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일생

 


1. 유년/청년기
2. 5.16 군사정변 이전
3. 5.16 군사정변 당시
4. 5.16 군사정변 이후
5. 10.26 사건 이후
6. 11대 대통령(1980~1981)
7. 12대 대통령(1981~1988)
8. 퇴임과 구속
9. 이후
10. 명예훼손 피고소


1. 유년/청년기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 태생으로,[1][2] 형제는 원래 6남 4녀이나 성인이 될 때까지 요절하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은 셋째 형(전기환)과 본인, 그리고 남동생 전경환과 누이들뿐으로 총 3남 4녀이다.
전두환의 부모.형제관계는 다음과 같다.
  • 아버지 전상우(全相禹)(1893 ~ 1967): 독립운동가였다고 한다. 자신을 추적하던 합천경찰서 일본인 순사를 폭행한 후 만주로 망명해 그곳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고 한다.
  • 어머니 김점문(1898 ~ 1978)
  • 장남 전열환(1915 ~ 1925): 10살 때 집에서 놀다가 마루에서 떨어져 뇌진탕으로 사망했다.
  • 차남 전규곤(1916 ~ 1916): 생후 5개월 당시 옆집 처녀의 등에 업혀 있다가 그 처녀의 실수로 땅에 떨어져 역시 뇌진탕으로 사망했다. 두 형제가 전부 추락사고로 사망.
  • 장녀 전홍렬(1918 ~ ?) : 이 정도 고령이면 사실상 사망이나 다를바 없는데 정확한 사망 시기는 알 수 없다. 전두환의 누이들은 잘 알려지지 않아서 정보가 없다.
  • 차녀 전명렬(1922 ~ ?)
  • 3녀 전선학(1928 ~ ?)
  • 3남 전기환(全基煥, 1929 ~ 2019): 전두환이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할 무렵을 전후해서 순경으로 경찰관에 들어갔다. 1974년 최종계급 경사로 경찰을 그만두었으나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자 뜬금없이 경찰의 대부라는 소문이 퍼지고 경찰로 성공하려면 반드시 전기환의 손을 거쳐야 한다는 말까지 생겨났다. 성격은 천하의 순둥이로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이라고 한다.
  • 4남 전두환(1931 ~): 본인
  • 4녀 전학렬(1934 ~ )
  • 5녀 전점학(全點鶴, 1935 ~): 1991년 5월 16일동아일보 기사에 1991년도 고졸자격 검정고시에서 9개 과목에 총점 608점, 평균 67.5점으로 당시 시험에서 최고령으로 합격하였다고 한다. 당시 나이 56세. 기사
  • 5남 전석환(1937 ~ ?) :병으로 요절.
  • 6남 전경환(全敬煥, 1942 ~) : 전두환 10남매의 늦둥이.[3] 형의 후광으로, 청와대 대통령 경호실에서 경호 5계장을 지냈다. 이후 형이 대통령이 되자, 새마을 운동본부 총재를 맡았다. 전두환이 퇴임한 이후, 새마을 운동본부 비리사건으로 1988년 구속.
5세 때인 1935년대구시로 가족이 이주하여 학창시절을 대구에서 보냈다. 때문에 경남 출신이지만[4] PK가 아니라 TK 계열 정치인으로 분류된다. 대구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이 때문에 전두환과 관련해서 대구공고와의 역사가 많다. 특기할 점이라면 어릴 때부터 싸움을 잘해 고등학생 시절 대구의 학교들을 주먹으로 평정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훗날의 친구이자 정치적 동반자, 그리고 적이 되는 노태우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5]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게, 전두환은 대구공고에서 '''축구부'''였고 포지션은 골키퍼였다. 어렸을 때부터 축구로 몸이 엄청나게 단련되어 있어서 싸움을 잘할 수밖에 없는데, 특히 다리 힘이 엄청났다고 한다.#[6][7] 그런데다가 강인하기만 한게 아니라 넉살이 좋고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능력이 탁월했다. 싸움실력이 뛰어난 데다가 사람들을 모아 다정하게 잘 구슬리는 능력까지 뛰어났으니, 무리를 만들어 두목이 되기 매우 유리했다.
이후 1951년에 전두환은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다. 4년제 정규육사의 첫 기수였기 때문에 입학 당시엔 육사 1기라는 명칭으로 입학했지만 나중에 육군 수뇌부가 육군 초창기 장교들에 대한 예우와 사기 진작 차원에서 그전까지의 임시육사 기수들을 육사 1~10기로 쳐주기로 하고 정식 기수들을 부여하면서 전두환의 정규육사 1기는 11기로 수정되어 밀려나는 바람에 졸지에 11기생이 된 육사생도들이 격렬히 항의했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이후로도 육사 11기생들의 임시육사 세대 선배들에 대한 은근한 무시와 상호 갈등은 계속되었고, 이는 나중에 11기생들을 주축으로 한 신군부 세력의 탄생과 12.12반란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한다.
전두환은 운동 실력 및 강인한 카리스마와 사람들을 잘 이끄는 성격이 시너지효과를 일으켜, 육사 동기들 중에서 조차 항상 리더 역할을 했다. 심지어 같은 동기인데도 육사 시절부터 정호용과 김복동 정도를 제외하면 전두환에게 존댓말을 썼다고 한다.[8]
주말에 생도들끼리 축구시합을 끝내고 나면 동기들을 전부 모아다가 당시 육사 교장의 사택에 방문해서 교장을 설득해 잔치를 베풀게 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성적은 좋지 않아 육사 입학은 보결로 겨우 하였으며, 졸업 당시 156명 중 121등이었다. 참고로 노태우는 67등.

2. 5.16 군사정변 이전


[image]
대위 시절의 모습
1955년 3월에 육사 졸업과 동시에 육군 제25보병사단에서 소대장으로 첫 군생활을 시작했고, 그 후제21보병사단에서 근무한 뒤 육군보병학교 교육연대 구대장을 거쳤다.
미국 특수전 파견교육 장교로 선발되어 육군 고급부관학교 제46기 군사영어반에 입교해서 1959년 4월에 수료했다. 같은 해 5월에 육군 제1공수특전단[9] 본부에 배치되었다. 역시 같은 해 6월에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포트브래그의 미육군 특전단(그린베레)으로 군사유학을 가서 특수전학교(Special Warfare School)와 심리전학교(Psychological Warfare School) 이 두 교육을 수료한 뒤 귀국했다. 참고로, 이 때 미 특수전학교에 전두환과 같이 유학 갔던 장교인 이영진씨(육사12기)가 쓴 회고담에 전두환의 당시 성격 등이 묘사돼 있다.
이듬해인 1960년에도 다시 미국으로 군사유학 가서 조지아 주 포트베닝의 레인저 스쿨(Ranger School)을 이수했고, 그 다음에 미 육군보병학교에서 유격훈련 교관교육도 받았다.[10]
그 뒤 귀국하여 제1공수특전단 제1특전대대의 대대본부에서 작전참모로 근무하다가 이듬해 1961년 육군본부 특전감실 기획과로 발령받아 육본에서 근무하였다. 그러던 중 육군 ROTC 창단 준비위원으로 발탁되었고 그 뒤 서울대학교 문리대학의 ROTC 교관으로 선정되어 서울대학교에서 근무하였다.[11] 바로 이때 5.16 군사정변이 발생한다.
흔히 전두환은 특전사에서 근무했으므로 군생활 하나는 빡세게 한 거 아니냐는 오해가 일부에서 있는데, 이 시기 전두환이 특전사에서 근무한 건 불과 2년도 채 안 되며, 그것도 그 중에 많은 기간을 부대에 있지 않고 미국 군사유학을 나가 있어서[12] 한국 특전사에서 실제로 근무한 기간은 더더욱 얼마 안 된다. 게다가 한국 특전사에서 근무한 것도, 팀원들과 같이 구르며 빡센 훈련을 받고 작전을 뛰는 팀(중대)이나 지역대에는 한 번도 있지 않았고 특전단 본부 아니면 대대본부에서 편한 행정업무만을 봤다.[13] 귀한 나라 돈 들여 미국 본토의 고급군사교육을 여러 개나 보내주는 특혜를 받았지만, 정작 한국 특전사로 돌아와서는 편한 행정업무만 잠깐 보다가 육본과 서울대 ROTC로 떠나버린 바람에, 제대로 빡센 군생활을 하거나[14] 국군 특수전 분야의 발전에 실질적인 큰 기여를 한 것은 별로 없는 셈이다.물론 발령받은 곳으로 가야 하는 군인 특성상 본인 잘못은 아니지만...

3. 5.16 군사정변 당시


5.16 당시 전두환은 군이 아닌 서울대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사정변에 직접 참가하진 못했다. 꼭 참가하고 싶었지만 결과적으로 끼지 못해서 열받은 전두환은 혁명위원회에 가서 "왜 미리 우리들한테 말 안 해 줬냐"며 따졌다. 뒤늦게라도 기여해서 쿠데타 세력에 끼고 싶었던 전두환은 '''젊고 정의로운 이미지의 육사 생도들이 5.16에 대한 지지 선언을 한다면 국민들이 혁명의 정당성과 정통성을 인정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지지선언과 지지행진을 이끌어내기 위해 육사로 향했다. 하지만 이미 육사는 육사교장 강영훈의 지시로 쿠데타에 반대 분위기였고, 이에 전두환은 육사교장을 뒤쫓아 육본으로 다시 갔다. 거기서 강영훈 교장은 여러 이유를 들어 혁명 지지 시위를 거절했지만, 전두환은 "강영훈이 장교와 생도들에게 금족령을 내려 지지시위를 방해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군부혁명 본부는 전두환의 편을 들어주고 강영훈은 구금되었다. 결국 18일, 육사 생도들은 육사 선배인 전두환의 설득과 강압[15]에 넘어가서 군부혁명 지지 시가행진을 하였고, 이는 5.16 군사정변의 정당성 부여에 도움을 주었다. 이 공으로 전두환은 박정희의 신임을 얻어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관이 되었다. 이때 그의 계급은 고작 대위, 나이도 겨우 30살이었다.[16]

4. 5.16 군사정변 이후


1962년 전두환은 박정희로부터 전역하고 국회의원으로 정계 입문하라는 제의를 받았지만, 그는 '''군대에도 충성스러운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며 거절했다. 그리고 전두환과 몇몇 동기생들이 조직한 육군 내 사조직이 '''하나회'''로서 확립 되는 것도 이 시기이며, '''전두환과 하나회는 군대 내부의 박정희 친위대를 표방하며 정권의 비호를 받고 계속 승승장구한다.'''
1967년 수도경비사령부 제30대대장이 되었다. 전두환은 이때 청와대의 경비가 부실하다는 이유를 들어 박격포를 청와대에 설치했다. 그리고 이듬해 벌어진 1.21 사태 때 북한 김신조 일당이 서울로 침투하여 국군과 교전을 벌였는데 이때 수경사 30대대장이었던 전두환의 지시에 의해 30대대가 박격포로 많은 조명탄을 계속 쏘아 올려서 밝게 비추어 김신조 일당의 소탕과 생포에 적잖은 역할을 한다. 이 공으로 전두환은 박정희의 신임을 더욱 얻게 된다.
1969년에 육사 동기들 중 최초로 대령으로 진급한다.[17] 1970년 육군 제9보병사단 제29보병연대 연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도 참전했는데, 상관들에게 안 좋은 소리를 많이 들었다. 당시 9사단장이자 이후 육군특수전사령부의 2대 사령관인 조천성 장군이 '사병들은 마실 물도 마땅치 않은데 전두환은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18][19] 테니스나 치고 앉았다'고 29연대장에서 해임시켜야 한다는 보고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전두환의 연대가 군공이 전혀 없자 전두환은 무기밀매상으로 부터 적성화기 다수를 구매해서 그걸 노획물이라고 속여 상부에 바치며 있지도 않은 군공이 있다고 속였다. 그러나 이 전두환의 거짓말은 바로 들통났다. 전두환이 노획했다는 총기가 사용한 적이 없어 약실과 총열이 깨끗했기 때문이다. 전두환이 무기밀매상으로부터 구매한 무기는 다음과 같았다.
  • 소화기 115정
  • 공용화기 13문
  • 수류탄 42개
  • 실탄 2,191개
  • 포탄 31개
  • 기타 냉병기 등 다수.
베트남전 파병 이후 복귀한 연대장급 이상은 관례에 따라 모두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는데, 전두환의 경우는 직속상관인 9사단장 조천성, 그리고 주월사령관 이세호가 모두 전두환에 대한 '''훈장 수여에 반대한 일화'''가 존재한다. 이유는 인사오류+ 민간인 상대 문제 행위 + 작전지휘권을 참모 이하에게 맡겨 놓은 사례 다수 + 전투수행능력 부족 + 무기 밀매 및 적성화기로 거짓보고(없는 군공 있다고 속이기) + 연대장 부임 이후 파티가 너무 잦음 등 부정적 평가가 쏟아진 것이다. 기사 결국은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 일로 준장 특진은 미뤄지고 대령 계급으로 1공수특전여단장[20]으로 부임한 뒤 1973년 그 보직으로 준장이 되었는데 이는 육사 11기중 최초였다. 이후 1976년 대통령경호실 작전차장보로 임명됐고, 1978년 사단장 중에서 가장 요직인 육군 '''제1보병사단 사단장'''[21]이 되었는데 1사단장으로 있던 시기에 1사단이 제3땅굴을 발견한다. 이어서 1979년에는 요직인 '''국군보안사령관'''[22]이 된다. 취임 시기에 일어난 부마항쟁에 있어선 강경진압을 계획하기도 했다.#

5. 10.26 사건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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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보안사령관으로 재직 중 10.26 사건으로 대통령 박정희가 암살당한 상황에서 국군보안사령관 겸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 자격으로 10.26사건 수사를 맡았다. 그러던 중 12.12 군사반란를 일으켜 군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박정희가 그를 임명할 때 차지철을 견제할 목적으로 노재현이 박정희의 각별한 신임을 받는 전두환을 천거한 것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보안사령관인 그의 권력 순위를 짐작할만할 것이다. 그는 보안사령관에 앉고 주어진 임무대로 차지철, 그리고 김재규를 견제할 각종 방안을 연구하였고 10.26 이후 그 방안들을 바탕으로 손쉽게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런 점들을 상기한다면 유신 권력의 1인자와 두 2인자가 모두 사라진 이상, 두 2인자를 견제하는 위치에 있었던 그가 부상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이후 중장으로 진급하고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직하였고 5.17 내란을 통한 반란으로 헌정을 중단시킨다. 대통령 직선제 등을 요구한 시위인 서울의 봄 이후 벌어진 5.18 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 함으로써 새로운 폭압적 독재 정권을 예고했다.[23][24] 이후 대장으로 진급하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을 거쳐 정권을 장악했다. 이 반란은 아직 김재규에 대한 재판도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발생했다.
정권 장악 이후 대통령직을 공식으로 이어받기 위해 군 전역을 준비했고 1980년 8월 21일에 예편되었다.[25]
전두환은 쿠데타로 집권해 미국과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1980년 초 백곰 미사일 사업을 취소한다. 덩달아 플루토늄 반납, ICBM 개발 계획 취소, ADD 해체, 한미 미사일 사거리 지침 동의 등 이전 박정희 정권에서 대미관계 악화에 따라 추진한 자주국방 정책의 방향을 역행시켰다. 국방을 미국에 헌납하고, 미국과 거대 무기 도입 계약을 체결하는 등의 방식으로 미국에게 집권 보장을 받았다.[26]
5.18 민주화운동 유혈진압 이후 전두환은 1980년 8월에 정치인, 군인, 교수, 기업인, 종교인 등으로 구성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신설함과 동시에 사회악 일소를 명분으로 사회정화운동을 실시하여[27] 정치계와 사회 저변에 대규모 탄압작전을 시작한다. (대표적으로 삼청계획과 연예인 사회정화운동 등.) '한국판 굴라크'로 불려진 삼청교육대와 삼청계획 5호에 덤으로 낀 사회보호법[28]도 이때 생겼다.
최규하 대통령이 5.18 민주화운동을 명분으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진행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전두환은 다득표를 얻어 대통령직에 오른다. 한편 이때 선거는 장충체육관에서 소수에 의한 간접회의로 열렸는데 이것은 평생 오명으로 따라다니게 된다. 전두환 부부는 심지어 후임 노태우 부부에게 "우리는 체육관 선거로 집권하지 않았어요."하는 말을 듣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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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러한 국가적 요청과 역사적 소명에 부응하여 80년대의 국가 장래를 개척해 나아감에 있어, 대통령 각하께서 공약하신 정치발전과 경제적 발전을 균형있게 추구하며 여하한 경우에도 국가와 민족의 생존을 확고히 보전할 수 있는 국가안보태세를 정착시킴으로써 궁극적으로 민족적이고 사회정의가 넘치는 민주복지사회의 건설에 혼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입니다.

첫째, 여하한 형태의 용공 내지 사회주의적인 정치활동이나 정부수립 기도도 용납해서는 안 되며, 북괴와의 대결에 있어 국민적 단합을 와해시키려는 계급의식의 선동 및 조장, 소요 등 민중봉기를 통한 정부전복 기도를 단호히 봉쇄해야 하겠읍니다.[29]

둘째, 학원의 학구 목적의 서클활동이나 자치활동 등 자율적인 권리와 합법적인 의사표시는 최대한으로 보장할 것이나,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고질적 병폐인 불법시위 및 소요행위 등은 국력의 불필요한 소모와 사회혼란 등, 결과적으로 북괴를 이롭게 하는 것이므로 기필코 근절되어야 하겠읍니다.

세째, 권력형 부조리를 비롯한 각종 사회적 비리를 과감히 척결하고, 만연된 사회적 불신풍조를 불식하여 성실한 노력만이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는 명랑한 사회기풍을 만들어야 하겠읍니다.

넷째, 부정부패와 권모술수, 선동과 중상모략 등으로 점철된 정치풍토를 쇄신하고, 반대를 위한 반대나 권력에의 맹종을 시정하여, 부정과 불의에 대하여는 여야를 막론하고 자유로운 비판을 할 수 있는 건설적이고 활성화된 도의정치를 구현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겠으며,

다섯째, 언론은 어떠한 경우에도 국가이익이 우선되고 윤리와 도덕이 존중되는 건전한 풍토를 조성하는 데 기여해야 할 것입니다.

여섯째, 종교 및 신앙의 자유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원칙하에서 최대한 보장하고, 비록 종교인이라 할지라도 개인적인 정치활동은 이를 보장하되 종교단체, 집회 또는 선교활동 등을 빙자한 정치활동은 강력히 통제되어야 하며,

일곱째, 노동운동은 노사 공히 공동운명체적인 입장에서 상호이해와 협조로서 공존공영할 수 있는 바탕 위에 건전한 발전을 도모하도록 유도하고 기업의 부당노동행위 및 수탈행위와 노조의 불법적인 집단행동 등을 다같이 시정해야 할 것입니다.

여덟째, 밀수, 마약, 폭력배, 부정식품, 강력범 등 각종 사회악을 말끔히 근절시켜 사회정화를 기하고,

아홉째, 학원의 기업화와 과열과외 등 비뚤어진 교육풍토의 쇄신과, 퇴락한 윤리 도덕관을 바로잡아 도의사회를 구현하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모든 혼란요인과 사회적 병폐가 깨끗이 시정되어야만 우리 사회는 여하한 내외의 도전이나 충격에도 흔들리지 않고, 정의와 인정미 넘치는 풍요한 민주복지사회의 기틀이 확립될 수 있으리라는 확신하는 바입니다.

- 전두환, 1980년 6월 5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분과위원장 및 위원에 대한 훈시 中


6. 11대 대통령(1980~1981)



취임하자마자 연좌제를 폐지하고, 야간통행금지, 심야영업금지령을 해제했다. 이후 야간통행금지는 잠시 부활했다가 완전히 폐지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헌법개정안을 공고하였다.
집권과 동시에 전직 대통령 박정희를 홀대하는 조치를 하였다. 박근혜의 회고에 따르면 5공시절에는 아버지 추도식을 공개적으로 하지 못했을 정도라고. 이런 조치는 훗날 자신도 당하는데 절친이자 심복인 노태우에게 백담사 유배를 당하게 된다. 아무튼 자기 정권의 정당성과 색깔을 국민들에게 어필하고자 겉으로만 그렇게 한 것일 뿐, 전두환 개인적 및 신군부 내부적으로는 자신들(하나회)을 챙겨주고 비호해주며 키워준 박정희를 당연히 존경했다.
정당해산령을 내려 여러 정당을 해산시킨 후 1980년 10월 27일에 국민투표를 거쳐 새 헌법을 공포하였다(7년단임 대통령제). 그리고 1981년 1월에는 새로 창당한 민주정의당에 입당하고 당 총재에 취임, 그 후 새 헌법에 따른 간접선거로 1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7. 12대 대통령(1981~1988)



전두환의 취임은 언론을 상당히 활발하게 사용한 정치적인 사례였다. 어차피 간접선거라 결과는 뻔했지만, 그래도 구색이라도 맞춰야 했기 때문에 당시 개표생중계 방송을 KBS에서 했고, 초대형 스튜디오를 만들어 전광판으로 실시간 현황을 보였다. 지금과 다른 점은 후보별로 있는게 아니라 항목이 <찬성>과 <반대>밖에 없었다는 점... 반대는 겨우 6%나 넘을까 했다. 그밖에 당시 2채널에서 하던 오락 프로그램 100분쇼에서도 전두환 대통령의 축하와 지지로 이루어진 특집 방송을 했었고, 당시 유아동 프로그램에서도 패널들이 전두환 대통령 찬양 일색의 멘트를 날렸다. 게다가 취임 전날에는 취임 경축 전야제라고 해서, 장충체육관에서 밤새 공연했고 이를 생중계했다. 전형적인 독재 국가에서 보이는 프로파간다의 극치였다.
전두환은 취임 후 허문도가 주장하는 3S정책을 시행했다. 스포츠(Sports), 성 개방(Sex), 영상 산업 진흥(Screen)을 3S 정책이라 불렀는데, 이는 한국, 일본에서 공통적으로 있었던 정부에 대한 불만을 돌리기 위한 정책이었다. 이에 따라 두발 및 교복자율화를 실시하였으나 교복자율화는 학부모들과 여러단체에 항의가 들어와 노태우 정부 때 폐지된다.
한편 이 시기부터 대학 입시 경쟁이 매우 치열해졌다. 전두환 정부는 사교육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학원과 과외를 폐지하는 강압적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회 전반적인 엘리트화를 전두환은 추구하였고, 청소년 시절에 대학 입시로 자살하는 일이 이때부터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그 당시 대학은 거의 매일 전투 상태였다. 전두환 정부는 대학생들이 시위를 할 엄두를 못내도록 학원안정법을 제정하고 녹화사업을 실시했으며,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전까지 학내에 정보형사와 경찰 프락치가 상주하였고 거의 매일 화염병과 최루탄이 오가는 시위가 벌어졌다. 학생들도 사수대라는 민병조직을 만들어 냉병기 훈련을 하고 폭력시위에 앞장세웠으며 그 절정이 동의대 사태10.28 건국대학교 항쟁이었다. 86 아시안게임, 88 올림픽이라는 초대형 세계적 이벤트에 대해서도 학생권에서는 국민들, 특히 도시빈민의 부담을 가중시키고 올림픽을 프로파간다의 수단으로 사용한다고 상당히 반발했었다. 당시 방송국에서는 이들을 '좌경의식분자'[30]라면서 한창 내리까는 프로파간다를 많이 보도했었다. 그래서 최근 중장년층들에게 학생운동권 출신의 선입견이 많이 안좋은 것도 그까닭이다. 학원, 과외 폐지는 전두환이 퇴임한 이후 집권한 노태우 정부 때 현실성이 없다는 문제로 철회한다.
전두환은 집권 직후 록히드 마틴F-16 도입 계획을 체결하였고, 전두환 집권을 좋지 않게 보던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TV에 나와서 공개적으로 전두환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였다. 이는 반미감정으로 이어지게 된다. 1983년 11월 전두환은 한국을 공식 방문한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에게 핵개발 계획중지를 약속하였다. 박정희 대통령 당시 추진한 미사일, 핵 등 자주 국방 계획은 전두환 집권과 함께 폐기되었고, 훗날 노태우 정부는 미사일 설계도까지 전부 없어졌다며 한탄했다. 노태우 시절에 군이 전작권 전환 추진을 제일 먼저 시행한 것은 이 시기의 경험이 크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신군부의 탄압을 방관한 미국에 대한 반감이 커졌다. 한국군의 지휘권은 미국에 있었는데 어떻게 군대가 이동하여 광주에서 발포하고 학살을 저지를수 있냐는 것. 그 당시 매우 심각한 논쟁 거리였다. 또한 그 당시는 유교문화가 사회 저변에 아직 뿌리 깊던 시대라 광주민주화 운동 당시 시민군은 대국(大國) 미국이 자신들을 도우러 올 것이라 실제로 믿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오히려 한국의 무기 도입을 감사해하며 전두환과 웃으며 악수하고 전두환을 지지하였다.
경제개발이 시작된 1962년대로부터 20여 년이 넘게 경과함으로써 자연스레 산업 고도화가 이루어졌고 전두환 집권기에 이르면 중화학공업 생산 규모가 경공업 수준에 이르게 되었고 막대한 자본이 소요되는 중공업(제조업포함)의 급속한팽창을 겪을때 오일쇼크와 겹쳐 79년 하반기부터 시작해 1980년에 절정을 이루던 대불황극복 과정에서 대대적인 중공업정리를 하는 동시에 김재익을 등용하여 1945년이래 40년 가까이 지속된 높은 물가상승률을 재임기간동안 한 자릿수로 떨어졌다. 또한, 컬러 텔레비전 수상기가 보급된 것도 이 시기인데, 박정희 대통령은 컬러 TV가 사치품이라 금지하고 있었다.[31]
1983년 미얀마 방문 때 북한 스파이의 표적이 되어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가 일어났으나 그 시각에 현장에 없어 휘말리지 않았다.[32]
1986년에는 최초로 아시안 게임을 유치하고 평화의 댐 건설 홍보를 시작했다.
1987년 초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이 터졌다. 전두환 정부와 부산직할시 사회가 노숙자, 행려병자들, 고아들은 물론 심지어 멀쩡한 사람들까지 남녀노소 통금시간 이후에 돌아다니는 사람이란 다 잡아들여서 무차별적으로 끌고 가서 불법적으로 감금 및 강제 노역을 시킨 기관으로, 박인근 원장을 비롯한 관계자들의 갖은 폭행과 살인으로 '''500명가량의 원생이 사망하였으며 시신은 유기되고 암거래로 대학에 팔려나가는 천인공노한 짓거리'''를 벌였다. 35명의 원생이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며 집단탈출한 끝에 사건의 전말이 알려졌음에도 전두환은 '''"박 원장은 훌륭한 사람이오. 박 원장 같은 사람 덕분에 거리에 거지도 없고 좋지 않소"'''라고 말하고 압력을 가해 사건을 덮어버린다.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으로 정권에 대한 반발과 대통령 직선제 등 민주화 요구가 강했다. 그러나 1987년 대통령 간선제를 유지하겠다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고, 간선제의 여당후보로 노태우를 내세웠다.
1987년 이한열이 최루탄을 맞아 숨지는 사건을 계기로 6월 항쟁이 일어나자 6.29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였다.
대통령에서 물러날 시에 전두환은 "한 명의 장기적인 독재는 무리"라고 생각하고 일본 자유민주당처럼 정파 혹은 정당의 독재노선을 꾀한 것[33]으로 보인다. 그에 따라 노태우를 후계자로 세우고 정당의 우두머리로 수렴청정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막상 노태우가 집권하고서 전두환 색채를 지속적으로 자의 반 타의 반 지웠고, 3당 합당을 통해서 여권을 장악하게 될 김영삼의 등장으로 실패하였다.

8. 퇴임과 구속


김영삼은 3당합당을 통하여 보수계 민주자유당으로 들어가 5공 세력들의 주축인 공화-민정계를 내쫓고, 정권을 잡아 대통령직에 오른 이후 임기 중반에 접어든 1995년 말에 전두환과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전격 구속한다.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 구속 사건의 시작. 죄목은 반란수괴 · 반란모의참여 · 반란중요임무종사 · 불법진퇴 · 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 · 상관살해 · 상관살해미수 · 초병살해 · 내란수괴 · 내란모의참여 · 내란중요임무종사 · 내란목적살인 ·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 로 인한 재판이었다.
김영삼이 취임하고도 한참 있다가 본격적인 과거 청산이 시작되었는데, 사실 이미 12.12사태의 당사자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장태완 수경사령관 등 22명이 전두환을 고발하였으나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라며 공소권 없음을 내세워 거절했다. 그러나 이후 3건의 헌법 소원으로 헌법재판소는 1995. 12. 15. 95헌마221등 에서 성공한 내란이라도 처벌 할 수 있음을 판시하였고, 이 후 국회에서 5.18 특별법이 제정되어 시효 문제를 해결하면서 합법적으로 전두환을 잡아다 법정에 세운 것이다. 노태우 구속은 1995년 11월 16일, 전두환 구속은 1995년 12월 3일.
당시 상황을 보면 검찰에서 노태우를 구속한 직후 12. 12 사태의 집권부터 5. 18까지 피의자 신분으로 전두환을 당시 서울지방검찰청에 1995년 12월 2일 오후 3시에 소환하여 조사를 진행하고자 했다. 그러나 전두환은 이미 위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으나[34] 정부가 정치적인 이유로 특별법까지 제정하여 재조사를 한다니 자신이 응할 이유가 없고 단지 법을 존중하기 위해 사법부의 조치만 수용할 것이다 는 요지의 ''''골목성명''''을 연희동 자택 앞에서 발표했으며, 발표 직후 현충원에서 5분간 참배한 다음 그대로 고향인 합천으로 내려가버렸다.
이에 검찰은 전두환의 이런 행동을 피의자의 도주행위로 간주, 관할법원인 서울지방법원에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그리고 이게 그대로 받아들여지면서 전두환이 원하는 대로 사법부의 조치에 따라 그 다음날 새벽 합천 생가에서 검찰에 체포되어 그대로 안양교도소로 압송되었다. 뒷이야기로는 사실 처음엔 5.18 특별법 제정 이후 사건에 대한 초기수사를 진행하던 단계여서 검찰은 전두환을 청사로 소환해 일단 불구속 상태로 수사할 계획이었지만 '골목성명'이라는 뒤통수를 맞으면서 대노한 YS와 협의하에 속전속결로 법원에 구속영장을 청구하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당시 신문에 보도된 내용에는 안양교도소에 구속된 직후 검찰의 첫 방문조사에서 담당검사가 전두환에게 '화를 자초하셨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어쨌든 출두를 거부하고 도주한 점과 자기 때문에 죽은 순국 군인들이 잠든 현충원에 무슨 낯짝으로 참배했냐는 점에서 욕을 거하게 먹었다.
물론 구속된 전두환이 얌전히 수사에 협조했냐면 당연히 아니다. 구금된 즉시 구속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안양교도소에서 단식투쟁을 보름 넘게 벌이다가[35] 심한 탈진과 영양실조상태에 따른 건강 악화로 1995년 12월 21일 새벽에 국립경찰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검진 결과 전해질과 간기능 등 여러 검사가 정상으로 나오고 단식으로 인한 두통과 현기증 등의 탈수증세가 있는 것 외에는 건강에 큰 지장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샤워시설, 싱크대, 다용도실, 응접실에 갖추어진 10평 안팎의 VIP특실에서 익년 3월 2일까지 두 달이 넘는 70여일 기간동안 입원치료를 받았다. 첫 공판은 1996년 2월 26일에 진행되었는데 그동안 전두환은 경찰병원에서 푹 쉬고 있었으므로 공판날 교도소측이 병원을 방문해서 법원으로 이송하는 촌극이 펼쳐지기도 했다. 공판에서 너무 정정한 모습으로 나오자 이를 빌미삼아 다시 안양교도소로 재수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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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 진행 과정에서 전두환과 노태우는 구속 이전 1995년 10월경 육군사관학교에서 마지막으로 만난 이후 피고인의 신분으로 1심 재판정에서 몇 달 만에 재회했는데, 오랜만에 보자마자 전두환이 대뜸 하는 말이 "자네 구치소에서 계란 후라이 주나?"였다. 노태우는 "안 준다."라고 대답했고 전두환도 "우리도 안 줘."라 대답하며 두 사람의 짤막한 대화는 끝이 났는데, 백담사에 칩거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노태우 그 놈이 아무리 대통령이라도 나한테 이런 식으로 대접하면 귀싸대기 맞는다."라며 서운한 감정을 감추지 못하던 전두환인데 죽을지도 모르는 일생일대의 위기 앞에서 오랜 사적인 감정을 훌훌 턴 듯하다.
전두환은 1심 마지막 최후진술에서 다음 서면을 제출하며 "그들은 아무 죄가 없다. 내가 다 책임지겠다." 라는 말을 했다.

본인은 전직 대통령으로서 이 법정에 서게 된 것을 본인 부덕의 소치로 생각하며, 이러한 일로 심려를 끼쳐드린 점에 대하여 국민 여러분에게 죄송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 사건은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구호 아래 과거정권의 법통과 정통성을 심판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현실의 권력이 제 아무리 막강하다 하여도 역사를 자의로 정리하고, 재단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본인은 생각합니다.

또한 국가의 계속성과 현정사의 올바른 발전을 위해서도 정권이 바뀌었다 하여, 그 정권의 정치적 시각과 역사관에 의해 과거정권의 정통성을 시비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한 시대의 역사는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 그들 나름대로 나라를 위하여 노력한 처절한 삶의 기록입니다. 우리나라가 건국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국민과 국정 담당자는 온갖 역사적 시련을 그때마다 불굴의 의지로 극복하였기에, 오늘날 우리나라가 민족의 역사상 처음으로 자급자족하며,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갈 수 있는 기틀을 만들어 놓았다고 본인은 확신합니다.

건국 이후의 우리나라 역사가 독재와 부정부패로만 뒤덮인 암흑의 시기였다면, 어떻게 오늘날의 번영이 가능하였겠습니까.

따라서 지난 반세기의 대한민국의 역사는 이런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하며, 의도적으로 매도만 되어서는 결코 안될 것입니다.

본인도 국정을 담당했던 한 사람으로서 10.26 사건 이후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때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하였으며,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에는 정의로운 선진조국을

창조하려는 개혁의지를 가지고 국정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러나 본인의 부덕으로 이러한 과정에서 본의아니게 정책수행의 부작용이 발생하여 국민에게 불편과 피해를 준 점에 대하여 국민 여러분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본인은 지난 89년 12월 30일, 당시 여 야 4당의 합의에 의해 국회의 증언대에 섰을 때, 이미 과거에 있었던 모든 잘못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은 전적으로 본인 한 사람에게 있으며, 이를 위해 국민이 원한다면 감옥이든 죽음이든 그 무엇이라도 달게 받겠다는 말씀을 드린 바 있습니다.

그러한 본인의 마음은 5년여의 시간이 흐른 지금 이 순간에도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개인적으로는 미얀마에서 수많은 국가의 인재들을 잃고, 이 땅에 홀로 귀국했던 그 날부터 하루하루의 삶을 국가를 위해 봉사하라는 뜻으로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여분의 인생이라 생각하고 보내왔습니다.

따라서 지금은 본인의 생명에 연연하거나 처벌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없으며, 오직 바라는 것은 본인 하나의 처벌로 국론분열과 국력의 낭비를 막을 수만 있다면 하는 바람이 있을 뿐입니다.

끝으로 본인은 과거정권에 대한 정치보복적인 재판이 본인에서 끝이 나고, 앞으로는 과거정권을 긍정적으로 승계함으로써 이를 바탕으로 민족의 정체성을 높이고, 좀더 밝은 미래를 향하여 온 국민이 매진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1심에서 반란 수괴와 부패 혐의로 거액의 추징금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았다.[36] 그리고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상고하지 않고 검찰이 너무 처벌이 약하다며 상고했지만 결국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 원의 서울고법 판결을 확정지었다. 대법원에 의해 선고된 전두환의 범죄사실은 아래와 같다.
'''1. 반란수괴''' '''2. 반란모의참여''' '''3. 반란중요임무종사''' '''4. 불법진퇴''' '''5. 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 '''6. 상관살해''' '''7. 상관살해미수''' '''8. 초병살해''' '''9. 내란수괴''' '''10. 내란모의참여''' '''11. 내란중요임무종사''' '''12. 내란목적살인''' '''13.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
사형을 열 번도 넘게 선고할 만한 죄목들인데 무기징역으로 끝났으니 검찰에서 따질 만하다. 어쨌든 '''위와 같이 금고 이상의 형을 확정받음으로써 <전직대통령 예우에 관 법률>에 의해 경비•경호를 제외한 연금, 치료, 비서관 지원 등의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모두 박탈당했다. 여기에는 의전 및 예우, 연금, 비서관, 기념사업추진비, 사무실제공, 前 대통령 칭호[37] 포함된다. 그리고 법률상 국가장은 가능하지만 국립묘지 안장은 불가능하다.[38]
이렇게 무기징역이 였지만 김영삼은 대선 후 임기 내의 기간에 추징금 회수와 사면을 계획하고 있었으며, 이 계획은 세 대선 주자들에게 허가를 구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이 계획은 자서전으로 밝혀진 지금까지도 대선 후보들의 공약과 김대중의 요구란 미명 하에 사면이 진행되었단 이야기가 대중에 많이 퍼져있듯이 당시엔 폭로되진 않았지만, 이인제에 비해 지지도에서 열세에 밀렸기 때문인지 이회창이 추석 전에 둘을 사면시킬 것을 김영삼에게 직접 건의하겠단 발언을 했고, 이로 인해 곧 다가오는 15대 대선 유세에서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후보 모두 전두환과 노태우의 사면복권을 대선 공약으로 내세우는 결과로 이어지게 되었다. [39] 결국 15대 대통령 선거 이틀후인 12월 20일, 김영삼 정부는 그를 사면복권 하였다.당시 보도
당시엔 김영삼 정부이회창, 김대중, 이인제후보가 이 전노 사면을 추진하고 전노사면에 여야 모두 찬성의사를 밝혔던 것이라 전노사면은 이미 기정사실화되었다.[40]
하지만 당시 대법원 판례와 김영삼의 의지로 감옥에 가는것만 면했지 추징금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41] 다들 아시다시피 이 추징금을 29만원 드립을 치면서까지 안 내서 두고두고 문제가 되었다.

9. 이후


출소 후 전두환은 군인시절부터 살던 서대문구 연희동에의 안전가옥에서 철통경호를 받으며 심심하면 골프를 치러 놀러다니는 등 호화로운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2003년 SBS와의 인터뷰에서 광주 민주화운동을 폭동이라고 발언하여 논란이 되었다.

광주는…어... 그거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그.. '''폭동이야'''. 근데, 그러니까 계엄군이기 때문에 계엄군이 진압하지 않을 수 없잖아요?

2013년 7월 16일 검찰이 시공사 본사[42]와 기숙사, 연천 허브빌리지 등 그의 자택 및 그와 관련된 기업에 전격적인 압수수색에 들어갔다. 압수한 미술품을 경매에 내놓아 낙찰총액 72억 원을 기록하며 마무리 되었다. 아직 약 1,200억 원의 추징금이 남아있는 상태. 2013년 9월 아들로 하여금 추징금 완납 계획을 발표하기는 했지만, 아직 전부 납부하지는 않고 있다.
2015년 9월까지 추징금을 완납했다는 소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추징금이 선고된 년도가 1997년인데 18년 넘게 추징금을 완납하지 않은 것이다. 물가상승을 감안하면 순수 액수는 줄고 있는 셈.

아흔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정한 모습을 보여주며 대통령 취임식, 장례식 등 청와대 행사에 꾸준히 모습을 드러내는 중이다. 동 시대에 활동했던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이 노환으로 별세하고 오랜 동지 노태우는 병환으로 정상적인 생활조차 불가능한 모습과 대조된다. 제2연평해전, 천안함 피격사건 영결식에 참석하였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였다.
전두환은 자신이 집권기간 동안 줄곧 김대중을 탄압하고 내란음모사건으로 사형선고까지 하여 죽이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은 대통령이 된 이후 전두환을 특별사면 시켜주었고, 본인을 자주 청와대로 초청해 국정에 대한 이야기를 서로 나누는 등 전직 대통령으로써의 예우를 충분히 갖췄다. 이점에 대해서 전두환은 김대중에게 항상 감사하고 존경한다 라는 멘트를 했다. 그리고 김대중이 죽기 직전 병문안도 갔었으며 사망 이후 영결식장에도 참석해 애도를 표했다.
반면에 김영삼과의 관계는 이후에도 계속 껄끄로웠는데 전두환은 집권기간 김영삼을 가택연금 시켜버려 아들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게 하였고 김대중이 미국에서 입국할당시 김영삼이 마중을 나가려 했지만 전두환이 군인들을 보내 꼼짝도 못하게 하였다. 또한 정계에 발을 딛이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등 재임당시 김영삼을 줄곧 탄압했으며 김영삼은 대통령이 된 이후 하나회와 5공을 개박살내고 자신을 감옥에 쳐넣어 대통령 예우를 받지 못하게 하였다. 퇴임 후에도 자신을 대통령감이 아니라고 맹비난을 퍼부었고 2010년 전직 대통령 회동 자리에서도 김영삼은 이명박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에게 큰 목소리로 ''' "전두환이는 왜 불렀노? 쟈는 대통령도 아니데이. 죽어도 국립묘지는 못간다." ''' 라고 망신을 준 사례는 유명하다. 하지만 2015년 김영삼이 사망했을때 장례식에 참석하여 조문을 오며 상당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러나 김영삼을 용서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는 끝까지 묵묵부답이었다고 한다. 기사

10. 명예훼손 피고소


2017년 박근혜 탄핵으로 정국이 어수선한 와중 은근슬쩍 2천 페이지 분량의 3권짜리 회고록을 내놓았다. 당연히 자신에게 유리한 서술로 점철된 내용이라 비난의 여론이 일었다. 전두환 회고록[43] 결국 법원에서 전두환 회고록의 발매를 금지하였다.# 5.18 관련 내용이 실려있는 1권의 발매만 금지되고 그 이후의 내용이 실린 2, 3권은 정상적으로 발매가 되었기 때문에 1권의 문제가 되는 부분은 까맣게 처리해서 내놓았지만 본질적으로는 바뀐 것이 없어서 그런지 이마저도 다시 출판, 배포가 금지 되었다.#
게다가 회고록 중 고 조비오 신부를 ‘가면을 쓴 사탄’,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하여 조 신부의 유족[44]들이 전두환을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형사 고발하였다. 그런데 형사 재판을 맡은 재판부가 바로 '''광주지방법원'''. 당연히 전두환은 재판 연기 및 재판부의 서울 이송 신청을 했으나 법원은 5월 28일로 예정되었던 재판의 연기만 받아들이고 이송 신청은 기각하였다. 이후 2018년 8월 27일 첫 공판이 열렸다. 전두환의 변호인 측에서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2018년 들어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며 불출석하겠다고 밝혔지만 재판부는 '관련 법(형사소송법 277조 피고인의 불출석 사유)에서 건강 문제는 불출석의 사유가 될 수 없다' 라고 밝혔다.
전두환은 도저히 광주에서 재판받지 못하겠다며 대법원에까지 재판관할 이전 신청을 상고했으나 모두 기각되고, 2019년 1월 7일에는 알츠하이머에 이어서 독감에 걸렸다고 부인 이순자 여사가 대신 인터뷰까지 하며 재판에 불출석하였다. 그러나 건강이 안 좋다면서 골프를 쳤다는 의혹으로 논란이 되었으며 측근들은 “운동과 법정 진술은 다르다”고 주장했다.# 아무리 봐도 꾀병같아 보였는지 광주지법은 3월 11일로 재판을 다시 연기했고 끝내 구인장까지 발부했다.
한편 2018년 12월 20일에 서울시에서 전두환의 재산을 압류했는데, 그 이유가 '''세금체납'''. 금액도 무려 9억 8천만원에 달하며 연희동의 그 대저택도 추징금을 받기 위해 '공매'로 넘어간다고. 전체 땅과 건물을 합친 감정가는 약 '''102억 원'''이라고 한다.[45]#
그리고 마침내 부인의 동석 하에 2019년 3월 11일 경찰 경호팀의 호위로 재판 출석을 결정하였고 이로써 퇴임 이후 23년만에 피고인 신분으로 법원에 출석하게 되었다. 광주지방법원 장동혁 부장판사의 주재로 열린 첫 공판에서 전두환은 헤드셋을 착용하기는 했지만 거동이 불편하다는 주장과는 달리 명확하게 자신의 육성으로 본인이 기소된 모든 혐의에 대하여 전면 부인했다.[46] 그리고 이전에도 누차 요구했던 재판관할이전 신청도 같이 했으나 이에 관하여 담당판사는 일단 심리를 계속 진행하면서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취했다고도 하며, 다음 공판기일은 2019년 4월 8일 오후 2시 광주지방법원.
근 30년만의 광주 방문에 일대는 난리가 났다. 아침부터 전두환을 규탄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으며, 전두환을 태운 차량이 도착하자 바로 고성이 터지고 몸싸움이 벌어지는 등 아수라장이 되는 가운데 전두환은 인터뷰를 일체 거부하며 철통경호 속에 실내로 이동했다. 하차 직후 움직이기조차 힘들 정도로 인파가 몰렸다. 법원에서 나올 때에도 소동이 일어나서 쇼크를 먹었는지 사저 귀가길에 신촌 세브란스병원 응급실에 방문하기도 했다.
한편 법원 청사내로 들어가려는 전두환을 한 시민이 제지했다가 경호원한테 발길질을 당해 분위기가 극으로 치닫기도 했다. 한편 법원 옆에 초등학교(동산초등학교)가 있었는데, 초등학생들이 전두환에 대해 항의를 하기도 했다.[47] 또한 언론에서도 다시금 전두환의 악행을 돌아보면서 형제복지원 사건이 자신과 관련되었다는 사실이 재조명되었다. #, #
앞으로 남은 공판기일 내내 이러한 모습이 재차삼차 연출될 것으로 보인다. 유죄판결이 나오더라도 벌금으로 그칠 것으로 보이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지금이라도 단죄를 해야 한다고 난리가 났으며, 그게 아니더라도 이제 구순에 접어든 만큼 과거의 죄업에 대한 참회와 반성으로 국민화합을 위한 메시지와 비록 쿠데타의 수괴로서 집권했을지라도 전직 국가원수로써의 품격을 지키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2019년 4월 8일 두 번째 공판기일에서는 재판부가 '공판준비기일'로 지정함에 따라 피고인의 출석의무가 없어 전두환은 출석하지 않고 변호인만 출석한 상태에서 속행되었다. 이 자리에서 전두환 측 변호인은 회고록상 문제되는 '거짓말쟁이' 발언은 문학적인 표현이여서 명예훼손의 범의가 없이 단순견해를 표명한 것에 불과하며 검찰이 제출한 대다수 증거에 '부동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면서 첫번째 공판기일에서 전두환이 재판정에서 조는 모습을 보인 것과 관련하여 재판부에 결례를 끼쳤다며 사과했다.
다음 재판기일은 2019년 5월 13일 오후 2시 광주지방법원. 이 날은 증인심문을 개시하는 공판절차의 본격적인 시작단계에 해당하기 때문에 전두환이 출석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법원은 전 씨의 불출석 허가 신청을 5월 8일에 받아들였다. ‘5.18 헬기사격’ 형사재판, 전두환 출석없이 진행 이후 이 재판은 불출석 재판으로 진행된다.

전두환은 재판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알츠하이머 투병 중임을 주장해 왔지만, 2019년 11월 8일 정의당 임한솔 부대표가 전두환이 홍천군의 한 골프장에서 시원하게 골프를 치고, 거동과 의사소통이 원활한 신체건강한 모습이 담긴 영상을 공개하면서 다시 시끌시끌해지고 있다. 이미 법원출석 당일 90 먹은 노인네가 몰린 인파를 제치는 모습으로 알츠하이머는 구라 아니냐는 얘기가 많이 나왔는데 이번 영상이 나오며 그럼 그렇지라는 반응.

2019년 '''12월 12일'''에는 최세창, 정호용 등 쿠데타 주역들,[48][49] 그리고 김장환 목사 내외와 함께 강남구 압구정동의 한 고급 중식당에서 인당 20만원씩 하는 호화만찬을 즐기는 모습이 공개되었다.[50] 하필 12.12 쿠테타 40주년이 되는 날 옛 부하들과 모였다는 점에서 영상을 촬영한 임한솔 부대표는 만찬장을 나오는 전두환에게 쿠테타기념회가 아니냐고 질문했지만 전두환은 단순 친목회라고 일축했다. 그러면서 임 부대표는 알츠하이머라는 전두환이 줄곧 큰 목소리로 대화를 주도했으며 각하 소리까지 나왔다는 얘기까지 덧붙였다. 이에 5.18 관련 단체들은 반성 없는 뻔뻔한 태도에 경악하여 비난성명을 내고 여론도 꾀병으로 법원을 농락하는 전두환을 제대로 법정에 세울 것을 촉구하고 있다.
2020년 4월 27일 재판 참여를 위해 광주 법원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10월 5일. 검찰이 징역 1년 6개월을 구형했다.
11월 30일, 광주지방법원이 사자명예훼손죄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였다. 이날 재판을 위해 광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사죄를 요구하던 시위대에게 '''"말 조심해 인마!"'''라며 역정을 내서 논란을 빚었다. 그가 광주로 올 때 탑승했던 세단 차량은 광주 시민들로부터 계란과 밀가루 세례를 맞았다.[51]
[1] 합천군에서 '새천년생명의 숲'의 이름을 ''''일해'''공원'으로 바꾼 것은 전두환의 연고지가 합천군이기 때문이다.[2] 본래 선대의 집성촌은 합천군 쌍책면 하신리인데, 전두환의 증조부 전석주(全錫注) 때에 율곡면 내천리로 이주했다고 한다.#[3] 당장 얼굴도 보지 못한 큰형인 전열환과 27살 차이가 나며, 조혼 풍습이 아직 남아 있던 20세기 초에는 사실상 부모자식뻘 수준의 나이 차이다.[4] 합천군 자체가 행정구역상으로는 경남이지만 대구에 인접해 있고, 부산광역시창원시 같은 경남권 도시보다는 대구광역시에 훨씬 가까운 생활권이다. 행정구역 경계선이 실제 생활권과 일치하지 않는 사례다.[5] 노태우는 전형적인 학구파로, 육군사관학교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한 적이 있다. 게다가 문학과 음악에도 관심이 많은 문학소년이었다고 한다. 반면 전두환은 문학이나 예술보다는 스포츠에 열광하는 타입이었다.[6] 골키퍼가 팔만 좋으면 되지 왜 다리 힘까지 세느냐는 소리도 있지만 골키퍼도 골킥을 계속 차야하고 유사시 프리킥까지 차는 등 롱킥처리 비율이 높아 필드 플레이어들보다도 다리 힘이 센 키퍼들도 많다.[7] 이전 버전에선 공부는 못했던 것처럼 서술돼 있었는데, 중고등학교 시절엔 성적도 우수한 편이었다. 다만 육사 시절엔 공부 잘 하는 이들이 워낙 많아서 그런지 성적이 하위권이었다. 육사 시절 성적이 하위권이었다는 보도들 때문에 중고등학교 때도 하위권이었던 걸로 잘못 인식되어 와전된 것, 애초에 고등학교에서 하위권 성적이면 4년제 정규육사에 합격할 수도 없다. 아무리 그당시 육사가 전쟁으로 인해 인원이 부족하다고해도 지방에서 꼴통인 학생을 정규육사가 국가의 장교로서 책임지고 키운다는 것은 불가능에가깝다.[8] 전두환이 1년 늦은 나이에 입학하긴 했지만, 그 시절은 1, 2년씩 늦게 취학하는 건 흔했기 때문에 동기들 중에 전두환만 나이가 많은 건 아니었을 것이다.[9] 현재는 제1공수특전여단[10] 특수전학교와 심리전학교는 노태우와 통역장교를 비롯한 4명의 한국 장교들과, 이듬해의 레인저 스쿨은 차지철을 비롯한 5명의 한국 장교들과 같이 교육을 받았지만, 유격훈련 교관화 교육은 한국인 장교으로서는 전두환 혼자 입교해서 교육받았다.[11] 그래서 형식적으로만 따지면 서울대학교 ROTC 1기가 전두환의 제자들인 셈이지만, 밑에 내용에 나오듯이 이 ROTC 교관을 한 지 얼마 안돼서 5.16군사정변이 일어났고 전두환은 이에 동참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관으로 옮겼기 때문에 실제 교관 생활을 한 건 매우 짧은 기간에 불과하다. 특전사든 ROTC교관이든 뭐든간에 어느 한 곳에 진득이 있지 않고 짧게만 근무하며 굉장히 여러 조직과 보직을 이리저리 옮겨 다닌 것도 전두환 군 이력의 특징이다.[12] 공수특전단에 적을 뒀던 짧은 기간 중에 미국에 두 차례 도미하여 4개의 교육과정을 이수했다. 이 교육과정들 하나하나의 교육기간이 각각 수개월씩이나 된다. 즉 공수특전단 근무 기간의 대략 절반 이상을 미국 군사교육기관에서 지낸 것이다.[13] 그 한참 뒤에 공수특전단으로 다시 와서 부단장을 잠깐 지냈고 그 몇 년 뒤에 또다시 1여단으로 와서 여단장을 지냈지만, 당연히 여단장/부단장은 직접 훈련을 뛰진 않는다.[14] 물론 미국 위탁교육 중에는 힘들었겠지만[15] 선배이기 이전에 인간흉기이다. 군부혁명 지지 퍼레이드를 안하겠다고 개겼다간 욕지거리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전두환의 주먹이 날아올 것 같은 분위기였다.[16] 한편 강영훈은 이 때문에 박정희 시기에는 해외유학을 떠나야했고 전두환이 집권한 5공 때는 해외대사로 타국을 떠돌다가 노태우가 집권하고 국무총리가 되어 금의환향한다.[17] 이에 대해 전두환은 "나는 내 동기들 중에서 소령은 제일 늦게 달았지만 대령은 제일 빨리 달았다"고 회고했다.[18] 남 베트남은 4계절 평균기온이 26°C 정도, 뜨거운 물이 필요없었을지도 모른다.[19] 꼭 그렇지는 않다. 한여름 폭염에도 온수로 샤워하는 사람은 의외로 많다.[20] 이 여단장 시기에 전두환에게 우수 훈련병사 표창장을 받았던 사병 중 한명이 먼 훗날 유명 정치인이 되었는데, 그가 바로 문재인이다. 표창장 사진도 공개한 적이 있고, 심지어 대통령후보 경선토론회에서도 본인이 말했다.[21] 이게 어떤 진급코스냐 하면 제1보병사단 사단장을 역임한 후 제7기동군단 군단장을 역임하면 '''대장 진급 100%'''일 정도로 둘 다 진급코스이다.[22] 전투 특기들이 대장으로 진급하는 게 대세인 지금 안보지원사령관은 그저 그런 보직이다. 대부분 안보지원사령관을 마치면 전역하기 때문. 현 안보지원사령관인 전제용 장군도 기무 특기에 공군 출신이라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남영신 장군처럼 특별한 이유로 인해 대장으로 진급한 사례도 있다.[23] 특히 항쟁 중인 5월 21일 오후 1시 도청 앞 집단발포의 발포명령자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24] 현장명령자는 조창구이지만, 그에게 발포명령을 내린사람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25] 헌법상 대통령은 민간인이어야 하기 때문에 제대한 것.[26] 덕택에 노태우 정부에서 제일 먼저 이야기된 것이 전작권 반환이었다.[27] 1980년 국보위 창설 시부터 '정화운동기획단'으로 출발하여 11월부터 사회정화위원회로 계승되어 정권 유지를 뒷받침하다가 노태우 시기인 1989년에 해체되어 민간단체인 '바르게살기운동 중앙협의회'로 재탄생했다.[28] 이 법은 범죄자가 유사한 죄로 2회 이상 실형을 받고 그 형기의 합계가 3년 이상인 자가 다시 유사한 죄를 저질렀을 경우 등의 사유로 인해 상습성이 인정될 때는 형량과 상관없이 추가로 장기간의 보호 감호 처분을 내릴 수 있도록 규정하는 법인데, 1989년 지강헌 탈주 사건과 보호감호 중 사망자 속출 등 장기간 보호감호 처분에 따른 반발과 부작용이 발생하고 이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1989년 사회보호법을 개정해 보호감호 기간이 7년을 넘지 못하도록 제한했으나, 이후 사회보호법상의 보호 감호가 ‘사실상의 이중 처벌’로 위헌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오다가 2005년 8월 4일에 폐지되었다.[29] 1980년 당시 ㅆ 뒤에서의 맞춤법은 '''읍니다'''가 맞다. '''습니다'''로 개정된 때는 1989년.[30] 쉽게 말해 빨갱이라는 뜻이다.[31] 컬러TV 방송은 미국에서는 60년대부터 보편적이었다.[32] 다만 전 대통령이 사고에 휘말리지 않은 것이 다행인데, 당시 대한민국은 '''하나회'''의 영향력이 컸던지라, 까딱했다면 또 군사반란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33] 전두환의 대통령 7년 집권은 프랑스 드골 대통령의 벤치마킹.[34] 앞서 검찰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워 기소유예로 마무리지은 사건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미 기소유예로 끝났는데 또 뭔 ㅈㄹ이냐는 얘기.[35] 위 '단식투쟁'은 병원 이송 이후에도 한동안 지속되다가 1995년 12월 30일 경찰병원에서 제공하는 쌀뜨물에 이상이 생겨 설사증세가 발생한 이후 중단하였다.[36] 재밌는 게 1심 판결 당시 사형을 선고한 판사 김영일은 훗날 최종영 대법원장의 지명을 받아 헌법재판관이 되어 노무현 탄핵 때 찬성표를 던진 적이 있다.[37] 호칭 설에 대해서는 의견이 대립하는데, 민주당계 정당/진보 정당 지지자는 국가가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를 하지 않는 대통령에 대해서 전(前)자를 붙일 필요 없다고 하고, 보수 정당 지지자는 예우에 대한 문제는 법원 판단에 맡겨야할 영역이고, 존중해야하지만 역사적 인물에 대한 사실의 인정으로서 전(前)자를 붙이는 것이라는 이유 등으로 전(前)자를 넣어야 한다고 한다. 참고로 문재인 정부의 총리인 정세균과 이낙연도, 대통령인 문재인도 재임 도중 논란이 되고 있는 전(前) 대통령들에 대하여 전직 대통령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바 있다.[38] 국립묘지 안장 등을 전담하는 국가보훈처에서는 사면이 되기는 했으나 판결 자체가 무효화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유로 전두환의 사후 현충원 안장이 불가하다는 입장을 2019년에 내놓았다.[39] 위키백과 15대 대통령선거, 대선후보들의 전두환 노태우 사면공약 대결 논란[40] 전노 사면에 대한 청와대 정치권 반응 1997.12.21 동아일보[41] 전두환, 노태우 사면 모레 석방, 추징금은 내야[42] 시공사는 1989년에 전두환이 장남 전재국을 시켜서 비자금으로 만든 출판사이다.[43] 전두환 회고록 출간 이전에는 아내 이순자가 먼저 회고록당신은 외롭지 않다을 출간한 바가 있다.[44] 고인의 조카(신부 조영대)가 대표하였다.[45] 어마어마한 땅값이지만 과거 1997년 내란·반란수괴 등 혐의로 선고받은 추징금이 잔여 1,000여억 미환수 상태라서 '''남은 돈 900억을 더 내야한다'''.[46] (사자명예훼손등)에 관하여 회고록은 허위가 아닌 공적인 사실인 과거 국가기관기록과 검찰조사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헬기 사격설의 진실은 아직 확인되었다고 볼 수 없다는 취지로 전두환 자신이 고의성을 가지고 위 회고록을 작성한 적이 없다고 하였다.[47] 그러자 이후 극우단체들이 시위법을 악용해서 학습권 침해를 벌였다.# 우연히도 이 초등학교는 '''이한열의 모교이다.''' 이후 광주 시민들이 격려 메시지와 간식 선물 등을 해당 학교에 대거 보내줬다고 한다.[48] 중환자인 노태우와 사망자들을 제외하고 다 모인 듯 하다.[49] 다들 전 前 대통령을 각하라고 높혀부르며 윗사람 대우를 했고 정호용씨만 '두환이'라는 표현을 썼다고 한다. 둘이 사적으로는 육사동기인데다가 5공 내내 요직을 시킬 정도로 친한 친구사이여서 가능한 일로 보인다.[50] 코코넛 제비집, 양등심 탕수육 샥스핀, 와인 등이 포함된 고가의 메뉴이다. 불도장을 세트와는 별개로 주문하기는 했으나 테이크 아웃으로 가져갔다고 한다.[51] 이 상황을 예상이라도 했는지 전두환은 다른 차량을 타고 빠져나갔다. 그가 차에 내리고 탈 때마다 경호원들이 마른 하늘에 비닐 우산을 펼치다 접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