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의 식사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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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김홍도의 그림 '새참'. 그림 속의 인물들이 수저로 퍼먹고 있는 밥그릇 크기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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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인 남자가 밥 먹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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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조선인들의 식사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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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별 밥그릇 비교사진
1. 개요
2. 상세
3. 대식의 근거
3.1. 역사
3.1.1. 외국인의 평가
4. 단백질이 부족했는가?
4.1. 긍정론
4.2. 부정론
5. '먹다'의 다의성과의 관계
6. 여담
7. 둘러보기
8. 관련 문서


1. 개요


한민족의 식사량이 예전부터 유난히 많았다는 이야기에 대한 문서이다.
이것이 놀라운 이유는, 똑같은 사람임이 분명한 전근대 한국인들이 어떻게 현대인들의 2~3배가 넘는 양의 대식을 했는가 하는 놀라움도 있지만, 그보다는 농업생산량이 현대에 비해 절대적으로 부족했을 것임이 자명한 전근대의 사람들에도 그토록 대식을 했다는 점 때문이다. 하다못해 이러한 대식을 소수 상류층들만 했다면 모를까, 일반 서민들조차 이에 못지 않은 대식을 했다는 사실 때문에 더더욱 현대인들에게 신기하게 보이는 것이다.

2. 상세


역사적 근거에 따르면, 현재 쓰는 일반적인 밥그릇의 크기는 350g이 들어갈 정도이지만[1], 조선 시대에는 690g, 고려 시대에는 1,040g, 고구려 시대에는 무려 1,300g의 밥그릇이 발굴되었다.
삼국유사에서는 김춘추가 하루에 먹는 양이 엄청나다.

왕은 하루에 드시길 ''' 3말[2]

9마리'''를 젓수셨는데, 경신년에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는 점심은 그만두고 아침과 저녁만 하였다. 그래도 계산하여 보면 하루에 '''쌀이 6말, 술이 6말, 그리고 꿩이 10마리'''였다.[3] 성 안의 시장 물가는 베 1필에 가 30석 또는 50석이었으니 백성들은 성군의 시대라고 말하였다. ─ 삼국유사

다만 이건 혼자 다 먹는 것이 아니라, 먹을 만큼 먹고 남는 것은 아래의 신하들이 나눠먹는 방식이었다. 수라상 문서의 물림상 관련 내용 참고.
아래에서 언급된 ''은 흰 쌀밥이 아니라 잡곡밥일 가능성이 높다. 쌀밥을 원없이 즐겨 먹는 건 주로 높은 신분에 한정되었다. 삼국시대 한반도의 귀족 계층은 쌀밥을 먹었지만, 평민들은 잡곡밥을 먹었다고 한다.
부여에 관한 중국 역사서의 기록을 보면 "부여는 오곡을 기르기 적합하다."고 적혀 있다. 참고로 중국의 오곡과 한국의 오곡은 다르며 위서 지리지에서 오곡과 쌀을 따로 기록한 만큼 이 오곡에 쌀이 포함되지는 않았다. 현대에는 만주 지역에선 이모작이 불가능하고 조선 사람들이 간도로 이주해 농사를 짓기 전까지는 벼농사가 오랫동안 되지 않았던 지역이었지만 고구려가 있었던 그 시절은 연 평균기온이 지금보다 3~5도 정도 더 높았다고 한다.[4] 그래서 북위 45도인 만주 중부 지역에서도 이모작이 가능했고 동토인 그린란드도 실제로는 풀이 뒤덮인 섬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서기 10세기에 소빙하기가 도래하면서 연 평균기온이 뚝 떨어져서 그린란드는 동토가 되었고 만주 지역은 벼농사가 힘든 땅이 되어버린 것이다. 1300년 전과 지금은 기후가 약간 달랐다.[5]
이 많이 보급된 조선 후기에 와서도 서유구가 지은 "임원경제지"의 기록에 '남쪽 사람은 쌀밥을 잘 짓고, 북쪽 사람은 조밥을 잘 짓는다.'고 적었다. 그나마 수전이 먼저 보급되고 기후 조건상 농사가 활성화된 남부 지방은 경제 조건만 되면 쌀밥을 먹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거꾸로 돌리면, 경제 사정이 안 되어서 쌀이 없으면 잡곡밥을 곁들여 지어 먹어야 했다는 소리다. 헌데 이런 잡곡밥은 먹어도 배가 금방 꺼지는 속성이 있다. 이걸 봤을 때, 큰 밥그릇에다가 엄청난 양의 밥을 먹는 것은 충분히 신빙성이 있다는 것이다. 힘이 많이 들어가는 고된 농사 일을 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현재도 운동선수들은 보통 사람보다 식사량이 많다. 고기뷔페에서는 운동선수 출입을 통제할 정도.
다만 이러한 대식이 과연 전반적인 생애에 걸친 충분한 영양 공급을 보장했다고 보긴 어렵다. 그랬다면 조선시대에 이미 현 대한민국의 평균 신장에 이르렀을 것이다. 아래에서 보듯 탄수화물은 정말 원없이 먹었을지 몰라도 고기나 지방은 부족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실제 한민족의 식사량이 많은 것과는 별개로, 근대 이전의 기록의 경우 조금 고려해야 할 부분은 있다. 고대에는 인물의 신분과 능력을 과시할 때 실질적인 지식이나 능력 뿐만 아니라 그 개개인의 체구, 외모나 식사량, 주량 등도 그 '능력'에 포함해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의 유능한 무장들이 말술을 마시고 많은 양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도 결국은 '이렇게 술과 음식을 많이 먹을 수 있을 정도의 힘과 재력이 있다'는 점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자신의 근황을 살피는 왕에게 '''밥을 1말에 고기를 10근씩'''[6]이나 먹고, 한바탕 말을 타고 달렸다던 염파가 그 예.
또 그와 비슷한 의미로 작게는 개인의 부(富)나 권력, 지위, 크게는 국가 전체의 국력도 이런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따라서 근대 이전의 기록에서 인물이 대식을 했다고 해서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그 인물의 능력과 신분을 과시하기 위한 각색일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김춘추도 이런 해석이 나오고 있다. 이러한 사료 해석은 한국사뿐만 아니라 전근대 시대의 역사 전체의 보편적인 요소이다.

3. 대식의 근거



3.1. 역사


한민족이 예로부터 대식을 했다는 기록들은 찾아보면 아주 많다. 참고 참고2
임진왜란 때 기록한 <쇄미록>이란 책에는, 보다 구체적으로 조선 사람들의 식습관을 설명했다. 쇄미록에 "조선의 일반적인 성인 남자는 1끼에 7홉이 넘는 양의 쌀을 먹는다"고 적었는데, 이것은 현재 먹는 1공기의 '''2배'''의 양이다. [7]
임진왜란 당시에도 이것과 관련한 비화가 있었는데, 한양을 점령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량을 조선군의 식사량으로 계산하니 1달치 정도였다. 당연히 조정에서는 1달만 버티면 왜군들이 물러가리라 생각했는데 고니시 부대의 식사량을 본 밀정이 왜군들의 식사량이 조선군의 1/3정도임을 보고하자, 조정에서는 왜군들이 '''승리를 위해 일부러 식사량을 줄인다'''고 생각했다고.[8]
조선시대의 책인 용재총화에서는 그 당시 식습관을 잘 드러낸다. 책 내용에서 '가난뱅이는 빚을 내어서라도 실컷 먹어대고, 군사들은 행군시 군량짐이 반을 차지하며, 관료들은 수시로 모여 을 마신다'라고 비판한 부분이 있다.
조선 전기 훈구파의 대표주자인 이극돈은 조선 백성들의 식습관에 관련한 상소를 올려 '풍년이면 음식을 아끼지 않고, 중국인이 하루 먹을 분량을 한 번에 먹어치우니 그것이 문제입니다'라고 임금에게 간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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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먹는 건 신분의 차이가 없었다. 조선시대 왕의 일과를 보면, 하루 5~6끼씩은 먹은 것을 알 수 있다. 영조는 대표적으로 소식을 하고 덕분에 장수한 임금인데, 소식을 한 기준이 5끼에서 3끼로 줄이고, 고기 위주의 반찬에서 채식위주의 반찬과 고단백질 고기를 더한 현대기준으로 균형잡힌 식단이였다. 그러나 주변에서는 너무 소식한다고(...) 크게 우려했다.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는 ‘스스로 먹는 것이 너무 박하니, 늙으면 반드시 병이 생길 것'이라고 걱정했다고 한다.
식사를 지칭하는 아침, 점심, 저녁 이 중에 유독 점심만 한자어다. 사실 점심이란 아침과 저녁 사이에 먹는 간단한 음식을 가리키는 중국어로, 우리가 흔히 쓰는 딤섬이 바로 점심을 뜻하는 광둥어다. 한국에서도 오래 전부터 아침과 저녁 2끼만 먹기가 평상시의 식습관이었다. 옛 기록에 따르면 고려 초 이후로부터 보통 사람들은 하루 2끼, 귀족 등의 부유층은 하루 3끼를 먹는다고 했고, 이 식습관은 조선 말까지 이었다. 그러나 말이 하루 2끼지 선조들은 그 사이에 소량의 음식을 자주 먹었다고 한다. 물론 어디를 가거나 농사를 지을 때처럼 육체적으로 활동하는 때는 엄청난 참을 먹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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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이야기로는 농부 3~4명이서 점심에 잠시 쉴 때 간식거리로 '''복숭아 25개'''를 껍질째 우적우적 먹곤 했다고 한다.[9] 이러한 새참문화는 농사나 육체노동을 하는 곳에서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
조선시대까지 갈 것도 없이, 1960년대만 해도 일반인의 사기 밥그릇은 용량이 650cc가 조금 넘는 정도였는데 2010년대 현대의 공기밥 밥그릇은 300 cc 정도로 2배보다 훨씬 크다. 게다가 그 당시는 밥그릇에 넘치게 고봉밥을 담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밥의 양이 2.5배 정도는 된다. 농부 등 육체노동자가 아닌 도시 사무직 일반인 어른 남자가 매일 사용한 밥그릇이다. 쌀로는 대략 200g 정도이다.
1970년의 한국인 1인당 연간 양곡소비량은 190kg이었고 그중 쌀이 136kg 정도였다. (농가 비농가 합계 평균) 현재는 연간 쌀 소비량이 1인당 60kg 정도로 줄어 들었다. 1일 쌀 소비량은 170g 정도. 공기밥 1그릇은 밥으로 210g, 쌀로는 90g. 칼로리로는 약 300kCal 정도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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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밥상 차림과 밥그릇 크기
종가집이나 제사를 지내는 큰집에 가서 기제사상에 올리는 밥그릇을 보자. 그 크기가 옛날에는 어른용이었다. 요즘 식당에서 공기밥 1그릇 추가하면 주는 용량은 미취학 아이들용이나 돌맞이할 때쯤 되면 선물로 들어오는 아이용 용량과 비슷하다.
70~80년대에는 이러한 식사량을 조절하기 위해 기존의 고봉밥 형태에서 주식의 양이 훨씬 적은 일본식 공깃밥을 도입해 식당마다 이를 어길 시 단속하게 하는 등 정부에서 규제를 한 덕분에 주식의 양이 크게 줄었다.(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 또한 경제의 발전으로 부식 섭취량이 늘어나 식사의 총량은 몰라도 주식 섭취량은 현대의 한민족이 가장 적게 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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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도 1인당 아시아 1위의 육류섭취, 세계 1위의 해산물/야채 섭취[10] 등으로 대식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70년대 1인당 쌀 소비량 136 kg에서 현재는 75kg으로 반토막이 나버렸고, 심지어 이 수치는 아시아 평균 쌀 소비량(78kg)에 못미치는 것이다. 대신 면을 많이 먹어 1인당 면 소비량은 9.7kg으로 세계 1위이다.
따라서 현재는 많이는 먹지만 예전처럼 쌀 위주의 식생활에서 부식 위주로 변화한 것을 볼 수 있다.

3.1.1. 외국인의 평가


조선시대 실학자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식에 힘쓰는 건 으뜸이다. 유구국[11]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고 '밥을 떠서 실컷 먹으니 어찌 가난하지 않겠는가?'라며 비웃었다."이라 기록했다.
임진왜란 당시 이여송은 조선인들이 먹는 양을 보고 놀라 백성들이 이렇게 많이 먹으면 국가 운영은 어떻게 하나고 묻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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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한국에 진출한 베네딕토회 독일인 수도자들.
조선 말쯤에 한국에 머문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12]의 기록에서도 대식을 하는 조선인들의 일화를 확인 할 수 있다.[13]

다식에 대해서는 대신과 평민의 구별이 없다. 조선 사람들은 많이 먹는 것이 곧 명예로운 것으로 여기며, 식사의 질 보다는 양을 중시한다. 조선 사람들은 식사를 하면서 수다를 떠는 법이 없다. 노동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식사량은 1리터의 쌀밥으로, 이는 아주 큰 사발을 꽉 채운다. 각자가 한 사발씩을 다 먹어치워도 충분하지 않으며, 계속 먹을 준비가 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2~3인분 이상을 쉽게 먹어치운다. 우리 신자들 중의 한 사람은 나이가 30세에서 45세 가량 되는데, 그는 어떤 내기에서 7인분까지 먹었다. 이것은 그가 마신 막걸리 사발의 수는 계산하지 않은 것이다. 64세에서 65세가 된 어느 노인은 식욕이 없다 하면서도 다섯 사발을 비웠다. 조선 사람들은 열 사발을 감당하는 자를 장사라고 부른다.

를 잡을 일이 있어 쇠고기가 마음껏 제공되면 아무도 고기로 꽉찬 접시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과일을 대접할 경우, 예를 들어 큰 복숭아를 내놓을 때에 가장 절제하는 사람도 10개 정도는 먹으며, 종종 30개, 40개, 50개까지 먹는 사람도 있다. 참외를 먹을 경우 보통 10개 정도 먹지만 때때로 20개나 30개를 먹어치우기도 한다.

조선의 어머니들은, 아이의 배를 손으로 두들겨 보면서 뱃속이 가득해지는 최후까지 밥을 채워 넣는다. 때때로 숟가락 자루로 아이의 배를 두드려 보다가 속이 꽉 찼을 때에 비로소 밥 먹이는 것을 중단한다. 누군가를 잘 대접해야 할 때는 1마리를 통째로 내놓는다. 아무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말할 필요도 없이 각자는 그것을 다 먹어치운다.[14]

쇠고기나 개고기도 큼직하게 썰어서 양껏 내놓는다. 그래야만 사람들은 고기를 먹었다고 여긴다. 특히 곱창생선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요리이다. 하지만 조선인들이 이를 식탁에 올리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보자마자 먹어치운다. 왜냐하면 조선인들은 자제할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인들의 집에는 비축식량이 없으며, 손에 넣는 즉시 먹어치운다. 물론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찬장이나 식량 창고가 없으므로 음식을 보관할 수 없다. 게다가 이 나라는 기후가 매우 습하기 때문에 음식물이 금방 부패한다.

그리고 취할 정도로 을 마시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임금이나 영의정도 공공연히 폭음을 한다. [15]

술에 취하면 정신을 잃고 바닥에 뒹굴거나, 술을 깨기 위해 잠을 잔다. 그래도 아무도 놀라거나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고, 혼자 쉬도록 내버려둔다. 우리 눈으로 볼 때 이것은 큰 타락이다. 그러나 이 나라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관습이다. 그래서 허용되며 아주 고상한 일이 된다.

구한말 조선을 여행했던 오스트리아의 귀족 출신 여행가인 에른스트 폰 헤세 바르텍(1854~1918)도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조선인들이 대식가라는 점에서, 비교할 만한 대상이 없었다. 내가 일본에 갔었을 때, 일본인들은 자신의 이웃이 자신들보다 3배 가량 더 많이 먹는다고 내게 말했었는데, 나중에 제물포 개항장에 와 보니, 정말로 그랬다. 중국인과 일본인들은 일정한 시각에 식사를 하는 반면, 조선인들은 때를 가리지 않고 식사를 하는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의 밥이, 붉은 고추 한 줌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었다.

영국 출신 여행가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선교사 그리피스 존의 여행기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조선인들은 보통 한 끼에 3~4인분의 양을 먹어치우며, 3~4명이 앉아 있으면, 그 자리에서 20~25개의 복숭아와 참외가 없어지는 것이 다반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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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벨라 버드 비숍

조선인들은 보통 일본인들의 2배를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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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피스 존

릴리어스 호턴 언더우드(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부인)은 이렇게 기록했다.

조선인들은 잔치에 가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먹는다. 잔칫날 많이 먹으려고 전날 굶기도 한다. 반면 일본인들은 잔칫날에 근사한 접시를 늘여놓지만 정작 음식은 쥐꼬리만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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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어스 호턴 언더우드

오스트리아의 여행가 에른스트 폰 헤세-바르텍은 이렇게 기록했다.

'''조선인들은 이웃나라 사람들보다 고기를 많이 먹는 편'''인데 엄청나게 많은 고춧가루와 식초, 그리고 양념을 곁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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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폰 헤세-바르텍 조선, 1894년 여름 中

미국의 군인이자 외교관인 조지 클레이턴 포크 중위[16]는 이렇게 기록했다.

오전 10시에 아침상이 들어왔다. 가슴높이까지 올라온 수많은 음식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중략)

저녁이되자 나를 위한 연회가 열렸다. 상을 채우고 있는 둥글고 작은 접시에는 '''열 명도 먹을 수 있을 만큼 음식이 쌓여 있었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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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클레이턴 포크, 은자의 왕국 中


4. 단백질이 부족했는가?



4.1. 긍정론


조선은 농업 국가였고 주식도 특히 쌀이었기에 탄수화물 섭취는 그럭저럭 괜찮았을지 모르지만, 다른 영양소에 비해 단백질 섭취가 부족했다는 주장도 있다. 밀이 쌀보다 70% 정도 많은 단백질을 가지고 있기에 쌀 섭취 국가는 똑같이 주식인 곡물만 섭취하더라도 단백질 섭취에 불리하다. 이는 복날에 고기를 구할 수 없으면 를 즐겨 잡아먹었다든가, 고기 음식 중에 내장을 비롯해 버리는 부위가 없을 정도라는 것, 대식하는 식사 사진에서 유독 밥은 어마어마한 데 비해 반찬은 보잘 것 없다는 것이 근거가 된다.
다른 가설로는 미곡의 저장 방식이 발달하지 못해 저장기간이 길지 못하고, 유통망의 문제로 각 지역에 골고루 분배되지 못하므로 먹을 수 있을 때 먹어둬서 칼로리를 비축해두려는 풍조가 만연했었다는 가설과, 이 시기는 노동 및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못해 사소한 용무조차 육체노동을 수반할 수밖에 없으므로 저 정도 칼로리를 축적해둘 수 밖에 없다는 가설이 있다. 하지만, 농경사회였던 시절에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성별을 불문하고 고된 노동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금방 배가 고파지기 때문에 그만큼 많이 먹는 것이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3면이 바다인 반도 국가이니 생선을 단백질 대체재로 쓸 수 있지만, 안그래도 평지가 별로 없고 산지가 많은데다가 조선시대에는 상공업을 천대했기 때문에 내륙 지방에서 생선값이 높았을 것이다. 오죽하면 박지원이 '''"생선 내장을 바닷가에선 거름으로 쓰는데 서울에선 한 줌에 한 푼이냐"'''라고 할 정도.[18] 그래서 나온 결과물이 간고등어, 건어물, 젓갈 등등... 그러나 이런 것만으로 충분한 육식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조선시대가 500년임을 감안했을 때 한해 두해 푸짐하게 육류가 공급되었던 때는 작게나마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저술은 그런 시기에 남겨진 것일 수도 있다.
사실 유럽은 토지에 비해 낮은 인구 밀도, 발전한 도시와 상업망, 그리고 어업에 대한 강한 의존, 목축업과 농업의 복합적인 발전 덕분에 농업 생산성이 동아시아에 비해서 매우 처참했음에도 불구하고[19] 단백질 섭취량은 비교적 양호했다.
'''정말로 조선시대 때 단백질 공급이 풍부했다면 동시대에서 신장이 전세계 다른 나라 사람들을 압도해야하는 것이 맞다.''' 최소한 그게 아니더라도 대한민국 국민의 유전적 평균 신장 한계점으로 평가되는 남 173~174cm, 여 160~161cm에 도달했어야만 한다.# 하지만 위에 나온 기사 자료를 보면 전세계적으로 비교했을 때 '''한국인의 신장은 매우 작은 축에 속했고 유전적 신장 한계점인 174cm, 161cm에는 택도 없이 부족한 키다.''' 유전적 차이를 가정하더라도 한국인들은 서양인들에 비해서 작은 편이다. 특히나 기사에 나온 포르투갈은 그 당시 키는 최소 우리보다 5cm가 더 컸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 2020년대 한국인의 평균 키는 남자 기준으로 포르투갈보다 크다.
뿐만 아니라 여성 기준으로 볼 때 평균 키가 큰 최근 100년간 제일 많이 자란 국가 중에 하나가 대한민국이다. 이 시기의 평균 키라는 것은 일제의 수탈로 인하여 줄어든 시기라고 보기 어렵다.# 이제 막 일제의 수탈이 시작된 시기였다. 이 시기의 저신장 및 유전적 한계점 키까지 도달하지 못한 이유는 단백질 공급 및 영양 공급이 굉장히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전체를 통틀어 좋다고 할 수는 없어도 최소한 조선 말기에 있어서 대한민국의 단백질 공급은 굉장히 열악한 실정이었다.
조선 후기 농업사를 연구한 논문이나 학술서를 봐도 1인당 곡물 생산에서 특별히 주변국(청, 일본)에 비해서 조선은 우위를 가지지 못했다. 이러한 학술서에서도 지적하는 것은 공통적으로 조선은 도시 산업 발전이 미비해서 농촌에 잉여인구가 지나치게 많았다는 점인데, 청, 일본은 그러한 부분에서는 조선보다 우월했다. 바꿔 말하자면, 청과 일본은 농촌에서 생산된 곡물이 도시 인구 부양을 위해서 흘러가느라 농촌 사람들이 먹을 식량이 줄었다면, 조선은 도시가 딱히 발전하지 않고 농촌에 백수가 많았기 때문에 그런 농촌의 하류층들이 쫄쫄 굶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의 <조선 중기의 경제> 혹은 <조선 후기의 경제>에서 서술한 당시 조선의 기근 및 유랑민의 발생은 큰 골칫거리였다. 해외 선교사들이 방문한 조선의 가호는 대부분 토지와 주택을 가진 최소한의 중산층이었기 때문에 식사량이 많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던거고, 그들보다 하류층인 조선 민중들은 기아에 시달린 것이다.
아래 문단의 근거 중 하나인 '소고기 섭취량 4kg'도, 소고기 이외의 고기 섭취량이 적었음을 감안하면 전체 고기 섭취량은 적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내륙 지방에서 해산물 섭취량은 뻔했을거고, 조선은 돼지고기를 거의 먹지 않았다. 개를 잡는 것이 소를 잡는 것보다야 훨씬 만만하긴 했어도 개는 빨리 자라는 편도 아니고 고기가 많이 나오는 편도 아니다. 닭도 지금처럼 많이 기르지도 않았고 다 늙어서야 겨우 잡았다. 계란의 크기는 지금보다 조금 작았으며 지금처럼 매일 하나씩 낳지 않고 나흘에 하나 꼴로 낳았기에 계란도 흔하지 않았다.
게다가 조선시대의 소고기 섭취량에 대한 계산이 매우 이상하게도 소의 마릿수를 인구수로 나눈 추정값인데, 이 추정값에서 소의 마리 당 무게를 현대 한우랑 비슷한 600kg으로 잡고 있다. 하지만 일제 시대까지 한우의 무게는 200kg 내외였으므로, 저걸 바탕으로 다시 계산하면 조선인의 평균 소고기 섭취량은 자연스레 1/3로 줄어들어 1.3kg 정도로 잡는 것이 합당해진다.
또한 사람들이 소고기를 많이 먹어서 문제라는 조선시대 학자들의 기록은 말그대로 그냥 학자들이 자신의 감상을 남긴 것일뿐이지 아무런 통계적인 근거가 없는 말이다. 조선의 고위층 일부 혹은 몇몇 백성들이 많이 먹은 것을 가지고 본인의 감상을 남긴 것 따위를 근거로 많이 먹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형적인 '''아무런 물증이 없는데 심증만으로 범인을 잡는 것'''과 동일한 얘기일뿐이다. 체계화된 현대사회에서도 정확한 통계가 어려운데 조신시대야 말해서 무엇할까? 조선시대 대학자들도 그 당시에나 대학자들일뿐이지 현대의 기준에서 보면 미신 혹은 근거가 없는 책 좀 읽은 촌부와 다를바가 없다. 그리고 그들의 기준에서 주요 자산중에 하나인 소고기를 잡아먹는 것은 집안의 대들보를 팔아 굶주림을 면하겠다는 차원과 동일해 보였기 때문에 좀 더 비판적으로 말했을 가능성이 있다.
혹여 만에 하나 풍족하게 먹었던 해가 있었을지언정 심지어 조선왕조는 500년이나 지속된 왕조다. 대한민국은 고작 100년도안된 나라다. 500년간 서너해 풍족하게 먹은 것 가지고 조선 전체를 통틀어 잘먹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분명한 것은 조선시대에 저렇게 소고기를 많이 먹었다면 현대의 날로 발전하는 농수산 기술이 왜 필요할까? 조선시대 방법대로 살면 충분했을 것이나 현재 농업과 축산업, 어업등은 아직도 활발하게 기술연구나 사육방법들이 논의되고 발전되는 학문이다.

4.2. 부정론


유럽 국가들에도 개고기 요리가 있고, 유목민족 출신이었던 게르만족에서 소시지가 나왔다. 계란도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이다. 만약 단백질 섭취량이 부족해서 탄수화물을 많이 섭취했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주장하는 쪽에서 정당한 역사 기록을 찾거나 명시적인 증거를 찾아서 근거로 제시해야 한다.
오히려 이익의 성호사설이나 다산 정약용의 글, 박제가의 북학의만 봐도 조선 사람들이 소고기를 너무 많이 먹어서 문제[20][21]라며(출처) 차라리 먹으려면 소는 농사를 지어야 하니 중국인들처럼 돼지도 먹고 도 먹으라는 말도 있었던 데다가, 개와 생선만 해도 복날에만 먹은 게 아니라 18세기 술집에서 술안주로 가장 인기 있었던 음식이 생선 요리와 개장국이었으며 일반적인 술집 손님의 대부분은 '''서민'''이었다(출처). 또한 김동진 저, '''조선 소고기 맛에 빠지다''' 같은 책과 조사만 봐도 조선 왕조 500년 내내 '''소를 많이 잡아먹었다.''' 연 4kg 가량인데 현대 한국인의 연 소고기 소비량이 15kg으로 '''1985년을 넘어서야''' 조선인의 연간 4kg을 넘겼다. 먹지 못한때는 경신대기근같은 국가적 재난상황때 뿐 이었다.
옆 나라 일본 같은 경우, 혼다 마사노부의 '농민은 죽지도 살지도 않게 만들어야 한다'라는 말로 대표되는 5공 5민, 세금 50%의 가혹한 지배에[22] 육식 금지령으로 서민들은 고기를 거의 못 먹었다는 점과 쌀조차도 충분히 못 먹었다는 점, 육식 금지령에다가 대식을 하기는커녕 소식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영양학적으로 굶어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만 봐도 단백질이 부족해서 대신 탄수화물을 대량으로 섭취했다는 말은 근거가 부족하다.

5. '먹다'의 다의성과의 관계


'먹다'가 다양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이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을 특별히 구분하지 않고 혼용: ex) 물을 먹다/마시다
  • 어떠한 마음을 품다: ex) 마음을 먹다
  • 나이가 차다: ex) 나이를 먹다
  • 무언가를 획득하다: ex) 아이템을 먹다
  • 두려움을 느끼다: ex) 겁을 먹다 → 식겁
  • 욕을 듣다: ex) 욕을 먹다
  • 물품이나 돈을 받다, 수익을 차지하다: ex) 뇌물을 먹다, 먹튀
  • 물이나 습기 따위를 빨아들이다: ex) 먹물을 먹인 붓, 풀먹인 셔츠
  • 어떠한 경기에서 등급이나 점수를 얻다: ex)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 물리적 타격을 입히거나 당하다: ex) 주먹 한 방 먹여줘
  • 관계를 맺다: ex) 나 걔랑 친구 먹었어
  • 무엇과 같거나 동등하다: ex) 그의 야심은 고래와(과) 맞먹다
  • 성관계를 하다: ex) 철수가 영희를 먹었다.
    • 정조를 유린하다: ex) 그 여자가 그 남자를 따먹었다.
  • 효과가 있다: ex) 이 방법이 잘 먹힌다.
  • 소리를 없애다: ex) 이 스피커는 고음을 먹는다.
  • 패배나 실패의 쓴맛을 보다: ex) A는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을 하고 B는 수강신청이 망해서 둘다 이렇게 고배를 마셨다.
  • 무엇인가에 빠져들거나 길들여지다: ex) 갑은 권력의 맛을 본 뒤 사람이 변했고, 을은 유흥에 맛을 들인 뒤 문란해졌다.
다만 먹는다는 표현을 다양하게 쓰는 건 한국만은 아니다. 먹다(eat)는 단어와 연관된 영어 숙어만 해도 eaten up(~를 사로잡다, ~를 써버리다), eaten into(~를 축내다), eat away/eat through(침식하다), eat at(~를 초조하게 하다), eat humble pie(실수를 인정하다), eat quiche(비열한 짓을 하다), eat the leek/eat dirt(치욕을 견디다), eat someone alive(누군가를 심하게 질타하다[23]) 등등 찾아보면 상당히 많다. 그외엔 한국어에선 마신다는 표현도 쓰인다. 고배를 마셨다는 표현이 그 예. 또한 역시 한국어에선 맛을 들이다, 맛을 봤다는 표현도 쓰인다.

6. 여담


이러한 대식 문화를 근거로 한국인이 야만스럽고 무절제한 민족이라고 까는 경우도 있었으나, 이는 한국 역사와 그에 합당한 추론이 아닌 '''현재의 가치기준으로 판단한 단편적인 기록을 확대생산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 기록의 주체들은 관료들이나 선교사[24]거나 외국인들이었는데, 조선생활을 오래 한 외국인의 전문을 읽어볼 경우 '나는 처음에는 절제하지 못하고 방탕한 조선 사람들의 생활상에 학을 떼었으나, 러시아 등지로 진출한 조선 사람들은 매우 절제하고 아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조선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게으른 것이 아니라, 관료들로부터 심한 수탈을 당하기 때문에 당할 바에야 그냥 있을 때 먹어치운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와 같은 내용으로, 말하자면 선량한 조선 백성들에게는 구시대 정권으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고 서구가 들어와 문명의 빛으로 이들을 고통에서 구해줄 필요가 있다고 하는 상당히 제국주의적인 주장이었다.[25]
허나 이러한 조선후기 수탈강화와 기후악화에 의해 가용식량이 줄어들어 있을 때 한방에 폭식해 버렸다는 설과 달리 우리 민족은 쌀농사위주의 고된 노동환경을[26] 고려하더라도 그냥 많이 먹은 듯하다. 그 근거로 위에 나와 있지만 비슷한 사회였던 주변국(중국, 일본 등)보다 많이 먹었다고, 선교사가 아닌 조선인 스스로의 기록과 중국, 일본 사람들의 기록을 교차검증해 보면 알 수 있다.

조선인들의 대식과 식탐은 빈부와 귀천에 관계 없이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조선인들의 가장 큰 결점은 '''대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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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선교사, 샤를 달레 신부

구한말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물론이거니와 실학자들도 "이러한 조선의 대식풍습은 빈부차와 풍흉 유무,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는 일반적인 습관이다"라고 기록하거니와 되려 이에 대해 까고 있었다. 심지어 "가난한 사람들은 빚을 내어서라도 많이 먹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다"는 기록과 "쌀에 대한 지나친 탐식으로 소갈병(당뇨병)을 앓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흔히 대식풍습과 관련돼서 거론되건 하는 아랫사람에게 상 물리기라고 해서 왕 수랏상 뿐만 아니라 양반들도 손님이 오면 상다리가 부러져라 내오는 게 주인의 예의였고 주인이나 손님이나 배가 터져라 먹는 게 예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잔뜩 먹고도 남도록 음식을 많이 차렸는데 주인과 주빈의 식사가 끝난 후 대궁과 잔반은 양반을 수행해 온 아랫사람들에게 그대로 내려가 그들도 배터지게 먹었다. 특히나 궁중이나 민간에서 큰 잔치를 열 때에는 며칠동안 음식물을 엄청난 양으로 미리 준비하는데다 음식을 직접 맛보기보다는 보기 좋게 전시해놓는데 더 치중했기 때문에 정작 잔칫날에는 준비해둔 음식이 모두 굳어버리거나 뻣뻣해져서 먹을만한 것이 별로 없었다. 잔치에 온 하객들은 이 꾸드러진 음식을 넣어서 데운 전골[27]과 술 몇 잔을 먹고 돌아가는 것이 다반사였다.[28] 이렇게 남은 음식들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대신과 하객들의 집으로 옮겨와 집안 식구들과 하인들이 나누어 먹을 수 있게 했다. 나랏님의 은혜와 잔치 주최자의 감사를 고루고루 나누어 맛보는 의미였다.[29]
이러한 사치스러운 식습관에 문제의식을 느낀 것은 조선임금도 마찬가지여서 영조 또한 기존의 수랏상에서 반찬 가짓수를 두세 가지로 제한하였고 그마저도 장 종류[30]에 그치는 대단한 검소한 습관을 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그 덕인지 영조는 역대 국왕들은 물론이거니와 조선 평균을 놓고 봐도 상당히 장수했다. 이완용[31] 또한 이러한 낭비습관을 지적하면서 식단을 샌드위치로 바꿨다고.
그러나 양반이나 임금들도 통상 하루 2끼를 먹었고(여름은 3끼) 중간에 간식으로 국에 밥 말아서 한두 끼 때우는 게 일반적이었으므로 통설이나 편견과 달리 그렇게 많이들 먹은 건 또 아니라고 한다. 손님이 늘 오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점심이라는 말도 '점(點)을 속(心)에 찍는다'는 말이였고 그 말마따나 굉장히 간소하게 먹었다. 그리고 과거만큼은 아니지만 '''요새도 노가다판이나 조선소의 함바집[32]이나 식당에서는 식사량을 일반인과 달리 푸짐하게 준다.'''[33] 확실히 사진에서 나온 저 정도는 좀 많긴 한데, 조선소 같은 육체 노동이 잦은 곳에선 일반인의 2~3배 가량의 식사를 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설계직 모임과 생산직 모임이 옆에 붙어서 밥 먹는 양을 비교하면 확실한 차이가 보인다.
실제로 한국 음식이 유달리 염분 면에서 말이 많은 까닭은, 이것이 육체 노동에 종사하던 사람들을 위한 식문화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원래 전세계를 막론하고 과거에는 음식의 염분 함유량이 상당했다. 식품을 장기 보존할 방도가 마땅치 않아서 소금에 절이는 게 그나마 가장 좋은 보존법이였기 때문.[34] 그나마 서양의 경우는 제국주의 시절 식민지를 개간하면서 식민지로부터 삥 뜯은 식자재를 잔뜩 들여와 식자재가 풍부해지자 장기보존의 필요성이 줄어들면서 점차 염분을 줄여나갔지만[35], 오랫동안 한반도라는 한정된 영토 안에서 식자재를 자급자족해야 했던 한반도는 그 시절 식문화가 그대로 유지되면서 아직도 근대 시절 염분 함유량을 유지해 오늘날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나마 이게 육체 노동이 대다수이던 조선 시대에는 먹는 만큼 다 빠져나가서 문제가 덜했지만 육체 노동이 줄어든 현대에도 같은 양의 염분을 섭취하니 문제가 커진 것.
또 이 같은 대식의 영향 덕분인지는 몰라도 한국인들의 체격은 중국인이나 일본인들보다 더 큰 편이다. 조선시대 때만 하더라도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 전투 유적지인 동래읍성에서 발굴된 조선인 유골들을 분석해 본 결과 16세기 당시 조선인 남성의 평균 신장은 대략 164cm였고 여성의 평균 신장은 대략 153cm였다고 한다. 그런데 에도 막부 시절 일본인 남성의 평균 신장은 155cm 정도에 불과했고 여성은 더 작아서 144cm 정도였다고 한다. 19세기 말에 조선을 방문했던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는 "한국인들은 중국인이나 일본인과 닮지도 않았고 체격이 크고 훨씬 잘 생겼다."고 했으며 당시 한국인 남성의 평균 신장은 163.4cm 정도였다고 적고 있다. 이로 볼 때 조선시대 전체에 걸쳐 남성들 평균 신장은 대략 163~164cm 정도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1937년 일제 징병 검사 데이터를 보면 함경도 지역의 경우 평균 신장이 170cm에 육박하는 것으로 나와 있다. 반면, 일본인들의 경우 1937년 징병 검사 데이터에서도 남성들의 평균 신장이 158~162cm에 불과하였다. 중국인들의 평균 신장에 대해서는 자료가 부족하고 지역별로 편차가 큰 편이라 자세하진 않지만 한, 중, 일 동양 3국을 모두 방문한 서양 사람들이 하나같이 한국인들이 중국인, 일본인보다 체격이 더 크다고 기록을 남긴 것으로 보아 대체로 우리보단 좀 작았던 듯하다. 현재도 아시아 전체를 통틀어서 평균 신장이 제일 큰 민족은 한국인이다. 아마 대식의 영향도 어느 정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당대 기록을 보면 산업화 전 다른 나라에서도 상당한 대식을 했고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와 기록했을 시점에선 한민족은 아직 식사를 많이 하는 편이였고 서양인들은 그 정도가 이미 많이 완화 되어 조선인들이 대식한다고 기록했을 거라는 주장도 있다.
서양만 보더라도 아일랜드의 농민들이 하루에 약 8파운드(3.6kg)의 감자를 먹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중세 영국의 농부는 하루 3,500칼로리에서 4,000칼로리의 음식을 먹었다고 한다.출처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하루에 고기를 5kg 씩 먹어치워서 백인들이 놀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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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관련 문서


[1] 2020년 현재 음식점 공기밥은 의도적으로 주식의 양을 줄이기 위해(공깃밥 항목 참조) 일본식 표준을 써서 200cc 남짓[2] 쌀 3말은 삼국시대 기준 6kg[3] 식사를 줄였다 해놓고 오히려 양이 늘어났기 때문에 앞의 기록을 '1끼'에 쌀 3말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 번역은 이거다.[4] 그래서 현재 내륙 지방인 마한, 백제 영토들 상당수가 당시에는 해안가였다.[5] 4군 6진을 개척한 조선왕조 시절과 고구려 시절 만주의 자연환경의 차이는 너무 달랐기 때문에 조선 왕조는 고구려 시절과는 달리 농토로 이용하기 힘든 척박한 땅으로 변한 만주에 그렇게 큰 욕심을 내지 않았을 법하다.[6] 춘추전국시대 단위로 한 말은 3L로 현대기준 대략 밥 15공기 정도 정도 고기 10근은 2.2kg 현대 기준으로 15인분 정도 이 정도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다[7] 오늘날의 홉을 생각하면 5배씩이나 될 것으로 오해할 수 있는데, 조선 시대의 한 홉은 지금 홉의 약 1/3에 불과했다. 조선 시대의 한 홉은 약 60ml, 지금의 한 홉은 대략 180ml인데, 지금 쓰는 홉은 1902년 일본의 것에 맞추어 개정된 단위인 것. 따라서 지금 한 공기인 210ml에 비교해 볼 때 당시의 7홉은 약 420ml가 된다.[8] 물론 340년 뒤에는 진짜로 식량이 부족해지자 정신력을 끌고 와 갖다붙였다. 그리고 먹을게 없으면 풀을 뜯어먹으라는 장군도 생겼다.[9]복숭아를 현재의 개량된, 과육이 많은 복숭아와는 거리가 먼 지름 3cm 정도의 야생 개복숭아(돌복숭아)가 아닌가 추증할지도 모르지만 그럴리 없다. 현재 우리가 먹는 개량종은 1900년대 초에 일본을 통해 들어왔기 때문에 그 이전의 복숭아가 전부 개복숭아였을 거라는 착각 때문에 생긴 오류다. 현재의 복숭아가 일본에서 들여온 품종인 이유는 그게 가장 생산량이 많고 당도가 높은 등 상품성이 뛰어나기 때문일 뿐 이전에 먹던 복숭아도 크기 자체는 지금의 복숭아와 비슷했다. 중국에서는 이미 기원전에 이미 현재의 복숭아처럼 품종 개량된 복숭아를 먹었다. 하지만 실제 토종작물을 기르는 학자들이나 농부들은 토종참외도 종류가 다양하고 일부는 개량종에 버금가는 크기이기도 해서 단정짓기 힘들다고. 단순히 현대인 기준에서 작은 야생참외를 먹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 이미 조선 후기에 참외나 과일을 재배하고 공급하는 체계가 갖춰져있던 상태이기 때문에 야생의 참외라고 단정짓는 것은 역으로 심각한 오류를 초래할 수 있다. 애초에 이런 기록을 남긴 이들이 전부 서양인들인데 그들이 본 과일이 그렇게 작았다면 그런 기록을 남기지 않았을리가 없다.[10] 1인당 마늘 섭취도 1위다.[11] 지금의 오키나와.[12]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5대 교구장. 1866년 병인박해순교,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한국 103위 순교성인 중 하나.[13] <조선사 입문을 위한 노트 (Notes pour l`introduction a l`histoire de Coree, Daveluy, 1818-1866)>[14] 지금도 1인 1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닭의 사육이 산업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닭은 씨암탉이거나 노계, 즉 지금 치킨집에 납품되는 수준의 닭보다 훨씬 오래 키워서 덩치가 크고 육질이 질겼다고 봐야 한다. 토종닭을 생각하면 된다.[15] 이 부분은 다블뤼 본인의 개인적 주관에 의해 서술되었거나 혹은 카더라 통신을 확인없이 서술한 것이다. 다블뤼는 당시 국왕이었던 고종(대한제국)은 커녕 흥선대원군도 만날수 없었다.[16] 주한 미국공사관 대리공사로도 복무했다.[17] 당시 그가 받은 반상은 음식이 17개나 기록되어 있었는데, 밥이나 국, 식초, 김치를 제외하면 11첩 반상으로 거의 수라상에 올라가는 12첩 반상수준이여서 이 정도는 조선인 기준으로도 많은 수준임을 감안해야 한다.[18] 그나마 서울은 한강이라는 커다란 강도 있고 조금나가면 바닷가지만 중부내륙지방은 살면서 해산물을 구경도 못해봤을 가능성도 높다.[19] 17~18세기, 즉 조선 후기에 해당되는 시기에 유럽은 종자 하나를 심으면 7알 정도의 수확을 얻었고 동시대 동아시아는 50알이 넘는 수확이 가능했다.[20] 현대 스포츠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소고기를 좋아할 만한 이유가 있다. 체력과 지구력을 중시하는 종목에서는 기름기가 많은 돼지고기보다 소고기를 권장하는 데, 힘 쓰는 일이 많은 농민이라고 예외는 아닐 것이다. 차범근만 해도 독일에서 선수 생활을 할 때, 밥만 먹고는 훈련을 감당하기 힘들어 독일인 선수들처럼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소고기를 꾸역꾸역 씹어 체력을 보충했다고 한다.[21] 근데 이는 단백질이란 개념조차 없던 18세기에 '''밥이나 고기나 배에 들어가면 똑같다''' 수준의 그릇된 생각에 나온 말이고, 단백질을 충분히 섭취하려면 곡물과 콩 외에도 매일 200g 이상의 고기나 생선을 먹어줘야 한다.[22] 다만 국가별 학계별로 이 세율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다. 일본 학계의 경우 농민들의 자체적인 개간과 토지 조사사업의 미비로 인해서 실질 세율이 30%대까지 줄어들었다고 주장한다. 반면 한국과 중국의 경우 후대로 갈수록 잡세가 이것저것 많이 붙어서 법적으로는 10% 정도였던 것이 30% 이상으로 늘어났다는 것이 중론이다. 다만 일본의 경우 일본 내의 주장과 달리 마비키 같은 악습이 지속적으로 유지된 것을 보면 정말로 세율이 얼마나 유의미하게 줄었는지 의심 받고는 있다.[23] 비슷하게 한국어에서도 '물어뜯다'라는 표현을 쓴다.[24] 기독교에서는 식탐을 포함한 탐욕을 죄로 여겼다.[25] 또한 러시아나 만주지역 등 한반도보다 비교적 습기가 덜하고 추운지역이면 음식을 보관하기 용이한 점도 한몫 했다. 실제 위에 선교사가 쓴 글을 알겠지만 한반도의 습한 기후 때문에 음식이 쉬이 상했기 때문에 음식을 보관하다 버리느니 그냥 먹어 치운것도 대식의 이유 중 하나였다.[26] 항목에도 나와 있듯, 쌀은 타 주식곡물에 비해 단위면적당 생산력이 높지만, 그만큼 물과 인력을 많이 갈아넣어야 한다.[27] 이 전골에서 유래한 음식이 열구자탕이다.[28]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속담이 여기서 나왔다는 설도 있다.[29] 물론 이러한 풍습은 한민족만의 독창적 풍습은 아니다. 서구에서도 궁중 연회 시 정량보다 좀 더 많이 준비해 연회가 끝난 뒤 참석한 귀빈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이로 인해 궁중의 식문화가 귀족사회에 전파될 수 있었다.[30] 영조는 고추장일화로 유명하기도 하다.[31] 그 매국노 맞다.[32] 원래는 飯場집(한국식 한자음으로는 반장집)이나 일본식 한자음으로 함바집이라고 하는 게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33]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육체 노동강도가 일반회사 사무직의 4~5배, 공장생산직의 2~3배를 가뿐히 넘기는 수준이다.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선 엄청난 양의 칼로리가 필요하다. 건설노동자의 경우 노가다의 꽃이라 불리는 유로폼 운반과 벽돌운반 업무의 경우 하루 5,400Kcal 이상을 소모한다. 건설직 일과시간에 법적으로 오전 참, 오후 참을 합쳐서 간식시간을 30분씩 주는 걸 법으로 괜히 정한 게 아니다. 또는 군필자들은 훈련병 시절 짬밥을 진짜 위에 구멍 뚫린 마냥 신들린 듯 퍼먹어도 살이 찌기는커녕 쭉쭉 빠지는 것을 경험해 봤을텐데 , 군대 훈련이 그만큼 칼로리 소모가 높기 때문이다.[34] 대표적인 게 서양의 염장고기인데, 이건 그걸 만들어 먹던 서양 사람들 기준으로도 너무 짜서 '''바닷물에 헹구어서 먹을 정도'''였다. 그 짜디 짠 바닷물로 '헹굴' 정도라면 얼마나 짠 건지는 안 봐도 비디오.[35] 이것도 틀린 게, 보존을 위한 염장 처리는 줄었지만, 음식 조리할 때 소금을 팍팍 치는 건 외국도 마찬가지다. 당장 미국이나 유럽패스트푸드(예를 들면 KFC, 파파이스 등)나 과자류(국내에 유통되는 것 포함)를 보면 염분이 상당히 높은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