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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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계
친이회창계'''

<colbgcolor=#00529C> '''형성'''
<colbgcolor=#ffffff>1996년
'''해체'''
2012년[1]
'''수장'''
'''이회창'''
'''정치적 이념'''
자유보수주의
'''경제적 이념'''
경제적 자유주의, 재정 보수주의
'''주요 정치인'''
하순봉[2]
김덕룡[3]
홍사덕[4]
박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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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활동
3. 구성
4.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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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한국당, 한나라당자유선진당에서 이회창을 따랐던 정치세력을 일컫는다.

2. 활동


1993년 문민정부 두번째 국무총리로 임명되고 1994년 자진 사퇴하면서 대외적 이미지가 좋아졌다. 그후 정계에 입문하여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신한국당 소속 선대위원장을 맡으며 총선 승리하고[5], 본인도 전국구로 당선되면서 순탄대로를 걸었다. 이후 199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에서 승리하며 본격적으로 세력이 모이기 시작하고, 대선을 접전패했어도 지지를 받아 당권을 장악하고 보스인 이회창도 한나라당의 총재가 되었다.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까지 승리하며[6] 이회창계 역시 여당의 주류가 될 줄 알았으나 또다시 접전패를 하고 이회창이 정계은퇴를 선언하며 이회창계는 해체 수순에 들어갔았다. 하지만 지역조직이나 공천 등을 고려하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였는데...[7]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한 달 앞둔 2007년 11월, 이회창은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충청도와 일부 보수 표심을 잡으며 여론조사 대부분에서 2위를 기록했고, 후에 3위로 떨어지고도 선거에서 15.1%를 득표하며 아직 정치 생명이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후 그의 세력은 자유선진당을 창당했고, 그의 세력을 중심으로 국민중심당과 일부 충청권 무소속이 합류했다.
그리고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18석을 획득하며 이회창계는 완벽하게 부활했다. 자유민주연합 출신의 김종필을 따르던 원조 충청파심대평이나 이인제[8] 소수 케이스를 제외한 이들은 모두 순수 이회창계이거나, 조순형 같은 이회창이 영입한 인물이기에 자유선진당을 장악했다[9]. 선거에서 중박은 했던 이회창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패배를 했지만[10] 심대평국민중심연합을 만들고 나갔기에 당선인들은 이회창계로 분류되며 당과 충남권을 더욱 더 장악했다.
제19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당세가 완전히 기운 상황에서, 이회창이 심대평과의 갈등이 생기면서, 공천에서 이회창계는 상당수 배제되었다. 당선인은 국민중심당 출신 이명수, 이회창과 숙적 관계인 이인제, 그리고 청구동계에 속하는 성완종이었다. 비례대표 역시 이회창계라고 볼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이회창계의 원내 인물은 전무했지만, 지방선거 때 당선된 지방의원이 남아있었기에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였는데,
결국 이회창이 자유선진당을 탈당하면서 소수의 지방의원들도 탈당했다.[11][12] 그후, 이회창새누리당으로 복당하고, 자유선진당이 이름을 바꾼 선진통일당2012년 11월 16일 새누리당에 합당되면서 이회창계는 완전히 해체되었다.[13]
자유선진당을 일부 이어받으려고 노력하고 자신의 영입 인재들이 큰 파이를 차지하며 창당한 바른정당바른미래당에 이회창과 그의 세력이 소수 합류하였으나, 그는 이미 정계은퇴를 했기에 별 의미는 없었다.[14]

3. 구성


원내에서는 주로 대부분의 민정계[15][16]와 일부 상도동계[17], 통합민주당 출신이 이회창계에 속했다.[18] 그러나 15대 대선 이후에는 일부 세력이 자유민주연합새천년민주당으로 빠져나가기도 했다. 그리고 후단협으로 한나라당에 합류한 사람들과 김대중 정부 후반기에 자유민주연합새천년민주당에서 탈당하여 한나라당에 합류한 사람들도 나름 이회창계로 분류된다. 또한 이회창이 직접 영입 인재들 또한 이회창계에 속했다.
비교적 최근에 합류한 인사들은 자유민주연합 탈당 이후 다시 충청권 보수정당에 복귀하거나 한나라당에서 영입한 인사들이다. 자유선진당에 합류한 영입 인재는 민주당계 정당 출신이 많으나 정계에 직접 입문시킨 인물들이 많다.

4. 명단



[1] 이후 이회창계는 친박, 친이, 친유, 친무 등으로 찢어지며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2]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민정계 리더[3]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민주계 리더.[4] 심복. 이후 친박으로 이동.[5] 이때 공천이 이회창계가 만들어지는데 공이 크다.[6] 본인의 위치가 위치라, 공천의 영향력을 줬을 가능성이 큰 만큼, 이회창은 지역조직마저 장악했던 것이다.[7] 꽤 많은 인원들이 친이친박으로 전향했지만, 그래도 일부는 남아서 당권을 일부 가지고 있었다[8] 당장 이인제는 자유선진당에서 당선된 케이스가 아니다.[9] 당의 장악력과 별계로, 이회창계는 국회에서 힘을 못 썻는데, 그 이유는 비교섭단체이기 때문이다.[10] 물론 지지 세력인 대전 충남권에서 유의미한 득표를 보이며 생명을 살아있었다.[11] 이들이 사실상 이회창계 전직 의원들과 함께 이회창계로 볼 수있는 마지막 인물들이다.[12] 물론 지방의회 의원들인 만큼 크게 파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13] 그의 영입 인재들이 활동하고 있기는 하나, 모두 거물급이 되고 자신의 세력을 만들어 하나의 단일 계파라고 보기는 어렵다.[14] 사실 이들은 충청권에 별 기반이 없었다. 지역별 지지율 순위를 보면 대경권(출신 의원이 많아서) - 수도권 - 충청권 순이였다.[15] 문민정부 시절 민주계김영삼, 그 이후에는 이명박을 지지하고 현재는 은퇴하거나 뿔뿔이 흩어졌다.[16] 공화계와 일부 민정계는 김종필과 함께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했다.[17] 일부는 김영삼의 후계자로 옹립하자 했지만, 일부는 한나라당에서 이회창김영삼을 사실상 쫓아내서 사이가 안 좋았다.[18] 조순과의 사이가 좋아서 그런지 대다수는 이회창을 따랐다.[영입] A 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