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일생

 


1. 당선 전
1.1. 성장기
1.2. 군인
1.3. 제5공화국
1.4. 대통령 선거
2. 대통령 시절
3. 퇴임 후
3.1. 5.18에 대한 망언
3.3. 징역형 및 전직대통령 예우 박탈
3.4. 사면 이후


1. 당선 전



1.1. 성장기


1932년 지금의 대구광역시 동구 신용동 용진마을에서 당시 면서기였던 노병수(盧秉壽. 1901~1940) [1], 그 아내 김태향(金泰香, 1907~1999)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음악을 좋아한 부친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축음기를 틀어놓고 책을 읽었으며, 불교에 조예가 깊은 할머니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팔공산의 대찰을 오가며 참선[2] 배웠다고 한다. 덕분에 "호흡 및 호흡관찰을 생활화" 하게 되었는데, 성인이 될 무렵에는 자동차가 땅굴(터널)로 들어갈 때 1번 숨을 들이쉬고, 자동차가 터널을 빠져나올 때까지 천천히 숨을 내쉴만큼 호흡 수준 및 폐활량이 좋아졌다고.
7살에 부친 노병수가,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러 가는 막내동생(=노태우의 숙부) 노병상을[3] 응원하기 위해, 대구시내 시험장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가 철도 건널목 사고로 숨을 거두게 된다. 이 때문에 가세가 기울어 막내숙부가 중학교를 마치고 취업할 때까지 어렵게 살았으며, 14살 때부터 대구의 삼촌 집에서 통학을 했다고.
대구공산소학교(現 대구공산초등학교)를 졸업한 뒤[4] 대구공업중학교(現 대구공업고등학교[5])에 입학했지만, 중2 때 당시 유행하던 말라리아에 걸려 1년동안 생사를 오가는 투병끝에 겨우 목숨을 건지면서 삶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의대에 진학해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고자 본격 학업에 열의를 보였던 것. 비록 1년이란 세월을 날렸지만, 이 무렵 닦은 학업 실력으로 10:1의 경쟁을 이겨내고 영남권 제일의 명문 학교였던 구 경북중(현 경북고등학교) 4학년 편입에 성공[6], 미래의 경북 지역 엘리트들과 같이 공부하고 친분을 쌓게 되었으며, 6.25 전쟁 발발 후에는 20:1의 경쟁률을 뚫고 우수한 성적으로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다. 베프 전두환이 인문계 편입시험과 갑종장교 시험에 연거푸 물을 먹고, 충원합격으로 육군사관학교 11기에 합격한 것과 여러 모로 대조된다.
고교 시절에는 이런 시도 썼다고 한다. (오마이뉴스 기사, 오마이뉴스 기사(네이버))

<여름의 저녁>

여름의 저녁 뻐꾸기 울고 피리소리 들려오누나

물은 고요히 잠자고 그 속에 달그림자 떠 있어......

두던의 잔디는 부드럽고 그 위에 몸을 높인 이 몸

잠자코 나는 여름 하늘의 별을 세노라.

어디서 들려오는 뻐꾸기 소리. 나는 고요히 물 위에 가벼운 돌을

던지다. 물은 잔작히 파도를 일으키고 달은 너울너울 춤을 추누나.

여름의 저녁 어느덧 밤은 물속에 든 달그림자와 함께 깊어간다.

그윽한 여름 개울의 잔디 두던에 고요히 밤은 짙어간다.

중학교 시절에는 공부를 잘했고 장래희망이 외과의사였다고 한다. 영어를 특히 잘해 육사에서 영어를 가르쳤다고도 한다. 때문에 학구파로 알려졌지만, 사실 성적이 특출나게 좋은 편은 아니었다. 노태우가 직접 쓴 회고록에 의하면 육사 입학 때는 200명 가운데 10위권이었지만, 졸업할 때는 67등까지 떨어져 그렇게 특출난 성적도 아니었다고 한다.[7] 사관생도 시절 '''태릉 타잔'''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체력이 뛰어났다는 설이 있는데, 딱히 확인된 바는 없다. 다만, 럭비는 좋아해서 자기 회고록에 사관학교 시절 자랑거리가 럭비와 후배에게 저지른 똥군기말고는 없다. 그렇지만, 이 사관학교 럭비부 출신 선후배들이 대선에 출마한 노씨를 물심양면으로 도왔다는 일화도 있는 만큼[8], 사관생도 시절 인망은 괜찮았던 것으로 추정.
전두환과는 동기로 육사 생도 시절 방을 같이 썼으며[9], 노태우가 한살 형인 전두환을 옆에서 보좌해주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10] 두 사람 모두 자기만의 확고한 1등 영역(노태우는 영어, 전두환은 [11] 체육 실력)을 구축하며, 기수를 이끄는 역할을 자주 맡았다고 한다.

1.2. 군인


[image]
[image]
[image]
소위 시절 노태우. 맨 왼쪽에 담배를 물고 있는 인물이다.
▲ 월남 파병 당시의 노태우. 오른쪽은 같이 12.12 군사반란의 주역이었던 박희도.
국군보안사령관 시절
육군사관학교 11기로 동기 전두환과 함께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12] 영어를 매우 잘하고 선생님으로서의 자질이 뛰어난 노태우는 소대장을 완료한 이후 보병학교에서 구대장을 역임한 뒤 육군정보학교에서 영어교관을 역임했다. 5.16 군사정변이 성공한 이후로, 같이 하나회를 조직한 전두환과 더불어 박정희의 총애를 받게 되고 이후로 승승장구하며 전두환과 함께 정치군인의 행보를 걷게 된다.
대위 시절 육군방첩부대[13] 정보처 정보과에 근무한 적이 있었는데, 이 때 방첩대장은 바로 이후에 원수지간이 되는 정승화였다. 당시 노태우가 정보과 일을 하면서 정치 분야에 지나치게 관심을 두자, 정승화가 이를 딱하게 여겨서 '이 일을 너무 열심히 하지 말게. 야전 지휘를 해봐야 진짜 군인이지.' 라고 가볍게 충고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 월남 파병을 다녀오고 군내 노른자위 보직들을 옮겨다녔다.
전두환이 제1공수여단장 - 제1보병사단장을 거친 것처럼, 노태우는 제9공수여단장-제9보병사단장을 거쳤다. 공수여단장 시절 흥미로운 일화를 많이 남겼는데, 그 중 하나가 '''공중낙하 합동결혼식'''이다. 공수여단 내에 나이든 부사관들은 부인과 동거는 오래 했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들 28쌍을 모아서 합동 결혼식을 주선했다. 근데 그 결혼식이란게, 신부들은 지상에서 웨딩드레스 입고 부케 들고 행주나루에서 대기하고 있고 신랑들은 양복 입고 비행기에서 낙하산 메고 창공에서 점프(...)해서 날아오는 것이었다.[14] 그날 점프의 1번 강하자는 다름 아닌 결혼식 주례를 맡은 노태우 공수여단장 이었다고(...)
공수여단장을 마치고 청와대 경호실에서 행정차장보를 역임했다. 이후 소장으로 진급해서 작전차장보도 맡았다. 참고로 경호실 작전차장보 행정차장보는 당시 차지철 경호실장이 자신의 권위와 세력을 키우기 위해 현역 군인들을 데려다 앉히기 위해 만든 직위들로, 처음에는 차장보가 준장, 경호실 차장이 소장이었는데 나중에는 차장보가 소장, 경호실 차장이 중장으로 높아졌다. 10. 26. 사건 당시에는 이재전 육군 중장이 경호실 차장으로 있었다.
[image]
대통령경호실 행정차장보 육군 준장 노태우, 작전차장보 육군 준장 전두환, 그리고 경호실장 차지철
12.12 군사반란 당시 자신이 지휘하던 제9보병사단에서 2개 보병연대를 동원하여 반란 성공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12. 12 군사반란 후에는 쿠데타에 저항하다 쫓겨난 장태완의 후임으로 수경사령관이 되었다.
수경사령관시절 서울대 경제학과 재학중 입대한 33경비단 소속 유승민에게 공관병으로 옮겨 자녀들의 과외를 해줄수 있냐고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는 유승민 개인의 주장일 뿐 전혀 교차검증이 되지 않는다.

1.3. 제5공화국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자 노태우는 정권의 핵심인사 중 하나가 되었지만 동시에 정권의 2인자로서 1인자의 견제를 받는 처지이기도 했다. 정권 초기에 노태우는 김종필을 찾아가 2인자로 처신하는 법에 대한 조언을 들었다는 일화가 있다.[15]
1981년 대한민국 육군 대장(국군보안사령관)으로 예편하여 민간인 신분이 된다. 이후 정무제2장관, 체육부 장관, 내무부(현 행정안전부) 장관, 올림픽조직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정권의 2인자였지만, 정권의 실세이자 각종 정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던 이들은 사실 ''였고 노태우는 장관급에 기용되기는 했지만 정권의 핵심적인 권력과는 거리가 있는 한직에 가까운 직책들이 주어졌다. 특히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된 것은 국내의 사건사고가 터지면 내무부 장관이 책임지고 사임하는 일이 빈번했던 만큼 노태우에게 정치적인 데미지를 주기 위한 것이었다는 해석도 있다.
결국 일련의 사건으로 내무부 장관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이번에는 당으로 가서 야당의 공세에 맞서는 총알받이 역할이 주어진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직후 권익현의 뒤를 이어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전두환이 노태우가 TV에 많이 나오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명색이 여당 대표임에도 불구하고 TV에서 야당 대표들보다 존재감이 없었다. 실로 안습이다.
전두환 임기 말에 우여곡절 끝에 전두환의 정치적 후계자로 낙점되었다. 정권 초기에 전두환의 정치적 심복이었던 3허가 차례로 나가떨어졌고, 장세동은 안기부장 직책에 있었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인기가 바닥이었고, 노신영 역시 국민들에게 인지도가 높지 않았다. 다른 마땅한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결국 노태우가 간택된 것. 한편으로 전두환은 물같이 유해 보이는 노태우를 후계자로 앉힌 후 자신이 배후에서 상왕과 같은 역할을 하려 했던 정황이 있다.
노태우는 전두환의 후계자로서 5공 헌법대로 체육관 선거에 의해 당선될 예정이었으나, 6월 항쟁을 맞아 국민들의 개헌 주장을 전면 수용한 이른바 6.29 선언을 발표하게 된다. 당시에는 본인의 역사적 결단으로 포장하였으나 후일 전두환의 기획에 합의한[16] 것이었다는 논란이 있었고 후자가 사실에 더 가깝다고 보는 것이 다수 의견. 물론 고종사촌 처남인 박철언 등은 전자를 주장한다.

1.4. 대통령 선거



"'''나, 이 사람. 보통사람입니다. 믿어주세요."'''[17]

"'''이제는 안정입니다"'''

'''보통사람의 위대한 시대''', "이제는 안정입니다", "꿈도 아픔도 국민과 함께" 등과 같은 슬로건을 내걸었다. 장기간에 걸친 권위주의 정권, 군사 정권의 이미지를 불식시키고 안정을 원하는 국민들에게 호소력을 갖기 위해서 초점을 맞춘 선거캠페인을 전개했다. 당시 "보통사람의 위대한 시대"라는 슬로건을 두고 선거캠프 내에서 "보통 사람이 어떻게 대통령을 하냐", "이미지가 너무 약한 것 아니냐"는 부정적 인식도 있었지만 노태우 본인이 굉장히 흡족해했다고 한다.
의도했는지는 모르지만,[18] 사실 정치공학적으로는 상당히 뛰어난 이미지 전략으로 꼽히는데, 김영삼의 '군정종식', 김대중의 '평민은 평민당, 대중은 김대중'을 기억 못하는 사람은 많으나, 이 '보통사람'이라는 슬로건은 당시 투표를 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30년이 지난 시점에도 아직도 기억한다. 김영삼, 김대중의 분열과 김종필이 가세한 치열한 싸움에서 평범한 이미지를 고수하며 오히려 그 싸움에서 한발 물러나는 듯한 이미지를 고수하면서 자기 지지층을 모으고, 군사독재 정치의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던 계층이나 양김의 싸움에 지루함을 느끼던 약한 민주화 지지층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노태우에게 관심을 갖게 만든 효과가 있었다.
민주화 이후 최초의 대선이라 한국 대표 민주화 운동가였던 두 후보 김영삼, 김대중에게 처음에 관심이 쏠렸던 선거임에도 노태우의 '보통사람'이 다른 어떤 강한 단어보다 대중의 폐부를 찌르는 단어로 작용하여 노태우쪽에 유리한 영향을 주었고 결국 당선까지 되며, 이는 역대 대선 슬로건 중 일반인들이 가장 많이 기억하는 대표 슬로건으로 꼽힐 정도가 되었다. 보통사람처럼 '사람'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슬로건과 캐치프레이즈가 어떤 슬로건들보다 대중들에게 엄청난 임팩트를 준다는 것을 확고히 보여준 사례.[19][20][21] 후에 개그맨들이 코미디프로그램에서 "나 이 사람, 보통사람입니다. 믿어주세요"라며 노태우 특유의 경상도 억양섞인 말투를 흉내내며[22][23] 대중들의 기억에도 오래 남게 된다. 주변에 1987년 대선을 겪은 어르신들이 있으면 한번 물어보라. 다른 슬로건은 몰라도 "보통사람의 위대한 시대"라는 말은 거의 대부분 선명하게 기억할 것이다. 그만큼 대통령 선거사에서 길이 남을만한 명 슬로건.
그리고 마침내 1971년 이후 처음 치러진 대통령 직선제에서 약 36%의 득표율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다만 당선의 주된 이유는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후보의 단일화가 실패하여 표가 분열돼 결국 어부지리로 당선된 것이다. 물론 민주화 열망이 가득했던 당시 비록 야권이 분열되었어도 충분히 정권교체는 가능했겠으나, 선거 막판에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등으로 안보 불안감이 조성되기도 했고, 또한 방송사들이 노태우에게 유리하게끔 편파보도를 했으며 전두환 정권 당시의 인권유린 실태의 상당수가 알려지지 않았던 것도 한 몫을 했다. 노태우의 최저 득표율 기록은 19대 대선까지도 깨지지 않았다.
참고로 경부고속철도, 새만금 간척, 서울 지하철 확충, 주거안정을 위한 신도시('주택 200만 호 프로젝트', 1기 신도시) 건설 등 오늘날까지 국가적 토목사업이자 개발공약 상당수가 노태우의 대선공약에서 처음 발표되었고, 실제로 임기 중에 추진되었다.

2. 대통령 시절


1988년 2월,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거행된 취임식에서
취임 선서를 하고 있는 노태우

"'''보통 사람들의 위대한 시대"'''

노태우 대통령 취임식의 취임사 제목[24]

당선 직후 치러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예상과 달리 민주정의당이 과반수 의석 확보에 미달하여 여소야대 국회가 이루어졌고 지난해 6월 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의 여운이 그대로 살아있었기에 엄청난 정치적 압박을 받게 된다. 이에 '''쿠데타'''의 주도자인 '''하나회'''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5공 청산론'''을 받아들여 전두환 정권의 핵심인사들을 대거 정리하고, 전두환과 이순자의 친인척들을 비리 혐의로 구속시킨다. 또한 전두환 정권에 비해 상대적이긴 하지만 군출신 인물들을 민간인으로 대체했다. 정권 말기가 될수록 본인이 졸업한 경북고등학교 출신을 권력 전면과 핵심에 고루 포진시켰다.
6.29 선언에 이어 또 한번 재야인사들에 대한 복권과 해금을 단행했다. 그리고 '''정치인에 대한 풍자의 자유'''를 적극적으로 허용하였다.[25] 또한 정기적으로 김대중을 비롯한 주요 야당 총재들을 만나 의견을 교환하면서 국정에 이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통합행보'''로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도 하였다.
사회적으로는 '''범죄와의 전쟁''' 선포가 널리 알려져 있다. 1990년 10월 13일 대통령 선언 형식으로 발표된 이 정책으로 인해 당시 사회적으로 기승을 부리던 각종 강력.조직범죄는 철퇴를 맞았다.[26] 민주화 운동, 노동 운동 탄압을 포장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는 비판도 있지만, 범죄와의 전쟁 선포 이후에 실제적으로 강력범죄 발생율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무엇보다 한국에서 조직폭력 범죄가 거의 뿌리가 뽑혔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노태우의 업적이다.[27]
냉전이 끝나는 세계적 분위기에 민첩하게 대처하여 1988년 7.7 선언으로 대북비난방송을 중단하는 등, 북한에 유화적인 정책을 폈고, 91년 12월 남북기본합의서를 발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세간에서는 모처럼 대통령 별명(물태우)을 한 껏 말하며 농담 소재로 삼았지만, 노태우 정부의 대북 및 외교분야의 업적은 2010년대까지 유지되고 있는 불곰사업, '''노태우 정부 이후 모든 대북 정책의 기초를 이루는''' 남북기본합의서[28], 또한 동구 공산권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수립한[29] 북방외교(= 북방정책)까지 눈부신 데가 있었다. '''1988 서울 올림픽'''도 전에 불참하던 공산권 국가들이 모두 참여하는 성공을 거두며 Korea의 이름을 널리 알리기도 하였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을 불법으로 규정해 탄압해 이와 관련한 수많은 시위가 일어났지만, 전교조 사태의 후속 조치로 교원 대우 향상을 약속, 교사들 봉급이 이 때부터 인상되어 생계걱정 없는 매우 안정된 직장으로 탈바꿈하는 계기가 된 측면도 있다.
여소야대 국회의 압박을 버티지 못하고 여대야소의 정계개편을 시도하는데 첫번째 접촉한 대상은 놀랍게도 당시 제1야당이던 김대중평화민주당이었다. 그러나 김대중 총재가 이를 거절하자 1990년 1월에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의 '''3당 합당'''을 성사시켰다. 현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민주자유당'''을 창당, 초대 총재에 추대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이 당시 3당합당에 반발하여 대학가에서 수많은 시위가 있었는데 노태우 정권은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을 일으켜 모든것을 덮으려 하였다.
같은 해 10월 4일 '''국군보안사령부 민간인 사찰 폭로 사건'''이 발생해 국군보안사령부가 '''국군기무사령부'''로 바뀌고 역할이 축소되었다. 그후 며칠 지나지 않아서 민생치안 확립을 위해 10월 13일 범죄와의 전쟁을 선언하였는데, 시기가 미묘해서 정국전환용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노태우는 대통령 후보시절 작전권 환수를 공약하고, 다음 정권 때 평시작전권을 환수받게 된다. 1991년에는 '''한반도 비핵화를 공식 선언하고 UN에 북한과 동시 가입'''하였다. 31년만에 지방의회를 뽑는 1991년 지방선거가 다시 열렸다. 기초의원 선거에서 투표율 저조로 여유있게 압승하였고 광역의원 선거에서 민자당 내 혼란으로 인한 지지율 저조와 학생운동진영에서 개혁후퇴에 대한 항의 차원에서 연쇄분신을 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선거운동기간 초기까지만 해도 민자당이 수도권에서 참패할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지만 정원식 총리 밀가루 투척사건으로 막판에 역전하는데 성공을 거두며 민주자유당이 압승을 거두며 저항은 무력화 되었다.
그러나 민자당 내의 당권다툼에 따른 혼란은 여전하였고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공천과정에서 다수 공천탈당자가 통일국민당이나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일이 벌어졌고, '''국가안전기획부'''에서 서울특별시 강남구 을 선거구[30]에서 흑색선전물을 살포하다 4명이 적발된다. 또 군 부재자투표 부정 폭로 사건이 발생하여 선거 막판에 야권지지층이 결집하였고, 야당에 그리 우호적이지 않은 무당파층 상당수가 무소속 후보와 통일국민당으로 이탈하면서 결국 민주자유당은 과반에 1석 모자라는 149석을 얻는다. 한때 200석이 넘는 정당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참패한 셈.
이 선거로 노태우 정권의 레임덕은 가속화 되고, 노태우는 8월 민주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9월에는 민주자유당을 탈당한다. 하지만 당시 총선패배는 오히려 당 대표였던 김영삼 대표에 대한 민정계의 불신론을 키운 것이지 노태우 대통령의 기반이 흔들린 것은 아니다. 노태우에게 탈당하라고 요구한 사람도 없었고 당시 92년 대선을 관권선거 없이 중립적으로 치루기 위해서 개각을 해야 한다는 야당과 시민사회의 요구가 거세게 일면서 노태우는 개각을 단행하고 여기에 더해서 민자당을 탈당하겠다고 한 것이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탈당주장은 전혀 없었던 것인데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김대중 역시도 이러한 결단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재임기간 중에 딸 노소영을 선경그룹 회장 최종현의 장남 최태원과 결혼시켰다. 여기서 끝나면 그럴 수도 있는데, 이 결혼 이후 제 2 이동통신 사업자로 선경이 선정된다. 대선 준비하던 김영삼 등의 반발에 밀려 선경은 사업권을 반납하였지만, 김영삼 정권 시기에 한국이동통신을 선경에 매각해서 SK텔레콤이 된다.

3. 퇴임 후



3.1. 5.18에 대한 망언


[image]
1995년 10월 5일, 서울신라호텔에서 열린 경북고등학교 동창회 모임에서 노태우는 '''문화혁명 때 수천만명이 희생당하고 엄청난 걸로 말하자면 우리 광주사태는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발언으로 여론의 거센 비판을 받았다. 비판이 거세지자 '''처음에는 그런 얘기한 기억이 나지 않았으나 나중에 녹음 테이프를 들어보니 자신이 그런 얘기를 했었는가'''라며 '''어떻게 그런 얘기가 나올 수 있었는지 스스로도 놀랐다'''고 변명했지만, 도리어 빈축만 샀을 뿐이었다.노태우씨, 광주사태는 중국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라 망언광주사태 별 것 아니다” 노태우 전대통령, 한겨레 신문광주사태 별 것 아니다” 노태우 전대통령 충격발언 요지, 한겨레 신문
[image]
광주 피해자들에게 참으로 미안
이후 2019년, 노태우의 건강이 나빠지면서 아들 노재헌이 대신 5.18 국립묘지에 방문해 사죄했다.

3.2. 1995년 노태우 비자금 사건


항목 참조.

3.3. 징역형 및 전직대통령 예우 박탈


1995년 검찰에 구속,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이는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 구속 사건의 시작이었다. 정확한 죄목은 반란수괴·반란모의참여·반란중요임무종사·불법진퇴·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상관살해·상관살해미수·초병살해·내란수괴·내란모의참여·내란중요임무종사·내란목적살인·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 로 인한 재판이었다.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과 장태완 수경사령관 등 22명의 고발하였으나 법원은 "성공한 쿠데타(내란)를 처벌할 수 없다"라며 공소권 없음을 내세워 방어를 했다. 그러나 이후 3건의 헌법 소원으로 헌법재판소는 1995. 12. 15. 95헌마221등 에서 성공한 내란이라도 처벌 할 수 있음을 판시하였고, 이 후 국회에서 5.18 특별법이 제정되어 시효문제를 해결하였다.
이듬해부터는 전두환 등 신군부 인사들과 함께 과거 12.12 사태, 5.18 광주항쟁 유혈 진압 및 학살 등에 대해서도 재판을 받아 1심에서는 징역 22년 6개월을 선고받고 이후 항소심에서는 징역 17년으로 감형되었으며, 결국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징역 17년과 추징금 2,628억원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해 말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3후보 모두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 복권을 공약으로 내세웠다.[31] 결국 15대 대통령 선거 이틀후인 12월 20일 김영삼 정부에 의해 사면복권되었다.[32] 이로 인해 전직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에 의거해 전두환, 노태우는 기본적인 경호 이외의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박탈당했다.

3.4. 사면 이후


[image]
병원으로 이송 중인 노태우(2013년[33])
2002년에 전립선암을 앓아서 수술을 받은 뒤부터 건강이 매우 나빠졌다. 그 때문에 언론이나 공식 석상에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상태다.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주최한 전직대통령 만찬회에 초청받은 것이 매스컴에서 드러낸 마지막 모습이다. 공식 석상에서 얼굴을 노출한 것도 2007년 6월에 열린 6.29 선언 20주년 기념식에서 지팡이를 짚고 나온 것이 마지막이다. 어느 날부터인가 소뇌 위축증과 암이 재발하여, 자택에서 요양을 받는 중이라고 전해진다. 위 사진을 봐도 알듯이 모습을 철통같이 감추고 있으며, 병원에 들어갈 때도 가명을 쓸 정도였다. 아직도 나이가 90임에도 불구하고 건강하여 매스컴에 활발한 모습을 보이고있는 전두환과는 대조적.
석방 당시에도 추징금에 대해서는 사면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전두환과는 달리 추징금 납부를 매우 성실히 한 편이다.[34] 1997년 대법원 확정 판결이 있은 직후 추징금의 90%가량을 납부하였고, 2013년 말까지 분납해서 추징금을 '''완납'''하였다.[35] 이 때문에 일부 호사가들은 아직 몸이 건강하고 대외 활동이 잦은 전두환과 비교하며 '과연 욕 먹으면 오래 산다'라는 말을 꺼내기도 한다.
2020년 1월 1일 갑자기 상태가 위중해져 병원에 입원했다. 측근에 의하면 위독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고령인 탓에 입원 처치를 했다고 한다. 여전히 거동 및 의사소통은 전혀 못하면서 듣는것과 보는것만 할수 있는 수준이다.
[1] 무려 키가 '''188cm'''이였다고. 그래서인지 노태우도 고령인데도 신장이 175cm다. 지금도 175cm면 성인 남성의 평균 신장을 웃도는 수준인데, 노태우가 한창 태어났을 때면 평균보다 최소 10cm는 큰 키다. 사실 아버지키가 188인데 아들 키가 175면 아버지 키에 비해 아들 키가 많이 작긴 하다.[2] 사실 제대로 된 불교사찰이라면, 신도들에게 기도보다는 참선과 계율의 합리적인 준수를 더 강조하며, 108배와 호흡관찰법을 중점적으로 가르쳐준다. 기도로 복을 빌며 의지하는 '''기복적(祈福的)인 모습보다는, 108배로 하체를 든든하게''' 하고, '''호흡'''하는 본인의 모습과 마음상태를 주의깊게 '''관찰'''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는 취지.[3] 문구점 운영으로 살림이 비교적 넉넉했으며, 어린 노태우를 돌봐주었다고 한다.[4] 아래 어린이날 영상에 따르면 소학교 시절 반에서 1~5등을 했다고 한다.[5] 공교롭게도 전두환도 이 학교 출신이다.[6] 이맹희 회장의 회고록 <묻어둔 이야기>에도, 대구공고에서 편입한 동기생 노태우가 정호용, 김윤환, 김복동과 더불어 학과 성적이 우수했다는 일화가 실려있다.[7] 출처: 노태우 저, 노태우 회고록 1권 中[8] 다만, 선후배들을 확실하게 챙겨준 전임자에 비해, 이런 인사 측면에서 다소 손색이 있었기 때문에 95년 노 씨의 구속 당시 서운해 하는 후배의 인터뷰조선일보에 실리기도 하였다.[9] 이 무렵의 육군사관학교는 한 번 방이 배치되면 큰 사유 없이는 배정이 바뀌지 않아, 같은 방 식구끼리 미운정 고운정 주고받으며 매우 돈독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군사 반란을 일으킨 그룹도 살펴보면 기숙사 방을 같이 쓰면서 인연이 닿은 경우다.[10] 전두환은 갑종장교를 지원했다가 탈락하고 시간을 낭비하다 뒤늦게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11] 어느 대령의 회고에 따르면, 전두환이 여단장을 맡은 공수특전여단에서는 실제로 주먹을 주고받으면서 훈련할 것을 지시받아 정기적으로 간부부터 말단 병사까지 치고받으면서 무술을 익혔다고 한다.[12] 1955년에 임관했으며 그의 군생활의 시작은 제5보병사단 27연대 3대대 11중대 3소대장이었다. 여담으로 현재는 5사단이 철원에 있지만 당시엔 양평에 있었다.[13] 이 부대는 육군기무사령부, 국군보안사령부를 거쳐 1991년 국군기무사령부로 개칭되고 노태우는 훗날 이 부대의 사령관이 된다.[14] 출처 : 노태우, 노태우 회고록, 조선일보사. http://www.yes24.com/24/goods/5498171, 밀리터리 계에서 유명한 9공수여단 출신 잇빨중사도 이에 대해 기록한 적이 있다.[15] 이 일화는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도 나온 바 있다.[16] 대통령을 사실상 거저(...) 먹으려다가 경쟁을 치러야 했으니 처음에는 거세게 반발하였다고 한다.[17] 하나회 부두목 출신이라는 이미지를 씻으려고 내건 슬로건이다.[18] 공교롭게도 노태우의 실제 성격이 잘 반영되어있는 슬로건이다.[19] 단순하게 노태우가 당선됐기 때문에 기억한다고 오해할 가능성이 있으나, 눈을 감고 87년 이후 대선에서 당선자나 낙선자들의 슬로건을 정확히 기억해보자. 대부분 대선 시에 일어났던 사건이나, 선거홍보광고 등을 더 많이 기억하지, 슬로건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보통사람' 빼고 잘 기억나는 것이 별로 없다는것만 봐도 사람이라는 단어의 힘을 알 수 있다.[20] '보통사람'만큼 대중들의 기억에 오래 남는 임팩트를 줬던 슬로건은, 오히려 낙선자였던 18대 대선 문재인의 '사람이 먼저다' 밖에 없다. 이 경우 임팩트가 컸던 나머지, 오히려 당선됐던 19대 대통령 선거 과정 중에서도 지지자들마저 실제 슬로건인 '든든한 대통령'보다 '사람이 먼저다'를 더 많이 기억했고, 일반인들 중에는 지금도 19대 대선에서 '사람이 먼저다'를 계속 쓴 줄 아는 사람들도 생각보다 많이 있다. (대신 '사람이 먼저다'는 두산의 역대급 광고로 꼽히는 '사람이 미래다' 를 차용한 광고라서 참신성에서 '보통사람'보다 많이 부족하다.) 문재인 캠프 측도 '사람이 먼저다'가 워낙 대중 기억 속에 많이 남은 걸 알아서 두 번째 대선 슬로건 홍보 자체에 신경을 쓰지 않고 '적폐청산'이라는 구호 홍보에 더 신경을 썼다. (실제 19대 선거운동 중 일부는 확성기로 유세할때 즉흥적으로 "사람이 먼저인 나라만들 든든한 대통령! 기호 1번 문재인입니다!" 이런 식으로 사람이 먼저다를 섞어서 홍보를 하기도 했다.) 보통사람이나 사람이 먼저다는 모두 동시대 코미디 프로에서 패러디가 될만큼 응용하기 쉬운 매력도 있어서 더 일반인들의 기억에 쉽게 퍼지고 남았다. 그만큼 '사람'이 들어간 슬로건은 대중들에게 쉽게 퍼지고 다수의 기억에 오래 남는 효과가 있다. [21] '사람이 먼저다' 보다 훨씬 유명하고 임팩트 있었던 대선 슬로건이 있긴 했다. 손학규의 '저녁이 있는 삶' 그러나 손학규는 경선을 통과 해보질 못해서...[22] 10년이 넘게 지난 2000년대초에 개그맨 심현섭이 노태우와 전두환과의 대화를 패러디하며 "친구야"라는 유행어를 밀었지만, 90년대의 "보통사람" 패러디 개그만큼 오래가지 못했다.[23] 다른 예로, 1977년생인 허준(게임 캐스터)켠 김에 왕까지를 하다가 저 멘트를 비슷하게 써먹은 적이 있다. [24] 이 슬로건은 노태우 정부에서 청와대 공보수석을 지낸 김학준 교수가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5] MBC 코미디언 최병서가 우연히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MBC를 방문했던 노태우를 만나 성대모사를 선보이자, 노태우가 감탄하여 대통령을 코미디 대상으로 삼아도 좋다는 약속을 했다고 한다. 다만 최병서에 의하면 이후 방송에서 정치인 풍자 코미디를 할 때에도 안기부 등으로부터 약간의 압력을 받았다고도 한다.[26] https://news.v.daum.net/v/20161013065730522[27] 밀리터리 계에서 유명한 9공수여단 출신 잇빨중사님의 기록에 의하면, 노태우는 이미 9공수여단장 시절에 비슷한 일을 했었다고 한다!!! 유흥가에 깡패들이 설치면서 민폐 끼치는걸 직접 겪은 노태우 여단장은 이른바 부평지역 깡패 토벌 작전이라는걸 시작했다. 1개 지역대 규모 특전사 병력을 퇴근 후에 사복으로 갈아입혀 유흥가에 대기시키다가 깡패들 조직폭력배들과 시비가 붙으면 일제히 뛰어나와 초토화시키는 것이었다고(...)[28] 특히 김대중이 '''"남북문제 해결의 길은 이미 열려있다. '남북기본합의서'의 실천이 바로 그것이다"'''며 호평했는데, 나중에는 아예 실무책임자였던 임동원을 삼고초려 끝에 영입해, 국민의 정부 출범 후 대북정책 기조를 맡긴다.[29] 폴란드를 시작으로 소련중국, 베트남, 불가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헝가리등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와 수교를 맺거나 관계를 회복한다[30] 민주자유당 김만제, 민주당 홍사덕, 신정치개혁당 이신범 등이 출마[31] 위키백과 15대 대통령선거, 대선후보들의 전두환 노태우 사면공약 대결 논란[32] 전두환 노태우 사면 결정 정부[33] 그 이전에는 폐에서 한방용 침이 발견되는 등 각종 희한한 병까지 앓아야 했다.[34] 처음 불거질 때부터 수감생활, 추징금 납부 등 모든 면에서 전두환과는 정말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35] 되려 화제가 안 되고 관심이 뚝 끊긴 이유가 이것일지도...뭔 사고를 치거나 사망을 하지 않는 한 화젯거리에 오를 일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