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훈/선수 경력
1. 선수 경력
1.1. 농구에 입문한 야구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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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OB 베어스의 박철순 선수를 좋아해서[1] 서울 학동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에 먼저 입문했다. 포지션은 투수. [2][3] 선린중학교 야구부로 가기 위해 서울 남정초등학교로 6학년 때 전학을 간 후 선린중학교로 진학해 야구부 활동을 했지만, 중학교 1학년 도중 초등학교 친구들 대부분이 있던 휘문중학교 근처로 다시 이사 갈 일이 생겼고 당시 학교군 제도상 야구부 소속으로는 전학이 불가능해 농구부로 바꿨다고 한다.[출처][4] 게다가 마침 180cm를 넘는 키는 농구부에서도 주목할 만 했고, 휘문중학교에 농구 특기생으로 전학한 뒤 1년 동안은 기본기만 다지다가[5] 중3 때 키가 15cm나 증가하면서[6] 197cm의 거인 센터가 되어 마침내 포텐이 터지게 되었다.
그는 김원호 감독의 가르침을 받아 중학교 때부터 같이 활동하던 단짝이자 1년 후배인 현주엽과 함께 휘문고를 고교 정상급의 팀으로 이끌며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둘은 나란히 93학번과 94학번 최대어로 꼽혔다.
1.2. 연세대학교
그러다가 1993년 연세대학교에 입학하고[7] 1993-94 시즌 농구대잔치에 등장했는데, 1학년의 나이로 기존 대학 팀들의 인사이더뿐 아니라 기존 실업팀의 국가대표급 센터들까지 완전히 관광을 보내버리며 농구팬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다. 당시 서장훈만큼의 높이를 가진 농구 선수는 노쇠한 기아자동차 농구단의 한기범과 기량이 두드러지지 못한 현대전자의 정경호 둘 뿐이었고, 키는 비슷해도 서장훈 만한 힘과 기술, 민첩합과 BQ[8] 를 가진 선수는 그때까지의 한국 농구계에는 없었다. 이 당시 국내 농구인들의 희망사항은 "한기범의 키에 김유택의 기량을 가진 선수가 있으면 좋겠다."였고, 서장훈은 김주성과 더불어 이 조건을 충족시킨 한국 농구 역사상 두 명뿐인 선수 중 하나다.[9] 서장훈 본인은 후보 선수라 전술 훈련에도 잘 끼지 못했었던 중학교 시절에 슈팅 연습을 혼자 열심히 했던 것이 센터 치고도 슈팅 능력이 탁월해지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평했지만, 사실 서장훈은 대학이나 프로농구 활동 당시 또래 선수들 중에서도 매우 성실한 선수에 속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체격이 커지고 주전 선수가 되고 나서도 슈팅 연습을 항상 따로 열심히 했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것에 의한 영향이 더 컸을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연세대 농구단이 실력도 뛰어났지만 인기 자체가 연예인급으로 많아서, 농구팬들에게 어마어마한 인기와 지지를 받던 시절이었는데[10] 최희암 감독은 선수들이 훈련 중 해이한 모습을 보일 때 선수들을 모아 놓고 "너희들이 대단한 줄 아느냐. 너희들이 막말로 연필 하나라도 만들어서 팔아봤느냐. 그냥 농구만 하는 니들이 무슨 생산성이 있는 일을 한다고 거만해지느냐. 모든 게 니들 덕이 아니라 너희를 좋아해주는 사람들 덕이니 항상 사랑을 주는 팬들에게 감사해야 하고 그를 위해 성실히 노력하라"고 하며 무섭게 다그쳤고, 그것이 서장훈의 농구에 대한 생각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참고로 그렇게 불벼락을 떨어뜨린 최희암 본인은 연세대학교 농구팀의 인기에 힘입어 남성팬티 TRY CF를 찍기도 했다(...).
서장훈은 당시 농구대잔치 리그에서 연세대가 한기범과 김유택이 있던 기아자동차를 이기는 데 일등 공신 역할을 했고, 플레이오프에서 재차 기아자동차와 대결하는 일은 없었지만,[11] 결승에서 상무의 센터 정재근을 제압, 이상민, 우지원, 문경은, 김훈 등과 함께 연세대를 농구대잔치 최초의 대학팀 우승으로 이끈다. 이게 얼마나 대단하냐면 허재, 강동희, 김유택, 한기범이 모두 뛰고 있던 중앙대조차도 준우승만 하면서 이루지 못한 업적이다.[12]
1994년에도 서장훈은 '''21점 20리바운드 10블록'''이라는 어마어마한 기록으로 트리플 더블을 달성하기까지 하며 공포의 존재로 군림했다. 고려대가 전희철, 김병철을 비롯한 기존의 강력한 선수진에 현주엽까지 입학시키는 데 성공하며 연세대를 노리는 상황에서 두 대학이 마주한 농구대잔치에서, 경기 도중 이상민이 부상으로 실려나가면서 고려대는 동점을 만들었고 연장전만 가면 유리하다고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연세대에겐 한번의 슛 찬스밖에 없는 상태에서 서장훈은 눈앞에 수비수를 달고서도 중거리 슛을 버저 비터로 꽂아넣으며 팀을 승리로 이끌고 고려대를 충격에 빠트렸다. 이때는 서장훈의 운동 능력이 절정이던 시기였는데, 본인 스스로도 이 당시의 자신은 막을 방법이 없었다고 할 정도.
위의 영상이 바로 당시 경기의 영상이다. 참고로 이 영상은 KBL 2007-08시즌에 추억의 영상으로 KBS에서 편집하여 방송한 것인데, 편집영상이 끝나고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진행자는 다름 아닌 오정연 아나운서이다.
이상민을 부상으로 잃은 상태에서 당시 1번 시드였던 연세대는 8번 시드 삼성전자와 플레이오프 1라운드를 치르게 되었는데, 당시 삼성전자는 2번 시드 고려대와 만나는 것보다는 이상민이 없는 연세대와 붙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해 정규시즌 막판에 고의적으로 여겨지는 석연찮은 패배까지 불사하며 8번 시드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이상민이 없는 연세대가 불리할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으나, 정작 1차전은 건재한 서장훈의 활약에 대학 시절 내내 동기 이상민에게 가려 출전 기회도 제대로 잡지 못했던 백업 포인트가드 김성헌[13] 이 선발 출장해 그야말로 이상민이 빙의한 듯한 엄청난 활약으로 연세대가 손쉽게 승리를 가져갔다. 하지만 삼성 또한 2차전을 가까스로 잡고 다음 라운드 진출 여부를 최종 3차전으로 끌고 갔다.
서장훈만 철저히 틀어막으면 이긴다고 본 삼성은 서장훈의 학교 선배인 문경은까지 투입시키며 서장훈에게 폭력에 가까운 파울을 남발했고, 그 와중에도 서장훈의 활약은 계속되었다. '''그런데 삼성의 센터 박상관은 거친 파울 속에도 서장훈이 득점을 하고 리바운드를 따내자 아예 서장훈의 뒷통수를 그대로 두들겨 패 버리고 만다.''' 연수 부분에 충격을 받은 서장훈은 그대로 코트에서 혼수상태로 쓰러지면서 병원으로 실려갔고, 삼성은 그것에 힘입어 결승에 올라간다.[14]
이때 서장훈이 당한 부상은 상당히 심각했는데, 목이 다친 부분이 약간만 빗나갔어도 '''전신마비'''가 올 수도 있었다고 한다. 결국 서장훈은 한국 농구에 환멸을 느껴 1995년 미국의 산호세주립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15] 그러나 애초에 편입생은 1년간 뛸 수 없다는 당시 NCAA의 트랜스퍼 제한도 걸린데다 산호세주립대학이 농구로 알아주는 대학도 아닌지라 미국에서 별로 보여준 건 없이 1년만에 귀국한다.[16] 더군다나 국내에서는 독보적인 수준일 만큼 서장훈의 기량과 재능도 상당히 좋긴 했지만 미국에는 서장훈 이상의 키와 스피드, 파워를 지닌 선수들이 많아서 미국 농구계에서 대성할 거라고 확신하긴 힘들었다. [17][18]
서장훈은 국내 복귀 후 황성인, 김택훈, 조상현, 조동현과 함께 다시 연세대를 최강팀으로 이끈다. 그리고 다시 열린 농구대잔치에서 서장훈이 이끄는 연세대는 당시 센터치고는 단신이지만 주목받는 활약을 보여준 윤영필과 장신 슈터 김성철, 그리고 강혁을 앞세운 팀 플레이를 보여준 경희대학교와 플레이오프에서 맞섰다. 서장훈은 이미 경희대의 골밑을 유린한 적이 있지만 경희대는 당시 상승세를 타고 있었기에 새롭게 떠오르는 센터 윤영필과 서장훈의 맞대결이 기대되었는데, 윤영필이 경기 도중 부상을 입어 경기에서 빠져버리자 맞설 상대가 없는 서장훈은 경희대 골밑을 손쉽게 접수한다. 그렇게 경희대는 1차전을 내준 후 2차전에서는 인사이드의 절대적인 열세 속에서도 강혁이 팀을 이끌며 연세대와 대등하게 맞섰으나, 강혁마저 부상으로 빠져버리자 더 이상 버틸 힘을 잃고 만다.
그리고 결승에서는 상무를 만났다. 이상민, 조성원, 문경은이 있는 상무는 현주엽이 있던 고려대를 격파하고 올라오면서 이번에야말로 우승하겠다고 벼르고 있었고, 준결승에서 연세대의 테러를 본 농구 팬들은 상무에게 일방적인 응원을 보냈다. 하지만 상무에는 서장훈을 막을 선수가 없었다. 서장훈에 의해 제공권을 장악당하며 상무는 패하고, 서장훈은 다시 한 번 연세대를 농구대잔치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 후 프로화된 농구팀에 입단하는 과정에서 갈등을 겪었는데, 당시 진로그룹은 신생 농구팀을 창단하는 과정에서 연대 농구선수들에 대한 우선 지명권을 가지고 있었고, 당연히 서장훈을 자기들의 신인으로 지명해 놓았는데 서장훈은 이에 대해 선수의 권리를 침해하는 거라며 반발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서장훈의 농구 유학 자체가 이후 프로화되는 실업팀에 입단하면서 대우가 나빠질 것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는 소문이 있었고, 이 당시 진로 농구팀 단장이었던 사람이 농구대잔치에서 삼성 감독으로서 서장훈을 골로 보낼 뻔한 짓을 지시한 김인건이었기에 서장훈이 입단을 꺼렸다는 말도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서장훈이 졸업 후 현대전자로 가기로 밀약이 되어 있었다는 소문인데, 그 때문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현대는 한국프로농구 출범 과정에서 상당히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프로 전환 후에도 팀 내의 베테랑 선수인 이영주를 내치는 등의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진로가 창단하기도 전에 부도가 나고 농구 팀은 SK그룹에 인수되고, SK 측이 김인건을 단장에서 부단장으로 내려버리고 최고 대우를 약속하자 서장훈은 서울 SK 나이츠에 입단한다.
1.3. 프로 시절(1998~2013)
1.3.1. 청주/서울 SK 나이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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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선수로 챔피언 결정전 우승과 본인의 커리어 하이를 찍었던 1999~00시즌 SK 멤버들과 함께 찍은 사진. 맨 왼쪽이 서장훈이다.'''
사진에서 서장훈, 조상현, 황성인 등 연대 3인방 출신 선수가 신은 농구화는 99/00시즌 나이키에서 만든 케빈 가넷 전용 농구화로서 당시 KBL에서도 많은 선수들이 신었고 센터 재키 존스의 농구화는 게리 페이튼의 1999/00시즌 시그니처 모델이다. 참고로 서장훈 선수는 저 시즌 이후 그 유명한 에어 조던 11을 많이 신고 나왔는데 상대적으로 가볍고 목이 낮은 농구화를 선호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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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으로 SK 나이츠에 입단한 서장훈은 함께 입단한 현주엽과 함께 소속팀을 우승시킬 것이라고 사람들은 예상했으나, 서장훈과 현주엽은 각자 스탯만 잘 쌓고 시너지 제로의 모습을 보이면서 '시즌 전엔 우승 못하면 바보, 시즌 끝나면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라는 SK 나이츠의 전통 첫 장을 열었다.(...)
하지만 다음 시즌 SK가 시즌 도중 활동 범위가 겹치는 현주엽을 슈터 조상현과 트레이드하면서 황성인, 로데릭 하니발, 재키 존스와 함께 팀을 99-00 시즌 우승으로 이끈다. 시즌 MVP는 서장훈의 몫. 사실 데뷔 시즌에도 국내 선수로서는 최초이자 지금까지도 유일한 '''리바운드 1위'''를 차지했지만, 팀 성적을 이유로 신인상을 못 받았는데, 그 한을 제대로 풀었다.[19] 외국 선수와 대적해도 결코 밀리지 않는 존재감을 과시할 뿐더러 되려 외국선수를 압도한 경우도 많았다.
그가 MVP를 차지한 1999-00시즌을 보면 외국인선수상을 탄 맥도웰과 그의 성적이 거의 비슷하다. 그리고 2001-02 시즌에는 외국인 선수가 거의 없는 상태[20] 였던 만신창이 SK 나이츠를 이끌고 4강에서 KCC를 격파하고 챔피언 결정전에서 당시 최고 전력을 자랑한 대구 동양 오리온스와 맞서서 7차전 접전을 이끌면서 역시 서장훈이라는 찬사를 얻는다. 사실상 서장훈이 페리맨을 순삭시키며 균형을 맞추었던 것이었다.[21]
또한 서장훈은 2016년 11월 5일 김민수가 기록을 갱신하기 전까지 SK의 개인 최다득점자로 남아있었다. 김민수가 9시즌을 뛰고 기록을 경신한 걸 단 4시즌 만에 기록한 서장훈의 선수 시절 위엄이 드러나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자기 발로 나간 선수지만 활약은 엄청났기에 SK에서는 구단의 역사를 돌아보는 행사를 하면 초청은 꼬박꼬박 해서 영상으로 한 번씩은 인사말을 건네고는 한다. 그리고 서장훈의 시대 이후 SK는 김태술의 2008년을 제외하고 긴 암흑기에 빠져있다가 김선형이 등장한 이후로 겨우 플레이오프에 얼굴을 비추게 되었다.
1.3.2. 서울 삼성 썬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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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2시즌 종료 후 놀랍게도 FA 자격으로 '''서울 삼성 썬더스로 이적한다.''' 팬들이 대단히 놀랄 수밖에 없던 것이 농구대잔치 시절 서장훈에 대한 린치에 가까운 거친 플레이를 가한 삼성[22] 이었고 이적 당시 서장훈을 목장훈으로 만든 당사자들인 이창수 & 박상관 두 선배(강을준은 은퇴)가 멀쩡히 팀에 있었기 때문에 삼성행의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 사람들이 많았고 울산 모비스 오토몬스에 갓 부임한 은사 최희암 감독이 강력히 영입을 희망하기도 해서 모비스로 갈 것으로 예상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삼성행이라는 최대의 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물론 등가교환이라고 당시 삼성이 샐러리캡을 맞추기 위해서 그전 시즌 팀 부진의 원인으로 지목된 우지원을 보호선수에서 제외해버렸다.[23] 서장훈으로 인해 쫒겨난 선배가 이상민뿐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서장훈을 목장훈으로 만든 주범들이었던 이창수&박상관은 동시에 방출됐다.[24][25] 스포츠계에서 감독이나 스타 선수 영입이 있으면 껄끄러운 관계인 선수나 코치들을 방출시키는 게 관행이라 비판할 일만은 아니지만, 서장훈으로 인해 주전이었던 우지원과 나름 전력급 백업센터인 이창수 & 박상관이 동시에 팀을 떠났다. 자신의 이적으로 대학 선배 우지원이 팀을 떠나게 돼서 마음이 안좋았다고 하는데, 몇년 지나지 않아 자신의 이적으로 또 다른 대학 선배인 이상민을 떠나게 만들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고 한다.
어쨌든 서장훈이 합세한 서울 삼성은 9년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의 서막을 열었고[26] , 05-06 시즌 챔피언 결정전 우승을 거머쥐었다. 이 시기에 '''주성타 사건'''[27] 이 일어나면서 목 부상의 재발로 그의 상징이 된 목 보호대를 차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고, 서장훈은 부상을 극복하면서 05-06 시즌 삼성의 우승을 이끌었다. 그러나 이 05-06 시즌 우승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는데, 정규 시즌에서는 서장훈이 활약하며 생애 두 번째 MVP를 수상했지만, 챔피언결정전에서는 안준호 감독이 의도적으로 강혁과 네이트 존슨의 픽 & 롤을 구사하면서 서장훈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 연장까지 간 2차전에서는 강혁과 함께 팀을 캐리했고, 접전이었던 3차전은 결승점이 된 자유투 2개를 성공시켰으니 비중이 아예 없다고 할 수 없지만 마지막 4차전에서는 경기 초반만 뛰고 내내 벤치에 앉아 있었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다음 시즌 삼성과 갈등이 생긴[28] 서장훈은 2007년 다시 한 번 FA로 KCC 이지스로 이적했는데, 이때 보상선수로 '''이상민이 삼성으로 가게 된다.'''[29]
사실 우승에 기여하지 못했다는 일각의 비아냥과는 다르게 챔피언결정전 한정으로 서장훈의 출전 시간이 줄었지만, 정규 시즌과 플레이오프에선 서장훈이 좋은 활약을 했다. 이 시즌부터 평균 득점이 20점 밑으로 내려가긴 했어도 올루미데 오예데지와 네이트 존슨 듀오의 가세로 수비 부담을 덜고 공격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었고, 특히 플레이오프에서 오리온스의 약한 골밑을 제대로 유린하면서 팀이 체력 소모 없이 쉽게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당장 서장훈은 해당 시즌 '''MVP'''였기 때문에 그가 우승에 기여한 게 없다는 얘기는 까놓고 말해 그냥 대놓고 헛소리다. 그가 없었으면 애초에 파이널 진출도 힘들었다.
1.3.3. 저니맨 시기(2007~2013)
서장훈은 KCC에서의 첫 시즌엔 팀을 정규 시즌 2위로 올리며 나름 활약했으나[30] 4강에서 삼성에게 3 대 떡으로 발렸고, 그 다음 시즌엔 '''하승진'''의 등장 이후 출전 시간이 줄어들자 트레이드를 요구해 3:2 트레이드가 성사되면서 인천 전자랜드로 이적했다.[31] 전자랜드에서는 당시 7~10위권을 헤매며 답이 없어 보이던 전자랜드가 2월 전승을 포함해 13경기 12승 1패라는 대반전으로 팀을 재건, 은사 최희암 감독과 만나며 6강 진출을 이루었고, 전자랜드가 답이 없던 09-10에도 서장훈은 건재했다. 유도훈이 감독이 된 10~11시즌 문태종-허버트 힐과 같이 '''서태힐 트리오를 결성''', 전자랜드를 '''팀 성적 역대 커리어하이인 정규리그 준우승으로 이끌었다.'''[32]
데뷔 시즌부터 10~11시즌까지 통산 기록 12,500점을 돌파[33] 했고 리바운드 4,986개로 독보적 1위이다. 센터 중 유일하게 어시스트 1000개를 넘어섰다. 전술한 폭행성 파울로 인한 부상을 제외하면 철저한 몸 관리를 통해 잔부상도 별로 없이 꾸준히 시즌을 소화해온 프로 의식도 칭찬할 만한 부분.[34] 더구나 현역 주전 선수이기에 프로농구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라 불러도 무리가 없다. 특히 득점 통산 기록이 대단한 것은 2위를 다투는 문경은과 추승균보다 2~3,000점 이상 차이가 나는 데다가 서장훈이 문경은보다 3살이나 나이가 어리다는 점이다.
2010-11 시즌 후 FA자격을 얻었으나 연봉 2억 5천에 인센티브 1억을 더해 총 3억 5천만원에 1년 계약으로 팀 잔류를 선언했다. 그러나 이후 LG 세이커스의 이현민+강대협과 1:2 사인 엔 트레이드 형식으로 LG 세이커스로 이적. 유도훈 감독은 2010-11 시즌을 치르면서 종종 팀에 남아달라 요청했었고 서장훈도 별다른 잡음없이 무난하게 팀에 남을 줄 알았는데, 이런 트레이드가 터짐으로서[35] 전자랜드 팬들은 프런트를 폭풍 성토. 더군다나 서장훈을 내주고 얻어온 대가가 많이 부족해 보인다는 것도(트레이드의 명분을 리빌딩으로 삼았는데 강대협은 30대 중반, 이현민은 30대에 들어선 나이도 있고, 상무 소속이라 로스터를 비워둔다고 해도 2011-2012시즌 5라운드 이후에나 합류 가능. 게다가 강대협, 이현민 모두 요근래 하향세를 보였으니...) 트레이드에 대한 비판의 한 원인으로 보인다. 어쨌든 원치않은 저니맨(...)이 돼버린 서장훈과 이번 트레이드를 주도한 전자랜드의 2011-2012 시즌 성적은 어떨런지...[36]
결과적으로 2011-12 시즌은 서장훈 농구 인생 최대의 흑역사가 되었다. 노쇠하고 발이 느려진 상태에서 문태영과 롤도 겹치고, 애런 헤인즈 위주로 공격을 풀어간 LG에서는 그의 자리가 마땅치 않았다. 수비 면에서는 송창무가 어느 정도 각성하면서 장신 선수 수비에 굳이 서장훈이 필요 없어진 상황. 여기에 부상까지 겹치면서 완전히 시즌을 망쳤다. 그를 트레이드시킨 전자랜드는 6강 PO에는 진출했지만,[37] LG는 6강 PO 진출에 실패하면서 묘한 대비가 되었다. 이 때문인지 은퇴냐, 선수 생활 지속이냐를 두고 진지한 고민을 해야 했다. 특히나 그때 이혼까지 겹치면서 심적으로 많이 힘든 시기였다.
결국 전창진 감독의 부름을 받고 연봉 1억 원에 kt와 계약을 맺고 선수 생활을 이어가게 되었다.[38] 기자회견을 열어 kt에서 뛰는 12-13시즌 이후 은퇴와 연봉 전액과 사비 1억을 더해 사회 기부를 발표했다. 서장훈 본인은 은퇴식을 고사했지만 kt는 전설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은퇴식을 준비했다.
2013년 3월 19일 KCC와의 홈 경기에서 은퇴식 및 은퇴 경기를 가졌으며, 33득점이라는 놀라운 기록, 그리고 이날 경기의 마지막 득점을 남기며 25년에 걸친 농구 인생을 마감했다.
1.4. 국가대표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에 대학 신입생 신분으로 발탁된 것을 시작으로 2006 도하 아시안 게임까지 12년간 성인 대표팀에 발탁되었다.
이 시기는 중국이 아시아 농구의 1인자였고, 서장훈과 동시대에 왕즈즈(214cm)[39] , 야오밍(229cm)이 중국 대표팀에 뛰었기에 아무리 서장훈이라 해도 높이의 열세는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아시안게임 두차례 은메달에 그쳤으며, 중국을 꺾은 단 한번의 대회인 1997년 ABC 준결승 때는 대회 내내 중이염 때문에 서있지도 못할 정도[40] 국내에서 열린 2002년에 기적적으로 중국을 꺾었다. 야오밍을 막다 일찌감치 파울 3개를 범했으나, 끝까지 야오밍을 육탄방어 해냈고 연장에서 중요한 첫득점을 3점슛으로 올리는 등 활약하며 15득점 6리바운드로 승리에 공헌했다.[41]
경기 직후 인터뷰에서 서장훈은 '왜 중국을 넘지 못하는가' 라는 비판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이후 방송에서 정말 이기고 싶었고 농구하면서 처음으로 야비한 짓까지 해가며 뛰었고, 농구 인생에 있어 가장 열심히 뛰었던 경기라고 술회했다. 여담으로, 야오밍이 출전한 중국팀이 아시아 국가에게 패한 유일한 경기가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결승전이다. 2006 도하 아시안 게임 무대는 안일한 대회 준비와 선수 선발으로 형편 없는 경기력을 보였으며, 결국 5위에 그치는 수모를 겪는다. 서장훈도 부상이 있는 상태로 참가하여 최부영 감독에게 '센터 본능'을 잃어버렸다며 혹평을 듣기도 하며 갈등을 겪었고, 결국 이 대회 이후 서장훈은 대표팀을 은퇴하고 이후의 복귀 요청도 고사한다. 한국 농구 사상 최고 센터의 국가대표 은퇴로는 씁쓸한 모양의 은퇴. 아시안 게임 금메달 1개, 은메달 2개를 따 냈다.
2. 평가
2.1. 팬들의 평가
기록만 봐서는 프로농구 최고의 선수였고 화려한 커리어로 농구팬들의 추앙만 받아왔을 것 같지만 현실은 비난과 비판을 독식했던 불운한 선수였으며, 은퇴한 이후 끊임없이 재평가되며 평가가 올라간 재평가의 아이콘.
코트에서 잦은 항의를 하는 모습이 팬들이 서장훈을 싫어하게 된 가장 큰 이유이다. 2011년 11월 20일 서울 SK 나이츠와의 원정경기에서 심판에게 거칠게 항의해 테크니컬 파울을 2개 연속으로 받고 퇴장당해 팀 분위기를 다운시킨 일이 단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심판 항의가 잦고 인상을 많이 쓴 것 자체는 사실이지만 그것은 김주성[42] , 하승진 외에는 서장훈을 정상적으로 수비할 수 있는 국내 선수가 거의 없던 상황에서 서장훈의 마크맨들이 파울에 가까운 거친 수비를 자주 했고 심판들이 다른 선수들의 마크맨에 비해 너그러운 판정을 내렸던 것에 대한 불만을 표현하는 과정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43] 서장훈만 그랬다면 비판을 독식해도 할 말이 없겠지만[44][45] 현역 시절 서장훈을 그렇게도 괴롭혔던 김주성 역시 짜증과 항의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며 오히려 해가 거듭될수록 점점 늘어나고 있다. 물론 코트에서 욕설을 하고 잦은 항의를 하는 것이 좋은 모습은 아니지만, 수비를 빙자한 거친 폭력에 수도 없이 노출되었고 커리어 내내 그를 괴롭힌 목 부상을 두 번이나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견제는 줄어들 줄 모르니 서장훈의 행동을 마냥 비판만 하기는 어렵다.[46]
참고로 이른바 '목장훈'의 상징인 목 보호대를 은퇴할 때까지 차게 된 원인은 2004-05시즌 김주성에게 당한 일명 '''주성타''' 사건 때문이다. 후술하겠지만 서장훈이 골밑 싸움을 기피한다는 이유로[47] 서장훈이 농구판에서 골리앗 같은 악역인 셈이지만 오히려 실제로는 피해자인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48][49]
자신을 욕한 관중에 대해 욕설을 했다는 루머도 있다. 중계 화면에 잡힌 바로는 해당 관중은 '이응사'[50] . '이응사'가 서장훈을 욕하게 된 계기는 서장훈이 FA 자격을 얻어 삼성에서 KCC로 이적하였을 때 삼성이 보상선수로 현대-KCC의 프랜차이즈 스타인 이상민을 지목하여 그가 팀을 떠나게 되었기 때문. 그러나 서장훈이 KCC로 이적한 이유가 대학 선배 이상민과 다시 같이 뛰고 싶어서였는데 소속팀에서 이상민을 보호하지 않고 보상선수로 떠나보냈음에도 그에 대한 비난은 서장훈이 받았다. KCC는 서장훈-이상민 콤비보다는 노장인 이상민 대신 다른 선수 위주로 팀을 개편하고 싶어했고, 서장훈 역시 삼성보다는 우승권에 근접하며[51] 자신의 비중이 높을 KCC를 염두에 두고 있었을 확률이 높다. 요컨대 이상민과 KCC의 특별한 관계를 떼고 보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는 선수 이동 및 FA 계약이었다.
물론 저런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고도, '''평소 팬들을 대하는 팬 서비스가 안 좋았다는 증언이 많다.''' 이 때문에 농구팬들 사이에서 서장훈에 대한 이미지가 많이 안 좋았던 측면도 크다. 이 부분은 전적으로 서장훈이 감당해야 할 오명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프로농구의 인기가 폭락하고 서장훈은 연예계 데뷔 후 뛰어난 예능감으로 이미지를 완전히 일신해서인지, 선수 시절 안 좋았던 팬 서비스 전적이 오늘날 연예인 서장훈에게 악영향을 끼치는 부분은 거의 없다. 서장훈을 있게 해준 농구의 인기가 폭락하면서 오늘날 서장훈의 이미지 실추가 없게 된 묘한 상황인 셈. 팬 서비스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국민타자' 같은 명예로운 호칭으로 표현되던 이승엽이나 '조선의 4번 타자' 소리를 듣던 이대호 등 최고의 야구선수들이 안 좋았던 팬 서비스 전적으로 대중의 엄청난 지탄의 대상이 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여전히 '국보급 센터'로 좋은 이미지를 유지하는 서장훈은 정말 운이 좋은 케이스인 것도 맞다.[52][53]
또한 상당히 까칠했던 성격 탓에 드러나지 않은 몇몇 트러블도 있어서 선수 시절 동안 안 좋은 이야기를 달고 살아야 했다. 가령 서장훈이 저니맨이 된 원인을 팀의 1옵션에서 밀려났다는 이유로 불만을 표한 것이라 주장하는 것이 그 케이스. 그런데 사실 팀 내 역할이 적다는 이유로 팀에 불만을 표하는 경우는 해외 리그에선 아주 흔하다. 오히려 외국에서는 이를 공개적으로 얘기하는 경우도 잦은데, 설령 이게 욕먹을 일이라 해도 서장훈은 불만을 가졌을 뿐 공개적으로 불평한 건 아닌 만큼 욕먹을 이유는 없다는 의견도 있다..
서장훈이 줄어든 역할로 불만을 표한 게 이적으로 이어진 삼성, KCC 케이스를 살펴보면[54] 삼성 시절엔 결승전에서 팀 플랜을 가드 위주로 짜려고 해 그의 출전을 제한한 안준호 감독과의 마찰이었다. 근데 이 시즌 서장훈은 '''MVP였다.''' 그것도 20점 가까이 기록할 수 있는. 리그 최고의 국내 선수를 뛰지 못하게 하는 상황에서 기꺼이 벤치에서 동료들을 응원하겠다며 불만갖지 않을 선수는 적을 것이며,[55] KCC의 경우 까마득한 후배이자 본인보다 기량이 훨씬 떨어지는 신인 하승진과 로테이션으로 나오다가 출전시간이 20분 밑으로 떨어진 상황이었다. 이적 직후 전랜의 팀 성적을 수직으로 끌어올리고 그 다음 시즌 정규시즌 2위/베스트 5에 들 정도의 실력자가 말이다.
2.1.1. 외곽 플레이어라는 오해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지만 경기력 면에서도 비판을 받았는데, 골밑 경합, 리바운드 등 센터의 본분을 다하지 않고, 외곽으로 나와 중장거리 슛에만 몰두하며 팀 성적보다는 스탯관리에만 몰두한다는 비판인데...
굉장히 아이러니한 것이 '''이런 비난이 시작된 시기가 20대 초중반에 골밑 공격 위주일 때부터 나온 비난이다.''' 물론 30대에 진입해 노쇠화한 이후 3점 라인에서 공받아서 3점 혹은 드라이브인을 노리는 공격 등 포워드 플레이를 하던 시기가 분명 있었고 그 당시에 외곽 공격에 대한 비판이 시작되었다면 이해할 일이지만, 20대 전성기에 '''골밑 공격 위주'''일 때부터 이런 비난에 시달렸으니 아이러니.
이런 비난의 근본적 원인은 우선 한국 남자농구에서 센터가 득점 1위를 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역대로 한국 농구에서 센터가 1옵션인 경우는 없다시피 했다. 한국에서는 신동파-이충희-김현중-문경은-방성윤으로 이어지는 슈터 계열이 메인 스코어러 스타일이었고, 예외적으로 허재 같은 다재다능한 유형이 있었다. 하지만 센터는 스크린, 리바운드, 피딩 등 궂은 일 위주였고, 전 시대 최고의 센터 김유택은 다양한 득점 루트를 보여줬으나 팀에선 2~3옵션이었고, 1옵션은 허재와 강동희였다.[56]
따라서 당시 한국 남자농구에서 센터가 팀의 볼 소유 시간이 길고 공격 시도가 많다면 볼 호그 취급받기 쉬웠다. 그러나 서장훈은 한국 농구계 최초로 센터가 1옵션이 되었던 상황이다. 서장훈 자체가 리바운드와 골밑 수비 등 역대 최고의 기량을 가졌다는 것 이외에, 득점 역시도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는 점이 매우 생소한 상황이었다. 이는 서장훈의 안티들에게 볼 호그로 매도당하기 쉬웠으며, 실제로 서장훈이 커리어 내내 받아왔던 비판 중 하나는 탐욕이 심하다는 내용이었다는 점이 방증한다.[57][58]
즉, 서장훈이라는 출중한 신체를 지닌 선수가 골밑에서 리바운드와 수비만 충실하고 공격은 보조적인 수준을 원했는데, 막상 서장훈은 주도적으로 자신의 득점을 시도하는 선수였으니 이질적으로 느껴지기 쉬웠고,그냥 다양한 공격루트와 득점력을 지닌 센터였을 뿐 전혀 외곽 위주가 아닌데도 외곽에서만 머무른다는 오명[59] 이 생겼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서장훈 역시 자신의 득점의 2/3는 항상 골밑 공격으로 이루어진다고 항변해 왔다. 실제로 아마추어 때는 아예 골밑에 주력했고, 전성기 서장훈의 주 공격루트는 포스트업에 이은 골대 근처에서 페이더웨이가 주를 이뤘다. 30대 초반까지 경기당 삼점슛 성공갯수가 한 개 정도였다. 이때 서장훈이 20점 가까이 넣은걸 생각하면 실제로 3점슛이 차지하는 비중은 극히 적었다.
이후 프로농구 출범 이후 용병 제도가 도입되자 국내 선수는 1옵션에서 거의 배제된다. 2명의 용병이 득점을 주도하고, 허재 등 한국의 최고 스타조차도 공격을 주도하면 비효율적이고 이기적이라는 비난을 받기 쉬웠다. 문경은 같은 특급 슈터들도 공격 위주보다 3&D 스타일의 롤 플레이어로 강요받는 상황이니 블루워커들이 더 많았던 센터들은 더욱더 마당쇠 역할을 강요받았다. 이에 반하며 프로 이후에도 국내 선수로 4~5년 이상 오랜 기간 주축 스코어러였던 선수는 서장훈뿐이니, 비난받기 쉬웠다.
서장훈의 최전성기가 지나고 골밑에서 용병을 상대하는 경쟁력이 떨어지자, 3점슛 비중이 높아진 것은 분명히 맞다. 다만 이 당시 국내 센터들 대다수가 골밑 경쟁력을 잃고 3&D 스타일로 수비와 3점슛에만 치중하거나 벤치로 내려와야만[60] 출전이 가능하다시피 했다. 서장훈 역시 전성기가 지나고 용병과 일대일 대결에서 우위가 힘들어진 상황이었으니 스트레치 빅맨이 된 것은 맞으나 이전에도 빅맨으로서의 기본 소양에 소홀했다는 비판은 어불성설이다.
그리고 이는 선수 생활 후반에나 적용되는 논지일 뿐 전성기 구간과는 거리가 멀다. 심지어 이때에도 매치업 상대가 국내 선수일 경우는 엘보우에서 포스트업을 구사하거나 골밑을 많이 노렸다. 전성기 시절의 서장훈에 비해 커리어 후반의 서장훈의 경기를 본 사람이면 누구나 그가 골밑에서의 적극성이 줄었다는 건 알지만, 그는 자신의 장점인 정확한 슈팅을 활용해 좋은 선수로 남았다. 실제로 삼성에서의 마지막 2년 간 미들슛의 비중을 높이며 팀의 우승을 견인했고, KCC에서도 토종 1옵션으로 준수한 활약을 보여주었다. 08-09시즌 중반 트레이드 이후 바닥을 기던 전자랜드를 기어코 6위로 이끌면서 '''플옵 보증수표'''의 역할을 톡톡히 했고, 10-11시즌엔 팀을 2위로 이끌면서 MVP 후보이자 베스트5에도 들었다. 06-07시즌을 기점으로 리바운드가 줄었다고는 하나, 이후 6시즌 중 아시안게임 차출과 부상에 시달렸던 06~07시즌을 제외하고는 전부 5~7개 사이의 리바운드를 기록했는데, 이는 김주성과 비슷한 수준이다. 원래 10개를 기록하던 선수가 6개 정도 잡으니 적다고 느껴질 뿐 절대적으로 보면 적은 수치가 아니다.
정리하자면 서장훈이 05-06시즌를 기점으로 골밑 플레이가 예전보다 줄어든 건 맞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력적인 선수였기 때문에 '''스탯만 좋다거나 볼 호그 기질이 심하다는 비판은 초보적인 비판이 맞다.''' 또한 골밑 플레이가 줄었다고 해도 국내선수들 중 상위권의 보드 장악력을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독보적인 넘버 원에서 "잘하는 수준"이 된 것일 뿐.[61]
재미있는 것은 서장훈과 자주 비교되는 김주성의 경우 선수 말년에 3점 슈터로 전업한 듯한 변신을 하였음에도 비판받지 않는다. 최고센터 김주성, 어떻게 그는 '3점 슈터'가 됐을까 나무위키 내 김주성 항목을 보더라도, 3점슛을 던지기 때문에 상대가 수비하기 더 어려운 선수가 됐고, 팀 기여도가 더 높아졌다며 칭찬하는 대목이 나오지, 단순히 외곽슛을 던진다는 이유로 비판받지 않는다. 시대가 바뀌고, 3점슛의 가치가 높아진 것에 따른 자연스런 인식의 변화로 보인다.
2.1.2. 수비와 리바운드에 대해
보통 농구계 속어로 '''(골밑)비비기'''라는 용어가 있는데 , 서장훈은 골밑에서 비비지 않는다는게 서장훈에 대한 흔한 비판 논리였다. 골밑 비비기는 다른말로, '''골밑 자리잡기''' '''골밑 몸싸움''' '''박스아웃'''등으로 어느정도 대체할 수 있는 용어이다. 20세기 농구는 빅맨의 골밑 몸싸움과 자리잡기가 농구의 승패를 좌우하는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봤기에 이 부분에 굉장히 민감했다. 100%까지는 아니지만 골밑 비비기를 상당히 반영하는 기록이 리바운드이다.
사실 농구선수의 기량은 스탯으로 수치화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빅맨의 득점 리바운드 스틸 블록슛 등의 주요 스탯중에서, 득점은 포지션과 상관없는 스탯이라면, 리바운드와 블록슛은 빅맨의 기량과 직결되는 기록이다. 하지만, '''골밑 비비기''' 가장 그나마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기록은 리바운드이다[62] . 서장훈은 이런 측면에서 분명히 골밑에서의 리바운드 싸움에 누구보다 충실한 선수 중 하나였다.[63]
서장훈의 리바운드는 수치상으로 매우 뛰어나다. 앞서 언급된 대로 국내 선수 중 평균 리바운드가 두자리 수를 넘긴 선수는 서장훈(네 차례)와 하승진 뿐인데, 그나마 하승진은 정확히는 9.95로 반올림해서 10리바운드다. 커리어 후반에도 6~7개는 올려줬으며 이는 국내 선수 중 상위권이며 김주성과 비슷한 수준이며 밀린 적도 거의 없다. 몸싸움을 안 하는 빅맨의 리바운드 1위가 상식적으로 말이나 되는지 생각해 보자.[64][65]
느린 백코트와 불성실한 수비 또한 비판받았다. 단지 나이 먹은 이후 '''키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빠른''' 김주성이 등장해서 김주성과 비교되는 것이기 때문에 서장훈이 억울한 면이 없지 않다.
지나친 술, 담배, 체중 증가와 발바닥 무릎 허리 등의 부상 이후 스피드가 느려졌지만 본래 서장훈은 100m 기록이 13초 대가 나올 정도로 스피드가 좋았다. 실제로 서장훈이 대학농구에서 다른 선수들을 압살한 이유도 키와 힘, 스피드까지 갖췄다는 것이었다.# 다만 백코트 속도가 느려 얼리 오펜스에 대한 수비가 취약했던 것은 사실. 그러나 이 또한 전성기 이후에, 술, 담배, 노화, 부상...으로 신체능력이 하락해서 나타났던 단점.
김주성이 유독 상대적으로 롱런한 것일 뿐 김주성보다 훨씬 육중한 서장훈이 부상에 시달리는 건 당연했다. 평범한 선수였으면 몸 상태가 심각해서 운동 능력이 많이 내려오면 선수 생활 지속이 어렵지만, 서장훈은 워낙 기본 기량이 뛰어나고 슛도 좋았기 때문에 부상과 운동 능력 상실 이후에도 계속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물론 그 반대급부로 수비력과 기동력의 저하는 감수해야만 했다.[66]
서장훈의 신체적인 대표적인 약점은 팔의 길이, 즉 윙스팬이었다. 블락과 스틸 기록이 상대적으로 빈약한 핵심적인 이유. 농구선수의 신체 조건 중 키 못지 않게 중요한것이 윙스팬이다. 윙스팬이 길수록 스탠딩 리치도 높아져 블록이나 림 프로텍팅, 슛 컨테스트와 디플렉션 등 수비 시 강점이 매우 높아진다. 서장훈은 윙스팬이 길지는 못했기 때문에[67] 스틸이나 블록슛이 많지 않았고(커리어 평균 스틸 0.5, 블락 0.6), 이는 커리어 평균 스틸 0.9, 블락 1.4를 기록한 김주성에는 한참 못 미치는 수치이다.
총평하면 서장훈은 노쇠 이후 팀 수비와 스피드 측면에서 약점을 드러낸 것일 뿐, 전성기 용병센터와 일대일 매치업에 밀려나는 일이 거의 없는 뛰어난 선수였다.
국내 선수는 외국인 선수를 1:1로 막기도 힘들고 반대로 뚫어내는 것도 어려운데, 서장훈은 전성기 내내 줄곧 외국인 센터와 매치업하며 팀에 기여했다. 이걸 극대화한 사례가 99-00시즌 로데릭 하니발. 당시 상대는 역대 최고의 용병 맥도웰을 보유한 현대라는 거함이었는데, 이를 파훼하기 위해 최인선 감독이 기발한 수비전략을 썼다. 주로 상대 한국인 주 득점원을 봉쇄하던 로데릭 하니발이 이상민을 막고, 상대 센터를 막던 서장훈이 4번으로 뛰던 맥도웰을 막는 전략. 이상민은 하니발에 막혀서 볼 간수에서부터 애를 먹었고, 언더사이즈 빅맨이었던 맥도웰은 서장훈의 높이에 밀려서 원활한 플레이가 힘들었다. 공격에서는 하니발을 주 공격옵션으로 사용하면서 상대의 예상을 완전히 뒤집는 전략으로 최강 현대를 꺾고 우승하게 된다. 이는 서장훈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전략.
어쨌든 서장훈이 노쇠화로 인해 자유계약 용병센터에 밀려나고 부상으로 갈수록 느려져서 팀 전술상 수비가 약해진 것은 사실이다. 노쇠화 이후에도 수비력 약화가 천천히 온 김주성에 비해 수비력 저하가 빨리 온 셈은 맞지만, 역대를 논할 빅맨 수비수인 김주성보다 못하니 수비력이 약하다는 비판은 과한 측면이 있다.[68] 즉, 노쇠화가 된 이후에 느려지면서 지역방어 등 팀의 수비밸런스에 손해를 끼친 것은 맞으나 이는 노쇠화로 인한 불가피한 현상이다. 물론 목 부상이 없었고, 담배 끊고, 술 줄였다면 전성기 기량을 3~4년 더 유지했을 것이다.
이것 역시 상대적으로 수비에 강점이 있었던 김주성과 비교되는 면인데, 사실 김주성이 센터(라고 쓰고 파워포워드라고 읽는다)지만 스피드가 뛰어나며 기동력 저하도 늦게 온 덕에 팀 수비 측면에서 강력한 수비수였던 거지 전성기 서장훈이 수비가 약했던 게 아니다.
2.1.3. 그 외 비판
덩크슛이 적었다는 점도 꽤나 욕을 먹었었다. 최근에야 김선형이나 김종규등 비교적 토종 선수들의 덩크가 많이 나오는 편이지만 서장훈의 선수 시절엔 국내선수의 덩크가 희귀한 볼거리였고 그나마 김주성이 종종 보여주는 걸 제외하면 시즌 내내 보는 일이 손에 꼽는 수준이였다.덩크 영상 그래서 팬들은 국내 최장신이던 서장훈이 덩크를 좀 시도하길 바랐지만 원맨 속공 같은 노마크 상황에서도 레이업을 올려놓아 아쉬움을 샀던 것. 이에 대해 서장훈 본인은 자신의 덩크가 외국인 선수들의 덩크에 비해 멋없어서 잘 시도하지 않는다고 인터뷰했다. 또한 덩크나 레이업이나 성공률은 비슷한 반면 덩크의 체력소모가 훨씬 커서 굳이 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도 했다.
다만 이러한 비판도 복잡미묘한 감이 있다. 이상민의 경우 프로 출범 이후 인게임 덩크를 거의 안 했으나 연습 중에는 이따금씩 덩크를 선보였는데, 이상민의 덩크 시 경기장이 떠나갈 정도로 환호가 나왔다. 그러나 서장훈이 실제로 덩크를 할 경우 반응이 별로 없었다. 04-05시즌에 서울 삼성과 전주 KCC 사이의 잠실 경기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로, 연습 중 이상민이 레이업을 할 때마다 관객들(주로 여성들)이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고 끝내 투핸드 덩크를 보이자 경기장이 폭발할 듯 환호가 터져나왔다. 그런데 여기에 자극받았는지 다른 한쪽에서 연습하던 서장훈이 원핸드 덩크를 하자 덩크를 본 일부 팬들이 "오-"한 것 외에는 '''아무도 환호하지 않았다'''. 애초에 관심이 없었던 것. 당시 서장훈은 평균 22점 9리바운드를 기록하는 특급 선수였음에도. 농구대잔치 시절 서장훈은 연세대의 인기에 힘입어 환호를 받았으나, 프로 출범 이후 안티가 점점 늘어나면서 삼성 시기에는 비판적인 여론이 꽤나 많았다. 물론 "우리 편"이란 점에서 응원은 있었지만 서장훈이 (파울을 당한 뒤) 항의를 하면 파울을 당한 서장훈에 대한 우려보다는 "저 놈 또 욕하네"란 탄식이 많았다. 즉, 애초에 서장훈이 하는 플레이는 팬들로부터 환호를 받지 못했는데 당시 목 보호대를 하고 있던 서장훈이 체력소모와 부상을 각오하고 덩크를 해야 했을까 싶기도 하다.
물론 이는 프로시즌 이후의 농구팬들이 주로 가하던 비판이었으며, 농구대잔치 시절부터 그를 봐 온 올드팬들은 대부분 서장훈에 대해 '''불쌍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가령 위에서 언급한 삼성전 때의 폭력 수비 사건. 그리고 프로에서 '주성타'를 비롯한 수많은 폭력 수비 등등. 그만큼 국가대표나 소속팀에서나 궂은 일을 많이하고 험한 꼴 많이 받았으나 돌아오는 건 욕밖에 없으니... 사실 서장훈이 받는 비판의 대부분은 상대 선수들의 상식 밖의 견제와 목 부상에 기인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불쌍한 거 맞다.''' 하지만 위와 같은 비판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논파되거나 정상 참작되며 긍정적으로 재조명받고 있다. 어쨌든 한국 농구계의 전설적인 선수이니... 특히 베테랑이 되면서 인터뷰도 자주 있었고 신문 기사에서도 자주 본인의 목소리를 냈는데, 그 동안 농구팬들에게 험상궂고 짜증만 많은 이미지로 알려져 있던 서장훈은 인터뷰를 통하여 똑똑하고 말도 잘하는 이미지로 돌아서게 되며 이미지 회복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 후에도 늘 개념찬 인터뷰를 보여준다.
다만, 여러 팀을 돌아다닌 통에 어느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기억되기는 어려울 듯하다. 어떤 의미로 보자면 농구계의 저니맨. 한국을 대표하는 센터로 농구사에 길이 남겠지만, 특정 팀의 영웅은 되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단 굳이 따지자면 SK[69] 혹은 서울 삼성의 레전드로 볼 수 있겠다.
이는 서장훈의 2번의 MVP와 우승을 차지한 팀이 각각 SK와 삼성이고 그가 뛴 기간동안 최전성기를 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등번호인 11번이 영구결번 된다면 이 두 팀에서 받을 가능성이 높다.[70][71] 하지만 본인 스스로가 영구결번에 부정적이라 영구결번이 될 확률은 낮은 편이다.
그 외에 01년과 03년에 음주운전 전과가 있어서 비난받는 것도 있다. 2001년 9월에 음주운전으로 인해서 면허가 취소되었는데 02년 7월 2002 월드컵 기념 대사면으로 면허가 회복되었다. 그런데 이후 불과 8개월만에 6강 플레이오프 중[72] 음주 운전이 적발되어 다시 면허가 정지되었다. 그리고 이 여파로 인해서 플레이오프에서 삼성이 탈락했다.
2.2. 농구인들의 평가
(한국농구 역대 Best 5를 뽑아달라는 질문에)“제일 어려운 질문이다(웃음). 애매하긴 한데, '''일단 서장훈은 무조건 들어가야 하고''', 이충희, 허재도 이름을 올려야 한다. 김주성도 2002년 때의 전성기라면 뽑힐 수 있다"
[image]"내가 높이 평가를 하는데. 그 당시에 선수 생활이라는 그... 그게 있다고.. 한기범이랑 서장훈이랑 10년 차이가 나요. '''농구 역사로 보면 10년 주기로 한번씩 나온다는 거지. 그게 이제 서장훈이라고.''' 한기범 밑으로 나온 게 서장훈인데… 한기범은 그때 몸이 안 좋아서 체력적으로 많이 딸릴 때고. 그러니까 이제 서장훈이가 그 때 완전.. '''서장훈이 하나 때문에 우승했다고 보면 되지.'''"
[74]
'''농구선수들의 아이돌'''
팬들의 평가보다도 농구인들 사이에서 오히려 더 높은 평가를 받는다. 궂은 일을 잘하는 블루워커 스타일을 이상하리만큼 고평가 하는 한국 농구의 특성에 맞지 않게 블루워커보다 득점을 하고 팀의 중심이 되고 싶기에 반감을 사기도 했지만 농구대잔치 시절부터 공포의 대상으로 군림하던 만큼 현역 농구인들로서는 서장훈의 실력을 그 누구보다도 잘 실감했다.
한국농구에서 서장훈과 쌍벽을 이루는 김주성과의 비교에 대해 신선우 감독은 "전성기 기량으로 본다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라며 서장훈의 손을 들어줬고 모비스의 유재학 감독은 "전성기 기량이라면 당연히 서장훈을 택할 것이다"라고 했고 삼성 안준호 감독도 "득점력과 노련함이 돋보인다"며 서장훈에 대해 호평했다.중앙:8개구단 감독들이 말하는 서장훈과 김주성
다만 링크에서 보면 유재학과 안준호 등 서장훈을 택한 감독이 있고, 김진, 추일승 등 김주성을 들어준 감독, 그리고 판단을 유보한 감독으로 각각 나뉘었다. 두 선수가 한국농구를 대표하는 센터라 볼 수 있지만 둘의 플레이 스타일이 다르고, 각자 장단점이 있다보니 선택이 갈리는 것으로 보여진다.
2016년 스포츠동아에서 현역 감독, 코치, 선수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허재와 함께 '남자프로농구 20주년 기념 역대 최고선수' 공동 1위에 선정됐다.‘국보 센터’ 서장훈 ‘대통령’ 허재…최고 선수 공동 1위
2.3. 은퇴 이후의 재평가
NBA에서 르브론 제임스와 카이리 어빙의 사례는 1옵션의 논쟁에서의 대표적 사례다. 제임스 밑에서 어빙은 파이널 진출과 좋은 스탯, 그리고 '"NBA 파이널 우승'"이라는 인생에 제일 빛나는 순간을 가졌지만, 1옵션이 되지 못하는 상황이 싫어서 팀을 나갔다. 그만큼 1옵션과 2옵션의 지위는 팀 내에서도, 그리고 스타플레이어들에게도 큰 차이로 다가온다. 이러한 관점에서 계속 서술했듯 서장훈은 용병제도 도입 이후에도 The man을 고집했던 선수이다.
그런 이유로 서장훈이 선수 생활을 하던 시기 궂은 일에 소홀하고, 득점과 리바운드 등 드러나는 성적에만 신경쓴다는 비판은 당시 시대적 상황을 보면 좀 억울한 면이 있다. KBL 출범 이후 외국인 선수 제도가 도입되며 한국 농구의 방향성은 외국인 선수에게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게 되었고, 이는 당시 1옵션이던 서장훈의 매치업이 '''팀마다 두 명씩''' 생겼다는 의미기도 했다.
첫 우승팀인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의 경우 국가대표 센터였던 김유택이 순식간에 식스맨이 되고, 허재가 팀에서 존재감이 없어져서 결국 밀려나는 상황이었다.[75] 실제로 당시 기아는 클리프 리드와 저스틴 피닉스 두 명이 득점과 리바운드를 장악했고, 이에 따라 득점원 역할을 해줄 국내 선수보다는 패스가 뛰어난 포인트가드와 오픈 찬스에서 외곽슛을 쏘며 수비까지 되면 금상첨화인 슈터 정도, 그리고 용병이 쉴 때 백업을 해주는 조동기나 앞서 말한 김유택이 필요할 뿐이었다. 허동택 트리오를 보유했던 기아가 이 정도였으니 다른 팀은 말할 것도 없었다.
결국 블루워커 기질이 뛰어나고 팀 디펜스와 활동량이 많은 선수들을 모아놓고 그 위에 뛰어난 용병 둘을 얹으면 우승할 여건이 되기에 당장의 우승을 위해선 이러한 흐름을 따라가기 쉬웠다. 그 결과, 서장훈의 연세대 선배인 우지원은 스팟업 슈터로 변신했고, 원래 고려대학교 센터 출신이자 다재다능한 포워드 자원으로 기대를 모았으며, 서장훈의 서울 삼성 썬더스 시절 같이 뛰기도 했던 이규섭도 우지원과 비슷하게 수비력을 갖춘 슈터가 되었다. 라이벌이었던 현주엽은 포인트 포워드라는 미명 하에 득점보다는 다른 방식으로 팀에 기여하는 것을 택했고. 그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한국 선수가 중심이 되어서 경기를 끌어갈 수 있는 경우는 서장훈과 방성윤, 그리고 문경은의 프로 초기와 00-01 시즌 MVP인 조성원밖에 없었으며, 서장훈만이 팀내 1옵션으로서 롱런했다.
서장훈은 인터뷰에서 이런 식으로 궂은 일을 하는 선수가 더 가치를 인정받는 KBL의 풍토가 아쉽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그의 주장의 요지는 용병과 정면으로 대결해서 평균 20점씩 넣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선수들도 팀의 중심이 되지 못하여 궂은 일을 하며 용병을 보조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는 것이고, 그런 이유로 에이스 역할을 할 만한 국내 선수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서장훈은 궂은 일을 하는 선수는 아니었지만, 능력이 떨어져서 그렇게 밀려날 바에야 은퇴를 하겠다고 이야기했던 선수이다.[76] 서장훈의 이야기가 틀린 말이 아닌 것이 시즌이 진행될수록 점차 국내 선수의 득점과 리바운드 등의 기여도가 낮아져서, 팀 공격의 중심으로 활약하는 국내 선수가 꽤나 줄어들었다. 김선형이나 이정현, 오세근 정도. [77][78] 화려하고 개인 능력으로 득점하는 선수가 아닌 궂은 일을 하고 성실한 선수가 더 인정받는 KBL이 오히려 비정상적이며 우물 안 개구리가 되었다는 이야기들도 나오는 상황이다. 궂은 일을 하는 선수가 팀에 필요한 건 당연하지만 그 선수가 에이스보다 잘 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야구로 치면 아무리 홀드를 많이 따내는 중간계투라도 15승을 해 줄 수 있는 선발투수에게 명함을 내밀 수 없는 것처럼. 종목을 막론하고 스포츠에서 블루워커는 팀의 입장에서 좋아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 궂은 일이 저평가받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상차원의 접근으로, 궂은 일이 주목받는다면 그건 이미 궂은 일이라 부를 수도 없다.
사실 다득점, 다포제션 게임인 농구에 있어서 팀 구성의 기본은 공격과 득점이고, 이 때문에 농구는 스코어러가 팀의 기둥뿌리이자 대들보가 되는데, KBL 농구는 이를 전부 외국인 선수에게 맡겨버렸기 때문에, 외국인 선수의 기량 부족이나 플레이스타일이 스코어러가 아니거나 부상을 입을 경우 '''국내선수 중 아무도 스스로 슛을 던질 수 없는'''[79] 구성의 팀은 아예 득점이 안 되는 팀이 되고, 용병을 단 1초도 코트 밖에서 쉬게 할 수 없는 리그가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서장훈도 나이를 먹으면서 외곽으로 밀려나는 경향은 있었으나, 자신이 중심이 되어서 득점하고 리바운드를 잡으며 경기를 이끌어가는 스타일은 변하지 않았다. 분명히 서장훈은 마지막 두 시즌을 제외하고는 소속팀을 포스트시즌에 꾸준히 올린 핵심 선수였으며, 수비 능력도 나이가 많아 하락했을 뿐 전성기 구간에는 분명 좋은 수비수였다.
SK, 삼성, KCC, 전자랜드에서는 잘했고 LG에선 부진했고 kt에서 유종의 미를 거뒀다고 할 수 있겠다.
2.4. 총평
팬들의 평가는 그의 커리어 내내 등락이 컸지만 은퇴하고 난 후에 그에 대한 평가는 한결같다. 전문가 및 선수들의 평가는 말할 필요도 없고. '''반박불가한 한국 농구 역사상 최고의 센터'''이자 '''한국 농구 역사상 최고의 농구선수 중 한명'''이다.[80]
실업 무대를 제패하고 프로 리그에서 용병들과 맞대결하면서도 '''THE MAN의 자리를 잃지 않았던 유일한 한국 선수'''.
서장훈은 선수 시절에는 욕심이 과하며 외곽에만 맴돈다는 비판과 함께 끊임없이 저평가되었다. 팬들에게 생긴 좋지 못한 이미지를 만들게 된 이유들로 서장훈이 허재의 기아-동부나 이상민의 KCC-삼성과 같이 그를 상징하는 팀의 대표로 남지 못하고 이적을 자주해왔던 것과 그의 선수시절 동안 <팀의 승리에 어떤식으로 공헌하는가>라는 질문에 한국 정서에 맞는 희생정신을 꼽은 팬들의 반향이 가장 컸다. 반대로 농구인들에게 서장훈은 언제나 호평받았으며 특히 현역 농구 선수들에게는 우상과 같은 존재였다. 당시 KCC의 신선우 감독은 서장훈이 한창 현역이던 03-04시즌에 '용병들이 판을 치는 현 한국 농구에서 유일하게 30득점을 기대할 수 있는 농구선수'라 말했으며 당시 한국에 오는 용병들도 서장훈은 1대1로 제압하기는 힘들다고 언급할 정도.
그러나 서장훈이 은퇴하며 점차 국내 선수의 1옵션으로서의 활약이 폭락하며 팬들의 서장훈에 대한 평가가 뒤집혔다. 당장 외국인 선수 없이는 득점이 급감하는 프로 팀들의 실력은 과거 외국인 선수 유무에 관계없이 메인 스코어러 역할을 완벽히 수행했던 서장훈에 대한 재평가의 이유가 되기 충분했으며[81] 팬들에게만 저평가되던 서장훈의 기량과 1옵션 마인드 등이 현재의 KBL의 프로선수들이 현재 보여주는 모습이 대비되며 급격하게 평가가 올라갔다.
3. 역대 성적
4. 수상 내역
[1] 이 때의 인연으로 현재까지도 두산 베어스의 열렬한 팬이라고 한다.[2] 창단 당시 한국야구위원회와의 약속대로 1985년에 서울로 올라온 OB 베어스는 서울 연고 정착과 야구 저변 확대, 꿈나무 육성 등을 위해 1986년부터 서울시 초등학교 및 리틀야구 대회를 개최했는데, 서장훈은 이 대회 초대 우승팀 멤버였다. 2016년 7월 31일 아는 형님에서 언급했고 8월 26일 두산과 롯데의 잠실 홈경기 전 시구 때도 이것을 언급했다.[3] 참고로 1986년 OB기 리틀야구대회 초대 우승팀 멤버 중 한 명이 이도형이다. 서장훈이 야구선수 생활을 할 때 투수 서장훈의 볼을 받는 경우가 있었고, 이도형과는 학동초-휘문중-휘문고를 같이 나온 절친이다.[출처] 2011년 1월 3일 네이버 라디오 바스켓카운트.[4] 군기를 잡는 선배로 인해 학교를 옮겼다는 이 기사를 참조바람.[5] 농구를 늦게 시작한 관계로 실력이 부족해서 벤치 신세였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옆에서 함께 기본기 연습에 매진했던 선수가 또 한 명 있었는데, 그 선수는 살을 빼기 위해서 농구를 늦게 시작한 1년 후배 현주엽이였다.[6] 훈련하다가 다쳐서 한 달 정도 쉬었던 기간부터 폭발적인 성장을 시작했다고 한다.[7] 서장훈은 한 인터뷰에서 "당시 최희암 감독님이 우리 집에 오셔서 저녁을 먹고 가셨다. 당시 두 학교에서 경쟁이 너무 치열했다. 어떻게 해서든 저를 데려가려고 노력했다" 라고 스카우트 비화를 밝혔다. 연세대학교를 선택한 이유는 "친한 친구들이 연대에 더 많았다. 그리고 연세대학교가 여학생 비율이 높았다. 그래서 대학의 낭만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그리고 대학생 숙소가 이대 후문 쪽에 있었다" 라고 밝혔다. #[8] 2m를 웃도는 거인 센터인데도 점퍼 구사가 가능하고 정확도도 매우 높은데다가 상황에 따라 어떤 슛을 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판단력 역시 최고 수준일 정도로 농구 센스가 매우 뛰어났다.[9] 이때 국가대표 에이스 센터이자 한국 농구 최초로 국제 무대에서 그나마 이름값을 해 본 한국 역사상 최고의 센터 중 하나인 김유택은 서장훈에 대해서 "우리는 매번 중국, 서양 팀에게 20점 차로 대패하는 것이 일이었는데, 서장훈 덕에 10점 차이 정도까지 줄일 수 있었다." 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이다.[10] 당시 대학 농구는 양대 산맥이라고 할 수 있는 연세대, 고려대, 여기에 중앙대까지 실력파 팀이 즐비했다. 그 중에서도 연세대와 고려대는 그야말로 최고의 실력을 가진 선수들의 대결로 인기 절정이었고, 전희철, 이상민, 문경은, 우지원과 같은 준수한 외모를 겸비한 선수들의 인기는 아이돌 그룹 못지 않았다.[11] 기아자동차는 플레이오프에서 중앙대에게 떡실신당하며 탈락하는 굴욕을 겪었다.[12] 근데 이 당시는 워낙 나이가 깡패였던 시절이라 심판도 대놓고 상대에게 편파판정을 해대서 중앙대 선수들이 항의의 표시로 경기 중에 그냥 서 있기만 했던 적도 있다고 한다.[13] 김성헌은 이상민의 동기인 91학번으로 경복고 시절 포인트가드 랭킹 2위의 유망주였지만, 하필이면 랭킹 1위였던 이상민이 고대에서 연대로 갑자기 진로를 틀어버리는 바람에 4년 내내 벤치만 달구다시피 했지만 중도 이탈 없이 4년을 잘 다니다가 이상민의 아웃 때 기회를 잡았다. 이 시리즈에서 김성헌의 활약만큼은 과장 좀 보태서 제레미 린이 갑자기 나온 수준과도 같았다. 4년 동안 경기에 거의 출장도 못하던 선수가 졸업 고별 무대와도 같은 농구대잔치, 그것도 플레이오프에서 갑자기 주전으로 나와 엄청난 활약을 보인데다 연세대의 높은 인기 탓에 당시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 후 김성헌은 인천 대우 제우스에서 프로생활을 한 뒤, 2014년에는 인천 전자랜드의 사무국장으로 재직 중.[14] 그리고 결승에 올라간 삼성은 허재, 강동희, 김유택에게 돌아가며 두들겨 맞으면서 기아자동차에 완패하고 만다.[15] 당시에는 "대표팀 빠지려고 저런다", "몸값 부풀리려는 술책이다" 라는 등 온갖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곳곳에서 비난이 쇄도했었다.1995.04.25 경향신문 기사[16] 최희암 당시 연세대 감독도 한국으로 돌아오라고 설득했다고 한다.[17] 서장훈의 전성기였던 1996년 NBA 선수인 그랜트 힐이 한국에 방한해서 이벤트로 서장훈과의 1:1 대결을 한 적이 있었는데, 서장훈의 슛을 전부 막아냈고 본인은 서장훈을 앞에 두고 덩크를 하는 등 퍼포먼스성 플레이를 하며 그야말로 가지고 노는 모습을 보여줬다. 서장훈은 끝까지 진지하게 임했고 결국 한 골을 넣었으나 당시 한국 최고의 선수였던 서장훈의 입장을 생각해서 그랜트 힐이 봐준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물론 그 당시 그랜트 힐은 전년도 신인왕을 탄 NBA 최고 수준의 플레이어이긴 했으나, 스몰 포워드인 힐이 자신보다 키도 큰 센터 서장훈을 상대로 골밑 공격까지 압도한 것을 보면 NBA와의 격차를 느낄 수 있다.[18] NBA 데뷔에 실패한 KBL 용병들이 한국에서 드마커스 커즌스급 성적을 보여주니 그 격차는 상상 이상이다. 당시 그랜트 힐은 발목 부상 4년 전 시절이였고 서장훈이 포스트업을 해도 힐 역시 203cm/100kg의 근육질 몸매였으니 힘으로 밀릴 일도 없었고 힐의 돌파는 NBA에서도 역대급이다.[19] 사실 지금도 좀 그렇지만 당시 KBL의 수상은 조금 근본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NBA의 경우는 아무리 팀 성적이 떨어져도 서장훈 정도로 개인 성적이 압도적이면 당연히 신인왕을 준다. 4대 센터 중 하나인 패트릭 유잉도 결장이 잦고 팀 성적도 작년과 비슷했지만 무난히 상을 탔다. 게다가 이때 KBL의 수상 체계도 매우 엉망이었는데, 이상민의 경우 신인 시즌에 MVP를 타놓고도 농구대잔치 시절 이미 상을 받았다는 이유로 신인왕을 못 받았다. 당연히 이 경우엔 둘 다 석권하는 게 상식이고, 2001년에 데뷔한 김승현의 경우는 이런 촌극이 반복되지 않았다.[20] 2000년 우승 주역인 로데릭 하니발은 시즌 도중에 부상으로 낙마했고, 대체로 들어온 찰스 존스는 외국인 선수답지 않게 형편없는 기량을 보여주면서 SK는 사실상 빅맨이었던 에릭 마틴 1명으로 결승전을 치를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상대팀 동양 오리온스는 당대 최고의 외국인 선수였던 마르커스 힉스와 리바운드왕 라이언 페리맨이 건재한 상태였다.[21] 나름 수월하게 우승할 것으로 예상하다가 페리맨이 서장훈에게 쩔쩔매는 바람에 7차전까지 가는 고생을 한 오리온은 다음 시즌 페리맨과의 재계약을 포기하게 된다.[22] 그 때문에 당시 서장훈의 부친이 김인건 삼성 감독에게 드잡이질을 했을 정도.[23] 우지원은 SK에서 보상선수로 지목받자마자 김영만과 맞트레이드되어 모비스로 가게 된다.[24] 이창수는 울산 모비스를 거쳐 창원 LG에서 현역 최고령인 42세로 은퇴했다. 박상관은 대구 오리온스에서 2004년 은퇴했다. 모두 이 사건 때문에 인간 말종 취급받아 저평가를 많이 받았지만 두 선수 모두 블루 워커로서는 상당한 실력을 보여주었다. 서장훈은 이창수의 은퇴 경기에 앞서서 이창수의 롱런을 칭찬하는 인터뷰를 했고 경기 중에도 이창수와 대화를 나누는듯한 모습을 보여서 앙금을 푼듯하나 그때의 부상으로 목쪽에 고질적인 부상을 안게된 건 여전히 본인 입장에선 마음이 아플 듯.[25] 여담이지만 박상관의 딸 박지수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농구선수를 하고 있다. 더군다나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키가 김연경과 동일하며 아직도 성장 중이다. 2016년 4월 현재 195cm다. 1998년생으로 동연령대 선수 중에서는 최고로, 국내대회뿐 아니라 국제대회도 그야말로 씹어먹는 중. 아들 박준혁 군은 2m의 키로 명지고 농구부에서 선수생활을 했고 이후 배구로 전향하여 명지대 배구부에서 뛰고 있다.[26] 이 와중에 2003년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의 스카웃이었던 밥 피어스가 서장훈의 플레이를 확인하러 잠실실내체육관을 찾아온 일이 있었다고 한다. 손대범 기자가 미리 서장훈의 플레이 영상을 보내준 상태였는데, 피어스는 잠실 경기를 본 후 'NBA에 오고 싶으면 테스트를 받으러 (미국으로) 와라'고 했다고 한다. 당시 서장훈은 팀과의 계약도 있고 아직 시즌 중인데도 미국으로 가면 시끄러워질 것을 부담스러워했다고 한다. 여기에 손대범 기자는 서장훈은 비록 NBA에 관심은 있어도 자존심이 강해 그 나이에 모든 걸 포기하고 NBA 진출을 노릴 정도로 적극적이진 않았던 것 같다고 봤다(정지욱 기자의 용병닷컴TV 78회 2020.01.03).[27] 2005년 2월 23일 원주 TG삼보와의 원정경기에서 1쿼터 5분 30초를 남긴 상황에서 벌어졌다. 공격리바운드를 잡아낸 후 김주성을 펌프 페이크로 속이고 올라가려는 순간 공중에서 내려오던 김주성이 오른팔로 서장훈의 머리를 내려쳤는데 이 과정에서 서장훈의 목이 뒤로 살짝 꺾이는 모습이 보인다. 이 때 경기를 중계하던 SBS 해설위원 이명진은 "아까 왼쪽 팔을 못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라는 코멘트를 하기도 했다. 서장훈은 잠시 벤치에 있다가 비틀거린채 코트로 나와 자유투를 던졌는데, 몸에 확실히 이상이 생겼는지 1구는 평소에 잘 시도를 안 하던 뱅크슛으로 던져서 실패를 했다. 자유투 2구 성공 직후 삼성은 곧바로 반칙으로 끊어 서장훈은 코트에서 물러나게 된다. 한편 이날 TG삼보는 서장훈을 부상으로 일찍 잃은 삼성을 96-89로 꺾었다.[28] 일설에는 우승 축하연을 안 갔다고 한다.[29] 서장훈의 이적과 이상민의 영입으로 삼성은 3가드 시스템을 가동하는 전력을 썼고, 이는 팀의 2차례 준우승과 인기몰이 등 호성적을 가져다주었다. 다만 등가교환으로 높이와 수비력이 급격하게 약해져 11~12시즌 삼성 추락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30] 10,000득점 마일스톤은 KCC에서 달성했다.[31] 강병현, 조우현, 정선규 ↔ 서장훈, 김태환[32] 전자랜드는 저때가 우승을 노릴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였지만, 정규 시즌엔 부산 kt 소닉붐에 밀려 준우승, 4강 플레이오프에선 KCC에게 패해 챔결 진출이 무산되었다. 그리고 정규리그 우승을 했던 kt 역시 제스퍼 존슨과 김도수가 빠지며 동부에게 밀려 4강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하였다.[33] 서장훈이 10,000점을 넣던 그 경기에서 현주엽이 상대팀으로 만났는데 서장훈의 기록을 세워주기 위해서 일부러 골을 허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10,000득점을 달성한 직후의 서장훈은 같은 팀 동료들뿐 아니라 상대팀 선수들에게도 축하를 받았고 전광판에는 그 동안의 서장훈의 농구 인생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담았다.[34] 그러나 실상은 만신창이 수준의 몸 상태를 참고 경기를 뛴 것으로, 족저근막염에서 만성요통으로 이어진 부상이 그의 운동 능력을 많이 깎아 먹었다. 커리어 중반 이후부터 뛰지 못하고 잘 넘어진 이유가 허리 부상 때문이다. [35] 게다가 기사에서 서장훈은 사전에 트레이드 진행을 몰랐다는 이야기도 있어서[36] 서장훈이 은퇴를 선언한 시즌 막바지 즈음, 이미 4라운드에 전주에서의 kt의 경기가 종료된 KCC전을 제외하고 나머지 8개구단 원정경기 때 각 팀에서 서장훈 은퇴 기념행사를 했는데, 전자랜드 홈인 삼산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물론 가장 많이 운 것은 kt 홈에서의 마지막 경기였지만.[37] 다만 kt에게 1차전을 따내고도 5차전까지 간 끝에 분패하고 만다. 여담으로 5차전은 2차 연장 접전이 펼쳐진 명승부였다.[38] 사실 이 기간에 서장훈은 전자랜드로의 복귀를 희망했다고 한다. 다만 이는 규정상 '원 소속팀으로의 복귀는 1년이 지나야 가능하다'는 규정 때문에 불가능하게 되었다. 트레이드 발표 자체는 작년 5월 중순에 났지만, 규정상 공식 승인은 6월 1일에 떨어지기 때문에 아직 1년이 지난 기간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자랜드에 복귀하려면 서장훈을 다른 팀에서 영입한 뒤 전자랜드에 무상 트레이드 하면 되는데, 다른 팀이 남 좋은 일만 시켜주는 귀찮은 일을 할 이유는 없고, 그렇다고 반대급부를 받기엔 전자랜드에서 선수 유출을 감수하면서까지 할 이유가 없다. 결국 전자랜드 복귀는 실패로 돌아가고, kt가 영입과 기용 의사를 밝히며 자연스럽게 kt행이 성사되었다.[39] 아시아 최초로 NBA에 진출한 선수다.[40] 아는 형님 태양, 송민호 편에서 예능 스타일로 토크해서 그렇지 이후 6개월 동안 코트에 서지 못했다고 한다.[41] 단 이 경기의 심판이 훗날 밝히길, 실제 서장훈은 진작 5반칙 퇴장을 당해야 했다 하였다. 실제 서장훈이 야오밍에게 확실하게 범한 파울만 최소 9개 정도 된다고. 사실 대한민국 선수들의 분전은 놀라웠지만 홈콜이 좀 심하긴 했다. 특히 야오밍은 거의 보호받지 못하는 수준. 오히려 03년에 중국에서 열린 ABC 챔피언십에서 한국이 홈콜 없이도 4쿼터 종료 몇분전에 1점차로 따라잡는 등 분전했는데, 이 해엔 서장훈의 부재로 골밑의 열세가 더욱 심해졌지만 (리바운드가 39대 24였다) 후웨이동이 빠진 중국의 가드진이 한심한 모습을 보이며 한국의 풀코트 프레스에 많이 당했다. 오죽하면 야오밍이 하프코트까지 와서 도와줘야했을 정도. 어쨌더나 02년 당시는 야오밍에 후웨이동까지 있는 팀이라 정상적인 전력으론 이기기다 불가능에 가까웠다.[42] 김주성도 소위 주성타 사건을 생각해보면 정상적인 레벨에서의 서장훈 수비에는 애먹었던 것도 사실이다. 서장훈은 김주성을 상대로 힘에서 명백히 우위를 점하는데다 높이도 대등했고 스피드도 크게 밀리지 않는 수준이었다.[43] 심판도 '''서장훈에게 일일이 파울을 다 불어주면 시합이 안 되기 때문에''' 일부러 안 부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44] 사실 코트에서 욕을 자주 하는 편이기도 하다. 파울을 당한 뒤 서장훈의 얼굴을 클로즈업하여 욕하는 입 모양을 슬로우 모션으로 보여주는 리플레이 장면은 농구팬이라면 자주 봤을 장면. 하지만 서장훈 정도로 견제를 당한다면 욕이 안 나오는 게 되려 이상할지도.[45] 물론 그렇다고 욕설을 하는 일이 옹호될 수는 없으며 실제로 비판도 많이 받았다. 서장훈이 견제를 많이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경기를 보는 팬들 입장에서는 유쾌할 수는 없었기 때문.[46] 다만 서장훈의 거친 항의는 연세대 1학년 시절부터 유명했다. 본문처럼 그것이 자기 보호의 일환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TV 중계를 하던 농구대잔치에서도 여러 번 항의가 보였으며 서장훈이 팀을 우승으로 이끈 93-94시즌에서도 중계진이 "서장훈 선수가 아직 1학년이라 저런 듯 합니다"는 발언을 수차례 했을 정도로 서장훈의 항의는 악명 높았다. 만약 그가 이상민, 우지원이 있는 아이돌팀 연세대 소속이 아니었다면 실력과 관계 없이 엄청난 비난을 받았을 것이다. 다만 서장훈이 1학년 때부터 거친 파울에 시달려왔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서장훈은 20살 때부터 지금 키였고 한기범과 달리 파워를 겸비해 실업농구에서도 상대할 선수가 없었고, 경력이 깡패인 한국농구 특성상 농구대잔치의 '''거의 모든 빅맨들이 선배였기에''' 이들은 어린 괴물 센터를 무자비하게 괴롭혔다.[47] 게다가 오해에 가까운 것이 서장훈은 리바운드왕을 차지한 유일한 국내센터이며 노쇠하기 전까지 리바운드 수치가 리그 최고 수준이었다. 게다가 서장훈은 국제대회에서 야오밍을 상대로도, 하승진을 상대로도 맞상대하며 치열하게 몸싸움을 했다. 자세한 것은 후술.[48] 실제로 서장훈은 심판에게 항의하는 이미지 때문에 과다하게 욕을 먹었던 반면, 김주성은 이미지로 인해 비판을 적게 받는 측면이 있다. 김주성이 깨끗한 사생활, 효자이며 한국 역대 최고 빅맨 중 하나이지만, 리그에서 가장 헐리웃 액션을 많이 하는 선수라고 흔히 회자되며, 경기 매너도 그리 깔끔한 선수는 아니다.[49] 이 사건 이후로 서장훈은 목 보호대를 하고 농구를 했으며 사실 이 당시 대부분의 의사들이 은퇴를 권유했다고 한다. 그러나 은퇴는 죽어도 하기 싫었던 서장훈은 보호대를 하면서 선수 생활을 이어나갔다. 이 무렵부터 20점을 찍던 평균 득점이 조금씩 저하되기 시작했다.[50] 이상민을 응원하는 사람들의 약칭이자 팬카페의 이름. 이들은 '''극성팬으로 악명이 높았다.'''[51] 다만 삼성은 서장훈이 떠난 이후에도 2번의 준우승을 기록하였다.[52] 사실 잘 모르는 사람들도 많고, 큰 덩치에 항상 신경질 부리는 선수인 서장훈한테 사인 요청하는 게 무서워서 그런 것도 있다. 사실 팬 서비스는 류현진 메이저 이후에 논란이 된 것이지, 이전까진 팬 서비스 이야기조차 나오지 않던 시절이다. 오히려 농구계에서 팬 서비스에 대한 논란이 잘 되지 않던 이유는 근본적으로 인기가 덜하기 때문이다. 이상민, 문경은, 우지원, 전희철 등 이들의 팬 서비스와 사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그다지 많진 않을 것이다. 하물며 지금 현재 농구 선수들 인지도도 높지 않은데 말이다.[53] 또, 팬 서비스에 관한 증언도 모두 신뢰도가 높다고 보기는 어렵다. 최형우나 김주찬처럼 어린아이에게도 안 해주는 경우라면 당연히 비판받아야 하지만, 정작 이대호는 출근길에 롯데팬들이 줄서서 사인을 받는 팬들도 많았다. 이승엽도 희소성 발언은 비판받아도 마땅하지만 해당 인터뷰 마지막에는 앞으로는 잘해주겠다는 인터뷰로 마무리했다. 앞으로 안 해주겠다는 의도는 절대로 아니라는 것. 사실 사인을 받은 경우라면 당연히 인터넷에 인스타로 자랑을 하는 경우가 대다수일 것이다. 하지만, 거절당한 경우라면 아무리 매너있게 거절해도 기분 나쁘게 글을 올릴 가능성이 높다. 서장훈도 팬한테 욕을 했다는 증언이 있지만 증명이나 해명할 길은 없다.[54] 전성기인 SK는 당연히 해당 사항이 없으며 전자랜드 이적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는 트레이드였고, 이후 KT는 말년인데다 팀에 불만을 가져서 팀을 옮긴 케이스가 아니다.[55] 최소한 KBL은 지금까지 없으며, NBA에서도 이런 선수는 없었다. 당시 서장훈급 위상을 갖고 있으면서 20분 정도 출장하는 선수는 역대 어디에도 없다. 주전급 실력을 갖고 있으면서 식스맨으로 출장했던 마누 지노빌리는 당시 출장시간이 27~31분이었다. 심지어 지노빌리의 당시 리그 내 위상은 KCC 시절 서장훈의 KBL 내 위상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 비유하자면 90년대 당시 최정상급 센터들인 샤킬 오닐과 패트릭 유잉이 같은 팀에 있는데, 당시 기준으로 둘 다 기동력이 떨어져 센터밖에 못 보니(유잉은 20대 시절엔 4번이 가능했지만 이때는 30대였다.) 24분씩 로테이션으로 뛰게 하는 꼴이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기용이다.[56] 반면 여자농구는 박신자, 박찬숙, 정은순, 정선민, 박지수 등 센터가 에이스가 되는것이 상대적으로 흔하다.[57] 반대로 NBA에선 센터들이 주 득점원이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들은 대부분 수준급 점퍼를 갖고 있었다. 2010년대 이후로는 센터의 점퍼 및 코트 스페이싱이 자주 요구되는 사항이지만, 그 이전 센터들의 전성기였던 80~90년대에도 특급 센터들에겐 거의 예외 없이 미들슛이 기본이었다는 것.[58] 물론 예외도 있다, 미들슛 없이 리그를 지배했던 샤킬 오닐. 샤크는 자유투 솜씨도 좋지 않았고, 미드레인지 점퍼도 없었으나 압도적인 피지컬과 롤인, 포스트업을 바탕으로 리그의 1인자로 군림했었다.[59] 프로 이후에도 서장훈의 전성기 대부분의 득점이 포스트업을 구사해 페인트존으로 진입한 이후 슈팅을 통한 득점이었다. 종종 던지는 중거리슛은 그 당시 토종 센터의 슈팅 능력을 넘어서는 정확도였기에 기억에 더 남은 것일 뿐, 기본적으로 힘을 바탕으로 한 페인트존 내외 득점이 주된 공격 루트였다는 것.[60] 다만 송영진은 장신 슈터로 전향했다가 다시 백업 빅맨으로 경기 스타일을 바꾸었다.[61] 게다가 프로 이전부터 몇몇 상대팀의 '''수비를 빙자한 폭력'''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고 골밀에서 몸싸움을 할 체력이 받쳐주지 못하는 노장 선수가 되면서 생긴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볼 수도 있다.[62] 블록 역시 빅맨의 수비능력을 보여주는 스탯이 맞지만, '''비비기'''라는 용어에 걸맞는 골밑에서 상대 빅맨과 골밑자리잡기로 골밑 몸싸움을 열심히 했냐는 논지에 더 맞는 플레이는 박스아웃과 리바운드다. 키가 매우 크지만 몸싸움이 약한 숀 브래들리나 마누트 볼 같은 선수들이 자리싸움에서 밀려 리바운드는 잘 못 잡지만 블럭슛은 잘하는 걸 보면 알 수 있다.[63] 블록슛은 림프로텍팅과 관련있는 수치로 리바운드와 더불어 중요한 스탯이다. 보통 스탠딩리치가 길거나 스피드가 있는 빅맨은 블록슛이 많다. 반면 리바운드는 골밑 몸싸움과 연관이 많아서 키가 좀 작아도 골밑에서 힘으로 상대를 밀어낼수있는 스타일이 리바운드에 유리하다. 그래서 리바운드는 힘있는 파워포워드가 1위를 하는 경우도 많다. 김주성은 긴팔과 스피드로 블록슛에 유리하고, 서장훈은 팔이 짧아서 블록슛은 불리하나 파워가 있어서 몸싸움으로 리바운드를 잘 따낼수가 있었다.[64] 리바운드에서 김주성과의 비교는 불합리한 측면이 있다는 의견도 있다. 서장훈의 포지션은 센터였지만, 김주성은 소속팀 원주 동부에서 외국인 선수를 센터로 두고 김주성을 파워 포워드로 기용했기 때문에 김주성이 리바운드가 더 적다는 것. 오히려 공격 리바운드에서는 김주성이 커리어 평균에서 서장훈에게 앞서기 때문에 리바운드 능력에서 김주성이 서장훈보다 떨어진다고만 하기에는 애매한 점도 있다.[65] 다만 공격리바운드 수치는 서장훈처럼 중거리 위치에서 공격하면서 에이스롤을 맡은 빅맨들이 높은 수치를 기록하기 어렵고, 김주성은 서장훈에 비해 공격롤이 적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공격리바운드를 따내기 쉬운 환경이다. 스티븐 아담스의 경우 공리가 수리보다 많은 경우도 있는데, 원래 수비나 리바운드에 치중하는 선수들은 공격 에이스들보다 공격리바운드가 높다. 모제스 말론이나 찰스 바클리, 샤킬 오닐처럼 골밑 위주로 공격하는 빅맨들은 예외. 게다가 뛰어난 외국인 빅맨들과 함께 한 건 서장훈도 마찬가지였다. 외국인 선수들이 "서장훈이 센터라고 해서" 골밑을 그에게만 맡긴 적이 있던가? 그리고 서장훈은 파워포워드를 맡을 때에도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66] 장신센터는 부상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서장훈이 워낙 기량이 출중했기에 부상으로 기량이 떨어진 이후에도 계속 선수생활을 이어갔을 뿐이다. 특히 2002년 아시안게임 우승 때 족저근막염이 생긴 후 지속적으로 다양한 부상에 시달렸으나 출장시간이 줄어들지 않을 정도로 성실했다. 이는 서장훈이 금강불괴였다기보다는 부상을 참고 경기한 경우에 가까우며,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로 굉장히 심각한 상황에서 출전했기에 그에 따른 신체 하락이 발생했다는 것. 이 상황이 은퇴 시점에서가 아니라 전성기 전후로도 이미 심각한 상태였다.[67] 대척점에 서 있는 선수가 바로 계속 언급되는 김주성이다. 김주성은 윙스팬이 길고 출중한 기동력을 갖춰 수비범위가 넓었고, 이를 통해 스틸과 블록 능력이 뛰어난 모습을 보여줬다. 김주성은 서장훈에 비해서는 몸싸움과 박스아웃, 힘에는 밀렸지만, 이러한 점을 장점으로 수비수로서 호평받았다고 할 수 있다.[68] 반대로 김주성은 준수한 득점력을 지닌 선수인데, "역대급 득점력을 지닌 서장훈보다 못하니 득점력이 약하다"라고 하면 말이 되겠는가?[69] 청주와 서울 두 연고지를 모두 경험했다.[70] SK는 문경은과 전희철을 '''팀의 프랜차이즈가 아님에도 농구계의 전설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영구결번을 지정했기 때문에 서장훈에게도 이를 적용할 가능성이 있다. 2020년 시점에선 11번은 자밀 워니가 달고 있다.[71] '''삼성은 이상민이 11번을 이어받은 후 '''지금까지 11번을 단 선수가 없으며, 서장훈과 이상민이 동시에 영구결번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단 이상민은 이미 KCC에서 지정되어 있으며 서장훈은 삼성 이적 전까지만 하더라도 삼성과의 사이가 껄끄러웠던 편이었던데다(대표적인 것이 연세대와 삼성전자간의 사건) 05-06 챔피언결정전에서는 비중이 낮은 탓에 팀간의 갈등이 있는 것도 사실.[72] 당시 음주운전에 적발된 이후의 기사.[73] 스포츠웹진 후추닷컴 인터뷰 <허재 - 드디어 후추를 만나다> (1999년 10월 24일 취재)[74] 그 유명한 "문경은이 걔는 뭐...선수가 아니고..." 발언이 나온 인터뷰다.[75] 물론 나이 문제도 있었고, 허재의 경우 경쟁자의 부재로 인해 자기관리에 소홀해 기량 하락이 발생했다는 관점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허재 항목 참조.[76] 전술했듯 안티들이 서장훈을 폄하할 때 '기록만 신경쓴다.', '센터인데 왜 궂은 일을 하지 않느냐?' 라는 식의 비판을 많이 했다.[77] 그나마도 김선형은 기복 있는 득점력, 이정현은 으악새로 대표되는 파울 콜 논란, 오세근의 경우 부상 이력에 따른 적은 출장시간 등으로 폄하되기도 한다.[78] 서장훈에 대한 재평가가 꾸준히 이뤄지고 있는 현재, KBL의 스타들에게 저런 비판과 폄하가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은 굉장히 아이러니하다. 이들도 은퇴 후 재평가가 이뤄질지도...[79] 이들이 던지면 팬들과 코치, 감독이 합심해서 깐다.[80] 허재를 제외하면 비교대상이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한다.[81] 실제로 서장훈은 블루워커들이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은 상관없으나 자신과 같이 경기의 중심에서 경기하는 선수들의 스타일이 비판받는 것이 안타깝다고 인터뷰를 해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