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한/생애
1. 일제강점기
1.1. 개관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1930년 13살이 되던 해 집안 사정이 어려워 홀로 경성에 올라왔다가 거지패에 잡혔다거나, 교동보통학교에 다녔으나 제대로 끝마치지 못했다거나, 아니면 졸업을 간신히 했다거나 원씨 노인 원영기[1] 이라는 사람이 데려가 운동만 시켰다거나 등의 잡다한 내용이 있지만, 정확한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다. 사실 이 문제를 진지하게 연구하는 연구자 또한 없으므로 앞으로도 밝혀내기 어려울 것이다.
어쨌든 매우 어렸을 때부터 종로와 파고다공원 근방에서 싸움 실력 하나만으로 입지를 다졌으며, 18세가 되던 1935년 당시 서울에서 가장 큰 극장이었던 우미관 일대를 제패하여 서울의 깡패들 중 가장 악명 높은 한 사람이 되었다. 1940년 종로 2가의 다방을 거점으로 깽판을 쳐오던 김두한이 검거된 사건
나중에 본인 및 본인을 따르던 이들, 친지들은 일제강점기 시절 종로 일대에서 일본 야쿠자의 침입에 맞서 대항했던 민족적인 주먹패라고 선전했다. 심지어 일부 창작물에서는 일제의 무기고를 폭파했다는 주장도 서슴지 않았다. 어쨌든 가장 주요한 행적은 조선인 상인을 '''"보호"'''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보호"라는 것에는 당연히 "보호비"가 따라오기 마련이다. 즉, 결국 김두한은 단순한 건달패거리의 우두머리로, 그저 자신의 구역을 관리한 것일 뿐이라고 보는 평가도 있다.
그런데 사실 '''김두한 본인은 '보호'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한적이 없다.''' 보호 운운은 후대의 창작자들이 자기네들 물건 팔아먹기 위해 핑계거리로 댄 것에 불과하다. 김두한 본인은 대놓고 '세금 받았다'는 표현을 썼으며, 자기가 조선인 상인을 위해 벌인 활동에 대해 특별히 이야기 한 내용도 없다.
김두한이 활약하던 시기에는 깡패나 조직폭력배라는 단어 자체가 없었으며, 김두한 본인에 따르면, 당시에 어깨나 건달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협객이라는 표현은 이보다 한단계 높은 것으로 일본 야쿠자의 극도(極道)와 동격의 표현이었다고 한다.
김두한은 거짓말을 많이 했다. 김두한의 거짓 가득한 자서전과 자기 회고를 가지고 후대 사람들이 창작물을 만들면서 생겨나게 된 문제점을 2가지 꼽아볼 수 있다.
하나는 김두한이 아무렇게나 말해댄 덕분에, 자기는 대단한 일 했다고 생각한 일들이 후대 사람들이 보기에는 '저 인간이 왜 저렇게 미쳐 날뛰었나' 싶은 점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어떤 이유에서든 그 김두한의 증언을 가지고 더 미화하고 뻥튀기시켜서 아예 신화로 만들어 놓는 더 큰 문제가 있었다는 것인데, 아무래도 이 분야의 최고봉은 야인시대의 작가 이환경이 되겠다.[2] 김두한이 되지도 않는 자기 자랑을 많이 하기는 했어도, 해방 전에 독립운동을 했니 조선인 보호를 했니 하는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김두한이 동년배 중에서 싸움실력으로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낸 것은 분명하다. 김두한의 회고에서 사실상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일대일 대결인 구마적, 신마적과의 대결이 있었던 때가 10대 후반이었다니, 있었다면 대략 1935년 전후의 일로 보인다.
장군의 아들에서 묘사된 김동회와의 대결은 불명확한 편인데, 김두한과 김동회의 관계는 김동회가 주장한 내용 외에는 별다른 증거나 기록이 없다. 김동회 본인은 김두한과 친분을 강조하긴 하였으나 대결이 있었음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김두한은 자기 회고에서 김동회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때문에 김동회는 김두한을 팔아 자신의 이름을 알린 일종의 사기꾼이라는 견해도 있다. 실제로 김동회는 1999년에 TV의 모 프로그램에서 김두한 관련 이야기들을 하기는 했는데,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나 사실관계가 맞지 않는 것 같은 이야기들을 늘어놓고는 했다. 하야시가 일본 야쿠자의 대부 도야마 미츠루의 제자인데 술먹다가 총독부 정무총감을 부르면 정무총감이 달려 올 사이라느니 구마적이 김두한에게 지고 만주로 떠났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이 그것이다. 아무리 간덩이가 부었다고 한들 조선인 야쿠자가 감히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술쳐먹다 오라가라 부른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조선총독부는 천황의 직속이었기 때문에 일본 정계에서도 어마어마한 파워가 있었으며, 게다가 해군대장 출신인 사이토 마코토를 제외하면 모두 파워 넘치는 육군대장 출신이다. 심지어 데라우치 마사다케, 사이토 마코토, 고이소 구니아키, 아베 노부유키 등의 일본 내각총리대신이 배출되기도 할 만큼 조선 총독은 요직 중의 요직이었는데, 그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정무총감을 야쿠자 따위가 오라가라한다? 도야마 미츠루가 쥔 권력이 '''도조 히데키 급은 되어야 말이 되는 이야기이다.''' 여튼 선우영빈이 하야시라고 친다면 김두한이 한참 힘 쓸 때 20대후반에서 30대 초반의 나이인데, 이왕가도 아니면서 그 나이에 그렇게 막후에서 무시무시한 영향력을 가진 조선인이 있다는 것도 이상하다. 야인시대의 경우, 김두한의 회고에 빠져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김동회라는 인물 자체를 아예 등장시키지 않고 있다.
김두한이 윗세대 거물들을 차례대로 꺾어 주먹계의 지존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는 식의 생각은 현실이 아니라 판타지의 영역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인데, 그렇게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후술한다.
구마적이니 신마적이니 하는 사람들 자체가 사실 생업이 따로 있는 사람들로, 아니 사실 생업 없는게 생업인 사람들도 많았는데 그저 전형적인 유흥가 건달들이지 기업형 범죄조직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3] 저 유흥가 건달이라는 것도 현대 조폭들같이 유흥가 운영하면서 보호비나 운영비 받고 이권 노리고 이런 것이 아니라, 유흥가 술집에서 술 취한 손님들한테 삥 뜯고 가게에서 공짜 술 얻어 먹으며 노는 그런 건달이었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때는 1930년대 말에서 40년대다.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일제가 제2차 세계대전에 뛰어든 시기라서, 1940년대가 되자 대부분의 건달, 깡패들은 일제의 집중 단속대상이 되었다. 실제로 저 위의 신문기사들도 그 결과물이었던 것이다.[4] 결국 김두한의 윗세대들은 김두한에게 져서 밀려난게 아니라 시대가 어수선해지자 자연스럽게 생업에 복귀하거나, 군대에 끌려가거나, 그냥 나이가 차서 정신을 차렸다는 식으로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김두한은 별다른 생업도 없었고 징용 문제도 어영부영 해결되어 남들 다 군대로 끌려가는 판에 끝까지 경성에 남아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구마적이니 김기환이니 하는 윗세대 양아치들도 사라진 게 아닌 것이, 일제 말 기사들에 여전히 김기환은 김두한의 보스로 나오고 있으니 김두한이 유독 태산북두와 같은 위치로 살아남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김두한이 저런 시대 상황에 따라서 어부지리로 자기 세력을 유지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김두한 나름의 능력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전술했듯 구마적, 김기환도 사라지지 않고 청년단 활동 등에 계속 이름이 올라가고 있었다. 그러니 어떤 종류의 능력이었던 간에 김두한이 분명 뭔가 두각을 나타낸 부분이 있었기에 몇 년 사이에 저들과 최소한 호형호제정도는 할 수 있는 위치로 올라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야쿠자 등 일본 폭력 조직과 갈등이 있었다는 부분도 애매한 것은 마찬가지이다. 김두한에 따르면 일본인 조직과 몇 차례 분쟁이 있었던 뒤, 양쪽이 조정하여 화해했다고 한다. 형식상으로는 김두한이 하야시를 형님으로 대접하고, 실제로는 하야시 쪽에서 김두한에게 돈을 줬다는 것. 김두한이 일본인 밑으로 들어갔다 어쨌다는 이야기가 꾸준하게 흘러나오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인데, 솔직히 일본인과 조선인 문제를 떠나서 그냥 전형적인 조폭 간의 갈등 조정 방식이다.
그리고 각종 창작물에서도 등장한 헌병대와의 트러블은, 실제 그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술 마시다 시비가 붙은 사건'에 불과하며, 사실 그 사건에서 황병관을 구해 준 일이 실제로 있었는지도 큰 의문이다. 훗날 태릉선수촌 선수들이 쓴 자서전 비슷한 책에 보면 황병관의 회고도 나오는데, 황병관이 음식점에서 김두한과 만나 김두한을 쓰레기통에 쳐 넣었던 일화를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저 말이 사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자기 구해 준 사람에 대해서 저런 말을 하지는 않았을테니.
한편으로 김두한은 부민관 폭탄의거 사건 당시 사건에 쓰인 폭약이 자기 쪽에서 흘러나온 것이라 일제에게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허나 해당 폭탄은 의거의 주역 중 유만수, 조문기가 간신히 고생하여 구한 것으로 김두한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라고 여러 차례 조문기의 인터뷰 등을 통해 언급되었다. 부민관 폭탄의거 사건 항목에서도 나와있지만, 이 사건은 일제 패망 직전인 1945년 벌어진 대형 사건으로, 김두한이 리얼타임으로 목격한 항일 의거는 이것이 유일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해방 20일 전에 벌어진 사건인 탓에 일제가 제대로 된 수사결과를 내거나 법정 기록을 남길 여유조차 없었다. 한마디로, 시간이 지난 뒤 김두한이 유명한 항일 의거에 슬쩍 숟가락을 얹은 것이다. 김두한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었던지 "나도 그 폭탄을 거기에 쓸 줄은 전혀 몰랐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긴 했다.
그외에 김두한이 일본 헌병대 무기고를 습격했다는 둥, 학도의용군 참모장을 맡아 일본에 대항했다는 둥의 헛소리를 지껄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냥 무식으로 팝콘 튀기는 소리이므로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전혀 없다. 이런 내용은 해방 직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활동에 자신이 관여했었다는 김두한의 주장에서 비롯된 것으로, 항일과는 별 상관이 없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바로 아래 해방 이후 행적에서 다룬다.
어쨌든 결론은 창작물에서 묘사된 김두한의 행적은 상당히 미화되고 과장되었다는 것. 일단 '''하야시'''라는 인물조차 실존 인물은 선우영빈이라는 조선인이라는 것이 현재 반쯤 정설로 굳혀진 상태이다. 그나마도 선우영빈과 하야시라는 인물은 전혀 관련이 없으며, 김두한과 하야시의 이야기 자체가 그저 창작의 영역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도 나오는 판이니 진실은 저 멀리.....
다만, 저 위의 각주에 나온 블로그의 기사들에서 당시 김두한의 위치나 역할에 대해서 뭔가 시사할 만 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분명 1940년 이전까지 김두한과 함께 그 이름을 남겨 온 구마적이니 신마적이니 김기환이니 하는 깡패들의 하는 행동들을 보면 꽁술 먹고 푼돈 뜯고 행패부리는 일 정도가 전부인데, 심지어 김기환과 같은 경우는 복싱 선수로서 어느 정도 이름이나 인기가 있는 사람이었는데도 딱 저 수준의 범죄를 저지르고 다녔던 것. 그래서인지 당시 엄격한 형법 사이에서도 저 사람들이 잡혀갔다는 기사와 다음 사고를 친 기사 사이에 그다지 긴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말 그대로 별로 엄한 처벌을 받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 수준의 사고였다는 걸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헌데 1943년의 김두한이 모 종교단체와 결탁해서 다른 종교단체의 건물을 꿀꺽했다는 사건에 이르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딱 우리가 생각하는 번듯한 사무실 놓고 이권다툼 하고 있는 조폭, 그 모습이 되는 것이다. 이런 걸 보면서 짐작할 수 있는 건, 김두한이 단체를 조직해서 상인들에게 세금을 걷고, 이권을 먹어가고, 그런 걸로 주변 조폭들에게 콩고물을 나눠 주며, 나름 그걸 바탕으로 청년단을 조직해서 징용을 빠져나갈 도구를 만드는 등의 일을 하는데에 최소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어찌 보면 그런식의 현대적 조직폭력배의 시초이지 않을까 하는 추측도 가능한 건데, 해방 이후 김두한의 행동을 보면 아주 근거 없다고 할 수는 없는 추측이다. 따지고 보면 이정재가 삼우회 따위를 만들고 시라소니를 린치하면서 옛날의 낭만 주먹은 없어졌다고 하지만, 그 이정재가 동대문상인연합회 따위를 만들어서 군림했던 일의 시초가 김두한일 공산이 매우 큰 것이다.
참고로 성인이 된 김두한의 키는 180cm 이상에 몸무게는 80kg이 넘는 거구였다.
1.2. 행적 고증의 문제
김두한의 일제시대 행적에 대해서 큰 줄기를 따라가자면....
1. 고아로 자라다가 원노인이라는 사람에게 자식처럼 키워졌다.
2. 원노인이 죽고 나서 거지촌에서 다시 지내다가 모종의 계기로 우미관에서 일 하면서 건달 세계에 끼어들었다.
3. 구마적을 이기고 신마적이 물러나면서 경성 주먹의 황제가 되었다.
4. 그 와중에 헌병대와의 싸움에서 황병관을 구해 준 일, 하야시 등의 일본 야쿠자와의 대립, 마루오카와의 결투와 브로맨스, 평양축구단과의 다대 일의 싸움 등의 일화가 있었다.
5. 청년단 활동을 하면서 징용을 면제받았다.
6. 해방이 되면서 자기를 괴롭혀 온 미와경부를 끌고가서 죽였다.
정도인데, 문제는 저 사건들이 죄다 1963년 김두한의 자서전과 1969~1970년 사이 방송된 김두한의 '노변야화' 에서 김두한 입으로 말한 것들을 후대 사람들이 살을 붙이고 미화를 해 가면서 더 크게 만들어 버렸던 사건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증언의 시점 상 교차검증이 어려워져 버린게 문제가 된다.단 노변야화는 김두한의 증언을 방송국 작가가 다시 창작하여 인터뷰를 끼워 넣은 것이다.
우선 김두한 외의 사람이 일제시대 김두한의 행적을 증언한 것 중 대표적인 게, 김동회와 이상욱이 1999년 MBC 다큐멘터리 '깡패와 건달로 본 100년' 이란 프로에서 증언한 것, 그리고 야인시대가 한참 인기있었을 때 쯤 김동회가 한 번 더 이빨을 턴 것[5] 과 미국에 있던 김영태[6] 를 만나서 인터뷰 할 때 김영태가 했던 말 정도가 있는데, 이게 시간이 한참 지난 후의 증언이라는 건 둘째치고 미묘한 문제가 있다. 우선 김동회나 이상욱의 경우는 김두한이나 김두한 다른 패거리들의 입에서 그의 이야기가 단 한 번도 안 나왔다는 게 문제다. 김두한의 입에서도 그렇고, 훗날 김두한에 대해서 증언한 청년단 같이 한 게 신문기사나 판결문 등으로 어느 정도 증명이 된 신영균이나 박용직의 입에서도 그렇고, 저 사람들의 이름 자체가 나오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종로꼬마 이상욱은 김두한이 자기보다 2살 어리다고 이미 이야기한 상태.
따라서 김두한이 유명해진 이후에야 그에 편승해서 한 몫 하려는 게 아니냐 라는 의혹까지 있는 판이다. 김영태의 경우, 김두한의 입에서 이 사람 이름이 나온 적은 없어도, 해방 후 김두한과 연관된 사건들에서 이 사람 이름이 같이 등장하고 있고, 신영균이나 박용직의 이야기도 있기는 하니 김두한과 연관이 있는건 사실인데, 야인시대와는 다르게 실제로는 김두한보다 두 살 연하인 1920년 생인데다가 고등보통학교까지 나왔다고 하니, 김두한 패거리에 끼어들어갔을 때가 빨라야 1940년 전후로 여겨지는데[7] , 저 때라면 김두한과 신마적 구마적 마루오까 등등의 그 일화들이 진짜 있었던 건지 볼 수 있는 시기는 아니다. 구마적과의 싸움 이야기는 김두한 외에 김동회의 증언이 있지만 저 여섯가지 중 팩트가 어느정도 증명된 5번을 제외하고는 그 외에는 김두한의 증언 이외에는 저 사건들에 대해서 교차검증 하도록 이야기 해 준 사람이 없다(?).
우선 1940년 이전의 김두한의 모습을 교차검증이 가능하도록 신뢰성 있게 증언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최소한 노변야화 시점에서는 거의 없다는 것이 문제다. 헌병대 일화의 황병관이 1952년 사망한 것은 기사 등으로 확인 된 확실한 사실이다. 구마적 역시도 1960년대에 죽었다고 하니 저 시점에서는 고인이 된 사람이다. 신마적은 해방 이후 행적은 전혀 알 수 없을 정도(하지만 '''신마적의 딸이 도쿄에 살고 있다. 그유명한 시라소니의 증언이니''')로 세상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이정재는 청년단 시절 이후에나 인연이 있던 사람인데다 역시 저 시절에는 고인이 된지 오래다. 선우영빈이 하야시가 맞다면 저 시대에 살아는 있었겠지만 김두한은 한 번도 선우영빈을 하야시라고 한 적이 없다. 그러니 선우영빈이 하야시가 서로 다른 사람이라면 선우영빈은 저 이야기를 남 이야기 듣 듯 했을테니 설령 저 이야기를 들었다고 해도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선우영빈은 훗날 한국건설협회?회장을 역임 했는데 그 자신이 "하야시"였다고 밝혔고 많은 사람들이 하야시라고 알고 있던 상태 였다). 그리고 김두한이 처음 주먹패에 들어왔을 때를 봤을만한 사람이 김무옥과 김기환 정도인데 김무옥도 김기환도 이미 1950년대 이전에 고인이 된 사람들이니 저 일화들을 증언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이다. 일본으로까지 장소를 넓히자면 미와 와사부로가 있기는 한데, 1968년 당시 일본에 있던 조선일보 기자 김을한에게 연하장을 보낸 뒤로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건 둘째치고 구마적이니 신마적이니 운운하는 시절에 하도 나대다가 윗분들에게 찍혀서 저 멀리 강원도 함경도 이런데서 구르고 있었던 사람이다. 우선 그 때까지 살아있었다는 것만으로도 6번 사건은 거짓말이라는게 증명이 된 것이다. 어쨌던 저런 판이니 김두한이 자기 열일곱살때 팥으로 매주를 쑤고 콩으로 팥죽을 만들었다고 해도 누가 뭐라고 테클 걸 사람도 별로 없는 셈이다. 청년단을 만든 이후나 해방 이후 행적은 역시 김두한답게 열심히 뻥을 튼 것들이 많기는 한데, 그에 대한 교차검증 가능한 증인과 증언들도 좀 있어서 1930년대의 우리가 아닌 영웅적인 주먹 김두한을 검증하는 것 만큼 검증이 오리무중은 아니니 뭐 그렇다고 치고.....
따라서 그냥 현재 있는 몇 안 되는 김두한에 대한 일제시대 기사들과 순전한 당시 시대상황에 따른 상식으로만 저 사건들을 고증해 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다만 그 정도로도 어느 정도 저 사건들에 대해서 엄밀한 진위는 아니더라도 신뢰성을 어느 정도판단할 수 있는 근거들은 마련이 된다.
1번인 원노인과의 이야기야 어느정도 이빨이 섞였을 것이라고 판단하나, 진실이 어떻든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 일이다. 그리고 모종의 계기로 우미관에서 일하다가 그 쪽 세계로 간 것도 당시 상황을 보자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니 역시 그런가보다 할 일이다. 사실 저런 일은 김두한에 대해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일도 아니고, 문제는 김두한이 정말 매력있는 낭만 협객이었냐를 증명할 수 있는 다른 사실들인데....
우선 3번.... 구마적과의 대결은 진위여부야 불분명하나, 분명한 건 '사상에 관한 정보(경찰서장), 경종고비 제1721호의 1, 1942.04.07 16쪽' 에서, '同年2月19日自宅において被疑者金斗漢の紹介により其親分俗称旧馬賊こと高時亨(京)改め高山勲を知り、前掲両名に対する如き好言を述べて獲得し : 동년 2월19일 자기 집에서 피의자 김두한의 소개로 그의 두목인 속칭 마적(馬賊), 곧 고시형(高時亨, 京)을 알게 되어 위의 두 사람에게 한 것과 같은 감언으로 획득하였다.' 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모 신흥종교들과의 알력다툼 와중에서 김두한이 예배당을 사무실로 빼앗는 사건에서 있었던 일인데, 저 사건 보고서에서 분명 구마적이 김두한의 두목으로 나온다는 게 문제다. 싸움에서 이겼지만 그냥 구마적 밑에 들어갔던 건지, 아니면 구마적의 상징성을 이용해서 김두한이 붙어먹은 건지, 그도저도 아니면 그냥 구마적과의 싸움 이야기가 거짓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던 구마적을 두목으로 모셨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즉, 주먹의 1인자는 아니었단 것이다.
'''하지만 구마적은 평생 조직이나 세력을 가져본적이 없다.해방후 영등포의 방직 공장의 책임자 였는데 김두한 일파가 말 한마디로 공장의 물건을 다 털어간다 즉 구마적은 장사이긴 했어도 주먹 1인자 였던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리고 4번 중 헌병대 대위 두 명을 패고 황병관을 구해 준 일은 과연 존재했는지가 의문 투성이다. 우선 당시 상황에서 건달인 김두한이 헌병대 대위를 팼다는 건, 요즘으로 말하면 조폭이 검사를 반 죽도록 팬 일과 마찬가지의 일이다
김두한이 일본군 헌병을 팼다는 말을 한적이 없다 유곽에서 어깨가 맞닿아서 민적이 있다고 했다.아울러 유곽직원들이 숨겨 줬는데 술이 깨고 헌병이 먼저 챙피해서 말을 안했다. 당시 일본군 대위라는 건 지금 우리나라의 대위와 달리 급이 있는 직책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그걸 김두한 말대로 적당히 사령관과 이빨을 까면서[8] 쇼부를 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물며 저런 사건이 뉴스에서도 전혀 다뤄지지 않았을 리는 없고, 설당시 일본헌병 대위면 일령 맞은게 쪽팔려서 외부에는 덮었다고 쳐도 김두한이 몸 성히 살아올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니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것은 일본사람이건 조선사람이건 헌병대가 시비를 붙으면 우선 해임이 된다.
무엇보다도 해방 후 국가대표 선수들의 인터뷰를 담은 책에서 황병관이 한 이야기를 보면, 유명한 싸움꾼인 김 모[9] 와 식당에서 시비가 붙었는데 그가 발차기를 해서 그걸 그대로 잡아서 쓰레기통에 거꾸로 쳐 박아 버렸다는 이야기를 하며, 나중에 김 모라는 걸 알고 나서는 더 패 줬어야 했는데 운운했다는 일화가 있었다.
하야시 등의 일본 야쿠자와의 대립은 하야시=선우영빈 썰은 김동회가 증언한 게 유일하기는 한데, 위에서도 말했지만 김동회의 말이 신뢰가 안 가는 부분들이 많은 게 문제다. 어쨌든 일본 야쿠자 패거리들과 대립을 했던 건 이상욱 등이 증언한 바도 있고, 김두한 역시도 엄청나게 기름칠을 하기는 했어도[10] 그의 증언에서 최소한 조선인을 위해 종로를 지키겠다느니 하는 따위로 입을 털지는 않았다. 김두한의 말을 있는 그대로 믿더라도 그냥 조폭간에 이해관계 조절에 불과하다. 사실 저걸 엄청나게 미화한 건 후세 창작자들의 문제가 더 큰데, 김두한의 일화라면 그런게 한 두 가지가 아니니 뭐....하야시라는 사람 자체가 그냥 김두한 등의 뇌피셜이라는 견해도 있는데, 지나치게 김두한에게 비판적인 사람이기는 한데 그 나름의 근거가 있는 면도 있으니 판단은 알아서 하자.
마루오까와의 이야기는 경부보 이상이면 총독부 인명록 등에 기록이 죄다 남아있는데, 마루오까라는 사람은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는 점에서 전혀 고증이 안 되는 이야기다. 평양 축구단과 싸운 일은, 무슨 조폭이 돈 몇원 삥뜯어 술 먹은 일도 경성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죄다 시시콜콜하게 신문에 나오는 판에 김두한이 저 정도 깽판을 쳤다면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고 아니면 다른 신문이고 간에 신문에 안 나올 리 없다는 점에서도 약간 이빨에 가까운 편이나, 그렇다고 아니라는 증거도 없고, 실제로 그 비슷한 일이 있을 수는 있으니 그런가보다 할 일인데다, 김두한 역시도 그 사건에서 자기 싸움실력을 자랑하듯 늘어놓기는 했어도 여자를 구하기 위해 20대1로 싸웠다느니... 뭐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이빨은 안 깠으니 역시 크게 문제될 건 없는 건달의 무용담일 따름이다. 다만 마루오까와의 유죄 무죄 운운하는 일화는 그다지 신뢰하기 힘들다.
5번은 김두한이 변명을 하기는 하지만 어쨌던 분명 있었던 일이고, 종로꼬마 이상욱이 1999년 MBC 다큐멘터리에서 증언을 하기도 했다. 저게 친일논란이 되느냐 아니냐는 다른 판단의 문제로 밑에서 넘어가기로 하고, 다만 김두한이 그냥 건달에서 어느정도 조직과 세력을 갖춘 건달이 되는 데 일종의 계기나 기회가 된 사건이 아니냐는 추측은 가능한 정도의 사건이기는 하다. 다만 종로꼬마 이상욱이 정말 김두한의 최측근이었나 하는 것이 또 다른 문제인데, 김동회 만큼이나 이상욱도 김두한이 회고에서 언급한 바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6번은 우선 미와가 종로로 다시 온 건 퇴임 후 1940년대의 일이니 미와가 자기 권력을 이용해서 김두한을 괴롭히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는 점에서 좀 문제가 있는데다가 김두한이 고등계에 얼마나 의미 있는 조사대상자였는지도 의문이니[11] 역시 의심해 볼 만 한 문제다. 참고로 저 위에 사건 보고서가 '사상에 관한 정보' 였던 건, 김두한 자체가 고등계의 요시찰대상이라서라기 보다는 저게 신흥종교간의 알력다툼 문제였던 게 더 컸을 듯 하다. 고등계 업무 중 중요한 게 공산주의나 독립운동가 단속이었지만, 신흥종교 단속도 고등계의 중요 임무 중 하나였다. 실제로 신흥종교들의 문제가 일제시대때도 꽤 많았다.
1.3. 친일 테러 행적
1.3.1. 의혹
그러나 위의 내용, 즉 깡패짓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1943년 '''경성특별지원청년단(반도의용정신대)를 조직하였다는 친일 의혹이다.'''
이 단체는 군대 보내기도 뭐하고 가만 놔두기도 뭐한 전국의 골치거리 깡패들을 적당히 처리하기 위해 조선경시청이 만들고 지원한 어용단체였으며, 거기에 더해 김두한은 김좌진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이 점을 이용한 상당한 선전효과까지 고려하여 조직된 것으로 보인다.
당연하지만 이 문제는 해방 이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걸려들었다. 김두한은 아니지만, 전직 헌병이자 전직 대구 경찰서 고등계경찰로서 이 단체를 조직하고 단장을 맡았던 장명원[12] 은 반민특위에 검거되어 조사를 받았다. 당시 반민특위의 장명원에 대한 조사 자료. 참고로 장명원은 여기서 매우 황당한 주장을 하는데, 헌병이 된 것은 일제에게 원수를 갚기 위해서였다거나, 경찰이 된 것은 일제의 내막을 탐지하기 위해서 였다는 것이다.
일단 장명원의 변명에 따르면, 이 단체는 미와 경부 등이 당시 골칫거리였고 어차피 군대 보내기도 뭐했던 깡패, 불량배를 조직하여 뭔가 쓸모 있는 짓을 해보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며, 장명원 자신은 낙하산에 불과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장명원은 "명칭상 정신대였을 뿐 실상은 깡패들에 대한 감화운동이었고, 의료비나 피복비 외에 비밀활동자금 같은 것은 받은 적이 없다"고 주장하였으며, 관련자 전원이 철도 건설 작업에 참여한 것 외에는 다른 활동은 없었다고 증언하였다.
또한 장명원은, 이 단체가 결성된 것은 다음과 같은 내막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김두한, 구마적[13] , 김기환, 이정재[14] 깡패가 등이 "일본이 깡패, 불량배들을 태평양에 빠뜨리거나 군대로 보내버린다는 소문"을 듣고, "그렇게 된다면 가만있지 않겠다."며 불만을 터뜨리고 다니자 이를 심상찮게 여긴 경찰 관계자들이 이들과 자리를 주선하여 몇 개월 간 합의를 거친 뒤 단체를 결성했다는 것. 덧붙여서 장명원은, 김두한이 수만 명을 모을 수 있다고 해서 가봤더니 백 명도 채 안되더라고 증언했다. 참고로 김두한은 나중에도 이때 수만 명을 모았다며 큰소리를 뻥뻥 쳐댔다. 김두한의 허풍과 허세는 일제시대에도 여전했다는 증거다.
어쨌거나 장명원의 주장은 다른 관련자들이 주장한 것과 대체로 일치하며, 세부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을 뿐 김두한의 회고록과도 거의 내용이 일치한다. 한편 여기에 더해 김두한은, "전장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일부러 총독부를 속여 만든 것이다."라고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러나 한편 이 조직은, 비록 확실한 조사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으나, 당시 빼도박도 못할 친일단체였던 일진회, 시천교와 모종의 연결고리가 있었다. 웃긴 건, 당시 반민특위에서 조사할 때 이들이 일진회와 시천교의 건물을 강제로 빼앗았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참고로 장명원은, 일진회나 시천교와의 연결은 경찰 쪽이 아닌 김두한 측에서 먼저 이루어진 것으로 주장하였다. 또한 징역, 징용기피자들을 구타 고문, 심지어 살해했다는 소문이 있었는고, 깨알같이 총독부에서 자금을 받았을 뿐 아니라 개인 용도로 착복한 혐의까지 추가되었다. 당연히 이러한 의혹들에 대해 장명원은 전부 부인하였다. 이에 대한 뚜렷한 증거 역시 발견되지 못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장명원을 조사하는 과정 중에 불려나온 증인들은 '''모두 이 단체 관련자들'''이었다. 즉, 반대 증언이 전무하다는 것. 그리고 김두한은 훗날 이런 문제들에 대해선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당시 반민특위의 검사들은 장명원에 대해 '''기소유예''' 결정을 내린다. 당시 기소유예 결정서. 단체장인 장명원이 불기소였으니 김두한 등의 관련자도 당연히 자동적으로 무혐의 처리됐다. 기소유예를 내린 이유는, ''' "명칭상 정신대일 뿐, 실상은 불량배를 교화하여 선량한 청년으로 육성하려고 한 것이며, 징용기피처가 되어 일제에게 주목 받은 사람들의 피신처가 되었다. 또한 불법 감금, 고문 등에 대한 증거가 없다." '''는 것이다.
특히 '징용 기피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만든 것'이라는 주장이 핵심적인데, '''그렇다면 총독부, 경시청과 붙어 먹지 못해서 군대로 끌려간 다른 사람들은 대체 뭐가 되냐?''' 이런 식으로 친일 행위를 비호하면, 모든 친일행위가 사실은 이유가 있어서 그렇다는 결론이 나올 수 밖에 없다. 당연하지만, 당시 조사위원들 역시 이 병맛 돋는 기소유예에 대해 반대 의견을 냈다. 당시 불기소 반대 의견서. 반대 의견이 문제로 삼은 내용은, 첫째, 경시청과 붙어먹고 돈까지 받았다는 점이다. 둘째, 고문과 학대, 어쩌면 살인 행위까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그런데, 반민특위 조사위원들 역시 뭔가 핀트 자체를 잘못 맞춘 감도 있고, 몇가지 사항을 놓친 감 또한 없지 않다. 무엇보다도 돈 문제다. 장명원에 따르면, 단원 가입은 부장인 김남산, 김기환, 김원옥 등에게 전권을 가졌다는데, 이들 깡패 우두머리들이 과연 순수한 선의만으로 단원을 모집했을지? 당연히 단원을 모집하고 추가인원을 받는 과정 중에 금품 수수, 권력 남용 등의 행위를 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무엇보다도 이 단체가 조직된 시점이 1943년임을 주목해야 하는데, 조선에서 본격적인 징병제가 실시된 것은 바로 다음해인 1944년이며, 이 사실은 1942년에 이미 결정된 내용이었다. 이 시점에 깡패들이 반도의용정신대를 결성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사실 이런 이유때문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뒤늦게 이 단체에 가입한 사람들은 대체 어떤 과정을 거쳐 이 단체에 가입한 것인지? 그리고 단체의 간부들이 가입자들을 걸러내기 위해 어떠한 기준을 적용했을지? 또한 이 단체는 민간업자에 기탁하여 철도 공사에 투입되었다는데, 순수한 봉사정신만으로 땅을 팠을 가능성은 당연히 없다. 업자 및 작업 선정은 어떤 기준으로 됐으며, 공사대금이나 임금은 어떻게 처리되었을지?
또한 조사위원들은 '경시청의 비밀자금'에 집착하고 있는데, 비밀이건 나발이건 간에 경시청에서 돈을 받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장명원도 피복비 등의 명목으로 만원을 받았다는 점은 순순하게 인정하였다. 그런데 이 당시 만원이면, 현재 시세 1억 5천만 원 정도의 거액이다. 비밀 자금 여부를 떠나서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문제거리가 된다. 또한 후세 연구에 따르면, 이 단체는 총독부의 협조를 얻어 금속 회수 운동, 즉 일제의 공출제도에 참가하였고 수집한 대금을 헌납하는데 참여하였다고 한다.
이정재의 행적을 통해서도 몇가지 미심쩍은 점을 추론해낼 수 있다. 이정재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정재는 이 단체에 가입한 것을 인연으로 하여 경찰에 투신하게 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곧, 이는 당시 깡패 - 경찰 간에 뭔가 불투명한 유착 관계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이정재는 '''반민특위의 특경대 요원으로 활동하기까지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피의자 심문서에서 분명 이정재 이름이 거론되는데, 정작 당사자인 이정재는 반민특위에 참여 중이었다는 기가 막힌 아이러니가 성립된다. 그런데 과연 이정재 이외에 이 단체에 연루된 다른 경찰은 없었을까?
마지막으로 이 단체는 이후의 역사에 상당히 안 좋은 선례를 남겼다. '''이 단체에 참여했던 깡패들이 이때 완장질에 맛을 들여 해방 이후 이런저런 정치단체를 기웃거리기 시작했다는 것.''' 이로 인해 정치깡패 문제를 연구할 때 반도의용정신대는 반드시 그 기원으로서 언급된다.
문제는 확실히 밝혀진 것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사실상 밝혀진 것은 깡패들이 핑계대고 모여 빈둥거리며 건설현장에서 삽질한 것 뿐. 이들에게 당했다는 피해자도 특별히 밝혀지지 않았다. 사실 이들에게 당한 사람들은 이미 군대로 끌려가버려 전사했거나, 살아있더라도 여전히 거리를 활보중인 김두한과 깡패들에게 또 걸려들까 두려워 나서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반민특위에서 조사한 증인들은 전원 이 단체 가입자였거나 이권에 관련된 인물이었는데, 당연히 모든 증인이 이 단체에 유리하게 증언하였다. 그나마 불리한 증언조차 단체의 지도부장이었던 김남산이 장명원과 경찰들에게 책임을 떠넘기기 위해 행한 카더라 수준의 증언 뿐이다.
이후 이 단체에 대한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시간이 너무 지나버린 탓에 관련 자료들도 모두 소실된 상태. 이로 인해 이 단체는 사람들에게 잊혀지다시피 했으며, 김두한이 변명한 내용, 즉 '징용기피를 위한 단체'였다는 내용에서 더 연구되거나 알려진 바도 없게 되었다. 때문에 김두한은 각종 친일파 명단 등에도 오르지 않았다.
하여간 일제와 협력했다는 점 때문에, 김두한을 극도로 미화한 야인시대에서도 이 부분만큼은 주인공의 입을 통해 자아비판을 했다. 단체를 만든 덕분에 수 많은 사람들이 징용에 끌려가지 않게 되었긴 하지만, 어쨌든 일제와 협력한 꼴이니 올바른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1.3.2. 미군 문서로 밝혀진 실체
당시 김두한이 자기 친구 정진용을 죽였을 당시 미군에게 한 증언이다.
사실은 '''"일본인을 위한 합법적인 테러리스트 겸 정보제공자"를 하다가 종전 때문에 "실업자"가 된 테러리스트다.''' 저 인용된 이야기도 기본적으로는 김두한의 증언을 베이스로 한 것이기 때문에 어느정도 신뢰도가 떨어질 수 있음은 알아야 한다. 다만, 김두한이나 정진룡이 일본인을 위한 합법적 테러리스트 겸 정보제공자가 되었다는건 김두한의 고백이라기보다는 미군이 증언을 종합하여 내린 결론이니만큼 크게 사실관계와 다르지는 않을 수 있다. 사실 국토건설단 일이라는게 합법적으로 폭력을 쓴다거나 휘하 단체 등의 정보를 제공해준다거나 하는 것들이 분명 그 일부일거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사실 크게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나의 오랜 친구 정…김두한의 이야기는 한국에 대한 일제 강점기까지 되돌아간다.…김의 제일 친한 친구는 정진용인데 그는 그들이 일본인에게 고용되어 경방단(Police Assistance Association)을 조직 운영하기 전까지는 그와 더울 일본 정부당국과 마찰을 빚고 있었다. 경방단에 가입한 후 '''김과 정은 일본인을 위한 합법적인 테러리스트 겸 정보제공자가 되었다. 종전과 더불어 실업자가 되면서 모든 지위를 상실'''한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큰 고려 없이 청년들로 모아서 정치 정당의 돌격대로 고용되었다. 유일한 문제는 정은 남로당을 위해서 일하는 조선전위대를 택했고, 김은 우익주의자 장덕수의 정당에 고용되었다. 그때부터 김은 "나의 오랜 친구 정"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정에게는 불행하게도 김은 한국 전체의 싸움 왕이었다. 처음에 김은 서울의 거리에서 정과 정의 부하 두 명을 때렸다. 다음에 정이 김에게 권총을 겨누었으며 김 역시 정에게 권총을 겨누고 정의 권총을 떨어뜨린 후 정의 무릎에 총을 쏘았다. 1947년 4월 우익 한국인들이 그들 국가의 미래의 국부로 간주하였던 이승만의 귀국을 열렬히 기다리고 있는 동안, 좌익도 나름대로 그들의 계획을 수행하고 있었다. 정진용과 그의 무리들은 이승만을 사기꾼이고 자기중심적인 정치인이라고 비방하는 팜프렛을 배포하기 위해서 동원되었다. 4월 20일, 김두한은 이 시점이 그의 오랜 친구를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할 좋은 기회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는 부하들을 보내서 반 이승만 유인물을 배포하는 사람들을 잡아오게 했다. 김의 부하는 극장과 서울의 시장거리를 배회하면서 정과 그의 부하를 잡아들였다. 김과 그의 부하들은 그들이 그들의 과거의 잘못을 인식하기를 희망하면서 이들을 폭행하기 시작했다. 폭행을 길고 단단한 일본 단풍나무로 만든 몽둥이로 행해졌다. 정은 박헌영 부재 시 남로당의 대표였던 허헌에게서 명령을 받았다고 했고 그는 공산주의 지도자들의 모든 명령에 복종한다고 말했다. 그는 심지어 이승만을 역적이라고 말했다. 이 순간에 김이 이성을 잃고 정의 가슴을 찼다. 그는 그의 오랜 친구에게 철회를 요구햇지만 정은 거절했다. 김은 또 한방을 더 때렸고 그것으로 인해 정은 체내 출혈이 시작되었고 곧바로 죽었다..」
History of the Counter Interlligence Corps, pp.92-94, 김봉진, 미군정기 김두한의 '백색테러'와 대한민주청년동맹, 대구사학 97, 2009, 56쪽에서 에서 재인용
2. 해방 이후 ~ 한국전쟁
'''드라마 야인시대와는 정반대로 주먹깡패 시절보다는 8.15 광복 직후가 바로 김두한의 진짜 리즈 시절이였다.'''
이 당시 김두한은 '''그냥 깡패에서 정치깡패로 변신했다.''' 단지 위의 내용 뿐이라면 별다른 역사적인 의의를 지닌 인물도 아니었겠지만 김두한이라는 인물이 나름 거물로 성장하여 역사에 이름 석자나마 남길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이 시기에 그가 벌인 행적 때문이다.
어쨌든 해방 직후 복잡한 정국 하에 이런저런 단체를 오가다가 활동하였다. 본인에 따르면, 여운형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기도 했다고 한다. 건준 항목에도 나와있듯이 이 단체는 여운형이 대표로 나선 중도적 단체[15] 덧붙여서 역사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는 무리들이 훗날 "김두한이 일제 무기고를 습격했다"는 식의 단순한 이야기를 떠벌였는데, 김두한의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정리하면, '''"해방 직후, 건준에 소속된 김두한이, 건준이 일제의 무기를 접수받는 일에 참여하였다."''' 정도가 된다. 일단 건준의 성격상 이야기 자체는 그럴듯하다. 단지 김두한이 주변에서 주워 들은 이야기를 자기 이야기로 바꿨을 가능성이 높을 뿐. 어쨌거나 결론은 김두한이 무기고를 습격한 항일 영웅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극우로 전향, '''극우 테러 활동의 대표적인 기수가 되었다.''' 일단 김두한 본인에 따르면, 극우 활동을 한 이유에 대해 자신의 부친 김좌진 장군이 좌익계열에게 암살당한 일의 자세한 속사정을 그 때 알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김두한은 사상에 대해 아는 것이 전무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어린 시절에 개성에 있을 때 동네 아이들이 “네 아버지는 어디서 무엇을 하느냐”고 묻자 “청국에 있는데 머리를 길게 늘어트린 사회주의자이다. 나도 열 네 살만 되면 아버지를 따라가서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대답하곤 했다고 이야기가 있다. 사실 시대 정황상 일반 대중에게 사회주의란 '뭔가 위험하지만 정의롭다' 정도의 이미지였으므로, 어린 김두한으로서도 충분히 자랑스럽게 생각했을 법하다. 게다가 앞에서 설명했듯이 건준에 참여한 전적 또한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두한이 우익 쪽으로 전향한 까닭은, 사상이나 뚜렷한 복수심보다는 그저 '''인맥과 시류에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된 결과'''였다고 봐야 한다.
일단 김두한 본인은 아버지의 의형제였던 이규갑과 윤치성이 자신을 적극 설득한 결과라고 하는데, 이규갑은 김좌진과 같은 충남 사람이기는 하지만 김좌진의 사망 당시 조선에 있었고, 심지어 윤치성은 1936년에 사망한 사람이므로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단, 김두한은 '윤치영의 형님이었는데 아마 윤치성이었을 것이다'라는 식으로 얘기했다. 윤치영에게는 형이 다섯이나 있었으므로 헷갈렸다고 해도 이해는 된다. 그러나 뒷부분에서는 또, 자신을 설득한 것은 장덕수와 김구라며 딴소리를 늘어놓고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럴듯한 명분의 문제일 뿐 진실이 무엇인지고 누가 그것을 말해주었는지는 부차적인 문제였던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설명은, 이범석 혹은 이범석 쪽 인물과의 인맥이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일단 이범석과 김좌진의 관계는 두말 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당연히 김두한은 해방 이후 자연스럽게 이범석 및 그쪽 계열의 사람들과 접촉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이범석이 1930년대부터 나치를 대놓고 찬양할 정도의 극우 반공주의자가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16] 또한 이범석 계로서도 김두한은 그야말로 땡큐땡큐인 존재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 김두한에게는 10여년간의 건달, 깡패 생활을 통해 그를 따르는 힘께나 쓰는 무리들이 제법 존재하였다는 점이었다. 당시 이범석 계는 조선민족청년단, ''''족청'계'''라는 이름으로 당대 역사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겼는데, 반공 + 민족주의를 앞세우면서 좌우합작운동시기엔 중도파 코스프레를 함으로써 다른 우익청년단과 차별성을 두었고 여러 세력의 인물들을 흡수해가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전향한 좌익 인사들도 상당수 족청계로 흡수되었다. 이렇게 족청계는 파시즘적인 성향이 매우 강했는데, 대중을 동원하여 세를 불리는 동시에 다른 이들처럼 반대 세력을 테러로 박해하는 일에 주력했다. 그러니 해방 이후 한참 완장질에 빠져 있던 김두한의 존재는 그야말로 완소 그 자체였다.
결국 이범석 계는 아버지와의 인연을 앞세워 김두한을 추켜세워주며 적극적인 스카우트에 나섰고, 김두한 역시 아버지 친구들 + 좋은 일이라는 명분 + 완장을 찼다는 허영심이 휘리릭짬뽕되어 이런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다만, 김두한의 행적을 보다 파고들면, 단순히 이범석 계, 족청 계라고 꼭 집어 말하기엔 무리가 있다. 사실 김두한과 그의 단체인 대한민청은 이승만, 이범석 중 어느 한쪽에 집어넣기가 애매한 조직. 굳이 당시의 우익청년단 계보를 정리하자면, 이범석의 족청계 vs 이승만의 대한독립청년단(독청계) vs 서북청년단 정도로 말할 수 있는데, 대한민청은 이 중 어느 쪽에도 포함되지 않은 별개의 존재였다. 실제로 김두한 본인은 이범석에 대해 특별한 언급도 한 적이 없다. 그저 지나가는 제 3자 정도로 이야기한 것이 전부다. 또한, 나중에 자유당에서 숙청당한 이범석 계가 자기들끼리 재차 분열되는 과정에서도, 김두한은 이범석 계가 아닌 비 이범석 계와 함께 따로 갈라져 나왔다. 그러니 '김두한 = 이범석 족청계'라는 단순도식으로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김두한의 행적은 이범석과 이범석의 족청계를 빼버리면 논리적인 설명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 또한 함정. 실제로 김두한은 자신이 백의사와 매우 가까웠다는 주장을 했는데, 백의사는 빼도박도 못하는 이범석 쪽 조직이다. 또한 김두한은 국회의원에 처음으로 출마했을 때 연설 도중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을 재건했다는 드립을 쳤다는데, 이것은 사실상 이범석 계열의 주장을 복붙한 것. 김두한은 신나게 썰을 늘어놓다가 "부산에서 이범석과 자유당을 만들었다"는 터무니 없는 이야기를 얼핏 흘린 적이 있다.
사실 당시 정치인들의 계파 문제는, 내로라하는 역사가들조차 피똥을 쌀 정도로 워낙 복잡하므로 극우단체를 통틀어 이범석 계나 족청계로 구분하는 것은 사실 편의상 뭉뚱그려 표현하는 것에 불과. 일일이 따지고 들면 온갖 세부 계파 및 군소단체들이 존재한다. 따라서 김두한 본인으로서는 당시에 딱히 자신이 이범석 계, 족청 계라는 자각이 없었을 수도 있다. 다만, 김두한과 그의 조직을 장택상의 별동대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이것 역시 상당한 부분에서 설명이 들어맞긴 하나, 또 한편으론 들어맞지 않는 점도 있다. 김구의 별동대로 볼 수도 있으나 이것 역시 맞는 부분과 맞지 않는 부분이 존재. 결국은 보기 나름에 따라 결론이 달라진다.
그런데 아주 간단하고 쉬운 설명이 있다. '''그것은 바로 돈과 권력'''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당대의 부자들이나 일제시절 관료 출신들의 대부분은 우파 단체를 지원했다. 이로 인해 콩고물을 노리고 수많은 우파단체들이 난립하였는데, 워낙 이름도 비슷한 별의별 정체불명의 우파 단체들이 존재하는 까닭에, 내로라하는 역사가들조차 피똥을 쌀 지경. 특히 군소 단체들의 경우, 특정 정치인의 계파에 속하지 않고 자기들만의 조직을 꾸려 운영하며 그때그때 들어오는 일을 맡는, 일종의 용병단체로서 존재하였다. 김두한의 조직 역시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사실 김두한 본인부터가 자서전이나 회고록에서 자신에게 지시를 내린 주체가 누구인지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물론, 김두한 스스로가 자신이 다른 역사적 인물과 맞먹는 수준의 중요 인물이라고 허세를 부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신에게 명령을 내린 사람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고, 오명을 자기 혼자서 뒤집어 쓰겠다는 의리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원래부터가 용병집단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김두한 본인으로서도 딱히 '누구의 지시'라고 특정할 수 없었던 것으로 봐야한다. 실제로 신영균, 박용직 등은 훗날 인터뷰를 통해 "일단 김두한과 조직을 만든 뒤, 낙하산으로 유진산을 회장으로 앉혔다."라고 증언하였다.
김두한에 대한 본격적인 후대의 연구가 이상할 정도로 적은 까닭이 바로 이 때문이다. 현재까지 우익행동대에 대한 대부분의 연구들은 특히 족청계와 서북청년단 쪽에 집중되어 있는데, 김두한과 그가 초기에 속해있던 단체는 족청, 서북청년단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별개의 조직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연구 내용에서 누락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1946년 우익청년단체인 대한민청의 주요 인사가 된다. 대한민청은 고문 신익희, 회장 유진산, 명예 회장 김구, 이승만, 김규식이라는 식으로 명망가들이란 명망가들로 온통 도배를 해놓았지만, 결국 실질적인 영수는 이범석과 상당한 친분이 있는 신익희였거나 이범석 계는 아닌 제3의 인물 유진산이었을 것이고, 신익희나 유진산 등이 직접 테러 활동을 벌이고 다닐 것은 아니기에 결국 이 조직의 실질적인 책임자는 김두한이었던 것이다.
한편으로 김두한은 이범석, 신익희의 비밀 조직인 백의사와도 상당한 관련성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백의사 자체가 비밀 조직이라 행적이 불문명하고 이미 백의사 단장은 염동진이라는 신비의 거물이 별도로 존재하던 상태로, 나이도 어리고 나중에 끼어든 처지인 김두한이 어떻게 비빌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따라서 김두한이 백의사와 관련해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관련성이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김두한의 대한민청 등의 청년단체가 좀더 표면화된 활동을 했다면, 염동진의 백의사는 좀더 비밀스러운 활동을 한 것으로, 양자는 마치 우익테러의 '빛과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고 볼 수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훗날 김두한이 제법 이런저런 내용들을 회고록에 남겼다는 것이다. 그의 증언만 참고하여도 제법 활약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신탁통치 찬성대회를 사보타지한 것, 남로당 전당대회 습격, 박헌영 암살 미수, 신불출 암살 미수, '''심영 암살 미수''', 여운형 암살 미수[17] , 좌우합작을 이유로 김규식을 살해 협박, 좌우합작을 이유로 김원봉을 살해 협박 등이 있다. 위의 인물들 면면을 보면 알겠지만 김두한의 대상은 박헌영과 남로당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좌우합작에 대한 사보타주와 테러 또한 상당히 비중이 높았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리 김두한이라 해도 최소한 양심의 가책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좌우합작은 좌익에 대해 오염되었다는 주장을 열심히 전제로 깔았으며,[18] 김규식에 대해서는 '아버지 친구인데 좌우합작에 속아서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을 하였고, 여운형에 대해서는 '내가 볼때 여운형은 완전한 좌익은 아니었는데, 좌익에게 둘러싸여 제대로 운신할 수 없는 비극이 일어났다'는 변명을 하였다. 또한, 여운형을 협박하는 과정 중에 '내가 선생을 존경하고 있는데, 좌우합작은 잘못되었으니 좌우합작을 탈퇴하지 않으면 죽일 수 밖에 없다'는 발언을 했다고 주장하였다. 실제 있었던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리 김두한이라도 김규식, 여운형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존경심 내지 조심스러움 정도는 있었다는 증거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가 참여했음이 확실하고, 본인도 자랑스러워했던 일은,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의 활동을 방해한 것이다. 특히 1946년 9월 총파업에서 맹활약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한마디로 '''파업 현장에 쳐들어가 노동자들을 두드려 패는 일을 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상당한 수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김두한은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의 전신인 대한노총의 간부가 되어 활약했는데, 대한노총은 원래 사회주의 계열의 노조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족청계에 포함된 전향한 사회주의자들이 브레인이 되었고, 힘쓰는 역할은 김두한 및 김두한과 비슷한 정치깡패들이 맡았다.
또, 형무소 수감 중에 대구 10.1 사건이 일어나자자 높으신 분들이 직접 명령하여 풀려나, 이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행동대를 조직하여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다만, 김두한의 증언들은 깡패 특유의 허세탓으로 자신에 대한 미화와 과장이 매우 심하다. 김두한의 이야기에는 적이 10만명이었다느니 100만명이었다느니 하는 표현이 허다하며, 기관총을 갈기는데 우랴돌격을 해 군중 수백명을 죽였다는 등, 수류탄이 오고갔다는 등의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무렇지도 않게 등장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들은 충분히 걸러 들을 필요가 있는데, 아무리 당시 상황이 막장이라도 서울 한복판에서 이런 내전, 시가전 수준의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기록에 따르면 9월 30일, 경찰과 경찰 끄나풀들이 노동자들의 농성 현장을 급습하여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장택상은 7~8명의 경관과 '''수천 '''명의 노동자가 부상당했다고 기자들에게 발언했다. 대체로 수천까지는 아니라도 수십, 수백 정도의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김두한의 증언은 바로 이 사건에 자신도 동참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김두한은 이 사건에서 노조 간부 8명을 불법 체포, 살해했다고 주장했는데, 확실히 밝혀진 바는 없다. 어쨌든, 김두한과 그의 세력들이 한 일은 대체로 집회나 파업 현장에 들어가 몽둥이나 칼 따위를 휘둘러 방해하기, 노조원들을 찾아가 협박하기 등이 대부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야인시대에 나오는 총격전 따위는 실재하지 않았을 확률이 높고, 극작가의 정신 상태가 의심이 될 정도로 매우 심하게 왜곡된 내용이다. 다만, 이와 관련해서는 야인시대 이전부터 더 정신이 나간 영화들이 존재한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김두한/창작물 항목을 참고할 것.
또한, 국군준비대 관련 김두한의 증언은 너무 허풍이 심하다. 국군준비대 해체 당시 김두한은 아직 제대로 된 조직조차 결성하지 못한 채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고 있었으며, 국군준비대가 해체된 진짜 이유는 극우 쪽에서 미군정에게 고자질을 해서다. 문제는, 김두한이 국군준비대 내지 관련 학병 단체를 습격해서 시가전을 벌였다는 개뻥을 침으로써 후대에 이걸 진실로 믿는 넋나간 사람들이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미군에의해 국군준비대는 해체되자 국군준비대원들이 전국 30~100여명씩 곳곳에 산개되어있는 국군준비대원을 300~600여명에 달하는 대한민청대원들의 압도적인 병력차이로 학살한것뿐이다. 10번이상 넘을정도로 여러차례 살해하다 신고로 출동한 미군에의해 증거를 목격하여 김두한은 수배가 걸리고 모두 죽이지못했다.) 심지어 야인시대의 경우 여기서 한층 더 나가 국군준비대가 박헌영과 관련되어 있다는 상상을 초월한 왜곡을 벌이는데, 국군준비대는 좌익 인물들이 관련되어 있기는 하나, 근본적으로 여운형 및 그의 조선인민공화국과 관련된 단체로 안재홍이나 김구 같은 우익 인사들까지 이 단체에 축사를 보냈다. 이러한 점은 김두한조차도 '여운형에게 모여든 사람들'이라고 확실하게 증언하였다.
한편, '''김두한의 회고 중에는 민간인에 대한 학살행위까지 포함되어 있다.''' 동두천 인근의 한 부락을 습격했는데, '김두한의 부하들이 '부녀자들까지 죽이는 사태가 벌어져, 젖을 빨던 아이가 엄마 품에서 숨져 있는 것을 본 김두한이 열을 받아 부하들을 광에 가두고 불을 지르고 직접 총살했다'는 것이다. 가해자는 무용담이라 생각해서 진실과 거짓을 넘나들며 증언하였고, 피해자는 아무 기록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에 이것이 사실인지 허풍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당시 우익청년단들이 학생, 노동 조직 뿐만 아니라 일개 평범한 부락 자체를 습격하는 행위가 일어났다는 것은 이미 입증이 되어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시가 서북청년단이 제주도에서 저지른 짓들이다. 물론 김두한이 서북청년단 쪽에서 흘러들은 이야기를 자신의 것인양 꾸며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워낙 똥과 된장을 구분할 줄 몰랐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런 구역질 나는 이야기를 무용담 쯤으로 여겼을 확률이 있기 때문. 덧붙여서, 아무리 후대의 김두한 찬양자, 조폭 미화물 제작자들이라도 이 일화만은 결코 영상물에 등장시키는 용자짓은 하지 않았다만... <야인시대>의 작가인 이환경이 이 이야기를 아주 교묘한 방식으로 왜곡하여 써먹었다. 이에 관련된 이야기는 김두한/창작물에서 볼 것.
한편으로 김두한은 박헌영, 여운형, 김규식과 같은 역사적인 인물들을 자기가 직접 암살을 시도했다거나 협박했다는 식의 이야기들을 늘어놓는데, 근본적으로 이는 '자기도 이들만큼 중요한 인물'이라는 허영심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걸러들어야 할 부분이 상당하다. 예를 들어, 김두한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여운형이 암살 당할 때 자기가 암살범에게 직접 총을 건네줬다는 식의 이야기를 했는데, 역사가 한홍구에 따르면 여운형이 암살 당하던 시점에 김두한은 감방에 있었으므로 성립 자체가 될 수 없다고 하며, 장택상의 딸인 역사가 장병혜 역시 김두한의 이야기가 그의 전형적인 허풍이라고 주장하였다. 다만, 당시 유명 정치인을 암살하겠다고 정체불명의 괴한이 수류탄을 투척하는 일 정도는 종종 일어나는 일이긴 하였다. 당시 테러리스트들, 정치 깡패들의 대부분이 제대로 된 기록을 남기지 않은 상태에서, 김두한만이 그걸 자랑거리 쯤으로 여겨 관련 증언을 남겼을 뿐이다.
또한, 김두한은 김구가 암살당하던 당시 암살 세력들이 김두한이 방해될 것을 우려해 감방에 집어넣었다는 주장을 하였다. 당시 우익청년단체는 '''자기네들의 성향에 따라 지들끼리도 서로 치고 박고 싸웠으므로''' 김두한이 이런 주장을 할 만한 이유는 있었다. 다만, 그래서 김구를 죽인 것이 과연 누구이며 누가 김두한을 감방에 집어넣었는지는 전혀 말하지 않았으므로, 이 역시 전형적인 김두한의 허풍, 허세일 가능성이 높다. 참고로 김구의 암살범 안두희는, 백의사였다는 설도 있었으나, 한때 서북청년단 소속이었다는 것만이 확인된 상태이다.
김두한의 과장이 어느 정도냐면, 당시 대한민청에 참여했던 인물들조차 "과장되었다"라는 증언을 남겼을 정도. 야인시대에도 등장하는 신영균, 박용직 등이 1987년 경향신문에서 주간 연재된 '''<청년운동반세기>'''라는 기획 기사에서 이와 관련된 증언을 남겼다. 박용직과 신영균이 저 기사에서 과장된 사건으로 말한 대표적인 네 가지가 '해군 무관부 습격사건', '국군 준비대 습격사건', '오키나와 이감 후 그쪽 격투기 대표와 싸워 이긴 사건', 이승만 독대 후 '사람 좀 그만 죽이게' 소리를 들었다는 그 일화인데 여기에 대해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단언했을 정도였다. 참고로 이 인터뷰에서 신영균, 박용직이 미군정 때 시작한 완장질을 아득바득 예순 살이 넘은 1987년 신군부 시절까지도 하면서, 청년단체의 부회장이니 위원이니 하는 칭호를 달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자신들의 행동을 여전히 반공으로 포장하고 있으나, 제법 내용이 상세하고 개연성 또한 그럴듯한 편으로, 김두한의 허풍과 허세보다는 어느 정도 역사적 사실에 가까울 가능성이 높다. 참고로, 당시의 경향신문은 정수장학회가 소유한 관계로 대표적인 친정권 보수 성향 언론이었다.
이렇게 우익테러의 선봉대장이 되어 맹활약하던 '''김두한이 미군정에 의해 체포당해 사형까지 선고받는 일이 벌어진다.''' 1947년 바로 그 유명한 '''정진룡 살해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기사 훗날 몇몇 창작물들에서 이 인물을 정진'''영'''이라고 하였으나, 진짜 이름은 정진'''룡'''이며 재판 기록과 신문 기사로 명확히 남아있다. 이 인물이 곧 야인시대 정진영(야인시대)인데, 야인시대의 내용은 김두한의 자기 변명 + 극작가의 미화가 반영된 것으로 사실상 불쏘시개 수준이므로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 일단 이름조차 재판 기록의 정진룡이 아닌 잘못 알려진 정진영으로 한 것에서부터, 극작가가 어떤 집필 과정을 거쳤을지는 뻔할 뻔자.
알려진 바에 따르면, 원래 정진룡은 일제시대부터 김두한과 거의 대등한 위치에 오른 깡패로, 김두한과 마찬가지로 해방 초기 완장질을 하기 위해 조선건국준비위원회나 사회주의 단체 등을 기웃거린 것으로 보인다. 한편, 김두한은 정진룡에 대해 '수표교 아래에서 어머니를 모시던 거지를 부하로 거둬들였다.'라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다. 다른 증언들에 따르면 정진룡은 이미 일제시대부터 김두한급의 깡패였으며, 반도의용정신대에서도 김두한보다는 한 단계 낮은 급이지만 간부급 직책을 맡았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김두한이 우익계로 전향하는 과정에 갈라섰고,[19] 상당한 분쟁과 갈등이 벌어졌으며, 결국 김두한이 수하들에게 명령해 정진룡과 그의 부하들을 납치해 끌고온 뒤 두드려패 살해했다는 것. 간단히 말하면 정치깡패 두 명이 이쪽저쪽으로 나뉘어서 완장질을 해대다가 열받은 한쪽이 다른 한쪽을 패죽여버렸다는, 사상 문제만 빼면 아주 전형적인 조폭 사건이다. 단지 훗날의 김두한으로서는 운좋게도 죽은 정진룡이 좌파 쪽 깡패였을 뿐이다.
한편, 김두한은 1970년 라디오 방송에서 회고할 때, 진행자가 '친구 정씨에 대한 사건'에 대해 계속 질문함에도 불구, 대충 죽이고 파묻었다는 식으로 자세한 언급을 회피했다. 그리고 전혀 딴소리를 하며 이 사건이 아닌 다른 사건으로 재판정에 섰다는 식으로 주장하는데, 자신이 사형선고 받은 까닭은 '''"영등포에 10만명의 좌파가 운집하는 대회가 열렸는데, 목숨을 걸고 1700명의 부하를 이끌고 쳐들어가 기관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져 수백명이 죽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원래부터가 위에 적힌 9월 총파업 중 일어난 사건을 살해사건과 교묘하게 바꿔치기하여 설명한 것으로, 김두한이 체포되고 사형까지 받게 된 것은 정진룡 살해사건 때문이지 그 전의 농성자 습격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오히려 당시 미군정이 빨갱이 콤플렉스로 인해 파업 현장에 대한 습격을 고의적으로 묵인했다는 의혹까지 제기되고 있을 정도이다.
이후 수사와 재판 과정 중에 여러 우익인사들이 대놓고 개입하였는데, 그럼에도 족청계의 병크에 잔뜩 열 받아있던 존 하지가 강경하게 나와 결국 김두한은 사형이 확정됐'''었'''다. 그리고 이때 존 하지에게 원한이 생겼는지 회고록에서는 줄곧 존 하지가 좌익에게 편향적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존 하지 항목에도 나와있듯이, 근대사에 조금이라도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존 하지는 전형적인 반공주의자 미국인이었다는 평가를 하고 있다. 한편 김두한은 재판 도중에 통조림 깡통 뚜껑으로 할복을 시도했다. 사실 말이 할복이지 전형적인 깡패들의 자해 쇼에 불과했다. 그런데 김두한으로서는 다행인 것이,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따라서 김두한의 형 집행 문제는 자동적으로 미군정에서 대한민국 정부로 이관되었고, 김두한은 1948년 9월 경 얼렁뚱땅 풀려난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김두한이 자기 입으로 직접 얘기한 내용만 봐도 그가 벌인 상해 및 살해 사건이 수두룩할 것으로 추정되는데, 유독 이 정진룡 사건으로 김두한이 사형선고까지 받게 되고 후세에도 널리 알려진 까닭은, '''김두한이 살해 현장에서 직접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즉, 빼도박도 못할 정도로 확실한 현행범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 사건의 결과로 대한민청은 해체되었다. 재판에서 결과는 김두한은 사형, 김준경, 신영균, 김영태, 홍만길, 조희창 등은 종신형을, 고경주(휘발유), 김관철, 김두윤, 이영근, 이창성, 양동수, 임일택, 송장환, 박기형 등은 징역 30년, 문화태, 송기현 등은 징역 20년이 선고되었다.
덧붙여서 김두한은 오키나와 형무소에서 흑인 주먹들과 붙었다는 둥, 위에 적힌 1947년 발생한 여운형 암살사건에 개입했다는 둥의 이야기들을 '''지껄였는데''', 당연히 신뢰성은 제로이고, 아무리 김두한을 미화시켜 돈을 버는 극작가들이라 해도 이정도까지 허무맹랑한 내용을 창작물에 반영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참고로 영상물 가운데 이 이야기를 '우정을 간직한 두 친구가 사상적으로 갈라서 결국 한쪽이 죽음으로 다다른 비극'이라는 식으로 미화한 정신나간 작품은 야인시대와 동양극장이 있다. 사실 그런 설정 자체가 기존의 다른 김두한 소설, <인생극장>에서 표절한 것이다. 이 역시 자세한 내용은 김두한/창작물에서 다룬다.
한편, 한국어 위키백과의 김두한 항목을 비롯 각종 백과사전이나 인명사전에서도, 정진룡 살해 사건 자체는 아예 언급조차 안되며, 그나마 기록되어 있는 것들도 '대한민청 관련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고 얼버무리듯 서술되어 있다.
어쨌든 1948년 대한청년단이 창단되는데, 이 단체는 당시 우후죽순으로 존재하던 이런저런 우익청년단체들이 이승만과 이범석의 합작으로 하나로 통합된 단체로서, 김두한 역시 대한청년단으로 흡수되면서 이 단체의 건설부장 겸 감찰부국장이 되었다. 단장은 당시 귀국한지 막 한달이 지난 낙하산 신성모. 이후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되고 이승만계와 이범석계가 사실상 대한민국 정부 그 자체가 됨으로서, 사실상 대한청년단은 이승만 정부의 어용단체가 된다.
어쨌든 이 당시 김두한의 활동에 대해서 본인이나 그의 측근들, 몇몇 후세 사람들이 '''공산당에 대항하기 위한 애국심'''이라는 주장을 했는데, 분명한 사실은 '''김두한이 해방 이후 혼란한 정국을 틈타 자신의 특기였던 폭력을 바탕으로 테러 활동에 앞장서, 상당한 세력을 쌓고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를 다졌다는 점'''이다. 또한, 그 당시나 이후에나 김두한과 유사한 행각을 벌인 정치깡패들이 몇몇 있었고, 이중에 일반에 알려지지 않았을 뿐 부와 명성을 거머쥔 작자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김두한만큼 성공적으로 커리어를 쌓고 명예로운 자리까지 차지했으며 대중의 화제가 되어 영화까지 만들어진 인물은, 대한민국 역사상 김두한 뿐이다.
참고로, 김두한이 당시 벌이고 다닌 짓에 대해서는 그의 측근들도 반박이 거의 불가능한데, 훗날 김두한 본인이 직접 이러한 내용들을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다녔기 때문이다.''' 심지어 김두한 본인 입으로, 이승만이 "사람 좀 그만 죽이고 다니게."라고 했다고 자랑스럽게 밝혔을 정도다. 뭐 기실 위에서도 말했듯 박용직이나 신영균이 다른 쪽으로 반박 비슷한 말을 하긴 했는데 저 정도로 사람 죽이고 다니지는 않았던 건 아니고 그저 못했다는 것이다. 그저 정치깡패짓 하며 행패부리다가 사람 여럿 죽이긴 했을지언정 이승만과 독대씩이나 하면서 직접 저런 소리 들을 급의 인물도 안되었다는 이야기다.
이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본인은 피난 도중 수원시, 포항시에서 전투에 참여했다는 주장을 하였으나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관련 기록은 전무하다. 다만, 당시에 우익청년단체원 중 일부가 전투에 참여했다는 것은 역사상 기록에 남아있는 사실이긴 하다. 단지 김두한 본인이 전투에 참여했는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일 뿐이다. 어쨌거나 김두한 본인이 라디오에서 한 이야기에 따르면, 태어나 처음으로 전쟁의 공포에 마주친 상태에서 똥오줌을 갈기며[20] , 몇날 며칠 동안 전투에 참가했다고 한다. 김두한이 늘어놓은 거짓말이 워낙 다채롭고 양 또한 많은 탓에 이 이야기 역시 진실인지 허풍인지는 전혀 알 수 없다.
이후 부산으로 건너갔으며 뚜렷한 행적은 기록되지 않았다. 김두한 본인에 따르면, 이승만이 내무부장관직을 제의했었다고 주장했으나, 이승만이 아무리 망령난 사람이라도 김두한에게 이런 제의를 했을 가능성은 한없이 제로에 가까운 허풍이다. 또한 그 유명한 부산정치파동에 대해서는 치질을 앓는다는 핑계로 자신은 일부러 참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부산정치파동 항목을 가보면 알겠지만, 이 사건은 이승만이 '''깡패들을 동원해''' 야당 국회의원들을 억류하고 기습적으로 헌법을 개정한 사건. 즉, 김두한은 이때 일을 벌인 깡패들은 본인이나 본인 세력이 아니었다고 주장한 것이며 이때 동원된 깡패들이 이정재 세력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김두한이 정말로 참가했는지 안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라디오 회고를 통해 '안 걸린 게 나 하나이다.'라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데, 이는 이정재 세력이 몰락했을 때, 본인은 이정재와 관련성이 없어 무사했다는 뜻이다. 실제로 4.19나 5.16 이후에 부산정치파동사건에 김두한이 관련되어 있음이 드러났다면, 아마 김두한은 이정재와 사이좋게 손잡고 몰락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부산에서 일어난 철도 파업, 항만 파업을 선동했다는 아리송한 이야기를 하는데, 이 역시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나 김두한은 알고보면 노동자 편이라는 주장인 셈이다. 일단 당시 파업이 있었던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3. 국회 초선
3.1. 의정 활동
휴전 협정 직후 서울에 돌아와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된다. 덧붙여서 미디어에서의 이미지와는 달리 이 때의 나이는 '''겨우 37세에 불과했다'''. 이 시점에서 김두한은 한마디로 인생의 승리자였다. 참고로 김두한과 유사하게 우익청년단체 활동을 했던 인물 중 상당한 수가 2대, 3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유진산과 이철승이 있었고, 자유당이 형성된 이후 여당에선 국회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려고 자기네편에 속하는 청년단계열 인사들을 대거 공천시킨것도 있었다고 한다.
김두한의 국회의원 시절 행적은 단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다. '''명물'''. 이는 단순히 주관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1950~60년대 언론에서 김두한을 일컬은 말이다. 젊은 나이에 좌충우돌하는 "김두한 군(君)"의 기사는 소위 신문 박스 기사의 단골 소재거리였다. 굳이 오늘날에 비유하자면 대충 어느정도 인지도 있는 유튜버가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우선 '''김두한은 말빨이 장난이 아니었다.''' 김두한이 육성으로 남긴 내용만 보아도, 물론 원고가 있다고는 하지만, 이게 보통학교도 못 나온 사람인지 의심이 들 정도의 달변이며 그럴 듯한 고급 어휘도 상당수 섞어서 사용하고 있다. 심지어 김두한은 구마적과의 대결을 이야기할 때, 제대로 된 용어를 쓰지는 못 했지만, 작용 반작용의 개념을 들어 설명했다. 정치권을 떠돌며 남들에게 주워들은 내용을 적당히 짬뽕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보기와 달리 남에게 들은 것을 잘 기억해뒀다가 자기 것으로 써먹는 것 자체가 상당히 능력을 요하는 일이다. 두뇌회전도 엄청 좋았다. 최소한 현실적인 임기응변에 한해서 만큼은 굉장히 머리가 잘돌아갔다. 일례로 심영을 저격할 때 심영을 미행했다가 '''종로구와 중구의 정확하게 경계선 지점'''에서 저격했다. 김두한이 심영을 저격하면서 노린 게 뭐였냐 하면 종로구와 중구 사이의 수사권 분쟁을 노린 것이었다. 경계선에서 저격했으니 어느 구에서 담당해서 수사를 해야 할지 애매모호하기 때문이다. 김두한은 이 점을 노려서 심영을 저격하고도 법망을 교묘하게 빠져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머리를 쓸 정도로 김두한은 머리 자체는 매우 좋았다. 김두한이 해방공간이라는 이전투구의 수라장을 헤치고 살아남아 일자무식의 학력으로 국회의원까지 된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또한, 이때까지도 종로 유흥가에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 기자는 김두한이 유세장에서 "이 동네 기생년들이 한 표씩만 줘도 내가 뽑히게 되어 있다."고 큰소리 쳤다는 증언을 남겼다.
그 외에도 총선 결과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자유당과 이기붕을 싫어하는 것이 투표를 통해 밝혀졌다. 자유당이 과반 이상의 의석 수를 차지하긴 하였으나, 노골적으로 자행된 선거부정에 비하면 결과가 썩 좋은 것은 아니었다. 또한 서울에서는 16개 의석 중 5개만 차지했으니 사실상 서울에서는 판정패한 셈이다. 자유당의 공천을 못 받아 무소속으로 출마한 상황에서 당선된 사람들의 수가 무려 67명에 이르렀다. 김두한 역시 반자유당 정서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게 종로구 을 선거구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어 '''국회의원이 되었다.''' 2위와 1.5 퍼센트 포인트 차이로 아주 근소한 차이로 당선됐다. 참고로 2위는 북에서 월남한 인사들로 구성된 조선민주당에서 출마한 '한근조'라는 법조계 거물이었다. 자유당 최봉하 후보는 이들과 큰 차이로 3위 낙선했다. 참고로, 국회가 열린 첫날 국회의장 및 부의장 선거가 있었는데, 부의장 선거에서 김두한에게 한 표가 나왔다.
그리고 국회의원이 되자마자 반 자유당파의 기수가 되었다. 이에 대해 김두한의 측근 및 몇몇 정신나간 후세의 사람들은 김두한이 이승만이 독재화 움직임을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진실은, 자유당의 공천을 못 받자 깽판을 쳐서 자유당에서 제명됐다는 것이다. 이는 김두한조차 쿨하게 인정한 사실이다. 특히 자유당 창당 과정 중에 이범석 및 족청계의 세력에 위기감을 느낀 이승만이 이들을 자유당에서 대거 숙청하였는데, 이 과정 중에 김두한 역시 토사구팽 1순위에 포함된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이에 김두한 본인 스스로가 먼저 판을 뒤집어 엎어 버리고 나온 것이다.
이후 이범석과 족청계는 공화당이라는 새로운 야당을 만들어 선거에 나설 계획을 세웠으나, 이범석이 부통령 출마를 고집하여 분열하였다. 이로 인해 비족청계가 이탈하며 당이 깨지게 되는데, 이때 김두한 역시 비족청계와 함께 딸려 나오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제1 야당이었던 민주국민당은 이범석의 족청계를 포함, 우익청년단체 출신 인사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일체 거부한 것이다. 사실상 신익희, 조병옥이 야당인사로 신분 세탁하면서 옛 동료들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버렸다.
또한 이때는 자유당이 창당된 후 최초의 국회의원 선거였기에 출마를 위해서는 자유당의 공천여부가 절대적이었으므로, 자유당의 공천을 받기 위해 돈보따리를 싸들고 찾아오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이런 상황이니 자유당에서도 아쉬울 게 하나 없는 상황. 김두한 대신 선거에 내보낼 사람이 잔뜩 대기 중이었다. 또한 김두한은 본인부터가 테러로 악명이 높고 나이까지 상당히 어렸으며, 배운 것도 하나 없는 건달 출신이었다. 게다가 각종 범죄 및 깡패들과 엮인 관계가 현재진행중인 상황이다. 자유당이 김두한 공천이라는 무리수를 둘 이유가 전혀 없었다. 실제로 김두한은 당선 직후 선거법 위반 의혹에 김관철 살해미수 혐의 사건까지 연루되었다.
뻔한 이야기지만, 선거 직후 무소속 당선자들의 상당수는 자유당에 재입당했다. 이는 김두한 역시 마찬가지였다.
재미있는 사실은 자유당 안에서 깽판을 치는 중에 김두한이 조봉암을 찬양하면서 어그로를 끌었다는 점이다. 사실 조봉암은 사회주의에서 전향하여 족청에 가담한 전적이 있긴 하나, 반공주의와는 거리가 있고 순수한 중립 민족 화합 노선을 취하여 결국 갈라섰었다. 즉, 어쨌거나 이전에 김두한과 어느 정도 인연이 있긴 있었다는 것. 참고로 조봉암은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정치깡패들의 방해'''를 받아 후보 등록을 못했다는 소문이 있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이 정치깡패들은 이기붕의 지시를 받은 이정재 계통이었을 확률이 높다.
그러다가 사사오입 개헌 이후 이 개헌에 반대하며 깽판을 쳤다는 이유로 또다시 제명 처리됐다. 김두한은 이 과정 중에 자유당의 브레인이었던 장경근의 옥수수를 몇 대 털어냈다고 주장했으나 진실은 저 너머에. 덧붙여서 김두한은, 자유당 세력의 방해로 투표에 불참하게 되었으며 자신이 불참한 덕분에 한표 차이로 개헌을 일단 막을 수 있었다는 궤변을 늘어놓기도 했다. 사사오입 개헌이 처음에 실패했던 까닭은 '''찬성표가 하나 모자랐기 때문'''이지, 누가 불참하고 말고는 상관이 없었다. 이게 아예 터무니 없는 소리인게 당시 신문 기사만으로 김두한이 회의장에 있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밝혀진다. 김두한과 함께 반대표를 던졌던 민관식 역시, 훗날 인터뷰를 통해 당시 김두한과 함께 투표에 참석하여 반대표를 던졌다는 사실을 증언하였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김두한이 사사오입 개헌을 반대한 이유다. 김두한이 개헌 몇 달 전부터 개헌에 반대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것도 자유당 내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직접적으로 개헌을 반대한 사람은 김두한과 민관식 단 두 명 뿐이다'''.[21] 이에 대해 훗날 김두한은 이승만의 독재를 막기 위해서라는 주장을 했으며, 후세의 사람들도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받아들이지만, 영 애매하긴 하다. 사실 사사오입 개헌 전에 김두한은, "개헌안 중 경제조항이 우리나라 실정에 맞지 않기 때문"에 반대한다는 뚱딴지 같은 이유를 댔다.
대통령 3선 문제를 제외했을 때, 사사오입 개헌의 중점은 경제 관련 조항들이긴 하다.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자원 및 기간산업의 국유화, 무역 통제, 민간기업의 국유화 및 통제 등 계획경제적 조항들을 삭제하거나 완화하여 시장경제 쪽으로 바꾸는 작업이었는데, 문제는 자유당이 경제 관련 조항 개헌 도중 갑작스럽게 국무총리 폐지와 이승만의 삼선이라는 내용을 끼워 넣으며, 경제 조항 문제는 쌈 싸먹는 수준의 '''퐈이야'''가 일어나버렸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김두한이 사사오입 개헌을 반대한 이유가 이승만의 독재에 반대해서였는지, 그냥 꼬장의 연장성이었던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김두한이 처음부터 끝까지 반대했고, 반대한 의원의 대표주자였다.
사실 김두한이 이런 식으로 반자유당 반이기붕 입장에 선 것은, 그냥 ''''자기들을 내쫓은 이기붕이 싫어서''''였기 때문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또한,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한 것 역시, 뭔가 대단한 정의감 때문이라기보다는 이 개헌 자체가 선거 이전부터 이승만, 이기붕 일파의 지상최대 목표였기 때문에, 단순히 '이기붕 엿 먹이기'였을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사사오입 개헌 이후 자유당에서 쫒겨난 김두한은, 남은 회기를 무소속으로 보내며 매일같이 흥미로운 기삿거리를 쏟아내는 무소속 계의 행동대장이자 아이돌같은 존재가 되었다. 다만, 이 때의 무소속은 완전히 혼자 노는 무소속은 아니고, 훗날 민주당(1955년)으로 발전하는 호헌동지회라는 교섭단체에 소속인 무소속이었다. 또한 김두한은 사사오입 개헌 이후 호헌동지회의 다른 의원 15인과 합쳐 이기붕 의장 사직권고결의안을 제출하였는데, 이게 실제로 통과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으니까 그냥 이기붕에게 엿 한번 제대로 먹여볼려고 개겼던 셈이다.
이렇듯 김두한의 의정활동은 이승만 까기와 이기붕 까기를 제외한 다른 활동은 딱히 대단한 것이 없다. 그런데 어쨌거나 훗날 자유당이 온갖 병스러운 짓을 자행한 끝에 몰락하면서, 결과적으로는 김두한은 역으로 정의의 투사 포지션 쯤에 자리잡게 된 셈이고, 이는 훗날 김두한 지지자들이 '김두한은 알고보면 독재에 저항하는 정의감 있는 인물이었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또한 일제에 의해 난장판이 되어 있던 불교계가 정화운동을 할 때 여기에 개입, 조계종의 출범에 한 역할을 하였다. 조계종이 탄생한 일은 불교 및 조계사 항목을 참고. 이로 인해 21세기까지도 불교계 일부에는 김두한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인사들이 존재한다. 다만, 이 일은 좀 더 파고들어가보면 그렇게 밝고 건전한 이야기가 아니다. 당시 불교계에서 난장판이 일어난 까닭은, '''어느날 갑자기 이승만이 '승려가 결혼도 하고 애도 낳으면 이상하잖아? 그거 일제 잔재임' 이라고 말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승만이 벌인 각종 병크 중에 이와 유사한 것으로는 한글 간소화 파동이 있다. 나무위키에는 한글 맞춤법#s-2에 간단하게 그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대통령인 이승만의 이러한 행위가 얼마나 사태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을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일단 명분 자체는 대체로 비구승 쪽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대처승 가운데에는 친일 인사들도 상당수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어느날 갑자기 국가 권력이 종교 문제에 개입했다는 것 그 자체. 한편 조계종 일부에서는, 알고보면 당시 법원, 행정부 등은 중립적이었다고 주장하였다. 무엇보다도 대통령이 마치 임금이라도 된 양, 매일같이 '대처 쪽이 옳다'라며 '종교의 자유'와는 영 거리가 먼 발언들을 쏟아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에는 '''상당한 이권'''[22] 이 얽혀 있었다. 김두한이 이미 갈라선 이승만 쪽을 따라 비구승 쪽을 편든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결국 이때 상당수의 깡패들이 불교계와 관련을 맺었는데, 일부는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됨으로써 이후 불교계의 상당한 골칫거리가 되었다. 불교계 일부에서 김두한을 높이고 천도재까지 지내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덧붙여서 예전에 불교계에서 허구헌 날 갈등이 발생하고, 머리를 빡빡 깎고 덩치가 좋은 승려들이 짱돌을 던지고 각목을 휘두르는 광경이 TV를 탔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불교계의 깡패 관련 문제는 2020년 현재까지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중이다.
어쨌거나 김두한은 이를 자랑거리로 여겼던 듯하다. 또한, 다음 선거에서 떨어진 까닭은, 이 사건으로 인해 개신교 신자들의 미움을 샀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물론 믿는 사람이 바보 수준의 이야기다. 더욱 특이한 점은, 이 무렵부터 김두한의 행적이 진보 쪽과 얽힌다.
일단 국회의원이던 1956년에 김두한은 '''조봉암의 진보당에 입당했다.''' 그런데 이는 내막이 있다. 사실 김두한은 그 해 공화당이라는 정당에 입당한 상태였는데, 이 당은 사실 이범석과 그의 족청계가 주축이 되어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이범석이 부통령 선거에 나서겠다고 고집을 피워 이범석 직계가 아닌 사람들, 특히 장택상 쪽 사람들이 이 당을 파토내게 되었고, 김두한도 장택상 계와 함께 떨어져 나온 것이다. 이 과정 중에 이범석과도 원한이 생겼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때마침 창당중이던 진보당에 가입하며 창당에 힘을 실어 주는데, 진보당은 원래 출발 당시 '''야당연합'''운동으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보당이 야당연합이 아니라 진보주의 정당으로 정체성이 굳어져가자 김두한이 본격적으로 동참할 가능성은 전무. 이로 인해 입당한지 겨우 한달 만에 탈당한다. 참고로 김두한이 탈당하던 시점에 진보당은 정식 당명도 정해지지 않았던 상태였다. 여기에 대해 조봉암은, "오는 것도 가는 것도 자기 마음이니 말릴 수 없다"는 식의 냉소적인 논평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덧붙여서 김두한은 이런 경력을 흑역사로 생각했는지 회고록에서 언급하지 않았다. 단지 후대의 김두한 지지자들이 "알고 보면 김두한도 진보적인 면이 있었다"고 포장하는데 쓰일 뿐이다.
이후 김두한은 노농당에 가입한다. 노농당 당수이자 창당인인 전진한은 일제시대 일본 유학 중 협동주의(코포라티즘) 사상에 감화되어 독립운동과 사상투쟁에 나선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초대 사회부 장관을 거친데다 국회 5선의원, 국제노동운동에도 참여한 인물이며, 개인적으로도 대단히 청빈하고 소탈하여 주변과 언론인들의 평가가 좋았고, 1972년 별세할 때까지 민주주의와 노동자 문제, 평화통일 문제에 앞장선 인물. 사상적으로는 조합주의(협동조합주의. 코포라티즘)[23] 내지 중도 우익 생디칼리즘 주의자였다.[24] 그런데 '''김두한은 원래 기본적으로 반공주의자였다.'''
참고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당시 제정된 노동법이나 대한민국 헌법의 노동 관련 조항들은 전진한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대표적인 예로, 당시 제헌 헌법 제18조 2항은 전진한이 우겨넣다시피 해서 만들어졌다는 연구가 있다. 제헌 헌법 제 18조 2항은 다음과 같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에 있어서는 근로자는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이익의 분배에 균점할 권리가 있다."''' 덧붙여서 현행 헌법에는 이런 위엄 넘치는 내용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원래 제헌헌법이 논의될 무렵 조선민족청년단 소속의 문시환은 노동자의 경영참가권과 이익 균점권을 둘 다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는데 아슬아슬한 표 차이때매 부결되었고 조병한이 어느정도 수정한 채 이익균점권을 규정한 것만 통과되었지만 법률로 구체화되지 못한 채 이름만 남아있다가 1962년의 개헌 무렵 삭제되었다.
다만 전진한은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의 전신인 '''대한노총'''을 세우고 관변단체화 한데다가 김두한까지 앞세운 인물이라는 야릇한 일면까지 있다. 애초부터 협동주의는 계급투쟁을 주된 목표로 삼지 않는다. 오히려 "노동자들끼리 알아서 잘" 상부상조하며 사는것을 목표로 하는 온건파도 많다. 전진한은 일제시대에 유학생 시절부터 학생 생협운동을 했던 사람으로, 당시 스탈린주의나 공산주의가 횡행했던 것을 잘 생각해보면 좌파 사상과는 거의 인연이 없었다고 보면 된다. 지금에야 노조가 굉장히 강성한 느낌이지만 당시에는 온건 조합주의자들이 많았다. 당시 좌파 노동운동가들은 전부 월북하고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해방 후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나 생디칼리즘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사회부 장관이 노조를 겸직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며 폭풍까임을 당하게 된다.
또한 유진산과 김두한의 인연은 후대의 창작물을 통해서도 제법 알려져 있는데, 사실 유진산은 전진한의 와세다 대학 직속 후배로 전진한을 따르던 인물이므로 '유진산 - 전진한 - 김두한'의 인간관계로 봐야 한다. 어차피 해방 직후에 유진산과 김두한은 전진한의 휘하로 대한노총에서 함께 구르던 처지였다. 또한 김성수나 송진우도 일본 유학을 통해 전진한과 상당히 친분을 맺은 관계였으므로 전진한을 통해 이들의 관계도 설명된다.
어쨌거나 덕분에 김두한은 한동안 이 쪽에서 활동하여, 이는 훗날 김두한의 관련자들이 그가 나름대로 진보적인 의정활동을 펼쳤다고 주장하는 밑바탕이 된다. 예를 들어, 김두한은 서독에서와 같이 반공을 위해서라도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장해 줘야한다는 나름 비범한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거나, 보좌관들을 "동지"라고 부르기도 했다는 등의 내용이다. 심지어 김두한은 죽기 몇해 전, '''"루즈벨트가 뉴딜정책을 행한 까닭은, 독점자본주의로 인한 노사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스웨덴 등의 북유럽 국가식 배분 정책을 도입한 것인데, 이같은 정책이 한국에서도 필요하다"'''는 위엄 돋는 열변을 늘어놓기도 하였다. 라디오에서 직접 발언한 것이다. 누군가 원고를 써줬을 가능성이 높긴하다.[25]
이 때 김두한이 덴마크니 일본 공산당이니 노동정책이니 사회보장제도니 하는 위험천만한 단어들을 나열하며 열변을 토하자, 사회자가 황급히 화제를 돌리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엿들을 수 있다. 지금은 사회보장제도나 타국인 일본의 공산당에 대한 언급이 무슨 문제냐고 할 수 있겠지만, 김두한의 노변야화는 1970년의 대담이다.
이렇게 후대의 사람들이 보면 기괴하다시피 한 김두한의 당시 친 노동자적인 행적은, 딱히 김두한이 뒤늦게 뉘우쳤다거나 정의감을 가진 것이 아니라, 애초에 이곳저곳 정치계를 기웃거리다 주워들은 내용 + 전진한을 대표로 하는 이범석 계에 포함된 협동조합주의 사상자들 + 1960년대 이후 접한 학생운동가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이전 행적이 행적인지라.. 이와 동시에 여전히 반공을 외치며 빨갱이를 때려잡은 무용담을 늘어놓는 지극히 모순된 일면 역시 여전히 존재했다. 그러니 결국 김두한에게 딱히 별다른 사상 같은 것은 없었고, 그저 좋아보이는 것을 휘리릭 짬뽕하여 자기 딴에는 그럴듯하게 포장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3.2. 거듭되는 폭력 사건
문제는 '''김두한이 그때에도 폭력배때의 버르장머리를 버리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한 마디로 온갖 곳에서 트러블이 일어났다. 말실수 같은 것 쯤이야 거의 매일같이 일어났고 웃어 넘길 수준이었다고 치겠지만, 부정선거 혐의에 부동산 불법 매매 혐의가 있었으며, 특히 '''깡패 동료였던 김관철에 대한 살해미수 의혹까지 있었다.'''
김관철 살해미수 사건은 밀가루와 설탕 입찰, 즉 이권을 둘러싼 갈등으로 발생한 사건으로 국회 선거 한달 전인 1954년 4월에 발생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김관철 항목 참조.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김두한이 열받았다고 권총으로 김관철에게 위협사격을 한 사건'''이다. 참고로 김두한은 대질심문 중에서조차 또 한차례 김관철을 패버렸다고 한다. 결국 이로 인해 당선되자 마자 감방으로 직행했으나 도주 우려가 없다며 불구속 기소하여 일단 풀려났다. 이후 김관철은 고소를 취하했다. 그러나 특수협박은 친고죄가 아니므로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법정에서 기묘할 정도로 시간을 질질 끌었고, 결국 1956년 김두한이 유죄를 받긴 받는데 선고유예였다. 참고로 현재 선고유예 기준을 적용하면 김두한은 절대로 선고유예를 받을 수 없다.
그리고 김관철 사건 선고유예가 나온지 한달도 안 된 시점에 이정재가 국회 회관까지 찾아와 김두한에게 맞짱을 뜨자고 요구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국회 안에서 깡패들끼리 치고 받을 뻔했다는 게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던 탓에 언론에서 기사화될 정도로 제법 크게 알려졌다. 다만 이 사건은 이정재의 맞짱 요구에 김두한이 응하지 않았다는 것이므로 대체적인 여론은 '김두한이도 철이 좀 들었나보다.' 정도다. 사건의 원인은 역시 이기붕 세력과의 불화였다. 이것이 원인이라는 것은 김두한 본인 역시 훗날 인정하였다.
단지 여기에 더해 주먹질하는 사람들 특유의 허세가 겹치다 보니 이런 요란한 사건으로까지 발전했던 것인데 어쨌거나 이 둘이 정확히 어떻게 붙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중에 김두한 본인은, '이정재는 원래 사랑하는 내 동생이었다'는 둥, '권총을 든 이정재를 점잖게 타일렀다'는 둥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는데, 지금까지 보았듯이 김두한의 허풍은 한두 개 수준이 아니므로 진실은 저 너머에.
여기까지는 김두한의 주장대로,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한 김두한을 자유당, 이기붕, 이정재가 담가버리려고 한 일이라고 넘어가준다 쳐도, 다음 선거 1년 전인 1957년 사세청장을 국회의원을 몰라본다는 이유로 폭행했는데 이는 정치적으로는 큰 실책이었다. 당시 정황상 김두한이 청장을 방문했음에도 청장이 일하는 척하며 무시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김두한은 정권 실세인 이기붕에게 대놓고 대드는데다가 나이도 어리고 거친 일자무식의 건달 출신이었다. 애초에 사세청을 방문한 이유부터가 별로 밝고 명랑한 이유는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어쨌든 김두한이 청장을 '''패긴 팼다.'''
하지만, 당시에는 자유당의 전성기 시절이었던 탓에 오히려 "속이 다 시원하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고, 시대가 시대인지라 남자들이 주먹질하고 술 마시는 것에도 다소 관대한 분위기였다. 이로 인해 언론에서도 1면이 아닌 2면, 3면에서 반쯤 우스개소리로 다뤘을 정도. 참고로 이 사건은 김두한 본인이 자신의 회고록에서 쏙 빼버린 탓에 후대인들에겐 잊혀졌다.
'''하지만 이런 인물을 국회의원으로 뽑아주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 동아일보의 경우, "많은 사람들이 잘 팼다고 하더라"라면서도 대구 매일신문 테러 사건 당시 정권의 하수인인 경찰서장이 했었던 "백주대낮에 테러하는 것은 테러가 아니라던데?"라는 망언을 뒤에 실어서 막장으로 치달은 자유당과 김두한의 행적 둘 다 까버렸다.
여담으로, 전 국회의장 이만섭은 KBS 1TV 인물현대사 차지철 편에서 "차지철은 권오석 등과 현역 정치인들을 폭행하는 등, 주먹으로 정치활동을 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박정희의 경호실장 차지철도 못 건드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정치깡패로 이미 악명이 자자했던 김두한이었다.
4.19 혁명 학생운동 참여, 6대 국회에서 김두한의 비서로 지냈던 서용화는 국회 본회의장 안에서 갑자기 김두한이 차지철을 보고는 '''"당신 힘이 장사라며? 나하고 한 번 붙어볼까?”'''라며 웃통을 벗어던지는 일화를 소개했다. 당시 김두한은 40대 후반, 차지철은 30대 초반. 한편 차지철은 김용채에게 손찌검을 당하기도 하였다는 소문도 있다.
이 당시 김두한의 무력을 나타내 주는 사건이라고 나오는 게 1956년 7월 27일에 있었던 야당 국회의원들의 가두시위에서 김두한이 무장경관들과 맞서서 14명을 팼다는 사건인데, 야인시대에도 나오는 이 사건의 전말은, 당시 언론을 빌리자면 지방자치법안 통과 문제로 여야가 대립하다가 야당 의원들이 가두시위를 했고, 그걸 무장경관, 사복경관들이 막아서고 김선태의원이 잡혀가면서 충돌이 일어났는데, 거기에 김두한과 이철승[26] 이 몸싸움 선봉이 되어서 무장경관들과 싸우고, 뒤에 있는 다른 야당의원들 보호하면서 행진을 했던 사건이 과장된 것이다. 14명 이야기가 나온 것은 저 시위 와중에 경관 14명이 다쳤다면서 경찰에서 야당의원 다섯을 소환했는데, 죄다 비웃으며 소환거부를 했기 때문이다.[27] 김두한이 1대 14로 싸워서 무장경관을 때려잡은 사건이 절대 아니다. 이걸 김두한이 노변야화 나와서 개뻥을 친 것을 사실로 보고 여기저기서 써먹은 것이다. 무쌍에 대한 판타지와 달리 김두한 본인도 '아무리 강한 사람이래도 장정 3명이 한꺼번에 덤비면 꼼짝 못하고 당한다.'라고 현실과 굉장히 가까운 발언을 한 적도 있다.
4. 재야인사
결국 다음 선거인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해버렸다. 당시 야권은 반 자유당 기치를 내건 민주당(1955년)으로 재편되는 상황이었는데, 민주당 쪽에서도 트러블메이커이자 이범석 계, 족청 계의 아이콘이나 마찬가지였던 우파 깡패 김두한을 불러줄리가 만무. 결국 김두한은 위에서 설명한 '''노농당'''이라는 군소 정당의 후보로 나설 수 밖에 없었고, 민주당 한근조 후보와 압도적인 표차이로 2위 낙선했다. 덧붙여서 김두한은 선거가 끝나자마자 사세청장 폭행 사건과 선거법 위반으로 감방으로 직행하는데 훈훈하게도 경쟁자였던 민주당 한근조 당선자가 면회를 갔다고 한다.
하지만 국회의원 선거에서 떨어졌으니 야인 신세였다. 따라서 1958년부터 65년까지 7년 동안 김두한은 그냥 '''재야인사 비슷한 그 무엇'''인 상태였다. 이 시기동안 선거에 나왔다 떨어지는 과정 중에 상당한 재산을 까먹었을 듯하다.[28]
물론, 당시 혼란한 상황 속에서 뒤늦게 개나소나 나선 것은 분명히 있었던 일이긴 하다. 게다가 4.19로 이승만이 쫓겨나고 이기붕이 죽는 것을 보면서 김두한이 야! 신난다! 했을 가능성도 높고.. 한편 몇년뒤 김두한은 한국독립당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되는데, 이 사건에는 4.19 혁명에 참여했던 운동가들이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니 뭔가 미심쩍긴 하다만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다. 한편, 김두한은 4.19혁명 세력 속에서 자신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는 까닭은, 자유당의 남은 세력이 위해를 가할까봐 전면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어쨌든 4.19 직후 치뤄진 제5대 국회의원 선거. 자유당의 몰락으로 사실상 민주당이 제1당이 되버린 가운데, 수많은 군소정당들이 난립한다. 노농당의 경우, 이미 창당인인 전진한 스스로가 탈당한 지경인지라 김두한은 그냥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종로구에서 출마하는 것은 부담이 되었던지 아버지의 고향인 충남 홍성군에서 출마했다. 그러나 선거 과정 중에 "김두한이 서울에서 주먹들을 데리고 왔다더라"는 소문이 퍼져[29] 근소한 차이로 무소속 김영환 후보에 밀려 2위 낙선했다. 훗날 본인은 이때 역시 불교 정화 과정 중에 생겨난 개신교 신자들이 안티 김두한 운동을 펼쳐 낙선했다고 주장했다.
이후 장면 정권이 성립하자 장면의 일제시대 행적이 애매하다는 이유로 국회 방청석에서 난동을 부린다. 아니, 이 정도 뿐만 아니라 본인이 직접 "국민연합전선"이라는 정치조직을 만들어 장면이 친일반민족행위자라며 찌라시를 돌리고 시위를 벌였음을 훗날 쿨하게 인정했다. 아버지 때문에 친일파가 싫다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아무래도 총리의 친일 의혹을 부추겨 독립운동가인 아버지를 둔 자신을 상대적으로 부각시키려 했던 행위로 보인다.
덕분에 장면은 친일 의혹 꼬리표가 붙어 고인이 된 이후까지도 그야말로 개고생했다. 장면의 친일 행적 의혹의 핵심은, 그가 신사참배 참여를 독려했다는 것이다. 결국 이것이 문제가 되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그러나,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에서는 '종교의 자유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받아들어져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장면의 행동을 '소극적인 친일'로 볼지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볼지는 결국 각자의 판단. '''다만, 장면의 행적을 친일로 본다면, '경성특별지원청년단'이라는 조선총독부의 어용 준군사단체를 조직했던 김두한의 행적은 과연 무엇으로 봐야할까?''' 어찌보면 이런 김두한의 행위야말로 후안무치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일 말고도 여전히 깡패로서의 본성을 보여준 웃지 못할 사건도 있었으니, 마사이찌 린치 사건이다. 사건의 전말이야 김두한이 당시 유명한 부산 건달인 고영목, 소위 고 마사이찌라고 불리던 자와 같이 술을 마시다 사소한 일로 시비가 붙어서 싸운 사건인데, 당시 뉴스 기사들의 이런저런 전말을 종합해서 당시 상황을 훑어보면 웃기지도 않은 몇가지 결론이 나오게 된다.
김두한이 야인생활을 하던 당시, 평소 제법 두터운 친분이 있던 마사이찌 고영목과 술을 마시다가, 요정 기생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고영목을 홀대하자 빡친 고영목이 김두한과 붙은 사건인데, 여기서 김두한은 1대1로 승부가 안 나자 처음엔 고영목을 달래서 화해하는 척 한 다음 다른 졸개들 몇을 데리고 가서 달궈진 연탄집게 등의 연장을 써서 고영목을 집단으로 린치해서 상해를 입히게 된다. 여기서 야인시대 시청자들이 '뭥미??' 할 일이 몇 개 생긴다. 우선 야인시대에서 그저그런 중간보스 급이던 황병관에게 개털린 후에 총질을 해서 황병관을 죽인 그 고사이마찌가 바로 저 인물인데[30] 실제로는 그 인물과 비교해서 김두한의 싸움실력이 썩 나을 것도 없었다는 점이다. 나이가 들어서 그랬다고 보기에도, 고영목은 김두한보다 두 살 위였다. 그리고 낭만파 주먹 운운하지만, 김두한 역시도 그다지 썩 정정당당하게 싸우고 다니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야인시대 부산피난 시절의 부두노동자를 위해서 그 지역 깡패들과 싸운 그 사건이 개뻥이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점인데, 실제로 김두한은 그 당시 황병관쪽 보다는 고영목 쪽과 친분이 있을 수 밖에 없었던게, 고영목도 김두한이 속해 있던 단체인 대한청년단의 소위 '동단부 특공대장'이었다.[31] 이러니 당연히 당시 부두 노동자들을 위해서 부산의 악마 고영목과 싸우게 되고 황병관 포함한 명동파들이 김두한을 도와주다가 당하거나 했던 건 뻥 중에서도 개뻥.[32] 깡패들끼리 시비가 붙은 닳고 닳은 사건이지만 김두한이 실력으로나 아니면 마인드로나 특별히 대단한 깡패였다는 사실을 제대로 부인하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5. 국회 재선
1965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의 재보궐선거에서 용산구에 한국독립당의 후보로 출마, 당선되었다. 이로써 생애 두번째로 국회의원이 되어 8년 만에 국회 재입성한다. 보궐이 아닌 본래의 제6대 국회의원 선거 자체에 출마했는지는 불명확하다. 한국어 위키백과에는 출마했던 것으로 나와있으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이때 나이 47세로 아직까지는 한창때였다. 그런데 문제는 김두한의 소속과 그의 상태였다.
때는 5.16 군사정변이 일어난지 3년 뒤로, 정계는 박정희의 민주공화당 vs 윤보선의 민정당을 중심으로 재편된 상태였다. 여기에 더해 제3의 세력으로 옛 민주당(1955년)에서 갈려져 나온 민주당 계의 꼬마 정당들이 있었다. 문제는, '''어느 쪽이건 간에 모두 김두한을 꺼렸다.''' 당시 군부 세력이 들어서고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정치깡패들을 청소한 것이다.''' 사실 정황상 집권세력인 군부가 정치깡패의 대명사였던 김두한 역시 함께 보내버리고 싶어했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당시 김두한이 조폭계에서 우두머리였던 이후 김두한을 대신하는 조폭계의 대명사가 된 이정재나 임화수 등은 김두한과 확실하게 대립관계에 있었으므로[33] , 엮을 꺼리 자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이런 상황에서 여당이건 야당이건 정치깡패의 대명사 그 자체였던 김두한을 받아들이는 것은, 명분에 상당히 좋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한편, 이 시점의 김두한은 그야말로 괴상하기 짝이 없는 상태였다. 입만 열면 우익 정치깡패시절 빨갱이 잡은 이야기와 반공을 주장하며 허풍과 자랑을 늘어놓다가, 어느 샌가 화제를 노동자, 빈민으로 돌려 사회보장이니 복지니 하는 이야기를 주워섬겼다. 그러는 한편으론 여전히 주먹계 후배들과 어울리며 광산업 쪽에서 큰손으로 활동한다는, 그야말로 모순 그 자체인 상황이었다.
그가 소속되어 출마한 한국독립당 자체가 어떻게 설명하기도 묘할 지경이다. 원래 한국독립당은 1930년, 임시정부의 여당으로써 세워진 정당이였다가 1935년에 민족혁명당에 통합되었다가 이탈한 뒤 1940년에 통합됨으로써 새롭게 세워진 정당이라 볼 수 있는데, 김구가 사망하고 한국전쟁으로 인해 자연소멸된 상태였다가, 제6대 국회의원 선거 직전이던 1962년 옛 한독당 소속 인물이었던 김홍일 등을 중심으로 다시 재건된 것이다. 즉, '선거용으로 향수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이름만 끌어와 급조한 정당'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1960년대라도 이런게 먹힐리가 만무하니 결국 한독당은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단 한사람도 당선자를 배출하지 못했고, 나중에 보궐선거에서 김두한 한 명만이 간신히 당선했다. 신기하게도 이 당에는 4.19혁명에 참가했던 학생운동가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고, 어느샌가 사실상 당의 핵심은 이들이 되었다.[34] 그 덕에 김두한의 포지션도 자연스럽게 진보계로 또다시 연결됐다. 당시 김두한의 선전부장이었던 모세원의 이야기 그런데 '''김두한은 당선되자마자 한국독립당 내란 음모 사건의 주범으로 체포, 수감되어 버린다.''' 이 사건은 아주 전형적인 국가보안법 용공 조작 사건의 초창기 버전이긴한데, 주범으로 김두한이 껴있다는 매우 특이한 사건이다. 김두한의 비서가 된 모세원의 이 사건에 대한 이야기
이 사건을 정의하자면, 한일기본조약에 반대한 젊은 운동가들[35] 과, 말실수라면 일등 가는데다[36] 오랫동안 광산업을 해서 폭약, 화약을 입수하기 쉬웠던데다[37] 어쩐지 이 당시 김종필에게 접근을 시작한 김두한을 엮어 버린 것이다. 그러고서 알고보니 김두한이 자금이랑 폭탄까지 주면서 불순분자 운동가들에게 내란 일으키라고 했다고 만들어낸 것이다. 집권 세력인 군부 입장에선 운동가들도 정리하고 정치깡패도 정리한다는, 그야말로 꿩먹고 알먹기였다. 덧붙여서 이 사건은 통합진보당 내란음모 수사 사건 이전 현역 국회의원이 내란죄에 연루된 유일무이한 사건이다.
어쨌거나 워낙 스토리가 어처구니 없었던데다, 당시는 유신 이전으로 야당 세력이 그렇게까지 약하지 않았고 여당 쪽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었던 상태였다. 거기다 간신히 10년 만에 보궐 선거로 당선되어 회기가 1년 정도 남은 상태에서 당선되자마자 감방행이라는 사실이 동정표를 끌어 곧바로 국회에서 석방동의안이 가결되어 풀려난다. 또한 재판정에서도 이 사건으로 최종적으로 기소된 10명 전원 무죄 판결을 받았다. 사건에 연루된 사람 중에는 단순한 광산업자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의 입장에선 그야말로 지옥 문턱까지 갔다온 셈이다. 한편 이 사건이 종결된 뒤 기소된 10명 가운데 한 명은 경찰이 심은 프락치임이 밝혀졌으며, 무죄 확정에 따른 형사보상금은 김 모씨가 일괄수령해 잠적해버렸다고 한다.
6. 국회 오물 투척 사건
'''1966년, 그 유명한 국회 오물 투척 사건이 발생한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을 참조할 것. 이 사건은 그야말로 김두한이 국회의원 시절 일으켰던 온갖 좌충우돌의 결정판으로, 이후 영원히 국회의원 김두한의 이미지로 남았다.'''똥이나 처먹어 이 새끼들아!'''
- 사건 당시 김두한의 마지막 발언.
김두한이 이런 일을 벌인 것은 사실 복잡한 이유같은 게 불필요. 바로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선거 직후 내란음모죄로 감방행이라는 불쾌한 사태를 겪었고, 원래 성격부터가 단순하고 거친 사람이었으니 속에서 끓어오르는 무언가를 참지 못했던 듯하다. 실제로 이 사건은 한독당내란음모 사건의 항소심이 마무리된 지 불과 5일 후에 발생하였다.
이로써 김두한은 한독당 사건으로 감방에서 풀려난지 겨우 1년, 의정활동을 한지 8개월 만에 국회의원에서 물러나[38] 곧바로 감방으로 직행했다. 그러나 똥 뿌린 것 말고는 별로 피해를 주지 않았으므로 1년 뒤 고혈압으로 인해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한편 수감 중에 할복을 시도하는 소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런 행위는 미군정 당시 정진룡 살인 사건 재판 때도 벌인 짓이다.
박정희 정권은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나빠진 이미지를 반전시키기 위해 김두한을 거세게 몰아 붙였으나, 오히려 이미지 세탁을 제대로 한 건 김두한 쪽이었다.'''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김두한이 잘했다고 여겼다.'''
7. 말년
감방에서 풀려난후 야인시대에선 박정희에게 독대를 요청해 성사되었고 박정희는 김두한에게 다시는 정치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뒤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39] 에게 김두한을 도와주게 했고 김현옥은 김두한에게 성북구 정릉유원지 개발권을 줬지만 사기를 당해 날려먹었다는데 전혀 검증이 안된이야기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런 깽판을 친 김두한에게 뭐가 이뻐서 유원지 개발권같은 이권을 주겠는가란 의문이 들며 김두한은 이후 선거에 출마했기 때문에 사실이 아닌걸로 보인다.
어찌되었든 워낙 혼란하고 괴상한 인생 속에서 야당 세력과도 자주 엮였다. 실제로 2년 뒤인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 신민당 후보로 수원시 선거구에 출마한다. 국회 오물 투척사건의 결과로 이미지가 개선되었고, 한독당 출신 운동가들이 민주당계이던 신민당에 들어가는 과정 중에 김두한도 함께 영입이 된 것이다. 여담이지만 한독당 내란음모 사건으로 김두한과 함께 법정에 선 인물 중에서만 국회의원이 세 명씩이나 나왔다. 드디어 그 오랜 세월 끝에 그럴듯한 정당의 소속이 된 것이다. 이 신민당은 바로 대한민국에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고 훗날 대통령이 되는 정치계의 거목인 '''김영삼'''과 '''김대중'''이 몸담고 활동한 민주당 계열의 정당이었기에, 우익 깡패 전적이 있던 김두한의 행보와 생애를 사람들이 조사하는 데에 더욱 꼬이고 꼬이게 만드는 일이기도 했다. 김영삼과 같이 야구경기를 한 후 찍은 사진도 있고, YS 역시 훗날에 김두한에 관련된 짧은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야인시대에서 묘사되었듯이 부하들 밥 사주겠다고 김영삼에게 돈을 꿔간 일이 꽤 있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이만섭 국회의장은 김두한을 매우 긍정적으로 보았다. 김대중의 경우엔 박정희 정권의 사카린 밀수로 인한 오물투척 사건 때 김두한보다 앞서 연설을 하며 현장에 있었고 신민당으로서 같은 당원이기도 했지만 특별한 이야기는 없었다. 다만 김을동이 정계입문 초기에는 민주당 소속으로 서울시의원을 재직하기도 했고, 김대중이 대통령이었을 시절에는 김을동 본인이 소속해있던 자민련이 연립여당이었기까지 했기 때문에 김대중의 선거운동을 도와주는 등 연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다만 이 당시의 김을동은 국회의원이 아니라서 특별히 엮을거리는 없었다.
그러나 득표율은 이전보다 크게 늘었기는 했다만 '''약간의 차이로 민주공화당 이병희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국회 오물 투척사건이 아무리 속시원하다해도 국회의원으로 뽑아주는 것은 또 별개였던 듯하다.[40] 게다가 유세 도중 연설이 문제가 되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는 일을 겪기도 한다. 후세의 김두한 찬양자들은 이 사건을 이유로 김두한이 박정희 정권에게 탄압 받은 민주 투사 쯤으로 위장하려 드는데, 사실 이때 김두한은 투표소 관리위원을 협박 모욕하는 사건도 저지른 상태였다. 즉, 이 두 사건을 함께 적용되어 수감된 것. 어쨌거나 이번에도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8. 사망
이후 2년 뒤인 1972년 11월 18일, 김두한은 주먹계의 후배를 만난 후, 다음날인 19일에 센추럴호텔 객실에서 심한 두통과 구토를 호소하더니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관련자료 1 관련자료 2 이 때 신원미상의 인물들이 김두한을 병원까지 옮겨다주었으나 의식을 되찾지 못했고, 결국 다음날인 11월 20일에 퇴원하여 서울 성북구 정릉 3동 769[42] 자택으로 옮겨진 뒤 그 다음날인 11월 21일[43] 에 세상을 떠났다.[44] (3·6대 국회의원 김두한씨 별세) 향년 54세. 사인은 뇌출혈.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인 조소앙의 동생인 조시원이 장례위원장이 되어 광복회의 사회장으로 치뤄졌으며, 장관이나 정치인등이 조문을 와서 명복을 빌고, 그가 생전에 백야 김좌진 장군의 국가유공자 연금 등을 장학금으로 기부해왔던 삼애 고아원등에서 온 소년소녀들이 참석하는 등 나름대로 사회적인 명사의 장례식의 모습을 갖췄다. 시신은 경기도 양주시 장흥 신세계공원(#)에 안장되었다.
김두한의 죽음에 대해 주먹계의 후배 및 김두한의 아들은 타살설을 주장했다. 사실 김두한이 쓰러진 장소는 센추럴 호텔 객실이라고 알려졌는데, 그가 이곳에서 누구를 만났는지, 쓰러진 김두한을 병원에 데려다 준 사람들이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유족 및 친지들은 훗날 김두한은 박정희 정권 혹은 그 사주를 받은 자에게 타살되었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이 신빙성이 없는 것이, 몸집만 딱 봐도 알 수 있듯 김두한은 원래부터 고혈압을 앓고 있었다. 김두한이 병보석을 받았던 것도 전부 고혈압 문제 때문이었으며, 사망 4개월 전에는 고혈압 문제로 병원에 입원하기까지 하였다. 당시 김두한을 진료한 의사들 역시 전형적인 뇌출혈에 의한 쇼크상태로 판정하였으며, 실제로 뇌출혈은 중증 고혈압 환자들이 겪는 증상 중 하나이다. 또한 그가 사망했을 당시 그의 죽음에 대해 의혹을 제기한 인물이나 언론은 전무하다. 그의 죽음에 당시 행세 좀 하던 정치계 인사들이 조문하였으며, 각 언론들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의리가 있었다", "반공투쟁을 하였다"는 둥 대체적으로 고인을 긍정적으로 추모하는 분위기였을 뿐 타살설에 관해서는 아무도 의혹을 제기하지 않았다.
9. 요약
- 김두한은 김좌진의 사망 직후인 1930년 신문지상을 통해 소개되었다. 그의 신분이 위조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이런 주장이 사실일 가능성은 낮다.
- 어머니 김계숙이 일찌감치 가출해서[45] 김두한은 불우하게 자랐으며, 결국 1930년대 후반에서 1940년대 사이 서울에서 이름 있는 깡패로 성장하였다.
- 1943년 김두한은 조선경치청과 협력하여 다른 깡패들과 함께 '경성특별지원청년단(반도의용정신대)'라는 지원단체를 조직하였다. 한마디로 일제의 독립 운동가 사냥을 보조해주는 단체를 설립한 것이다. 이는 명백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볼 수가 있으나, 이 배경엔 일제의 강제 징용을 피하고자 어쩔 수 없이 참가했어야 했다는, 즉 또 다른 친일 행위를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현실과 타협해서 했던 사소한 친일 행위였다는 이유로 반민특위에 의해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이후로도 이 단체에 제대로 연구된 바가 없어 결국 김두한의 이름은 각종 친일부역자 명단에 등재되지는 않았다.
- 1945년 해방 직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활동에 참가하였다고 본인이 주장하였다.
- 대체적으로 김두한은 이범석의 족청계 인물로 분류한다고 하지만, 확실하게 족청계로 분류하기엔 애매하다. 어쨌든 우파청년단체의 한 갈래에서 활동하였다.
- 김두한의 확실한 행적은 우익 노조인 대한노총의 간부였다는 것. 이 직책을 통해 당시 활발했던 각종 파업을 사보타주하고 노동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였다. 9월 총파업 당시 김두한이 상당한 활동을 하였음은 거의 확실해 보이며, 본인은 대구 10.1 사건에도 참가하여 시위자들을 진압했다고 주장했다.
- 위의 활동들과 아버지의 명성, 본인의 말솜씨와 싸움 실력을 더하여 우익청년단체에서 핵심적인 인물로 성장하였다.
- 6.25 전쟁이 끝난 이후 이승만이 이범석의 족청계를 숙청하는 과정 중에 김두한 역시 자유당을 탈당하였다. 그러나 1956년 무소속으로 종로에서 출마하여 국회의원이 되는데 성공하여 자유당에 재입당한다.
- 이 과정 중에 이승만 및 이기붕과 등을 돌려 반자유당 인사가 되었으며, 그의 의정 활동은 반자유당 반이기붕 운동에 집중되었다.
- 그러는 한편 선거부정, 김관철 살해 미수, 이정재와의 대결 사건, 사세청장 폭행 사건 등을 저질렀다.
- 결국 1958년 다음 선거에서 낙선하였고 이후 1965년까지 야인 신세가 되었다.
- 재야인사 시절, 이런저런 군소정당을 기웃거리는 과정 중에 진보계 및 학생 운동계와 다소 인연을 맺게 된다. 그 자신에게는 특별한 사상이 없었지만, 이런 과정 중에 진보 및 학생 운동 쪽의 이론 약간을 습득하여 그의 행적이나 연설 등에 이러한 것들이 다소 반영되게 되었다.
- 그러는 한편으로 여전히 깡패, 건달들과의 접촉은 끊기지 않았으며, 이들을 동원한 부정 선거, 시위 주도, 사조직 결성 등의 행위도 여전하였다.
- 1965년 보궐 선거를 통해 두번째로 국회의원이 되었으나, 그 직후 한국독립당 내란 음모 사건의 주범으로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젊은 학생 운동가들과 악명 높은 정치깡패였던 김두한을 엮은 특이한 형태의 박정희 정부의 조작사건으로, 김두한은 체포 직후 국회의 석방 동의안 가결로 풀려났으며, 재판에서도 관련자 전원이 무죄로 판명되었다.
- 그러나 풀려난 직후인 1966년 국회 오물 투척사건으로 사실상 국회에서 제명 처리되었으며, 수감되었다. 이는 김두한의 마지막 국회 활동이다.
- 이후 1967년 다시 선거에 나서서 그 동안 얻었던 득표율에 비하면 큰 표를 얻었기는 했다만 간발의 차이로 낙선하였으며, 1972년 뇌출혈로 사망했다.
- 현재까지 김두한에 대한 연구는, 반공콤플렉스 및 김두한보다 우선적으로 연구되어야 할 인물, 사건이 상당한 탓에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또한 대부분의 기록들이 김두한이 직접 남긴 증언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허위, 과장, 왜곡, 축소, 은폐된 부분이 상당하여 어려움을 한층 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