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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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모습.
[image]
본관 신축 이전의 구 본관 건물(1936~2002).
'''마산고등학교'''
'''馬山高等學校'''
'''Masan High School'''
[image]

<colbgcolor=gray> '''교훈'''
자율ㆍ협동
'''분류'''
자율형 공립고등학교
'''개교'''
1936년 4월 11일
'''교장'''
문정식
'''교감'''
이상근
'''학생 수'''
25학급 589명(2019년 10월 14일 기준)
'''교직원 수'''
73명(2018년 5월 기준)
'''성별'''
남자고등학교
'''교목'''
히말라야시다
'''교화'''
태산목
'''주소'''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심온길 33 (완월동)
'''관할 교육청'''
경상남도교육청
'''홈페이지'''

'''총동창회'''

1. 개요
2. 역사
2.1. 연혁
2.2. 상세
2.2.1. 관련 문서
3. 상징
3.1. 교표
3.2. 교훈
3.3. 교목
3.4. 교화
3.5. 교가, 응원가, 학교 관련 음악
4. 학교 시설
4.1. 본관
4.2. 후관
4.3. 생활관
4.4. 체육관
4.5. 학명관
4.5.1. 시설
4.6. 기타 시설
5. 교기(校技)
6.1. 주요 행사
6.2. 학교 주위 상권
6.2.1. 개요
6.2.2. 목록
7. 관련 인물 및 동문회
7.1. 출신 인물 및 관련 인물
7.2. 동문회
8. 이용 가능한 대중교통
8.1. 버스
9. 사건·사고
10.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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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완월동에 위치한 자율형 공립고등학교.
경상남도의 자율형 공립고들이 으레 그렇듯, 그냥 좀 오래된 도시마다 하나씩 있는 공립 고등학교.

2. 역사



2.1. 연혁


1936. 03. 16.
마산공립중학교 설립인가(5년제, 10학급)
1936. 04. 11.
개교
1950. 06. 15.
고등학교령에 의거 수업연한 3년제로 개편
1951. 09. 01.
학제 변경에 따라 마산중학교와 분리(15학급 인가)
1974. 12. 31.
마산고등학교부설방송통신고등학교 설치 인가
1994. 09. 10.
강당 겸 체육관 개축 준공(연건평 718평)
2002. 07. 18.
본관 개축 준공(2,954평)
2003. 04. 12.
관정교육관 제2관 준공
2004. 04. 08.
역사관 개관
2007. 02. 26.
실내야구훈련장 준공(494.1m2)
2015. 10. 17.
학명관(기숙사)개관
2017. 02. 07.
제34대 문정식 교장 취임
마산고등학교 홈페이지에 기재된 연혁.

2.2. 상세


마산고등학교의 초기 설립과정은 옛 마산지역의 근대 향토교육사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일제강점기 마산부 지역에는 구한말 개항 이래 도시가 성장하며 인구가 모여들었고, 자연히 여러 교육기관이 생겼다. 구체적으로는 구한말 시절 이미 마산공립보통학교(현 성호초등학교)가 생겼고, 일제에 강제병합된 이후에도 마산노동야학교[1](현 중앙중/마산공고), 창신학교(현 창신중/창신고), 호신학교(창신학교의 고등부가 분리, 이후 폐교), 의신여학교(현 의신여중), 마산공립상업학교(이후 마산동중/마산상고(현 용마고), 마산공립고등여학교(현 마산여중/마산여고), 성지여학교(현 성지여중/성지여고) 등의 공립/사립 교육기관이 존재했고, 이외에도 일본인들이 다니던 학교인 마산공립심상고등소학교(현 월영초등학교)가 있었다.
그러나 예과생, 제국대학 항목에서 보듯 식민지 조선의 인재가 고등교육을 받기 위한 과정은 제도적으로 막혀있다시피했고, 이들 학교의 학력도 인정되지 않았다. 당장 일본 본토의 대학에서는 이들 학교의 교육이수를 '중졸', 아니 그 이하로 대우해주고 있었고 학제에 따라서는 아예 계산하지 않는 곳도 많았다. 그리하여 식민지 조선에서는 소위 '민립대학설립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으며[2], 마산지역에서도 뜻있는 인사들을 중심으로 구제고등학교에 준하는 고등교육기관 설립 움직임이 일어나게 된다.
한편으로는 마산에 살고 있는 일본인들도 일본인들대로 일제 당국에 불만이 많았는데(...) 마산공립심상고등소학교에 고등과를 설치하여 일본인 자녀들에게 중등교육을 시키고 있었으나 이 역시 깡통학력인 것은 마찬가지였으므로, 일본인들도 공립중학교 설치 요구를 줄기차게 요구했다. 특히 마산공립상업여학교를 마산고등여학교로 전환하여[3] 설치한 사례가 있었는데다 진해 신시가지와 원마산 상권에 밀리는 신마산 일본인들의 지역간 알력다툼까지 겹쳐, 고등교육기관 설치 운동은 일제 행정당국을 여러 모로 골치아프게 만들었다. 우선 마산공립심상고등소학교의 분교를 원마산 근처에 설치해 일본인들의 민심을 달래고자 했으나(현 무학초등학교) 이로서는 수요를 충족할 수 없었다. 게다가 조선인들이 세우려는 고등보통학교 설립운동이 점점 활기를 더해가자, 결국 공립중학교를 설치하면서 조선인도 일부 받도록 하여 무마시켰다. "공립중학을 설치해줬으니 니들 학교는 필요없지?" 라는 식으로 호신, 창신, 노동야학을 폐교시켜버린 것이다. 나중에는 일본인 학교였던 심상고등소학교의 고등과도 폐쇄시킨다.
설립 부지는 당시 신마산과 원마산 사이 군사용지로 텅 비어 있던 중앙마산[4]를 개발하고 그 산중턱에 학교부지를 마련했다. 아울러 마산고녀도 마산중학 인근으로 이전시켰는데, 현재에도 완월동 인근에 마산고, 마산여고, 완월초등, 마산중, 성지여중, 성지여고, 월성초등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건 이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1936년 5년제 마산공립중학교가 개교했다. 일본인 학생이 다수였으며 조선인은 30% 정도였다고 한다. 학교의 상징(교표)는 아래에 나오는 것처럼 무학 마크가 아니라 벚꽃을 형상화한 문양이었고, 이 문양이 교모 등에 붙어있었다고 한다. 일명 독수리마크라 불리는 무학 교표는 해방 이후 제정되었다. 조선인 학생 수가 적어서 일제강점기물 특유의 이지메가 있었을 법도 한데 의외로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학교 역사 기록물에 보면 해방 후 귀국하는 일본 학생들을 두고 양쪽으로 도열해서 서로 눈물을 닦는 사진도 있다(...) 여담으로 본관 건물 철거가 결정된 1997년 이후로 실제 철거에 들어간 2000년 사이 이 당시 일본인 졸업생들이 학교에 많이 방문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일본인들이 다수인 학교 한가운데에서 '''독립운동 비밀조직'''이 결성된 적이 있다. "마중독립단"이 그것으로, 1944년 6월 학교 지하창고[5]에서 2, 3, 4학년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현재 알려져 있는 가담자는 박기병, 박후식, 감영재, 조이섭, 강성중, 박성수(이상 8회), 김학득, 강순중(이상 7회), 이주국(6회). 일제 당국이 고문을 가해 얻어 낸 자료이기 때문에 알려지지 않은 조직원이 더 있을 것이란 추정이 가능하다.
이들은 7월 일제 당국에 검거되었고, 개중 2명은 구류로 풀려났으나 중심인물인 김학득은 모진 고문을 당하고 마산형무소[6]에 투옥되었다가 8.15 광복을 맞으며 풀려났다. 학교 한 켠에 뜬금없이 항일운동 기념비가 서 있는 것은 이 까닭. 1994년 세워졌다.
1950년, 학제가 미국식으로 개편되면서 1~3학년 과정이 마산중학교로 분리되었고, 마산고등학교는 3년제 고등학교로 거듭났다. 그리고 1달 뒤에 6.25 전쟁이 터졌다. 마산은 최전방 전선이었기 때문에 교사는 징발되어 야전병원으로 쓰였다. 그리고 현재의 솔밭 옆 한우아파트 자리는 공동묘지 터이며, 합포고등학교 자리는 화장터가 있었던 자리다(!). 그래서인지 90년대말까지만 해도 운동장 파 보면 유골이 나올 거란 소문이 돌기도 했다.
1952년 현재의 무학초등학교 인근에 이름이 똑같은 '마산고등학교'라는 또 다른 교육기관이 설립되었으나, 이내 현 마산고등학교로 흡수 통합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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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19 혁명 당시 시위대의 '''선봉에 섰던''' 학교다. 해당 항목 참조. 3.15 부정선거 규탄시위 당시 맨 앞줄에서 희생된 김용실 군은 당시 마고 1-C반 급장이었고, 다수의 학생들이 3.15 의거에 참여했고 일부는 사망, 부상당했다. 이후 4월 11일 김주열 군의 시신이 신포동 중앙부두에 떠오르며 촉발된 제2차 마산의거에서 선봉에 선 두 학교 중 하나였다. 마산고는 김용실을 잃었고, 마산상고는 김주열이 입학예정자였기 때문. 이들 시위대 중 일부는 마산여고에 몰려가 시위참가를 독려했는데 교장이 직접 여학생들을 인솔해서 나오는 풍경이 부산일보에 실려 전국으로 타전되었다. 그리고 이 사진은 4.18에 불을 붙였다.(...)
현재도 3.15 기념식이 열리는 날에는 수업을 하지 않고 당시 시위에 참가했던 학교의 학생들이 기념식에 참가하여 묘지를 참배한 후 시가행진을 한다. 아래 교복 항목에 있는 사진이 단체 묵념하는 모습.
1974년 마산/창원공단의 청년 노동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방송통신고등학교가 설립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야간생', '방통고생'이라고 하여 현재도 마고 교실에서 수업을 진행하는데 겹치는 시간대가 거의 없기 때문에 재학생과 야간생은 서로 거의 모른다.
자율형공립고로 지정된 것에서 보듯 경상남도 교육청 차원에서 뭔가 진행되는 사업이나 시행규칙 등은 항상 마고가 시범케이스가 된다. 이게 좋은 쪽이라면 다행인데 가끔은 안 그런 것도 있어서 문제.(...)

2.2.1. 관련 문서



3. 상징



3.1. 교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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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생 아재들이 일명 '독수리 마크'라고 부르는 교표. 과거에는 교모(모자)에 쓰였고, 현재는 배지의 도안으로 쓰이고 있다. 구 본관 중앙부 꼭대기에도 교표의 조형물이 걸려 있었고(위 사진에도 희미하게 보인다), 20세기 후반까지 명찰이 아크릴이던 시절에는 명찰 왼쪽에도 금박으로 새겨져 있었다. 그 외 학생수첩이나 각종 학교 상징물 등등에 널리 쓰이고 있다.
참고로 뱃지에 그려진 날개 문양과 실제 교표 문양이 미묘하게 다른데, 이것 때문에 동문회에선 설왕설래가 있었다(...) 그런데 정작 저 날개 마크는 '학'의 날개를 형상화한 것으로, 당연히 무학산의 웅혼한 정기를 상징한다. 여튼 언젠가는 전국 교표 콘테스트에서 1위를 입상한 적도 있다고 한다. (학교 공식 설명에 있다!)
21세기 들어 교정을 새단장한 후에는 학교 울타리 곳곳에 교표가 새겨져 있다.

3.2. 교훈


교훈은 '자율', '협동'이다.
지금 보면 어느 학교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교훈인데, 리즈시절에는 꽤 무게감 있는 말이었다. "시험쳐서 명문 고등학교에 들어왔으니 공부는 당연히 스스로 알아서 하는 거고, 사회에 나온 동문들끼리는 서로 똘똘 뭉쳐 도와야 한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3.3. 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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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시다(개잎갈나무).
이름에서 보듯 히말라야 산맥이 원산지로, 황폐한 땅과 추운 기후에서도 잘 자라고 늘 푸른 잎을 갖고 있으며 다 자란 나무는 매우 우람하다. 그 기상이 백년대개 인재육성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상단 사진에서 교문 양 옆으로 보이는 커다란 나무가 바로 히말라야시다로, 재학생들은 흔히 히말라야 사이다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원래 본관 양쪽 구석, 그리고 교문 양 옆으로 울창하게 군락을 이루었다. 그러나 현재 교문 왼쪽에는 저 나무가 '''없다.''' 64회 졸업생의 말에 의하면 당시 교장이 교문 개축공사를 하면서 나무를 팔아버렸다는 소문이 있다고 한다. 다만 당시 소나무제선충이 맹위를 떨치던 시기였기 때문에 죽어서 베어버렸을 수도 있다. 실제로 본관 왼쪽의 히말라야시다는 본관 신축 이전에 이미 말라죽어버리기도 했고.
그래서 현재는 교문 들어오면 바로 보이는, 본관 앞 히말라야시다만이 예전의 위용을 계속 뽐내고 있다. 실제로 보면 매우 거대하다.

3.4. 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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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산목.
나무도 꽃도 다 큼지막하여 태산목이라고 불리는 나무다. 사철 푸른 잎과 흰 꽃, 붉은 열매, 빼어난 향기가 인상적이다. 이 때문에 젊음의 열정과 기상을 상징한다.
이외에도 여름철만 되면 교화도 아닌 주제에 교정을 온통 꽃향기로 물들이는 놈이 있는데 바로 '금목서'. 금목서나무가 일제히 개회하면 온 천지에 꽃향기가 등천을 한다.

3.5. 교가, 응원가, 학교 관련 음악


[image]
태백의 정기서려 마재에 맺고
남해의 푸른 물결 합포에 치니
찬란한 오천년의 피를 이어서
동방의 홰를 들라 배달의 아들
청년의 큰 뜻 이 가슴에
자주의 정신 노래하는
마고 학도 사명은 거룩하도다
아득한 하늘가에 천마 달리고
청정한 수풀 속의 송뢰들으며
옳은 길을 밝히고 곧은 길 찾아
새 넋을 세우려는 우리의 학사
청년의 큰 뜻 이 가슴에
자주의 정신 노래하는
마고 학도 기상은 늠름하도다
새싹이 자라나듯 고난 헤치고
샘물이 솟아나듯 끊임이 없이
묻힌 옥 숨은 빛을 갈고 닦아서
새 힘을 기르려는 젊은이 일천
청년의 큰 뜻 이 가슴에
자주의 정신 노래하는
마고 학도 노력은 슬기롭도다
위 악보의 작곡자 부분을 자세히 보면, '''윤이상'''이라고 적혀 있다.
마산고등학교에 부임했던 한 교사의 블로그에 보면 교가와 응원가, 학림동산의 녹음파일이 올려져 있다. 게시물 보기
실제로 공식행사에서 2절이상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7]
공식 교가 외에도 졸업식 때 부르는 '졸업가', 야구경기 때 주로 부르는 '응원가'가 있고, 공식 응원가 외에 '마고 단가'가 있다. 그 외에도 마고에 재직하던 음악 교사가 작곡한 '학림동산'이라는 노래도 있는데, 이 쪽은 합창부 외에는 잘 부르는 일이 없어서 졸업생들도 잘 모른다(...)
야구 응원가는 교가보다는 신나는 음계를 갖고 있는데, 자세히 들어보면 'KBS 노래'랑 첫 소절 계이름이 거의 똑같다.
타오르는 태양이 창공에 높고
찬란한 아침 해는 승리의 표상
무학의 정기 넘친 마고 건아여
지축을 흔들어라 꿈을 펼쳐라
승리의 월계관을 바라보면서
기쁨에 북받쳐 노래하리라
마고 마고 전통에 산다
마고 단가는 남진의 <마음이 고와야지>를 개사한 노래라서, 마산고등학교 야구부가 재창단되던 1970년대 초반쯤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거 실제로 불렀다가는 마산공고 축구부나 창원기공하고 패싸움 붙기 딱 좋은 노랫말인지라[8] 응원전이 절정으로 치달을 때 외에는 쓰지 않는 듯.

3.6. 교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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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동복 사진.[9] 2013년 기준으로 3학년 때 교복이다.[10] 교복자율화 때 기존 교복이 폐지되었다가, 이후 현재와 같은 정장타입으로 부활했다. 현재 동복은 사진과 같이 평범한 정장타입 투버튼이고, 전체적으로 밤색 컬러에 윗컬러 부분만 흑색인 투톤이다.
조끼와 넥타이가 검은색이라 밤색과 매치가 잘 안된다는 의견이 있다
[image]
전체적으로는 이런 느낌.[11]
문제는 하복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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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현재도 과거와 같은 시퍼런 상의를 그대로 부활시켜 쓰고 있다.
다만 마고 하복만 이런 것은 아니고, 괴가 하복을 부활시켜 쓰고 있는 곳은 마고 외에도 전국적으로 몇 군데 있다. 경기고, 경남고, 부산고 등이 그 예. 즉 학교 뱃지와 명찰을 떼면 이들 학교 하복은 그냥 다 똑같다.
문제는 마고의 경우 어시장에 있는 특정 교복사에서만 유독 컬러톤이 다른 원단을 쓰고 있다는 것인데, 이 때문에 전교생 운동장 조회 시간에 보면 파란색 상의 사이에 하늘색이 간간이 보인다. 교사들이건 학생들이건 별로 신경쓰지는 않는 듯.

4. 학교 시설



4.1. 본관


본 문서 상단에 있는 2장의 사진에 나오는 건물이다. 현재의 건물은 2002년 신축한 것으로, 그 전까지는 1936년 개교 당시 건립한 2층 건물에 1층을 더 증축한 건물을 본관으로 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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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구 본관 앞에서 촬영된 사진. 현대의 일반적인 학교 교실[12]과 달리, 교실 칸 하나당 하중기둥 2개에 세로로 높은 창문이 3개씩 있는 구조다. 옛날 기술로는 기둥과 기둥사이를 널찍하게 띄우기 어려웠기 때문. 게다가 교실 문도 일반적인 작은 도르래가 미닫이 바닥에 있는 형태가 아니라, 겉으로 보기에도 육중한 철도르래가 문 위에 붙어 문이 현수식 모노레일마냥 매달려 있는 구조였다. (종합병원 병동에서 보이는 문턱 없는 미닫이문 생각하면 된다.)
구 본관은 옛 경기고등학교(현 정독도서관) 건물과 그야말로 판박이다. 같은 시기(1933~1936), 같은 주체(일제 당국)에 의해 지어졌기 때문에 건물 양식이나 설계 개념이 비슷하다. 정독도서관과 구 마고 건물이 다른 점은 중앙현관이 개방식이냐 아치형이냐, 건물 날개가 곧게 뻗었나 끝으로 굽어있었나 정도의 차이 뿐이다. 마고 건물은 양 끝에 북향 교실이 2개 달려 있어서 화학준비실, 화학실, 물리준비실, 물리실 등 특수교실이나 때로는 일반 교실로 활용했다.
사실 마고 본관이나 정독도서관이나 외형 및 설계 자체는 일본 도쿄의 구 '''대본영육군부''' 건물과 판박이이다. 1990년 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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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3층을 증축했는데 1, 2층과 달리 천장도 낮고 바닥도 플로어링이었으며 심지어 일부 천장은 슬레이트 지붕이었다.[13] 이 때문에 등록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떨어지는데다 모르타르가 떨어져나가는 등 1990년대부터 신축 논의가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IMF 크리로 계속 미루어지다 2000년대에 들어와 드디어 철거했다. 원래 겨울방학 중 철거하기로 했지만 철거 소식이 알려지자 동문 할배들과 심지어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 졸업생 할배들까지 줄줄이 찾아와서 또 미뤄졌다(...)
신축 본관은 지상 4층, 지하 1층으로 샤워실 등 신식 시설이 구비되어 있다.
현재 재학생 경우 지하1층[14]은 출입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신축 본관 2층에 본교무실, 1학년교무실, 방송실, 컴퓨터실[15], 메이커스페이스[16][17][18], 본관 3층에 도서관, 사회교과실, 수학실 2개, 진로교과실, 방송통신고등학교 교무실, 학생회실,본관 4층에 2학년 교무실, 과학교무실, 과학실 4개, 국어교과실이 있다.

4.2. 후관


본관 뒤에 있는 4층짜리 건물. 과거 1학년 일부와 2학년이 썼지만, 현재는 3학년이 쓰고 있다. 별다른 특징없는, 그냥 대한민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플로어링 바닥의 학교 건물이다. 신축 전 본관과는 1층 현관과 일본식 지붕을 씌운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본관 신축 후에는 2층끼리 구름다리로 연결해놓았다. 본관과 후관 사이에는 수돗가와 체육시설, 그리고 연못도 수조도 아닌 이상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있었는데 다.

4.3. 생활관


언덕배기 위에 있는 독서실 비슷한 공간. 야간자율학습 때 전교 1등부터 50등까지는 이 건물에서 공부시켰다. 1990년대 당시 기준으로 문명의 이기인 '''에어콘'''이 달려있었다. 그러면 일반 학생들은? 털털거리는 고물 선풍기를 감수하고 땀을 닦아가며 공부할 수밖에... 게다가 구 본관은 천장이 높은 주제에 환기가 잘 안 되어서 찜통이었고 선풍기 바람도 잘 안 닿아서 3학년 학생들은 팬티만 입고 수업받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후술할 학명관이 생긴 이후 현재는 운동부 숙소로 이용되고 있다.

4.4. 체육관


흡사 예배당처럼 생긴 옛 체육관을 싹 밀어버리고 1994년 준공했다. 1999년 소년체전을 경상남도에서 개최했을 때, 농구부 경기는 이 곳에서 열리기도. 1층에는 농구부 숙소가 있고, 지하층(1층처럼 보인다)에는 급식소가 있다.

4.5. 학명관


鶴(학 학) 鳴(울 명) 館(집 관)
마산고등학교의 기숙사이다. 2015년 10월 7일 준공식을 가졌다.
기숙사 완공 당시에는 부영그룹 이중근 회장의 호인 '우정'을 따다붙인 우정학사라 불렸다.

4.5.1. 시설


사감실: 1층에 위치, 사감 교사의 방이다. cctv 모니터링 및 기숙사내 방송장비 등이 구비되어 있다.
샤워실: 1, 2, 3층에 하나씩 위치, 1층에는 샤워기 3개+세면대 3개, 2층에는 세탁기 1개와 샤워기 5개, 3층에는 샤워기 5개가 있다.[19]
보일러실:1층에 위치, 보일러 시설이 작동되는 방이다.
화장실: 1, 2, 3층에 하나씩 위치, 화장실이다. 1층에는 장애인 화장실도 있다.
정독실: 4층에 위치, 학생들 개개인이 사용하는 책상과 사물함이 있으며, 또한 졸음방지용 '키다리 책상', 일체형 컴퓨터 11[20]+1(교사용)대가 구비되어 있다.
발코니: 1층은 출입구라 없고, 2, 3, 4층에 동쪽-서쪽으로 하나씩 위치.
기숙사 호실: 학생들의 생활공간. 2층침대 2개, 사물함 4개, 빨래 건조대, 소화기, 쓰레기통 등이 구비되어 있다.
교사실: 기숙사 담당 교사의 방이다. 3층에 위치해있다. 도어락으로 잠겨 있으며, TV, 개인 냉장고등 학생들 방에 비해 좀 더 고급스럽다.
청소용구함: 1, 2, 3층에 하나씩 위치, 여러 청소 용구들이 구비되어 있다.
냉장고: 1, 2, 3층에 하나씩 위치, 학생들이 간식을 보관할 수 있게 되어 있다.

4.6. 기타 시설


  • 테니스장
  • 학림동산 - 본관 뒤편에 있는 연못. 네이밍을 강제규가 했다는 설이 있다.
  • 야구부 연습장 및 숙소
  • 매점 - 원래 급식소 옆에 있었는데 현재는 연못 왼쪽에 있는 건물[21]에 위치.

5. 교기(校技)



6. 학교 생활


수업 시간은 50분이며, 쉬는 시간은 10분이다. 타 학교와 달리 점심시간 등 텀이 긴 쉬는시간에는 쉬는시간 종료 10분 전 미리 울리는 '예비령' 개념이 있다. 이 종소리도 특이했는데, 1930년대에 쓰던 기계식 벨[22]을 2000년대까지 쓰고 있기도 했다.
경례 구호는 "단결"이다.
  • ~08:20 등교
  • 08:40 ~ 09:30 1교시 수업
  • 09:40 ~ 10:30 2교시 수업
  • 10:40 ~ 11:30 3교시 수업
  • 11:40 ~ 12:30 4교시 수업
  • 12:30 ~ 13:20 점심시간
  • 13:30 ~ 14:20 5교시 수업
  • 14:30 ~ 15:20 6교시 수업
  • 15:30 ~ 16:20 7교시 수업
  • 16:20 ~ 16:35 청소시간
  • 16:35 ~ 17:45 8교시 (보충)수업. ,선택으로 야자를 할수 있다.
  • 17:45 ~ 18:40 저녁시간
  • 18:40 ~ 20:00 야간자율학습 1교시
  • 20:10 ~ 21:00 야간자율학습 2교시
  • 21:10 ~ 22:00 야간자율학습 3교시. 3학년은 야자를 오후 10시까지 하고 귀가한다. 수능 이후에는 2학년들이 10시까지 남아 야자를 한다.

6.1. 주요 행사


  • 무학제 - 매년 수능 치룬 후 12월에 진행되는 축제(2019년에는 10월에 진행됐다). 남학교 축제라 아무도 안 올 것 같지만 의외로 인근 여학교에서 많이들 놀러온다.[23] 여학교 교복을 빌려 여장 쇼 하는 것 정도는 연례행사로 있는 일(...) 초청공연은 해마다 학생회에서 주변학교에 협조요청을 통해 일정조율이 된 학교 및 시설에서 온다.(2~4학교정도) 보통 이틀에 걸쳐서 진행되었지만 2015년부터는 하루로 줄었다.
  • 체육대회 - 흔한 체육대회지만 하다보면 은근히 경쟁붙는다. 5월중으로 진행되며 보통 이틀에 걸쳐서 진행된다.
  • 마고리그 - 축구, 농구를[24] 토너먼트식으로[25] 진행한다. 9월중으로 2주간 진행된다.
  • 장도식 - 수능 며칠 전 강당에 모여 고3 수능을 잘치자라는 의미를 가진 행사. 모교를 졸업하신 대 선배님들이 오셔서 연설도 하신다.

6.2. 학교 주위 상권



6.2.1. 개요


마산고등학교의 주변 상권에 관해 서술하며 폐업한 상점은 취소선으로 처리한다.
달동네이긴 하지만 구청 쪽의 중앙동, 장군동을 비롯하여 경남데파트상가를 끼고서 있는 신포동, 완월동[26], 자산동 일대는 나름 살기 좋은 동네이다.

6.2.2. 목록


  • 어울림분식 - 한 번도 안 가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가본 사람은 없는 곳. 마산고에서 자산동 시장방향으로 내려가다보면 마산중을 조금 지나서 위치하고 있다.유튜브 리뷰
> 마산고 학생의 성지
아는 사람만 아는 곳. 20세기 당시에는 간판조차 없어서 그냥 '분식집'이라고 불렀다. 지도에 검색해도 안나오고, 가게 근처까지 가서 봐도 이게 장사를 하는 건지 마는 건지 불이 켜져있는 건지도 알 수가 없을 정도로 허름한 가게인데, 기다려서 먹어야 될 정도로 동네주민들과 학생들의 인기가 있는 식당이다. 요리부터 카운터 보는 것까지 모든 일을 주인 할머니 한 분이 혼자서 운영하고 계시는 가게이다.
메뉴는 라면류(라면, 만두라면, 떡라면)와 국수류(물국수,비빔국수)로 나뉘는데 가성비가 개쩐다.
만두라면, 떡라면, 2,500원 비빔국수, 물국수, 라면 2,000원(2018년 10월기준). [27] 곱빼기는 500원 추가(참고로 일반도 양 엄청 많다.)
추천 메뉴는 물국수. 국수고명은 경상도 물국수가 으레히 그렇지만 깨소금, 양념장에 부추나물 얹힌게 다인데 소위 '존맛' 이런 느낌은 아니지만 조미료 들이부은 그런 맛이 아닌, 과하지 않고 멋부리지 않은 맛이라 할 수 있다. 비빔국수도 괜찮은데 팁을 주자면 4교시 체육시간일 때 축구나 농구 한사바리하고 비빔국수랑 어묵국물(비빔국수 시키면 나옴. 육수개념)먹으면 개꿀. 비빔국수도 많이 맵거나 시지도 않고 닥 오이채나 김가루정도로 꾸미지않은 시원한 맛이다.
한 가지 훈훈한 점이라면 할머니 혼자서 운영하시는 점을 손님들이 배려해서인지(?) 서빙을 손님이 자발적으로 한다. 다 먹은 그릇은 손수 치우고 정리하여 주인할머니께 건내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으며 40대, 50대 단골 손님분들은 주인할머니와 이런저런 안부도 나누는 모습도 살펴볼 수 있다.
밑반찬도 깍두기말곤 없으며, 한두 평 남짓한 부엌에 한켠의 방이 전부이고 작은 가게이지만 뭔가모를 정감을 찾아 볼 수 있는 가게이다.
리얼 무슨 느낌이냐면 백석의 유명시인 국수보다도 소박하면서도 훈훈한 분위기라고 생각하면 된다.
옛날엔 교복입고 가면 할인도 됐다고 하는데 요새는 없어진 얘기인듯....
혹시 대학을 마산권이 아닌 다른 지방이나 다른 나라(...)로 가고 싶다면 이 맛을 잘 기억해두는 게 좋을 것 같다. 서울을 비롯한 타 지역에는 마산 특유의 멸치육수 진한 그 물국수가 없다. (잔치국수가 생김새는 비슷하긴 한데 물국수와는 다르다 물국수와는...) 그 꼬들꼬들한 라면 맛도 졸업한 지 수십년이 지나도 가끔 생각날 때도 있고.
  • 뚱스밥버거 - 심온길과 고운길이 만나게 되는 완월동 삼거리 쪽에 위치한 2014년 즈음부터인가 생기게 된 가게인데 급식이 맛없는 날이나 급식이 없는 모의고사날 가기에 딱이다. 가격도 비싸지 않아서 대부분 주위 학교의 학생 손님만 오간다.
여담으로, 주위에 여학교가 많아서 그런지 몰라도 매장에 포스트잇으로 도배되어 있다.
  • 이정하 수제돈까스
  • 국수나무 합포구청점 - 잔치국수 등 국수를 전문적으로 하는, 경상남도 쪽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체인점이다.
  • 명랑시대쌀핫도그 마산중앙동점

7. 관련 인물 및 동문회




7.1. 출신 인물 및 관련 인물


가나다순으로 정렬합니다.
나무위키에 등재될 정도의 저명성 있는 인물만 기록 가능합니다.
강용석의 고소한 19에서 명문고등학교 랭킹을 매기며 12위에 등재시켜 놨다.
주로 정치, 경제계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창원시 문서의 출신 인물 중 상당수도 여기에 겹친다.

이 외에, 특히 졸업생이 아니라도 1950~1970년대에는 교직원으로 재직했던 유명인사들도 있다. 대표적인 사람이 성문종합영어 저자인 송성문, 이수인 동요곡집의 저자인 이수인, 그리고 윤이상 선생은 교편을 잡던 중 교가를 작곡하였으며, 「꽃」이라는 시를 지은 시인 김춘수도 본교에서 재직하였고 천상병이 마산중학교 5학년이었을 당시 그의 담임교사였다.

7.2. 동문회


총동문회는 타 학교와 달리 졸업 후 10년이 지나면 가입 대상이 된다. 동문회빨이 ㅎㄷㄷ하다는 건 대부분 이 총동창회를 의미한다. 여타의 지역명문고들이 그렇지만, 이 총동문회는 지역사회에서는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학생들은 졸업 직후에는 지부별로 알음알음 소속되다 총동문회로 넘어가는 듯.
재경 마고동문회에서 '재경'이라는 문자 그대로 서울에서 수학하는 학생들 및 일부 수도권 대학에서 수학하는 학생들[30]이 가입 대상이다. 한때 국회의사당 뒷마당을 빌려서 체육대회를 연다는 소리가 있었는데 최근 2013, 2014년에는 서울특별시 강남구 서초동에 위치한 서울시 인재개발원에서 체육대회를 진행했다. 2015년에도 역시 같은 장소에서 체육대회를 연다.

8. 이용 가능한 대중교통



8.1. 버스


완월동
100, 105, 254, 266
완월동(맞은편)
100, 105, 254, 265
완월초등학교
100, 262
완월초등학교(건너편)
100, 262
한우아파트(평화궁전맞은편)
105, 254, 262, 266, 707
한우아파트(한독치과앞)
105, 254, 262, 265, 707

9. 사건·사고



10. 기타


  • 모교 출신들의 교생이 많이 왔으나, 현재 마산고는 협력학교에 포함되지 않아 교생이 오지 않는다.

  • 교문 앞 완월초등학교 담벼락에 있는 벽화는 1995년 당시 미술교사로 재직 중이던 한 졸업생과 미술부원들이 그린 것이다.
  • 본관을 신축하면서 원래 히말라야시다 뿌리 밑 본관 동편 옆에 있던 항일운동기념비와 3.15 학생의거 기념비는 현재의 위치인 교문 옆으로 옮겨졌다.
  • 본관 옆 주차장 자리는 원래 2층짜리 부속건물이 있던 곳이다. 2층은 열람실, 1층은 서고와 음악실로 사용되었다. 열람실은 24시간 개방이었고 밤새면서 공부하는 근면한 학생들도 이따금 보였다.
  • 과거 테니스장 옆 가건물에 이발소가 입주해 있었다. 때문에 두발규정을 지적당하면 쉬는시간 10분 동안(!) 깎고 오는 학생들이 많았다. 이발소 아저씨가 5분 사이에 바리깡으로 쓱쓱 밀어버렸기에 가능한 일.
  • 학년마다 배지 색이 다르며 1학년은 흰색, 2학년은 초록색, 3학년은 빨간색이다. 배지 색 뿐만 아니라 명찰도 학년마다 색깔이 다 다르다. 옛날에는 옷핀형 플라스틱으로 만든 명찰을 하고 다녀 편히 교체가 가능했지만 교장이 새로 부임하면서 명찰이 플라스틱이 아닌 교복에 직접 바느질을 해서 박아야 하는 형식으로 바뀌었다. 학년마다 색을 고정시켜 버려 1년씩 진급할 때마다 일일히 명찰을 다시 뜯어내고 다시 바느질을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생겼다. 그러면서도 이름표의 색깔을 학년마다 고정해둔 이유는 옛날에는 진급 할 때마다 이름표의 색깔을 그대로 가지고 올라가다가 3학년이 빨간색일 때 졸업했던 졸업생들이 명문대에 많이 가서 이게 미신이 되어 이름표의 색깔을 고정하게 되었다. 사실 개교 초기 명찰은 천으로 된 것이었는데 어떻게 보면 당시로 회귀한 것이기도 하다. 1960년대에는 그냥 천 명찰이었고, 1970년대에는 교련교육이 강화되며 이름과 함께 학도호국단 넘버가 함께 기재되었다. (조회시간에 '학생장' 직책이 있는 건 그 흔적이다.) 대략 1980년대부터 아크릴 명찰이 사용되었는데, 아크릴은 속칭 간지(?)가 나고 패용이 편리했지만 충격에 잘 깨진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리고 한 번 깨지면 주문제작에 며칠 걸려야 했기 때문에 이 기간동안에는 선도부 및 교사들과 실랑이를 매일 아침마다 벌여야 한 것은 덤. 하지만 2020년도부터 이름표엔 학번이 들어가지 않는다. [31]
  • 완월초등학교와 마고 사이를 가르는 2차선 도로는 봄이 되면 벚꽃이 만개하여 장관을 이룬다. 이 때문에 봄 등굣길엔 벚꽃 을 보기 위해 이 쪽으로 통학로를 질러 가는 여고생들이 왕왕 있다.

  • 버스로 통학하는 경우 산복도로를 따라 학교, 특히 여학교가 몰려있는 지리적 특성 덕분에 또래 여학생을 접할 기회가 아주 많다.

[1] 이 학교의 자금줄이자 독립운동 자금의 출처였던 원동무역의 창업자 옥기환 씨는 해방 후 첫 마산시장을 역임했다.[2] 다만 경성제국대학의 경우 민립대학운동 이전부터 설치계획 자체는 있었다고 한다.[3] 대부분 일본인 입학생들이 많았고 조선인은 약 20% 정도[4] 현 마산합포구 자산동, 완월동, 중앙동, 장군동 일대[5] 현 교사 동측 반지하 시설물은 구 본관 시절에도 반지하 창고와 옥외 변소가 있던 곳이었다.[6] 현재의 회성동 마산교도소가 아니라 불종거리 삼성생명 빌딩 터에 있었다.[7] 부르는걸 본적이 없지만 혹시 몰라 거의를 표기함[8] 가사가 대략 이러하다. "새까만 책가방의 마고생/겉으론 거만하게 보여도/한번만 마음주면 변치않는/마고생이 정말 최고야//미팅만 잘한다고 상고냐/기술만 배운다고 공고냐/한번만 마음주면 변치않는/마고생이 정말 최고야//엿나 달밤 어린애들아/이내몸을 붙잡지마라/일편단생 만나더라도/마고생이 정말 최고야" [9] 뜬금없이 왠 일반학생 사진이냐 할수 있겠지만, 시각장애 1급을 딛고 특수학급이 아닌 일반 교실에서 공부하여 전교 수석을 차지하며 서울대학교에 합격한 노용후 군의 사진이다. 관련기사 아래 '출신인물' 항목 참조.[10] 이름표와 뱃지 배경색이 학년마다 다르다. 1학년은 흰색, 2학년은 초록, 3학년은 빨강. 인근의 마여고, 성지여고, 중앙고 등이 기수별로 3년 내내 같은 색을 써서 구분하는 것과 다른 부분.[11] 구암동 3.15 민주묘지에 참배하고 있는 사진이다.[12] 교실 벽에 하중기둥이 1개 있고 양 옆으로 창문이 2개[13] 상단부 2번째 사진의 오른쪽 날개부분에 천장 마감이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컴퓨터실은 비슷하게 서쪽 3층 날개부분에 입주하고 있었다.[14] 체육과 교무실 제외[15] 19년까지 스터디실로 사용됨[16] 공학1실과 공학2실, 공학준비실로 구분된다[17] 기존 컴퓨터실, 목공실(사용안함)을 2020년 MOU체결과 함께 공사를 거쳐 메이커스페이스가 되었다.[18] 공학1실에는 3D프린터 6대, 레이저 커팅기, 목공장비 등이 구비되어있다.[19] 샤워헤드가 자주깨진다. 층별로 5개보다 적다고 보는게 맞을듯 하다 [20] 10대라고 보는게 맞는듯 하다. 한대는 자주 고장나서 수리받으러 자주 없어진다.[21] 본관 내 서쪽[22] 스위치 누르면 전자석이 복싱에 쓰는 공 같은 걸 때르르르릉하고 때리는[23] 2019년 37회 무학제 기준 주변 고등학교 학생으로 2층좌석이 다 찼을정도...(순간최대인원400명, 총인원 500명 추산/남녀비율 대략 1대1)[24] 종목은 변경 및 추가될수있음[25] 리그라면서요...;;[26] 부산의 완월동이 아니다![27] 같은 시기 서울시내 평양냉면 가격은 6,000원에서 11,000원으로 곱절 가까이 올랐다.[28] 중선거구제인 제12대 국회의원 선거는 마산시 지역구. 총 5선.[29] 사장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해임됐다[30] 성균관대학교 자연과학캠퍼스, 경희대학교 국제캠퍼스 학생도 대상이 된다. 이원화 캠퍼스라서 그런 듯. 국어사전 이원화 캠퍼스[31] 80회 학생회에서 개인정보침해를 문제삼아 탈착식 명찰로 교체를 추진했지만 인성부에서 학번만 제거하기로 결론지은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