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생애
1. 생애 초기
1.1. 내력과 출생
1893년 청나라 후난성 샹탄에서 농민 마오이창 과 그 부인 원(文)씨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부농으로 취급될 정도로 부유한 편이었다. 아버지 마오이창 이 자수성가를 이뤄 상당한 부자인 부농 집안의 출신이다. 오늘날로 따지면,아무리 못해도 중소기업 의 오너 수준은 되며 넉넉히 잡으면 중견기업 의 오너 가족은 되는 수준이었다.
모택동 집안은 대부분의 백성들이 가난한 장삼이사 들의 시대인 '''청 말기에''' 20마지기를 가진 부농 집안이었다. 한 마디로 오늘날의 건물주에 비견되는 '''지주 집안 출신'''.1마지기는 평균 200평 정도 된다.https://www.google.com/search?q=1%EB%A7%88%EC%A7%80%EA%B8%B0+%EB%AA%87&oq=1%EB%A7%88%EC%A7%80%EA%B8%B0+%EB%AA%87&aqs=chrome..69i57j0j69i61.4071j0j15&sourceid=chrome&ie=UTF-8 때문에, 모택동은 후술할 젊은 시절부터 학교를 세우고 교장 노릇을 할 수 있었다. 마오이창 참고.
14살 때 뤄씨 성을 가진 여인과 혼인하였으나, 이 결혼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따른 것이라서 결혼을 거부하고 가출하였다. 그 뒤 장사의 주성 중학에 입학하였고 신해혁명이 발생하자 혁명군에 잠시 가담했다가 후난성 공립 고등 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후난 제1사범 학교를 졸업한 후 1918년 스승이자 후의 장인이 된 양회중 교수를 따라 베이징대학에서 약 2년간 보조 사서로 근무했다.
1.2. 공산주의를 접하다
이때 공산주의 사상을 처음 접하고 많은 독서와 토론, 강연 등을 통해 사상적 기초를 닦았다. 사실 이때는 공산주의를 접하기는 했지만 본격적인 마크르스주의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아나키스트에 가까웠으며 심지어 이때 마오쩌둥은 통일된 중국이 악의 근원이라면서 중국을 27개의 소중국으로 나누자는 글까지 썼을 정도였다. 후에 공산당에 입당한 이후로도 아나키즘 서적을 많이 탐독했으며 결국 평화투쟁에 한계를 느끼고 무장투쟁에 나섰을때 즈음에 아나키즘 이론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되었기는 했지만, 마오이즘 이론에 아나키즘 이론의 흔적이 남아있게 되었다.
어쨌든 청년시절 마오쩌둥은 정식 학생이 아니었지만 베이징대학 철학과 수업에 들어와 계속 청강을 했다. 한 번은 정식 학생도 아니고 사투리를 쓰는 말단 직원이 자기 수업을 듣는 것을 고깝게 보던 철학과 교수 후스가 수업 시간에 들어온 마오쩌둥을 학생들 앞에서 "자네는 좀 나가주게"라고 모욕을 주어서 쫓아내었다. 이후 국공내전 당시 베이징대학 총장을 맡고 있던 후스는 공산군이 입성할 무렵 마오쩌둥으로부터 "과거는 잊어버리고 자리를 보장할 테니, 대만에 가지 말고 남아달라"는 대인배적인 권유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후스는 "마오쩌둥과 공산당은 못 믿는다"며 이를 거절했고[1] 미국으로 떠난 뒤, 1960년대 타이완으로 이주한다.[2]
후스의 말처럼 17년 후에 문화대혁명의 본격적인 시작은 베이징대학 철학과에 붙은 교수를 비판하는 대자보로부터 시작했고[3] , 당시 철학과 교수들은 홍위병 제자들에게 엄청나게 고초를 겪었다.[4] 이들 중 슝스리 같은 일부는 박해를 견디다 못해 자살하기까지 했다. 후펑, 라오서, 량수밍 등도 가혹한 운명을 맞이하였다[5] . 후스도 아마 남았으면 비슷한 운명을 겪었을 것이다.[6] 대륙에 남아있던 그의 차남 후쓰두(胡思杜) 또한 1957년 반우파 투쟁에 휘말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후스의 실용주의 사상은 마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어쨌거나 후스는 이후 중국에서 장제스, 쿵샹시, 쑹쯔원 등과 함께 국민당 정권을 상징하는 구시대적 악당 중 하나로 낙인찍혀 중국에서 조리돌림 당하는 신세가 된다.
1.3. 귀국과 양카이후이와 결혼
고향으로 온 이후에는 그동안 사망한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고 학교 사업도 벌여서 교장이 되어 꽤 돈을 벌게 된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안정되자 그동안 사귀던 양 교수의 딸인 양카이후이와 결혼하게 된다. 계급으로 치면 그는 부르주아 계급이었다. 하지만 호남성을 무력으로 점령한 북양군벌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 반정부 성향이 되었으며 공산주의자 친구 차이허썬 등의 영향으로 공산주의자가 되어 1921년 중국 공산당 창당에 호남성 대표로 참여하여 창립 멤버가 되었다. 여담으로 이때 창립 멤버 21명 중에 1949년 중국 공산당이 정권을 잡을 때까지 공산당에 남아있던 사람은 마오쩌둥과 둥비우 딱 2명 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사망하거나 혹은 국민당이나 일본 측으로 전향했다.
2. 청년 시절
고향인 호남성으로 돌아온 후 동생 마오쩌민, 마오쩌탄 등을 공산당에 입당시켜 농민운동을 전개하였고 호남독군 푸량쭤, 장징야오 등이 호남성의 민의를 가혹하게 탄압하며 독재를 펼치자 이들을 몰아내는 호남성의 반장운동에 참여했다. 1924년, 코민테른의 지시와 중국 공산당 대회의 결정으로 1차 국공합작이 결성되자 1924년 1월에 개최된 중국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 37호라는 이름으로 참석하여 국공합작에 반대하는 국민당 우파들을 말빨로 몰아붙혔고 국공합작이 결성됨에 따라 국민당에 가입하였다. 이후 국민당 정부의 명령을 받아 후난성의 향촌 조사 임무를 맡게 되었다. 이때부터 마오쩌둥은 농민의 혁명 역량을 주목하게 되었다. 이후 중앙집행위원회 후보위원, 선전부장 대리, 농업부장 등을 맡는 등 꽤 잘나갔으며 이 때문에 서산회의파에서 마오쩌둥을 저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력을 거치면서 대표적인 농업전문가가 되었으며 펑파이 등과 함께 중국 공산당 내부에서도 유별나게 농촌혁명을 강조하는 인물이 되었다.
2.1. 우파 당권파의 집권과 국공결렬
1925년 쑨원이 사망한 후 중국 국민당은 왕징웨이를 중심으로 하는 자유주의 세력(당내 좌파)과 후한민을 중심으로 하는 우파가 대립하게 되었는데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을 계기로 외교부장 후한민, 군정부장 쉬충즈 등이 숙청되면서 왕징웨이를 비롯한 당내 좌파가 집권하게 되었다. 하지만 왕징웨이는 군사적 영향력을 강화하는 한편 북벌에 소극적인 입장을 취하다가 반발한 장제스의 중산함 사건에 밀려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고 외유를 떠났고 국민당의 새로운 실력자가 된 장제스는 1926년 7월, 국민당의 1차 북벌을 거행하였다. 하지만 북벌 과정에서 장제스와 국민당 좌파 및 중국 공산당의 관계는 반제문제에 대한 방법론 차이, 당권파의 영향력 강화 시도 등으로 인해서 급격히 악화되었고 천도논쟁과 영왕운동이라는 형태로 번졌다. 여기에 과격한 농촌혁명주의자들이 곳곳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국민당 장교들의 가족들까지 돌리며 주4일제와 상인들이 감당할 수 없는 최저임금제를 강요하는 등 사회적 소요가 심각해지자 중도파 내부에서도 공산당에 대한 불만이 급격히 증가하게 된다. 결국 이 충돌은 1927년 4.12 상하이 쿠데타로 이어졌고 국공결렬이 일어나면서 공산당은 국민당과 결렬하게 된다.
2.2. 난창 폭동의 실패와 마오쩌둥의 선출
이후 공산당은 보복을 위해 1927년 8월 1일 난창 폭동을 일으켰으나 참혹하게 실패했다. 이에 1927년 8월 7일, 8.7 긴급회의가 소집되어 천두슈는 실각했고 취추바이가 총서기에 올랐다. 이때 취추바이의 눈에 띈 마오쩌둥도 중앙위원회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취추바이 역시 폭동과 봉기를 통한 혁명전략을 지휘했고 9월 9일 마오쩌둥도 고향인 후난성에서 추수폭동을 일으켜 장사의 점령을 시도했으나 국민혁명군에게 완패하고 마오쩌둥도 사로잡혔으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도주했고, 이후 패잔병을 규합하여 후난성 남방에 있는 장시성으로 도피, 징강산(정강산)에서 세력을 규합하여 정강산 투쟁을 전개했다. 이후 자신들을 중국 공농 홍군(홍군)이라고 자칭하게 되었다. 이후 비슷하게 쫓겨온 주더가 이에 합류해 세력을 확장한다.
중국 공산당은 해풍 폭동, 광저우 폭동 등을 전개하면서 총폭동 노선을 지시했으나 모두 국민정부에게 참혹하게 진압당했으며 장타이레이, 펑파이 등 주요 지도자들이 체포되어 처형당하는 등 극심한 피해를 입고 전체 당원의 80%가 처형당하는 등 세력이 급감하였다. 이후 중국 공산당은 저우언라이의 지시로 한동안 세력을 확장한다는 존버노선을 타게 되었으나 중원대전과 대공황에 고무된 코민테른의 지시로 리리싼이 다시 총폭동 노선을 제기하였다. 이에 따라 중국 공산당은 1930년 창사 폭동을 일으켰는데 마오쩌둥도 참여하였으나 실패했다. 이후 아내인 양카이후이는 창사 폭동의 직접적 피해를 입은 호남성 정부주석 허젠의 지시로 체포되었고, 마오쩌둥과 결별하고 공산주의를 버리면 살려주겠다는 제의를 받았으나 이를 거부, 아들 마오안잉이 보는 앞에서 총살당했다.
2.3. 소비에트 지구 건설
한편 마오쩌둥은 중앙의 무모한 폭동 노선에 소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처음에는 정강산, 이후에는 강서성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가장 유력한 소비에트 지구를 건설하였다. 이 당시 주창한 16자 전법은 굉장히 유명하며 유격전술의 기초가 되었다. 이는 현대에도 비즈니스 모델로 주창되기도 한다.
강서성에서 마오쩌둥의 해방구는 날이 갈수록 확장되었으며 이에 고무되어 장궈타오의 악예환 소비에트 등이 중국 곳곳에서 건설되었다. 국민정부는 수차례 이를 토벌하려고 초공작전을 발동하였으나 공산군을 그저 비적떼로 얕잡아보고 무능한 지방군만을 투입하였으며 1차 양광사변, 만주사변, 열하사변의 잇다른 발생으로 총력을 기울일 수 없었다. 마오쩌둥은 토벌군에 맞서 게릴라 전술, 매복 전술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여 군사전문가 주더와 함께 토벌을 수차례 분쇄하였고 승리에 힘입어 많은 무기를 노획, 세력을 더욱 크게 확장하기에 이르렀다.적진아퇴(敵進我退) - 적이 진군하면 아군은 물러나 피하고
적주아요(敵駐我擾) - 적이 주둔하면 아군은 교란한다.
적피아타(敵疲我打) - 적이 피폐해지면 아군은 타격하고
적퇴아추(敵退我追) - 적이 물러나면 아군은 추격한다.
2.4. 중화소비에트공화국 건국
결국 이에 고무된 마오쩌둥은 1931년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건설을 선포하기에 이르렀고 주석으로 추대되었다. 이 시기 마오쩌둥은 부전사변을 발동하여 반대파를 숙청하는 등 훗날 연안정풍과 문화대혁명의 전조로 보이는 매우 잔혹한 숙청을 벌였으며 강서 소비에트의 철권통치자로 군림하였다. 하지만 상하이에 위치한 중국 공산당 임시 당중앙의 국민정부의 탄압을 이기지 못하고 강서성으로 퇴각하면서 마오쩌둥은 지나친 유혈사태에 대한 비판을 받게 되었으며 영도권을 당중앙에 내주고 물러나야 했다.
3. 대장정
“홍군은 고난의 장정도 두렵지 않은 듯
천수만산을 가볍게 굽어보네.
오령의 산맥 높아지고 또 낮아지다가
잔물결로 멀어지고
오몽의 굽은 층계들
겹겹이 푸르게 쌓여 있네.
진사 강의 격랑 뜨겁게 바위를 두드리고
다두허에 걸린 적교의 쇠사슬 차갑구나
민산 천리에 신선한 눈 내리니
마침내 마지막 여정을 정복하고
삼군은 웃음을 머금었네.”
-
중국의 붉은 별, 두레, 2013, p.268~269
3.1. 여러 비난과 제4차 초공작전의 발동
소련유학파, 국제파가 주도하던 상하이 임시 당중앙은 마오쩌둥이 우경 군사기회주의자라고 생각하여 마오쩌둥을 싫어했다. 혁명을 위해 일본의 침략을 이용해야 한다는 마오쩌둥의 주장에 대해서도 "일본의 소련 침략을 저지해야 한다"는 코민테른의 판단에 따라 마오쩌둥을 기회주의자로 몰아 비난했다. 당시 국제파, 소련 유학파가 중심이 된 상하이 임시 당중앙은 취추바이에 이어 리리싼이 폭동 노선을 지도했다가 실각했음에도 여전히 대도시 진공과 전면전 전략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이런 혼란 와중에서 제4차 초공작전이 발동되었고, 국민당의 탄압을 피해 상하이 임시 당중앙을 비롯한 공산당 지도부가 마오쩌둥이 있는 루이진(서금)으로 이전하면서 마오쩌둥은 간저우 공격 문제 등에서 소극적으로 굴었다는 이유로 당권을 박탈당하고 막판에는 거의 연금 수준에 놓이게 된다. 왜냐하면 원래부터 마오쩌둥은 일개 상무 위원에 불과했을 뿐 당 내 지위는 열약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자 소련 유학파 출신 간부들로 구성된 28인의 볼셰비키[7] 는 기존의 방식으로는 전쟁에서 적에게 끌려다니게 되며, 세력 확장에 문제가 생긴다고 지적하며 게릴라전을 버리고 정규전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제4차 초공작전은 주더가 총사령관, 저우언라이가 총 정치 위원을 맡은 상태에서 마오쩌둥 없이 승리할 수 있었지만, 악예환 소비에트 등 여러 소비에트가 분쇄되었으며, 그 승리 또한 국민혁명군의 역량 부족과 열하사변의 발생 덕분이지 자체적 역량 덕분이라 볼 수는 없었다. 게다가 장제스는 독일 군사 고문단, 외국 차관, 전훈 연구를 통해서 국민 혁명군을 강화하고 있었다.
3.2. 연이은 참패
이후 국민 혁명군은 나치 독일에서 한스 폰 젝트 장군을 초빙하여 벙커를 수백m마다 떡칠해 토치카 작전으로 게릴라전을 원천 봉쇄시키고, 주민들을 소개하고, 정치 선전을 통해 주민과 공산당의 접촉을 차단시켰으며, 경제 봉쇄로 공산당 지배 지구를 고립시킨다. 그 결과 1933년 10월 시작된 제5차 초공작전에서 공산군은 참패하였고, 결국 대부분의 지배 구역과 병력을 잃은 공산당은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수도 루이진에서 일시적으로 퇴각하기로 결정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돌아가는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서쪽으로 탈출하기로 결정한다. 이게 유명한 대장정이다.[8]
3.3. 재집권
이 과정에서 마오쩌둥은 '좌경 모험주의로 인해서 군사적으로 대실패했다'라고 주장하면서 소련 유학파의 실각을 주장했다. 이에 유학파와 소련 군사 고문 오토 브라운이 '역량 차이가 너무 심해서 진 것이지, 홍군의 전략은 옳았다'라고 주장하면서 맞섰으나,[9] 저우언라이가 마오쩌둥을 지지한 데다가 일단 소련 유학파의 전략이 실패한 것이 사실이라, 대다수의 간부들이 마오쩌둥을 지지하면서 마오쩌둥은 다시 당 지도부로 올라섰다.
이후 산서성 옌안에서 토착 공산 정권과 합류하는데, 이 과정에서 정적 및 토착 공산 정권 지도부를 숙청했다는 음모론이 신빙성 있게 들려온다.
4. 제2차 국공합작과 국공내전
4.1. 장쉐량의 서안 사건과 2차 국공합작의 체결
옌안으로 퇴각한 마오쩌둥은 동정 항일 운운하며 기동 사변으로 혼란스러운 서북 지구를 장악하여 재기하려 했으나 옌시산의 반격에 박살나 더욱 궁지에 몰렸다. 하지만 고향을 잃고 사기가 떨어진 장쉐량을 상대로는 승리했고, 이를 기반으로 한숨돌린 마오쩌둥은 장제스와 협상하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하지만 장제스는 소비에트 정부를 지방 정부로 격하하고 홍군을 해체하라고 요구하였고, 마오쩌둥도 중화민국 내부의 소요를 획책하여 협상은 잘 진행되지 않았다. 결국 장제스가 공산당 토벌을 독려하려는 가운데 장쉐량이 장제스를 감금하고 강제로 제2차 국공합작을 강요하는 서안 사건이 일어나면서 기사회생했다.[10] 이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양측은 공식적으로 국민당에 공산당이 복종한다는 조건으로 합작에 합의한다.
4.2. 일본의 침략을 이용하여 세를 회복하다
그러나 중일전쟁 시기 마오쩌둥은 '''세력의 7할을 세력 확장에, 2할을 반장에, 1할을 항일에 쓰라고 지시하면서 일본군과의 교전을 극도로 회피하고, 도리어 국민당의 유격대와 옌시산을 비롯한 화북 지역의 국민당군을 뒤통수 까며 세력 확장에 골몰'''하였고, 그 결과로 중일 전쟁 시작 당시에 4만명에 불과했던 공산당은 전쟁이 끝날 무렵 120만으로 불어났다. '''심지어 그와중에 일본군과 결탁하여 국민당의 군사기밀을 팔아넘기기도 했다.''' 당연히 전쟁 내내 국민당과 공산당의 갈등은 최고조에 다다랐고, 그것이 환남 사변에서 폭발하기도 했다. 오죽했으면 마오쩌둥은 전후에 일본인들을 만나 수차례에 걸쳐 ''''중국을 침략해주셔서 고맙습니다''''라며 감사할 정도였다. 과거 장제스가 노는 동안 일본군을 게릴라로 애먹이면서 그 경험으로 6.25 때 미군과 호각지세로 겨룬 마오쩌둥~ 운운하는 찬양성 프로파간다들이 버젓이 실려 있었지만, 일본 제국은 장제스랑 싸우느라 정신 없었지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에 대해서 그냥 아오안이었다. 농담이 아니라 그냥 비적 취급이었고 1940년 여름, 백단 대전 터지기 전까진 상대도 안했다. 자세한 것은 중일전쟁 항목 참조.
4.3. 아편 수출비로 군자금을 충당하다
게다가 잘 부각되진 않는 사실이지만 이러한 태업 행위와 더불어 공산당은 막대한 양의 아편을 재배해서 팔아치워서 그걸 군자금으로 삼았는데, 1943년도에 마오쩌둥이 판매한 아편의 양이 4만 5천kg이었고 그 수익이 당시 돈으로 6천만 달러에 달했다.[11] 이러한 공산당의 태업 행위에 스탈린조차도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대한 배반'이라면서 마오쩌둥에 대한 혐오감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언론인들은 이러한 사정을 잘 알지 못했고, 공산당의 이런 행위는 알려지지 않게되었다.
4.4. 장-모 평화회담의 결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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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제일 어색한 사진.
미국의 중재로 평화 회담을 위해 만난 장제스와 마오쩌둥.
항일 전쟁 이후 1945년 미국은 국민당과 공산당을 중재하여 연립 정부를 구성시키려고 했고, 조지 마셜이 중국에 방문하여 장제스 - 마오쩌둥과 3자 회담을 갖기도 했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1946년 국민당은 합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공산당을 공격한다. 국민당의 파상 공세로 한때는 공산군의 근거지인 옌안을 점령하기도 했다.
4.5.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선포
그러나 국민당군은 병력을 지나치게 확산시키는 우를 범했고, 공산군은 농촌을 휘젓고 다니면서 세력을 확장한다. 결국 상황은 국민당군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1948년 가을 린뱌오가 만주 지역의 중화민국 국군을 섬멸하면서부터 전세는 역전되었다. 당황한 국민당은 장제스를 실각시키고 리쭝런이 대표로 재협상을 시도하지만, 이미 승세를 잡은 공산당은 이를 사실상 무시한다. 결국 1949년, 마오쩌둥은 중화민국을 대륙에서 타이완섬으로 몰아내고 중화 인민 공화국을 선포한다.
물론 이런 집권 후에 당연히 피의 숙청이 따랐다. 당장 국공 내전 도중에 만주와 화북에서 50만 ~ 100만 단위의 숙청이 있었고 국공 내전이 완료된 다음에 화중, 화남에서 다시 최소 70만, 최대 200만이 숙청되었는데, 마오쩌둥은 전국민의 0.1%를 죽이면 좋다고 구체적인 수치까지 제공하면서 이러한 학살 작업을 감독했다.[12] 이러한 학살은 1949년부터 1953년의 토지 개혁 작업 동안 이뤄졌고, 이후 합작사 운동을 하면서 더 죽였다. 당연하지만 이때 쳐죽여댄 사람들 중에서 실제 지주는 얼마 없었고, 죽은 지주들도 과연 죽을 죄를 졌냐고 물으면 당연히 그런 거 없다.
4.6. 삼반오반운동
1951년부터는 숙련된 공산당원 공무원층이 형성되면서 잠시 살려두었던 국민당 시절의 실무 공무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자행되었는데, 삼반오반운동이라 불린 이 운동에서 400만명의 공무원이 숙청되었다. 이중에 공산당 출신은 20만에 불과했으니 국민당 출신 공무원을 노린 숙청이 명백했다.
5. 중화인민공화국 건국과 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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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10월 1일''' 천안문 광장에서 건국 선포를 하고 있는 마오쩌둥.
5.1. 한국전쟁과 참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 마오쩌둥에게 닥친 외교적 현안은 1950년 6월 25일에 터진 한국전쟁이었다. 당시 이오시프 스탈린은 중국의 참전을 종용하면서도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으려 했고, ''''마오가 참전하지 않으면 한반도를 포기하겠다''''고 단언할 정도였다. 스탈린은 대외 관계에서는 매우 조심스러운 사람이라서 미국과 직접 대결하는 것은 피하려고 했다.
6.25 전쟁도 사실 대한민국에서는 스탈린이 김일성을 사주한 것이라고 주장되어 왔지만, 실제로는 김일성이 소극적인 스탈린을 충동질했다고 흐루쇼프 회고록에도 나오고, 소련 붕괴 후 공개된 구소련 기밀 문서에도 나온다. 스탈린은 그리하여 중국마저 북한을 돕지 않을 경우 북한 정부와 북한군을 중국 동북 지방으로 철수시키려고 했다. 다만 스탈린은 중국과 북한 양국의 군사력만으로는 미군을 물리치는 것은 커녕 교착 상태도 이루지 못할 것이라 여겼다. 따라서 중국이 북한을 지원하지 않을 경우 북한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고, 지원할 경우에도 중 - 북 양국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 물론 결과는...
5.2. 한반도 파병에 대한 지도부의 갈등
한반도 파병안을 놓고 중국 지도부는 갈라졌다. 저우언라이[13] 와 린뱌오는 참전을 반대했는데, 당시 국공 내전이 끝난 지 1년도 안 되어 세계 최강 미국과 맞붙는다는 것은 커다란 모험이었기 때문이다. 총사령관인 주더는 중립을 지켰지만 펑더화이는 파병안에 찬성했다. 마오쩌둥도 북한이 망하면 미국의 다음 목표는 자신들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걱정했기 때문에, 본토에서 미군과 싸우느니 한반도에서 싸우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순망치한'을 외치며 총 60만 대군을 파병했다.
5.3. 한반도 파병
고심 끝에 마오쩌둥은 펑더화이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중국 인민지원군'을 한반도에 대규모로 파병했다. 정규군인 중국 인민해방군을 투입했으면서도 '인민 지원군'을 사칭한 것은 중국 정부가 유엔과 직접적으로 맞서는 것을 피하고, 이 '지원군'이 중국 정부와 아무 상관 없고 이들이 "제국주의에 시달리는 조선 인민을 불쌍히 여겨 자발적으로 참전했다"는 것으로 위장하기 위함이었다. 이들은 산악 지형을 이용한 보병 위주의 기동 포위전을 펼쳐 한반도의 북부에서 유엔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으나, 보급에 대한 깊은 생각도 없이 마구 돌격한 결과 유엔 공군에 의해 보급로가 차단되는 바람에 한반도 중부에서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5.4. 중공군의 패퇴
부지불식간에 중국군에게 반격을 받아 패퇴한 유엔군과 미국의 충격은 대단해서, 1.4 후퇴 당시 미국 정부와 유엔군 사령부는 전선이 전라도의 금강에 설치된 방어선까지 밀리게 되면 유엔군은 축차적인 방어를 하면서 부산까지 후퇴한 뒤 '''최종적으로 유엔군은 일본으로, 대한민국 정부와 한국군은 제주도로 철수한다는 한국 정부 망명 계획을 극비리에 기획하고 있었다.''' 만약 이 계획이 시행되었다면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되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중공군의 제3차 공세는 공세 실시 전에 현지 사령관인 펑더화이가 무리한 진격임을 상기시키며 여러 차례 말렸지만, 마오쩌둥은 스탈린이 지속적인 공세를 원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공세를 지속하도록 명령했고, 그 결과 인민 지원군은 매튜 리지웨이가 이끄는 유엔군의 재반격을 받아 패퇴하여 한반도 중부에서 양군이 교착 상태에 들어가 남한은 위험한 상황을 무사히 넘겼다.[14]
한편 마오쩌둥은 참모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스스로 전쟁에 참가하겠다고 뜻을 밝힌 큰 아들 마오안잉을 한국 전쟁에 참전시켰다. 마오안잉은 전쟁 도중에 미 공군의 네이팜탄 폭격에 맞아 전사하였다. 그의 유해를 중국으로 옮길지 여부를 묻는 참모진의 건의에 마오쩌둥은 시신을 북한에 그대로 두라고 지시하여 현재에도 마오안잉의 묘는 북한에 있으며, 이 묘는 북한과 중국의 혈맹을 상징하는 정치적 장치로 이용되고 있다.
6. 반우파 투쟁
7. 중소결렬
스탈린 바로 옆에 선 것에서 보이듯 공산 진영의 2인자 노릇을 했다.[15]
7.1. 스탈린의 홀대
1950년대 초반까지 소련은 전세계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이념의 조국"이라고 불렸다. 중국 공산당도 예외는 아니어서 1940년대 초까지 코민테른의 지시를 계속 받으며 활동했다. 그러나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 공산당 지도부는 마오쩌둥을 "무식한 농부"[16] 라고 무시했으며, 마오쩌둥의 혁명이론을 "마가린 사회주의"라고 디스했다.
마오쩌둥은 국민당을 타이완으로 몰아내고 1949년 말에 장기간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이 방문의 목적은 소련에 대해 여러 원조를 받아내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소련으로부터 수억 달러(현재 시세로는 수십 억 달러)의 차관을 끌어내고 소련에 다수의 중국 유학생을 파견하기로 했다. 이때만 해도 마오쩌둥은 소련과 스탈린에 불만은 있을지언정 디스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스탈린은 소련이 미국과 직접 맞붙어봐야 손해만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국전쟁에 중국의 참전을 종용했고 이는 중국 참전의 한 이유가 된다. 물론 마오쩌둥의 가장 큰 이유는 북한 정권이 망하면 그 다음 차례는 자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망치한이라고 했다.
정작 스탈린은 마오쩌둥을 그리 탐탁치 않게 여겨 크게 환영하지는 않았다. 사석에서 스탈린은 마오쩌둥을 "그 놈은 사이비지? 정말 만나기 싫다"라고 했을 정도(...) 모스크바에 왔던 마오쩌둥이 얼마나 홀대받았는지 열 받은 마오쩌둥은 "난 여기에 먹고 똥이나 싸려고 온 것이 아니다!" 라고 소리를 질러대기도 했다. 어쨌든 동유럽의 인구 수백~수천만 정도의 국가들에 비해 세계 1위 인구대국인데다가 소련보다는 면적이 작기는 해도 어마어마한 국토면적을 자랑하던 중국과 틀어지면 소련도 난처했으므로, 원조를 단행하기는 했다. 당시 스탈린은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는 거의 교황이나 마찬가지였고, 게다가 소련의 국력은 세계 2위였기[17] 때문에, 어쨌든 중국인들은 소련을 자신들이 본받아야 할 모델로 여겼다. 서울신문. 다만 스탈린이 중국에 대한 원조를 단행하면서도 중국 당국이 내세웠던 계획가운데서 과도해보이는 계획에 대해서는 축소했는데 아이러니한 점은 마오쩌둥이 스탈린의 계획을 지속해서 따랐다면 중국이 수십년 일찍 경제대국이 되었을것이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1957년도에 1936년도의 공업생산량을 뛰어넘는 등 성과는 나쁘지 않았으니 말이다.
7.2.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난
그러나 스탈린의 뒤를 이은 흐루쇼프가 1955년부터 서방과 평화 공존을 외치며 스탈린을 디스하기 시작하자 중국 지도부는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마오쩌둥은 "평화 공존"이란 사회주의 혁명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수정주의"라고 비난했다. 마오쩌둥과 흐루쇼프는 공개적으로 "저 새끼 트로츠키파다"며 욕을 할 정도로 관계가 악화되었다.[18]
뿐만 아니라 소련은 중국과의 여러 기술 거래에서 중국을 사회주의 우방이라기보다는 철저히 털어먹을 대상으로 여겼고, 소련이 자신들에게 판 여러 무기들이 다른 나라에 파는 국제 시세보다 훨씬 비싼 것을 알자 중국 지도부는 소련에게 배신감을 느끼게 되었다. 또한 사상 측면에서도 스탈린은 인간의 의지보다도 기술과 생산력을 중시했는데, 이는 의지나 정신을 중시한 마오쩌둥 사상과는 모순되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스탈린의 글에는 오직 기술만 있고 인간은 없다"고 비판했다.
7.3. 소련과의 관계 악화
이때문에 1960년대 중순부터 중국은 소련을 추종하던 그 전의 방침에서 180도 돌려 스스로 공산주의의 종주국을 자처하게 된다. 한편 소련도 소련은 1960년 중국과 맺은 모든 기술 이전 협정을 취소하고 기술 고문단을 철수시켰으며, 중국과는 관계가 더욱 악화된다. 또한 동유럽 각국은 소련의 위성국이었으므로 마찬가지로 이들과 중국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중국은 한국전쟁 참전으로 인해 서방 국가들과의 관계도 당시에는 나빴으므로 1960년대 중국은 외교적으로 고립되었다.[19] 고작 비슷하게 고립된 알바니아가 중국의 유일한 맹방이었다. 이때 소련과 중국 모두와 국경을 맞대고 있던 북한도 상당히 난감한 처지였다. 북한 입장에서는 소련과 중국의 분쟁에 일방적으로 소련 편만 들 수도, 그렇다고 중국 편만 들 수도 없었던 것이다. 소련과 중국 가운데 누구를 지지하느냐는 물음에 북한은 "소련과 중국 모두가 받드는 사회주의를 지지한다"라는 애매한 말로 빠져나와 소련 중국 분쟁에서 중립을 지키지만, 실제적으론 중국 편에 좀 더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7.4. 핑퐁 외교
1970년대에 접어들어 중, 소간의 관계가 악화됨을 감지한 미국은 중국에 접근했고,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은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게 된다. 이것이 유명한 핑퐁 외교다. 1972년 미국 대통령 닉슨은 중국을 방문하여 세계를 놀라게 하였고, 저우언라이와 회담하고 미, 중간의 상호 교류 확대와 평화 관계를 도모하는 상하이 커뮤니케를 발표했다. 당시 상하이 커뮤니케는 한국에도 큰 충격을 주었고, 박정희의 대미 불신에도 일정하게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마오쩌둥은 지금까지 저질렀던 일들을 뛰어넘는 초특급 바보짓으로 나아가게 된다.'''
8. 과대망상적 정책
중국 공산당의 공식적인 평가에 따르면 마오쩌둥이 극좌적 태도(= 뻘짓)를 한 것은 1957년 반우파운동시기로 간주한다. 즉 이 이후의 주요 행동은 지금 공산당으로서도 옹호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렇게 대약진 운동이 망하게 내버려둔다면) 농촌으로 달려가 농민들을 이끌고 정부를 전복할 것이다. 해방군 여러분이 나를 따르지 않으면 나는 홍군을 찾아가 또 다른 해방군을 조직할 것이다. 그러나 해방군이 나를 따를 것이라 생각한다.
- 마오쩌둥, 1959년 루산 회의에 앞서 있었던 연설에서
여하튼 소련과 점점 사이가 악화되자, 마오는 중국의 전략적 위치에 불안감을 느낀다. 남으로는 미국 세력에 봉쇄되어 있고 북으로는 소련까지 적으로 두게 되자, 마오쩌둥은 어떻게든 중국을 스스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나온 구호가 '자력 갱생'.
8.1. 대약진 운동의 실패
마오쩌둥은 중국은 기술은 적고 인력은 많으므로, 노동력을 모두 이용하여 기술을 상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대규모 제철소를 건설할 만한 기술이나 자본이 없으니, 각 마당마다 재래식 고로를 설치해 수로 질을 대체하자는 것이었다. 공업화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사회주의 지상락원을 건설하기 위해 대약진 운동의 기치하에 농촌을 집단농장 단위인 공사로 재편성하고, 아무런 기술적·경제적 기반도 없이 영국보다 더 많은 철강 생산을 위해 온 인민을 제철 사업에 총동원하였다. 하지만 결국 이 사업은 인력 낭비[20] 와 환경 파괴, 그리고 재래식 제철법으로 생산한 탓에 현대 공업에서는 전혀 쓸모가 없는 똥철이 남조되었을 뿐이었다. 통계에 의하면 이렇게 만든 철 중에서 약 10%만이 다른 고철 또는 철광석과 함께 재활용이 가능하였고, 나머지 90%는 이용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많은 공산권 국가들이 국가 막장 테크로 가는 힘찬 첫 걸음을 내딛을 때의 징조는 보통 '산업에서 미국 따라잡기'와 '엉터리 통계'에서부터 시작한다. 마음은 이미 세계 최고 생산량의 공업국인데 현실은 시궁창이라, 윗놈들은 아랫놈들을 닦달하고 밑에서는 눈치 때문에 숫자를 속여서 올릴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관료주의에 물들어 현장으로 나가보지도 않고 보고서의 숫자들만 믿고 있다간 그야말로 막장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오쩌둥은 이 테크를 그대로 밟았다.
8.2. 수치 날조를 비롯한 결점들
마오가 정권을 잡은 초기에 공산당의 목표는 곡물 생산량을 크게 향상시키는 것과 철강 생산량을 영국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핵심이었는데, 밑에서 올라오는 수치들은 정말로 "우리 이러다 10년 안에 미국 따라잡는 거 아닐까?"라고 착각할 수준이었다. 이러한 수치 날조는 지방의 관리들이 실적을 보고하기 위해 사실을 허위 날조하면서 상황이 더욱 심각해졌다. 한 지방에서는 논 농사에서 200배의 수확을 올렸다고 해서 덩샤오핑이 직접 확인하러 가 보니 다른 논에서 뽑아다 옮겨 심은 것이었다. 게다가 철강 생산량을 올리려고 농기구의 철을 용광로에 집어넣어 철강으로 만드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8.3. 제사해 운동과 대기근
이렇게 인력이 빠지고 농사에 필요한 도구까지 없애버린 것만으로도 벌써 농업 생산량은 상당히 저조해졌는데, 생태계에 대한 이해는 눈곱만큼도 없는 상태에서 마오쩌둥이 '''"저 새는 해로운 새다"'''란 교시를 내려서 단 1년 ~ 2년 만에 전국에서 참새의 씨를 말려버리고 만다. 참새의 씨가 마르자 병해충이 폭증하였고, 이는 앞에 언급된 실정과 이후 발생한 자연 재해 등의 수해로 인해 작황은 처참한 수준으로 치닫고 이념만 내세운 무자비한 인민 동원과 강제 공동생활 등으로 인해 인민의 고통은 극에 달했다. 문제는 이 상황에서 마오쩌둥은 소련에 대한 가오를 세우기 위해 식량을 가차없이 징발할 것을 지시했고 결과적으로 1957년 ~ 1960년 사이에 공식적으로 2000만명[21] , 학계 추산으로 '''3000~4,000만 명, 많게 잡아선 7,000만 명이라는 역대급 아사자'''가 발생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22] 경제적 피해도 1000억~1200억 위안이라는 어마어마한 수치였다. 이는 중화인민공화국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위해 투입한 모든 금액의 2배가 넘는 금액이었다.
이 대기근은 훗날 옌벤의 조선족과 북한이탈주민 사이에 연대 의식이 생기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북한은 당시 계획 경제의 효과를 톡톡히 본 덕에 경이로운 경제 성장을 이루고 있었고, 김일성이 주장한 대로 '이팝에 고깃국 기와집에서 비단옷을 입는 나라'가 '''될 것 같았다'''. 실제로 1980년대 초반까지 북한 경제는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이때 굶주림에 허덕이던 수많은 조선족들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압록강을 넘어 북한으로 넘어왔고, 국경 지대의 북한 주민들은 우리가 남이가라는 생각으로 그들에게 식량을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그 시절에 받은 도움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조선족들은, 이제 역으로 식량난에 허덕이다가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들어오는 북한 주민들을 쉽게 내칠 수 없다고 한다.
8.4. 농업 생산량의 감소
한편 마오쩌둥 시기가 기근이 일반적인 장제스 시절과는 달리 정권 안정화가 이루어지면서 농촌의 생산량이 올라갔다는 둥, 배급이 원활했다는 둥 하는 떡밥이 나무위키 곳곳에 돌곤 했는데, 마오쩌둥의 토지 개혁 결과로 중국의 농업 생산량은 국민당 시절의 3분의 2로 감소했고, 합작사 운동을 하면서 거기서 더 떨어졌다. 세금은 몇 배로 올라갔고 영양 섭취는 반타작이 되었다.
배급이 원활했니 어쩌니 하는 것도 '''그건 도시에나 해당되는 이야기'''고, 대다수 농촌 지역은 3일치 이상의 식량을 가지면 반동으로 몰아서 때려잡는 등의 공산당의 탄압으로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굶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나마 대약진 운동이 시작되면서는 도시 지역에서조차도 기아가 번지기 시작하여 수도인 베이징의 노동자들의 절반이 기근 부종을 앓는데, 영양 실조라는 판단을 내렸다가 숙청될 것을 두려워한 의사들이 전염병이라는 거짓 진단을 하고 엉뚱한 항생제를 먹이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천윈은 대놓고 제국주의와 봉건주의에 시달렸다던 국민당 시절에는 먹을 것이라도 많았는데 위대한 인민 공화국엔 묽은 죽밖에 없다고 깠고 중앙당에서조차 국민당 시기의 영양 섭취와 농민 수익이 더 높았으며 중일전쟁 시기보다도 영양 섭취와 농민들의 식량 비축이 떨어졌다고 비밀리에 인정했다.
9. 문화대혁명
대약진 운동의 결과는 산전수전 다 겪은 중국 공산당 원로들까지도 통곡하게 만들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리셴녠은 현지지도 후에 중일전쟁, 국공내전을 다 합쳐도 이런 참상을 본 적이 없다고 통곡했고 류사오치는 고향을 방문하여 무릎을 꿇었다. 저우언라이도 하북성 시찰 중 농민들의 굶주림을 눈치챘으며 어떤 노인으로부터 2년 후엔 총리도 굶어죽을 것이라는 직언을 듣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게다가 지옥을 맛본 중국인들은 당에서 엄격히 금지한 종교를 신봉하는가 하면 공공연하게 당과 소련을 욕하고 미국을 칭송하는 한편 국민당 시절 책자들을 돌려보는 등 반정부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당연히 당과 정부의 권위는 엄청나게 실추되었다.
9.1. 일시적인 사퇴
한편 마오쩌둥은 1956년에 건강상의 이유로 국가주석직 수행에 무리가 있다고 밝히고 1959년에 사퇴한다는 결의에 의거하여 류사오치에게 국가주석직을 넘겨주고 요양하면서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는데 마오쩌둥 본인 역시 대약진운동의 결과에 대해선 충격을 받았지만 그 원인이 자신의 반지성주의와 아마추어리즘에 있다고 인정하지 않았다. 반면 류사오치는 사태의 책임이 정부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천재가 3할이면 인재가 7할"이라는 표현을 가져오고 성공은 열손가락 중에 한손가락도 되지 않는다고 마오쩌둥의 테제를 정면으로 공격했다. 류사오치는 북대하의 마오쩌둥에게 식인도 기록에 남을 것이라고 맹렬히 비판했고 마오쩌둥은 삼면홍기가 땅에 떨어졌다고 소리 지르면서 이젠 토지를 재분배해서 토지를 사유화할 것이냐고 맞섰다. 이후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등이 실용적 경제정책을 실시하자 사태의 원인이 자신에 있다고 인정하지 않았던 마오쩌둥은 류사오치를 주자파, 즉 자본주의 추종자로 의심하게 되었다.
9.2. 류사오치의 사퇴
한편 전술한 바와 같이 대도시를 중심으로 "미국이 우리의 미래다."라는 구호가 유행하고 국민당 시절의 선전책자나 금지된 서양 도색잡지를 비롯한 불온서적들이 불티나게 팔리는가 하면 공산당에서 그렇게 열심히 때려잡던 기독교와 불교를 비롯한 종교의 교세가 급속도로 확장되었으며 홍콩, 마카오, 대만 등으로의 망명은 줄을 이었다. 그리고 젊은 학생들을 중심으로는 공산당의 리더십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고 류사오치는 강온양면책을 통해 정국을 수습하려 했다. 사회 비판 세력에 대해서는 공작조라 불리는 요원들을 파견해 가혹하게 탄압하는 한편 경제적으로는 유화적인 조치를 취해서 민심을 수습하고자 한 것이다. 마오쩌둥은 이에 주목하여 류사오치가 대중의 목소리를 짓밟고 혁명을 저버린 주자파라고 맹비난하며 류사오치에게 탄압받던 학생들을 선동하여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고 이에 학생들은 너도나도 홍위병을 조직하여 주자파, 반혁명세력을 떄려잡자고 날뛰기 시작했다. 결국 입지가 좁아진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자아비판을 하고 실각당했고 선동된 젊은이들은 홍위병이 되어 기존 질서를 완전히 뒤집는다. 이 혼란 속에서 마오는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다시 정권과 당권을 장악했고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쫓겨났다.
류사오치는 카이펑으로 하방되었다가 지병인 당뇨병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원래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으나 홍위병의 위협을 받은 의사가 치료를 거부해서 죽었다고 한다. 덩샤오핑은 엔진 공장으로 쫓겨나 강제노동을 해야만 했었다.
9.3. 무자비한 파괴, 학살의 비극
이것이 바로 '''중국(현대)사 최대의 사건인 문화대혁명'''이다. 기존의 모든 가치를 부정하는 분위기 속에서 멀쩡한 학자들과 문인들이 죽어나가거나 끌려가서 강제 노동을 하고 각종 서적이 불태워지고 수많은 문화 유산이 파괴되었으며, 학교 수업은 사실상 정지 상태에 이르렀고 탄압으로 인한 정신병자가 늘어나는 등 사회 전반이 개판이 되었다. 더욱 자세한 설명은 문화대혁명, 홍위병 항목을 참조하기 바란다.
1968년에는 사망 오보가 퍼지기도 한다.
2년여에 걸친 문화대혁명 동안 저우언라이를 제외하면 중공 정권을 성립시키는데 공을 세웠던 공신들은 대부분 귀양가거나 숙청당하고, 마오쩌둥은 정부와 당을 모조리 장악하여 신적인 존재가 된다.
9.4. 토사구팽
그러자 홍위병의 활약으로 정권을 잡은 마오쩌둥은 이제는 "홍위병이 너무 극좌적으로 행동한다"며 그동안 홍위병을 부추키던 것을 그만두고 인민해방군을 동원해 홍위병들을 진압하는가 하면, 농민에게 배우라면서 홍위병들을 농촌으로 쫓아 내려보냈다.[23] 결국 자신에게 이용된 자들도 헌신짝처럼 버렸다.[24] 이렇게 마오쩌둥은 정권을 되찾긴 했으나, 혼란이 너무나 극심해서 중국인이든 외국인이든 이 시기에 중국은 10년 ~ 20년 퇴보했고 많은 전통 문화들도 단절되거나 없어져버렸다고 평가한다.
중국에선 아직도 이러한 마오의 잘못에 대해 거론하기 꺼리며, 건국의 공만은 인정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분위기가 있지만 문화대혁명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비판한다고 한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은 공식적으로 언급하는 것 자체가 사실상 금기시된다. 워낙 엄청난 사건이었기 때문에 다들 잊고 싶어하는 듯하다.[25] 중국 공산당의 공식 입장은 공칠과삼(功七過三), 즉 7할은 공이 있고 3할은 잘못했다는 것이다. 아직까지도 문화대혁명에 관한 대부분의 정부 문서는 비밀로 분류되어 공개하지 않고 있다.
10. 말년
10.1. 9.13 사건
문화대혁명 때 마오쩌둥의 선동에 적극 가담한 린뱌오가 마오쩌둥의 후계자가 되는 듯 했다. 그러나 린뱌오가 자신을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낙인시키는 과정에서 마오쩌둥의 의심을 사 쿠데타를 준비하게 된다. 1971년 린뱌오와 그의 아들 린리궈는 연합함대라 불리는 측근 세력들을 동원해 571 공정이라 불리는 마오쩌둥 암살 계획을 꾸몄지만 냄새를 맡은 마오쩌둥이 신속히 지방 순시에서 돌아오면서 망해버렸다. 결국 린뱌오 일가는 발악적으로 쿠데타를 일으키려다가 이마저 실패하자 소련으로 도주하다가 비행기가 추락해서 사망했다. 이를 9.13 사건이라고 한다. 마오쩌둥은 1970년 루산회의 이후 깊어지던 린뱌오와의 갈등이 린뱌오의 자폭으로 끝나버린 것에 대해서 매우 시원하게 여기면서도 동시에 린뱌오가 쿠데타까지 기도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이후 군부는 쉬샹첸, 예젠잉의 주도로 비림정풍 운동이 벌어져 린뱌오 색채 지우기에 들어갔고 마오쩌둥은 천이의 죽음을 계기로 저우언라이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10.2. 저우언라이의 실각
저우언라이는 덩샤오핑을 복권시키는 등 의욕적인 정돈에 들어갔으나 이 과정에서 좌파가 너무 약화되자 이를 불쾌하게 여긴 마오쩌둥은 극좌파가 바로 반혁명이라고 주장하던 기존의 입장을 뒤집어 사실 린뱌오는 극우파의 수장이었다고 선포, 다시 장칭을 비롯한 극좌파에게 힘을 실어주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저우언라이를 몰아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던 장칭을 비롯한 4인방은 비림비공운동을 전개해 저우언라이를 난타했고 정돈사업을 통해 기초부터 망가져버린 중국을 재건하려는 덩샤오핑을 투항주의자, 수정주의자로 매도하여 1차 천안문 사태를 계기로 실각시키기에 이르렀다.
10.3. 건강의 악화와 화궈펑 지명
이 상황에서 마오쩌둥은 1970년대부터 파킨슨병 혹은 운동 뉴런 장애로 보이는 심각한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1972년, 미국의 닉슨이 방중했을 때 마오쩌둥은 공식 석상에 나와 몇 마디 하지도 못하고 저우언라이 총리가 모든 의전을 담당하였을 정도였다. 사실상 국정은 저우언라이가 맡아서 했으나, 저우언라이도 곧 암이 발생하여 건강이 몹시 나빠졌다. 이를 기회로 정권을 노리고 있던 사인방은 마오 사후 국정 장악을 노렸다. 이를 우려하던 저우언라이는 문화대혁명 때 실각하여 엔진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고 있던 덩샤오핑을 불러들여 국정을 넘겨주기 시작했으나, 사인방은 덩샤오핑을 잠재적 경쟁자로 생각했기 때문에 실각시키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사인방의 기대와는 다르게 후계자 자리를 장칭이 아니라 자신의 고향 후배였던 화궈펑으로 지명했다.[26] 말년에는 말도 제대로 못 할 만큼 건강이 심하게 악화된 상태였는데, 뉴질랜드 총리 로버트 멀둔과의 회담 이후 화궈펑에게 "천천히 하고 서두르지 말라. 과거의 방침에 따라 일을 처리하라. 네가 일을 하면 나는 안심이다."라는 메모를 건네 화궈펑에게 힘을 달아 주었다. 저우언라이는 1976년 초에 먼저 사망했고, 저우언라이를 추모하기 위한 인파가 천안문광장에 모이자 사인방은 이를 군대를 동원 진압했다. 그리고는 이 혼란의 책임을 뒤집어 씌우고 마오의 이름으로 덩샤오핑을 다시 실각시켰다.
10.4. 사망
마오쩌둥은 1976년 9월 9일, 저우언라이가 숨진 후 몇개월 뒤에 사망했고 중국은 애도의 분위기에 휩싸였다.
자신이 죽은 뒤 저우언라이처럼 화장해달라고 유언했지만, 오히려 미라가 되어 천안문광장에 있는 모 주석 기념관에 안치되었다. 히더 프링글이 쓴 <미라>에서 마오의 엠바밍 과정에 대한 비화가 실렸는데, 사망 당시엔 중-소 분쟁 시기였기에 소련으로부터 엠버밍 처리 지원을 받을 수 없어서 주치의 리즈쑤이 등은 독자적으로 엠버밍을 해야 했는데, 처음 엠버밍을 할 당시 마오의 얼굴이 축구공처럼 부풀어오르는 참극이 발생했다. 그러다가 리즈쑤이 등이 온갖 수를 다 쓰고서야 원래 모습대로 복구할 수 있었다.(링크1, 링크2)
얼마 지나지 않은 (동년) 10월 6일, 후임 주석 화궈펑은 국정을 농단하던 사인방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들은 모두 체포되었다. 예전에는 이를 군부가 권유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최근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이는 화궈펑의 결단이었다고 한다. 사인방은 모두 감옥살이를 하다가 옥사하거나 출옥 후 사망했다.
[1] 후스는 일찍부터 공산당을 빠는 대학생들에게 "너희들은 공산당의 실체를 모른다"고 훈계했으며, 미국으로 떠난 후에는 "공산당 치하에 언론의 자유가 없다는 건 다 알지만 침묵할 자유도 없다는 건 사람들이 잘 모르더라"라고 공산당을 무지막지하게 까댔는데, 공산당을 믿고 남아있던 학자들은 정말로 침묵할 자유조차 없이 조리돌려지거나 어용학자들로 전락했다.[2] 다만 대만에서도 일당독재가 펼쳐져서 많은 반정부 인사들이 투옥되기는 마찬가지였는데 섣불리 감옥에 보내기에 후스가 너무도 거물이었기 때문에 비판적인 의견을 내도 감옥에 보내지지는 않았고 그래서 장제스 1당 독재시절에는 그나마 정권을 비판하는 양심적인 지식인으로 남았다. 다만 후스가 양심적인 지식인이라 할지라도 국민당과 관제야당 이외의 정당의 창당을 비판한 일 때문에 보신에 연연하는 어용지식인이라는 욕도 듣기는 했다.[3] 마오는 이 대자보를 전국에 회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4] 사실 이때는 중국 대학 내 거의 모든 교수들이 털렸었다. 심지어 어떤 대학 의대에서는 의대생 홍위병들이 의대교수들을 잡아패서 청소나 병원 관리 등 보조일을 시킨 뒤, 교수 대신 자신들이 환자 진료를 한 사건도 있었다.[5] 다만 량수밍은 목숨을 부지하여 마오 사망 후 복권된다. 1988년 사망.[6] 다만 이때에도 유학자 량수민같은 예외가 있기는 했다.[7] 다만 실제로 28인인지도 명확하지 않으며 명단도 통일되어있지 않다.[8] 이때 노오력으로 세력을 불리다 28인 볼셰비키에게 어처구니 없이 권력을 넘겨주고는 그 노오력들을 수포로 만들게 되자, 마오쩌둥도 절망하여 내심 모든 걸 포기할 생각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남의 말이나 따르다 패배한 게 너무 억울해서 이제는 지더라도 자신의 판단에 의한 결과로 패배를 맞이하자고 결심했다고 한다. 이는 군사적으로는 성과를 가져왔지만, 정치적으로는 독선과 아집으로 흘러서 문화 대혁명 같은 대삽질을 불러오는 원흉이 되었다.[9] 이 주장에 대해서 스탈린 빠돌이인 오토 브라운과 28인의 볼셰비키를 비롯한 교조주의자들의 비겁한 변명 정도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으나, 사실 오토 브라운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게릴라 전을 한다고 해서 탱크랑 비행기를 갖추고 토치카 지어가면서 조여오는 장제스의 중앙군을 이길 순 있었나? 물론 오토 브라운과 소련 유학파가 신봉한 단총 돌격전이 유용했냐면 그건 또 별개.[10] 후일 장제스는 2주일만 더 있었으면 초공 작전은 완수될 수 있었다면서 평생동안 장쉐량에 원한을 품었다.[11] 그러나 모택동은 자신이 정권을 잡은 뒤에는 아편 상인, 재배자, 유통업자를 모두 죽이거나 중형에 처하였고 소규모 상인을 사면하였으며, 중독자에게는 재활 치료를 제공하는 등의 초 강경책을 2년에 걸쳐 시행했다. 그 결과 아편 전쟁 이전부터 고질적이던 아편 문제가 해결되었다. 즉 자기가 아쉬울땐 팔아먹고 아닌 때는 때려잡았다(...) 아편 항목 참조.[12] 당시 중국 인구가 5억 5천만인데 마오쩌둥과 류사오치가 인정한 71만이란 수치를 인용하면 마오쩌둥이 말한 수치에 근접한데 보이보가 언급한 200만 명설로 가면 뭐(...)[13] 사실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의 참전 주장에 동의는 했으나, 한반도 파병을 위해 소집된 중국군의 상태가 전쟁을 새로 치르기에 영 좋지 않아서, 당장 중국군이 참전한다 해도 미군에 승산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비교적 소극적인 참전 지지를 표명했다.[14] 여기에 대해서는 음모론도 존재한다. 당시 인민 지원군의 다수는 국민당 출신이었는데, 이들을 숙청시키기 위해 고의로 소모했다는 것. 진위 여부는 차차하더라도 자신들을 다시 이역만리로 보낸 옛 국민 혁명군 출신들은 공산당에 회의를 품어 인민 지원군 포로의 80%는 타이완 행을 택했다.[15] 저 사진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숨어있는데, 사진을 자세히 보면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키가 비슷한데 실제 스탈린의 키는 163cm이지만 마오쩌둥의 키는 172cm였다. 그러나 키가 비슷해 보이는 이유는 마오쩌둥이 측근에게 웃으면서 설명한 이야기에서 알 수 있는데, 그에 따르면 스탈린이 마오쩌둥에게 지기 싫어서 사진을 찍기 전에 앞으로 한 발자국을 나와 사진을 찍어서 그랬다고 한다.[16] 당시까지 소련 공산당과 스탈린의 입장은 "혁명의 주체는 노동자"였다. 그런데 모택동과 중국 공산당은 이 이론과는 반대로 노동자가 아니라 농민이 주축이 되는 혁명을 성공시켰으니 스탈린 입장에서는 떨떠름했을 것이다.[17] 독소전쟁으로 잿더미가 되었지만 종전 3년 만에 회복했다. 1위야 당연히 미국.[18] 그러나 실제적인 원인은 따로 있다. 스탈린에 대한 비판이 자신에 대해 확산될 것을 모택동이 꺼린 것.[19] 게다가 당시 중국은 한국 전쟁 참전 탓에 아직 서방으로부터 교역이 봉쇄된 상황이었다.[20] 이게 얼마나 대강대강 진행된 방식이었냐 하면, 철광석 증산을 꾀하지 않아 철광석을 토법 고로에 쏟아부으면서 국민정부 시기 창설된 대형 용광로는 놀고 있었다. 당연히 효율은 후자가 더 압도적인데도![21] 1980년 당시 중국 공산당 총서기였던 후야오방이 발표한 수치. 이제 형편없이 낮은(...) 수치다. 학계에선 평균적으로 '''최소 3천만'''으로 본다.[22] 참고로 그 중일전쟁 전사자가 공식적으로 1200만 정도고 학계 연구로도 1400만 정도고 중화민국이 대륙에 있을 시기에 내전,질병,자연재해,전쟁 등으로 인한 사망자가 350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23] 이걸 하방이라고 하며 이들 중 대부분은 다시 고향으로 오지 못했다. 문혁 말기 호적 이동을 동결시키면서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거주지 이동을 금지했기 때문.[24] 아이러니하게도 대약진 운동의 아사자의 절반은 10살 미만의 아이들이었다. 즉 홍위병의 대부분은 대약진 운동 시기 가장 고통받은 자들이라는 것이다.[25] 이런 배경 때문에 2012년 원자바오 총리의 '정치 개혁을 하지 않으면 제2의 문화대혁명이 올 수도 있다'는 발언이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26] 당시 화궈펑은 겨우 현 서기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