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역사

 





1. 개요
2. 유럽인 도래 이전
3. 유럽인의 도래
3.1. 영국의 개척
3.2. 프랑스의 개척
4. 영국령 북아메리카의 완성
4.3. 식민지 정부 설치
4.5. 각지의 반란들
4.6. 더램 보고서(Durham's Report)
5. 캐나다 자치령 창설
6. 영국으로부터의 독립
6.1. 19세기 후반
6.2. 세계대전
7. 현대사
7.1. 냉전
7.3. 지금의 캐나다
8. 근대 캐나다 원주민의 역사
8.1. 원주민 부족들과의 토지 계약
8.2. 레지덴셜 스쿨
8.3. 원주민들의 현황


1. 개요


캐나다의 역사를 서술하는 문서.
간혹 캐나다의 역사가 그 옆집보다 편안했다고 더러 인식되는데 이는 심지어 삽질까지도 옆집이 더 크게 알려졌기 때문이다.

2. 유럽인 도래 이전


북아메리카에 처음으로 도래한 사람들은 빙하기 시절 베링 해협을 통해서 북아시아에서 육로로 건너온 것으로 추측되는 사람들이다. 그 시기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으나 많은 역사학자, 고고학자, 고인류학자들은 약 3만 년 전에 처음으로 북미 대륙이 인류에게 발견됐으며, 1만 5천 년~2만 년 전 대규모 이동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한다. 마지막 빙기를 필두로 아프로유라시아 대륙과 아메리카 대륙을 연결하는 육로는 완전히 끊어졌고, 곧 아메리카 대륙은 인류가 정복했으며 고대인들은 이후로 다양한 문화와 문명을 꽃피웠다.
북미에는 너무나도 많은 부족과 문화가 있었기 때문에 이를 '북미 원주민 문화'라고 퉁치기에는 너무 범위가 광범위해지며, 그렇기에 식민지 시대 이전의 역사는 짧게 정리하기 굉장히 어려워진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이들 문화는 고인디언(Paleo-Indian, 혹은 Paleo-American) 문화에 기반을 두고 발달하였으며, 많은 문화권이 현재 미국과 캐나다 땅에 위치해 있는 그레이트플레인스와 오대호 주변으로 발달하였고, 또한 서부 및 남부의 인접 지역에도 자리잡았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유사한 스토리의 창조 신화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미시시피 호를 숭상시하던 애니미즘 정서와 관련히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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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원주민의 민족적/문화적 분류.
12세기경에는 온타리오 호수를 주변으로 하여 이로쿼이 연맹이 결성된다. 현대에는 프랑스어인 '이로쿼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있지만 이로쿼이 연맹의 사람들은 본인의 부족연맹을 하우데노사우니(긴 집에 함께 사는 사람들)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불렀다. 이로쿼이 연맹은 현재의 미국과 캐나다 영토에 걸쳐져 있었으며, 히아와타를 비롯하여 데가나위다(일명 피스메이커, Peacemaker), 지곤사세 등의 평화주의적 지도자들이 비슷한 방언 수준으로 다른 언어를 쓸 뿐인 모호크족, 오네이다족, 오논다가족, 카유가족, 그리고 세네카족이 모두 통일되어 평화로운 이웃사촌으로 살아야 한다며 구성한 일종의 연합부족의 형태였다. 캐나다의 국명은 이들의 언어에서 비롯되었는데, '마을'이라는 뜻의 '카나타(Kanata)'에서 가져온 이름이다. 히아와타는 전쟁에 시달리는 이 다섯 부족들의 국민들을 위하여 평화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을 설득해 나가며 연합을 이뤄냈고, 끝내 전쟁을 통해 공포적인 정치를 하던 모하크족의 지도자 타도다호까지 설득해내는 데 성공해 '대평화율법'을 선포함에 따라 다섯 부족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기틀을 다졌다. 다섯 부족이 연합되었기에 '오족 연합(Five Nations)'라고도 불리는데, 1722년 투스카로라족이 가입해 잠시 '육족 연합(Six Nations)'이 되었다.


3. 유럽인의 도래


캐나다라는 땅은 서기 1000년경 바이킹들이 들른 후 역사의 무대에 드러난 적이 없었다. 그러나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항해 이후 서유럽 국가들은 '신대륙'에 흥미를 가지고 아메리카에 진출했으며, 그 중에서도 잉글랜드(영국)와 프랑스는 현 캐나다 지역에 관심을 보였다.

3.1. 영국의 개척


1497년, 영어식으로 존 캐벗(John Cabot)이라고도 알려진 이탈리아인 탐험가 조반니 카보토(Giovanni Caboto)가 잉글랜드 왕국헨리 7세의 재정적 지원으로 바다 건너 육지에 도착하지만, 다다른 곳은 동양이 아닌 신대륙이었다. 이에 카보토는 지명을 뉴펀들랜드라고 명명하며 영국의 땅이라고 선포한다. 그러나 이후 잉글랜드는 헨리 8세성공회 창립, 메리 1세가톨릭 진흥정책 등 국내 정치/종교 관련 혼란에 휩싸여 식민지 개척에 관심을 갖지 못했다.
잉글랜드가 다시 아메리카 대륙 개척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엘리자베스 1세 시기로, 1583년에 험프리 길버트를 캐나다 동부에 보내 탐험하도록 하였다. 엘리자베스의 뒤를 이은 제임스 1세도 1610년에 탐험가 헨리 허드슨(Henry Hudson)을 보내 허드슨 만 일대를 탐험하도록 하였다. 찰스 1세는 이 때 발견된 땅을 모두 영국 영토로 선포하고는 자신의 조카인 루퍼트(Rupert)에게 하사했는데, 이를 루퍼츠랜드(Rupert's Land)라 하였다. 당시 루퍼츠랜드는 현 캐나다 중서부 거의 전역을 이르는 말이었다.
영국 내전올리버 크롬웰의 독재를 거쳐 즉위한 찰스 2세는 허드슨 베이 회사(Hudson's Bay Company)를 차리고 루퍼츠랜드에 대한 개척의 전권을 맡긴다. 이들은 탐험가들을 초빙해 캐나다 중서부 내륙을 탐험했다.

3.2. 프랑스의 개척


프랑스 왕국은 1534년 자크 카르티에를 머나먼 땅에 보낸다. 카르티에는 20일간의 항해 끝에 가스페 반도에 다다르게 되고 그곳에 "프랑스 왕 만세"라는 글귀가 적힌 깃발을 꽂는다. 이것이 프랑스의 퀘벡 개척의 시작이었다.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이로쿼이 족의 일파였던 스타다코나의 추장 돈나코나의 두 아들을 배에 싣고 프랑스로 돌아갔다. 프랑스 왕은 황금어장과 빽빽한 삼림이 있다는 말을 듣고 2번째 원정을 보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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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다시 스타다코나에 도착을 한 후, 두 아들을 돈나코나에게 다시 돌려주게 된다. 카르티에는 원주민들에게 강 상류에 가면 큰 마을과 더욱 더 큰 강이 존재한다는 것을 듣고, 탐사에 나선다. 그 강은 지금의 세인트로렌스 강이다. 이때, 원주민들이 북쪽 연안을 가리키면서 '가나타'라고 했는데 이것이 지금의 국명 캐나다의 유래이다. 그들은 지금의 몬트리올까지 도달하나 너무나 추운 날씨에 괴혈병이 돌아 결국 실패하게 된다. 원정이 끝난 후 추장 돈나코나를 프랑스에 데려갔을 때, 고향에 가고 싶던 돈나코나가 신비의 왕국이 있다는 거짓말을 하여 그 다음 원정에서 더 많은 선원을 잃는다. 그렇게 카르티에의 업적은 잊혀져 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왕국은 퀘벡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았다. 리슐리외에 의하여 일백조합인상사(Compagnie des Cent-Associés)가 설립되어 식민지 교역을 독점하였고 지속적으로 원주민과의 모피 교역을 확장해 나갔다. 몬트리올도 이런 확장을 통해서 1642년 건설된 도시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적은 인구로 인하여 식민지 운영이 쉽지 않았고, 루이 14세는 '왕의 딸들(Filles du roi)'이라 불리게 되는 약 800명의 여자들을 보내기도 하였다.[1]
1660년 당시, 프랑스 정착민들의 인구는 겨우 2500명이었다. 17세기에서 18세기 중반까지 프랑스 정착민들이 상당수 왔지만, 죽거나 프랑스로 되돌아가는 수도 많았다. 오늘날 캐나다와 미국에 거주하는 프랑스계 1천만 명은 초기 정착민 2,600명의 후손들이라고 하며, 이들은 유전적 다양성이 적어 관련 의학 연구에 유용하다고 한다.
한편 이들이 정착한 캐나다 북동부를 아카디(Acadie)/아카디아(Acadia)라고 했다.

4. 영국령 북아메리카의 완성



4.1.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7년 전쟁


영국은 프랑스가 차지한 퀘벡과 아카디아(캐나다 동부)에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영국 입장에서는 본국에서 캐나다 내륙으로 들어가려면 거쳐야 하는 지역이 프랑스 땅인 게 매우 못마땅했다. 그리고 이 지역의 거대한 어족자원 역시 탐내고 있었다.
1714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결과 맺어진 위트레흐트 조약에서 루퍼츠랜드와 뉴펀들랜드 섬, 노바스코샤 지역이 영국에 할양되었다. 이로서 아카디아 전역을 영국이 차지하게 되었는데, 영국은 처음에는 프랑스인들 계속해서 아카디아에서 살도록 허용했으나 나중에 7년 전쟁이 일어나자 영국은 아카디아 거주 프랑스인들의 충성심을 의심하여 이들을 아카디아에서 쫓아냈다. 쫓겨난 이들은 캐나다에서 쫓겨나 고국인 프랑스로 돌아가거나, 케이프 브레턴 섬[2]이나 생피에르 미클롱 섬 등으로 도망치거나, 현재는 미국 땅이 된 루이지애나 등 남쪽으로 추방[3]되었다. 노바스코샤에서 일어난 아카디아인 축출 등의 사건은 캐나다 동부의 아픈 역사의 일부이다.
그럼에도 프랑스는 여전히 퀘벡을 포함해 캐나다의 대부분 지역을 통제하고 있었다. 1756년 일어난 프랑스-인디언 전쟁은 퀘벡 역사에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오하이오 지역에서 영국군과 충돌한 프랑스군은 몽칼름 후작의 지휘 하에 주요 전투에서 승리를 하며 영국군을 봉쇄했는데 1758년에 이르러 영국의 피트는 이러한 상황을 더 이상 좌시하지 않고 제임스 울프 장군과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역공을 개시한다. 이러한 역공으로 인해 프랑스군은 퀘벡 시 일대까지 물러났다. 1759년 9월 퀘벡 근교의 아브라함 평원에서 양측 군대가 회전을 벌였는데, 이 전투에서 몽칼름 후작과 울프 장군 모두 전사를 하는 격전 끝에 영국군이 승리하였고 완전히 포위를 당한 퀘벡시는 결국 영국군에게 항복한다.
그렇지만 아직 몬트리올의 프랑스 군과 총독은 항복을 하지 않았고, 이들은 본국에서의 지원을 기다리며 퀘벡을 탈환하려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퇴각했다. 하지만 이미 이 시점에서 본국에서의 수송선은 영국 해군과의 해전에서 패퇴한 시점이었으며 결국 1759년 영국군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7년 전쟁의 종결과 함께 맺어진 파리 조약에 따라서 퀘벡은 영국에게 할양되었다.
그러나 퀘벡의 프랑스인들의 영국에 대한 여론은 호의적이지 않았고, 통치 시작부터 반란 등 충돌이 잦았다. 결국 영국은 캐나다 지역이 미국의 독립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막기 위해 1774년에 퀘벡 조약을 맺어 퀘벡의 프랑스계 주민들이 가톨릭 신앙을 유지하고 프랑스어를 계속 사용할 수 있도록 특권을 인정하였다.

4.2. 미국 독립전쟁


1770년대 미국 독립전쟁이 한창 벌어질 당시, 영국에 정복당하여 악감정을 가지고 있던 노바스코샤와 퀘벡 식민지 지역의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에게 미국 독립군은 자신들과 손잡고 영국에 대항하여 같이 미합중국을 이루자고 제안한 적이 있다. 추후 독립전쟁에서 승리할 경우 미합중국에 가입할 식민지 목록에 노바스코샤와 퀘벡을 위해 두개의 빈칸을 남겨두기도 했었다. 약 몇 천명의 캐나다인들은 미국 독립을 지지하여 독립군을 지지하였으나 프랑스계를 포함한 대부분은 중립을 선언하였으며 노바스코샤와 퀘벡 식민지 정부 역시 미국 독립 정부의 제안에 공식적으로 답하지 않았다.
1775년 미국 독립군은 당시 북미 대륙에 주둔하는 영국군을 갈라놓을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인데 비해 허술한 방어를 가진 퀘벡을 공격하기 위해 몽고메리와 아놀드 장군을 지휘관으로 보낸다. 몽고메리 장군은 빠르게 몬트리올을 점령하며 캐나다 측 지휘관인 칼튼 장군이 간신히 피신한 퀘벡 시를 공격하기 이전, 물자가 부족하여 보급병력을 지휘하던 아놀드 장군을 기다렸는데....메인 주에서 병력을 보트에 태워 강줄기를 통하여 빠르게 퀘벡으로 이동시키려 했던 아놀드 장군은 거센 강물 때문에 빠른 이동은 커녕 대부분의 보트가 침몰하는 참사를 겪었고 퀘벡에 든든한 보급병력 대신 대부분의 병력을 잃고 거의 굶어 죽어가는 군사 600명과 함께 도착한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물자는 부족한데 겨울이 가까워지며 폭설이 내리기 시작한다. 이 상황에서 두 장군은 무리하게 퀘벡 시 공격을 강행하였고 당연하게도 결과는 대패. 이 전투에서 대부분의 병사들과 몽고메리 장군을 잃었으며 아놀드 장군 역시 부상을 입고 퇴각한다. 그 후 미국은 1776년에 추가 병력을 퀘벡에 보냈으나 칼튼 장군은 오히려 마침 군 내에서 천연두가 돌아 사기가 많이 떨어진 독립군에게 반격을 가하여 퀘벡 밖으로 몰아낸다. 퀘벡을 공격한 것으로도 모자라 점령한 몬트리올 주민들에게 횡포를 부렸던 미국 독립군은 이미지가 크게 추락하여 그나마 캐나다에서 소수인 독립군 지지자들도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된다.
독립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약 75,000명의 미국 내 왕당파(영국 지지자)들이 캐나다로 피신하여 캐나다는 명실상부한 친(親)영국 국가가, 미국은 반(反)영국 국가가 되었다. 그 후에는 서로 평화롭게 왕래하는 시대가 왔으며 특히 캐나다 동부가 비옥하여 미국의 농부들이 캐나다로 오기도 하였다.

4.3. 식민지 정부 설치


미국 독립전쟁에서 패배한 영국이 미국의 독립을 승인한 이후, 영국은 남은 영국령 북아메리카의 행정을 재편했다.
영국 의회는 1791년 헌법 (Constitutional Act of 1791)을 제정해, 당시 캐나다에 위치한 영국 식민지를 현재 퀘벡 주에 해당하는 프랑스계 지역 하류 캐나다(Lower Canada)와 현재의 온타리오 주에 해당하는 영국계 지역 상류 캐나다(Upper Canada)라는 2개 주로 나누고 2개 주가 각자 주 정부를 형성하여 영국의 허락 아래 자치적인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을 허용했다.[4] 영국 본국은 부총독(Lieutenant Governor)을 임명해 본국에서 파견을 보냈고, 부총독은 현지의 행정을 도맡을 장관들을 임명했다. 더불어 현지 주민들로 구성된 의회가 차려져 부총독에게 민의를 전달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상캐나다와 하캐나다의 통치는 부총독과 그의 내각의 독재(?)나 다름없었다.

4.4. 미영전쟁


자신들을 이기고 독립을 한 미국이 찝찝하게 보였던 영국은 나폴레옹 전쟁이 터지자 영국군 탈영병들을 수색한다는 이유로 미국 상선들을 맘대로 수색하여 압수하고 미국인 상인들을 탈영병으로 몰아 영국군에 강제로 징집하거나 프랑스군과 내통한다고 몰아서 미국 상선들에 발포까지 한다. 이에 화가 난 미국인들 가운데서 영국과 다시 싸우자는 강경파 여론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때문에 당시 영국령 국가였던 캐나다는 다시 미국을 경계하게 되며 두 나라의 분위기가 험악해진다. 당시 초강대국대영제국을 형성했던 영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것은 미국에게는 그림의 떡이었고 미국은 영국이 나폴레옹과 싸우느라 다른 곳에 파견할 여유 병력이 부족한 틈을 타 선전포고는 영국에 하고 캐나다를 공격하여 미영전쟁(1812년 전쟁, War of 1812)이 발발한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영국의 지원 병력이 없던 캐나다는 속수무책으로 밀리며 미국에게 오대호 지역과 토론토, 그리고 몬트리올까지 내준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준비한 전쟁으로 공격하던 미국 역시 준비가 잘 안된 상태였으며, 특히 영국의 지원을 받으며 미국의 원주민 탄압에 대항하던 족장 테쿰세가 본격적으로 캐나다 방어를 도우면서 전쟁은 미국이 원하지 않았던 장기전으로 돌입하였다. 결국 미국의 우려대로 그 시간 안에 영국은 나폴레옹을 잡고 눈길을 캐나다로 돌리게 되고 오히려 캐나다에 병력을 파견하여 미군을 몰아낸 뒤 미국 본토를 침공한다.
영국/캐나다 군은 순식간에 '''뉴욕'''을 함락시키고 빠른 속도로 남진, '''수도 워싱턴 DC를 점령하고 백악관까지 불태워 버린다.''' 미국 역사상 워싱턴 DC가 적군에게 점령당하고 백악관이 전소한 적은 이때가 유일하다.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수도를 털어 버렸다는, 어느 누구도 달성하지 못한 업적에 대해 캐나다인들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미군의 반격도 거세서 영국군은 결정적인 승리없이 각지에서 큰 피해를 입었고 해전에서도 미군은 의미있는 승리들을 거둔다. 이렇게 교착상태에서 나폴레옹의 엘바섬 탈출로 대 프랑스 전쟁이 다시 발발하자 상황이 급해진 영국과 더 전쟁을 해서 좋을게 없던 미국은 급하게 종전협약을 맺는다.

4.5. 각지의 반란들


상캐나다/하캐나다 식민지 정부는 실질적으로 영국에서 파견된 부총독과 그의 내각의 독재가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통치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하캐나다(퀘벡)의 경우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프랑스계가 권력에서 소외되고 현지의 소수 영국계가 권력을 독점했는데, 이에 많은 프랑스계가 불만을 품었다. 상캐나다(온타리오)라도 사정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영국계 내부에서도 교파가 다양했는데, 성공회 교도 중심으로 이루어진 상캐나다 식민지 정부가 이외의 주민을 차별한 것이다.
이에 1830년대 캐나다에는 수많은 현지 주민들의 반란이 있게 된다. 1837년과 1838년에 퀘벡에서는 독립을 요구하는 반란이 일어났다가 무참하게 진압되었고, 온타리오에서도 1836년에 반란이 일어났다가 철저하게 진압당했다.
영국 정부는 반란을 계기로 하캐나다의 프랑스계를 영국인으로 동화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퀘벡에서 프랑스어를 금지하는 초강경 정책을 도입한다.

4.6. 더램 보고서(Durham's Report)


영국 정부는 영국령 북아메리카 식민지의 잇다른 반란에 놀라 제1대 더램 백작 존 램턴(John Lambton)을 캐나다에 파견해 캐나다 식민지 통치의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해 보고서를 올리도록 했다. 이렇게 하여 더램 보고서(Durham Report)가 발간되었다. 보고서에서 그는 영국 정부의 양캐나다 통합 정책에는 찬성하면서도 현지의 민심을 무시하는 식민지 정부와 프랑스어 탄압 정책은 지속적인 반란을 낳을 것이라 경고했다.
더램 보고서는 영국 정부에 큰 논란을 일으켰다. 토리당 인사들은 그의 자유주의적 사고관이 담긴 주장을 반대하였지만 영국 정부는 그의 보고서를 받아들여 1841년에 상캐나다 정부와 하캐나다 정부를 하나(Province of Canada)로 통합하고 그 휘하에 서캐나다(Canada West/온타리오), 동캐나다(Canada East/퀘벡)이라는 휘하 행정구역을 두었다. 그리고 이전처럼 총독을 캐나다 현지에 파견하되 행정권은 현지 의회에서 선출한 총리와 장관들이 행사하도록 했다. 이는 영국 식민지에서 최초로 있는 책임정부(Responsible Government/자치정부)의 구성이었다. 물론 프랑스어도 다시 허용되었다.
양 정부의 통합으로 통합 캐나다의 수도를 정해야 했다. 당연히 온타리오와 퀘벡은 자신들의 영역에 수도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이에 따라 캐나다 주 정부는 킹스턴, 몬트리올, 토론토, 퀘벡 시티 등으로 이리저리 옮겨다니다가, 빅토리아 여왕의 중재를 통해 온타리오 소속이지만 코앞에 퀘벡이 있는 도시 오타와가 수도로 정해졌다.
한편 캐나다 주와 같은 이유로 별도의 식민지가 꾸려져 있던 노바스코샤,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뉴펀들랜드, 뉴브런즈윅에도 자치 정부가 구성되었다.
이 시기에 각지에서 캐나다(온타리오, 퀘벡, 동부 지역)로 향하는 이민이 본격화되었다. 마침 아일랜드 대기근이 터지는 바람에 아일랜드인이 캐나다로 유입되었고, 영국에서도 수많은 하층민들이나 고아들이 캐나다로 유입되었다. 한편 캐나다에서는 18세기에 노예제가 폐지되었기에 미국의 일부 흑인 노예들도 혹독한 착취를 피해 캐나다로 도망쳤다. 특히 미국에서는 흑인 노예들을 다시 잡아들이려 노예 사냥꾼을 캐나다에 파견하기도 했는데 이들이 캐나다에서 깽판을 부려 외교 문제가 되기도 했다.

4.7. 브리티시컬럼비아


한편 별도의 정부가 꾸려지지 않았던 캐나다 서부 및 루퍼츠랜드, 북서부 변경 지역에도 이민자들이 서서히 유입되었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지역은 태평양에 맞닿아있어 온타리오나 퀘벡에 비해 개척이 늦었지만, 제임스 쿡 선장의 항해를 통해 브리티시컬럼비아 지역이 어느 정도 알려지고, 이에 따라 일부 이민자들이 밴쿠버 섬에 자리잡으면서 밴쿠버 섬에 식민정부를 수립했다. 얼마 못 가 브리티시컬럼비아 내륙부에 금이 발견되었고, 이에 따라 내륙으로도 이민자들이 유입되면서 영국 정부는 재빠르게 브리티시컬럼비아 지역에 식민정부를 수립한다. 밴쿠버 섬 식민정부가 재정난을 겪으면서 이 두 정부는 하나의 식민정부인 브리티시컬럼비아로 통합된다.

5. 캐나다 자치령 창설


1800년대 들어 미국이 발전하면서 영국은 캐나다 지역이 미국에 합병되는 것을 막기 위해 식민지의 행정, 정치적 통합에 나섰다. 이에 따라 퀘벡, 온타리오, 뉴브런즈윅, 노바스코샤의 4개 주로 이루어진 캐나다 자치령이 1867년 형성되었다.
영국 정부가 희망했던 것은 영국령 북아메리카(캐나다 전역) 전체가 하나로 통합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로 다른 경위로 구성된 캐나다 주(온타리오, 퀘벡)와 뉴브런즈윅, 노바스코샤,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뉴펀들랜드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보여 제대로 된 통합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캐나다의 식민지인들은 미국미국-멕시코 전쟁을 벌이고 명백한 운명 등의 주장을 하는 걸 보고 점차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미국이 엄연한 주권국 멕시코도 찍어누르고 땅을 뺏고 그것을 명백한 운명으로 정당화하는 것을 보면서 자신들도 멕시코와 똑같은 신세가 되리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더군다나 남북전쟁이 일어나면서 일부 북군의 아일랜드인 병사들이 영국령 캐나다에 침입해 난동을 피운 것을 계기로 영국령 북아메리카 식민지 통합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다. 1864년에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정부가 있는 샬럿타운에서 영국령 북아메리카 식민지 정부 대표들이 모여 통합을 논의했고 마침내 캐나다 주, 뉴브런즈윅, 노바스코샤는 통합에 합의를 보았다.
1867년에 영국 의회에서 영국령 북아메리카법 (British North America Act of 1867)이 통과해 대영제국 최초의 자치령인 캐나다 자치령(Dominion of Canada)이 창설되었다. 상류와 하류 캐나다가 각각 온타리오퀘벡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온타리오, 퀘벡, 뉴브런즈윅, 그리고 노바스코샤 식민지들을 통합해 캐나다라는 이름의 체계적인 대영제국의 자치령으로 승격해 영국 정부의 허가 아래 헌법을 수정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통합된 각 식민지 정부는 자치령 휘하의 주 정부가 되어 상당한 자치권을 가졌다. 캐나다는 이때부터 실질적인 국가가 되었으며 법안이 통과된 7월 1일이 현재 캐나다의 건국을 기념하는 국가 공휴일인 캐나다의 날(Canada Day)로 지정되어 있다. 캐나다 자치령은 1870년에 루퍼츠랜드를 사들였고, 1871년에는 브리티시컬럼비아, 1873년에는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가 연방에 가입하였다. 캐나다는 서부 개척을 시도하여 영토와 인구를 늘리면서 독자적인 발전을 시도했다. 메티스인들과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매니토바 주가 창설되고, 서부 내륙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서스캐처원, 앨버타 주가 창설되었다. 영국령 북아메리카 식민지 중 하나였던 뉴펀들랜드는 캐나다와의 통합을 거부하고 별도의 자치령으로 승격했다가 이런저런 과정을 통해 1949년에 가입했다.
한편 영미전쟁 이후 캐나다와 미국의 관계는 다시 회복되기 시작하였으며 1800년대 초반에는 캐나다 서부에서도 골드러시가 일어나 많은 미국인들이 캐나다로 건너왔었다. 1800년대 후반 부터는 미국의 캐나다보다 훨씬 빠른 산업화로 인해 더욱 더 많은 캐나다 사람들이 미국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으며, 1870년대에는 약 캐나다 인구의 1/6이 미국으로 이주한 적도 있다. 또한 캐나다에 라디오를 통한 미류 열풍이 불어 대부분의 캐나다 라디오 방송 시간을 미국 노래들이 차지하게 되었으며 이 현상이 얼마나 심했던지 캐나다 정부는 캐나다의 예술문화 발전 대책 마련을 위한 여러 협회들과 위원회들을 만들고 캐나다 최초의 방송국을 개국하였는데 이것이 현재 캐나다의 유명한 공영방송CBC의 시초이다. 그와 더불어 이 때부터 여러 미국 기업들이 캐나다에 진출하여 캐나다 시장에서 점유율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6. 영국으로부터의 독립



6.1. 19세기 후반


캐나다 자치령 정부는 내정에서는 완전한 자치권을 얻었지만 외교권과 군사권은 계속 본국 정부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본국 정부와 캐나다의 이해관계 불일치로 인해 캐나다에서는 외교권과 군사권도 가져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당시 영국은 독일 제국의 부상으로 인해 아메리카보다는 유럽 대륙에 점점 신경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 때문에 가급적 미국과의 충돌을 피하고자 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867년과 1903년에 벌어졌던 미국-캐나다 국경분쟁으로, 영국은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와 미국 워싱턴 주, 그리고 캐나다와 미국 알래스카 주 사이에 국경 분쟁이 일어나자 미국의 입장을 많이 들어주는 쪽으로 분쟁을 해결했다. 이는 캐나다인들의 분노를 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1909년에는 외무부가 설치되어 서서히 영국으로부터 외교권을 가져오게 되었다. 1927년에는 워싱턴 D.C. 주재 캐나다 대사관이 처음 문을 열고 미-캐나다 어업 협정도 캐나다 수산 장관이 직접 서명하였다.

6.2. 세계대전


제1차 세계대전 때 캐나다가 영연방의 일원으로서 의무적으로 참전한 것에 대하여 전쟁 초기에 영국계 국민들은 당연히 영국을 도와야한다며 정부의 결정을 상당히 지지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상당한 수의 캐나다인들이 전사하였는데도 모자란 연합군 병력 때문에 정부가 강제로 징병령을 내린 것. 이에 대해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은 크게 반발했다. 이유는
1. 자신들과 관련도 없는 영국을 위해 왜 목숨을 바쳐야하느냐?
2. 퀘벡에서 살던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은 대체로 농부여서 원래 제외였으나, 징병으로 인해 전쟁에 강제로 가야만 했다.
3. 퀘벡 주 이외의 다른 주에서는 프랑스어를 사용할 수 없었기에 자신들이 캐나다의 소수민족 분류에 속하여 있으며 그로 인해 영국계에 비해 차별 대우받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캐나다 병사들이 캐나다군이 아닌 영국군으로서 싸워야 했던 것, 그리고 전쟁에서 캐나다 병사들의 극적인 활약들 등으로 인해 캐나다인들 사이에서 자국에 대한 자부심과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심이 매우 커졌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독가스가 처음으로 쓰인 2차 이프르(Ypres) 전투에서 영국군의 지원이 올 때까지 독가스를 오줌 적신 수건으로 입과 코를 막고 전선을 사수했다. 1차 대전에선 위의 2차 이프르 전투와 비미 전투를 비롯한 다양한 활약을 많이 했는데 덕분에 "스톰 트루퍼"라는 이명을 얻었다. 비미 리지(Vimy Ridge) 전투는 처음으로 작전 입안에서 실제 동원병력까지 거의 95% 이상이 캐나다군이었던, 캐나다가 주도한 첫 전투이다. 부활절 다음날인 월요일, 따뜻한 음식과 럼주로 배를 채우고 전투를 시작했다. 포병의 지원사격을 받으며 1만 5천 명이 제1진을 향해 공격하여, 진흙 구덩이, 철조망, 지뢰를 넘어 노도같이 밀고 나갔다. 반격하는 독일군의 기관총과 포탄은 살인적이였으나, 캐나다 군인을 막기엔 어려웠다. 그들은 너무나 저돌적으로 공격한 나머지, 최전방 방어선을 넘었는지도 모른 채(...) 제2차 방어선으로 진격하여 무너뜨린다. 이 전투에서 거둔 전과는 '온타리오 주 파병 군단', '매니토바 주 파병 군단'인 식으로 구분되던 캐나다군이 처음으로 '우리는 캐나다군'이라는 동질감을 느끼게 한 계기가 되었으며, 캐나다 국민들에게도 실질적으로 '캐나다인'이란 정체성을 확립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 전투 이후 1차대전 당시 캐나다군이 항상 입에 달고 다녔던 말이 "Who won at the Vimy?"였을 정도로 이 전투에 대한 캐나다인들의 당시 자부심은 대단했다. 영국군이고 프랑스군이고 왕창 깨졌던 곳인데 캐나다군은 그에 비교도 안 되게 적은 희생으로 요충지를 점령한 것이다.
때문에 1차 세계대전 후 승리한 연합군 국가들이 패전국들과 맺었던 베르사유 조약에서 캐나다는 영연방의 자치령 국가라는 영국의 관계국이 아닌 캐나다라는 국가로서 조약을 체결할 것이라 주장하여 관철되었으며 국제연맹에도 자발적으로 가입하였다. 한편 자치령은 본국 정부에 피흘려 싸운 대가를 요구했고, 이에 본국 정부가 1931년웨스트민스터 헌장을 제정해 외교권과 군사권을 넘겨줌에 따라 캐나다는 실질적인 독립국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에는 1차 대전 때처럼 영연방의 일원으로 의무적으로 참전한 것이 아니라 국회에서 회의를 통해 직접 참전을 결정하였다. 캐나다군은 2차대전에서도 큰 활약을 보였다. 1943년 12월, 이탈리아 전선의 오르토나라는 마을에서 독일 공수부대를 상대로 큰 고전을 했는데, 마을의 구조가 좁은 골목과 길거리로 구성되어 있었고 독일군이 사방에서 매복했기 때문이다. 즉, 길거리만 나오면 저격수와 기관총 사수가 버티고 있었단 소리. 그래서 새로운 전술을 사용했는데, 이름하야 쥐구멍(mousholing) 전술이다. 적이 안보이는곳에 폭탄으로 구멍을 뚫어 진입로를 만들고, 그걸 건물 건물 마다 적용해서 모든 건물의 안전한 통로를 잇는것이 바로 그 전술이다. 이는 상당히 효과적으로 쓰여서 현대 시가전에서도 쓰일정도. 대테러전에서도 자주 쓰이는데 주요 진입로인 문과 창문에만 적들의 신경이 집중되어 있어서 벽을 폭파하고 진입하면 기습의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또한 2차 세계대전 서부전선의 터닝포인트인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도 큰 활약을 했다. 미군이 담당했고 몇시간만에 전사자만 3000명 이상이 나와 유명해진 오마하 해변보다는 덜 유명하지만, 주노 해변에 상륙한 캐나다군은 상륙한지 불과 15분(!)만에 독일군의 저항을 분쇄하여 해변을 점령하고 더 나아가 우회기동하여 영국군이 고전하고 있던 골드 해변의 후방을 차단하고 조여들어가 독일군을 포위 섬멸하였다.(...) 이 덕분에 영국군은 1시간이나 먼저 상륙을 시작한 미군보다 더 빨리 해변을 장악할 수 있었다. 당시 사상자 수를 보면 골드 해변의 영국군 사상자가 약 400여명, 주노 해변의 캐나다군 전사자가 359명에 부상자가 574명이였고, 소드 해변의 영국군 및 자유 프랑스군은 683명의 사상자를 기록하였으며, 유타 해변에서는 200여명의 사상자만을 기록했다. 즉 캐나다군이 상륙한 주노 해변의 방어가 허술해서 15분만에 해변을 장악한게 아니라 오히려 사상자 수로는 오마하 해변 바로 다음이었을 정도로 저항이 거센 해안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15분의 기적은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냥 악과 깡으로 해냈다는것. 대전 기간에 윈스턴 처칠은 "나에게 캐나다 병사와 미국의 기술력, 영국의 장교들이 주어졌다면 세상을 지배할 수 있었을 것이다."[5] 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는데, 그만큼 캐나다 병사들의 전투력이 뛰어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세계대전을 통해 캐나다는 독립국가로서의 위상을 키워나갔다. 1956년 수에즈 전쟁 당시 중립과 평화를 주장하여 영국의 파병 요청을 거절한 사건이 캐나다가 과거에 비해 영국에 대한 군사/외교적 독립성을 갖췄음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 때만 해도 캐나다는 명목상 자치령으로서 헌법 수정안을 통과시킬 때마다 명목상 영국 정부의 허가를 받는 것이 필요했는데, 1982년 영국과 캐나다에서 동시에 캐나다 법 (Canada Act 1982)이 제정되어 영국 의회의 허가없이 자치적으로 캐나다만의 헌법을 만들고 수정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법이 통과되어 캐나다는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게 되었다.

7. 현대사



7.1. 냉전


한편 캐나다 옆에 있었던 미국은 세계대전을 통해 세계 최강대국이 되었고, 미국과 국경을 맞닿은 캐나다는 그 영향을 크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이 주도하는 냉전이 벌어졌다. 캐나다는 되도록이면 중재 외의 이유로 국제 분쟁에 끼지 않기를 원했다. 그러나 미국은 캐나다 정부에게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달라고 하거나 캐나다에 소련을 견제할 핵미사일 기지를 건설하는 것을 허락해 달라는 등의 적극적인 군사적 협조를 요구하였으며, 또한 캐나다 정부의 허락 없이 캐나다에 영향을 줄 수도 있는 외교적 행동들을 독단적으로 감행하며 캐나다와 마찰을 빚었다. 캐나다의 피에르 트뤼도 총리는 워싱턴 DC 방문 당시 "당신네들 옆에서 사는 것은 마치 큰 코끼리와 자는 것 같군요. 당신들이 아무리 친절하고 얌전한 맹수라고 쳐도 그 옆은 움찔거리거나 잠자는 소리 하나하나가 신경쓰이니까요."라며 대놓고 미국을 까는 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미국을 코끼리에 비유하며 미국이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행동 하나하나가 캐나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데도 미국은 아무렇게나 행동한다는 뜻의 연설이다.
특히 이러한 갈등은 베트남 전쟁 때 극에 달했다. 캐나다는 베트남 전쟁 파병을 거부하고 미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기피자들의 망명을 받아주는 등으로 미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냉전시대 당시 캐나다는 상공 방어를 위해 에브로 애로우(Avro Arrow)라는 당시 세계 최첨단 기술의 초음속 전투기를 개발하던 중이었는데 거의 완성 단계까지 왔던 이 전투기 개발 프로젝트는 갑작스럽게 취소되며 백지화 되었다. 이에 정부는 예산 문제 때문에 취소되었다 발표하였으나 아직도 프로젝트가 취소된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며 여기서 당시 자신들을 능가하는 군사 기술력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이 캐나다 정부를 압박했다는 음모론도 존재한다.
소련의 붕괴로 냉전시대가 끝나고 미국이 캐나다에 군사적 요구나 행동을 하는 것도 줄어들음에 따라 냉전시대 이후 때 부터 현대까지 다시 관계를 회복하게 되었다.

7.2. 퀘벡 독립운동


한편 프랑스계가 주류를 차지했던 퀘벡에서는 20세기 초까지도 전근대적, 가톨릭적 구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1960년대부터 '조용한 혁명'(Révolution tranquille)으로 일컬어지는 급격한 근대화, 세속화 과정으로 말미암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변모했다.
2차 대전 이후 처음으로 집권한 퀘벡 자유당(Parti libéral du Québec, PLQ)은 주 정부 주도의 강력한 경제 개발을 실시하며 퀘벡의 경제 주도권을 영국계로부터 빼앗기 시작한다. 특이하게도 퀘벡 자유당은 중도우파를 표방하나 일부 정책들에서 사민주의 색채를 띠기도 한다. 그 중 대표적인 예가 영국계들이 소유하고 있던 수력 발전회사인 '이드로 케베크'(Hydro-Québec)의 국유화였다. 정교분리 정책이 이루어져 사회적으로 가톨릭 교회가 담당하고 있던 교육, 의료 부문을 정부가 통제하기 시작하였으며, 프랑스어의 사용이나 프랑스계 문화 보존에 대한 법률이 지속적으로 통과되었다. 사회 복지와 노조에 대한 지원도 확대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조용한 혁명으로 불리며, 퀘벡의 프랑스계들이 스스로를 프랑스계 캐나다인이 아닌 퀘벡인으로 인식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퀘벡의 독립운동으로도 이어졌다. 연방정부는 독립 열기를 완화하기 위해 퀘벡에 대해 상대적으로 많은 국회 의석, 문화/언어적 인정, 국영 가톨릭학교 제도 등 여러가지 정치적 편의를 제공하였다. 그리고 1969년 7월 7일에는 연방정부 차원에서 공용어에 대한 법이 도입되어 프랑스어가 모든 연방정부의 영역에서 영어와 동등한 위치를 획득하였다.
그럼에도 1970년에는 과격 독립운동 단체인 퀘벡 해방전선(FLQ)은 몬트리올에서 퀘벡 지방 내각 관료인 피에르 라포르테와 영국 외교관 제임스 크로스를 납치(!)하는 엄청난 짓을 벌였고, 이에 당시 총리였던 피에르 트뤼도 총리는 전시조치법을 발동하고 계엄령을 내려 사태를 강경 진압한다. 이 사건으로 FLQ는 해체되었다.
급진적이고 폭력적인 퀘벡 분리 운동은 주류에서 멀어져 서서히 막을 내리게 되고, 투표를 통해 합법적으로 독립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게 된다. 이로서 1980년과 1995년 두차례에 걸쳐 퀘벡 주에서 분리독립 투표가 이루어졌다. 첫 투표는 40:60으로 꽤 큰 차로 부결되었지만, 두 번째(1995년) 투표에서는 49:51로 근소한 차로 독립이 부결되었다.

7.3. 지금의 캐나다


1993년 진보보수당의 브라이언 물로니가 사임하면서 킴 캠벨이 최초의 여성 총리의 자리에 올랐으나 총선에서 자유당에게 참패하는 바람에 임기는 몇 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해당 선거로 자유당의 장 크레티앵이 총리에 당선되었으며 또한 퀘벡당이 대약진해 제2당의 자리에 올라 2차 분리 독립 투표가 이뤄졌으나 상단에서 언급되었듯 근소한 차로 독립이 부결되었다. 크레티엥 정부는 이라크 전쟁에는 반대하였으나 코소보 전쟁이나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파병하는 등 국제 분쟁에 관여하였다.
2003년 캐나다의 온타리오 주가 동성결혼을 합법화했고, 이후 다른 주와 준주들 또한 합법화의 추세를 이어갔다. 2005년 폴 마틴 총리의 자유당 정부가 발의한 시민결혼법(Civil Marriage Act) C-38호 법안이 통과됨에 따라 전국적으로 동성결혼이 합법화되었고, 이에 캐나다는 세계에서 4번째로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국가가 되었다.
이후 2007년 취임한 보수당의 스티븐 하퍼 총리는 경제적 이유를 들며 교토의정서를 탈퇴하였고 보수 표심이 강한 알버타 주의 석유 산업에 크게 투자했다. 그러나 미국의 셰일 가스로 저유가 시대가 도래하며 캐나다 경제는 큰 타격을 맞아 표심을 크게 잃었고 결정적으로 2015년에는 F-35 도입 관련 스캔들로 의회가 내각불신임결의을 제출하자 그해 8월 의회해산을 선언하고 총선거를 실시했다가 자유당에게 참패하여 쥐스탱 트뤼도 총리의 당선으로 이어졌다. 아버지 피에르 트뤼도에 이어 총리가 된 트뤼도 총리는 젊고 진보적인 공약으로 세계적 관심을 모았는데, 그러한 행보로는 남녀 동수 내각, 레지덴셜 스쿨 등 과거사의 사죄, 시리아 난민 수용, 그리고 오락용 포함 대마초 전면 합법화 등이 있다. 또한 경제적으로는 향후 5년 동안 적자를 내서라도 돈을 많이 써서 경제를 부양하겠다는 정책을 발표했다. 이는 스티븐 하퍼의 지도 아래 셰일 가스로 위시되는 에너지 산업에 치중했던 캐나다의 경제 구조를 바꾸는 것이 최종 목표로 보인다. 또한 중산층에게 부과하던 세금을 줄이고, 1% 부유층에게 세금을 더 거두겠다고 밝혔다.
한편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하여 캐나다도 역시 큰 경제적, 사회적 타격을 받았다. 2020년 10월 기준 194,000여명의 확진자와 9,700여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물론 아랫동네에 비하면야 어마어마한 선전이긴 하지만(...) 코로나19로 인한 국제적 경제 침체는 캐나다에도 큰 악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21세기 캐나다는 경제사회적으로 안정적인 선진국임과 더불어, 영국계와 프랑스계의 문화와 언어가 법적으로 동등한 위치를 가지는 것과 동시에 이민자들의 다양한 문화들이 모자이크처럼 어우러지며 인종, 성별, 종교, 성적 특성 등으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국가적으로 천명된 나라이다. 이에 캐나다는 다문화주의의 성공 케이스로 세계의 이목을 받으며 캐나다인들 스스로도 다양성에서 국가적 정체성을 찾는다. 이는 2010년대의 서방 세계의 우경화에도 불구하고 꺾이지 않는 추세라는 것에서 주목할만 하다.

8. 근대 캐나다 원주민의 역사


'명백한 운명'으로 대표된 이주자들의 확장과 그에 맞선 원주민의 생존을 건 정면 무력충돌이 끝없이 이어지던 미국과는 달리, 캐나다는 정부 주도의 원주민 학살은 적은 편이었다. 물론 베오투크 족이나 크리 족 등 일부 원주민 부족들에 대한 백인들의 학살도 존재했으나[6] 미국에 비하면 정부 주도하에 학살 정책이 이뤄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백인들의 이민 이후 캐나다에서 좋은 대접을 받은 것 또한 아니었다. 캐나다의 백인 이주민들은 원주민들로부터 모피를 구입하고 그 대가로 술과 총을 주었는데, 총을 사용하게 된 원주민들은 모피 원료가 되는 동물들을 재생 가능한 속도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학살하여, 모피 동물 자원이 고갈되기 시작했고 술이 필요했던 원주민들은 다시 충분한 양의 모피를 획득하기 위해 이웃 원주민들의 거주 지역을 쳐들어가 점령하여 새로 점령한 지역에서 모피 동물을 사냥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노예들은 캐나다의 프랑스, 영국 식민지로 팔려갔다.

8.1. 원주민 부족들과의 토지 계약


캐나다 내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부족들마다 종족에 달랐지만, 원래는 영토의 소유에 대하여 내 땅, 네 땅과 같은 개념이 강하지 않았다. 그래서 영국계 개척자들과 땅을 공유한다는 계약서를 쓰게 되는데, 원주민들은 이들이 기껏해야 몇 백 명 남짓 하겠거니... 하고 생각하고 있었고, 원주민들도 연합체가 아닌 부족국가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살았으며 서로 말도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영국계 캐나다인들이 데려온 원주민 통역사들과도 말이 달라 계약을 하긴 했지만 계약에 대한 이해도가 매우 부족했다. 그래서 다른 부족들보다는 상대적으로 유리하게 계약을 체결해 땅 공유의 대가로 연금을 몇 백 년간 받는데 어느 부족은 아예 쫒겨나서 살기도 했었다.
연금을 받는 대가로 원주민들은 땅을 내주고 보호구역에 물러나 살게 되었는데, 좋은 땅은 백인들이 다 차지하고 보호구역은 황무지인 경우가 많았고, 또한 원주민 보호구역은 캐나다의 인프라 사업에서 소외되어 현재에는 흙밭에 다 비포장도로, 부실한 전기사정, 1800년대에 지어진 공동주택이 뜨문 뜨문 지어져 있는 생지옥이다. 그리고 여기서 나오는 순간 연금을 받지 못하게 된다. 인프라가 부족하니 생필품도 도시와는 다르게 적게는 5배, 많게는 20배 이상 비싸다. 5불 짜리 치즈 스프레드 1통은 20불, 도시에서는 2불짜리 양배추 하나가 원주민 구역에서는 40불이나 비쌀 정도다.
계약 초기에는 마을이라고 불릴 것도 주변에 없으니 공돈을 준 것 같아 만족했겠지만, 이는 원주민 공동체로 하여금 농사도 지을 필요가 없게 만들었고, 그들이 직업을 가질 이유도, 가져야 한다는 의무감도 없어지게 만들었다. 계약서 한방에 원주민들을 영국과 캐나다가 발행하는 화폐와 시장이 없으면 모조리 죽어야 하는 사람들로 만들었다.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대개 정주민이 아닌 유목민 생활을 해온 만큼 보호구역이라는 존재 자체가 수렵과 채집에 의존하는 원주민 부족들로 하여금 생활이 대단히 고달프게 만드는 정책이기도 하였다. 영국령 캐나다 정부를 상대로 한판 붙어보겠다는 생각이 아니면 그냥 잠자코 주변 RCMP와 인디언 관리당국이 진주한 기지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이 세운 정착지에 생긴 시장에 의존할 수 밖에 없기도 했다.

8.2. 레지덴셜 스쿨


캐나다 정부는 자립 능력을 잃어버리고 정부에 의존하게 된 원주민들에 대한 탄압과 동시에 강압적 동화 정책을 시행하여 원주민 사회에 악영향을 남겼다. 일단 원주민들을 '개화'하는 작업에 착수했는데 그 일례로 Residential School이 있다. 캐나다는 반란과 영국계를 향한 민족 분쟁의 빌미 자체를 없애기 위해 국가 구성원 전체가 같은 국가관과 여러 동질성을 공유하기를 원했으며, 이를 위해 영국계 캐나다인의 가치관을 원주민들에게 주입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조직적으로 설립된 Residential School이라는 학교를 본딴 기관을 통해 동화하려고 하려고 했으며, 초기에야 들어오면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으니 들어와라~ 하는 식이었지만, 이후에는 RCMP[7] 전신인 NWMP(North-West Mounted Police)와 Dominion Police를 앞세워 무력까지 동원해 가며 강제로 납치해 입학시켰다. 학교에서는 영어만 사용할 수 있었으며, 이름도 영국식으로 바꾸었고, 강제로 머리카락이 잘렸으며, 옷도 "백인"들처럼 입게 했다.
학교라는 말이 무색하게 교육 과정은 고작 3~4학년 수준으로 매우 낮았는데, 이는 원주민들을 "비문명적 미개인"으로 보는 관점에 의하였다. 대부분 학습보다는 "문화 교정"을 받았으며, 자신의 문화와 관련된 행동을 하면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결국 학교를 졸업한 후의 원주민들은 더 이상 원주민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주변 백인 사회에서 동등한 "캐나다인"으로 인정해주지도 않아 정체성 혼란을 겪었다. 몇몇 원주민들은 자신의 문화와 관련된 행동을 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느끼기도 했고, 이로 인해 원주민 문화가 전승되지 못했다가 요즈음에 들어서야 학자들에 의해 겨우 보존되고 있다. 원주민 언어 사용자들의 수는 급감했고, 원주민이라는 정체성이 희석됨에 따라 원주민 사회의 협동력이 떨어졌다. 또한 학교나 교회를 개조해 만들어진 급조 학급들에서 교사 역할을 했던 백인 선교사들은 어린 소년소녀들을 자주 강간했으며, 이 때문에 원주민들은 지금도 백인 기독교 선교사들에 대한 시각이 좋지 못하다.
또한 어릴 때부터 부모와의 강제로 떨어지고 가혹한 1900년대의 기숙사 생활과 이유 없는 인종차별, 강간은 원주민들 대부분에게 정신적인 충격을 강하게 안겼으며, 그들에게 성격장애알코올 중독, 조울증을 안기는건 기본이고, 이들이 후에 가정을 형성하고 그들의 가정에서 가정폭력이 흔하게 일어나게 되는 이유가 된다. 또한 강간에 대한 심각성을 알지 못해 치안 부재와 더불어 여성 인권의 하락을 야기했다. 이 Residential School은 1840년도에 처음 생겨나서 1996년에 마지막 학교가 폐쇄되었다.
2008년 6월 11일에 당시 스티븐 하퍼 정부가 처음으로 이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이후 쥐스탱 트뤼도 현 총리도 공식 사과했다. 실제 캐나다에서는 중고등학교에서 원주민 탄압의 역사를 빠짐없이 가르치며 선조들이 벌인 잘못을 잊지 말자고 강조한다. 또한 스티븐 하퍼와 쥐스탱 트뤼도의 사과 연설을 들으면 알 수 있듯 캐나다의 치부인 레지덴셜 스쿨에서 행해진 모든 악행들(납치, 폭행, 강간, 학대 등등)을 일일이 거론하며 사과하였다.

8.3. 원주민들의 현황


여전히 원주민 보호구역의 개선은 이루어지고 있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일례로 캐나다 내 원주민 보호구역들은 불법 마약인 펜타닐매독 그리고 에이즈 등이 판을 치고 있으며, 국민으로서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기반 시설과 깨끗한 물조차 받지 못한 채, 광견병 걸린 들개들과 집을 도박으로 잃어버린 거지들이 슬럼을 형성하였다.
캐나다 북쪽의 이누이트들도 살기에 힘든 것은 마찬가지. 알레시아 아만쿡 바릴 감독의 다큐멘터리 앵그리 이눅(Angry Inuk)을 통해 소개가 된 바 있는데 고질적인 기아와 빈곤은 해결될 기미도 보이지 않고, 그나마 근근이 먹고 살던 물개 사냥(Seal Hunting)도 유럽의 물개가죽 금지로 인해 먹고 살기도 막막하게 되었다.
오랜 기간 이루어진 식민주의와 인종주의의 역사를 바탕으로 한 이러한 환경 속에서 원주민들은 아직까지도 다른 이민계 캐나다인들에 비해 더욱 열악한 삶을 살고 있다. 이러한 캐나다 정부의 무관심 속에 눈물의 고속도로 연쇄살인 사건과 같은 참혹한 일도 현재 진행형으로 일어나고 있으며, 원주민 보호구역을 두고 캐나다 파이프라인에 대한 논쟁도 거세게 일고 있다.
최근에는 자치 사회를 지탱해오던 생명줄인 연금이 계약상 만기에 달해 아예 끊길 예정이다. 이런 문제가 현실화되기 직전이지만 캐나다 정부와 원주민 커뮤니티들은 현실적인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1] 이 '왕의 딸들'을 소재로 한 소설이 있다.[2] 노바스코샤 주의 일부[3] 미 남부 지역 사람들은 이들을 케이준이라고 부름. 아카디안의 프랑스어 발음 (l'Acadien) 의 와전이다.[4] 여기서 상류와 하류라는 명칭은 신분적 의미의 상류와 하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두 주를 지나던 세인트 로렌스 강의 상류와 하류를 뜻하는 것이었다. 덕분에 하류 캐나다는 상류 캐나다 보다 북쪽에 위치하여 있으면서 이름에 하류가 들어가는 헷갈리는 명칭으로 특히 캐나다 역사 시험 때 고등학생들을 괴롭히게 되었다(...)[5] 원문은 If I had Canadian soldiers, American technology, and British officers I could rule the world.[6] 특히 베오투크는 아예 백인 개척민들의 토벌에 완전히 멸족되고 말았다.[7] 미국인들과 해외에서 오는 포경업자들이 캐나다에서 깽판치고 난리도 아닌데, 끽해야 권총이나 든 유럽식 경찰 가지고는 제압에 무리가 있겠으니 헌병대 비슷하게 만들어야 겠는데 이름을 군대처럼 하면 프랑스인들과 원주민들이 반발해 폭동을 일으킬테니 경찰처럼 이름을 지어 만든 경찰대다. 예전에는 그런 이유로 만들어서 휘하에 라이플로 무장한 보병들, 기병대, 포병대(...)까지 끼고 다녔지만 지금은 미국의 FBI와 같은 연방경찰의 업무를 수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