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호/선수 경력
1. 아마추어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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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고등학교 1학년 시절인 1989년에는 3연타석 홈런도 맞아본 적이 있었던 모양이다. 봉황대기 16강전에서 당시 휘문고등학교의 4번타자였던 박정혁은 박찬호에게 3연타석 홈런을 때려냈고, 다음 경기 포함하여 4연타수 홈런으로 기록을 세웠다. 기록의 희생양이 된 셈.[1]
고3이었던 1991년에 한미일 청소년 야구대회에 청소년대표로 미국에 간 적이 있었고, 그때부터 MLB에 대한 꿈을 가졌다. 공주고등학교 당시에는 4번타자로 이름을 날렸지만 당시 초특급 유망주였던 조성민, 임선동, 손경수 등 이른바 Top 3에 비해서는 그리 이름을 날리지 못했다. 당시 같은 팀 동기로는 손혁과 홍원기가 있었다. 링크
고향팀 빙그레 이글스와 계약금 5,000만원에 거의 합의했으나[2][3] 어머니의 반대로 인해 한양대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한양대 2학년 시절이었던 1993년 미국 버펄로 유니버시아드 대회에 나가 활약했으며 이 때 애틀란타 브레이브스, 뉴욕 양키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등에서 오퍼가 들어왔다. 먼저 박찬호는 애틀랜타와 접촉을 했고 애틀랜타 측에서 계약금 30만 달러를 제안했다.[4]
그런데 현지 사정에 밝지 않았던 박찬호는 1991년 한미일 청소년 대회 때 숙소를 제공해 준 것으로 인연을 맺은 스티브 김(훗날 박찬호의 에이전트가 됨)을 통해 메이저리그 구단에서 좋은 조건을 제시받았음을 확인했고, 스티브 김이 박찬호에게 메이저리그 구단과 밀당을 할 것을 주문한 끝에 다저스와 계약금 120만 달러 오퍼를 받았다. 이후 다저스의 피터 오말리 구단주, 프랭크 조브 박사[5] 등이 계약 문제로 한국으로 오면서 계약은 급속도로 진행된다.
병역 문제 및 신분 문제라는 암초를 만나 계약이 불투명해진 적은 있다. 지금도 유학비자나 영주비자를 가지지 않고 해외에 장기체류하며 입대를 연기하는 것이 어려운데 당시는 김일성이 살아있던 1993년 겨울이었다. 분단국가 한국에서 병역의무를 필하지 않은 20대 남자는 단기 해외여행에도 보증인을 세우고도 무조건 단수여권만 발급되던 시절이다. 계약이 성사되자 심지어 당시 병무청장이 엄청난 야빠라서 눈감아줬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실제로 박찬호가 사용한 방법은 해외 유학생 신분이었다. 당시 그는 명목상 LA소재 웨스트코스트 대학교 경제학과 학생으로 등록되어 있어 F1 유학비자를 받았기에 해외 유학생 취급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하면 입국은 가능하지만 비자 특성상 취업은 할 수 없었다. [6] 비자 규정을 무시하고 학생비자로 취업하거나 계약 등을 시도할 경우 불법체류로 미국 밖으로 추방당하거나 차후 비자발급이 거부될 수도 있었다. 이때문에 또 한 번 계약 불발 위기를 맞다가, 당시 메이저리그에는 학생비자로 입국한 선수도 취업할 수 있는 제도가 있어[7] 이를 이용해 무사히 신분문제 및 병역 연기 문제를 해결했다. 여담이지만 이후 풀타임 메이저리거로 자리잡고 병역 혜택을 받은 후에도 왠지 영주권은 취득하지 않고 취업비자로만 체류한 걸로 보인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1994년 1월 11일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 계약금 120만 달러를 받고 정식으로 입단하게 된다. 박찬호 이후 2012년까지 거의 50여명에 달하는 한국 유망주들이 메이저리그 구단과 계약했지만 100만불 이상 계약은 겨우 10명 남짓이며, 더구나 20년의 세월의 흐른 것을 감안한다면 엄청난 액수이다. 당시에도 100만 달러 이상은 드래프트 1라운더 계약금 수준이었고, 실제로 1993년 드래프트 전체 1번이었던 알렉스 로드리게스는 계약금 150만 달러를 받았다. 메이저리그 구단과 계약한 유망주 중에서 메이저리그까지 올라간 선수들은 대부분이 100만불 이상 계약금을 받은 선수들이다.
2. MLB 시절
2.1. LA 다저스 1기 시절
다저스 입단 당시 그가 원했던 등번호는 16번이었다. 공주고와 한양대 시절 달았던 등번호가 16번이었기 때문이다. 16번은 박찬호의 공주고 - 한양대 3년선배인 손차훈으로부터 물려받았다.[8]
1993년부터 쓰던 16번이 익숙해 다저스에서도 쓰려 했으나, 당시 다저스의 16번은 당시 투수코치였던 론 페로나스키가 달고 있었다. 대학교도 졸업하지 않고 온 새파란 신인이 선배도 아니고 코칭스태프의 번호를 뺏는 것은 하극상으로 보일까봐서 아마추어 시절의 등번호를 뒤집어 61번을 달게 된다. 다저스에서 61번을 단 선수는 1958년 뛰었던 얼 로빈슨 이후 36년 만이었다. 그리고 그는 은퇴할 때까지 61번을 본인의 분신처럼 등에 달고 활약했다. 박찬호는 등번호 61번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고 방송에서 수차례 언급했다.
그가 당초 원했던 16번은 이듬해 론 페로나스키 코치가 팀을 떠나며 자리가 비었고 이 번호의 주인은 공교롭게도 박찬호와 같은 시대에 다저스에서 활약했던 일본인 투수 노모 히데오에게 돌아갔다.
첫해인 1994년 마이너리그를 거치지 않고 바로 메이저리그로 직행하는데, 이 기록은 당시 기준 17번째 진기록이었다.[9] 데뷔전은 4월 9일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전. 박찬호는 개막 이후 두 번 등판해 4이닝 6실점 6K를 기록했고, 가능성은 있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코칭스태프의 판단에 의해 4월 20일 AA로 내려가게 된다. 이후 AA와 AAA를 거치며 약 2년여간 마이너리그에서 소위 눈물젖을 빵을 먹으며 숱한 고생을 했다. 1994년 9월 40인 로스터 확장으로 MLB에 승격했으나 이해는 파업으로 인해 시즌이 조기 종료되면서 등판하지 못했고, 이후 1995년 9월 40인 로스터 확장에 맞춰 다시 MLB로 승격되었고 2경기를 등판하면서 다음 시즌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1996 시즌 시작 전 스프링캠프에서 쾌투를 선보이며 개막 엔트리에 진입하는데 성공했다. 보직은 중간계투로 출발했으나 4월 7일 컵스 원정에서 선발 라몬 마르티네즈가 타석에서 부상을 당하자 바로 구원 등판하여 구원승을 따냈다. '''이것이 그가 기록한 MLB 첫 승이었다.'''[10] 꿈의 무대에서 첫 승을 거두자 우리나라 언론은 대서특필하며 이를 비중있게 다루었다. 여세를 몰아 4월 12일에는 플로리다 말린스와의 홈경기에서 첫 선발승을 따냈으며, 마르티네스가 돌아오기 전까지 선발 로테이션에서 활약했다. 마르티네스 복귀 후에는 다시 중간계투로 돌아갔으며 가끔 땜방 선발로 활약하기도 했다. 풀타임 메이저리그로서의 첫해는 5승을 수확하였다.
1997 시즌 5선발 자리를 두고 여러 선수들과 경쟁[11] 하였고 결국 5선발 자리를 꿰차는데 성공했다. 박찬호는 시즌 초반부터 파죽지세로 좋은 활약을 보였고 선발경기가 매번 공중파 중계가 되면서, 우리 시간으로 평일 오전 박찬호가 등판한 날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박찬호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8월 11일 컵스전에서는 생애 첫 완투승을 기록했다. 참고로 그 해, 정치인인 김종필은 TV에 나와 박찬호가 내가 다녔던 학교 후배라고 난데없는 자랑을 하기도 했다. 시즌 성적은 '''14승 8패 ERA 3.38(NL 14위) 192이닝 WHIP 1.14(NL 7위).'''
1998 시즌에는 더욱 향상된 모습을 보여주었고 7월에는 6경기 동안 42⅔이닝[12] , 4승 무패, ERA 1.05, 탈삼진 34개를 기록하면서 이달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1998시즌 성적은 '''15승 9패 ERA 3.71 220.2이닝 .''' 시즌 직후 방콕 아시안 게임에 참가해 팀의 우승에 일조하였고 병역 특례를 받게 되었다.
1999 시즌에는 성적이 매우 안 좋았다. 본인 말로는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때문에 그랬다고(...) 4월 13일 애리조나 디백스 원정경기에서 생애 첫 만루홈런을 맞았고, 그 유명한 한만두를 이 해 맞았다. 그해 박찬호는 한만두 포함 4개의 만루홈런을 맞았다.[13] 이는 메이저리그 단일 시즌 최다 공동 타이기록. 게다가 6월 5일 애너하임 에인절스 전에서 상대 투수 팀 벨처[14] 가 박찬호에게 욕설[15] 을 하자 팔꿈치 가격 뒤 이단옆차기라는 기이한 싸움을 보였고 벤치클리어링 후 퇴장 당했다.[16] 참고로 이 벤치클리어링은 역대 최악의 난투극에 심심치않게 뽑히는 장면이기도 하다.[17] 이걸 1박2일에서 왜그랬냐고 이유를 묻자 자신을 욕하는게 아닌 한국을 욕하는 거라고 여겨서 발차기를 돌려차기로 했다고 털어놓았다.
이유는 야구의 암묵적인 룰 문서에도 적혀 있지만, 스파이크화를 신고 있는 야구선수들의 발차기가 금기이기 때문. 발을 머리에라도 잘못 맞으면 그대로 은퇴할 수도 있고, 실제로 자니 쿠에토에게 발길질을 당한 제이슨 라루는 뇌진탕으로 실려갔고, 다시는 선수신분으로는 그라운드로 복귀하지 못했다. 여러모로 다사다난했던 시즌.
이후 2018년 10월 20일 방영된 SBS 빅픽처 패밀리를 통해 추억을 돌이켰는데 영어를 잘 하지 못했으며 당시 중계진이 '태권도 킥한다, 가라테 킥한다'고 언급했다.
이에 박찬호는 "한국 사람들은 좋아했다. 통쾌해 했다. 1승 한 것 보다 좋아하더라"고 회상하며 "그런데 그 후로 엄청난 일이 있었다. 협박을 많이 받았다. 협박한 이들 중에는 미국 갱들도 있었다. 협박 편지도 많이 받았다. '네가 총알도 피할 수 있나 보자'고 하더라"고 털어놔 놀라움을 자아냈다.
또 박찬호는 "그 이후 사람들이 많은 곳이나 어두운 곳은 못 가겠더라. 그 뒤로 슬럼프에 빠졌고 대인기피증도 생겼다. 저 미국인이 날 죽이고 싶어하는 건 아닐까 했다"면서도 "지금도 그 사건이 자랑은 아니지만 메이저리그에서 하이라이트로 톱5에 들어간다"고 너스레를 떨어 웃음을 안겼다.
차인표는 이 사건을 회상하다 "그런데 더 웃긴 건 상대 선수가 킥을 안 맞았다. 박찬호의 킥이 빗 나갔고 발차기를 한 뒤 상대 팀 선수들 아래에 깔렸다"고 폭로해 웃음을 더했다. 김세정은 "영상 봐도 되냐"고 물었고, 박찬호는 "이걸 보는 순간 나를 경계하게 될 거야"라고 응수했다.
박찬호는 "전 이닝에 내가 홈런을 맞아서 경기 분위기가 과열돼 있었다. 일반적으로 살짝 태그해서 1루로 공을 던지면 되는데 내 번트를 잡아서 태그를 하던 상대 투수가 내 명치에 태그를 했다. 너무 아팠다"며 "그래서 나한테 왜 그러냐며 아프다고 했더니 그 선수가 내게 영어로 욕을 하더라"고 설명했다.
또 "태그도 태그지만 너무 화가 나서 때린 거다. 상대투수의 이름은 팀 벨처"라며 "그 친구도 손가락이 부러졌다. 공을 든 상태에서 내 헬멧에 주먹을 휘둘러 손가락이 부러졌다"면서 "그 후로 나는 7경기가 출장정지 됐고 벌금을 물었다. 그 팀이 있는 지역으로 원정 경기를 가서 사과했는데 그 선수가 직접 와서 얘기해줘서 고맙다고 하더라. 이후 그 친구는 한국선수(추신수)가 있는 팀에 투수 코치로 갔다"고 말했다. 기사[18]
그런데 훗날 모 대학강연에서 1999년 부진의 주 원인으로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에 빠졌던게 가장 큰 원인이었다고 밝혔다(...) 이거 접으니까 성적이 다시 올라 막바지 7연승을 했다고. 1999년이었으면 당시 신작이었던 2도 나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인데 이걸 다시 접었다는 것도 어찌보면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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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6월 5일 애너하임 에인절스 전에서의 장면.[19]
2000 시즌에는 그야말로 에이스 모드...라고 하기에는 케빈 브라운이 강하긴 했지만 그래도 빼어난 모습을 보였다. 2000시즌 전경기 등판 하이라이트 영상 2000년 8월 25일 몬트리올 전에서는 생애 첫 홈런을 기록했고[20] , 2000년 9월 30일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전에서는 생애 첫 완봉승을 기록했다. 이날은 홈런도 쳐 냈다.
이 시즌 9이닝당 피안타'''(H/9)가 6.889로 NL 1위'''를 찍었는데 박찬호가 공식 지표에서 1위를 찍은 몇 안되는 기록이다.[21] 비록 5.309의 페드로 마르티네스 때문에 MLB 1위는 못 했지만 그 시즌에 유일한 6개대 기록이었고 랜디 존슨, 케빈 브라운도 7개를 넘었기 때문에 의미는 있다.
'''18승(NL 5위) 10패 ERA 3.27(NL 7위) ERA+ 132 226이닝(NL 9위) 217K(NL 2위) H/9(NL 1위)피안타율 .214(NL 2위) WHIP 1.32 fWAR 3.9 bWAR 4.9'''의 커리어하이 성적.
이듬해인 2001시즌에는 더욱 강력한 모습으로 시즌을 시작했다. 시즌초 방어율 2점대 행진을 달리면서 전반기부터 그해 FA계약금액이 얼마나 될것인가하는 기사가 돌았다. 투수 첫 연평균 2000만달러 계약을 돌파할 것인가하는 가쉽성기사도 나올 정도. 올스타전에도 출전하였다. 그러나 칼 립켄 주니어에게 홈런을 맞았고 성적은 그리 좋지 못하였다. 그러나 올스타전 이후 허리가 문제가 되어 성적은 급락하게 되고 또한 배리 본즈의 시즌 71, 72호 홈런 신기록의 희생양이 되었다.
또한 2001년 5월 5일,시카고 원정에서 0대0이던 7회말 무사 1, 2루상황에서 갑자기 허리통증을 호소하고 마운드에서 내려간 적이 있었다.6회까지 무사사구에 안타는 3개만 맞고 삼진 8개를 기록하며 눈부신 호투를 펼치다가, 갑자기 허리를 부여잡고 마운드를 내려온 후에, 1루와 2루의 주자가 홈을 밟으면서 패전투수가 되는 일이 있었는데 잘 생각해보면 이때가 박찬호 부진의 시초였을 것이다.
2001년 시즌성적 '''15승 11패 ERA 3.50 234이닝(NL 3위) 218K(NL 3위) WHIP 1.17(NL 7위) fWAR 4.3 bWAR 4.2'''을 마친 뒤 FA 자격을 획득했는데, 이 당시 다저스는 이미 몇 년 전 케빈 브라운에게 1억 달러가 넘는 계약을 안겨준 데 이어 바로 직전해에 대런 드라이포트와의 희대의 먹튀 계약을 체결한 뒤라 팀 페이롤이 심각하게 치솟은 상황에서 박찬호를 붙잡을 돈이 없었고, 결국 텍사스 레인저스로 이적하게 된다. 이 당시 박찬호가 부상을 숨기고 있었지만 텍사스는 그것을 몰랐고, 이는 텍사스와 박찬호 둘에게 매우 안 좋은 결과로 이어지게 되었다.
어쨌거나 다저스 시절은 박찬호의 전성기라 함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다저스 팬들에게도 강한 인상으로 남아있던 시절이었다.
2.1.1. 다저스의 1선발이었는가?
이 시절 박찬호는 그야말로 리그에서 선발투수로서 열 손가락 내에 꼽힐만한 성적을 냈다는 주장과 당시 세이버 스탯을 살펴보면 박찬호는 팀 덕에 승만 많이 챙겼을 뿐이지 절대로 리그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든다고 볼 수가 없다는 주장이 공존한다.
일단 박찬호의 전성기는 어느정도 투수로서 완성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2000시즌 후반기~그의 커리어를 날려먹은 허리부상이 오기 전인 2001시즌 전반기이다. 이 기간 메이저리그 커리어 내에서도 가장 빼어난 피칭을 보여줬다.
우선 FIP가 방어율보다 꾸준히 높았던 것은 사실이다. 다만 그 이유는 운빨이라기보단 박찬호의 수비가 워낙 뛰어나서[22] 본인의 힘으로 막은 실점이 꽤 많은데 FIP는 투수 수비도 지워버리기 때문이며 박찬호도 FIP의 예외케이스 중 하나이다.(FIP 문서에도 나와있다.)
또한 몇몇 박찬호팬들은 다저스 시절에는 팀의 1선발인 케빈 브라운은 거액을 주고 데려오자마자 드러눕는 바람에 실질적으로 박찬호가 팀내 최고 에이스였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케빈 브라운은 데려오자마자 드러눕지도 않았고, 오히려 이적 첫 해인 1999년에 252⅓이닝을 던져 평균자책점 3.00을 기록, 팀내 에이스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반면 박찬호는 194⅓이닝을 던져 평균자책점 5.23을 기록했다.
그 다음해인 2000년 역시 케빈 브라운은 230이닝을 던져 평균자책점 2.58을 기록하면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다만 박찬호의 실질적 전성기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2001년 시즌에 케빈 브라운은 부상으로 인해 115⅔이닝을 던져 평균자책점 2.65를 기록하였다. 2001 시즌 케빈 브라운은 '콜라 등 카페인이 많은 음료를 많이 마셔 심장 박동에 이상이 생기는' 묘한 부상을 시작으로, 시즌 내내 부상에 시달렸다. 그 덕택에 2001 시즌은 개막전 선발을 포함, 박찬호가 사실상 1선발이었다. 참고로 브라운이 약을 빤 시기는 부상을 당한 2001시즌 직후부터다. 그러나 정작 약빨을 받기는커녕 더욱 성적이 하락해버리며 좋지 않은 끝을 보이고 말았다.
2.1.2. 총평
1994년부터 2001년까지의 성적은 8시즌 221경기 176선발 1183.2이닝 80승 54패 3.80ERA/107ERA+ 560BB/1098K 1.319WHIP 4.22FIP 17.2bWAR/16.4fWAR이다. 그런데 박찬호는 1994년~1995년에 겨우 4이닝씩만 던졌으니 실질적인 활약 기간은 1996년~2001년의 6년이다.
이 6년의 성적은 217경기 175선발 1175.2이닝 80승 54패 3.77ERA/108ERA+ 553BB/1085K 8.31K/9 1.316WHIP 4.21FIP .225피안타율 17.2bWAR/16.4fWAR이다. 지표들의 동 기간대 순위를 보면[23] 다승 19위, 이닝 19위,[24] ERA 19위, 탈삼진 8위, K/9 10위, FIP 43위, WHIP 32위, 피안타율 4위 fWAR 29위다. 통계상 박찬호는 MLB에서 이닝도 잘 먹고 가장 안타를 안 맞으면서[25] 탈삼진을 잘 잡는 데다가 ERA도 괜찮고 승도 꽤 얻는 좋은 투수였다. 네이버 스포츠 댓글 같은 데서 보이는 각 팀의 1선발이 30명이니 지표가 30위 안이면 리그 정상급이라는 논리로 보면 리그의 평균적인 1선발 급의 활약을 했다는 결론이 나온다.[26] 거기에 마이너 리그를 생략한 메이저 리그 데뷔, 본즈에게 내준 홈런, 이단옆차기, 한만두 등으로 화제성도 있는 선수였다. 또 저 승수에는 명예의 전당 멤버들인 톰 글래빈, 존 스몰츠, 마이크 무시나 같은 선수들에게 호투하여 거둔 승들도 포함돼있다.
2.2. 먹튀가 된 5년 간의 흑역사 - 텍사스 레인저스 &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시절
박찬호는 풀타임 선발이 된 1997년부터 준수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2001년 역시 좋은 성적을 거두었기에 정상적이라면 많은 돈을 받고 계약을 하는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2001년에 FA로 대박 내보겠다고 부상을 안고서 투구를 했고[31] 시즌 후에 그걸 알고 있던 다른 팀들에서는 영입 제안이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관심을 가진 쪽은 시애틀 매리너스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거 모르고 걸린 게 에이스급 투수가 필요했던 텍사스 레인저스. 2001년 말 텍사스 레인저스와 5년 6500만 달러가 보장된 거액에 계약했다.[32] 물론 여기서 텍사스 입장에서 진짜 문제가 될만한 부상이 있었다면 입단 직전 메디컬 테스트에서 빠꾸 먹는다. 즉 텍사스 입장에서는 일단 지르기 시작하면 오기 싫어하는(구장이 타자구장이니) 투수들의 관심을 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 저 당시 텍사스는 에이스 릭 헬링을 포함한 선발진의 몰락으로 투수진을 재건하고자 거액으로 지른다. 그 결과는……
엄청난 기대치와 함께 비싼 돈 주고 영입했더니 텍사스 레인저스로의 이적 전후 찾아온 허리 부상과 대표적인 타자 친화 구장인 알링턴 볼파크 적응 실패로 인해 첫해부터 25경기 145.2이닝 9승 8패 5.75ERA/83ERA+에 그치는 등 하락세를 보였다. 이 시즌 텍사스의 에이스는 박찬호가 아니라 210.2이닝 3.84ERA의 케니 로저스였다.[33]
그나마 이적 첫 해인지라 구장 적응 등을 마치면 좋은 성적을 낼 거라고 기대했으나, 2003년에는 시즌 초부터 잔부상으로 출발이 늦었다가 얼마 못 가 6월 초 부상자 명단에 오른 뒤 시즌 '''7경기 29.2이닝 1승 3패[34] 7.58ERA'''라는 최악의 성적을 찍은 채 그대로 시즌 아웃되었고 2004년 역시 스프링캠프 때만 해도 150km/h대 구속을 던진다는 등 부상이 완치된 보였으나 시즌 시작 직전 다시 허리 부상이 재발, 얼마 못 가 다시 부상자 명단에 올랐고 3개월 이상을 날린 뒤 시즌 막판 잠시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는 등 2003년~2004년 2년을 거의 부상으로 날려버리고 말았다. 덕분에 한만두, 박먹튀라는 욕까지 먹었고 이 당시 쏟아진 한국 언론의 원색적, 비판적인 태도 때문에 박찬호는 언론에 대해서 안 좋은 인식을 가졌다고 한다.[35] 미국 언론에서도 최악의 FA계약을 꼽을 때 모 본, 대런 드라이포트, 마이크 햄튼, 알버트 벨 등과 함께 항상 상위에 꼽고 있는 계약으로서, 그 이후 한동안 투수에게 장기계약을 하지 않는 분위기까지 불었다.[36][37] 텍사스에 있던 3년 반 동안 제대로 뛴 시즌은 2002년과 2005년이었는데 성적은 안 나왔고, 부상으로 누운 시간이 많았으니 커리어도 그 만큼 손해를 보았다. 단, 여기서 스캇 보라스는 박찬호가 허리에 부상이 왔던 것은 박찬호 자신만의 훈련법에서 레인저스 구단에서 하라는 대로 바꿨더니 부상이 왔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스캇 보라스는 이후로 의학 전문가와 트레이너까지 고용해서 따로 훈련을 시킨다고...
2005년 2월 mlb.com이 발표한 ‘2005 팬터지 베이스볼 프리뷰’의 포지션별 랭킹에서 선발투수 187명 중 꼴찌에서 6번째인 182위에 이름을 올린 박찬호는 오렐 허샤이저 코치를 만나면서 부활의 징조를 보였고 6월에 통산 100승을 달성.[38] 항상 박찬호에 대해 없는 말까지 지어내며 안좋은 기사를 쓰던 기자가 있었는데, 이 시기에 부활 피칭을 여러차례 선보이자 박찬호 인터뷰에 한동안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마지못해 나타난 그 기자가 박찬호에게 오늘 피칭은 어땠냐는 평범한 질문을 던지자 박찬호가 웃으며 "당신은 오늘 피칭이 어땠다고 생각하나요?"하고 되물었고 다른 기자들은 빵터졌다. 그 기자는 아무 말도 안하고 그냥 어깨만 으쓱하더니 집에 갔다고.
그리고 7월 31일 플레이오프를 노리던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로 이적하면서, 부담감도 조금 덜어졌는지 조금씩 예전의 모습을 찾기 시작했으며 방어율은 좋지 않았지만[39] 오랜만에 시즌 10승을 기록한다. 이 시즌 8월 메츠와의 경기에서 5.2이닝 2실점으로 페드로 마르티네스를 이겼다.
2006년에는 비교적 건강한 모습으로 시즌을 잘 소화해 나갔다. 하지만 게실로 인한 장출혈, 그리고 이어지는 빈혈로 시즌 후반 수술을 하게 되어 로테이션에서 탈락하는 불운을 겪었다. 하지만 플레이오프 로스터에는 포함되어 생애 첫 플레이오프를 치르고 디비전 시리즈 1차전에 등판에 2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내기도 하였다. 수술을 받고 돌아와 플레이오프에서 던진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당시 트레이드 맞상대는 샌디에이고의 필 네빈이었다. 당시 네빈이 1000만달러, 박찬호가 1400만 달러 정도 수령했는데, 양 팀이 어차피 돈은 나갈테니 필요한 포지션이나 메우자고 바꾼 것이었다. 참고로 네빈은 텍사스 이적 후 1할 8푼대의 타격을 보여주다이후 2006년에 텍사스와 시카고 컵스와 미네소타까지 두 번이나 트레이드 되고 시즌 종료와 함께 은퇴(2년간 다섯 팀을 다닌 비운의 말년이었다). 컵스에서는 2할 7푼을 쳤는데 미네소타로 이적하고 1할 9푼을 친 것이 결정적이었다. 네빈도 나름 아마추어 드래프트 전체 1번 출신으로 큰 기대를 받았던 유망주였다.
정리하자면 박찬호는 아쉽지만 텍사스 시절에는 기대받았던 에이스로서의 모습은 전혀 보여주지 못하였다. 이로 인해 텍사스의 선발진은 몇년간 삐걱거릴 수밖에 없었으며, 케니 로저스, 이스마엘 발데스, 라이언 드리스 같은 B급 선수들[40] 이 프론트 라인을 맡았던 안습한 상태였다 (2016년 현재의 콜 해멀스, 다르빗슈 유 같은 듬직한 이름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샌디에이고 시절, 원인 불명의 장출혈로 인해 고생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 당시 워낙 출혈이 심해서 수혈을 받아야 할 정도가 되었고, 제이크 피비의 아내가 박찬호에게 수혈을 해주었다. 이 사건 뒤에 박찬호가 제이크 피비에게 "피비 집안의 피를 받았으니 이제 우리는 가족이다"라고 피비에게 농담을 건넸다.[41] 또한 팀의 클럽하우스 리더였던 우디 윌리엄스는 이 시절 정신적으로 박찬호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박찬호가 자신의 몸상태가 좋지 않음에도 계속 등판을 자처하자, 박찬호에게 "사랑하는 아내와 태어날 아기를 생각해보라. 오늘 한 경기가 중요한 게 아니라 앞으로 건강하게 살아갈 가정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2.3. 뉴욕 메츠, 휴스턴 애스트로스 시절
2007년에는 뉴욕 메츠와 계약하였으나 장출혈 후유증 등으로 선발 등판한 경기에서 4이닝 7실점으로 아주 나쁜 모습을 보이며 트리플A로 강등, 이후 방출되어 휴스턴 애스트로스와 마이너 계약을 맺지만 이곳에서도 상당히 나쁜 모습을 보여 재활의 전망을 어둡게 했다.[42]
여담으로 뉴욕 메츠의 AAA팀에서 뛰던 시절, 페르난도 타티스와 한솥밥을 먹기도 했다. 또 이때 메츠에 페드로 마르티네스, 톰 글래빈, 카를로스 벨트란, 카를로스 델가도 등이 있었다.
2.4. LA 다저스 2기 시절
하지만 2008년에 올림픽 예선에서 호투하고 LA다저스와 계약한 뒤 상당한 구위 회복을 보였으며 시즌 초반 완전 재수[43] 로 콜업되어 중간계투로 주로 활약하는 한편 선발투수로도 등판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5월 17일 LAA와의 인터리그에서 7년만에 다저스 소속으로 선발등판하여 4이닝 2실점을 기록했는데, 이 경기가 역사에 남는 경기 중 하나가 되었다. 바로 MLB에서 처음이자 현재까진 마지막으로 아시아인 투수들이 한 게임을 전부 다 던진 것.(완투 제외) 이날 다저스는 선발 박찬호 4이닝, 중간 궈홍치 4이닝, 마무리 사이토 다카시 1이닝으로 아시아인 투수만으로 한 게임을 치르는 기록을 세웠다. 이날 승리투수는 궈홍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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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돌아온 구위와 선발의 기회. 그러나...
또 6월 21일에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상대로 등판해, MLB 30구단 전 구단 상대 등판기록을 세웠다. 이 당시 전구단 상대 등판기록은 케빈 브라운, 알 리터, 재비어 바스케즈, 제이미 모이어에 이어 5번째 기록. 2019년 지금은 가입자가 꽤 늘어났지만 이 당시는 레이스와 디백스가 생긴 지 10년 된 신생구단이던 때라 가입자가 많지 않았었다.
다음날인 2008년 6월 22일 드디어 오매불망 그리던 선발 출전에서 35도의 불볕더위 속에서 5이닝 1실점 9삼진의 놀라운 피칭을 보여줬으나 하필 상대팀 밀워키 브루어스 선발이 2007 사이 영 상 수상자인 CC 사바시아. 사바시아는 5회까지 무결점 피칭을 하고 그것도 모자라 이날 박찬호의 유일한 실점인 홈런도 쳐낸다. 그리고 박찬호가 마운드에서 내려가자마자 사바시아는 홈런을 허용하였다. 이래저래 안습이다.
참고로 2008년은 클레이튼 커쇼가 처음 메이저 데뷔를 한 시기인데 5선발 경쟁을 놓고 커쇼가 더 중용되자 어디선가 커쇼를 마구잡이로 욕하는 글을 올려서 박찬호 팬인 척 선동하는 괴담 아닌 괴담이 퍼져서 이게 사실로 오랫동안 알려졌다. 이 괴담의 정확한 출처와 내용은 아무도 모르고, 오직 커쇼가 박찬호의 선발 기회를 빼앗은 역적처럼 대해져 박찬호 팬들과 다저스 팬들 사이에서 심한 다툼이 벌어졌다는 카더라만 무성했다. 언론에서도 대놓고 박찬호와 커쇼를 갈등 관계로 부추겼고 둘의 팬덤끼리 네이버 스포츠 댓글이나 엠팍에서 싸우는 장면은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다만 네이버 댓글과 엠팍이 개편되면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을 뿐이다.
전반적으로 선발보다는 중간 계투로 훨씬 많이 출전하여[44] 4승 4패, 방어율 3.40, 95.1이닝의 성적을 거두었다. 박찬호 본인과 팬들 모두 선발자리를 꿰차지 못한 점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표했지만, 전년도였던 2007년 사실상 전(全) 시즌을 마이너에서 보내는 굴욕을 맛보면서 메이저리그로의 복귀가 가능할 지 여부에 대해서조차 부정적인 시각이 많았던 점을 고려하자면 훌륭한 복귀. 이미 커쇼가 5선발로 좋은 기량을 보여주고 있었고, 당시 마무리였던 사이토 다카시의 갑작스런 팔꿈치 통증으로 인한 이탈로 불펜에 구멍이 나 있었던 상황으로 선발보다는 불펜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시즌초 박찬호는 롱릴리버나 땜빵선발로 주로 기용되었으나, 사이토의 이탈 이후 1이닝 불펜으로 완전히 돌아서게 되었다.
팀 성적도 준수해서, 다저스는 이 해 내셔널리그 서부지구를 4년만에 재탈환하고 내셔널리그 챔피언십 시리즈까지 진출한다. 다만 챔피언십 시리즈에서는 그 해 월드 시리즈 챔피언 필리스에게 1승 4패로 밀리면서 탈락.
2.5. 필라델피아 필리스 시절
2009년엔 다저스를 떠나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최소 250만, 최고 500만 달러라는 불황치고는 짭짤한 메이저 계약을 해냈다. 조건은 5선발 후보로 경쟁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 시즌 초에는 5선발로 선발출장[45] 했지만 1승만 거두고 중간계투 요원으로 돌아섰다. 선발투수 성적이 좋지 않았음에도 박찬호를 계속 믿고 내보냈던 당시 필리스 감독 찰리 매뉴얼은 한국 팬들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46] 중간계투로 전환한 뒤에는 구원승과 여러차례 홀드를 기록하며 선발로 나섰을 때보다 구위가 상승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박찬호의 선발 부진의 원인에 대해 일각에선 부상설을 제기하였지만 워낙 예민한 성격의 박찬호가 주변의 과도한 기대에 대한 부담감과 선발투수로 확실히 부활하겠다는 일념이 너무 지나쳐서 도리어 부진했던 이 아니냐는 시각이 제일 근접한 설명인 것 같다. 실제로 선발에서 탈락하고 릴리프로 전환하면서 상당히 좋은 피칭을 보여주고 있으며, 본인도 부담감이 적어 좋은 피칭이 나오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여담으로 불펜으로 돌아선 덕분에 MLB 네트워크에서 방송했던 'The Pen'(필라델피아 불펜 선수들의 일상을 다룬 프로그램이다)에 2회부터 자주 출연하기도 했다. 여기에서 박찬호는 불펜 동료들과 있을때 특유의 말투로 한두마디 툭툭 던지곤 하는 재미난 감초 역할.
'불펜 에이스'라는 칭호를 들으며 롱 릴리버로서 무피홈런, 삼진/볼넷 비율 10 이상 등의 황금 스탯을 자랑했으나 안타깝게도 9월 16일 경기에서 병살타로 이닝을 마감하던 공을 뿌리다 다시금 오른쪽 햄스트링 부상이 도졌다. 1994년에 MLB에 진출하여 PS에 던진 경험이라고는 2006년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서 던진 패전처리용 2이닝 뿐. 세상을 향해 법규를 날린 남자가 가진 두 개의 우승반지를 보면 이래저래 부러워 할 수밖에 없을 듯. 부상을 이겨내고 PS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길 기대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그리고 필리스의 내셔널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기록상으로는 1패에 평균자책점 8점대를 찍어 매우 좋지 못하지만, 결정적 위기 상황을 잘 모면했다.
특히 LA 다저스 클린업 트리오를 삼자범퇴시켜 게임을 승리로 이끈 NLCS 1차전은 그 중 백미. LA 원정에서는 다저스 팬들에게 야유를 받은 것 때문에 국내 박찬호 팬덤이 들고 일어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지만, 원래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는 법이다. 선수보다 응원하는 팀이 무조건 우선인 법이다. 워낙 팀이 많고 이동이 잦아서 자기 팀 선수였는지도 모르는 선수에게 일일이 격려를 보내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며, 이따금씩 기립박수를 보내주는 것은 팀에 큰 공헌을 했거나 위대한 업적을 세웠던 선수에게나 해줄 수 있는 것이다. 그나마도 위대한 선수라 해도 라이벌 팀에 가서 자기 팀을 상대할 때는 야유를 당하기가 부지기수. 다저스와 필리스가 신 라이벌리로 떠오르던 상황에 그렇게 필리스로 가서 다저스를 상대하는 전 다저스 투수에게 좋은 반응이 있었겠는가. 게다가 1년 전만 해도 다저스 소속으로 NLCS 필리스전에서 등판하던 왕년의 다저스 에이스급 투수가 필리스로 날라버린채 자기 팀을 상대하러 오니 팬들은 불쾌할 수밖에 없으니 그러려니 하자. 그래도 야유라도 듣는 건 그만큼 박찬호가 다저스에서 존재감이 있긴 있었다는 소리다. 듣보잡은 진짜 있었는지도 몰라서 야지고 뭐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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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의 명장면 : NL 우승이 확정된 뒤 관중석에 올라가 샴페인을 터뜨렸다!
그렇게 악의 제국과의 월드시리즈 맞대결을 펼쳐 신종플루에 걸린 상태에서 4게임에 등판해 3⅓이닝 동안 2피안타 무실점으로 틀어막았지만 일본에서 온 고질라의 대활약에 막혀 꿈에 그리던 우승반지를 얻지는 못했다. 그래도 예년과 다른 모습을 보이던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불펜에서 스캇 에어와 함께 그나마 체면치레를 해준 단둘뿐인 선수가 되면서 길었던 2009년 시즌을 마무리했다.
2.6. 뉴욕 양키스 시절
2010년 계약발표 당일까지 언론에서는 마치 시카고 컵스와 계약할 것처럼 이야기가 흘러나왔는데, 모든 사람들과 기자들의 예상을 뒤엎고 뉴욕 양키스와 계약했다! 월드시리즈 우승반지 득템을 위한 선택으로 추정된다. 계약조건은 1년에 기본 120만달러 + 보너스 30만달러로 선발이 아닌 불펜투수로 뛰게 되었다. 민훈기 기자의 저서 메이저리그 124승의 신화 박찬호에 따르면 당시 시카고 컵스가 300만달러에 5선발 자리를 약속하면서, 뉴욕 양키스는 컵스의 오퍼에 맞춰 줄 수 없어 사실상 박찬호를 포기한 상태였으나 박찬호는 우승반지를 위해 뉴욕 양키스를 골랐다고 한다.
등번호는 이번에도 61번. 외야수 그렉 골슨이 자신의 등번호였던 61번을 포기하고 27번으로 바꾸면서 박찬호는 다시 양키스에서도 자신이 매번 달아오던 61번 번호를 달고 뛸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양키스 입단과 동시에, 수염과 장발을 허용하지 않는 양키스 팀 내부 규율에 따라 박찬호의 상징이던 턱수염이 모두 말끔하게 정리되었다.
카메라 뒤에서 미친듯이 폭소하는 건 데이비드 로버트슨과 조바 체임벌린.[47] 선수들이 저렇게까지 웃는 건 단어 선택을 실수했기 때문이다. 한국어도 그렇지만 이런 말은 '복통'이라고 돌려서 말할 수도 있는데, 아예 직설적으로 설사, 설사 연호를 해대니 웃을 수밖에(...)
2010년 4월 4일 펜웨이 파크에서 열린 레드삭스 원정에서 더스틴 페드로이아에게 좌월 2점 홈런을 맞고 뒤이어 케빈 유킬리스에게 그린 몬스터를 맞추는 2루타를 허용한뒤 강판당했다. 설상가상으로 뒤이어 올라온 다마소 마떼와 호르헤 포사다 배터리는 2연속 폭투를 범하며 유킬리스는 득점. 결국 7:9로 양키스는 패배했고 박찬호는 패전의 멍에를 썼다. 가뜩이나 승리투수는 오카지마 히데키.
4월 7일 경기에서는 1:1 스코어에서 7회에 등판하여 3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고, 연장 10회초 양키즈가 커티스 그랜더슨의 솔로홈런 등 2점을 추가, 10회 말 마리아노 리베라의 세이브에 힘입어 통산 121번째 승리를 기록하였다.
4월 15일 에인절스전에서 몸을 푸는 도중 오른쪽 햄스트링에 통증을 느꼈고, 바로 15일 DL행. 박찬호는 개인 홈페이지에서 갑작스럽게 부상을 당한 이유에 대해서는 "늦게 계약해 약간은 정신없이 새로운 팀에 적응하고 시즌 준비 또한 서둘러 하다 보니 좀 바쁘게 달린 것 같다"고 설명했다. 복귀를 위해 25일에 양키스의 스프링캠프가 있는 플로리다에서 재활에 매진하였으나 여전히 오른쪽 햄스트링 뒤틀림이 낫지를 않아 재활을 중단하였다.
2.7. 피츠버그 파이리츠 시절
결국 복귀 후에도 높은 피장타율을 보이며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덕분에 코칭스태프의 눈밖에 나 트레이드설이 흘러나왔고, 케리 우드가 트레이드로 양키스에 온 7월 31일자로 웨이버 공시를 거쳐 지명할당되면서 4일 뒤, 피츠버그 파이리츠가 클레임을 걸어 피츠버그로 이적, 빅리그 생활을 이어가게 되었다. 웨이버 공시기간이 지나 FA로 풀릴 경우 영입을 원하는 탬파베이 레이스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뺏길 것을 염려한 해적네가 대담(?)하게 나서 데려간듯 싶다. 하위 팀이기는 하지만 팀의 중심을 잡아줄 베테랑 투수로서 데려갔으니 어쩌면 양키스에 있을 때보다는 나을지도 모르겠다. 우승반지는 좀 더 참아야 할 듯.
어쨌든 온갖 고난 끝에 9월 12일 드디어 123승 97패의 아시아 최다승 타이기록을 이루었다! 그리고 10월 1일 플로리다 말린스와 원정 경기에 3-1로 앞서던 5회말 구원투수로 마운드에 올라 3이닝 무실점 무안타 6K 호투로 시즌 4승째를 거두면서 124승 97패 아시안 최다승 기록을 경신하였다! #[48]
최다승을 경신한 후 한화 이글스로의 복귀를 원한다는 발언을 했는데, 한화팬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의 의견은 "한국에서 마무리 잘하자."와 "그냥 미국에서 깔끔하게 은퇴하자."로 팽팽히 맞섰다. 다만 공통적인 의견은 "국내에 와서 부진한 모습을 보이고 원자단위로 까이는 건 원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2010년 시즌을 마치고 향후 진로를 놓고 가족이 허락한다면 국내에서도 뛸 수 있다는 의사를 피력하는 등 여러 의견이 오갔지만 결국 메이저리그 4개 구단에서 박찬호와의 계약에 흥미를 보인 상황이고, 박찬호 본인 역시 한 번 더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강했던 까닭에 기자회견을 열어 2011년에도 메이저리그에서 뛰겠다는 사실을 밝혔다.
3. NPB 시절
하지만 2010년 12월 20일 스포츠조선 단독보도로, 일본 프로야구 오릭스 버팔로즈로 갈 것이라는 기사가 났다. 계약기간은 1년이고 등번호는 그대로 61번. # 그리고, 그토록 염원하던 월드시리즈 우승반지는 결국 얻어보지 못하게 되었다.
메이저리그 생활은 이미 청산한 지 오래라고 한다. 근데 좀 요상한 게 본래는 오릭스에 입단하는게 아니라 고향팀인 한화로 오고 싶었다고. 하지만 오는 데 여러가지 병신력 넘치는 규정이 산재해 있는 바람에 이도저도 못하다가 일단 처가가 있는 일본으로 가닥을 잡았다.
3.1. 오릭스 버팔로즈 시절
오릭스 입단이후 첫 공개훈련.
2011년 3월 6일 주니치와의 시범 경기를 가졌는데 결과는 4이닝 5실점. 이에 네티즌들에게 쫌 까였다. 하지만 이와는 상관 없이 박찬호 자신은 이번 성적에 일단은 나름대로 만족한 모양이다. 일단은 계획대로 80구를 던져서 그중 51개는 스트라익을 만들었고, 탈삼진 5개에 사사구 2개가 4이닝동안 5실점하고 교체 될때까지 낸 성적인데 일단 박찬호 자신은 뭔가 자신감을 얻은 듯한 뉘앙스를 주었다. 게다가 시범경기때 한번 푸닥거리한번 하고 본 시즌 들어가서 잘나가는 선수들도 있으니...
그렇게 시범경기 선발등판에서 죽을 쑤던 것도 몇번이였을까…. 3월 21일 쿄세라돔에서 열린 야쿠르트와의 경기에서 등판, 53개의 공을 던지고 볼넷을 한개도 내주지 않고 딱 3피안타만 허용하며 총 4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그의 위기 관리능력과 구위가 상승한 것을 본 팬들은 "이제야 몸풀렸구나!" 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도호쿠 대지진으로 일본 사회가 흉흉한 가운데, 3월 15일자로 피해지역 지원금 모금에 '''1천만엔'''을 기부했다고 발표 하였다. 배용준에 이어 기부발표에 대해, 일본 내 야구팬들은 크게 감사하다는 반응. 대인배로 추앙받았다.
4월 2일 있었던 프로야구12개팀 자선경기에 선발로 출전, 상대는 지바 롯데 마린스로 해당 팀에서 활약하는 김태균과의 투타대결이 화재를 모았다. 하지만 보크를 6개나 범하면서 페이스가 무너져서 인지 6이닝에 포풍실점...일단 투구와 볼끝은 좋았다지만 10년 넘게 미국에서 야구생활을 하다가 규정이 더 세밀한 일본야구의 보크 규정에 발이 많이 묶인 듯 하다.
결국 여러가지 불안요소가 노출되면서 아쉽게도 개막전 선발투수 자리는 기사누키 히로시에게 돌아갔다.
4월 15일,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즈전에 정규시즌 첫 선발 등판했다. 마쓰이 카즈오에게 선두타자 홈런을 허용하면서 불안하게 출발했으나, 오릭스 수비진의 도움과 베테랑다운 위기관리능력을 십분 활용하며 6⅔이닝 3실점으로 역투했다. 7이닝 가까이 던지면서 투구수가 고작 83개였을 정도로 투구수 관리도 적절했다. 하지만 라쿠텐의 에이스인 다나카 마사히로의 구위에 오릭스 타선이 완전히 발리면서 패전투수가 된다. 이 날 경기에서도 보크를 하나 범했지만, 본인이 수긍했다고 한다.
4월 22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전에서는 7이닝동안 3피안타 4볼넷 6삼진 무실점으로 호투하여 일본에의 첫 승을 거두었다. 거기에 이날은 부진하던 이승엽이 몸을 던져 안타와 점수를 뽑아내어 팬들을 열광시켰다.
4월 29일, 이번에도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즈의 다나카 마사히로와 선발 맞대결을 펼쳤다. 2회에만 5안타를 맞으며 3실점했지만, 그외에는 특별한 위기없이 8회까지 완투. 그러나 이번에도 오릭스의 타선이 9회까지 완투한 다나카의 구위에 발리면서 1득점에 그치는 바람에 완투패를 기록하게 되었다. 그나마 1득점도 병살타구가 실책으로 타자가 살아서 얻은거다. 이 날의 기록은 8이닝 110투구수 9피안타 3실점 0볼넷 4탈삼진.
어린이날인 5월 5일에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전에 선발 등판하지만 잦은 실투를 범하며 5이닝 7피안타 5실점으로 부진, 패전투수가 된다. 이날도 오릭스 타선은 당연히 무득점으로 침묵.
5월 11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의 경기에서 6이닝 4실점으로 또 패전투수가 되었다. 잘 던진 편이었지만 6회에 맞은 홈런이 뼈아팠다. 이 날 팀타선은 간만에 터졌으나 터졌다고 하기도 애매한게 3득점이니….
근데 이걸 이유로 감독이 박찬호를 2군으로 내려보냈다. 2군 내려가기 전까지 평균자책점은 4점대로 어떻게 보면 평타는 친 성적으로 보일 지도 모르나 2011년 퍼시픽리그는 극도의 투고타저를 겪었다. 박찬호의 경우 2군 내려가기 전 퍼시픽리그 선발 중 평균자책점이 뒤에서 2등. 며칠 전 이승엽의 2군행까지 엮여서 감독이 한국까 아니냐는 소리까지 나오기도.
그리고 5월 22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을 앞두고 이승엽과 함께 1군에 복귀, 요미우리전에 선발 등판한다. 다양한 변화구를 바탕으로 한 노련한 경기 운영으로 6이닝 3피안타 무실점으로 호투했다. 7회초 공격에서 대타로 교체되었고, 그 회에서 오릭스가 한 점을 뽑아내면서 박찬호는 승리투수 요건을 갖춘다. 하지만 9회말 오릭스의 마무리 기시다 마모루가 야노 켄지에게 동점 적시타를 허용하면서 박찬호의 승리는 물거품이 된다. 일단 잘 던졌다는 것에 위안을 삼자.
그러나 일본리그가 희대의 투고타저 리그가 된 시점에서 4점대의 ERA는 용병의 성적이라 하기에는 초라한 것이 사실이며, 게다가 2군에서는 그것보다도 성적이 나쁘다. 사실상 일본 리그 시절은 거의 흑역사라 봐도 무방하다. 처음에는 국내 복귀에 회의적이었던 일부 팬들 - 정확히 말하면 구위와 제구가 좋은 박찬호가 한화에 오는 것을 꺼리던 팬들 - 도 이제는 "까짓거 뭐..."라는 마인드로 생각을 바꿀 정도.
2011시즌이 끝나고 결국 오릭스에서 박찬호 퇴단을 공식 기사화했다. 한국에도 오지 못하고 자신의 부진도 마이너스 요인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너무나 아쉬운 시즌.
4. KBO 리그 시절
2012년, 연고팀 한화 이글스에서 뛰었던 시즌.
5. 은퇴 선언
2012 시즌 종료 이후, 현역 연장과 선수 은퇴의 기로에서 고민하던 박찬호는 결국 11월 29일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수많은 이력을 남겼던 대선수의 은퇴 선언의 아쉬움도 있었지만, 박찬호를 포함하여 전력구상을 세웠던 김응용 감독의 한화 이글스의 입장에서도 타격이 큰 결정이었다.[49]
2013 시즌 중반쯤 되자 야구팬들이 우스갯소리로 박찬호의 은퇴를 신의 한수라 평하기도 한다. 한화의 투수진이 외국인 선발 두명을 제외하고 자리를 잡지 못하고 김응용 감독의 불펜 투수 기용도 잘하는 투수를 무리하게 등판시키는 일이 잦은 만큼 만약 박찬호가 은퇴하지 않았다면 말년에 엄청나게 고생하게 됐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50]
사실 이 둘은 직접적으로 만난 적은 김응용이 한화에 오기 전까지 없었지만 깊은 악연이 있었다. 박찬호가 텍사스로 이적한 후 부상 후유증과 이적 부담감이 겹치며 부진을 겪고 있을 때 김응용은 느닷없이 박찬호에게 '야구에 집중 안 하고 딴짓하느라 그런 거다. 야구인들은 다 알고 있다.'라는 근거없는 비난을 하였다.[51] 이미 박찬호를 먹튀라고 하며 국민영웅에서 국민역적으로 온갖 매도를 하던 언론은 구체적 증거도 없이 김응용의 말을 사실인 것처럼 다뤘다. 박찬호는 시 구절을 인 용하여 김응용의 증거 없는 막말에 대해 섭섭함을 표현했다.
박찬호가 한국에 돌아온 뒤 국내팬들에 대한 팬서비스에 가까운 선발 등판을 한 2012년 시즌이 끝나고, 잘 던지던 못 던지던 진심으로 응원해주며 좀 더 던져주기를 원하는 한화팬들의 성원에 마음이 흔들려 지인들과 상담을 하며 고민하고 있을 때 김응용은 대뜸 박찬호를 마무리로 보직 변경한다고 발언하였다. 야구선수의 보직 변경, 특히 투수의 보직 변경이라는 건 투수 개인은 물론 팀 전체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기 때문에 형식적으로라도 보직 변경을 권유받거나 자처한 투수는 감독이라든가 코칭스태프와 의논을 진지하게 나눠야한다. 그런데 김응용은 박찬호와 한마디 의논도 없이 보직 변경을 하겠다고 선언. 이러한 김응용의 박찬호의 의사를 무시한 태도는 고민하던 박찬호에게 은퇴라는 결과를 만들어줬다.
덕분에 박찬호는 현역 시기 김응용과 악연으로 시작해 악연으로 끝났다.[52]
2014년 한국프로야구 올스타전에서 역대 최초로 은퇴식을 가진 선수로 이름을 남겼다. 원래 2013시즌에 한화 이글스에서 은퇴식을 준비했으나 일정이 맞지 않아 결국 무산 되었고 2014시즌 들어서 선수협이 KBO에 박찬호 은퇴식을 건의하면서 이러한 의견이 급물살을 탔다. 올스타전에서 은퇴식을 하는 것에서 박찬호가 야구계에서 얼만큼 상징성을 가진 인물인지 알 수 있다.[53] .여담으로 이때 박찬호가 한화 올드 유니폼을 입고 등장해 많은 한화팬들이 감동했었다. 이하 그의 은퇴사 전문.
6. 국가대표 경력
국가대표 야구팀의 영원한 리더이자 에이스로써 MLB에서 뛰는 후배 투수 류현진과 함께 말하기도 입아픈 '''역대 최고의 국가대표 투수.''' 원투펀치 에이스인 게 기록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국대 최다승 6승 에이스 선발 류현진과 유일한 0점대 방어율왕 에이스 선발 박찬호로 정리가 가능하다. 공교롭게도 이 부분도 마찬가지로 2000년대 대한민국 최고의 스포츠 스타 중 한 명이자 후배 축구선수인 박지성과도 유사한 특징이다. 박지성도 2000년대 초~2010년까지의 대표팀의 중심이자 국가대표 역대급 크랙으로 평가받는 선수인데, 박찬호도 비슷하게 출전하는 국제대회마다 에이스로 평가받았고 실제 활약상도 정말 에이스에 걸맞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국제대회에 굉장히 강했다. 심지어는 공의 위력이 텍사스 시절 이후 가장 약화되었다는 06년에도 다른 나라 타자들이 손 한번 못댄 정도. 특히 06 WBC때 코치나 해설가 할거 없이 박찬호의 체인지업 위력이 완전 떨어져서 공을 던지면 난타 당할거란 예상을 내놓기도 했는데 결과적으로 '''그 체인지업으로 관광 보내버렸다.''' 당시 한국에선 먹튀가 된 박찬호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고 선발이 아닌 계투로 활용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가장 잘 던지는 투수는 계륵 취급받던 박찬호였다.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불참 선언 때 괜히 난리친 것이 아니다.
2007년에도 메츠에서 너무 부진해 은퇴할까 생각하던 와중에도 베이징올림픽 예선을 국대로 뛰었는데 대만타선을 3이닝동안 꽁꽁 묶어둬 승리의 주역이 됐다.
박찬호의 국제대회 성적은 다음과 같다.
- 1998 방콕 아시안 게임/야구
- 예선전 vs. 대만 : 5이닝 1실점 승리
- 예선전 vs. 대만 : 1⅔이닝 0실점
- 결승전 vs. 일본 : 7이닝 1실점 승리
-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 1라운드 vs. 대만 : 3이닝 0실점 세이브
- 1라운드 vs. 일본 : 1이닝 0실점 세이브
- 2라운드 vs. 멕시코 : 1이닝 0실점 세이브
- 2라운드 vs. 일본 : 5이닝 0실점
- 2007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 예선전 vs. 대만 : 3이닝 무실점
- 통산 성적
- 2승 3세이브 26⅔이닝 2실점 2자책점 평균자책점 0.68
본인 또한 국가대표로 뛰면서 좋은 기억들과 특히 첫 메이저리거로서 그동안 한국에서 자신에게 보내주는 성원을 알기에 국가대표에 엄청난 책임감과 긍지를 가지고 있어 09 WBC 개최직전에 있었던 기자회견에서 불참을 발표하며 눈물을 보일정도였다.
또한 06 WBC에서도 실력뿐만이 아니라 3월말의 WBC 4강 특집 방송에서 리더이자 분위기 메이커이며[55][56] 물론이고 조력자이기도 했던 듯하다.[57] 구위가 떨어진 07년에도 대만을 완벽하게 묶어버리는 피칭을 할때 당시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신중하게 피칭을 한다는게 당시 티비나 유튜브 영상에서도 느껴질정도였다.
태극마크를 단 박찬호는 위에 있는 무시무시한 국제대회 기록과 이런 좋은 일화들 덕분에 '''진정한 의미의 국가대표'''로 평가하는 팬들이 많을 정도다. 당시 함께 뛰었던 국가대표 팀 멤버들을 비롯한 모든 대한민국 야구인들의 존경의 대상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며 그들 역시 박찬호를 보며 야구인의 꿈을 키워온 세대이기 때문.
[1] 링크 여담으로 박정혁은 화려한 성적으로 고려대에 진학하고, 당시 고려대는 임수혁, 마해영, 박계원과 같은 강타자가 즐비했음에도 1학년 때 4번타자가 될 정도로 촉망받았었다. 그러나 그는 학교폭력의 희생자가 되어 팔꿈치가 부러지는 중상으로 선수 생활을 일찍 접어야 했다.[2] 당시 5,000만원이면 고졸 선수들에게는 상당히 큰 금액이었다. 박찬호가 메이저 리그에 가서 얼마되지 않았을 때 이루어진 인터뷰에서는, 빙그레가 3,000만원을 제의했는데 이미 몸값이 억대를 호가하던 조성민과 임선동에 비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져서 1,000만원만 더 주길 바랐는데 빙그레에서 그러지 않아서 무산되었다고 밝힌 적이 있다.[3] 이 당시는 연고 지역 내의 고졸 선수들은 별도의 지명 절차 없이 입단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교섭 기간이 11월 1일부터 15일까지로 제한되어 있었고 1990년대 중반에 들어 프로야구와 아마추어 야구의 대립이 심해지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대표적으로 김재현과 이호준) 결국 1996년 과도기성 제도인 고졸우선지명 제도가 생기며 폐지되었으며 이 방법으로 계약한 대표적인 선수는 이승엽이 있다. 참고로 이승엽은 1억원이 살짝 넘는 계약을 맺었다. 계약금 + 연봉 1500원 + 합 1억 2500만원[4] 다만, 브레이브스 측에서는 계약금을 먼저 받는 대신 먼저 병역을 마칠 것을 박찬호에게 요구했다. 만약이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면(...)[5] 토미 존 수술을 최초로 제안하고 집도한 의사. 다저스의 팀닥터로 오랫동안 활동했으며 후에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도 입성한다.[6] 유학 비자로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취업활동을 불허한다. 현지 취업시장에 타격을 주며 불법체류 등으로 악용될 수 있기 때문. 결국 따로 취업비자 또는 영주비자 신청을 해야 하거나, 파트타임 일만 허용하든지, 학업을 마친 자에 한해 일정 기간만 허용하는 경우가 많다.[7] 당시 메이저리그에는 팀당 3명의 비미국인 선수의 취업이 허가되었다는 조항의 혜택도 보았다고 한다. 이종남 기자의 책 발췌 [8] 박찬호가 1학년이던 1992년에 손차훈이 4학년으로 같은 팀에 있던 적이 있었다. 손차훈은 1989~1992년 한양대의 대학야구 최강시절 등번호 16번을 달고 주전 2루수로 뛰던 선수로 1989년 백호기 야구 MVP를 수상하기도 했다. 손차훈은 대학 졸업이후 한화 이글스가 구대성을 지명하는 바람에 태평양 돌핀스의 지명을 받았고, 이후 SK 와이번스가 창단 된 후 은퇴한다.[9] 대런 드라이포트와 함께 메이저리그에 직행했다. 하지만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직행은 일종의 기록 만들기에 불과했다는게 그 당시나 지금이나 일치하는 평. 뉴욕타임스에서는 아예 대놓고 마이너리그 계약이라고 보도했다.[10] 참고로 경기 종료 후 공이 관중석으로 던져지자 노모 히데오가 박찬호의 첫승 기념구라며 관중석까지 쫒아올라가 그 공을 찾아와 박찬호에게 건네주었다고 한다.[11] 5선발 자리는 주로 베테랑과 유망주들이 경쟁하는 자리다. 당시 박찬호는 베테랑 너클볼러였던 톰 캔디오티와 5선발자리 경쟁을 했다.[12]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평균 7이닝 이상이다!'''[13] 참고로 98시즌 박찬호는 20번의 만루위기에서 단 한번도 홈런을 맞지 않았고,마크 맥과이어와 새미소사가 홈런왕 경쟁을 하는동안 그 둘에게 단 한개의 홈런도 허용하지 않았다.[14] 옛 다저스 에이스로, 1988년 월드 시리즈 당시 다저스 '''월드시리즈 1선발'''이었다. 1989년에는 사이영 후보로도 올랐던 선수. 다저스에서 한 활약은 박찬호보다 한 급 높은 선수다. 박찬호 입단 이전인 1992년 LA에서 신시내티로 이적했으며, 이 사건 당시시 벨처는 기량이 쇠퇴해 저니맨이 된 상황이었다.[15] 희생번트 후 뒤에서 껴안은 채 놓지 않자 박찬호가 "아 님 왜 안놓으셈? 좀 놔줘요" 하니까 벨쳐가 "꺼지셈(fxxk off)"이라고 말했다.[16] 저 영상 댓글이 엄청 웃기다. '아시아 인들은 전부 무술의 달인이라는 증거다', 'Jackie ChanHo Park', '박찬호가 가라테를 할줄은 몰랐다.' 등등. 외국인들도 이 영상을보고 적잖이 신기해한듯.[17] 2016년 호세 바티스타 vs. 루그네드 오도어 난투극 직후 ESPN Sports Center Top 10 - 역대 최악의 난투극에 9위로 뽑히기도 했다. 하술될 자니 쿠에토의 발길질, 그밖에 A.J. 피어진스키 vs. 마이클 배럿, 페드로 마르티네스 vs. 카림 가르시아+돈 짐머, 이지 알칸트라의 포수 선빵과 더불어 자주 뽑히는 최악의 난투극 레퍼토리 중 하나이기도 하다. [18] 추신수의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시절 팀 벨처가 투수코치로 활동했었다.[19] 마음의 소리 758화에서 임찬규 물벼락 사건과 함께 깨알같이 패러디되었다.[20] 참고로 이날 미국 국가를 부른 가수가 양파였다 한다.[21] 2001, 2002 두 시즌에 최다 몸 맞는 공을 찍고 2001년 선발 35회로 최다 선발이었지만 이것들은 기록이라 쳐주기도 뭐하다.[22] 1997-2001년의 투수 수비 기여도(def)는 전체 투수중 10위다. 투수 수비만큼은 정말 열 손가락 안에 든다.[23] 비율 스탯은 리그를 불문하고 500이닝 이상인 151명의 투수들 중에서.[24] 박찬호는 1996년에 풀타임이 아니었기 때문에 1997~2001만 보면 1067이닝으로 11위다.[25] 그러나 BB/9이 4.23(135위)이라서 상대적으로 피출루율은 높다.[26] 물론 이런 식의 접근은 1위에 가까워질수록 차이가 커진다는 것과 단일 시즌별로 일어나는 활약을 간과하는 논리이긴 하다. 실제로 이 시기에 뛰던 올타임 1선발급 페드로 마르티네스와의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물론 극소수의 선수들을 빼면 저 자와 차이가 어마어마한 것은 당연하다.[27] 리버풀 FC의 팬이라면 학을 떼는 그 구단주 맞다. 현 구단주인 펜웨이 스포츠 그룹의 존 헨리 이전에 팀을 소유했었다.[28] No.1 starter를 번역한 말인데 이 말은 거의 아는 사람이 없지만 오역이다. 진짜 뜻은 '제1선발'. 팀내 1선발 투수는 곧 팀내 최고의 투수를 의미하기에 아예 틀렸다고 보기엔 애매하지만.[29] 알렉스 로드리게스는 박찬호 입단 당시 "소식을 듣고 너무 기뻐 양복을 입은 채로 수영장으로 점프할 뻔했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30] 여담으로 두 명 모두 스테로이드 복용자인 것이 이채롭다. 참고로 저 둘은 '''02시즌 100홈런을 합작했다.'''[31] 사실 허리 부상은 대학 때부터 가지고 있었다는 설이 있다. 그 외에도 오른팔 팔꿈치 뼛조각 문제도 대학때부터 있었다고 한다.[32] 1년 후 구단에 보너스 600만달러를 요구할 권리를 얻었는데 구단이 이를 거부하면 FA를 선언할 수 있는 선택권이 포함되어 첫 년차의 성적이 좋을 경우 7100만 달러까지 총액이 상승 가능하였다. 그러나 부상으로 나가리...[33] 이때 타선에는 이반 로드리게스, 라파엘 팔메이로, 알렉스 로드리게스, 후안 곤잘레스 등 뛰어난 자들이 많았다.[34] 이 3패 중 1패는 페드로 마르티네스에게 당했다.[35] 민훈기 기자와 사이가 벌어진 것도 이 시기의 일. 당시 언론들의 까대기 때문에 박찬호는 상처를 많이 받았다.[36] 그래서 그랬던 걸까, 2013년 텍사스 레인저스에 입단한 추신수에게 박찬호 관련한 질문이 쏟아졌다.[37]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구단주 피터 안젤로스는 "투수에게 천만 달러 이상을 주는 건 미친 짓"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저 시기의 박찬호의 성적은 이 말에 딱 맞았다.[38] 다만 이 경기는 5이닝 11피안타 6실점으로 개난타당하며 간신히 5이닝을 채우는 와중에 팀 타선의 덕으로 승리를 먹은 좀 쪽팔리는 승리이기도 했다.[39] 샌디에이고에서의 기록만 따지면 10경기 중 9경기 선발 등판해서 45.2이닝동안 방어율 5.91로 그때나 지금이나 펫코 파크가 극단적인 투수친화 구장임을 감안하면 그냥 5선발 자리에서 5이닝 버티기만 했다고 봐도 무방하다.[40] 사실 로저스는 B급이라고 하기에는 억울한 투수이다. 박찬호가 텍사스 소속이던 시기 로저스는 4.9 3.6 4.8의 준수한 war를 기록한 투수였다.[41] 그러나 이후 정작 피비 본인은 이혼을 한다.[42] 2007년 마이너리그에서 거둔 성적은 24경기 등판 6승 14패 ERA 5.97 의 절망적인 성적이었다.[43] 박찬호는 사실 시즌 극초반 콜업할 예정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날 비가 오기로 예보되어 있던 날이라서 다저스의 조 토레 감독은 임시 선발 투수를 투입했다. 하지만 의외로 날씨가 맑자 3회에 예정된 선발 투수로 바꾸었다. 그런데 갑자기 다시 비가 내려서 투수의 어깨가 식는 바람에 또 선발급 투수를 한명 더 투입하였다. 그 바람에 다저스는 급하게 롱 릴리프가 부족해 박찬호를 콜업하게 되었다.[44] 총 54번 등판하였고, 이 중 선발은 5번이었다.[45] 시즌 초 선발로 등판하던 때에 플로리다 말린스 원정경기, 다시말해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홈런 치기 힘든 돌핀 스타디움에서 커리어 최후의 홈런을 치기도 했다. 이후 박찬호에게 홈런을 맞은 크리스 볼스태드는 부진한 커리어를 보내다가 2014년 한국프로야구의 두산 베어스에 입단했고 시즌초반에는 나름 괜찮은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사상 초유의 사태 이후로 멘탈이 붕괴되며 부진하다가 퇴출당했다.[46] 참고로 찰리 매뉴얼은 일본에서 활약하던 시절 장명부에게 홈런을 얻어낸적 있었다. 물론 팀은 졌다.[47] https://ca.sports.yahoo.com/mlb/blog/big_league_stew/post/Chan-Ho-Park-is-amazingly-honest-about-his-diges?urn=mlb,233585[48] 당시 피츠버그 감독 존 러셀이 전폭적으로 밀어줬다. 당시 피츠버그는 포스트시즌은 예전에 물건너가고, 기념할 만한 마일스톤도 전혀 없는 상황이어서 팀 전체가 박찬호의 기록을 맘놓고 지원해 줄 수 있었다. 실제로 기록달성 때 자기일처럼 기뻐하는 팀원들을 볼 수 있다. 선발투수였던 다니엘 맥커친의 경우 4회까지 1실점으로 호투했으나, 5회초에 감독이 맥커친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의 타석에서 대타를 냈다. 박찬호는 다음 날 맥커친에게 감사의 뜻으로 아이패드를 선물했다고 한다.[49] 2012년 시즌 후 NC 다이노스의 특별지명이 있을 때 박찬호를 20인 보호선수에 포함시켰고, 그 때 옮겨간 선수가 송신영이었다. [50] 박찬호/2012년 문서에도 있었지만 김응용 감독은 박찬호를 마무리 투수로 기용할 구상을 하고 있었다.[51] 야구에 집중 안 하고 한 딴짓이라는 건 검열삭제에 대한 언급일 것이다. 허리 부상이니 보나마나 그것 때문이라고 지레짐작한 모양. 김응용이 야구인 운운해버리면 딱히 아니라고 누가 나서기도 애매해진다.[52] 은퇴식때 김응룡 감독이 박찬호의 신문 스크랩을 액자로 내놓으면서 이 같은 평가도 미묘해졌다. 다만, 김응용 본인은 딱히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아 딱히 박찬호에게 감정이 없다고 여겼을 수 있다.[53] 당해 올스타전은 광주에서 이뤄졌는데, 박찬호는 광주 혹은 기아랑 특별한 인연이 전혀 없다. [54] 방콕 아시안게임부터 뛰었다.[55] 광주일고 출신이 아님에도 광주일고 출신 선수들과 사이가 좋음은 물론이고 감독 코치 모두와 웃고 떠드는 성격이어서 김인식 감독이 의지했던듯 하다.[56] 그리고 지금이야 올림픽은 08년 이후 퇴출되었지만 WBC, 프리미어 12 등 많은 메이저 국제대회들이 창설되었지만 박찬호의 현역시절 94-05년에는 이렇다 할 국제대회가 없었다. 사실 아시안게임은 아마추어 대회였다. 특히 미국에서 홀로 야구했던 메이저리거들 서재응과 김선우 등도 이런 대표팀 분위기를 좋아했다. 어린 나이에 해외에 나가 나라를 대표한다는 긍지를 가진다는 책임감이 박찬호를 만든듯 하다. 그렇기 때문에 박찬호에게 06 WBC에 참가하는 의미는 굉장히 남다르게 인식되었을 것이다.[57] 미국과의 시합전에 이승엽에게 멕시코전에서 오늘 니가 친게 직구니까 내일 돈트렐 윌리스가 변화구로 승부할꺼다 라고 했더니 진짜로 이승엽이 변화구를 홈런으로 만들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