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4 작전

 




T4 프로그램을 재연한 내용이 나오는 영화의 한 장면. 영화 속의 대사는 영어로 나온다.

"우리의 시발점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가 배고픈 사람에게 음식물을 주거나 목이 마른 사람에게 물을 주거나 옷이 없는 사람에게 옷을 제공하는 것에 신경을 안 쓴다. 우리의 목적은 색다른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가 꼭 건강한 인간으로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

— 1938년 파울 요제프 괴벨스

Eine nur sechshundertjährige Verhinderung der Zeugungsfähigkeit und Zeugungsmöglichkeit seitens körperlich Degenerierter und geistig Erkrankter würde die Menschheit nicht nur von einem unermeßlichen Unglück befreien, sondern zu einer Gesundung beitragen, die heute kaum faßbar erscheint. Wenn so die bewußte planmäßige Förderung der Fruchtbarkeit der gesündesten Träger des Volkstums verwirklicht wird, so wird das Ergebnis eine Rasse sein, die, zunächst wenigstens, die Keime unseres heutigen körperlichen und damit auch geistigen Verfalls wieder ausgeschieden haben wird.

600년 동안만이라도 육체적으로 퇴화되어 있는 자나 정신적으로 병이 든 자로부터 생식 능력과 생식 가능성을 저지하는 일은 생각할수록 헤아릴 수 없게 건강 회복에 공헌할 것이다. 그와 같이 민족의 가장 건전한 담당자의 출산력을 의식적, 계획적으로 촉진하는 일이 실현된다면, 그 결과 적어도 현재 우리의 육체적인, 동시에 또 정신적인 퇴폐의 싹이 완전히 제거된 인종이 생길 것이다.

- 아돌프 히틀러, 나의 투쟁에서

1. 정의
2. 실시 이전
3. 실시 이후의 행보
4. 전쟁 이후
5. 나치당의 모순적인 모습
6. 픽션에서


1. 정의


독일어: Aktion T4
영어: Action T4, T4 Program
나치 독일장애인 말살 프로그램이자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우생학적 사상관을 추론할 수 있는 사건.
히틀러가 1939년 9월 한 극비 지령 문서에 서명하면서 T4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T4 프로그램은 장애인과 정신질환자 등의 부적격자에 대한 '''집단 살인 허가''' 명령이었다. 나치 정권은 이러한 부적격자를 사회로부터 제거함으로써 게르만 민족의 유전적 우수성을 지킬 수 있다는 인종위생학(독일 버전의 우생학)을 나치즘의 뼈대로 삼았다. 나치 정권은 이러한 사람들을 '''살 가치가 없는 밥벌레들(useless eater), 열등인간(Untermensch)'''으로 간주했고, 그들을 죽이는 것을 자비로운 안락사로 간주했다. 이들 기준에 따르면 게르만족들은 모두 우월해야 하는데, 그 중에서 '불량품'이 있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병자나 기형아를 절멸시키는 것이야말로 병적인 인간을 보호하려는 미친 짓에 비하면 몇 배나 자비로운 일이다."''' - 히틀러

이러한 나치의 우생학적 견해에 따르면, 안락사 프로그램은 이후 체계적으로 자행된 유럽의 '''홀로코스트'''로의 진화를 대변했다. 역사학자 이언 커쇼는 이를 "현대적 야만으로 가는 필수 단계"라고 표현했다.
T4라는 이름은 사무국이 있던 베를린 티어가르텐 4번지(Tiergartenstraße 4)에서 유래했다.[1] 병원 4개가 집단 살해 장소로 쓰였으며 가장 큰 병원에는 '''사령부'''가 존재하기도 했다.

2. 실시 이전


1930년대 나치당은 안락사를 선호하는 선전 캠페인을 실행에 옮겼다. 국가사회주의인종정치사무소(NSRPA)가 독일인들에게 불치병과 정신병자를 위한 보호시설을 유지하는 비용을 다루는 팸플릿과 포스터하고 극장에서 상영되는 단편영화를 제작했다. 자신들의 환자를 죽이는 데 반발하리라 예상된 가톨릭 단체들은 점차 폐쇄되었으며, 요양 중이던 환자들은 북적대는 국립 기관으로 이송되었다. 그곳의 더러운 환경은 이후 안락사를 선호하던 캠페인에 기폭장치를 제공했다. 또한 "장애인 한 사람당 5만 제국마르크가 나가고 있다", "장애인 한 사람을 먹여살릴 돈으로 정상인 4인 가족을 먹여살릴 수 있다"는 식의 선전 포스터들을 제작하여 배포하였다.
1932년 독일에서는 단종법(斷種法)이 제정되어 이들 부적격자를 자율적으로 거세토록 했다. 이듬해 나치 정권이 들어서자 이 법은 더욱 더 강화되어 1933년 7월 14일 '''유전적 질환의 자손 예방법'''으로 공표되었다. 이 법 하에서 유전적 질환을 가진 45세 미만의 여성은 의사들의 판결에 의해 강제로 불임 수술을 받게 되었으며, 의사들의 판결에 불순응할 시 벌금형이 내려질 수 있었다. 법률 시행의 첫 해에 약 4,000명의 사람이 불임화 인가의 판결에 대해 항소했고 그 중 3,559명이 패소했다. 나치 정권 말까지 200여 개의 유전 건강 법원(Erbgesundheitsgerichten)이 만들어졌으며, 이 법원에서의 판결에 의해 '''40만 명 이상이 강제로 불임 시술을 받았다'''.
1935년에 아돌프 히틀러는 제국 의사들의 리더였던 게르하르트 바그너에게 부적격자에 대한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물었고, 그는 "그러한 문제는 전쟁 상황에서는 좀 더 쉽게 처리될 수 있다"고 답했다.[2] 이후 전쟁의 발발은 히틀러에게 그가 오랫동안 바랐던 정책을 실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했다.

3. 실시 이후의 행보


[image]
Reichsleiter Bouhler und Dr. med. Brandt
sind unter Verantwortung beauftragt, die Befugnisse namentlich zu bestimmender Ärzte so zu erweitern, dass nach menschlichem Ermessen unheilbar Kranken bei kritischster Beurteilung ihres Krankheitszustandes der '''Gnadentod''' gewährt werden kann.
''A hittler''
'''제국지도자'''[3] 필리프 보울러[4]와 의사 브란트에게
치료에 가망이 없을 만큼 병세가 무겁다고 판단되는 경우, 그 환자에게 병세에 관해 엄격한 감정을 실시한 뒤에, 특별히 지명한 의사에게 '''자비로운 죽음'''의 처치를 허가할 권한을 부여한다
''A 히틀러''
- 아돌프 히틀러가 서명한 장애인 학살 승인 서류
그리고 1939년 10월 1일 히틀러는 장애인들에게 강제 안락사를 지시한 살해 명령서에 사인한다. 그리고 이전에 강제로 수용된 장애인들과 정신질환자들은 이 명령에 따라서 살해당하고, 희생자들의 유가족들에게는 일제히 폐렴이나 뇌질환 등을 사인으로 적은 사망 편지가 도달한다. 나치 독일에 의해 '''부적격자'''로 분류당한 이들에 대한 살인은 후에 절멸수용소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샤워실이라 불린 가스실에서 이뤄졌다. 초반에는 아예 굶겨 죽이거나 약물 주사로 이루어졌으나, 굶겨 죽이는 건 시간이 오래 걸리고, 전쟁이 지속되면서 물자가 점점 귀해져갔으니 독극물조차 점차 희귀해져버려, 결국 일산화탄소 등을 비롯한 가스가 쓰이게 되었다. 특히 히틀러 본인이 가스를 쓸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프로젝트의 실질적인 책임자는 위 명렁서처럼 히틀러의 주치의 중 하나이자 위생학자인 카를 브란트가 담당했다. 히틀러의 장애인에 대한 견해를 가감없이 주워섬긴 브란트는 가스실과 병행해 실시한 약물주사처럼 효율적인 안락사 방법을 강구하기 위해 별도로 인간을 대상으로 하여 가스와 약물을 재료로 멩겔레를 방불케 하는 잔인한 생체실험을 진행했다. 그러나 이렇듯 인간말살 프로젝트라는 형태로 그 죄악이 전면에 대두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이 사건도 독일 자국민에 대한 나치의 전쟁범죄로 분류되어 전후 생체실험 혐의로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 회부된 23명의 의사에 대한 재판의 명칭이 'Karl Brandt et al.(카를 브란트 등)'이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는 이 재판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이 프로그램이 실행된 지 2년이 지난 1941년 여름, 이번에는 노인들을 겨냥한 새로운 질의서가 각 가정으로 보내졌다. 사람들은 자신의 부모나 조부모가 안락사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충격에 빠진다.
그뿐만 아니라 너무 못생겼거나 장애를 가진 아이들[5]도 표적이 되어 소리소문 없이 사라져 가기도 했다. 이 경우, 아이들의 부모들에게는 아이들이 '''특별 치료'''를 받으러 간다고 속이는 전단지가 배달되었고, 아이들은 비밀리에 각종 인체실험에 이용되다 목숨을 빼앗긴 후 부검되어 사라져갔다. 게다가 이는 전쟁이 본격적으로 일어난 1939년 후 더 심해져, 청소년기에 다다른 아이들까지도 끌려가게 되었다. 그리고 마비질환자, 뇌염, 간질, 정신분열증 환자들과 치매를 앓고 있던 노인들까지 대상이 되어 살해당했다.
40년부터 소수 개신교 목회자들이 T4에 대해 항의하기 시작했다. 나치는 이에 대해 공식적인 답변을 전혀 하지 않았다. 허나 이후 계속적으로 프리드리히 폰, 빌레펠트, 폴 게르하르트 등의 루터회 신학자들이 계속해서 항의를 시작했다. 이후 주교 프란츠 본바워를 기점으로 8월 시위가 발생했다.
독소전쟁이 발발하고서 대규모 전상자가 발생했고, 장애를 입은 참전용사에게도 이러한 T4 프로그램이 실시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소문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1차대전 참전자와 2차대전 참전자(중증 부상으로 인한 장애인)들 중 소수에게 대한 안락사가 실시되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원래 T4 프로그램을 계획했던 이들도 이러한 제대 군인들이나 참전 노인들은 아예 대상에 넣지 않았으나, '''그 카를 브란트가 몰래 이들도 포함시켜 생체 실험에 사용했다.''' 물론 이러한 사항은 카를 게프하르트 같은 일부만 알았다. 독일 국민들의 추측과 소문이 실제론 사실이었던 셈이다. 애시당초 장애인들을 모두 죽이는 정책인데 고의였든 실수였든 전상자 출신 수용자가 많든 적든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정부 입장에선 참전용사나 산업 현장 특히 군수 관련 분야 종사자가 근무 중 부상을 입으면 선전용으로 우대해 줘서 사기를 올리는 것이 이득이니 당연히 이들은 여건이 되는 한 챙겨 주려고 하며, 독일 역시 그랬다. 브란트 등의 일탈 행위 및 행정 오류 등으로 몇몇 참전용사들이 희생된 것이 T4 프로그램에 참전용사들을 적극 활용했다는 식으로 와전됐다.
이에 군인들이 동요하기 시작했으며, 종교계와 시민들이 저항을 했다. 특히 종교계의 경우 T4 입안 당시부터 격렬한 항의가 계속되었다. 클레멘스 폰 갈렌[6] 주교는 공개 강연을 통해 T4 프로그램을 비판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 연설에 감명받은 순수한 학생들은 백장미단을 만들어 저항 운동을 벌이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941년 히틀러는 T4 프로그램의 중지를 명령했다. 정확한 중단의 이유는 불명확하나,[7] 이 조치 이후로도 은밀한 살인은 계속되어 이전의 7만보다 많은 9만여 명이[8] 중지 선언 이후에 희생되었다. 공식적으로는 1941년에 종료되었지만, 가장 마지막 아이가 희생된 것은 '''독일이 항복하고도 3주가 지난 1945년 5월 29일이다.'''
스웨덴 국왕 칼 16세 구스타프의 외할아버지인 작센코부르크고타카를 에두아르트 [9]도 T4 작전에 가담한 바 있다. 또한 아스퍼거 증후군의 발견자로 알려진 한스 아스페르거도 T4 작전에 가담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있다.#
사실 이 프로그램 시작 전부터 히틀러와 그의 수하들은 반대 여론이 높을 것을 짐작하고 있었고, 이 덕분에 T4 프로그램에 관한 문서 기록이나 명령서 등을 사전에 작성하지 말라는 지시를 했었다. 때문에 최초 시행시 히틀러가 보낸 서신 정도 외에 공식적인 명령이 남은 것은 하나도 없다. T4 프로그램 자체도 내용이 엄청난 것이라 당시 관료 중에서도 반대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렇게 반대의 의지를 표명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쫓겨나고 말았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로타어 크라이시크(Lothar Kreyssig) 판사. 허나 희생자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T4 프로그램 자체의 존재를 숨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가족을 요양원으로 보낸 사람들은 갖은 수를 써서 다시 찾아오려 했고, 여러 방면으로 저항을 하게 된다. 특히 이런 운동은 가톨릭에서 가장 활발했다. 그리하여 결국 공식적으로 1941년 폐지를 선언하였고, 바르바로사 작전이 실행됨과 동시에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던 인력들(의료인력, 관리, 경비원 등)은 절멸 프로그램에 투입되어 홀로코스트를 본격적으로 실행하게 된다. 즉, 수용소에서 학살을 자행할 때 일을 할 수 없는 인력을 따로 분류해 죽였던 것이 이들의 끔찍한 작품이었다.

4. 전쟁 이후


이 사건의 중요 가담자인 카를 브란트 등은 전쟁 범죄자로 분류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피해자의 대다수가 독일인임에도 사형을 받은 것은 장애인을 학살한 반인륜 범죄로 분류되었기 때문이다.
이 끔찍한 흑역사 때문에 독일에서는 안락사 문제에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견해가 매우 강하여 논의 자체가 금기시되었다. 나치 잔재 청산을 최우선시하는 독일에서 안락사를 허용하는 것은 자칫 나치의 행위를 정당화시키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2010년에 대법원에서 환자의 동의 아래 안락사를 허용하였지만, 완전히 논쟁이 일단락될지는 미지수이다.
T4센터
기간
총 희생자 수
그라페네크
1940년 1월 ~ 1940년 12월
9,839
브란덴부르크
1940년 2월 ~ 1940년 10월
9,772
베른부르크
1940년 11월 ~ 1943년 7월
8,601
하르트하임
1940년 5월 ~ 1944년 12월
18,269
조넨슈타인
1940년 6월 ~ 1942년 9월
13,720
하다마르
1941년 1월 ~ 1942년 7월
10,072
공식적으로 발표된 T4 프로그램 희생자 수. 출처 : Document 87, P. 232 cit. in Ernst Klee. Dokumente zur "Euthanasie", 1985.
독일 뿐 아니라 주변국에서도 영향을 주었다. 사실 20세기 초까지는 나치 뿐 아니라, 후에 나치와 적대하는 주변국들에서도 우생학적 분위기가 만연했고, 선천적 지적 / 정신장애인에 대한 거세도 당연하게 여겨졌던 시대였다. 중세는 물론 근대까지도 선천적 기형과 정신질환은 천형으로 여겨져서 사회로부터 격리 - 귀족이라면 요양, 시민 이하라면 교외의 수용소 - 하는 것이 당연시되었고 강제 불임, 유산과 뇌엽 절제술 등의 대상이었다. 그런 마당에 진화론이 소개되었고 이어 우생학, 사회진화론이 나오면서[10] 나쁜 의미에서 인간을 떨어뜨려 가축의 연장선상에서 육종하자는 발상으로 연결되었고, "공동체가 더 높은 곳을 향해 진보하기 위해 열성인자는 솎아내야 한다"는 막장 개념이 탄생했다. 그러나 나치는 '단종' 정도가 아니라 아예 대학살을 저질러 주변국들을 경악하게 만들었고, 2차대전 이후로 우생학인권에 반하는 유사과학으로 판명되어 유럽 사회에서 퇴출되고 말았다. 다만 T4 작전 자체는 나치의 종말과 함께 사라졌지만, 나치 이전 행위의 관성은 계속되어서 북유럽을 비롯한 유럽 각국과 미국, 일본[11], 그리고 이들 소위 선진국의 영향을 받은 한국에서도 그 잔재는 길게는 이후 수십 년 간 남았다.
독일 뿐 아니라 각국에서 자행되었던 ‘정신질환이나 정신지체인을 불임으로 만들어 자손을 남기지 않게 하는 행위가 과연 전반적인 지능향상이나 정신질환 유병률 감소에 도움이 되었는가?’라는 질문에는 논란이 있는데 대개 특별한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고 본다. 특히 독일 같은 경우는 역시 전쟁으로 인한 스트레스나 영양실조가 큰 원인이겠지만 정신분열이나 지적장애의 발생율이 오히려 나치스 집권 전보다 엄청 늘어나버렸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철학 교수 피터 싱어도 이로 인해 입국이 거부되었다. 싱어 교수는 공리주의에 기반한 윤리학의 석학인데, 그의 주장은 한마디로 '고통의 최소화가 윤리다'로 정리될 수 있다. 따라서 고통을 느끼는 임산부가 원하지 않는 임신을 중단하고 싶을 경우, 고통을 느끼지 못 하는 초기 태아의 낙태는 문제가 되지 않고, 심각한 고통이 확실한 병을 가지고 태어날 태아의 낙태나 환자의 안락사도 허용되어야 한다는 주장. 사실 우리도 일상에서 사지마비로 살 바에는 죽는 것이 본인이나 가족에게도 좋다는 말을 한다. 그런데 독일은 이와 관련되어 너무 끔찍한 역사를 겪었기에, 싱어의 학설은 나치의 범죄를 정당화한다 하여 입국이 거부됐다. 독일이 얼마나 나치 시대에 학을 떼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2011년 11월에는 기존의 추모 명판 근처에 T4 프로그램에 관한 자세한 정보와 만행들을 알 수 있는 시설물이 새로 설치되었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주 공연장인 필하모니 바로 옆에 있다.

5. 나치당의 모순적인 모습


히틀러 본인부터 잠복고환을 가진 장애인이었으며[12], 선전장관 파울 요제프 괴벨스소아마비를 앓아 다리를 절었다. 그러나 둘 다 오히려 장애인을 죽이는 데 앞장섰고, 괴벨스는 아이만 7명이나 낳는, 위에서 말한 나치식 논리로는 설명이 안되는 행보를 이어갔다. 이에 대해선 그의 자기혐오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다. 자신이 장애인이니 장애인들에게서 자신의 '혐오스러운' 모습을 상기하고 이를 지우고자 노력했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어느 시대나 지배자 가계와 최고지배층은 예외였기 때문에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13], 현대에 일어난 사실이란 점이 이를 특이하게 만든다.
나치당은 이 같이 모순적인 사례가 매우 많다. 당장 히틀러부터도 외형 자체가 자신이 말한 이상적인 '아리안족'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14] 히틀러가 태어난 곳은 히틀러가 하등인간이라고 주장하던 체코 슬라브족과 통혼이 매우 흔한 곳이었다.[15] 독일군의 명장 에리히 폰 만슈타인 장군만 해도 '''유대인 혈통이 상당히 섞여있다는 주장이 있으며, 폴란드 혈통과 리투아니아 혈통은 확실하게 섞여있었다.''' 나치당이 상당히 미화한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나중에 나치당이 연구를 하다가 그에게 '''유대인 혈통이 있는 것을 알고 경악'''하였다. 이에 대한 나치당의 대응은 '''족보 위조'''(...)였는데, 부모에게 거짓 증언을 하도록 지시했다. 무엇보다 독일은 로마 제국 이래 지리적으로 유럽의 중심이고, 다양한 상인들, 선교자들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지역이라 혼혈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역사적으로 독일 땅은 대부분 유럽의 주요 전쟁터였고, 전쟁을 했다 하면 독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스위스, 폴란드, 프랑스, 덴마크 등 인접지역의 군대가 뭉치는 건 기본이었고, 멀리 이탈리아,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 러시아, 리투아니아, 스웨덴, 체코, 세르비아, 헝가리, 그리스 등에 심지어 오스만 투르크의 군사들까지 파병 오는 것도 일상이었다. 역사적으로 군대가 전쟁을 하고 그 땅에 주둔하면 자연스럽게 혼혈이 발생한다. 당장 제노포비아가 심했던 한국에서도[16] 짧은 6.25 전쟁 기간과 미군의 주둔으로 발생한 혼혈은 일부 있었다.[17] 근데 여기는 어차피 다들 비슷한 백인들끼리였으니 혼혈에 대한 거부감도 거의 없었고... 거기에 독일은 왕족들도 국가의 동맹과 공동체 구성을 위한 혼인 동맹이 엄청났다. 당장 합스부르크 왕족은 아예 모토가 '''"다른 이들은 전쟁을 하게 두어라, 너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결혼하라"'''였다. 혈통에 민감한 왕족들도 이럴진대[18][19][20] 먹고 살기 바쁜 평민들이야... 결론적으로 '''독일은 혈통적으로도 유럽에서도 가장 복잡한 국가였다.''' 되려 구석에 처박혀서 이민이 적었던 북유럽 국가들이나[21], 대항해시대 식민지 개발 이후 유럽의 전쟁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처박혀 있던 포르투갈 등이 혈통적으로 더 단순하다고 봐야 했다. 이런 지역엔 순수한 아리아인 자체가 있기가 어려웠다.[22]
루돌프 헤스의 어머니 같은 경우 나치당의 인종론을 강하게 지지했지만 정작 당사자는 '''그리스계 독일인'''이었고, 공군 장성 에르하르트 밀히의 경우, 아버지가 유대인이라서 밀히도 유대인이란 이유로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자 그를 아낀 헤르만 괴링이 '''"누가 유대인인지는 내가 결정한다"'''란 말을 하며 풀어주게 했다.[23] 등 이러한 사례는 나치당 내부에서 숱하게 발견할 수 있다. 바르샤바 봉기 당시 20만 폴란드인을 학살한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폴란드계였다.[24]
이러한 사례는 나치당이 주장한 인종주의독일의 현실을 완전히 외면하고, 그들의 '관념'에만 근거를 둔 피상적이고 맹목적인 환상 에 불과했음을 드러내주고 있다. 애당초 나치당은 북유럽에 가까운 독일 북부가 아닌 남부 바이에른을 기반으로 한 정당이었고, 히틀러가 입당했을 당시만 해도 당원 상당수는 눈만 파랗고 나머지는 갈색머리에 그을린 피부를 지닌 전형적인 '알프스 인종'[25]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례 때문인지 몰라도 문학 작품에서 인종차별주의적인 성향을 지닌 캐릭터가 정작 자신들이 혐오하는 인종의 피가 섞여 있다는 일종의 클리셰가 있다.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마법사 순수 혈통을 중시하지만 정작 자신은 머글 혼혈인 볼드모트, 세베루스 스네이프[26], 아돌프에게 고한다에서의 아돌프 히틀러와 아돌프 카우프만 등. 한나 아렌트의 저서인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이러한 모순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

6. 픽션에서


  • 은하영웅전설에서 열악 유전자 배제법이 이것을 모티브로 한 듯. 게다가 그 법안의 발안자가 열악 유전자를 가지고 있었을 확률이 높다는 것까지 똑같다. 그나마 은하제국은 나치만큼 미치지는 않았는지 발안자가 죽고 나서 사문화의 형태로 법안을 엎어버렸다.[27] 하지만 이미 전 인류의 1.3%인 40억 명이 죽은 뒤였다. 그리고 클리셰 그대로 후세 학자들의 의견에 의하면 루돌프 대제는 유전병 인자를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 근거로 루돌프가 여러 총희들 사이에서 본 아이들 중 유전병 환자들이 많았던 점이 거론되며 작중에서는 루돌프 대제의 후손인 엘리자베트 폰 브라운슈바이크나 자비네 폰 리텐하임에게 유전병 인자가 있다고 밝혀졌다.
  • 울펜슈타인: 더 뉴 오더에서는 당시 현실을 반영해 아주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B.J. 블라즈코윅즈가 입원해있던 병원[28]에서 주기적으로 나치 병사들이 와선 장애인들을 넘길 것을 강요했고[29], 마지막에 병원 폐쇄가 명령되자 데스헤드 특공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로 장애인들을 살해하기 시작하고 그 과정에서 B.J. 블라즈코윅즈가 깨어난다. 저항군의 멤버 중 클라우스 크로이츠는 원래 독일 국방군 출신의 순수 아리아인이었지만, 장애(평발)를 가지고 태어난 아들은 물론 아내까지 살해당하자 나치에 대항하여 싸우게 된다. 크라이서우 서클의 맥스 하스가 이 실험의 희생양 중 한 명으로 추정된다.
  •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에서 어인이 처음 시설에 갇힌 방 이름은 T-4이다. 영화에서 나타나는 사람들의 장애인 혐오를 생각해보면 흥미로운 면이 있다.
  • 미드 높은 성의 사나이에선 미국 대부분 지역에서 T-4 작전이 광범위하게 시행되며, SS 지휘관 존 스미스의 아들 토마스가 자신의 선천적 장애를 자진 신고하여 순교자로 추앙받는 장면이 나온다.
[1] 현재 이 거리 중심가에는 '''프로그램에 의해 살해당한 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명판'''이 새겨져 있다.[2] 막상 바그너 자신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6개월 전인 1939년 3월에 51세의 나이로 급사했다.[3] 나치당 당수인 히틀러 바로 밑의 당 최고위 간부들이다.[4] 당시 Reichsjustizminister(법무부) 장관으로 '''나치당 의장 비서실장 즉 히틀러의 당무 비서실장'''이다.[5] 주의가 산만해 인식력이 떨어지거나 다운 증후군을 보이는 경우, 지적장애를 가진 아이들 등. 명확할 수도 있고 불명확할 수도 있지만, 나치가 존재하던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자폐증을 가진 아이들도 지적장애를 가진 아이들과 같은 아이들로 보고 살해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은 T4 프로그램 관련 한글 기사에 발달장애라고 되어 있어 명확한 것으로 보인다.[6] 사실 이 양반의 이념은 한동안 나치즘에 가까웠다. 폴란드소련과의 전쟁에 나가는 독일군에게 축복 기도를 했을 정도. 하지만 나치의 실상을 보고는 마음을 바꿔 1941년부터 설교에서 나치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상당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고 폭넓은 존경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히틀러 일당도 그를 건드릴 수 없었다.[7] 일반적인 설명은 범종파적인 종교계의 저항이 전국민적 봉기로 이어질 것을 우려했다는 설이다.[8] 다른 통계의 경우 250,000~350,000명으로 추산하기도 한다.[9] 빅토리아 여왕의 손자, 즉 막내 아들인 올버니 공작 레오폴드의 1남 1녀 중 막내이자 유복자이며 원래는 영국 왕자로 올버니 공작 찰스 에드워드로 불렸다. 그가 16세가 되던 해 삼촌이자 역시 영국 왕자 출신인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알프레트(前 에든버러 공작 앨프리드)가 사망하면서(똑같은 이름의 아들이 있었지만 먼저 사망했다) 공작령은 영국 왕실 사람들 중에 누군가가 상속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왕위계승자가 훗날 조지 5세가 되는 요크 공작 조지밖에 남지 않았던 에드워드 7세는 당연히 거부했으며, 코넛 공작 아서와 그의 아들에게 돌아갔지만 조국을 떠나 외국의 군주가 되고 싶어하지 않았기에 공작령의 상속을 포기했다. 그래서 결국 찰스 에드워드에게 공작령이 돌아갔는데, 어머니 발데크피르몬트의 헬레나는 어린 아들이 독일의 군주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사랑하는 남편 앨버트 공이 자란 곳이기도 했던 코부르크를 잃고 싶지 않았던 빅토리아 여왕이 "공작령을 받아들이는 것이 왕족의 의무다"라고 설득하면서 결국 공작령을 상속했으며, 이름도 찰스 에드워드에서 카를 에두아르트로 바뀌었다.[10] 진보를 모토로 하는 당시 시민사회의 분위기, 시민사회로 돌입했지만 아직 신분제 계급사회였던 사회상황, 백인우월주의제국주의의 전성기던 시대상황, 철학적으로는 인간 기계론과 유물론이 등장하기도 해서 이 모든 것의 칵테일이 그런 관습이 지속되는 데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도 있다.[11] 일본에서는 1948년 우생보호법이 제정되어 1996년 폐지될 때까지 1만 6475건에 달하는 장애인과 유전병 환자들에 대한 강제 불임 수술을 정부가 나서서 한 일이 있었다. #[12] 자신의 6촌 여동생에게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가스실에 보내 죽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히틀러 본인에게도 정신적 장애가 있는 것 아니냐는 추측이 돌기도 했다.[13] 유럽 왕가의 유전병은 때때로 고귀한 질병 또는 혈통을 이어받은 증거로 간주되기도 했다.[14] 다만 나치 독일은 이상적인 아리안족이라는 모델을 제시했지만 당연히 여기에 안 든다고 다 죽이거나 한건 아니다(...) 애초 그랬다면 살아남을 독일인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즉 나치 독일 입장에서 미달만 안 되면 통과고 모델은 말 그대로 모델이다. 물론 그 모델에 적합하다면 뭔가 더 좋은 대접을 받았을 수는 있겠지만[15] 심지어 히틀러는 근친상간 혹은 유대인 사생아 혈통이란 설도 존재한다. 히틀러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가계도 자체가 미스테리한 부분이 많다. 심지어 혈통에 북아프리카인도 섞여있다는 얘기도 있다.[16] 동아시아 3국의 경계는 짧게는 오백 년, 길게는 천 년 이상 전에 초기 민족구별과 함께 정해졌고 그것을 넘은 혼혈의 계기는 거의 전쟁밖에 없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이방인 = 침공자 = 겁탈자기 때문에 당연히 외부인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다. 물론 수학적으로 꼬치꼬치 따지면 원명교체기 당시 난립했다 명나라에게 패배했던 한족 정권들의 황가, 명청교체기 당시 만주족을 피해 온 명나라 유민들처럼(예시로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과 함께 싸웠다 진린의 후손 역시도 명나라 멸망 후 조선으로 건너왔다.) 조선시대에도 특정 시기에는 외국인이 유입이 있었지만 큰 틀에서 보면 한국이 타국들에 비해 혈통적으로 훨씬 단순한건 맞다.[17] 여기에 더하여 현존하는 성씨와 본관의 절반은 중국에서 건너온 것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조선시대때는 중국이 현재의 미국과 같은 가장 잘나가는 국가였기 때문에 자신의 조상이 선진국(즉, 중국)에서 온 후손이다라는걸 일종의 간지로 여겨서 의도적으로 중국과 연결 짓곤 했다. 즉, 실제로 중국에서 건너온게 아니라 중국에서 건너왔다고 일부러 구라치는게 유행이었다는 얘기.[18] 물론 왕족들의 국제결혼은 이익이 많이 남았다. 예를 오스트리아만 해도 결혼동맹으로 부르고뉴, 네덜란드를 얻거나 스페인과 일시적으로 동군연합을 이루기도 했다. 이 때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바로 카를 5세[19] 일례로 나치가 그렇게 숭배한 프리드리히 대왕의 경우 선대에 독일계(호엔촐레른, 하노버, 팔츠계 비텔스바흐), 네덜란드계(오라녜), 프랑스계(로렌-기즈, 부르봉-방돔), 영국계(튜더, 스튜어트)와 연결된다.(네덜란드, 영국이야 독일과 같은 게르만계지만 프랑스는 게르만+라틴 등 다양한 계통이 섞여있다.) 당장 오라녜 공 빌럼 1세와 제임스 1세가 5대 조상이니 뭐.[20] 마리아 테레지아의 경우 독일계(합스부르크, 브라운슈바이크볼텐뷔펠, 비텔스바흐), 에스파냐계(트라스미디라), 헝가리계, 프랑스계(발루아부르군디), 포르투갈계와 연결된다.[21] 이런 나라들은 구석에 처박힌데다가 환경적으로도 조건이 나쁘기에 굳이 사람들이 살러 가거나 땅을 빼앗을 생각을 할 가능성이 적다.[22] 무엇보다 독일은 프로이센이 열강 중 하나로 들어서고 끝내 이들에 의해 독일 제국이 탄생하기 전까지 35개 소국으로 나뉘어있었고, 이들 모두가 유럽의 여러 왕가나 공작 가문들과 혼인동맹을 맺었다. 귀족들도 이럴진대 평민들은 말할 것도 없다. 당연히 유대인 역시 마찬가지이며, 순혈 아리아인이라는 것 자체가 허상에 지나지 않을 수 밖에 없었다.[23] 밀히는 결국 밀히의 어머니가 바람을 피워서 낳았다는 고백을 통해 유대인 혐의를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출생의 비밀이 드러나면서 온갖 욕을 먹은 건 안 자랑.[24] 정작 자기는 폴란드식 성을 뗄 정도로 폴란드계인 것을 부정했다고 한다.[25] 1920년대 당시 우생학 기준, 현재는 이런 식으로 분류하지 않는다.[26] 나중에야 후회하지만 어릴 때는 머글 태생들을 머드블러드라는 멸칭으로 부르고 다녔다.[27] 정확히는 사문화를 시킨 것 때문에 효력은 형식적으로는 존재해서 500년 후 은하제국 유년학교 살인사건 당시 범인으로 몰린 하제는 범인 혐의는 벗어났지만 선천적 색맹의 이유로 은하제국 유년학교에서 퇴학당했다.[28] 이 병원의 원장이자 아냐의 아버지 크르지토프 올리바 박사는 이 공로로 훈장도 받는다. 그러나 실상은 데스헤드가 병원을 총칼로 위협하여 억지로 환자들을 뺏어가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아냐의 부모는 환자들을 지켜주지 못하는 현실에 통곡만 할 수밖에 없었고 마지막에는 장애인을 학살하는 나치군을 저지하다가 살해당한다.[29] 이 장애인들은 당연히 우버솔다튼의 재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