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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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개요'''
'''발생일'''
1995년 3월 20일 오전 8시경
'''유형'''
동시 다발 테러 (화학 테러)
'''발생 위치'''
도쿄 제도고속도교통영단 지하철(현 도쿄메트로)
마루노우치선 · 히비야선 · 치요다선
'''범인'''
옴진리교
'''피해'''
14명 사망[1], 약 6,300명 부상
'''범행 목적'''
교단을 향하던 수사의 교란과 수도권의 혼란
'''범행 수단'''
사린 가스
1. 개요
2. 배경
3. 사건
3.1. 실행범
3.2. 범인들의 승차 지점+시간, 피해 규모
4. 가해자와 피해자
5. 교주 및 간부 체포, 판결
6. 형벌 및 사형 집행
7. 여파
8. 관련 창작물
9. 기타
10. 둘러보기

  • 일본어: 地下鉄サリン事件 (지하철 사린 사건)
  • 영어: Tokyo Subway Sarin Attack

1. 개요


때는 1995년 3월 20일. 월요일. 기분 좋게 맑게 갠 이른 봄날 아침이었다. 바람이 아직 차가워서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 모두가 외투 차림이었다. 바로 전날은 일요일, 그 다음 날은 공휴일[2]

- 즉, 징검다리 휴일 사이에 낀 평일이었다. 어쩌면 당신은 '오늘 하루는 쉬고 싶었는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당신은 휴가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 당신은 평상시와 같은 시간에 눈을 뜨고, 세수를 하고, 아침을 먹고, 옷을 챙겨입고 역으로 향한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혼잡한 지하철에 몸을 싣고 회사로 향한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지극히 평범한 아침이었다. 인생 가운데 구별할 수 없는 단 하루였을 뿐이다.

 

'''가발을 쓰고 가짜 수염을 붙인 젊은 남자 다섯 명이 갈개로 뾰족하게 갈아둔 우산 꼬챙이로 기묘한 액체가 든 비닐봉지를 찌르기 전까지는.'''

 

무라카미 하루키, "언더그라운드" 中

팟캐스트 프로파일러 배상훈의 CRIME - 신의 명령 1
팟캐스트 프로파일러 배상훈의 CRIME - 신의 명령 2
[3]
1995년 3월 20일 월요일, '''일본 도쿄에서 옴진리교가 일으킨 대규모 지하철 화학 테러 사건'''으로, 세뇌광신도를 동원해 도쿄 지하철에서 독가스사린을 살포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고 일본 사회 전체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한국어 연음현상 때문에 착각을 일으키기 쉬운데 '''살인가스''' 살포사건이 아니라 테러에 사용된 가스의 이름이 사린(Sarin)이다. 물론 LC50(반수치사농도)값이 매우 적은 맹독성 '살인가스'인 것은 맞다. 그랬기에 1995년 3월21일 MBC 뉴스데스크 보도에서도 사린가스(Sarin Gas)는 그 엄청난 파괴력과 살상력 때문에 한국어 발음 그대로 '''살인가스'''라고 규정하기도 했다.[4]
정부 기관에 대한 공격이라고 볼 수 있는데, 당시 지하철 운영 기관이었던 제도고속도교통영단민영 기업으로 개편된 것은 사건 9년 뒤인 2004년 4월 1일이므로 사건 당시 영단은 재무성 산하 관공서였고 기관사 및 역무원을 비롯한 직원들도 국가공무원 신분이었으며, 옴진리교의 타겟이자 주요 희생자였던 국가공무원[5]들도 영단 지하철로 통근했기 때문이다.
테러와 관련된 학술지에서 사린가스 살포사건을 9.11 테러만큼, 혹은 그보다 더 비중있게 다루는 경우가 많은데, 왜냐하면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살포사건이 인류 최초이자 현재까지 유일하게 대량살상무기를 사용한 테러사건'''이기 때문이다.[6] 물론 해당 사건은 불과 십수명의 사망자를 발생시키는 데에 그쳤지만, 생화학무기가 테러에 성공적으로 사용된다면 최소한의 물질로 단 한번의 공격을 통해 수십만명의 사망자를 발생시킬 수 있기 때문에[7][8] 최악의 테러를 방지하기 위한 연구를 할때 사린가스 살포사건이 자주 언급된다.

2. 배경


사카모토 츠츠미 일가족 살인사건, 옴진리교 국토이용계획법 위반사건, 메구로공증인사무소 사무장 납치 감금 치사 사건, 마츠모토 사린 사건, 카메이도 악취 사건 등의 온갖 대형 강력범죄를 저지르던 옴진리교는 그 결과 이들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기 시작하면서 경찰 수사가 포위망을 좁혀 오자 압박을 느끼고 있었다.
이에 교주 아사하라 쇼코는 경찰의 수사력 및 관심을 분산시켜 궁극적으로 옴진리교가 조사받는 사태를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지금까지와 수준이 다른 대규모 테러를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특히, 테러 대상으로 도쿄의 주요 관공서가 밀집된 지역 등을 골라 일본 정부를 일시적으로 마비시키는 것까지 노리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이미 이성적인 판단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미 계속적으로 테러를 저질러 왔기 때문에 옴진리교는 요주의 대상으로 찍혀 있었다. 이 상황에 대규모 테러를 저지를 경우 오히려 제일 먼저 용의 대상으로 지목받기 쉽다. 역시나 이 사건이 터지자 옴진리교는 확실하게 몰락의 길을 걷는다. 궁지에 몰리자 망상에 빠져 폭주해 최악의 사건을 저지르고 말았던 것이다.

3. 사건


1995년 3월 20일 아침 8시, 옴진리교는 한창 직장인들과 학생들의 출근 및 등교로 바쁜 러시아워 시간대에 제도고속도교통영단(영단)이 담당하는 노선에서 총 5개 편성을 노려 차량에 대량의 사린 가스를 살포했다. 실행자들은 각각 2명씩 패를 이루어 1명은 지하철에 탑승하여 사린을 담은 비닐봉투에 구멍을 내는 식으로 사린을 살포하고, 다른 1명은 살포자를 태워 도망치는 운전수 역할을 맡았다.
마루노우치선히비야선에 각 2편성, 치요다선에 1편성을 노렸는데, 이들 3개 노선의 공통점은 도쿄의 주요 관공서 밀집지역을 지난다는 것이다. 카스미가세키로 불리는 이 지역은 대한민국세종대로와 비슷한 지역으로서, 이 지역에 위치한 주요 성급 부서만 해도 법무성, 후생노동성, 환경성, 경제산업성, 총무성, 국토교통성, 재무성[9], 문부과학성, 외무성 등 9개에 이르며[10] 또한 이들 부서의 산하기관이 수두룩하게 밀집해 있다. 당연히 통근하는 공무원들이 많았고 그들을 핵심 타겟으로 노려 사린 가스를 살포했다. 평상시에는 출근 시간이 9시 30분까지지만, 사건이 일어난 월요일은 아침 일찍 조례를 하는 곳이 많아 사건이 일어난 시각 즈음에 출근하는 공무원들이 많았다고 한다. 즉 '''옴진리교 내부에 이런 일본 정부 관청가의 내부사정을 잘 아는 자있었다는 뜻이다. '''옴진리교 문서 초반에 나와 있듯이 옴진리교일본에서 정말 옴진드기와 같은 존재였던 것.

3.1. 실행범


'테러리스트(최종학력) ↔ 이동 담당 운전수' 형식으로 작성하였다.
  • 하야시 이쿠오林郁夫(게이오기주쿠대학 의학부) ↔ 니이미 토모미츠
  • 히로세 켄이치広瀬健一 (와세다대학 이공학부 응용물리학과) ↔ 키타무라 코이치
  • 요코야마 마사토横山真人 (도카이대학 공학부 응용물리학과) ↔ 토노자키 키요타카
  • 토요다 토오루豊田亨 (도쿄대학 이학부 물리학과) ↔ 타카하시 카츠야
  • 하야시 야스오林泰男(코우카쿠인대학 전기공학과) ↔ 스기모토 시게로
일본 재판소는 실행범들의 죄질이 운반책보다 나쁘다고 봤다. 무기징역 판결을 받은 하야시 이쿠오를 제외하고 전원이 사형 확정된 반면 운반책들 중에는 2018년 7월 6일 사형당한 니이미 토모미츠를 제외하고 사형확정자가 없다. 나머지 운반책들의 경우 무기징역 판결을 받았다.

하야시 야스오는 교주 아사하라 쇼코로부터 스파이 의심을 샀다고 하며,[11] 이것이 그를 과격파로 만들어, 후술하는 바대로 도쿄 지하철(히비야 선)에 가장 큰 피해를 유발했다. 같은 피해를 당한 마루노우치 선과 치요다 선을 비롯하여 다른 도쿄지하철 노선들이 아침에만 운전승무를 정지하고 오후부터 운전승무를 재개한 것과 비교한다면 엄청난 피해 규모이다. 또 이 자의 도주 중 행보도 비판대상인데, 도쿄지하철 사린가스 살포 사건 후 장기간 도주하다 1년 9개월만인 1996년 12월 3일 오키나와현 이시가키시에서 오키나와 현경에게 체포됐을 때(출처), 이 자의 소지품에서 작은 불상이 나왔고 그 불상이 다름아닌 하야시 야스오 자신 때문에 사망한 지하철 승객들의 영면을 기도하기 위한 불상이었다고 한다. 자신이 사고를 일으켜서 지하철 승객들을 사망하게 만들어놓고도, 자수를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도망다니는 주제에 뻔뻔스럽게 자신 때문에 사망한 지하철 승객들의 영면을 기도하기 위해 불상을 소지했다? 이건 완전히 병 주고 약 주는 꼴이고, 엄청나게 비판받을 부분이다.[12]

3.2. 범인들의 승차 지점+시간, 피해 규모


테러리스트
탑승 차량
승차 시각
승차 지점
독가스 살포 구간
사상자
해당 전동차들의 종착역
하야시 이쿠오
JR 203계 마토67편성
7:48
치요다선
키타센쥬역
센다기

신오차노미즈[13]
지하철 직원 2명 순직[14]
지하철 승객과 직원
231명 중경상
콧카이기지도마에역(국회의사당앞역)
히로세 켄이치
02계 제16편성
7:48
마루노우치선
이케부쿠로역
이케부쿠로

오차노미즈[15]
지하철 승객 2명 사망[16]
지하철 승객과 직원
358명 중경상
신코엔지역
요코야마 마사토
02계 제50편성
7:55
마루노우치선
신주쿠역
신주쿠

요츠야[17]
지하철 승객과 직원
200명 중경상
콧카이기지도마에역(국회의사당앞역)
토요다 토오루
도부 20000계 제11편성
7:59
히비야선
나카메구로역
나카메구로

에비스[18]
지하철 승객 1명 사망
지하철 승객과 직원
532명 중경상
카스미가세키역
하야시 야스오
03계 제10편성
7:55
히비야선
우에노역
우에노

아키하바라[19]
지하철 승객 '''8명 사망'''
지하철 승객과 직원
'''2475명 중경상'''[20]
츠키지역
아래 도쿄지하철 노선도를 동시에 로딩해놓고 위 데이터를 맞춰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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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명의 테러리스트가 도쿄 지하철을 어떻게 파괴하려 했는지 알 수 있다.
이 사건으로 도쿄는 대혼란에 빠졌다. 그나마 일선 부서의 발빠른 대처 및 숭고한 희생[21]으로 살포 지역의 무정차 통과 및 열차운행 중단 등의 조치가 이어졌고, 살포된 독가스가 사린이라는 것도 비교적 초기에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 도쿄 도내의 각 병원에 사린 가스의 해독제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병원에 비교적 빨리 도착한 피해자들을 제외하면 추가 치료가 불가능해 대재앙이 발생할 뻔했다. 사린의 해독제로는 아트로핀과 프랄리독심(Pralidoxime, 2-PAM)이 쓰이는데, 프랄리독심은 유기인계 농약 중독의 치료제로 많이 쓰이는 물질이어서 대도시인 도쿄에는 물량이 얼마 없었다. 다행히 스미토모(住友) 제약회사에서는 이 프랄리독심을 생산하고 있어서 서일본 지역에 있는 아트로핀과 프랄리독심을 긁어모아 도쿄 지역의 병원에 공급해 사태가 크게 번지는 일을 막았다.[22]
자위대에서는 화학전 담당 부대(제101화학방호대)를[23] 중심으로 화학학교 교관 등을 파견하여 환자 치료를 도왔다. 자위대중앙병원에서 파견한 의사가 이전의 간부연수에서 화학병기 대응 교육을 받았고, 현장으로 파견될 때 연구자료를 가지고 와서 화학병기로 인한 테러라고 판단하고 병원에 아트로핀과 2-PAM을 투여할 것을 조언해 빠른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최종적으로 이 테러로 13명이 숨지고 5,000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사실 테러의 규모, 살포된 사린가스의 양을 보면 '''이 정도에 그친 것이 다행'''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언더그라운드> 264페이지에서는 피해 규모가 그나마 이 정도에 그친 사유를 거론하고 있다. 구명구급센터 의사 겸 토호대학(東邦大学) 의학부 사이토 토오루(斎藤徹) 조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테러리스트들이 액체 사린 가스에 아세토니트릴을 섞어 휘발속도를 늦추어 도주할 시간을 확보했는데, 액체 사린가스에 아세토니트릴을 섞으면서 사린가스 자체의 농도가 30% 이하로 떨어졌고, 아세토니트릴이 섞인 사린독가스가 지하철 전동차 안에서 기화하면서 겨자 및 고무 타는 냄새를 풍기며 느린 속도로 기화해 그 사이에 사린가스 살포 사실이 파악되어 대피가 이뤄졌고 앞서 거론한대로 그나마 신속한 사고처리가 실행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순수한 100% 농도의 순수 사린이었다면, 기화하는 도중엔 냄새도 없고 휘발속도 역시 대단히 빠르므로 가스를 살포한 테러리스트들도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옴진리교가 실행범 본인도 죽는 자살테러를 각오+침착함을 갖고서 이 테러를 저질렀거나, 만약 시한 장치 폭발물을 이용한 순도 100%로 사린가스폭탄을 제작해 지하철 전동차 내에 살포했다면 '''5,000명 이상의 피해자가 죄다 사망자가 되는''' 상상만 해도 끔찍한 초대형 참사가 됐을지도 모른다. 결국 실행범들이 자기들 목숨은 아깝다고 한 짓이 최악을 피한 셈이 됐다. 게다가 이런 엄청난 일을 저지른 이상, 어차피 잡히면 인명피해 줄이건 말건 무조건 사형이었고, 실제로도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1명을 제외하고 전부 사형이 집행되었으니 그야말로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인 무의미한 행동이었다.

4. 가해자와 피해자


놀랍게도 '''이 사건의 직접적인 가해자, 그러니까 지하철에서 가스를 살포한 이들은 일본 사회 전체 가운데에서도 엘리트로 불릴 만한, 고등 교육을 받고 전문지식을 가진 인물들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가해자들의 학력과 경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치요다 선에서 역무원 2명의 목숨을 앗아간 하야시 이쿠오(당시 48세)는 평판이 좋은 심장외과 전문의였다. 마루노우치 선에서 승객 1명을 죽게 한 히로세 켄이치(당시 30세)는 와세다대학의 이공학부 응용물리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한 사람이었다. 마찬가지로 마루노우치 선에서 200명에게 중경상을 입힌 요코야마 마사토(당시 31세)는 도카이 대학에서 응용물리학을 전공했다. 히비야 선에서 승객 1명을 죽게 만든 토요타 토오루(당시 27세)는 도쿄대학 이학부의 응용물리학과 출신으로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훌륭하고 우수한 연구실의 박사과정에 진학했다. 같은 히비야 선에서 무려 8명의 승객을 죽게 만든 하야시 야스오(당시 37세)는 코우가쿠인 대학에서 인공지능을 연구했다.

그러나 피해자들은 가해자들이 (아마도) 타깃으로 삼은 일본의 관료들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다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지하철역에서 사린 가스를 마시고 호흡 곤란에 빠져 영문도 모른 채 격렬한 고통 속에서 목을 쥐어뜯으며 희생당한 사람들은 시스템 안에서 하루하루를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보내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책을 위해 사건 피해자들을 60명 넘게 인터뷰했지만, 반수 이상의 사람들이 대학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적잖이 놀랐다. 실행범들에 필적할 만한 고학력자는 아주 소수에 불과했다.

실제로 '언더그라운드'에 실린 피해자의 인터뷰들을 보면 집값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사이타마현의 도심지 밖에 거주하면서 매일같이 1시간 이상이 걸리는 도쿄로 힘들게 출근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이다. 긍정적으로 사고를 극복한 피해자도 있지만, 기억력 감퇴, 체력과 시력 저하 등의 후유증을 앓고 있거나 이후 암 등으로 사망한 피해자들이 많았다.
여담으로 이 사고로 중증 장애인이 된[24] 독신 여동생을 챙기는 한 30대 남성의 이야기가 나와서 독자에게 안타까움을 주기도 했는데 안타깝게도 피해자 여성은 사고 이후로 평생 누워서만 지내야했고 2020년 3월 10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25] 이 남매는 2000년대 중반부터 얼굴과 이름을 밝혔으며[26] 오빠는 2010년대부터 피해자 구제 활동을 시작했다. 여동생의 사망 후 언론 인터뷰를 갖기도 했다.
결국 '''이 사건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전형적인 평범한 소시민들이었으며, 그에 반해 테러를 자행한 범인들은 사이비 종교악행에 가담하지만 않았더라면 국가와 사회를 지탱할 우수한 인재가 될 수 있었을 사람들이었던 셈이다.''' 이 기막힌 아이러니는 당시 일본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사망자 목록 사이트(일본어).[27]

5. 교주 및 간부 체포, 판결


옴진리교아사하라 쇼코의 의도와는 반대로, 일본 경찰은 테러의 배후로 옴진리교를 지목해서 집중적으로 수사를 시작했다. 이미 아사하라 쇼코가 지휘하여 각종 독가스를 사용한 테러 사건을 1980년대에 저질렀기에 일본 정부는 이번 사건이 터지자마자 옴진리교를 배후로 지목했다.
수사를 시작한 일본 경찰은 전국의 옴진리교 관련 시설을 일제히 수색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사린 테러에 관련된 옴진리교 간부들을 체포하고 사린가스를 포함한 독가스 및 무기 제조, 어린 아이들을 포함한 신도 납치 등 옴진리교의 악행을 구체적으로 밝혀냈다. 경찰이 수사를 진행하는 동안 옴진리교 잔존 신도들은 "종교 탄압을 반대한다"며 경찰의 수사에 저항했지만, 이미 옴진리교가 사린 가스 테러를 저질렀다는 것이 드러난 이상 아무 소용 없었다. 당시 영상
이후 1995년 5월 16일, 일본 경찰후지산 근교에 있던 옴진리교의 본부인 제 6 사티암(サティアン)[28]에 교주 아사하라 쇼코의 가족이 살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바탕으로 아사하라 쇼코 본인도 제 6 사티안에 은거 중일 것으로 판단해 체포작전에 나섰다. 아사하라 쇼코의 도주를 막기 위한 대규모 경찰 병력과 사린 테러의 주범이 체포되는 모습을 기다리는 취재진들이 사티안을 포위하였고, 사티안 내부에 돌입하는 체포조는 혹시나 있을 신도들의 독가스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가스를 감지하기 위한 카나리아 새장[29]과 독가스를 막아 줄 방독면을 구비하였다. 체포조는 철문을 쇠톱으로 열고 사티안으로 진입했지만 사티안 내부는 미로처럼 복잡하게 설계되어 있어서 4시간이 넘게 수색해 봐도 아사하라 쇼코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수색을 하던 경찰 병력이 사티안의 2층 계단과 3층 계단 사이에 작은 공기 구멍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고, 얼마 안 가 계단 사이의 좁은 밀실에 몸을 숨기고 있던 아사하라를 체포할 수 있었다. 당시 국내에서 나온 아사하라 쇼코 체포 관련 기사
아사하라 쇼코는 체포 이후 사형 판결을 받고 20년 넘게 복역하다 2018년 7월 6일 사형이 집행되어 처형당했다. 그리고 옴진리교는 테러 단체로 지목되어 강제 해산되었다. 관련인은 도합 188명이 유죄판결을 받고 그중 13명이 사형 확정을 받았다.
한편, 옴진리교는 원래 사린 가스가 아니라 탄저병을 연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조사 결과 밝혀졌다. 옴진리교의 기술력이 부족해서 탄저병을 포기하고 사린으로 전환했다. 탄저균 배양에는 성공, 도쿄 고토구 카메이도 지역에 살포를 하였으나, 악취만 남게 된 카메이도 악취사건이 벌어진다.[30]
사린 제조 프로젝트에 관여한 키쿠치 나오코(菊地直子)는 2012년 6월 3일 저녁, 가나가와현 사가미하라시에서 체포되었다. 키쿠치는 1996년에 타카하시와 함께 숨어 산 것으로 알려져, 일본 경찰은 키쿠치가 타카하시의 행방을 알고 있을 것으로 보고 이를 추궁 중이라고 한다.
히비야 선 구간에서 운전수 역할을 포함한 총 5가지 사건[31]에 관여했던 타카하시 카츠야(高橋克也)는 다른 범인들과 마찬가지로 지명수배 중인 상태였으나 2012년 6월 15일 도쿄 오오타구(大田区)에서 타카하시가 잡히면서 사건 17년만에 '''드디어 옴진리교 특별지명수배 대상이었던 3명[32]이 모두 잡혔다.[33]''' 사건 전에도 만화를 좋아했던 터라 만화방에서 나오다 잡혔다고 한다. 잡히고 나선 아돌프 아이히만처럼 '나는 그저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 드립을 치고 있다. 그러더니 경시청 조사에서는 또 옴진리교에서 수행하고 싶다는 드립을 쳤다!!! 또한 해당 기사에 따르면 체포됐을 때 교주인 아사하라 쇼코의 사진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이쯤 되면 도주하는 17년 동안 반성이나 후회를 했을 가능성은 전무한 걸로 보인다.
최후의 옴진리교 재판인 타카하시 카츠야의 재판은 2015년 1월 16일 시작되어 2015년 4월 30일, 1심에서 구형 그대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본인은 "뿌려진 것이 사린 가스인지 몰랐다"고 하지만 재판장은 그가 "지하철에 위험한 독극물을 뿌리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고 판단하고 17년간의 도주와 재판 중의 태도도 반성의 기미가 없는 점 등으로 미루어보아 무기징역이 타당하다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타카하시 피고는 판결에 불복해 항소를 했지만 그가 요구한 아사하라 쇼코 사형수 등의 증인 심문은 각하당하고 피고인 질문도 행해지지 않은채 1심의 무기징역을 지지한다며 9월 7일 도쿄 고등재판소에서 피고의 항소를 기각했다.
그런데 2015년 11월 27일, 도쿄 고등재판소에서 키쿠치 나오코가 살인 미수 방조 등에 대해 무죄판결을 선고받았다. 살인의 의도가 없었다는 재판정의 발언에 일본 현지는 충격의 도가니. 당연히 검찰측은 상고를 진행중이다. 결국 2017년 12월 27일, 일본 최고재판소(한국의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이 확정되었다(...).
한편 2018년 1월 19일, 일본 최고재판소(한국의 대법원)는 마지막 수배자인 타카하시 카츠야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하였다. 이로써 옴진리교 관련 사건 재판은 22년이라는 긴 시간 끝에 마무리되었다. 한편 재판이 끝난 후 옴진리교 사형수들은 도쿄에서 전국 각지의 구치소로 흩어졌다.
2018년 7월 6일 교주를 포함해 운반책, 전속 기사 겸 테러 주동자, 화학무기 개발자 등 그 중 죄가 상대적으로 무거운 7명이 먼저 사형되었고, 주로 실행범인 나머지 6명은 2018년 7월 26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례적으로 한달 사이에 옴진리교 13명이 한꺼번에 사형집행 되었는데, 이는 2019년에 예정된 아키히토 천황의 퇴위를 앞두고 헤이세이 시대에 일어난 참혹한 사건은 되도록 헤이세이가 지나가기 전에 완전히 끝내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6. 형벌 및 사형 집행


  • 주범 - 마츠모토 치즈오 - 1995년 5월 16일 체포 - 2006년 9월 15일 도쿄고등재판소 사형 확정 - 2018년 7월 6일 사형 집행[34]
  • 연락책 - 이노우에 요시히로 - 1995년 5월 15일 체포 - 2010년 1월 12일 도쿄고등재판소 사형 확정 - 2018년 7월 6일 사형 집행[35]
  • 공급책 - 나카가와 토모마사 - 1995년 5월 17일 체포 - 2011년 11월 18일 상고 기각으로 인한 사형 확정 - 2018년 7월 6일 사형 집행[36]
  • 공급책 - 엔도 세이이치 - 1995년 4월 26일 체포 - 2011년 11월 21일 상고 기각으로 인한 사형 확정 - 2018년 7월 6일 사형 집행
  • 공급책 - 츠치야 마사미 - 1995년 4월 26일 체포 - 2011년 2월 15일 상고 기각으로 인한 사형 확정 - 2018년 7월 6일 사형 집행
  • 실행범 - 하야시 이쿠오 - 1995년 4월 8일 체포 - 1998년 5월 도쿄지방재판소 무기징역 확정[37]
  • 실행범 - 히로세 켄이치 - 1995년 5월 16일 체포 - 2009년 11월 6일 상고 기각으로 인한 사형 확정 - 2018년 7월 26일 사형집행
  • 실행범 - 요코야마 마사토 - 1995년 5월 16일 체포 - 2007년 7월 20일 상고 기각으로 인한 사형 확정 - 2018년 7월 26일 사형집행
  • 실행범 - 토요다 토오루 - 1995년 5월 16일 체포 - 2009년 11월 6일 상고 기각으로 인한 사형 확정 - 2018년 7월 26일 사형집행[38]
  • 실행범 - 하야시 야스오 - 1996년 12월 3일 체포 - 2008년 2월 15일 상고 기각으로 인한 사형 확정 - 2018년 7월 26일 사형집행
  • 운전자 - 니이미 토모미츠 - 1995년 4월 12일 체포 - 2010년 1월 19일 상고 기각으로 인한 사형 확정 - 2018년 7월 6일 사형 집행
7월 6일에 사형 집행이 끝난 7명 중 교주인 아사하라 쇼코를 제외한 6명은 화장 후 집행 전의 유언에 따라 시신 인도가 완료되었다고 한다.# 그중 엔도 세이이치 사형수는 자신의 시신을 옴진리교의 후속 단체인 알레프에 인도할 것을 요청하였고, 이 유언에 따라 그대로 인도되었다. 사실 위험인물의 시신을 위험단체에 넘기는 건 공안측면에서 문제가 있는 부분이라 논란이 일고 있지만, 사형집행전에 피형자가 사후처리를 요청한 인물이 있는경우, 사후처리자로 지명된 사람이 거부하지 않는한 그대로 인도되어야 한다는 조항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아사하라 쇼코는 본인이 넷째딸에게 넘겨달라고 유언을 남기고 넷째딸도 시신 인도를 수락하였으나, 아직 교단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아내와 셋째딸이 이의를 제기한 점과, 반대로 교단과 척을 진 넷째딸이 시신 인도 후 안전 확보등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어 아직 도쿄구치소가 임시 보관중이다.

7. 여파


교주 아사하라 쇼코는 이 사건을 비롯하여 그간 옴진리교가 일으킨 각종 사건의 주범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옴진리교는 강제로 해산당한다. 하지만 아사하라 쇼코가 체포된 후에도 잔당들이 모여서 새로운 조직을 건설했다. 이 사건의 용의자들은 사건 발생 후 17년 가까이 장기 지명 수배되어 있었고, 2012년이 되어서야 모두가 체포되었다.
이 일로 도쿄 경시청과 공안조사청의 고위간부들의 목이 줄줄이 날아갔다고 한다. 이 일 이후로 일본 경찰 특히, 도쿄의 경찰들은 업무가 완전히 빡세졌다고 하며 신흥종교들은 일본 경찰이나 공안조사청의 매의 눈의 감시받게 되었다.
사회적으로는 1995년 1월의 고베 대지진과 함께 일본 경제 침체기의 대표적인 사건으로 꼽히고 있다. 무라야마 도미이치 내각의 무능한 행보와, 지속되는 경제 불황으로 인해 다시는 일본 정계에서 혁신계가 야당의 주도권을 잡지 못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또 경제 불황, 고베 대지진에 이어 사린가스 테러까지 터져 수천명도 넘는 사람들이 죽거나 부상을 입자, 일본 내에서는 세기말적인 분위기까지 돌았다. 전설적인 애니메이션인 신세기 에반게리온 특유의 음울하고 어두운 분위기는 안노 히데아키 감독의 우울증과 더불어 이런 세기말적인 사회적 배경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하는 사람들이 많다.[39]
이 사건 한달 이후 미국에서 오클라호마 폭탄 테러까지 일어나자, 동시 다발적인 테러로 인해 일본 뿐만 아니라 세계가 큰 충격에 빠지기도 했다. 물론 이거랑은 비교도 안되는 엄청난 규모의 테러가 6년 뒤에 일어났지만...[40]

8. 관련 창작물


일본의 유명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사건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직접 사건의 피해자들을 취재한 인터뷰 내용을 모아서 '언더그라운드(アンダーグラウンド)'라는 책을, 옴진리교 신도[41]들의 이야기를 모아서 '약속된 장소에서'라는 책을 발간했다.
크리미널 마인드 시즌 11 2화에서 독가스 살포 사건이 일어났다는 말에 해당 사건이 언급된다.
쏘우 2에서는 직쏘가 해당 사건을 언급하며 2시간 후에는 사린가스 중독으로 죽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돌아가는 펭귄드럼은 이 사건을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이다.
이 외에도 일본 창작물에서 종교로 인한 테러, 도심 생화학 테러라고 하면 보통은 모티프가 이 사건이다. 그만큼 이 사건이 일본에 끼친 영향력은 어마어마한 것. 이를테면 아오야마 신지 감독의 영화 <유레카>(2000),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디스턴스>(2001).

9. 기타


언더그라운드의 인터뷰 중 '지하철 사린사건 피해자의 모임'의 상담 창구를 맡고 있는 나카무라 유지 변호사[42]일본 경찰 조직과 사법 조직의 태만을 지적한다. 사건이 일어난 해 설날에 이미 요미우리 신문에서 본거지인 사티안이 있는 카미쿠이시키무라(上九一色村)에서 사린 잔유물이 검출됐다는 기사가 나고 1995년 3월 6일과 13일[43], 2번에 걸쳐 치안 상태 및 사린 가스 살포의 가능성에 대한 건의서가 제출되지만[44] 경찰은 설날로부터 3달이 넘도록 옴진리교의 조직도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등 늦장 대응을 보여주며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고 한다. 공안조사청도 비난을 받았는데 경찰은 민생치안을 전담하느라 대응이 늦었다쳐도 공안조사청이야말로 이런 위험한 집단을 감시하고 정보를 수집해야 하는 기관인에도 경찰 이상으로 손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공산당은 공안조사청이 우리를 감시하느라고 쓰는 시간과 인력의 반만 옴진리교 감시에 썼어도 사전에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요도호 납치 사건 당시의 인질로 유명한 히노하라 시게아키(日野原重明)가 원장으로 있던 '세이로카 국제병원'에도 환자가 몰려들었는데, 당시 히노하라 원장은 사린 중독임을 알아내고 적절한 해독 치료를 지시해서 600여명의 환자를 살릴 수 있었다.
교주가 LSD에 중독되어있었고, 사이비 교주적인 행동을 보였으며, 자신의 광신도들을 세뇌해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 등이 로만 폴란스키의 일가족 5명을 무참히 살해한 찰스 맨슨과 그 추종자들과 닮아있기도 하다.

10. 둘러보기




[1] 2020년 3월 사망한 여성이 피해자로 인정되면서 사망자 1명이 추가되었다. 관련 내용은 하단의 가해자와 피해자 문단 참고[2] 일본에서는 춘분이 공휴일이다. 일본/공휴일 문서 참고.[3] 한 블로거가 이 영상도 입수했다. 앞서 영상 못지않게 피해자 시민들과 지하철 직원 그리고 경찰공무원 소방공무원들과 한국육군에 해당하는 육상자위대 관계자들과 병원 의사, 간호사, 원무과 관계자들의 처절한 모습이 담겨져 있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참고.[4] 사실 사린가스 자체가 대표적인 신경계 독가스다. 군필자들이 화생방 정신교육 받을 때마다 늘 들었을 그 가스 중 하나.[5] 영단 직원을 포함한다.[6] Intriligator, Michael D. “The Economics Of Terrorism.” Economic Inquiry, vol. 48, no. 1, 25 Jan. 2010, pp. 1–13., doi:10.1111/j.1465-7295.2009.00287.x.[7] 실제로 이 사건에서도 하마터면 수천명을 죽일 뻔했다. 만약 테러범들이 지들은 살겠다고 농도를 희석하지 않았거나, 정부가 전력을 다해 필사적으로 대처하지 않았더라면...[8] 엑시트에서 단 한 번의 테러로 어마어마한 사상자를 발생시킨 것도 이 특성을 반영한 것이다. 독가스는 인명피해 측면에서 폭탄급, 아니면 그보다도 더 위험하다.[9] 당시에는 대장성으로 불렀다.[10] 한국으로 따지면 대한민국 법무부, 보건복지부, 고용노동부, 대한민국 환경부, 산업통상자원부, 행정안전부, 국토교통부, 재정경제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외교부에 대응된다.[11] 조총련재일교포였다고 한다. 이름도 한국식으로 음독하면 '''임태남'''으로 여느 한국인의 이름들과 비슷하다.[12] 무라카미 하루키, 『언더그라운드』, 364페이지[13] A725K 아비코요요기우에하라 행.[14] 각각 타카하시 카즈마사(高橋一正, 1945~1995)와 히시누마 츠네오(菱沼恒夫, 1944~1995)이다. 출처: 1995년 3월 21일 연합뉴스 & 1995년 3월 20일 연합뉴스.[15] A777 이케부쿠로 발 오기쿠보 행.[16] 사건 당시 사망자는 1명이었지만, 2020년 후유증으로 사망한 여성 한 명도 이 사건의 희생자로 인정되면서 2명이 되었다.[17] B801 신주쿠 발 이케부쿠로 행.[18] B711T 나카메구로 발 토부동물공원 행.[19] A720S 기타센주 발 나카메구로 행.[20] <언더그라운드> 361페이지에서부터 이에 대한 자세한 언급이 나온다. 하야시 야스오의 테러 공격에 이 엄청난 수의 피해자가 발생한 것은 이 A720S 전동차에서만 피해자가 발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린 가스가 살포된 후 A720S 전동차(0)가 코덴마초역에 스톱했을 때 이 전동차의 승객들이 사린 팩을 발로 차서 코덴마초 역 승강장에 버렸기 때문. 결국 츠키지역에 멈춘 (0)A720S 기타센주 발 나카메구로 행 전동차를 뒤따라오던 열차들-
①A621T 기타카스카베 발 나카메구로 행 전동차가 핫초보리역에서,
②A785K 기타센주 발 나카메구로 행 전동차가 카야바초역에서,
③A666S 토부동물공원 발 나카메구로 행 전동차가 닌교초역에서,
④A750S 기타센주 발 나카메구로 행 전동차가 코덴마초 역과 닌교초 역 사이에서,
⑤A738S 타케노츠카 발 나카메구로 행 전동차 등이 코덴마초 역에서 줄줄이 정차했을 때,
④에서 하차하여 승강장에서 대기 중이던 모든 승객과, ④를 뒤따르던 ⑤에서 하차하여 승강장에서 대기 중이었던 모든 승객이 코덴마초 역 승강장에서 대규모로 사린 가스를 흡입하면서 피해가 커졌다. 결과적으로 사린 봉지를 걷어찬 행동이 엄청난 희생을 부른 행동이 된 것이었지만, 사린 흡입으로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능한 상태였고 위독 물질인지 몰랐던 상황이라 봉지를 걷어찬 남성이 유죄가 되지는 않았다. 다만 일본의 위키에서 이 남성의 행동이 유죄가 아니라는 점을 기록한 것을 본다면 사건 당시에는 꽤 비난을 받았었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 봉지를 차서 내보내려다가 선수를 빼앗겨 내보내지 못했던 남성이 무라카미 하루키와 인터뷰를 하기도 했었다. 문제는 이 가스 팩 개수가 무려 3개나 됐다. 다른 4명이 각각 2팩씩 살포했는데 하야시 야스오만 3팩을 살포했다는 점에서, 팩 하나당 독가스 분량이 900ml였다는 점에서 참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하야시 이쿠오, 요코야마 마사토, 히로세 켄이치 3명은 독가스 팩에 구멍을 작게 뚫었고 일부는 뚫지 못하기까지 한 반면, 토요다 토오루는 독가스 팩 2개를 구멍냈고, 하야시 야스오도 독가스 팩 3개를 다 구멍내어 가장 많이+가장 큰 구멍이 났다. 최종적으로 도쿄 지하철 여러 노선들 중에서도 히비야 선이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고 말았다. → 총 사망자 9명(8+1), 총 중경상자 3007명(2475+532).
[21] 승객들을 1명이라도 더 대피시키기 위해 사린 가스 살포 지역에 남아 대피조치를 실행하다 독가스 중독으로 인해 순직한 역무원도 있다.[22] 일본 위키백과의 해당 문서의 "4. 긴급 조치" 항목을 보면 사고 당시 일본이 더 이상의 사태확산을 막기위해 얼마나 처절하게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다 했는지 나온다.[23] 훗날 2001년 중앙즉응집단(현 육상총대) 소속 중앙특수무기방호대가 된다.[24] 시력에 심각한 손상을 입어 물체의 색상을 구별할 수 없는 색맹이 되었으며, 거동도 매우 불편해졌고 식사도 아이스크림, 떠먹는 요구르트 등의 부드러운 것이 아니면 소화할 수 없었다. 말을 하기도 힘들어져 매우 불분명한 발음만 나왔기에, 그녀의 사연은 다른 피해자들의 인터뷰와 달리 본인의 구술이 아닌 그녀를 만나본 무라카미 하루키의 경험을 서술하는 형식으로 쓰였다.[25] 사고가 발생했던 3월 20일과는 10일 차이였다.[26] 사건 발생 후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나온 '언더그라운드'에는 가명으로 나왔었다.[27] 도쿄 사린가스 사건 사망자는 물론이고 옴진리교가 벌인 다른 사건의 사망자 이름도 포함되어 있다.[28] 옴진리교는 교단의 건물을 사티안(Satian)이라고 불렀으며, 사티암은 산스크리트어진리라는 뜻의 단어인 사티아(SATYA).[29] 카나리아는 가스에 대한 반응이 인간보다 빠르기 때문에 과거에는 광산에서 유독 가스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카나리아 새장을 같이 가져갔다. 또한 아사하라 쇼코 체포 이후 결성된 옴진리교에서 탈출한 신도들의 모임인 카나리아회(カナリヤの会)의 이름이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참고로 카나리아회(カナリヤの会) 홈페이지 열어서 "設立者" 및 "会長" 즉 '대표'와 "滝本太郎" 부분을 보자. 타키모토 타로(滝本太郎) 변호사가 이 카나리아회 설립자 대표 회장이다. 덤으로 "重要人物" 즉 '주요당사자' 부분에서, "滝本太郎" 옆에 "永岡辰哉" 부분을 보자.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분인데, 이분이 나가오카 히로유키(永岡弘行) 씨의 아들 나가오카 타츠야(永岡辰哉) 씨다. 일본어를 아시는 분은 링크타고 들어가면 아시겠지만 나가오카 타츠야 씨는 옴진리교에 들어갔다가, 바로 사카모토 츠츠미 변호사의 상담과 설득으로 옴진리교를 탈퇴한 후 가정으로 복귀, 자기 아버지 나가오카 히로유키 씨와 함께 옴진리교 탈퇴운동을 전개했다.[30] 1993년 6월 27일과 7월 2일 2차례, 도쿄 고토구 카메이도 지역에 있던 옴진리교 지부가 (정확하게는) 탄저균의 배양에는 성공했지만, 이를 도쿄 고토구 카메이도 지역에 살포하는 과정에서 고압 분무기를 사용하는 바람에 탄저균이 모두 사멸해버리고 악취만 남게 되었다(출처: 일본어 위키백과 카메이도 악취사건 문서1995년 3월 22일 MBC 뉴스데스크).[31]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살포사건, 메구로공증인사무소 사무장 납치 감금 치사 사건, 도쿄도청 소포폭탄사건, VX를 사용한 2건의 살상.[32] 키쿠치 나오코, 타카하시 카츠야, 히라타 마코토.[33] 1990년대, 2000년대 일본에 여행 다녀오신 분이라면 아마 이 지명수배 포스터를 봤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우습게도 이 중 다른 사건에 연관되었던 히라타 마코토(平田信)는 2011년 12월 31일 도피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변호사와 상담 후 '''자수했다'''. 그리고 '''2012년 1월 1일''', 즉 자수한 지 '''하루 만에''' 본인임이 확인되어 최종적으로 체포. 다만 이 자수 과정에 좀 경시청의 병크가 돋보였다. 옴진리교 문서 참고. 참고로 히라타 마코토는 이후 징역 9년형을 선고받았다.[34] 집행지는 도쿄도 카츠시카구 도쿄 구치소.[35] 집행지는 오사카부 오사카시 오사카 구치소.[36] 집행지는 히로시마 구치소.[37] 조유 후미히로와 마찬가지로 하야시 이쿠오는 옴진리교의 파괴범죄와 거리를 두어 왔던 자라고 한다. 체포된 후 옴진리교의 모든 것을 다 폭로하고, 피해자들에게도 거듭 반복적으로 사죄하였으며, 경찰 검찰 재판소 공안조사청 중앙정부 지방정부 전체의 옴진리교 강제수사에 적극 협력했다. 그리하여 일본 경찰, 검찰, 재판소가 앞장서서 본래 사형이 구형됐던 것을 종신형으로 감형해준 유일한 사람이다. 현재 치바 현 형무소에서 복역중이며 피해자들을 염불하며 책을 저술하고 있다고 한다. 그 책 인지세를 피해자들에게 기부하고 있다.[38] 히로세 켄이치, 요코야마 마사토, 토요다 토오루 등 3명이 일괄체포된 1995년 5월 16일은, 공교롭게도 교주 마츠모토 치즈오가 체포된 날이기도 하다. 동시에, 옴교주 체포에 반발한 옴진리교 광신도들이 도쿄도청 소포폭탄사건을 저지른 날이기도 하다.[39] 세컨드 임팩트로 인해 도쿄가 멸망하고 세워진 2번째 수도인 제2신동경시마츠모토 사린 사건이 일어난 마츠모토시에 위치해있다는 설정이라는 점에서 꽤나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40] 사실 옴진리교 신자들이 자신의 목숨을 소중히 하지 않고 사린가스 농도를 짙게 했다면, 5천명 이상의 엄청난 피해자가 나와 오히려 9.11이 비교도 안되는 수준이 되었을 것이다.[41] 사건의 직접적인 가해자들이 아니라 주로 前 신도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직접적인 가해자들은 다 감방 갔을 거고 관계자들은 이 정도 사건을 일으킨 가해자가 자기랑 아는 사이였다고 하기 싫어 이야기를 꺼릴 게 분명하니 어쩔 수 없긴 하다.[42] 사카모토 츠츠미 변호사와는 사법연수원 동기이다.[43] 사건이 일어나기 딱 일주일 전이다.[44] 이 2차례 건의서를 제출한 분이 바로 타키모토 타로(滝本太郎) 변호사이다. 3월 6일에는 "치안 상태에는 문제가 없는가"라는 제목으로, 3월 13일에는 "옴진리교가 사린 가스를 살포할 가능성이 있다"라는 제목으로 경찰청장과 검찰총장 앞으로, 그리고 경시청에 제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