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공화국/패망 원인

 

1. 개요
1.1. 남베트남의 민심
2. 역사적 문제
3. 전략적 문제
4. 지리적 문제
4.1. 미군이 해상 포위전을 벌였다면?
5. 간첩 문제
6. 외부 문제
7. 한국과의 비교


1. 개요


남북총선거를 미국과 남베트남이 거부하면서 북베트남에 정통성이 넘어갔다. 여러가지 문제점이 있었지만, '''정권의 정통성이 부족하고, 부정부패가 매우 심했다'''는 게 가장 컸다.
응오딘지엠이 초기처럼 제대로 통치했으면 그래도 나라의 기틀을 잡았겠지만, 엄청난 비리를 저지른데다가, 베트남인들이 대다수 믿는 불교를 탄압한지라 국민의 지지를 제대로 받을 수 없었다. 전면적 마비에 가까운 남베트남 정부 기관과 관료제의 취약함,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남베트남 농촌과 도시에 대한 너무나도 쉬웠던 침투, 그리고 수 많은 농촌과 도시에서 세력권을 넓혀가며 실질적으로 국가 내의 국가를 세울 수 있었던 베트콩의 확장은 바로 이러한 남베트남 정부의 취약함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북베트남은 항불/항일 투쟁을 위해 만든 독립운동 조직인 베트남 독립동맹(베트민)이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를 이기고 식민통치를 종결한 후 그대로 북베트남 정부를 구성했으므로 초대 국가 주석인 호치민을 비롯해 팜반동 총리와 쯔엉친 부총리, 똔득탕 국회의장, 보응우옌잡 국방장관 등 북베트남 정권 수뇌부의 대다수는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활동한 독립유공자였으며, 이는 당연히 북베트남 정부의 정통성 확보에 큰 도움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북베트남은 당장 집권 시작부터 1945년 8월 대봉기 당시 독립 선언과 동시에 고도 하노이의 탕롱궁에서 지금까지 프랑스의 꼭두각시로 있었던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 바오다이로부터 정식 이양식을 받고, 옥새와 왕검(王劍)을 대중 앞에서 넘겨 받은 걸로 시작했다. 다시 말해서 북베트남 정부가 응우옌 왕조의 계승자임을 인정받은 것이다.[1] 당장 토지 몰수/분배 정책, 인구 집계, 행정 구역 재편 등 실질적인 행정 정책을 시행하는 한편, 이념적으로도 대대적인 국사학 재편을 실시했다. 또한 1960년 10월에 개전 준비에 정신 없을때도 북베트남은 새로운 공화국으로서 하노이 수도 건설 950주년 행사를 거대하게 치루며 대중에게 베트남 민족 국가의 후계성을 제대로 과시했다. 이후로도 육상 전쟁은 남베트남 내에서만 벌어졌다. 이는 한반도에서 중공군 물량에 한번 데여본 미군이 중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북베트남에 진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북베트남에서 끝없이 남베트남땔감을 던져대니, 미군은 남베트남에서 불을 끄다 끄다 끄다 지쳐버린 것이다. 물론 북베트남에 항공폭탄은 열심히 날려줬지만 결국 하노이를 점령하고 북베트남 정부를 붕괴시키지 않는 한 전쟁은 끝나지 않을 운명이었다. 이래서는 중국의 서포트를 받는 북베트남이 언젠가는 승리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위의 월맹 정권 치하 베트남의 민족 국가로서의 이데올로기적, 역사학적 재편성 과정은 P.M. Pelley, Postcolonial Vietnam: New Histories of the National Past, (Durham: 2002)에 자세히 저술 되어 있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당시 사이공 정권의 철권 반공 색출, 절멸 작업에 숨어서 모가지 간수 하는데도 바쁜 남베트남 공산당 지하 조직원들에게 유적 답사를 시켰을 만큼 치밀하게 전국에서 고고학적, 역사적 자료를 긁어 모은 뒤 식민 당국 치하 고급 교육을 받아 전적이 구릴 수 밖에 없는 역사학자들 마저도 복권 시켜주며 민족 국가적 역사관을 짜맞춘 뒤 이를 보급했다. 물론 그 과정 중에 근대 민족적 관점에서 월족, 즉 킨족과는 궤도나 정체성이 확연히 다른 참파도 은근슬쩍 자기들 역사로 포장하는 등 학자적 관점에서 보면 어두운 면이 있으나, 이 문맥에서 중요한 건 북베트남 정권은 오히려 중국문화대혁명이나 몽골의 처이발상 정권이 벌인 대숙청과 같이 기존의 문화와 역사를 부르주아 봉건 반동의 잔재라고 앞세우며 멀쩡한 절, 교회, 문화재들을 박살내기 일쑤였던 다른 아시아 나라들의 공산주의자들과 달리 저만큼 치열한 역사적 정통성을 설립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였다.
반면 남베트남은 정부 구성원들이라고는 응오딘지엠 같은 일부 비공산주의파 독립운동가 인사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태반이 구 프랑스 식민 정권 인사들에, 당장 정부 통제력 자체가 엉망이었다. '''응오딘지엠 정권이 붕괴된 이후에는 어느 정치 세력도 정국의 주도권을 확고하게 쥐지못해 쿠데타가 여러번 일어나는 등 최악의 혼란기로 치달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식민지 시대의 인사들을 기용하는 거야 당시로서는 필요악이었다고 하겠지만 북베트남과 같은 학술적, 이념적 수준의 근대 민족 국가로서 재형성 과정은 꿈도 못 꾸는 상황이었다.
국기조차 남베트남은 바로 전의 정권인 베트남국의 깃발을 이어 받았다. 그런데 이 베트남국의 국기인 황저삼선기(黃底三線旗)도 1890년에 이미 나라가 프랑스에게 넘어 가고 왕실이 있는 후에시를 중심으로 한 중부 지방만 안남 보호국이란 이름의 식민지로 전락했던 시점에 프랑스가 대충 꼭두각시로 옹립해 두었던 황제 성태제(Thành Thái, 成泰, 타인타이 1879~1954)가 디자인하고 도입했던 것이기 때문에 베트남 민족의 입장에서는 그리 애착도 없는 깃발이었다. 식민화 이전 쯔엉조의 황제들은 주황색 바탕에 붉은 원이 있는 깃발을 사용했고, 그 이전에 베트남은 다른 전근대 아시아 국가들 처럼 딱히 국기라 할 만한 게 없었다.
한편 남베트남이 종교 정책에서 '''크나큰 만행을 저질러서''' 이것이 대부분의 국민들로 하여금 등을 돌리게 하는 원인이 된 것만큼은 분명하다. 응오딘지엠은 가톨릭을 우대하는 정치를 펼쳤는데 가톨릭은 베트남인에게는 식민 지배자의 종교였고, 당시 베트남인은 90%가 불교도였다.
다만 응오딘지엠가톨릭 우대와 측근 정치는 일단 쿠데타로 좀 수습되었기에, 이것이 멸망의 결정적인 원인이라고는 볼 수 없다. 응우옌반티에우 대통령과 응우옌까오키 부통령 체제가 1967년 9월에 들어서면서 민심은 적어도 종교문제에 있어서는 수그러 들었다.
또한 당시의 북베트남은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공산국가였다. 베트남 독립운동가들에게 가톨릭은 '''제국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북베트남은 가톨릭 계열을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하수인으로 보고 대량 탄압했다. 그러다보니 그 전까지는 정권에 충성스러운 편이었던 수십만 가톨릭 교도들은 월남을 택했고, 이들은 당연하지만 남베트남을 지지하게 되었다.[2] 또 베트남 통일 이후 공산정권은 중공이 그랬던 것처럼 남베트남의 불교계를 강력하게 탄압했다. [3]
당시의 애매한 남베트남 민심을 드러내는 대표적 사례가 하나 있다. 전쟁 직후 테트 공세에서도 베트콩은 주요 도시를 공격하며 '민중 봉기'가 일어나기를 기대했지만 실제 베트콩에 호응하는 민중 봉기는 도시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이는 남베트남에 국민 국가로서의 정체성이 희박했기 때문이고, 남과 북의 문화적, 이념적 차이가 컸기 때문에 대놓고 호응하는 사례는 적었다. 쉽게 말해 남베트남 정부건, 북베트남 정부건, 남베트남 사람들은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남베트남의 당시 평균 민심은 북베트남과의 통일은 지지하며, 남베트남 국가를 지지하지 않으나, 그렇다고 북베트남을 조국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닌 애매한 정도였다. 일부 한국인들이 '''국가 자체는 인정하되''' 사회 고위층과 정권에 대한 불신, 대한민국 사회의 병폐 때문에 자국을 싫어하는 거라면, 남베트남인들은 '''지도층뿐만 아니라 아예 남베트남이라는 국가 자체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결국 외세의 침략이 있으면 전자의 경우 남의 노예되기는 싫어서라도 국가와 국토는 지키려 하겠지만, 후자의 경우 아예 국가가 망하든 말든 아예 신경도 안 쓸 것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북베트남에 대한 반감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단적으로 1973년 통계에서 집계된 남베트남 인구가 19,370,000명인데, 통일 이후 바다로 도망친 보트피플만 최소 100만 이상이다. '''이들 가운데 바다에서 죽은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결국 '''남베트남이 북베트남에게 허망하게 망한 것은 남베트남 자체가 속빈 강정에 가까웠던 게 원인이다.''' 무엇보다 극도의 부패와 막장행동으로 인해 지지받을 여지를 스스로 상실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1950~80년대 당시 독재치하 한국이 부정부패가 심하다고 하지만 적어도 이쪽은 '''미국이 공산당 막으라고 준 무기를 적국에 돈 받고 팔아넘기는 짓은 하지 않았다.''' 먼나라 이웃나라 3권 독일편에서 부정부패와 관련한 설명을 하는 중에 미국이 공산당 막으라고 준 무기를 적국에게 팔아넘겨 공산당에게 나라를 뺏긴 나라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나라가 남베트남이다. 이렇게 남아 있었어도 국가 막장 테크가 확실했기에, 북베트남이 한 일은 남베트남의 썩은 문을 걷어찬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다못해 미국과 파리 협정을 맺은 후 다시 베트남을 침공했는데 완전히 이기는데 2년은 걸릴 거라는 북베트남의 지도자들의 예상을 깨고 단 55일만에 무너뜨렸으니 말 다했다.

1.1. 남베트남의 민심


응오딘지엠의 타락과 그 이후 쿠데타의 연속으로 혼란만 초래했던 군정, 그리고 그 이후 집권한 응우옌반티우의 별로 나아진 게 없는 통치능력에 남베트남 사람들이 환멸을 느꼈다는 데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그들이 결코 북베트남에 애매한 태도를 보이면서 적대를 하지 않았다는 데에는 과장이 심하고, 반론의 여지가 만만치 않다.
미군이 개입한 이후 베트남 전쟁에서 가장 많이 베트콩 및 북베트남군과 교전한 것은 미군도, 남베트남 육군도 아닌 바로 수십만에 달하는 남베트남 민병대원들이었다.# 이들의 대다수는 징집병이 아니라 자원해서 입대한 모병이었는데, 이들 중 지방군(Regional force)들은 각 성의 통제를 받으며 고향 성을 지키는 풀타임 복무 병력이었고, 시민군(Popular force)은 고향 마을에서 농사꾼 등의 직업에 종사하다가 베트콩이 쳐들어오면 총을 들고 맞서 싸우는 파트타임 복무를 하는 병사들이었다.
시골에 사는 민간인들의 가족이나 친척, 이웃으로써 각 성의 소규모 도로나 하천, 각 마을을 방위하는 이들은 남베트남 시골로 베트콩 병력을 침투시켜서 마을을 약탈하는 걸로 보급을 챙기는 전술을 쓰던 베트콩들에게 엄청난 골칫거리였고, 따라서 이들에게 베트콩의 공격이 집중되었고, 따라서 많은 사상자를 냈다.
게다가 미국과 남베트남 정부의 지원 대부분은 남베트남 정규군에게 집중되었기에 이들은 미국 군사지원단이 본격적으로 이들을 육성한 이후에조차 열악한 보급과 훈련을 받았고 중화기도 거의 없는 수준이었으며, 화룡점정으로 봉급마저도 정규군보다 훨씬 적게 받았다.
하지만 이런 열악한 지원과 형편없는 봉급, 그리고 베트콩들의 공격 집중으로 많은 사상자를 내는 위험한 환경이라는 삼중고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본격적으로 민병대 훈련에 나선 1965년 이래로 민병대의 숫자가 급격하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지만, 이들은 전시동원병력이 아니라 모병이다! 즉 저런 형편없는 조건 속에서도, 고작 인구 2천만 정도의 나라, 그것도 주 산업이 노동집약산업인 농업인 나라에서 70만을 몇 년만에 넘길 정도로 병력 충원이 빨리 됐다는 것은, 그만큼 남베트남 민중들이 남베트남 정부를 딱히 좋아하지는 않더라도 북베트남 정권과 베트콩은 더더욱 싫어하며, 따라서 그들의 고향을 베트콩으로부터 지킬 의지로 충만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결과로써, 베트남 민병대는 베트콩과 북베트남에게 인명피해를 가장 많이 입힌 군대가 되었다.
남베트남 민중들은 북베트남과 베트콩에 대항할 의지가 없었던 게 아니다. 오히려 민중들의 항전 의지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정부와 정규군보다 훨씬 높았으나, 무능한 정규군이 지원의 대부분을 쳐먹는 주제에 도움도 되지 않고, 미군 또한 정규전에 치중하는 바람에 이들에 대한 지원이 열악했던 등 여러 악조건이 있었다.

2. 역사적 문제


사실 '''베트남은 한반도와 달리 이념 논쟁 이전에 남북 간의 격차가 심한 편이었다.''' 한반도는 고려 시대 이후 1000년간 중앙집권 단일국가를 유지하면서 한민족이란 의식[4]이 뚜렷했으며, 지역 간의 이질감이나 격차도 거의 없다시피 하였다. 남북 분단은 미소 양국간의 냉전과 이념대립, 독립운동가들의 분열 때문이었다. 분단 이전부터 지역감정이야 존재했지만, 이것이 별개의 국가와 민족으로서 서로 구분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은 절대로 아니었다.[5]
하지만 베트남은 이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온 나라이다. 우선 베트남사에서 남부의 참파는 아예 다른 나라였다. '''베트남의 주류인 킨족과 참파의 주민들이었던 참족은 아예 계통도 문화도 완전히 달랐다.''' 킨족은 중국 남부 계통의 민족으로 중국을 정점으로 하는 유교-한자-동아시아 문화권에 속해 있었던 반면, 참족은 말레이계 민족으로 이슬람교힌두교를 믿으며 인도 문화권에 속해 있었다.
헌데 감정적인 면 이전에 베트남 남부는 이미 근대 이전부터 죄다 주류민족인 킨족에게 점거당한 상태라서 베트남에서 떨어져 나간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고, 그렇다고 참족과는 별개의 역사와 문화가 자리잡은 유서 깊은 지역이라고 보기에도 애매한 변방 지역 정도가 당시 북부의 시선에서 본 남부라고 할 수 있겠다. 다시 말해서 북베트남인들의 시선에서는 남베트남은 '''"저 촌것들이 미국을 등에 업고 따로 노네? 제정신임?"''' 수준이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소수민족 비중이 높은 곳은 북쪽에 몰려 있다는 지적도 있으나 사실 남부 내륙의 떠이응우옌(Tây Nguyên, 西原) 지역은 남베트남과 이후 통일 베트남의 베트남인 이주 정책으로 소수민족이 소수가 된 지역이지 20세기 초중반까지는 소수민족이 다수인 지역이었다. 실제 1930년대만 해도 이 지역 인구의 95%는 소수민족이었다.#
수도의 상징성도 마찬가지여서 도저히 비교가 되지 않았다. 북베트남하노이는 수백년 동안 역대 베트남 왕조의 수도로 자리잡은 역사 도시였다. 베트남 전쟁이 벌어지기도 전에 이미 하노이는 베트남의 수도로 자리잡은지 900년이 넘었다. 반면 남베트남의 사이공은 17세기 말 응우옌 씨가 막 진출한 메콩 강 델타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세운 군사거점에 불과했고 도시가 발전하기 시작한 것도 프랑스가 점령해 인도차이나 식민지 경영의 거점으로 삼은 이후였다.

3. 전략적 문제


남베트남의 경우, 전쟁이 시작되기 직전에 이미 응오딘지엠 일가의 독재와 부패가 전세계적으로 대대적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적어도 전쟁 초기엔) UN에서 남베트남을 대대적으로 지원할 명분이 없다시피 했다. 미군이 아닌 UN군의 이름으로 한국전에 참전한 것은, 대한민국이 UN의 지원을 통해 '최초'로 수립된 국가이기 때문이었다. 현실적으론 미 군정이었지만 한반도는 UN의 신탁통치 후 독립할 것이 예정되어 있었고, 이는 2차대전 이후 "국제연합이 막장된 지역을 정상화시키고 주권국가로 만들어보자" 라는 야심찬 계획의 제1번이었다. 그런 한국을 침공하는 건 UN 설립을 주도한 국가들의 자존심을 확 긁어버리는 국제적 어그로였다. 그 댓가로 북한군은 2020년 현재까지 최초이자 최후로 국가적 전면전에서 UN군과 마주하고 있다. 평화유지군이 아니라 처음부터 작정한 군대였다.
반면 북베트남은 직접적으로 공세에 나서는 것을 피하고 베트콩을 지원하여 사회 혼란을 일으키는데 주력했으며, 북베트남 자체는 공식적으로 미국에 대하여 방어적인 움직임만을 보였다. 베트콩을 '자발적으로 남베트남 정부에 저항하는 집단'으로 포장하여 방패로 삼았던 것이다. 현실의 베트콩은 근본적으로 보면 적국의 지원을 받는 게릴라에 지나지 않았으나, 남베트남 정부의 무능 탓에 60년대 초반까지 베트콩을 제대로 상대할 수단이 마련되지 않았고 이 문제는 미국이 민병대 육성을 적극 지원하고 나서야 어느 정도 해결되었으나 이미 문제가 상당히 심각해진 뒤였다. 더불어 북베트남의 언론플레이도 비교적 잘 먹혀들어서 베트콩의 잔혹성을 축소하고 미국과 남베트남의 문제점만 부각하는 이들까지 서방권 내부에 생겨나면서[6] 미국이 제대로 개입하지 못하는 또 다른 원인이 되었다.
이 부분 역시 남북한과 다른 부분이다. 대한민국 정부UN으로부터 총선거를 통한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라는 정통성을 인정받았고, 한국전쟁북한의 일방적인 남침으로 인한 피해자라는 위치 때문에 UN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을 명분이 충분했다. 게다가 북베트남이 적극적으로 지원한 베트남[7]과는 달리 남한 내에서의 빨치산 부대는 말이 북한군이지 실제로는 여순사건 및 한국전쟁 때의 낙오병, 이승만 정권의 탄압을 피해 도피하던 공산주의자들의 집합체에 불과했으며 북한 정권의 제대로 된 지원조차 받지 못했고 결국 북한 정권에 의해 버림받았다.[8] 그래서 유의미한 세력 구성은 전혀 하지 못한 채 산발적인 게릴라 전투만 행하다가 1950년대에 거의 대부분 소멸했다.

4. 지리적 문제


남베트남은 지리적 관점에서 볼 때도 남한에 비해 훨씬 운이 나빴다.
지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베트남은 나라가 남북으로 길게 생겼으며 그 중에서도 중부 지방은 특히 극단적으로 좁고 길게 생겼다. 때문에 남북베트남의 국경은 매우 좁아서 언뜻 생각하면 방어하기 쉬워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베트남 서쪽의 라오스, 캄보디아가 자국 영토를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9] 북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의 해방구를 통해서 '''호치민 루트를 만들고 베트콩을 지속적으로 키워줄 수 있었다.''' 거기다 호치민 루트가 밀집되어 있던 라오스 남부와 베트남 안남 지방의 경계 일대는 험준한 산지이기 때문에[10] 호치민 루트를 발견 처리하는 것이 매우 힘들었으며 길이가 길며 산지 투성이에 정글로 뒤덮힌 남베트남의 서쪽 국경은 경비가 무척 어려웠고 결과적으로 서쪽 국경이 남베트남을 공격하는 제2, 제3 전선이 되었던 것이다. 해상은 강력한 미 해군으로 철저하게 봉쇄할 수 있었지만 북베트남은 라오스, 캄보디아를 통해 우회하면 되기 때문에 굳이 해상 작전을 펼 필요도 없었다. 물론 밀수선박 등은 꾸준히 총기와 탄약을 실어 날랐다. 몇몇 나포선이 그 증거.
반면 한반도는 동쪽, 서쪽, 남쪽이 모두 바다이기 때문에 북한이 우회하여 공격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고, 해상으로 침투하기에는 북한 해군은 미국은 고사하고 대한민국 해군에게조차 밀리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남한(과 UN군)은 폭이 비교적 좁은 휴전선 만을 주 전선으로 삼을 수 있었다.[11] 오히려 낙동강 전선까지 밀릴 때, 인천에 상륙해 반격을 꾀하거나 역으로 남한 쪽에서 북한의 해안 도서를 점령해[12] 북파공작원의 근거지로 활용하며 본토에 북파공작원을 파견, 게릴라전을 펼칠 정도였으며, 남쪽에서 게릴라 활동을 하던 빨치산은 지원이 거의 끊겨버리는 바람에[13] 군경의 대대적인 토벌에 저항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죄다 말라 죽어버렸다.

4.1. 미군이 해상 포위전을 벌였다면?


사실 미군이 북위 17도선 북쪽으로 대규모 지상전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두고 전쟁을 펼쳤기에 베트남의 지리 조건은 한반도와 달리 북베트남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환경이 되었지만 안 그럴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미국과 남베트남이 북베트남과 공산 진영을 일방적으로 압도하는 능력, 즉 해군력을 한국전에서처럼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던 전제조건이었다면 말이다.
2년 4개월 동안 일방적으로 포위전을 당하면서 지속적인 함포사격으로 도시가 쑥대밭이 되고 교통 중심지로써의 역할이 심각하게 저하되었으며 항구 기능은 아예 마비된 원산과, 몇 차례 공습을 받긴 했어도 도시 자체 기능이 마비된 적은 없는 하이퐁을 비교하면, '''오히려 원산보다 하이퐁이 더 포위전에 취약한 지리적 조건을 가졌다.'''
원산만 내부 섬들 중 원산 포위전 당시 한국군과 UN군이 점령했던 7개의 섬의 지리조건을 살펴보면, 그 중 6개는 관측반이 포격유도를 해 줄 수 있는 관측소 역할을 해 주는 것 외에는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을 만큼 협소했고, 그나마 커서 포위전 사령부를 설치할 수 있던 여도도 고작 비상활주로 하나를 설치할 공간이 나올 정도로 협소했다. 여도의 면적은 고작 6제곱킬로미터 정도로, 흔히 특정 지역이나 시설의 면적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면적의 단위 쯤으로 취급되는 여의도보다 좁다(...). 따라서 포격은 원산만에 주둔한 미 해군 함선들, 특히 구축함들이 주로 담당했고 7개의 섬 자체에는 야포가 배치되지 않았다.
반면 하이퐁 앞바다의 하롱베이에서 가장 큰 섬인 깟바 섬의 경우, 면적부터가 354제곱킬로미터로, 1958년에 중공군이 그토록 점령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던 진먼 섬의 두 배가 넘는다. 게다가 섬 서부의 약간의 저지대를 제외하면 험준한 산지로 이루어진 덕에 섬 자체가 관측소로써의 기능을 하기도 적합하기 때문에,[14] 만약 미군이 한국전쟁 때 제해권을 장악하기 위해 한반도 섬들을 하나하나 점령했듯이 깟바 섬을 점령해놓고 진먼 섬처럼 남베트남군이 주둔할 요새를 건설했다면 해군력이 없다시피했던 북베트남이 여길 탈환하는 건 불가능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 깟바 섬은 하이퐁 코앞에 있어서 155mm급 곡사포만으로도 하이퐁의 항구 기능을 사실상 마비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60년대 말~70년대 초에 화포의 사거리가 늘어나고 있던 탓에[15] 하이퐁 시 영역 전체가 위험 범위 내였을 것이다. 하노이까지의 거리도 고작 110km밖에 안 되는 탓에 잘못하면 미군이나 남베트남군이 하노이를 타격하는 비용까지 크게 줄여줄 수 있을법한[16], 원산만의 섬들처럼 남베트남 영토가 된다면 북베트남 입장에선 엄청나게 위협적인 곳이었다.
하지만 결국 '하이퐁 포위전'이 실제로 시행되는 건 무리였을 가능성도 높은데, 미군이 북베트남 지역에 지상군을 투입한다면 중국이 개입할 것을 시사했기 때문이다. 결국 상륙작전에 필요한 압도적인 화력은 미 해공군이 해 줄 수 있을 지 몰라도, 상륙작전 자체는 남베트남이 알아서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이 상륙작전이 시행되는 게 그나마 가능했을 법한 시기1969년에는 남베트남 해병대 병력이 고작 9300명에 불과했다. 물론 상륙전은 해병대 병력만 가지고 하는 게 아니긴 하지만[17], 상륙작전에 대규모 병력을 동원할 수 있을 정도로 남베트남 육군은 전투력에서 신뢰받을 만한 집단이 아니었다는 것이 함정이다(...).

5. 간첩 문제


남베트남 정권 자체의 부정부패로 국민들의 지지는 사라지고 내부의 갈등은 더욱 심해졌다. 북베트남은 이를 기회로 보고 수많은 간첩들을 침투시켜 사회혼란을 부추겼다.
대통령 비서실장과 법무부 장관, 모범적인 도지사로 평판이 자자했던 녹따오를 위시한 많은 정치인과 관료들이 공산 프락치였음이 드러난 것은 월남 패망 후의 일이다. 캄보디아 국경선 근처 빈룽성 내(內)의 지하 땅굴에 있던 혁명정부 청사에는 월남 정부의 각 부처, 월남군 총사령부에서 진행된 극비 회의 내용이 하루만 지나면 통째로 입수될 정도로 티우 정권의 핵심부에 공산 간첩들이 대대적으로 침투해 있었다.
1967년 9월 3일에 벌어진 월남 대통령 선거에서 티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2위 득표를 한 야당 지도자 쭝딘주(張廷裕)는 선거 유세에서 민족 감정을 자극하며 반미(反美), 반전(反戰)을 선동했다. 변호사 출신인 쭝딘주는 용공(容共)주의자라는 공격을 받자 “나는 용공주의자가 아니라 민족주의자, 평화주의자, 자유민주주의 신봉자이며 진실한 불교도”라고 주장했다.
그는 유세 때마다 “동족상잔의 전쟁에서 시체가 쌓여 산을 이루고 있다. 우리 조상들이 외세(外勢)를 끌어들여 동족들끼리 피를 흘리는 모습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얼마나 슬퍼하겠는가. 월맹과 대화를 통해 얼마든지 평화협상이 가능한데 왜 북폭을 하여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는가.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북폭을 중지시키고, 평화적으로 남북문제를 해결하겠다”라면서 반전(反戰) 여론을 자극했다. 개표 결과 그는 17.3%의 지지를 얻어 2위를 얻었다. 그의 아들은 사회주의 베트남 정부를 위해 외교관으로 복무하다 1978년 공작원 행위가 들통나 추방당했다.
좌익 종교인들은 월남 군인들을 향해 “동족인 월맹군을 향해 총을 쏘지 말고, 미군을 향해 쏘라”고 선동했다. 천주교의 짠후탄 신부, 불교계의 뚝지꽝 승려 등 종교인들은 ‘구국(救國) 평화회복 및 반(反)부패 운동세력’이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이 단체는 산하에 사이공대학 총학생회, 시민단체들이 시민연대를 구성하고 반부패 운동을 벌였다. 이 조직에 공산 프락치들이 대거 침투하여 거대한 반정부 세력으로 변질되었다.
이대용 전 주월공사는 “월남은 월맹에 힘으로 망한 게 아니라 속임수에 망하고, 간첩들에 망하고, 데모에 망하고, 부정부패에 망했다”고 술회했다.# 남베트남에 침투한 간첩들은 '민주주의가 망할 때까지 민주주의를 외쳐라'는 이이제이 전략을 가장 잘 수행했는데, 반정부 시위를 주도하던 판칵투 신부는 외세와 결탁한 티우 정권과 미군을 몰아내자며 우리민족끼리를 강조했다. 당시 남베트남은 막 독립된 혼란기였던 것도 모자라 뿌리부터가 대단히 불안정했고, 설상가상으로 공산주의 물결이 전세계를 휩쓸던 시절이었기에 '간첩'에 버틸 능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게다가 이런 환경을 만들어준게 '''남베트남의 부정부패였고 실제로 간첩에게 돈을 받고 무기나 기밀을 넘기거나 현상금 삐라를 제작하고 뿌려대는데 동참하기 까지 했다.''''[18]

6. 외부 문제


1970년대 미국의 경제난과 뒤이어 터진 워터게이트 사건을 수습하느라 미국은 휴전에 응할 수 밖에 없었고, 워터게이트 사건을 수습해야 하는 탓에 미국은 휴전 후 신경쓸 여력도 없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리처드 닉슨이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제럴드 포드가 부통령이 된 지 얼마 안되어 대통령직에 올라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개입하기 어려웠다.

7. 한국과의 비교


한국의 상황을 남베트남에 비교하는 것은 꽤나 오래된 주장이다. 이는 한반도와 베트남 두 지역 모두 식민제국에 의한 식민통치를 겪었고 독립 이후 남북으로 분단된 상황에서 착안해서 나온 주장으로 극우들은 물론, 좌파들도 자주 언급한다. 일반적인 우익들은 남베트남이 간첩의 공작과 종북의 국론 분열 조장으로 망했다고 하는 반면, 좌파들은 남베트남은 친불파가 장악한 정통성 없는 국가이기 때문에 사실상 미국의 속국이었던 것처럼 친일파가 장악한 한국 역시 정통성이 없다고 주장하며고 부정부패과 방산비리를 언급하며, 남베트남과 비교를 한다. 과거 권위주의 독재정권 시절엔 정부와 언론 등지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날 때마다 "월남 꼴 날지 모른다"고 주구장창 언급했는데, 1980년 5월 <대한뉴스> '안정만이 살길'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2:28 ~ 3:27)
일단 차이점을 몇 가지 말하자면, 대한민국 임시정부대한민국 정부의 정식 수립 이후 바로 해체한 점, 대한제국이 이미 진작에 망해 굳이 계승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점, 그리고 북한이 정통성에서 우월한 입장이 아니었다는 점이 결정적인 차이다. 적어도 대한민국 정부는 총선거를 실시한 한반도 38선 이남 지역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완전히 인정받았다. 김일성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6.25 전쟁을 일으켰지만, 선전포고 없이 기습적으로 남침을 함으로서 스스로 '침략에 대한 방어'라는 확고한 반격 명분을 '''대한민국미국에게 넘겨줬다.''' 그 결과는 UN군의 반격이었으며, 북한을 응징하자는데 서방 각국의 동의는 확고하게 되었다. 반면 베트남 전쟁의 경우, 6.25 전쟁에 비해 자유진영 국가들의 참전 명분이 희박했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게 된 원인을 제공한 통킹만 사건에 경우 미국이 사건을 조작했다는 주장이 논란으로 남아있다. 나중에 미국도 결국 철수 후 현재는 베트남 정권에 자유화 물을 조금씩 먹이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베트남에게 '''한국이 걸어온 길'''을 그대로 따르게 만들고 있다. 동남아의 한국으로 만들고 있는 셈이다. 공산국가지만 필요하면 중국과 전쟁도 불사하는 베트남이라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독립운동을 했고, 수도인 서울 자체도 500년 조선 왕조의 수도란 정통성이 있고[19], 국민의 국가에 대한 공감도 남베트남과 달리 있었다. 독립한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했고, 이 점은 절대적 공감을 받을 수 있었다. 말단 공무원이나 경찰조직 등에서 식민지 시절 인사들을 그대로 고용했다는 약점은 있으나[20] 남베트남과 달리 최소한 국가지도층은 대부분 독립운동가 출신이었다. 이승만 본인도 남들을 욕할 때 종북몰이만큼이나 친일몰이를 자주 한 사람이었다.
또한 대한민국 주민들은 남한 내 좌익세력의 분란으로 이들에 대한 거부감이 높아진 데다가 농지개혁 시행으로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농민들이 '''대한민국 정부에게 충성할 명분'''을 만들었으며 결정적으로 북한이 6.25 전쟁이라는 화려한 자폭을 저지르면서 결정타를 날렸다. 여기에 그렇게 넘어온 북한 인민군이 대한민국 정부보다 국민들에게 더 잘 해줬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토지개혁으로 땅을 나눠준것까지는 모르겠는데[21] 북쪽에서 하던짓을 반복해서 농작물 수확의 27% 밭작물 수확의 25%를 바칠것을 강요했다. 농지개혁법으로 인해서 연 30%를 5년간 납부해야 하니 당장 보면 차라리 전자가 나아보인다. 하지만 후자는 딱 5년만 총합 150%만 바치면 끝 그걸로 내 땅이 되는건데 전자의 경우는 세금 형태이다 보니까 그 짓을 언제까지 할지 모른다. 더군다나 북쪽에서는 더해서 50%가 넘는 세율을 거두었다. 그걸 몰랐건 알건 간에 사람들 눈에 보면 '''30% 5년간 내기 VS 25~27%씩 (그리고 북한 기준으로 보면 이후 50%씩) 영원히 내기''' 인데[22] 그중에서 전자를 택하는게 당연하다.
호치민과 베트민 세력을 북한의 김일성 세력과 비교하기도 하는데, 호치민베트민 세력의 지지 기반과 영향력 역시 김일성 세력의 그것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진행한 항불-항일 투쟁을 수행하면서 베트민은 베트남 전체에 지지 기반을 구축하였고[23]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호치민의 베트민은 확고한 집권 세력으로 인정받았다. 보천보 전투와 같은 소규모 유격전을 과대 선전하고 소련의 지원까지 받아가며 무력으로 한반도 북부를 차지한 김일성과는 그 위치부터가 달랐다.[24] 북베트남의 '베트남 민족 국가'로서의 정통성 확보는 북한의 그것과는 그 노력 및 설득력 면에서 큰 차이가 났다. 북베트남과 달리 북한은 전통에 냉소적인 공산주의에 매몰되어 한반도를 대표하는 국가로서의 역사적 정통성 확보에 무관심했다.
국제적인 합법성 면에서도 북한보다는 대한민국이 훨씬 유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유엔한국위원단이 제안한 남북 총선거를 조선로동당과 소련 군정이 거부하여 어쩔수 없이 선거가 가능한 38선 이남 지역에서 총선거를 하여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설립된 정부이기 때문이다. 한반도처럼 베트남도 일단 분단되었다가 총선거를 통해 통일 정부를 수립하려 했는데, 한반도와 달리 '''베트남은 오히려 남쪽이 총선거를 거부했다.''' 총선거를 하면 호치민과 베트남 공산당이 이길 게 뻔했기 때문이다.[25]
남베트남은 종교 정책에서조차 병크를 저질렀다. 이승만 같은 경우는 친 개신교 정책을 취하긴 했어도 최소한 자기 주변 인사들을 개신교도로만 뽑지는 않았고 친 개신교랍시고 불교, 가톨릭, 토속종교 등을 눈에 띄게 탄압하지도 않았다.[26] 베트남의 경우 가톨릭은 '''식민지배자의 종교'''였지만[27], 한반도에서 개신교를 비롯한 기독교는 일제 지배자들과의 연결고리가 약했다. 오히려 식민지 이전에는 국권수호를 위한 문명개화의 상징이었고 식민지 시기에는 애국계몽과 항일운동의 한 축을 담당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우방국의 종교이자 한국형 기복신앙으로서 세가 계속 늘어났다.
지리적으로도 한반도는 양쪽이 바다라 간첩 세력의 지속적인 보급이 불가능하다. 무장공비들이 침투했는데 세력을 키우지 못하고 전멸했다. 반면 베트남은 라오스캄보디아 국경 지대에 있는 정글들을 통해 지속적인 물자보급을 이룰 수 있었다. 남베트남과 캄보디아, 라오스와의 국경이 제2, 제3의 전선 역할을 했다.
지리 뿐만 아니라 대부분 극우파들이 그러는 것처럼, 현재 한국 대중들의 의식을 남베트남의 그것과 비교하는 것 역시 무리다. 우선 국민들이 가지는 인식과 지식 등에서도 차이가 난다.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에 비해 최소한의 비교우위를 갖춘 현실사회주의 체제였던 반면, 현재의 북한은 남한에 비해 표면상으로는 별다른 비교우위를 갖추지 못한 막장 국가인데다가 제대로 된 현실사회주의 체제도 아니다. 따라서 남베트남 대중들 가운데 아무리 봐도 외부 열강의 간택으로 정권 잡는 몇몇 유력 군부, 정치 가문들이 자기들끼리 대놓고 총칼로 싸우는 판에 자본주의고 뭐고 할 기본적인 정치적 안정과 치안, 보호도 제공하지 못하는 남베트남에 비해서야 일단 동포기도 하고, 현실적으로도 억압적이지만 적어도 제대로된 국가 기강은 확실히 잡힌 북베트남식 현실사회주의 체제가 차라리 더 낫다고 여겨 북베트남을 지지하고 북베트남의 편을 드는 사람들은 많았다.(물론 멀쩡히 돌아가는 상점이나 공장에 폭탄테러를 한 것도 수차례지만) 반면 남한의 대중들 가운데 북한 체제, 북한의 '우리식 사회주의' 체제가 더 낫다고 여겨 북한의 편을 드는 사람은 종북주의자를 제외하면 없다고 봐도 틀리지 않다.
더군다나 일반적으로 한국 국민들의 북한 정권에 대한 인식 자체가 매우 좋지 않다. 북한 '그 자체'에 대한 인식은 언젠가 평화적으로 합쳐질 통일의 대상이고 북한 주민들이 한민족이라는 생각으로 우호적일 수 있으나 독재와 압제를 일삼는 북한 '정권'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는 국민은 주체사상파 계열 NL이나 스탈린주의+마오주의 계열의 PD가 아닌 이상 드물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단체든 뭐든 그 어떤 단체를 가장한 국내 반정부 세력이 북한 정권을 위해 변호와 옹호를 해도 오히려 그들 자신의 정체를 밝히게 될 뿐이고 자신들의 활동 영역을 옭아맬 뿐이다.
남베트남과 비교하면서, 남남갈등과 같은 국론분열을 언급하면서, "남베트남처럼 한국도 국론 분열로 멸망한다!"는 소리도 나오는데 위에서도 설명하였듯이 남베트남은 여러가지 요인들로 패망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는 비판점이 있는데, 내부의 적을 조심하자는 취지는 좋았어도, 아무나 남남갈등과 국론 분열 딱지를 붙여대면, 여론의 반응이 좋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한국을 남베트남에 비교할 때, 방산비리와 부정부패를 걸고 넘어지며 안보팔이를 하는 경우도 있다. 한국의 방산비리 큰 원인은 똥별들이 떼어먹는 문제보다 나라까지 반토막난 상황인데 주변국이 북한빼고 깡패급인 환경과 제한된 시간과 상황에서 꼭 필요한 무기사업, 첨단장비를 개발 혹은 얻기 위해서 강행하거나 그다지 넉넉하지 않은 기간으로 인한 여러가지 원인이 더 크다(...). 북한이 한국을 훨씬 능가하는 썩어빠진 국가임을 망각하고 있으며, 조선인민군/열악한 현실에 나온 것처럼, '''북한군 내부는 대한민국과 비교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비리와 부조리가 가득한 군집단이다.''' 북한 자체가 뇌물로 나라가 돌아간다는 농담이 돌 정도로 부패가 심각하다.
거기다가 현 한국의 부정부패를 남베트남에 비유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남베트남은 관료들이 적에게 무기 팔아 넘길 정도로 썩었었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적어도 북한에게 무기를 팔아줄 정도로 썩진 않았다. 기본적으로 대한민국 정부는 반공주의를 국시로 삼았던 군사독재 정권이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민주화와 남북 대화의 분위기를 마련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북한 정권과 국내의 그 동조세력을 경계하고 있다. 국가의 존립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면 즉시 국가보안법을 동원하여 잡아들인다.
패망의 길을 걸은 남베트남군의 상황은 구태여 따지자면 한국군보다는 북한군에 가깝다. 정규군 57만, 민병대 포함 총 140만에 달하는 대병력이었던 남베트남군은 정규군과 베트콩 포함 약 108만 수준이었던 북베트남을 숫적으로 압도했으며 미군으로부터도 막대한 최신 장비를 인수받았지만, 정작 이들을 제대로 운용할 수 있는 보급이 이루어지지 않아 이러한 숫적 우세는 전혀 살릴 수 없었다. 수적으로도 한국군을 압도했고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최신무기를 제공받은 그 당시의 북한군과 빼닮았다고 할 수 있다. 현재에도 뇌물에 휘둘리고 군 장비를 마구 팔아먹는 모습, 체제 유지에 전전긍긍하며 군 수뇌부를 정치놀음에 개입시키는 남베트남군의 모습은 한국군보다는 북한군에게서 찾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이른바 베트남전의 교훈을 부르짖는 이들은 이런 현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다.
기본적으로 간첩문제에서 한국과 남베트남은 차이점이 많다. 간첩문제의 근본적 원인이 남베트남 수뇌부의 극심한 부정부패와 그로인한 사회적 혼란과 정치적 불안정이 원인임을 감안하면, 간첩문제는 남베트남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기 보단 부가적인 요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부정부패와 쿠데타로 정치적 혼란이 잦았으니, 정치적으로 안정적인 한국과 달리, 남베트남은 부정부패와 빈약한 정치적 근간에 더불어 북베트남에서 남파된 간첩들이 조장하는 사회적 혼란까지 덥쳐 간첩과 이적세력을 청소할 능력이 전무한 상황이였다.
또한 한국의 경우에는 6.25 전쟁이라는 본격적인 전면전쟁이 발발하고 초반에 수도가 함락되는 등 패전의 기미가 농후해지면서 남로당과 정재계 및 군부에서 암약하던 제5열이 대거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었고 이후 국군의 북진과정에서는 일반주민들중 북한의 잠재적 동조세력들이 북으로 대거 피난하거나 숙청되었기 때문에[28] 월남에 비해서는 훨씬 안정된 상황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결론을 내리자면 한국이 경제나 사회 신뢰도나 안보나 여러모로 비교할 수 없을만큼 나아서 남베트남처럼 망할 가능성이 없어졌다.
[1] 베트남이 공산주의 국가임에도 공산정권이 성립되는 과정에서 구 왕가 사람들을 총살해 죽이거나 국적을 박탈하며 국외로 추방했던 구 소련이나 구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동유럽의 공산권 국가들과 이웃 동남아시아 나라인 라오스캄보디아 등과는 달리 구 황족들이 자국내에서도 멀쩡하게 생활하는 등 비교적 좋은 대우를 받는 것은 이런 점과 무관하지 않다.(물론 동유럽의 경우 공산정권이 해체된 이후 망명 중인 구 왕실 일가들에 대한 귀국이 허용되었으며, 캄보디아는 크메르 루주와 그 뒤를 이은 친베트남 정권이 무너지고 나서야 왕정복고가 이뤄졌다.)[2] 그리고 마침 이때는 응오딘지엠이 정상이었던지라 이들을 안정적으로 정착시키는데 성공했다.[3] 베트남은 1992년 헌법을 개정하고서야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게 된다.[4] 역사학자들은 대체로 고려말 40년간에 걸친 대몽항쟁을 거치면서 민족의식이 자리 잡은 것으로 보고 있다. 고려가 통일된 직후에도 삼국 유민 의식이 남아있어서 고려 중기때는 신라나 고구려, 백제 등 삼국 부흥운동이 일어날 정도였다.[5] 일례로 조선시대 지방에서 터진 대규모 반란인 이징옥의 난, 이시애의 난, 홍경래의 난등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중앙정부를 갈아엎거나 중앙정부에게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관철시키려는 정도였지 자신들이 한성 조정에 대항하여 지방 독립운동을 벌이려던 게 아니었다. 특히 이징옥의 난이나 이시애의 난은 조선의 통치체계가 완성되기도 전인 1400년대 초중반인데도 이랬다.[6] 단순히 반전시위하는 민간인들만 그랬던 게 아니라 가렛 포터처럼 소위 학자라는 작자가 자료 조작으로 사실을 왜곡하고 베트콩을 옹호하는 일도 있었다.[7] 베트남 전쟁 후기에는 남베트남에서 자생적으로 활동하던 게릴라들이 남베트남 정부군과 미군에 의해 전멸하면서 베트콩의 구성원 상당수는 북베트남에서 남파시킨 북베트남 출신 정규군과 공산당원으로 대체되면서 게릴라 부대에서 정규군으로 전환되었다. 물론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수뇌부가 전부 순수 북베트남 출신 공산당원인 것은 아니며 그 중에서 베트남이 분단되기 전에 남베트남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하다 북베트남으로 넘어가서 그 곳에서 정치적 입지를 만든 뒤 남베트남으로 재남파한 남베트남 출신 공산당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종전 시점에서 남베트남 출신자들은 4개 사단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물론 이들은 해체되어 북베트남군에 흡수되었다.[8] 남한 내에서 활동했던 조선인민유격대 구성원의 대다수가 남로당 출신이었다.[9]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라오스와 캄보디아 동부 일대는 공산 반군 지배하에 있던 상황이었다. 뿐만 아니라 캄보디아 왕 시아누크는 은근히 그들을 돕기까지 했다.[10] 이것이 베트남의 역대 왕조들이 서쪽 라오스로 확장하는 것을 자제하고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확장한 이유이다.[11] 국군 및 UN군이 북진할 당시에는 폭이 좁은 한반도 중남부와 달리 청천강-함흥시 축선 이북으로는 동서 방면으로 크게 길어지면서 방어해야 할 전선이 너무 길어지는 바람에 중공군에게 공세를 허용하는 요인 중 하나이기도 했다.[12] 휴전 당시 북한 지방의 수많은 섬들이 남한 점령 상태였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북한의 해상 이용에 심각한 위협을 끼칠 수 있었다. 다만 휴전에 북한을 끌어들이려는 의도도 있었고 추후 계속적인 군사적 충돌 및 그에 따른 각종 비용에 대한 우려로 휴전 협정 때 모두 포기하였다. 하지만 그랬음에도 서해 5도와 같이 남아있는 지역도 있는데 이 지역은 북한 황해도 해안가를 막고 있다.[13] 지리상 문제로 지원이 사실상 불가능했고, 북한 김일성 정권은 일부러 빨치산을 버렸다. 휴전협상 당시에 남한 측에서 "제발 좀 빨치산 데려가라"고 했는데 오히려 북한 측에서 무시해버렸으니. 전쟁을 전후한 남한 내 빨치산들은 북한 역사에서 완전히 지워졌으며, 탈북자들 경우 오히려 남쪽에 와서야 빨치산 이야기를 알았다고 한다.[14] 이 때문에 섬 동부에 일본군이 해안포 요새를 하나 설치했는데, 지금은 관광지로 기능하고 있다. [15] 말할 것도 없지만, 이 분의 영향력이 컸다. 불 박사 자신도 북베트남 해안가들을 포격하는 함포들의 개량에 깊게 참여했기도 하고 말이다.[16] 당장 당시 현역이던 MGM-52 랜스 미사일 사거리 내다.[17] 인천상륙작전에는 미 해병대 1개 사단 외에도 육군 7개 사단이 추가로 동원되었다.[18] 실제로 이놈 죽이면 현상금 준다며 미군이나 한국군, 남베트남군, 호주군을 비롯한 유엔군 장교들의 사진과 신상정보들을 영어나 한국어와 베트남어로 쓰여진 삐라가 부대 내에 나돌아다니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근데 이걸 일부 남베트남 병사나 장교들이 '''돈받고 제작하는데 도움을 주거나 뿌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19] 그리고 서울은 온조왕 때부터 개로왕 때까지 백제 왕조의 수도였으며 고려 시대에도 숙종때 서울로 천도할 계획이 있었다.[20] 경찰에 친일인물이 많긴 했지만 그렇다고 독립운동가 출신이 아예 없진 않았다. 수가 매우 적었을 뿐. 대표적으로 차일혁, 최능진, 문형순 등이 있다.[21] 심지어 이조차 기존의 농지개혁법으로 인해서 반응이 밍숭맹숭했다.[22] 북한은 나중에 세금을 폐지했지만 그때는 땅이고 뭐고 개인의 소유가 없어졌다.[23] 이미 '''1919년'''에 베르사유 회담에서 베트남의 독립을 주장했을 정도 고작해봐야 1930년대에나 활동을 시작한 김일성과는 격이 다르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중등학교 시절부터 ㅌ.ㄷ(타도반제국주의동맹)을 결성해 활약했다고 주장하나 부정되고 있다.[24] 오히려 남쪽에서 활동하다가 넘어온 박헌영호치민에 비길 수 있을 만큼 제대로 된 독립운동을 했다. 실제로 대중들에게 지지도 많이 받고 있었고... 그러나 소련은 박헌영보다는 김일성을 더 선호했고, 때문에 김일성은 북쪽에서 지지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온갖 뻥튀기를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25] 만일 남베트남이 총선거를 받아들였다면 오히려 미국의 징병제는 오랫동안 지속됐을 것이다.[26] 정부 주도의 불교정화운동을 벌이는 등, 몇 가지 탄압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전자는 민간에서 알아서 쉬는 건 알음알음 넘어가 준 편이고, 후자는 식민지배의 잔재를 청산한다는 면에서 명분이 있었다. 불교계가 친일 행적을 보였기 때문. 불교계는 이승만-박정희 시대를 거치고 나서야 우리가 아는 조계종 중심의 민족불교로 바뀐다.[27] 프랑스는 세속 국가이기에 공식적인 국교가 없지만 가톨릭이 오랫동안 프랑스의 국교 노릇을 해왔고 또, 식민지배의 첨병 역할을 톡톡히 했다.[28] 6.25 전쟁 이전 정확히는 1945년부터 1948년까지의 시기에는 21세기 기준 우파 세력의 표밭에 해당되는 TK지역 중 하나인 대구는 조선의 모스크바로 불릴 정도로 좌익 세력의 세가 강했고 평양의 경우 북한 당국과 소련군정에 의한 탄압으로 기독교도가 절멸하기 전까지는 조선의 예루살렘이라 불릴 정도로 다른 지역에 기독교도의 비중이 높았고 기독교의 영향력이 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