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그람 왕조

 


'''로엔그람 왕조'''
ローエングラム 王朝 · Lohengramm Dynasty
[image]
'''국가 개괄'''
'''국명'''
은하제국 로엔그람 왕조[1]
'''국가 체제'''
전제군주제[2]
'''국가 원수'''
은하제국 황제
'''수도성'''
발할라 성계
제3행성 오딘

페잔 회랑 페잔 성계
제2행성 페잔
'''수도'''
행성 오딘
노이에 상수시

행성 페잔
호랑가시나무관 → 벨제데 임시 황궁 → 뢰벤브룬?[3]
'''국성'''
로엔그람,Lohengramm,
'''국가 정보'''
'''인구'''
약 400억 명[4][5]
'''공용어'''
제국 공용어[6]
'''통화'''
은하제국 마르크
자유행성동맹 디나르[7]
'''군사'''
은하제국군
'''기년법'''
신제국력
'''역사 정보'''
'''개조'''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
'''국가 존속기간'''
서기(A.D.): 3599. 6. 22. ~ ?
우주력(SE): 799. 6. 22 ~ ?
신제국력(NRC): 001. 6. 22. ~ ?
'''주요 사건'''[8]
'''· NRC 001''' 은하제국 건국(NRC 001. 6. 22.), 큄멜 사건, 지구교 본거지 토벌 작전
'''· NRC 002''' 제2차 라그나뢰크 작전(NRC 001~002),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 2차 암살미수사건, 노이에란트 전역
'''· NRC 003''' 하이네센 동란, 제11차 이제르론 공방전, 오베르슈타인의 풀베기, 호랑가시나무관 습격사건, 시바 성역 회전, 벨제데 임시 황궁 습격사건
'''건국 이전'''
은하제국 골덴바움 왕조
'''멸망 이후'''
?[9]
1. 개요
2. 역사
2.1. 건국
2.2. 전쟁과 테러, 그리고 평화
3. 국가 개괄
3.1. 정치
3.2. 건국 세력
3.3. 초대 내각
3.4. 주요 군부 인사
3.5. 노이에란트 통치
3.6. 경제
3.7. 신분제
3.8.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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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image]
로엔그람 왕조의 수도성 페잔.
은하영웅전설에 등장하는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이 건국한, 은하제국의 두번째 왕조. 상징은 황금사자(골덴뢰베 Goldenlöwe).

2. 역사



2.1. 건국


로엔그람 왕조의 역사는 골덴바움 왕조로 거슬러 올라간다. 골덴바움 왕조는 개조 루돌프 대제은하연방을 무너뜨린 후 5세기 동안 민중들 위에 군림했으나, 서서히 늙고 병들어가고 있었다. 궁정암투와 지방반란이 성행하고, 문벌귀족들의 전횡이 날로 심해졌으며 황제는 정사를 돌보지 않고 여색에 빠져 있었다. 이런 썩어빠진 제국은 수많은 불만분자들을 양성했고, 그 중 하나는 아예 제국을 찬탈하겠다고 마음 먹었다.
개조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의 본래 이름은 라인하르트 폰 뮈젤이다. 뮈젤 가문은 제국기사 작위를 받은 한미한 가문으로서 그마저 있는 재산도 아버지 세바스티안 폰 뮈젤이 탕진하여 평민들보다 가난한 가문이었다. 라인하르트는 이 가난한 생활에도 친우 지크프리트 키르히아이스와 누나 안네로제 폰 뮈젤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었으나, 황제 프리드리히 4세의 후궁을 찾던 궁내성 직원들의 눈에 누나 안네로제가 들어오면서 그는 궁정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사랑하는 누나가 황제에게 끌려가자 격분한 라인하르트는 출세해서 황제로부터 누나를 찾아오기 위해 군인이 되었다.
총비 안네로제 폰 그뤼네발트의 동생이었으므로 프리드리히 4세는 그를 총애했고, 그는 불과 4년 만에 소위에서 제국원수까지 진급했다. 거기에다 가문도 하급귀족인 뮈젤 가문이 아닌, 제국 건국 때부터 내려왔지만 최근 후사가 없어 폐절된 명문가 로엔그람 백작가를 이어 문벌귀족에 편입된다. 그러나 로엔그람 백작은 황제에 대한 복수심을 누그러뜨리지 않았으며, 더 나아가 부패하고 무능한 문벌귀족들과 황가를 타도하기 위해 칼을 갈았다.
그리고 우주력 796년, 제국령 침공작전 도중 은하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4세가 붕어하자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 후작은 재국재상 대리이자 국무상서인 클라우스 폰 리히텐라데 공작과 연합하여 프리드리히 4세의 손자 에르빈 요제프 2세를 새 황제로 옹립했다. 이 사실에 문벌귀족들은 격분했고, 국정을 농단한 리히텐라데 공작과 로엔그람 후작을 처단한다는 명분으로 립슈타트 귀족연합을 결성하여 립슈타트 전역을 일으켰다.
하지만 본래 군재가 없었던 문벌귀족들은 샨타우 성역 회전을 제외한 모든 전투에서 은하제국군에게 연전연패했고[10], 베스터란트 학살사건으로 민심도 잃었으며 결국 최후의 근거지 가이에스부르크 요새가 함락당하면서 완전히 몰락한다. 강력한 정적이 사라지자 로엔그람 후작의 참모장 파울 폰 오베르슈타인은 로엔그람 원수 휘하 제독들을 수도성 오딘으로 파견하여 리히텐라데 공작과 그 일가를 모조리 숙청한다. 이로써 반대파를 모조리 숙청한 로엔그람 공작은 스스로 재국재상이 되어 제국의 사실상 1인자로 등극했다. 1인자로 등극한 로엔그람 공작은 개혁을 추진, 제국을 빠르게 건실하게 만들었다.
한편 망명귀족들은 페잔 자치령의 지원으로 어린 황제를 납치하여 자유행성동맹망명정부를 세워 동맹정부와 손잡지만 라인하르트는 즉시 오토프리드 5세의 손녀 카타린 케트헨 1세를 새 황제로 옹립하고, 제1차 라그나뢰크 작전으로 페잔 자치령과 동맹을 침공한다. 동맹을 침공한 라인하르트는 최고평의회 의장 욥 트뤼니히트의 항복으로 동맹을 제국의 속국으로 만들고, 오딘으로 돌아와서 카타린 케트헨 1세로부터 제위를 넘겨 받아 로엔그람 왕조를 건국했다.

2.2. 전쟁과 테러, 그리고 평화


그런데 로엔그람 왕조가 건국된지 불과 2주 만에 지구교의 테러로 황제가 암살당할 뻔한다.(큄멜 사건) 이 사건은 지구교라는 종교가 단순한 사이비 종교가 아닌 제국을 뒤엎으려는 반역자들임을 만천하에 드러내었고, 카이저 라인하르트는 아우구스트 자무엘 바렌 상급대장을 지구로 급파해 지구교를 소탕한다.(지구교 본거지 토벌 작전)
한편 동맹에 파견된 제국 고등판무관 헬무트 렌넨캄프제1차 라그나뢰크 작전 당시 양 웬리에게 2차례나 패해서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고, 주변에서 양 웬리가 제국을 뒤엎으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투서가 날아들자 동맹정부를 압박해 양을 체포했으나, 로젠리터 연대의 반란으로 오히려 자신이 로젠리터 연대의 포로가 되자 수치심에 자살했다.(양 웬리 원수 모살미수사건) 이 사실이 알려지자 카이저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은 이 책임을 동맹정부에 물어 제2차 라그나뢰크 작전으로 동맹을 침공한다. 자유행성동맹군은 마르 아데타 성역에서 제국군과 최후의 전투를 벌이지만 패배하고,(마르 아데타 성역 회전) 동맹은 이후 겨울장미원의 칙령으로 완전히 멸망한다. 로엔그람 왕조는 이후 구 동맹령을 노이에란트라는 이름으로 제국에 편입하고 초대 총독으로 오스카 폰 로이엔탈을 임명했으며, 마지막 숙적으로 엘 파실 독립정부에 가담한 양 웬리를 쓰러뜨리기 위해 엘 파실 성계로 출정하였다. 회랑 전투에서 제국군은 압도적인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엘 파실 독립정부를 굴복시키지 못했고, 결국 라인하르트의 제안으로 양자 간 회담이 이루어지지만 지구교도의 테러로 양 웬리와 프란체스크 롬스키 등 독립정부 수뇌부들이 사망하면서 협상은 무산되었고, 라인하르트는 페잔으로 돌아갔다.
카이저가 페잔으로 돌아간 이후, 노이에란트에는 심상찮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우주력 800년 9월 1일 하이네센에서 위령제에 참가한 시민들이 제국 타도를 외치며 노이에란트 치안군과 정면충돌해 대규모 유혈사태가 터진 것이다.(응웬 킴 호아 광장 사건) 거기에다 노이에란트 총독 오스카 폰 로이엔탈 원수의 야심, 카이저 라인하르트와의 갈등, 하이드리히 랑아드리안 루빈스키를 비롯한 모략가들의 모략, 우르바시에서 일어난 제국군의 반란(우르바시 사건), 부귀영화에 눈이 먼 알프레트 그릴파르처의 증거인멸 등의 이유로 로이엔탈 원수는 국정을 농단한 군무상서 파울 폰 오베르슈타인 원수와 내국안전보장국장 하이드리히 랑을 처단한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킨다. 제국 정부는 우주함대 사령장관 볼프강 미터마이어 원수, 아우구스트 자무엘 바렌 상급대장, 프리츠 요제프 비텐펠트 상급대장, 에르네스트 메크링거 상급대장을 노이에란트로 급파해 반란을 진압하도록 했으며, 양군은 란테마리오 성역에서 격돌했다. 치열한 전투는 이제르론 공화정부의 협조로 이제르론 회랑을 빠져나온 에르네스트 메크링거 함대의 합류로 노이에란트 치안군의 패배로 끝났으며, 노이에란트 총독 오스카 폰 로이엔탈 원수는 이 전투의 부상으로 하이네센에 돌아온 뒤 사망하였다.(노이에란트 전역)
로이엔탈 원수가 사망한 이후, 노이에란트 관리는 아우구스트 자무엘 바렌 상급대장이 맡게 되었다. 그런데 우주력 801년 1월부터 누군가의 공작으로 하이네센의 물류 시스템이 파괴되더니 급기야 대규모 폭동이 발발하였다. 이 소동은 노이에란트 전체로 퍼져나갔고 아드리안 루빈스키의 공작으로 페잔 항로국의 데이터까지 삭제되는 일이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공화주의 최후의 보루 이제르론 공화정부를 치자는 주장이 군부 강경파를 중심으로 대두되었지만, 그 전에 이제르론 공화정부가 선수를 쳐 바겐자일 함대와 바렌 함대를 공격해 승리를 거두었다.(하이네센 동란, 제11차 이제르론 공방전)
노이에란트의 혼란이 잦아들지 않자 카이저 라인하르트는 군무상서 파울 폰 오베르슈타인 원수를 하이네센에 급파하였다. 오베르슈타인 원수는 하이네센에 도착하자 구 자유행성동맹의 명사 5,000명을 체포해 라그풀 교도소에 수감하여 이제르론 공화정부에 항복을 강요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오베르슈타인의 멱살을 잡은 프리츠 요제프 비텐펠트 상급대장이 감금되었고 누군가의 공작으로 라그풀 교도소에 폭동이 터져 수많은 사상자가 나왔으며, 서로 사이가 좋지 않던 슈바르츠 란첸라이터와 제국 헌병대가 충돌할 뻔하기도 했다. 이 사태가 터지자 카이저 라인하르트는 오베르슈타인 원수를 질책했고, 5월 초부터 나이트하르트 뮐러를 대표로 이제르론 공화정부와 외교 교섭을 시작했다.(오베르슈타인의 풀베기, 라그풀 교도소 폭동사건)
우주력 801년 5월 14일, 페잔의 임시 황궁호랑가시나무관에 살던 카이저린 힐데가르트 폰 마린도르프와 뱃 속의 아기를 노리고 지구교도들이 습격했다. 지구교의 양동작전과 내부 구조에 대한 자료 부족으로 테러는 성공할 뻔 했지만, 안네로제 폰 그뤼네발트 대공비와 헌병총감 겸 제도방위사령관 울리히 케슬러 상급대장의 활약으로 지구교도의 폭거는 저지되었으며 도리어 에프라임 거리에 위치한 지구교 페잔지부까지 궤멸되었다. 카이저린 힐데가르트는 무사히 아이를 낳았으며, 이 아이에는 카이저 라인하르트가 직접 지은 알렉산더 지크프리트 폰 로엔그람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호랑가시나무관 습격사건)
그해 5월 말, 노이에란트에서 이제르론 공화정부로 망명하려던 수송함 '신세기호'가 이제르론 회랑에 거의 도착한 시점에서 동력이 고장나 공화정부에 구조를 요청했는데, 이 통신파가 제국군을 끌어들였고, 곧이어 양군이 충돌하였다. 이 조우전,遭遇戰,으로 양군은 시바 성역에서 충돌했으며, 이제르론 혁명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사령관 율리안 민츠가 겨우겨우 브륀힐트의 함교에 진입해서 카이저와 만나 강화할 수 있었다. 이후 로엔그람 왕조와 이제르론 공화정부는 바라트 성계의 내정자치권을 부여하는 문제에 대해 합의하였다.
그런데 카이저 라인하르트가 하이네센폴리스로 돌아왔을 때, 전 페잔 란데스헤르 아드리안 루빈스키가 투병 끝에 숨을 거두었다. 그가 죽은 후 하이네센폴리스에는 대규모 폭발 및 화재가 일어나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카이저 라인하르트가 기거하던 하이네센 국립박물관도 불타 그 안에 있던 수많은 미술품들이 소실되었다.(루빈스키의 불 축제)
그 후, 이제르론 공화정부 대표 율리안 민츠와 카이저 라인하르트가 바라트 성계의 내정자치권 문제와 제국의 입헌체제 전환을 두고 토의하면서 페잔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카이저 라인하르트는 '변이성 극증 교원병,變異性劇症膠原病,' 가칭 '황제병'이 악화되어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한편 신분증을 위조했다가 적발된 레오폴트 슈마허지구교 최후의 행동부대가 페잔에 잠입했다는 사실을 자백하면서, 군무상서 파울 폰 오베르슈타인 원수는 카이저의 병환이 회복세이며, 건강이 회복되면 지구를 파괴하겠다는 헛소문으로 지구교도를 유인하였다. 이는 공화정부가 제국과 강화한 시점에서 제국 최후의 위협세력인 지구교를 완전히 소탕하기 위한 조치였다. 계획대로 지구교는 황제를 암살하기 위해 벨제데 임시 황궁을 습격하였고, 파울 폰 오베르슈타인 원수가 지구교도의 테러로 폭사했으나 그 대가로 가짜 총대주교드 빌리에를 비롯한 지구교도는 모두 소탕되었다.(벨제데 임시 황궁 습격사건)
지구교가 소탕되고 2시간 뒤, 카이저 라인하르트는 "우주를 손에 넣으면...... 모두 함께......."라는 유언을 남긴 채 병사했다. 아들 알렉 대공은 생후 2개월 밖에 되지 않아 카이저린 힐데가르트가 섭정을 맡았다.
이후에는 평화로운 세상을 위한 번영에 힘쓴 듯하다. 8권에서 로엔그람 왕조의 특질은 ''''전제정권의 사회공정''''이라고 언급되는 대목이 있는데 그것이 후세의 평가인 듯하다. 은영전은 라인하르트가 죽는 에피소드를 끝으로 완결했으므로 이 '후세'가 로엔그람 왕조 존속 중의 시대인지 로엔그람 왕조가 끝난 후의 시대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OVA 1화에서 아득할 정도로 오래전 이야기로 잊혀져 가고 있다고 하는 언급을 생각하면 끝난 후일 가능성이 더 높다).

3. 국가 개괄



3.1. 정치


정치체제는 전제군주제. 속령인 바라트 성계 자치령민주공화제이다.
로엔그람 왕조는 골덴바움 왕조에 비해서 황권이 크게 강화되었다. 황권을 견제한 문벌귀족립슈타트 전역을 거치면서 대거 몰락하여 황제를 견제할 힘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골덴바움 왕조에 있었던 제국재상도 없어졌고, 초대 황제 라인하르트 자신도 근면하고 부지런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정사는 자신이 직접 처리했다. 본래 황제를 제외한 정부 1인자인 국무상서 마린도르프 백작도 황제가 대부분의 일을 처리하다 보니 의례 등 몇몇 업무만 보았다.
비단 황권 뿐만 아니라 제국정부의 권한도 매우 커졌는데, 이 역시 문벌귀족의 몰락과 연관이 있다. 내전이 승리한 이후 제국정부는 문벌귀족들의 재산과 영지를 몰수하여 막대한 재력을 가지게 되었고, 이를 토대로 막강한 군사력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문벌귀족으로 대표되는 지방세력은 모조리 몰락하여 제국정부를 견제하지 못했다.

3.2. 건국 세력


로엔그람 왕조의 성립을 주도한 세력은 크게 네 부류로 나뉘는데, 평민~하급귀족 출신 군인, 진보 세력, 관료, 문벌귀족이다.
초대 황제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이 본래 군인인 데서 알 수 있듯 로엔그람 왕조의 설립에는 군인의 지분이 가장 크다. 주로 평민에서 하급귀족 출신으로 이루어진 군인계열 공신들은 골덴바움 왕조의 불합리한 신분제 때문에 뛰어난 능력이 있어도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했고, 문벌귀족에게 자신의 공훈을 빼앗기기도 했다. 그러나 카이저 라인하르트가 원수부를 개설하여 자신들을 불러모으자 그들은 라인하르트에게 강한 충성심을 가지게 되었고, 자연히 그의 수족이 되어 로엔그람 왕조 창립에 크게 공헌했다. 그 때문에 로엔그람 왕조 초기에는 군부의 발언권이 강했다.
진보 세력은 칼 브라케와 오이겐 리히터로 대표되는데, 이들은 귀족 출신이면서도 제국의 문제점을 깨닫고 개혁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들의 개혁론은 문벌귀족에 의해 좌절되었으나 라인하르트가 그들을 불러모은 후 사회경제에 대한 개혁론을 입안할 것을 요구하자 이들은 개혁에 적극 협조했다. 이후 이들은 로엔그람 왕조에 초대 내각에 입각한다.
관료는 브루노 폰 질버베르히 등 과거 골덴바움 왕조 시절 빛을 보지 못한 관료들로, 신 제국 창립 이후 카이저 라인하르트에 의해 등용되어 출세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건국 과정에서 딱히 한 건 없지만 신 제국 창립 이후 제국의 기틀을 닦는데 적극적으로 일했다.
문벌귀족은 라인하르트파와 충돌해서 대거 몰락했으나, 마린도르프 백작가 등 소수 귀족들은 라인하르트에게 적극 협조하여 신 제국에도 출세했다.

3.3. 초대 내각


이하는 로엔그람 왕조 건국 당시의 내각 멤버. 과거 골덴바움 왕조의 내각에 있었던 전례성(귀족에 관한 업무 담당)이 사라지고 공부성(물류, 통신, 건설, 생산, 사회자본 정비 총괄. 정보통신+과학기술+국토교통+농림+산업자원부 쯤 된다.)과 민정성(보건복지+고용노동+환경 쯤 된다)이 새로 생겼다.
  • 국무상서: 프란츠 폰 마린도르프[11] → ???
  • 군무상서: 파울 폰 오베르슈타인[12] → ???
  • 공부상서: 브루노 폰 질버베르히[13]글룩
  • 사법상서: 브룩도르프
  • 재무상서: 오이겐 리히터
  • 내무상서: 오스마이어
    • 내무차관 겸 내국안전보장국장: 하이드리히 랑[14]
  • 민정상서: 칼 브라케
  • 학예상서: 제페르트
  • 궁내상서: 베른하임
  • 내각서기관장: 마인호프
내각을 보면 구 귀족(극소수)+친위 세력+구 관료층+기타등등으로 구성된것을 볼 수 있는데 국무상서였던 프란츠 폰 마린도르프의 경우 립슈타트 전역 당시 제일 먼저 라인하르트 쪽에 줄을 섰던 구 귀족 출신으로서 가장 로엔그람 왕조에 충성할 만한 인물이었고[15] 군무상서 오베르슈타인은 라인하르트의 친위 세력이다. 공부/사법/내무/학예/궁내상서와 내각서기관 모두 구 관료 출신이고, 다만 재무상서 오이겐 리히터와 민정상서 칼 브라케는 몇 안되는 기타 출신으로 골덴바움 왕조에서 제국의 개혁을 요구했던 인사들이었다.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 본인이 군 출신이다 보니 자신의 세력은 대부분 군인들이었고 그래서 정부 일은 구 관료층 중에서 눈여겨보던 유능한 인물들과 골덴바움 왕조 치하에서 개혁을 주장하던 인물들을 데려다 맡겼던 듯하다.
로엔그람 왕조가 초기에는 군사정권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실제로 작중에서도 로이엔탈 모함 당시 브룩도르프에 대한 설명에서 로엔그람 왕조는 초창기엔 군사정권적인 성격이 강했다는 서술이 나온다. 이러한 상황이 발생된 것은 제국군 3대 장관으로 상징되는 골덴바움 왕조의 군사 편제를 그대로 계승한 탓에 문민통제가 부재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골덴바움 왕조와는 달리 문관과 무관의 구분을 건국 당시부터 명확히 하였는데 한 보기로 힐데가르트는 총본영 참모총감이 되자 정치적 발언권을 잃었다는 서술이 있다. 위에 있는 초기내각에서도 군무상서를 제외한 전부가 민간인 출신이다. 다만 예외가 있다면 프란츠의 후임이 될 것으로 예정되는 미터마이어와 노이에란트 총독직인데 노이에란트 총독은 정치권력과 군사권력을 모두 갖고 있으며 임명된 이도 전 통수본부총장 로이엔탈 원수였다.

3.4. 주요 군부 인사



3.5. 노이에란트 통치


로엔그람 왕조 신 은하제국은 구 자유행성동맹령을 흡수하여 영토가 2배로 불어났다. 로엔그람 왕조는 이 새 영토를 어떻게 통치하느냐 하는 새로운 과제를 얻었다.
이에 제국정부는 하이네센에 총독부를 설치하여 전 동맹령을 관할하게 했다. 노이에란트 총독은 상서(장관)와 동등한 지위를 가지며 오직 황제에게 책임을 지고, 함선 35,800척에 장병 5,226,400명에 달하는 노이에란트 치안군을 관할하며 노이에란트의 정치 군사 양면을 총괄하는 사실상 제국의 2인자였다. 초대 총독으로 통수본부총장 오스카 폰 로이엔탈 원수가 임명되었다.
그러나 제국정부는 총독부를 영원히 유지할 생각이 없었다. 당장은 총독부가 정치군사 양면을 모두 관할하지만 언젠가는 내무성 주도 하에 지방제도를 정비하여 정치 군사를 분리하여 통치할 생각이었다.
어쨌든 초대 총독 로이엔탈은 구 동맹령의 부패정치가와 군수기업가를 모조리 청소했다. 구 동맹의 사법절차따윈 무시하고 총독이 서명한 영장 하나로 강제수사와 구속을 행했으며 600명의 '범죄자'들이 소탕되었다. 여기에 동맹정부의 민주공화정치 질서가 처벌하지 못한 범죄자들을 총독부의 전제정치질서가 심판을 받는다는 아이러니를 연출하여 제국에 적개심을 지닌 동맹 시민들이 제국의 통치를 실효적으로 인정하도록 할 계산도 있었다.
그러나 동맹 시민들의 민주공화정치에 대한 신념은 사그라들지 않았고, 9.1 사건을 통해 폭발한다. 이 사건 이후 노이에란트에는 시민들의 폭동이 빈발하게 된다.
그리고 아드리안 루빈스키지구교, 하이드리히 랑등 모략가들의 모략으로 우르바시 사건이 터지면서 로이엔탈 총독은 반란을 일으킨다. 로이엔탈은 민간인이 내전에 말려들게 하는 걸 원치 않아 동맹시민들은 털끝만큼도 다치지 않았고, 예상보다 빨리 내전이 끝나면서 제국정부는 동맹시민들이 반제국 활동에 나설 시간을 없애는데 성공했다. 이후 구 동맹령의 통치는 아우구스트 자무엘 바렌 상급대장이 대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하이네센 동란을 계기로 구 동맹령의 혼란이 증폭되었고, 여기에 제11차 이제르론 공방전, 오베르슈타인의 풀베기, 라그풀 교도소 폭동사건 등으로 동맹의 혼란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제국 정부는 노이에란트 중 바라트 성계를 민주공화주의 세력에게 넘겨줘 바라트 성계 자치령을 창건한다.

3.6. 경제


신 은하제국의 화폐는 구 제국과 똑같이 제국마르크를 쓴다. 그러나 270년 넘게 쓴 동맹 디나르를 한번에 폐지할 수 없으므로 5년의 기한 동안 천천히 폐지하려 했으나, 구 동맹령의 혼란 때문에 재무성의 디나르 폐지 계획은 미루어질 수 밖에 없었다.
로엔그람 왕조는 골덴바움 왕조와 달리 문벌귀족의 자산을 압류했기 때문에 재정적으로 부유했으며, 적어도 라인하르트 재위 기간 동안에는 재정적으로 압박을 받은 적은 없다.[20]

3.7. 신분제


구 문벌귀족은 이미 립슈타트 전역을 거쳐 대거 몰락했으며, 라인하르트 본인의 귀족제 혐오와 겹쳐 살아남은 귀족들도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그래도 '폰' 자를 쓰는 것과 작위 제도는 폐지되지 않았고 영지도 반납되진 않았으며 작위수여도 계속되었다.
골덴바움 왕조에 있었던 농노 계급은 이미 라인하르트가 해방한 뒤라, 로엔그람 왕조에는 없었다. 그래서 골덴바움 왕조의 농노-평민-귀족-황제의 신분제는 평민과 귀족, 황제로 재편되었다. 귀족은 실질적으로는 명예직이나 다름없으므로 사실상 황제 아래 모두가 일반 국민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3.8. 군사




[1] 골덴바움 왕조와의 구분을 위해 '''신은하제국'''이라 불리기도 한다. 공식 국명은 아니다.[2] 라인하르트 사후 입헌군주제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으나 본편에서는 라인하르트 사후는 다루지 않았다.[3] 라인하르트 1세 사후 건설 완료. 즉 본편에서는 벨제데 임시 황궁이 수도였다.[4] 골덴바움 왕조(250억)+페잔 자치령(20억)+자유행성동맹(130억)을 더한 수치다. 이는 개국 시점의 인구로, 사실상 은영전 세계관의 인류 전체의 인구 수이기도 하다. 여튼 한동안 큰 전쟁이 일어날 일은 없을테니 인구는 비약적으로 증가했을 듯하다.[5] 단, 골덴바움 왕조와 페잔 자치령을 별도 세력으로 치는 것처럼 바라트 성계 자치령을 따로 계산하면 하이네센만 해도약 10억 명 정도가 빠지고 바라트성계에 있는 다른 행성까지 해서 좀더빠질 것이다.[6] 사실상 미래 독일어[7] 공식적인 화폐는 제국마르크지만, 그렇다고 자유행성동맹 130억 시민들이 쓰는 디나르화를 하루아침에 없앨 수 없는 터라 제국재무성은 5년의 기간에 걸쳐 천천히 화폐를 통일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하이네센 동란이제르론 공화정부와의 전쟁으로 구 동맹령의 혼란이 확산되는 바람에 실행은 미루어질 수 밖에 없었다.[8] 신은하제국의 연호인 신제국력(NRC)으로 표기함.[9] 은영전이 라인하르트의 사망으로 끝나기 때문에 이 다음 역사에 대해서 알 수 없다.[10] 그나마도 그 샨타우 성역 회전조차, 많은 희생을 내며 지켜낼 만큼 전략상으로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한 로이엔탈이 작전상 후퇴한 것에 가깝다.[11]힐다와 라인하르트가 결혼해 황비가 되자 사임한다.[12] 벨제데 임시 황궁 습격사건으로 사망.[13] 페잔 폭탄테러사건으로 사망.[14] 후에 페잔 폭탄테러사건의 진상과 노이에란트 전역 등이 맞물리며 몰락.[15] 덧붙이자면 그만큼 구 귀족을 대표하는 인물이 된다. 물론 그렇다고 구 귀족을 정치세력화하거나 한 건 아니고 그저 몰락한 귀족들이 굶어죽지 않도록 손을 써준 정도에 불과했다. 애초에 로엔그람 왕조는 황권이 강했고 국무상서의 권력은 그리 크지 않았다.[16] 벨제데 임시 황궁 습격사건으로 사망.[17] 노이에란트(구 자유행성동맹) 총독으로 취임하면서 사임한다.[18] 제국 내 치안도 담당[19] 페잔 천도로 인해 루츠의 직책이 붕 뜨게 되었는데(업무 자체가 케슬러와 겹치게 되었다.) 그 직후 루츠는 우르바시 사건에서 사망, 사후 원수로 추서되었다.[20] 다르게 말하자면 문벌대귀족들이 몰락하기 전만 해도 은하제국은 재정적으로 영 좋지 않은 상황이었고 라인하르트가 정권을 잡은 후부터 죽을 때까지 계속 전쟁이 이어졌다. 그런데도 재정이 그런대로 괜찮았다는건 이 문벌대귀족들에게서 압수한 재산이 어마어마했다는 뜻이다. 귀족들에게 압수한 금액이 10조 제국 마르크에 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