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여담

 



1. 개요
2. 개인적 면모
3. 일화
3.1. 대통령이 되기 이전
3.2. 대통령직 재임 시절
4. 기타


1. 개요


대한민국 제5·6·7·8·9대 대통령 박정희에 대한 여담을 다루는 문서.

2. 개인적 면모


  • 엄청난 애연가였다고 한다. 5.16 군사정변을 일으키는 날에는 지프 차 안에서 줄담배를 피우고 대통령 집권 이후 인기리에 방영되던 수사반장이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담배가 나올 때마다 담배를 물은 데다[1] 월남파병을 결정하기 전에는 담배 4갑을 하루 저녁에 피울 정도.
  • 미국의 밴스 특사는 존슨 대통령에게 "박정희는 종종 재떨이로 영부인과 참모들을 때린다"고 하면서 "위험하고 불안정한 사람"이라고 보고했다.#
  • 교사 생활을 3년 했고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정규교육을 받아서 문예적인 소양이 깊었다. 시와 일기, 편지같은 글쓰기와 풍금, 클라리넷, 트럼펫 등 악기도 두루 다루었다.[2] 그림도 곧잘 그렸으며 서예에도 취미가 있었다. 서예 전문가들은 역대 대통령 중 최고의 명필로 이승만을 꼽지만, 가장 값을 비싸게 치는 것은 박정희의 서체라고 한다. 군인 출신답게 날카로운 판본체에 가까운 글씨를 고수했으며, 현재는 바뀐 이전의 광화문 현판도 그가 손수 쓴 것이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일본에서 되찾아온 소전 손재형에게 지도를 받기도 했고 승마검도, 국궁을 즐기기도 했었다.
  • 박정희가 직접 작사, 작곡한 노래는 새마을 노래 말고도 유신시절에 프로파간다를 위해 만들었던 나의 조국 등이 있다. 그런데 이 나의 조국이라는 노래를 직접 들어보면 알겠지만, 엔카풍 음계를 갖다 쓴 왜색가요나 다름없다. 박정희가 왜색을 몰아낸다면서 금지곡들을 선정한 시대였다는것을 감안한다면 상당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 일상생활이 검소했다는 주장이 있다. 비름나물이나 두부 같은 향토음식을 좋아했다고 하며[3], 허리띠가 해져도 모르다가 청와대 전속 이발사가 알려줘서야 알아차렸다거나, 여름에도 에어컨을 틀지 않고 겨울 난방도 적정 온도를 유지했다는 증언도 있었으며, 변기물을 아끼려 변기 뒷칸에 벽돌을 놓았었다는 것. 빈농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배인 생활습관의 영향으로 추정된다고 하며, 해외의 한국 근현대사 관련 학자나 정치학자들도 박정희의 생활이 검소했다고 평가했다.출처# 하지만 사망 당시 술자리를 보면 갈비, 장어, 송이, 전복 등의 고급 술안주를 차려놓고 연예인까지 불러 유흥을 즐긴 점을 감안하면 검소하다고 보기 어렵다는 의견도 있으므로,출처 이에 대한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이와 관련해, "육영수 여사의 사망 이후 검소하던 박정희가 사치스러워졌다"가 현재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만, 보통 사람도 가끔씩은 비싼 거 먹는데 그냥 대통령도 아니고 무소불위의 독재자씩이나 되어서 아랫사람들과 연회를 갖는 데도 싸구려 술과 안주를 먹으며 궁상떠는 일도 우스운 일이고, 증언이 꽤 많이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평소 검소했다는 것 자체는 맞아 보인다. 개인의 기호나 취향은 성장기나 젊은 시절에 굳어지는데 성장배경을 보면 사치스러울래야 사치스럽기가 힘든 성장배경을 지닌 사람이기도 하다.
> 이한수 전 서울신문 사장은 "육 여사가 죽은 뒤 박 대통령의 주변에 '인의 장막'이 둘러쳐져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이씨뿐만 아니라 박 대통령 주변의 많은 인사들이 그의 '실정'의 원인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 박정희'의 소탈하고 서민적인 면모는 유신체제 출범 뒤 그 '물'이 많이 빠졌다는 게 주변 인사들의 증언이다. 이 무렵부터 그의 술자리에는 막걸리보다 '시바스 리갈'이 자주 올라왔고, 여자들과의 추문도 불거지기 시작했다. 물구나무 서기와 검도로 체력을 단련했던 그가 골프에 푹 빠진 것도 이 무렵부터다. 박 대통령이 '장학생'으로 관리하던 몇몇 기자들과 사이가 틀어진 것도 이 때다. 박 대통령은 1978년 출입기자들과의 만찬에서 술에 잔뜩 취한 채 자신에게 비판적인 기사를 쓴 한 일간지 기자의 이마를 들이받아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그의 독재권력이 종말에 가까울수록 ‘인간 박정희’도 서서히 망가져 갔던 것이다.

3. 일화



3.1. 대통령이 되기 이전


  • 구미보통학교에 다니던 시절 박정희는 처음에는 역사 수업에서 배운 일본 위인들을 좋아하다가, 5학년 때 춘원 이광수가 쓴 《이순신》을 읽고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게 되었다. 6학년 때 나폴레옹 전기를 읽고 나서부터는 나폴레옹을 숭배하게 되었다. 교사 시절엔 문경에 있는 하숙집에 나폴레옹의 초상화를 걸어둘 정도였다. 그는 이순신과 나폴레옹 등 군인을 동경하였고, 결국 교사직을 버리고 사관학교에 진학하여 장교가 되었다.
  • 박정희는 교사 생활이나 아버지의 강요로 이뤄진 첫번째 결혼 생활을 탐탁찮게 여겼다. 특히 결혼 생활이 불성실해서 형인 박상희에게 잔소리를 많이 들었다. 박정희의 초혼은 당시 농업국가의 사회분위기처럼 나이 차면 집안에서 결혼하라고 시켜서 결혼한 것이었다. 첫째 부인 김호남은 유순한 성격이라 시어머니의 마음에는 들었다.
  • 조갑제의 말에 의하면, 박정희는 여자를 보는 눈이 꽤 높고 까다로웠다고 한다. 보통 키가 크고 얼굴이 긴 미인형 여자를 좋아했다. 자신처럼 근대교육을 받은 신여성(新女性)과 결혼하길 원했다고. 실제로 결혼을 전제로 동거했던 前 내연녀 이현란과 후처 육영수가 그런 스타일이었다. 전처였던 김호남은 전통적이고 순종적인 여성이었으나 박정희의 이상형은 아니었기에 박정희는 김호남과의 결혼생활을 좋아하지 않았다.
  • 박정희가 문경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시절 이미 김호남과 결혼한 유부남이고 딸(박재옥)도 하나 두었음에도, 결혼 사실을 감추고 한동안 '총각선생님' 행세를 했다고 한다. 더러 중매가 들어왔지만 기혼자임을 밝히지 않았는데, 당시 문경초등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이던 제자 정순옥을 제자 이상으로 좋아했다고 한다. 정순옥의 아버지를 장인으로 부를만큼 사이가 진전됐으나 박정희가 유부남이란 사실이 들통나는 바람에 관계가 깨졌다고 한다.#
  • 박정희가 친누나만큼이나 좋아했던 주현숙의 말에 의하면 1939년말 박정희가 주현숙의 집에 놀러와서는 "군인이 돼 높은 사람이 돼서 오겠다" 며 일본군가를 불렀고, 얼마 뒤 실제로 일본군 장교가 되었다고 한다.#
  • 조갑제가 저술한 박정희 전기 중 "4.19 혁명 이후, 이병주(국제일보 주필, 소설가) 황용주(부산일보 주필) 조증출(대구 사범 동기)와의 술자리"에서 박정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미국에서 교포들을 모아 놓고 연설이나 하고 미국 대통령에게 진정서나 올리고 한 게 독립 운동이 되는 건가요? 똑바로 말해 그 사람들 독립 운동 때문에 우리가 독립된 거요? 독립 운동 했다는 거 말짱 엉터리요, 엉터리 해방 직후 우후죽순처럼 정당이 생겨갖고 나라 망신시킨 자들이 누군데. 독립 운동 했습네 하고 나선 자들이 아닌가. 독립 운동을 합네 하고 모두들 당파 싸움만 하고 있었던 거여. 그 습성이 해방 직후의 혼란으로 이어진 기라 말이다. 그런데도 민족의 체면을 유지했다고?"[4]#
이번에는 박정희는 5.15 사건, 2.26 사건을 말하며 찬사를 하자, 황용주가 "천황 절대주의자이고 국수주의자 놈들이며 그들이 일본을 망쳤다"고 반박한다. 그러자 다음과 같이 답한다.
>"일본의 군인이 천황 절대주의자 하는 게 왜 나쁜가. 그리고 국수주의가 어째서 나쁜가. 그런 잠꼬대 같은 소릴 하고 있으니까 글 쓰는 놈들을 믿을 수 없다. 일본이 망한 게 뭐꼬. 지금 잘해 나가고 있지 않나. 역사를 바로 봐야 해. 패전 후 얼마 되지 않아 일본은 일어서지 않았나.” “자유주의? 자유주의 갖고 뭐가 돼. 국수주의자들의 기백이 오늘의 일본을 만든 거야. 우리는 그 기백을 배워야 하네.”[5]

3.2. 대통령직 재임 시절


  • '밤의 대통령'이라 불리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방일영 조선일보 고문과 가까운 사이였다고 한다. 박정희는 첫 대통령 유세를 마친 뒤 방일영의 집으로 가서 기생들과 함께 '야스기부시(미꾸라지 잡기)'라는 일본의 민속춤을 추면서 밤새 놀았는데, 이 사실이 육영수의 귀에 들어가 육영수는 청와대 비서들에게 다시는 박정희가 방일영의 집에 가지 못하게 하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 이동원 비서실장이 박정희가 서독방문 후 오는 길에 영국런던에 가서 도시계획을 직접 한 번 보시는 게 좋겠다고 하니까 박 대통령이 버럭 화를 내면서 "나라에 돈도 없는데 관광이나 다니게 됐어?"라고 한다. (이동원 회고록에서)
  • 유럽 방문 당시, 한자로 서명하려는 걸 본 측근 한 사람이 "각하는 대한민국 대통령이십니다."라 조언하자, 즉시 한글 사인으로 바꾸었다는 일화가 있다. 이후에도 박 대통령은 한글 서명으로 일관했다고 한다.
  • 미국을 세번째 방문한 박정희는 한일수교에서 독도영유권 문제가 발생하자, 데이비드 딘 러스크 미국 국무장관과의 대화 중에 박정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미국 기록이 있다.
>‘수교 협상에서 짜증스런 문제 가운데 하나가 독도문제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도를 폭파시켜 없애버리고 싶다.'
(President Park said he would like to bomb the island out of existence to resolve the problem)
>
>1965년 5월 18일, <한일협정 반대운동(6·3운동) 사료총집> 2권 231쪽##
  • 1965년 미국 웨스트포인트에 있는 미국육군사관학교에 방문했을 때, 생도들을 사면해 준 일이 있었다. 미 육사는 방문하는 귀빈에게 특권 하나를 주는데, 대개 퍼레이드를 요청하거나 기념품을 받거나, 특별연설 정도였다. 그런데 박정희는 그 특권으로 현재 교정에서 징벌 중인 생도들의 사면을 요청하였고, 덕분에 크고 작은 징계를 받고 있던 260명의 생도들이 사면되었다. 훗날 이 생도들은 임관 후 다들 기피하는 한국 근무에 자원했다고 한다.
  • "박정희와 육영수가 싸우면?" 이라는질문에 육박전이라는 단어가 탄생했다. 이 드립을 고안한 전유성은 방송에서 이 언어유희를 자문자답하다가 3개월 동안 방송출연을 정지당했다.# 그런데 대통령 전용 비행기 스튜어디스인 최은자 씨가 경남 진주로 가는 비행기에서 대통령 부부 앞에서 육박전 얘기를 했더니 둘 다 박장대소했다고 증언하였다.#
  • 필리핀의 제10대 대통령페르디난드 마르코스와는 1917년생 동갑내기, 비슷한 시기에 집권(박정희는 1961년, 마르코스는 1965년), 서로 닮은 외모[6] 등 공통점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사이가 매우 나빴다. 1966년 2월 박정희는 동남아시아 순방을 계획하면서 필리핀에 초청 의사를 타진했으나 마르코스는 "시간이 없다"며 답을 주지 않았다. 이에 박정희는 이를 갈면서 "건방진 사람, 두고보라지. 앞으로 우리가 몇 년 내 필리핀을 앞설테니. 그리고 10년 후 우린 선진국이 되고 필리핀은 영원히 후진국으로 남을 테니 두고봐….."라며 반드시 필리핀을 추월해버릴 것을 다짐했었다.[7] 박정희의 초청 요청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던 마르코스는 당시 한국이 주최하려던 월남전 참전국 정상회의의 주최국을 대미 외교력을 동원해 필리핀으로 변경시켜 박정희를 분노케하기도 했다. 이 때 박정희는 '마르코스, 이 나쁜 자식. 윤리도 도의도 없는 놈.'이라고 했었다고. 회담을 위해 박정희가 필리핀을 방문했을 때에도 정상#s-1.1.2들 중에서 가장 작은 방을 배정해 줬고, 다른 외국 정상들과는 잘만 얘기하다가도 박정희와 마주치면 입을 꾹 다물고 지나쳐버렸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 탓인지 당시 필리핀 언론들은 한국의 월남파병을 비난하며 박정희를 "매파의 우두머리", "전쟁을 부추기는 전쟁광"으로 묘사했다. 회담 이후 박정희는 다시는 필리핀을 방문하지 않았다.
  • 1967년, 광복군 출신 박영만은 픽션 소설 <광복군>이라는 책(上下 전2권, 협동출판사)을 출판한다. 흔히 비밀광복군설의 ‘원전’이다. 내용은 '박정희가 1945년 2월 광복군에 가담한 뒤 부대 안에 비밀조직을 만들었고 김학규 장군의 명령에 대기하고 있다가 일본이 명령을 대기하고 있었다'는 내용의 소설이다. 박정희를 찾아가기 전에 박영만은 만주군 간도 특설대 하사이자 박정희의 후배 박창암에게도 찾아갔었다.
>"5·16 이후 반혁명사건으로 옥살이를 마치고 풀려난 박창암 前혁명검찰부장 앞에 박영만이 찾아왔다. 대뜸 ‘같이 박 대통령을 한번 도와보자. 어느 지하운동 리더의 공적을 박 대통령 것으로 만들고 싶으니 도와 달라’고 부탁했는데 박창암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러나 1967년 박영만은 기어이 ‘광복군’을 출간했다. 박영만은 책을 박정희에게 전달했으나 환대는커녕 호통을 들은 것으로 전해진다."
>
>정윤회 저자 <실록 군인 박정희>, 2004, p. 118 중에서
이를 두고 김승곤 前광복회장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한다.
>“박영만은 청와대에서 돈을 받을 줄 알고 <광복군>을 썼는데, 내용을 훑어본 박정희 대통령은 ‘내가 어디 광복군이냐. 누가 이 따위 책을 쓰라고 했냐’며 화를 냈고, 결국 박영만은 돈 한푼 못 받고 거창하게 준비한 출판기념회도 치르지 못했다”#
  •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될 무렵(1970년 7월 7일), 당시 김종신 사회언론담당 비서관(전 부산문화방송 사장)은 박정희와 정강 장군을 만났는데, 정강 장군이 말하기를 "5.16 쿠데타가 일어난 아침 주동자가 박정희 소장이라는 말을 듣고 나라가 뒤엎어질 줄만 알았다. 나는 그(박정희)와 동기생이기 때문에 그의 전력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 위험한 인물로 봐 왔다" 그 후, 김종신 비서관은 선거 때마다 '사상논쟁'이 벌어졌으나 한번도 당사자의 시원한 해명이 없었기에 궁금해 용기를 내 물어본다. 그러자, 박정희는 이렇게 답변한다.
>"육사 교관으로 있을 때 형님 친구(이재복)되는 분이 찾아와 다음 일요일 모 장소에서 향우회가 있다면서 나더러 꼭 참석해 달라는 거야. 처음엔 거절하려다 사관학교 교관생활이 따분하기도 하고 해서 거길 갔었지. 그런데 그게 화근이 될 줄이야. 그날 향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빨갱이였어. 나는 거기서 (남로당 입당원서에) 사인하거나 도장을 찍은 적은 없지만 그 일로 김창룡한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재판도 받았지."#
  • 경부고속도로 공사 당시, 박정희가 현장을 지휘하던 정주영 회장을 호출해서 만났는데, 정 회장이 하도 피곤해서 대통령이 이야기 하던 중에 졸았다고 한다. 하지만 박정희는 이를 탓하지 않고 오히려 "정사장, 내가 미안하구료"라며 피곤한 사람을 잡아두었다고 사과했다고. 이런 일과 달리, 박정희가 조선소 건립을 지시했는데 정 회장이 기술과 자본 문제로 난색을 보이자, "현대가 정 회장 개인 거요?"라고 호통치기도 했다고 한다. 다만 일방적으로 까라면 까라는 식은 아니었고, 조선소 건립 외자 유치에 있어 정부가 보증을 서주기로 약속했다.
  • 스웨터 수출하는 공장 시찰을 갔을때 대통령과 이야기를 나누던 어린 여공이 "공부 못한 게 한입니다."라고 하자, 사장과 논의해 야간학교를 세우기로 결정이 되었다. 고등공민학교, 혹은 산업학교라고 불린 이 교육기관은 정식학교가 아니었기 때문에 문교부에서 수료증은 몰라도 졸업증은 불허한다는 지침을 내리자, 다음 날 문교부 장관이 청와대에 불려가더니 관련 규정이 바뀌었다.
  • 지방순시 중에는 전용차를 놔두고 슬쩍 지나가던 시외버스를 타고 승객들이랑 노가리 깐 적도 있었다는 증언이 있다. 승객들은 앞에 가는 전용차를 타신 높으신 양반에 대해 씹고 뜯었지만, 정작 그 높으신 양반이 자기네와 같은 차를 타고 있는 건 몰랐다고 한다. 식당에서 자신보고 박정희를 닮았다고 하는 주인장에게 "대통령이 날 닮았지."라며 뻔뻔하게 대꾸한 적도 있다는데, 아마 밑에도 있는 전주 삼백집 일화의 일부인 듯하다.
  • 전주 지역 시찰을 마친 후 술을 마신 다음 날 아침에 콩나물국밥으로 유명한 삼백집에 수행원을 시켜 배달을 요청했는데, 하필 그곳 주인이 욕쟁이 할머니였다, 당연히 "이 썩을 놈아, 얻다 대고 배달을 해달라고 XX이야! 와서 처먹어!"라는 호통이 날아왔고 이에 사색이 된 수행원이 보고하자 박정희는 "허허, 오라면 가야지."라면서 국밥집을 찾아갔다. 물론 수행원들이 미리 가서 제발 욕을 하지 마시라고 신신당부했지만 이에 개의치 않은 할머니는 계속 욕설 섞인 응대를 했고, 와이셔츠 차림으로 국밥을 먹던 박정희를 보더니 계란을 하나 까서 넣어 주곤 "얼씨구? 생긴 건 박정희 닮아서 잘도 쳐먹네? 네놈은 어찌 그리 박정희를 쏙 빼닮았냐? 누가 보면 대통령인 줄 알겄다 이놈아" 라고 지나가다가 다시 그래도 그놈은 큰일이나 했지. 옛다, 계란이나 더 쳐먹어!" 하며 계란을 하나 더 서비스로 까 넣어 주었다고 한다. 이에 박정희도 지지 않고 껄껄 웃으며 "할머니. 내가 박정희를 닮은 게 아니라, 박정희가 날 닮은 거요."라는 말로 응수했으며 연신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맛있게 국밥을 먹고 자리를 떴다고. 일설에 따르면 그 할머니는 작고하기 직전까지도 "그때 그 놈팽이는 박정희가 아니야!"라고 자신이 욕을 퍼부은 상대가 박정희였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 70년대 중반 쯤 혜화동로터리 근처의 막걸리집에 박정희가 혼자 들어와 막걸리 한 사발을 시켜서 김치를 안주 삼아 마셨다는 말이 있다. 잠시 후 주인이 부스럭 소리가 나서 뒤돌아보니, 대통령이 막걸리 독에서 직접 또 한 잔을 퍼고 있더란다. 다 먹고 나서 "얼마냐"고 묻고는 호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계산하고 나가더라고.
  • 박지만이 육사에서 친구와 휴가를 나왔을 때, 아들 친구가 온다고 하니 대통령이라고 딱딱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되겠다 싶어서 꽃남방을 입었다고 한다. 아들 친구와 만났을 때는 아니지만, 휴가 가서 입은 모습이 찍힌 사진은 있다.
  • 성형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다만 외형적인 측면을 위해서가 아니라 축농증으로 알려진 부비동염을 앓고 있었기 때문. 호흡곤란이나 감기 증세를 동반한 장애를 고치려 60년대부터 수술을 하였으나 적절한 치료 방법이 없어 78년도에 다시 수술을 진행하여 완쾌하였다고 한다. 한국에서 2번에 걸친 성형을 했지만 결국 실패하여 일본으로 넘어가서 수술을 받아서야 증세가 없어졌다고 하는데, 이에 이전 수술 실패에 대해서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유혁 단국대 종신명예교수 증언
  • 박정희 정권 당시 육군 소위 신분이었던 노병천은 저서 <박정희 마지막 신앙고백 (부제:최초로 공개하는 박정희 전도 비화)> 을 통해,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목숨을 건 직언으로 "대통령 각하! 이대로 지옥 가시겠습니까?" 라며 기독교 복음을 전해 그에게서 마지막 신앙고백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박정희는 사망하기 불과 얼마 전에 "대통령직에서 하야하면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했단다. 박정희가 사망하기 직전까지 온전히 예수를 영접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호기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비하인드 스토리이다. 다만 노병천 혼자만의 주장이기 때문에 검증이 필요한 내용이다.
  • 1979년 신년 기자회견에서 '새마을운동 홍보 질문'을 배정받은 동아일보 강성재 기자가 사전 시나리오를 깨고, '각하' 호칭을 '대통령께서'로 바꾸고 미리 짜여진 질문에 이어 새마을운동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차지철 경호실장은 눈초리를 올리며 권총을 만지작거렸다. 2달 뒤, 박정희는 청와대 출입기자 술자리에서 만취해 그 기자의 이마에 박치기를 날렸다고 한다. 그로부터 열흘 후, 박정희는 강 기자에게 정식 사과했다.#[8]

4. 기타


  • 사후 1979년 11월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았는데, 이는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주요 친일 행각을 행한 인물들을 담은 '친일인명사전'에 해당 인물명이 포함되어 있어 논란이 일었다. 박정희뿐만 아니라 친일 활동을 공고히 한 장면 전 총리도 이 논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 조카사위인 김종필의 둘재형인 김종익과는 촌수 상 박정희가 아저씨임에도 나이 차는 1살밖에 안 난다. 이는 김종필의 장인어른이자 박정희의 셋째형인 박상희가 박정희와 10년 넘게 차이나기 때문이다.
  • 지금의 세종시 일대인 공주시연기군 주변으로 행정중심복합도시의 서쪽 지역에 수도 이전을 하려고 계획했다는 사실이 사후에 알려졌다. 이 계획을 백지계획이라고 하며 대대적인 서해안 중화학/무역벨트 사업인 가로림만 계획과 연계되어 있었다. 하지만 박정희가 10.26 사건으로 죽어 실행되지 못하였다. 70년대에 수도 이전과 충청 지역의 경제수준을 영남권 정도로 끌어올리는 사업을 단행했다면 지금의 수도권 과밀화 현상이 많이 완화되었을 것이라는 측면에서 꽤나 아쉬움이 남는다. 충청도 수도 계획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세종시 계획으로 간접 계승된다.
  • 영원한 유작이 있는데 10·26이후 보좌진들이 집무실을 정리할 때 발견된 돋보기와 청사진이 그것이다. 이는 수도를 서울에서 대전인근으로 옮기는것과 수심 20m 대형선박이 출입할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을 지닌 가로림만에 대규모 공단을 건설해 수도권집중문제를 해결할 겸 최대 600만명이 이주하는 국토균형개발 프로젝트를 기획하였다. 이는 KBS역사스페셜에서 "박정희 최후의 프로젝트"로 방영한 바 있다.
  •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에 남한 면적 정도의 땅을 사서 대규모 농업 이민을 시키자는 계획을 세운 적이 있었다. 왜 그런 계획을 생각하냐는 물음에 "국내에 있을 땐 불만이 많더라도 외국 나가면 다들 애국자가 된다"라 했다고. 일본의 남미 이민을 보고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이때 시험적으로 매입한 토지가 아르헨티나에 있다. 야따마우까 농장으로서, 면적은 9만평. 서울시의 30~40% 정도 된다고 한다. 하지만 해당 토지는 염분이 많아 농장 경영에는 실패했다. 이때 아르헨티나에 이민 갔던 사람들은 다른 사업을 하면서 현지에서 기반을 잡았다. 오랫동안 있으나 마나 했던 이 땅에 대해 최근에 탄소 배출권 문제 해결에 이용해 보자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었고, 실제로 노무현 정권 시절 활용계획을 지시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후 활용계획은 백지화되었고, 박근혜 정권 시절 불법점거중인 현지인들에게 무상으로 양도하기로 합의하고 공증까지 채결했다고 한다. #
  • 박정희의 큰형 박동희는 66세 때 동생이 정변에 성공하여 대통령이 된 뒤에도 고향인 구미면 상모동에서 농민으로 살다가 죽었다. 박동희는 1남 1녀가 있었는데, 아들 박재홍은 백수로 있다가 삼촌이 대통령이 된 다음 포항제철에 취직했고, 이후 민주정의당에 입당하여 국회의원으로 4선을 했다. 박정희의 큰 누나 박귀희는 은 씨 집안으로 출가해 3남 2녀를 두었는데, 이 3남 중 차남 은희만의 아들이 바로 연예인 은지원이다. 둘째 누나 박재희는 박정희가 어릴 때 잘 돌봐주었고, 박정희가 대구사범학교에 다닐 때 남편 한정봉이 학비를 대주기도 했다. 당시 한정봉은 기자로 일했는데, 박정희가 만주갈 때 밑천으로 쓰려고 매형의 밥줄인 카메라를 가져갔다. 박정희가 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나서 이들 부부가 성북동으로 이사 왔는데, 청탁꾼들이 하도 찾아와서 박정희는 경찰을 배치하고 둘째 누나 일가에 대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함은 물론 상주군으로 내려가라고 압박을 가했다. 이 때문에 박재희는 단식투쟁 하며 섭섭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셋째 형 박상희는 거물급 공산주의자였다. 이 때문에 박정희도 덩달아 잡혀가서 문초를 당했다. 해방 정국 당시에는 아직 연좌제가 있던 시절이었다. 참고로 그 박상희의 딸 박영옥이 김종필과 결혼해서 김종필은 박정희의 조카사위가 되었다.
  • 제9대 박정희 대통령 취임기념 시계가 있는데, 역대 대통령 시계 중에서 가장 비싼 값에 거래되고 있다. 매물도 적은데다, 역대 대통령 시계 중에서 유일한 기계식 시계라 인기도 높아서. 요일 표시는 한자와 영어가 가능하다.
  • 처음 최태민박근혜와의 관계를 들었을 때 화가 나서 최태민거세시키고 박근혜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하라고 지시를 내렸으나 공교롭게도 얼마 안 있어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한테 암살 당했고, 이후엔 '애미 없는 것'이라고 딸을 감쌌으며 결국 주변의 충언에도 불구하고 지시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나중엔 오히려 최태민이 마음에 안드는 도지사나 경찰총장을 호출하여 호통치거나 구국십자군이란 단체를 만들어 돈을 갈취하는 국정농단 행위를 방조하기까지 하였다. 결국 "최태민의 전횡을 방조하던 박정희를 보다못하여 결국 저격하게 되었다"고, 김재규는 항소이유보충서에서 주장하였다.
  • 2017년 박근혜 파면 이후 박정희는 자식 농사가 크게 실패했다는 부정적 이미지가 늘었다.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대통령이 된 박근혜가 자신의 이미지를 완전히 손상시켰고, 헌정사상 최악의 부패 사태를 초래하여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직에서 탄핵 당했다. 박근령은 일제 시기 친일 망언과 국정농단 사범인 동복언니 박근혜를 대놓고 찬양하고 미화하거나 그들의 악행을 부정하는 등 행위로 논란이 되고 있으며, 박지만은 상습적인 마약 복용으로 구속과 투옥을 반복했고, 마약 문제 뿐만 아니라 박근혜 5촌 살인사건 등 살인 범죄에 개입하였다는 의혹이 있다(다만 박지만은 10대~20대에 부모를 한꺼번에 잃은 트라우마로 마약쟁이가 된 만큼 동정여론은 상당했다). 다만 박정희와 전처 김호남 소생의 장녀 박재옥은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생활하고 있으므로 제외. 그러나 일부에서는 박재옥 역시 그의 일가족들이 설악산 케이블카 사업의 경영권을 독점하고 과거 박정희 정권 시기 특혜를 받았다는 이유로 "박재옥도 박근혜, 박근령, 박지만보다 덜할 뿐 몰염치하고 부패한 인물"이라고 비판하는 이들도 더러 있다. 물론 박재옥 역시 논란이 없진 않아도, 여전히 비난을 받고 있는 박근혜와 박근령, 박지만보다는 성품이 좋은 것은 분명하다.
  • 딸인 박근혜가 참담한 국정농단을 일으킨 가운데, 박정희에 대한 평가도 깎이자, 충무공의 15대 종부인 최순선[9] #은 박정희가 쓴 한글 현판을 철거하고 이전의 숙종 사액 현판을 걸 것을 문화재청에 요구하고 있다. 다만 덕수이씨 충무공파 종회는 현판 교체 요구에 즉각 반대 의사를 밝혔다. 문화재청현충사를 박정희 정권의 작품이라고 여겨 현판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결정하였다.
  • 박정희 전 대통령 장례식 당시 200만 명의 추모객들이 몰려왔었다. 이 기록은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모객이 500만 명을 기록하며 깨졌다.
  • 여담으로 그의 고향인 구미시에는 그 의 이름을 딴 '박정희로'가 있다.[10]
[1] 정확히는 주연인 최불암이 드라마에서 담배를 피울 때 박정희도 같이 피웠다고 한다. 그래서 육영수 여사가 직접 최불암에게 전화를 걸어 담배를 적당히 피워주십사 요청했다 한다.[2] 새마을 노래를 직접 작사, 작곡하기도 했다. 단, 작곡은 음악을 전공한 셋째딸 박근령이 "아버지의 요청으로 내가 작곡했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반면, "풍금을 켜면서 직접 작곡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박정희가 풍금 코드를 기반으로 노래를 만들고, 박근령이 곡을 다듬고 악보작업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3] ## [4] 위 문장구조는 토론 AnIcyAndWillingAmusement에 근거합니다.[5] 토론 AnIcyAndWillingAmusement[6] 1966년에 박정희가 필리핀을 방문할 당시 동행했던 이동원 외무부 장관의 회고록 《대통령을 그리며》에 따르면, 공항에서 두 사람이 포옹하는 장면을 보고 “저렇게 닮았을 수가…” 하며 놀랐다고 한다. 물론 이목구비 하나하나까지 복사판은 아니었으나 까무잡잡한 얼굴, 날카로운 눈매에 작은 , 아담한 체구, 카랑카랑한 목소리, 특히 도도하고 당당하게 걷는 걸음걸이는 뒷모습이라면 누구든 쌍둥이라 할 정도였다고.[7] 당시 한국은 필리핀에 비해 후진국이었다. 사료에 따르면 당시 필리핀의 1인당 국민소득은 269달러였으나 한국은 130달러로 필리핀의 딱 절반 수준이었다.[8] 참고로 박치기 세례를 받은 강성재 기자는 이후 신군부에 언론통폐합 과정에서 해직당하였으나, 이후 민주정의당에 입당하여 정치에 입문했으며, 신한국당 소속으로 15대 총선에 당선(서울 성북을)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9] 과거 몰래 충무공 유물을 팔아 치우려 했던 전적이 있다.[10] 진짜 그가 태어나서 산 동네인 상모사곡동을 지나간다!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