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평가
1. 서론
냉정하게 말해서 '''일제의 식민사관 덕분으로 필요 이상의 과분한 평가를 받았고, 이 평가가 21세기 현대에도 대중적 인식으로 남은 럭키 연산군.''' 조선 대표 암군으로 여겨지는 앞의 선조, 뒤의 인조는 광해군과 비교하면 군주로서는 거의 선녀라고 해도 무방하다. '보는 관점에 따라 해석이 극단적으로 갈리는 인물이다'라는 평가도 있는데 이건 최근의 학계 연구에서 '광해군을 왕좌에서 끌어내린 당대 조선인들의 행동은 당연한 것이었다'라는 얘기가 나오니까 광해군빠들의 점점 입장이 후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평가에 가깝다. 까놓고 밀실, 야합 정치를 벌이고 조선의 정치구조를 망가뜨려 세도정치로의 길을 튼 정조와 함께 가장 대중적으로 과대평가 받는 조선 군주 가운데 하나다.[1]
1.1. 세자 광해군
초반에는 전쟁영웅으로 상당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선조가 영변행궁에서 신하들을 알연한 후 요동으로 가겠다고 말하는 것을 신하들이 애써 말리고 있었다. 심지어 선조는 왕위도 다 넘기고, 신하들도 안 따라와도 되니 자신이 요동으로 가게 해달라고 한다.[3] 이 와중에 광해군은 조선을 떠맡게 된 것이다. 광해군은 조정을 직접적으로 위임받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역사학에서는 구분을 쉽게하기 위해서 이를 '분조'라 칭하고 있다.세자는 평안도 영변에 머물고 대가는 정주로 갈 것이니 준비하라는 전교
"본 고을이 조폐(凋弊)하여 음식물을 제공할 수 없다고 하니 내전이 이곳에 도착한 뒤에 세자는 이곳에 머물도록 하고, 대전(大殿)은 바로 박천(博川)으로 가 가산(嘉山)을 지나 정주(定州)로 갈 것이니 모든 일을 즉시 예비하여 떠날 수 있도록 하라. 이런 뜻으로 즉시 시종(侍從)을 파견하여 그로 하여금 조치하여 준비하도록 하라."
상(선조)이 영변행궁(行宮)에 납시어 호종한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최흥원(崔興源)이 아뢰기를,
"상께서 정주(定州)로 이주하고 싶으시더라도 우선은 여기에 머무르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에 대한 내 생각은 이미 정해졌다. 세자는 여기에 머무를 것이니 여러 신하들 중에 따라오고 싶지 않은 사람은 오지 않아도 좋다."'''
였다. 정철(鄭澈)이 아뢰기를,
"세자가 지금은 여기에 머물다가 끝내는 정주(定州)로 갈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귀성(龜城)이나 강변(江邊) 등처로 가야 할 것이다."
하였다. 철이 아뢰기를,
"세자가 여기에 머무르면 힘이 분산되어 조정이 모양을 이루지 못할 성싶고 인심도 역시 요동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호종하는 관원을 여기에 많이 머물게 하고 나는 가벼운 행장으로 옮겨갈 것이다."'''
하였다. 철이 아뢰기를,
"우선 평양의 소식이 오는 것을 기다려 봄이 어떻습니까."
이날 밤에 비망기로 전교하였다.
'''"내선(內禪)[2]
할 뜻을 말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대신(大臣)들의 반대를 받아 죽고 싶어도 죽을 수도 없다. 오늘 이후로는 세자로 하여금 국사를 임시로 다스려 관작의 제배(除拜)나 상벌 등의 일을 다 편의(便宜)에 따라 스스로 처결할 일로 대신들에게 이르라."하자, 대신들에게 중난한 일이어서 할 수 없다는 뜻으로 아뢰니, 답하기를,
"내선은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 선조실록 27권, 선조 25년 6월 13일
광해군은 남은 관료들을 이끌고 강원도 이천으로 향한다. 당시 강원도 이천은 일본군의 손에 떨어지지 않았으나, 그 곳을 가기 위해서는 일본군 점령지를 지나야 했다. 이후 광해군의 조정은 전시조정의 역할을 다한다. 백성을 위무하고, 흩어진 관리들을 수습하여, 일본군과 맞써 싸웠다. 사실상 전쟁초기 7개월은 군주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광해군이다.[4]
정탁의 <피난행록>에는 이러한 점이 서술되어 있다. 7월 17일의 기록에는 “평양을 지키지 못한 이후부터 온 나라 백성들이 대가(大駕)[5] 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해 크게 우러러 전하를 사모하고 슬퍼하고 있다가, 동궁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인심이 기뻐하며 마치 다시 살아난 것 같았습니다. 도망쳤던 수령들도 점차 관직으로 돌아오고 호령 역시 행해져 회복의 기회가 조금씩 가망이 있습니다”라고 기재돼 있다. 7월 27일 기록에도 “경기도 의병들이 곳곳에서 봉기해 서로 앞을 다퉈 적을 잡아 적세가 조금 꺾이고 있습니다”라고 한다.
광해군의 분조는 임진왜란 초반에 큰 역할을 했다. 선조는 의주에서 요동행을 외치며 국가를 버를 생각만 하고 있었던 희대의 기업가 마인드를 지닌 황당한 왕이었다.[6] 조선의 역사를 통틀어 조선의 창건자인 이성계와 그리고 같이 전쟁터에 나갔던 정종을 제외한다면, 외적과의 전면전에 직접 뛰어들어 맞서 싸운 경험이 있는 왕은 '''광해군이 유일하다.''' 농성을 포함한다면 인조도 해당되겠지만 이쪽은 삼남 쪽으로 도망치려다 갇혀서 농성했기 때문에 본의로 임한 것이 아니라서 경우가 좀 다르다.
선조의 도주로[7] 백성들이 궁궐에 불을 지르고[8] 왕의 아들들을 (깽판을 쳤다지만) 왜군에게 넘기던 시절[9] , '''유일하게 왕실의 일원으로서 해야할 일을 책임있게 그리고 꽤 성공적으로 임한 인물로 민심 수습과 사기 회복, 왕실 이미지 회복'''의 효과는 꽤 컸다. 그 때 광해군의 나이 18살이었다. 조선에서도 왕이 20살이 되지 않으면 아직 미성숙하다고 하여, 어린 왕의 할머니나 어머니가 수렴청정을 했다.[10] 그 와중에 갑자기 분조를 떠맡게 됐음에도 도주하기는 커녕 적진 한복판에 들어가 항전을 지휘했다. 이 때 대처는 한국사 통틀어 다른 전란기 왕들과 비교해봐도 꿇리지 않을 정도. 실제로 조선 신하들과 명나라에서는 '선조를 상왕으로 올리고 광해군을 왕으로 즉위시켜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논의도 있었다.
1.2. 왕 광해군
정권 초기에는 내치와 외치 모두 업적이 있으나 폐모살제, 불필요한 숙청과 궁궐공사, 대북에 밀집된 정치권력으로 인하여 후반으로 갈수록 비호세력들의 입김에 따라서 정책적인 동력을 잃으며 민심과 건전한 국정을 상실했다.
광해군의 몰락은 불필요한 수준의 정치, 경제의 삽질을 벌이면서 시작된다. 특히, 내치에 관심이 부족했던 대북파에 권력을 싣어주며 함께 폭주하는데, 문제는 그들이 점차 광해군의 정치 개입을 부채질할 때 다른 파벌을 견제하고 내치를 방치하며 국정 운영에 있어서 내치와 국가중흥에 대한 방향성이 표류하게된 것이다. 특히 강경파들은 가장 먼저 남인들의 거두였던 류성룡을 실각시키고, 심지어는 광해군의 즉위를 지지해주었던 서인들의 대학자 이항복 등을 광해군이 숙청하도록 유도하면서, 대북파가 비정상적인 숙청의 주도권을 쥐고 권력을 탐닉하는 상황을 방치하게 된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광해군의 즉위를 지지하는 등 처음에는 갈등의 골이 별로 없었던 남인과 서인들이 당연히 광해군과 원수가 되어버렸고, 대북파들 중에서도 특히 내치에 관심이 없는 일부 권신이 권력을 얻으면서 광해군의 폭주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광해군이 의도적으로 특별히 외치만 신경쓰고 내치를 망치려고 했다기보다는, 본인의 궁궐공사와 숙청을 지지해주는 정치세력 만을 비호하다보니 자연스레 다른 정치세력이 박살났고, 정치다툼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점점 국익을 위한 정책을 논하는 신하들보다는 살벌한 싸움판에 적응한 신하들이 살아남았으며, 나중에는 그렇게 권력을 독점했던 대북 세력마저도 서로 분열하면서 점차 외치, 내치 모두 점점 상황이 목적성이 모호한 상황으로 돌아가게 되자 특히 내치 분야에서부터 궁궐공사와 매관매직을 시작으로 상황이 악화된 것이 현실에 가깝다.
게다가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인경궁, 자수궁 등의 무리한 토목 공사로 조선의 재정을 파탄냈으며, 이는 후대의 흥선대원군과도 겹치는 부분이다. 심지어, 흥선대원군은 상당한 개혁으로 민심을 얻었으나 경복궁 토목공사로 민심을 바로 잃어버린다. 그런데 광해군의 궁궐공사는 흥선대원군의 2개를 뛰어넘는 무려 5개 궁궐을 동시에 지었다. 게다가, 흥선대원군처럼 민중과 신하들의 마음을 잡을 만한 국익에 도움이 되는 개혁을 시도한 후에 궁궐을 지은 것도 아니고, 그냥 닥치고 궁궐공사를 무려 5개나 진행했으니 백성들은 물론이고 정치싸움과는 동떨어진 제정신이 박힌 신하들이라면 이러한 막장 내치를 좋아할 리가 없었다.
그밖에도, 광해군은 국문횟수가 많았는데 친국(親鞫) 회수가 광해군은 15년 동안 무려 344건인데, 이는 51년이라는 초장기 집권을 했던 영조 다음의 2위 기록이다. 영조는 재위기간이 길었고, 대규모 옥사가 환국이 잦았던 [숙종(조선)|[숙종]]과 신임옥사가 벌어진 경종 시절에 비해 적은 편이었음에도, 1755년에 일어난 나주 괘서 사건으로 소론 인물들이 대규모로 숙청되는 탓에 영조의 친국 횟수도 덩달아 증가했다. 그런데 영조의 친국 횟수가 나주 괘서 사건 같은 특정 사건으로 급속도로 증가한 것과 다르게, 광해군 시절에는 불필요한 대규모 옥사 사건이 빈번했다. 심지어 봉산옥사, 칠서의 옥, 신경희의 옥, 계축옥사까지 광해군은 다른 왕들은 1번도 많다는 옥사를 무려 4번 이상를 일으키는데, 현실적으로 광해군이 5개의 궁궐공사, 여러 차례의 옥사, 수백회의 친국을 했는데, 좋은 통치로 보답한 것도 아니고 갈수록 다른 분야는 훼방을 놓으면서 궁궐 공사로 국가를 버티기 힘들 정도로 만든 것은 광해군 옹호론자들도 도를 넘은 악행으로 비판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나마 고평가받는 외치도 이러한 내치 때문에 광해군과 몇몇 최전선 일군들의 업적이었을 뿐 제대로 된 탄력을 받지 못했다.
한마디로, 광해군의 후반기에 부정부패와 매관매직 같은 사회상의 모순이 집약되고 정책이 제대로 돌아가지도 않는 막장 통치와 국고파탄을 부추기는 궁궐공사 때문에 이미 '국가 경영에 비하여 패악이 커서', '쫓겨날만해서' 쫓겨났던 상황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왕이 된 세력조차 광해군과 같은 실책을 반복하며 민생을 고통스럽게 했다는 것인데, 단순히 민생을 고통스럽게 했다던지 유교 명분을 어긴 수준의 문제[11] 가 아니라, 위에서 보이듯이 너무나 많은 국책의 진행과정과 농경과 산업 같은 전근대 사회에서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분야에 대한 무관심 등이 너무 많은 부정적 사유가 겹쳐지며 아랫사람들의 입장에선 임계점을 넘어버린 것이다.
1.3. 현대의 평가
광해군은 인조의 삼전도의 굴욕 등등, 대중이 한국역사에 지니고 있는 수치심(...) 때문에, 광해군은 대중의 포퓰리즘을 잘 긁어주는 캐릭터로 둔갑하여 지나친 고평가를 받고 수혜자의 입장이 되었으며 현재 대중의 인식은 긍정적으로 바뀌어버렸다.
1.3.1. 긍정설
근대 이후 처음으로 광해군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 문헌은 조선과 만주를 확고히 침략하고 수탈하려는 일본인들의 식민사관이었다. 1920년대 간행된 만선지리역사연구보고(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에 실린 일본 학자 이케우치 히로시(池内宏)의 논문이다. 이 책에서 그는 '광해군의 밀지를 받아 후금에 투항했다'고 하는 강홍립의 주장을 받아들여 '중립외교를 수행하려 했던 식견 높은 군주'로 평가했다. 그러나 책 자체는 만주사와 한국사를 연결시키려는 일제의 만선 경영이 목적이며, 조선이 문약하고 당파 싸움에 시달렸다는 시각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서 이 주장은 식민사관과 만선사관의 일환으로 취급 받는 경우가 많다. 이 이케우치 히로시의 평가가 식민 사관과 무관하다는 주장도 있지만, 한명기 교수의 책에도 식민사관이 광해군의 평가에 영향을 주었음을 언급한 바 있다.[12] 1933년 이나바 이와키치의 <광해군 시기의 만주와 조선의 관계> 역시 광해군의 외교정책을 긍정적으로 평했다.
광해군 미화는 조선의 체제를 비하하는 식민사관으로 처음 모습을 드러냈지만, 재미있게도 민족 영웅에 목말라있었던 1920 ~ 1930년대 조선의 민족주의 세력에서도 광해군을 영웅화 하는 평가에 영향을 주었다. 그 중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로 잘 알려진 신채호는 광해군 치세 실권당인 대북을 높게 평가했으며, 그 중에서도 사상적 기반이자 핵심적 인물인 정인홍을 을지문덕, 이순신과 같이 조선 3걸로 꼽고 옥중에서 홍명희에게 전달한 친서에서도 필생의 저서인 정인홍공약전(鄭仁弘公略傳)이 세상에 빛을 보이지 못함을 아쉬워했을 정도였다고. 두계 이병도 박사도 1959년에 <광해군과 대후금정책>에서 긍정적으로 평했다.
이러한 2개의 정치적 갈래가 이어져 한국에도 광해군 재평가에 적극적인 사람들이 꽤 있다. 국사 교과서에서는 광해군을 외치 중심으로 설명하고, 대동법은 신하들의 공으로 나온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 전후 복구 사업을 활발히 펼치고, 대동법을 경기도 지방에 실시하는 등의 세제 개편을 보여[13] 조선이 근대로 가는 첫 관문을 연 왕으로 평가하고 있다.
1.3.2. 부정설
궁궐 공사는 당대에는 물론이고, 오늘날에도 광해군의 통치에서 가장 혹독한 비판을 받는 부분이다. 궁궐 공사 때문에 재정이 부족해진 까닭에 뇌물과 매관매직이 성행했다. 광해군 말기는 심지어 당파를 초월하여 광해군의 지지자였던 북인들의 기록에도 막장스러운 비판이 많다. '백성들이 탐관오리가 부임한다는 소식에 놀라서, 옛날 관리를 다시 돈주고 사왔다'는 황당한 소문부터, 광해군 당시의 시대상을 표현하는 잡기인 죽창한화[14] 에서는 야사라고 하지만 매관매직으로 관직을 구매한 황해도 감사가 관청에서 기생들의 똥누는 모습을 즐기는 막장행위까지 일어나는 등[15] 막장 시대상이 여럿 확인된다.
광해군은 적법한 절차에 따라 즉위했고, 세자 시절의 활약으로 대신들의 많은 기대를 받고 있었고, 그 공으로 인해 진정으로 광해군의 자리가 위협받았던 적은 존재하지 않는다[16] . 또 잘못 알려진 사실로 서인과 남인들이 광해군을 경계해서 광해군의 즉위를 방해했으므로 숙청했다는 것이 있는데, 광해군을 반대한 세력은 오히려 광해군의 지지세력 대북과 같은 북인이었던 소북이었으며 소북 중에서도 광해군의 처남 류희분이 소속된 청소북은 광해군에 우호적이었다. 남은 반 광해군파인 류영경의 탁소북조차 선조 사망 후에는 죄다 청소북을 자처하면서 자멸하여 사라졌으며 강성한 반대세력은커녕 광해군을 비호하는 기반이 자리잡고 있는 상황에서 즉위한 왕이 광해군이었다.
그럼에도 광해군은 이해할 수 없는 행보로 중립 내지는 광해군에게 동조하였던 일부 서인과 남인[17] 의 인재들을 죽이며 쓸데없이 적으로 돌리는 정치적 실수를 범했다. 광해군은 초반부터 대소신료들의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었고, 연이는 실정에도 인조반정 이후에도 우호적인 인물들이 남아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보여주나, 정작 그들을 비방하고 내쫓아버린 건 왕 광해군이었다.
또한, 광해군은 매관매직, 궁궐공사, 폐모살제 등등 영양가 없는 정책 방향에 반대하는 신하들을 압박하는데 간신배들을 등용하고 이득을 보았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친위세력이자 정치깡패로 써먹은 대북파의 실세인 이이첨을 지나치게 키워줬는데, 나중에는 그를 통제하지 못하여 정치를 파국으로 만들었다. 광해군을 "허풍쟁이"라고 말한 것이 바로 이이첨의 대북당이며, 광해군은 이이첨더러 "네가 붓으로 한번 싸워봐라!"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18] 그리고 마침 소북인 박승종이 이이첨의 뒷통수를 후려쳐 이이첨이 소성대비를 죽이려 하면 박승종이 가솔들까지 이끌고 나서는 수준에 이르렀다.
말년의 광해군은 자신의 내치(內治)를 후회했는지 균형잡기를 시도했다. 광해군이 총애하던 신하가 서인 중 유명한 윤두수의 아들 윤휘였다는 점이 증거다.[19] 하지만 이미 국가는 파탄나고 수많은 쿠데타 위협분자들을 더 많이 만든 이후여서 늦은 대처였으며, 박승종의 고발 역시 신뢰하지 않으면서 몰락했다. [20]
게다가 이이첨의 반대 급부로 중용한 임취정 같은 인물은 임진왜란 때는 파천 길에 사초를 태우고 도망갔다고 비판받고, 광해군과의 인연도 조카가 후궁이란 이유였으며, 제 2의 이이첨이 되어 권력을 농단하는 등 막장이었다.[21]
참고로, 광해군에 대한 기록은 서인이 집필한 것뿐만 아니라 광해군 시절의 조정과 민중에서도 남긴 기록이 동시에 전해지고 있으며, 이후의 사관들도 사관인 만큼 없는 이야기를 지어서 쓰지는 않았다. 심지어, 서인들 역시 인조와 같은 당파들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욕하는 기록을 많이 남겼으므로 다른 왕들과 광해군은 똑같은 조건이었다. 무엇보다, 광해군의 지지세력이었던 북인들도 광해군에 대한 큰 차이가 없이 비판적인 기록을 남긴 것을 볼 때, 광해군의 역사 기록은 신뢰성이 있다고 보인다.
1.3.3. 소결
광해군은 '''세자시절''' 임진왜란 당시 도성을 버린 부왕을 대신해 일본군에 맞서 7개월 동안 분조를 이끌어 많은 공을 세웠다.[22] 허나 '''15년 동안''' 집권하면서 불필요한 숱한 옥사(봉산옥사, 칠서의 옥, 신경희의 옥, 계축옥사)를 일으키면서 본인의 비호세력과 왕권 강화에 집착하여 많은 신하들의 숙청 이후에 본인의 비호세력마저도 분열하기 시작하자, 국정의 원동력을 이끌 신하들이 모호해졌다. 결국, 말년에는 그동안 저질렀던 실책으로 국정 운영에 실패하면서 국고 파탄과 정치 파국에 대한 책임으로 몰락하였다.
광해군 본인의 능력을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분명히 광해군은 역량도 있었고 판단력이 나쁘지 않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광해군은 분명한 자신의 책임으로 몰락한 인물임을 부정할 수 없다. 애시당초 정치인의 역할은 백성과 정치을 관리하며 이끌어가는 것인데, 백성과 국가 중흥을 방치하고 타인들과 함께 국가를 이끌어가는데 실패한 정치가의 행적을 좋게 평가할 수는 없다. 조직을 운영해야하는 '정치가'에 대한 평가로서는, 오히려 그런 식의 변명이야말로 통치자로서의 광해군의 역사적 교훈을 모욕하는 평가라는 것이다.
'광해군이 본인을 비호할 정치세력을 육성하지 못해서 몰락했다' 라는 다분히 잘못된 해설이 있으나, 오히려 광해군은 본인을 비호하는 대북파의 폭주를 방관하며 정치적 권력 행사로 정국을 장악하면서 문제가 시작되었다. 광해군이 본인을 지지하는 강력한 정치세력이 없는 왕이었다면, 어떻게 그 많은 숙청을 할 수 있었으며, 어떻게 국고를 파탄낼 때까지 궁궐공사를 진행할 수 있었는가? 그런 식으로 한때나마 국가를 다스렸던 왕을 책임이 없는 허깨비처럼 유체이탈시키는 평가야말로, 광해군이 왕으로서 국가를 통치했다는 역사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모욕이나 다름없다. 오히려, 현실의 광해군은 자신의 정치세력을 지나치게 키웠고, 자신의 왕권을 지나치게 강화했고, 오히려 그 과정에서 쌓인 역효과 때문에 "국정이나 제대로 하라"며 반기를 들었던 여러 신하와 군인들의 협력에 의하여 몰락한 왕이었다.[23]
특히 초반부에 특별히 정치에 개입하지 않았던 시절의 광해군은 내치/외치 모두 챙겼으므로 광해군이 외치에만 유능하고 내치에는 무능했다는 평가보다는, 광해군이 본격적으로 1인자가 되어 정치를 하게 되고, 숙청과 궁궐공사, 즉 '''왕권 확립'''에 욕심을 내면서 특정한 권신들의 권력투쟁에 매몰되어 국정이 표류하게 되었다는 평가가 더욱 옳은 편이다. 애초에 외치조차도 나중에는 그러한 의견을 함께 나눈 비호세력끼리 분열하자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으며, 국가를 움직이는 것은 왕의 독단이 아니라 구성원들의 협의이기 때문에 왕은 착하고 똑똑했는데 궁궐공사와 지속적인 대규모 숙청 같은 실책이 진행되었다는 식으로 좋은 것만 골라빼먹는 묘사 자체가 현실적으로 성립될 수가 없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의 광해군일기 편은 전반부는 세자 시절의 활약과 이에 따른 선조의 질투심 및 후계 과정의 어려움, 재위기의 이런저런 치적들, 후반부는 인조반정에 이르는 과정과 광해군 시대의 옥사를 주로 서술하고 있다. 임해군 옥사, 봉산 옥사부터 시작해서 계축 옥사, 허균의 옥사 등 아무튼 광해의 총명함을 흐리게 한 결정적인 요인으로 바로 광해가 벌였던 옥사를 들고 있다. 광해군의 입지를 강하게 만든 것도 옥사였지만, 반대로 옥사로 타 정파와 사대부가 소외되고 이이첨의 힘이 커져서 광해군의 입지는 약화되었다고 적고 있으며 '인사에 관하여 광해는 부왕 선조보다 하수' 라고도 쓰고 있다.
이복 남동생 영창대군의 죽음을 접한 광해가 "내가 부덕하여 이 아이로 하여금 섬에서 병으로 죽게 했으니 비통하다. 예를 갖춰 장례를 치러 줘라."고 말은 해도 비정하고 위선적인 모습으로 묘사되는 장면은 조선왕조실록 전체에서 유일한 파스텔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마지막 장면은 광해군이 신선처럼 구름을 걸으면서 이렇게 마무리한다.
명군의 자질을 갖고 있었으면서도, 주어진 조건과 내면적 불안으로 인해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던 광해군에 대한 기대와 안타까움이 동시에 묻어나는 대목이다. 다만 이런 평가는 지상파 교양 프로의 인터뷰에서 박시백 화백이 가장 좋아하는 조선 국왕 3위로 광해군을 꼽았던 것#에서도 드러나듯 박시백 화백 자체가 광해군에게 매우 우호적인 성향인 점을 감안해야 한다. 비슷한 논리를 다른 왕에게도 적용한다면 선조, 인조도 딱히 욕을 먹을 건덕지가 없어진다.세자 시절의 아픈 경험으로부터 조금만 자유로웠다면 도그마에 사로잡히지 않은 빛나는 외교에서 보이듯 열린 이성과 현실 감각, 유려한 솜씨로 내치도 성공할 수 있었으리라. 그런 상황을 만든 부왕 선조의 책임이 크겠지만, 누굴 탓하랴. 극복하지 못한 자신의 몫인 것을.
정리하자면
1. 대중의 의식은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된 복권론을 이어받은 사극이나 창작물의 영향으로 매우 긍정적이다.
2.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광해군은 대동법에 반대하고 확대를 저지했다. 아래 나온 궁궐 5개 연달아 올리는 영건사업과 조도사의 수탈, 이를 비호하는 행보를 보면 대놓고 하지 말라고 안 했을 뿐 분명 막은 게 맞다. 민생을 생각하지만 신중했을 뿐이라면 공납의 부작용을 극대화시키는 영건사업도 하지 말았어야 했다. 다만 선조도 시행하지 못했던 대동법 자체를 시행하게 한 것은 어쨌든 업적이라면 업적이다. 대동법 참조.
3. 세자 때는 민심 수습과 전시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냈지만, 즉위 후엔 궁궐병과 재정 파탄 사태으로 조선 내정에 어마어마한 악영향을 미쳤다. 특히 궁궐 건축 사업은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야말로 재앙에 가까운 악영향을 미쳐 당시 국가 재정의 15% ~ 25% 가까운 자원을 소비함은 물론, 관련 비리가 전혀 관리가 되지 않아 민중들에 대한 갖가지 수탈로 이어졌다.
4. 광해군은 후금과 친하게 지내자고 한 것으로 주로 알려져있지만, 실상은 정충신 등에게 첩보를 명하여 후금의 권력 구도나 병력, 군수 물자 등을 세세히 파악하게 하면서도, 강홍립에게 따로 편지를 받아서 추가적인 정보를 얻어내기도 했다. 심지어 '''후금의 세세한 정보를 파악하고 있던 것을 이용해 후금의 후계구도까지 파악하고, 훗날 청 태종이 되는 홍타이지를 친조선파로 만들기 위해 정충신을 통해 접촉함과 동시에, 다이샨과 이간질을 벌여 후금의 내분을 계획하기도 했다.''' 당연히 이것은 중립외교 안했다고 까일 것이 아니라 인조에 비해 월등히 잘한 부분이다. 후금에 대한 적극적인 정치공작을 벌인 것은 이견의 여지가 있으나 적어도 후금에 대한 정보나 안목, 홍타이지라는 청 태종이 될 인물의 위험성 파악 등은 매우 뛰어났다.
5. 자신이 키워준 세력이 자신의 뜻과 정면으로 대치했다. 즉위 초에는 혼란스럽기는 했지만, 영창대군 즉위에 찬성하는 사람은 소북파 정도이고, 인목왕후는 그냥 권력을 넘겨주었다. 그런데 광해군은 무슨 이유인지 영창대군을 죽여버렸고, 인목왕후를 폐비하며 대북파를 극단적으로 키우는 무리수를 범했다. 자기를 지지하는 중신 이원익을 필두로 반대가 넘치는데도 모두 쫓아내는 자승자박을 한 것. (당장 광해군의 외교의 협력자인 윤휘, 정충신은 서인이고, 박승종은 소북 인사다.) 결국 훈련대장 이흥립을 비롯한 다수의 임진왜란 시절의 영웅들을 포함한 집단적인 내부 배신으로 몰락하고 말았다.
6. 광해군일기나 인조실록에서 광해군이 군사를 육성한 것이 간접적으로 묘사된다. 당장 이괄의 난 직후 정충신이 "광해군 때의 절반만 복구해도 후금을 상대로 방어전이 가능하다"고 평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략적인 안목은 부족했는데, 국방력은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나 궁궐공사에 군사에 쓰일 화약 원료를 빼돌리면서 재정을 전혀 돌보지 않았다. 게다가, 당대 여론조차 '''"광해군이 수도의 병력을 비우고 군사를 북쪽으로만 보낸다"'''라며 매우 걱정했다. 이는 정상적인 국방력 강화라고는 보기 어렵다.
2. 외교적 평가
2.1. 긍정적 평가
광해군은 왕이 되자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이 붕괴하고 들어선 에도 막부는 조선과 선린 관계를 구축하길 원했다. 즉위 이전부터 이미 그것을 긍정적으로 검토했고, 쓰시마의 영주 소 요시토시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결국 즉위 직후 남방을 안정시키고자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면서 기유약조(1609년, 광해군 1년)를 체결했다. 그 결과 일본과의 관계 및 교역은 급속도로 호전되었고, 조선 왕조는 일본 에도 막부와 250여년에 걸친 평화를 영유하게 되었다. 조약 과정에서 조선은 국서(國書) 요구, 범능적(범죄인)의 압송, 포로와 피로인(被虜人)의 송환을 확약받는 등 유리한 입장에 서 있었다. 아울러 일본 측에게 왜란 이전보다 더 큰 제약을 가하게 되었다.
국방 정책에 있어서는 조총수 및 포병을 양성하고 후금에 밀정을 투입하여 정보를 수집했으며 진법 훈련이나 성곽 수축에도 진력했다. 이 정책은 선조가 이어지던 국방 대책의 연속이자 확장이라 할 수 있다. 선조는 왜란으로 의주에 피난갔을 무렵부터 여진족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었고, 간첩을 파견해서 '건주기도정기'라는 건주여진(뒷날 후금)의 보고서를 만들어냈다. 광해군 역시 선조의 북방 대책을 계승하여 북방 방비를 위해 노력했다.
광해군 긍정론을 집대성한 한명기는 저서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등을 통해, 광해군의 만주에 대한 경계노선은 선조시절에 만들어둔 첩보망을 이어받은 것이라는 입장을 펼쳤다. 애초에 임진왜란 이후의 선조도, 광해군도 개인적 경험에 비추어 외적의 침입에 대해 경계태세를 취하면서도 다방면으로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중립외교, 즉 단순히 조선이 상처를 입지 않는 외교방식에 대해서는 선조, 광해군, 인조가 모두 공감했다. 또한 객관적으로 본다면 명 제국, 청 제국은 무두 조선을 우회전선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쳐들어올 기회는 온전히 조선이 아닌 외부 제국들의 계산에 달려있었기 때문에 중립외교라는 자주적인 용어는 실체가 없다는 의견이 많으며 그저 왕들이 첩보에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었는지에 대한 평가 정도로 압축된다.[24]
또한 정충신을 만포 첨사에 임명하기도 하며 직접 후금에 다녀오게 하여 후금의 상세한 정보들을 알아오게 하고, 또한 방비하게 하였으며 인조실록 2년 9월 1일의 내용에 따르면 5년, 6년간 남쪽의 병사들을 징발해서 배치하는 바람에 민심이 나빠지고 나라가 피폐해졌다고까지 언급한다. 인조 2년 3월 14일의 남이흥이 한 “금년에는 남방의 군사를 징발하지 않았으므로 변장(邊將)이 군사가 적은 것을 걱정할 것입니다.”과 합쳐지고 광해군이 수도 없이 군사력을 강화시키라고 화약 무기를 준비하라고 명을 하기도 하며 이런 행동들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광해군 10년대로 인조실록 2년에 (광해군 대에) 5년, 6년간 병사들의 징발을 계속했다고 언급되는 것과 기간이 일치한다. 물론, 이 기간은 후금이 명과 조선의 국경선마저 침범하기 시작했으며, 사르후 전투의 전후기간이라서 후금의 전투력을 뼈저리게 확인한 이후므로 광해군이 군사를 많이 뽑은 것은 특이한 일이 아니라 매우 당연하기는 하다.[25]
또한 명나라에 구원병을 보낸 도원수 강홍립이 후금에 항복하자, 이후 그로 하여금 계속 연락을 취하게 하여 후금의 정탐에 활용했다. 하지만 이것은 서인이 쿠데타를 일으킬 때 '강홍립 밀지설'을 주장했을 뿐으로 실제로는 큰 의미가 없었다는 설이 있는데, 김응하 등 주요 장수들과 파병군의 절반이 사르후 전투에서 전사했던 것을 보아[26] 서인의 밀지설은 근거가 부족하다.
다만 어떤 경위로든 강홍립을 통해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광해군이 후금의 실체를 파악하려고 했던 정황은 분명해 보인다. 사르후 패배 이후에도 명나라는 후금에 응전해 복수하길 원했으며 이를 위해 속국 조선을 지속적으로 끌어들이려 했지만 광해군은 그 때마다 이를 번번이 회피한 것이다. 가령 후금에 대한 반격을 논의코자 명의 사신이 칙서를 들고 찾아올 때마다 광해군은 조선이 엮이지 않게끔 잘 구슬려 보냈으며, 심지어 명의 황제가 군사 조련에 쓰라며 막대한 은을 하사할 때조차도 이를 몽땅 창고에 박아두고 기어이 쓰지 않았다. 그 자금에 손을 대는 순간 명에 재차 군사가 동원당할 빌미를 제공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노력의 결과, 적어도 후대 인조 시기 모문룡 사건이 비화되기 전까지 주변국간 충돌의 빌미는 발생하지 않았다. 이에 관련된 광해군일기 중 이런 부분도 있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3년 6월 1일
또한 명에게는 흔적을 남기지 않고 염탐이라고 말하면서 후금과 사신 교환을 하던 것도 있고 정충신이 이로인해 후금의 막대한 정보들을 가져와 보고하기도 했다. 광해군일기 1621년 6월 6일자에서 다음과 같이 잘 드러난다.“적의 형세는 날로 치열해지고 있는데, 우리 나라의 병력과 인심은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다. 고상한 말과 큰 소리만으로 하늘을 덮을 듯한 흉악한 적의 칼날을 막아낼 수 있겠는가. 적들이 말을 타고 들어와 마구 짓밟는 날에 이들을 말
談鋒[
로 막아낼 수 있겠는가. 붓]
筆翰[
으로 무찌를 수 있겠는가. 널리 조정의 의견을 들어보는 것이 무슨 일에 도움이 되겠는가. 대개 중국 사람들이 비록 귀순을 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란 천리에 퍼지고 듣고 보는 이가 매우 많은데 하필이면 이 길을 통해서 나오겠는가. 하물며 중국의 사신은 이웃 나라에 편지나 가지고 오가는 사람이 아니다. 이후로 글의 격식을 고치고 만포(滿浦)를 경유하여 나오도록 하는 일에 대해서는 다시 유시가 내려오기를 기다리도록 하고 뒤에 절대로 중국 사람들의 이목을 번거롭게 하지 말라. 그리고 파견되어 나온 오랑캐가 있는 곳으로 자세하게 답장을 보내되, 다만 강홍립 등의 서장(書狀)만을 받아서 올려보내도록 하라. 그리고 오중고(吳仲庫) 등에게는 말하기를 ‘이 적의 세력이 크다. 옛날에 처음으로 나라를 세운 임금들 중에는 역시 자신을 낮추어 후한 예를 차리는 경우가 있었으니, 이 적이 어찌 이러한 의도가 없을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 나라는 이미 요양을 상실하여 중국에 조공하는 길이 끊어졌으며 군대는 보잘것없이 약하니 임시로 둘러대는 말로 잘 처리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하도록 하라. 그리고 이른바 ‘조서의 글’이라고 하는 것은 가능하면 몰래 베끼도록 하고 받지 않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것은 종묘 사직의 존망에 관계되는 것이니 경들은 다시 더 의논하여 결정하도록 하여 좋은 방법으로 잘 처리할 것을 〈비변사에 말하도록 하라.〉”]
관련 기사“이 적들이 요동성에 들어가 버티고 있으므로 중국의 장관들이 차례로 적에게 항복하고 있다. 심지어 요동 지방의 인재들 2백여 명이 원 경략(袁經略)을 결박하여 넘겨 주었다고 한다. 비록 30만 명이나 되는 군사가 나온다 하더라도 이는 모두 일찍이 오랑캐를 경험하지 못한 군사들이다. 영솔하는 대장들이 과연 이목(李牧)이나 이정(李靖)과 같은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그들의 갑옷과 무기가 파손되어 형편이 없다고 한다. 멀리에서 온 군사들이 어떻게 정예롭고 건장하겠는가.''' 중국의 일의 형세가 참으로 급급하기만 하다. 이런 때에 안으로 스스로를 강화하면서 밖으로 견제하는 계책을 써서 한결같이 고려(高麗)에서 했던 것과 같이 한다면 거의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 나라의 인심을 살펴보면 안으로 일을 힘쓰지 않고 밖으로 큰소리 치는 것만 일삼고 있다. 조정의 신하들이 의견을 모은 것을 가지고 보건대, 무장들이 올린 의견은 모두 강에 나가서 결전을 벌리자는 의견이었으니 매우 가상하다 하겠다. 그렇다면 지금 무사들은 어찌하여 서쪽 변경은 죽을 곳이라도 되는 듯이 두려워하는 것인가. 고려에서 했던 것에는 너무도 미치지 못하고 있으니, 부질없는 헛소리일 뿐이다. 강홍립 등의 편지를 받아 보는 것이 무엇이 구애가 되겠는가. 〈이것이 과연 적과 화친하자는 뜻이겠는가.〉 우리 나라 사람들이 끝내는 반드시 큰소리 때문에 나라 일을 망칠 것이다. 그리고 이제 차관을 만포(滿浦)로 옮겨가게 한다고 하는데 그들이 과연 머리를 숙이고 명령을 받아들이겠는가. 대체로 이 문제는 관계되는 바가 매우 중요하니 다시 더 의논해서 잘 처리하도록 〈비변사에 말하라.〉'''”
또한 광해군은 홍타이지가 반조선파라는 사실을 진작에 파악하고 다이샨을 지원해서 홍타이지의 대항마로 세우고 둘을 이간시켜 서로 싸움에 빠져 내분을 일으키게 하려 시도하면서도, 동시에 홍타이지에게 뇌물을 보내서 친조선파로 포섭을 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하며 홍타이지를 미리 경계하며 주목하고 있었다.[27] 실제로 홍타이지가 후계자가 되었을 때 광해군 본인도 전쟁의 가능성이 높다고 여기며 도성 내 군사들까지 상당수를 북방으로 보낼 정도로 방비에 철저했었다.
강홍립을 통해서 정보를 얻어내는 것 외에도, 당장 정충신을 파견해서 홍타이지의 회유 시도를 하면서 동시에 따이샨과 싸움을 붙이려고 들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후금 내의 정보들과 군사 배치 등을 자세히 손쉽게 얻어낸 것이 큰 이득이었다. 광해군도 홍타이지를 크게 경계해 회유하려고 하면서도 전쟁 가능성을 높다고 생각했기에 홍타이지를 전문적으로 마크하며 홍타이지에게 광적인 경계심을 보이며 사실상 최대 숙적으로 여기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정충신을 통한 파견 등으로 얻어낸 제일 큰 성과는 후금의 군사 배치와 내부 사정을 소상하게 알아내 후금에 관한 막대한 정보를 알아냈다는 것이다.
후금이 식량문제로 인해 조선을 필연적으로 공격할 수 밖에 없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2010년대 후반~2020년대 한국 연구자들의 구체적인 연구(계승범(2020), "정묘호란의 동인 재고"; 구범진(2019),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허태구(2019), 《병자호란과 예, 그리고 중화》.) 성과에 따르면 정묘호란, 병자호란의 원인에서 경제적인 면은 사실상 없거나 부차적인 수준에 멈춰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병자호란 직후 청이 조선을 속국으로 복속함과 동시에 세폐 등을 요구한 것은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게 아니라 전쟁을 일으킨 김에 식량 문제를 타개하려 한 것일 뿐이다. 물론, 그들이 쳐들어온 가장 근본적인 전략적 원안은 광해군의 사르후 전투 등에서 명과 청이 공유했던 인식론으로서 광해군과 조선이 결국에는 명 제국에 부역할 가능성이 있는 후방전선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지만 말이다.
2.2. 부정적 평가
하지만, 이러한 외교적 계획안은 광해군의 내치와 정책적 태도가 비관적이었던 탓에 제대로 진행되지 못한채 정충신 같은 최전선의 군인들과 광해군 사이의 '''밀실 첩보'''라는 수준에서만 표류하다가 잊혀졌다는 것에는 부정하기 힘들다. 광해군의 첩보에 대한 공로는 대다수의 학자들이 인정하지만 그 외에는 과대평가로 보는 시각에 가까운 것이다.
심지어 명에 대한 사대주의와 재조지은을 중시하던 유생들은 이 상황에 격렬하게 반발한다. 또한, '''광해군을 왕위에 옹립한 이이첨 등이 있던 대북이 열렬하게 광해군의 현상 유지론을 반대했다'''. 이에 대해서는 인목왕후 폐위 문제로 윤리적 논란에 휘말린 것에 대해 관심을 돌려보겠다는 포석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그나마 소북 중 영의정 박승종 정도만이 소극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이었으나, 그 역시 이이첨이 싫어서 조정에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광해군은 1622년 거의 대부분의 신하들이 반대하는데도 후금의 지도자를 '한'으로 호칭하는[28] 국서를 보냈는데, 저 국서를 보낸지 1년 2개월만에 광해군은 인조반정에 의해 폐위되었다. 그래서 광해군의 저 국서가 인조반정의 원인 중 하나가 아닐까 추측하는 주장도 있으며, 실제로 정변 당시 교서에서 반정 명분 중 가장 많이 차지하는 것이 외교 문제이다. '''광해군의 지지층도 친명배금 문제로 광해군의 통제를 벗어났고, 조정에서 광해군의 편이 사라지는 사태가 벌어진다.'''
사실 광해군의 조정은 서인들보다 무식하고 위험했다는 증거이기도 한데, 심지어 서인들도 집권 후 숭명배금을 주장했으나, 비변사 내부에선 광해군의 기조가 완전히 부정되지는 않았다. 광해군 정권의 구성원들은 세 임금의 정권 중 가장 친명파였고, 이건 광해군이 스스로 자초한 일이었다.[29] 광해군은 조선 왕조에서 단기간 옥사로는 손에 꼽을 정도로 신하들을 숙청했고, 이 과정에서 선조가 만들어놨던 인재 풀의 붕괴를 가져왔다. 이 과정에서 강경 북인 친명파들만 조정에 득세하게 된 것. 이 때 항복한 강홍립을 통해서 후금과 내통하려고 해보려고 했으나, 홍타이지는 그냥 협박용으로만 사용했으며 별다른 구체적인 이득이 있었다는 구체적인 기록과 증거는 없다.
많은 사학자들은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명나라의 선양질에 꽁해서 입에 발린 칭찬은 하면서도 뒤에서는 명나라에게도 은근슬쩍 술수를 부리던 선조의 임진왜란 직후 외교 정책을 이어받은 걸로 보고 있으며, 애초에 기회만 생기면 언제든지 조선을 전쟁터로 삼을 수 있었던 명과 청이라는 양대 제국은 광해군의 외교를 선조의 외교와 다른 것으로 봤다는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광해군이 청을 방비하고 동시에 명에게 최대한 관심을 덜 받으려고 했던 흔적은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광해군 시대의 외교 행보를 봤던 명 제국, 청 제국은 조선을 명의 철저한 따까리 국가이자 잠재적인 명 제국의 장기말이자 후방전선으로 보는 생각을 각자 내부적으로 더욱 강화하게 되었기 때문에''' 중립외교라는 단어가 과연 맞는지에 대해서 학계에서는 이미 찬반이 존재하고 있다.
즉, 홍타이지와 후금의 강경파들은 무슨 일이 됐건 사르후 전투 이후로 조선을 손봐줄 생각을 더욱 강화했고, 명나라는 무슨 일이 됐건 사르후 전투 이후로 조선을 후금에 대한 충실한 총알받이로 써먹으며 본인들은 조선과 요동 뒤에 숨겠다는 생각을 도리어 강화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조선을 언제든지 명 제국, 청 제국의 전쟁의 장기말로서 먹고 버릴 생각이 더욱 강해졌던 시대는 오히려 광해군 치세였다는 것이다. 즉, 광해군 시대는 실질적인 조선이 외교적 주도권을 지녔던 시대가 아닐 뿐더러 후대의 전쟁을 둘러싼 상황에도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때문에 '중립 외교'라는 관점은 근본적으로 용어에 대한 이의제기가 있으며, 애초부터 당대 상황과는 전혀 상관도 없었던 근대 일본제국의 만주 장악을 위한 프로파간다에서 시작되었다는 레퍼런스 탄생 자체의 한계점과 함께, 실질적으로 때린 놈들의 계산에 따르자면 조선을 어떻게든 명나라의 총알받이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던 두 제국의 전략적 관점을 전혀 수정하지 못했던 행보를 두고 어차피 때릴 놈들은 전략을 짜둔 상황에서 맞은 놈들끼리 왜 맞았는지 반성회를 열고 착한놈 나쁜놈 나누겠다는 현대의 논쟁 자체가 당대 역사를 설명하기에는 어색하다는 이의가 존재하며 이 논의는 현재 진행형이다.
심지어, 이 용어에서 느껴지는 자립적인 민족주의적인 인상과 광해군에 대한 일부 정치 편향적 언론의 과대평가 때문에, 광해군의 외교 또한 실질적으로는 국가 외부에 자신의 의도를 제대로 전달하거나 외교적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던 왕이었다는 현실의 초라한 모습과는 정반대로 역사해석과 정치적 관점에 있어서의 악영향을 상당히 끼치는 편이다.
당장에 이 항목에도 광해군이 15년 동안의 동아시아 평화를 중립외교로 달성했다는 여러모로 엄청난 서술이 적혀 있었던 적이 있는데, 도리어 광해군의 파병 이후 두 제국의 주요 지도층들은 조선을 명을 위해서 결정적일때는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충실한 따까리로서 이후 조선을 중요한 우회전선으로 생각하는 관점이 보이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일본제국 이후 편의적으로 사용되어온 중립외교라는 용어와 이후의 광해군에 대한 과대포장된 정치적 편향성이 당대 역사에 대한 인상을 현실과는 얼마나 다른 관점으로 오해하게 만들어버렸는지를 알수있다. 오히려 광해군 시대의 실질적인 행정부와 외교부는 말이 안 통하는 강경파들이 장악하여 최전선 군인들과 왕이 밀실에서 이러한 꿈을 꾸다가 편지 한통만으로 지지자들마저 등을 돌려버리는 실제 역사에서 중립외교라는 단어는 근대 한국의 민족주의, 일본제국과 부역자들의 만선동조라는 현대 정치사의 좌우의 정치적 프로파간다에 의해서 부풀어오르며 현실과는 다른 방향으로 지나치게 해석된 정치론적 해석의 측면이 상상이상으로 강하다는 것이다.[30]
등거리 외교 긍정 문단에서 광해군이 명나라 황제가 군사 조련에 쓰라며 막대한 은을 하사할 때조차도 이를 몽땅 창고에 박아두고 기어이 쓰지 않았다고 서술했다고 써 있는데, 실제로 '광해군일기'의 기록을 보면 광해군은 만력제가 조선의 유가족들에게 주라고 준 '''은 1만냥을 모두 착복'''해 용보, 겸금, 주옥, 사라, 능단이 나라의 용도에 합당(?)한 물건이니 사라고 한 기록이 존재한다. 문제는 저기 있는 물품들은 염초나, 포, 쌀 등과 같이 군사적, 생활적으로 중요한 것들이 아닌 보석과 비단 등으로 모두 왕실에서 사용하는 '''사치품'''들이었다.
지금 중국 황제가 내려준 은 1만 냥을 내림에 호조 참판과 색낭청이 받아가지고 갔다. 허술하게 하지 말고 십분 단단히 보관하라. 나라의 용도에 합당한 물건을 우선 값을 주고 일일이 서계하라. 그 가운데 용보(龍補)·겸금(兼金)·주옥(珠玉)·사라(紗羅)·능단(綾緞)은 나라의 용도에 합당한 물건이니, 먼저 내어 팔지 말도록 하는 일을 십분 상세히 살펴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