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동(파주)
臺城洞 / Daeseong-d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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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경비구역 인근에 위치한 마을. '동'이 붙어서 행정구역 단위가 동인 줄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실제 행정구역상으로는 경기도 파주시(옛 장단군) 군내면 조산리며 모든 행정 업무는 장단출장소에서 처리한다. '''대성동 평화의 마을'''이나 '''대성동 자유의 마을'''이라고도 불린다.
행정구역은 아니지만, 이 지역의 도로명주소로 '대성동길'이라는 이름이 부여되어, 주소에도 '대성동'이 적히게 되었다. 도로명주소로 적을 때는 리를 빼고, 도로명을 대신 넣어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대성동길'이 된다. 신 우편번호(기초구역번호)는 대성동 전역이 '10800'이다.
'''정전협정에 따른 남방한계선 이북 비무장지대에 남아있는 유일한 남측 마을이다.''' 2017년 기준 49세대 총 193명이 거주 중. 조금만 옆쪽으로 가면 바로 군사분계선이, 북쪽으로 올라가면 판문점이 있으며, 바로 코앞에는 북한 인공기가 보이며, 북한 기정동 마을도 육안으로 흐릿하지만 볼 수 있다.
재미없기로 유명한 대남방송도 매일 들을 수 있었다. 남북관계가 급격하게 악화되었을 때는 대남 방송을 아침부터 새벽까지 틀어놓았다. 소음공해가 가공할 수준이었다고. 2018 제1차 남북정상회담 이후로는 남에서나 북에서나 DMZ 내 대북방송, 대남방송 송출을 중단하기로 합의했기 때문에 현재는 들을 수 없다.
정전협정 당시 거주했던 원주민들과 그 자손들만이 거주할 수 있으며, '''여기에 해당한다 하더라도 1년 중 8개월 이상을 대성동에서 거주하지 않으면 주민권을 박탈당한다'''[1] . 즉 주거와 주거 이전의 자유가 제한된다. 남성이 외지인 여성과 결혼한다면 주민으로 남을 수 있지만 여성이 외지인 남성과 결혼한다면 마을을 떠나야 한다.[2] 다만, 여성이 외지인 남성과 결혼하더라도 주민권을 유지할 수 있는 예외적인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외지인 남성이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것이다. 외지인 남성이 데릴사위로 들어가서 입주하게 되면 그때부터 현지인으로 간주되기 때문. 하지만 데릴사위를 들이는 게 허가되는 조건이 '''처가 쪽이 아들이 없는 경우'''[3] 에 한정되며 그마저도 바로 OK인 게 아니라 입국심사와 마찬가지로 까다롭게 심사를 거치고 나서야 겨우 허가가 난다. 그래서 대성동 마을에 데릴사위로 들어간 외지 출신의 남성은 휴전 협정 이후로 2020년 현재까지 통틀어서도 단 2명밖에 없다.
대성동 주민이 32세가 되면 대성동에서 계속 살아갈지 대성동을 떠나서 살지를 결정해야 한다. 대성동을 떠나서 살기로 결정한 사람이라도 자신이 나고 자란 대성동으로 귀농해서 인생 말년을 보내고 싶은 사람도 있을 테니 원한다면 나중에 다시 대성동으로 들어와서 살 수도 있다. 하지만 자의로 대성동을 떠난 사람이 대성동 주민으로 복귀하고자 하는 경우 주민회의를 거치고 '''UN사령관의 허가를 받아야''' 주민으로 복귀할 권리를 얻게 된다. 사실 그 전에도 나가서 사는 건 가능하기는 하다. 외지인이 마을에 들어오는 게 어렵지 내부인이 나가는 건 상대적으로 쉽다. 그냥 1년 중 4개월 이상 밖에서 거주하면 자동으로 거주권리가 박탈된다.
주민 대부분은 농업(벼, 고추 재배)을 생업으로 삼고 있으며, 돼지, 사슴 등을 일부 기른다. 마을 주민들의 소득은 2006년 기준 가구당 연 6700만 원 정도로 중위 소득 분위를 아득히 넘어서는 수치며, 일반 농민들이나 웬만한 중산층보단 제법 많은 편이다. 앞서 언급했듯 세금 면제는 덤[4]
말만 파주시 땅이지 사실상 UN령이라고 봐도 된다. 다만, UN은 국가가 아니므로 토지 소유를 못하기 때문에 소유는 파주가 하되 위임받은 UN군으로부터 통치를 받는다. 그렇다고 해서 뒤에 후술하듯 이 곳이 치외법권 지역은 아니다.
마을 주위는 군부대 아니면 농경지다. 경작권이 주어지지만, 토지에 대한 소유권은 가질 수 없다. 북한의 도발이 심했을 때에는 농사 짓는데 경호원으로 대한민국 육군 병력이 따라가기도 했다.
만약 UN군에게 행패를 부리면 해당 주민은 4개월간 추방을 당하는데, 이는 사실상 주민권 박탈을 의미한다. 위에 보다시피 1년에 8개월 이상 살아야 주민권 유지니까. 또 이장은 주민들이 선출하여 뽑지만, UN 사령관의 직권으로 이장을 파면시킬 수 있다.
한 마디로 전혀 안 그런 것 같지만, 살벌한 동네다. 마을 안에도 군인이 있고 버스 타고 가다가 잘 보면 위장해놓은 초소 같은 게 보이기도 한다. 농지로 가는 길에도 탈북하는 군인들을 안내하는 표지판, 전화와 무전기 등이 설치되어 있다. 즉 '''전쟁 나면 3분 만에 날아갈 동네'''다.
휴전 이후 초기 14년 간은 참정권이 제한된 채 살아왔다가, 1967년이 되어서야 투표권이 주어졌다. 이후 대성동 주민들은 투표일에 모두 함께 마을 밖으로 외출한다. 그래서 대성동 마을 사람들의 투표율은 매번 거의 100%에 이른다.
MDL과 너무 가까워서인지 조선인민군 육군들이 대성동을 '''해방'''시키겠다고 위협하기도 한다. 1958년 7월 마을 사람들과 미군들 사이에서 통역관 역할을 하던 이영기 씨가 월북을 하고, 또 같은 해 12월 8일 이대성 씨가 5~6명에게 끌려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60년대에는 마을 주민이 북한군에게 사살된 적이 있다고 하고, 1975년에는 농부가 납북된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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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나왔듯이 왼쪽에 두 번째에 서있는 김세연은 부대명이 안 적혀 있고 머슴이라고 적혀있는 걸 봐서 1975년에 납치된 농민으로 보인다. 하지만 지금은 '''생사를 알 수 없다'''. 참고로 여기나온 ('양'이라는 글씨 밑에 있는) 윤치기라는 사람은 1970~1980년대쯤 탈북했다고 한다.
1997년에는 마을 할머니와 그 아들이 도토리를 주우러 갔다가 월경해서 북한에 5일간 붙잡힌 적이 있다. 2012년 10월에는 탈북자 단체의 대북 선전 풍선 날리기를 핑계로 북한이 ‘임진각 군사적 타격’을 위협하는 바람에 마을의 모든 주민이 잠시 벙커 신세를 지기도 했다.
이 동네의 불편함은 북한군 문제만이 아니다.
마을 안에 유일한 교육시설인 대성동초등학교가 있다. 1967년 개교. 원주민 자녀는 한 자리 수지만 파주시 이곳저곳에서 학생을 끌어모아 간신히 학교를 유지하고 있다. '''학생이 30명인데 교직원이 무려 21명'''인 무서운 학교.[5] 학생 수가 적어서 1대 1 교육이 이뤄지는 데다 영어특성화학교로 지정돼 있어 판문점 소속 UN군이 영어를 가르쳐 주기 때문에, 해마다 외부 학생 신청자가 많다.
또한 학교 곳곳을 육군 병력이 보초를 서며 지키고 있다.
중고등학교가 없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보내야 한다. 그래서 대성동초등학교 졸업(예정)생은 서울특별시의 중학교에 배치받을 수 있는 특혜를 주고 있다. 예전에 중학교의 경우 급식비나 방과후 학교 비용, 의무교육이 아닌 고등학교의 경우 운영지원비 등을 낼 때도 대성동 주민들은 학비와 급식비 등 모든 금액을 전액 지원받았다.
현지 주민들이 자녀 교육 때문에 마을을 일시적으로 떠나기도 하는데, 이 경우에는 주민의 신분을 유지할 수 있다. 특히 대성초 졸업생들은 서울 중학교 입학 가능 특혜가 있어 다들 서울에 나가는데, 미성년자들이니만큼 부모 한 명 혹은 둘 다 함께 나가서 살아야 한다.
주민 어린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살아가면서 '위험하다, 무섭다'는 생각을 딱히 하지 않는다. 어린이들이 놀러다닐 때도 항상 군인이 주시를 해야 하는 동네다. 그 반대급부로 어린이들이 밖에서 노는 것을 부모들이 위험하다고 통제하는 일이 적다. 크리스마스에는 미합중국 육군 부대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는 데 어린이들을 초대한다.
최근에는 근처 미 육군기지의 미군을 끌어들여 원어민 영어교육을 시킨다고 신문에 나오기도 했다. 졸업생들을 축하해주기 위해 UN군사령부와 중립국감독위원회의 각국 장교들이 졸업식에 대거 참석하는 풍경이 매년 뉴스에 나온다. 마을 주민이 아닌 학생과 교직원은 허가 없이 학교 담 밖을 나갈 수 없으며 심지어 공놀이 하다 공이 담 밖으로 넘어가도 나갈 수 없어서 원주민 친구한테 주워달라고 부탁해야 한다고 한다.
가는 데만 관문이 3개가 있고 처음 들어가는 데도 '평화의 다리' 라는 다리를 건너가야 하는데 평화의 다리에는 바리케이트가 쫙 깔려있고 중간에 육군 초소가 있다. 평화의 다리에 처음 들어갈 때도 육군 군사경찰이 차를 멈추게 하고 신분증 검사를 한다. 들어가는 마지막 관문에는 '평화의 마을 대성동' 이라는 큰 표지판이 있다. 이른바, '평화의 마을'이지만 군사경찰에 바리케이트로 통제되어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라는 의견도 있다. 물론 마을 안은 고요하고 평화롭게 유지된다.
이곳을 방문할 때 반드시 파란색 손수건을 창문으로 펄럭이게 해야 하는데 달지 않고 무단으로 들어갔다가는 총에 맞아도 뭐라 하지 못하는 지역이다. 사실 저 파란색 손수건은 DMZ 출입 차량이라면 해놓아야 되는 건데 원칙적으로, 파란색(남색)은 대한민국군 계통, 하얀색은 UN군사령부, 빨간색과 노란색은 북중 공산군이 써먹는다. 그리고 중립국감시위원회는 저 4색이 들어간 깃발을 달아놓으며 이 깃발은 중립국감시위원회의 마크이기도 하다. 개성공단으로 넘어가는 차들을 보면 빨간색 깃발을 단 한국 번호판을 단 트럭들이 보이기도 한다.
마을로 들어오면 UN군에 자신이 방문했다는 것을 신고해야 한다. 방문자가 있을 경우 군인들이 집에 찾아와서 방문자를 확인한다. 다만, 외부인이 이 마을을 출입하려면 일주일 전에 신청을 한 후 신원 확인을 거쳐야 가능하다. 주민이 아닌 경우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만 출입이 가능하다. 다만, 사람이 죽으면 외부 조문객이 들어와야 하는데 규칙대로라면 장례식이 다 끝난 후에나 조문할 수 있지만 예외는 있다. 그리고 김문수 도지사가 2011년에 1박 2일간 머무른 적이 있다.
현지 주민의 경우 매일 저녁 7시가 되면 육군 민정경찰이 가구별 인원을 점검하고 밤 12시부터 새벽 5시까지는 통행이 금지된다. 이 통행금지를 어기면 1차 위반시 경고, 2차에는 7일 추방, 5차 위반이면 주민권이 박탈된다. 다만, 밤중에 병이 나거나 돌발적인 사태가 일어나 나가야 할 일도 있고 돌아와야 할 일도 있으므로 그럴 때는 부대와 연락하고 오간다.
6.25 전쟁 전에는 이 마을 사람들은 물건을 살 때 개성장에 갔다. 걸어서 '''9km'''만 가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면서 개성장에 가는 길이 막혔고 그 다음부터는 고립된 생활을 해야 했다.
휴전 이후에는 '민사표'라고 해서 미군들이 군용트럭으로 1주일에 1번 문산으로 사람들을 실어다 주었다. 생활용품을 사려면 문산으로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농산물 역시 이 미군 군용트럭을 통해 판매하였다. 하지만 당시 돌아오는 차는 마련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한 번 나간 사람은 1주일간 문산 밖에서 살아야 했다. 그래서 문산에 지낼 친척집이 없는 사람은 마을 밖으로 나가는 것이 힘들었다. 여관비를 내야 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장을 자주 보러 나갈 수 없었다. 교통이 불편해 유엔군 트럭이 일주일에 한 번씩 마을에 들어와 생필품을 나눠주기도 했다고. 그리고 당시 군용트럭에는 문이 없었기 때문에 흙길을 지나다 보면 옷이 흩날리는 흙먼지로 더러워지기 일쑤였다. 결혼식에 가는 사람들은 담요를 덮고 가거나 아예 보자기에 옷을 싸가지고 가서 결혼식장 근처에서 갈아입기도 했다. 이 군용트럭의 운행은 나중에는 1주일 2번으로 늘었다.
미니버스를 도입한 적이 있었으나 운영적자로 금세 중단되었다. 이후 1972년 마을버스를 기증해 버스 운행이 일주일에 세 번으로 늘었다. 1970년대 말부터 버스가 매일 한 번씩 다니다가 횟수가 늘어 지금은 하루 세 번 문산터미널까지 왕복한다. (오전 6시, 정오, 오후 6시) 문산읍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신일여객[6] 93번 따복버스를 타고 갈 수 있다. 마을로 들어가려면 패스라는 출입증이 필요하고 군부대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백연리에 있는 통일촌과 진동면에 위치한 해마루촌 역시 마찬가지. 노인 주민들은 거동이 불편하기 때문에 버스운전기사가 혈압약 등 주기적으로 받아야 하는 약을 전달해주기도 한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자가용이 늘어났다.''' 그래서 현재 집집마다 1대 이상 자가용을 보유하고 있고 마을 출입 역시 개인 자가용을 이용한다.대성동 주민들의 의식주 생활
군사 지역이라 차량 내비게이션도 여기에서는 먹통이 된다. 같은 이유로 네이버 지도나 다음 지도에서도 이 마을은 로드뷰를 제공하지 않는다. 구글 스트리트뷰에서 대성동초등학교와 인근 지역을 볼 수는 있지만, 대성동을 위성사진만 보고 알아서 찾아야 한다. 잘못 찾아서 도라산역 쪽만 보고 있으면 못 찾는다.
철도교통으로는 장단역이 있었으나 6.25 전쟁으로 인해 현재는 운행되지 않는다. 때문에 철도교통을 이용하려면 어쩔 수 없이 도라산역으로 이동해서 DMZ-train[7] 을 타야한다. 경의중앙선 전철이 개통한다면 문산과 서울로 가기 수월해질 듯 하다.
대성동 주민들은 병역의 의무와 납세의 의무가 모두 면제된다.[8] 대성동마을은 정전협정 제10항에 의해 국제연합군사령관에서 관할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따라 민사행정 및 구제사업은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이 책임지며, UN사령관(한미연합사령관이 겸직)이 관할하고 UN의 통제를 받기 때문이다.[9] 즉 군대 안 가고 세금도 안 낸다.
이에 대해 불만을 갖는 국민들 가운데는 비무장지대의 주권 행사를 헌법에 의하지 않고 제약한 정전협정을 일부 폐기선언하고, 앞으로는 정전협정중 그 이외의 내용만 준수하자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 면세는 그리 큰 혜택이 아니다. 대성동 주민들의 절대 다수는 농업 및 관련 사업에 종사하고 있고, 대한민국의 세법상 농산어업 등으로 거두는 소득이나 관련 비용은 대부분 면세 또는 저율 과세 혜택을 주고 있기 때문에 규정을 바꾸어 세금을 내게 된다고 해도 낼 것이 거의 없다.
대성동 주민은 휴전협정 당시 DMZ 안쪽에 살던 사람들과 그 자손으로 한정되고 위에 적힌 것처럼 셀 수 없이 많은 불편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혜택을 줄 만하다고 여겨 문제삼지 않는 국민이 대다수다. 날이 어두워지면 통행금지고 이를 무단으로 어겼다가는 잡혀간다고 생각해 보라. 오고가는데 수속이 필요하고, 친인척이 방문하는데도 통행증을 신청해야 한다고, 통행증 없으면 아예 못 들어간다고 말이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평시에도 전시통제를 당하는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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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근처 북한에도 비슷한 입장의 마을인 기정동이 있다. 냉전 시절에는 북한 기정동 마을의 인공기 깃대와 대성동 마을의 태극기 깃대의 높이를 서로 높이는 경쟁을 하기도 했지만, 쓰잘데기 없는 짓이라고 판단한 남측이 먼저 그만두며 경쟁이 끝났다고 한다. 도덕 교과서에도 실려있었던 일화이다. 덕분에 태극기나 인공기나 굉장히 높은 곳에 매달려 있다. 특히 기정동 깃대는 약 160m에 달하는 그 높이로 인해 기네스북에 올라가 있었지만... 2010년에 아제르바이잔 바쿠 깃대에게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국기게양대 타이틀을 뺏겼다.[10]
다만, 대성동과는 달리 기정동 마을은 현재 거주자가 거의 없어 유령 마을 수준이다. 지어 놓은 주택들도 선전용으로 외관만 그럴싸하게 지어 놓은 것이라, 내부는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수준이라고. 인근 마을에서 여기로 출퇴근시키며 선전활동에만 쓰고 있는 동네인데, 탈북에 대한 우려도 이유인 듯하다.
60년 전에 기정동 마을에 사는 큰 형님을 두고 헤어진 주민이 있다.#
여기 게양되는 태극기는 깃대가 높다 보니 비바람에 찢어지는 경우가 있어서 일정 기간마다 새 태극기로 교체해주는데, 그 비용은 파주시에서 전액 부담하고 게양/하기식은 육군 병력과 마을 주민이 함께 한다. 태극기 크기가 어마어마하게 큰데, 북한 인공기에 비해서 원단이 훨씬 좋아 무게는 굉장히 가볍다고 한다. 태극기를 교체할 때 깃대가 너무 높아서 기계로 내리고 게양한다고.
한편 해피선데이 1박 2일에서 예능 최초로 대성동을 방문했다.
Warhammer 40,000 국내 커뮤니티에서 카디아가 망하기 전까지 대성동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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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공동경비구역 인근에 위치한 마을. '동'이 붙어서 행정구역 단위가 동인 줄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실제 행정구역상으로는 경기도 파주시(옛 장단군) 군내면 조산리며 모든 행정 업무는 장단출장소에서 처리한다. '''대성동 평화의 마을'''이나 '''대성동 자유의 마을'''이라고도 불린다.
행정구역은 아니지만, 이 지역의 도로명주소로 '대성동길'이라는 이름이 부여되어, 주소에도 '대성동'이 적히게 되었다. 도로명주소로 적을 때는 리를 빼고, 도로명을 대신 넣어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대성동길'이 된다. 신 우편번호(기초구역번호)는 대성동 전역이 '10800'이다.
'''정전협정에 따른 남방한계선 이북 비무장지대에 남아있는 유일한 남측 마을이다.''' 2017년 기준 49세대 총 193명이 거주 중. 조금만 옆쪽으로 가면 바로 군사분계선이, 북쪽으로 올라가면 판문점이 있으며, 바로 코앞에는 북한 인공기가 보이며, 북한 기정동 마을도 육안으로 흐릿하지만 볼 수 있다.
재미없기로 유명한 대남방송도 매일 들을 수 있었다. 남북관계가 급격하게 악화되었을 때는 대남 방송을 아침부터 새벽까지 틀어놓았다. 소음공해가 가공할 수준이었다고. 2018 제1차 남북정상회담 이후로는 남에서나 북에서나 DMZ 내 대북방송, 대남방송 송출을 중단하기로 합의했기 때문에 현재는 들을 수 없다.
2. 거주민의 자격
정전협정 당시 거주했던 원주민들과 그 자손들만이 거주할 수 있으며, '''여기에 해당한다 하더라도 1년 중 8개월 이상을 대성동에서 거주하지 않으면 주민권을 박탈당한다'''[1] . 즉 주거와 주거 이전의 자유가 제한된다. 남성이 외지인 여성과 결혼한다면 주민으로 남을 수 있지만 여성이 외지인 남성과 결혼한다면 마을을 떠나야 한다.[2] 다만, 여성이 외지인 남성과 결혼하더라도 주민권을 유지할 수 있는 예외적인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외지인 남성이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것이다. 외지인 남성이 데릴사위로 들어가서 입주하게 되면 그때부터 현지인으로 간주되기 때문. 하지만 데릴사위를 들이는 게 허가되는 조건이 '''처가 쪽이 아들이 없는 경우'''[3] 에 한정되며 그마저도 바로 OK인 게 아니라 입국심사와 마찬가지로 까다롭게 심사를 거치고 나서야 겨우 허가가 난다. 그래서 대성동 마을에 데릴사위로 들어간 외지 출신의 남성은 휴전 협정 이후로 2020년 현재까지 통틀어서도 단 2명밖에 없다.
대성동 주민이 32세가 되면 대성동에서 계속 살아갈지 대성동을 떠나서 살지를 결정해야 한다. 대성동을 떠나서 살기로 결정한 사람이라도 자신이 나고 자란 대성동으로 귀농해서 인생 말년을 보내고 싶은 사람도 있을 테니 원한다면 나중에 다시 대성동으로 들어와서 살 수도 있다. 하지만 자의로 대성동을 떠난 사람이 대성동 주민으로 복귀하고자 하는 경우 주민회의를 거치고 '''UN사령관의 허가를 받아야''' 주민으로 복귀할 권리를 얻게 된다. 사실 그 전에도 나가서 사는 건 가능하기는 하다. 외지인이 마을에 들어오는 게 어렵지 내부인이 나가는 건 상대적으로 쉽다. 그냥 1년 중 4개월 이상 밖에서 거주하면 자동으로 거주권리가 박탈된다.
3. 상세
주민 대부분은 농업(벼, 고추 재배)을 생업으로 삼고 있으며, 돼지, 사슴 등을 일부 기른다. 마을 주민들의 소득은 2006년 기준 가구당 연 6700만 원 정도로 중위 소득 분위를 아득히 넘어서는 수치며, 일반 농민들이나 웬만한 중산층보단 제법 많은 편이다. 앞서 언급했듯 세금 면제는 덤[4]
말만 파주시 땅이지 사실상 UN령이라고 봐도 된다. 다만, UN은 국가가 아니므로 토지 소유를 못하기 때문에 소유는 파주가 하되 위임받은 UN군으로부터 통치를 받는다. 그렇다고 해서 뒤에 후술하듯 이 곳이 치외법권 지역은 아니다.
마을 주위는 군부대 아니면 농경지다. 경작권이 주어지지만, 토지에 대한 소유권은 가질 수 없다. 북한의 도발이 심했을 때에는 농사 짓는데 경호원으로 대한민국 육군 병력이 따라가기도 했다.
만약 UN군에게 행패를 부리면 해당 주민은 4개월간 추방을 당하는데, 이는 사실상 주민권 박탈을 의미한다. 위에 보다시피 1년에 8개월 이상 살아야 주민권 유지니까. 또 이장은 주민들이 선출하여 뽑지만, UN 사령관의 직권으로 이장을 파면시킬 수 있다.
한 마디로 전혀 안 그런 것 같지만, 살벌한 동네다. 마을 안에도 군인이 있고 버스 타고 가다가 잘 보면 위장해놓은 초소 같은 게 보이기도 한다. 농지로 가는 길에도 탈북하는 군인들을 안내하는 표지판, 전화와 무전기 등이 설치되어 있다. 즉 '''전쟁 나면 3분 만에 날아갈 동네'''다.
휴전 이후 초기 14년 간은 참정권이 제한된 채 살아왔다가, 1967년이 되어서야 투표권이 주어졌다. 이후 대성동 주민들은 투표일에 모두 함께 마을 밖으로 외출한다. 그래서 대성동 마을 사람들의 투표율은 매번 거의 100%에 이른다.
3.1. 사건사고
MDL과 너무 가까워서인지 조선인민군 육군들이 대성동을 '''해방'''시키겠다고 위협하기도 한다. 1958년 7월 마을 사람들과 미군들 사이에서 통역관 역할을 하던 이영기 씨가 월북을 하고, 또 같은 해 12월 8일 이대성 씨가 5~6명에게 끌려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60년대에는 마을 주민이 북한군에게 사살된 적이 있다고 하고, 1975년에는 농부가 납북된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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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나왔듯이 왼쪽에 두 번째에 서있는 김세연은 부대명이 안 적혀 있고 머슴이라고 적혀있는 걸 봐서 1975년에 납치된 농민으로 보인다. 하지만 지금은 '''생사를 알 수 없다'''. 참고로 여기나온 ('양'이라는 글씨 밑에 있는) 윤치기라는 사람은 1970~1980년대쯤 탈북했다고 한다.
1997년에는 마을 할머니와 그 아들이 도토리를 주우러 갔다가 월경해서 북한에 5일간 붙잡힌 적이 있다. 2012년 10월에는 탈북자 단체의 대북 선전 풍선 날리기를 핑계로 북한이 ‘임진각 군사적 타격’을 위협하는 바람에 마을의 모든 주민이 잠시 벙커 신세를 지기도 했다.
3.2. 시설 문제
이 동네의 불편함은 북한군 문제만이 아니다.
- 마트도 편의점은 물론이고 슈퍼나 구멍가게조차 없다. 마을에서 공동 관리하는 직판장이 있지만 직판장은 PX와 마찬가지로, 과자나 아이스크림 등 극히 적은 물건밖에 팔지 않기 때문에 제대로 장을 볼려면 무조건 자가용을 타고 가까운 문산읍까지 나가서 장을 봐야 한다. 그마저도 통일대교에서 검문 크리가 기다리고 있기에 시간을 오래 잡아먹는다.
- 학교는 대성동초등학교 단 한 곳 뿐이기에 중학교, 고등학교 진학 시에는 대개 가까운 문산 쪽으로 나가야 한다. 그 때문에 교육 목적의 장기 미거주는 8개월 거주 의무의 예외 조항 중 주요 사유가 된다.
- 음식점이나 식당도 없으며 외식하려면 무조건 문산 일대나 운정신도시 등으로 가야 한다.
- 이발소 및 미용실도 없다. 이용하려면 통일대교를 건너서 문산쪽으로 나가야 되기 때문에 매우 불편하다. 자가용 시대가 열리기 전까지는 교통이 몹시 불편했기에 집에서 이발기를 구입해 이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남자 아이들은 이발 횟수를 최대한 줄이려고 머리를 아주 짧게 밀어버렸다. 심한 경우는 머리를 거의 삭발 수준으로 밀어버리기까지 했을 정도라고.
- 당연히 목욕탕이나 흔하디 흔한 세탁소도 하나 없어 시설을 이용하려면 무조건 마을 바깥으로 나가야만 한다.
- 대중교통편으로는 93번 시내버스 노선 단 하나 뿐이며 이외의 다른 노선은 없다. 그마저도 운행 횟수가 매우 적다.
- 의료 시설 및 병원이나 의원조차 없어 아프면 육군 헬기 신세를 지고 병원에 가야 한다.
- 종교 시설 또한 하나도 없어, 사찰이나 교회, 성당 등을 가려면 마을 바깥으로 나가야만 한다. 때문에 개신교나 천주교 신자는 매 주 일요일마다 마을 바깥에 위치한 교회나 성당에 다닌다.
-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기지국 설치를 못 해서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없었다.
- 아날로그 방송 시절에는 난시청 지역이라 텔레비전 수신료가 면제였을 정도. 케이블 TV도 들어오지 않는 지역이다.
북한과 너무 가까운 지역이라 증폭기랑 고감도 안테나로 어찌어찌 해결할 수는 있으나 전파방해로 인해 수신하기가 곤란한 듯. 그리고 북한은 PAL-D/K 방식을 사용한다.
2002년에 국내에 스카이라이프가 출범하기 시작했으며, 2002~2008년 사이에야 스카이라이프를 볼 수 있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무궁화 위성은 1996년에 송출.)
2008년쯤 대성동에 IPTV가 들어오기 시작했으며 2014년에 디지털 방송 수신료를 부과하려 했으나 주민 항의로 인해 디지털 방송도 텔레비전 수신료가 면제다.
2002년에 국내에 스카이라이프가 출범하기 시작했으며, 2002~2008년 사이에야 스카이라이프를 볼 수 있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무궁화 위성은 1996년에 송출.)
2008년쯤 대성동에 IPTV가 들어오기 시작했으며 2014년에 디지털 방송 수신료를 부과하려 했으나 주민 항의로 인해 디지털 방송도 텔레비전 수신료가 면제다.
- 전화 모뎀이 아닌 ADSL 이상의 고속 통신망 인터넷은 2012년이 되어서야 공급되었다. 즉 모바일 네트워크 구축과 스마트폰 사용도 2012년 이후부터 가능해진 것. 그나마 2019년 6월 KT에서 5G를 설치해줬다. #
- 상수도는 2013년이 되어서야 공급되었으며 그 전에는 물탱크에 정수된 물을 저장해 놓고 써야 했다.
- 건축 당시 건축물 대장에 등재하지 않은 탓에 주민들에게 집에 대한 소유권이 없어, 일일이 유엔사 군사 정전 위원회의 허가를 받지 않으면 인터넷 연결이나 집이 낡아도 보수나 증축, 재건축, 리모델링이 불가능하다. 재건축이나 리모델링 등을 하려고 허가를 받아도 업자들을 대성동으로 불러야 하는데, 민통선 이북 지역이기에 외부인을 불러내는 것이 매우 까다롭다.
- 체제 선전을 위해 건물들이 북한 쪽에서 잘 보이도록 남향이 아닌 북향으로 지어진 탓에 일조량이 매우 적어 여름에도 보일러나 전기장판 같은 난방 기구를 틀어야 잠을 제대로 청할 수 있을 정도로 춥다. 거기에다가 북향집의 특성상 바람도 잘 안 드는 탓에, 북태평양 기단의 영향으로 고온 다습한 기후를 띠는 여름에는 집이 매우 습해진다. 겨울에도 온수가 나오지 않아서 찬물로 샤워해야 하는 지경이다. 2015년 리모델링 직전의 한 가정은 겨울에 월 40만원의 난방비를 써야 했다. 특히 2018년 여름에는 전국적으로 폭염이 닥치면서 집을 리모델링하지 않은 가정은 낮에는 폭염, 밤에는 한파라는 끔찍한 혼종의 상황을 겪었다.
- 그 외에도 모든 기반 시설이 80년대 이후 새로 지어지지 않아 매우 낙후되어 있었다가, 2015년 7월부터 경기도와 정부, 유관기관들이 나서 마을을 새롭게 단장하는 '대성동 프로젝트'가 시작되어 건물 보수부터 통신 시설, 환경 디자인, 농업용수 수도시설 설치까지 완전히 뜯어고쳐서 겨우 나아졌다.
4. 교육
마을 안에 유일한 교육시설인 대성동초등학교가 있다. 1967년 개교. 원주민 자녀는 한 자리 수지만 파주시 이곳저곳에서 학생을 끌어모아 간신히 학교를 유지하고 있다. '''학생이 30명인데 교직원이 무려 21명'''인 무서운 학교.[5] 학생 수가 적어서 1대 1 교육이 이뤄지는 데다 영어특성화학교로 지정돼 있어 판문점 소속 UN군이 영어를 가르쳐 주기 때문에, 해마다 외부 학생 신청자가 많다.
또한 학교 곳곳을 육군 병력이 보초를 서며 지키고 있다.
중고등학교가 없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보내야 한다. 그래서 대성동초등학교 졸업(예정)생은 서울특별시의 중학교에 배치받을 수 있는 특혜를 주고 있다. 예전에 중학교의 경우 급식비나 방과후 학교 비용, 의무교육이 아닌 고등학교의 경우 운영지원비 등을 낼 때도 대성동 주민들은 학비와 급식비 등 모든 금액을 전액 지원받았다.
현지 주민들이 자녀 교육 때문에 마을을 일시적으로 떠나기도 하는데, 이 경우에는 주민의 신분을 유지할 수 있다. 특히 대성초 졸업생들은 서울 중학교 입학 가능 특혜가 있어 다들 서울에 나가는데, 미성년자들이니만큼 부모 한 명 혹은 둘 다 함께 나가서 살아야 한다.
주민 어린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살아가면서 '위험하다, 무섭다'는 생각을 딱히 하지 않는다. 어린이들이 놀러다닐 때도 항상 군인이 주시를 해야 하는 동네다. 그 반대급부로 어린이들이 밖에서 노는 것을 부모들이 위험하다고 통제하는 일이 적다. 크리스마스에는 미합중국 육군 부대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는 데 어린이들을 초대한다.
최근에는 근처 미 육군기지의 미군을 끌어들여 원어민 영어교육을 시킨다고 신문에 나오기도 했다. 졸업생들을 축하해주기 위해 UN군사령부와 중립국감독위원회의 각국 장교들이 졸업식에 대거 참석하는 풍경이 매년 뉴스에 나온다. 마을 주민이 아닌 학생과 교직원은 허가 없이 학교 담 밖을 나갈 수 없으며 심지어 공놀이 하다 공이 담 밖으로 넘어가도 나갈 수 없어서 원주민 친구한테 주워달라고 부탁해야 한다고 한다.
5. 교통
가는 데만 관문이 3개가 있고 처음 들어가는 데도 '평화의 다리' 라는 다리를 건너가야 하는데 평화의 다리에는 바리케이트가 쫙 깔려있고 중간에 육군 초소가 있다. 평화의 다리에 처음 들어갈 때도 육군 군사경찰이 차를 멈추게 하고 신분증 검사를 한다. 들어가는 마지막 관문에는 '평화의 마을 대성동' 이라는 큰 표지판이 있다. 이른바, '평화의 마을'이지만 군사경찰에 바리케이트로 통제되어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라는 의견도 있다. 물론 마을 안은 고요하고 평화롭게 유지된다.
이곳을 방문할 때 반드시 파란색 손수건을 창문으로 펄럭이게 해야 하는데 달지 않고 무단으로 들어갔다가는 총에 맞아도 뭐라 하지 못하는 지역이다. 사실 저 파란색 손수건은 DMZ 출입 차량이라면 해놓아야 되는 건데 원칙적으로, 파란색(남색)은 대한민국군 계통, 하얀색은 UN군사령부, 빨간색과 노란색은 북중 공산군이 써먹는다. 그리고 중립국감시위원회는 저 4색이 들어간 깃발을 달아놓으며 이 깃발은 중립국감시위원회의 마크이기도 하다. 개성공단으로 넘어가는 차들을 보면 빨간색 깃발을 단 한국 번호판을 단 트럭들이 보이기도 한다.
마을로 들어오면 UN군에 자신이 방문했다는 것을 신고해야 한다. 방문자가 있을 경우 군인들이 집에 찾아와서 방문자를 확인한다. 다만, 외부인이 이 마을을 출입하려면 일주일 전에 신청을 한 후 신원 확인을 거쳐야 가능하다. 주민이 아닌 경우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만 출입이 가능하다. 다만, 사람이 죽으면 외부 조문객이 들어와야 하는데 규칙대로라면 장례식이 다 끝난 후에나 조문할 수 있지만 예외는 있다. 그리고 김문수 도지사가 2011년에 1박 2일간 머무른 적이 있다.
현지 주민의 경우 매일 저녁 7시가 되면 육군 민정경찰이 가구별 인원을 점검하고 밤 12시부터 새벽 5시까지는 통행이 금지된다. 이 통행금지를 어기면 1차 위반시 경고, 2차에는 7일 추방, 5차 위반이면 주민권이 박탈된다. 다만, 밤중에 병이 나거나 돌발적인 사태가 일어나 나가야 할 일도 있고 돌아와야 할 일도 있으므로 그럴 때는 부대와 연락하고 오간다.
6.25 전쟁 전에는 이 마을 사람들은 물건을 살 때 개성장에 갔다. 걸어서 '''9km'''만 가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면서 개성장에 가는 길이 막혔고 그 다음부터는 고립된 생활을 해야 했다.
휴전 이후에는 '민사표'라고 해서 미군들이 군용트럭으로 1주일에 1번 문산으로 사람들을 실어다 주었다. 생활용품을 사려면 문산으로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농산물 역시 이 미군 군용트럭을 통해 판매하였다. 하지만 당시 돌아오는 차는 마련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한 번 나간 사람은 1주일간 문산 밖에서 살아야 했다. 그래서 문산에 지낼 친척집이 없는 사람은 마을 밖으로 나가는 것이 힘들었다. 여관비를 내야 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장을 자주 보러 나갈 수 없었다. 교통이 불편해 유엔군 트럭이 일주일에 한 번씩 마을에 들어와 생필품을 나눠주기도 했다고. 그리고 당시 군용트럭에는 문이 없었기 때문에 흙길을 지나다 보면 옷이 흩날리는 흙먼지로 더러워지기 일쑤였다. 결혼식에 가는 사람들은 담요를 덮고 가거나 아예 보자기에 옷을 싸가지고 가서 결혼식장 근처에서 갈아입기도 했다. 이 군용트럭의 운행은 나중에는 1주일 2번으로 늘었다.
미니버스를 도입한 적이 있었으나 운영적자로 금세 중단되었다. 이후 1972년 마을버스를 기증해 버스 운행이 일주일에 세 번으로 늘었다. 1970년대 말부터 버스가 매일 한 번씩 다니다가 횟수가 늘어 지금은 하루 세 번 문산터미널까지 왕복한다. (오전 6시, 정오, 오후 6시) 문산읍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신일여객[6] 93번 따복버스를 타고 갈 수 있다. 마을로 들어가려면 패스라는 출입증이 필요하고 군부대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백연리에 있는 통일촌과 진동면에 위치한 해마루촌 역시 마찬가지. 노인 주민들은 거동이 불편하기 때문에 버스운전기사가 혈압약 등 주기적으로 받아야 하는 약을 전달해주기도 한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자가용이 늘어났다.''' 그래서 현재 집집마다 1대 이상 자가용을 보유하고 있고 마을 출입 역시 개인 자가용을 이용한다.대성동 주민들의 의식주 생활
군사 지역이라 차량 내비게이션도 여기에서는 먹통이 된다. 같은 이유로 네이버 지도나 다음 지도에서도 이 마을은 로드뷰를 제공하지 않는다. 구글 스트리트뷰에서 대성동초등학교와 인근 지역을 볼 수는 있지만, 대성동을 위성사진만 보고 알아서 찾아야 한다. 잘못 찾아서 도라산역 쪽만 보고 있으면 못 찾는다.
철도교통으로는 장단역이 있었으나 6.25 전쟁으로 인해 현재는 운행되지 않는다. 때문에 철도교통을 이용하려면 어쩔 수 없이 도라산역으로 이동해서 DMZ-train[7] 을 타야한다. 경의중앙선 전철이 개통한다면 문산과 서울로 가기 수월해질 듯 하다.
6. 의무 면제 혜택
대성동 주민들은 병역의 의무와 납세의 의무가 모두 면제된다.[8] 대성동마을은 정전협정 제10항에 의해 국제연합군사령관에서 관할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따라 민사행정 및 구제사업은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이 책임지며, UN사령관(한미연합사령관이 겸직)이 관할하고 UN의 통제를 받기 때문이다.[9] 즉 군대 안 가고 세금도 안 낸다.
이에 대해 불만을 갖는 국민들 가운데는 비무장지대의 주권 행사를 헌법에 의하지 않고 제약한 정전협정을 일부 폐기선언하고, 앞으로는 정전협정중 그 이외의 내용만 준수하자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 면세는 그리 큰 혜택이 아니다. 대성동 주민들의 절대 다수는 농업 및 관련 사업에 종사하고 있고, 대한민국의 세법상 농산어업 등으로 거두는 소득이나 관련 비용은 대부분 면세 또는 저율 과세 혜택을 주고 있기 때문에 규정을 바꾸어 세금을 내게 된다고 해도 낼 것이 거의 없다.
대성동 주민은 휴전협정 당시 DMZ 안쪽에 살던 사람들과 그 자손으로 한정되고 위에 적힌 것처럼 셀 수 없이 많은 불편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혜택을 줄 만하다고 여겨 문제삼지 않는 국민이 대다수다. 날이 어두워지면 통행금지고 이를 무단으로 어겼다가는 잡혀간다고 생각해 보라. 오고가는데 수속이 필요하고, 친인척이 방문하는데도 통행증을 신청해야 한다고, 통행증 없으면 아예 못 들어간다고 말이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평시에도 전시통제를 당하는 마을이다.'''
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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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근처 북한에도 비슷한 입장의 마을인 기정동이 있다. 냉전 시절에는 북한 기정동 마을의 인공기 깃대와 대성동 마을의 태극기 깃대의 높이를 서로 높이는 경쟁을 하기도 했지만, 쓰잘데기 없는 짓이라고 판단한 남측이 먼저 그만두며 경쟁이 끝났다고 한다. 도덕 교과서에도 실려있었던 일화이다. 덕분에 태극기나 인공기나 굉장히 높은 곳에 매달려 있다. 특히 기정동 깃대는 약 160m에 달하는 그 높이로 인해 기네스북에 올라가 있었지만... 2010년에 아제르바이잔 바쿠 깃대에게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국기게양대 타이틀을 뺏겼다.[10]
다만, 대성동과는 달리 기정동 마을은 현재 거주자가 거의 없어 유령 마을 수준이다. 지어 놓은 주택들도 선전용으로 외관만 그럴싸하게 지어 놓은 것이라, 내부는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수준이라고. 인근 마을에서 여기로 출퇴근시키며 선전활동에만 쓰고 있는 동네인데, 탈북에 대한 우려도 이유인 듯하다.
60년 전에 기정동 마을에 사는 큰 형님을 두고 헤어진 주민이 있다.#
여기 게양되는 태극기는 깃대가 높다 보니 비바람에 찢어지는 경우가 있어서 일정 기간마다 새 태극기로 교체해주는데, 그 비용은 파주시에서 전액 부담하고 게양/하기식은 육군 병력과 마을 주민이 함께 한다. 태극기 크기가 어마어마하게 큰데, 북한 인공기에 비해서 원단이 훨씬 좋아 무게는 굉장히 가볍다고 한다. 태극기를 교체할 때 깃대가 너무 높아서 기계로 내리고 게양한다고.
한편 해피선데이 1박 2일에서 예능 최초로 대성동을 방문했다.
Warhammer 40,000 국내 커뮤니티에서 카디아가 망하기 전까지 대성동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8. 책
- 희망의 단지 DMZ
- 조선북스 출판 시리즈 내용으로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우리땅 1편
[1] 피치 못할 경우는 예외다. 입원, 대성동 외부 학교 재학, 대성동 외부 학교에 다니는 자녀 양육 정도로 정해져 있다.[2] 출가외인이라는 전통에 따라 마을에서 정한 규칙이라고 한다. 이걸 안하면 납세의 의무 회피와 병역기피를 목적으로 면제 제도를 악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든 것. 군필자만 받으면 되지 않냐는 의문이 들 수도 있겠지만, 병역 의무는 군대 2년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서.... 그리고 민방위까지 끝난 사람이 굳이 대성동까지 찾아와서 살아야 할 메리트가 전혀 없다. 게다가 병역면제는 특권따위가 아니라 살기 힘든 동네에 사는 사람에게 해주는 최소한의 배려에 가깝다. 병역면제를 악용하는 사례를 막기 위한 제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평생을 GOP GP같은 곳에서 사는 것이나 다름없다.'''[3] 즉 처가 될 현지인 여성에게 오빠나 남동생이 없는 경우. 물론 있어도 이론상으로는 가능하기는 하다. 현지인 여성이 본인의 본관 변경을 법원에 제소해서 해당 여성이 새로운 가문의 1대가 되는 방법으로 기존의 호적에서 스스로 제적되면 된다. 그런데 사실 마을 자체가 편리성 면에서는 살기 좋은 환경도 아니여서 이렇게까지 해서 들어올 남성이 얼마나 많을 진 의문이다. 사실 요즘 같은 경우는 원래부터 허용이 되는 남성의 경우에도 들이기가 힘들다. '''애초에 대성동에 안 살려고 하기 때문. 실제로 대성동 거주 문제 때문에 파혼한 사례가 있다고 한다.''' 그 이전에 장노년층들이 거의 다수라서...[4] 신문 기사, 주민 인터뷰 [5] 2020년 3월 1일 기준. 비슷한 실정인 군내초등학교의 경우 학생 41명에 교직원 21명이다.[6] 1970년부터 운행한 노선으로, 원래 서부여객 소속이었다가 2003년 파주신성교통으로, 2016년 신성여객 경영난 사태로 신일여객에게 넘겼다.[7] 현재 아프리카돼지열병으로 인해 운행중지됨.[8] 몇몇 사람들은 부럽다고 하지만, 상술한 리스크들을 보면 절대 부럽지 않다. 의무와 권리는 항상 같은 방향으로 따라간다고 보면 쉽다. 의무가 면제되는만큼 권리도 제약되는 것.[9] 그래서 대성동 마을에서 범죄가 발생했을 시 한국 경찰이 대성동으로 들어갈 수 없으며, 때문에 범죄자를 한국 경찰이 체포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이곳이 치외법권지대인 것은 아니며, 대성동 주민이 범법 행위를 하면 일단 대성동에서 추방되는 형식을 거친 후, 외부에서 체포하는 형식으로 범죄인 인도절차가 진행되고 나서 대한민국 법률에 의하여 규제를 받는다. 즉 중범죄를 저지르면 대한민국 법률에 따른 처벌은 물론 주민권 박탈에 대성동에서 추방까지 덤으로 당한다고 봐야 한다.[10] 이후 타지키스탄 두샨베 깃대, 2015년 9월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의 170m짜리 깃대가 타이틀을 이어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