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오해

 



1. 개요
2. 원인
2.1. 조선시대에 대한 무관심
2.2. 인터넷의 단편적·사전적 정보표현
2.3. 지배층 위주로 서술된 기록
2.4. 일제의 왜곡과 과장
2.5. 한국의 뉴라이트 세력에 의한 선동
3. 종류
3.1. 조선은 군약신강의 나라이며 그래서 국가가 허약했다?
3.2. 남자는 게으름뱅이, 여자는 노예
3.3. 백성들은 가혹하게 고통받았다.
3.4. 남자가 먹고 남은 음식을 여성이 먹었다.
3.5. 여성은 배우지 못한다.
3.6. 모든 계층에서 성리학적 예법과 사상을 따랐다.
3.6.1. 성리학은 양반만의 것?
3.7. 계층마다의 삶
3.7.1. 평민사회
3.7.2. 양반사회
3.7.3. 평민과 양반의 차이
3.8. 한복은 명나라옷 짝퉁
3.9. 조선은 가난해서 염색도, 무늬도 없었다.
3.10. 한복은 매력없는 임산부 옷이다.
3.11. 조선은 보수적 태도 때문에 교통이 엉망이었다.
3.12. 이름은 최대한 천하고 더럽게?
3.12.1. 여성의 이름
3.13. 한옥은 허접한 흙덩이
3.14. 한옥은 2층건물이 없었다.
3.15. 조선은 전적인 폐쇄사회?
3.16. 조선의 문화만이 한국의 전통문화다?


1. 개요


인터넷 등지에서 주장하는, 조선시대에 대해 품고있는 여러 오해들을 근거와 함께 설명한다.
조선시대에 대한 사회적 시스템이나 국력, 역사적 평가 등에 대해선 지금도 여러 학설과 주장이 오가고 있으며 "이것이 정답이다!" 라고 규정되는 것은 없다. 때문에 이 문서에서는 20세기 이전, 조선시대 민중들의 "풍속이나 생활사" 또는 "사회와 문화의 발전양상"이 현대인의 시선에서 왜곡된 것들을 주로 기술한다.
고대, 중세, 근대를 거쳐 현대까지 인간 역사속에서 다양한 인간들이 존재해왔다. 여기서 서술하는 것들은 어디까지나 평균적인 입장이지 이것이 절대가 될 순 없다. 예나 지금이나 착한놈 나쁜놈 이상한놈은 어딜가나 존재했다.
유교질서와 관련되어 생긴 오해들이나 정치, 군사, 외교적인 내용들은 변질된 유교적 전통조선/평가 문서에 설명되어 있다.

2. 원인



2.1. 조선시대에 대한 무관심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대부분이 "조선의 역사와 문화예술"에 관심이 있지[1], "조선의 풍속과 생활사"에 큰 관심을 두는 이가 적기에 겉핥기식으로 내용만 보고 끝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행태가 반복되다보니 '''"신분"이나 "환경"처럼 다양한 요소들을 고려하여 구분하지 않고, "조선"이란 이름으로 하나로 묶어 퉁치는 모습이 자주 발생하여 오해가 심화되는 것이다.'''
그들이 실제로 무슨 입장인지, 어떤 계층이 그랬는지, 어떠한 문화적 요소들이 있었는지 모르고 단순히 하나로 묶어서 판단하다 보니, 인터넷에선 확대해석되거나 왜곡되어 전해지는 정보들이 꽤 많은 편이다. 더욱이 교과서의 내용만으로 조선을 바라보는 시선도 존재하므로 정보전달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알고 있다 하더라도, 대다수가 민간에서도 성리학이 심화되던 20세기의 정보들이라 그 이전 세대의 정신 세계를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실제 기록을 대조해보면 19세기 이전과 이후가 극명히 갈리는 성격을 보이니, 조선 당시의 모습과 대한민국 초창기의 모습을 동일시하기엔 무리가 있다.

2.2. 인터넷의 단편적·사전적 정보표현


대부분의 정보가 인터넷으로 통하는데 비해 조사와 관심이 적은 분야는 미약한 정보 수준을 보여주기도 한다. 위에서 말했듯 조선의 인권과 가치관, 생활사는 마이너한 분야다 보니 대중의 관심이 적어 정보 또한 그 질이 낮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지금 인터넷에 출가외인, 칠거지악을 검색해보면 단순하게 "집을 나간 딸은 남이다", "아내를 합법적으로 쫓아내는 항목들이다." 처럼 매우 간략화된 의미로 표현하기에, 당사자가 일부러 깊게 파고들지 않는 이상 대부분이 오해와 편견을 가질 수 밖에 없다.
특히 몇몇 블로그와 지식인의 답변들을 보면 이들이 얼마나 조사 없이, 조선의 문화적 특성과 그 수준을 모른 채 미약한 정보를 서술하는지 알 수 있으며. 현실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어떤 의미에서 시행되어 왔는지를 상세히 알고 기술 하여야 할 것이다.
조선시대에 대한 정보를 쉽게 이해하려는 편의주의나 선입견도 문제가 된다. 당장 방대한 조선왕조실록 등은 접근성이나 이해도가 떨어지니 그나마 쉽게 알 수 있는 근대소설이나 역사소설 등에서만 유추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정보는 반골사상이 기본으로 깔려있다는 것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다. 가령 임꺽정이라던가 장길산 등이나 각종 반란에 대한 미화를 보면 그 당시 생활이 극도로 절박해기에 사회에 불만을 품을 수 밖에 없고, 그들의 행동에 정당성이나 동질감을 심어주기위해선 당시의 상황을 개막장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현재의 극도 빈민층이나 범죄자들이 처한 현실을 100년이나 200년 후에 후손들이 "아 대한민국 시절에는 저렇게 밖에 못 살았구나"라고 한다면 이해가 될까? 어느 시대나 문화에든 계급차이라는 것이 존재하며(그래서 '평등은 오류다'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조선시대에도 현재와 같이 잘사는 평민, 못사는 소작농 등의 구분은 분명히 있었지만 비참하게 살아가는 계급을 모두 그렇게 살았다고 일반화시키기엔 무리가 있다.

2.3. 지배층 위주로 서술된 기록


조선 이전의 한반도 왕조의 기록도 그렇고 또 동시기 다른 지역들도 그랬듯이 조선 역시 대부분의 기록이 왕실과 조정, 법, 양반측 기록 등이 대부분이다. 평민들의 기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나, 대부분 포상을 받거나 사건사고가 터졌을 때의 기록들이라 상세한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때문에 양반과 평민들의 삶을 동일시하는 시각이 생겨났고, 20세기의 가부장적 이미지가 겹치면서 사람들이 당시의 삶을 파악하기 어려웠었다.
심지어 19세기, 몇몇 선교사들의 기록에는 (인종주의 등은 제쳐두더라도) 조선 문화에 대한 무지, 겉보기식 판단 기록이 드러나는 것도 많기 때문에 조선의 풍속을 잘 모르는 현대인의 입장에선 조선의 모습이 더욱 왜곡되기도 한다.
지방 수령의 기록, 몇몇 선교사들의 기록과 사진, 견문록, 선비의 일기, 얼마 없는 풍속기록 등을 통해 평민들의 삶을 어느정도 파악할 수 있다.
사족으로, 조선은 자신의 역사 기록을 객관적으로 남긴 데다가 그 기록이 거의 훼손되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 있었기에 무수한 문제점과 모순이 보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2.4. 일제의 왜곡과 과장


일본 제국 및 일본 우익들이 조선 식민지화를 정당화하기 위해 조선의 좋지 않은 점을 과장한 측면이 있다.
문제는 조선의 인권침해나 악습과 유사한 사례들은 다른 나라, 특히 일본에도 존재했고, 더 가혹한 부분도 있었으며 일본 막부 시기는 물론이고 일본제국 시기에도 악습이 존재했다는 점에서 개구리 올챙이 적 모르는 선전이라고 볼 수 있다.

2.5. 한국의 뉴라이트 세력에 의한 선동


식민지 근대화론을 '''정당화''' 시키기위해 최대한 조선에 있었던 사건이나 일들을 침소봉대시켜 망해야 했을 나라라고 선동한다.
조선은 미개하고 망해야 되었을 나라라고 선동하는 것이 유튜브 등지에서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특히 노비문제에 있어서 일본이 해방시켜주었다고 생각하고 세종대왕노비를 폭증시킨 암군으로 인식하고있다.
이 중심에는 뉴라이트의 핵심 인물인 이영훈이 집필한 반일 종족주의 책에 내용이 유튜브의 영상이나 댓글을 통해 잘못된 정보와 특정 집단의 주관이 담긴 역사적 인식을 퍼나르고 있다.
'''이러한 특정 집단의 주관이 다분히 담긴 역사 해석을 통해 역사를 배운다면 그것은 역사가 아니라 종교에 불과하다. 역사를 수용할때 가장 중요한 점 중 하나는 어떠한 역사적 사실을 온전히 해석하고 수용하는 것은 개인의 주관이라는 점이다. '''

3. 종류



3.1. 조선은 군약신강의 나라이며 그래서 국가가 허약했다?


절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조선은 한국사의 역대 왕조 중에서도 '''왕권이 가장 강력한 국가였다.''' 다만 조선의 군주와 사대부의 관계는 이렇게 일방적인 주종관계가 아니었고, 여러가지 견제 장치가 갖춰져 있었기 때문에 이런 오해를 산 것이다. 또한 당시에 가장 강력한 중앙집권적이고 황제권을 구사한 중국의 명청시대[2]가 있기 때문에 조선의 왕권은 상대적으로 약해 보일 뿐이다. 조선이 중국 이외의 국가와 비교되면, 왕권이 강했으면 강했지 결코 약한 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게다가, 국력과 왕권의 관계는 이렇게 단순하게 연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자세한 내용은 군약신강 문서 참조.

3.2. 남자는 게으름뱅이, 여자는 노예


외국인들의 견문록을 보면 남자들이 일은 안하고 게으르게 살아서 여성들만 고생하여 노예와 같다는 말들이 있는데, 이는 당시 조선의 생활패턴을 잘 몰라서 생긴 말들이다. 조선인들의 기상시간은 보통 4~5시 정도로 9~10시까지 하루의 대다수 업무를 끝내버리곤 휴식을 취한다. 일반 서양인들이 활동하는 시간쯤에는 농사일에 지친 남자들은 뻗어있고 식사준비와 빨래를 하는 여성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다.[3] 남녀가 함께 일하는 것이 보편적이던 평민사회에서 어느 하나만 속편히 살았다면 바로 섶이 잘렸을 것이다.
보통 조선인들은 두가지 일을 동시에 했었다. 땅만 있는 농사꾼이면 몰라도, 또다른 직업이 있는 경우엔 낮에 기본적인 농사를 짓고, 오후엔 제2의 직업을 가지고 다른 일들을 하며 먹고 살았다.[4]
이는 한반도 기후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는데, 농사가 주로 이루어지는 농번기는 북태평양 기단의 영향을 받아 높은 기온과 습도를 가지게 된다. 농업이 중심인 국가에서 대낮에 일하는 건 매우 고된 일이며 자칫하면 목숨의 위협이 되기도 한다. 때문에 가급적 해가 완전히 뜨기 전•후부터 일을 했던 것. 이는 현재에도 마찬가지로, 터널(비닐하우스) 시설은 실외온도와 실내온도가 최대 20도씨까지 차이가 날 수도 있기 때문에 낮에 일을 하는 것은 진짜 목숨이 걸리는 문제가 될 수 있다. 아무리 더운 날씨에 익숙한 동남아 사람이라도 한여름에 터널에 들어가 일하면 위험하기는 마찬가지. 그리고 온도가 지나치게 높을 때는 농약이나 비료, 퇴비마저도 약해가 발생할 위험성이 높아지므로 한여름에는 비교적 선선한 새벽에 살포를 하고 한낮에 쉰 뒤 온도가 차츰 낮아지는 저녁때쯤 다시 살포해서 오후 10시나 다음날 새벽에 일이 끝나는 경우가 많다. 그 시간대에 도시민들이 시골에 갈 일이 없으니 알아차리지 못하고 당시의 서양사람들과 같은 선입견을 가진다.
당시에 서양이 이미 산업혁명으로 산업화 사회에 들어간 것과 달리, 당시 조선은 아직 농업사회였던 사회적 차이를 인지하지 못한 서양인들의 잘못된 시선 또한 크다. 당장 현대에도 도시민들이 농민들을 보고는 게으르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이러한 생활패턴을 알지 못하는 도시민들은 농민들이 게으름부리거나 편하게 산다고 생각하는 걸 떠올려보자. 실제로 일본은 이런 오해를 가지고 보드게임을 만들어 식민사관에까지 이용해 먹었다.

3.3. 백성들은 가혹하게 고통받았다.


조선이 일본에게 망했다 보니 좌우익을 막론하고 이러한 주장을 펴기도 한다. 그러나 조선건국의 배경은 유교식 민본주의였고 마비키같은 악습도 없었다. 기근이나 재앙같은 극한 상황에서는 아이를 버리거나 죽이기도 했지만 일본처럼 풍습이나 문화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서양인의 기록에서도 산업혁명 당시 유럽에서는 아이들을 버리는데 조선인들은 그러지 않는다며 칭찬하기도 한다. 여담으로 일본에서는 1930년대 쇼와 대공황때 딸아이 모두를 공창에 팔아 적십자단체가 구조한 일도 있었다. 영화 스파이 조르게에서도 이 사건이 묘사된다. 게다가 일반 백성들의 영양 수준 또한 주변국들 보다 더 좋은 편이었다. 이는 동시대 주변국과의 영양상태 비교로도 확인된다. # 형법 또한 너그러웠던 편이다.[5][6] 또한 백성들을 위해서 신문고를 만들거나[7], 농민들을 위한 복지 정책[8] 장애인 등용, 사형에 대한 3심제 시행, 노비 학대에 대한 처벌 등 시스템이나 이념 자체는 오히려 동시대 중국이나 일본보다 나은 편이었다.[9][10] 문제는 시스템의 운영이 점차 변질되고 삼정으로 인한 혼란, 이념과 현실의 괴리[11]가 문제였지, 조선이 다른 나라보다 가혹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 물론 전근대적인 인권침해는 있었지만 다른 나라보다 딱히 비난의 대상이 될 수준은 아니라는 것.

3.4. 남자가 먹고 남은 음식을 여성이 먹었다.


조선은 전통적으로 내림상 문화로서 (웃어른→부모→자식)순서로 밥을 먹었다. 집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일반적으로 평민들은 특정 제제없이 남녀가 서로 겸상도 하고, 자식과 부모가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다. 때문에 여성은 남은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섣부르고 과장된 판단이다. 양반의 경우엔 식사 예절 참고.[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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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밥그릇 사진을 보았다면 어마무시하게 큰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내림상 문화의 산물이다. 수저는 따로 쓰더라도, 거대한 그릇에 가족들의 한끼 식사를 몽땅 떠놓아 각자의 순서에 맞추어 먹었던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선 남은 것이 아닌, 각자의 선택에 따라 적절한 양을 떠먹는 개념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과 달리 음식은 남기는 것이 예의에 속했다. 그래야 다음 사람이 먹을것이 생기기 때문[14].
순서에 있어 차별이 있었다는 점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형태의 식사법이 성리학을 통한 차별적 식사라고 말하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다. 비교적 성리학이 약하던 조선전기에도 이러한 식사가 이루어졌었기 때문.
역으로 여성이 먼저 식사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시가 결혼식. 이 경우엔 신부와 신부의 가족들이 먼저 식사를 즐기고, 방으로 들어가 휴식을 취하면 그 다음부터 남편과 하객들이 식사를 했다.

3.5. 여성은 배우지 못한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주장이다. 어느정도 사실이지만 그 내용을 확대·왜곡시킨 경향이 있다. 여기서 배움이란 실재론 "학교에서 배우는 전문교육"을 의미한다.
사대부들의 주장을 보면 여성은 교육을 받아선 안 된다는 말들이 여럿 보이지만, 이는 조선에서 "사대부 남성만이 전문교육을 배우고 관직에 나가던 사회적 구조가 원인"이었다. 그렇기에 사대부 여성은 배움의 까닭이 딱히 없었으므로 굳이 전문교육을 가르치지는 않았다.[15] 반면에 평민들은 남녀가 기초적인 초등교육(소학, 간단한 한문)을 받았을뿐, 과거에 나갈것이 아니라면 고등교육(성리학, 경전)을 배울 기회, 명분, 경제력이 전무했다. 때문에 대부분이 실질적인 기술들을 배워서 먹고 살았다. 동시에 조선에서 세워진 초창기 학교들은 대다수가 서양인들에 의해 설립되었는데, 가면 갈수록 서구열강에 의한 사건들이 여럿 발생하면서 부정적인 인식이 형성되었고 이와 관련해 서양인이 세운 학교가 엮이면서, 사대부들 사이에선 반발심으로 학교교육에 대한 반대를 외치기도 했다.
당시 여성도 한글은 배웠으며, 원한다면 상업, 공업, 예체능처럼 다양한 분야를 배울 수 있었다.[16][17]
그러면 고위층의 여성들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조선 후기에는 여성의 교육이 증가하면서 남편을 가르치는 여성인 현처가 등장했으며 임윤지당, 강정일당처럼 성리학을 자기화하는 여성 성리학자들이 나타났다.[18], 이들은 남성 양반들에게서도 자신들과 대등한 수준의 학문적 성취를 이룬 것으로 대접받았다. 참고로 임윤지당은 남자와 여자의 존재를 차별에 두지 않고 음양오행의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인식한 사람이며, 역사 인물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으로도 유명했는데, 그 논리가 탄탄하여 모두들 수긍했다고 한다. 즉 "여성의 말이라 하더라도 무조건 폄하하지는 않았다."[19] 왕족의 경우에도 인수대비, 문정왕후, 명성황후는 한문을 알던 걸 넘어서 유교 경전에도 나름 통달했다. 게다가 인수대비는 여성 전용 유교 교과서 격인 내훈의 저자이기까지 하다[20].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보아, 전반적으로는 여성이 남성보다는 교육 면에서 떨어질수 있지만 그렇다고 못 배웠다고는 할 수 없다
조선과 동시기에 다른 지역이라고 해도 딱히 여성에게 전문교육을 찬성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으니, 각 국가마다 저마다 이유는 달랐겠지만 비단 조선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당장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의 저자 요한나 슈피리는 자신이 여성임에도 여성의 대학교육에 반대했는데, 19세기 후반임에도 여전히 여성교육에 대해서 사람들의 시선이 어땠는지 잘 드러나는 일화라 할 수 있다. 결국 이같은 현상은 "여성이 싫어서"라기보다는 "기존체계의 붕괴에 대한 지도층들의 반발" 그리고 "서구열강에 대한 견제"에 가까웠다.

3.6. 모든 계층에서 성리학적 예법과 사상을 따랐다.


임진왜란 이후 성리학이 강화되고 칠거지악, 출가외인 등 예적 제약이 형성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허나 위 항목에 들어가 보면 알겠지만, 이같은 것들은 주로 양반들에게 해당되던 내용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러한 인식은 '''"양반과 평민의 입장차이를 구분하지 못해서 생긴 오해다."''' 실제론 계층마다 제약의 종류와 수준이 달랐으며, 세계 어느 나라를 봐도 고위층은 강력한 규칙과 예가 있는 반면, 평민은 상대적으로 숨통이 트이는 입장이었다.
흔히 조선여성의 권리를 낮아지게 하였다 불리는 '''"남녀칠세부동석, 출가외인, 남존여비, 칠거지악, 지조와 절개, 삼종지도[21], 외출•노출 금지"''' 등은 민간이 아닌 '''"양반의 성리학"'''이었다. 평민•천민 계층에겐 그 관념이 없거나 미약하던, 귀족들의 예법과 정신적 가치였단 소리다. 이 외에도 부부유별, 신체발부수지부모[22]와 같은 사상들도 신분에 따라서 그 유무가 갈렸다.
물론 성리학을 기초로 한 조선시대 특성상 일반적인 백성들도 성리학의 영향을 받았었다. 조선은 평민들에게도 성리학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법이 적용되어, 성차별이 법적으로 명백하게 있었고, 서당의 보급과 함께 소학의 교육이 증가하며, 성리학의 예의범절이 전파되었기에, 여러가지 성리학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진 못하였다. 허나 위에서 서술했듯이, 각 계층마다 살아가는 환경이 달랐던만큼 그 형태와 깊이엔 차이가 있었다.[24]
쉽게 말해, 유교란 거대한 틀 안에서 "직접적인 예법으로 이루어진 사대부의 성리학" 그리고 "간접적인 법률로 이루어진 민간의 성리학" 정도로 구분되었다고 보면 된다.
성리학적 입장을 제외하곤, 평민들의 차별은 주로 "남자는 힘, 여자는 섬세함" 정도였을 뿐, 뚜렷하게 구분된 경계는 없었다. 전쟁, 스포츠처럼 힘을 중요시하는 것 외에 요리, 꽃꽂이, 독서, 조각, 그림, 연주, 노래와 등 웬만한 문화들을 서로가 공유하며 즐겼다. 나중엔 사대부와 같은 지배층들을 까는 문화가 생겨나고, 기존의 다함께 노는 문화가 맞물리면서 이는 더욱 활발해진다. 실제로 민간에서 남성적, 여성적이라는 개념이 강해진 것은 20세기 즈음에 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조선의 이야기라기 보단 대한민국 초창기의 이야기에 더 가깝다.

3.6.1. 성리학은 양반만의 것?


조선은 위에서 말했듯이 성리학을 기반으로 삼은 이상 백성들도 간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양반의 율법이 평민에게 모두 적용되는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영향이 아예 없지도 않았다. 조선 전기에는 후기와 달리 조금의 유연함을 보여주긴 하지만 조선은 건국 시점부터 태조가 불교를 탄압하며 성리학자 정도전이 국가의 초안을 만들었고 성리학을 국가의 기강으로 삼으며 만들어진 나라다. 성리학 자체가 중국에서 처음 만들어 질 때 이렇게 보수적인 학문은 아니었으나 시간이 지나며 더욱더 보수적으로 변질되었고 조선으로 들어오면서 조선 상황에 맞게 변하였다.

3.7. 계층마다의 삶


신분사회였던 조선은 각 계층마다의 모습이 매우 달랐다. 더욱이 고위층이던 양반과 하위층이던 평민들은 대부분의 분야에서 서로 반대되는 양상을 보이는데, 이같은 문화, 사상적 차이는 성리학적 관념과 유교가 영향을 주어 그 거리가 큰 편이다.

3.7.1. 평민사회


요즘 사나운 여편네를 둔 집안은 여럿 있어도

남편이 권세를 쥐고있는 집안은 열에 한둘도 안되는 듯 싶다.

아내에게 눌려 기를 못 펴고 사는 사내들이 많아 기강이 흐트러질까 걱정되지만

'''그런데 보다보면 그런 집의 살림이 관리가 더 잘 되긴 하더라'''

중국 남부의 여자들은 온순하고 북부는 거칠다 했는데

우리나라가 지리적으로 북부에 붙어 그 기를 받고 있으니 여자들이 매서운 것도 이상한 것이 아니다.

- 18세기 실학자 성호 이익 -

조선의 사람들은 말과 행동이 거칠고 폭력적이다.

생활력이 매우 강해 산처럼 쌓인 업무가 눈 깜짝할 새 사라져 있었다.

또 허영심이 강해 돈을 낭비하며 먹고 꾸미기를 즐겼는데

이때문에 부부싸움을 하는 남녀가 많았다.

- 구한말(19세기) 선교사들의 기록 -

집안 사정이나 사람의 성격에 따라 다르겠만 일반적으로 '''지금 우리의 삶과 유사했다.''' 당시 경제성장으로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증가하였고, 구한말 남성들 사이엔 마누라를 두고 "곳간주인"이란 별명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적어도 가정에선 그 권리가 낮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당시 화폐가 쓰였다곤 해도 면포의 지위는 그대로여서 남성의 생산성과 여성의 생산성은 서로에게 중요했다. 노동력이 중시되던 사회라 남아선호사상이 있던 것은 맞았지만, 여성도 엄연한 노동력에 속했기에, 양반처럼 집 안에만 가두면서 예법으로 차별할 수는 없는 존재였다. 여성이 전반적으로 남성보다 밑이었다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남성의 말에 무조건 순종하거나 폭력을 당해도 순응하는 이미지가 아닌, 서로 큰소리로 욕하고 때론 주먹다짐을 하는 모습이 더 많았다고.
노동도 서로의 역할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공통으로 하는 일이 없던 것도 아니다. 농사, 육아, 요리, 청소, 빨래와 설거지처럼, 서로가 도우면서 생활하는 것은 기본 상식이었다.[25]
조선 후기로 갈수록 성리학이 심화되어 여러 제약이 만들어지고, 19세기 말기쯤 되면 백성들 스스로가 이를 따르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백성의 삶에 큰 변화가 있다고 보긴 어렵다. 우리가 흔히 아는 가부장제보다 분업으로서 부부관계를 유지하는 경향은, 근대화로 인해 산업기반이 180도 달라지기 전까지 오래도록 유지되었었다.
물론 당시에도 여성을 학대하고 무시하는 사람은 있었다. 허나 전반적인 분위기를 떠나 여성의 권리가 높다던 삼국시대고려시대에도 남존여비는 깔려 있었으며, 현대에도 알게 모르게 그 차이는 존재한다. 가령, 왕실 한정으로 일부다처제가 실시되었다거나, 고려 말에 문하시중이 일부다처제를 일반 백성들에게도 허용하자고 왕에게 건의했다가 백주대낮에 길바닥에서 빡친 여자들에게 처맞았다는 등의 기록을 보면 생각보다 여성의 권리가 높은 편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조선 시대에 와서야 일부다처제가 엄금되고, 지적 장애가 있던 부인을 돌봐줄 사람이 필요했던 퇴계 이황의 사례와 같이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축첩도 마음대로 못할 정도여서, 이 시기에 외려 여성의 지위가 꽤 올라갔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율곡 이이의 아버지인 이원수는 부인인 신사임당이 죽은 뒤에 첩을 뒀다가 자식들을 대노하게 만들었으며, 심지어 이이의 경우는 아예 아버지와 절연하겠다며 절간으로 들어가서 승려가 되겠다며 소동을 일으키기까지 했을 정도로, 이 시기에 지 꼴리는대로 첩을 들였다가는 세간의 질타를 받을 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개무시당할 수 있었다. 서얼에 대한 차별이 괜히 있던 게 아니다.[26]

3.7.2. 양반사회


여기서부턴 우리가 조선이라 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자주 보인다. 그럴만도 한 것이, 교과서실록처럼 우리가 흔히 접하는 자료들은 대부분 이 계층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고려 말기에 유교와 성리학이 유입되었고, 나중에 조선이 건국되면서 부패했던 기존의 불교를 밀어내고자 숭유억불을 시행하면서, 유교가 국가의 새로운 기틀로 자리잡게 된다. 이 때문에 지배층이던 사대부들 또한 이러한 성리학적 질서에 직접적으로 편입되어, 우리가 아는 양반의 이미지가 형성되게 된다. 성차별적 정신세계와 보수적 태도, 시간이 흐를수록 강화되고 늘어나는 제약들. 이 모두를 사대부들은 온전히 따랐을 것 같지만 실제론 온갖 편법을 동원하여 이를 벗어나곤 했다.
이들은 남녀칠세부동석에 따라 남녀의 구분을 "집 안"과 "집 밖"으로서 철저히 교육시켜서 차등을 두었고, 일반 백성들의 몇배나 되는 시간을 성리학에 투자하여, 강한 보수성을 띄었다. 때문에 여성은 "아이를 잘 볼보고 지아비를 잘 섬기는 것", 남성은 "교육을 받고 나라에서 큰일을 하는 것"으로 한정되면서 실권을 잡은 남성의 가부장제가 주를 이루었다.[27] 결국 외출과 같은 여러 사회적 활동들이 남성들의 전유물로 인식되면서, 양반여성의 권리는 거의 없다시피했다. 더욱이 3대 안에 관직에 오르지 못하면 양반취급도 잘 안 해주던 조선시대였기에(양천제가 베이스였던 전기에는 이 기준이 엄격했고, 양반이 통혼으로 서로 얽힌 신분으로 고착되면서 반상제로 바뀌어가던 중후기에도 어느 정도 의미가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강해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집안 여성들을 포함한 온 가족이 양반으로 제대로 인정을 받냐 못 받냐 여부가 남성들의 과거합격 여부에 달려있었으니.
이와 더불어 조선 후기에는 제사의 형식이 바뀌면서 장자에게 모든 것을 몰아주는 일이 나타났고, 딸은 외출과 관련된 제약에 의해 친가에 자주 들를 수도 없어서, 재산 배분에서 불리한 입장이었으며 출가외인이 생겨나는 원인을 제공했다. 때문에 남아선호사상이 가장 강한 계층이었으며, 조선애 대한 부정적 이미지의 주체가 되는 계층이었다.[28]

3.7.3. 평민과 양반의 차이


  • 성격의 차이
    • 평민사회의 사람들은 남녀모두 성격이 거칠면서, 정이 많고, 소비를 즐겼다. 예법, 격식, 체면과 관련해서 비교적 자유롭다보니 노출처럼 성적인 것에 거부감이 없었으며 서민문화의 노래와 연극속에 이러한 것을 넣어 오히려 즐기며살았다. 기본적으로 기가 세고 거칠다 보니 말이 빠르고 거세며 부부간의 반말이 일반적이었다. 여성또한 노출을 하며, 다리를 꼬거나 널브러지는 자세를 취하는것에 별 문제가 없던만큼 여성에 대한 지조와 절개또한 약한 편이었다.
    • 양반사회에선 성리학과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 지조와 절개를 중요시 하며 성적인 부분에서 예민한 사회였다. 여러 예절들을 숙지한 지식인들 이었기에 말투가 대체로 느리고 점잖으며, 부부간의 상호존중이 있어 존댓말을 사용하며 함부로 하지 않았다. 검약정신에 따라 지나친 사치를 부도덕하게 보았으며, 격식과 체면또한 강하여 다른 이들을 상놈이라 부르고, 육체노동을 천시하였다. 또한 여성들에게 순종과 조숙함은 기본이어서 "삼종지도", "열녀"와 같은 개념들이 존재했었다.
  • 생활의 형태 차이
    • 대체적으로 풍족하지 못한 평민들은 여러가지 노동에 시달렸다. 때문에 가족 구성원들과 다함께 일을 하였고, 마을 단위로 나서서 서로가 부족한 부분을 채우며 살아갔다. 공부를 해서 과거에 나가기도 했지만, 대부분 농사나 손재주를 활용한 여러가지 기술들을 배워서 먹고 살았다.
    • 돈 많고, 집 넓고, 하인들도 둔 양반의 삶은 확실히 평민에 비하면 쉬이 먹고 살 수 있었다. 노동의 고됨은 물론 배제되며, 고위층만의 여러가지 혜택을 누리며 지낼 수 있었다. 남성은 공부를 하며 사회생활을 하고, 여성은 그러한 남편을 보조하며 집에서 지내는 형태로서 가정이 이루어졌다.
    • 계층이 위로 갈 수록 가부장제, 밑으로 내려갈수록 분업관계의 성격을 띈 부부관계가 이루어졌다.
  • 사랑의 차이
    • (연애)
      • 성리학적 예법에서 비교적 자유롭던 평민들은 남녀간의 교류가 일어났었다. 때문에 연애가 가능했었는데, 지금의 커플티, 발렌타인 데이처럼 특정한 날에 연인끼리 서로간의 은행알을 주고받는 커플문화가 있었다.
    • (결혼)
      • 양반사회에서의 혼인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유교적인 입장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가문과 가문간의 교류이기에 명예, 재력, 수준, 당파를 철저히 고려하여 상대를 매치시키는 형태인지라, 좋아하는 이성과의 혼인이 아닌 대부분 부모끼리의 정략이나, 중매쟁이를 통한 중매혼이 일반적이었다.
      • 반대로 평민들은 중매를 통한 결혼도 치루어졌지만, 연애를 통해 결혼하거나, 외간남자와 바람이나서(...) 맺어지는 등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29]
    • (이혼)
      • "섶자르기" 라 하여 평민들은 이혼을 할때 특정 절차를 걸치는 것이 아닌 단순히 옷과 옷 사이를 잇는 "섶"을 잘라다가 이혼서류처럼 쓴 뒤 헤어졌다. 이는 후에 "여성이 바람을 피웠다", "남성이 여성을 성추행했다." 처럼 앙심을 품고 거짓으로 고발하는 일들을 방지하기 위한 이혼의 증표로서, 이를 서로가 주고받음으로서 혹시모를 후폭풍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에서 평민들의 이혼은 조선 말기까지 흔하게 일어났었는데 이는 평민사회 자체가 자유로워서기도 하지만, 이혼에대한 법적 제약이 무의미하기도 했고, 당시까지만 해도 출가외인의 성격이 양반들처럼 "귀속"의 성격이 아니라 "해어짐"의 성격을 띄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우선 양반들도 이혼 자체는 가능했었다. 문제는 이러한 절차는 왕의 허락하에 성립된다는 것이었다. 양반의 신분 자체가 권력에 가까운 위치다 보니 각 가문간의 권력증가, 영향력 확대 처럼 혼인관계를 악용할 가능성이 있기에 이들의 혼인관계는 꽤 예민한 문제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왠만하면 이혼이 아닌 본처를 둔 상태에서 첩을 두거나, 남녀칠세부동석을 이용해 아예 각 방을 쓰거나 하는 식으로 문제를 처리했다.
    • (재혼)
      • 양반들에게 재혼이란 어려운 이야기였다. 유교적 관점에서 여성은 지조와 절개를 지켜야 하는 존재이자 남편에게 순종하는 열녀로서, 외간남자를 함부로 받아들여선 안되기 때문이었다. 원래 조선 초기만 해도 양반가의 여성들은 최대 3번까지 재혼이 가능했었다. 문제는 성종이 "과부재가금지법"을 만들면서인데, 재혼한 여성의 후손은 과거시험을 볼 수 없도록 법적 제재가 생긴 것이다. 이는 사대부가에게 엄청난 데미지로서, 과거 하나에 집안의 유지와 명예가 걸려있는데 여성의 재혼 한번에 집안이 통째로 망할수도 있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었기에, 양반여성은 혹여나 남편과의 연이 끊기게 된다면 집안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평생을 과부로서 살아가야만 했다. 물론 과거는 평민들에겐 별 상관 없는 이야기였으므로 실질적으로 무의미했다.
  • 남녀인식의 차이
    • 일반적인 평민들 사이서는 남아선호사상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사대부들 사이서는 더욱 심화된 형태인 남존여비사상이 뿌리깊게 존재했다.
    • 차별의 형태가 달랐는데 민간에서는 힘과 손재주처럼 "인물의 특성"을 이용한 차별이 성행했다면, 고위층에선 "성리학의 예법"을 이용한 성차별이 성행했다. 이는 단순히 힘이 세서 단어 그대로 남성을 "선호"한 것과는 달리, 고위층에선 "남녀유별"을 강조하며 나아가 "남녀차별"의 수준까지 그 개념을 확장시킨 데에 차이가 있다.
    •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양반계층에서 여성의 권리를 억압한것과는 별개로 여성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존재했다는 점이다.
    • 결국 가장 큰 차이점은 "직접적인 예적제약의 유무"라 볼 수 있다.
  • 개인의 권리 차이
    • 양반 여성은 "집 밖의 남성, 집 안의 여성" 개념을 기준으로서 여러가지 제약이 있었다. 거의 평생을 갇혀 살았으며, 지조와 절개를 지키기위해 반드시 온몸을 가려야 했고, 항상 간접적인 감시가 있어서 사생활을 보장받지 못하였다. 외출의 경우 낮에는 가마와 하인들을 데리고 다녔고, 밤이 되면 본인의 발로 나갈수 있었지만 그 영역은 한정되어 있었다.
    • 평민 여성은 외출과 관련되어 어느정도 자유로웠고, 스스로를 드러내는 데에 있어(사회적·성적) 부담감이 적었다. 또 어느 정도 한계는 있었지만 "직업 선택의 자유도 존재했다." 관직에 진출하는 것은 당연히 신분을 고사하고 여성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 힘이 많이 들어가는 것은 남성의 일이란 인식이 있어서 쉬이 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다만 그림이나 조각처럼 무언가를 만드는 일이라던가, 주막에서 요리를 하고 가게를 열어 장사를 하던가, 곳곳을 떠돌며 광대나 사당패 일을 하며 재주를 파는 등, 어느정도는 스스로가 본인의 일을 선택할 수 있었다.
  • 허나 여성의 권리가 낮았던 사회라 할지라도 오히려 여성에 대한 법적인 보호는 강해졌었는데, 여성의 지조와 절개를 중요시하던 사회다 보니 남성이 여성을 성추행 하면 곤장, 강간을 했을 경우엔 사형이 기본이었다. 사건마다 그 처벌은 다 달랐으나 대체적으론 매우 강한 처벌들이 가해자에게 내려졌다.
  • 교육의 차이
    • 일반적으로 학교에서 가르치는 전문교육은 경제력을 많이 필요로 한다. 더욱이 당시의 교육들은 대부분 관직에 나가기 위한 것이었다보니 이러한 전문교육은 사대부 남성의 전유물에 가까웠었다. 반대로 양반여성, 평민들은 각각 교육의 필요성이 적거나 그만한 경제력과 환경이 되지 않았기에 "사"를 제외한 농 공 상 예체능 처럼 실질적인 기술들을 익히거나 하였다.
평민들이 아예 무시하고 행하여 제약을 취소케 하는 성격이라면, 양반은 어느정도 따라가다가 뒤로 몰래 피해가는 성격으로서, 사람 사는곳 다 똑같다고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바보들은 아니었다.

3.8. 한복은 명나라옷 짝퉁


중국에서 한복이 자신들의 것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크게 2가지 근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 한복은 중국의 소수민족인 조선족의 의상이기에 자신들의 의복이라 할 수 있다.
• 명나라 초기의 복식과 한복은 유사한 구조를 가졌기에, 조선의 옷은 곧 한푸의 표절이다.
이중 2번항목이 중요한데, 한족들이 한푸, 특히 자신들의 마지막 왕조인 명의 한푸를 보고 주장하는 내용이다. 실제로 명나라 초창기의 양식을 보면 한복의 구조와 형식이 그것과 빼박이다만, 실재론 "수입"이 아닌 "수출"의 사례로서 고려양이란 이름으로 불리던 우리의 옷이다. 일부 커뮤니티에서 한국인 행세를 하는 중국인들이 조선의 한복이 명나라 복식을 받아들인 것이라는 말을 퍼트리고 있지만 실제로는 반대다.
당시 고려에선 원나라 말기때 궁녀들을 자주 올려보냈었는데 이때 궁녀가 입고있던 한복이 중국 북부의 몽골인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나중엔 명나라가 세워지고, 수도가 남부에서 북부로 옮겨지면서, 고려양은 한족들에게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어 기존의 한푸보다 더 유행하게 된다. 이대로 중화문명에 완전히 정착하나 싶었지만 홍치제는 위대한 한족이 동쪽 오랑캐의 옷에 홀렸다면서 그만 금지령을 선포해버리고[30], 약 100년 간 중화의 사랑을 누린 고려양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이후 여진족의 청나라가 들어서며 한푸와 함께 고려양도 잠들어 있다가, 21세기에 들어 한족의 한푸입기 운동이 퍼지면서 그 존재가 드러나게 된다. 문제는 이가 옆동네의 것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에서 비롯됐다. 이때 한족들은 '''"어? 명나라의 초창기 옷이 한복이랑 거의 똑같네?" → "명나라는 한족의 나라니까 이것도 한족의 옷이겠네?" → "우리가 동아시아의 중심이자 모든 문화의 기반이니까..." → "아하! 한복의 원류는 사실 명나라의 한푸로서, 한국에서 이를 따라한 거구나!"'''라고 계산을 때려버린다. 때문에 이런 오해가 생겨난 것. 혹시 중국인이나 뭘 잘 모르는 사람이 한복은 한푸 짝퉁이란 소리를 한다면 밑의 내용들로 반박할 수 있다.
  • 정말 한복이 명나라의 것이었다면 어째서 그들 스스로가 고려양이라 부르고, 스스로가 오랑캐의 옷이라며 금지령을 내렸겠는가?
  • 수백 년동안 유지되던 대륙의 의복양식이 아무 이유없이 하루아침에 180도 달라질 수 있는가? 또 이후에 다시 원래의 형태로 돌아간 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사실 이러한 말들은 한복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일본의 기모노와 베트남의 아오자이를 각각 당나라, 송나라 옷을 따라했다 주장하며, 기타 여러 소수민족들의 옷도 자신들이 전수해준 거라 말한다. 이에 대해 굳이 반박을 하자면, 그냥 한국이나 중국이나 일본이나 셋 다 오랜 옛날부터 동북아시아에서 부대껴서 공존해온지라, 문화적으로도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받긴 했을 것이고, 사는 환경도 비슷하니 전통 의상이 얼추 비슷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9. 조선은 가난해서 염색도, 무늬도 없었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착각 중 하나인데, 흰색 자체가 곧 "색"이다. 즉 염색을 해야 나온다. 그렇지 않은 면은 목화, 삼베와 같은 식물성 직물로 만들어서 기본적으로 칙칙하기도 하고 사람의 손때가 닿다보니 아이보리에 가까운 색이 나온다. 고구려때도 그랬었지만 흰색은 조선에게 있어 "신성한 자연의 색" 이기에 중요하게 생각했다.[31]
간혹 실록과 같은 기록물속에서 "흰색이 사치라서 금해야한다."는 대목을 보고 의아해하기도 하는데 이는 맞는 말이기도 한 것이, "흰색은 사치스러운 색이 맞다." 다른색들과 비교했을때 제조 단가, 시간, 난이도, 관리 등 많은 부분에서 투자를 필요로하는 비싼색상에 속한다. 흔히들 흰색을 가장 기본적인 색으로 인식한다만, 그만큼 다른색에 물들기 쉽다는 것이지 결코 하찮은 색이 아니다. 조선이 가난해서, 기술이 없어서 흰색을 입었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정 반대였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에 여러 요소들이 있는데 몇가지만 꼽아보자면
  • 일제의 문화통치시기에 일어난 자국혐오적 분위기 조장의 일환
  • 흰색이 가장 기본적인 베이스라 여기는 현대인들의 인식이 미친 영향
  • <흰옷을 주로 입었다.> 라는 대목의 성급한 일반화로 인한 사실 왜곡
정도로 볼수 있을 것이다. 결국 시간이 흐름에 따라 특정 지식들이 사라지고 변질되어가는 와중에 이러한 인식이 생겨졌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진추가예정]
아무리 흰색이 신성하다 한들 사람의 손이 닿는 이상 쉽게 더러워지는 것 또한 사실이라서, 위아래로 흰색인 경우 보다는 둘중 하나의 부분만 흰색을 쓰고 나머지는 다른 색상을 입히는 식으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또 조선은 무늬문화가 없다는 말도 허구이다. 조선이 타국에 비해 무늬의 사용빈도가 떨어지던 것은 맞지만 아예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더욱이 조선이 선호하는 무늬방식도 있었다. 여러가지 색을 사용해서 마치 중국처럼 화려한 무늬도 분명 있었지만, 의상에는 보통 엇비슷한 색으로 무늬를 넣었다. 기존의 원단 색에서 약간 채도를 높이거나 그와 비슷한 색을 이용하여 최대한 튀지 않도록 무늬를 새기는 것이다. 이처럼 무늬문화 자체는 있었지만 평민들은 굳이 필요성을 못느꼈을 뿐더러 당시 무늬는 기생들이나 한다는 인식이 있기도 해서 그리 즐기지 않았을 뿐이다.
기생이나 광대같은 예술인, 관직에 오른 사대부, 군인, 의사, 무당 등등 다양한 곳에서, 각자의 성격에 맞는 염색옷을 입었다. 거기다 외투 정도는 평민들도 여러 색깔을 입었다. 물론 그것도 흰색으로 입은 사람이 적지 않았지만, 정부에선 딱히 색에 제재를 가한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해달라는 입장이었다. 한때는 황토색이 전국적 유행이기도 했으니, 결국 강제가 아닌 백성들 스스로가 흰색 열풍에 빠진 것이었다. 외려 조정에서는 흰색 옷이 사치라고 생각해서 이를 금지하려 하거나[32], 국가차원에서 사례를 하기도 하는 등 유색옷을 적극적으로 장려했을 정도였다.

3.10. 한복은 매력없는 임산부 옷이다.


보통 "조선전기 시절엔 옷이 길고 푸짐한 반면, 조선후기 시절엔 짧고 좁은 양식으로 변화했다." 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허나 이는 성급한 일반화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갈수록 <짧은 양식으로 "변했다."> 가 아닌 <짧은 양식도 "추가됐다."> 라 보는것이 타당하다. 실재로 일제강점기 초기(10~20년대) 사진들을 보면 하나가 아닌 다양한 양식의 한복들을 입고서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조선 말기라 하여 흔히 말하는 "임산부 한복"만 입고 다니진 않았다는 소리다.
[image]
(왼쪽부터 20세기, 19세기, 18세기 대표양식)
[사진추가예정]
(1920년대 사진, 왼쪽은 전통양식의 한복(허리) 오른쪽은 서구양식의 한복(어깨허리) 기존의 가슴가리개가 드러나는 부분만큼을 치마가 가려버려서 저고리의 짧은 형상이 뚜렷이 보인다.)
위 사진들에서도 볼 수 있듯, 한복의 특정 양식이 그 시대를 대표한다 하여 굳이 그 양식을 고집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의류선택의 가짓수가 늘어나 다채롭게 입고 다녔다고 보아야 맞다.
[사진추가]
그렇다면 왜 이러한 형상의 옷이 만들어졌는지, 항목과 같은 인식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한번 알아보자면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본래 한복치마를 가슴밑~허리부근에서 묶기에 인체의 실루엣을 살렸으나, 20세기에 들어서면 서구열강의 영향으로 인해 가슴부분을 다 덮어버리는 길이의 "어깨허리치마"가 만들어지면서, 대한민국 초장기나 북한방송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통자형 한복" 속칭 "임산부 한복"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33] 당시엔 사진에서처럼 허리띠를 따로 묶어서 효율+실루엣을 어느정도 챙겼었지만 이또한 어느순간 사라지게되며, 단호히 말해 추한 모습만이 남아 한복에 대한 이미지를 실추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의복 변천사를 간단히 풀어보자면《 15~18세기 까지 무난한 형태를 유지(깊게 여미어 입음) → 19세기, 저고리를 줄이고 가슴에 천을 둘러 매듭장식을 더하는 양식 출현(옅게 여미어 입음) → 20세기, 서구열강에 의해 가슴부분을 다 감추는 어깨허리치마 출현, 허리띠를 따로 두름 → 20세기 후반, 허리띠 사라짐 》결과적으로《상의: 매우 짧고 옅게 여미는 저고리, 하의: 서구식 통치마 》라고 정리할 수 있다. 결국 이러한 통자한복이 나온 것도, 미디어와 이미지를 통해 한복에 대한 오해를 형성한 것도, 대한민국 초창기때 여러가지 혼란속에서 망가지고 변질된 정통의 어설픈 따라하기에 따른 폐해들 중 하나라 볼 수 있다.
전통문화의 상당부분이 홰손되고 사라지던 20세기 초~중반 시기의 문화를 20세기 후반 급속한 근대화 속에서 복구하고 퍼뜨리려는데, 별다른 조사나 깊이없이 허레허식의 형상으로서 전통을 이어나가려다 보니 조선 말기의 옷이, 그것도 정확한 형상이 아닌 왜곡된 형상으로서(허리띠 생략, 지나치게 짧고 큰 고름의 저고리) 소개되었고, 여러 미디어나 공식선상에서 이러한 옷이 입혀지면서 한가지 형상으로만 각인된 결과이다.

3.11. 조선은 보수적 태도 때문에 교통이 엉망이었다.


조선은 육운보다 수운을 더 많이 하였다.
교통의 중요성은 따로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물자, 정보, 군사, 이동처럼 교통 하나에서 얻을 수 있는 건 많다. 그런데 조선이 길을 닦는 것은 오랑캐만 편하게 한다, 상업을 촉진시켜 농업의 몰락을 부추긴다고 여겨 길을 닦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다소 오해가 섞여 있다.
중국이야 평야가 넓고 인구도 많으니 포장도로가 생길 수 있었다지만, 국토 대부분이 산지에 특별히 많은 인구를 둔 것도 아닌 조선이었다. 웬만한 평지들은 폭증한 인구 때문에 꽉 차 있었기에 수레기술이 있음에도 사람들은 산을 넘어서 가야 되니 지게를 애용했다.[34]
당시에 터널을 뚫는 기술 따윈 없었을 테니, 지리적 한계를 극복할 수 없던 것이다. 이에 조선은 산을 깎아가며 힘을 빼는 대신에 반도의 특성을 이용했다. 해상로를 개척하여 항구를 설치하고 배 하나로 팔도를 누비고 다녔으니[35], 굳이 돈 써가며 흙 길을 닦을 이유가 없던 것이다. 한강, 낙동강, 영산강 등 각종 하천과 바닷길을 이용한 수운이 오히려 더욱 효율적이었다.
현재에도 ~ 나루가 붙는 지명과 포(浦)나 진(津) 끝나는 지명이 있다면 옛날에 나루터였던 곳인 경우가 많다 과거 수운을 통해서 거쳐가던 곳이었다. 대표적으로 영등포, 제물포, 노량진 등이 있다.
이러한 요소들과 더불어, 한반도의 엄청난 연교차와 강수량 등까지 고려하면 전근대에 제대로 된 도로를 건설하고 유지하기란 처음부터 대단히 어려웠다. 육로는 도시의 도로, 팔도를 연결하는 대로, 국가의 주도로 만들어진 돌다리를 제외하곤 사람들의 순수한 발길과 노력으로 형성됐다.
하지만 조선후기 박지원과 같은 실학자들도 수레를 이용할수없어 물자 운송량의 한계와 내륙 지방의 자급자족의 문제가 생기고 이로인해 경제가 발전 할수없다고 비판한적이 있는만큼 육로 인프라의 미약성은 조선의 경제의 한계임은 명확하다.[36] 특히 각종 세금을 수운으로 운송하기때문에 길어지는 만큼 물품으로 징수하던 조선의 특성상 손실이 발생하였는데 이를 백성에게 가중해 거둘정도로 육로 인프라의 부족은 조선 발전의 큰 걸림돌이기도 하였다.

3.12. 이름은 최대한 천하고 더럽게?


조선시대의 영아사망율은 지금보다 꽤 높았다.[37] 그래서 당시 어른들은 귀신이 아이들을 저승으로 못 데려가게 한다면서 일부러 이름을 나쁘게 짓는 경우가 많았다.[38] 반대로 예쁘게 지으면 귀신이 샘나서 빨리 데려가려고 한다 믿었으므로, 어느정도 클 때까진 아명을 쓰다가 (원래 지으려 했던) 다른 이름을 지어주었다. 아이가 싫어서가 아니라 제발 죽지 말아달라며 일종의 부적처럼 아명을 부여했던 것이다. 비슷한 예시로 미미치리보지가 있다.
사실 이러한 이름짓기는 한국 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 전반에 널리 퍼진 문화다. 전근대시대까지 아이누족들의 전통적인 이름은 요즘 사람들이 보기에는 뭔가 멋이 없는 이름이 많고, 일본의 경우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신이 끔찍이 여겼던 아들 히데요리에게 '주워온 아이'라는 뜻의 히로이마루(拾丸)라는 아명을 붙였을 정도다. 오늘날에 노인들 사이에서 언년이나, 끝순이, 만득이같은 이름이 드물지 않은 건, 이런 풍습의 흔적이다. 일례로, 유명 유튜버박막례 할머니의 이름은 '막내'라는 단어를 한자음차한 것이지만, 집안에서는 주로 '박애경'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3.12.1. 여성의 이름


간혹 "여성은 이름이 없다." 라는 주장도 있는데 당연히 거짓이다. 외국인들의 기록엔 여자는 이름이 없다고 나오긴 하지만, 이것도 몰라서 그렇다. 조선에서 부모는 일종의 관직같은 개념으로서 "~댁, ~엄마" 는 자신이 부모임을 드러내는 호칭의 개념이지 이름이 없어서가 아니다. 특히 '~댁'이라는 호칭은 그 여성의 출신지를 가리키는 말로, 네덜란드에서 출신지에 따라 '판 XX'(van XX)[39]이라는 성씨를 붙인 것과 유사한 개념이다. 일례로, 조상이 네덜란드인이었던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경우는 이름의 뜻을 직역하면 '비트밭 출신 루트비히'(...)라는 뜻이다. 베토벤(Beethoven)이라는 성씨가 네덜란드어로 비트(beet)와 밭(hoven)의 합성어기 때문이다. 차이가 있다면, 네덜란드에서는 이게 남녀 불문하고 쓰인 것이라는 것과,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아예 성씨로 굳어졌다는 것이 있다.
이는 전근대 시대라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있었던 풍습인데, 서구권에서는 주로 특정인 본인이나 그 조상의 출신지나[40] 별명[41], 가족관계[42] 및 직업[43]을 가지고 이름이나 성을 지었다면, 동양권에서는 출신국[44]이나 거주지의 지리적 특징[45] 및 기타 미신적인 요소에 따라 대충 지은 아명[46]인 경우가 많았다.
언년이(모르는 아이), 막순이(못생김) 같이 나쁜 의미가 묻은 이름들도 이러한 문화적 요소가 반영된 것 뿐이다. 만약 이같은 것이 사실이었다면 역사에 남은 장만덕, 곱단, 어우동, 황진이 같은 여성의 이름들은 후대에 창작된 것인가? 당연히 아니다.
다만, 높은 귀족, 왕족층의 여성의 이름조차도 거의 남아있는 경우가 매우 드물어서 일본사서양사에 비하면 매우 적긴 하다. 이는 한국사에서 여성이 군주로 즉위하거나, 권력의 전반에 나설 일이 거의 없었던 탓이 크다. 당장 일본이나 서양의 역사에 등장하는 네임드 여성들도 죄다 특정 지역의 영주나 군주들이고[47], 일반인은 웬만해서는 이름조차 언급이 안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48].

3.13. 한옥은 허접한 흙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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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떠오르는 한옥의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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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한옥은 나무, 흙, 돌 모두를 이용한 집이다. 이는 초가집이건 한옥이건 마찬가지다. 가장 간단하고 서민적인 초가집 중 한 양식만을 떼다가 침소봉대한 것. 토벽 뿐이라 할지라도 그저 흙을 올리는 것이 아닌 나무or돌 중 하나라도 섞어서 벽의 기틀을 잡았지, 그냥 흙덩이를 쌓아 올리는 것은 금방 무너져내릴 뿐더러 취약점들이 많아서 사진과 같은 경우는 꽤나 극단적인 경우에 속한다.

3.14. 한옥은 2층건물이 없었다.


이러한 말은 절반만 맞는 사실로서 특히 "주거식 한옥"에 한하여 해당되는 내용이다. 흔히 알듯이 조선후기, 온돌의 대중화가 진행되며 비싼가격 + 구조적 불안감[49] + 존재이유의 퇴색 등 다양한 이유들을 통해 2층가옥의 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다만 주거용으로서의 2층건물은 그 역할이 퇴색된 반면, 주거 이외의 상업, 공업, 특수시설 등 다양한 용도로서 2층건물은 버젓이 존재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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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년 전 지어진 이문설렁탕 전신, '이문옥'
어느 날부터인가 "조선은 주거식 2층가옥이 없었다."는 사실이 "조선에선 2층 건물이 없었다." 로 그 개념이 확장되었고 (블로그 주소) 옆의 링크의 내용에서 볼 수 있듯 모든 한옥에서 2층이 역사왜곡(!)이라는 왜곡의 왜곡이 이루어지기도 한 것이다.
즉 모든 한옥이 2층의 여부가 없었던 것이 아닌 주거지에 한해 사라진 것을 전체로 확장시켜버린 것에서 나온 오해인 것이다.
복층건물이 많았던 시기가 있었다. 여몽전쟁전까지는 고려시대에 귀족문화를 꽃피우면서 여러 화려한 누각이 기록으로 남아있고 그림 또한 남아있다. 삼국시대부터 존재하던 건물들이 버젓이 존재해왔었고 익히 알려진 황룡사 9층 목탑 또한 남아있었다. 전쟁 후 파괴된 건축물을 복원이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기도했지만 당시 경제상황이 몽골의 대한 착취 + 전쟁 후유증이 극의 달아서 복원이 많이 힘들었다.
조선 초가 되어서나 국력을 회복하고 여러 누각이나 복층건물이 만들어졌지만 조선 자체가 귀족문화와 불교를 죄악시 여겼고 백성을 힘들고 궁핍하게 한다고 인식하여 조선 이전에 파괴된 불교 사찰건물을 복원하지않았거니와 새로운 건물을 건축한다고해도 높게쌓지않았고 화려하게 꾸미지도 않았다. 그런와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전국토가 파괴되었고 그나마 남아있던 여러 건축물이 초토화돼버렸다.
또한 경신대기근 시기 유럽과 동아시아의 각국의 산림은 고갈되고 있었다. 소빙하기로 평균온도가 낮아지자 건물을 낮게짓는 기조가 더욱 보편화되었고 여기에 온돌을 까는 것이 그 당시에는 추위를 견딜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한반도 기후가 애초에 추워서 상징적인 건물이 아닌 이상 건물을 높게지을라고 하지않았다.

3.15. 조선은 전적인 폐쇄사회?


조선에서 전적인 쇄국정책을 시행했을 때는 조선 후기, 척화비 세웠을 때에만 한정(게다가 척화비가 세워질 때의 쇄국정책은 1년도 안돼서 폐지된다). 그 이후에는 딱히 이렇다할 쇄국정책을 펼치지 않았다. 또한 해외와 무역을 많이 하지 않다보니 조선이 해외와 무역이 거의 없었거나 아예 없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원삼국시대, 통일신라 및 남북국시대, 고려시대만큼 해외와 개방적인 무역까진 아니었을 뿐[50][51], 조선 초기의 경우 쌀, 목재, 향신료 등의 자원들은 동남아시아로부터 수입한 적도 있었다. 물론 분명히 해외와의 무역이 다소 제한적이었던 것은 맞지만 무역 자체가 아예없었던 것은 아닌 셈이다. 또한 류큐 왕국과도 적지 않은 교류가 있었으며, 류큐를 통해서 일본의 정세를 알아보기도 했었다.
또한 명나라나 청나라와 무역을 하면서 간혹 명나라, 청나라의 소수민족들과도 무역을 한적도 있었다. 조선시대의 경우 한어, 만주어와 더불어 몽골어 교과서도 있었다.
무역은 아니지만 얀 야너스 벨테브레의 경우처럼 총포 기술을 개량한 서양인도 있었다. 그 외 표류를 했거나 어쩌다가 조선에 잠시 들른 해외 외국인들, 일부 선교사들과의 밀무역도 어느 정도 있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과학, 건축 등 일부분 서양의 기술도 받아들이기도 했다.
수원 화성도 중국과 일본 뿐 아니라 서양식 기술의 영향도 받아들여 만들어졌다. 그 외 조선 초기의 과학에서도 이슬람권의 과학 기술을 받아들이기도 했었다. 오히려 서구권과의 교류에 있어서 조선보다 더 유리한 측면이 있던 중국이나 일본도 쇄국정책을 시도한적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시마바라의 난과 같은 자국 내 가톨릭 신자에 대한 탄압 정책을 핑계삼아서 네덜란드를 제외한 모든 서양 국가와 단교를 선언한 에도 막부의 사례가 있다.

3.16. 조선의 문화만이 한국의 전통문화다?


직접적인 오해라기 보다는 은연중에 깔린 형태. 하지만 이게 의외로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조선은 현대 한국과 시기적으로 가장 가까운 시대이고, 그 문화 유산도 양적으로 가장 많이 남아 있다.
이 때문에 마치 조선, 그 중에서도 조선 후기~일제강점기 까지의 문화만이 한국의 전통문화라는 편견이 생각보다 강하다. 한복만 보더라도 조선 후기의 것이 아닌 삼국 시대나 고려시대의 양식, 혹은 새로운 형태의 현대식 한복을 한복이라고 인정하지 않거나 아예 '''왜색'''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의 전통문화를 조선시대라고 오해하는 이유는 전쟁으로인한 문명 초토화를 두번이나 겪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여몽전쟁,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그 이전부터 있던 문화재들을 포함하여 기술이나 예술 등 문명 대부분 파괴되거나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당장 역사서만 봐도 삼국시대 역사서 중 정말 단 한개도 현전하는 것이 없고[52] 문화재 조차도 대부분 현대에와서 발굴을 통해서만 전해진다.
즉, 한국의 역사가 반만년이라는 유구하다는 인식과는 다르게 실질적으로는 기록만 내려오는 것이지 고조선부터 삼국시대까지는 온전히 내려오는 문화재가 전무하다시피해서 발굴을 통해서 출토되는 유물에 의해서만 확인이 가능할 정도로 자료가 적다. 그렇기 때문에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문화만이 온전히 남게되고 그마저도 고려시대는 조선시대에 비해서도 턱없이 부족한 편이다.
[1] 이마저도 전형적인 궁중회화라거나, 의의나 특성, 상징을 설명할 뿐 실질적인 형태와 미적감각에 대한 서술은 거의 없다시피하여 꽤 허술한 편이다. 작품성 있는 사진자료를 찾기 위해선 시간을 어느 정도 들여야 할 만큼 알맹이 있는 것들은 골목 맛집마냥 숨어있는게 현실이다.[2] 사실 명청시대의 황제권이 다른 시대와 다른 지역의 국가와 비교할 때 지나칠만큼 강력했던 특수한 경우이다.[3] 임진왜란 당시 한 양반이 친구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중, 새벽 2시 쯤에 곡식을 빌리려고 민가를 찾아갔더니, 그집 주인장이 하는 말이 "이른 아침부터 무슨 소란이요?"였다. 이미 옛부터 이러한 시간관념이 있던 것[4] 이는 당시 군인들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 일단 농사를 지은 후에 본업을 하러 나가는 경우가 대다수였다.[5] 단, 역모 사건 한정에서는 가혹한 형벌이 자주 등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형벌도 중근세 유럽이나 일본, 중국의 기록만 봐도 조선보다 가혹하다 판단할 만한 형벌들이 자주 등장한다.[6] 일본 제국은 메이지 유신이 된 후 8 년이 지나서야(...) 고문을 금지시켰지만 일제강점기 조선인은 물론이고 일본인들조차 고문의 대상이 되는 일이 존재했다.#[7] 사실 신문고 문서에도 있듯 신문고를 치는 데에는 매우 까다로운 조건이 뒤따랐지만 백성의 소리를 귀담아 들으려는 의지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조선의 군주들이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을 듣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도 심심찮게 나온다. 가장 좋은 예로 격쟁이 있다.[8] 심지어 농민들의 형편에 따라 지방관들을 처벌하는 경우도 있었다. 일본에서도 평민들이 민란을 일으키면 영주의 토지를 몰수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조선에 비하면 규칙화가 덜 된 편이었다.[9] 다만 이러한 시스템이나 이념도 전근대적인 시대 환경에서 형성되고 운영되는 것이기 때문에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미비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특정 국가나 민족을 막론하고 전근대적인 시대 환경 자체를 이해하기 힘들다.[10] 전근대에 피지배층을 위한 시스템을 시행한것 자체가 잘시행되든 안되든 세계사적으로 봐도 특이한 사항이다.[11] 원래 유교적 이상에 따르면 윗사람은 윗사람답게 인덕을 베풀고 아랫사람은 아랫사람답게 순종하되 윗사람이 잘못하면 복종하지 말고 저항해야 한다는 것이 유교적인 이상체제다. 다만 이상이 현실에도 적용되었다고 보긴 힘들다.[12] 이와 비슷하게 일본에선 목욕을 할때 가족 구성원들이 각자의 순서에 맞추어서 씻는 목욕문화가 있었다.[13] 사족이지만 유럽 또한 중세 초·중기 때만 해도 남녀 관계는 아니더라도 연회때 먹다 남은 것을 자리 뒤쪽에 앉아 있던 하인들에게 던져주었다.[14] 이런 문화가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곳이 제주도나 어항주변 도시이다. 커다란 양푼에 밥을 퍼 먼저 일(뱃일)을 나가야하는 남자들이 서둘러 먹고 나가면 여성들(신분의 차이가 아니라 어차피 뒷치닥거리를 해야하니까)이 남은 밥으로 식사를 하고 들(野)일을 나가는 것.[15] 이는 동서양을 통틀어 귀족의 개념이 있는 나라라면 보편적인 현상이었다.[16] 사대부 남자들은 한문을 사용했지만 여성들은 언문을 사용했었다. 증거로 당시 여성이 쓴 언문편지나 문학작품들이 확인된다. 또한 한글소설의 주 소비층이 여성이었단 것을 생각하면 여성들도 일단 한문은 아니더라도 문자를 배웠기에 가능한 일이다.[17] 대표적으로 상업에 능통했던 "장만덕", 사당패의 "바우덕이" 같은 인물들이 있다. 19세기땐 신재효에게 여성들이 판소리를 배우기도 했었고, 풍속화를 보면 남성과 함께 돗자리, 망건 등을 만들며 수공업에 종사하는 여성들도 더러 보인다.[18] 링크 참조.[19] 고려때와 비교해서 그 권리가 동일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20] 심지어 인수대비조선시대 인물로는 보기 드물게도 산스크리트어에 능통하기도 했다.[21] 어려서는 아버지에게, 결혼해서는 남편에게, 늙어서는 아들에게 충성하고 받든다는 사상.[22] 부모에게 받은 몸을 훼손하는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사상.[(노출)평민여성] [image][23] 민간에서는 기본이고 판소리, 탈춤 등 옛날 대사속엔 생각보다 수위높은 드립들이 많이 들어있었다. 이후에 양반층으로 넘어가면서 어느정도 순화되는 모습을 보이지만, 민간에선 여전히 남녀노소 흔한 유희성 발언이었다.[24] 정말 양반과 동일한 수준의 성리학을 따랐었다면, 철저히 몸을 감추어야하고, 방에 같혀 남성을 멀리하며, 지조와 절개를 지켜야하는 사람들이. 옷을 입은듯 만듯 밖에 돌아다니고,[(노출)평민여성] 음담패설과 성관계에 있어 개방적이며,[23] 연애, 외출, 축제 등 남녀간의 접촉이 흔하게 일어났던 당시 백성들의 삶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25] 이와 관련된 이야기중에, 과거 소련에선 조선의 민중들을 보곤 "이 곳은 이미 사회주의가 이루어져있는 곳이다." 라며 칭찬했다는 얘기가 있다. [26] 참고로 율곡 이이의 집안의 사례는 다른 면에서도 조선 시대 여성들의 지위가 생각보다 높았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 존재한다. 이원수가 죽고 나서, 신사임당이 친정으로부터 물려받았던 각종 토지나 금은보화 및 노비들과 같은 재산이 잔뜩 남아있었는데, 이를 이이가 자기 누나를 포함해서 형제자매들과 함께 공평하게 나눠가진 것이 그 예다. 이를 입증하는 당대의 행정 문서가 현존하고 있으니, 이것도 조선시대 여성들의 지위가 그리 낮은 편이 아님을 알 수 있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참고로 동시대의 영국에서는 극단적인 남아선호사상이 존재하여 모든 재산이나 작위가 장남에게만 독점적으로 상속되었다.[27] 기록에는 사대부들이 '여성은 집에서 길쌈과 손님맞이만 잘 하면 된다' '요즘 백성들 사이에서 남자가 여자에게 눌리고 살아가는 폐단이 자주 일어난다' '가장으로서 집안의 기둥이 되어 아내를 다스려야 한다' 는 발언이 많았던 것으로 보아 확실히 가부장제의 영향이 짙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28]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지위가 높은만큼 그 권위를 지키려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흔하다. 더욱이 성씨의 주체가 되는 남성이 그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았으며 그 과정에서 여러 폐단이 일어나는 것은 생각보다 자연스러운 세계사적인 역사의 흐름이었다.[29] 19세기 철종의 경우 천민시절 "양순이"라는 처자와 결혼까지 생각할 정도로 사랑했었다는 사실로 보아, 평민들에게있어 연애결혼은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30] 고려양이라는게 몽골족들 사이에서 인기를 끄니까 한족들이 그냥 따라한 거지, 그게 한반도에서 유래한 문화라는 건 웬만한 서민들이 알 리는 없었다.[31] 대표적으로 우리가 새해마다 먹는 떡국, 가래떡이 있다. 온통 "흰색"인 신성한 음식을 먹음으로서 새로운 시기의 안녕을 빌던 것이 현재까지 유지되는 것. 결국 흰색이 신성하다는 사상이 반영된 결과이다.[32] 예나 지금이나 하얀색 염료가 제일 비싼 편이다.[33] 몇몇 외국인들의 견문록에서 한복을 허접하다, 끔찍하다 등 폄하하는 평가들도 확인되는데, 속옷을 장식삼아 노출하거나 아예 벗고다니던 19세기 양식의 한복은 그 당시 서양인들의 입장에선 충분히 거슬렸을 것이고 아예 가슴을 가려버리는 치마를 전수하던것은 어찌보면 이해가 되는 부분이라 볼 수 있다.[34] 물론 수레를 끌거나 사람이 타고갈 말이 부족한것도 있었다. 사실 조선 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도 말이 부족했기에 조선과 비슷하게 등짐이나 인력거를 이용하는 일이 많았다.[35] 나라에서 거둔 세금을 한양으로 수송하는 조운 업무를 조운선이라는 배로 수행했던 것이 그 예다.[36] 다만 현재 사학계서는 실학자들에 대해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조선의 현실을 지나치게 과장하여 깎아내렸다고도 평하기에 실학자들의 의견 역시 조심스럽게 봐야 할 것이다.[37] 당시 영조의 자녀 14명 중 5명이 4살이 되기 전에 사망했으므로 대략 60~50%, 왕실도 이럴진대 조선시대 평균 영아 생존률은 더 낮았을 것이다.[38] 섭섭이, 섭순이, 개아지(개새끼), 저치리(바보), 개/말/소똥이, 구더기 등[39] XX 지역 출신이라는 뜻이다.[40]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최후의 황태자였던 오토 폰 합스부르크(독일어로 '합스부르크의 오토'라는 뜻)가 대표적이다.[41] 미국의 국민적 영웅들 중 한명인 타슝카 위트코(수족 언어로 '성난 말'이라는 뜻)이 대표적이다.[42] 펠릭스 멘델스존(독일어로 '멘델스의 아들 펠릭스'라는 뜻이다.)이 대표적이다.[43] 미하엘 슈마허(독일어로 '신발제작자 미하엘'이라는 뜻이다.)이 대표적이다.[44] 서나라 유민의 후손이 칭한 서씨가 대표적이다.[45] 일본의 전 수상인 다나카 가쿠에이(일본어로 '밭 한가운데 사는 가쿠에이'라는 뜻이다.)가 대표적이다.[46] 전술한 박막례 할머니가 대표적이다.[47] 이이 나오토라나, 카테리나 스포르차가 대표적이다.[48] 기독교성인이거나, 국가적인 영웅이 아니면 서양사에도 이름이 알려진 여성은 거의 전무한 편이다.[49] 온돌은 목조건축물 특성상 다층 건물을 짓기가 어려운데, 그 어려운 난이도를 온돌을 깔아 지반이 약해짐으로서 더 높여버리니 비용이 엄청나게 뛸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50] 게다가 가야 등 일부 연맹국가들과 삼국시대부터 고려까지는 동아시아에서도 수많은 나라들과 민족들이 있었다보니 그래서 더 많은 나라들과 교류가 될 수 밖에 없었다.[51] 한국이 조선시대였을 무렵, 일부 유럽 동남부 지역과 서북아시아 및 중동, 중앙아시아 남부, 남아시아의 경우는 오히려 분열기에 가깝다보니 자신들끼리 싸우느라 바빴고,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거리적으로도 멀다보니 많이 무역을 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삼국시대, 가야, 발해, 고려의 경우 그 당시 중동, 남아시아, 일부 남유럽은 분열기가 아니었거나 동로마 제국처럼 한쪽 세력이 매우 강해 분단되었어도 심하게 분리되진 않아서 심각한 상황의 혼란은 없었을 무렵이었다.[52] 다행히도 삼국유사삼국사기는 삼국의 역사서를 토대로 만들어졌다. 대표적으로 고구려의 신집의 내용을 상당히 참고했다고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