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에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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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Freistaat Bayern /ˈfʀaɪ̯ˌʃtaːt ˈbaɪɐn/ 바이에른 자유주'''[1]
독일의 주(州). 주도는 뮌헨. 독일 동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가장 넓은 주이다'''. 하지만 인구는 2위(1250만 명)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가 500만 명 정도 더 많다.
영어로는 '''바바리아'''(Bavaria, /bəˈveəriə/). 참고로 바이에른 사람, 바이에른 방언, '바이에른의'란 의미의 형용사는 영어로 바바리안(Bavarian)이다.
주요 도시로는 뮌헨 외에도 뉘른베르크, 아우크스부르크, 로텐부르크, 레겐스부르크, 파사우 등의 도시가 있다.
독일에서 가장 잘사는 주로 꼽힌다. BMW, 아우디, MAN, 알리안츠, 지멘스, 오스람 등 독일 유수의 기업들의 본사가 뮌헨을 비롯한 바이에른주 도시들에 소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2차 대전 이후 베를린이나 구 동독 지역에 본사가 있던 회사들이 상대적으로 피해도 적었고 복구도 빨랐던 바이에른으로 대거 피난온 탓이지만.
유럽이나 미국 사람들은 "독일"이라고 하면 레더호젠(Lederhosen)을 입은 남자들과 디른들(Dirndl)을 입은 여자들이 맥주를 마시며 프레첼(바이에른에서는 브레첸Brezen)을 먹는 모습을 주로 떠올리는데, 사실 이 이미지는 바이에른주의 이미지에서 따온 것이다. 이 때문에 다른 지역 독일인들은 "그건 독일이 아니다!"라며 다른 나라 사람들의 이미지를 불식시키려 하지만 이미 너무 강하게 자리 잡은지라...[2] 바이에른 사람들은 자신들을 독일인이라기보다는 "바이에른 사람"으로 인식하고, 다른 독일인들 역시 바이에른 사람들을 독일인과는 다른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로 인식한다(오스트리아에 더 가깝다거나...). 인접한 오스트리아도 그렇듯, 이곳 사람들은 독일의 다른 지역보다 머리색깔이 짙다.
남자들이 입은 옷이 레더호젠, 여자들이 입은 옷이 디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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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에는 바덴-뷔르템베르크주, 서북쪽에 헤센주, 북쪽에 튀링겐주, 동북쪽에 작센주, 동쪽에 체코, 동남쪽과 남쪽에 오스트리아, 서남쪽에 스위스와 접한다. 직접 닿아있진 않지만 리히텐슈타인과도 가까운 편이며, 오스트리아를 통해 알프스 산맥을 넘으면 이탈리아가 나온다.
오스트리아 티롤주의 경계 부근에 2963m의 독일 최고봉 추크슈피체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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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기원전 바이에른 지방에 처음 정착한 주민들은 켈트족들로 그들은 기원전 마지막 10년 동안 북쪽의 튜턴족과 남쪽의 로마인들 사이에서 압박을 받았다. 로마 제국은 이 지방을 정복해 남부지역을 라에티아와 노리쿰으로 나누었고, 북쪽 경계를 따라 요새들을 건설해 튜턴족의 남침을 막았다. 아우크스부르크, 켐프텐, 레겐스부르크, 파사우 등의 번영하는 로마 식민지들이 남부에서 생겨났다.
5세기경 훈족으로부터 압박을 받은 게르만족들이 대이동하여 로마제국 영토를 침공하는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발생했고 이는 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이어진다. 게르만족의 대이동의 물결 속에서 바이에른 땅에도 488~520년 동쪽과 북쪽으로부터 게르만족의 일파인 바이에른족(바바리아족)이 들어와 원거주민인 켈트족, 로마인들과 뒤섞여 정착했다. 바이에른족은 지명의 어원이 되었다.
555경~788년 프랑크족의 아길롤핑 공작 가문의 통치를 받았다. 이 시기는 '''바이에른 공작령(Herzogtum Bayern)'''이라 불린다. 그 사이인 7~8세기에 이곳은 성 보니파시오, 성 코르비니언, 성 엠머람, 성 루퍼트 등과 같은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수도자들에 의해 그리스도교화되었다.
788년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는 아길롤핑가의 공작 타실로 3세를 폐위시키고 바이에른 공작령을 프랑크 왕국(카롤링거 제국)에 합병시켰다.
카롤루스 대제 사후 817년 프랑크 왕국은 분할되었으며, 바이에른 공작령은 루도비쿠스 1세의 차지가 되어 동프랑크 왕국에 속하게 된다.
이후 동프랑크 왕국은 919년 독일 왕국으로 변모했으며, 바이에른 공국은 독일 왕국을 구성하는 5대 부족 공국(Stem duchy) 중 하나가 되었다('''바이에른 부족 공국'''). 독일 왕국 시대에 접어들면서 각 5대 부족 공국의 독립성이 더욱 강화된다.
962년 독일 왕국의 오토 1세가 마침내 교황의 대관을 받아 신성 로마 제국이 세워졌다. 그러나 바이에른 공국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대립하는 세력의 중심에 있었다. 얼마 후 황제의 견제와 내부 분열이 겹치면서 976년 오스트리아 변경백국, 케른텐 공국이 바이에른 공국에서 분리되어 나간다. 분리된 2개의 공국은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습령으로 통합되어 합스부르크 제국을 거쳐 오늘날 오스트리아 공화국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바이에른과 오스트리아는 문화적으로 매우 유사한 배경을 지니게 되었다.
1180년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황제가 정적인 벨프 가문의 하인리히 사자공으로부터 바이에른 영지를 몰수한 후 팔츠 백작이었던 비텔스바흐 가문(Wittelsbach)의 오토에게 증여하여 바이에른 공국의 오토 1세가 되었다. 이로서 유서깊은 바이에른의 비텔스바흐 왕가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현재의 바이에른 남동부 지방만을 비텔스바흐 가문이 소유했고, 나머지는 수많은 제국도시, 수도원 보유지, 기타 가문 소유지들로 조각나 있었다. 14~15세기에 비텔스바흐가 공작들의 세력은 계속되는 집안 싸움으로 약화되었고, 중간에 루트비히 4세가 등장해 이 지역을 통합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선제후직을 그대로 팔츠계 비텔스바흐 가문에게 양도해야 했으며, 그의 사망으로 인해 영토 역시 아들들에 의해 분할되어 14세기 말에는 비텔스바흐가의 여러 분가가 바이에른을 3개의 공작령으로 분할했다.
1506년 바이에른-뮌헨의 현명공 알베르트 4세가 장자 상속 원칙을 세움으로써 영토의 통합이 시작되었다. 또한 알베르트는 뮌헨을 공작령의 수도로 삼았다. 1517년 루터의 95조 반박문으로 종교개혁 및 종교전쟁이 발생하자 알베르트 4세는 가톨릭 수호의 입장을 취하고 합스부르크가의 오스트리아와 함께 반종교개혁 세력(안할트 동맹)의 중심이 된다.
1545년 알베르트의 아들 빌헬름 4세는 마침내 이곳을 하나의 공작령으로 재통합할 수 있었다. 빌헬름 4세 역시 종교개혁을 반대했고, 그의 후계자인 알베르트 5세를 거치며 바이에른은 엄격한 로마 가톨릭령으로 남게 되었다.
30년 전쟁(1618년~1648년) 때 막시밀리안 1세는 합스부르크가의 편에서 싸웠다. 그의 지도력으로 바이에른 공국은 영토를 확장했다. 1623년 막시밀리안 1세는 선제후가 되는 특권을 얻었고 바이에른 공국은 '''바이에른 선제후국'''이 되었다.
그러다가 18세기에 들어와 바이에른은 스페인과 오스트리아의 왕위 계승 전쟁들로 인해 줄곧 유린되었다.
1777년 바이에른의 지배권은 분가였던 팔츠의 선제후 카를 테오도르에게 넘어갔다. 이렇게 해서 바이에른과 팔츠는 통합되었다. 바이에른 계승전쟁(1778~79)에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바이에른의 대부분 지방에 대해 권리를 주장하며 합병하려는 오스트리아를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프랑스 혁명기에 접어들자 바이에른은 프랑스 혁명에 맞선 제1·2차 반프랑스 연합에 가담했다. 그러나 1796년엔 프랑스 혁명군에, 1799년에는 오스트리아에, 다시 1800년에는 프랑스에 잇따라 점령당하는 고통을 겪었다. 다음해에 바이에른은 프랑스의 동맹국이 되어 오스트리아를 희생시키며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고, 1805년 프레스부르크 조약에 따라 거의 현재의 경계대로 영토를 얻었다. 이 조약으로 바이에른 선제후국은 '''바이에른 왕국'''으로 격상되었고, 통치자인 선제후 막시밀리안 4세 요제프는 바이에른 국왕 막시밀리안 1세가 되었다.
그러나 바이에른은 나폴레옹 전쟁 후기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 직전에 나폴레옹을 버렸고, 1815년에는 나폴레옹에 대항해 신성 동맹에 가담했다. 이렇게 시기적절하게 진영을 바꿈으로써 바이에른은 빈 회의(1814~15) 후에도 이미 취득한 영토의 대부분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게 되어, 독일 연방 내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 이어 3번째로 큰 국가가 되었다.
나폴레옹 전쟁이 종식되고 빈 체제가 들어선 후 막시밀리안 1세의 계속된 치세하에서 1818~19년에는 바이에른 최초의 헌법과 의회가 발족했다. 막시밀리안의 아들인 루트비히 1세 아래에서 지방자치제와 다른 개혁들이 취해졌다. 그러나 아일랜드의 여류 모험가인 롤라 몬테즈와 열애에 빠져 왕위를 지킬 수 없게 되자 루트비히는 결국 1848년 퇴위했다.
1850년 루트비히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막시밀리안 2세는 작센, 하노버, 뷔르템베르크 등과 동맹을 맺었다. 이들의 목적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 대항하는 제3세력으로서 독일 내에 중간 크기의 나라들을 건설하는 것이었고, 바이에른은 이들 가운데 가장 큰 나라였다. 바이에른은 그후 프로이센에 반대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지지했다. 남독일연방...
막시밀리안의 후계자인 루트비히 2세는 바이에른을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독일령으로 합치자는 프로이센의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제안을 거절하고, 1866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간의 보오전쟁에서 오스트리아 편에 섰다. 그러나 프로이센 측의 조속한 승리와 바이에른에 대한 그들의 온건한 정책으로 바이에른은 1870년 보불전쟁 때에는 프로이센 편이 되었으며, 그 후 프로이센 왕 빌헬름 1세의 주도하에 독일 제국을 수립할 때 도움을 주었다.
1871년 바이에른 왕국은 독일 제국에 가맹했으며 제정된 독일 헌법하에서 바이에른은 독일 제국의 다른 어떤 구성국보다도 큰 독자성을 얻었다. 외교활동, 군사행정, 우편·전신 업무, 철도 등에서 자치권을 보유했으며 제국 내에서 프로이센에 이어 제2위의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루트비히 2세는 정신불안 증세를 나타내기 시작했고, 특히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건설하는 것과 같은 그의 과도한 건설사업들은 바이에른의 국고를 바닥냈다.
1886년 루트비히 2세는 정신이상자로 공포되었고, 왕위는 그의 동생인 오토에게 넘어갔지만 오토 역시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 오토의 삼촌 루이트폴트가 같은 해에 섭정이 되었고, 1912년 루이트폴트가 죽자 그의 아들 루트비히 3세가 왕이 되었다.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독립 사회주의자인 쿠르트 아이스너가 비텔스바흐 왕조를 무너뜨리고 바이에른을 공화국으로 선포했다. 하지만 1919년 아이스너는 암살되었고, 잇따른 혼란 속에서 혁명위원회들이 '적색 테러'를 자행하고 단명한 소비에트 공화국을 구성했다. 이 공화국은 1919년 5월 독일의 육군부대들과 민방위대들이 뮌헨을 탈환하고, 공산주의자들에게 마찬가지로 무자비한 '백색 테러'를 가하면서 끝장이 났다.
1919년 8월에 통과된 새로운 바이에른 헌법에 따라 바이에른은 전후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의 자유주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바이에른의 정국은 여전히 혼란한 상태였고, 1920, 1921년에는 우익 쿠데타가 있었으나 실패했다. 아돌프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운동이 뮌헨에서 시작되었고, 아돌프 히틀러가 뮌헨의 맥주홀에서 쿠데타를 일으키려다 실패하였다.(뮌헨 폭동) 실패 이후 바이에른에서의 나치 당세는 급락하여[3] 1933년 이전까지는 바이에른 인민당에 밀려 바이에른의 주도권을 잡지는 못한다.
이후 1933년 나치당이 권력을 잡자 독일의 모든 주들 가운데서 가장 보수적이던 바이에른은 나치즘의 요새가 되었다. 특히 프랑켄 지역과 뉘른베르크는 바이에른 타 지역에 비해 나치세가 강했다. 가톨릭이 나치에 긍정적이지 않았으나 히틀러에게 가톨릭이 협력했다고 하면 독일 내에서는 백발백중 바이에른(...)[4] 그런 주제에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당시 독일의 다른 주들에 비해 연합국의 폭격을 많이 받지 않았다(...)
전후 바이에른은 미국 점령지역의 일부가 되었고, 프랑스 점령지역인 팔츠는 분리되어 새로 창설된 라인란트팔츠 주에 편입되었다. 1948년의 서독 기본법에 따라 바이에른은 독일연방공화국의 한 주가 되었다. 수도 베를린이 두동강이 난데다 공산주의 동독 영토인 브란덴부르크 주가 둘러싼 바람에 수도 기능이 반 고자가 되어서 여러 대기업 본사들이 바이에른으로 이전해 전후 큰 경제적 발전을 이룬다. 할양이라는 것이 인접국이 있어야 쪼개주고 하는 것인데 바이에른의 인접국은 '''체코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아무리 전후 조치라도 연합군이 양심에 찔리거나 기겁을 할 만한 지역이다(...).
설명했듯이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바이에른 영토는 팔츠 지방(현재 라인란트팔츠州 남부)도 포함하고 있었다. 1920년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의 월경지인 코부르크 지역을 흡수하였다.
3. 정치
독일에서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가장 보수적인 지역이다.[5] 독일에서 가톨릭 인구가 가장 많은 곳으로[6] 교황 베네딕토 16세도 여기에서 태어났다. 한편 개신교세는 19%이다.[7] 2018년에는 마르쿠스 죄더 주 총리가 "모든 공공건물에 십자가를 의무적으로 부착하라"는 조례를 발표했다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기사.
바이에른 지역 정당 바이에른 기독교사회연합(기사련, Christlich-Soziale Union)의 본거지 격으로, 2차 대전 이후 단 한 차례 주 총리를 사민당에 내준 것을 제외하곤 주 선거에서 모두 승리했다.[8] 기사련(CSU)은 오직 바이에른에만 존재하는 지역정당으로, 바이에른 이외 지역에서는 기독교민주연합(CDU)과 협력하고 있다. 기민련(CDU)은 바이에른주의 지역적 특수성을 인정해서 따로 후보를 내지 않고, 기사련을 지지한다. 연방 의회에선 두 당이 연대하여 CDU/CSU라는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한다.
세부적인 지역구로 들어가면 대도시권인 뮌헨이나 뉘른베르크 등은 사민당 지지율이 좀 더 높으며, 시장도 사민당 소속이 더 많이 당선되었다.
한편, 바이에른은 1999년까지 독일의 16개 주 중에서 유일하게 양원제 의회를 가지고 있었다. 이 때는 하원을 Landtag(주의회), 상원을 Senat(원로원)이라 했다. 독일 연방의회처럼 공식적으로 양원은 별개의 기관이었으며, 이 당시 상원은 전 세계적으로도 드물게 아일랜드 상원과 비슷한 직능선거구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필요하다는 비판이 제기되어 1999년에 주 헌법을 개정해 단원제로 전환하여 당시의 하원(Landtag)만이 현재의 단원제 주의회로 남아 있다.
2018년 주 총선에서는 기사련이 과반의석을 확보하지 못하고(41.5%) 겨우 제1당 지위를 유지했다. 그 와중에 전통의 맞수인 사민당도 추락하여 대신 동맹 90/녹색당이 의석을 더 확보했고, 극우 독일을 위한 대안이 사민당과 같은 수의 의석을 확보해 비상이 걸렸다. 결국 기사련과 중도~중도우파 정당인 자유 유권자(Freie Wähler, FW)[9] 와 연립 정부를 구성하였다.
여담으로 기사련의 활동영역인 바이에른이지만 뷔르츠부르크의 크리스티안 슈하르트 시장은 예외적으로 기민련 소속이다. 슈하르트 시장은 기사련과 자민당이 공동으로 시장 후보로 추천했기에 이런 일이 가능했다.
4. 특색
텔레비전에서 독일 국가(國歌)보다 바이에른 주가(州歌)를 먼저 연주할 정도로 지역색이 강하다.
다른 독일 지방에도 각 지역 언어가 존재하듯이, 바이에른에는 바이에른어(오스트로바이에른어, "바이에리슈" 혹은 "바이리슈")[10] 라는 지역 언어가 따로 존재하는데, 다른 지역에서 오는 사람들은 바이에른어를 알아 듣지 못해 별도의 사전을 구매하기도 한다. 바이에른어는 독일의 표준 독일어보다는 오스트리아 독일어에 가깝다. 바이에른 사람들에게 오스트로바이에른어를 "사투리(Dialekt)"라고 하면 기분 나빠하며 "지역 언어(Lokale Sprache)"라고 강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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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어 사용 지역[11] 은 바이에른 대부분 지역과(프랑켄 지역 제외) 작센 주 남부 극히 일부 지역, 오스트리아 대부분 지역, 스위스 동부 일부 지역, 이탈리아 쥐트티롤 지역, 그리고 독일계 주민이 모여 사는 헝가리 외덴부르크(헝가리어로는 쇼프론)과 체코 뵈머발트(체코어로 슈마바) 지역에 분포해있다.
이 때문에 바이에른 사람들은 스스로를 독일인이라기보다는 바이에른 사람으로 여기고, 다른 지역 독일인들 역시 바이에른 사람들을 독일인이 아닌 누군가(...)로 인식한다.
독일 내에서도 그렇지만 유럽 내에서도 손꼽히게 잘 사는 지역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잘 사는 지역은 아니고, 2차세계 대전 후 독일이 분할되면서 동독에 있던 기업들이 주로 바이에른으로 이전했기 때문에 발생한 이니셔티브다. 뮌헨 같은 대도시 빼면 2차 세계 대전 전까지 독일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 중 하나였다. 괜히 나치의 열렬한 지지 지역이 됐던 게 아니다. 반면 수도 베를린을 둘러싸고 있던 구 동독 지역은 산업이 발전했고, 큰 기업도 많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한 후 폴란드, 체코로 할양된 동쪽 영토에 살고 있던 많은 독일인들과 기업들이 국경 지대에 있고 땅도 넓고 지가도 싼 바이에른으로 대거 이주, 이전해왔고, 소련이 관할하게 된 동독에서도 많이 넘어 왔다. 바이에른에는 이때 동쪽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에 의해 아예 새로 건설되다시피한 도시나 마을이 많다.
바이에른의 졸른호펜(Solnhofen) 지역은 쥐라기의 동물 화석으로 유명하며 그 유명한 아르카이옵테릭스와 콤프소그나투스의 첫 화석도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게다가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화석들은 보존률이 뛰어나서 왠만한 연조직(깃털이나 날개막 등)이 화석으로 남아있기도 하다. 또한 1400만 년 전에 운석이 충돌해 생긴 지금 24km짜리 크레이터, 리스(Ries)분지도 바이에른 지역에 있으며 그 분지 한가운데에 위치한 중세도시 뇌르틀링겐에 리스 분지 박물관이 소재해있다. 방문하면 NASA가 기증한 월석도 구경할 수 있다.
지역방송인 BR은 교향악단과 독일판 방통대라 할 수 있는 'Telekolleg'를 운영하고 있다.
4.1. 프랑켄 지역과의 지역감정
프랑켄 지역은 바이에른 북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프랭키쉬(Fränkisch)라는 별도의 지역언어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바이에른과는 매우 다른 지역색을 가지고 있다. 프랑켄 지방 대부분은 바이에른주에 속하기는 하지만 바덴-뷔르템베르크와 헤센, 튀링엔 등 인접 주에도 걸쳐있다. 지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다뉴브강(도나우)의 수계인 바이에른 지역과 달리 프랑켄 지역 대부분[12] 은 라인강의 지류인 마인강 수계에 형성된 지역이다.
역사적으로 프랑켄은 본래 바이에른의 일부가 아니었다가 나폴레옹 전쟁 이후 나폴레옹에 협력한 바이에른 공국이 나폴레옹으로부터 프랑켄 지방을 할양 받으면서 바이에른 왕국으로 거듭나게 되었고, 그 이후 바이에른 내 2등 지역처럼 취급 받으면서 지금까지도 지역감정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현재 바이에른은 독일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부유한 지역으로 꼽히는데, 프랑켄은 그 혜택을 그만큼 보지 못했다는 데에 대한 감정도 있다. 결정적으로 이 지역은 바이에른이 그렇게도 증오하는 구 프로이센 왕가(호엔촐레른-안스바흐 왕가)의 근거지이다[13] . 종교적으로도 개신교세가 강한 지역이다.
이 때문에 뉘른베르크를 포함한 프랑켄 지방의 도시들로 가면 하늘색과 하얀색의 바이에른주 색깔은 거의 보이지 않고, 빨간색과 하얀색의 프랑켄 지방 색깔을 훨씬 많이 볼 수 있다.
4.2.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와의 지역감정
같은 남부인 바덴뷔르템베르크와 지역감정이 있다. 그 이유가 정치적인 문제와 연관되어있는 한국과는 다르게 종교적인 문제.[14] 바이에른은 종교개혁시기에도 개신교도들을 탄압하며 가톨릭을 유지한 골수 가톨릭 제후가 지배한 지역이였고[15] , 지역도시 잉골슈타트는 예수회와 가톨릭 종교개혁의 독일 내 최대거점이라 불렸을 정도로 가톨릭색채가 강한 지역이다. 그에 반해 뷔르템베르크 지역은 종교개혁 초기부터 일찌감치 개종하여 신교도 루터파의 남독일 최대의 거점이었으며, 제후 역시 종교개혁 당시 가톨릭 카를 5세의 대리인 로마왕 페르디난트 1세에 저항하다가 털려서 영지가 몰수 되었다가 헤센 방백의 도움으로 다시 찾는등 16세기부터 20세기 초 독일제국 해체의 순간까지 루터파를 완강히 신봉한 신교도 제후였으며,[16] 신성로마제국 해체 이후엔 작센과 함께 바이에른과 뷔르템베르크 제후도 동시에 왕 작위를 받았을 정도로 남독일에선 수위를 다투는 큰 세력들이었다. 이런 문제로 양 지역은 지금도 라이벌적인 감정과 함께 종교분포도 등에서 꽤나 차이를 보인다.[17] 뮌헨과 슈투트가르트는 양 지방의 대표도시임과 동시에 남독일 최대의 공업도시들이기도 하며 독일 세계유수의 자동차제조기업인 BMW가 뮌헨에 본사를 두고있는 반면, 역시 세계에서 수위를 다투는 자동차 기업인 벤츠는 슈투트가르트에 본사를 두고있다.
두 지역 사이에 알고이(Allgäu)라는 지역이 있는데, 두 주에 치여 놀림감이 되는 곳. 정작 거기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알고이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아우크스부르크와 노이슈반슈타인 성이 이곳에 위치해 있으며 최근에는 물 끼얹어서 치료한다는(...) 바트 뵈리스호펜이란 마을이 알려지기도 했다.
4.3. 프로이센, 함부르크, 브레멘에 대한 지역감정
과거부터 대대로 바이에른은 프로이센에 라이벌 의식과 지역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현재까지도 그 후신인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과 베를린,[18] 거기에다 한자동맹 자유시인 함부르크와 브레멘에까지 적대적인 감정을 품고 있다. 그래서 축구경기에서도 바이에른 뮌헨 VS 베르더 브레멘과 바이에른 뮌헨 - 함부르크 SV 경기에서 강한 라이벌 의식이 드러난다.
바이에른은 본래 프로이센과 동등한 왕국이었으나, 1870년 독일 통일 과정에서 철저히 프로이센이 중심이 되고, 바이에른은 완전히 소외되었다. 통일 이전 바이에른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등과 함께 독일에서 가장 큰 연방국 중 하나였으며, 통일된 지역에서는 프로이센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왕국이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가 이끈 프로이센 주도 하에 독일 통일이 이루어지면서 새 독일 제국에서의 주도권은 프로이센, 함부르크와 브레멘 등 구 북독일 연방 세력, 거기서도 특히 인구, 면적과 경제규모에서 우월한 프로이센이 잡게 되었다. 새 독일 제국의 황제, 수상, 국기 등을 비롯한 여러 국가 제도들이 프로이센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제국 내에서 두 번째로 큰 왕국이었던 바이에른은 독일 통일 과정에서 프로이센과 대립각을 세웠기 때문에[19] 오히려 패전국에 가까운 취급을 받았다.[20]
역사적으로 바이에른의 비텔스바흐 왕가는 프로이센의 호엔촐레른 황실보다 유서깊다고 여겨서 바이에른 사람들은 이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프로이센과 한자동맹 자유시가 개신교인 반면 바이에른은 가톨릭 국가였고, 독일 제국에서 호엔촐레른 황실이 전국을 개신교 지역으로 만들려는 작업에 착수하며 가톨릭 지역을 압박한 것도 그 반감에 더 불을 지피기는 했지만. (다만 이 사안은 호엔촐레른 황실이 딱히 바이에른만 압박한 것은 아니어서, 프로이센 내부에서도 가톨릭이 무시못할 지분을 차지하던 라인란트, 베스트팔렌, 오버슐레지엔, 베스트프로이센, 포젠 등의 가톨릭 세력도 처지가 별다를 바 없기는 했다.)
심지어 1차대전에 대해서도 "프로이센이 멋대로 일으킨 전쟁에 바이에른이 이끌려갔다."라고 여길 정도였으며, 이는 프로이센의 중심지 베를린에서 유지되는 중앙 정부에 대한 반발심으로 이어졌다.
이 후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중도 좌파 성향의 바이마르 공화국이 세워지자, 강경 우익을 지원하여 나치의 발상지가 되었다.
상대적으로 내륙이라는 지리적 특성상 니더작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베를린, 브란덴부르크[21] 등이나 함부르크보다도 연합국의 폭격을 덜 맞아 그만큼 전쟁의 피해가 타 지역보다 덜했다. 전후복구 역시 전쟁 피해를 직접적으로 본 영국이 점령한 니더작센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소련이 점령한-그리고 반은 동독이 가져가고 반은 동독에 포위되어 고립된-베를린, 아예 소련이 전부 점령하고 폴란드에 절반이 털려나간데다 공산화까지 되어 뭘 어떻게 해볼 수도 없었던 브란덴부르크보다는 '''쇼미더머니를 쳐가며 전쟁물자를 지원하고도 여력이 충분한''' 미국이 점령한 바이에른 쪽이 전후복구도 훨씬 수월하고 빨랐다. 여기에 더해 베를린에서는 지멘스와 알리안츠의 본사가 바이에른으로 이전되고, 작센에서는 아우디 본사가 이전되며 바이에른은 어부지리를 누렸다.
한편 2차 대전 이후 서독에서 바이에른과 대비되는 북부지역 '대표' 이미지를 니더작센이 갖게 되었는데(산악지역과 대비되는 평지와 바닷가, 가톨릭과 대비되는 개신교 이미지 등) 실제로도 볼크스바겐의 본사가 하노버 근교인 볼프스부르크에 자리잡고 있다. 즉 동서독 분단 이후의 남북 지역감정 구도는 바이에른 VS 니더작센 이미지로 재편되었으며 흥미롭게도 사투리 역시 바이에른 사투리와 [22] 동프리슬란트 사투리[23] 가 자주 비교당하곤 한다.
5. 하위 행정구역
[image]
7개 현
- 뮌헨
- 아우크스부르크
- 린다우
- 뉘른베르크
- 잉골슈타트
- 뷔르츠부르크
- 다하우
- 레겐스부르크
- 로텐부르크
- 안스바흐
- 밤베르크
- 파사우
- 로젠하임
- 슈트라우빙
-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24]
- 란츠후트
- 켐프텐
- 메밍겐
- 호프
- 아샤펜부르크
- 코부르크
6. 관련 문서
- 바이에른 왕국
- 프랑켄 지역 - 바이에른과는 다른 정체성을 드러내는 바이에른 북부에 위치한 지역이자 前 왕국.
- 뉘른베르크 - 바이에른 제2의 도시이자, 프랑켄 지역의 심장부.
- 1.FC 뉘른베르크 - 뉘른베르크를 연고로 하는 프랑켄 지역 최고의 프로축구단이자 FC 바이에른 뮌헨의 지역 라이벌.
- 밤베르크
- 로텐부르크
- 프랑켄 요리
- 뉘른베르크 - 바이에른 제2의 도시이자, 프랑켄 지역의 심장부.
- 기독교사회연합 - 오직 바이에른에서만, 바이에른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정당.
- BMW - 바이에른 자동차 산업의 자존심.
- 아우디 - 독일 자동차 브랜드 서열 3위
- 아디다스 - 세계적인 스포츠 브랜드이자 나이키에 대항하는 독일인의 자존심.
- MAN - 독일의 상용차, 엔진, 기계 제조 업체.
- 바이에른급 전함
-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 바이엔슈테판
- 파울라너
- 아돌프 히틀러
[1] 사실상 독일 유일의 자유주이다. 바이에른을 지역기반으로 하는 CSU와 바이에른주 정부는 독일의 분할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독일 기본법(헌법)의 조인을 거부했고, 서독 유일의 자유주로 남았다. 뭐 말이 그렇다는 거고 실은 나머지 주들이 다 기본법에 찬성했기 때문에 기본법은 바이에른에서도 유효하다. 실제 권한에서 다른 주와 큰 차이가 있지는 않다. 주 총리(주지사)의 의전과 주의회의 권한에서 약간 차이가 있을 뿐이고, 국민 생활에는 영향 없다. 동독과의 통일 이후 작센주와 튀링엔주도 스스로를 자유주로 선언했다.[2] 실제로 니더작센, 브란덴부르크 등 북부 지방의 전통의상은 흔히 생각하는 독일 전통의상과는 거리가 멀다.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도 북독일인은 마도로스 모자에 스웨터 차림으로 나왔다.[3] 맥주홀 폭동 직전 선거에서 프랑켄에서 20%, 오버/니더바이에른 10%를 넘겼던 지지율이 폭동 직후 선거에서는 10%도 못 넘길 정도로 폭락, 이후부터는 나치 지지율이 전국 평균에 턱걸이할 뿐이었다. 선거 지도 [4] 추축국 최대 점령영역까지 확장하면 여기에 크로아티아 독립국도 포함된다. 다만 이건 일부의 이야기고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부모 등 일반 평신도들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5] 독일은 종교개혁의 진원지라서, 카톨릭이 보수적이고 개신교가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라는 인식이 강한 편이다. 미국이나 한국의 상황과는 다른 셈.[6] 독일은 전체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의 인구 수가 비슷하다. 그러나 지역별로 비율의 편차가 크며, 남부는 신성 로마 제국부터 이어오는 골수 가톨릭 지역이다. 반면 북부는 개신교의 발상지이기에 개신교 선호가 강세다.[7] 바이에른의 얼마 안 되는 개신교 관련 시설들은 대부분 개혁교회(Evangelisch-Reformiert)인데, 종교개혁 당시 스위스처럼 급진적 개혁파가 많았던 시절의 흔적이다.[8] 다만 시 단위 선거로 가면 특히 주도인 뮌헨이나 뉘른베르크처럼 규모가 있는 도시의 경우 사민당에 밀리는 모양새를 보이기도 한다.[9] 지방 자치, 풀뿌리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정당이라 주의회나 주의회보다 단계가 낮은 지방의회에서 활동하는데, 유일하게 바이에른의 자유 유권자만 선거를 통해 주의회에 진출했다. 작센안할트 주의회에도 자유 유권자 소속 의원이 있기는 하지만 그쪽은 본래 대안당 소속이었다. 브란덴부르크 주의회의 자유 유권자는 이름만 같은 별개의 정당이다.[10] 표기가 다양하다. Bayerisch, Bairisch, Bayrisch 등으로 표기 된다. 바이리쉬로는 Boarisch라고 적는 듯.[11] 여기선 Boarisch라고 적고 있다.[12] 일부 페크니츠 등 다뉴브강 수계에 속한 지역도 끼고 있다.[13] 다만 안스바흐 왕가를 포함한 모든 호엔촐레른 가문의 종가인 호엔촐레른 성은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에 있다.[14] 그러나 여기는 바이에른과 다르게 녹색당 등 좌파세력도 약하지 않은 편이다.#[15] 신앙심이 따로 깊었다기보다 비텔스바흐 가문의 상속문제를 황제가 바이에른계를 지지했고 바이에른 공작이 신교도로 넘어가는 걸 방지하려 신성로마제국 선제후 직위이기도 한 쾰른, 트리어 대주교의 자리 중 하나는 비텔스바하 가문에게서 무조건 한 자리를 영구히 보장한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16] 지금은 뷔르템베르크 왕가의 직계는 단절되였으며,왕의 칭호는 방계에게로 넘어갔는데 이 방계는 가톨릭교도이다[17] 어떻게 보면 스위스와 오스트리아의 관계와 비슷하다. 스위스는 개신교 신도가 어느 정도 있는 반면 오스트리아는 가톨릭교도가 주를 이룬다.[18] 현재 독일에 남아있는 프로이센 지역 중 바이에른과 경제 및 인구규모로 대항할만한 곳들이다.[19] 오스트리아를 지지했으며, 보오전쟁에서도 오스트리아 측 연합군으로 참전했다.[20] 허나 이건 프로이센이 남독일이라 매우 봐준거다. 당장 오스트리아 편을 든 북독일 영방국 중 하노버, 나사우, 헤센카셀은 아예 망했고, 헤센다름슈타트랑 작센은 영토의 4할 이상이 뜯겨버렸다(사실 이 두나라도 완전히 멸망시키려했으나 러시아와 프랑스의 개입으로 살았다). 게다가 저 위에 망해버린 하노버 왕실 자산을 프로이센한테 뇌물로 받기까지했으니.[21] 전부 프로이센 지역이다.[22] 실제로 동서독 통일 이전 오씨(Ossi)란 단어는 본래 동프리슬란트 사람들은 뜻하던 단어였다.[23] 저지독일어의 한 갈래이다.[24] 1936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동계올림픽 개최지[25] 나머지 둘은 베를린과 함부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