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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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언론인이자 정치인. 제21대 국회의원 300인 중에서 최다선인 6선[4] 이며, 제21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이다.
2. 생애
1952년 충청남도 대전시(현 대전광역시)에서 출판인 박홍구[5] 의 3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6] 대전고등학교, 성균관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7] 1975년 중앙일보에 입사하여 사회부 기자, 경제부 기자, 홍콩 특파원, 정치부 차장, 산업부 부장 등을 역임했다. 특히 홍콩 특파원 시절인 1989년에 '''천안문 사태를 취재'''하여 '중국 자오쯔양 총리 체포 구금 기사'로 세계적인 특종을 했고, 이 공로로 같은 해 한국기자상을 수상했다.
2.1. 정치 활동
1998년 4월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여 수석부대변인과 정책위 부의장을 지냈고, 1999년에는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에 임명되어 2000년까지 역임하였다. 1998년 재보궐선거 경기 광명시 을, 1999년 재보궐선거 서울 구로구 을에 출마하려 했지만 각각 조세형, 한광옥이 공천되면서 출마가 좌절되었고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고향인 대전광역시 지역구 중에서 서구 갑 선거구에 새천년민주당 공천을 받아 현역 국회의원인 자유민주연합 이원범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이후 새천년민주당에서 원내부총무, 대변인 등을 역임하였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노무현 당시 새천년민주당 후보의 지지율이 급락하자 정몽준 국민통합21 후보와의 단일화를 촉구하며 후보 단일화 협의회에 참여했으나, 여론조사 경선으로 노무현이 단일 후보로 확정되자 그대로 잔류하였다.[8] 그리고 2003년 새천년민주당 내의 개혁 소장파 세력 대부분이 열린우리당을 창당하자 여기에 참여하는 이례적인 행보를 보이기도. 그렇게 출마한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당선되어 재선이 되었으며, 2006년부터 2008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정무위원장을 역임하였다.
한나라당 이명박이 압도적인 차이로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됨에 따라, 한나라당에 절대적으로 유리했던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통합민주당 간판으로 당선[9] 되면서 '''3선''' 고지에 올랐고 같은 해부터 2009년까지 민주당 정책위의장을 역임하였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역시 민주통합당 후보로 당선되어 '''4선''' 고지에 올랐다. 그리고 2014년까지 제19대 국회 전반기 국회부의장[10] 을 역임하였다.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8년 5월 10일, 20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에 공식 출마했으나 당내 경쟁자인 6선 의원인 문희상 의원에게 패해 탈락했다.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단수공천을 받아 6선에 성공했다. 이석현(6선), 이종걸(5선)이 경선서 탈락했고 이해찬(7선), 원혜영(5선), 추미애(5선)는 불출마를 선언했기 때문에 민주당 현역 최다선 의원이 되었으며, 동시에 21대 국회의원을 통틀어 최다선이 되었다. 민주당이 원내 1당을 차지한 만큼 국회의장이 될 가능성이 높다.
당내는 물론 국회 전체에 6선은 박병석 의원이 유일하고, 5선 급에서는 김진표, 설훈 등이 경쟁자로 언급되었다. # 이후 5월 25일 최다선 박병석 VS 최연장자 김진표의 양자대결로 경선을 치르게 되었다. #
그런데 5월 20일, 김진표 의원이 '많은 고심 끝에 출마하지 않기로 했다' 라고 하여 양보하고 출마하지 않겠다는 뜻에 따라 경선을 치루지 않게 되면서 경선을 치르지 않고 국회의장으로 추대되었다.###
2.1.1. 제21대 전반기 국회의장
2020년 6월 5일, 제21대 국회의 첫 본회의인 379회 국회 임시회에서 총 투표 수 193표 중 191표를 얻어 국회의장에 최종적으로 선출되었다.'''아쉬움 속에 출발한 21대 국회지만, 우리 국회를 마칠 때 국민의 국회, 신뢰받는 국회를 만들 수 있도록 저와 여러분 함께하십시다. 고맙습니다.'''
국회의장으로서 첫 발언.
의장 취임 후, 박 의장 중재로 7일 원내대표 간 원구성 협상 회동을 합의했다.# 이 자리를 앞두고 박 의장은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 내가 결단을 내리겠다."'''고 강조했다.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 자리를 두고 민주당 김태년, 통합당 주호영 원내대표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우선 상임위 정원 수를 개편하는 방향을 우선 합의 처리하는 쪽으로 방향을 정했다. #
2020년 6월 15일, 법사위, 기재위, 산자위, 외통위, 국방위, 복지위 6개 상임위를 우선 배정하고 상임위원장 선출을 진행하도록 했다. 나머지 12개 상임위는 일단 비워뒀다. # 이후 6월 15일에 미선출한 상임위원장 선출을 위해 6월 19일에 상임위 구성을 마친다했지만, 여야 협의가 다시 무산되면서 예정됐던 19일자 본회의를 다시 무기한 연기했다.
6월 26일에도 양당 원내대표 협상이 타결되지 않자, 또다시 본회의를 29일로 미루었다. 12일, 15일, 19일, 22일에 이어 또 미뤘다. #[11]
6월 29일 오전 마지막으로 협상을 가졌으나, 끝내 여야 합의가 이뤄지지 않자 본회의를 열어 정보위원회를[12] 제외한 모든 상임위원장을 선출했다. 자신의 노력에도 불구, 결국 여야가 합의에 이르지 못한 탓인지 오후 본회의 개회 후 굳은 표정으로 국회의장 및 여야 모두 국민과 역사에 심판을 받을 것이지만, 그 어떤 것도 국민과 국익을 앞설 수 없다는 것이 의장의 확고한 신념이라고 강조했다.
3. 논란
3.1. 대전 집 처분 거짓말 논란
경실련이 박병석 국회의장이 서울 서초구와 대전에 2주택을 보유하며 4년간 23억여원의 시세 차익을 봤다고 발표하자, 박 의장은 "대전 집은 처분한 상태이며 현재는 1주택자"라고 해명해 충청도 사람들로부터 "충청을 버리고 강남을 선택했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청주 집을 버리고 강남 집을 택한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 이시종 충북도지사과 같이 까이게 되었다. #
그런데 그 '처분'했다는 대전 집이 알고보니 아들에게 증여한 것이고, 월세살이 한다는 것은 아들에게 월세를 주고 있던 것으로 밝혀졌다.기사
3.2. 2020년 국회 필리버스터 종결에 대한 투표권 행사 논란
2020년 국회 필리버스터 당시 야당이 국가정보원법 개정안과 남북교류협력법 개정안을 두고 필리버스터를 할 때 여당인 민주당은 이를 중단시키기 위해 필리버스터 종결을 표결에 붙였다. 이때 박병석 국회의장이 전례를 깨고 헌정사상 처음으로 필리버스터 표결에 참여했고, 야당은 국회의장이 중립을 지켜야 할 의무를 버렸다고 비판했다. 특히 국정원법 필리버스터 종결안의 경우 반란표가 나와 180표라는 아슬아슬한 숫자로 가결된 만큼 박병석 의장이 표결을 행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알수 없었기 때문에 더욱 더 논란이 가중되었다.
여기에 대해 박병석 의장 측은 KBS와의 인터뷰에서 "당론의 포로가 되지 말라는 게 평소 박 의장의 소신이며 "국회의원은 개개인이 헌법기관인 만큼 표결 안 하는 게 오히려 국회의원의 의무를 방기하는 것"이라며 야당의 반발을 일축했다. 또한 "역대 의장들은 무기명 투표 안건이 있을 때 다 참여했고 정세균 의장도 박근혜 당시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에 참여했다. 박 의장 역시 의장이 된 후로 지금까지 법안을 비롯해 모든 안건에 투표해왔다"고 설명했다. #
4. 여담
- 앞서 언급했다시피 2002년 대선 당시 후보 단일화 협의회에 참여했다는 점에서 비노무현-비문재인으로 분류되지만[13] 정치 이력상 후단협 참여를 제외하면 오히려 당내 분란에 동조한 일이 전혀 없다.[14] 노무현 대통령을 딱히 지지한 인물이 아니었는데도 열린우리당에 참여해 계속 자리를 지켰고, 2015년 말에 안철수를 비롯한 비문/반문 성향 인사들이 대거 탈당해 국민의당을 창당할 때도 어떻게든 문재인 - 안철수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는 중재를 적극적으로 하면서 새정치민주연합에 잔류하였다. 애초에 정치 입문을 할 때부터 충청권의 맹주나 다름없던 자유민주연합을 마다하고 굳이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여 쉽지 않은 대전 지역구에 꾸준히 출마해 당선되었고, 2015년 말의 새정치민주연합 분당 사태로 탄생한 국민의당이 그렇게도 기고만장하다가 결국 어떻게 됐는지를 보면 정치적 감각이 매우 탁월한 셈.
- 미래통합당 이영규 후보와 무려 5번을 내리 상대해 모두 이겼다. 지난 총선까지는 그와 비슷한 위치인 대전 대덕구에서 구청장 선거, 국회의원 선거까지 박영순을 상대로 총 4연승을 거둔 정용기, 경기 안양시 동안구 을에서 이정국을 상대로 4연승을 거둔 심재철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 총선에서 정용기는 5번째 대결 만에 박영순 후보에게 패배하며 4연승으로 마감했고 심재철 또한 교체 선수로 투입된 이재정에게 패배하며 역시 4연승으로 마감했다. 이로서 박병석 본인 혼자만이 한 후보를 상대로 5연승이라는 유례없는 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이영규는 한 명에게만 5연패를 당한 충격이 컸는지 부정선거 음모론에 동조하는 추태를 보이고 말았다. #
- KTX 등 교통수단에서 박 의원을 봤다는 목격담 댓글이 있다. 목격자에 의하면 수행비서 없이 홀로 서류들이 잔뜩 든 노트북 가방을 가지고 다닌다고 하거나, 아반떼 타고 다닌다는 등 검소하다는 말들이 있다. 링크된 기사에서는 나오지는 않았고, 댓글에 지역 주민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목격담이 있다. 지역구가 지역구인 만큼 서대전역에 자주 나타나는 듯하다.
- 다선 의원들은 혐의가 없더라도 구설수에 한 번쯤은 휘말리기 마련이지만, 이 사람은 현재까지도 그런 거 없다. 상술한 일화들을 보면 평소 사생활 관리와 언행을 신중하게 하는 것으로 여겨지나, 정작 당이 뭉쳐서 활동할만한 지역구 유세는 커녕 당의 집단 행동. 특히 더불어민주당의 이미지 쇄신에 가장 상징적인 사건이었던 테러방지법 필리버스터나 탄핵국면마저 모습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뭔가 한 것이 없다. 좋게 말하자면 신중한 행보를 보고 국회의장으로 뽑혔다고 볼 수 있으나, 나쁘게 말하자면 여타 다선 의원들에 비해 이미지가 없다시피해서 정치적 모호성을 이유로 국회의장에 뽑혔다고 볼 수 있으며, 이런 행보로 인해 박병석이란 정치인이 대중적으로 자신의 행보를 보이며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다른 위치도 아닌 국회의원의 우두머리인 국회의장인 셈이다.
- 2020년 선거에서 지지자들이 6선 축하 및 국회의장 도전을 권하는 축하 케이크를 준비했다. # 다만 개표 초반 이영규가 앞서고 있어서 설레발이 되는 건 아닌지 우려하기도 했다고.
- 21대 전반기 국회의장이 되면서, 의장단이 모두 충청도 출신으로 채워질 뻔했다. 본인은 대전 출신이고, 더불어민주당의 김상희 부의장(경기 부천 병)과 미래통합당 몫 부의장으로 유력했던 정진석 의원(충남 공주부여청양)은 같은 충남 공주 출신이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이 법사위원장을 비롯한 18개 상임위를 모두 가져가면서, 정진석 의원은 21대 전반기 국회부의장직을 포기했다.
- 270개의 시민 단체가 선정한 국정감사 우수 위원으로 16번이나 선정되었다.# 그런데 이 단체들이 정상이 아닌것이 함정.(...)
- SBS가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개표방송으로 절대배지를 찾아서라는 다선의원 특집을 준비했었는데, 이곳에 등장한 16명의 다선의원 중 유일하게 제21대 국회에서 살아남은 의원이다. 제21대 국회에서 얼마나 크게 정치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는지를 상징하는 대목이다.
5. 소속 정당
6. 선거 이력
7. 둘러보기
[1] 반포주공1단지의 99개동 3590세대 중에서도 단 2개동(94동 및 95동) 60가구밖에 없는 복층 아파트에 살고 있으며, 면적은 204㎡(전용면적 196㎡)이다. 박 의장의 집은 1, 2, 4주구에 속해 있어 향후 디에이치 클래스트로 재건축될 예정이다. #[2] 후술하다시피 대전 집을 처분하겠다고 해서 논란이 되았고, 게다가 이를 아들에게 증여하여 다시 논란이 되었다.[3] 34세손 '炳'자 항렬[4] 16대부터 21대까지 한 번도 빠짐없이 내리 6선을 했다.[5] 충청북도 제천시 출신으로 본래 제천에서 서점을 운영하다가 6.25 전쟁 때 대전에 정착하여 1954년 족보만을 전문적으로 출판하는 회상사(回想社)를 설립, 2012년 사망할 때까지 경영하였다. 현재 회상사는 국내 족보 출판의 80%를 담당하고 있는 독보적인 기업으로 대전 동구 중동의 발상지에서 그대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6] 출처. 기사에도 나와있듯이 친형인 박병호는 민선 동구청장을 역임했다.[7] 한국외대 중국어과 중퇴 후 성균관대 법학과 입학[8] 이때 잔류한 인물들은 송영진, 김명섭, 송석찬 등이 있고 한편으로는 김원길, 원유철, 이근진 등의 한나라당 입당 인물들도 있었다. 특히 이중에서 원유철은 계속 당선되어서 새누리당과 자유한국당 간판도 달았고 2020년에는 미래통합당의 비례대표 위성정당인 미래한국당 대표까지 지냈다.[9] 대전 '''유일'''의 민주당 당선자였다. 유성구의 이상민 의원도 이 선거에서 당선되었지만, 이 때는 자유선진당 당적으로 당선. (이후 19대 총선을 앞두고 민주통합당으로 복당.)[10] 1987년 민주화 이후 국회부의장 최다득표율(98%; 출석의원 대비 득표율)을 기록하여 선출되었다. 이 기록은 2020년 김상희 국회부의장에 의해 갱신되었다.[11] 애초에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 자리를 놓고 양당이 타협의 여지가 전혀 없기 때문에 협상 타결이 이뤄질리도 만무했다.[12] 정보위의 경우 국회부의장의 협의가 있어야 하는데, 야당 몫으로 내정된 부의장 자리에 정진석 의원이 선임되었지만, 여당의 상임위 독식을 이유로 자리를 고사하면서 미뤄졌다.[13] 당내에서는 정세균계로 분류되기도 한다.[14] 2007년 7월 열린우리당을 탈당해 대통합민주신당 창당에 참여한 이력은 있으나, 결과적으론 불과 한 달 만에 열린우리당과 대통합민주신당이 합당한 데다 당시의 열린우리당은 사실상 와해되는 상황이었다. 박병석 본인이 분란을 주도하지도 않았고, 열린우리당 탈당 역시 당시 지도부와의 교감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15] 다만 울산광역시의회 의장인 박병석은 현대자동차 노동자 출신이며, 민주노동당-진보신당에 몸담았던 인물이다.[16] 새천년민주당에 흡수합당[17] 신당(열린우리당) 창당을 위한 탈당[18] 대통합민주신당 합류 목적[19] 대통합민주신당에 흡수합당[20] 대통합민주신당, 민주당 합당[21] 시민통합당과 합당[22] 새정치민주연합에 흡수 합당[23] 전반기 국회부의장[24] 전반기 국회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