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고증적 비판
1. 환단고기가 전하는 한민족의 '위대한' 역사
- 환단고기 신도들의 주장으로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 청록색 글씨로 쓰인 부분에 주목하며 읽어봅시다.
같은 맥락에서 거발환(居發桓)이라고도 일컬어진다. 이 나라의 중심지는 흑수와 백산이라고도 하고 천산이나 천해라고도 하는데 그 영역은 자그마치 남북이 5만 리에 동서가 2만 리였다. 환국은 비리국·양운국·구막한국·구다천국·일군국·우루국·객현한국·구모액국·매구여국·사납아국·선비이국·수밀이국의 12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기원전 3898년 환웅이 무리를 이끌고 동방으로 가 배달(倍達)을 세웠는데, 도읍은 태백산의 신시(神市)이고 그 군주는 환웅이라 일컬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그 유명한 단군신화의 천강신화 그리고 웅녀 이야기의 주인공인 초대 환웅은 거발환(居發桓)이라고 하나, 이 또한 고유명사는 아닌 듯. 모두 18대 환웅이 1565년 동안 다스렸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시기부터 중국과의 갈등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환웅과 나란히 환국에서 갈라져 나온 반고가 돈황 인근 삼위산(三危山)에 자리를 잡았고, 5대 태우의 환웅의 아들인 복희가 지금의 중국으로 이주하여 토착민인 수인씨와 유소씨를 밀어내고 일대 세력을 이루었으며, 그 뒤에는 역시 배달국에서 갈라져 나온 소전씨의 아들 신농이 중국의 우두머리가 되어 공상(空桑)을 경계로 배달국과의 국경을 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소전씨의 다른 후손이 바로 헌원이다.
이러한 중국과 배달국의 갈등이 터져나온 것이 바로 14대 환웅인 자오지 환웅 시기다. 맞다. 바로 그 유명한 치우천왕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치우라는 이름으로 더욱 잘 알려진 자오지 환웅은 당시 기준으로 엄청나게 혁신적이었던 쇠(금속)으로 만든 갑옷과 무기를 병사들에게 장착시켰고[1] , 간지포스를 풍기면서 신농씨의 후손 유망을 때려잡고, 연전연승하면서 황제 공손헌원을 마구 털고 다녔다고 한다. 이로써 유망은 쫓아내고 헌원에게는 항복을 받았으며, 이것으로도 모자라 황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전욱과 고신을 다시 털기 시작했으니 그야말로 광개토대왕급 포스로 중국으로 널리 영토를 개척한 결과 하북성과 산동성과 강소성과 하남성 지방을 다 먹어치우고 아예 도읍을 중국 땅으로 옮기기까지 했던 이 시절이 바로 한민족의 황금시대였다.
그러다 이번에는 마지막 환웅과 웅씨 왕녀 사이에서 태어난 왕검이 기원전 2333년에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불함산 아래에서 임금으로 추대되었다. 이로써 왕검의 지휘 아래 천하가 평정되고 조선이 세워졌는데, 도읍은 만주의 아사달이고 그 군주는 단군이라 일컬었다고 한다. 모두 47명의 단군이 2095년 동안 다스렸으며 영토를 진한(辰韓)·마한(馬韓)·번한(番韓)으로 갈라서 진한은 단군의 직할령이 되고 한반도에 해당하는 마한에는 웅씨의 후손이, 중국 방면에 해당하는 번한에는 치우의 후손이 대대손손 다스리도록 했다. 이번에도 역시 중국이 말썽이라, 단군 왕검은 요(堯)와의 전쟁이 이어지자 순(舜)을 지원해 주어서 요를 굴복시키고 태자 부루를 보내어 조선의 치수 기술을 중국에 전수해주었다. 또한 순과 국경을 정해서 하북성을 조선의 영토로 인정받고 강소성에는 자치정부를 두어서 순에게 감독을 맡겼는데, 왕검의 뒤를 이어 즉위한 부루는 순이 하북성에 찝적거리자 역관광을 보내기도 했다고.
단군 부루의 뒤를 이은 3대 단군 가륵은 기존의 문자 대신 독자적으로 가림토 문자를 만들었는데 훗날 한글의 모태가 되었다. 흉노니 몽골이니 선비니 하는 여러 북방민족들도 바로 이 즈음에 한민족으로부터 갈라져 나간 지파들이다. 기원전 1767년에 은나라가 하나라를 정벌하는 과정에서는 단군이 슬쩍 군사를 출동시켜 겐세이를 놓자 은나라의 탕왕(湯王)이 놀라서 얼른 군대를 물려 단군에게 사죄하기도 했고, 이에 단군이 하나라로 출동시켰던 군사를 빼려고 하는데 여기에 하나라가 이를 막자 단군은 거꾸로 은나라를 도와서 하나라를 부숴버렸다(…).
다시 인구가 1억 8천만 명을 찍는 등 한창 태평성대를 구가하던 조선은, 21대 소태 단군에 들어서 개사원의 욕살이던 고등과 그 아들 색불루의 세력이 강성해져 이웃나라들을 침략하고 급기야 단군을 자칭하기에 이르자 스스로 단군위를 버리고 은거해버렸다고 한다. 이로써 22대 단군으로 즉위한 색불루는 백악산으로 천도하고 삼한을 삼조선으로 바꾸는 등 국체 개조 사업에 들어갔으나, 변방에서 신독의 난이 일어나 영고탑으로 몽진하던 중 객사하였고, 그 아들 아홀이 단군위를 이어받아서 가까스로 백악산으로 환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부사정이 어찌되었든 조선은 그 뒤로도 산동과 하북을 차지하고, 은나라를 갈궈서 강소성을 삥 뜯고(…) 바다 건너 일본열도를 평정하는 등 위엄을 떨쳤다.
그런데 '즉위했다'와 '붕어했다'가 전부인 37대 마물 단군부터 42대 을우지 단군까지 185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이를 기점으로 조선은 급속도로(?) 국세가 기울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43대 단군 시절에 벌어진 우화충의 난인데, 우화충이라는 사냥꾼이 무리 수만 명을 모아서 반란을 일으키자 관군이 속수무책으로 깨져나갔던 것이다. 결국 단군은 배를 타고 송화강을 따라 몽진하던 중 객사하였고, 우화충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영웅으로 떠오른 백민성의 욕살 구물이 44대 단군으로 추대되었다. 구물은 국호를 대부여로, 삼한을 삼조선으로 바꾸고 삼조선의 군권을 분할하였는데, 이에 서쪽으로 연(燕)·제(齊)와 공방을 거듭하다가 결국 상곡을 국경으로 화친을 맺었다. 하지만 번조선왕이 연나라의 자객에게 살해되고 기후(箕詡)라는 사람이 46대 보을 단군의 허락을 받아 왕위에 오르면서 번조선은 기자조선으로 정권이 넘어갔다.
이런 와중에 기원전 296년 진조선에서 한개(韓介)라는 사람이 반란을 일으켜 46대 보을 단군이 몽진했다가 환도한 직후 사망하였고, 이번에도 한개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영웅으로 떠오른 장군 고열가가 47대 단군으로 추대되었다. 하지만 고열가는 나라의 국력이 쇠진하고 고구려 사람 해모수가 기자조선과 손잡고 반란을 일으키는 등 내우외환에 처하자, 기원전 238년 스스로 왕위를 버리고 은거하는 것으로 조선을 해체시켰다. 이후 진조선은 5가가 함께 공화정치를 펴다가 6년만에 해모수에게 정권을 이양하여 북부여로 전환되었고, 한편 기자조선은 중국에서 망명해 온 위만이 기준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하면서 위만조선으로 정권이 넘어갔다.
자연스럽게 북부여는 이렇게 생긴 위만조선과 거듭 투닥거렸지만 그 결과는 영 신통찮았고,[2] 결국 기원전 108년에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는 꼴을 손가락 빨며 보고 있어야만 했다.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한무제가 뒤이어 북부여로 쳐들어오자 위만조선에 살던 고열가 단군의 후손 고두막한[3] 이 분연히 의병을 일으켜 눈부신 활약으로 한나라를 몰아낸 뒤 4대 고우루 단군에게 당장 물러나라고 요구했고(…) 이러한 고두막한의 기세에 데꿀멍한 고우루단군은 병사, 뒤이어 즉위한 해모수의 증손 해부루는 군대를 동원한 고두막한의 위협에 순순히 수도를 바치고 가섭원으로 물러났다. 이로써 졸본부여는 북부여, 가섭원부여는 동부여가 되었다. 이후 고두막한의 아들 고무서는 동부여로부터 도망쳐 온 해모수의 다른 증손자인 고주몽을 받아들여 사위로 삼고 왕국의 후계자로 지정했으니, 이것이 바로 고구려의 시작이다.
이후 환단고기에서 고구려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 비해 의외로 실망스럽다. 태백일사 고구려본기 단일 기록인데다, 기전체고 편년체고 아무런 원칙 없이 사건 중심으로 구성되어 그저 한민족이 위대하게 보일 수 있는 떡밥에만 집중하는 티가 확연하다.[4] 고구려왕을 열제(烈帝)로 호칭한다던가, 을파소가 '''조의선인'''을 조직하였고 을밀과 연개소문이 조의선인 출신이라던가, 고구려와 백제가 요서와 중국의 동부 해안을 돌아가며 장악했다던가 정도인데, 이렇다 보니 심지어 백제와 신라에 대한 것도 별도의 체제 없이 고구려본기로 끌어다가 서술하고 있다. 그래도 역시 가장 큰 분량을 차지하는 건 7세기 중국과의 대전쟁. 그런데 이것도 1차 고구려-당 전쟁의 화려한 승리까지만[5] 서술하고 끝내버려서 보는 이로서는 뭐 어쩌란 거지(…) 싶을 정도. 그나마 고구려는 본기라도 있지, 백제는 신라는 그런 것도 없다.
그 뒤로 이어지는 대진국본기나 고려본기도 뭐, 이와 마찬가지다. 오히려 국제정세가 비교적 안정된 시대다 보니 덩달아 떡밥도 줄어서 개설서만 봐도 이만큼은 알겠다 싶은 수준. 다만 특징적으로 일본에 대한 서술이 묘하게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한다는 정도? 고려본기에서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궁예를 안승의 먼 후손이라 전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안 그래도 많지 않은 분량에 고려 후기 이존비(이암의 조부)와 이암과 이강(이암의 아들)의 이야기가 비교적 상당한 분량으로 나오는데, 무엇 때문에 이 두 사람이 강조되는지는 어허, 이쯤 되면 말 안 해도 아셔야지.(...) 그리고 최영이 요동 정벌군의 팔도도통사로 임명되는 대목에서 고려본기를 끝으로 모든 환단고기 분량도 끝난다.
2. 양적 고증오류
2.1. 크고 아름다운 환상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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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환국과 환인에 대한 이야기는 초장부터 환인을 신(神)이라고 칭하는 데에서 보이듯 신화적인 성격이 짙게 깔려 있다. 실제로도 이유립은 1976년까지만 해도 환국을 신화적인 유토피아로 묘사하고 있었지만, 환단고기를 출판하면서 이를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개변했던 것이다. 물론 정말로 큰 문제는 이것을 역사적 사실로 인식하려는 사람들이겠지만.
일단 환국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그리고 보는 이들에게 가장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는 환국의 강역 문제부터 따져보자. 환단고기에서는 환국의 강역에 대해서 삼성기 전 하편과 태백일사 환국본기에 두 번이나 거듭해 동서 2만 리, 남북 5만 리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 어마무지한 기록에 대해 대다수의 사람들이 알아서 머릿속에서 그 크기를 보정해 위와 같이 환국의 지도를 크고 아름답게 그리지만, 엄밀히 말해 위 지도는 크게 잘못되었다. 거듭 강조되는 바이지만 헷갈리지 말자. 환국은 '''동서 5만 리, 남북 2만 리'''가 아니다. '''동서가 2만 리, 남북이 5만 리'''다. 가로축(위도선)보다 세로축(경도선)이 두 배 이상 길다. 따라서 정말로 환단고기 본문에 입각해 환국의 지도를 그려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지도가 나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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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안에 표시가 다 안 된다(…). 남북 5만 리를 현대의 미터법으로 환산해보면 2만여km(19636.36…km)가 산출되는데, 애당초 1km의 정의가 극점에서 적도까지 자오선의 1만분의 1이다.[6]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환단고기의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환국은 남극에서 북극까지를 다스리고 있었다'''는 충격적인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여기서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면 아문센 VS 스콧 문서를 강추. 동서 2만 리라는 거리도 또한 러시아의 극동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유라시아를 가로질러서 터키 앙카라까지의 직선 거리가 약 2만 리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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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보정하는 것처럼 동서 5만 리에 남북 2만 리로 거리 방향을 바꾸어 보면 어떨까? 하지만 이것도 지도 안에 표시가 다 안 되기는 마찬가지. 동서 5만 리에 남북 2만 리는 아예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가로지르고도 남는 거리다. 아시아를 넘어 세계라도 정복할 기세(…).
하지만 지도의 형태에 대해서는 달리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데 고문서를 볼때 먼저 고려해야 하는 부분이 현재의 과학기술이나 지리도에 근거하여 보는 것 보다, 그 당시 세계지도에 대한 인식이 어떠 했는 지를 먼저 생각해 봐야 한다. 이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것이 1402년에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이다.
그림을 오면 오히려 셰계지도가 현재와는 달리 좌우가 좁고 상하가 길다. 이는 마치 중세 시대 쓰여진 책에 천동설을 주장한다고 이를 위서라고 단정 할 수 없듯이 서계지도에 대한 인식 부분에 대해서는 반론여지는 있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오히려 이를 오류라고 하기 보다 근세에 쓰여진 책은 아니라는 증거도 될 수 있다.
여기에 단위 환산의 문제를 제기해서 환단고기의 도량형이 오늘날보다 훨씬 작았으리라는 가정을 제기한다면 모르겠는데, 문제는 그보다 더욱 근본적으로 지금으로부터 수천 년 전도 아닌 자그마치 기원전 7197년에 자그마치 수만 리에 달하는 거리를 과연 어떻게 측정할 수 있었을지를 먼저 의문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보다도 더 근본적으로는 애당초 문자도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던 당시에 리(里)라는 단위를 어떻게 사용하고 그 정보를 후세에 전달할 수 있었을까? 언어도 통일되지 않고 교통과 통신 수단도 거의 전무한 상황 속에서 그 인구가 아무리 수만 명에 불과하다 해도 산과 바다와 강과 밀림 등 수많은 지형적 난관이 있는 이 엄청난 영역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모종의 인물을 중심으로 결합된다는 것이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더불어 환단고기에는 환인 7명이 3301년 혹은 6만 3182년을 이어서 다스렸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 이유립이 추산하였던 구석기 후기와 구석기 전기의 기간이다. 그러니까 결국 '''환국의 존속 기간은 석기시대에 대입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말.''' 그런즉 이처럼 망상에 논리를 끼워맞추려다 보니 무리수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인지라, 후자에 따르면 환인 한 명에 평균 9026년, 전자에 따르면 환인 한 명에 평균 472년을 다스렸다는 계산이 나온다. 추종자들은 한 명의 환인이 하나의 왕조이지 단일인이 아니라고 역설하지만, 1000년을 갔던 왕조나 2200년을 갔던 나라는 알아도 9026년을 갔다는 왕조는 정말로 전무후무하고 황당하기 이를 데 없다.
따라서 환국과 관련된 이야기는 이윤기의 말처럼 절대로 과학적·역사적 사실과는 무관한 '20세기에 새로 만들어진 신화'임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애당초 절대적인 신화의 영역에서 출발한 것이기도 하고. 덧붙여서 환국을 이루고 있던 12국가와 영역이라는 것들을 분석해보면 다음과 같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진서 사이전과 광개토왕릉비문을 주로 섞고 또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걸 적당히 짬뽕해서 연성해낸 것. 충격과 공포의 5만여 리라는 거리도 사실 여기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참 간파하기 쉬워서 좋다(...).
2.2. 자꾸만 사라지는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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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정작 위 지도의 영역도 환단고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환단고기의 내용을 그 추종자들이 제멋대로 부풀린 것이다. 환단고기에서 묘사하는 한민족의 강역은 '''의외로''' 좁다. 치우가 정복한 영토는 고작해야(?) 탁록과 회하를 넘지 않았으며, 고조선의 강역이라는 것도 만주와 요서 지방에 그치고, 진출 범위를 멀리 잡아도 전기에는 티베트까지 넘나들다가 나중에는 항산(恒山)까지도 못 가서 헥헥거리는 모습이 비치니 그저 안습(...).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환단고기의 내용은 무조건 큰 영토를 추구하는 '대물빠'적 관점에서 보면 실망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고, 대륙설에 도취된 사람의 시선에서 읽어보면 굉장히 실망스럽다.
우선 환국에서 배달국으로 넘어가면서 위에서 살펴보았던 광활한 영토(...)가 사라진 것부터가 미스테리. 그래도 환단고기에 보면 "이때 족속의 호칭이 한결같지 않고 풍속이 점차 달라졌다"는 내용이 있기는 한데, 이제 막 분화되기 시작한 민족들의 반발에 '''자비롭게''' 독립을 인정해주고 땅을 떼어주다 보니 점차 줄어든 것이라는 의미가 되겠다.(?!) 작은 부족 시절부터 조그마한 땅덩어리 두고 피 터지게 싸운 것이 인간의 역사인데 저런 세계구급 땅덩어리를 자비롭게 포기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헛소리인지. 하다못해 그렇게 불가피하게 영토를 떼주더라도 최소한 봉건제처럼의 주종관계를 구성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나마 가장 설득력 있게 구성할 수 있는 스토리는 전세계적으로 환국에 저항하는 '''반란이 일어나''' 환국이 해체되거나 환국이 가지고 있던 초고대문명스러운 '''교통·통신망이 한순간 증발'''하는 등 어떻게든 국가 막장 테크를 탔다는 설정이다.
환국의 뒤를 이어 즉위한 배달국의 초기 영역이 정확하게 묘사된 바는 없지만, 그 중심지가 태백산 신시이고 이후 중국의 비옥한 땅을 탐내어 이주해가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적어도 만주에서 요서를 넘지 않는 선이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이후 5대 태우의 환웅에 이르러서는 막내 왕자 복희가, 8대 안부련 환웅에 이르러서는 소호와 소전이 이주해가는 등 지속적인 확장으로 배달국의 강역은 급속도로 뻥튀기되었고, 급기야 10대 갈고 환웅은 중원의 패권을 잡은 소전의 아들 신농과 강역을 정해 공상(空桑) 이동을 배달국의 땅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런즉 기원전 30세기 즈음에는 위와 같았다는 말이 되겠다.
하지만 이로부터 300년 뒤에 치우가 정복했다는 영토를 보면 이로부터 이미 자기 땅인 동네를 재정복하고 앉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치우가 차지한 영토는 기(冀)·연(兗)·회(淮)·대(岱)라고 되어 있고 그 중에서도 특히 회와 대가 새로 정복한 땅으로 여섯 번이나 강조되고 있는데, 문제는 '''이곳은 이미 300년 전에 배달국에 귀속된 공상 이동의 바로 그 땅이다.''' 또한 탁록 서쪽으로 요서 지방까지는 창힐의 영역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역시 배달국이 창힐에게 '''자비롭게''' 독립을 인정해주었다는 소리가 된다. 요약하면 배달국의 영역은 300년 사이에 요서와 산동-강소 지방이 소리 없이 증발해버렸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이어지는 단군시대에도 영토 증발 신화는 계속된다. 초대 단군인 왕검의 외할아버지 웅씨왕(熊氏王)이 전사하자 왕검이 그 자리를 이어받아서 온 한민족을 통일했다고 하니 배달국 말기에 모종의 난세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정작 다른 기록들에서는 아주아주 평화롭게도 백성들이 알아서 복종하며 임금으로 추대했다고 서술되어 있으니 이 무슨 인지부조화(...). 이에 단군 왕검은 자신이 통일한 땅을 셋으로 갈라서 진한·마한·번한으로 나누어 다스렸다고 하는데, 단군 왕검 자신은 진한을 다스리니 수도는 송화강 유역의 아사달이고, 마한에는 웅씨왕의 일족 웅백다를 책봉하니 수도는 대동강 유역의 달지국[7] 이고, 번한에는 치우의 후손 치두남을 책봉하니 수도는 요서의 험독[8] 이었다고 한다.
또한 앞에서 '''갈고 환웅이 귀속시키고 치우가 재정복했던 회·대 지방은 또 어느새 흘리고 다녔는지''',(...) 단군 왕검 재위 67년에 다시 제후들을 평정하고 일종의 자치정부라 할 수 있는 분조(分朝)를 낭야성에 두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이에 대해서도 단군세기에는 순임금에게 분조를 감독시켰다고 하고 태백일사에는 번한이 분조의 정무를 겸했다고 해서 환단고기 안에서도 말이 상충된다. 그래도 절충하자면 번한이 맡아 다스리지만 순의 조언이나 의견을 수렴하는 지역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가 하면 위에서 치우가 애써 차지했던 하남성 공상, 하북성 탁록 일대는 어느새 증발해버려서 더 이상 조선의 영역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즉 단군이 개국한 기원전 22세기 즈음에는 위와 같았다는 말이 되겠다. 덤으로 티베트까지 원정하여 중앙아시아의 강거(康居)에 원정한 사실이 있으나 영토를 확장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부터 다시 천여 년이 지나서, 기원전 13세기에 21대 소태 단군을 몰아내고 단군이 된 색불루가 삼한을 삼조선으로 바꾸고는 은나라를 갈구어서 회·대 지방을 얻었다고 한다. 거꾸로 말해 이 즈음이면 '''갈고 환웅이 귀속시키고, 치우가 재정복하고, 단군 왕검이 평정했던 회·대 지방이 어느새 다시 증발'''해 은나라 땅이 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이때 번조선의 제후국 가운데 하나였던 남국(藍國)이 크게 흥기해 엄독홀로 이주하고 은나라와 국경을 접했는데, 바로 그 남국의 왕 금달이 또다시 은나라를 갈구어서 회·대 지방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고작 44년 만에 '''갈고 환웅이 귀속시키고, 치우가 재정복하고, 단군 왕검이 평정하고, 색불루가 뜯어냈던 회·대 지방이 어느새 다시 증발'''해 은나라 땅이 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덤으로 다른 한 갈래는 멀리 서쪽으로 가서 관중에 여(黎)라는 나라를 새로 세웠고, 이로부터 조선의 세력이 '''멀리''' 항산까지 미쳤다고 하는데 티베트까지도 원정가시던 분이 갑자기 항산 정도를 가지고 멀다고 말씀하시니 이게 대체 어찌된 일...?
그래도 500년 정도 이대로 영토가 유지되어오는 듯 보이다가, 기원전 8세기가 되면 춘추시대의 제후국들이 등장하면서 갑자기 고조선의 영토가 찌그러든다. '''갈고 환웅이 귀속시키고, 치우가 재정복하고, 단군 왕검이 평정하고, 색불루가 뜯어내고, 금달이 정복했던 회·대 지방은 더 이상의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당연히 증발'''한 듯하고,(...) 대신 이제는 그 자리에 연나라와 제나라가 등장해서 조선의 세력과 투닥거린다. 조선은 이들과 상곡·조양을 국경으로 삼고 나중에는 만·번한까지 밀렸다고 하지만, 번한이 번조선의 수도 험독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이건 밀린 것도 아니고 상곡·조양이나 만·번한이나 애당초 거기서 거기다(...).
춘추시대 당시의 고조선은 이제 요서에서 벗어나 요하 일대의 부족국가들을 정복활동을 통해 차례차례 복속시켜나가고, 연나라, 고죽국, 동호 등과 티격태격하는 수준이었고, 전국시대에는 요녕성 전역과 길림성, 한반도 북부에 이르는 영역을 통치하에 두며 만주와 한반도에서 감히 넘볼수있는 국가가 없을 만큼 패권을 장악했지만 그 전성기에도 연나라를 멸망시키지는 못하고 티격태격했으며 나중에는 연나라에게 일격을 당해 본거지를 상실한다. 환단고기에서는 나의 크고 아름다운 조선이 그랬을 리 없다는 생각으로 번조선이라는 허수아비를 내세웠던 것이다.[9] 맞는 건 번조선이 하고, 때리는 건 단군조선이 하고(...). 이밖에도 때때로 가끔 제나라(齊)와 싸운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춘추전국시대의 진짜 강국이었던 진(晉), 진(秦), 초(楚)와는 아예 충돌한 기록 자체가 없다. 여기까지 영토가 뻗어나간 적이 없는 것. 따라서 의외로 환단고기의 단군조선은 그렇게 까지 강대한 나라가 아니며, 국력은 영토와 별개로 '''잘 쳐줘서 전국칠웅과 비슷한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는 '''설정'''으로 되어 있다.[10]
정리하자면 단군시대까지 환단고기의 영토 주장은 이런 바보짓거리가 되겠다.
- 갈고 환웅이 하남성(兗), 하북성(冀), 산동성(岱), 강소성(淮)을 확보(기원전 30세기)했지만 어느 순간 증발.
- 치우 천왕이 하남성(兗), 하북성(冀), 산동성(岱), 강소성(淮)을 정복(기원전 26세기)했지만 어느 순간 증발.
- 단군 왕검이 하북성(幽), 산동성(岱), 강소성(淮)을 확보(기원전 2267)했지만 어느 순간 증발.
- 단군 색불루가 산동성(岱), 강소성(淮)을 정복(기원전 1285)했지만 어느 순간 증발.
- 남국왕 금달이 산동성(岱), 강소성(淮)을 정복(기원전 1236)했지만 어느 순간 증발.
3. 질적 고증오류
3.1. 시대를 초월한 통치제도
사실 조금이라도 생산수준과 정치체제의 발전 정도를 관련지어 사고할 수 있다면, 위에서 언급된 내용들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 쉽게 간파할 수 있다. 동북아시아에서 고고학적으로 확인되는 기원전 수천년 즈음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런 광대한 영토를 엄밀한 역사적 개념의 '국가'로 다스리는 건 어디의 누구라도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하·은·주라고 하는 중국사의 첫머리에 위치하는 나라들 또한 말이 '나라'지 그 크기는 고작해야 '''오늘날의 읍 단위 도시 하나와 그를 둘러싼 공동체 정도'''[13] 에 지나지 않았다. 중국만이 아니라 고대 수메르, 이집트, 그리스, 인더스 등도 역시 수없이 크고 작은 도시국가들이 난립한 모습이었고, 한국사에서도 수천 호 단위의 78개 소국들이 집합된 삼한이 있다가 단계적으로 통합되어갔다.[14] 즉 이러한 과정은 정치사적인 발전 단계에서 보편적이고도 당연한 모습이었다.이와 더불어, 단군조선의 역사적 실체에 대한 엄밀한 이해가 필요하다. 단군조선을 하나의 역사적 실체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조선이 일개 읍락국가의 명칭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당시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는 단군조선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성격의 읍락국가들이 수없이 공존하고 있었고, 단군조선은 그러한 수많은 읍락국가들로 구성된 국제 사회에서 중심된 역할을 수행하는 일개 읍락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단군조선을 이와 같은 개념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단군조선의 뒤에 등장한 위만조선, 부여, 고구려 등 한국의 국가들도 후대의 왕조와는 달리 수많은 읍락국가군으로 구성된 국제 사회의 '''대표적 읍락국가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상고사』의 신채호 등 후대의 민족주의 사가들은 자기 시대의 왕조상을 수천년 전의 단군조선에 투사하여 단군조선을 마치 방대한 규모의 영토를 가진 국가인양 묘사했던 것이다.[12]
하지만 이러한 세계사적 흐름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란 듯이, 환단고기에 묘사되는 국가체제는 그야말로 시대를 초월해 있다. 환단고기를 해석해보면 조선은 만주에서 하북성 및 산동성과 한반도를 아우르는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봉건제와 군현제를 병행'''하였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사실 여기에서 보이는 봉건제라는 것 자체도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관료화된 모습'''을 보인다. 이들은 직위를 세습하고 일정한 외교, 인사, 군사권을 행사했지만 기본적으로 분급된 영역을 단군을 대신해 '관리'하는 것이었으며, 군사권이 단군에게 종속되어 있었고, 그 처신에 따라서 단군으로부터 상이나 벌을 받았고, 나아가 단군이 일방적으로 책봉하거나 폐위시킬 수도 있었다.
간접통치의 봉건제가 이러하니, 직접통치의 군현제를 실시했다는 기록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단군조선의 행정 구획으로는 가장 먼저 주(州)가 확인되는데, 중국의 우공구주(禹貢九州)에 비추어보면 단군조선에도 주가 존재했다는 게 납득 가능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사실 전국시대까지만 해도 중국의 '구주'라는 것은 실제적으로 구획된 각이한 아홉 개의 주가 있었다는 게 아니라, 단순히 많은(九) 고을(州)[16] 을 뜻하는 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 전국시대에 들어와 광역적인 실체가 부여되고, 이에 기반해 한무제가 전국을 13주로 나누어 다스리면서 주가 실제적인 행정구획이 되었던 것이다.
즉 주(州)라는 것은 전한시대에 들어서 비로소 광역적 행정단위의 의미로 정착되었으므로 '''단군조선 시기에 벌써부터 행정구획으로서의 주가 존재했다거나, 순임금에 그러한 행정단위로서의 주가 설치되었다'''는 내용이 실린 환단고기의 기록은 자연스럽게 역사상의 실제와 어긋나는 엉터리 소리가 된다. 창작할 거면 차라리 처음부터 독자적인 명칭을 만들 것이지, 그걸 또 굳이 중국의 주라는 명칭을 가져다 써서 그 의미가 형성되고 변동된 과정과 시기를 추적하면 환단고기의 내용이 거짓임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또 기원전 1767년에는 단군흘달이 주(州)만이 아니라 현(縣)도 설치했다고 나오는데, 이러한 현이라는 제도 또한 중국사의 전개 과정을 통해 충분히 그 기원이 추적 가능하다. 현이라는 것은 춘추시대에 처음 등장하는데 기원전 6세기에 진(晉)에서 현대부(縣大夫), 초(楚)에서 현공(縣公)·현윤(縣尹)을 통해 멸망시킨 읍을 변경을 방위하는 군사 거점으로서 다스렸던 것이 그 시초가 된다.[17] 물론 이 시기의 현은 아직 봉건제의 변형으로서 후대와 같이 군주의 직접지배라는 성격을 띤 것은 아니고, 실제로는 제후가 측근에게 준 봉읍이나 마찬가지로 사유적인 영지였다. 즉 '''종래의 간접적인 봉건지배체제에서 직접적인 군현지배체제로 전환되는 중간 단계'''에 해당하는 것이다.
하지만 환단고기에는 그런 거 없고, '''그냥 내가 직접지배 하겠다는데 뭔 상관(...)'''이라는 수준이다. 주나라 여왕(厲王)이 산림천택을 국유화하자 백성들이 들고 일어났고, 초나라 영왕이 진(陳), 채(蔡)를 현으로 삼았다가 반란이 일어나 패가망신한 것을 생각해보면 이렇게 큰 영토를 단번에 현으로 만들었다가는 나라가 수십 번은 더 뒤집혀도 모자랄 상황이다. 때문에 단순한 군사거점을 넘어서는 본격적인 군현제의 실시를 위해서는 생산력의 획기적 개선, 중앙의 절대적인 힘의 우위, 지방의 씨족적 공동체 질서 와해, 군주권을 보좌하는 측근 집단의 출현 등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도대체 환단고기 어디에 그런 거대한 변화의 묘사가 나오나?'''(...)[18][19]
3.2. 엉터리 방터리 사회상
이와 같은 제도적인 측면과 표리를 이루는 것이 바로 당대의 사회구조, 즉 통치와 생활의 중심이었던 각 읍락 내부의 사회적 모습이다. 물론 단군시대 당시의 사회적 모습이 어떠하였는지를 직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문헌은 오늘날 존재하지 않지만, 대신 환단고기에서 '''상대적으로 봉건세력의 활동이 제약'''되고 '''군현제가 보편화'''되었던 것으로 기술한 기원전 8~7세기[20] 의 청동기시대 사회구조를 현재까지 축적된 고고학적 정황을 통해 추적하고 환단고기의 내용과도 비교해 볼 수 있다.[21]'''각 시대의 사회 상태는 우리 대에서 각 분야의 자료에 의해서 항상 그 개략적인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만약 아무 책에서 그 시대 상황을 말한 것이 사리에 있어 너무 차이가 나는 것이라면 바로 거짓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 량치차오(梁啓超), 『중국역사연구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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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지도에 표시된 한국 관련 청동기문화권(1~11)에서 '''기원전 8세기에 군장사회[22] 단계에 도달한 것은 가장 서쪽에 있는 십이대영자 문화(1)밖에 없었다.''' 십이대영자의 대형 석곽묘군은 주위의 다른 중소형 고분들과 별도로 대릉하 근처 언덕 위에 독립적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그 안에는 청동검·청동거울·청동도끼 및 각종 위세품이 다량 부장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주위의 다른 중소형 고분들이 피장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위세품이 거의 부장되어 있지 않고, 있다 하더라도 단수로 소량 부장된 것과 대조적이다. 따라서 기원전 8세기에 십이대영자 문화는 전문적인 수공업과 사회적 위계화가 진행된 군장사회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외의 지역들은 여전히 부족사회 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여타 지역에서 청동기물의 발견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 한정되고, 그러한 청동기물이 발견된 고분이 입지상이나 크기상으로 다른 고분들과 구별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서단산 문화(6) 등에서 토기 및 석제 부장품의 다양화를 통해 전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회경제적 불평등성이 심화되어가는 모습만을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이다. 요동과 한반도에 널리 분포한 거대 지석묘들도 이와 마찬가지로 생산물의 재분배와 집단의 공동 의식을 주재하는 지도자로서 발전된 부족장의 면모 정도만을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와 같은 십이대영자 문화(1)와 여타 지역들 사이의 사회 발전 격차는 기원전 6세기 중반에 대릉하 유역의 십이대영자 문화에서 일군의 집단이 요하를 건너 심양에 정가와자 유형을 형성하면서부터 비로소 좁혀지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 만주의 서단산 문화는 취락의 숫자와 규모가 비약적으로 증대되었지만 여전히 청동기물의 독점적 소유 등은 보이지 않다가 기원전 5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다양한 청동기물의 소유 차등, 지배집단과 피지배집단 사이의 거주공간 분리 따위가 일어나게 된다. 비슷한 시기 한반도에서는 금강 유역에 간석기, 쌀농사, 환호취락, 송국리형 주거, 송국리형 토기로 특징되는 송국리 유형이 발전하였지만 기물이나 공간이 독점화된 모습을 찾아보기는 어렵고,[23] 기원전 4~3세기 충청남도 일대의 남성리 유형이 정가와자 유형의 영향하에 군장사회로 발전한 모습을 보인다.
여기에서 고고학적인 증거들이 환단고기의 내용과 심하게 배치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군현제가 처음으로 실시되었다는 기원전 17세기는 고사하고, 그로부터 천 년 가까이 지난 기원전 7세기에조차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는 균질적인 영토라던가 통일적 집권국가가 형성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환단고기에서 당시 단군조선의 중심지라 주장하는 송화강 유역의 길림-하얼빈-영고탑 일대[24] 가 그 부속국인 번한이 위치하고 있는 요서보다도, 아니 만주 일대에서 가장 정치적 경제적 통합이 미진한 후진지역이었다(...).
더욱이 이러한 사회적 여건 위에서는 '나라'라는 개념 자체도 오늘날 우리의 생각과 분명한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단적으로 춘추시대에는 나라의 중심에서 제후가 거주하는 중심적 읍을 가리켜 국(國)이라 불렀고, 교(郊) 밖으로 이러한 국을 둘러싸고 있는 광대한 원야를 가리켜 야(野)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원야의 여기저기에 점점이 존재하는 소읍락이 비(鄙)이며,[25] 이밖에도 읍락의 성격이 국에 가까운 도(都)가 공족과 귀족의 채읍으로 존재하면서 주변의 비읍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성 안에 거주하는 지배집단은 국인(國人), 성 밖에 거주하는 피지배집단은 야인(野人) 또는 비인(鄙人)이라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26]
따라서 초기에 국(國)이라는 개념은 중층화된 읍락들의 정점에 있는 가장 크고 중요한 읍락을 가리키는 것일 뿐, 일정한 선으로써 존재하는 국경의 안이라던가 하다못해 '''지배력이 미치는 영역 전체를 가리키는 의미조차도 아니었다.''' 이는 생산력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읍락의 외연에 존재하는 농지(野)와 농지(野) 사이에 광대한 규모의 미개간지, 일종의 공백지대가 존재하였고 이 때문에 읍락국가는 아직 영역국가로 발전할 수도, 발전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연스럽게 일국의 속읍이 타국을 초월하여 존재할 정도로 이 시기 국경의 개념은 명확하지 않았고 오직 속읍에 대한 영유권만을 확보할 뿐이었다.
그런데 환단고기는 이러한 초기 국가의 사회상을 무시하고 '국(國)'이라는 글자를 명백하게 지배력이 미치는 일정한 경역으로서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토지세(田結·租稅)를 걷는다거나 백성들에게 농지를 분급했다는 데 대해서는 할 말이 없는 노릇이다. 토지에 세금을 물렸다는 것은 노역에 의해 공동경작하는 씨족공동체가 해체되어 사적 토지점유의 불균등이 발생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또 밖으로 미개간지가 널려 있는 상황인데 토지를 분급하기는 왜 분급한다는 말인가?[27]
3.3. 우리들의 일그러진 초인
국가의 형성과 탄생이라는 측면에서도 환단고기에 실린 내용은 황당하기 그지없다. 환단고기의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자면, 환국과 배달과 조선 모두 어떤 위대한 신인(神人)의 등장으로 사람들이 '오오 하느님 오오'하고 알아서 와서 모셨다는 것인데, 이러한 방식의 역사 이해는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기다리는 종교적 영웅주의가 대단히 짙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짜고짜''' 윗사람으로 모시는 것도 모자라 알아서 가진 걸 주기적이고도 정기적으로 가져다 바치는 게 말이 되는가(...).
또한 환국이 성립되었다는 기원전 72세기는 '''이제 막 초기 농경 사회가 시작될 즈음'''이었다.[28] 고고학적으로 기원전 93-75세기에는 요르단 강에서 야생 밀과 보리가, 기원전 80-45세기에는 장강에서 야생 쌀이, 기원전 65-55세기에는 황하에서 야생 기장이 곡물로 개량되었다. 그런즉 이제 막 사람들이 초보적인 정착 생활을 시작하던[29] 시점에 환단고기는 성인의 등장으로 사람들이 절로 모여서 자그마치 한 대륙을 넘어서는 규모의 제국이 만들어졌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저런 전제와 부연을 더한다면 환단고기의 기록을 꿰어 맞추는 것도 가능은 하겠으나, 그렇다면 '''지배하지 않고 징세하지도 않으며 균질적인 공동체 의식은 물론 정부조직도 없는 나라가 있었다는 것과 나라가 없었다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리고 환국이 수메르부터 바이칼, 몽골, 중국, 만주, 일본을 모두 지배했다면 관련 유적이나 유물이 나와야 하지만 당연히 그런 거 없다.[30] 환단고기 신봉자들은 중국과 일본이 감추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나 세계사가 어디 그렇게 만만한가. 중국과 일본 외에 '''환국의 본고장인 시베리아, 그리고 심지어 한국에서도 유물은 나오지 않는다.''' 국가 권력으로 자그마한 지역 문명도 아니고 커다란 제국을 숨긴다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며, 그것이 부끄럽다면 일본은 고대 한국을 통해 넘어온 문물 또한 숨길 것이나 그것을 증명하는 유물과 사적은 일본내에 널리고 널렸다.[31]
더불어 환국의 중심지로 지목되는 시베리아 남부 바이칼 호 일대는 지금도 그렇고 당시에도 농경과는 거리가 있는 곳이었다. 기원전 120세기에 뷔름 빙기가 끝나고서도 한동안 빙하기의 연장선상에 있던 이 지역은 기원전 60세기가 되어 온난습윤한 아틀란틱기가 도래함에 따라 기후가 호전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마저도 여타 지역들에 비해서 극히 제한적인 것이었고 이는 대체로 농경보다는 삼림자원의 증대라는 측면으로 나타났다. 때문에 이 지역에서는 신석기 시대가 되어서도 중석기 시대의 수렵·채집 경제가 지속되었고, 이런 배경에서 정기적인 수입과 중장기적 저장성 그리고 무엇보다 순환적인 생산력 증대를 보장하는 농경과 목축으로 부(富)의 등장과 계층의 분화가 일어날 일은 없었다.
이처럼 온갖 문제점을 안고 있는 환단고기에 비해 고고학의 연구 성과에 기반을 둔 현대 역사학이 제시하는 국가의 형성 과정은 훨씬 더 설득력 있다. 수많은 논의가 있지만 이를 개략적으로 정리하면 신석기 시대에 빙하기가 끝나고 정주생활이 시작되면서 여러 가족이 한 지역에 모여서 마을 단위로 응집되었고, 이후 청동기 시대에 이르러 한정된 자원의 독점을 바탕으로 위계질서가 고착화되어 국가 단위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청동기와 같은 금속 기술의 출현은 채굴, 정련, 조형, 주조, 보수 등 전문적인 분업체계를 발생시켰고 자원의 독점과 맞물려 자원 간의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상업의 등장, 전쟁의 격화, 생산의 증대, 그리고 부가적으로 환경의 악화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마침내 최초의 계급적 고대국가가 배태되었다. 청동기 시대에 '읍락'을 넘어서서 '국가'가 탄생했다는 관념은 바로 이러한 이론에 기초하고 있다.
하지만 환단고기에서는 이러한 복잡한 진화 과정을 그냥 싸그리 무시하고 반대로 환국에서 배달국으로, 배달국에서 고조선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영토가 축소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도리어 극단적으로 ''''좋았던 옛날''''이라는 비과학적인 신비주의 역사관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 군주들의 수명도 환웅들은 기본이 100세이고, 최장기록은 자오지환웅으로 무려 151세에 달한다. 재위기간만 109년(...). 다음 통계를 참고.
4. 이런저런 용어의 문제
일단 수백 년 내려왔다는 역사서에 '''근대의 한자가 왜 있는데?'''[32] 단적으로 일본에서 서구의 언어를 한문으로 번역한 세계(world), 인류(human), 국가(nation), 권리(right), 산업(industry), 공화(republica), 유신(reformation), 문명(civilization), 개화(civilize), 문화(culture), 개체(individual), 자유(liberty), 평등(equality), 평화(peace)와 같은 것들이 그대로 실려있다. 유신과 같은 한자 조어들은 애당초 고전으로부터 차용된 것이며 한자 자체가 한 글자에 하나의 의미가 부여되는 만큼 이러한 조어들이 전근대에도 존재하고 있었을 수는 있지만, 그 하나하나가 굉장히 근대적인 의미를 띠고 있으므로 이러한 단어들이 동시에 하나의 문헌에 다발적으로 출현하였다 함은 내용상의 문제가 되기에 충분한 것이다. 그 구체적인 문제점을 몇 가지 짚어보면 다음과 같다.
- 전근대의 '국가'는 하나의 군주를 정점으로 공유되는 수직적인 공동체로서, 오늘날과 같이 사회 각 개인이 상호 교류를 통해 내적으로 투영하는 등질적 공동체와는 분명히 성격이 다른 것이었다. 근대에 들어와 일본에서 '국가'와 '민족'이 서구에서 들어온 nation의 번역어로 채택됨에 따라 비로소 국가는 오늘날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33] 때문에 전근대의 국가란 군주의 소유하에 있는 실재적·비실재적 영역을 가리키는 말이었지, 각 개인에게 1대 1로 투영되는 충성의 대상이나 주체성 및 객체성을 가진 무언가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환단고기는 근대적 국가관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 본래 '권(權)'이라는 글자는 저울을 뜻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통치자가 담지하는 기준이나 판단의 의미로 확장된 말이었다. 즉 본래 이것이 뜻하는 말은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right)가 아니라 기준적인 판단을 가리키는 권력(power)이었던 것이다. 대표적으로 전통 사회에서 익히 사용되었던 권도(權道)라는 단어는 상황에 맞추어서 행동을 판단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것이 지금과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근대에 들어와 일본에서 '권리'가 서구에서 들어온 right의 번역어로 채택되면서부터의 일이다.
- 본래 '공화'라는 말은 기원전 9세기에 주나라에서 여왕(厲王)이 쫓겨나고 귀족 공백화(共伯和)[34] 가 왕 없이 정무를 맡아 본 것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였다. '공화'가 본격적으로 왕 없는 공동통치를 의미하는 개념어로 쓰이게 된 것은 근대에 들어와 일본에서 이것이 서구에서 들어온 res-publica의 번역어로 채택되면서부터의 일이다. 그 전까지는 문자 그대로 '함께 화합한다'는 의미로 쓰였다.[35]
- 본래 '문명', '개화', '문화'라는 말은 정신적인 맥락에서 성현이나 군주의 가르침을 밝혀서 백성들이 바르게 사는 상태로 이끈다는 교화(敎化)의 뜻이었다. 이것이 정신적이고 사상적인 것만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을 포괄하는 인간의 성취나 생활 양식 전반을 가리키는 단어로 확장되는 것은 근대에 들어와 일본에서 '문명'과 '개화'가 서구에서 들어온 civilization의 번역어로, '문화'가 서구에서 들어온 culture의 번역어로 각각 채택되면서부터의 일이다.
- 본래 '개(個)'는 오늘날과 같이 전체와 반대되는 각각의 특수성을 가진 존재들을 가리키는 의미의 말이 아니라 단지 수를 셀 때에 붙이는 수량사로 통용되는 말이었다. 그러던 것이 근대에 들어 서구의 언어가 들어오면서 중국어로 먼저 individual을 일개(一個)라는 의미로 번역하게 되었고, 여기에서 비롯되어 일본에서는 individual에 상응하는 것으로 인민각개(人民各個)라는 단어가 등장하였다. 그러다 개인주의라는 조어의 확산과 함께 개인이라는 말이 독립적 의미를 지니게 되면서 비로소 '개'는 오늘날과 같은 의미를 지니는 단어로 정착되어 갔던 것이다.
그러나 17세기 이전까지 이곳이 영고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실제로 발해 시기에는 이곳에 상경용천부가 있었음에도 홀한성(忽汗城)이라고만 일컬어졌지 영고탑이라고 불리지는 않았고, 원나라 때에는 고주(古州)가 있었지만 역시 영고탑이라고 불리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궁지에 몰린 환빠들은 이곳에 과거 실제로 탑이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진 것뿐이라고 강변하거나 증산도 역주본에서는 영고탑이 '영고터'라는 우리말이 와전된 것이라고도 하지만, 신당서에도 잘 나오듯 이곳은 '''본래 영고를 치르던 부여가 아니라 숙신의 땅이었다.''' 또한 영고탑에 대한 근거인 만주실록과 만주원류고는 청 시기에 만들어졌다. 명나라에서 뭐라고 부르건 만주원류고에서는 영고탑이라고 할 것이다. 쓰인 언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추가적으로 환빠들 말처럼 영고탑이 부여의 영고가 행해졌던 터라고 할 경우 더욱 이상해진다. 환단고기에는 단군이 있을 때 부터 영고탑이라는 지명이 등장하는데, 부여는 고조선보다 훨씬 뒤에 등장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즉, 부여가 생겨나지도 않은 시점부터 영고탑이란 지명이 쓰이고 있는데 환빠들은 부여의 영고가 행해졌던 터라는 기괴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밖에도 환단고기에는 영고탑과 같은 시대착오적 지명들이 수두룩하다.
- 송화강(松花江) - 1462년부터 사용[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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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베리아(斯白力/斯庀廲阿) - 16세기부터 사용[38]
- 해성(海城) - 1653년부터 사용[39]
- 혼춘(琿春) - 1714년부터 사용[40]
- 세토내해(瀨戶內海) - 1872년부터 사용[41]
- 하얼빈(哈爾濱) - 1898년부터 부각[42]
5. 자기모순에 빠진 내용
환단고기가 크게 네 개의 문헌을 취합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다가, 특히 가장 분량이 많은 태백일사는 오만 잡다한 기록들을 조금씩 가져다 묶어놓은 형식을 취하고 있어 그 내용을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데 애로사항이 꽃피기 십상이다. 예컨대 단군조선에 대한 내용은 단군세기만이 아니라 삼성기 전 상편,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에도 흩어져 있고 특히 단군왕검에 대한 내용은 태백일사 신시본기에서도 한 마디 거들고 있다. 이렇다 보니 '''환단고기라는 하나의 책 안에서도 서로 하는 말이 엇갈리는 모순이 발생한다.'''
환국의 위치와 같은 경우 삼성기 상편에서는 환국이 만주에 있었다고 하면서 환웅은 그 땅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것처럼 서술되어 있지만, 삼성기 하편과 태백일사에서는 바이칼호(天海)의 동쪽으로 시베리아 중앙 고원이나 천산산맥(天山) 혹은 파미르고원(波奈留山) 부근[45] 을 환국이 있던 자리라 가리키고 있다. 또 환웅은 여기에서 별도의 무리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즉 지금의 백두산 아래 만주 땅으로 내려온 것으로 되어 있다. 부싯돌의 최초 발명에 대해서도 삼성기 상편에서는 환인이 돌을 부딪쳐 불을 일으키고 익혀 먹는 법을 가르쳤다고 되어 있는데, 태백일사에는 규원사화를 따라 환웅 초기 고시례가 부싯돌을 발명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거기다가 흠좀무하게도 그토록 중요한 '''치우의 행적에 대해서도 환단고기 안에서 서로 말이 다르다!''' 삼성기 하편에서는 치우가 탁록에서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았다고 하지만, 태백일사에서는 이와 더불어 그토록 지긋지긋하게 싸웠는데도 불구하고 그 무시무시한 인해전술에 끝내 굴복시키지 못하고 중원으로 나오지 못하게 길목을 틀어막는 선에서 그쳤다는 기록이 함께 나온다. 여기에 이미 전에 함락시켰던 탁록을 함락시키고, 또 함락시키고, 다시 함락시키는 것을 반복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인 건 마한세가의 기록으로, 치우가 전군을 탁록에 집결시킨 상황에서 헌원에게 경고서한을 보내자 헌원이 알아서 숙이고 끝난다. 한마디로 전쟁은 없고 그저 해피엔딩 해피엔딩.
그리고 태백일사에서는 22대 단군인 색불루가 단군 자리를 선위받으면서 종래 고조선 내의 삼한을 삼조선으로 개편했다고 나오는데, 단군세기에서는 그보다 한참이 지난 44대 단군 구물이 우화충의 반란을 진압한 뒤 진한을 대부여로 고치고 삼한을 삼조선으로 바꾸었다고 나온다. 일단 소도경전본훈에 따르면 색불루의 삼조선은 불완전한 것이었고 구물에 이르러서야 삼조선이 완성되었다고는 하나 도대체가 아무리 불완전하기로서니 공식 이름이 이렇게 되는지는 영문을 모르겠다.[46]
이 가운데 백미는 단연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에서 번한세가 상편의 기록이다. 이에 따르면 도산회의의 결과로 낭야성에 감우소(監虞所)를 두고 뒤에 번한을 세워서 감우소의 정무를 맡겼다고 하는데, 그런데 정작 도산회의는 단군조선의 2대 번한인 낭야 시절에 있던 일이다. '''도산회의로 말미암아 번한이 세워졌는데, 번한이 세워진 뒤에 도산회의가 열렸다'''니 이건 또 무슨 순환논증의 오류인지(...). 게다가 더 심각한 것은 이것이 치우 관련 기록들처럼 여러 부분에 흩어진 게 아니라 한 기록 안에서 이런다는 것이다!
6. 연대 오류
이밖에도 몇 가지 연대상의 문제가 있다
- 단군세기에는 고등을 우현왕으로 삼은 게 임진년(기원전 1289)이라 되어 있는데, 마한세가에서는 무오년(기원전 1323)이라 되어 있다거나, 번한 계전이 경신년에 삼신단을 탕지산에 쌓았다는데 정작 계전의 재위기간 안에는 경신년이 없다는 식으로 내부 모순을 일으키는 연대가 있다.
- 망한 지 200년이 넘은 수메르가 고조선에 사신을 보냈다는 것은 이미 위에서 말한 바와 같고, 부여기에 보면 경진년(기원전 221)에 연나라가 진개를 보내 고조선을 침공하는데 연나라는 이미 작년(기원전 222)에 망한 나라다(...). 참고로 이유립은 뒤늦게 진개의 침입 부분의 모순점을 파악해서 "일찌기"라는 글자를 추가해서 경진년 기사에 앞서 일어난 사건을 몰아서 기록한 것으로 바꿔 놓았다. 물론 왜 굳이 그 사건을 몰아서 기록한 것인지에 대한 해명은 전혀 되지 않는다.
- 삼성기는 사마천의 사기를 인용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삼성기에 인용된 것은 사기가 아니라 사기의 주석서이다. 즉, 참고서를 인용해 놓고서 교과서에서 인용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환단고기 저자의 얄팍한 역사 지식을 탓하기에 앞서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교과서와 참고서가 따로 유통되고 있다면 참고서를 인용하면서 교과서라고 착각하는 일은 일어나기 어렵다. 하지만 교과서와 참고서가 한책으로 묶여 있고, 교과서의 문장 하나하나마다 모두 참고서가 부기되어 있다면 역사적 상식이 부족한 사람이 보기에는 교과서라고 착각할 수 있다. 삼성기의 저자도 바로 그런 착각을 한 것(...) 여기서 문제는 사기와 주석서가 하나로 합쳐진 것이 송나라 시기라는 것이다. 환단고기 옹호측의 주장에 따르면 삼성기의 저자인 안함로와 원동중은 삼국시대의 인물인데 말이다. 백번 양보해서 안함로와 원동중이 다른 시대의 인물이라고 쳐도 연대 문제는 여전히 계속된다. 삼성기는 조선왕조실록 중 세조실록에서 처음 등장한다. 안함로, 원동중이라는 이름이 나오게 된 것도 세조실록. 그런데 삼성기에 인용된 사기의 구절은 18세기에 고증을 거쳐 교감된 판본이라는 사실. 즉, 세조실록에 나온 삼성기라는 것도 거짓말이라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7. 기타 오류
- 발해의 역대 국왕
발해의 역대 국왕을 14명 기록하고 있으며, 그 시호와 묘호까지 모두 정해 놓는 무리수를 두었다. 묘호도 황당한 문제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발해의 13, 14대 국왕의 시호. 실제 기록에는 발해 선왕(10대) 이후로 시호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데, 13, 14대 왕의 시호는 경왕과 애왕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경애왕 때 발해가 멸망했다"는 기록을 오독하여 이를 경왕과 애왕이라고 착각한 것. 그런데 사실은 신라 경애왕이다(...) 즉, 신라 경애왕 때 망했다는 기록을 착각해서 경왕과 애왕이 마지막 왕이라고 파악한 것. 이 오류는 20세기 초까지 상당히 알려져 있었는데, 현재는 모두 바로잡혀서 대현석과 대인선은 시호가 없다. 하지만 환단고기는 오독에 의한 시호인 경왕과 애왕을 그대로 따서 시호로 표기하고 있다. 게다가 현재 알려진 발해의 역대 국왕은 14대가 아닌 15대(혹은 그 이상)이다. 김육불이 당회요에서 대위해를 발견해서 현재는 최소 15대 국왕이 존재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환단고기에는 대위해가 없고 그냥 14대 국왕까지로 끝이다. 이 오류 자체는 현재까지도 종종 답습되는 문제이므로 환단고기만의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환단고기는 감춰져 있던 진짜 역사를 밝혀내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만큼, 이런 오류를 답습했다는 것은 환단고기가 정확한 발해의 역사 기록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기존에 알려진 역사를 편집한 것에 불과하다는 증거가 된다.
고조선 시대에 지어진 향가라는 시 2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수준이 처참하다.
3000여 년 전에 지어진 향가인데 독음만 읽어보아도 완벽하게 현대 한국어로 해석된다![47] 삼국유사에 실린 신라의 향가는 고작(?) 1300여 년 전의 것인데 독음은 커녕 어떤 방식으로 읽어도 이런 식으로 해석되지 않는다. 그런데 고조선 시대의 향가라는 물건은 완벽하게 현대 한국어에 즉각적으로 대응된다는 점에서 말도 안되는 일. 물론 애초에 향가라고 부를 수 있는 물건 자체도 아니며 이두, 향찰 등 다른어떤 한문 활용법과도 맞지 않는다. 당장 고등학교에서 정규 수업시간에 국어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이면 향가가 이렇게 쓰일 수 없단 걸 알 수 있다(...).또한, 다른 쪽에서도 문제가 되기도 한데 무엇보다 어떻게 그런 큰 제국을 운영할 인구가 고대사에 있었느냐도 문제가 된다. 당장 고대 로마나 이집트만 했어도 인구가 억을 넘기는 것도 어려워했는데 그 큰 나라를 다스리려면 인구와 행정체계 여러 문제가 있는데도 무슨 난항을 겪고 인구를 어떻게 증가시켰으며 통치도 의문점이 든다. 당장 인류가 이만큼 불어난 것은 정작 의료와 보건 기술학문 쪽이 발달해서 그런데, 아무리 책을 봐도 그런 언급이 전혀 없는 것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1] 중국 신화에서는 치우에 대해 구리 머리에 쇠 이마(銅頭鐵額)라고 묘사한다.[2] 기원전 118년 북부여는 위만조선의 침공군에 대패해서 해성 이북 50리 땅을 상실했다가 3년 뒤에야 고우루 단군이 직접 정예병 5천 명을 이끌고 빼앗긴 땅을 탈환한다.[3] 고열가의 후손이라는 말은 일설로 기록되어 있지만, '고'열가(高列加)라는 이름을 보았을 때에는 애당초 노리고 지은 이름인 듯.[4] 비류수 전투나 고국원왕 시기 전연과 백제와의 전쟁에서 고전하는 등의 이야기는 모두 생략했다.[5] 그 화려한 승리도 실제 역사보다 전과를 부풀렸다. 을지문덕이 살수대첩에서 단순히 수나라군을 털어버리는 데 그치지 않고 수나라를 침공해 태원과 유주를 점령하고, 안시성 전투에서도 당나라를 역침공해서 당의 수도 장안에 입성하면서 산서성, 하북성, 산동성, 강좌를 모조리 점령한다. 더 어이없는건 이렇게 강성했던 고구려가 불과 23년 뒤에 아무런 설명도 없이 망한다(...).[6] 지구의 크기가 불변이 아닐 가능성 때문에 정의를 바꿔서, 1983년부터는 빛이 진공에서 1/299 792 458 초동안 진행한 거리가 되었다.[7] 한문으로 達支國이라 쓰는데 한글로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는 바로 마한의 맹주국이었던 월지국(月支國)을 가리킨다. 또는 목지국(目支國)이라고도 하는데 실제로는 대동강 유역이 아니라 충남 직산이나 전북 익산에 비정하는 것이 통설이다.[8] 사기에는 위만이 왕험(王險)에 도읍했다고 전하는데, 여기에 주석을 단 응소(應邵)는 공통되는 글자에 착안했는지 요동군의 속현이던 험독(險瀆)을 조선의 옛 도읍이라 했던 것이다. 환단고기에서는 이를 받아들인데다가 난하요수설을 끌어다가 이것을 난하 하류에 있는 탕산시 일대로 보고 있다. 실제로는 험독과 왕험을 연결시키는 것을 오류로 보고 험독은 요하 하류에 비정하며, 왕험은 지금의 평양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9] 예로부터 중화문명권은 세계사에서도 가장 발전도가 높은 지역중의 하나로 동시대의 문명권과 비교해 봐도 전국7웅은 하나같이 모두 상당한 국력을 가지고 있었다. 바록 같은 7웅 중에서는 말석이었지만 연나라 자체도 북방민족들과의 싸움에서 혁혁한 전과를 세운 무시못할 국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런 연나라와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인 고조선이 오히려 상당히 선전한 셈이다.[10] 이 때문에 대륙설 계통의 주장은 환단고기를 직접적으로 근거로 삼지 않고, 삼국사기 등의 사서에다가 억지를 쓰는 경우가 많다. 실질적으로 대륙설로 가면 환단고기는 거의 인용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11] 그냥 고조선이 패배한 사실은 기록되지 않았다고 보면 간단하지 않겠나 싶지만, 있지도 않은 춘추필법의 위중국휘치(爲中國諱恥) 운운하면서 중국의 사서들을 신나게 까내리던 낮짝으로는 어림도 없는 소리다. 사실 이걸 춘추필법이라고는 하는데 춘추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정작 춘추필법은 억울하다(...). 이 말은 본래 신채호가 조선상고사에서 '중국을 위해 치욕을 숨긴다(爲中國諱恥)'는 것이 공자의 춘추 이래 지나 역사가의 유일한 종지가 되었다"라고 적은 데에서 비롯된 말이다.[12] 김한규, 『천하국가』, 57쪽의 일부를 어레인지한 것. 그 원문은 상나라 문서에 인용되어 있다.[13] "도시국가론자 가운데는 한대(漢代)의 취락규모로부터 유추하여 당시 성곽도시의 평균을 300호로 잡기도 하지만 이는 '도비불과백실 이편야사(都鄙不過百室以便野事)'만을 감안해도 기층의 전형적 읍이라 보기 어렵고, 반면 선진(先秦) 취락규모를 10~25호로 잡는 자연촌락설도 읍 본래의 공동방위집단적 성격에 의거할 때 지나치게 소규모인 듯하다. 따라서 이상과 같은 정황적 조건과 기타 문헌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당시 비읍 규모의 최상한을 100호로 보고 대체적 평균치를 30~40호로 추정하는 견해가 더 타당한 듯한데, 물론 이 역시 추론의 역(域)을 넘지 못한다.(「春秋戰國時代의 國家와 社會」, 『講座 中國史 I』)"[14] 사족이지만 대륙설을 주장하는 이들중 일부는 남한지역 같이 좁은 땅덩이에 80개나 되는 국가가 세워질수 있냐며 이거야말로 삼국이 중국대륙에 있었다는 증거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아이고.....[15] 이것이 단군조선 말기 단군구물 원년(기원전 425)의 일이므로 거꾸로 그 이전까지는 '화친하고 전쟁할 권리'가 단군에게만 있었다는 말이 된다.[16] 주(州)라는 글자 자체도 강(川)의 줄기 사이에 점을 찍은 자형에서 보이듯 본래 하중도(洲)를 뜻하는 글자였고, 사람들이 하중도에 모여 살면서 마을이라는 의미로 확장된 것이었다. 따라서 춘추시대에 주는 지방의 군사거점이라는 의미에 가까웠다.[17] 사기에서는 이들보다 조금 앞선 기원전 688년에 진(秦)이 규(邽)와 기(冀)의 융족을 토벌하여 이들을 초현(初縣)하고, 이듬해에는 두(杜)와 정(鄭)을 초현(初縣)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좌전에는 진(秦)의 현 설치가 전혀 보이지 않는 반면에 초(楚)와 진(晉)의 현 설치는 집중적으로 기재되어 있으므로 일반적으로는 후자가 더 중시된다. 현(縣)은 계(繫; 걸려 있다, 따라서 당기면 끌려온다)는 의미가 있어 '현'을 설치했다는 것만이 아니라 단순히 직할화한다는 뜻의 동사로도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사로부터 현이라는 행정단위가 나왔음은 물론이다.[18] 게다가 춘추시대까지만 해도 오늘날과 달리 군(郡)이 현보다 작은 조직이었는데, 이유립이 이걸 몰랐는지 환단고기에서는 처음 한 번만 주현(州縣)이라 하고, 그 뒤로는 일관되게 주군(州郡)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19] 만약에 진짜라고 해도 증거가 있어야하지만, 이를 뒷받침해줄 기록이나 문서 자체도 없고, 오히려 옛날 것을 겨우겨우 다시 되돌려버린 한국사의 역대 국가들을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격이다(!) 설명하자면 과거에 이랬다면 나라가 멸망해도 그 수도정치 체계를 기억하는 지식인들이 있으므로 다음 왕조에 똑같이 내려왔어야 하는데 고대사 초기에서도 이렇게 섬세한 정치행정 체제를 펼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중국이나 타국가에서 배워 시행한 경우가 많은데도 그걸 뒤늦게 시행한 것을 보면 한민족이 옛날 제국의 행정체계를 그 동안 복구하는 노력을 했는지 안 했는지 어리둥절하게 만들 정도로 조상님들을 멍청하게 만드는 격이니 걸러들을 필요가 있다.[20] 30세 단군나휴(기원전 909~기원전 875)부터 35세 단군사벌(기원전 772~기원전 705)까지의 기간이 여기에 해당한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이 시기는 단군색불루가 조선의 제도를 정비한 이래 줄곧 태평성대가 이어진 기간이었다. 중국의 주나라·초나라와 북방의 흉노족·선비족이 모두 단군조선에 조공을 바치고 뒷산에는 봉황, 앞뜰에는 기린이 뛰노는 가운데 백성들은 도리가를 지어 부르며 단군조선을 찬양했다 카더라. 다만 단군사벌의 말년에 들어 일본으로 원정군이 출정하고 중국의 연나라 및 제나라와 전쟁을 벌이는 등 조금씩 갈등이 시작되었다. 더욱이 이 뒤로 기원전 6세기 중반부터 4세기 전반까지는 근 200년간의 암흑기가 펼쳐진다(...). 그 뒤로는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멸망한다. 당연히 실제 고고학적인 연구결과와는 배치되는데 실제로는 기원전 6세기를 전후하여 중심지를 요서에서 요하 일대로 이동한 뒤로는 랴오닝 성 남반부와 지린 성 서부, 평안도 일대에 산재해있던 소규모 부족국가들을 차례로 복속시킨 뒤에 기원전 4세기 말까지 패권을 장악하는것으로 나오기때문이다. 즉, 고조선이 한창 성장하던 전성기였다는 얘기이다. 비록 완전한 중앙집권화를 이룩한 수준은 아니지만 전국시대 당시에 전국7웅으로 손꼽히던 연나라를 완전히 압도할 정도는 아니었어도 연역왕이 왕을 칭하자 같이 왕을 칭하거나 연나라를 정벌하려는 계획을 세울수있던것은 이러한 국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것이었다.[21] 이하 오강원, 「동북아시아 속의 한국 청동기문화권과 복합사회의 출현」, 15~28쪽 참고.[22] 오강원, 「동북아시아 속의 한국 청동기문화권과 복합사회의 출현」, 14쪽, "군장사회는 수공업의 전문화와 사회적 위계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을 뿐 아니라 군장을 중심으로 한 엘리트 계층에 의해 일반 사회 성원들에 대한 사회경제적인 통제와 조절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단계에 도달한 사회에서는 군장을 비롯한 엘리트 계층이 자신들의 권위를 현시하는 특수 유물을 전유(專有)할 뿐만 아니라 일반 성원들과의 차별성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들의 가옥·무덤·공적 의사 결정의 장소·의례 공간 등을 공간적으로 구분하기 마련이다."[23] 김경택, 「청동기시대 복합사회 등장에 관한 일 고찰: 송국리유적을 중심으로」, 19~20쪽.[24] "그 뒤 호를 단군왕검이라 하는 분이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시니 지금의 송화강이라. 처음으로 나라를 칭하사 조선삼한이라 하니 고리 시라 고례 남북의 옥저 동북의 부여, 예와 맥은 그의 관경이었다.(태백일사 신시본기)" "단군조선이 도읍한 곳으로서 아사달이 그곳이니, 즉 지금의 송화강의 하르빈이다.(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25] 사실 생활공간으로서 야(野)와 거주공간으로서 비(鄙)의 구분은 모호한 면이 있다. 비와 야를 동일시하는 것을 뒷받침하는 기록이 있는 반면에, 비와 야를 동일시할 수 없는 기록도 존재한다. 어찌되었든 둘은 교외라는 의미에서 일정하게 혼용되었던 듯하다.[26] 이성구, 「春秋戰國時代의 國家와 社會」, 『講座 中國史 I』, 95~96쪽.[27] 안 그래도 미개간지가 유의미하게 널려 있는데 중국 따라한답시고 토지분급제를 실시했다가 철저히 시망한 사례가 있으니, 바로 다이카 개신 시대의 일본...[28] 다만 예외적으로 '''괴베클리 테페'''같은 극히 희귀한 사례는 있다.[29] 그것도 지역마다 '''각기 다른 작물'''과 '''각기 다른 특성'''과 '''각기 다른 종교'''를 가지고! 예컨대 기원전 75세기에 환국의 서쪽 끝(이라고 주장되는) 시리아에서 시작된 밀 재배는 기원전 20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환국의 동쪽(이라고 주장되는) 중국에 도달한다. 도저히 '''하나의 나라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는 여길 수 없는 전파 속도'''다. 일각에서는 환국인이 북미로 건너갔다고도 하는데, 인류가 베링해협을 건너간 건 이미 기원전 300~100세기라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당연히 콜럼버스 이전까지 북미에 밀 농사는 전혀 없었다.[30] 이미 무언가와 관련되어 있다고 확정된 유물을 환국과 관련지어서 말도안되는 날조를 일삼기도 한다.[31] 당장 메이지 유신 때 국가신토 교리를 세우느라 자국의 신화를 물갈이한 일본을 보라. 그렇게 물갈이를 했음에도 이리저리 들춰 보면 곳곳에서 티가 드러난다. 그런데 땅 속에 있는 수천 년 전 사람이 살았던 유적·유물을 하나도 안 놓치고 다 파내서 없앴다? 그건 좀 아니지 않은가?[32] 뿐만 아니라 초본이라는 책이 성분검사결과 캐나다산 펄프다(...). 하지만 환빠들은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세계를 제패했다는 증거라 우긴다. 하지만 방사선 탄소 연대 측정법을 사용하면 어떨까?[33] 더불어 이러한 개념적인 이행이 종래의 가족적 국가관 위에서 이루어진 만큼 이는 동아시아에서 특히 더 강력하게 동질성(문화)과 친연성(혈연)을 확인하고 이를 타 집단과 대비시킴으로써 정체성을 가지는 공동체가 되었다. 간단히 말해, 전근대의 국가관이란 사람이 '아버지(왕)'를 섬기지 '가족(국가)'을 섬기지 않는 것과 같다.[34] 공백(共伯)인 화(和)라고도 하고, 공(共)나라의 백화(伯和)라고도 한다. 다만 이는 죽서기년에 따른 것이고 사기에는 공백화가 아니라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이 함께 정치하면서 공화라고 칭했다고 전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소공은 목공(穆公)이라는 시호와 호(虎)라는 이름이 전하는 데 반해 주공은 그 자세한 신상을 알 수 없기에 근래의 학자들은 죽서기년의 기록에 더욱 힘을 싣고 있다.[35] "협화(協和)니 상화(相和)니 공화(共和)니 하는 문자는 대개 서로 통용하는 말들인 것입니다(광해군일기)" "특별히 그 마음이 공화(共和)하지 못하고(영조실록)"[36] 지금의 헤이룽장 성(黑龙江省) 무단장 시(牡丹江市) 닝안 시(宁安市) 닝안 진(宁安镇). 1910년부터 영고탑(寧古塔) 대신 영안(寧安)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37] 본래 송화강은 만주어로 '하늘 강'이라는 의미의 쑹아리 강(松阿哩江)을 음역한 것이다. 고구려와 발해에서는 속말수(粟末水), 요나라에서는 압자하(鴨子河), 금나라와 원나라에서는 송와강(宋瓦江)이라 기록되었는데, 송화강이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쓰인 것은 1462년의 명통지가 최초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금나라에서 이를 혼동강(混同江)이라 이름지어서 한동안 송화강과 혼동강이라는 명칭이 병존하기도 했다.[38] 시베리아라는 이름은 15세기에 킵차크 칸국이 분열되고 우랄 산맥과 예니세이 강 사이에 세워졌던 시비르 칸국(Khanate of Sibir)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이후 러시아가 이반 뇌제의 지도 하에 아스트라한 칸국과 카잔 칸국을 멸망시키고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러시아는 자연스럽게 우랄 산맥을 넘어 시비르 칸국과 충돌하게 되었고, 이로부터 러시아 인들이 우랄 산맥 너머의 동토를 시비리(сибирь)라 부르던 것이 시베리아로 전화되었던 것이다.[39] 고대에는 부근에 요동군 소속의 신창현(新昌縣)이 있다가 요나라 때 비로소 해주(海州)가 설치되었는데, 본래 발해의 남경 남해부였다는 것으로 보아 황해도에서 사람들을 끌어다 정착시킨 데에서 비롯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금나라 때에는 등주(澄州)라 개칭했다가 원나라 초에 폐지되었는데, 명나라 초에 다시 이곳에 해주위를 설치하였다. 해성이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쓰인 것은 청나라 순치 10년에 해주를 해성으로 고친 것이 최초이다.[40] 고구려 때에는 책성이 있었으며, 간혹 동해곡(東海谷)이 이곳을 가리키던 지명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발해에서는 이곳에 동경 용원부를 설치하였고, 원나라 때에는 해관총관부(奚關總管府)가 설치되었다가 명나라 때에는 안춘(顔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혼춘이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쓰이게 된 것은 청나라 강희 53년에 혼춘협령(琿春協領)이 설치된 것이 최초이다.[41] 에도시대 이전까지는 섬과 섬 사이 해역들이 늘어선 개념만이 있을 뿐, 그것들이 모여서 하나의 내해를 이룬다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에도 시대에도 세토우치(瀨戶內)라는 명칭은 있었지만 단순히 해역이 확장된 것일 뿐, 오늘날의 것과 그 범위가 겹치는 것은 아니었다. 이후 서구의 해역(The Inland Sea)이라는 정의를 받아들이면서 1872년부터 비로소 세토 내해라는 개념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고, 이는 1911년에 '세토내해론'으로 정리되어 20년 뒤 하나의 국립공원으로 묶이게 되었다.[42] 엄밀히 말하자면 하얼빈이라는 말 자체는 '그물 말리는 곳'이라는 만주어 토속 지명으로 그전부터 존재해왔다. 다만 이곳에 도시가 건설된 것은 1898년에 둥칭철도(東淸鐵道)의 건설에 따라 이곳이 교통의 요지가 되면서부터의 일이고, 그전까지는 일개 촌구석에 지나지 않았다. 대신 아십하(阿什河)를 거슬러 올라가 있는 아성현(阿城縣) 일대가 이 지역의 중심이었으며, 금나라의 상경(上京) 회령부(會寧府)도 바로 이곳 아성현에 있었다.[43] 물론 수밀이국이 수메르라는 견지에서 바라볼 경우에 해당한다.[44] 진짜로 역사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니라[45] '''환빠들에게 천산산맥이나 파미르고원이 바이칼호 서쪽에 있다는 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게 대부분의 환단고기 역자들이 저지르고 있는 실수인데, 때문에 정작 이유립은 '천산=파나류산'을 시베리아 중앙 고원으로 정의내렸다. 여기에서 '파나류(波奈留)'가 우리말 '하늘'의 일본어 음차라는 것은 해동역사 제28권 방언조에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를 인용하여 실려 있다. 즉 파내류산은 뜻으로 쓰면 천산, 음으로 쓰면 하늘산인 것이다. 덧붙여 환국을 파내류국이라고도 했으니 환국=하늘국으로 환=하늘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데, 다만 이걸 한국이라고 읽지 않음은 개요에서 상술한 바와 같다. 환인의 '환'이 하늘이라는 것은 이유립의 설정일 뿐. 이것도 또 태백일사에서는 '환'을 가리켜 광명이라 말하는 대목이 따로 있다(...).[46] 사실 신채호가 20대에는 기원전 15~14세기에 고등(高登)으로부터 부여라는 이름이 시작된다고 하였고, 30대에는 이걸 취소하고 기원전 4세기에 삼조선이 분립했다고 하였는데, 환단고기에선 이 둘을 모두 가져다 쓰다 보니 생긴 문제다(...).[47] '''하다'''라는 의미에 해당하는 부분은 모두 할 위(爲)로 되어 있으니 해석에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