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제/일생
1. 일생
1.1. 정계 입문 이전
이인재는 1948년 12월 11일 충청남도 논산군의 가난한 집안에서 아버지 이윤식과 어머니 김화영 사이의 4남 2녀 중 3남으로 출생하였으나 서울특별시로 상경, 경복고등학교(43회)와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서울대학교 졸업 이후 유신 반대운동에 뛰어들었다가 수사기관에 불려가 모진 고초를 겪고[1] 군대에 징집되어 대한민국 육군 병장으로 만기 전역했다.
1979년 제21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1981년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되어 1983년까지 약 3년간 재직하였다.
1.2. 정계 입문 이후
1.2.1. 초ㆍ재선 의원 시절
1983년 변호사로 활동하며 노동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가 김영삼의 소개로 1987년 정계에 입문, YS정부 끝까지 같이 갔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국회의원으로서의 인생을 시작했다. 당시 지역구는 경기도 안양시 갑. 현재 만안구 지역이다. 초선의원 시절, 노무현, 이해찬과 더불어 '''5공 청문회 스타 3인방''' 중 한 명으로 유명했다. 이후, 통일민주당 → 3당합당 때, 그대로 김영삼을 따라 민주자유당에 남았고,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도 같은 지역구에서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재선하였다. 이듬 해 1993년 김영삼의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만 45세 최연소 노동부 장관으로 기용'''되는 기록을 세웠다. 노동부 장관 시절 고용보험제도를 최초로 도입한 업적을 남겼으며, 과거 변호사 시절부터 실상을 잘 알고 있었던 산업현장을 찾아 다니며 부지런히 움직이는 등 '''발로 뛰는 장관'''의 모범을 보여준 덕분에 당시 국민들에게 상당히 좋은 이미지로 각인되게 된다.
1.2.2. 경기도지사 시절과 전성기
1995년 6월,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경기도지사 선거에 민주자유당 후보로 출마, 노동부 장관 시절의 좋은 이미지 덕분에 여유롭게 당선되면서 민주자유당의 후신인 신한국당에서 유력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하였고, 이런 명성에 힘입어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선언하며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하게 된다. 경쟁 후보인 이회창의 압도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중반 이후부터 이회창을 압박할 정도로 급속히 부상하면서 1차 투표에서 2위를 기록하고 이회창과의 결선투표까지 갔지만, 결국 이회창에게 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당내 경선과는 상관없이 급속도로 성장세를 타던 자신의 독자적인 지지 기반에 부응하고자, 그리고 이회창이 아들 둘 모두 병역면제를 받은 것이 알려지면서 지지율이 자신의 지지율보다 낮은 상태로 계속 가자, 결국 같은 해 9월 13일에 대선후보 경선 결과 불복을 선언하며 신한국당을 탈당하여 제15대 대통령 선거에 국민신당 후보로 독자 출마, 19.2%를 받아 3위에 오른다. 사실 이 득표율은 소속 정당의 지역기반 없이 '''오직 이인제라는 인물 하나만 보고 얻은 득표'''로서 대한민국 역사상 인물빨로 얻은 득표수로는 최고 기록을 자랑.
[image]
이인제의 경선 불복 및 대선 출마 덕분에 보수 진영의 표가 분산되어 어부지리로, 자민련의 김종필, 그리고 박태준과 이른바 '''DJP''' 연합한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당선됐다. 출마 선언 후 상당 기간 여론조사 2위를 달리며[2] 위력을 보였으나, 신생 정당은 기존조직과의 차이는 극복할 수 없었고, 이회창 측의 강력한 네거티브 공세로 인해 끝내 지지율이 뒤집히며 3위로 밀려났다. 만약 이인제가 대선에 출마하지 않았다면, 김대중이 아니라 무난하게 이회창이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 15대 대통령 선거에서 득표 1위 김대중이 40.3%였고 2위 이회창이 38.7%이었으며, 1, 2위 표차는 불과 390,557표 차이었다. 3위 이인제가 19.2%임을 감안하면 '''본인은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김대중 당선과 50년 만의 평화적 정권교체, 2000년 이후 정치판도를 만든 1등 공신'''인 셈. 유시민은 저서인 <나의 한국현대사>에서 '이인제 씨는 선한 의도가 있어야만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삶의 역설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다.(중략)나는 텔레비젼에서 그를 볼 때마다 감사의 마음을 되새기곤 한다.'라며 조롱반 칭찬반의 평가를 내렸다.
그런데 DJP 연합 이후 김대중은 선거일까지 여론조사 1위를 놓친 적이 없는데, 정식 후보 등록 후 여론조사 1위가 항상 대권을 차지했다는 점을 들어 양자 구도로 갔어도 김대중이 이겼을 것이라는 시각도 제법 많다. 특히나 1997년 대선 예측조사에서 이인제가 청년층들에게 많은 표를 얻었고 중장년층에게 표를 적게 받았으니 당시의 이인제가 보수표만 긁어갔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김대중의 이미지가 청년층들에게도 호불호가 갈렸던 탓에[3] 1당도 2당도 싫다는 사람은 지금보다 당시가 더 많았고, 지금이야 당을 나와도 양 진영으로 구분되어버리지만, 당시에는 분명 중간에 위치하는 포지션이 있었기 때문. 또 김종필과 손잡은 것이 싫어서 이탈한 표도 많이 흡수했다.[4] 이를 반증하듯이 1997년 대선 투표자조사결과를 보면 이인제가 20대와 30대 층에게 득표를 많이 얻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인제가 흡수한 표는 결속력이 단단한 호남표 보다는 다소 느슨한 그 외 지역의 표로 봐야 한다. '''선거운동 당시 '리틀 박정희'를 자처하며 보수층의 지지를 호소'''했으며, 이회창 후보 측에선 이인제 후보에 대한 투표는 사표(死票)가 된다며 후보 사퇴를 종용해 많은 물의를 낳기도 했다.
이인제의 경선 불복과 대권 행보가 단순히 이인제 개인의 정치적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그의 정치적 스승이었던 '''김영삼의 의중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실제로 이회창의 최측근인 서상목 전 장관은 당시 이인제를 따라 신한국당을 탈당한 홍재형 의원이 대통령 후보 경선 당시 이인제 지지와 거리가 멀었던 중립인사였다는 것을 예로 들면서 김영삼 대통령이 이인제를 암묵적으로 지지했다는 음모론을 펼치기도 했다.
당시 김영삼은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국무총리 및 당대표로 있었던 이회창과 껄끄러운 관계가 오랫동안 지속되던 상황이었는데, 자신이 대통령이 되고 난 후 과거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주자유당에서 껄끄러운 관계로 말이 많았던 노태우를 4000억 원 비자금 조성 및 12.12 군사반란 혐의 등으로 내쳤듯이, 이회창이 대통령이 될 경우 본인 또한 퇴임 후에 정치적으로 크게 다칠 것을 고려하여 이인제를 은연 중에 부추겨 이회창의 대권을 막게 한 것이라는 논지. 사실 이인제의 경우 1997년 대선 당시 나이가 만 49세로 상당히 젊은 축에 속했기 때문에, 앞으로 차기 대권에서도 기회가 많았던 것을 감안한다면 어느 정도 일리있는 논리였다.[5]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3후보 모두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 복권을 공약으로 내세웠는데, 조선일보사에서 발간된 김영삼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미 김영삼이 대선 후 자신의 임기 내에 전노의 사면을 기획하고 이 사안을 15대 대통령 당선 뒤에도 문제없이 처리하기 위해 비밀리에 진행하면서도 김대중에게도 허가를 구하는 등 극비리에 사안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이 시기에 이회창이 이인제에게 지지율에서 열세를 달려서였는지 최후의 카드로 추석 전에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을 직접 건의하겠단 카드를 들어버린다#. 이회창은 그 뒤에도 전두환, 노태우 사면에 대해 대선 전에 사면해 줘야된다고 10월 6일, 인터뷰에서 밝혔으며이회창 후보 집권 땐 권력구조 개편, 전두환, 노태우 대선 전 사면 이인제도 12월 16일, 자신이 당선되면 빠른 시일 내에 전두환, 노태우를 사면하겠다고 공약으로 내세웠다.이인제후보 전두환, 노태우 사면[6] 사실상 이인제의 흥행이 전노의 사면을 공약을 만들게 된 원인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1997년 대선 당시엔 대선 후보로서는 최초로 독도를 방문하여 독도에 대한 정부의 미온적 대응을 비판했다. 이인제 대선 후보 독도방문 1997.11.17 경향신문, 이인제 대통령 후보 독도방문
15대 대통령 선거 이후에도 약 8개월간 이만섭과 더불어 국민신당을 지켰으나, 1998년에 치러진 4월 재보선, 2회 지방선거, 7월 재보선 등 연이은 선거에서 국민신당은 연전연패를 거듭했다.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이인제의 고향인 논산시에서만 시장을 배출하는 데 그쳤을 뿐이었다. 한편 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 자유민주연합 연정 역시 의석 수 부족 및 차기 정치 지도자 부재를 통감하고 있었는데, 이 와중에 눈에 들어온 정당과 인물이 국민신당과 이인제였다. 1998년 8월 29일, 국민신당이 국민회의와의 합당[7] 에 합의하면서, 이인제는 일약 여권의 유력 대선 주자로 떠오르게 되어 속칭 '''이인제 대세론'''을 이루게 되고 다음 대선에서는 이회창vs이인제의 구도가 확실시 되는 상황이었다.
이후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선대위원장을 맡아 비례대표를 마다하고 자민련의 텃밭인 고향 논산에 출마, 현역 김범명 의원을 꺾고 당선되면서 그의 주가는 최정점에 달했다. 1999년 말, DJP연합이 무너지면서 민주당은 충청권에도 모두 독자후보를 내세웠는데, 이인제가 직접 고향에 출마하자 기존 민주당의 약세 지역이었던 충청권 전역에서 민주당 후보들의 득표율이 급상승한 것이다.[8]
1.2.3.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경선이 시작될 때만 해도 새천년민주당의 16대 대선 후보로 가장 유력했다. 그러나 노무현이 국민참여경선 과정에서 '''노풍'''을 일으키자[9] , '''보이지 않는 손''' 운운하며 '김심론'[10] 을 주장하다가 이것이 먹히지 않자 경기지역 경선을 앞두고 경선을 중도 포기한다.
보이지 않는 손이란 퇴임 이후를 걱정한 김대중 대통령이 물밑에서 은밀하게 노무현을 지원해서 후보로 만들었다는 음모론이다. 혹은 애초에 보수우파에 가까웠던 이인제가 민주당 후보가 되는 것을 청와대가 부담스러워 했다는 버전도 있다. 하지만 둘다 아무런 근거가 없었기 때문에 유력 대선후보가 인물경쟁, 정책경쟁이 아니라 음모론과 네거티브만 한다면서 역풍만 맞았다. 실제로는 평생 김대중을 모셨던 권노갑, 김옥두 등 동교동계 주류가 이인제를 필사적으로 밀었다는 점에서 이 음모론은 처음부터 설득력이 없었다.[11]
1.2.4. 철새 이미지 각인
이후 민주당 내에서 노무현 후보 낙선운동(...)에 나섰으나, 각종 공작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이 승승장구하자 결국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고 여러 정당을 떠돌면서 선거 때마다 매번 아슬아슬한 격차로 당선되며 결국 '''피닉제'''라는 애칭(?)을 얻게 된다..
실제로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의 연속되는 세 선거가 모두 압권인 게, 17대에서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의 역풍으로 여론조사에서 열린우리당 양승숙 후보에게 계속 밀리다가 정작 개표에서는 승리했고, 18대에서는 당시 통합민주당 공천 탈락에 불복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했는데 무소속인 본인을 포함해 한나라당, 통합민주당, 자유선진당, 친박연대 후보가 출마하는 '''5파전''' 선거구도가 벌어지면서 '''27.7%'''라는 말도 안 되는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19대에서도 17대처럼 김종민 후보에게 출구조사에서 밀리다가 개표에서 금산군의 몰표로 뒤집었다(...)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는 별안간 민주당에 입당하여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본선에서는 0.7%라는 미미한 득표율을 기록했고, 심지어 일부 지역에서는 허경영에게도 뒤지는 처참한 결과를 얻었으며, 그 직후 치러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앞서 본 바와 같이 공천 탈락하고 탈당했다.
1.2.5. 15년 만의 복귀
2011년 말 자유선진당에 입당하며 이회창과 해후하게 된다. 그리고 자유선진당이 19대 총선에서 패망하자 비대위원장, 대표가 되고 선진통일당으로 당명을 바꾸었다. 나름 제3지대로서 역할을 하나 싶었지만 결국 대세가 양강구도로 기울었다고 판단한 이인제는 새누리당과 선진통일당의 통합을 주도하면서 15년 만의 복귀을 하게 된다.
2014년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는 최고위원직에 당선되었고 친박계와 행동을 같이 하며 신박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1.2.6. 저물어가는 정치 인생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김종민 후보[12] 에게 예상 밖의 역전패를 당했다. 개표가 일찍 진행된 계룡시와 금산군에서 앞서 가고 국민의당 후보와 김종민 후보의 표가 분산된 것으로 나타나면서 이번에도 또 역시 살아남나 했었는데[13] 개표가 늦게 시작된 논산시에서 김종민 후보의 표가 더 많이 나오면서 야금야금 따라잡히기 시작하더니, 계룡, 금산의 개표가 사실상 끝나고 논산만 개표가 15% 정도 남은 상황에서 결국 역전 당해 최종적으로 '''1%'''(1038표)차로 낙선했다. 여담으로 이 지역의 선거는 사실상 이인제와 충남도지사 '''안희정'''의 대리전이라는 평가도 있었다. 안희정과 김종민의 고향 역시 논산이고 김종민 후보는 안희정과 매우 가까운 측근 인사였기 때문이다.
[image]
이인제가 낙선 사례를 트위터에 올렸는데, 리트윗 중 하나가 이인제 눈물을 거둬~(...)
헌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때문에 오히려 '''낙선이 신의 한 수'''가 아니었냐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14]
2016년 12월, 박근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이후 친박 정치인 50여 명이 혁신과통합연합이라는 모임을 결성하였다. 이인제는 김관용 경상북도도지사와 함께 공동대표로 선임되었다.
2016년 12월 12일 19대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결과는 자유한국당 19대 대선 후보 경선 결과 당원투표 4위(5.1%), 여론조사 2위(24.6%)로 합계 3위(14.85%)를 기록하면서 본선 진출에는 실패했으나, 탈당하지 않고 잔류하여 자유한국당 공동 중앙선대위원장으로 홍준표의 선거운동을 도왔다. 여담으로 자신을 경선에서 이긴 후보자의 선거 운동을 돕는 경우는 이인제의 '''30여 년 정치 인생에서 처음'''이다.
자유한국당의 대선 패배 이후에는 별 다른 행보를 보이지 않고 조용하게 지냈으나, 2018년 안희정의 불출마 선언으로 공백지가 된 충청남도지사 후보로 출마하였다. 사실 20여년 전에 이미 경기도지사를 지낸 경력이 있는 그에게는 별 메리트가 없는 것이 사실이고, 본인도 천안시 갑 보궐선거[15] 에 출마하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던 듯 하나, 결국 당의 충남지사 출마 요구를 받아들였다. #
홍준표 대표와 마찰을 일으켜 탈당한 의원이 홍준표로부터 철새 소리를 듣자 "네가 공천시킨 17번의 당적변경 철새는 뭐냐?"고 반격하면서 졸지에 까이기도 했다.
외부자들 72회에서 출연했다. 정계의 노익장답게 이름 날리는 논객들의 맹공을 가뿐하게 받아치는 여유로움을 보였다. 홍준표 대표에 대해서는 옹호를 하면서도 그를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철새 행보에 대해서 하는 말이, 이념정당이 아닌 지역정당에만 다녀봤으며 조국 안에서 영남, 호남, 충청의 국토 대장정을 다녔다고... 사실 참여정부 시기까지 한국의 거대 양당은 대북 노선을 빼고는 정책·이념 면에서 큰 차이가 없었다는 것이 정치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평가이므로 아주 터무니없는 변명은 아닌 셈이다. 또 옮길 일이 있으면 정의당도 고려한다고 한다. 충남지사 선거에 대해서는 본인 감이 꽤 여유로운 특성상 잘 될 것 같다고 했다.
2018년 6월 치러진 충남지사 선거에서 35.1%의 득표율을 기록하여, 더불어민주당 양승조 후보(62.6%)에게 큰 표 차이로 밀리며 낙선했다.
2019년 5월, 21대 총선 총선 출마 의사를 내비쳤다. # 그러나 공천에서 배제되고 박우석 전 지역위원장[16] 이 공천되었다. 또(...) 탈당 및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다가, 입장을 바꾸어 불출마 및 백의종군하기로 했다.
2. 당적 변경사(피닉제)
[1] 바로 이때 사법시험을 치려는 결심을 했다.[2] 1위는 김대중.[3] 1992년 대선 여론조사에서도 김대중은 청년층 표 상당수가 정주영과 이인제와 나눠먹었던 탓에 청년층들에게 특출나게 많은 표를 얻었던 것은 아니었으며, 1997년 대선에서는 청년층들에게 지지를 상대적으로 많이 얻기는 했지만 각각 40% 중반 정도(한국갤럽 기준 20대 43.2%. 30대 43.7%) 수준으로 중장년층들에게 얻은 비율 자체도 34~37%는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압도적인 차이가 난 것은 아니었다. 1987년 대선 때부터 1997년 대선 때까지의 김대중은 보수 정당 후보들보다도 오히려 세대별 득표차이가 적은 인물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 물론 민주당이라는 정당 자체는 당대에도 청년층들에게 많은 표를 받은 정당이었던 것은 팩트다.[4] 또한 2007년 열린 17대 대선에서 똑같이 보수 진영 표가 이명박과 이회창으로 분산되었지만, 이명박이 큰 표차로 이겼다. 김대중의 당선이 단순히 보수표 분열 탓은 아닌 셈.[5] 김대중이 집권해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꼬장꼬장한 법관 출신으로 김영삼과 사사건건 대립한 이회창에 비하면 김대중은 그래도 과거 군부 독재 시절에 투쟁 동지였다는 인연이 있었던지라 최소한의 소통은 가능했다. 실제로 김대중이 집권한 이후 김영삼과 딱히 화해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김영삼이 직접적으로 다친 일은 없었다. 더군다나 양김은 '''서로를 너무 빠삭하게 알고 있어''' 저 쪽에서 털면 이 쪽에서 폭로해버리는 식으로 반격이 가능했다(...)라는 해석도 있다. 이런 형세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바보도 아닌데 선빵을 먼저 날릴 수는 없다는 것.[6] 위키백과 15대 대통령선거, 대선후보들의 전두환, 노태우 사면공약 대결 논란[7] 국민신당이 자진해산하고 새정치국민회의로 개별입당하는 방식. 이 때문에 김학원 등은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했다.[8] 영남 vs 호남의 지역대결 구도가 명확한 상황에서 민주당 입장에선 캐스팅보트를 쥔 충청권을 잡아야 그나마 승부가 가능했다. 그래서 DJ는 충청권의 맹주였던 JP와 손을 잡은 것이었는데, DJP 연합이 무너졌는데도 이인제가 충청도에서 바람을 일으켰으니 민주당은 엄청나게 환호했다.[9] 당시 노무현은 이인제의 대선 출마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경선에 나섰다고 밝힌 바 있다. 이인제에 대해서 "재주는 있어 보이는데 성실해 보이지도 않고 철학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나는 88년부터 89년까지 이인제 씨와 함께 국회 노동위를 같이 했다. 그때 이인제 씨는 불성실의 극치였다." 등의 말로 비난을 하기도 했다. 당적을 옮긴 정치인이 정당의 대선 후보로 나서게 할 수는 없다는 그의 확고한 논리는 이후 손학규를 비토할 때에도 그대로 쓰였다.[10] 金心論, 본인의 계파에서 대통령이 나오길 바란 김대중, 혹은 이인제를 고깝게 여긴 김영삼 등 전직 대통령이 허수아비 노무현을 내세워서 본인을 골탕먹인다는 주장이었다.[11] 다만 권노갑 등이 이인제를 밀었던 것은 김대중의 의중이 아니라, 독자적인 판단이었다. 이미 2001년말 시점에서 김대중은 레임덕에 빠져서 민주당과 동교동계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실제로 2002년 민주당 후보 경선과 대선전략에 김대중이 직접 개입한 흔적은 그뒤에도 나오지 않았다. 박지원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 후단협 활동을 하던 동교동계 인사들을 은밀하게 만나서 그러지 말라고 설득했었다고 훗날 고백했지만, 노무현이 후보로 선출된지 한참 후의 일이다.[12] 19대 총선에서도 김종민 후보가 나왔기에 공식적으로는 김종민 후보의 복수전이 된 셈.[13] 특히 계룡의 경우 지난 19대 선거 때는 김종민에게 졌었다.[14] 물론, 정치인은 물구나무를 서서라도 국회에 들어가고 싶어한다. 당선만 보장된다면 국가혁명당이나 진보당에도 입당할 수 있는 것이 정치인이다.[15] 박찬우 의원이 대법원 판결로 의원직을 상실했다.[16] 공천을 앞두고 전국 모든 지역위원장들을 사퇴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