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나라 이웃나라/문제점/일본
1. 7권
1.1. 한국 음식 문화에 대한 오해
1.2. 제사에 대한 오류
1.3. 욕설에 대한 오류
1.4. 신체 접촉에 대해
1.6. 섬나라와 정치에 대한 오류
1.7. 자식-부모 관계에 대해
1.9. 진화론
1.10. 일본의 기업 세습
1.11. 이직에 대한 오해
1.13. 자민당에 대한 오류
1.14. 기타
2. 8권
수정된 부분은 다음 표시.
21세기판 - (03)
전면개정판 - (12)
업그레이드판 - (18)
1. 7권
1.1. 한국 음식 문화에 대한 오해
한 사람 앞에 음식상을 하나씩 따로 차리는 것은 일본 특유의 이치닌마에[一人前], 한 사람 몫을 다 하는 것을 중시하는 생각에서 비롯되었으며 한국에서 한 찌개 냄비에 여러 사람이 숟가락을 담그고 떠먹는것을 비위생적이라 비판함과 동시에[1] 일본은 한 음식을 여럿이 함께 먹는것은 상상도 하지 못하며 반드시 개인 접시를 놓고 따로 덜어먹는 위생적인 것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부분으로, 후술하겠지만 한국 역시 원래 독상문화였으나 조선 말기부터 현대까지 여러가지 시대적, 경제적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변한 것이지 한국이 정이 두터워서 한 상을 쓰는 게 아니다. 그에 대한 사전조사 없이 무작정 비판하는것은 좋은 모습이 아니다. 또한 1986년 방영된 한지붕 세가족 드라마에서도 개인식기를 사용하는 장면이 나왔듯이 꽤 예전부터 한 냄비에 숟가락질 하는 것에 대한 반감이 있어 왔다.
한국 전통 반상 또한 한 사람 앞에 하나씩 차리는 개인상이었으며 김치 등 밑반찬이나 찌개 같은 것까지 전부 개인별로 따로 상을 차렸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서 6.25 전쟁 등으로 인해 개인별로 상을 챙길 여력이 없어져 어쩔 수 없이 과거에는 마이너했던 겸상이나 두레상으로 밥을 먹게 된 것이 지금까지 굳어진 것이다. 그럼 한국도 과거에는 이치닌마에 정신이 발달했다가 쇠퇴한 것인가? 서로 아무 연관 없는 두 현상을 억지로 끼워맞추다 생긴 촌극이다. 역으로 밥과 국, 그리고 기본 3찬은 개인상으로 내는 것이 일반적인 일본이라도 겸상과 두레상 차림이 없는건 아니다. 그리고 외국인들도 두레상으로 먹는 것을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아마 저때는 급식도 없었을 것으로 추정되니 계속 도시락을 싸와 비빔밥을 만들어 서로 같이 먹는 것을 추리했을지는 모르나 지금은 약간 구시대적인 발상과 평가이다.
이는 단순히 문화의 차이고 문화는 낮고 높은게 아니니까 이런 식의 비난은 좋지 않다. 이원복 교수 본인부터가 먼나라 이웃나라 프랑스편에서도 문화는 낮고 높은게 아니라 강조한 게 있다.
그리고 일본인들이 밥이 찰기없어서 젓가락을 쓴다 하였는데 일본인들이 먹는 것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자포니카로 찰기있는 밥을 먹는다. 그리고 밥이나 요리을 먹을때 숟가락을 안쓴다고 하였는데 쓸때도 있다. 오므라이스 카레라이스 하이라이스나 볶음밥이나 소스와 곁드린 덮밥요리 먹을때도 숟가락을 쓴다.
1.2. 제사에 대한 오류
한국에선 개신교를 믿어도 제사를 지낸다고 하는데, 보수적인 교단에서는 제사를 철저히 금기시하며, 일부 진보적인 교단이나 가톨릭에서 허용하는 것으로 이마저도 조상을 추모하기 위해서 할 뿐 소원을 비는 등 미신행위는 안된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업그레이드판에서는 절은 안한다고 수정됐다(?).
1.3. 욕설에 대한 오류
일본에서 가장 심한 욕설은 바카(바보). 칙쇼(짐승)일 정도로 욕설이 약한 나라라고 설명했는데 아주 틀린 말은 아니고 일부 맞긴 하다. 특히, 에도 시대나 메이지 시대 쯤에 한번 일본 정부 차원에서 욕설을 대대적으로 없애는 운동을 하기도 했다. 그 이후로 욕설이 많이 줄어서 현대 일본어에서는 확실히 한국어보다 욕설이 적긴 하다.
우선 대한민국 사람이라서 잘 모를 뿐이지, 일본에서도 매우 심한 말이 꽤 있다. 당장 욕설/일본어 항목만 가 봐도 그 종류가 넘쳐난다. 예시로 언급한 바카(馬鹿)는 한국에서처럼 귀여운 욕설이고[2] , 칙쇼(畜生)는 후술하겠지만 번역이 잘못되어서 그렇지 일본 현지에서는 꽤 심한 욕이다. 그 외의 욕이라면 쓰레기를 의미하는 '고미(ごみ;塵)', '쿠즈(屑)'나 '카스(滓;カス)'를 내뱉으면, 몇 곱절로 모욕을 느낀다. 장애인을 뜻하는 카타와(片輪)나 정신병자를 뜻하는 키치가이(気違い), '새끼'를 뜻하는 '야로오(やろう, 野郎)'라는 욕도 있다.[3] 여기에 강도를 높이고 싶다면 부라쿠민(部落民)이나 백정을 뜻하는 에다(穢多)나 히닌(非人)이라는 말도 있고, 자이니치(在日) 까지 가면 핵폭탄급 위력을 낼 수 있다. 여기에 '''당사자'''에게 쓰기라도 하면 그 자리에서 싸움이 나는 것도 가능하다. 덧붙이자면, 일본어에는 한국어 이상으로 성적인 비속어도 많다. 아나쿄다이(あなきょうだい;穴兄弟), 야리망(やりまん), 아게칭(あげちん) 등등.
다만 일부 의견에 따르면, 일본어에는 씨발이나 fuck에 대응하는 범용성 높고 입에 착착 붙는 욕은 없는 듯하다(...).
또한 칙쇼를 "짐승"으로 번역한 것은 오역이다. 정확히 의미를 살려 번역하자면 축생, 즉 개돼지 정도가 맞다. 이를 설명하는 장면에서 한국인 여자가 장난으로 남친을 짐승이라 부르는 것에 펄쩍 뛰는 일본인을 그렸는데, 이 장면을 일본어로 제대로 번역하면 일반적인 숲에 사는 동물을 의미하는 짐승이라는 뜻의 케모노(獣/けもの), 또는 '짐승같은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로는 케다모노(けだもの/한자로는 똑같이 獣)로 번역해야 한다. 애초에 한국에서도 비하하는 말을 쓸려면 짐승이란 말은 잘 안쓴다. 그냥 똑같이 개돼지로 비하하지.[4]
그리고 한국과의 비교에서 간과한 게 한 가지 있는데, 한국어는 사실 세계적으로도 비속어나, 축약어, 은어 등을 비롯한 변형어가 많은 편이다. 그 영향으로 최근 신세대들이 만들어내는 말들도 꽤 있다. 영어의 경우 한국어와는 달리 오히려 한 단어가 뜻을 여러개 담고 있는 케이스... 뭐 외국어의 경우도 얼마든지 그들 사회에서 만들어 쓴다면 많은 비속어나 은어 축약어 만들수 있기는 하나 한국어보단 언어 표현 범위가 넓지는 않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면, 그들이 한국인이라 자각이 없는거지 '''사실 한국어는 비속어나 욕설이 굉장히 잘 발달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언어의 욕설을 한국어랑 비교해서 욕이 없는 건 그냥 당연한 것이며 이것만으로 욕설이 없다고 단정짓긴 어렵다.[5] 정작 우리나라편에서는 한국의 욕설이 세계 챔피언급이라면서 정상적으로 나온다.
1.4. 신체 접촉에 대해
핵심만 요약하자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 할 수 있다. 신체 접촉 문제를 다루는 태도가 한국인끼리 다 다르고 일본인끼리 다 다른 법이다.[6]
한국인은 친구끼리 장난삼아 툭툭 치거나 머리를 쥐어 박지만 일본인은 아무리 친한 친구일지라도 철저하게 신체적 접촉을 피한다고 적혀있다. 당시에는 '''맞았던''' 말이라 우리나라는 타국에 비해 친밀한 사람간의 바디 터치가 문화적으로 많이 허용되는 편이고, 일본이나 서양 등은 반대로 폭력에 민감해 툭툭 치는 것도 웬만큼 친하지 않으면 실례가 되었다.[7]
그러나 '''아무리 친한 친구일지라도 철저하게 신체적 접촉을 피한다'''는 말은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다. 가키노츠카이 같은 일본 쇼 오락프로그램을 보면 손으로 남의 뒤통수 후려치기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방영된다. 당장 접할 수 있는 일본 만화나 애니메이션 몇 개만 뒤져봐도 친한 친구에게 하는 접촉이 수두룩하게 나온다.
그 외에 일본도 접촉에 대한 인식이 지역마다 달라서 모든 일본인들이 저리진 않으며 오사카나 후쿠오카는 '''오히려 한국인보다 더 과격하고 극단적인 성향을 가진 데도 있다.''' 이들 지역은 다른 지역과는 달리 상인과 서민층 위주로 발전한 도시기 때문. 네이버 웹툰 세개의 시간으로 유명한 정구미 작가가 그린 '내가 결혼할때까지'라는 웹툰을 보면 오사카 출신인 작가가 고향에서 하던 대로 남자친구를 툭툭 치다가 싸움이 난 에피소드가 나온다.http://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55120&no=2&weekday=wed
덧붙이자면 아무리 한국인이라도 머리를 쥐어박는 것은 장난이라도 싸움나기 딱 좋다. 존두사상이 강하기 때문으로, 친구끼리 장난삼아 친다고 해도 어깨나 등 정도지 머리를 때리는 경우는 거의 못 봤을 것이다.
애초에 이런 사고 방식 자체가 섣부른 일반화의 오류다. 한국도 남자나 여자끼리 친밀하지 않으면 터치를 안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한국 또한 친한 친구일때도 터치를 안할수도 있다. 그리고 친한친구가 방점을 두는게 아니라 그 행동에 적극적으로 받아주는 친구이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다. 한국에도 아무리 친해도 소심하면 단순히 놀고 잘가라고 인사하고 갈 수 있고, 반대로 일본도 친한 경우에는 가벼운 터치 정도는 허용된다는 거다. 이건 사람 마음 가짐에 문제이지 절대로 국가적 특성으로서 엄격하게 지켜야 할 문제는 아니다.
또 이곳에서는 편향성도 있는데 제일 먼저 시대착오적인 것도 들어가 있다. 1980~90년대 한국은 약간 버릇없고 막 놀고 다니는 사람이 많이 있었을 듯 한데 개인주의라는것이 미진했고 교사가 학생 맘에 안들면 패던 시기였으니 어찌보면 약간 공격적으로 머리를 콩하고 때리는게 불가능했을 거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2000년대~10년대에서는 체벌도 줄고 친구끼리 어렸을때야 많이 싸우지만 고등학생 이후부터는 친하지 않으면 쓸때없이 머리콩 절대 안하며 이성일경우는 머리콩은 한국이어도 말이 안된다. 이는 오히려 여기서 말하는 일본인들과 닮은 꼴이 되는데 역으로 일본은 그 당시에는 철저히 친한 친구끼리는 쓸데없는 터치는 자제하는게 미덕이었을 지 몰라도 요즘 약간 천진난만한 10대들은 그 규 범을 대다수 깨고 있다는 것이다. 머리콩을 하기도 하고 몸싸움은 안하지만 물론 한국같다까진 아닐 지 몰라도 일본이 그렇게 딱딱하고 단편적 이진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최근 들어서는 일본과 한국인의 터치영역의 거리감도 상당히 줄어들었다. 좀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먼나라 이웃나라의 '''일본'''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상 버블경제때의 일본과 검정고무신때의 한국을 단순하게 비교해서 생긴 불상사라고 봐도 될 수준이다. 물론 그 경향성은 무시할수 없기 때문에 일본에서 절대로 타인에게 신체폭력을 함부로 하지 않을 것 그런데 이것은 한국도 마찬가지라는 것... [8]
이 오류는 일본인과 한국인이 생각하는 개인 영역의 거리감을 설명하는데 오해가 빚은 오류이다. 한국인이고 일본인이고 모두 장난삼아 툭툭 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다만 타인이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면 인지하게 되는 거리에 대해 조사하면 확실히 일본인이 한국인보다 약간 넓은 편이고, 거래나 악수와 같은 접촉마저 한국인보다 약간 더 특별하게 여기는 편이었다. 그러나 이는 다소 내성적인 사람들이 여기는 악수수준에 거리감이지 도저히 못할 짓이라고 보지 않는다.
이에 대한 가장 큰 반례가 있으니 바로 MM!이다. 물론 애니메이션 표현이긴 하지만 여자가 무려 남자를 심하게 폭행하는 것을 애니메이션으로 송출했다... 일본이 진심으로 신체 접촉에 대해 꺼려한다면 이런 묘사 자체가 나와서도 안되고 방영될리도 없다. 일단 서브컬쳐에서는 신체접촉을 꺼린다는 표현은 전혀 안 맞고 현실에서도 그다지 안맞눈다. 그리고 현재 코로나 19 사태 이후로는 전세계적으로 신체접촉을 자제하게 됬다는걸 생각하면 오로지 과거 버블경제시대에서만 맞았던 발언인셈...
사실 첨언을 하자면 버블 경제때도 서민층의 신체접촉은 있었다. 물론 공적인 자리에서는 신체접촉이 한국보다는 자유롭지는 않았지만... 그건 현대의 한국도 마찬가지다. 함부로 신체접촉하면 고소당할수 있는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은 느낌이었다고 보면 된다.
한편으론 미국편에서는 일본인 부장이 미국 지사에서 파견가서 일본식대로 부하 직원들과 따뜻한 스킨쉽을 했다가 성추행으로 고소당했다는 이야기가 실려있다.
1.5. 단일민족국가?
일본 민족은 2천여 년 동안 타민족과 섞이지 않았으며 일본인으로써의 동질성이 어느 나라보다 강하다 되어 있지만 오류다. 해당 항목을 보아도 알겠지만, 전세계를 통틀어서도 혈통적인 단일민족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대한민국도 단일민족국가가 아니다.
애초에 혈통적인 단일민족국가라는게 존재할수가 없는 것이 진짜 작정하고 근처에 아무것도 없는 태평양 한가운데있는 섬에 정착해서 극폐쇄주의적으로 살지 않는 이상 피는 섞이기 마련이다.[9] 일본의 경우에도 예로부터 가까이있던 조선과 중국을 중심으로 교류는 물론 민족의 이동이 있었던데다 전국시대에는 일본인들이 동남아시아로 이민을 갈 정도로 개방적이었다. 일본은 선주민족인 류큐인과 아이누 외에는 한반도와 중국으로 부터 온 야요이족과 아이누민족과 유사한 파생족인 조몬족과 혼혈인 야마토 민족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이래가지고서는 차라리 한국이 더 단일민족국가에 가깝다 해야 할 지경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하나의 언어라는 일본'''이라는 류의 우익성향의 몰지각한 발언은 정계나 언론계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는 견해이다.앞서 기술한대로 민족국가와 관련한 민족주의에 대한 혐오감도 있으며, 소수민족을 경시하는 태도 및 일본을 단일민족국가라 부르는 것 자체를 비판하는 견해도 매우 강하게 존재하는 편이며 '''실제로 단일 민족 발언에 비판을 받은 유명인사가 한 두명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한국보다 동질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는 소수 민족의 존재를 지적하여 '순수'한 의미에서 일본은 단일민족이 아니라는 주장을 전개한다(한편 인구의 대다수가 야마토 민족인 일본은 '실질적인' 의미에서의 단일민족국가로서 '순수'라는 개념을 적용하여 일본이라는 국가의 단일민족성을 부정하려는 것은 옳지 않다는 반론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제도나 국가에 대한 언급이라는 면도 있으며, 그 정당성은 논쟁의 여지가있다. 복잡한 피로 섞였다고 했는데 당장 이 말부터가 일본을 두고 한 말이다. 여러 민족들이 단일 민족으로 융화되어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영국과는 전혀 다른 단일 문화를 지닌 섬나라가 되었다는 내용이 나오며 가로세로 세계사에도 민족은 혈통이 아닌 문화로 결정된다는 말이 나온다. 업그레이드판에서는 단일민족이란 말이 사라졌다.(18)
한국편에서도 비슷한 오류가 난 것을 보면 당시 민족주의에 대한 지나친 인식이 만화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1.6. 섬나라와 정치에 대한 오류
일본과 영국의 경우를 예로 들며, 섬나라의 주요 특징 중 하나로 아직도 왕이 있다는 점을 꼽았지만, 섬나라가 아닌 군주국이나 섬나라인 공화국이 오히려 '''더 많다.'''[10] 저자는 비교 대상을 G7 국가로 한정지어서 그 중에는 일본과 영국만 군주국인데 섬나라이기도 하다고 했는데, 섬나라의 특징을 특정 국가들만의 집단만 보고 판단하는것은 상당히 어폐가 있다. 게다가 G7 중 하나인 캐나다는 섬나라가 아니지만 엄연한 입헌군주제 국가라는 점에서도 오류이다. 사실은 영국 여왕이 캐나다 여왕을 겸하는 것이긴 하지만,[11] 문제는 캐나다의 국가원수를 수상(총리)으로 묘사해 놓았다는것이다(...). 신판에선 총독이 추가됐지만 총독도 여왕이 임명하는 것이므로, 캐나다는 입헌군주제지만 영국의 여왕이 캐나다의 여왕을 겸하므로 논외라는 말을 넣었어야 자연스럽다. 이 오류는 한국편에도 존재한다.[12]
섬나라에서는 역성혁명이 불가능하다고 서술했지만, 영국편에서도 나왔듯이 섬나라인 잉글랜드에서 청교도 혁명으로 찰스 1세를 사형시키고 올리버 크롬웰이 종신 호국경으로 집권한 사례가 있다. 다만 이 경우는 크롬웰 사후 찰스 1세의 아들인 찰스 2세가 도로 복위하였기 때문에 약간 애매하다.[13]
다만 영국과 일본에 한정해서 보면 이들이 섬나라였기 때문에 외적의 침입으로 완전히 정복당한 경우가 거의 없어서 왕가의 혈통이 상당히 길게 이어져 내려온 것이기는 하다. 일본의 경우 2차 대전에서 패하여 미국에 점령당하기 전까지는 타국에 완전히 정복당한 적이 없고[14] 이른바 '만세일계'론은 분명히 허구가 맞지만 만세일계가 아닌 3왕조 교체설을 따른다 하더라도 적어도 507년 즉위한 케이타이 덴노 이래로 천황 왕가의 혈통이 끊기지 않고 현재까지 이어져 왔다는 것이 정설이다. 영국의 경우 윌리엄 1세의 잉글랜드 정복 이후로는 타국에 완전히 점령당하거나 정복당한 적이 없으며 윌리엄 1세부터 현 국왕 엘리자베스 2세까지 모든 영국 국왕들은 혈통으로 이어져 있다.[15]
영국의 의회와 일본의 바쿠후(막부)를 예로 이중권력은 섬나라의 특징이라고 나왔지만 이중권력은 다른 나라에도 존재했다. 자세한 것은 8권 기타에서 후술.
1.7. 자식-부모 관계에 대해
일본에선 자기가 살 고가 물건(특히 자가용)을 100% 자기 돈으로 하고 한국에선 고가 물건 살 때 부모님이 버는 돈에 의존해서 산다고 쓰여 있다.
물론 국민 정서상 일본에서는 좀 더 자기가 어떻게든 해야 하고, 한국은 좀 더 부모가 도와줄 수 있다는 식으로 차이가 있다는 정서 차이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일본이든 한국이든 단순히 어느 쪽은 100% 독립이고 어느 쪽은 무조건 얹혀 살수만 있다는 얘기는 지나치게 극단적이다.''' 일본에선 귀금속이나 가전제품 같은 자신의 고가 물건을 살 때 자신의 돈을 모아서 사는 경우가 많지만 특별한 사정이 있거나 돈이 좀 부족하면 부모님이나 지인과 은행이나 카드로 좀 빌리거나 보태며 사는 경우도 있다. 반면 한국에서도 고가 물건을 살 때 부모님에게 100% 물건 자금을 대주라 하면 등골 브레이커 취급 받는다. 오히려 요즘에는 기본적으로 자신이 모은 자금으로 사고, 만약에 조금 부족하면 부모님과 지인 그리고 은행에게 빌려서 보태 쓰는 경향이 강해졌다.
무엇보다 이 오류의 문제는 위의 이치닌마에 오류처럼 마치 한국인이 한 사람의 몫을 못하고 정에 기대는 이성적이지 못한 국민이라는 뉘앙스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오류를 낸 거라면 모를까 일본인은 땀 뻘뻘 흘려 노력하면서 집을 마련하고 4~50대까지 빚에 허덕이는 반면 한국인은 사치품인 자동차를 산다고 실실 웃고 굽실대면서 부모에게 카드를 받은 다음 일본인한테 한 사람 몫도 못하냐고 경악을 받는 위치에 있도록 그린 것이 문제다. 설령 한국인이 부모에게 좀 더 기대는 경향이 있다고 해도 생필품을 구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부모에게 손을 빌리는 경우를 고려하지 않고 그린 것은 오류의 문제를 넘어서 형평성의 문제라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이것 또한 시대착오적인 오류이다. 당시 한국에는 막 신세대가 나오던때로 자유분방하고 청춘을 희생하면 안되며 즐겨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x세대와 이후 세대가 줄기차게 나오던 시대였다. 당연히 기성세대는 1980년대 경제호황기에 돈을 벌었기에 자신이 노력을 해서 얻는 게 당연하다는 인식이 강하였다. 노력하면 돈이 들어오는데 그 노력도 하지 않고 돈을 축내는 신세대에 대한 태도가 어찌보면 맘에 안 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 한국은 IMF 사태도 지난지 고작 3년 밖에 되지 않았다. 특히 이때부터 청년실업이 대두되기 시작했으며 청년 스스로 노력만으로는 성공하기 힘들게 된 것도 사실이다. 일본 또한 버블경제 이후 경제 파탄으로 청년들이 살기 다소 힘들어졌다. 애초에 그런 상황에서 단순히 경제호황기 시선으로 한국과 일본을 평가한 것이 아닌지 상당한 의구심이 든다. 심지어 일본 이상으로 자식의 독립 성향이 강한 서양에서조차 경제위기로 청년실업이 심각해지면서 부모에게 손을 벌리거나 얹혀사는 경우가 늘어나는 추세다.
1.8. 압존법에 대한 예시
일본의 예절상 남에게 자기 상사를 말할 때 "님(존칭)"자를 안 붙인다면서 '듣는 사람을 높이기 위해 대화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낮추는 어법'인 압존법의 예시로 들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압존법과 무관하게 처음부터 일본어에서는 직책명에 어지간하면 様를 붙이지 않는다.[16]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선생(先生)을 선생'''님'''으로 부르지만 일본어로는 센세-라고 하지 센세-사마라고 하지 않는다. 즉 일본인들은 자기 상사의 면전에서도 그냥 부장, 사장이라고 부르지 한국에서 부장님, 사장님 하는 것처럼 部長様나 社長様 라는 말을 쓰지 않으므로 이걸 압존법의 예로 드는 것은 부적절하다. 이는 한국어에서는 직책명은 직책 그 자체만을 나타내고 존칭의 의미를 가지지 않는 것과 달리, 일본어에서는 직책명 그 자체에 이미 존칭의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17] 즉, 만약 선생님을 先生様라고 호칭한다면 '선생님 님'이라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매우 어색한 표현이 되어 버린다. 만화에서 올바른 회화로 소개되는 "사장은 없습니다"같은 경우도 이 사실을 감안하면 "사장님은 없습니다"가 되는 엉터리 압존법이다.
물론, 만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사장님께서는 지금 자리에 계시지 않습니다'하는 식으로 높임법을 쓰면 예의에 어긋난것 처럼 보일 수 있지만, 만화처럼 '지한테나 님이지 나한테도 님이야?'라며 '님'을 불였다고 해서 화를 내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고, 일본어 문법에 대해 완전히 잘못된 지식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계시지 않습니다" 같은 문맥에는 압존법이 적용되므로 아예 틀린 지식은 아니지만, 한국 정서에 맞춰 "님" 자 까지 압존법으로 지칭하다보니 오류가 생긴 것이다.[18]
추가로 일본 비즈니스 대화에서는 상대방에게 자기 상사를 성씨(혹은 이름) + 직책이나 직책만으로 호칭하는 것은 크게 실례되는 것이며, 성씨로 호칭해야 한다. 직책을 함께 말해야 할 경우 성씨 + 직책이 아니라 '직책 + の + 성씨'로 호칭한다. 회사 OJT 때, 신입사원들에게 세뇌하다시피 교육하는 부분이다. 예를 들자면, 자신의 상사인 야마다 부장을 상대방에게 이야기할 때에는 部長(부장님)나 山田部長(야마다 부장님) 등이 아니라 '''部長の山田(부장인 야마다)''' 혹은 그냥 '''山田(야마다)'''라고만 칭해야 한다.[19] 반대로 상대방에 대해 호칭할 때에는 성씨 + 직책명 혹은 성씨 + 様를 사용함이 옳다.[20] 이 역시 직책명 자체에 이미 존칭의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에 상대방에게는 존칭을 사용하고, 자신의 상사는 낮추는 압존법 표현이 되는 것이다.
1.9. 진화론
111페이지에서 진화론은 원숭이가인간이 되었다는걸 뜻한다는 잘못된 인식이 나왔다.등장 당시에는 그랬지만 현대에는 다르다.
1.10. 일본의 기업 세습
일본 재벌과 대기업은 자식에게 회장직 세습을 하지 않는다고 적혀있으나 의외로 세습하는 경우도 자주 있다.[21] 다만 한국 재벌처럼 자식에게 경영실적을 보고 물려주는 경우로 토요타가 대표적인 예시다. 이는 한국편에서도 있는 오류다.
1.11. 이직에 대한 오해
일본에선 회사를 내 집처럼 생각하므로 직장을 이직하는 경우가 드물고 서양에선 이직을 자주 한다고 쓰여 있으나[22] 완전히 틀린 설명이다.
일본에선 자영업이나 개인 사업을 할 경우에는 이직이나 폐업이 드물지만 회사 같은 경우 경영 사항이나 업무 조건을 고려할 때 이직하는 경우도 있다. 이직하는 사람이 취직하는데 별로 안좋다 하였는데 계약직에서 경험직으로 옮길 때 같은 경우에는 오히려 대우해주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서양에선 이직을 자주 한다고 하였는데 높은 물가, 실업률 그리고 이민자를 고려하면 오히려 조건이 안 좋아도 그곳에서 해고 안당하려고 눌러 일하는 경우가 있다. 이직 할 여유가 없고 이직이 자주 일어나고 일자리 얻기가 쉽다면 서양에서 노동 파업이 왜 일어나겠는가? 그리고 미국에선 해고가 쉬워서 어떻게든 일자리를 잃지 않으려고 그곳에서 고정되게 업무를 종사하려 하고 있다. 이직은 해고 당하고 겨우 일자리를 구할 때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일본이 상대적으로 이직을 덜 하는 건 맞으나[23] 서양에서 이직을 자발적으로 자주 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자주 이직'''당한다'''면 모를까...
1.12. 플라자 합의
일본의 엔고(円高)[24] 는 90년대 초부터 미국의 엔화 절상 압력으로 시작되었으며, 엔고로 인해 버블이 무너졌다고 서술했다.
서술을 보면 미국을 위시한 주요 경제대국들이 단체로 일본에 엔화 가치 안 올리면 수출입 막고 압력 넣겠다는 식으로 일본을 몰아넣은 것처럼 그려 놓았는데 실제로는 달러를 약화시킨다는 명목 하에 엔화뿐만 아니라 독일 마르크, 영국 파운드, 프랑스 프랑, 이탈리아 리라 등 주요국의 화폐 가치가 모두 한꺼번에 올라갔다.
그리고 일본의 버블이 엔고로 인해 무너진 것처럼 서술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일본 정부의 금리 인하와 부동산 규제 완화가 버블의 형성과 붕괴에 큰 영향을 끼쳤고 이러한 미국의 조치는 일본의 금리 인하와 규제 완화를 이끌었을 뿐이다. 즉, 인과관계가 정반대라는 것.
정작 개정판 8권에 추가된 내용을 보면, 플라자 합의 이후 부동산 투기와 주식투자가 늘어나 거품이 생겼다고 했으나 플라자 합의로 수입품이 싸지고 경기가 좋아졌다고 나온다(?). 해외쇼핑 활성화는 7권에도 나오는 내용이지만.....
엔고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플라자 합의 문서 참조.
1.13. 자민당에 대한 오류
자민당은 전체의석의 개헌선(2/3)를 넘어서는 거대여당이었다고 서술했는데, 일본 정치에서 자민당이 거대여당인건 맞지만 자민당의 의석수가 중, 참의원 개헌선을 넘은적은 일본 정치사를 통틀어서 '''단 한 번'''도 없다. 개헌선을 넘는 여당이었다면 진작에 개헌해서 평화헌법 9조부터 삭제하고 재무장했을 것이다. 역사상 가장 많은 의석을 확보했던 1986년 중, 참의원 선거에서도 중의원 300석(정수 512석, 개헌선은 341석) 참의원에서 143석(정수 252석, 개헌선은 169석)을 얻어 개헌선에 못미친다. 다만 연립정당과 합쳐서 개헌선을 넘은적은 3차례나 이루워졌으며 이는 현재 진행형이다.
1.14. 기타
총체적 난국이다.... 아이누가 유럽 계통의 민족이라고 나온다. 정작 그림에는 인도게르만계 뒤에 (?)를 써 놨지만. 업그레이드판에는 유럽계통으로 추측된 적도 있었다고 나오지만 8권에는 여전히 인도게르만계라고 나온다.(18)
122페이지를 보면, "9세기 여류작가 무라사키 시키부가 쓴 소설인데"라는 대사가 있다. 하지만, 무라사키 시키부는 973~1014 및 1025년 경 현존했던 10세기-11세기 작가다.
191페이지를 보면 일본은행의 마이너스 채권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1백만엔 맡기면 보관료 50억엔을 떼고 돌려준다"고 나와있다. 0.005%니깐 원래 50엔을 떼야 한다. 단순한 오타인 것 같다. 21세기판에는 50엔으로 수정되었다.(03)
또한 한국 음식이 맵고 짠 데에 비해 일본 음식이 밍밍하고 간이 싱겁다고 서술되어있는데, 한국 사람들 입맛에는 일본 요리가 비교적 덜 매운 건 맞지만 음식의 매움을 통한 자극이 적을 뿐이지 감칠맛과 짠맛을 위시한 자극은 한국 요리 이상이다. 와사비부터가 맵고 알싸한 느낌의 소스이며, 라멘에도 간장이나 된장을 왕창 부어넣는 경우도 왕왕 있다. 일본에서의 간장과 된장은 한국 것보다 감칠맛과 짠맛이 더해서 음식보다 물을 많이 들이킨다 할 정도. 편차는 있지만 대체적인 한국인 기준으로 대체로 홋카이도 것은 간이 맞고 오사카는 너무 강하다는 평가가 많다. 이 때문인지 한국편에서는 "비교적 맵고 뜨거운 음식이 적다" 면서 서술을 축소했다.
일본인들이 혼네를 꽁꽁 숨기고 다테마에를 통해 맞장구를 치고 그런다?[25] 사람들은 완벽한 이중심리는 불가능하다. 일본인들도 혼네를 표현하는 경우가 꽤 있다. 다만 완곡표현으로 할 뿐이다. 말 그대로 혼네를 꽁꽁 숨기고 드러내지 않으면 스트레스 쌓이고 우울증이 생긴다. 표현심리란 완벽한 것이 없다. 한국도 상황에 따라 솔직히 표현하고 완곡하게 표현하고 숨기고 있다. 꼭 일본인의 습성이 아니라 본능의 강도를 조절하는게 차이일 뿐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한국은 욕설문화가 너무 잘 발달되있어서 돌직구가 심하고 일본은 욕은 안쓴다는 것 자체만으로 본심을 숨기고 있다고 착각은 할 수 있겠다. 아무리 직설적이여도 한국의 욕설 문화에 비하면 일본의 직설적인 말은 강도가 낮은건 사실이다.
일본의 세대차이 파트에서 1945년생 이후 전후세대가 "어렸을 적 굶어본 기억은 없다"라고 하는데, 실질적으로 일상에서 굶어보지 않은 세대는 1950년대 후반 ~ 1960년대생부터이다.
태평양 전쟁 이후 미국에 의해 신토가 금지됐다고 하는데 사실 국가신토가 정확한 표현이다. 앞에서도 일본의 신토 문화가 언급되므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 당장에 신토가 금지되었다면 야스쿠니 신사도 없어져 있어야 한다.
먼나라 이웃나라 한국편에서 일본인들이 플레이스테이션 비디오 게임을 즐기고 남과 접촉하기 싫어 온라인 게임 PC 게임을 하지 않는다는데 이는 작가의 굉장히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하다. 한국에 비해 플레이스테이션을 위시한 비디오 게임의 인기가 높은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당연히 일본인들 역시 한국인들처럼 PC게임이나 온라인 게임을 많이 즐기고 있다.
일본이 저축만 하고 소비는 별로 하지 않는다? 반은 맞는 애기지만 사람이 생활을 할 때 소비하는 경우와 그리고 취미 생활이나 오락이나 문화 생활을 할 때 일본인들도 소비를 많이 한다.
그냥 한마디로 말해서 믿지 않는게 좋다. 심각하게 일차원적인 서술로 일본에 대한 편견이 쌓일수도 있기때문... 다른 책에 경우에도 그런 문제점이 있지만 유독 일본 문화편은 왜곡과 일반화가 상당히 심하다.
2. 8권
2.1. 스이코 덴노
스이코 덴노가 소가노 우마코의 딸로 나오나 스이코 덴노는 소가노 우마코의 여동생이 천황에게 시집가서 낳은 딸, 즉 조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천황가는 왕족의 직계와 방계로 물려주지 '''누가 황후라고 하여 외척의 딸에게 황위를 물려주겠는가?''' 그리고 스이코 덴노는 쇼토쿠의 이모가 아니라 쇼토쿠 태자의 이복 작은아버지 비다쓰 덴노의 황후이면서 고모와 친조카이다.
2.2. 진신의 난
진신의 난이 이 덴지 덴노의 아들들간의 후계자 싸움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덴지 덴노의 동생인 오야마 황자와 덴지 덴노의 아들인 오토모 황자간의 싸움이였다. 뒷날 명나라의 정난의 변처럼 숙질 간의 왕위 계승 전쟁이었던 것이다. 이 싸움은 숙부 오야마 황자가 이겨서 덴무 덴노로 즉위했다. 오토모 황자는 자결했고 사후에 고분 덴노로 추존되었다.
2.3. 후지와라 가문
후지와라 가와 결혼한 덴노 목록에 고산조 덴노가 들어가 있다고 묘사하였다가 뒤에 고산조 덴노가 출현할 때는 후지와라 어머니도 후지와라 부인도 없었다고 나온다. 동궁비는 후지와라노 요시노부의 양녀였지만 중궁은 황족이었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 자체는 특별히 틀렸다고 볼 수는 없지만, 아무 설명도 없이 앞서 묘사한 내용을 뒤집는 것은 독자에게 혼란을 유발하기 쉽다.
2.4. 혈통 오류
고산조 덴노가 고레이제이 덴노의 손자로 나오고 타이라노 시게모리가 타이라노 타다마사의 조카로 나온다. 고산조 덴노는 고레이제이 덴노의 이복동생이며 시게모리는 타다마사의 종손(조카의 아들)이다. 개정판에서는 고산조 덴노가 이복동생이라고 했지만 시게모리는 업그레이드판에도 조카로 나온다.(18)
2.5. 시라카와 상황
시라카와 상황(조코)이 곧장 인세이를 행했다고 나와 있다. 그러나 시라카와 상황이 양위 후 곧 실권을 장악한 것은 아니고, 섭관가 인물들이 요절하면서 권력의 공백이 생긴 것을 이용해 실권을 장악한 것이다. 분량 문제 상 생략한 듯하나 인세이는 덴노의 아버지의 자격으로 상황이 행하기는 했으나 당시는 관례화되지 않은 상태였으며, 시라카와가 선례를 만든 것이었다.
2.6. 스토쿠 덴노의 출생
스토구 덴노가 시라카와 상황의 사생아라는 출생 비화가 정설인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고시라카와 덴노와 스토쿠 상황의 갈등이 스토쿠 상황의 일방적 전횡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이 비화는 정설로 확인될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설득력이 없다. 공식적으로 스토쿠는 도바 덴노와 제1중궁 후지와라노 쇼시의 장자이자 고사라카와 덴노의 형이다. 그리고 스토쿠 상황은 오히려 도바 상황에 의해 정치참여가 봉쇄되어 있었고, 양자의 동생이던 고노에 덴노 사후 도바 상황이 미워하던 스토쿠 상황의 아들 시게히토의 계승을 막고자 하여 황태자도 아니었던 4남 마사히토를 즉위시킨 것이었다. 이는 마사히토의 아들인 후의 니조 덴노가 총명하다는 평을 받았던데다 후지와라노 도쿠시의 양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도바 상황은 죽기 직전에도 스토쿠 상황의 문안을 거부했으며, 고시라카와 덴노는 즉위 후 스토쿠 덴노를 계속 압박했다. 그리고 호겐의 난과 헤이지의 난 이후 니조 덴노의 즉위는 고시라카와 덴노가 인세이를 하고자 하여 양위했다기보다는, 니조 덴노와 그 양모이자 도바 상황 소유의 막대한 장원 상속자였던 도쿠시의 압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니조 덴노 치세에 고시라카와는 실권을 잡지 못했으며, 니조 덴노 사후 후일 동서가 되는 타이라노 키요모리와 협조하여(고시라카와는 키요모리의 아내의 여동생이던 켄슌몬인 시게코를 측실로 들였다.) 권력을 장악해 인세이를 행하게 된다. 그리고 고시라카와 덴노의 비호 아래 키요모리는 강력한 권력을 누리게 된다.
2.7. 미나모토노 요시츠네
요시츠네가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의 4남으로 나오는데 실제로는 9남이다. 그래서 풀네임은 미나모토노 쿠(九)로 요시츠네. 개정판에선 수정.(12)
2.8.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자손
가마쿠라 막부 초대 쇼군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자손은 요리이에, 사네토모, 구교 뿐이며 2대 쇼군인 요리이에는 요리토모의 장남이라고 쓰여 있다. 그러나 요리토모에겐 일찍 죽은 치즈루마루라는 장남이 있었으며 요리이에는 차남이다. 게다가 형제 조카들보다 오래 살았던 3남 죠교가 있으며 요리이에에게도 구교 외에 세 아들과 딸 하나가 더 있었다. 3대로 대가 끊긴 것은 사실이지만 그 점만 맞고 가계도는 엉망이 되었다.
2.9. 여몽 전쟁
여몽 연합군을 막아낸 호조 가문은 권위가 더욱 세지고 막부의 권위도 든든해졌다고 서술되어 있다. 실제로도 천황 가문이라든가 일본인 차원에서의 긍지가 올라갔고, '카미카제'(神風)로 잘 알려진 일본의 신국(神國) 의식은 강화되었고, 전쟁을 수행하면서 단일체로서의 일본의 정체성은 강화되었다.
그러나 '호조 가문'과 '가마쿠라 막부' 쪽의 권위에 있어서는 급격히 실추되는 계기가 되었다. 승전(?)을 거두고 돌아온 병사들에 대한 논공행상 과정에서 보상해야 할 토지를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적국공격이 아닌 국토방어라는 전쟁의 성격상 전리품이라 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실추된 막부의 권위는 가뜩이나 귀족들의 토지겸병과 경제난을 겪던 무사들의 불만을 급격히 증폭시켜 결국 막부 몰락에 직접적인 단초를 가져왔다. 다만 2차 침공 직후로 한정짓는다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호조가의 멸망은 고케닌 체제를 미우치비토 체제로 원활하게 바꾸지 못함과 고다이고 천황이 직접 반기를 들면서 정통성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2.10.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교토 입성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가마쿠라의 호죠 잔당들을 토벌하고 바로 교토로 회군하여 덴노군을 공격, 손쉽게 이를 격파하여 교토에 입성했다고 되어 있다. 사실은 가마쿠라의 호죠 잔당을 격파한후 가마쿠라에 눌러 앉아서 권력을 행사하다가 덴노군이 다카우지를 공격하자 군사를 일으켰다. 교토에 입성하긴 했지만 덴노군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고 다카우지는 교토를 일시 점령했지만 곧 덴노군의 반격을 받아 교토를 포기하고 큐슈까지 도망치기도 했다.
2.11. 아시카가 요시미츠
정확히는 명나라 건문제를 잘못 묘사했다.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일본국왕 책봉을 받을 때 건문제를 희끗희끗한 노인으로 묘사했지만 실제로 건문제는 1377년에 태어났고, 아시카가 요시미츠에게 일본국왕을 책봉한 시기는 1401년으로, 아직 서른이 되기 전 이었다.
2.12. 오닌의 난
오닌의 난이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동생에게 한 약속을 씹고 후계자리를 아들한테 넘겨줘서 발생한 사건으로 묘사했으나, 실제로는 요시마사가 동생과 아들 사이에서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사이에 다이묘들끼리 편을 가르고 일이 커지면서 발생한 사건이다. 또한 쇼군 가문의 계승 문제뿐 아니라 다이묘 가문들의 계승 문제까지 달려있던 사건이었다.
또한 요시미가 쇼군 후계자를 지명받고 좋아하며 요시마사가 약속을 취소하자 불만을 가지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역시 오류, 요시미는 처음에는 만일 요시마사에게 아들이 태어나면 후계 문제가 꼬일게 분명하다고 여겨 거절했지만 요시마사가 아들이 태어나도 후계자 자리를 무르지 않겠다고 하고서야 받아들였다. 게다가 요시미에게 지명한 것도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은데 아들이 안 태어나 어쩔 수 없이 지명했다는 뉘앙스지만 실제로는 요시마사가 아들이 없어 요시미에게 물려주겠다고 한건 맞지만 그보단 요시마사 본인이 정무는 관심없고 빨리 쇼군자리를 누구에게 물려주고 싶은데 아들이 안 태어나 요시미에게 약속한 거다. 혈통에 집착했다기보다는 그냥 개인적으로 쇼군자리를 빨리 때려치우고 싶은데 아들이 안 태어나니 대타로 동생에게 떠넘겨버리고 싶어 그랬다고 할 수 있다.
2.13.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쿠가와를 느긋하고 성질 급하지 않은 사람으로 묘사하였는데 의외로 성급한 면도 있었다. 젊은 시절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도 불리한 상황에서 신겐에게 정면승부를 걸었던 적도 있고 세키가하라 전투 초반에 동군이 불리했을 때 시동이 등에 달고 있던 깃발의 깃대를 베어버린 적도 있었으며, 불안하거나 기분이 나쁘면 왼손 엄지손가락의 손톱을 이빨로 물어뜯는 특이한 버릇이 있었는데 이게 너무 심해서 피가 날 정도로 물어뜯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또 말을 타고 지휘할 때에도 처음에는 지휘채로 지휘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맨손으로 말안장을 두드리며 고래고래 고함쳐가며 지휘했을 정도(...). 이런 모습을 보면 꽤 다혈질적인 면모도 가지고 있었다.
2.14. 조총에 대한 인식
오다 노부나가가 조총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빨리 꿰뚫어 철포를 도입했다고 쓰여 있다. 조총의 중요성을 깨달았다는 건 사실이지만 실제로 철포를 처음 도입한 건 타네가시마이다. 당장 일본식 화승총을 타네가시마 총이라 부른다는 걸 생각해보자.
최초로 사용한 것은 키모츠키 가문이고, 1549년 시마즈 가문에서 키모츠키 가문과의 전투 이후 시마즈 가문에서도 대대적으로 도입한 것이 그 중요성을 처음 꿰뚫은 것이며 오히려 당시 조총을 중요시 하지 않았던 다이묘들을 찾기 힘들 정도다. 다만 대대적인 생산공방을 구축할 정도로 돈이 있던 다이묘들은 오다 노부나가와 사카이이의 미요시 나가요시, 시마즈 타카히사, 오토모 소린, 모가미 요시아키 등등 정도. 다케다 신겐과 다케다 가츠요리도 철포의 중요성은 알았으며 어떻게든 철포의 숫자를 늘려야만 한다. 라는 기록도 남아있으나 마련할 돈이 없었기에 가신들에게 알아서 조달할 것을 맡겼고 그 결과 나가시노 전투에서는 철포를 200정 정도 밖에는 준비하지 못하였다.이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할수있다.
2.15. 3단 철포 전략
오다 노부나가가 3단 철포 전략으로 적을 무찔렀다고 쓰여 있으나 이는 후대의 창작이다. 오다 노부나가 항목 참조. 사실 이 오해는 일본에서도 자주 발생하는 오해이다.
2.16. 도요토미 히데요시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죽자 즉시 출동해 아케치 미츠히데를 죽였다고 되어 있다.
정확히는 히데요시가 즉시 출동한 건 사실이지만 아케치 미츠히데는 패전 후 도주 중 농민에게 살해당했다. 전국 시대의 농민들은 땅만 파먹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농사도 지으면서 다이묘가 소집령을 내리면 즉시 응하여 전투에 참여했고, 전쟁이 끝나면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 예비병 비슷한 사람들이었다.[26] 또 농민들은 이 점을 이용해 패잔병들을 습격하여 죽이고 물건을 약탈하기도 했는데, 이것을 '낙오무사사냥(落武者狩り)' 이라고 했다. 그리고 다이묘들도 적의 수급을 가져오면 상을 주는 방식 등으로 이것을 장려하기도 했다. 거기다가 '''주군을 배신한 배신자'''였던 아케치 미츠히데가 농민에게 살해당한 건 별로 이상한 건 아니다. 개정판에서도 수정되지 않았다.
2.17. 도요토미 히데츠구
히데츠구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동생으로 나오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동생은 도요토미 히데나가이다. 히데츠구는 조카 겸 양자. 거기다가 해당 페이지에서 히데츠구를 히데나가로 바꿔도 오류다. 히데나가는 임진왜란 발발 1년전에 이미 병으로 숨진 상태였다. 21세기판에선 수정되었다.(03)
참고로 히데요시는 자기 아들에게 권력을 물려주겠다며 히데츠구를 죽였는데, 오히려 그 때문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포함한 휘하 가신들까지 히데요시 사후 다 배신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손자 도요토미 쿠니미츠까지 처형했을 당시 백성들이 인과응보라는 반응을 보였을 정도다.
2.18. 무신파
가토 기요마사와 후쿠시마 마사노리,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 칠본창의 무장들을 대표로 하는 무신파는 반 도요토미 파벌이었다고 쓰여 있는데 실제로는 정반대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근 출신이었으며, 그를 포함한 많은 무신파 일원들은 문신파와의 대립과는 별개로 여전히 도요토미 가에 우호적이었다. 단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가토는 동군의 편을 들었고 서군의 편을 들었던 라이벌 격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영지를 많이 흡수했다.
2.19. 이시다 미츠나리의 실각
미츠나리가 무신파에게 밀려날 위기에 처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가 지방으로 쫓겨났다고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가토 기요마사 등이 자신을 암살하려 하자 위기를 느껴 도쿠가와에게 도망친 것이며, 도쿠가와는 그를 보호해주고 무신파와 화해시켰고 그의 거성인 사와야마 성까지 배웅해 줬다.(배웅해준 사람은 아들 유키 히데야스) 물론 이것은 자신의 인망 쌓기와 도요토미파의 분열을 위해 그렇게 한 것. 그리고 이시다 미츠나리는 화해하는 대신 오봉행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2.20. 세키가하라 전투의 후처리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파인 자들을 모조리 죽이거나 다이묘 자리를 박탈했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처형된 인물은 안코쿠지 에케이, 고니시 유키나가, 이시다 미츠나리, 이 3명 뿐이었고, 그 외에 자결한 인물로 구키 요시타카, 나츠카 마사이에, 오노기 시게츠구 등이 있다. 실제로 영지삭감으로 끝난 것은 우에스기 카게카츠, 사타케 요시노부, 모리 테루모토 3명에 불과하고 영지보존을 받은 것은 가독승계를 조건으로 한 시마즈 요시히로, 조선과의 화해를 조건으로 한 소 요시토시, 마사무네의 중개로 개역을 면한 소마 요시타네 정도에 불과하다. 우키다 히데이에, 오노데라 요시미치, 조소카베 모리치카, 사나다 마사유키, 타치바나 무네시게 등은 아예 영지가 날아갔다. (더불어 이부분은 초판에도 언급이 되어 있다. 그러니까 앞뒤가 안맞다는 말.) 후일 메이지 이신을 주도한 이들이 바로 이 도자마 다이묘 및 그 가신들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다수의 가신 및 무사들이 일자리를 잃고 거리로 내몰린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이후 이들 낭인과 그 자손들이 시마바라의 난에 가담하게 된다.[27] 개정판에서는 수정되었다.
2.21. 오사카 전투
라는 대목이 있다. 한 해 가까이란 말이 나왔으니 적어도 봄이나 초여름 쯤 전투가 시작되었다는 말. 그리고 이듬해까지 4월까지 공선전을 하다 바깥 해자만 메우는 조건으로 물러나겠다고 하면서,1614년, 오사카성 공격이 시작되었어. 그러나 예상 밖으로 단단한 수비력은 한 해 가까이 이듬해 4월이 지나도록 무너질 줄 몰랐지.
실제론 1614년 음력 11월(즉 가을~겨울 사이)에 전투가 시작되어 음력 12월에 화의를 맺었고, 이듬해인 1615년 음력 5월에 전투가 재개해 결국 도쿠가와 측이 승리했다. 오사카 전투에 대해 일본 고등학생이 배우는 상식 이하고, 성의 해자라고 그려놓은 그림은 일본의 성에 대한 기본 지식도 1%도 없다는 것이 드러난다.그러나 약속과는 달리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밤 사이에 재빨리 안팎의 호수를 모두 메워버렸어 이제 오사카성 공격을 가로막는 호수가 사라져 버리고 오사카성은 간단히 함락되었지.
2.22. 에도 시대의 덴노에 대한 묘사
작품에서는 에도 시대의 덴노는 완전 병풍에 무시당하는 신세였다고 묘사한다.[28] 하지만 다소 과장된 면이 있는데 우선 이러한 묘사와 어울리는 시대는 사실 센고쿠 시대인데 이 시기의 덴노는 안습 그 자체라서 한 예로 고나라 덴노의 경우 즉위식에 쓸 돈이 없어 즉위하고도 10년이나 즉위식을 거행하지 못했다.[29] 그 후에도 돈없기는 마찬가지라 어필을 팔아 수입에 보태고 궁녀들은 매춘을 하고[30] 덴노 본인은 아이들이 던진 돌에 맞기도 했다. 외려 에도 막부 시절에는 나아진 면이 있는데 여전히 실권은 없었지만 쇼군직을 맡은 도쿠가와 가문을 비롯한 여러 가문들과 사돈을 맺고 영지를 받기도 하는 등 실권만 없다 뿐이지 대우는 나았다. 추신구라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자결해야 했던 다이묘도 있었을 정도다. 즉 덴노에 대한 충성이 반역으로 취급되었을 수도 있겠고 은둔을 강요받았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경제적으로는 그정도의 시궁창은 아니었다.
2.23. 산킨코타이 관련
산킨코타이가 첫 언급되었을 때는 '산킨코타이는 다이묘의 가족들을 에도에 볼모로 잡아둔 채 다이묘 자신은 1년간은 영지, 1년간은 에도를 오가게 하는 제도' 라고 소개해 놓고서 몇 페이지 뒤에는 다이묘의 아내로 추정되는 여성이 "자기야, '''에도''' 가면 지갑 하나 사 주라" 라고 한다(...) 위에 말했듯 다이묘는 영지에 갈 수 있어도 다이묘의 가족들은 에도에서 지내야 해서 이런 일은 못 일어난다.
2.24. 도쿠가와 요시노부
1867년 같은 해에 도쿠가와 요시노부와 메이지 덴노가 각각 쇼군과 덴노에 즉위했다는 부분에서 요시노부의 외모를 너무 늙게 묘사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의 요시노부의 모습을 참고한 듯 한데, 요시노부는 1837년생이므로 쇼군에 즉위할 때는 겨우 30세였다. 게다가 이후의 대정봉환을 거쳐 보신전쟁에서 요시노부가 항복할 때까지 쭉 이런 모습으로 나오는데, 보신전쟁이 완전히 끝난 해도 1869년으로 시기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
2.25. 도사 번 지형 오류
사카모토 료마의 소개에서 출신지인 도사 번(지금의 고치 현)이 '''큐슈 섬'''에 위치한 것으로 나온다. 실제로는 '''시코쿠 섬'''에 소재한다. 다른 페이지의 지도에서는 제대로 묘사되었고 개정판에서 이 부분도 수정되었다.(03)
2.26. 보신 전쟁
정부군이 에도까지 진격하여 막부와 협상하여 정전했다고 쓰여 있으나 보신 전쟁은 협상이 아니라 전쟁으로 종결됐다. 정부군과 막부군의 협상 이후로도 막부측 강경파는 최후까지 항전을 계속하였고, 결국 홋카이도의 하코다테까지 올라가서 반정부군인 에조 공화국과 끝까지 치열하게 싸워 이듬해인 1869년 가까스로 평정했다. ("대통령"이란 표현도 에조 공화국에서 유래되었다.) 또한 이 전쟁의 피해 역시도 만만치 않아서 도호쿠 지역의 경우, 다이쇼 시대에야 겨우 피해를 회복했다.
2.27. 하마구치 오사치의 사망
하마구치가 1930년에 총에 맞아 암살되었다고 되어 있다. 실제로 그 해에 총에 맞긴 했지만 암살미수가 되었으며 그로 인한 합병증으로 이듬해인 1931년에 죽었다.
2.28. 사이토 마코토
5 15. 사건[31] 이후 후임 총리대신이 된 사이토 마코토를 군부 출신이란 이유로 강경파로 묘사했다. 하지만 사이토도 해군 출신이란 점에서 짐작되듯이 온건파에 현상유지파였다.[32] 한편 이누카이 츠요시 역시 재임중에 만주사변으로 중일 전쟁을 시작한 인물이었다. 여하간 사이토 역시도 황군파 장교들에게는 적대시되었으며, 결국 총리 퇴임 이후 1936년 2.26 사건(쿠데타)에서 다른 대신들과 함께 암살되었으며 쿠데타는 진압되었지만 이후 정권은 육군에게 넘어가게 된다.
2.29. 기타
- 스슌천황이 소가노 우마코의 외손자였다.
스슌천황은 요메이 천황의 이복동생이고 소가노 우마코의 큰누나의 아들로 외조카이다. 나이로는 스슌천황이 우마코 보다 30세연상이다. 쇼토쿠 태자의 숙부이다 그리고 스이코 천황의 이복오빠 이기도하다
- 미나모토 요시토모가 다메요시의 차남으로 표기되는데 다메토모가 8남이고 요시토모는 겐지가의 장남이다.
탈공업화를 통한 전쟁불가국가로 만들려는 계획은 독일을 대상으로 한 모겐소 플랜(Morgenthau Plan)이라는 실행되지 않은 계획만 존재했었고 일본을 대상으로 한 계획은 미국의 대일본 전후계획에도 없었다.1
이 착각된 내용을 근거로 한국전쟁탓에 일본이 공업화 되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저 먼나라 이웃나라로 퍼져진 주장들중 하나일뿐이다.
이 착각된 내용을 근거로 한국전쟁탓에 일본이 공업화 되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저 먼나라 이웃나라로 퍼져진 주장들중 하나일뿐이다.
- 바쿠후에대한 챕터표시가 있는데 바쿠후시대가 끝난 후에도 다음 챕터표시가 없다.
- 일본, 조선, 중국을 비교하면서 이중권력이 일본의 특수성이라고 서술했는데 사실 이중권력은 어느 나라 역사들에서나 존재했다. 중국의 경우 망탁조의 중 왕망을 제외한 3명은 군주를 능가하는 권력을 휘둘렀음에도 새 나라를 세우지 않았다. 조선의 경우 알려진 것과 달리 이전의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보다 왕권이 강력했다는 반론이 있지만 조선에도 정종, 단종, 명종, 순조, 헌종, 철종 등 허수아비된 군주들이 있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다만 이러한 구도가 제도로 정착되었다는 점은 일본이 좀 특수하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이나 한반도의 경우, 실권자가 군주를 건드리지 않고 허수아비로 남겨두었다쳐도 대부분 당대 한정이며 막부처럼 대대로 실권만을 장악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33] 즉 이중권력은 많았어도 그걸 사실상 제도화한건 일본이 유일에 가깝다 할 수 있겠다.
-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헤이지에 의해 이즈 반도로 유배된 나이가 8세라고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13세 때 일이다.
- 혼다의 고급 브랜드는 아큐라#s-2인데 애발론이라고 적혀 있고, 애발론[34] 은 혼다 제품이 아니고 도요타 제품이다. 토요타의 고급 브랜드인 렉서스의 로고도 잘못되었다. 아래의 애발론이라고 적혀 있는 로고가 진짜 렉서스 로고이다.
- 사쓰마와 조슈와 바쿠후 대립 부분에서 조슈와 죠슈표기를 섞어서 쓰고 있다. 개정판에선 조슈라고만 나온다.(12)
- 에도 막부 시절 신분 질서를 위해서, 만약 사무라이가 평민에게 모욕을 당했을 경우 그 자리에서 죽여도 죄를 묻지 않는다고 나와 있고 이를 기리스테고멘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100% 틀린 내용은 아니지만 오해를 하기 쉬운 묘사이다. 이 부분은 기리스테고멘(부레이우치) 문서를 참고할 것. 만화에서도 실제로 농민이나 조닌을 죽인 일은 거의 없다고 나온다.
- 이탈리아 편의 폼페이우스와 비슷한 오류로,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평범한 체격을 가진 청년의 모습으로 그려놨는데, 실제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남아있는 기록에 의하면 무려 키가 197cm, 몸무게가 161kg에 달하는 거구였다.[35]
[1] 한국 특유의 정 문화라는 말을 끼워넣었으나 전체적인 묘사로 봤을 때 비위생적이라고 까는 내용이다. 물론 맞는 말이다. 이로 인해 다른 사람의 침이 숟가락과 함께 냄비에 들어가고, 그로인한 감염이 생길 수 있다.[2] 비슷한 욕설로 '아호(あほ, 阿保, 바보)'와 '마누케(まぬけ, 間ぬけ, 얼빠진 놈)'라는 욕설도 있다. 도쿄 쪽 사람들은 '아호(あほ)'를, 오사카쪽 사람들은 '바카(ばか)'를 더 심한 욕으로 친다. '바카(ばか)'는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도 심심찮게 들리며 모에 요소로도 자주 쓰인다. 심지어 너의 이름은에서는 이게 아주 희대의 명대사이다. [3] 바카나, 쿠즈를 야로에 붙이면 바보새끼, 쓰레기새끼라는 큰 욕이 될수있다.[4] 물론 2000년 초반 때까지만 해도 짐승이 욕에 들어가긴 했지만, '짐승돌'과 같이 남성미 넘치고 야성적인 이미지를 가진 사람의 모습을 부각시키기 위해 짐승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경우도 생겨버려 요즘엔 애매해졌다.[5] 애초에 일본어는 한자다. 한국처럼 한글로 변형을 시킬 수 있는 단어는 아니다. 뭐 한국어도 한자긴 한데 일본과는 사정이 다른게 한국은 fuck에 대한 대응되는 단어가 한자 초중종성으로 자유로이 변형이 된다는 거다. 예를 들어 씨발을 시발, 씨부랄, 씨벌탱, 씨바와 같이 얼마든지 비틀 수 있지만, 일본어의 경우는 영 자유로이 변환하기가 어렵다는 거다. 한자 표기를 비틀거나 발음 자체를 비틀 수는 있지만, 한국과 같이 만들 수만 있다면 10개고 100개고 가능한게 아니라 제한이 어느정도는 있다는 거다.[6] 일단 섬나라여서 서로와의 마찰을 줄이랴면 접촉을 줄여야 한다는 일종에 화 문화를 언급하는데 이것도 그닥 맞다고 보기 어렵다. 대표적인 반례가 일제강점기인데 정말로 우리가 알고 있는 화문화를 중시한다면 일본은 일제강점기때 말 그대로 화를 위해 대륙진출을 할게 아니라 서로 협력해서 서구 열강으로부터의 보호수준으로 그쳐야 했다. 일단 그러지도 않았으며 결국 미국에 핵폭탄 두방에 갑자기 화문화를 되찾은 굉장히 독특한 민족이 되버린다... 물론 일본에 갈라파고스 문화와 어느정도 민폐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문화는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매너지 법이 아니며 진심으로 화 문화를 이행하려 안간힘을 쓰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즉 '절대로'라는 말을 붙일정도로 화문화를 지킨다고 보긴 어렵다.[7] 물론 한국이 터치에 자유로운 분위기라는 거지 일본이 터치도 못하는 그런 국가는 아니라는 것을 알것[8] 한국에서도 폭행죄로 처벌될수 있다. 아니 그 이전에 성추행으로 오인받을 만한 짓이기에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상식인이면 국적 상관없이 알것이다. 아주 대표적인것이 똥침이 있다.[9] 당장 단일민족국가 어쩌구에 가장 가까울 한국도 몇몇 성씨들은 외국에서 온 경우도 있다. 그 흔한 김씨도 어떤 건 시조가 일본인인 것도 있다.[10] 영국, 일본, 영연방 왕국을 제외한 섬나라 겸 군주국은 브루나이, 바레인, 그리고 통가뿐이다. 가장 섬 많은 국가인 인도네시아와 그 뒤를 이은 필리핀은 공화국이다.[11] 캐나다에서는 영국 여왕을 국가원수로 모신다고 설명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건 다소 부정확한 표현이고, 정확히 말하면 엘리자베스 2세는 캐나다의 여왕이기도 하다.[12] 한국, 중국, 일본의 국민성을 비교하는 앞부분에 나온 내용.[13] 이외에도 스튜어트 왕조의 제임스 2세를 몰아낸 명예혁명이 있지만 현임 국왕만 몰아냈을뿐 그 이후에도 제임스 2세의 두 딸인 메리와 앤이 연달아 국왕으로 즉위하여 스튜어트 왕조 자체는 유지되었기 때문에 그냥 혁명이지 '역성' 혁명은 아니다. 애초에 기존 왕조를 뒤엎지 않고 유지하면서 혁명에 성공했다고 하여 '명예' 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스튜어트 왕조가 하노버 왕조로 바뀐 것은 앤 여왕이 후계자 없이 사망했기 때문에 제임스 2세의 사촌인 팔츠의 소피를 다음 후계자로 정했고 소피가 앤보다 2달 먼저 사망하자 소피의 아들인 하노버의 조지 1세가 즉위한 것이지 혁명으로 왕조가 바뀐게 아니다.[14] 애초에 정복은 커녕 공격당한 것도 몽골의 일본 원정 때가 처음이고 그 이후로도 일본 전체를 대상으로 한 공격은 2차대전 말이 유일하다.[15] 영국 역사에서도 왕조가 바뀐 경우는 많으나 노르만 정복 이후의 왕조는 왕조가 교체되더라도 전 국왕의 친척이나 모계혈통의 자손이 즉위하였고 윌리엄 1세 즉위 이후로는 왕가의 혈통이 완전히 교체된 적은 없다.(동양의 왕조 개념과 서양의 왕조 개념은 상당히 달라서 조선의 선조나 철종, 고종이 즉위한 것도 서양식으로는 왕조교체에 해당한다.) 물론 여왕의 자녀나 모계혈통의 자손이 즉위하면 '역성'은 맞으나 '혁명'은 아니다.[16] 비즈니스 메일에서는 붙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거래처인 A상사의 스즈키 과장에게 메일로 연락을 할 경우 첫 부분에 누구에게 쓰는 것인지를 표기할 때 'A商事 鈴木課長'''様''''라고 쓰는 식. 다만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이것이 잘못된 표현이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최근 들어서는 메일에서도 직책명+様의 사용이 줄어 가는 추세이다. 물론 회사에 따라 차이는 있으며, 대화를 할 때에는 직책명 뒤에 様나 さん 등을 붙이지 않는다.[17] 직책명만 부르는 것 자체가 이미 '님'자를 붙여서 호칭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18] 올바른 압존법을 적용한 일본어로 표현하면, 사장의 성씨가 사토(佐藤)라고 가정했을 때 "(社長の)佐藤はただいま席を外しております。"라는 표현을 사용함이 옳다. 이를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사장인) 사토는 지금 자리를 비웠습니다'에 가까운 표현이라고 보면 된다. 괄호 안의 말은 붙여도 되고 안 붙여도 되는 표현으로, 주로 성씨가 같은 사람이 2명 이상 있는 경우 어느 직책인지를 통해 구분하기 위해 붙이는 편이며, 동성(同姓)인 사람이 없다면 사용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19] 様나 さん을 붙여서도 안 된다.[20] 상대방의 직책명을 알고 있는 경우 성씨 + 직책명으로 호칭하는 쪽이 상대방이 어느 직책인지까지 신경쓰고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좀더 정중하고 세심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선호되는 편이다. 성씨 + 様의 경우 상대방의 직책을 모르거나, 상대방이 특별한 직책이 없는 평사원일 경우에 주로 사용된다.[21] 애초에 일본은 기업뿐만 아니라 정치인이 자식한테 지역구를 물려주는 게 흔해빠진 동네다.[22] 서양에서 이직이 많이 일어나는 이유는 후술하겠지만 고용 안정성이 약해서 노동자들의 운명이 파리목숨이기 때문이지 그들이 자발적으로 원해서가 아니다. 따라서 이게 절대 좋은 현상이 아니다.[23] 바꿔 말하면 일본의 고용 안정성이 서양보다 강한 것이다.[24] 엔화의 가치를 높이라는 압력. 가령 이전의 1달러가 90엔이었다면 85엔 정도로 취급하도록 변경하란 뜻이다.[25] 공적인 자리라면 그걸 느끼는 건 쉬울지 몰라도... 일본인도 사람이다. 사적인 자리는 한국과 똑같다. 아니 애초에 공적인 자리에서 본심을 대놓고 말하는 경우는 한국이나 일본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일본이 조금 더 심할뿐이지 차이는 현 시점에서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26] 이는 이 만화에서도 언급된다.[27] 시마바라의 난 주동자로 알려진 아마쿠사 시로 역시 아버지가 고니시의 가신이었다.[28] 덴노에 대한 충성은 곧 반역으로 취급되었다느니 덴노는 유폐 생활과 다름없는 은둔을 강요받았다느니 돈이 없어 끼니를 굶거나 기운 옷을 입은 덴노도 있었다는 것[29] 그나마 거행할 수 있던 것도 여러 센고쿠 다이묘 가문들이보내준 성금 덕분이었다.[30] 하지만 일본의 궁녀를 결코 조선시대의 궁녀와 동급 취급하면 안된다. 일본의 궁녀는 공가의 여식들이 많았는데 그 말인즉슨 덴노 가문 빼고 최고 명문가급 여자들이 매춘 행위를 했다는 말이다.[31] 이누카이 츠요시 당시 총리가 강경파 장교에게 암살당한 사건.[32] 심지어 일제강점기 때 그나마(?) 온건했던 문화통치를 처음 시행한 총독도 사이토 마코토다.[33] 물론 중국에 정말로 당대가 아닌 2대나 군주를 허수아비로 만든 인물이 있긴 하다. 사마의-사마사-사마소로 권력이 이동했는데 그래도 사마사와 사마소가 형제임을 감안하면 2대고 한국엔 고려때 최씨 정권은 4대 조선때 안동 김씨들은 2대나 해먹었다.다만 안동 김씨는 댓수로는 그래도 권력의 중추는 김조순 사후 헌종때 두번이나 바뀌긴 했다.[34] 국내에서는 아발론이라고 적지만, 영어 발음은 애발론에 가깝다.[35] 물론 이 기록이 과장일 가능성이 더 크다. 오류라기 보다는 작가가 해당 기록의 신빙성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