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석(명군이 되어보세!)

 



1. 개요
2. 능력
3. 성격
4. 작중 행적
4.2. 2부: 장조 이윤
4.3. 3부: 건흥제 이현


1. 개요


슈타인호프 작가대체역사물 명군이 되어보세!의 주인공이자 주 화자. 여주인공 김상희와 함께 둘뿐인 환생자로, 김상희의 남편. 조선에 떨어지기 직전인 2017년에는 27세(1991년생) 공시생으로 시험에서 떨어진 속풀이로 같은 공시생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 문득 떠오른 과거시험부터 시작한 이야기가 조선시대의 왕에 대한 평가로 이어지다가 '조선시대 왕이었으면 속 편했겠다.', '내가 왕이었다면 훨씬 더 잘했겠다.'는 내용으로 농담을 하고 돌아온 후, 술김에 할아버지의 유품인 연적에 대고 '왕이 되고 싶다.'는 소원을 빌었다가 천녀에 의해 윤회를 거듭하며 조선시대 왕으로 사는 운명에 처한다.

2. 능력


평범한 지방대 출신이고 9급 공무원 시험에 두 번이나 떨어진 별 볼일 없는 사람 같지만, 의외로 역사와 사회 전반에 대한 지식이 일반인은 물론 웬만한 준전문가 이상으로 꽤나 풍부하고, 할아버지가 농사꾼 겸 한학자였던 덕분에 성리학농사 등에도 어느 정도 지식이 있어 이를 요긴하게 사용한다.[1] 한문은 1급으로 매우 능숙해서 조선시대의 한문으로만 된 문서도 막힘없이 읽을 수 있다. 또한 학창시절에 연극부와 검도부를 했다고 하는데, 이 덕분에 남의 몸에 빙의해서 진짜인 척 자연스럽게 연기하고 현대인에게 익숙하지 않은 승마사냥을 그럭저럭 해낼 수 있었다. 군 시절 담배와 초코파이 때문에 성당에 다닌 탓에 성서 지식도 있어서 2부에서 잘 활용한다. [2][3]
신체능력은 제법 뛰어나다고 설정된 모양이다. 승마와 사격에 능숙해진 것 외에도 1부에서 종성순에게 공격당할 때 허리에 찬 검을 뽑아서 막는 데에 성공하는데 비록 힘이 밀려 베이긴 했지만 순간적인 공격에 칼을 갖다 대기라도 한 데에서 평범한 현대인이나 조선 선비보다는 뛰어나다고 볼 수 있다. 2부에서는 빙의 직후 경성군의 몸을 보고 운동부족한 놈이라며 한참 까기도 한다. 다만, 조선시대라 게임, 영화 등 현대에서처럼 즐길 취미가 없어 운동만 한다는 언급이 있기는 하다. 그래도 대단한건 사실. 다만, 현대에 있을 때 축구 등 단체운동은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는 언급이 나와 현대에서 운동신경은 별로였을 수도 있다.[4] 3부에서는 17살의 젊고 튼튼한 육체를 다시 얻었고 38년간의 승마와 사냥 경험까지 겹쳐져 말을 달리면서 총과 활로 사슴이나 멧돼지를 한 번에 잡는 사냥 실력을 보였으며 검술도 연습하기 시작한다.[5] 기나긴 경험과 수련으로 폴란드 기사와의 마상창시합에서 승리하기도 했고 빈 포위전에 기병으로 참전하여 돌궐군 여럿을 직접 베기도 했다.
2부에서 현대에는 낙제생 수준이던 영어를 영국인과 대화 가능할 정도로 다시 익히고 무려 라틴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를 서툴게나마 동시에 익혀 어느정도는 구사하게 된다.[6] 덕분에 3부에서는 프랑스인들과 프랑스어로 무리없이 대화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이런 것을 보면 어학적 재능도 없는 것 같진 않고, 단지 현대에는 영어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3. 성격


성격적으로는 약간 평이 갈린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나 부모로서는 진짜 연산군, 경성군보다는 훨씬 낫지만 좋은 사람이나 부모라고 보기는 어려울 듯. 1부에서 세자 이황을 안아주는 등 이뻐하긴 했지만 서자 양평군은 자기 입으로도 이뻐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하며 옹주는 2부가 되자 이름도 까먹었다. 2부에서는 손자인 정일한을 만났을 때도 그 아버지, 즉 자기 자식도 얼굴 한 번 못 보고 죽어서 그런가, 충신에 대한 고마움 정도나 느꼈지 혈육의 정은 느끼지 못했다. 자신이 빙의하기 전 태어난 경성군의 자녀들은 "걔네들이 경성군 아이들이지 내 아이들인가"라며 후계자인 세자를 제외하고는 아예 관심도 안 준다. 자기 자식이 아니라는 말도 자기 변명에 더 가까운데, 1부에서부터 자기가 낳은 서자와 옹주들도 잘 안 챙겨줬다. 즉 애초에 자식에게 큰 사랑을 안 주는 타입. 국가의 발전을 위해 자신의 자식도 얼마든지 내치거나 이용할 생각도 있다. 1부, 2부 봐도 주인공이 진심으로 사랑을 다하고 아껴준 건 1부의 세자 이황뿐이다. 자신이 직접 낳은 자식이고 자신의 후계자이기 때문. 심지어 저 논리 상으로는 완전하게 자기 자식이라고 봐야할 상희가 낳은 서자들에게도 그럭저럭 잔정만 줄뿐 그렇게까지 큰 사랑을 주는 묘사는 없다.[7] 다만, 이후에는 틈틈이 다른 후궁들과 자식들도 잘 챙겨주고 같이 사냥이나 소풍을 가는 묘사도 나오고 있다. 세자에게도 자기 자식이 아니라는 초반의 생각과 달리 시간이 흐르자 진짜 자식 마냥 믿고 아끼며, 세자가 세손을 낳자 솔직하게 기뻐한다. 그리고 3부에서 얻은 자식인 이은은 함께 놀아주고 책을 읽어주는 등 현대인 부모처럼 사랑을 쏟아 키운다.
의식을 가지고 살아간 세월은 노인과 비슷하나 27살이던 현대의 기억이 고정된 탓인지, 경험한 세월에 비해서 정신연령이 철이 없는 행동을 자주 보인다. 일반적인 현대인들도 결혼 이후에 대부분 아내를 '여보', '당신' 등으로 부르는데, 아직도 아내인 상희를 친구처럼 '상희야' 라고 이름을 부르거나 '너'라고 부른다든가, 견서사와 미주탐험대가 귀환하자 체통머리 없이 개성으로 바로 가려고 한다든가. 꼰대 끼도 좀 있어서 담배가 현대에서 피우던 것 보다 너무 독해서 자신이 못피우니까 자신 앞에서 신하들도 못피게 담배 연기 싫은 티를 팍팍 낸다든가, 딸의 결혼식 이후에 세자와 왕자, 부마들이 모여서 술자리를 가지는데 안불러줬다고 삐치기도 한다.
현대에서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입맛은 그다지 까탈스럽지는 않은 편으로 묘사되는데, 학부생 신분으로 공무원 시험을 치다가 넘어왔기 때문에 현대의 미식보다는 치킨, 부대찌개, 족발, 피자, 짜장면, 짬뽕, 탕수육 등의 평범한 음식을 좋아한다. 술에 대한 조예도 그다지 높지 않은지 마리아주가 불가능한 한국요리와 적포도주를 매칭시키기도 한다.[8] 탕수육은 찍먹이라, 3부에서 재석이 찍먹으로 탕수육을 시작하는 바람에 원역사에서 볶먹이 원본인 탕수육이 찍먹이 전통이 된다.
1, 2, 3부에서 보여주는 성격이 꽤 다르다.[9] 팬덤에서는 기억은 재석의 것을 가지고 있지만 뇌는 몸의 원 주인의 것을 사용하기에 원 주인인 연산군, 경성군, 성친왕의 성격이 반영되는 것이라는 가설이 꽤 설득력을 얻고 있었고, 작가가 호르몬 때문이라고 밝혔다.
  • 1부: 실제 연산군처럼 때로는 광기 어린 카리스마를 보여주며 조정을 휘어잡고 일을 강력하게 추진하지만 어떨 때는 편집증에 가까울 정도로 예민하고 의심이 많으며[10] 잔혹함도 보인다. 연산군의 예술가 기질 덕인지 그럴싸한 한시를 짓기도 하고[11] 연회를 자주 열고 음주가무를 많이 즐긴다.
  • 2부: 빙의 전 경성군처럼 찌질하게 남탓하는 경우도 많고 자기 말을 뒤집는 뻔뻔하고 졸렬한 모습도 보인다.[12] 반면 1부에서의 카리스마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또한 워낙 일이 바쁘기도 했으나 1부와 다르게 잔치와 음주가무를 즐기는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 3부: 빙의 전 관종이었던 성친왕처럼 일선에 직접 나서기를 좋아하는 모습을 많이 보인다. 폴수국 귀족 차르니에츠키의 도발 한 마디에 열받아서 빈 공방전에 직접 창을 들고 참전하는 것, 한양대화재 당시 금전적 지원만 하려던 예왕과 달리 직접 불을 끄고 인명을 구하러 돌아다닌 것, 무인지변 때에도 또다시 전장에서 직접 돌격을 한 것 등. 다만 그런 성격 때문에 그저 관종 개초딩이었던 진짜 성친왕과 달리 80여년의 인생 경험이 이런 성격을 통제해주면서 단순 관종이 아닌 일선에서 솔선수범하는 모범적인 태도로 발현된 듯.
종합적으로 보자면 능력적으로 상당히 유능하지만 그렇다고 먼치킨이라고 할 만큼 엄청난 인재는 아니며 성격은 대체로 호인에 가깝지만 그렇다고 성인이나 대인이라고 불리기엔 많이 부족하다. 미래지식을 제외하고 본다면 나름 뛰어난 범군 수준의 인간상이고, 명군이나 성군이 되기에는 꽤 무리가 있는 인물. 주인공이 명군이 될 수 있었던 건 미래의 지식들 덕분도 있지만, 빙의하는 왕들이 하나같이 답이 없는 암군들이라 상대적으로 더 유능한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1부에서의 연산군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암군의 대명사이고, 2부에서의 경성군은 실제 역사의 그 선조보다도 더 무능한 암군이었다. 주인공도 이들을 반면교사로 삼아 타의 모범이 되는 행보를 보이려고 의식하고 있다. 1부에서는 연산군처럼 흥청망청 놀지 않고 나라의 발전을 위해 일했고, 2부에서는 선조처럼 비겁하게 도망치지 않고 친정에 나서 국란극복에 기여한다. 주인공을 가장 객관적으로 아는 상희 역시 미래 지식 없는 주인공이 노부나가와 전쟁을 벌여 이길 거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는 평가를 내린 적 있다.
한편 예민하고 잔혹한 면이 있어서 자칫 잘못하면 폭군이 될 가능성도 존재한다. 조선인들 기준에서도 잔인하다는 평이 몇번이나 나오며, 현대인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더 이상할 정도로 피 보기를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덕분에 대역갤 등 팬덤에서는 사이코패스라고 깐다.[13] 물론 현대적 윤리관은 있어서 조선식 고문을 줄이고, 능지형을 되도록 줄이고 참수로 끝내려는 등 모습도 보이는데, 반대로 죽이려고 작정한 적은 최대한 잔인하게 죽인다. 1부에서는 왜구를 붙잡자 '성문 높이 매달아서 말려 죽이고 백골이 될 때까지 방치하라'고 명령하고, 2부에서는 여진정벌 후 추장들의 머리를 수레 모서리 마다 매달고 포로들에게 수레를 끌게하거나, 임해군을 처분할 땐 명나라에서 능지형 기술자까지 초비해 능지형을 집행하는 등 잔인한 퍼포먼스를 가끔 선보인다. 특히 능지형은 충격을 받은 선비들이 아무리 역적이라지만 너무 처벌이 잔인하다며 상소를 올릴 정도.[14] 사지가 찢겨 죽는 거열형을 보면서도 약간 거북하다는 정도의 반응이고, 능지형 집행 때는 주변 신하들은 기겁을 하며 자리를 뜰 핑계를 대는 와중에 주인공은 나도 마음이 아프다 정도의 감상만 남기고 끝까지 본다. 1부 무종은 선비들에게 대놓고 잔인하다고 까이고, 2부에서도 세자가 수급 수레를 보고 기겁을 한다. 권율도 저런 왕을 보고 '주상께선 수급을 좋아하신다'고 착각해서 왜군의 수급을 한수레 가득 실어서 보내기도 한다.
게다가 겉보기엔 제법 재밌고 유쾌해 보이지만 실상은 냉혹하고 비정한 측면이 제법 있다. 특히 1부는 현실 연산군만큼은 아니어도 사화를 여러번 일으켰으며 왕권을 위협할만한 이복형제들을 가차없이 숙청했다. 또 성균관 유생들은 경인왜란에 종군하고서는 PTSD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이는데, 주인공은 전쟁에 대해서 트라우마나 죄책감을 느끼는 묘사가 없다. 아군의 희생에 대해서는 '마음이 아프지만 부강한 나라를 위해 어쩔 수 없는 희생' 정도로 생각하며 넘어가고, 적군에 대해선 '놈들이 먼저 침략해서 반격한건데 당연하지 않나' 하는 식으로 생각한다. 암행을 하면서 전쟁으로 괴로워하는 백성들 목소리를 몇번이나 듣고 그런 백성들에게는 나름 신경을 쓰지만 전쟁의지를 꺾지는 않는다.
그래서 대역갤같은 곳에선 재석이를 코른의 사도(...)로 취급하고 있다. 카오스 4대 신 중 누구에게 어울릴까라는 주제로도 글이 나온 적이 있다.
하지만 미래지식을 제외하고 봐도 명군이 될 자질이 아예 없는 건 또 아니다. 인재를 보는 눈도 있고,[15] 군사적 식견도 나쁘지 않고,[16] 타인의 의견도 잘 귀담아 듣고,[17] 전체적인 형세를 읽는 능력도 나쁘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본인이 국가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매우 충만하다. 사실 편하게 마음먹고 대충 살려고 하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음에도 주인공은 국익을 위해 힘쓴다.[18] 그와 더불어 국익을 위해서라면 설령 본인이 죄책감을 느끼더라도 죄 없는 이들을 처형하고 고문할 잔혹함과 국익에 해가 된다면 일가친척이나 피붙이는 물론이고 스스로의 목숨까지도 망설임 없이 끊어낼 냉혹함도 겸비하고 있다.[19] 어찌 보면 태종한고제를 꽤 닮았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작가가 주인공이 연속해서 환생한다는 설정을 생각해서 주인공의 능력을 애매하게 설정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지금의 능력으로도 오랫동안 나라를 다스리고 시스템을 만든다면 충분히 조선을 강대국으로 만들기에 부족함은 없지만, 다른 동네의 다 쓰러져가는 동방 소국을 무지막지한 통찰력과 카리스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배짱과 무력, 그리고 미친듯한 행운으로 순식간에 대제국으로 만드는 괴물 난쟁이나, 쇠락해서 멸망을 앞둔 제국을 인간을 초월한 듯한 정신력으로 부활시키는 괴물이나, 기계장치의 신의 가호를 받아 극동 산골자락에서 일어나 세계의 절반을 무릎 꿇리며 중세의 조종을 울리신 만고일제 천자폐하 등에 비하면 많이 부족해보이긴 한다. 덕분에 대역갤 등 관련 커뮤니티에서는 허구한 날 빡대가리, 사이코패스라고 까인다.
하지만 비교대상들이 워낙 먼치킨들이라 그런 점이 있다. 물론 재석이가 저 자리에 들어간다고 해서 잘할 거란 보장은 없다. 작가도 재석이가 저 자리에 들어간다 해도 잘한다고 보장한 적도 없다. 하지만, 위에 나열된 다른 대역물의 주인공들만큼 유능한 인물이 수십년 간격으로 무한정 빙의했으면, 이미 조선은 아시아 전체를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하고 유럽 정벌까지 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아마 재석이의 능력이 어중간한 것은 작가 나름의 밸런스 패치인듯하다.
거의 백년 왕을 하다보니 현대 지식을 가졌음에도 마인드는 점점 신분제 사회의 특권층에 익숙해지고 있다. 자신도 언젠가 근대에 들어 권력을 내려놓게 되는 날이 온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기도 하고, 창관에서 성친왕의 사생아가 생겼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천한 어미에서 난 쓰레기 같은 녀석들'''이 몰려들면 어쩔까? 같은 생각을 자연스럽게 한다. 또한 부국강병만을 바라보고 왕을 해오다보니 땅을 얻기 위해 적당한 전쟁 명분을 생기길 바란다든지, 대한의 종속국이 대한의 영향권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움직임이 보인다면 무력으로 정권을 갈아치울 생각을 한다든지, 제국주의적 사고에 상당히 물든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4. 작중 행적



4.1. 1부: 무종 이융


'''조선 제10대 국왕
무종 | 武宗'''

'''무종□□□□□□□□□효대왕
武宗□□□□□□□□□孝大王'''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묘호'''
'''무종(武宗)'''
'''시호'''
'''조선'''
□□□□□□□효대왕
(□□□□□□□孝大王)
''''''
□□(□□)
'''출생'''
1476년 11월 23일 (음력 11월 7일) 0시 36분
조선 한성부 경복궁 교태전
'''즉위'''
1495년 1월 25일 (음력 12월 29일) 신시
조선 한성부 창덕궁 인정전
'''사망'''
1506년 11월 20일 (음력 11월 8일)
(29년 11개월 28일, 1만 955일)
조선 한성부 경복궁 광화문 주변
'''능묘'''
무릉(武陵)
'''재위'''
'''조선 왕세자'''
1483년 3월 14일 ~ 1495년 1월 21일
(음력 1483년 2월 6일 ~ 1494년 12월 29일)
'''조선 국왕'''
1495년 1월 25일 ~ 1506년 11월 20일
(음력 1494년 12월 29일 ~ 1506년 9월 2일)
(11년 9개월 26일, 4,3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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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전주(全州)
''''''
융(㦕)
'''전호'''
□□전(□□殿)
'''부모'''
부왕 성종, 모후 제헌왕후
'''부인'''
성렬왕후, 숙의 이씨, 숙의 곽씨

눈을 뜨니 자신이 왕이 되어있는 난데없는 상황에 꿈이나 몰래카메라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자신이 술에 취해 돌아온 날 겪은 그것이 꿈이 아닌 진짜라는 걸 알고 기가 막혀한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조선시대 왕으로 살아보기로 하며 내관을 상대로 질의응답을 통해 우리에게 '연산군'으로 알려진 왕의 즉위 초에 빙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왕이 된 김에 자신의 지식을 기반으로 조선을 성리학밖에 모르는 꼴통국가가 아닌[20] 실용주의적 국가로 개혁하여 임진왜란병자호란을 막고 일제강점기가 오지 않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성리학적인 사고방식에 익숙하지 못하고 정치라는 것을 해본 경험도 없기에 신하들을 이끄는 능력은 좀 모자라서 자신과 뜻이 맞지 않는 신하들을 정기적으로 사화를 일으켜 숙청하는 식으로 국정을 이끈다.[21]
조총 등 많은 발명품을 만들고, 수 차례 전쟁에서 이기며 영토를 크게 확장하고, 노비종모법, 서얼금고법, 과부재가금지법과 같은 악법들을 철폐하는 등 12년간 국정을 제법 훌륭하게 이끌었으나 자신에게 원한을 품은 대마도 출신 일본인 종성순에게 허무하게 암살당해 사망한다.[22]
사망 후 '무종'의 묘호를 받는다. 재위기간은 1495년 ~ 1506년. 3부에서 조선이 칭제건원을 하지만 위로 4대조 까지라 그의 아들 앞에서 끊긴다 .
요절하긴 했지만 원역사에서처럼 반정으로 폐위를 당하지 않아서 몇달 더 오래 재위하였으며 묘호도 받았다. 무(武)는 시법 항목에서 볼 수 있다시피 중간 축에는 드는 묘호지만, 유교 사대부들에게는 상당히 평가가 안 좋다. 본편에서도 '젊어서 그런지 전쟁으로 명성을 떨칠 생각만한다'고 까이고 '죽어서 무종이라는 묘호라도 받고 싶은 모양이다'라는 말도 나왔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반 쯤 빈정거리는 의미로 붙은 묘호인셈. 당연하지만, 선왕의 아들인 새 왕은 효심+자신의 정통성 강화를 위해 아버지에게 좋은 묘호를 올리려고 애쓴다. 하지만 무종의 아들 인종은 어린 나이에 즉위해 묘호 결정에 힘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반면 백성들에게는 꽤 좋은 평을 받는 듯. 무덤에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복숭아를 심어주거나 무종 세대의 백성들이 자식, 손자 세대에게 강선총, 개선식 등의 업적을 이야기해 준 묘사가 있다. 개선식과 순행 덕에 백성들에게는 이미지 메이킹을 잘 한 셈이다. 한편 2부에서도 실용주의 성향이 강한 몇몇 신하들 - 정여립, 이항복, 유성룡 등 - 은 무종을 고평가하기도 한다. 3부에서는 민간에선 원역사처럼 어머니의 죽음을 알게 된 이후 사화를 일으킨거 아니겠냐는 말이 도나, 조정 고관들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함이라고 다 알고 있다.
현실 연산군에 비하면 충분히 명군이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역사의 궤적을 크게 바꾸지는 못한 편. 2부의 등장인물들은 현실과 별 차이가 없고, 재석 본인도 그것을 들어 연산군 시절에는 역사를 아주 많이 바꾸진 못한거 같다고 생각한다. 일단 제위 기간 자체가 짧아서 많은 변화를 일으키기엔 시간이 부족했고, 후계를 제대로 키울 시간도 없었다. 게다가 시대적, 사회적 한계[23]에도 많이 부딪혔다. 2부에 경성군으로 재빙의하지 않았으면 무종 시절의 개혁이 전부 퇴행해서 현실 역사와 별 차이 없게 됐을 가능성이 크다.[24][25]
2부 경성군 대에는 무종 시절 닦은 기반들을 활용해서 더 큰 스노우볼링을 하게 되며, 2부의 개혁은 불가역적일 정도로 역사에 큰 변화를 주어서 3부에서는 동아시아 전체의 역사가 현실과 영 딴판으로 흐르게 된다. 자세히 보면 '''왕권 강화''', 영토 확장, 대외 원정, 상공업 진흥, 신무기 발명, 삼림 보호 등등 2부의 많은 것들은 무종 시대의 선례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훗날 역사가들은 더 고평가할 군주가 될 가능성이 높다.

4.2. 2부: 장조 이윤


'''대한 황실 2대조'''
'''장조 | 莊祖'''

'''조선 제13대 국왕'''
'''장조 | 莊祖'''

'''장조소경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
莊祖昭敬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
[A]
'''장조현문의무성예달효태황
莊祖顯文毅武聖睿達孝太皇'''
[A]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묘호'''
'''장조(莊祖)'''
'''시호'''
'''조선'''
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
(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A]
'''대한'''
현문의무성예달효태황
(顯文毅武聖睿達孝太皇)[A]
''''''
[26][B]
'''출생'''
1551년
조선 한성부 은성군 사저
'''즉위'''
1567년
조선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C]
'''사망'''
1608년
조선 한성부 경복궁 강녕전
'''능묘'''
장릉(□陵)
'''재위'''
'''조선 국왕'''
1567년 ~ 16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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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전주(全州)
''''''
윤(□)[46]
'''군호'''
경성군(景城君)
'''전호'''
영모전(永慕殿)[A]
'''부모'''
생부 은성대원왕, 생모
의부 명조, 의모 인순황후
'''부인'''
의인황후, 인빈 조씨, 혜빈 강씨,
순빈 박씨, 귀인 김씨, 숙의 홍씨,
상빈 이씨, 숙원 정씨, 숙원 김씨

2부에서는 (무종 시절의 활약 덕분에) 역사가 바뀌며 등장한 실존하지 않는 가공의 왕 '경성군'에 빙의한다. 무려 76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다른 왕에 빙의했다는 사실에 절규하며 천녀를 원망하지만 이내 냉정을 되찾고 자신이 없는 동안 조선에 어떤 변화들이 있었는지 파악하기 위해 2주 넘게 서재에 틀어박혀 지난 역사들을 되짚어본다. 불행 중 다행으로 자신이 1부에서 벌인 정책 상당수가 사장되지 않고 이어진 것에 안도하며, 10년 후 닥칠 왜란을 대비하기 위한 준비에 나선다.[27] 이 과정에서 이전까지 경성군이 추진했던 성리학적 가르침을 우선시한 정책들을 취소하고 성리학밖에 모르는 유교꼴통들을 숙청해가며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응하기 위한 실용주의 개혁 정책을 밀어붙인다. 그래도 실제 역사의 임진왜란에서 헌신하여 입만 산 선비가 아니라는 걸 입증한 조헌, 김성일 같은 사람은 우대해주고, 성리학이 조선의 근본이념이라 전면 부정할 수는 없는데다가 유용성도 없진 않기에 대간에는 사림들을 남겨둔다. 유성룡, 이순신, 이항복 등의 위인으로 남은 인재들을 중용하는 것은 물론, 김명원, 정철처럼 능력이 있지만 과오가 더 크게 기억된 인물들도 알맞은 자리에 기용해 오명 쓸 일 없게 하며 잘 활용한다. 사화를 일으켜 사림들을 대거 죽이던 1부와 달리 기축옥사의 역 버전에 해당할 서인 숙청도 처벌을 전가사변 정도로만 하고, 윤두수, 정철 같은 인재는 공을 세우자 복귀시켜 준다.
1부에선 왕권 강화를 위해 정치 싸움을 하고 부국강병을 위한 개혁에 몰두하는 모습이었다면, 2부에서는 국난 극복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다. 빙의 초부터 연속으로 이어지는 전란에 맞서 전쟁에 몰두하는 모습이 주로 나온다. 실제 역사에서의 선조를 반면교사로 삼아 친정을 나서 병사들을 독려하는 등 책임감 있고 모범적인 태도를 보이며[28] 성공적으로 여진족과 북원, 일본의 침략을 물리치고 반격에 나서 침략받기 전보다 영토를 넓히고 조선이 지역강국으로 성장하는 데 기여한다.
일본 보복 원정이 끝난 뒤에는 국력 강화를 위해 외국과의 전쟁보다는 교류를 확대하고 탐사와 개척으로 해외영토를 넓히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양응룡의 난은 얻을 것도 꽤 있고 왜인과 토인 외인부대를 주력으로 쓰면 피해도 적을 것이기에 참가했으나 스페인과는 충돌을 피하려 한다.
견서사가 유럽에 주인공을 소개할때는 서양식으로 '''유구왕국의 보호자이시며 야인들의 자애로운 어버이시고 대남도의 지배자시며 구주 왜인들의 심판자이자 대명천하의 굳센 수호자[29]이신 조선왕국 국왕'''이라고 소개하게 된다.
신체나이가 50대가 된 뒤론 피로감이 든다거나, 두통이 심하다거나, 성욕이 줄어 중전과 상희 외의 후궁과 관계를 맺지 않는다거나, 폐렴에 걸려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고 앓아눕기도 하는 등 건강악화 떡밥을 뿌렸고, 조선에 3년째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이어지자, 건강이 악화된 상황에서 환구단공사를 명하고, 무리해서 기우제를 지낸 뒤 기적적으로 폭우가 쏟아지자 솜옷도 걸치지 않고 폐렴에 걸린 몸으로 비를 그대로 맞는다. 결국 이것이 원인이 되어 상희, 이순신, 이항복, 중전, 세자 등등 아끼는 인물들 앞에서 '우리에겐 우리의 하늘이 있으니 기회가 오면 꼭 붙잡아라'는 유언을 남긴 뒤 숨을 거뒀다.
재위기간은 1567~1608년[30]이며 그 중 경성군 본인이 통치한 초기 15년을 제외하고 1582년부터 빙의해 26년간 통치했다. 묘호는 '장조'를 받는다.
이것저것 실리적인 일을 하긴 했지만 도리에 맞지 않다며 후세 유학자들에게 까인 무종과 달리, 이번 생에는 감히 그 누구도 비판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위업을 달성한 '''명군'''으로 평가받을 것이다. 그토록 가뭄이 이어졌어도 대규모 아사 사태 없이 어찌어찌 넘겼고, 유럽에서 작물과 가축을 도입해 백성들 먹고 사는 문제를 상당 부분 해결했고, 각종 문화 산업을 크게 증진시켰으며, 세 차례 전쟁에서 진두지휘해 승리를 이끈데다, 조선을 강대국으로 분류해도 될 정도로 영토를 크게 넓히고 국력을 증진했으며, 조선인들 스스로 사대주의를 버리고 자주정신을 기르게 했다. 말년에는 아예 목숨을 바쳐가며 기우제를 지내 비를 내리기까지 했으니 후세에 두고두고 칭송받을 명군으로 불러도 부족할 정도다. 아예 왕이 싫다는데도 신하들이 존호를 받으라고 강요했을 정도니 결과만 두고 따지면 광개토대왕, 세종대왕과 함께 '한민족 최고의 3대 명군'으로 평가받을 것이다. 조선 왕조의 모든 국왕들의 공식 시호에는 '대왕'이 들어가지만, 현대에서도 '대왕'이라고 굳이 불리는 왕은 세종뿐[31]인데, 그런 세종과 사실상 동격의 명군인 셈.
재위초기 15년의 무능도 사실상 장조의 큰 그림으로 해석될 여지가 농후하다. 장조는 재위초기 별다른 업무를 안하다가 북방에서 전쟁이 나면서 본격적으로 각성해서 능력을 발휘했는데, '초기에는 방계에서 들어와 왕이 되어 부족한 정통성 때문에 숨죽이고 대간들을 그대로 따르며 물밑에서 힘을 기르다가, 북방의 정세 변화를 캐치하고 일부러 성격이 포악한 신립을 보내서 여진족을 도발, 연속된 전쟁을 일으켰다'고 여겨질 수도 있다.[32] 실제로 전쟁에 승리하여 왕권이 강해지자 마자 자신이 하고 싶은 여러정책을 순식간에 밀어붙였을 뿐만 아니라[33] 자신이 원하는 인재들을 순식간에 높은 자리로 끌어올려서 국력을 강화했기 때문이다. 조선사에 길이남을 위대한 지략가로 여겨질 것이다.
손자가 칭제건원하며 황제로 추존되어 3부에서는 장조대제라고 불린다.
대체역사 마이너 갤러리에 독자가 올린 박시백 조선왕조실록 장조만화에 이 작품 세계선에서 후손들이 본 장조의 모습이 요약되어 있다.[34]

4.3. 3부: 건흥제 이현


'''조선 제18대 국왕'''
'''대한 제4대 태황'''
'''건흥제 | 建興帝'''

'''출생'''
1665년
대한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C]
'''즉위'''
1699년 3월 28일 (음력 2월 27일)
대한 한성부 창덕궁 인정전
'''절일'''
□□절(□□節)
'''재위'''
'''대한 황태제'''
1698년 12월 4일 ~ 1699년 3월 27일
(음력 1698년 11월 3일 ~ 1699년 2월 26일)
'''대한 태황 대리청정'''
1698년 11월 24일 ~ 1699년 3월 27일
(음력 1698년 10월 22일 ~ 1699년 2월 26일)
'''대한 태황'''
1699년 3월 28일 ~
(음력 1699년 2월 27일 ~)
'''연호'''
건흥(建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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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全州)
''''''
현(□)
'''왕호'''
성친왕(□親王)
'''부모'''
부황 열조, 모후 진성황후
'''부인'''
인선황후 강씨(추존), 황후 민씨, 순비 소씨,
정빈 김씨, 희빈 박씨, 숙빈 홍씨
'''자녀'''
황태자 이은, 친왕 이준, 친왕 이권, 친왕 이○, 군왕 이○,
옹주 이명주, 옹주 이향주,
비수백 이진서

재회한 천녀에게 또다시 바보노릇을 할 수는 없다며 최소한 빙의당하는 사람이 원래 알던 사람은 알아보게 해달라는 부탁을 하는데, 천녀는 이 청을 수락하지만[35] 대신 조건이 달라질 것이라고 한다.
3부는 대한 태황 건복제의 아우, '성친왕 이현'으로 빙의했으며, 1682년 루이 14세 시기의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10년 만의 모닝 발기를 기뻐하며 폴란드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의 사생아 올렝카와 동침한 상태에서 깨어난다.[36] 자신을 추방한 것이 동복 형인 태황의 의심 탓도 있지만 이복형이자 야심가인 예왕의 모함에 빠진 것임을 알게 되면서 긴장하게 되었다. 주변에 금위사와 예왕의 첩자가 분명히 있을텐데 너무 막 놀면 예왕이 태황에게 자신을 참소해 죽이거나 진짜 유배를 보내버릴 명분을 주는 것이고, 그렇다고 너무 똑똑한 모습을 보이면 견서사 속에 있을 예왕의 첩자가 자신을 암살할 수도 있다는 것.[37] 때문에 '원래 망나니였던 내가 모범적인 명군 루이 14세를 보고 감명받아 개과천선하기로 했다'는 설정으로 유흥을 줄이고 대한에 보낼 고문단을 모으고 선물로 귀금속을 보내는 등으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회복하려고 노력하고, 암살 위협을 막기 위해 견서사 관원들에게 인망을 쌓고 첩자를 색출해내려 한다.
그 후 루스국으로 가다가 들린 폴란드에서 제2차 빈 공방전에 폴수국 지휘관으로 참전하여[38] 돌궐군 총지휘관 카라 무스타파 파샤의 천막을 점령하는 큰 공을 세우고 보상으로 올렝카와 혼인과 약 21만 두카트의 전리품을 받는다.[39] 큰 재물을 얻은 것에 더해서 익위사 무관 김종건을 빈 전투 중 구해줬는데 이에 감동한 김종건이 자신이 암살 밀명을 받은 예왕의 첩자라고 고백하고 재석에게 충성을 맹세하여 암살 위협에서도 어느정도 벗어난다.
루스에 방문하여 표트르 대제와 친분을 쌓고, 이형준의 사생아인 보리스와 그 의형제들을 호위로 삼는다. 표트르 대제에게 같이 유럽을 여행하자고 설득하여 약 3년에 걸쳐 스웨덴, 네덜란드, 잉글랜드를 차례로 방문한다. 그 후 건복제에게 귀국하는 대신 미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고 동변관리사 벼슬을 받는다. 그리고 본국의 태후가 새 친왕비를 간택해서 보내주는데... '''새 친왕비는 상희였다.''' 함께 깨를 볶는 시간을 보내면서, 하와이 정복, 아파치 토벌, 광업 진흥, 중미주 신설 등의 업적을 세운다. 그러던 중 본국에서 태자가 사망하며 후계 구도가 불안정해지자 동변관리사에서 해임되고 급히 귀국 명령을 받는다. 이 과정에서 두번째 암살자였던 이진원이 재석을 암살하려다 포기하고 자수하게 되어 암살 위협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귀국 후 후계자 자리를 놓고[40] 예왕과 경쟁을 벌이는데 과거의 나쁜 평판 때문에 초기에는 위기였으나 재석 개인이 처신을 잘했고 성친왕의 편에 선 사람들이 옹호해주는 동시에 결정적으로 '''태황이 개과천선한 아우 성친왕을 태제로 책봉하는 것에 마음을 두고 있어서''' 유리한 위치를 점한다. 한양대화재가 발생했을 때 일선에서 뛰면서 화재를 진압하고 많은 인명을 구출하는 공을 세웠고, 이를 계기로 건복제에게 대리청정을 명령받으면서 사실상 황태제로 가책봉되며 후계자 경쟁은 재석의 승리로 끝난다. 이에 궁지에 몰린 예왕이 일으킨 무인지변으로 목숨의 위기[41]를 겪었으나 반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건복제의 인가까지 받으며 무인지변을 성공적으로 제압하고 정식으로 황태제로 책봉되고,[42] 1699년 3월 27일 건복제가 사망하면서 태황으로 즉위한다. 연호는 고구려, 발해 선왕이 사용했고, 제갈량 시절 한 회제 유선이 사용한 것으로 유명한 건흥[43]으로 정한다.
즉위 후 동촌과 남촌의 재개발을 마무리하고 용산별궁 공사를 시작하는 등 치세를 토목으로 시작한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틈타 필리핀을 획득할 명분을 짜내는데 고심하며, 표트르 1세의 부탁으로 루스국 세자 알렉세이를 맡아 교육시키면서 대북방전쟁도 관심을 두고 있다. 아들을 모두 잃어 후사가 불안한 태황태후와 황태후의 권유를 따라 후궁을 3명 추가로 들인다. 그리고 후송이 요구한 국교 수립에 대해서도 일단 받아들이되 건주를 배신하지는 않기로 한다. 스페인에서 재석 빙의 전 성친왕이 원나잇으로 만든 사생아 디에고가 찾아오고, 황실에 스페인 세력이 침투해 분란을 일으킬 씨앗이 되리라 우려하면서도 자식으로 받아들이고 백작위를 내린다. 그러던 와중에 원래 천연두로 요절한 카를로스 2세의 원 후계자 요제프 페르디난트가 종두를 맞고 살아남아 왕위를 계승하게 되면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양상이 달라지게 됨과 동시에 신서반아 부왕대리의 오판으로 필리핀에 불법체류중인 한인들이 학살당하게 되자 이를 빌미로 필리핀 점령에 나선다.
본인이 3번의 삶을 쏟아 가꾸고 키운 대한을 거의 본인의 소유물로 여기며, 북미에 대한 본국을 압도하는 강대국의 출현을 견제하거나, 제정 타도나 민주화 요구 시위 때 권력을 잃을 것을 두려워하는 등, 가까운 미래에 전제군주제의 시대가 끝나고 민주주의의 시대가 온다[44]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으나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하고 있다.
1, 2부와 다르게 10대 후반의 건강한 몸을 얻었고 38년간의 승마와 사격 경험이 쌓여 신체 능력으로 활약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고 있다. 사냥에서 총과 활을 백발백중하거나 연습도 없이 마상창시합에서 승리하는 등. 사범을 구해서 검술을 배우기도 하고[45] 기병 지휘관이 되며 처음으로 실전 참가와 전술 지휘를 해보는 등 더 레벨업한다. 귀국 후 무인지변에서도 반란군의 포위망을 뚫고 가족과 함께 탈출하기도 하고, 패배한 반란군을 추격하면서 선봉에 서는 등 장수로써도 뛰어난 모습을 보인다.

[1] 물론 성리학은 할아버지보다 훨씬 잘하는 사람들이 발에 채이는 사회라 한동안 고생을 많이 했다. 경연은 아예 실력 부족이 들통날까 봐 잘 열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 정도 지식조차 없었으면 대화를 따라가지도 못해서 임금 연기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 1부에서 십년 넘게 왕 노릇하며 익힌 게 있기에 2부에서는 성리학 지식 부족으로 고생하는 묘사는 없다. 2부 말에 가서는 38년간 임금 노릇하는 동안 경연관에게 시달리면서 대학, 중용, 십삼경을 강제로 마스터하게 된다.[2] 시험에 불합격한 이유는 영어 과락이다. 다른 과목은 나쁘지 않은데 영어에서 유독 물을 먹었다고 하며 학창시절 수포자였다는 언급이 있다. 국어·과학·체육 등 다른 과목은 모두 S~A급인데 가장 중요한 수학·영어를 못해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작가 왈, 공시준비 제대로 안했다고. 애초에 공무원 시험도 남들이 한다니까 그냥 적당히 교육행정직으로 그것도 가장 덜 귀찮다고 선택과목을 과학과 사회로 적당히 준비했다고 한다. 머리는 좋은데 노력을 안 하는 유형이거나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만 열심히 판 역덕후 성향으로 추정된다. 어찌 보면 시대를 잘못 타고난 인재.[3] 어쩌면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성균관 학생들이 카페인에 찌들며 공부할까 봐 걱정할 때, 자신은 그렇게까지 공부하기 전에 조선으로 왔다는 독백이 있다.[4] 다만 군복무 시절 축구시합에서 부진해 선임들에게 갈굼당했던 경험이 있다는 묘사가 나오기에 운동치라서만은 아니고 단체운동에 대해 안 좋은 기억이 남아 좋아하지 않는 것일수도 있다.[5] 1, 2부와 다르게 믿을만한 호위를 데리고 다닐 수 없는 상황이고 예왕이나 형황이 암살을 시도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호신술의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1부에서 종성순에게 암살당한 트라우마의 영향도 있다.[6] 이 덕분에 3부에서는 억양이 이상해졌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루이 14세 등 유럽인들과 통역없이 대화할 수 있게된다.[7] 다만, 변호해주자면 계속 전생을 해야 하는 상황상 언젠가 자식들과 이별해야 하는 상황에 있고, 당시 영유아 사망률이 높아 자식들에게 정을 주기 어려운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1부의 주인공이 낳은 자식 중 무사히 자란 아이는 이황뿐이었으며 2부에서도 자식 일부가 요절했다. 덤으로 상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을 누르하치의 아들에게 시집보내기로 한 것 역시 당시 시대에 공주가 가장 성공할 수 있는 길이 청나라 왕비가 되는 것인 이유도 있다. 실제로 상희 역시 주인공의 이 계획에 동의했다.[8] 포도주 문서에 잘 서술되어 있듯이 한국요리와 포도주의 마리아주는 불가능하다.[9] 독자들의 평가만이 아니라 작중에서도 상희의 입으로 전생과 이번 생에서의 재석은 거의 다른 사람 수준으로 성격이 달라졌다고 말한다.[10] 하지만 실제 암살 기도를 당하기도 했으니 이해할만한 부분이다.[11] 실제 연산군이 지었던 시이다. 재석이 현대에서 보고 기억해서 읊은 것이 아니라 창작을 했는데 똑같은 시가 나온 것.[12] 대표적인 것이 하남벌 전투 대패 이후 자기 잘못은 생각도 안 하고 신립만 욕하면서 잘못을 뒤집어씌우던 것. 그러나 바로 다음 화에서 생각해보니 신립에게 미안하다면서 눈물을 보이기도 한다.[13] 사실 현대에도 사이다패스 같은 신조어가 나오는 걸 생각하면 재석이 딱히 특이한 것은 아닐 지도.[14] 조선 시대에 역적을 옹호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생각해본다면 이 처벌이 조선 사회에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15] 미래지식을 빼고 봐도 주인공이 등용하거나 아낀 인물들은 대체적으로 실용적이고 유능하고 충직하다. 물론 2부 시점에는 역사적으로 워낙 천재가 많아서 좀 묻히는 감이 있지만, 가상 인물들만 놓고 볼 때 주인공이 뽑은 신하들과 경성군이 뽑은 신하들을 비교해 보면 주인공의 인재 보는 눈이 더 좋다는 걸 알 수 있다.[16] 무자호란이나 경인왜란 중에 주인공이 보여준 판단력은 제법 괜찮은 수준이다.[17] 1부나 2부에서나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은 무조건 강행했지만 그 외에는 대체로 신하들의 의견도 많이 수용했으며, 앞으로의 전생에서 미래지식 버프를 보완할 주요 자산으로 남을 것이다. 물론 의심병 도지면 그런 것도 없지만.[18] 1부에서나 2부에서나 언제나 열심히 정무를 돌본다. 또한 미래에 자신이 타락할 경우까지 대비해 국가가 발전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려고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19] 물론 이것은 마냥 좋은 점은 아니다.[20] 그래선지 사림을 매우 싫어한다. 무슨 실용주의적인 개혁만 하려고 하면 꼭 성리학적 도리를 운운하면서 열의 아홉은 반대하고 들기 때문에. 다만 사림에서도 뛰어난 인재는 중용하는 편. 조광조도 똑똑하긴 한 인물이니 잘 교육시켜 실무형 관료로 만들 생각도 했었다. 조헌, 김성일처럼 실제 역사에서 나라가 위험에 처했을 때 헌신하여 입만 산 선비가 아니라는 걸 몸소 입증한 사람도 우대한다. 애초에 주인공도 현실을 보려하지 않고 성리학적 이상밖에 모르는 꽉 막힌 사림들을 싫어할 뿐 성리학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는다.[21] 그래도 경험이 쌓이면서 성리학적 도리를 적절히 언급하며 그럴듯한 명분을 제시하는 모습도 보인다.[22] 원래 결말에서는 연산군이 이 날 사망해서 그 몸은 무조건 그 날 죽을 운명이었다는 설정이 있었으나, 너무 욕을 많이 먹어서 이 설정은 폐기되었고 대신 종성순이 자신에게 원한을 품을 행동들을 자초해 끝내 폭발하게 해놓은 주제에 별 생각 없이 갑옷이나 호위도 없이 돌아다녀서 죽은 것이 되었다.[23] 해외 무역을 하려고 해도 명나라는 해금령을 유지하고 있으며 항해기술도 부족했다. 농업 생산력을 늘이려고 해도 신대륙의 신작물이 없다. 화폐 경제를 시작하려고 해도 귀금속이 없다. 실용주의 사상을 기르려고 해도 이미 조선 초부터 성종 시대까지 사림 세력이 계속 성장해왔다. 재석은 조선 후기에 일어나는 변화를 연산군 대에 미리 일으키려고 했으나, 대동법조차 시범 시행하다가 1~2부 사이에 흐지부지 되버린다.[24] 그렇지만 운이 따른 부분도 있다. 재석이 재위 중 어지간한 비리나 비위는 눈 감아주면서 키운 측근들이 아들이 5살의 나이에 즉위한 다음엔 권신이 되어서 자신의 국정 방침들을 큰 틀에서 유지했고, 공교롭게도 인조가 친정에 나설 때가 되니까 대부분 죽어버려서 국정을 농단하는 사태가 벌어지지도 않았다. 이 신하들은 대부분 원역사의 중종반정 주역들이라 더 우대한 점도 있는데, 결과는 좋았다가 되었다.[25] 이 측근들의 명성(?)은 2백년 가까이 지난 3부 시점에서도 대한 황실에서 언급될 정도이고, 성인인 진성대군이 아닌 5살 왕자가 왕위에 오른 것도 이 측근들의 존재 때문이라는게 정설로 자리잡을 정도이다.[A] A B C D 작중 묘사 없음. 원 역사 선조에 대응해서 추정.[26] 원 역사 선조의 시호[B] 황제 추존과 동시에 폐지 추정.[C] A B 작중 묘사 없음. 추정.[27] 조선은 태종-세종-문종으로 이어지는 초기 전성기를 지나 세조 시절에 공신 대량양산과 군사력 대폭 약화를 겪었고 성종 치세부터 성리학 교조화의 씨앗이 나왔으며, 이후 연산군의 폭정과 문정왕후 시절의 부패, 지속적으로 문약해져가는 군사력으로 말미암아 선조 시기 대재앙이 일어난다. 다행히 주인공이 연산군에 빙의하여 세조 이후의 똥들을 치우고 군사력을 강화시키고 상공업의 기본을 다져놓고 죽었으며 이후 인종과 명종이 유지를 잘 이어나갔기 때문에 원역사의 조선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건강하다.[28] 상희가 친정 나가는 걸 말릴 때도 나는 후세 사람들에게 선조 같은 비겁한 도망자로 기억되기 싫다며 강행한다.[29] 조선 내부적으로는 명나라를 돕는 제1번국이라는 뜻이라고 주장하고 유럽에 대해서는 세상의 빛과 질서를 수호한다는 뜻이라고 주장한다.[30] 작가가 기상 상태는 실제 역사의 기록을 그대로 따라간다고 밝혔으므로 주인공을 죽음에 이르게 한 폭우는 1608년 11월 9일에 기록된 폭우로 보인다. 이후 수일이 지나서 사망했으니 1608년 11월 중순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때문에 장조가 죽은 날짜가 1608년 11월 21일이라는 드립도 나왔다.[31] 가끔 정조도 대왕을 붙여 부르긴 하지만 세종대왕보다는 인지도가 훨씬 떨어진다. 게다가 최근에는 세도정치의 원인을 제공한 원흉으로 찍히면서 점점 평가가 안좋아지는 추세.[32] 장조의 가장 뛰어난 능력이 바로 인재등용과 활용능력이라는 면을 보면 더욱 그렇다.[33] 공신전 회수, 이순신 등용 및 중앙군 강화, 대 서양 외교 등등.[34]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의 형식을 빌려서 2부 주인공 장조대제를 그린 패러디 만화인데, 마치 작품 속 평행우주원작자 본인이 그린 것 같은 미친 퀄리티를 자랑한다. 작가도 이걸 보고 감탄해서 당일 문피아 연재분에 아침 7시 40분 예약을 걸어놓는 것을 깜빡해서 자정에 공개될 정도였다(...).[35] 그러나 재석이 빙의한 성친왕 이현이 일행인 견서사를 제외하고는 전부 모르는 사람들뿐인 대유주에 체류하던 중이었기에 본국으로 돌아가기까지 십수년동안 이 능력을 사용하는 묘사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36] 2부에서 재석이 했던 망상이 현실이 되었다.[37] 재석이는 자기도 무종, 장조 시절에 남에게 누명을 씌워 죽인 일을 많이 해봤기 때문에 이게 얼마나 쉬운 일인지 잘 알아서 더 걱정을 하고 있다.[38] 원래 참전할 생각은 없었으나 차르니에츠키가 시비를 걸면서 얼떨결에 휘말렸다.[39] 21만 4528 두카트. 연재일인 2020년 7월 22일 기준 금 시세가 1g 당 71,170.07원이므로 약 523억원의 거액이다.[40] 원래 재석은 상희를 소망대로 본부인으로 두게 되었으니 황위에 미련을 버리고 미주에서 쭉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귀국한 이상, 예왕이 즉위하면 자신을 숙청할 것이 확실하기에 자신과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권력투쟁에 나설 수 밖에 없게 되었다.[41] 하루만에 실패로 끝난 무인지변에서 예왕에게 가장 희망적이었던 시나리오는 거사 시작과 동시에 성친왕 일가를 몰살시키는 것이었는데 여기서 재석이 탈출하면서 사실상 성공은 물건너간다.[42] 건복제가 붕어하기 6일 전 마지막으로 독대했을 때 건복제가 장조에게 무종의 혼이 깃들었다는 괴담을 언급하자, '자신은 현대인이고 무종, 장조, 성친왕에게 차례로 빙의했다'는 고백을 하나 건복제는 아우가 자신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서 그럴듯한 재담을 꾸며냈다고 웃어 넘긴다. 현대인처럼 합리적이고 회의적인 성격상 건복제가 믿지 않을 것이고, 설령 이를 믿고 이야기를 퍼트리더라도 주변에서는 오늘내일하는 건복제가 헛소리를 한다고 여길 것이라는 계산까지 하고 한 얘기였다. 그러나 애초에 성친왕이 변했다는걸 제일 먼저 눈치챈게 건복제인 만큼, 진짜 믿고 안심하고 갔다는 해석도 있다. 판단은 독자의 몫.[43] 무난한 것으로 골랐다고 하는데 재석 본인이 삼국지 덕후인 영향도 있는듯.[44] 사망으로부터 70년 정도 뒤에 재빙의하는데, 성친왕으로부터 70년 뒤 빙의 때면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을 겪을 가능성이 크다.[45] 언제 예왕의 첩자에게 암살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1부에서 종성순에게 참살당할 때 칼을 뽑아 갖다대기는 했는데 힘이 부족해 막아내지 못하고 그대로 베인 것에 대한 트라우마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