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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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마산시청사 전경. (현 마산합포구청) (옛)주소는 경상남도 마산시 3.15의거길 760 (중앙동3가 4-11)
마산시 시절 마스코트 '만남이'. 이름의 유래는 마산에서 매년 여는 축제 '만날제'. 디자인상의 모티브는 괭이갈매기.
2007년경 캐릭터 디자인이 변경되었는데(왼쪽이 구판, 오른쪽이 신판), 구판과의 차이점은 그림의 선이 굵어졌고 발이 좀 더 새답게 바뀌었으며, 복장도 도날드 덕처럼 세일러복으로 바뀌었다. 참고로 마산역 앞 광장 교차로에는 구 디자인의 만남이 동상이 있다.
1. 개요
창원시 서부 지역을 가리키는 지명이자 과거 경상남도 중부에 있던 도시. 역사적으로 창원부의 영역이었으며 1899년 개항장으로 지정되었다. 1910년 경술국치 때 창원부가 마산부로 개칭되고, 1914년 마산부의 영역을 개항장(마산합포구 일대 구시가지) 일대로 축소시키고 잔여지역을 창원군으로 분리시켰다. 그 후 2010년 7월 전까지 창원과 별개의 도시로 성장하였다. 자세한 역사는 창원시/역사 문서에서 서술한다.
남해안에 접한 무역항구 도시로 일본 회사의 한국 법인이나 수출 위주의 중소기업 업체들이 많이 있다. 수출자유무역지역[8] 의 혜택 덕에 1980년대까지는 한창 잘나가는 도시였으나, 1990년대 중반부터 통합 직전까지는 도청소재지인 창원에 밀려 안습한 상황이었다.
2011년 조사 인구는 약 41만 명. 1990년에 50만[9] 으로 합포구, 회원구로 갈라지면서 정점을 찍었지만 이후 95년 도농통합직전 35만으로 대폭 줄어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1998년경 내서 택지지구 개발으로 다시 40만을 넘어섰지만, 감소세는 계속되고 있는 상태다. 2010년 통계에서는 인구 수 감소 속도가 가장 빠른 도시로 지목되기도 했다. 내서를 제외하고 마산 시내만을 보면 1990년 49만 명에 달하던 인구가 2018년에는 약 40만 명으로 감소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인구 증가와 감소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되었다. 14세기에는 진주성과 합포성이 경쟁했고, 18세기 말 폭발적으로 팽창하던 마산포(현 어시장 부근)와 합포성이 경쟁 관계. 그리고 19세기에는 마산포[10] 와 일본인 조계지인 신마산이 경쟁하더니 20세기 초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이 새로 진해항을 개발하며 또 정체기를 겪는다. 그러다 일본으로의 물동량 관문이 되면서 1930년대부터 80년대까지 핵폭발급 성장을 하고, 1980년대 이후에는 창원과 경쟁하다 결국 21세기 들어서 항복.
동쪽에 마산만을 사이에 두고 옛 창원과 진해의 영역이 있고, 서쪽은 거의 산지로 되어 있는 지형이다. 말하자면 배산임수의 지형.[11]
과거 마산시청 홈페이지 도메인은 'www.masan.go.kr'이었다.
마지막 마산시장은 황철곤이다. 3선에 성공한 후 통합 창원시장에도 도전했으나 박완수에게 경선에서 패배했다.
2. 성깔 있는 마산 사람
전투종족의 속성을 지니고 있어서 정치적으로는 마산시내 중고등학생을 중심으로 한 3.15 의거가 일어났다. 3.15 부정선거 때 민주당 마산지부가 전국 최초로 선거 포기를 선언했고, 이에 호응한 시민들이 대대적인 시위를 하여 경찰 발포로 다수의 사상자가 나면서 4.19 혁명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이어 경남대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부마민주항쟁 등의 사건을 일으켜 80년대까지는 대표적인 민주화 운동의 성지였다. PK 지역의 대표 야당인사인 김영삼이 참여한 3당합당 이후로는 새누리당 계열의 보수 세력을 지지하고 있다.
이러한 기질은 국제 관계에서도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는데, 마산시의회는 시마네 현의 독도의 날 제정에 대항하여 대마도의 날을 만들어 대마도 고토 수복을 다짐했다. 조선시대 이종무 장군이 대마도 정벌을 위해 마산포에서 출정한 6월 19일을 대마도의 날로 지정한 것이다. 2014년 6월 19일에 10주년 기념행사도 했다. 쓰시마 섬 문서를 봐도 알 수 있듯이 명확한 근거에 기반한 것이 아니었지만, 당시 반일감정이 극도로 차오르던 시기라 이에 대해 전국에서 동조하였다. 이런 행동은 그저 병림픽일 뿐이라는 논조로 댓글을 단 누리꾼은 감정에 휩쓸린 다른 누리꾼들에 의해 벌집이 되기도 했다. 물론 상식밖의 상대에게 비슷하게 대응하는것이 하나의 방법일수도 있으나 일본의 수준이 저급하다해서 감정적으로 대응하는것 또한 그들에게 좋은먹잇감을 주는것임을 인지해야한다. 조례는 창원시 조례에 그대로 남아 있다.
마산아재들의 야구사랑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1980년대 (나중에 허구로 밝혀지지만) 성영재 새총 저격사건이나 용접기로 문을 뚫은 사건 등이 유명하며, 아직도 '''여대생이 관객석에서 소주를 원샷하는''' 장면도 볼 수 있는 곳. 포털사이트에서 '성지마산' 을 검색해 보면 전투종족 마산 아재의 위엄을 볼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마산 야구장 문서로.
3. 교육
4년제 대학교 3개(경남대학교, 창신대학교 마산대학교)가 있다.
경남대학교는 이름 때문에 지거국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립대학이다. 어쨌거나 이름 때문에 인지도는 높다. 학교 위치가 산악지대인지라 경사가 매우 험하다. 경남대 셔틀버스가 그 길을 내려가는 걸 보면 보는 사람이 불안해질 정도의 각도.
창신대학교는 지역 고등학생들은 기피한다. 하도 기피를 해대서, 창신대는 라디오로 대대적인 광고를 때리고 있지만 인식이 달라질 것 같지 않다.[12] 이 지역 민족학교이던 창신학교의 후신이며, 대학부와는 달리 창신고등학교는 여전히 지역 명문이다.
마산대학교는 전문대학으로 지방 내에서 안습취급. 다만 마산대학의 전신이 전문대학이던 마산간호대학이었는지라, 간호학과는 유명한 편. 마산제일고, 마산제일여고와 함께 청강문화재단 계열이다.
예전엔 마산이 교육의 성지로 불릴 정도로 유명할 때가 있었다. 경상남도 지역이나 경상북도 지역에서 시장선거나 도지사선거, 국회의원 선거 등에서 등장하는 학력을 보면 거의 다 마산고등학교 출신이다. 그리고 금융/재계에서 날고 긴다 하는 사람들은 마산용마고등학교(구 마산상업고등학교) 출신일 정도로 두 학교는 전국구의 명성을 떨쳤던 시기가 있었다. 중간중간 마산중앙고등학교도 정치권 인사나 이름있는 군 장교를 배출하기도 했다. 문제는 마창지역 학군통합으로 인해 교육의 질이 떨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연합고사에 들어온 후에도 대략 1990년대 중반까지는 마산고등학교가 넘사벽급 지원률을 자랑했지만 1990년대 말에는 창신 등에 밀리기 시작했고, 결국 청강고가 제일고로 이름을 바꾸고 연합고사 라인에 들어오면서 마산지역 최고 명문의 지위는 모두 사립고등학교로 넘어가 버렸다. 그마저도 새롭게 부상한 창원에게 지위를 넘겨주면서, 마산지역 전체의 고교 교육 또한 안습이 돼버렸다.
마산의 고등학교가 심각하게 몰락하게 된 큰 계기가 있는데, 바로 학군의 분리. 원래 비평준화 시기 마산과 창원의 고등학교는 한 학군이었고, 때문에 공부 잘 하는 창원 학생은 마산에 있는 고교를 많이 지망했다. 그런데 창원 지역에 새 아파트를 분양하면서 창원시에서 창원시민에게만 1순위 권리를 주자, 마산시민들은 같은 생활권인 마산을 차별한다며 마산시민에게도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였다. 창원시에서는 이를 거절하고 마산시의회는 그에 대한 보복으로 마산과 창원의 학군분리를 추진해 결국 이루어졌다. 학군분리 초기에는 창원의 학생들이 마산으로 위장전입을 할 정도였으나, 오히려 나중에는 뒤집어지고 말았다. 통합 후에 학군을 합친다는 선언은 있었지만 10년이 넘도록 여전히 분리된 상태다.
한때 마산학원이라는 재수학원이 교육의 성지였던 시절이 있었다. 실제로 과거에는 많은 수의 수능 고득점자를 배출하던 곳이었지만 점점 수준의 저하를 보이더니 결국은 2020년에 문 닫았다.
4. 관광
2008년 7월 1일, 앞바다에 마창대교(2번 국도 우회로)가 개통되었다. 이로써 창원까지 승용차로 가는 시간이 크게 단축되었다고 하나 통행료가 소형차만 2,000원이고, 특대까지 가면 그 2배이므로 많은 이용자를 기대하기엔 어렵다. (그래서 개통되고 며칠 간 무료 이용 시기에만 사람이 왕창 몰렸다.) 하지만 확실히 빠르다. 마산합포구에서 봉암교를 이용하여 진해구로 들어가려면 약 1시간 정도 걸리나, 마창대교를 이용하면 약 30분대로 줄어든다.
수정에 STX 조선소를 유치시키려 했으나 시토회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봉쇄 수녀원[13] 의 수녀들과 마을 주민들의 격렬한 반대로 STX에서 취소해 버렸다. 수녀들은 "조선소가 들어서면 환경오염으로 인해 마을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 사라진다. STX 측이 수녀원에만 이주대책을 마련해주겠다고 회유했으나, 주민들을 버려두고 수녀들만 이주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정신에 어긋난다."며, 봉쇄까지 풀고 주민들과 함께 상경 시위를 하게 된 이유를 밝혔다.# 사실 STX그룹의 하향세 때문에 조선소 유치를 포기한 것이다. 주민들 보상까지 했는데 이미 지급된 거라 돌려받지도 못한다고 한다. 지금도 이 부지는 근 20년 넘게 문 닫은 공터다.
2009년경 구산면에 마산 로봇랜드 유치가 확정되고 2019년 9월 7일 개장했다. 그러나 높은 입장료로 인해 찾아오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코로나-19까지 터지면서 더더욱 썰렁한 곳이 되었다.
2003년 가포신항을 조성하면서 쌓인 준설토를 이용해 월영동 앞바다에 인공섬을 만들고 이 지역에 마산해양신도시를 만들 계획을 세웠으나 아직까지도 방치된 상태다.
4.1. 돝섬
더 자세한 내용은 돝섬 문서 참고.
앞바다에 섬이 하나 있다. 이름은 돝(돼지)섬. 돝섬이라는 이름은 하늘에서 본 섬의 모양이 돼지가 누워 있는 듯한 모양이라 붙여졌다고 한다. 신라시대 고운 최치원 선생이 마산(정확하게는 월영대)에 살 적에, 돼지를 쫓아냈더니 섬이 이런 모양으로 변한 뒤 밤마다 섬에서 돼지 우는 소리가 들렸다고 하는 설화가 전해진다. 하지만 육지에서 보면 고래나 거북이처럼 보인다.
섬 내에 유원지가 있어서 국내 유일의 해상 유원지 명칭을 자랑하지만 관광객 유치 효과는 적었다. 운영주체가 바뀌면서 이름을 가고파랜드로 바꾸고, 매년 가을 국화축제를 이곳에서 열고 있었다. 2008년 마산 국화축제 당시에는 사람이 예상 외로 너무 많이 몰려 골치가 아팠고, 국화축제 때만 흥하고 다른 때에는 관광객이 없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었다.
섬 이름의 유래를 알리기 위해 섬에 황금돼지 상도 세웠으나, 태풍 매미가 왔을 때 떠내려갔다(...) 마산만 어딘가에 가라앉아 있을지도 모르는 일. 태풍 매미로 인해 놀이기구 등 시설물 파손도 심각해 한동안 문을 닫아야 했다(그것도 가고파랜드로 재개장한 직후에 말이다.).
보통 외부인들은 돝섬에 대해 괜찮은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가끔 관광 오곤 했지만, 현실은 시궁창. 놀이기구나 공원이나 산책로라든지 있을 건 다 있었다. 정말로 '''진짜 있다고 할 수 있을 것만 있었다.''' 당연히 국화축제 같은 큰 규모의 행사를 열기에는 다소 부적합한 곳이었다. 축제 때마다 인근지역 배란 배는 몽땅 급조해와서 관광객을 실어날랐지만 역부족이고, 들어가는 건 그렇다 쳐도 오후 5시쯤의 퇴장 시간에 나오려고 하면 줄을 2시간쯤 서야 할 정도로 골치 아팠다. 평소 방문객이 적은 만큼 대부분이 급조시설이라, 임산부가 방문했다가 열악한 환경 때문에 하혈까지 보였다는 증언이 있다. 딱히 마산시의 개선의지는 없었는지 몇 년간 그다지 나아진 점이 없었다.
주위의 중학교나 고등학교가 소풍으로 오기도 했는데, 소풍 당사자들은 치를 떨었다. 가까운 진해파크랜드[14] 나 산으로 소풍 가는 건 빨리 마치면 마칠수록 빨리 다른 곳(PC방 등)을 갈 수 있는데 반해서, 이 섬은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배이기 때문에 정말 저주하는 곳 중 하나였다. 거기다가 이 섬은 진짜 있을 것만 있어서 할 게 없기 때문에, 보통 가면 벤치에서 잤다.
2010년 10월경[15] , 가고파랜드를 운영하던 회사가 '''망했다.''' 결국 2010년의 마산 국화축제는 육지에서 열렸다. 그리고 2011년, 재개장했다. 재개장 이후 창원시가 해상공원으로 운영하고 있고, 국화축제도 2019년부터 10년만에 다시 돝섬에서 열리게 되었다.
4.2. 문신 미술관
조각가 문신의 작품들이 전시된 문신미술관이 명물이라면 명물. 마산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치고 안 가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창원시립마산박물관과 가까워 견학이나 소풍 등에서 같이 묶이는 경우가 많다. 사람 없는 오후에 가면 자산동 언덕길을 거니는 데이트 코스로는 의외로 쓸 만하다.
4.3. 마산 9경5미
마산의 관광활성화를 위해 마산시청이 선정, 홍보했던 곳.
4.3.1. 9경
- 무학산: 일제강점기에 '학이 춤을 추는 듯한 모양' 이라 붙여진 이름. 원래 이름은 두척산. 마산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마산의 대부분의 산은 무학산의 줄기. 정상부에는 6.25 전쟁 당시 파놓은 교통호가 손질까지 잘 된 채로 아직까지 남아 있다.[16][17]
- 돝섬
- 저도연륙교: 야경포인트로 유명해졌다. 일명 '한국의 콰이강의 다리'. 지금 연륙교 옆에 있는 옛 다리가 트러스 조립교량이라, 정말 영화에 나오는 콰이강 다리와 닮았다. 비용문제로 조명을 끄네마네 말이 많았지만 결국 켜두기로 한 듯.
- 3.15 민주묘지: 3.15 의거 당시 사망한 12명의 희생자를 기린 국립묘지.[18] 3.15 열사들의 묘소와 관련 전시관 등이 있다. 전시관에 있는 영상물이나 사진 등의 자료를 대충만 봐도, 나올 때 오한이 들거나 숙연해지게 된다.
- 마산 어시장: 경상남도 최대의 재래시장이다. 마산 사람도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사실 이곳은 조선시대 후기부터 내려온 유서깊은 곳으로, 약 25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정조시대 조운선이 여기서 출발하여 신안앞바다, 안면도, 김포를 거쳐 서울 마포구(!)까지 들어갔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현 부림시장에 차이나타운이 있었을 정도.
- 문신미술관: 상기 서술에 나온다.
- 마산항 야경: 사진만 보면 멋있다. 사진만. 사진의 촬영지점이 배 위 아니면 통제구역인 옛 MBC 송신소 위 갈마산이라 사진처럼 찍기 어렵다. 비슷한 야경을 볼려면 마산항 건너편 성산구 적현/귀현동 쪽으로 가야 된다. 근데 여기도 부두라서 통제구역 천지라 쉽지 않다.
- 팔용산 돌탑: 1990년대 후반부터 한 개인(!)이 쌓은 돌탑으로 그 수가 상당하다. 근래에 어떤 무개념들이 가끔 훼손하는 듯.
- 의림사 계곡: 가봤다는 사람도 드물고 어딘지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19]
4.3.2. 5미
- 아구찜: 90년대까지만 해도 마산 명물을 물으면 하면 튀어나오는 게 무학소주와 몽고간장 그리고 이 아구찜이었다. 오동동에 아구찜 거리도 조성되어 있다. 다만 중심가였던 근처(창동) 상업이 죽어가고 있다는게 흠. 타 지역과 달리 건아귀를 사용한다.
- 전어회: 가을에 어시장에서 전어축제가 열린다. 이 시기에 아침 경매장 가보면 그 열기가 장난 아니다. 부산 자갈치 뺨칠 정도. 미식가들은 서해바다 전어를 남해보다 더 쳐준다고는 하지만 이 시기 마산 전어회의 고소함만은 매우 높이 평가한다.
- 복요리: 중장년층들의 해장 및 안주거리로 열렬한 인기를 얻는다. 요즘은 아구찜보다 더 유명해진 듯. 어시장에서 아라비안나이트 뒤쪽 골목 거리가 유명하다. 최근에는 복요리 골목까지 생겼다.
- 미더덕: 전국 미더덕 생산량의 80%가 진동면에서 난다고 한다. 미더덕 축제도 열린다. 소주 술안주로 좋다. 진동면의 진동 미더덕은 지리적 표시제/대한민국 상품이다.
- 가을국화주: 람사르 총회 공식 건배주라고 한다. 그런데 대체로 술 하면 좋은데이 소주+하이트 맥주 두가지만 선호하는 동네라, 잘 안 팔리는 듯.
4.4. 그 외
위암 장지연 선생의 묘와 몽고정[20] 을 포함한 이런저런 유적이나 사적지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지만, 마산 사람들도 잘 모르고 가지도 않는다(...).
5. 태풍 매미
2003년 추석 전후에 불었던 태풍 매미의 피해 도시 중 하나. 모 여학교 기숙사 지붕이 뜯겨 나간 것은 사소한 것에 불과하다.
최악이라 할 수 있을 만한 것은 만조로 인한 엄청난 해일이 발생, 태풍 대비책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채 해안 부두에 야적되어 있던 통나무가 해안도로를 넘어 1.2km 내륙 시가지까지 떠내려왔던 사건. 해일로 인해 바닷물이 매립으로 넓힌 땅 대부분에 들어왔다.
자유무역지역또한 피해를 봤다. 대부분의 공장 및 사무실 건물 1층이 물에 잠겼고 물류창고또한 파도에 휩쓸렸다. 당시 자유무역지역에 당직으로 근무했던 사람의 증언으로는
라고 한다. 당시 당직 근무자들은 노키아 휴대폰이 박스포장 그대로 바닥에 굴러다니는 것이 매우 기억에 남는다고.."파도가 밀려와서 도망칠려 했는데 다리가 물에 잠겨서 이동할수 없었다. 결국 가장 튼튼한 건물이었던 ○○회사 옥상에 주변 당직근무자들이 모두모여서 가족들에게 전화하기에 바빴다. 3시간쯤 있으니까 물이 빠졌는데 바닥에 하얀 벽돌같은게 굴러다니더라, 내려와서 자세히 보니 휴대폰들이었다."[21]
이 태풍으로 인해 몇 명의 사상자도 발생했다.[22] 이후 대대적으로 국가 지원을 받아 방조제를 쌓을 듯 했는데, 국토해양부에서 플랩게이트라는 걸 마산항에 설치하기로 했다. 평소엔 바다 밑에 가라앉혀 놨다가 해일이 오면 공기를 채워 세움으로써 해일을 막는 것이다.
이 피해 이후 마산에 지어지는 아파트들은 터돋움식으로 지어지게 되었는데, 아파트 1층이 다른 아파트 2층 이상의 높이에 필적할 만큼 꽤 높게, 그 아래 공간은 주차장으로 활용하는 방식이 되었다.
참고로 마산의 만조로 인한 피해는 현대에 들어와서 거의 전무하다시피했기 때문에, 수해보험을 들지 않은 전자기기 상가들은 그 뒤로 모두 문을 닫아야 했다. 심지어 대동씨코아는 유입된 통나무가 지하 구조물을 몽땅 두들기는 통에 건물 전체 안전까지 위협받아 대대적인 수리를 벌여야 했을 정도. 하지만 인근의 모 아파트는 우연히 외국계 수해보험에 들어두는 통에 대박을 맞았다고 한다.
그런데 자료를 찾아보면 아주 드물게 마산에 해일로 인한 수해는 발생한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1985년 마산시사(史)에 따르면 "산꼭대기 바위에 조개가 붙어 있는" 민간설화가 동네 나이 많은 어르신들에게 전해지는 경우가 많은데, 채록한 마을을 이어 보면 놀랍게도 현재의 진전-진동면 일대 평지가 몽땅 잠긴 모양을 하고 있다. 과거 해안선이 상당히 침식되어 있었거나 혹은 수해를 입었다는 유력한 증거. 또한 실제로 현재의 산호동 MBC경남 창원지역본부 사옥 앞까지 배가 수월하게 들어왔다는 옛 기록도 있다. 즉 현재의 이산성터는 옛날에는 "항구"였던 것이다(!)[23]
5.1. 원인 : 마산 간척의 역사
마산 시내의 평평하고 낮은 땅(=수해 입은 지역) 대부분은 일제강점기부터 1990년대 말까지 매립한 땅이다. 현재의 동서동부터 추산동까지가 원래 옛 마산이었고, 문화동부터 마산제일여고까지의 네모반듯한 곳이 구한말 일본 조차지였다. 문화동 버스정류장 맞은편 붉은 벽돌건물은 당시 일본군 헌병대 건물이다. (해방 후 한국군이 접수해서 현재는 향군 건물로 쓰이는 중.) 러시아 조차지는 현재의 월영마을 터였다. 애초에 마산 지명에 '월(月)'자가 많이 붙어 있는 것은, 옛 해안선이 죄다 반달꼴의 모래사장이었기때문.
백사장은 일제강점기에 신마산과 구마산을 잇는 신시가지사업을 벌이며 사라졌다. 당시 이 지역은 일본군의 점유지로, 그래서 옛 마산시청이나 마산고 등을 빈 땅에 싸게 세운 것이다. 중앙동이란 이름의 유래는 거기서 나왔다.
1960년대에는 신포동 앞 부두를 매립하여 현재의 롯데백화점 마산점(구 대우백화점) 땅이 만들어졌다.[24] 이후 1990년대에 동산토건(현 두산건설)에서 지금의 어시장 앞과 신마산 대동씨코아 앞을 매립했다. 그리고 동산아파트(현재 두산1차 아파트)와 두산 2/3차 아파트가 세워졌다. 하지만 매립설계가 잘못되어 건물이 기울어지는 등 잡음이 많았다. 시사매거진 2580에도 나간 적 있을 정도.
6. 산업
6.1. 상업의 도시, 경공업의 도시
창원에서 마산이 차지하는 산업 비중은 다소 미미하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한때 '''전국 7대 도시'''[25] 가 될 만큼 컸던 역사가 있다. 진주를 비롯한 서부경남에서 생산되는 대부분의 물량이 마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수출입되었기 때문이다.
즉 교역도시로서 발전했다는 얘긴데, 사실 마산의 지리적 위치상 교역의 비중은 삼국시대 초기의 포상팔국(골포국)에 거론될 정도 크다.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와 조선 초기에도 상당히 큰 항구였다고 전하며, 쓰시마 왜구들의 빈번한 노략지가 되기도 했다. 현재의 장군동 유래가 된 장장군 전설이나, 최윤덕 장군이 북방에서 경력 쌓기 전부터 두각 나타낸 것도 다 이유가 있다. 왜구 때려잡던 동네 출생이니까 (정확히는 지금의 창원시 의창구 북면 근방)
조선 후기로 들어오며 어시장과 조운출항지로서 다시 항구의 기능을 되찾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경남선'과 '마산선'의 종착역이자 일본으로 가는 부두의 교역점으로 크게 발전하게 되었으며,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경남 제1의 도시였다. 1960년대 이래 정부의 정책으로 남동해안공업벨트를 조성하며 상대적으로 당장 쓸 수 있는 토착노동자 비율이 많고, 이미 인프라가 어느 정도 갖춰져 있던 마산에서는 (초기투자 인프라와 토지가 많이 필요한) 중화학공업 대신 경공업을 육성하게 되었는데, 울산과 여수가 현재까지도 중화학공업을 기반으로 굳건히 남아있는 데에 비해 마산은 창원으로 그 기능이 넘어가며 상대적으로 쇠락하게 된다.
6.2. 한일합섬
현재의 창원 NC 파크 건너편 메트로시티 터에 있었던 공장. 터닦기를 할때 박정희 대통령이 내려와 직접 챙겼을 정도로 당시로서는 국가의 명운을 건 사업이었다. 1986년 국제상사 등 옛 국제그룹 주요 계열사들을 인수하고 1990년대까지 '윈디' 등 의상브랜드를 이끌며 나름 명성을 누렸으나, 경공업의 몰락과 함께 한일합섬 마산공장도 중국발 태풍에 밀려 결국 문을 닫게 된다. 현재의 한일전산여고[26] 가 그 흔적으로 남아 있다. 즉 옛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는 한일합섬 여직공들을 위해 지어 준 교육기관이었던 것.[27] 이들이 고향에서 한 줌씩 들고 온 풀떼를 이어 만든 게 '팔도잔디'의 유래다. 한일전산여고가 축구로 유명한 게 다 이유가 있는 거다. 현재 이곳은 창원 메트로시티가 개발되어 주거구역으로 완전히 변했다.
6.3. 마산자유무역지역(구 마산수출자유지역)
"마산에서 노동활동 = 자유무역지역 근무"라고 성급히 판단할 정도로 마산의 자본유통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지역이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이 본격적으로 수출위주 정책을 펴기 시작하며 국내에 두 군데 수출자유지역을 지정하였는데, 그중의 하나. 다른 한 곳은 익산에 지정되었는데 아무래도 마산이 수출입에 유리한 항구지형이다 보니 이쪽이 더 발전한 감이 있다. 어쨌거나 한일합섬과 함께 과거 마산 산업 발전의 양대 원동력이었던 곳이었다.
외국계 기업들의 입주가 쉬운데다가 세제혜택 등 기업규제가 적었고, 결정적으로 당시 한국인의 임금은 현재의 인도 노동자들 수준이었기 때문에(게다가 당시 마산은 잉여인력이 드글거리는 곳이었다.) 외화벌이의 선두주자 역할을 했다. 코리아타코마는 우리나라 최초로 객차 해외수출(남베트남)을 하기도 했다.[28][29] 그러나 노동운동권 입장에선 '신식민주의'라고 부정적으로 평가했으며 장시간/저임금 노동으로 인해 파업이 흔했던 곳이었다. 국내 노동운동사에 언급된 바로는 1987년에 결성된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마창노련)'의 활동 근거지이기도 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계기로 노동운동이 치열해져 1989년에 수출이 전년도보다 5.9%나 떨어져 수출에 차질이 생겼고, 1990년대 이후로 외국계 기업들은 임금이 더 싼 동남아로 공장을 이전하면서 경쟁력이 좀 떨어졌다. 1994년 이후에 전자 및 전기업종으로 구조가 변경되어 노키아 TMC가 한때 번영했던 시절도 있었으나 마이크로소프트가 노키아를 인수할 때 마산공장 인수를 거부하여 문을 닫게 되었다. 이 외에 한국소니전자 공장도 입주해 있지만 역시 사정이 좋지 못한 편이다. 2000년 '자유무역지역의 지정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공단명도 현 명칭으로 변경됐다.
매미 등의 태풍이나 폭우가 쏟아지면 가끔 침수되기도 한다. 매립지가 많은 마산의 상습침수구역 중 하나이기도 하다.
자유무역지역 안에 있는 마산항 제3부두에는 크루즈선 퀸 엘리자베스 2세호가 기항한 적도 있다. 지역뉴스에서 다루었을 정도였다.
6.4. 가포신항
마산항의 기존 제1·2부두와 중앙부두, 서항부두를 대체하는 신항구로 민자로 건설되었고 3만 톤급 다목적 부두 2선석과 2000TEU급 컨테이너 부두 2선석 등 4선석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는 총 1.3㎞의 부두시설과 40만㎡의 넓은 배후부지를 구비하고 있으며, 최첨단 하역장비를 갖추고 부두를 개장‧운영함으로써 연간 약 400만 톤 이상의 화물 처리가 가능하다.
6.5. 경남 지능형 홈산업 도시첨단산업단지
생산시설과 연구·지원시설, 공원녹지, 도로·주차장 등 총 14만 5,205㎡로 창원 통합 이후 처음으로 분양하는 도시형 첨단산업단지이다. 현재 덴소 코리아가 입주해 있는 상태이다.
7. 마창진 통합
2009년 중반 마산에서 발표한 마산, 창원, 진해, 함안 통합설이 떠돌았는데, 여론조사 결과[30] , 통합모델이 마+창+진으로 결정되었다. 그 결과, 3개 시의회 모두 통합에 찬성하여 2010년 7월 광역시급의 통합시가 탄생하게 되었다. 창원시 문서로. 그러나 시민들은 찬반을 불문하고 졸속통합 추진에는 다들 볼멘 소리를 한다.
2010년 2월 17일 통합시의 명칭이 창원시로, 임시청사는 창원시청으로 결정,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산이나 진해보다 창원이 인구가 많고 계속 성장 중이며 역사적으로도 창원에서 마산이 독립해나간 것이었기 때문에 창원 중심적 통합이 큰 반발 없이 이뤄졌다.[31] 신청사 소재지는 마산 종합운동장 주변, 창원 39사단 부지, 진해 옛 육군대학 부지 이렇게 3곳이 정해져 있고, 2011년 KBS 창원 보도에 따르면 여론조사 결과 39사단 부지로 잠정 결정은 났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결정하는데 앞으로도 계속 시끄러울 듯하다. 애초에 새 시청사 후보지로 마산, 진해를 0순위로 올리고서야 잠잠해졌던 일인데, 예전 창원지역 출신 시의원들을 중심으로 돌변하여 '시청은 못 준다' 식으로 나온 상황이라 도로 분리하자는 말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재정적으로 잠깐 나아진 듯 해도 결국 창원으로 얼마 안 남은 인적,물적 자본이 끌려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2012년 12월 19일, 경남도지사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홍준표 당선인이 주요 공약으로 경남도청 마산 이전 떡밥을 던졌기 때문에 앞으로 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게 되었다.
행정조직은 2010년 7월 1일 통합 창원시가 출범하면서 2개의 일반구로 재편되었다.[32] 현재는 도시의 절반이 마산회원구 / 마산합포구로 나뉘어 있다. 1990년대에도 합포구와 회원구로 나뉘어 있었다가 인구 감소로 2001년 폐지되었는데, 창원과 통합 후 다시 분구된 것이다. 마산만 놓고 본다면 구청 폐지 직전의 상태로 돌아간 것이라 볼 수 있다. 실제로 구 경계도 옛날과 똑같다.
수유리, 서면 등 행정명은 사라졌지만 편의상 계속 옛 지명을 사용하는 예와 같이 행정 통합 이후 행정구역명으로서의 마산은 사라졌지만 시민들은 구마산 지역을 여전히 마산으로 부르기도 한다. 여전히 철도, 버스 등 교통편 노선명에도 서창원 대신 마산을 사용하고 있으며 실제로 창원시민들에게도 이게 더 익숙하다. 이런 지역적 특성 때문에 구마산 지역에 홈구장을 뒀던 창원 연고 프로야구단 NC 다이노스는 창단 초창기에 마산 지명을 마케팅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했다.[33] 그러나 창원 NC 파크 개장 이후 불거진 구장 명칭 선정 논란으로 인해 지역 야구팬들에게 있어서 사용하기 껄끄러운 지명이 되었고 오히려 '읍산' 내지는 '그 지역'(...)으로 비하되기도 하였다.
8. 여담
마산시는 일본 효고현의 히메지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었는데 히메지시는 효고현의 '''2인자''' 이미지(1인자는 당연히 고베)에 인구는 50만 명이 안 되는데 옛 마산시처럼 인구가 들쭉날쭉하다.
마산합포구에는 신포동이란 곳이 존재한다. '빨간집' 이라고 불리기도 하며 평범한 시민들이 사는 아파트 단지와 청소년 통행 제한 금지구역이 바로 딱 붙어 있는 매우 엄한 뒷골목. 그래서 '안 좋은 예'로 자주 언론에 소개가 나가기도 한다. 정말 별 생각없이 아무것도 모르고 지나가던 관광객들도 왠지 사람들의 시선이 따가워서 뻘쭘해져 돌아볼 정도로 적나라하게 인접해 있다. 사실 이렇게 된 건 일제강점기부터 있던, 부두 노동자들 상대하던 유곽이 점차 불어나는 시가지에 잡아먹힌 꼴이 되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청량리 588처럼 철로 주변의 유곽촌이었다.[34]
한편 부산에서 집창촌을 일컫는 대명사인 완월동은, 마산에서는 '''초 중 고등학교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교육단지''' 이름이다, 그것도 명문들로만. 그리고 위에 서술한 신포동과 도로 하나 사이 끼고 사실상 '''붙어있다.'''
교통덕후들에게 인식되는 특이사항으로는, 버스 내구연한이 타 도시에 비해서 상당히 빨리 닳는다는 것이다. 아마도 소금기와 습기 찬 해풍의 영향에 높낮이가 많은 지형 때문으로 보인다.
9. 하위 행정구역
중앙동에 시청이 있었고, 현재 그 시청은 창원시 마산합포구청이 되었다.
9.1. 옛 합포구(現 마산합포구)
- 구산면
- 진동면
- 진북면
- 진전면
- 가포동
- 교방동
- 노산동
- 동서동
- 문화동
- 반월동
- 산호동
- 성호동
- 오동동
- 완월동
- 월영동
- 자산동
- 중앙동
- 창포동
- 해운동
- 합포동
- 현동
9.2. 옛 회원구(現 마산회원구)
10. 관련 문서
[1] 1995년부터 2010년 창원, 진해와 통합하기 전까지 사용했다.[2] 창원시 편입 전[3] 2010년 06월[4] 2020년 11월[5] 현 마산합포구와 마산회원구.[6] 2000년 이전에는 구 창원시와 같은 지역번호인 0551를 사용했었다.[7] 마산부 시절까지 포함하면 1914년 4월 1일부터.[8] 마산에서 흔히 '''자유수출''' 이라고 부르는 곳.[9] 옛날 마산시 쓰레기 수거 차에서는 “마산의 노래” 라는 걸 틀었는데, 70년대에는 "보아라 30만 단란한 가족~"이던 노래 가사가 90년대에는 "50만"으로 개사되었다.[10] 구마산 혹은 원마산이라고 함[11] 위성지도로 보면, 해안가에 산이 있고 산과 바다 사이에 낀 약간의 평지와 산비탈, 산골짜기 틈의 평지에 사람이 살고 있다. 사실 부산, 청진, 여수 등 일제강점기에 건설된 전형적인 항구도시 형상이다. 참고로 스튜디오 지브리의 2001년작 코쿠리코 언덕에서의 배경 옛 요코하마가 옛 마산과 상당히 닮았다.[12] 라디오에서 하는 말로 '창신대학에서 제공하는 57분 교통정보였습니다', '청년의 미래를 책임지는 창신대학' 등이 있다.[13] 봉쇄라는 말 그대로, 외부 활동을 하지 않고 평생 수도원 내부에서만 생활하며, 기도와 노동과 묵상으로만 수도생활을 한다. 몹시 아프거나, 가족의 상을 당하거나, 기타 정말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한 수도원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이런 봉쇄 수도원의 수도자들이 봉쇄까지 풀고 수도원 밖으로 나와 행동했다는 건, 그만큼 굉장한 일이었음을 의미한다.[14] 2011년에 문 닫았고, 대신 썬비치 워터파크라는 물놀이 시설이 들어섰다.[15] 실제로 망한 건 더 이전일 것이라 생각된다.[16] 무학산 등산로 입구중 하나인 서원곡이라는 계곡이름의 유래는 과거 회원서원이라는 서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있었던 서원 철폐령으로 사라졌고 바다가 보이는 정자라 하여 관해정이라 이름 붙여진 정자와 그 옆에 서원을 세운 정구라는 인물이 심었다고 알려진 은행나무 등으로 그 흔적을 찾아 볼수있다.[17] 무학산 때문에 마산에 본거지를 둔 무학주조(무학소주)를 비롯해 마산에는 '무학'이라고 이름이 붙은 것이 많다.[18] 단 김주열 열사의 경우 고향인 전북 남원에 안장되었다.[19] 이전 버전에 서원곡을 넣지라는 말이 있었으나 서원곡은 무학산의 입구 중 하나다, 즉, 굳이 무학산을 넣었는데 따로 무학산 등반 입구 중 하나인 서원곡을 따로 넣을 필요는 없다.[20] 고려 원나라 간섭기 때 몽골군이 일본을 침략하기 위해 마산에 주둔해 있을 때 물을 마시기 위해 팠다고 전해져 오는 우물이다. 3.15의거탑 바로 앞에 위치해 있으며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 중 하나인 원 간섭기의 역사를 대변해 주는 유적이라 할 수 있다.[21] 당시 노키아가 무역지역에 입주해 있었다. 노키아 창고가 파도에 휩쓸리면서 떠내려온 물품들이다.[22] 사망자 대부분은 추석 연휴를 맞아 지하 상점이나 노래방 등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밀려온 바닷물에 익사했다. 특히 '데몰리션 노래방'은 외계 설정이라 노래방 룸이 달걀모양 움집처럼 생겨서 더했다. 게다가 노래방 주인을 비롯, 탈출을 시도한 사람들은 떠내려온 통나무가 출입구를 막는 바람에 안타깝게 변을 당했다.[23] 즉 무학여고 뒤 이산성이 인천이라면, 현재의 합성동인 합포성이 서울이었던 셈이다.[24] 부두 노동자들을 상대하던 신포동 매춘굴이 지금 내륙에 위치한 이유.[25] 단, 1960년대~1970년대 남한의 이야기다. 일제강점기에는 북한 쪽 도시들이 더 많이 발전했기 때문에... 전주시와 목포시가 부진해지면서 후에 특별/광역시가 되는 6개시를 제외하고 최대인 7대 도시의 명성에 올랐으나 울산광역시의 등장에 따라 밀려났다. 1914년부터 1935년 대전, 광주, 전주가 승격되기 전까지는 군산, 목포와 함께 남한 7부였던 것도 사실이다(개성시는 1930년 승격했으며, 진주는 1939년이 되어서야 부로 승격했다. 흥남이 1944년부로 승격 된 것이 마지막. #).[26] 수원의 수원전산여고도 원래 이름이 한일전산여고로 역시 한일합섬에서 세웠다. (여기도 아직 한일전산여고라고 부른다. 버스에 보면 한일전산여고라고 써있다.) 2019년 한봄고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고 남녀공학으로 전환되었다. 참고로 장안구 조원동의 경기도 최대 아파트 단지 한일타운은 한일합섬 수원공장 자리에 세워진 것이다.[27] 비슷한 경우로 대농그룹이 청주에 세웠던 양백상고(구 양백여상)가 있었으나 2006년 폐교되었다.[28] 1999년 한진중공업에 합병되어 마산조선소가 됐다가 2007년 성동산업에 조선소가 팔렸으나, 2008년 세계금융위기에 조선업 불황까지 겹쳐 2013년에 폐업되어 부지가 경매로 넘어갔다. 2016년에는 골리앗까지 루마니아로 팔려나갔다.[29] 코리아타코마 사원아파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구암동에 있었다. 다 쓰러져가는 아파트이지만 건립 당시에는 최신식 문화 주택(...)이었다고 한다.[30] 문제는 이 여론조사를 어떻게 했는가 아는 사람이 없다. 전화를 받아본 사람도, 인터넷, 길거리 투표 등, 어느 것도 해봤다는 사람을 못 봤다(...). [31] 반대의견이 있긴 했는데, 청주-청원 통합 같은 다른 통합 시도사례에 비하면 반발이 적었던 편이다.[32] 덕분에 진해시청 공무원으로 들어간 마산 출신이 구산면 면서기를 하고 있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33] 선수단의 전지훈련지에 "마산아재들이 지켜보고 있다! 단디 해라"라는 현수막을 붙이기도 하고 롯데 자이언츠와의 낙동강 시리즈 때면 롯데의 견제 구호 "마!"에 대응하기 위한 NC의 구호로 "산!"을 외치기도 했다. 두 팀의 견제 구호를 붙이면 '''"마! 산!"'''이 되기 때문(...).[34] 입지가 옛 경전선의 2개 선로 사이에 반달꼴로 끼어 있는, 집 짓기 애매한 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