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폴란드 관계
German - Polish Relations
deutsch-polnische Beziehungen
Stosunki polsko-niemieckie
1. 개요
바로 옆나라인 독일과 폴란드 사이의 외교관계. 중세까지는 독일과 폴란드의 관계는 신성 로마 제국에 한해 데면데면한 정도였다. 그러나 현대 독일의 전신인 독일 기사단국 - 프로이센 왕국은 건국 직후부터 폴란드와 지속적으로 마찰을 빚었다. '''프로이센에 기반한 현대 독일과, 프로이센과 죽어라고 싸워가며 나라를 유지했던 폴란드의 악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독일과 폴란드 양국은 서로 국수주의라든가 민족적 자부심이 아주 쩔어주는 이웃나라다. 그러다보니 독일과 폴란드는 그야말로 '''피를 피로 씻는 전쟁의 역사'''였다. 튜튼 기사단이 존재하기 시작한 9세기 이후 1991년 통일 독일-폴란드 제3공화국 간 국경 획정 및 양국 우호에 관한 조약을 최종 확정하기까지 '''1,000년 넘게''' 독일과 폴란드는 죽어라고 싸웠다. 결국 '''독일은 폴란드 분할과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2차례나 폴란드를 멸망시켰다'''. 때문에 폴란드는 독일이 2차례의 세계 대전에서 패망하고 나서야 간신히 독일에서 떨어져나왔다.
폴란드는 국가 입장에서 한 번 당하기도 어려운 국가 멸망을, 독일이 2번이나 자국을 멸망시켜버리니 감정이 좋을 리가 없다. 이런 악연이 워낙 깊다 보니 독일과 폴란드의 관계를 사자성어로 하면 '''사생결단'''. 그나마 21세기 들어서는 굉장히 많이 호전되긴 했지만 여전히 독일과 폴란드는 상황에 따라 국민감정이 극과 극을 오간다. 특히 난민 문제와 폴란드인 이주민 노동자, 유럽연합 보조금 문제때문에 EU 지도국 독일과 EU의 이단아 폴란드 간 충돌이 많다. 게다가 폴란드의 집권 여당인 법과 정의당이 갈수록 독재를 하고 인권 탄압에 나서자,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법과 정의당을 비판하는 등 정치권 갈등도 있다.
독일-폴란드 관계는 한일관계와도 많이 비슷한 편이다. 한국과 일본 간 전쟁 자체는 독일-폴란드마냥 거의 매년 다툰 수준은 아니라서 좀 덜하지만,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지배한 경험이 있는 것이 비슷하다.
2. 역사
2.1. 신성 로마 제국 - 폴란드 영지
독일 전반의 역사라 할 수 있는 신성 로마 제국과 폴란드의 관계는 꽤 양호한 편이었다. 960년 독일 동부에 폴란드라는 나라가 등장하면서 당시 신성 로마 제국과 바로 마찰을 빚었다. 결국 965년 신성 로마 제국이 폴란드 영지의 독립을 인정하고 966년 폴란드도 가톨릭 국가가 되면서 분쟁은 마무리되었다.
중세 기간 동안 신성 로마 제국과 폴란드는 몇 차례 분쟁을 겪기는 했으나 뚜렷한 갈등관계는 보이지 않았다. 12세기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의 폴란드 침공 이후 두 나라가 분쟁을 벌인 사례는 없다. 두 나라 모두 중앙집권이 덜 되어 서로보다는 내부의 적이 더 위협적인 상대였기도 하고, 신성 로마 제국은 서유럽의, 폴란드는 동유럽의 적들이 더 위협적이었기 때문이다. 근세에도 두 나라 간의 관계는 비교적 원만한 편이어서, 30년 전쟁, 대홍수, 대튀르크 전쟁 등에서 두 나라는 서로 동맹을 맺고 공통의 적에 대항해서 싸웠다. 그러면서도 신성 로마 제국과 폴란드 간 무역 문제는 서로 계속 충돌을 일으켰다. 폴란드는 농산물을 수출하고 독일의 공업품을 수입했는데, 폴란드는 슐라흐타(귀족)들의 반발로 독일산 공산품에 관세를 못 매긴 반면, 독일은 폴란드산 농산물에 관세를 매겼기 때문이다. 덕분에 폴란드는 계속해서 독일한테 무역적자를 봤고 독일-폴란드 간 무역분쟁이 잦았다.
2.2. 독일 기사단국/프로이센 왕국 - 폴란드-리투아니아
반면 현대 독일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프로이센 왕국은 역사적으로 내내 폴란드와 마찰을 빚었다. 역사적인 두 나라 간의 악감정은 주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1236년 세워진 독일 기사단국은 15세기 이후 급격하게 쇠퇴했는데 과도하게 영토를 확장하다 보니 주변 국가들의 어그로를 단단히 끈 게 컸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동군연합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성립되자 기사단은 폴란드와의 전쟁을 결의했고, 결국 1410년 벌어진 그룬발트 전투에서 기사단국은 폴란드에 대패를 당해 기사단국은 폴란드의 봉신국이 되었다. 그 후 1525년 독일 기사단국은 루터교회로의 개종을 선언해 프로이센 공국으로 국호를 바꿨고, 공가가 단절되면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공작을 겸했다. 대홍수를 기회로 삼아, 1660년 프로이센 공국은 올리바 조약으로 폴란드와의 봉신관계를 청산했다.
뒤이어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과 프로이센 공국을 합쳐서 프로이센 왕국으로 개창했고,[1] 명군들의 출현으로 프로이센은 유럽의 강자가 되었다. 반면 폴란드-리투아니아는 권력이 지방의 귀족인 슐라흐타들에게 집중되었다. 강력한 왕권을 갖춘 왕을 경계한 슐라흐타들은 연방내에 강력한 새로운 왕조를 세울 걱정이 없는 외국인 후보자를 왕으로 선출했다. 이에 따라 외국인 출신의 국왕은 입법부인 세임과 극한 대립에 이르게 되었고 결국 이런 혼란은 연방을 유럽의 약소국으로 추락시키게 되었다.
2.3. 폴란드 분할
18세기 들어 폴란드-리투아니아 내부 정세가 혼란해지자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제국을 끌어들여서 폴란드를 멸망시킬 계획을 세운다. 폴란드는 가장 큰 위협이었던 러시아에 대항해 프로이센과의 동맹을 추구했으나 프로이센은 뒤통수를 쳤다. 1772년 제1차 폴란드 분할로 폴란드의 땅 1/3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3국이 따먹었고, 1791년 폴란드가 헌법 제정으로 나라를 안정시키려 하자, 1795년 제3차 폴란드 분할로 '''독일은 폴란드를 완전히 멸망시킨다'''.
2.4. 폴란드 분할 ~ 제1차 세계 대전
독일은 동프로이센과 서프로이센 주[2] 에 폴란드 점령지를 배분했고, 대대적인 민족 말살정책을 통해 독일에 동화시키려 했다. 이에 대해 폴란드인들의 저항은 거셌다. 폴란드인들은 나폴레옹 전쟁에서 프랑스를 도와 바르샤바 공국을 세워서 독립을 시도했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파멸하자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로 돌아간 폴란드는 더욱 가혹한 박해를 받았다.
2.5. 바이마르 공화국 - 폴란드 제2공화국
제1차 세계 대전의 결과 베르사유 조약으로 1918년, 1795년 이후 '''123년만에 폴란드 제2공화국이 독일에서 떨어져나가 독립'''했다. 그러나 독일은 폴란드를 외국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은 계속해서 단치히 자유시, 상부 슐레지엔, 폴란드 회랑을 내놓으라며 떼를 썼다. 폴란드 입장에서 베르사유 조약에 "바다로의 출구"가 적힌 상황에 독일의 이런 요구는 결코 들어줄 수 없었다. 그러자 1925년, 독일은 독일-폴란드 무역 전쟁을 일으키며, 독일, 폴란드 경제를 '''자해'''하면서까지 영토를 내놓으라는 요구를 계속했다. 무역 전쟁 와중에 세계 대공황이 터지자 독일과 폴란드는 계속해서 디플레이션 상황이 악화됐다.
2.6. 나치 독일 ~ 제2차 세계 대전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이 독일에 집권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히틀러는 바이마르 공화국과 달리 폴란드에 유화적인 행보를 보였다. 1934년 폴란드의 실권자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와 협상을 하여 서로간의 불가침조약과 독일-폴란드 자유무역협정을 성사시킨 것이다. 폴란드 제2공화국은 소련과 독일 양 강대국 사이에 끼인 입장이었으므로, 히틀러가 무역분쟁을 끝내자고 할 때 환영했다.심지어 1938년 체코슬로바키아를 삥뜯는 뮌헨 협정을 할 때 폴란드 제2공화국에 하부 실롱스크의 톄신 지방을 가져가라고까지 하는 히틀러였다. 그러나 히틀러는 단지 침략 야욕을 일시 연기하기 위해 폴란드에 잠시 유화책을 썼을 뿐이었다. 다음해인 1939년, 히틀러는 '''숨겨왔던 본색'''을 드러내며 단치히, 폴란드 회랑, 실롱스크를 내놓으라고 협박을 시작하자 폴란드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꼴이 되었고, 결사 반대했다. 그러나 1939년 8월 25일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은 독일과 소련은 1939년 9월 1일,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켜 폴란드 침공을 통해 '''폴란드 제2공화국을 멸망시켰다'''.
독일은 구 프로이센 지역의 폴란드 영토는 나치 독일 직할령으로 편입했고, 그 이외 지역은 폴란드 총독부라는 '''괴상한 이름'''[3] 의 체제가 들어서며 대대적인 유태인 홀로코스트의 중심지로 삼았다. '''아우슈비츠, 트레블링카, 베우제츠, 소비보르, 헤움노, 마이다네크''' 등등 대대적인 인종청소 기지를 세우고 유태인을 시작으로 폴란드인, 러시아 포로 등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을 시행한다.
폴란드 망명 정부와 망명 유태인들이 주도한 1943년 4월의 바르샤바 게토 봉기와, 1944년 8월의 바르샤바 봉기를 무자비하게 진압한 히틀러는 더욱 폴란드를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그러나 1944년 12월, 독소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소련의 스탈린이 폴란드에 진주하여 폴란드를 소련 지배하로 '''접수'''한다.
2.7. 냉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소전쟁을 이끌었던 소련 이오시프 스탈린의 요구로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의 영토와 단치히, 동프로이센은 소련의 위성국인 폴란드 인민 공화국에 들어갔고, 반대로 폴란드의 빌노, 핀스크 등 커즌 선 동쪽과 르부프, 갈리치아 일대는 죄다 소련이 삥을 뜯었다.(...)
2.7.1. 서독 - 폴란드 인민 공화국
전후 서독은 콘라트 아데나워를 위시로 오데르-나이세 선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에 따라 서독과 폴란드의 관계는 껄끄러웠다. 그러나 1970년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동방정책을 펼치면서 관계가 크게 개선되었다. 빌리 브란트는 폴란드와 바르샤바 조약을 맺고 동독-폴란드 국경을 인정했다. 물론 이 조약으로 빌리 브란트는 매국노란 소리를 정적으로부터 들어야 했지만..
2.7.2. 동독 - 폴란드 인민 공화국
당연히 동독 역시 처음엔 오데르-나이세 선까지 폴란드가 가져가는 것에 반대했으나 이오시프 스탈린에 의해 동독과 폴란드 인민 공화국은 반 강제적인 협력관계를 맺게 된다. 1950년 7월 6일 폴란드와 동독은 국경 협정을 맺었다. 유제프 치란키에비츠 폴란드 총리와 오토 그로테볼 동독 총리가 서명한 협정의 정식 명칭은 ‘폴란드와 독일 사이에 현존하는 국경을 확정하는 협정’. 줄여서 ‘평화와 우정의 국경협정’이라고 불렸다. 물론 이름과 달리 이 협정은 우정과 신뢰로 맺어지지 않았다. 동독은 소련의 압력에 굴복한 것이기 때문이다. 폴란드도 내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강철의 대원수가 까라면 까야지 별수 있겠는가..
동독 입장에서야 오데르-나이세 선을 인정하고 싶었을 리 없고, 폴란드 입장에서는 더 복잡한 문제가 끼어 있다. 폴란드 입장에서 평화-우정의 협정에서, 소련이 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빌노를 뜯어간 건 그렇다 쳐도 르부프와 갈리치아는 빼도박도 못하는 폴란드 땅인데 이걸 소련이 강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실적 이유도 있었는데, 폴란드 입장에서 갈리치아 일대는 가난한 지역이긴 했지만, 폴란드 농업의 60%를 차지하는 비옥한 땅이었다. 독일 땅을 얻은 대신 갈리치아를 소련에 빼앗기자 폴란드는 식량 부족국가가 되어서 만성적인 식량난과 물가 상승을 겪게 된다. 1956년 포즈난 항쟁, 1970년 봉기, 1981년 폴란드 연대노조 등 결국 공산 정권 붕괴 원인이 되기도.
2.7.3. 서독 - 폴란드 망명 정부
폴란드 망명 정부는 서독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다. 폴란드 망명 정부는 독일연방공화국이라는 체제가 들어서는 것 자체가 나중에 나치 독일의 재림이 될 수 있다고 연합국들에 계속해서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의 연합국들은 어딜 하나 폴란드 망명정부의 말을 들어주는 데가 있어야지... 결국 1960년대가 되어서야 서독의 존재를 인정했다.
2.7.4. 동독 - 폴란드 망명 정부
동독 입장에서는 폴란드 인민 공화국만 존재했으므로 폴란드 망명 정부와는 접촉이 없었다.
3. 동서독 통일 - 폴란드 제3공화국
1000년 넘게 피를 피로 씻는 독일과 폴란드의 관계는 동서독 통일과 폴란드 제3공화국 수립 이후 거의 사상 처음 맞는 평화기를 보내고 있다.
1990년 동서독 통일 이후 독일 정부는 폴란드와 다시 국경에 대한 협약을 맺기로 했다. 독일은 과거 동부 독일의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서독 기본법 23조를 폐지하고, 오데르-나이세 선을 폴란드-독일 국경으로 확정했다. 이 조약은 1991년 6월 체결된 우정 조약과 함께 1992년 1월 16일 발효됐다. 우정 조약에서는 국경 양쪽에 살고 있는 독일 및 폴란드계 소수의 문화적 및 정치적 권한 등을 보장했다. 대표적인 유명인이 바로 독일의 축구선수 미로슬라프 클로제인데, 아버지가 독일계 폴란드인인데 독일인으로 정착한 케이스다.
폴란드 제3공화국 수립 이후, 독일과 프랑스 정부가 바르샤바 지하철 건설에 대해 재정 및 기술 지원을 하였다. 이것이 바로 독일-폴란드 간 경제 협력의 시작이었다.
폴란드는 현재 1999년 북대서양 조약기구, 2004년 유럽 연합에 가입하는 등 친서방 정책을 고수하면서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친미 국가다. 미국 입장에서는 폴란드가 러시아를 견제할 수 있는 최전선이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러시아 견제라는 동일한 목표를 가진 독일과의 관계는 대체로 우호적인 편이다. 사실 폴란드 뿐 아니라 냉전 이후 대부분의 동구권 국가들이 북대서양 조약기구와 유럽 연합에 동시에 가입했기 때문에 러시아의 우방국은 유럽에서 사실상 벨라루스를 빼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근래 독일 기업들이 인건비가 저렴한 폴란드에 많은 공장을 세우고 있다. BMW, 포르쉐 등 자동차 기업과, 독일 머크 등의 생산 공장이 폴란드 포즈난 및 그단스크, 루블린 등에 위치해 있다. 폴란드에서는 반대로 폴란드 영화가 독일 영화 시장으로 대거 수출되고 있다. 폴란드 영화들은 베를린 영화제에서 상을 많이 받기도 했다.
물론 양국간의 역사가 역사인지라 다소 정치적인 목적으로 폴란드가 함께 침략받았던 그리스와 목소리를 높여 독일 정부가 나치 점령 피해에 대해 보상하라고 유럽의회에서 주장하기도 했지만 독일정부는 이미 “배상은 법적으로, 정치적으로 완전히 마무리됐다”며 선을 긋고 있다.[4]
독일의 하이코 마스 외무장관은 2019년 8월 1일에 바르샤바 봉기 75주년 기념식에 참석해서 폴란드에 또다시 사죄를 했다.#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을 소아성애자처럼 보도한 독일 타블로이드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4. 관련 문서
- 독일/외교
- 폴란드/외교
- 유럽 연합
- 독일/역사
- 폴란드/역사
- 상임이사국[5]
- 독일/문화
- 폴란드/문화
- 독일/경제
- 폴란드/경제
- 독일계 폴란드인 / 폴란드계 독일인
- 독일인 / 폴란드인
- 독일어 / 폴란드어
- 대국관계일람/유럽 국가/중부유럽 국가
[1] 프로이센 왕국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이 중심이 된 국가이지만,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이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국이라 멋대로 왕국으로 승격시키지 못하고 제국 외부의 프로이센 공국을 왕국으로 승격시켰다.[2]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도 서프로이센 주는 있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의 결과 서프로이센 주의 땅 거의 전부가 폴란드에 귀속되었다. 게다가 동서독 분단으로 서프로이센주의 관할구역이 전멸한다. 서독에서는 서프로이센 주를 명목상 유지했으나,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에 따라 서프로이센 주를 폐지하고, 동서독 통일 때 잔여 지구를 브란덴부르크 주에 통합해서 완전히 없앴다.[3] 브라이언 포터-슈치, 폴란드 근현대사, 오래된생각. 2017.[4] 서독은 1960년 그리스에 1억1500만마르크(지금 가치로 약 3000억원)를 지급했다. 독일은 또 소련의 요구로 오데르-나이세선 동부 영토를 폴란드에 넘긴 뒤 1953년 폴란드가 동독에 대해 배상권을 포기했다는 것, 그리고 통일 뒤 폴란드 강제노역 피해자들 및 폴란드 전쟁고아들에게는 일부 배상을 했다는 점을 내세운다. [5] 독일의 상임이사국 진출에 대해 폴란드는 반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