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근우/선수 경력

 


1. 개요
2. 프로 이전 경력
2.1. 아마추어 선수 시절
3. 프로 경력
3.1.1. 2005 ~ 2006 시즌
3.1.2. 2007 시즌
3.1.3. 2008 시즌
3.1.4. 2009 시즌
3.1.5. 2010 시즌
3.1.6. 2011 시즌
3.1.6.1. 포스트 시즌
3.1.7. 2012 시즌
3.1.7.1. 포스트 시즌
3.1.8. 2013 시즌
3.1.8.1. FA 1기
3.1.8.1.1. SK 입장
3.1.8.1.2. 한화 입장
4. 국가대표 경력
4.2. 2007 아시아 야구 선수권대회: 준우승
4.5. 2009 WBC: 준우승
5. 연도별 성적


1. 개요


정근우의 선수 경력.

2. 프로 이전 경력



2.1. 아마추어 선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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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2000년 동기인 추신수, 김백만과 선의의 경쟁을 펼쳤고 조성옥 감독의 엄격한 지도가 어우러져 팀은 대통령배 2연패 달성에 성공했다.
2000년 캐나다 에드먼턴에서 열린 '''세계 청소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일궈낸 1982년생 황금세대의 주인공'''으로 당시 대한민국 U-18 야구 국가대표팀의 주장을 맡았다.
2001년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했으나 어느 구단에도 프로 지명을 못 받고 고려대학교로 진학했다.[1] 고려대에 입학할 때 고려대 야구부 정원이 다 차서 럭비부로 입학했다가 나중에 야구부로 간 일화가 있다. 대학 졸업 후 2005년 SK의 2차 1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동갑내기로는 한화의 1차지명 김태균, 롯데의 1차지명 추신수,[2] 2차지명1R 이대호, 2R 이우민, SK 1차지명 정상호, 2차지명2R 김강민, 4R 채병용, 9R 박재상. 나열한 선수들 전원 2001년 지명자들이다. SK 입단 동기로는 최정이 있다(최정은 고졸, 1차지명).[3]
사실 정근우는 SK의 드래프트 역사상 대학 출신 지명선수 중 거의 유일하게 활약하는 선수이다. SK는 신인지명 때 대학 출신 선수로 거의 재미를 못 보았는데, 사실 대학 출신 선수를 잘 뽑지않는 경향 때문이기도 하다. 일례로 대학 출신 선수 1차지명은 2002년 한 번뿐이고 2001년, 2003년, 2004년, 2006년도에는 아예 대학 선수를 뽑지도 않았다.
2012년까지 그나마 활약한 대졸 선수는 2005년 2차1R 정근우, 2008년 2차1R 모창민이 전부인데, 모창민은 주로 백업으로 뛰다가 2012 시즌 후 NC 다이노스로 넘어갔다.
2009년도에는 야심차게 대학 최고 투수로 꼽히는 경희대 박모씨, 고려대 여건욱을 뽑았으나 그다지 성적이 좋지 못했다. 더군다나 박모씨는 2010년 4대3 트레이드로 당시 서울의 모 팀으로 갔다가 거기서 초대형 사고를 치는 바람에 다시는 야구공을 잡을 수 없는 몸이 됐다. 추가로 여건욱도 대형 트레이드로 같은 팀으로 갔다.
사실 부산고 시절에도 팀의 주장으로서, 팀의 에이스였던 추신수와 함께 부산고의 우승을 이끌었지만 프로 지명을 받지 못했다. 항간에는 추신수의 메이저리그 진출에 따른 보복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4] 고려대 졸업과 동시에 받은 지명도 당시 꽤 이른 순번이라는 평가가 있었던 점을 감안할 때, 아무래도 키가 작은 것이 낮은 평가의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3. 프로 경력



3.1. SK 와이번스 시절


'''SK 와이번스 시절 정근우'''

3.1.1. 2005 ~ 2006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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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데뷔 당시.
2005년 데뷔 시즌에는 기대에 크게 밑도는 아쉬운 성적을 거두었다. 하지만 2년차인 2006년부터 실력을 발휘하며 팀의 톱타자 자리의 굳건한 주전으로 도약했다. 그해 2할8푼대의 타율과 45도루라는 호성적을 거두면서 시즌 후 골든글러브 수상에도 성공했다. 하지만 팀 성적은 좋지못해 6위로 시즌을 마감. 2006년에는 2006 도하 아시안 게임에 출전하였지만...
정근우는 중고교 시절부터 3루수가 주포지션이었는데, 2006년 SK 연고지 우선 지명으로 최정이 입단하게 되면서 포지션이 겹치게 되었다. 2006시즌 초에는 최정이 정근우의 백업 3루수로 출전하기도 했으나 포지션 정리가 시급한 상황이었다. 때마침 SK의 주전 2루수였던 정경배가 2006시즌 들어 갑작스런 노쇠화를 보였고 이에 정근우가 2루수로 옮겨가게 되었다.

3.1.2. 2007 시즌


2007년 김성근 감독 취임후 상승하는 팀 성적과 함께 정근우의 실력도 일취월장하기 시작한다. 도루수는 2006년보다 거의 반으로 줄었지만 타율을 끌어올리면서 3할2푼대의 타격을 과시하며 리그의 괜찮은 2루수 수준에서 공격형 유격수로 명성을 날리게 된다. 다만 유격수로서의 수비는 불안하여 두산 베어스에서 유격수 나주환의 영입을 통해 2루수로 돌아오며 공수에서 안정감을 찾았다.
2007년 8월 11일 끝내기 홈스틸을 기록한적이 있다.
그러나 2007년 한국시리즈에서 두산과 만난 SK는 몇 번의 위험한 장면으로 구설수에 오르는데, 특히 이때 도루시에 스파이크 날을 세우고 주루 플레이를 하는 모습과 수비시 도루하는 이종욱의 발을 잡는 위험한 행동으로 일명 '''발근우'''란 좋지못한 이미지로 각인되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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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우는 불타는 그라운드에 출연하여 이 당시 상황을 말했는데, 그 해 팀 사정상 유격수 자리에 피치못하게 들어가게 된 정근우가 '거리 감각이라든지 수비할 때의 위치 선정, 주자에 대한 대처방법 등의 경험 부족으로 본의 아니게 좋지 못한 행동을 하게 됐다'고 말하면서 이종욱 선수에게 고의가 아니며 사과를 했다고 한다. 그 때는 감정적으로 서로 부딪혀서 굉장히 사이가 안 좋아보였는데, 그 이후로 국가대표팀에서 서로 같이 뛰어서 그런지 지금 보면 서로 못생겼다고 놀려대고 농담따먹기나 하는 친한 사이로 보인다.
흥미로운건 오직 이 해의 유격수 임팩트 때문에 정근우를 유격수 자원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정작 본인은 이 시즌 트라우마 때문인지 시즌 이후 KBO 리그에서는 단 한 차례도 유격수를 본 적이 없다. 예로 2014년의 유격수 출전논의 해프닝이라던가 2015년 전지훈련에서 유격수 훈련 중 부상 정도가 유격수 정근우에 관한 소식의 전부다. 덧붙이자면 실험은 실패했는지 멀티포지션 좋아하던 그분이 한화에 있는 동안에도 가끔 외야로나 돌았지 기어이 유격수 수비는 맡지 않았다.
그럼에도 본인 커리어에는 상당한 도움이 됐는데 이후 국대에 선발 될 때마다 감독들이 한결같이 "2루는 기본이고 유격과 3루까지 맡길 수 있는 멀티 자원"으로 중용했기 때문. 실제로 2008 베이징 올림픽/야구 예선전에서 박진만, 김민재의 컨디션 난조로 인해 정근우-고영민 키스톤 콤비라는 조합이 실행된 바 있으며 2009 WBC에서도 정근우 최정이 유격수 백업 가능한 점이 부각되며 승선했다. 2009년 커리어하이를 달성한 이후에는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야구에서 2루수에 단독으로 발탁[5]되는 등 주전으로 자리잡아 유격 수비 능력은 아무래도 상관없게 되어버렸다.

3.1.3. 2008 시즌


비난 속에서 맞이한 08시즌이지만 정근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좋은 활약을 펼쳤으며 결국 '''베이징 올림픽 야구 대표팀'''에 선발되었다.
예선 첫 경기인 미국전 9회말 7:6으로 뒤진 상황에서 대타로 출전한 정근우는 미국 투수 스티븐스를 상대로 풀카운트까지가는 접전끝에 2루타를 때려내고, 뒤를 잇는 김현수의 땅볼로 진루하여 3루까지 안착. 1사 3루 상황에서 이택근의 2루수앞 땅볼을 재치있는 주루 플레이로 홈인. 7:7 동점을 만들며 8:7 역전승의 발판을 마련했다. 다음 캐나다전에서도 경기의 유일한 득점이자 타점을 솔로 홈런으로 만들었다. 이후 한일전에서 홈으로 들어오는 플레이 등에서 활약하였다. 첫 시합을 짜릿한 역전승으로 장식한 한국은 결국 전승우승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게 되니, 이러한 활약을 한 정근우는 금메달의 주역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활약 덕분에 야갤에서 비매너 플레이에 대한 까방권을 주자는 의견이 많았는데 발동되지는 않는 것 같다. 허나 베이징 올림픽 전에는 마구잡이로 까였지만 이러한 활약을 펼친 다음에는 확실히 전보다는 덜 까인다.
금메달과 함께 병역혜택이라는 기분 좋은 선물을 받게된 정근우는 리그에서도 좋은 모습을 계속 보여주며 또다시 두산과 맞붙은 2008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2008년 시즌의 타율은 3할1푼대로 조금 떨어졌지만 40개의 도루를 성공시키며 역시 좋은 활약을 펼쳤다.

3.1.4. 2009 시즌


시즌 개막 전 열린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도 참가하여 고영민과 함께 번갈아가며 2루를 지키며 한국을 결승까지 이끌며 또다시 리그 정상급 2루수라는 것을 재차 확인시켰다.
2009년 시즌에서도 3할5푼대의 타율과 46개의 도루로 커리어하이 시즌을 보내고있는 정근우는 상대팀에게도 부담이 되는지 프로 데뷔 이후 가장 많은 사구를 기록중이고,[6] 9월 8일 경기에서는 2개의 몸에 맞는 볼을 기록해 고의성이냐 아니냐를 두고 여러 게시판에서 솩빠와 갸빠가 병림픽을 펼치기도 했다. 속칭 컨트롤 아티스트 서재응이 던진 볼이기에 그랬고 또 사구를 맞은후 좋지 못한 분위기로 흐른 투수와 타자의 신경전 때문.
이 와중에 디씨솩갤에서는 멋진 짤이 하나 탄생되기도 했다. 아이돌 2PM의 멤버인 옥택연과 비교한 짤은 프로야구 카툰을 그리는 최불암에게도 영향을 미쳐 불암콩콩코믹스의 자료가 되기도 했다. 일부는 빅뱅의 태양과 닮았다고도 한다.
서재응과의 신경전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2009 한국시리즈 3차전. 서재응이 던진 볼을 정근우가 때렸지만 바로 투수 강습. 하지만 바운딩 처리되면서 서재응이 다시 1루에 던지면 상황 종료였으나, 서재응은 무슨 이유에선지 1루로 몇 발자국 걸어가면서 공을 슬슬 1루로 토스. 정근우는 뛰다 걷다를 반복하다가 서재응의 제스처에 서재응을 빤히 응시했다. 서재응은 정근우가 빤히 쳐다보자 음성은 들리지 않았지만 입모양으로는 '뭘봐 이 XXX야' 하며 응수, 쳐다보다 욕먹은 정근우는 지지않고 노려보며 응수. 일촉측발의 상황에서 최희섭이 1차로 만류하며 상황이 종료되는 듯 싶었으나, 양 팀 선수들이 뛰어 나오면서 벤치 클리어링. 그 와중에 기아의 고참급 선수인 이종범과 특히 '''김종국'''이 당사자들보다 더욱 더 화를 내면서 응수했다. 그 덕에 야갤에서 대량의 짤방이 만들어졌다.
2009시즌에 최다안타 타이틀도, 타격왕 타이틀도 못 딴 아쉬움을 담아 둘째 아이의 태명을 '히트'라고 정했다고 한다. 3월 17일 출생으로 남자아이. 이로서 벌써 애가 둘이다.
최종성적은 타율 .350 9홈런 53도루 168안타 59타점으로 [7]와 도루1위를 기록하며 틀림없는 커리어하이 시즌을 보낸다.
여담이지만 마구마구에서 이 시즌의 엘리트 카드가 나왔다. SK 와이번스 사상 최초의 엘리트 카드.
그리고, 고교 동기 투수 김백만을 1군 콜업 하루 만에 다시 2군으로 보내버리는데 일조했다."친구 (김)백만아, 미안하다"

3.1.5. 2010 시즌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국가대표에도 무난히 선발되었다. 첫 경기인 대만전에서 3타수 3안타 2볼넷 1타점 2득점 100% 출루로 맹활약했다. 광저우로 오기전에 치른 슝디 엘리펀츠와의 경기에서 지독하게 부진한 모습을 보인 것에 '일부러 안 친 것'이라는 변명성 개드립을 쳤는데, 결과적으로 사실이 되었다?
만약 해외 진출을 한다면 미국에 가고싶다는 뜻을 피력하기도 했다.
시즌 성적은 타율 0.305 33도루 75득점을 기록했고 팀은 삼성 라이온즈를 꺾고 통산 세번째 우승을 기록했다.

3.1.6. 2011 시즌


11시즌 4월 16일에 넥센의 웬 사이버 투수에게 헤드샷을 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일단 CT 검사 결과로는 탈은 없다고 한다.
4월 20일 투런 홈런을 쳐서 이화여대수와 함께 '''홈런 공동 1위'''가 되었다.
2011년 옆구리 부상으로 규정타석을 채우지는 못하였으나 3할 타율은 기록했다.
하지만 일부 팬들에게서 타자로서의 가치(상위타순, 특히 1번으로서의)에 대한 지적이 나왔는데, 타자로서의 주요 능력인 선구안이나 컨택 능력이 조금 부족한데다 대책없는 초구사랑(...)으로 인해 상대 투수 투구수를 줄여주면서 중요한 상황에서는 삽질한다는 것. (ex. 득점권에서 초구 병살) 시즌 전체로 보면 병살은 예전 시즌과 크게 늘어나지 않았고 볼넷도 출장경기 비율을 생각하면 평균적인 커리어 수준. 다만 선구안에서 톱클래스 1번 타자인 이용규, 이종욱에 비해, 그리고 커리어 하이 시절에 비해서 볼넷과 삼진 비율이 조금 떨어진 것은 사실이다.
시즌 성적은 0.307 60득점 40타점을 기록하여 5년 연속 3할을 달성했지만 장점이었던 도루는 20개를 성공하며 해가 지날수록 줄어들고있다.

3.1.6.1. 포스트 시즌

KIA 타이거즈와의 준 플레이오프에서 17타수 9안타 1볼넷 1사구(死球) 3도루 6득점 타율 .529, 장타율 .529, 출루율 .579를 기록하는 대활약을 하여 안치용을 1표 차로 제치고 준 플레이오프 MVP를 수상하였다.
롯데 자이언츠와의 플레이오프에도 22타수 7안타 1볼넷 1타점 1득점 타율 .318, 장타율 .364, 출루율 .348로 좋은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정작 삼성 라이온즈와의 한국 시리즈에 들어와서는 매우 부진하여 팀 공격 자체가 난맥에 빠져 한국 시리즈 우승을 삼성에게 넘겨주는 단초를 제공하고 말았다. 한국 시리즈에서 정근우가 기록한 성적은 20타수 5안타 2볼넷 0도루 1득점 타율 .250(...), 장타율 .300, 출루율 .318. 거기다 삼진도 무려 6개나 당했다. 말 그대로 정근우 답지 않은 최악의 부진. 특히 3차전까지 정근우의 부진은 절정에 달했다. 그나마 4차전부터는 볼넷도 2개 기록하고 안타도 3개 더 추가하였지만, 이미 시리즈 향방은 삼성에게 넘어간 뒤라서 한국 시리즈에서의 정근우의 때늦은 활약은 더욱 아쉬움을 더하고 말았다.
결국 2011년 포스트 시즌 성적은 59타수 21안타 4볼넷 1사구(死球) 3도루 1타점 8득점 타율 .356, 장타율 .390, 출루율 .406

3.1.7. 2012 시즌


기대에 못미치는 활약을 보이며 너무 부진해서인지 항목 갱신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9월 기준으로 타율이 .266. 데뷔 시즌 제외하고 최악의 성적. 수비에 있어서는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진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타격에서 극심한 부진으로 인해 8월부터는 톱타자의 자리를 김강민에게 내주었다.
8월 22일, 한화 이글스와의 11회 말 연장접전을 끝내는 벼락같은 만루 기습 스퀴즈 번트를 성공시켜 경기를 종결시켰다. 이는 31년 프로야구 사상 통산 23번밖에 없던 대기록이라고 한다. 게다가 이 스퀴즈 번트는 기록에서 안타 처리되었다.[8]
9월 1일, 두산 베어스와의 3~4위권을 다투는 중요한 일전때 1번 타자로 선발 출장하였다. 그리고 김선우에게 벼락같은 '''1회 말 선두 타자 초구 홈런'''을 작렬했다. 재미있게도 정근우는 작년 시즌 '''1회초 선두 타자 초구 홈런'''를 날린 적도 있다는 것이다. (2011년 10월 3일 삼성전 차우찬 상대) 정근우는 이날 6타수 4안타 1홈런 1타점 2득점의 좋은 활약을 보였다.

3.1.7.1. 포스트 시즌

2012 포스트 시즌 플레이오프에서 팀의 승리를 이끌어 플레이오프 MVP가 되었다. 안정된 수비와 함께 18타수 8안타 타율 0.444, 3도루로 맹타를 기록했다. 팀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던 플레이오프 4차전에서 4타수 4안타 1볼넷으로 100% 출루로 팀의 공격을 주도한 것이 활약의 백미.
한국 시리즈에서도 유감없이 활약했다. 1, 2차전은 다른 타자들은 침묵한 가운데도, 근우 와이번스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혼자 치고 뛰고 야구했다. 두 경기에서 7타수 4안타 1홈런 1타점 3득점 1도루로 팀의 4득점 중 3득점이 정근우의 발에서 나왔다. 3차전 역시 침묵하던 SK 타선을 폭발시킨 것은 정근우였다. 이날 5타수 3안타 1타점 2득점 1도루를 기록. 3차전까지 타율이 무려 '''0.583'''(12타수 7안타).
하지만 4차전부터 무안타를 기록하는 심상찮은 조짐을 보이더니, 잠실에서 벌어진 5, 6차전에서마저 8타수 무안타라는 최악의 부진으로 일관하여 팀 공격 자체가 난맥에 빠져들고 말았다. 결국 팀은 5, 6차전 도합 '''1득점'''(9실점)으로 삼성에게 스윕당하고 말았다. 한국 시리즈에서의 정근우의 기록을 잘보면 1~3차전에서의 기록과 4~6차전에서의 기록이 과연 같은 선수가 맞나 싶을 정도로 극명하게 다른 것을 확인할 수 있다.[9]
2012 한국 시리즈에서 정근우가 거둔 기록은 24타수 7안타 타율 0.292 2타점 5득점 2도루였다. 단순한 지표를 보면 나쁘지 않은 활약을 한 것 같지만, 앞서 언급하다시피 3할에 육박한 타율과 타점, 득점, 도루 등 모든 공격지표가 1~3차전에만 쏠려 있었던 것이 문제였다. 상대팀 톱타자 배영섭이 전체적으로 기복없는 활약으로 0.409의 타율을 기록한 것과 마지막 6차전에서 5타수 3안타로 맹활약을 한 사실을 감안하면, 톱타자 싸움에서 SK가 패한 점이 시리즈 패인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3.1.8. 2013 시즌


박정권의 뒤를 이어 '''SK 와이번스의 주장'''을 맡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를 고사했으나 "정권이를 도와주라"는 이만수 감독의 말에 이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팬들의 반응은 이번 시즌을 마치면 FA를 맞는 정근우에게 주장 자리에까지 앉히는 것은 너무 큰 부담을 주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과 환영한다는 의견으로 갈린 듯.
정말 부담때문인지, 시즌 초반에는 2할 6푼대의 타격과 어깨 부상으로 FA를 망치는가 싶더니 6월 6일에 부상 복귀한 이후 살아나며 팬들이 바라는 정근우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보여주고 있다. 6월 20일 삼성 라이온즈 진짜 홈런을 터뜨린 데 이어, 21일 롯데 자이언츠 전에서는 9회 끝내기 결승타를 치며 5-4 역전승을 견인했다. 6월 25일 기준으로 부상 복귀 후 타율 0.301 23타수 7안타 1볼넷 2타점 4득점 4도루를 기록하며 좋은 활약을 펼치고 있다. 여기에 6월 30일 LG 트윈스 전에서는 KBO 역대 66번째로 통산 1000안타를 달성하기도 했다.
7월 4일 기준 동군 2루수 올스타 1위를 달리는 중. 0.283의 타격으로 타격 전체 24위에 랭크되어 있지만 2루수 중에서는 2위(...). 1위인 허경민과도 그렇게 차이는 안난다. 7월 11일 삼성 라이온즈 전에서는 윤성환을 상대로 선두타자 홈런을 터뜨렸다. 7월 17일 넥센 히어로즈 전에서는 좌중월 홈런을 터뜨렸다. 7월 27일 롯데 자이언츠 전에서 김사율 상대로 시즌 8호 홈런을 기록한 데 이어, 8월 1일 NC 다이노스와의 경기에서는 노성호 상대로 9호 홈런을 기록했다. 그러나 뜬금없이 등장한 오재원에게 2루수 타율 1위를 뺐기나 싶었는데 부진하며 결국 2루수 타율 1위를 차지하고 있다. 8월 31일 기준 0.280로 30위에 위치해 있지만 2루수 중에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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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4일 넥센 히어로즈와의 경기에서는 명백한 헛스윙을 하고도 파울 타구라고 우겼지만 느린 비디오로 누가 봐도 헛스윙 삼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정근우는 끝까지 파울이라 주장하였으나, 삼진으로 물러났다. 여기까지만이라면 그저 착각해서 그런 것이라 넘어갈 수 있었지만 괜히 밴 헤켄에게 도발하는 모습을 보여 넥센팬들에게 까였다. SK팬들조차 정근우를 감싸줄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창피해하는 동시에 밴 헤켄의 묵묵한 반응을 칭찬했다. 참고로 당시 포수는 허도환. 여담이지만 정근우와 허도환은 후에 한화 이글스에서 동료가 된다.
시즌 최종성적은 112경기 407타수 114안타 9홈런 35타점 64득점 28도루 50볼넷(7사구) 48삼진. 타출장 0.280/0.368/0.408으로 한창때의 모습보다는 낮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안치홍과 서건창이 타격에서 완전히 망했고 허경민은 부상으로 규정타석도 못 채운 덕에 2루수 골든글러브는 따놓은 당상이라는 말이 있다. 수비도 시즌 초반 불안한 모습을 보였던 것(34경기 4실책)에 비하면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결국 2013 시즌 2루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하게 되었지만...

3.1.8.1. FA 1기

2013년 시즌 종료 후 예상대로 FA 신청을 했다. SK팬들은 이만수가 살아남은 이상 100퍼센트 나간다고 체념했고 아니냐 다를까 정근우 역시 이런 기회가 다시 없을 것 같다며 시장에 나가보기를 원하고 있는 상황.
그리고 뜬금없이 런닝맨에 나온다는 소식이 흘러나왔다. 류현진 특집에 초능력 야구를 찍기 위해 나왔다고 하며, 이병규, 김현수, 신경현 등 전&현직 다른 야구선수들도 나온다. SK팬들은 정근우의 런닝맨 출연에 '뭥미?'하는 반응이 대다수다. 한참 구단과 FA 협상하는 중요한 시기에 예능 출연이라 그런 듯. 그런데 소문과는 달리 런닝맨에는 나오지 않았다. 단순 루머였는지 나오려다가 일정이 맞지 않아 취소된 것인지는 불명.
마지막 내부 협상일인 16일까지 구단과 만남을 가졌지만 결국 정근우와 구단은 합의점을 찾지 못하며 정근우는 이용규와 함께 FA 시장에 나오는 선수가 됐다. 구단은 정근우에 4년 70억을 제시했으나 정근우는 최소 80억원을 요구하여 양측의 마지막 협상도 그렇게 결렬.[10]

3.1.8.1.1. SK 입장

이런 협상의 결과에 상당수의 SK팬들은 아무리 거품이 많이 낀 FA 시장이라지만 70억도 많은데, 어떻게 '최소' 80억을 요구하냐며 황당하고 실망했다는 반응이 대다수. 여기서 요점은 악명높은 SK 프런트가 70억을 제시했다는 것[11]과, 정근우가 '최소' 80억을 요구했다는 것.[12] 당초 협상이 결렬되면 프런트가 돈을 적게 제시했겠거니 하고 생각하던 SK팬들 대다수는 높은 금액을 제시한 SK 프런트에 놀라고, '최소' 80억을 요구한 정근우에 실망했다. SK팬들 사이에서는 이만수가 있기 때문에 만약 떠난다 해도 미련없이 보내겠다, 할 말없다는 말들이 오갔으나, 막상 정근우의 터무니없는 80억 요구에 전의 '믓근신', '두두기' 등의 별명으로 불렀던 SK 와이번스 갤러리를 중심으로 야구 커뮤니티들에서는 멘붕한 팬들의 분노와 분열이 이어졌다. 특히 댓글북까지 만들어주며 잔류를 희망했던 SK 와이번스 갤러리에서는 '구더기', '씹근우', '좆근딱' 등의 욕설로 까는 중. '칰지어'로도 불린다.
결국 우선협상이 끝난 다음날인 11월 17일 한화와 4년간 계약금 35억원, 연봉 7억원, 옵션 7억원 총 70억에 계약했다. 옵션 등에서 차이가 있을 것이라는 의견이 대다수지만 SK 프런트는 옵션이 그리 크지 않았다고 밝히면서 여러 의문점을 주고 있다. SK 팬들은 정근우가 되지도 않는 변명[13]을 한다고 정근우를 깠다. 아내까지 끌어들이면서 한화로 가는 이유를 둘러댄 정근우를 보며 SK팬들은 작년 홍성흔이 생각난다며 혀를 내두를 정도. 적어도 정근우가 SK란 팀 자체에 마음이 떠났다는 점은 확실한 듯하다.
이적 이후 이용규와 함께 한 첫 인터뷰에서 "SK에서 나태해졌다. 새로운 도전이 필요했고 한화가 적당한 팀이었다"는 발언으로 SK 팬들을 뒷목 잡게 하는 말을 했다.
한편 SK는 한화에서 정근우의 FA 보상선수를 지명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으나, 보상선수 지명을 포기하고 연봉 300%에 달하는 보상금액만 받기로 결정했다. 한승택 말고는 건질 선수가 없었는데 KIA가 먼저 가져가버렸다.

3.1.8.1.2. 한화 입장

구단이 소위 류현진 머니로 이미 많은 실탄을 보유한 상태라, FA에서 공격적인 투자를 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이어진 정근우의 영입 소식에 많은 한화팬들이 쾌재를 불렀다. 특히 고질적인 내야 수비 불안이 문제이던 한화로서는 정근우가 내야 수비의 사령관적 역할을 해주길 기대하는 입장. 이로써 한화는 이용규-정근우로 이어지는 소위 국가대표급 테이블 세터를 보유하게 되었다.
더불어 청소년 대표 시절부터 오랜 친구이던 정근우-김태균의 친구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는 팬심도 있었다. 실제로 정근우의 한화 입단식에서 김태균이 환하게 웃으며 꽃을 건네주기도 했다.

3.2. 한화 이글스 시절


'''한화 이글스 시절 정근우'''

3.2.1. 2014 시즌



이적 첫 시즌
한화에서 김태균, 피에와 함께 고군분투하며 타선을 이끌었다

3.2.2. 2015 시즌



[image]
시즌 시작 전 부상으로 엔트리에서 빠지는 등 시작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홈런, 타점, 득점 커리어 하이 기록을 세우는 등 맹활약했다.[14]

3.2.3. 2016 시즌



한화에서의 '''커리어하이''' 시즌
20-20까지 홈런 단 2개가 부족했지만 홈런, 안타, 타점, 득점 커리어 하이를 재경신하고 7년만의 득점왕[15]까지 수상하였다.
KBO리그 최초의 '''11년 연속 20도루''' 기록도 달성하였다.

3.2.4. 2017 시즌



부상 회복이 덜 되었는지 전에 없던 실책을 자주 기록하고 있었지만, 공격 면에서는 2017년 5월 5일 kt전에서 정성곤을 상대로 만루홈런을 쳐내는 등 상당히 활약했다. 12년 연속 20도루는 실패했지만 사실상 정근우의 마지막 전성기 시즌이었다.
2017년 6월 14일 sk전에서 문승원을 상대로 통산 100호 홈런을 쳐냈다.

3.2.5. 2018 시즌



2루수 자리를 정은원에게 내주고 첫 1루수 시즌을 보냈다.

3.2.6. 2019 시즌




3.3. LG 트윈스 시절


2019년 11월 20일 있던 2차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 LG 지명을 받고 팀을 옮겼다. 상당히 충격이라는 반응이 적지 않았지만 본인은 그동안 신경써준 한화 이글스와 자신을 선택한 LG 트윈스에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한편 과거 빈볼시비를 일으켰던 정찬헌이 LG에 여전히 뛰고 있으니 조인성심수창 처럼 참된 약속을 해야 하는거 아니냐는 이야기들이 나오는 중이다.[16] LG에서는 내야가 약한 팀 사정상 2루수로 출전할 것으로 보인다.[17] 아니면 페게로와 재계약하지 않고 정근우를 1루수로 쓸 수도 있기는 한데, 그러려면 2루수가 가능한 홈런 타자 용병을 영입하는 매우 어려운 미션이 주어진다.[18][19]
본인은 2루수에 대해 여전히 자부심이 있고 미련이 많이 남았던듯. 류중일 감독이 정근우와 상견례를 한후 "세칸(2루) 되제?" 라고 묻자 힘차게 된다고 답한후 다시 2루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고 한다. 나이가 많으니만큼 풀타임은 확실히 무리이고 정주현[20]과 적절히 번갈아서 2루를 본다면[21] 체력적으로 무리가 없고 기용 효과가 클 것이다. 아니면 최재원이나 구본혁 등을 2루수로 선발 출장시킨뒤 중요한 순간 대타로 내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공격(1할 타자)이나 수비(실책 1위)나 완전히 맛이 간 모습을 보이며 한용덕을 재평가받게 만들고 LG 먹튀역사에 한 장을 더 추가했다. 요새는 그냥 '착한 이택근'이라고 불린다. 이택근은 LG팬들에게 이순철급의 원수인데 얼마나 못 하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사실 본인이 2루수를 하고 싶든 말든 이미 2018년부터 '''2루 수비가 맛이 가 있었다. 그것도 평범한 플라이마저 놓칠 정도로 말이다'''.[22] 한용덕은 억울하고 한화 팬들은 이제 알았냐며 어이없어하는 상황. 정주현만 독박을 쓰고 기회를 잃어버린 격이 되었다. 결국 한용덕과 정민철만 불쌍해진 격이 되고 만 셈.
후반기에는 정주현에게 밀려 1군 엔트리에 있어도 거의 경기에 보이지 않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시즌이 끝난 뒤 11월 8일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3.3.1. 2020 시즌




4. 국가대표 경력


현재 연금점수는 160점으로 상한선인 110점을 아득히 초과하였다.

4.1. 2006 도하 아시안 게임: 3위



4.2. 2007 아시아 야구 선수권대회: 준우승


2007년 아시아 야구 선수권대회는 2008 베이징 올림픽 아시아 예선을 겸한 대회였다.[23] 이 대회 우승팀만이 올림픽에 직행할 수 있는 상황에서 정근우는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었다.
이 대회에서 정근우는 대만과의 1차전 3번타자 겸 DH로 선발출전하여 팀의 5:2 승리에 일조했지만 이후 팀이 일본에게 패해 2승 1패로 준우승에 머물러야만 했다.
이 때 2008 베이징 올림픽 본선 직행 티켓을 놓친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은 2008년에 열릴 대륙별 플레이오프를 통해 본선 진출을 노려야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4.3. 2008 베이징 올림픽 최종예선



4.4. 2008 베이징 올림픽: 우승


2008 베이징 올림픽에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서 참가했다. 정근우는 대회내내 2루수 or 지명타자로 배치되며 팀의 연승을 이끌었다.
특히 선발출전한 캐나다와의 조별리그 경기에서는 3회 결승 솔로포를 터트리며 팀에게 1:0 승리를 안겨줬다. 당시 마운드에서 9이닝 완봉승[24]을 거둔 류현진과 함께 유일하게 밥값을 한 선수였다.
대회 최종성적은 8경기 출장, 29타수 9안타. 0.310/0.310/0.448, 1홈런 2도루 (1타점, 1득점), 공격뿐만 아니라 수비에서 역시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팀의 9전 전승 금메달을 이끌었다.

4.5. 2009 WBC: 준우승


2009 WBC는 정근우의 커리어 사상 첫 메이저 국제대회였다.[25]
지난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의 활약은 이번 대회에 역시 이어졌다. 정근우는 대회내내 팀의 주전 2루수로서 출전하며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준우승을 이끌었다.[26]
정근우는 9경기 24타수 7안타. 0.292/0.346/0.417, 1홈런, 2타점, 7득점을 기록하며 팀의 세이블테서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냈다.

4.6.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우승


지난 2번의 국제대회를 통해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부동의 2루수이자 테이블세터로 자리매김한 정근우는 이번 아시안게임 역시 대표팀에 선발되었다.
아시안게임 야구종목에 참가하는 나라들이 대부분 수준이하의 팀들[27]이기에 정근우 역시 월등한 개인성적을 기록하며 2002년 이후 8년만의 금메달 획득에 기여했다.
정근우는 이 대회 16타수 9안타. 타율 0.563을 기록하며 상대팀들의 마운드를 폭격했다.

4.7. 2013 WBC


무난한 경기가 예상되었던 네덜란드전과 반드시 크게 이겨야했던 대만전에서 말 그대로 죽을 쑤며 대표팀 광탈의 가장 큰 원흉이 되었다. 병살, 실책, 주루사 등 공격의 맥을 끊고 실점을 유발하는 모든 행동들을 선보였다. 1번 타자가 이 모양이니 장작이 쌓일리 없었고 중심타자인 이대호와 이승엽이 테이블 세터 역할까지 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속에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역시 2승 1패로 WBC 사상 첫 1라운드 탈락의 수모를 맛보게 되었다.

4.8. 2015 WBSC 프리미어 12: 우승


국가대표팀 주장을 맡아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에게 WBSC 프리미어 12의 초대 우승 타이틀을 안겨주었다.
사실 대회 개막전 정근우의 컨디션은 좋지 못한 것처럼 보였었다. 평가전 격으로 치루어진 쿠바 야구 국가대표팀과의 서울 슈퍼시리즈에서 2경기 모두 선발출전했지만 9타수 2안타, OPS 0.444로 부진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본 대회가 개막한 후 타격감을 끌어올려 맹타를 휘둘렀다. 특히나 일본과의 4강전에서 오타니 쇼헤이에게 유일하게 안타를 기록했을 뿐만아니라,[28] 바뀐 투수 노리모토를 상대로 9회초 대역전극을 만들어낸 첫번째 타점을 기록했다.
대회 최종성적은 8경기 34타석 12안타. 0.353/0.421/0.471, 2도루, 9타점, 7득점을 기록하며 이번 대회 최고의 테이블세터로서 진가를 드러내었다.
여담으로 2루타를 친후 야마다 테츠토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잡혔는데, 스포츠대백과에 출연해서 직접 언급하기론 나이가 몇살이냐고 물어봤다고 한다.

5.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사사구
장타율
출루율
wRC+
2005
SK
52
88
.193
17
2
0
0
5
11
4
8
.341
.304
16.2
2006
120
430
.284
122
19
'''4'''
(4위)
8
42
69
'''45'''
(2위)
40
.402
.342
113.0
2007
111
341
'''.323'''
(4위)
110
24
2
9
44
62
24
41
.484
.395
149.1
2008
124
491
.314
'''154'''
(2위)
20
4
8
58
73
'''40'''
(3위)
49
.420
.373
122.6
2009
127
480
'''.350'''
(5위)
'''168'''
(2위)
29
4
9
59
'''98'''
(1위)
'''53'''
(2위)
78
.483
'''.437'''
(5위)
145.9
2010
128
485
.305
'''148'''
(4위)
25
2
2
48
75
'''33'''
(5위)
55
.377
.375
97.6
2011
90
326
.307
100
19
0
6
40
60
20
42
.420
.384
118.4
2012
127
467
.266
124
13
'''4'''
(4위)
8
46
53
22
53
.362
.339
100.5
2013
112
407
.280
114
19
3
9
35
64
28
57
.408
.368
107.5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사사구
장타율
출루율
wRC+
2014
한화
125
464
.295
137
28
5
6
44
91
32
75
.416
.391
101.7
2015
126
468
.316
148
30
2
12
66
99
21
69
.466
.403
119.2
2016
138
575
.310
178
31
2
18
88
'''121'''
(1위)
22
69
.464
.381
112.5
2017
105
391
.330
129
22
0
11
46
73
6
42
.471
.392
120.4
2018
102
375
.304
114
24
1
11
57
63
6
46
.461
.377
111.8
2019
88
277
.278
77
10
1
3
30
37
8
24
.354
.334
94.3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사사구
장타율
출루율
wRC+
2020
LG
72
154
.240
37
4
0
1
14
23
7
19
.286
.322
64.5
'''KBO 통산'''
(16시즌)
1747
6219
.302
1877
319
34
121
722
1072
371
767
.422
.376
112.0
[1] 고려대 입학을 앞두고 부산고가 고려대와 연습경기를 했는데 조성옥이 '너 꼭 고대에 가야한다'면서 1번타자로 이름을 올렸고 그날 정근우는 3안타를 쳤다고 한다.[2] 알다시피 입단을 거부하고 미국에 갔다.[3] 1982년생 부산 출신 선수들이 많다. 같은 부산고 동료인 추신수와 김백만, 라이벌 경남고이대호장기영, 부산상고채태인, 이승화, 차정민, 경남상고김경언, 백승룡, 송산, 김덕윤, 부산공고이명우 등. 이명우는 1982년생이나 수술로 1년을 유급하여 이들보다 늦게 졸업했다.[4] 같은 부산고의 김백만은 2차 1라운더로 한화 이글스에서 계약금만 2억원을 받았던 걸 볼 때 신빙성은 낮다.[5] 2루 백업, 정확히는 내야 전천후 조커로 조동찬강정호가 역할을 맡았다. 막상 강정호는 부진한 최정을 대신해 3루수 주전으로 나와 13타수 8안타 3홈런이라는 공격의 핵심으로 활약했다.[6] 그래봤자 최정에 비해서는 그냥 버로우지만.[7] 이 기록은 2014년 서건창이 역대 최다 안타인 201안타를 기록하며 넘어선다.[8] 다만 아쉬운 것이 한화 내야수들은 전진 수비를 하고 있었고, 한화도 11회 초에서 스퀴즈 번트를 시도했기 때문에(실패했지만)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2루 주자 최정이 끝내기임을 직감하고 거의 뛰지 않았기 때문에 한화 입장에서 침착하게 1루->3루 병살을 노려볼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안승민은 무기력하게 공을 포수에게 토스해버렸고, 경기는 끝나버렸다. SK 와이번스와 한화 이글스의 여실한 기본기 차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한 장면으로 꼽을만하다.[9] 주지하다시피 3차전까지 정근우의 타율은 0.583였다. 하지만 4차전부터 6차전까지 의 타율은 '''0'''이다(...).[10] 이 둘 외에 손시헌, 이종욱, 최준석도 두산과 협상이 결렬되며 FA 시장에 나왔다.[11] 당초 SK팬들은 협상이 오래가자 50억~60억 정도만 가지고 협상하려 했을 것으로 짐작했다.[12] 협상의 의지가 없다는 것을 보인 것이라고 해석하는 팬들도 대다수.[13] 80억은 감정이 상해서 그냥 불러본 것이라든가, 고려대 선배가 직접 찾아와서 감명받았다고 하는데, SK 단장인 민경삼도 고려대 출신이다.[14] 특히 홈런의 경우 생애 첫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했다.[15] 121득점, 개인 첫 100득점 이상 기록[16] 일단 정찬헌 측에서 먼저 전화를 걸어 '곧 뵙겠다'라고 인사했다고 한다. 본인도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경기 중에 있었던 일이며, 모두 잊었다. 착한 후배일 것'이라는 인터뷰를 남겼기도 했고. 얼마 후 "반갑다. 잘 지냈냐?"는 인사를 정근우가 했다는 걸 보면 화해한 듯..[17] 류중일 감독이 정근우에게 제일 먼저 한 말이 "쎄컨(2루수) 되제?" 라고 한다(...)[18] 사실 안치홍은 시즌 중반 손바닥 부상 이후로 좀처럼 보기 힘들어졌고, 벌크업 이후 수비 면에서 불안한 면이 많아진 데다 공인구 변경 후 홈런 수가 급감했기 때문에 차라리 정근우를 2루수로 쓰자는 의견이 많다. 하지만 정근우도 한화 시절부터 노쇠화가 찾아왔고 최근 2년 정도 2루수 수비를 거의 본 적이 없는 점을 미루어보아, 외부 FA로 오재원이나 김재호를 데려와서 2루에 앉혀놓고 정근우를 1루수로 기용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이 두 선수도 1985년생(오재원은 빠른 1985년생이다.)이고 서서히 노쇠화가 오는게 보이긴 하는지라 이 대안으로만은 해결책이 확실히 나오진 못하고, 보상선수 문제 때문에 구단에서 만 34세의 두 선수 중 한 명 이상을 영입할 가능성은 낮다.[19] 이 과정에서 정근우가 한화에서 정은원을 기용하게 위해 2루를 밀려 포기 하게 되었다는 식의 말이 퍼졌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정근우로 인해 정은원이 기용되었던 것이다. 17시즌 부터 정근우는 서서히 노쇠화가 오고 있었고, 18시즌엔 나오기만 하면 실책을 하다보니 부상이 아닌 수비 부진을 이유로 2군행을 지시받을 정도로 답이 없는 상황이었다. 허나 아무리 부진해도 같은 지타 요원인 이성열이나 김태균보다 발도 훨씬 빠르고 3할 가까이 치는 타격 능력도 있던 덕에 외야나 1루 수비를 시키면서라도 어떻게든 써보려고 했을뿐. 본인도 20년 초 인터뷰에서 기회를 받았을 때 본인이 못했던 탓이라고 밝혔다.[20] 혹은 최재원이나 구본혁 등[21] 144경기 기준으로 절반을 나눈다면 72경기 정도[22] 정근우가 한화 시절 2루수로 나온 건 2018년 5월 31일이 마지막이었다. 한 마디로 근 1년 6개월 간은 2루 글러브조차 안 끼워봤다는 것.[23] 메이저리거 박찬호류제국이 대회에 참가하여 이슈가 되었었다.[24] 126구[25] 올림픽은 메이저 국제대회가 아닌 아마추어 국제대회다. 당시 출전국중 한국, 일본, 대만, 중국, 쿠바를 제외하고는 모두 2~3진급의 국가대표팀을 꾸려 출전했다. 위에 언급된 5개국 마저도 자국 메이저리거는 차출하지 않은채 자국리그 올스타 선수들로 팀을 꾸렸다.[26] 이는 현재까지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WBC 역사상 최고성적이다.[27] 사실상 대만, 일본, 중국을 제외하고는 한국과 경쟁이 될만한 팀이 없다. 심지어 일본의 경우 자국프로리그 선수들이 아닌 실업리그 선수들을 내보내기 때문에 사실상 우승 경쟁국은 대만 야구 국가대표팀이 유일하다.[28] 이 안타가 굉장히 중요했던 것이 6회까지 한국 타선이 노히트를 당했기 때문이다. 정근우의 안타가 아니었다면 한국전 노히트 노런 대기록을 위해 오타니를 내리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