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독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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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독일'''
한국어: 한독관계(韓獨關係)
독일어: Deutsch-Südkoreanische Beziehungen
1. 개요
2. 단순 비교
3. 역사
4. 역사적 비교
5. 인구 비교
6. 국민적 인식
6.1. 한국인이 보는 독일
6.2. 독일인이 보는 한국
7. 협력 및 진출
8. 문화 교류
9. 관련 문서


1. 개요


대한민국독일의 관계 문서이다.
유럽연합의 맏형 역할을 하는 독일과 서방세계와 친한 한국은 외교적으로 우호적인 관계이다.
대통령의 유럽순방에서 독일은 항상 빠지지 않으며, 한독정상회담에서 유의미한 합의 및 한반도정책에 대한 지지를 도출하고 있다.
특히 독일이 2차대전 이후 서독과 동독으로 분단되었다가 재통일된 독일의 역사는 분단을 겪고 있고, 통일한국을 지향하는 한국에게 좋은 사례이다.
최근 G11에 한국 가입에 독일이 반대한다는 의사를 밝혔다는 얘기도 있었지만, 독일은 가상적국인 러시아의 참여를 반대했지 한국의 참여는 오히려 환영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물론 G11 확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의가 필요한다는 입장이다.

2. 단순 비교


항목
대한민국
독일
면적
100,401km²
357,021km²
인구
51,833,175
82,838,212
1인당 GDP
$33,346
$47,841
명목 GDP
$1조 7,208억 (10위)
$4조 2,116억 (4위)
국방비
420억 달러
443억 달러
IMF 분류
선진국
선진국

3. 역사



3.1. 구한말


근대 이전까지는 그닥 접점이 없었고, 공식적으로 알려진 첫 만남은 1860년대에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남연군의 무덤을 파낸 오페르트 도굴 사건으로 인연이 닿았다. 흥선대원군을 비롯한 조선 입장에선 가히 최악의 첫 만남이었던 셈이다.
그후 흥선대원군이 실각하면서 명성황후 정권은 1883년 조선전권대사인 민영목과 주(駐) 일본 총영사인 자페 간의 '조독 수호통상조약' 을 통해 공식적으로 외교관계를 맺었으며 1884년 한양에 한옥으로 된 주(駐)조선 독일 총영사관을 설치하였다.
이후 고종대한제국을 선포한 뒤에도 두 나라는 외교관계를 유지한다. 고종은 아예 독일식 문화를 선호하기도 했으며, 빌헬름 2세가 고종을 카이저 폰 코레아라고 불러줬다고. 1899년 프로이센 왕국의 하인리히 왕자(빌헬름 2세의 동생)가 방한하기도 했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외교관계가 단절되었다. 공관 자체는 을사조약 이후에도 계속 존재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일본 제국독일 제국에 선전포고하면서 폐쇄되었다. 1928년 6월에 재개설되었으나# 얼마 못 가 다시 폐쇄되어 다롄 주재 영사관에서 한반도까지 관할했으며 이를 통해 36년 나치 독일은 조선에 수재 지원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아무튼 그러하다 보니 1936년 동아일보의 경성 주재 영사관 탐방기에 독일 영사관은 없다. 취재 당시 경성에 영사관이 있던 나라들은 중화민국,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뿐.

3.2.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중화민국 상하이에 있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일본 제국,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등 추축국에 선전포고하면서 잠시 적대관계가 되기도 했다.

3.3. 독일연방공화국대한민국


종전 후 연합국에 의해 독일은 동서로, 한국은 남북으로 분단되면서, 1949년에는 북한동독과, 1955년에는 대한민국서독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냉전기에 한국은 서독에게, 북한은 동독에게 경쟁적으로 지원을 받기도 하였다. 다른 곳이 아니라 하필 서독으로 광부, 간호사가 가고, 박정희가 서독을 방문하는 역사적 사건들은 이런 배경이 있다. 1990년 10월에 동서독이 통일되자, 통일 독일은 대한민국과는 외교관계를 지속하였으나 북한은 일반대표급으로 격하시켰다가 2001년에 외교관계를 복원했다. 북한 대사관의 장소는 그대로이다. 남한은 서베를린의 영사관을 통일 후 독일이 중앙 정부를 베를린으로 옮기기로 한 후에 대사관으로 바꾸고, 본의 대사관은 대사관 본 분관으로 바꿨다. 그래서 독일 주재 남한대사관은 구 서베를린에 있지만, 북한대사관은 구 동베를린에 있다.

4. 역사적 비교


적지 않은 한국인들이 으로 인한 분단의 경험 등으로 한국과 독일이 비슷하다고 생각하나 실제로 비슷한 점은 그것 뿐이며, 오히려 양국은 '''분단의 원인은 물론 역사적인 맥락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상반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다만 몇가지는 비슷한 점도 적지 않다(중앙아시아로 이주된 고려인, 독일인이 있다는 점 등).
'''시대'''
'''독일'''
'''한국'''
'''중세'''
수백년 동안 여러 나라로 나뉘어짐[1]
삼국, 남북국, 후삼국 시대 이후 수백년 동안 통일 국가[2]
'''근대'''
식민제국
피식민지
'''세계대전 시절'''
가해국이자 '''핵심 전범국'''
피해국이자 피식민지[3]
'''냉전기 정치'''
민주주의[4]
독재[5], 권위주의
'''냉전기 경제'''
열강으로써 쌓아왔던 기술력과 높은 교육수준(인적자원), 사회체계(시스템)와 공업기반 바탕
기반 전무, 국가 주도적 산업육성과 미국의 원조 바탕

5. 인구 비교


'''연도'''
'''독일'''
'''한국'''
'''1900년'''
5,600만명
1,600만명[6]
'''현재'''
8,140만명
5,100만 명.
독일 인구가 61% 증가하는 동안 한반도는 533%가 증가하여 거의 9배에 가까운 차이를 보인다. 독일의 경우 1900년 시점에서 이미 산업화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어 인구 증가가 웬만큼 이루어진 상황이었던 반면, 한국의 경우에는 20세기에 산업화가 막 시작되어 해방 즈음에서야 본격적인 인구 증가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산업화와 인구 수의 관계는 맬서스 트랩 참고.

6. 국민적 인식



6.1. 한국인이 보는 독일


한국인들의 경우 다른 나라를 바라보는 시선과는 달리 유독 독일에 대해선 '''무조건적으로 동경'''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무려 '''대한제국''' 시대부터 이어져 왔는데 당시 고종 황제의 행보만 봐도 알 수 있다.
우선 독일은 전쟁을 겪고 국토는 폐허가 되었으며 나라가 외세에 의해 반으로 갈라진 상황에서 고도의 경제성장을 통해 국가를 재건하여 마침내 통일까지 이뤄냈는데, 역시 전쟁-분단-고도의 경제성장을 차례로 경험한 (그리고 통일을 항상 염두에 두는) 한국의 입장에선 독일이 가장 적합한 벤치마킹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일례로 통일·외교 분야의 경우 한국 노태우 대통령의 외교정책인 북방정책은 독일 빌리 브란트 총리의 동방정책을 참고하여 수립된 것이다. 그러나 양국이 경험한 전쟁-분단-고도의 경제성장은 그 배경과 과정이 전혀 비슷하지 않고 오히려 상반되기 때문에, 독일이 한국의 벤치마킹 대상으로 적절하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또한 일본과 달리 과거사 반성을 국가 차원에서 전면에 내세운다는 점, 독일인의 원칙주의적인 면모 등이 호감으로 비춰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일의 과거사 반성 역시 선별적이라는 비판은 여전히 제기되고 있다. # 한국에서 활동하는 독일인 방송인 다니엘 린데만은 '한국인이 가진 독일에 대한 환상'에 대하여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주로 독일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자동차, 맥주, 베토벤이나 바흐, 환경 등을 얘기하고, 독일의 덕목으로 근면성, 효율성, 강한 조직을 꼽는다. 사실 한국인들은 독일인들이 원리원칙을 잘 지키고 또 독일인들의 보수적인 사상에 매료된다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것도 상당한 편견에 기인한 것이 많다.[7]
한국이 과거사 문제로 옆나라와 끊임없는 갈등을 빚고 있어서인지, 한국인들은 대체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잘못된 행적을 분명히 인식하는 독일의 태도에 매우 호의적이다. 때문에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더러 독일을 반만 닮아보라고 비판하는 경우들도 있었다.
그러나 보편적인 인식과는 달리, 독일의 과거사 반성은 주로 나치 독일 시절의 침략전쟁 및 전쟁범죄에만 국한되어 있으며, 일본이나 프랑스, 영국 등 다른 식민제국들처럼 식민지에 대한 수탈을 나몰라라 하는 것은 크게 다를 바 없다. 일본도 보편적 인식과 다르게 독일이 폴란드에게 했던 것처럼 한국에 대한 부분적인 배상과 형식적인 사죄는 있었다. 이는 한국이 건실한 중견국인데다 일본 안보에 있어서 한국이 나름 중요한 국가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전쟁범죄조차도 유대인 대상 홀로코스트, 그리고 폴란드러시아 등 외교관계를 관리할 필요가 있는 국가들에 한하여 배상하고 있을 뿐, 동유럽의 약소국이나 나라 없는 집시들의 피해에 대해서는 알지도,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국제사회가 철저히 힘의 논리에 따라 움직인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일본의 위안부 소녀상 철거를 독일이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한국에서의 독일 이미지가 점점 나빠질 뻔더러 유유상종, 끼리끼리는 물론 독일이 제대로 과거사 청산 안했다는 것이 그 반감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독일이 소녀상 철거하는데 있어서 민족주의, 국가주의, 인종주의, 전체주의의 발호에 대한 경계심을 역으로 일본이 팠다는 점이다.# 그러다가 독일 정치계에서 소녀상 철거를 반대한다는 것이 알려진 뒤로는 이런 감정이 사실상 사라졌으며, 독일 베를린시 미테구의회에서 소녀상 영구 설치 결의안을 통과시킨 사실이 알려지자 대다수의 한국 네티즌들은 독일을 칭찬하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동서분단 시절에는 한국과 같이 남북분단으로 있는 독일과 동질감을 갖고있었기 때문에 서로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광부, 간호사 파견 등에서 보듯 한국은 독일의 경제성취(이른바 "라인강의 기적")를 부러워했고, 자국의 성취를 "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동서로 갈라졌으면서도 유학생이 많았기 때문에 1960년대 1970년대를 전후해 북한과 접촉이 많아 납북, 망명, 간첩 사건도 많았고 또 그를 이용해 독재정권을 공고하게 하려는 고문조작 간첩 사건(동백림 사건 등)도 많았다.
이후 독일 재통일이 되면서 한국에게 독일식 통일 모델은 가장 이상적이고도 전형적인 모델로 여겨졌다. 그러나 동서독 국경은 유럽의 휴전선이었으며, 동독은 자유 진영에 대한 공산권의 광고판이나 다름없었기에 소련으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받았다. 게다가 공산주의의 발원지다운 사상적 배경과 양차대전을 일으켰을 정도의 국력이 합쳐졌기에, 적어도 아무것도 없었던 데다가 그나마 남아 있던 공업단지도 한국전쟁으로 다 날려먹고 막장 독재자가 권력을 장악한 북한에 비하면 인권/경제 사정이 훨씬 나았다. 때문에 1990년대2000년대 흡수통일의 후폭풍이 널리 보도되자, 서독과 동독의 차이에 비해서도 넘사벽인 경제적 부담 때문에 통일을 반대하는 분위기도 등장하였다.
한편 현대 독일이 유럽의 정치·경제적 중심지인데다가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선진국이다 보니, 한국의 여러 문제점들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독일의 선진성을 농반진반으로 찬양하는 모습도 보인다. 여기에는 1인당 GDP, 인간개발지수, 민주주의지수, 부패인식지수, 언론자유지수 등 각종 통계에서 어지간한 선진국들마저 압도하는 독일의 위엄이나, 프로이센 시절부터 나치 독일을 거쳐 이어져오는 왠지 모를 기술 강국의 이미지, 그리고 프랑스영국 등 주변국들에 비해 여행객들에게 대체로 깔끔하고 잘 정돈된 듯한 느낌을 주는 거리 등 복합적인 요소가 작용하는 듯하다. 물론 어느 나라나 그렇듯이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는 법이니 좋은 건 보고 배우되 맹신할 필요는 없다. 자세한 내용은 독일/정치, 독일/경제, 독일/교육의 세부 단락들 참조.

법학과, 행정학과 소속 교수들 중에는 독일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들어온 경우가 적지 않다. 심지어는 슈파이어 국립 행정대학원에서 박사를 받고 들어온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책에서 독일어가 많이 나오는 편이고, 책 정보-제목 등도 독일어로 기록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국내 과학계에서도 20세기 과학의 성지답게 독일에서 유학한 연구자들이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 특히 독일이 현대 유럽의 중심이니만큼, 입자물리학처럼 미국유럽이 경쟁하는 분야들에서는 독일의 지분이 상상외로 크다. 자연과학 분야에서는 알아주는 막스 플랑크 연구소의 사례도 있고. 또한 인문학, 특히 철학의 경우에도 독일의 비중이 커서 독일 유학 연구자의 비중이 크다. 19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의 서양 철학은 곧 독일 철학에 가까웠고 따라서 독일어의 비중이 매우 컸다. 현대에는 영미권이나 프랑스 등 다른 국가의 철학계 비중이 커졌지만 여전히 독일 철학의 영향력이 크다.

6.2. 독일인이 보는 한국


19세기 말에는 서로 외교적인 접촉은 있었지만, 양국 간의 국민적 인식은 거의 전무한 수준이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당시 독일(프로이센)은 보오전쟁, 보불전쟁 등을 거치며 이제야 통일 국가가 들어선 상황이었고, 조선은 각종 내우외환에 시달리느라 한반도에 별로 간섭할 의지도 능력도 없는 머나먼 유럽 국가에 관심을 둘 겨를이 없었다.
특이사항으로는 1899년 하인리히 친왕[8]이 대한제국을 방문하기도 했고, 독일 제국의 빌헬름 2세대한제국고종 황제를 Kaiser von Korea라 칭해 주었던 기록이 있지만, 그래봐야 외교적 수사에도 미치지 못하는, 그냥 그랬다더라 하는 수준의 이야기일 뿐, 구한말의 정세에 독일이 실질적으로 관여하지는 않았다. 당시 독일인들의 조선에 대한 인식은, 비유하자면 현대 유럽인들이 잘 몰라서 혹은 일본인들이 억지로 남한과 북한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정치인들을 제외한다면 독일에서 대중적으로 알려진 첫 한국인은 아마도 1936 베를린 올림픽 당시 한국인 금메달리스트였던 손기정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당시 한반도는 일제강점기를 겪고 있었기 때문에, 손기정의 소속은 일본 제국(정확히는 정식 일본인이 아닌 일본령(領) 조선)이었으며 세계인들도 당연히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으로 인식했을 것이다. 광복 후 한 공무원(혹은 의원)이 독일의 손기정 기념비에 기록된 국적을 바꾸려 시도하기도 했으나, 그런다고 공식 기록이 바뀌진 않았고 훼손죄로 처벌을 받았다. 현재 IOC 기록에선 일단 일본 선수로 기록하고, 손기정 선수에 대한 당시 조선의 상황 설명을 첨부하는 수준이다. 이것은 메달리스트들의 나라가 독립한 경우가 많고 독립한 국가에서도 옮겨다니는 경우가 적지 않아서 국적을 바꿔달라고 요청하는 것을 다 들어주기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의 경우는 없던 나라가 독립한 게 아니라 강탈당했던 걸 되찾은 거긴 하지만, 세계는 그렇게 따뜻하지 않다. 하지만 그 원칙 때문에 토리노에서 딴 빅토르 안의 메달은 러시아로 넘어가지 않는 것. 다른 경우론 수재 지원금을 주기도 했다.
또한 2차 대전 패전 이후 서독에서는 1946년에 출판된 작가 이미륵의 소설 'Der Yalu fließt(압록강은 흐른다)'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교과서에도 수록될 정도로 독일인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이후 축구선수 차범근분데스리가에 진출, 맹활약하며 독일 내에서 한국에 대한 인지도를 상당히 상승시켰다. 차붐의 등장으로 인해 한국이란 나라를 처음 알게 되었다는 반응이 대다수. '''갈색 폭격기 차붐'''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던 차범근은 이후 분데스리가 전설의 반열에 오른다. 이런 차범근의 업적은 이후 한국 선수들의 독일 진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실제로 그의 독일 내 위상은 말하면 입 아픈 수준이다. 자세한 것은 여기로. 이 영향력으로 가장 큰 수혜를 입은 선수가 바로 손흥민. 많은 한국, 아시아 선수들이 독일을 거쳐갔지만 손흥민의 활약상은 차범근 이후의 아시아 출신 공격수 중 가장 좋은 평가를 받았다. 오늘날 손흥민이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한 뒤로는 오히려 분데스리가 측에서 먼저 "Made in Bundesliga"라고 강조하며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독일인들 가운데는 남북간의 분쟁이나 북한이 국제사회에 끼치는 악영향을 쌍방과실로 인지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독일 내에서 진보 인사로 분류되었던 루이제 린저가 진성 친북 인사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는 동서독이 실제로 남북한과는 달리 냉전기에도 제법 상당히 활발하게 교류하였으며[9] 동방정책으로 대표되는 관계개선 시도를 여러 차례 했던 전적이 있기 때문에, 남북한이 (정치적 이유가 아니라 국민감정조차도)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상황이나 북한의 극한도발→남한의 강경반응→더 강한 도발로 이어지는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쯤 보면 알겠지만 동독 입장에서 북한은 통계상으로 나타나는 경제력부터 지도층의 정신상태에 이르기까지 비교되는 것조차 실례인 국가이므로, 남북관계의 문제를 쌍방과실로 인지하는 건 양국의 서로 다른 역사적 경험에 기인한 오해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무엇보다 '''동서독은 남북한처럼 전쟁을 치른 적이 없었으니.'''
최근 들어 삼성, LG 같은 한국 기업들의 성공적인 국외 마케팅과 함께 두각을 나타내는 예술계 인사 등으로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기회의 폭이 아주 넓어졌기 때문"이다. 실제 2005년에는 프랑크푸르트 국제 도서전에서 한국이 주빈국으로 행사를 성공리에 치렀고, 2004년 베를린 영화제에선 김기덕 감독이 <사마리아>로 감독상을 수상했다. 2007년 박찬욱 감독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알프레드 바우어상을 수상하면서 독일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 한국영화를 알렸다. 2012년에는 싸이강남스타일이 대박을 치면서 독일에서도 관심을 보였다. 싸이는 EMA에서 공연을 가진 뒤 최고의 권위를 가진 상인 EMA 베스트 비디오 상을 타기도 했다. 다만 한류 자체가 일부 계층의 문화를 벗어나지 못해서 그렇지.
한편 한국은 1990년대 후반부터 독일 비자 발급이 용이해지기 시작했으며, 2000년대가 돼서는 비노동 비자일 경우 독일 비자를 찍어주는 기간이 최소 소지 금액에 비해서 길어졌다. 쉽게 말해 한국인이 독일에서 불법 체류할 가능성이 적다고 판단했다는 의미로, 한국의 경제적 성장을 어느 정도 반영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1972년부터 한독간 사증면제협정에 따라 독일로의 무비자 입국 및 90일간의 체류가 가능했으며 장기체류 허가 또한 현지에서 직접 받을 수 있다. 이는 독일인들의 한국 입국시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참고로 독일에 무비자 입국이 가능한 비 유럽 연합 국가들은 대한민국, 미국, 캐나다, 일본, 호주, 뉴질랜드, 이스라엘 뿐이라 한국이 독일 정부로부터 불법체류 가능성이 낮은 국가로 대우를 받는다고 할 수 있다.
단 코로나19 사태 이후 양국의 비자 면제 협정에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는데, 유럽 지역의 코로나 대확산에 따라 2020년 3월 이후 모든 비EU 국가발 입국과 비자 발급을 독일을 비롯한 EU 국가들이 금지하였다. 이후 한국도 상호주의에 입각해 독일을 비롯한 쉥겐 협약국의 한국 무비자 입국을 중지하였다. 그리고 EU는 다시 2020년 7월부터 코로나19 통제를 잘하고 있는 나라들 위주로 기존 정책에 기반한 무비자 입국 혹은 비자 소지 입국 허용을 회원국에 권장했다. 다만 독일은 자국에서 이 조치를 구체화 하면서 한국, 일본, 중국은 여기에 조건을 달아 일단 보류하였다. 이 3개국에서 독일인에 대한 무비자(한국, 일본) 혹은 비자 발급 및 비자 소지 입국(중국)을 허용할 경우라는 조건을 달아 2020년 9월 현재도 한국인은 이전처럼 독일은 무비자 입국을 할 수 없다. 재밌는 점은 같은 시점에도 독일인의 무비자 입국을 허용하지 않고 있던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우루과이 등에는 독일로의 무비자 입국을 조건 없이 허용 했다는 점이다. 또한 다른 EU 국가인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은 한국인에 대한 무비자 입국을 허용했다. 한국과 독일의 해당 쟁점은 강경화 장관이 8월 독일을 순방하면서 표면화 되었으며, 하이코 마스 독일 외교부 장관이 한국 측에게 상호주의를 지켜 독일 및 EU에 무비자 입국을 다시 허용할 것을 압박했다고 한다. 또한 EU 전체에 대해 무비자 입국을 허용하지 않고 있는 한국에 대해 아예 EU 차원의 입국 허용국 리스트에서 한국을 빼자는 입장이라는 보도까지 나왔다. 하지만 독일은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우루과이 등에는 조건도 없이 먼저 무비자 입국을 허용했음을 상기한다면 굳이 한국에만 먼저 독일인에 대한 무비자 입국 개방을 요구하는건 여간 불평등하고 고압적인 입장이 아닐 수 없다.
2020년 7월 24일에 베를린에서 열린 훔볼트포럼(Humboldt Forum) 한국관 전시 방안에 대한 워크숍에서 홈볼트포럼 측 전시담당자는 조선은 16세기에서 19세기까지 청나라의 속국이었고, 1905년부터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독일의 수집가들이 한국문화에 관심이 없었다고 밝혔다.#

7. 협력 및 진출


2016년 3월 7일 국방부는 독일 국방부와 '한-독 군수협력에 관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양국 간 군수협력회의 정례화 등 군수협력 강화 방안을 논의했다. 양해각서에 따라 한독 양국은 군수협력회의를 정례화하고 지금까지 유지해 온 우호협력관계를 심화, 발전시키고 군수혁신 경험 등을 공유하기로 합의한다.
또한 국제평화유지군(PKO) 활동이나 재난구조 등의 분야에서 군수협력을 강화해 나갈 가기로 했다. 군 관계자는 “이로써 우리 군은 국제평화유지군(PKO) 활동 등 독일과 공동으로 참여하게 될 다양한 군사작전 분야에서 군수지원능력을 향상시켜 작전역량을 높이고 안정적인 임무수행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국방부는 지금까지 미국, 호주 등 15개 국가와 상호 군수협력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해 시행 중이다. 또한 향후 우방국들과의 군수협력을 지속적으로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계명대학교에서 학, 석, 박사를 모두 취득한 이정화 교수가 독일의 명문대인 베를린 보이트 기술대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다.
주독일 한국문화원은 구텐베르크 박물관측과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 설치를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한다고 2018년 9월 17일 밝혔다.# 그리고 주독일 한국문화원은 2018년 10월 11일 ~ 12일(현지시간)에 프랑크푸르트에서 이틀간 한식 문화 행사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우리은행은 2018년 10월 16일에 독일 금융감독청과 유럽중앙은행에서 유럽법인 설립 인가를 획득했다고 밝혔다.# 한국의 종이문화재단은 2018년 11월 16일 ~ 18일까지 독일에서 열리는 13회 국제종이접기 교수법 컨퍼런스에 참가해서 한국의 종이접기를 널리 알린다고 밝혔다.#
조선시대 문인석 1점을 한국에 반환키로 했다.#
SKT는 도이치텔레콤과 5G 네트워크, 미디어, 보안기술을 공동 개발하기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서울주택공사는 독일의 징코라는 업체와 스마트 옥상 녹화를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LG하우시스는 세계 최대의 가구 전시회인 독일의 인터줌에 참가했다.#
주한독일문화원은 한국 직업계고 학생들을 위한 독일어 교육에 관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한국기계연구원은 독일 하노버 레이저센터와 이저 유리 용접·수중 레이저 가공 기술 개발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현대자동차는 2019년 9월에 열리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첫 전기 레이싱카를 공개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한화정밀기계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인근의 유럽 통합 기술센터를 열었다고 밝혔다.#
삼성SDI는 독일 배터리 시스템 제조업체 아카솔에 배터리 셀과 모듈을 공급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한일간의 경제분쟁이 2019년 7월초부터 생기면서 한국은 독일 기업간에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해양수산부는 2019년 9월 27일에 독일 해사안전청과 항해사·기관사 등 해기사 자격 면허를 상호인정하는 내용의 협정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동원그룹은 독일 쾰른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의 식품박람회 '아누가'(Anuga)에 참가했다고 밝혔다.#
국내 주요 화학업체들이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열리는 최대 규모의 K 2019에 참가해 유럽 시장 공략에 나섰다.# 그리고 생활문화기업 LF가 2020년 1월부터 독일 주방 가전 전문브랜드 가스트로박을 국내에 소개한다고 밝혔다.# YBM넷은 세계 최대 규모의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참가했다.# 대원제약은 독일의 리히터-헬름 바이오텍이 개발한 골다공증 치료제를 국내에 처음으로 도입했다.#
코트라는 독일과 네덜란드에서 한국 화장품 브랜드 홍보를 위한 K뷰티 인 유럽 2019 행사를 잇따라 개최했다고 밝혔다.#
한국발명진흥회는 10월 31일 ~ 11월 3일까지 뉘른베르크 전시 센터에 개최된 ‘2019 독일 국제 아이디어·발명·신제품 전시회’에서 우리나라 발명품들이 대거 수상했다고 밝혔다.# 서울반도체는 5G 반도체·스마트조명 등 198개 특허를 독일에서 경매했다고 밝혔다.#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청은 12월 1일까지 네덜란드와 독일 기업을 대상으로 현지 투자유치설명회를 연다고 밝혔다.#
한글과컴퓨터는 독일, 오스트리아에 한컴오피스를 출시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한일간의 경제갈등이 시작되면서 산업통장자원부는 일본의 대체처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와 '한-독 소재·부품 기술협력센터' 설립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중소기업벤처부는 스마트 제조 등의 여러 분야서 독일과 협력 및 강화한다고 밝혔다.#
2020년 1월 3일에 제주도교육청은 독일과 러시아의 명문음악대학교와 교육교류협약을 체결한다고 밝혔다.#
2020년 2월 10일에 한국철도는 독일에서 열린 국제 디자인 공모전 iF 디자인 어워드 2020에서 유라시아 고속열차로 컨셉디자인 부문 금상과 승차권 자동발매기로 제품디자인 부문 본상을 받았다고 밝혔다.# 효성첨단소재는 독일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 타이어 전시회인 타이어 테크놀로지 엑스포 2020에 참가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LG전자는 독일 다임러사의 우수공급자로 선정되었다.#
정의기억연대는 3월 8일에 독일에서 열리는 세계 여성의 날에 한인교회에서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을 연다고 밝혔다.# 그리고 베를린의 한 광장에 있는 소형 전시관에서 작은 평화의 소녀상들이 전시되었다.#
독일에서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한국에서 시행하고 있는 드라이브 스루 검진을 받아들인 사례가 나오기 시작했다.#
코로나19로 인해 국내의 독일 기업들의 67%이상이 실적이 악화할 것으로 전망되었다.#
삼성전자는 2020년에 출시한 QLED 8K TV가 독일 영상·음향 전문평가지 비디오로부터 역대 최고 평가를 받았다고 밝혔다.#
한국 정부는 독일과 신재생에너지 기술 확보와 원자력발전소 해체를 위해 상호 협력하기로 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산업통상자원부는 독일 연방교육연구부와 공동으로 제6차 한-독 과학산업기술공동위원회를 화상으로 개최했다고 밝혔다.#
7월 10일에 조세영 제1차관이 독일의 요청으로 미구엘 베르거 외교부 사무차관과 화상회의를 갖고 양국관계를 포함해 한반도 정세, 국제무대 협력, 코로나19 대응 등에 관해 논의했다.#
코이카는 독일에 파견했던 광부나 간호사와 중동에서 일했던 건설 노무자 등의 파견 증명서 등 관련 서류 발급을 자동화했다고 밝혔다.#
강경화 장관은 8월 10일에 베를린에서 하이코 마스 외무장관과 한독외교장관 회담을 가진다고 밝혔다.#
독일의 기업 바베토스가 충남 당진에 공장을 세울 예정이다.#
환경부 소속 국립환경과학원은 9월 25일에 독일연방환경청과 환경 현안에 대한 공동연구 등을 위한 업무협약을 서면으로 체결한다고 밝혔다.#
한국경제연구원은 한국의 청년실업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독일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인 하르츠 개혁을 참고해야 한다고 밝혔다.#
수젠텍은 코로나19 항원 신속진단키트가 독일 연방정부 보건국의 승인을 받아 현지 판매를 시작한다고 밝혔다.#
SK텔레콤이 독일의 도이치텔레콤과 5G 기술 합작회사를 현지에 설립한다고 밝혔다.#
중소벤처기업부는 독일과 협력해 중소기업 제조데이터 분야를 선도한다고 밝혔다.#
현대자동차의 i30 N이 독일의 자동차 전문지가 뽑은 2020년의 스포츠카로 선정됐다.#

8. 문화 교류


한국과 독일은 상술했다시피 21세기에 들어스면서 문화 교류가 매우 많은 편이고 점점 증가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내에서는 독일어를 배우는 사람들도 많이 존재해 있다. 또한, 21세기가 되면서 독일내에서도 K-pop이 인기를 끌면서 독일내 한류팬들도 늘어나고 있고 예전에는 강남스타일이 독일에서 인기를 끈 적이 있었다. 그리고 한류의 영향으로 소수지만, 한국어를 배우는 독일인들도 늘어났고 한국학과도 독일내에 설치되어 있다. 또한, 독일은 유럽내에서는 러시아다음으로 한국학과 관련된 학문분야가 많은 편이다. 한국에서도 독일어를 배우러 독일 유학을 가는 경우도 있는 편이다. 그리고 한국내 대학교에도 독어독문학과가 설치되어 있고 외국어고등학교에서도 독일어반이 설치되어 있다.
주독 한국문화원은 2019년 6월 1일에 베를린 드리프트 코리아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창원 K팝 월드 페스티벌 2019'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또한, 7월 10일에 베를린에서 한국의 사물놀이팀과 비보이팀들이 합동공연을 할 것이라고 한국국제교류재단이 밝혔다.#
스포츠 부문에선 역시 축구 분야가 교류가 잦은 편이다. 과거의 차범근과 가장 최근의 손흥민 등의 활약으로 한국 내에서 독일 축구에 관심이 있는 팬들이 많고, 독일 축구 시장 역시 한국의 유망주들에게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어 한국의 축구선수들 역시 첫 유럽 진출의 목적지로 독일로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10] 2019년 현재 한국 선수들이 압도적으로 가장 많이 진출해 있는 유럽 축구 리그가 독일의 분데스리가일 정도.
한국과 FIFA 월드컵에서도 3번이나 맞붙었고 첫 만남이었던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선 함께 C조에 편성되었고, 맞대결에선 독일이 고전 끝에 3:2 신승을 거두었고, 8년 후인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선 4강에서 맞붙었고, 독일이 미하엘 발락의 결승골로 1:0 승리를 거두었다. 그로부터 16년 후인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선 함께 F조에 편성되었고, 경기 전까지만 해도 두 팀의 전력차가 워낙 컸기에 많은 사람들이 독일의 낙승을 예상하고 있었는데... 한국이 '''충격적인 2:0 승리를 거두고 독일을 조 최하위로 탈락시키는 이변을 일으키며 전세계를 경악시켰다.''' 자세한 내용은 신태용호/2018 FIFA 월드컵 러시아/독일전 문서 참고.
밀덕분야에선 독일의 무기체계에도 관심을 갖는 밀덕들도 많은 편이다. 그리고 예전에 상상원정대라는 MBC프로그램에서도 독일을 방문한 바 있었다. 독일 최고의 롤러코스터 실버스타 탑승은 덤. 또한, 한국 매체에서도 소수지만, 독일인 캐릭터가 나오는 경우도 있다.
한국관광공사는 9월 28일에 독일에서 한국 관광문화대전을 개최한다고 밝혔다.#
주독일한국문화원과 독일 예술영화 전문 극장 베를린 아르제날이 한국 영화 100주년을 기념해 10월 17일부터 31일까지 '한국 영화, 그 시작'이란 축제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 영화 필름인 '청춘의 십자로'가 독일어 변사 해설로 상연할 것이라고 밝혔다.# 제8회 독일 프랑크푸르트 한국영화제가 10월 24∼27일에 개최한다고 주프랑크푸르트 대한민국 총영사관이 10월 21일에 밝혔다.# 구텐베르크 박물관에서도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를 설치하는 협약이 체결되었다.#
방탄소년단이 세계 현대미술 작가들과 손잡고 진행하는 글로벌 전시 프로젝트 커넥트, BTS가 독일 베를린에서도 막을 올렸다.#
문화재청 산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선교박물관 소장 한국 문화재를 발간했다고 밝혔다.#
독일에서 코로나19 확산 사태로 공연 기회가 줄어든 한국 음악인들이 주독 한국문화원 기획으로 릴레이 콘서트를 개최할 예정이다.#
대구미술관은 10월 18일까지 독일 신라이프치히파 대표작가인 팀 아이텔 개인전 무제를 연다고 밝혔다.#
주독일 한국문화원은 '제2회 한국 창작음악 페스티벌'을 개최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주 독일 한국문화원은 9월 19일부터 11월 21일까지 한반도 분단을 소재로 한 작가 카이젠의 전시회가 개최된다고 밝혔다.#
주 독일 한국문화원은 베를린 포츠담 광장에 설립된 통일정을 11월말에 주독일 한국대사관의 뒤뜰로 이전한다고 밝혔다.#
베를린자유대의 한국학전공자가 늘어났다.#

9. 관련 문서


[1] 신성로마제국 참고[2] 고려, 조선, 대한제국[3] 일본 제국식민지 상태로 원치 않는 참전을 '''강요'''당한 꼴이니, 피해''''''이 아니라 피식민지가 더 정확한 표현이다. 실제로 2차대전 이후 승전국들은 이런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 한국을 연합국, 추축국, 중립국도 아닌 특별 상대국으로 지정했다.[4] 물론 서독 한정. 동독은 공산당 일당독재 국가였다.[5] 민주화가 1987년에 이루어졌고 냉전 종식이 1991년이니, 서울의 봄과 같은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면 사실상 냉전기간 내내 독재국가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북한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6] 한국 통계청 기준. 경우에따라 1200 ~ 1800만 사이로 추정된다.[7] 68혁명 이후 독일이 한국에 비해 사회문화적으로 굉장히 진보적인 방향으로 흘렀다는 건 아예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8] 빌헬름 2세의 동생[9] 서방권 국적자가 동독에 여행차 방문하고, 심지어는 동독 주민을 숨긴 차량으로 국경을 통과해 나오거나, 동독 정부에서 자국의 이산가족 노인들이 서독에서 여생을 마치는 것을 허락하는 등 여러모로 현대의 남북한과는 달랐다. 물론 적대관계인 만큼 당연히 각종 스파이 행위들은 빈번했으며, 여행이나 국경 통과 자체가 원천 금지되지는 않더라도 엄청난 검문수색을 받아야 했다. 또한 동독인의 불법 월경이 적발되면 감옥행은 기본에 북한처럼 즉결처형당하는 경우도 있었고, 이산가족 노인들을 보내준 것도 경제활동을 못하는 부양인구를 줄이겠다는 실리적인 이유 때문이었다.[10] 이는 독일이 다른 주요 경쟁자인 잉글랜드, 스페인 리그에 비해 선수에게 요구하는 조건이 사실상 없어서 진입장벽이 낮기 때문이다. 잉글랜드는 매우 까다로운 취업 비자 조건을 통과해야 하며, 스페인은 팀마다 유럽 연합 국적이 아닌 선수를 최대 3명까지 보유할 수 있도록 제한하고 있다. 손흥민처럼 높은 이적료가 책정되는 수준의 선수이거나 이강인처럼 세계적으로 주목받을 정도의 유망주가 아닌 이상, 보통의 아시아 선수가 정착하기엔 매우 힘든 곳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