영조/인물

 


1. 학구열
2. 소설, 잡기 덕후
3. 성품
3.1. 정치 스타일
4. 장수
5. 외모
6. 늦은 재혼
7.1. 금슬
7.2. 죽음
8. 아버지 영조
8.1. 자식 차별
8.2. 딸 바보
8.3. 아들을 미워하다
8.3.1. 원인
8.3.2. 강박증과 편집증
9. 할아버지 영조
10. 시아버지 영조
11. 남편 영조


1. 학구열


손자 정조 못지 않게 대단히 학업에 열중한 군주로 경연에서 태종, 세종, 문종, 정조와 같이 경연관들의 말문을 막히게 만든 몇 안 되는 군주 중 한 명.[1] 그리고 왕권이 매우 강했음에도 불구하고 죽기 직전까지 학업에 열중한 군주이기도 하다. 태종이나 세조도 똑똑한 축에 속했지만, 왕위에 올라 웬만큼 기반을 다진 후에는 이 나이에 무슨 공부를 하냐면서 경연을 때려쳤고, 연산군은 말할 것도 없으며, 광해군도 여러 옥사 이후로 왕권이 강해지자 경연을 매우 게을리했다.[2] 영조의 경연 사랑에 비견될 군주는 성종, 중종 정도인데, 이 둘은 적어도 본인 스스로는 죽을 때까지 '모범생 왕' 이미지를 유지할 필요성을 느꼈을 가능성이 높은 반면 영조는 자타공인으로 도무지 범접할 수 없는 권위를 쌓은 말년까지 경연에 열심이었으니 정말이지 천성이 경연 식 공부를 좋아했다고 볼 수 있다.

2. 소설, 잡기 덕후


영조는 소설과 잡기를 즐겨 읽었는데 이는 손자 정조와는 대조되는 것이었다. 영조 말년인 승정원일기 영조 50년 5월 16일의 기록은 다음과 같은 비망기를 기록하고 있다.

비망기(備忘記)로 심상운에게 전교하시길:

아! 금년의 혹심한 가뭄은 팔순 나이에 처음 보는 것이라, 애태우고 근심하노니 이 또한 헐후어(歇後語)로다. 고인이 말하길, 세 사람이 가면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고 하였다. 옛 한나라의 근 100년 기업(基業)은 삼로동공(三老童公)에서 비롯되었으니, 비록 연의(演義)이기는 하나 서한연의의 한 제목인 '부로(不老)를 논하여 한왕이 덕을 펼치다.'에서 그 모습을 그리게 했고, 또 말하기를 '황구(黃耉)에게 조언의 말을 구해야지 이를 놓아두고 무엇을 먼저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기로(耆老)가 어찌 전폐(殿陛)에 오를 수 있으랴? 내 오늘 지영처(祗迎處)에서 마땅히 볼 것이니 사서(士庶)를 막론하고 가히 치신(致身)할만한 자들을 모두 오게 해 기다리게 하라.

하셨다.

승정원일기 영조 50년 5월 16일

실제로 영조 50년에는 큰 가뭄이 들어서 죄인을 방면하고 지맥을 살펴보는 등의 조치가 조선왕조실록에서 보인다. 그런데 영조는 그런 상황에서 평소 즐겨읽던 소설인 서한연의의 한장면을 떠올렸던 것 같다. 재밌게도 해당 내용을 떠올리고 신하들에게 지나가듯이 언급하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진짜로 자신을 소설 속의 한고조에 이입하여 직접 소설 속의 모습처럼 신하들에게 가뭄에 대한 대책과 조언을 구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실록에서는 하루 차이로 영조가 신하들에게 가뭄에 대한 대책과 조언을 구했다는 기사가 있기도 하다.

오래도록 가뭄이 들자, 임금이 신하들에게 직언(直言)을 구하는 하교를 내렸다.

조선왕조실록 영조 50년 5월 17일

사실 승정원일기에서 영조와 신하들의 문답, 혹은 경연 내용을 보면 영조가 심심치 않게 서한연의, 삼국지연의, 동한연의[3]를 언급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한때 사도세자에게 자기가 소싯적에 어떤 부녀자가 삼국지연의를 읽는 모습을 보았는데, 맥성에서 관우가 패하고 죽는 장면에서 여자가 눈물을 흘리는걸 보있다고 말한적도 있다.

나는 번저(藩邸)로부터 입승하여 비록 사사로이 여항(閭巷)의 일을 알았으나 부모님의 병환을 보살필 때가 많았던 까닭에 또한 두루 알지 못하였다. 너는 궁중에서 나고 자랐으니 이러한 곳들을 분명하게 알지 못해서는 안된다. 그러하다면 비록 부녀자가 언서(諺書)[4]

를 읽을 때에도 시비(是非)와 현우(賢愚)의 나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소싯적에 어떤 부녀자가 삼국지를 읽다가 맥성의 일에 이르자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 일이 있다.

-

승정원일기 영조 27년 3월 2일

거기다 영조는 신하들에게 아플 때는 병석에서 낮잠으로 시간을 죽이지 말고 소설이나 잡기류를 권장하는걸 보면 영조란 인물은 소설이라는 장르를 굉장히 긍정적으로 봤던 것 같다. 심지어 신하들에게 소설을 읽으라고 어명을 내린적도 있었던 듯.

상께서 말씀하시기를:

병중에 소일(消日)하는 방법으로는 혹은 소설이 있고, 혹은 잡기가 있으니, 나는 이 두가지를 하지 않고서는 과연 소일하기가 어렵다. 유신(儒臣)에게 읽도록 명하여 이를 들으면 오히려 낮잠을 자는 것 보다 나으니 침전에서 인접하여도 또한 무방하다.

하니, 송인명이 아뢰길:

이 또한 반드시 무방한 것은 아니옵니다.

하였다.

승정원일기 영조 22년 6월 27일

손자인 정조가 소설이나 잡기류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이었던걸 생각해보면 흥미로운 면모라 하겠다.

3. 성품


이와 같이 학구적인 면과는 다르게 성격은 의외로 급하고 감정에 기복이 심했으며 눈물도 많은 타입이었다.[5] 입도 더러워 면전에서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신료들이랑 아들 사도세자에게 퍼붓기도 했다. 특히 영조의 손자였던 정조 또한 매우 다혈질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으니 할아버지의 이런 면을 매우 쏙 빼닮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런 성격은 영조의 형인 경종이나 아버지인 숙종, 그리고 거슬러 올라가면 영조의 할머니인 명성왕후 김씨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집안 내력에 가깝다.
그러나 영조의 무서운 면은 이와 같이 격정적인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필요할 때에는 끝간데 없을 만큼 냉혹한 면을 보여주기도 했다는 점이다. 이는 영조 시대의 정치사 전반에서 잘 드러나는 편인데, 특히 사도세자를 죽여버릴 당시에 아들의 죽음을 확인하고는 개선가를 울리며 환궁하고, 사도세자가 죽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사도"라는 시호를 내리며 후속 조치를 내리는 모습은 대단히 치밀하고 신중한 모습이다.
참고로 야사연려실기술에 등장하는 피휘 사건을 보면 상당히 대인배스러운 모습도 보였다. 영조의 이름에 들어가는 밝을 금(昑)은 백성들이 자주 사용하는 단어이기 때문에 만약 임금의 이름이 알려진다면 백성들이 피휘를 하느라 상당히 불편했을 것이다. 개명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영조는 40여년 동안 이름을 밝히지 않기로 했다. 물론 어찌어찌 이름이 알려졌는지, 어느 날 승지가 영조 앞에서 상소문을 읽던 중 금(昑)자를 발견하고 머뭇거리자, 괜찮다고 허가한 후, 피휘 적용 범위를 줄이는 방안을 검토해 보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참고 기사

3.1. 정치 스타일


정치 스타일은 아주 철저한 정면돌파형. 잔수보다는[6] 정공법을 선호했기에 걸리게 되면 말 그대로 박살나는 타입이었다. 애초에 자료 준비를 철저히 하고[7] 명분도 다지고 최후 수단도 강구해놓은 다음 정면 돌격하는 스타일이라 막기도 힘들고 막아낸다고 해도 피해가 큰 경우. 이건 세제 시절인 경종 치세 때부터 확립된 경우다. 신축환국으로 노론 정권이 개발살나서 자신의 위치까지 위태롭게 되자 이런 정면 돌파를 통해 입지를 다지며[8] 군주까지 오른 사람이라 왕이라는 위치에서 정공법 펴면 당하는 신료나 당파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기껏해야 하는 짓이 벽서 등으로 음해하거나 반란 같은 수밖에는 없었다.
한편 아버지 숙종처럼 신하들을 거의 노예 수준으로 취급하는 타입이기도 했는데, 성격의 변덕이 심하고 강퍅하며 급해 화가 나면 신하들에게도 대놓고 욕을 퍼부었거나, 중요한 회의를 하는 중 신하들은 밥도 안 먹고 쫄쫄 굶는데(…) 자기 혼자서 식사 때 되면 바로 밥을 먹으러 갔다는 이야기도 있다.더군다나 나이가 들면서 노환이 생겨 경연[9] 도중 신하가 자신의 질문에 잠시 뜸을 들이는 것을 가지고 볼기를 쳤다거나[10] 과거에서 이현필이라는 선비가 '''"전하께서 궁녀를 너무 많이 뽑으시는 거 아닙니까?"'''라는 답안지를 제출하자 그걸 본 영조가 '''"내가 임금인데 궁녀도 맘대로 못 뽑냐??'''"라고 하며 엉엉 울었다는 이야기가 있다.(…)[11]
죽음을 앞두고 정조에게 힘을 실어 줄 때는 무력을 쓰겠다고 화를 내고 협박하기도 했다. 전례가 있다며 중대하지 않은 건은 세손에게 전부 맡기고 중대한 건은 세손과 같이 처리하겠다고 발언하자, 홍인한을 비롯한 대신들이 크게 반대했다. 특히 홍인한은 승지의 앞에 서거나 영조의 발언을 대놓고 곡해하는 등, 처절하리만큼 문자 그대로 온몸을 던져 막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 여러 신하들에게 크게 화를 내며 쌍욕을 퍼붓다,[12] 끝내 성질을 못 이기고 전례가 무엇인지 직접 설명한 후, 이래도 정말로 깨닫지 못 한다면 조금 쉬어야겠다며 미리 대기시켜놓은 상협련군을 들여오라는 명을 내린다. 이후에 신하들에게 호령하자, 홍인한을 비롯한 신하들은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걸 깨달았는지 모두 굴복하여 전례가 있는 줄 정말로 몰랐다고 변명한다.

4. 장수


조선 왕조 국왕들 중 가장 통치 기간이 길며(52년) 가장 장수한 왕(83세)이기도 하다.
조선 왕조 국왕들의 수명은 군주임을 감안하면 영 길지 못한 편이었는데, 조선 건국시기에 정도전이 왕이 도학 정치를 펼치려면 왕이 부지런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혹사 수준의 일정[13]에 과도한 식사량[14], 상대적으로 매우 부족한 운동량, 대부분의 시간을 사무 업무로 보내는 왕에게 썩 적합하지 못한, 유목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아 육식 위주가 된 식단[15] , 조선 왕조 내내 내려오는 유전적인 문제[16]이 종합적으로 악영향을 끼친 탓으로 여겨진다.
기본적으로 한반도인은 70년대의 분식장려 이전에는 탄수화물을 무지막지하게 섭취했고[17], 그 당시의 밥그릇 크기는 지금의 국그릇 보다도 훨씬 컸는데[18], 하층민이야 반찬과 흰쌀밥(...) 부족으로 인해 어쩔 수 없다 쳐도, 양반을 넘어 무려 나랏님 조차도 그런 무지막지한 양의 밥은 예외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이런 대식 문화가 왕의 수라상에는 더욱 심해서, 하루에 올라오는 수라만 해도 무려 '''5끼'''에 달했다.
여기에 앞서 설명했듯, 조선의 (그리고 지금의 한식) 식단이 북방 유목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은 탓에, 육체 노동을 가혹하게 하는 농민이면 몰라도, 하루종일 혹사 수준의 사무를 봐야하는 왕에게는 별로 건강상 좋지 못한 식단이었다. 게다가 상업을 최대한 억제하고 공납을 통해 조정이 직접 잉여 자원을 분배하는 유교적 원시 공산주의(?) 체제 특성상 수라상에 올라오는 음식들은 산해진미라 할지라도 공납을 통해 올라오는 만큼 극단적으로 갈리기 쉬웠다. 즉, 식단이 안정적인 식단과는 정말 동떨어저 있었다. 무려 왕의 수라임에도.
이렇게 극단적인 특성 때문에 전국에서 모인 온갖 산해진미가 모이는 수라상임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화려함 대비 실질적인 맛이 부족했던 것인지는 몰라도, 세종대왕은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무조건 고기!!'''를 외치는 육류 애호가로 하루라도 수라상에 고기가 없는 날이 없었는데, 고기만 항상 있는 게 아니라 유목 문화 영향을 받은 기름진 음식들도 고스란히 올라온 고로, 세종대왕은 비만과 당뇨로 인한 합병증에 시달려 장수하지 못하고 54세까지 살고 사망하였다.[19]
이런 일반적인 조선 국왕의 수라 식단과 달리, 영조는 '''간결하고 적은 양을 최대한 맛있게''' 먹는 것을 선호했다. 이는 영조의 절제되고 검소한 생활 습관에서 비롯한 것으로, 밥은 현미을 섞은 잡곡밥을 즐겨 먹었으며, 반찬 매우 단순했다. 그래서 주변에서는 오히려 왕이 먹는 수랏상이 너무 부실한 것이 아닐까 항상 염려했다고 한다. 특히 영조는 하루에 간식을 합쳐서 5끼 정도는 먹었던 역대 임금들과는 달리 오직 하루에 3끼만 챙겨먹는 등 소식을 선호했다. 그래서인지 젊은 시절에 신하들과 힘겨루기를 하며 이들을 압박하기 위해 일부러 끼니를 거르는 경우가 제법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잘 견뎌냈다. 심지어 여름에는 그냥 물밥, 고추장, 굴비로 구성된 식단을 즐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대신, 영조가 선호한 식단은 적은 종류의 반찬에, 입맛을 돋우는 간결한 진미 한두종류를 곁들인 식단이었다.
이런 이유로 영조의 수라 식단은 육식의 비율이 적은 것은 물론, 다른 조선 국왕들의 식단에 비해 채식의 비율이 매우 컸다. 사실 신선한 채소라는 것이 전근대에는 상당히 귀한 것이었기에, 귀족이나 왕족이 아니면 충분히 즐길 수 없는 것이었는데, 조선 국왕의 수라는 지나치게 화려한 나머지 오히려 채소가 희귀(...)한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영조가 선호한 "단순한 진미"는 이런 문제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다.
무엇보다 영조가 선호한 "단순한 진미"가 기름기가 적고 담백한 음식들이었던 것 또한 그의 장수에 큰 기여를 했다. 역대 조선의 왕들은 기름기가 많고 맛이 풍성한 민어를 즐겼으나, 영조는 기름기없이 꾸덕꾸덕하게 말린 조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또한, 단순한 식단에 곁들여진 "핵심 진미"라 할 수 있는 것 중 영조가 특히 즐겨 먹었던 것이 송이, 전복, 새끼 꿩 등이었는데, 이것들은 지금도 진미로 불리는 귀한 음식들이지만, 역대 조선 국왕들이 즐긴 수라 반찬들에 비하면 기름기가 적고 담백한 음식들이다. 그외에도 영조는 고추장을 좋아했는데, 말년에는 고추장 없이는 입맛이 안 돈다고 할 정도였다. 게다가 이 고추장 또한 영조의 간결한 식단에 큰 기여를 했는데, 입맛을 돋우기 위한 다른 복잡한 반찬이 없어도 고추장 하나면 해결되니, 조선 국왕의 고질적인 과식 완화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단순한 진미"에 충분한 채식이 항상 곁들여젔다. 영조의 절제되고 검소한 생활 습관이 없었다면, 비교적 담백한 음식을 먹더라도 채소 섭취 부족으로 건강상 좋지 못하였을 것이다.[20]
또한, 영조는 빠듯한 국왕의 하루 일과로 인한 부담을, 하루 생활을 매우 규칙적으로 보냄으로써 극복했는데, 그중에서 식사의 경우 반드시 정해진 시간에만 했다. 신하들과 중요한 사안을 의논하거나, 심지어 강연을 하던 중에도 식사 시간이 되면 신하들을 내버려두고 식사를 하러 갔던 것도 그 때문이다.
게다가 영조는 젊은 시절부터 나름대로 말타기와 활쏘기 등의 운동을 즐긴 탓인지 체력도 상당히 튼튼했던 것 같다. 이처럼 건강미를 뽐내던 영조는 나이 70이 넘어서도 '''하얗게 샌 머리에서 검은 머리가 다시 나고 빠진 이가 다시 나서''' "나 회춘했다!"라고 좋아했다는 기록도 숱하게 나온다. '''환골탈태!?'''[21] 즉, 식단 조절과 운동 등의 철저한 건강 관리가 있었기에 그만큼 장수하는 게 가능했던 것이다.

5. 외모


영조는 연산군과 마찬가지로 꽤 꽃미남 임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런 외모를 '''계집스러워 천하다'''고 여겨서 기피했다고. 조선시대에 현대 기준의 꽃미남은 기생 오라비 취급을 받기 때문에 좋은 평가를 받기 힘들다. 단 이말은 걸러 들어야 할 것이, 어디까지나 이성을 끌어당기는 육체적 매력과는 거리가 한창 먼 사대부 남녀 이미지에 안 맞아 그렇다는 것이지, 이성의 마음을 떨게 하는 매력적인 외모로는 딱이었다. 이런 외모는 어머니의 영향이 큰 듯하다. [22]
사실 현대에도 왕실 등의 로열 패밀리에서 따지는 미의 기준은 실질적인 매력으로서의 미의 기준과 동떨어진 경우가 많다. 특히 왕실의 경우 왕비의 기준은 이성적인 매력이 아니라, 후손을 많이 남길 수 있는지, 조신하고 현숙하게 왕이 될 남편을 조용히 잘 보필할 수 있는지와 같은 외양적인 기준이 아닌 내면적인 기준을 더 강조했기 때문. 가슴이 큰 여자는 안 된다느니 하는 것도 당시로는 현모양처 상을 요구하던 기준을 외면에 적용시켜서 나타난 사례다. 현대에 들어서야 로열 패밀리들도 변화하는 시대와 사상을 받아들여 누그러진 경우가 많지만 아직까지 그런 잔재들이 남아있긴 하다.

6. 늦은 재혼


66세의 나이에 15세의 정순왕후 김씨를 계비로 맞았다. 현대의 관점으로 볼땐 뜨악할 일이지만 왕비가 죽으면 지존을 내조할 내명부의 수장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하여 반드시 정실을 들여야 했고, 왕이 늙었다고 왕비 후보들이 왕 나이에 맞춰서 늙어있을 리는 없기 때문에 왕은 초혼이든 재혼이든 10대 중후반의 배우자를 맞아야 하는 것이니 당연한 것이었다.
현대에는 주위에서 식은땀을 흘렸겠지만, 당시 기준으로는 나이 많은 남성이 어린 여성과 결혼하는 일이 금기시되거나 뒷말이 나올 행위는 아니었다. 그래서 왕의 어머니 뻘인데 왕보다 어린 경우도 왕왕 있었다. 예컨대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 조씨나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 김씨 등.[23]
후궁들 중에 짬 좀 되고 출신 배경도 어느 정도 뒷받침되는 이를 뽑아 승격시키면 안 되는 거냐고 할지도 모르겠는데, 영조가 숙종 대 이전의 왕이었다면 (세자 시절의) 문종 - 현덕왕후와 성종 - 정현왕후, 중종 - 장경왕후의 전례가 있어서 되었을지도 모르나, 영조 시기는 숙종이 후궁의 왕비 책봉을 금지한 이후였으므로 불가능했다. 다시 고치는 방법도 있었지만 아주 예전 임금도 아니고 영조의 부왕이 내렸던 조치였고 영조 본인도 최소한 정치적인 면에서는 세조연산군 수준으로 막나가는 왕이 아니었기에 고치지는 않았다.

7. 정성왕후



7.1. 금슬


정실인 왕비 정성왕후 서씨하고는 부부관계가 매우 나빠서 안 좋을 것을 넘어 최악이었다. 특히 영조는 아내인 정성왕후한테는 최악의 남편이었다. 그녀의 병세를 보고하는 의관이 직접 영조에게 말하면 들은척도 안 할거란걸 알고 영조 대신 대전 내관에게 대신 보고할정도로 두 부부사이가 최악인건 적어도 궁궐 내에서는 공공연했고, 아예 정성왕후를 창덕궁으로 보내고 자기는 경희궁에 있으면서 거의 찾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정성왕후의 환갑 잔치도 파토냈고,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사도세자는 눈물을 쏟으며 통곡하는데 자기는 느릿느릿 와서는 사도세자더러 "니 옷 꼬라지 그게 뭐냐?"라고 꾸중만 했다. 야사에는 결혼 첫날밤에 정성왕후가 질문에 대답을 잘못하는 바람에 소박을 맞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첫날 밤 영조가 손이 참 곱다며 감탄했는데 무심코 "힘든 일을 하지 않아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는 바람에 영조의 눈 밖에 났다는 것.
이게 그렇게나 소박맞을 일인가 싶겠지만 영조에게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녀의 이 발언을 '''자기 어머니인 숙빈 최씨를 모욕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 숙빈은 출신도 불분명한 일개 나인 출신으로 어렸을 때 고생을 많이 한 탓에 외모와는 달리 손마디도 굵고 손이 참 거칠었다고 한다.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던 연잉군(당시)으로서는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실록에 의하면 정성왕후의 조카인 서덕수 때문에 곤경에 처한 일이 있어 그랬을 수도 있다는 분석이 있다. 서덕수는 다름아닌 경종을 죽이고 영조를 옹립하려는 삼수의 옥의 주모자 중 하나였으며, 영조에게 "저하를 위해 모의하고 있으니 알아 두시라." 라고 발언하기도 했다.[24] 어쨌거나 영조는 덕분에 폐세제를 자처하며 부들부들 떨어야 했다.

7.2. 죽음


후술하겠지만 정성왕후가 세상을 떠난 날에 사위가 세상을 떠난 것을 추모하러 갔다는 이야기를 보면 야사의 이야기가 진실일 가능성도 있다. 정성왕후는 영조에게 죽기 14년 전인 1743년부터 통증을 호소했으나 영조는 오히려 담증 가지고 엄살부린다며 씹어버렸고 그녀의 용태를 진찰한 의관도 애초에 영조가 자기 마누라 얘기면 들은 척도 안할 것이니 영조를 모시는 내시에게 대신 보고하여 영조가 진찰 내용을 간접적으로 보고받을 정도였다.
게다가 영조는 죽은 마누라를 팽개치고 사위 문상을 가버렸으며, 대간에서 경악하여 결사 반대했지만 영조는 오히려 반대하는 대간들을 모조리 체차[25]해버리고 강행했다. 다만 죽은 후에도 같은 곳에 묻히지 않고 한양(서울)을 기준으로 서로 정반대 지역에 묻힌 건 영조의 뜻이 아니라 정조정순왕후 김씨의 눈치를 본 탓이다.[26][27] 영조는 오히려 정성왕후의 옆에 묻히려고 빈자리를 마련했다. 정조는 지금의 원릉 자리에 영조를 장사지냈는데, 이 자리는 원래 효종이 매장되었다가 비가 샐 우려가 있다 해서 천장된 '''파묘 자리'''였다.[28] 더군다나 경종을 여기에 장사 지내자는 신하들의 주청에 영조는 "국장에 어떻게 파묘 자리를 쓰겠느냐"고 물리쳤던 적도 있었는데 정작 영조 본인이 '''자신이 총애한 손자에 의해 민간에서도 묏자리로 기피하는 파묘 자리에 잠든 것.''' [29]
여기까지만 보면 남편의 사랑을 못 받은 게 한이 맺혀 시름시름 앓다가 단명했을 거라 오해하겠지만 실제론 정성왕후도 나름 장수했다. 특히 1757년에 사망했을 때 그녀의 나이는 '''만 65세.''' 남편에 미치지 못해서 그렇지 당시 기준으로 꽤 장수한 것이며 요즘 기준으로도 단명했다고 보긴 힘들다. 또한 1724년에 왕비가 되어 사망할 때까지 무려 33년을 재위하여 '''역대 조선 왕비들 중에서 가장 재위 기간이 길었던 왕비였다.''' 바꿔 말하면 그 오랜 세월을 남편한테 철저하게 무시당하면서 살았고 최후까지 남편이 박대했으니 더욱 불행하였다고 볼 수 도 있다.

8. 아버지 영조


평가에 앞서 유교의 가장 기본이 되는 '삼강오륜'에 '부자유친'이 있다. 보통 유교는 '충', '효'를 강조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간과하기 쉬운 내용이지만,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 못지않게 부모도 부모로서 자식에게 마땅한 도리를 하고 올바른 길로 이끌어야 한다는 사상 역시 있었고 매우 중요했다('애자, 교지이의방, 불납어사' - 사랑하는 자식을 의로운 방도를 가지고 가르쳐 나쁜 길로 빠지지 않게 해야 한다). 가정 내의 당연한 도리에서 정당성을 찾아 국가 통치 이념의 근본으로 삼던 것이 유교이다(군사부일체).
조선 왕조에서 가장 패륜적인 왕이라고 할 수 있는 태종, 연산군도 적어도 심정적, 상징적으로나마 근거가 있었고, 그 원인에서 자신의 의지 외에 상당한 압력[30]이 가해진 상황이었다. 또한, 그렇게 패륜적이라는 세조단종을 며칠동안 굶겨서 죽이진 않았으며, 아버지로서는 영조보다도 훨씬 휼륭한 모습을 보였다.
이때문에 자기가 자식을 그렇게 키워놓고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잔혹하게 살해한[31] 영조는 분명히 삼강오륜 하나 못 지킨 막장부모이며 패륜 군주이다.[32]
사실, 임오화변 시점의 사도세자는 심각해진 양극성장애[33] 탓에 범죄까지 저지르고 다닌 상황이니 왕이 되어서는 안 될 인물은 맞았다. 이는 그의 생모 영빈 이씨와 친아들 정조도 인정했던 부분.
문제는 그렇다고 아들을 끔찍하게 굶겨 죽이면서 살해했어야 하냐는 점인데, 일단 이 방식을 고른 것은 신하들의 반대가 심하여 사약이나 참수 같은 공식적인 사형을 내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34] 이에 자결을 강요했으나 이것 또한 신하들이 막아 불가능했고,[35] 방에 가두면 세자의 어머니와 형제들, 세자빈, 신하들이 몰래 음식을 갖다줄게 뻔하니 결국 죽음을 유도하려면 별다른 수가 없었다. 결론적으로 사도세자가 끔찍하게 죽어야 했던 것은 왕실이라는 입장이 만든 비극인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결국 사도세자의 양극성장애를 촉발시킨 사람이 영조인지라, 양육할 때부터 영조가 '''아버지로서는''' 대단히 잘못된 인물이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8.1. 자식 차별


몇몇 딸들은 매우 아꼈지만 아들인 사도세자나 화협옹주에겐 참으로 비정하고 못난 아버지였다.
좀 더 상세히 기술하자면 대체로 아들은 미워했고, 에게는 죽고 못 살았다. 즉 '''희대의 딸바보'''. 《한중록》의 묘사에 따르면, 자녀들 중 몇몇은 지나치게 미워하고(ex. 사도세자, 화협옹주)어떤 자식들은 매우 귀여워했다고(ex. 화평옹주, 화완옹주). 또 영조가 화협 옹주를 미워했다고 묘사하나, 저자가 시누이들을 싫어했던 혜경궁 홍씨다 보니 신뢰성이 의심되는 상황. 게다가 화협옹주가 위독할때 친히 달려갔다는 기록도 있으며 결국 화협옹주가 20대 초반의 이른 나이에 죽자 영조는 몹시 슬퍼하긴했다. 권력과는 상관없는 딸이기에 미워했음에도 아들만큼 미워하지는 않았던 것. 자세한건 화협옹주 참고.
영조의 자식 차별에 대한 일화가 있다. 어느날 화완옹주와 사도세자가 우연히 마주친 일이 있어 잠시 한방에 있었는데, 그걸 영조가 보고는 그야말로 눈이 뒤집혀서 사도세자를 죽이려 들었고, 사도세자가 기겁하여 '''창문을 통해 달아나야 하는 사건이 있었다.''' 영조는 자신이 싫어하는 자식과 좋아하는 자식이 한자리에 있는 것조차 견디지 못할 정도였던 것. 그렇다 하더라도 영조의 반응은 지나친 데가 있어, 사실 화완옹주와 사도세자가 근친상간 관계였고 이를 영조가 알고 있었던 게 아니었는가 하는 이 제기되기도.[36]
영조는 화협옹주와 사도세자를 극도로 미워했으나, 그에 비하여 화완옹주화평옹주는 무척이나 아꼈다. 상술했다시피 화완옹주와 사도세자가 같이 있었다는 이유로 노발대발했던걸 볼 때 자식 차별의 수준이 평범한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는 걸 한번에 알수 있다. 추가로, 영조는 정신병이 있었다고 하여 때만 되면 귀를 씻은 물[37]을 싫어하는 자식들이 사는 쪽으로 흘려보내기까지 했다고 한다.
사도세자가 눈병에 걸려 책을 마저 읽지 못했다고 하자, 오히려 꾀병을 부린다며 아들을 불러내서 크게 화를 내며 혼냈다. 허나 화완옹주와 화평옹주에겐 자그마한 일로도 지극히 정성을 다해 직접 병문안까지 갈 정도였다.
미움받은 자식들인 사도세자나 화협옹주는 대접이 종친들(방계 왕족)보다도 못했는데, 실록을 보면 이광정이라는 가난한 종친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종친의 의무를 다한다는 소식을 들은 영조가 종친은 벼슬을 할 수 없다는 규칙까지 깨며 벼슬을 제수하며 아꼈다고 한다. 친자식들이 신하보다도 못하게 취급받은 것이다.

8.2. 딸 바보


실록과 한중록을 교차 검증해 볼 때 아들에 비해 딸들을 지나치게 아꼈다. 아내 정성왕후 서씨가 죽은 날 화완옹주의 남편인 정치달이 죽자, 신하들이 결사반대 했는데도 불구하고 화완옹주의 집으로 달려갔을 정도였다. 화평옹주가 죽었을 때는 그녀의 장례를 위해 파주의 민가 100여채를 사들여 묘역을 조성하기도 했다. 화순옹주가 남편이 죽고 따라 죽기 위해 곡기를 끊었을 때도 친히 행차해 말렸다. 이 때 영조가 미음을 먹으라고 명령하자, 억지로 마셨다가 곧 토해버려서 영조는 딸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 탄식하며 궁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결국 화순옹주는 단식 14일 만에 죽었는데, 배신감을 느꼈는지 정려[38]하자는 신하들의 제안에 '불효요 불충이다'라고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이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 화완옹주가 남편을 잃은 것도 비슷한 시기라 이 시점에서 화순옹주를 정려하면 화완옹주도 순사(殉死)를 하라는 뜻으로 보일 위험이 있다. 화순옹주는 결국 정조 대에 정려된다. 딸 중에서는 미워했다던 화협옹주가 위독했을 때도 한걸음에 달려가 밤을 새워 딸의 곁을 지켰고, 결국 그녀가 죽은 뒤에도 밤늦게까지 환궁하지 않았을 정도였다.[39] 뿐만 아니라 평소에 대간, 대신들이 "출궁한 옹주의 사저로 납시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라고 만류해도 무조건 '''"닥쳐"'''로 일관해가며 딸 사랑을 표현했다. 가장 사랑했던 화평옹주는 시집 보내고 나서도 아예 궁에서 살게 했다. 그야말로 '''조선 역대 국왕 중 최강의 딸내미바보'''.

8.3. 아들을 미워하다



8.3.1. 원인


사도세자는 양녕대군 급은 아니었지만 공부를 별로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영조는 세자 교육을 잘못 시켰다고 여러차례 실망을 드러냈고 아들이 공부를 할 때 영리한 면모를 보이면 매우 기뻐했다. 영조가 아들을 꾸짖고 닦달하기 시작한 시기도 사도세자가 공부에 열의를 보이지 않으면서부터이다. 영조 자신이 이복동생에다 어머니의 신분이 낮아 언제나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자랐고, 다른 남자 혈족들은 모두 적이나 마찬가지였을 터라 아들을 자신의 후계자가 아니라 자신의 자리를 노리는 경쟁자로 본 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으나 머리는 좋아 보이지만 학업을 멀리하는 사람이 정적으로 보이긴 어렵고 그냥 사도세자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 영조의 더러운 성질머리에 결부되면서 차차 발전하여 나중에는 죽일 정도로 미워진 것일 가능성도 크다.
영조가 아들 교육에 조급했던 것은 사도세자가 늦둥이였던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조선 왕들은 환갑(60세)을 넘기기 힘들었는데 사도 세자는 영조가 40세가 넘어서야 태어났다. 영조가 다른 왕들처럼 50대에 죽으면 세자는 10대에 왕이 되는 것이니 영조는 세자가 공부에 흥미를 가지길 기다릴 여유가 없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더욱 몰아붙였으나 세자는 총명한 머리에 비해 공부에 대한 열의가 모자랐는데 이를 영조가 이해하지 않고 몰아붙이기만 하면서 결국 세자가 정신병에 걸리고 영조는 자식을 살해하는 패륜을 저질러 파국에 이르게 된다.

8.3.2. 강박증과 편집증


일단 자기 아들을 이해할 생각도 안하며 미친 듯이 몰아붙이기만 하여 광증을 앓게 만들고 신하들이 강력 반대했음에도 뒤주에서 굶겨죽인 사람이니, 정신적으로 건전한 사람이었다고는 믿기 힘들다. 아마도 강박증이나 편집증 증세가 심각했을 듯 하다.[40]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행한 학대는 사도세자임오화변 문서에 자세히 나와 있다.
만일 이 증세가 조금만 더 심했으면 정조도 무사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견이 있다. 만약 정조가 처신을 개판으로 했으면 정말로 그랬을 수도. 정조의 이복 형제들이자 사도세자의 서자들인 은언군, 은신군, 형제가 '추종을 외람되이 거느리고 방자하게 굴었다', '빚을 갚지 않았다'는 이유로 폭발한 영조에 의해 모조리 유배를 가서 은신군이 귀양지에서 병으로 죽고 은언군은 영조가 죽는 날까지 풀려나지 못한 것을 보면 확실하다. 그 이면에는 풍산 홍씨가와 경주 김씨가의 대립이 있었고 경주 김씨 측이 왕손들과 친한 풍산 홍씨를 공격하기 위해 벌인 일이지만서도 자기 친손자들이 처신을 엉망으로 했단 이유로 이렇게나 엄벌하여 고생시키고 한명을 죽게 만들 정도면 정조라고 마냥 예외일순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조는 학업에 열중하고 술과 여색을 멀리하며 효심까지 보여주는 등 영조의 마음에 쏙 들게 행동했고 훗날 영조가 죽기까지 십수년 간 총애를 받으며 꾸지람이나 질책을 들은 적이 없었다. 말년에 폭삭 늙어 않아눕고 치매로 추정되는 상태까지 이르렀음에도 정조에 대한 신뢰만은 굳건했을 정도
야사에선 실제로 죽을 뻔한 적이 한 번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맹꽁이 서당》에서는 정조가 읽고있는 책 내용에 영조가 싫어하는 내용(첩의 아들이 왕이 되어서는 안된다.)이 있었는데 정조가 얼떨결에 거짓말로 그 부분만 가렸다고 말하자 영조가 확인차 가져와보라고 했고 이를 가져다 주려던 홍국영이 무언가 이상한걸 느껴서 그 부분만 가리고 가져다 주어서 살았다는 내용이 있다.[41]
사도세자에게 시호를 내린 문제는 오히려 아주 냉정한 정치적 계산이 들어있었던 것이 맞을 것이다. 훗날 효장세자의 양자가 되긴 해도 생부가 역적이자 서인으로 남을 순 없으니 죽기를 기다렸다가 즉각 사도란 시호를 내려서 사도 세자가 미쳐서 그런 거지 역적은 아니라는 면죄부를 주었고 사도세자의 죽음 자체도 단순히 폭발하여 날뛴 것 치곤 매우 계획적이고 치밀하고 냉정하게 이루어졌다.
아무튼 자기 아들에 한해서는 극심한 강박 증세를 보였다는 건 확실하다. 지금까지도 현대 사람들에게 까이는 대표적인 흑역사인 이 사도세자 관련 사건 덕에 영조는 대부분의 경우 아버지로서는 자격 미달인 인물로 여겨진다. 영조가 열심히 국정에 임했고 여러가지 업적이 많음에도 평가가 엇갈리는 건 이 탓인듯. 사실상 하나뿐인 귀한 아들이었음에도 그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 때 보인 태도는 상당히 완고했으나, 그에 반해 손자인 정조의 경우에는 사도 세자에 대한 죄책감 때문인지 어떻게든 왕위를 보장해주려 애를 써서 이후에는 아들을 죽인 일을 후회한 것이 아니냐는 설도 있다. 그러나 실록을 보아도 영조가 과연 자기 아들을 죽인 일을 후회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오히려 말년까지 후회일랑 없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정조에게도 사도 세자의 이름을 한 글자라도 높이면 그건 날 잊고 종사의 대의 명분도 잊은 것임을 명심하라고 신신당부했다. 거기에 정조는 사도세자가 살아있던 시점에서도 할아버지에게 매우 예쁨받았다.
사도 세자를 죽인 일 자체는 후회하지 않았어도 아버지를 잃은 정조에게 미안해하거나 안쓰러워하는 기색은 여러 번 보인 일이 있는데 영조는 '내가 대의를 위해 죽였다. 문제 있냐?'라고 대놓고 말하기가 그랬는지 홍계희, 김상로가 나쁜 놈이라고 은근슬쩍 말을 돌리기도 했는데 정작 사도 세자가 살아있던 시점에서는 영조가 홍계희, 김상로 보고 세자를 옹호한다고 벌을 주었고 실제로 그들이 사도 세자를 압박한 정황은 없다. 게다가 그런 발언은 정조가 훗날 내 아버지인 사도 세자는 죄없이 죽었다!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으며 나중에 남인이 이게 다 노론 때문이다!를 외치는 도화선이 되었고 훗날의 이덕일 음모론의 최고 떡밥이 되었다.
사도세자를 끝내 사사한 일로 아들을 미워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으나 정작 정빈 이씨 소생인 장남 효장세자는 총애했다고 한다. 어렸을 적부터 조숙하고 총명한 모습을 보여 아버지의 사랑을 받던 효장세자가 갑작스런 병으로 10세에 요절했을 때 몹시 애통해했다고. 그러나 사도세자에 대한 영조의 태도 변화를 감안하면 효장 세자 역시 사도세자처럼 장성했을 경우 영조의 그에 대한 총애가 한결같았을지는 미지수이다. 패륜아이자 폭군으로 악명 높은 세조조차도 자기 아들들에게는 좋은 아버지였다는 걸 감안하면 세조에 비해 군주로서의 역량이 훨씬 뛰어난 영조가 본 문단의 내용과 후술할 내용처럼 가장으로서는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는 게 역사의 아이러니인 셈이다.

9. 할아버지 영조


자식들에게도 편애가 심했듯, 손주들에게도 편애가 극심했다. 사도세자의 적장자들이었던 의소세손이나 정조[42]에게는 엄청난 사랑을 주었지만 사도세자의 서자 및 서녀들에게는 그 어떤 사랑조차 주지 않았고 오히려 박대했다.
예를 들자면 사도 세자와 숙빈 임씨 사이에서 난 은언군은신군이 사소한 잘못을 했을 뿐인데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어린 손자들을 제주도에 유배시켰다. 결국 이들 중 한명인 은신군은 유배지에서 죽어버렸고 은언군은 말년에 가서야 마지못해 유배에서 풀어준다. 사도세자경빈 박씨#s-2 사이에서 난 청근옹주의 경우에도 부마 확정이 됐음에도 길례를 3년이나 미루다가 겨우 치뤄주었다. 오죽하면 사도세자의 정실인 혜경궁 홍씨는 자신이 사도세자의 후궁과 그 소생들에게 질투하지 않는 이유를 한중록에서 이렇게 표현한다.

''''만약 사도세자가 후궁에게 푹 빠졌거나 후궁의 소생을 사도세자나 영조가 끔찍이 사랑했다면 질투를 했겠으나, 사도세자는 후궁을 취한 뒤에 영조에게 들킬까 두려워 후궁 대접을 제대로 하지 않았고[43]

영조 역시 자신의 아이들을 제외한 서손들에게는 어떤 관심도 두지 않았기에 질투할 일이 없었다.''''

사도세자와 영조가 너무 심하게 박대를 하는 바람에 오히려 본처인 혜경궁 홍씨가 질투를 하기는 커녕 동정심을 가지고 남편의 첩들을 챙겨줄 정도로 최악이었다는 것이다. 영조는 은언군이 태어났을 때 혜경궁 홍씨에게 '왜 너는 투기조차 하지 않느냐? 그러고도 여자냐?'라고 따로 혼내기까지 했다.
이렇게 보면 영조는 소현세자민회빈 강씨, 그리고 손자들을 집요하게 죽여 지금도 패륜왕 소리를 듣는 인조와 매우 똑같다. 다만 화살이 적손이 아니라 서손이라는 것 정도. 그나마 영조가 귀양보낸 서손들은 그래도 나이가 어느 정도 있어서(10대 후반 ~ 20대) 어린 손자들을 박대한 인조보단 덜 욕먹을 만한 짓거리였다. 게다가 그 서손들이 잘못한것도 사실이니(그래봐야 교만하게 굴었다는 정도의 이유지만) 인조보다는 욕은 덜 먹는다.
유난히 아들의 서자들에게만 가혹했던 이유는 생모들이 전부 다 양반가 규수가 아닌 궁녀라는 미천한 신분이었기 때문일수도 있다. 실제로 사도세자의 후궁들은 궁녀 아니면 평민 출신이었으며, 간택후궁 출신은 단 한명도 없었다. 영조가 서손들을 그 정도로 싫어한 것은, 서손들이 결국 사도 세자가 저지른 비행의 결과물이라 생각해서였을것이다. 실제로 영조는 사도 세자가 후궁을 들일 때마다 격노하여 크게 질책했다. 숙빈 임씨, 경빈 박씨#s-2도 그랬다. 못마땅한 세자의 후궁이자 못마땅한 궁녀 출신 며느리의 자식들이 좋게 보였을 리는 없을 것이다.
다만 경빈 박씨가 세자의 광증으로 죽자, 나경언의 고변 후 영조가 사도 세자를 불러내서 크게 질책하며 "왜 왕손의 어미를 죽였냐? 아마 그녀는 너의 비행에 대해 간하다 죽었을거다." 라고 한데서 보아 아주 조금은 애정이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사도 세자를 갈구는데 써먹을 좋은 핑계거리에 불과했을지도 모를 일. 결국 사도세자가 죽자 정조를 제외한 손자들은 유배를 가서 요절했고 숙빈 임씨는 영조에 의해 궁궐 밖으로 내쳐져 정조 즉위때까지 돌아가지 못했다.
오히려 사도세자의 서손과 후궁들을 챙겼던 건 이복형인 정조였다. 특히 정조는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이 매번 역모에 휘말려 죽이라는 상소가 올라왔음에도 단식 투쟁까지 하면서 자신의 이복동생들을 지키려고 애썼고, 아버지 사도세자가 한번 동침하고 잊어버린 궁녀도 다시 찾아내 시호까지 부여했을 만큼 아버지의 가족들을 지키려 들었다.
사실 영조는 적손자들인 의소세손과 정조의 탄생도 처음엔 썩 좋아하지는 않았다. 의소세손은 자신의 유일한 적손이자 후계자로서 안 귀할 수가 없었을텐데, 가장 총애한 딸 화평옹주의 죽음 이후에 탄생해서 싫어했다가 딸과 똑같은 점이 있는걸 보고 화평옹주의 환생으로 여겨 아꼈다는 야사가 있을 정도다. 그리고 정조도 처음에는 화평옹주의 상중에 잉태된 아이라고[44] 싫어했으나 날이 갈수록 총명한 모습을 보이자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로 귀여워했다. 신료들 앞에서 대놓고 정조의 재능을 자랑할 정도였다고 한다.

10. 시아버지 영조


시아버지로서도 영조는 낙제점을 받아 마땅하다. 영조의 며느리로는 장남 효장세자의 빈 현빈 조씨, 차남 사도세자의 빈 혜경궁 홍씨, 그리고 사도세자의 후궁인 숙빈 임씨경빈 박씨가 있는데, 이들에 대한 차별 대우도 매우 심각했다. 영조는 효장세자가 요절하면서 14살의 나이에 과부가 된 며느리 현빈 조씨를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두 자식[45] 중 한 명이라고 하고, 현빈의 사망 이후에도 생일을 챙길 정도로 매우 아꼈다고 한다. 혜경궁 홍씨의 경우 정실이기도 하고 세손 정조에 대한 애정이 그 어머니에 대한 애정으로도 이어져서 나름대로 아껴주었지만[46], 임씨와 박씨는 제대로 후궁 대우도 해주지 않고 박대했다. 어찌나 박대가 심한지 앞서 언급했듯이 홍씨조차 동정심을 갖고 첩들을 챙겨줬을 지경.

11. 남편 영조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도 꽝이었다. 자신의 첫 정비인 정성왕후의 환갑 잔치 때 찾아오지도 않았고, 그녀가 죽었을 때도 애도하러가긴 커녕 같은날 남편을 잃은 딸 화완옹주를 보러가 이를 본 신하들마저 경악해 영조를 말리기도 했지만 오히려 말린 신하들에게 화를 냈다. 오히려 이런 정성왕후를 제대로 대우해주고 따른건 아들인 사도세자와 그의 친모인 후궁 영빈 이씨였다.
또한 궁녀와 후궁 관리도 제대로 교육을 시키지 않은 것 같은데, 그 예시로 영화 사도에서 나온 후궁 숙의 문씨가 세자의 친모 영빈 이씨한테 대들며 말대꾸를 하는 장면은 놀랍게도 실제 역사에서 일어난 일이다. 당시 조선 왕실의 후궁들 중에서도 으뜸인 빈의 지위에 앉은 영빈 이씨에게 일개 숙의 따위가 대든다는 것은 내명부의 위계 질서를 완전히 흐트리는 짓이다. 오죽하면 영화에서도 실제 역사에서도 숙의 문씨의 오만방자한 짓거리에 분노한 당시 대비였던 인원왕후가 벌로 그녀의 회초리를 때렸을 정도. 이를 볼 때 후궁과 왕비를 비롯한 내명부의 관리도 제대로 신경쓰지 않은 것 같다.
특히 제일 문제인건 위에서 나왔다시피 숙의 문씨를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도세자의 아내이자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서도 숙의 문씨가 악랄한데 영조만 못 알아차리고 문씨를 총애했다는 점이 언급된다. 결국 숙의 문씨는 정조가 즉위한 뒤에 폐서인이 되어 처형당하고 만다.[47]
그나마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의 경우엔 그냥저냥 아내 대우는 해주었지만 그 뿐이었다. 그나마도 이는 정순왕후가 스스로 외척의 중용을 삼가고 왕실 일원들과 마찰을 가지지 않는 등, 처신을 잘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였다.
[1] 공교롭게도 문종을 제외하면 다들 나름 한 성격 하기로도 유명한데, 문종도 그 태종과 세종의 직계인데다 밀덕 기질까지 있었음을 생각해보면 통념처럼 그리 유약한 편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다.[2] 사실 조선왕들 중에서 가장 경연에 게을렀던건 광해군으로 재위기간이 15년인데 경연을 한 횟수가 15번이 안 된다(...). 반면 경연을 게을리했을 것 같은 연산군은 의외로 세자릿수다. 이는 연산군이 무오사화 전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은 왕이었고 갑자사화 이전에도 마냥 막장왕은 아니었기에 가능한 일인 듯하다.[3] 동한 세조 광무제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4] 언문으로 된 글.[5] 눈물을 무기로 삼기도 했다. 숙종, 경종과 관련된 곳만 갔다 하면 숙종과 경종이 그립다고 울었으니… 수신을 중시하는 유교 사회에서 와 형제간의 우애를 표현하는 건 매우 좋은 프로파간다였다.[6] 영조와 반대로 정면 돌파보다 잔수를 주로 썼던 왕으로는 중종, 선조 등을 들 수 있다.[7] 한 사례를 들자면, 노론 이의연이 신임 환국을 일으킨 소론 측 인사들을 죄주라는 상소를 올린 것에 대해 영조와 소론이 논쟁을 벌인 일이 있다. 소론 이거원이 이의연을 죄줄 것을 청하면서 "논어에 이르기를, ‘형벌로 가지런히 한다고 했습니다. 만약 이의연의 죄를 명백하게 바룬다면 차후로는 절로 이런 흉소가 없을 것입니다." 라고 하자, 영조는 "공자가 말하기를, ‘덕으로 이끌고 예로 가지런하게 하며 법으로 이끌고 형벌로 가지런히 한다.’고 하였으니, 덕과 예가 위이고 법과 형벌은 그 다음이다."라고 응수했다. 두 사람이 주고 받은 얘기는 논어 위정편에 나온 것으로서 이거원이 문장의 일부만 가지고 와서 얘기할 때, 영조는 문장 전체를 예시로 들었다. 또한 공자는 이 문장 이전에 "형벌로써 질서를 유지하려 한다면 백성들이 형벌을 면하는 것을 수치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하면서 덕치의 중요성을 얘기했다. 따라서 영조의 주장은 근거와 출처가 확실하고, 덕치를 중시하는 유학자의 입장까지 고려한다면 소론 측의 주장보다는 영조의 주장이 더 정교하고 설득력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이의연은 이 일로 절도에 유배당했으나, 소론은 이광좌, 조태억 같은 영수들과 사헌부, 사간원에서까지 죄 줄 것을 청하고서야 유배를 보낼 수 있었다.[8] 다만 삼수의 옥이 터져 역적 수괴로 몰리자 그때는 그야말로 데꿀멍했다. 바로 거적을 깔고 "나같은 놈이 세제라니 어림없는 일입니다!!" 하고 눈물을 흘리며 페세제를 청했다. 경종의 보호로 왕위를 잇게 되긴 하지만.[9] 정확히는 무강(武講)[10] 동시대 인물 성대중의 《청성잡기》에 나오는 기록이다. 당시 뜸을 들인 초관인 홍건이란 자가 몰라서 그런거다 지레짐작하고 볼기를 쳤는데, 후에 홍건이 넌지시 영조의 답이 진작에 틀렸으나 일부러 모른 척 했다고 일러주었다. 신하들 앞에서 망신살뻔한 영조는 그의 배려에 감동해 지방 수령으로 올려주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여기서 영조가 금주령 기간에도 몰래몰래 술을 마신 증거가 나오는데, 저 당시 송절다를 마시고 취한 상태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기술돼있다.[11] 그런데 이현필 사건은 당대에는 매우 심각한 사안이었다. 왕에 대한 직접적인 모욕으로 여겨질 수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영조 13년, 실록에는 한 신하가 이현필을 처벌하라고 간언하면서 '''"과거 급제에 눈이 멀어서 왕을 능멸한 역적을 처벌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 문제는 몇 달을 끌다가 영조가 그냥 봐주고 합격시키는 선에서 끝났는데, 지방의 현감으로 부임한지 얼마 안 되어서 다시 합격이 취소되다가 결국 이현필이 세상을 떠난 지 한참 뒤에야(영조 40년) 벼슬이 다시 회복되었다.[12] 실록에서는 "차마 들을 수 없는 하교"라고 표현되었지만, 영조의 성격, 실록의 완곡한 표현, 그리고 전례 등을 감안하면 욕설로 보인다.[13] 수면시간이 평균 5시간정도다.[14] 보통 4끼에서 많으면 6끼[15] 고려 간섭기의 영향이다.[16] 종기가 나서 죽었다는 말이 정말 많이 나오는데, 종기는 실체를 추정하기 어려운 다양한 감염성 질환들이 원인인 경우가 의외로 많다. 당대의 위생/의학적 한계를 고려해도 유난히 왕족에게서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난 걸 보면 유전적으로 면역계통 결함이 있었을 수도 있다.[17] 탄수화물의 과도한 섭취는 지금도 이어지는 특징이나, 예전만큼은 아니다.[18] 쌀의 개량 상태가 이후 시대에 비해 훨씬 좋지 않던 삼국시대에는 더욱 심했다.[19] 이는 당대의 평균 수명 수준에 해당되나, 왕으로서는 장수하지 못한 것이다. 만약 세종대왕이 영조처럼 오래 살았다면 계유정난이 일어날 가능성이 줄어들었을 수도 있다.[20] 균형잡힌 식사를 했으며, 영조가 앓아 누웠을 때 사도세자가 구해 온 고추장에 감격한 것을 계기로, 이후 고추장을 매우 즐겨 먹었다고 한다.[21] 실제로 오래 장수하는 노인들은 검은 머리가 다시 나거나 이가 다시 나는 사례가 드물지만 종종 보인다고 한다.[22] 여담으로 가슴이 큰 여자 역시 무식하다고 해서 기피했다고 한다. 다만 왕실에서 그렇게 여겼을 뿐, 일반적인 조선시대 미의 기준으로는 가슴이 큰 쪽을 더 선호했다고 한다. [23] 계비를 안 들였을 경우 유력왕족에 의한 피바람이 발생될 확률이 높다. 명목상 왕실 어른이 있으면 유교국가인 조선상 경거망동을 하기 힘든데 광해군이 폐위된 가장 큰 이유가 폐모살제라는 점을 보면 쉽게 알수 있다. 그리고 이런 계비를 안 들였다 피본 조선의 왕은 다름아닌 세종문종이다. 둘 중 한 명이라도 계비를 들였다면 단종이 무기력하게 쫒겨날 확률이 적었을 것이다. 정순왕후 김씨가 괜히 최근에 긍정적인 재평가를 받는 게 아니다.[24] 이 말을 세상에 알린게 다름아닌 영조다! 즉, 이 말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25] 관리의 임기가 차거나 부적당할 때 다른 사람으로 바꾸는 일[26] 다만 정순왕후의 눈치를 본 이유는 정조가 정순왕후를 두려워해서 그런 게 아니라 죽기 직전에 정순왕후를 찾을 정도로 정순 왕후와 친밀해서 그랬을 것이다. 정순왕후 항목 참조.[27] 나중에 문정왕후도 중종이 장경왕후랑 묻힌 꼴은 못 보겠다고 이장을 했으나 비만 오면 물에 잠기는 곳이라 무산되었다. 문정왕후나 정순왕후나 남편에 대한 정은 있었는 모양.[28] 석물이 해를 거르지 않고 기우는 등 최악에 가까운 자리였다.[29] 다만 그렇게 보기도 힘든 게 정조는 할아버지인 영조에 대한 효성 하나는 지극했다. 나중에 윤구종이 경종에게 신하 노릇 하기 싫었다고 하자 '''"아니! 선왕의 효성과 우애는 모두가 알아주는데 어찌 이럴수 있냐?"'''하며 분노했다.[30] 1차 왕자의 난의 경우 아무 공적도 없던 이방석이 후계자로 정해졌고 정도전의 움직임도 매우 불안했다, 2차 왕자의 난에선 태종은 방어자의 입장이었다. 하다못해 폐세자였던 양녕대군의 처분에 대해 향후 세종대왕이 즉위했을 때 종묘에 해가 된다면 그 땐 사사해도 좋다는 유언까지 남겼었다. 연산군의 경우 폐비 윤씨의 사건을 숙청에 이용했다는 설이 설득력이 높지만, 자신이 어릴 때 어머니를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잃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31] 영조가 사도세자를 박대한 것은 실록에 기록된 엄연한 사실이다.[32] 비슷하게 고조할아버지 인조소현세자를 독살했다는 의심을 받고있지만 단지 견해일 뿐인데 반해,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박하게 대한건 엄연히 영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들이다.[33] 현대적 관점으로 보면 사도세자는 양극성장애가 유력하다.[34] 역모죄로 세자를 참수하면 아버지인 영조도 국법상으로는 역모가 된다. 물론 왕이니까 예외지만 계승 정통성 논란에 시달린 영조 입장에선 정치적 자살행위다. 또 영조가 후계자로 만들고 싶은 손자(정조)가 왕이 될 길이 완전히 막히게 된다. 사실 그정도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아예 후계자로 세울 남자가 없다! 한참 전에 갈려서 왕족 취급 못 받는 이씨를 찾아야하는데, 그냥 왕조가 바뀌는셈. 이게 심해도 그냥 심한게 아니라서 예를 들면 선조는 명종과 3촌지간이었고 인조도 광해군과 3촌지간이었다. 그럼 영조는? 영조 위로는 인조까지 올라가야 소현세자, 인평대군의 자손들이 나오며 영조와 대강 댓수가 맞거나 하는 점을 들어서 보면 무려 '''8촌''' 혹은 그 이상되는 촌수로 올라간다. 8촌까지는 그 당시로서는 가까운 편이었다 쳐도 그 위로는 당시에도 사실상 남이었다.[35] 사실 자결이 성사되었다면 영조로서는 가장 베스트였을 것이다. 일단 공식적으로는 자결하여 명예는 지켜진 것이니 정조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다. 문제는 신하들 입장에서는 그런 영조에게 순순히 따라준다는게 말이 안 된다는 것. 명색이 신하인데 조선의 유교법 상 왕이 죽을죄가 없는 세자보고 자결하라고 요구하는 걸 멀뚱멀뚱 보고만 있는 것도 말이 안 되며, 그런다고 진짜 자살하려는 세자를 말리지 않는 것도 말이 안 된다.[36] 하지만 이후 기록에서 화완옹주는 그렇게 아끼지만 사도세자를 엄하게 다스리는 모습을 보면 이 둘이 근친상간 관계였다는 것은 신빙성이 떨어지는 주장이다. [37] 영조는 화가 나는 일이 생기면 귀를 닦았다고 전해진다.[38] 효자나 열녀 등을 기리기 위해 마을 앞에 문을 세우는 것. 효자문이나 열녀문 등이 있다.[39] 정작 그런 화협 옹주가 죽은지 1달도 안되어 선위 파동을 일으켜 화협옹주와 우애가 깊었던 사도세자를 빈사 상태에 몰아넣는 짓거리를 하였다.[40] 위에서 정성왕후가 "험한 일을 안 해서 손이 곱다"고 한 걸 자기 어머니에 대한 모욕이라고 받아들였다는 것도 어찌 보면 그런 끼가 엿보이는 부분.[41]조선왕조 500년》에서는 한층 더 과격한 연출을 했다. 영조는 화완옹주에게서 세손(정조)이 아버지인 사도 세자를 그리워한다는 말을 듣고 일기장을 가져오게 했으며, 홍국영은 세손이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구절이 있는 부분을 아예 찢어내 버린 것. 영조는 일기장을 펼쳐들고 찢어낸 자국이 많은 것을 의아해하다가 '할바마마의 옥체 미령하시어(할아버지께서 편찮으셔서) 걱정이 많다'는 구절을 읽고 눈물을 글썽거리며 "화완이, 그 못된 것이 모함을 한 게야"라는 말을 곁들여 정조를 물러나게 한다. 정조가 동궁으로 돌아오자 홍국영은 일기장을 사사로이 보고 훼손한 죄를 청하기 위해 한나절 동안 정조의 눈치를 보며 문 앞에 꿇어앉아 있었다. 이후는 다 아시는 대로 정조와 홍국영의 약속이 오간다.[42] 물론 의소세손이나 정조도 사소한 이유 때문에(상중에 태어났다는 이유) 영조가 처음부터 총애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정조는 성장하면서 학문을 좋아하고 문무까지 겸비하여 훌륭한 후계자로서 영조를 크게 만족시키자,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로 아끼기 시작했다.[43] 실제로 사도세자는 숙빈 임씨가 자신의 첫자식을 임신했는데도, 아버지가 두려워서 어떻게든 아이를 지우려고 발버둥쳤다. 한중록에서 실제로 나오는 부분이며, 너무나도 비틀린 부자 관계다.[44] 정조의 친형 의소세손이 3세에 요절했을 때, 혜경궁 홍씨가 정조를 임신 중이었다.[45] 다른 한명은 화평옹주.[46]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혜경궁이 '''유일하게''' 영조에게 질책받았던 일도 혜경궁 본인의 잘못이 아니라 사도세자의 후궁을 도와준 일 때문이었다.[47] 후에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를 옮기고 묘지문을 썼을 때 숙의 문씨가 임신했을 때 불온한 무리들이 수상쩍은 모의를 했다거나, 궁에 불이 났을 때 숙의 문씨의 잔당이 사도세자의 짓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든가, 숙의 문씨와 그녀의 오빠인 문상국이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를 이간질을 했다든가 하는 얘기를 적기도 했다. 물론 정조가 자신의 아버지를 옹호하기 위함이니(가령 관서행은 도적들이 모의를 저지하러 간 것이고 홍계희가 변란을 일으키려하자 돌아왔다고 옹호하고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것은 이후에 영조가 여러번 후회했다고 옹호했다.) 거짓이나 과장도 섞여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한중록에서도 숙의 문씨가 영조의 아들을 낳으면 세자가 교체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던가, 문씨의 간악함을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데 왕(영조)만 모른다는 말이 돌았다는 등이 적힌걸 보면 과장이나 거짓이 있을지는 모르나 적어도 완전히 뻥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렇게 국왕의 총애만 믿고 거의 모든 왕실 일원들을 적으로 돌린 숙의 문씨의 처신이 그만큼 엉망이었던 것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