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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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무계
친김무성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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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fff>2014년
'''수장'''
'''김무성'''
'''정치적 이념'''
보수주의
'''경제적 이념'''
경제적 자유주의
'''주요 정치인'''
권성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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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3. 구성원
3.1. 원내 인사
3.2. 원외 인사
3.3. 탈당이나 의원직 상실, 혹은 자의로 계파를 탈퇴한 경우
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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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14년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김무성이 당대표로 선출된 후부터 분류되기 시작한 김무성을 지지하는 세력이다. 친무라는 명칭은 김무성의 가운데 글자 ‘무(武)'에서 유래되었다. 하지만 언론계나 정치인들 사이를 제외하면 그리 자주 불리는 명칭은 아니며, 오히려 인터넷상에서는 김무성의 별명인 ‘킹무성’에서 따와 김무성을 지지하는 세력을 일러 ‘친킹’이라 부르는 경우는 간간히 볼 수 있다.
사족으로 다른 계파들은 대부분 '친+성씨' 형태가 일반적인데 김무성 계파는 유독 이름 첫 번째 글자로 알려져 있다. 아무래도 김씨가 한국에서 가장 많은 성씨이기 때문에 변별력이 없어서 그런 듯. 당장 김영삼이나 김대중 등 전직 대통령도 '친김'이란 명칭을 가지진 못했다. '친김무성'도 종종 쓰인다.
여담으로 새누리당 공천 파동에서 비박계중 대부분이 통과한 정치인이 대부분 친무계이다 보니 제20대 국회 내 비박계 중진 대다수가 친무이기도 했다. 이는 보수계파에서 박근혜와 무관하게 계파 수장이 될만한 정통성을 갖춘 인물이 김무성 정도 뿐이라 그런 것이기도 해서, 말이 친무지 실질적으로는 비박연합이며 언론에서의 호칭도 비박인 경우가 더 많다.

2. 역사


김무성2013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후, 비박 진영의 구심점으로 자리잡았다. 이후 2014년에 새누리당의 당권을 잡으면서, 19대 대선 보수진영 유력후보로 등극했다. 그리고 새누리당이 2015년 상반기 재보궐선거까지 선거마다 연전연승하면서, 김무성을 따르는 정치인들이 점차 많아졌다. 현재 보수정당계 강성 소장파로 평가받는 하태경, 오신환도 현재는 아니지만, 19대 초선 의원때는 친무에 속했다.[1]
하지만 2015년 유승민 원내대표 사태파동과 2016년 새누리당 공천파동을 거치면서 '친무가 친박에게 상대가 안된다.'라는 인식이 보수진영 지지자들에게 퍼졌다. 특히 김무성의 옥새런사건이 새누리당의 20대 총선 패배로 이어지면서, 대권주자로서 거론되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하지만, 친무 현역 의원들이 지역 기반이 탄탄한데다, 김무성이 당시 박근혜 및 친박과 밀당을 잘 한 덕분인지, 20대 새누리당 공천파동때도 비박계중 기타 주요 계파들인 친박과 대립 관계였던 친이계는 파멸당하고, 박근혜에게 찍힌 유승민의 친유계도 상당히 큰 피해를 본 반면 '''친무계는 김무성의 옥새런 이전에도 박근혜와 친박 및 진박감별사들의 전횡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무난하게 공천을 받은 덕분에 적어도 친무 세력이 축소되진 않았다.'''
2016년 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사태로 인해서 비박계가 새누리당/비상시국위원회를 결성했다. 이 과정에서 김무성은 19대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비박계의 또 다른 핵심인 유승민과 함께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를 이끌었다.
하지만 탄핵소추 이후 비박은 새누리당 당권싸움[2]에서 패배했고, 친무는 친유와 함께 새누리당을 탈당해 바른정당을 창당했다. 그러나 바른정당의 반기문 영입 실패 및 유승민의 오르지 않는 지지율때문에, 친무와 친유의 갈등이 심화됐다. 결국 친무 대부분이 보수연대론을 외치면서 2017년 5월 2일에 집단탈당하고 자유한국당에 복당했다.[3] 그리고 대선 이후에도 친유와의 갈등이 해결되지 않으면서, 결국 11월 8일 김무성까지 탈당하여 자유한국당에 복당했다. 이런이유로 친무계가 '''철새 집단'''으로 비판을 많이 받는다.
2017년 12월 김성태를 원내대표로 당선시키며 친무-친홍 연합이 사실상의 자유한국당 당권파로 부활했다. 공식적인 당권파는 홍준표친홍이지만, 현재 친홍과 친무가 완전히 한 집단으로 뭉쳐 행동을 항상 같이 하고 있기 때문에 친무 또한 범주류 당권파에 해당한다. 그리고 소속 의원의 숫자로 보면 친홍보다 친무계 의원이[4] 많으며 원내대표인 김성태가 친무의 핵심이기 때문에 오히려 알맹이는 친무가 뽑아먹었다는 평가까지도 있다.근데 당선 이후로는 김성태는 김무성 보다도 홍준표와 맥을 같이 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현재는 아직까지 당 내에서 숫자가 비등비등한 친박/비홍비무비박/친홍-친무 세력이 대립하고 있는데다 홍준표와 김무성 모두 당 내 친박 청산 및 보수통합을 추진하고 있어 친홍, 친무 모두 아직까지는 서로 같은 배를 타고 연합한 상태로 있으며, 대립각은 보이지 않고 있다.
2018년 12월 자유한국당 조직강화특별위원회가 인적청산으로 지목한 당사자 21명 중에서 복당파 의원도 어느정도 포함되었다. 그 중 친무계는 김무성, 홍문표, 권성동, 황영철, 이은재 5명으로 이은재를 빼면 3선 이상의 중진들이다. 김무성 전 대표가 애초에 21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것도 감안하면, 사실상 21대 국회에서 친무계는 반대로 정계 복귀를 선언한 홍준표의 친홍계 계열 소속 분파로 위상이 떨어질 확률이 높아졌다. 그러나 김무성 대표가 불출마 선언을 뒤집고 호남 험지 출마도 불사하겠다는 의견을 내면서, 그가 총선을 건너뛰고 대권을 노리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있는만큼, 유승민 의원과의 차기 대권주자 다툼을 지켜볼 필요가 있다.
물론 김무성이 여론조사나 의원 조사에 이름도 올리지 않는 것을 보면 당내 대선 경선에 나가도 홍준표[5], 유승민원희룡 등 다른 대권주자들에게 밀려 탈락할 가능성이 크다.
제21대 총선 결과 당선돤 친무는 홍문표, 박성중, 권성동, 황보승희 정도이며 홍준표가 원내에 복귀하고 비박계 인사들이 당선이 되면서 비박계인 친유, 남원정, 소장파, 친이, 친홍과 동맹을 맺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쇠퇴한 계파임에도 불구하고 캐스팅보트의 역할을 할 수 있다.
현 시점에서는 친무계는 100% 국민의힘 소속이라고 볼 수 있다.[6]


3. 구성원



3.1. 원내 인사


친이계로도 분류된다. 권성동은 이명박 정부 시기에 법무비서관을 지냈기 때문. 18대 국회때는 친이계가 순수 이명박계와, 이재오계, 이상득계로 나뉘었는데 18대 국회때는 친이계 내의 이재오계에 속했다. 친이계 중 이재오계에 속했던 만큼 친이계 중진들 및 친이명박계 좌장 이재오와도 당연히 친분이 있는 편이다.
초선 의원 당시에 바른정당에 합류하고 대다수의 친무가 탈당할때 같이 탈당했다.
사실 바른정당 탈당사태 중 1차 탈당 때 자유한국당에 복당한 정치인은 순수 친이계인 장제원 빼고는 전부 다 친무 정치인이라고 봐도 좋다. 이후 추가 탈당한 인원의 경우 황영철이나 김을동 빼고는 거의 다 친무가 아닌 친이계, 친유에서 한국당 합류로 전향한 몇몇 의원 및 소장파로 꼽히는 남경필, 김용태 등의 비박계이다. 그리고 바른정당계는 유승민계와 하태경계 및 일부 친이계만 남아서 국민의당과 합당해 바른미래당을 창당하게 된다.
김무성 전 국회의원이 21대 총선을 불출마할 당시 황보승희는 당시 김무성의 간접적인 지지를 받고, 김무성의 지역구인 부산 중구·영도구에 출마하였다. 물론 김무성의 후광 외에도 김형오의 국회비서경력, 지역 기반이 탄탄하다는 것이 요인이기도 하다. 실제로 제7회 지방선거 당시 김무성으로부터 공천을 받아 영도구청장 선거에 출마한 적도 있고, 영도구의회, 부산광역시의회 선거에 출마한 적도 있다. 현재로는 계파성이 옅지만 보통 김형오계나 친무로 분류된다.

3.2. 원외 인사


김무성의 최측근으로 김성태, 김학용과 같이 김무성의 심복으로 일컫어지고 있으며, 20대 국회 기준 경상북도 북부지역[7] 국회의원 4명 중 유일하게 비박인 인물이다. 그렇다보니 친유, 남원정, 소장파, 친이 출신 다른 정치인과 달리 자유한국당에 존속하였다.[8] 21대 총선에서는 컷오프 된 후,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현재는 김무성, 박명재와 같이 마포그룹을 운영하고 있다.
김무성새누리당 대표 시기 최측근으로 일컫어지는 인물이며, 김학용, 강석호와 같이 원조 친무라고 불릴만큼 같이한 인물이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대해 여타 친무계와 같이 찬성한 인물이며, 당시 이혜훈, 장제원, 하태경과 같이 청문회스타로 언급되는 인물이었다.[9] 바른정당 탈당사태 이후 자유한국당에서 친홍김무성의 지원을 받아,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에 오르기까지 했다. 21대 총선에서는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친무계의 계파 수장으로 현재 마포그룹의 회장으로 역임하면서 국민의힘 내 킹메이커로의 역할에 집중하고 있다. 전두환 시기 같은 경남 동부 출신인 김영삼에 의해 발탁되었고, 상도동계의 주요 멤버로 활동하였다. 김영삼 재임기에는 내무 정무차관을 역임하였고, 김영삼 이후 이회창 체제에서는 김무성이 총재 비서실장으로 활동하였다. 한 때 상도동계 주류와는 별개로 박근혜를 보좌하면서 유승민과 같이 원조 친박 핵심으로 일컫여졌지만, 여러가지 갈등으로 인해 비박으로 전향하였다. 새누리당 대표를 역임했지만, 20대 총선 당시 새누리당 대표 직인 날인 거부 사태로 인한 패배를 책임지고 사퇴하였다. 현재 그의 선거구인 부산 중구·영도구는 같은 친무계인 황보승희가 차지하였다.[10]
원래는 전형적인 친박 인사로 꼽혔으나 19대 의원 시절 박근혜의 실정과 독단적인 성격을 보고 박근혜와 결별 후 친무계로 전향했다. 실제로 김무성과 같이 바른정당에 합류했다가 2017년 11월경에 자유한국당으로 복당했다. 유승민과는 상당히 친했다. 유승민한테 다소 호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지 타 친무계보다 자유한국당 복당 시기가 다소 늦은 편이었다.
김성태, 강석호와 같이 친무계의 핵심멤버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이해구 국회의원 보좌관부터 시작하여, 경기도의회에서 도의원으로 근무하면서 정치적 경험을 쌓았고, 제18대 총선 당시 경기 안성시에서 당선되면서 중앙정계에 진출하였다. 좌성태 우학용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21대 총선에서는 본인의 실책이나 청년층 비하 논란으로 인해 패배하였다.
조경태, 김병준과 같은 친노계 출신 정치인으로 전 행정안전장관을 역임하였다. 관료출신으로 이의근 도지사 시절 부지사를 담당하였고, 참여정부 내각 참여 이후에도 이명박정부에서도 중용되었다. 국민의힘(당시 한나라당) 입당 전에는 열린우리당 소속으로 경상북도지사 선거에 출마하였다. 그 당시 한나라당 텃밭인 경상북도에서 열린우리당이 부정적인 여론이 강할 시기에 23.2%의 득표율을 얻었다. 그 후 새누리당 당적으로 포항시 남구·울릉군 2013년 하반기 재보궐선거에 출마하면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한 때는 범친박으로도 분류되었지만, 강석호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면서[11] 범친무로도 분류되는 편이다. 21대 총선에서는 강석호와 동반 컷오프 된 후 김병욱을 지원하였다. 최근에는 김무성의 마포 포럼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
외교관 출신 정치인으로 친이계로도 분류된다. 외무고시 합격 후 외교관으로 근무하다가 사법시험을 응시해 검사로 재임용되었다. 18대 총선에서 정형근 대신 부산 북구·강서구 갑에 출마하였고, 19대 총선에서는 당선되었다. 20대 총선 당시 친박의 공천파동에 대해 비판했으나 안타깝게도 전재수에게 밀려 낙선했고, 21대 총선에서도 낙선하였다. 참고로 전재수와는 18대 총선부터 경쟁했으며 현재까지는 2승, 2패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12]
1995년 민주자유당 경기도의회 비례대표 도의원으로부터 정계진출을 시작하였다. 17대 총선에서는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역임하였고, 18대 총선부터 경기 안산 단원 을에서 출마해서 지역구 국회의원을 역임하기 시작했다. 19대 총선에서는 부좌현 민주통합당 후보에게 밀리기 시작하였고, 20대 총선에서는 다시 당선되어 원내로 재진출하였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당시에는 찬성하면서 바른정당에 입당했으나 친무계 타 의원들과 같이 자유한국당으로 복당하였다. 헌정사상 국토교통위원장을 역임하였고, 지역구 내 긍정적인 평을 들었다. 그러나 21대 총선 당시 안산시 단원구 을에서 2020년 차명진 세월호 유가족 망언 파동 사태[13]로 인해 낙선되었다. 현재는 마포그룹의 주요 멤버로 활동하고 있다.
원래는 17대 대선 한나라당 박근혜 후보 경선 캠프 보좌관으로 근무하면서 친박으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김무성과 가까워지면서 김무성의 측근이 되었고, 김무성부산 중구·영도구로 옮겨가자 부산 남구 을을 물려받았다. 20대 총선에서는 박재호에게 밀려 낙선하면서 정계에서 은퇴하였고, 2018년 7월 14일 백혈병으로 작고하였다.
판사 출신의 정치인으로 친이로 분류된다. 18대 총선 당시 박희태를 대신해서 출마하여 남해군·하동군에서 당선되었고, 19대 총선부터는 개편된 사천시·남해군·하동군에 출마해서 연임에 성공하였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당시에 찬성하였고, 바른정당에 입당했지만, 자유한국당으로 복당하였다. 21대 총선2016년 본인 보좌관이 본인의 스케쥴로 인해 무리하게 운전하다 사망한 것과 본인의 교통사고 등 건강 문제로 불출마를 선언하였고, 현재는 법무법인 한백의 자문변호사로 근무한다.
친무의 핵심인사 중 한 명이다. 정계 입문은 박관용 전 국회의장에 의해 영입되면서 시작되었다. 부산 동래구청장을 역임하였고, 18대 총선 부터해서 박관용의 지역구를 물려받아 당선되었다. 사실 18대 총선 당시 친박 무소속 연대에 동참하면서 김무성과 동거동락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21대 총선에서는 김무성과 같이 불출마를 했고, 미래통합당 선거관리대책위원장을 역임했다.
17대 총선부터 정계입문을 시작했으나 열린우리당 유필우에게 밀려서 원내입성은 18대 총선부터 시작되었다. 대표적인 친이 출신 인사로 이름을 날렸고, 친무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21대 총선에서는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육군사관학교 졸업생 출신 육군장교로 근무하였고, 주미국 대한민국 대사관 국방무관에 임명된 인물이다. 17대 국회에서는 비례대표로 정계에 입문하기 시작하였다. 초기에는 친박 출신 정치인으로 분류되었지만, 박근혜의 독단적인 행보를 보고 실망하여 탈박하고 친무로 전향했다. 20대 총선에서 낙선되고, 2016년 말에는 새누리당을 탈당하고, 바른정당에 입당한다. 특이한 점은 다른 친무계와 달리 바른미래당까지 당적을 유지하다가 정계은퇴를 선언하였다.

3.3. 탈당이나 의원직 상실, 혹은 자의로 계파를 탈퇴한 경우


사실 김용태는 친무도 범친무도 아닌 남경필과 같은 소장파로 분류되며 남경필과 항상 가까이 하는 행보를 보여 취소선을 쳤지만 유승민보다는 김무성 및 친무와 조금 더 가까이 지낸 영향으로 자유한국당에 복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김용태가 자유한국당으로 가자 남경필도 흔들리기 시작하다가 2달 뒤에 김용태를 따라갔다. 아예 신당을 창당했던 친이계와는 별개로 처음부터 새누리당 탈당을 주도한 것도 남경필 및 그 측근으로 분류되는 정두언, 정태근, 김용태였다.
본래 친박계열이었으나 친무-친홍계로 전향. 그러나 현재는 친황계로 전향했다.
본래는 박근혜를 누나라고 부를정도로 친박의 브레인이었으나 탄핵정국을 거치면서 친박의 이미지가 상당히 나빠졌고, 결국 자신에게 이득이 가지않아 친무-친홍계열과 함께 행동하고 있다. 그러나 다시 친황으로 전향했다가 총선 당일 전화 연결에서 윤상현만의 정치를 하겠다며 사실상 탈계파 선언을 했다.
2018년 12월 27일 의원직 상실
한 때는 친무계로써 노원구청장노원구 갑 국회의원을 역임하였으나 현재는 친박으로 전향하였다. 지역구 내 평판이 부정적인 까닭에 20대 총선에서는 낙선하였고[14], 국민의힘에서도 사실상 은퇴한 정치인으로 간주하고 있다.
2020년 3월 23일 미래통합당 탈당 및 기독자유통일당 입당
원래는 바른정당에서 범 친무계로 분류되었으나 나중에는 자강파로 전향했다. 사실 정운천은 친무보다는 친이계에 더 가깝다. 바른정당 탈당 사태 당시 그가 자유한국당 통합파였음에도 불구하고 잔류하였고, 나중에 국민의당 통합파로 전향한 이유는 본인 지역구 내 자유한국당에 대한 비토가 강했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유승민을 지지하며 범친유계로 전향하였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고 황교안 대표체제의 자유한국당을 겪으면서 친무에서 친황으로 전향하면서, 황교안과 껄끄러운 관계를 가진 김무성과 거리가 멀어졌다.
정치자금법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 상실형을 받았다.

4. 관련 문서



[1] 하태경과 오신환이 당시 친무로 분류된 덕분인지 하태경, 오신환은 현재 바른미래당에서도 강성 보수소장파 성향임에도 불구하고 무난하게 공천을 받은 듯 하다. 사실상 '''하태경, 오신환 이 두 명이 구 친무계였다는 걸 감안해도 친무 출신 중 끝까지 자유한국당에 복당하지 않고 바른미래당 소속으로 정계활동을 이어가는 유이한 경우이다.''' 복당을 고려했던 적이 있던 정운천의 경우 친이로 더 많이 분류되는데다 지역구가 호남인데, 호남 지역구의 민심을 감안하면 자유한국당으로는 해당 지역에서 절대 재선이 불가능하기때문에 의도와 달리 바른미래당에 계속 있는 것으로 보인다.[2] 정확히는 원내대표-정책위의장 선거였는데, 비박에서 내세운 나경원-김세연 조가 친박이 내세운 정우택-이현재한테 깨졌다.[3] 정작 김무성은 당시에 탈당하지 않고 바른정당에 남아있었다. 썰전에 따르면 아랫얘들이 먼저 가고 보스를 부르면 마지못해 보스가 가는 식을 생각했기 때문이라고.[4] 친홍은 10명 안팎에 그마저도 초선의원 비율이 높고 홍준표도 원외당대표지만, 친무는 자유한국당으로 복당한 친무계만 해도 20명쯤 되며 좌장인 김무성 본인도 원내에 있으며 현재 비박계 중 재선 이상의 다선 의원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친무-범친무 라인이다.[5] 복당하면[6] 바른정당 탈당 사태 때 대다수 친무계가 탈당했고 바른미래당에 극히 일부가 합류했으며 친유를 따라간 일부 친무 또한 새로운보수당을 거쳐 미래통합당에 합류했다.[7] 군위군, 문경시, 봉화군, 상주시, 안동시, 영덕군, 영양군, 영주시, 예천군, 의성군, 청송군[8] 범친유계 소장파김상훈 의원도 이와 같은 케이스이다. 같은 대구 내 기반이 강한 유승민, 주호영과 달리 대구 서구 내 보수적 분위기로 인해 바른정당에 가입을 하지 못한 케이스이다.[9] 지금은 김성태에 대한 호불호가 존재했지만 당시에는 친박 3인방 이완영, 이만희, 최교일을 견제하는 역할을 해 꽤 긍정적인 평을 들었다.[10] 원래 이언주가 노리려는 것을 김무성곽규택, 황보승희 경선을 요구하며 견제하였다. 결국 이언주부산 남구 을에서 낙선하고, 황보승희는 당선되었다.[11] 물론 21대 총선 지역구 획정안에 대해서는 갈등을 벌이기도 했다.[12] 전재수박민식은 사적으로는 가까운 관계이다. 보통 선거하다보면 타 후보와 관계가 악화되는 가능성이 크지만 거의 예외적인 현상이다. 실재로 박민식이 패배하고 나서 전재수의 당선을 축하해주었다.[13] 이 사태가 다른 수도권에도 큰 피해를 입혔지만, 특히 단원고등학교가 있는 안산시 단원구 을에는 더 큰 피해를 입혔다.[14] 낙선 이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사태로 인한 탄핵정국 당시 친박으로 전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