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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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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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제7대 주석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제6대 주석
시진핑
习近平 / 習近平 | Xi Jinping
'''
'''이름'''
간체자: 习近平 / 정체자:
(병음: Xí Jìnpíng)
한국 한자음: 습근평[1]
'''출생'''
1953년 6월 15일 (70세)
[image] 중화인민공화국 베이핑시
(現 중국 베이징시)[2]
'''국적'''
[image] 중화인민공화국
'''신체'''
180cm→176cm[3], 91kg
'''가족'''
부친: 시중쉰(习仲勋)[4]
모친: 치신(齐心)[5]
전처: 커링링(柯玲玲) (이혼) [6]
배우자: 펑리위안(彭丽媛)[7]
딸: 시밍쩌(习明泽)[8]
'''학력'''
베이징101중등학교[9]
칭화대학 (화학공학과 / 학사)
칭화대학 대학원 (법학과 / 박사)
'''종교'''
무종교 (무신론)
'''정당'''

[ 역임한 지위 ]
{{{#!wiki style="margin: -11px; margin-top: -5px; margin-bottom: -5px"
'''중화인민공화국 제7대 주석'''
'''임기'''
2013년 3월 14일 - 현직
'''중국 공산당 제9대 중앙위원회 총서기'''
'''임기'''
2012년 11월 15일 - 현직
'''중국 공산당 제6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임기'''
2012년 11월 15일 - 현직
'''중화인민공화국 제9대 부주석'''
'''임기'''
2008년 3월 15일 - 2013년 3월 14일
}}}
1. 개요
2. 정치력 평가
3. 생애
4. 집권
8. 저서
9. 필모그래피
10. 국제 여론
10.1. 2020년
12. 어록
13. 기타

[clearfix]

1. 개요


[image]
2018년 3월 17일 제13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헌법 선서를 하는 시진핑
중공정치인, 독재자.[10] 2013년 3월 후진타오의 뒤를 이어 중국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제6대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군 통수권자) 겸 제5대 중국 공산당 총서기이다.
역대 중화인민공화국 지도자들중 최초로 건국 이후에 태어난 인물이기도하다.
시진핑은 마오쩌둥, 덩샤오핑[11] 이후 25년 만에 '''중국에서 1인 독재를 하고 있는 인물'''이다. 장쩌민후진타오중국 공산당이 1당 독재 체제여서 독재자가 됐다는 변명이라도 해볼 수 있지만,[12][13] 시진핑은 중국 공산당의 집단지도체제를 뒤엎고 1인 독재체제를 구축했기에 진짜배기 독재자가 맞다.

2. 정치력 평가


시진핑이 주석 등극 이전까지 대권 후보로는 눈에 띄지 않는 인물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원래 성격 자체도 굉장히 조용한 인물이다. 후진타오 시대에 태자당의 선두주자였던 보시라이가 스스로 무리수를 범하다가 몰락하지 않았다면 시진핑은 절대 대권 주자로 발돋움할 수 없었다는 평이 있을 정도다.
시진핑은 푸젠성 위 부서기 출신으로 중국 공산당 중앙 후보 위원 150명 중에서 151등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시진핑이 특채 위원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관례상 150명만 뽑는 중앙위 후보 위원 자리에 당 고위 간부들이 시진핑을 억지로 밀어넣어서 151위였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공산당 원로였던 아버지 시중쉰이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음은 불문가지다.
애초에 태자당 출신에 당 고위 간부들의 배후 지원까지 받는 중앙 후보 위원이면 승승장구하는 '''세습 엘리트'''의 전형이지 핸디캡을 논할 계제가 아니다.[14]
다만, 잘해봐야 말석으로나 정치국 상무위원에 진입할 수 있었던 사람이 대권을 잡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원래 금수저인 시진핑이 당 고위 간부에 진입하는 것은 쉬웠어도, 당 최고위직은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에 본인의 능력뿐만 아니라 공산당 내부의 살벌한 경쟁을 뚫어야 하며, 이것을 뚫고 대권을 장악한 것은 아버지 덕이 아니라 혈통 외의 시대적 운이 따라줬고 본인이 이루어낸 것이다. 물론 보시라이의 자충수와 파벌 간 타협이 필요한 시대적 상황이라는 운이 따랐음은 부인하기 어렵지만. 한마디로 운도 좋았지만 그 운이 다가왔을 때 놓치지 않고 거머쥘만큼 능력도 있긴 있었다는 것이다.
총서기가 된 이후 절대 권력자가 된 것에는 시진핑의 정치력이 큰 힘을 발휘했다. 총서기가 된 2012년에는 사람들은 그가 강력한 지도자가 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공청단이나 상하이방 계파 소속이 아니라서 2012년 당시에는 자기 세력이 없었고 온화한 이미지를 내세우며 몸을 낮춰 적을 만들지 않아 당내 계파들의 타협으로 총서기가 되었기 때문이다.[15] 공산당 서열 2위이자 국무원의 총리인 리커창은 사실 성격이 호탕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시진핑은 내성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무색무취하고 안정지향적으로 '''보였다.''' 때문에 계파의 타협을 통해 총서기가 된 시진핑은 집단지도체제의 허수아비가 될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전임자였던 후진타오도 유약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덩샤오핑이 죽기 전에 장쩌민의 후계자로 직접 지목했다는 정통성이 있었고 공청단이라는 지지 세력이 있었던 반면 그런 스토리와 뒷배경이 없었던 시진핑은 후진타오보다도 약한 지도자가 될 것으로 보였다.
실제로 2011년~2012년 당시 기사들을 보면 시진핑은 '조심스럽다', '튀지 않는다', '정치적으로 비난을 받을 수 있는 모험을 하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았고, 위키리크스에서는 중국 공산당 내부자들로부터 지도력에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총서기 취임 이후에도 반부패 운동 초기에는 '권위를 세우기 위한 일시적인 백일 엄포로 고위직은 무사할 것'이라는 과소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렇게 자기 성격까지 숨기며 몸을 낮추던 '''시진핑은 총서기 취임 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만나 "내 생각에 나와 당신은 성격이 닮았다."'''[16] 말하며 절대 권력에 대한 야망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호랑이든 파리든 모조리 때려잡겠다.'는 명분으로 대대적인 반부패 정책을 펴기 시작해 자신의 정적들을 차례차례 숙청해 나가며 반대 세력을 일소했다. 물론 자기 밑에 있던 지지 세력들이 저지르는 부패 행위는 봐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2018년 3월 11일에는 개헌을 통해 국가주석직은 세 번 이상 맡을 수 없다는 조항을 삭제하여 종신 집권으로 가는 문까지 열어버렸다.[17]

3. 생애


[image]
5살 때 찍은 사진. 좌측 인물.
1953년 베이징에서 혁명 원로로 부총리였던 시중쉰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원래 섬서성의 토착 공산주의자로 류즈단(劉志丹, 1903.10.4 - 1936.4.14)[18]과 함께 해방구를 건설했다. 이후 중국 최남단에 있던 장시 소비에트가 국민당군이 철저히 준비하여 추진한 제5차 초공작전으로 삽시간에 붕괴하면서 공산당 지도부가 대장정을 거쳐 섬서성으로 피신해 오자, 시중쉰은 혁명의 새로운 근거지를 건설했다는 공로로 일약 당고위직에 진입한다.
시중쉰은 동료 공산당원 하오밍주(郝明珠)와 결혼했다가 1남 2녀를 낳았다. 1943년 이혼하고 1944년 치심(齐心)과 재혼했다. 시중쉰은 치신과 2남 2녀를 두는데, 시진핑은 그 중 셋째이다. 그러니까 총 3남 4녀 중에서 6번째 자녀이다.
1962년 소설 류즈단 필화 사건[19]에서 시중쉰이 펑더화이[20]로 몰려서 반당(反黨) 집단의 낙인이 찍혀 오지로 귀양갔고, 당시 16살이었던 시진핑도 아버지를 따라 산시 성 시골로 하방(추방)되어 불행한 시절을 보냈다.
중국 공산당에서는 이 당시 시진핑이 토굴에서 7년간 힘겹게 살았다고 한다. 어렵게 산 것은 사실이다. 아버지가 실각해서 평민이 되었는 데다가, 1966년부터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아버지가 마오에게 대약진운동에 대해 항의하다가 실각해서 대역죄인으로 찍힌 펑더화이의 부하에다가 반동을 미화한 소설을 펴낸 주범으로 몰렸기 때문에, 가족 전체가 박해를 받았다. 이때, 아버지가 전처와 낳은 이복 맏누나 시허핑(习和平)은 이때 '반동의 딸'로 홍위병에게 두들겨 맞다가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 시진핑도 이 당시 상당히 힘든 생활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image]
1973년 당시. 왼쪽에서 2번째 인물
소싯적부터 리더십이 있었는지 하방 당한 곳에서 노동자들을 지도하여 최고의 생산량을 올렸다고 한다.[21] 아버지가 반동으로 찍혔기 때문에 입당 신청을 했으나, 여러 번 퇴짜를 맞다가 문화대혁명이 완화된 1973년에야 겨우 입당했다. 이어 베이징으로 올라와 1975년 칭화대학의 화공과에 입학했다. 마오쩌둥이 사망한 후 화궈펑이 정권을 잡고 중앙군사위 주석, 당 총서기, 국무원 총리 세자리를 모두 장악했지만 화궈펑은 리더십이 모자랐기 때문에 결국 1979년 부총리였던 덩샤오핑에 의해 실각했고, 실권은 부총리이자 인민정치협상위원회(中国人民政治协商会议全国委员会) 주석이었던 덩샤오핑이 장악했다. 덩샤오핑은 부총리던 1978년 1962년 이래 16년간 죽 야인으로 지냈던 시중쉰을 정계로 복귀시켰고, 시중쉰은 1970년대 말부터 당고위직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즈음 대학을 졸업하게된 시진핑도 당당히 태자당에 진입하게 되었다.
대학 졸업 3년 후인 1982년부터 허베이성의 정딩현의 당부서기를 맡는 것을 시작으로 출세가도를 달리게 되었다. 이후 허베이성을 거쳤다가 1990년대부터는 폭발적인 경제성장을 보이는 남부로 전직했다. 그리하여 푸젠 성, 저장 성 등 동남부 지방 정부에서 지냈는데, 2007년 상하이시 당위서기를 지내면서 장쩌민주룽지의 파벌인 상하이방과도 관계를 맺게 되어 태자당과 상하이방 양쪽의 후원을 받는 거물로 성장했다. 2008년에는 국가 부주석 직에 올랐다. 하지만 이때까지 보시라이와 리커창에 비해 외국에 덜 알려졌으며 한국에서도 그가 중국의 주석에 오를 것으로 미리 예측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는 부주석을 지냈던 쩡칭훙 외에도 장쩌민과 후진타오의 지지와 후원 모두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부주석 겸 정협의장으로 있다가 2010년에 당 중앙 군사위 부주석 직에 오르면서 후진타오를 이을 차기 지도자로 공인되었다.
영국 주재 대사의 딸이었던 첫 아내와는 성격 차이로 이혼했고, 재혼한 현 부인 펑리위안중국 인민해방군 예술단 소속의 가수[22]로 중국의 국민 가수로 불리는 사람인데, 펑리위안의 인기도 시진핑의 권력 상승에 도움이 되었다.

4. 집권




[23]
시진핑의 집권은 이전 주석들인 장쩌민과 후진타오의 미묘한 권력 갈등에서 비롯되었다.
지난 날 상하이방장쩌민공청단후진타오에게 정권을 양도한 것은 본인이 원해서 양도해 준 것이 아니었다. 덩샤오핑이 생전에 장쩌민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되 후진타오를 장쩌민의 후계자로 하는 조건으로 정권을 인수인계해줬기 때문이었다.
이에 장쩌민은 정권 자체는 후진타오에게 인계해주었다. 그런데 중국 공산당 상무위원들은 대부분 상하이방으로 채우는 꼼수를 썼고 결국, 후진타오를 반쪽짜리 주석으로 만들어 버리는 데 성공했다. 4세대 지도부가 출범할때 이 4세대 지도부의 9명중 6명이 전부 상하이방이라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2006년 장쩌민이 차기 주석으로 밀던 '상하이방의 황태자' 천량위가 비리 문제로 낙마해 버리는 사태가 벌어진다. 말하자면 후진타오의 공청단이 일격을 가한 것이다. 천량위의 비리 수준은 장쩌민조차도 실드를 쳐주지 못할 정도였기에 그로서도 이 숙청을 막기는 불가항력이었다.
후진타오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다음해 2007년에 17차 공산당 대회에서 기회를 놓칠새라 자기가 후계자로 밀던 공청단의 리커창을 내세운 것이다. 그러나 리커창을 주석으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장쩌민과 상하이방으로서는 리커창의 집권만은 막아야 했기 때문. 결국 상하이방도, 공청단도 아닌 태자당의 시진핑이 대안으로 올라오고, 리커창은 주석이 되지 못하고 총리로 만족해야 했다.[24]
시진핑의 빠른 부상엔 후진타오의 협조도 한몫 했다. 후진타오 주석은 주석직에는 2003년에 올랐으나, 장쩌민이 권력을 내놓지 않겠다고 중앙 군사 위원회 주석 자리를 계속 유지하는 바람에 5년 동안 반쪽짜리 권력만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시진핑은 2013년 중국 공산당 제18회 당 대회 때 후진타오로부터 당 총서기와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주석 자리를 동시에 이양받았고, 2013년 3월 후진타오의 국가 주석 임기가 끝나면서 전국인민대표대회를 통해 국가 주석 직도 승계하였다. 따라서 공식적으로는 2013년 3월 14일부터 다른 일이 없는 한 2018년 3월 14일의 연임을 거쳐서 2023년 3월 14일까지 중국과 중국 공산당 전체를 이끌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조용하고 관리형 주석으로 보였던 시진핑은 서서히 본색을 드러내며 10년 임기는 물론이고 종신임기까지 바라보는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는 후술한다.

5. 임기 중 행보




6. 비판과 논란




7.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8. 저서



9. 필모그래피



10. 국제 여론



10.1. 2020년


[image]
2020년 퓨처리서치센터에서 세계 14개국 국민들에 대해 시진핑에 대한 신뢰 여부를 질문한 결과, '''불신(No Confidence)'''한다는 응답이 전 세계에서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출처
이번 조사에서 시진핑에 대해 가장 강한 불신을 보인 국민은 일본인들이며, '''전체 응답자의 84%'''가 시진핑을 불신한다고 답했다. 한국인들 역시 시진핑에 대한 불신 강도가 '''83%'''에 달해 일본 다음으로 시진핑을 싫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인들은 시진핑에 대한 불신 강도가 2019년 50%에서 2020년 77%로 '''1년 사이에 27%p나 급등'''했다.
[image]
시진핑에 대한 각국의 여론 추이 변화. 링크 한국은 유일하게 시진핑에 대한 호감도가 매우 높았다가('''비호감 29%''')[25] 극혐('''비호감 83%''')으로 바뀐 나라다.[26] 호주는 우호적이긴 했지만 비호감도도 37%에 달하는 등 무작정 시진핑에 대해 호감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호주의 경우 차이나 머니 유치를 위해 호주의 각종 섬과 항만을 2013년부터 중국 국영기업들에게 99년차 계약으로 팔아치우고 있었고 이게 대중들에게 문제시되기 시작한 건 2018년 이후이다.

11. 별명




12. 어록


물론 이런소리들이 자신의 전문분야나 경험에서(강택민은 전기쪽 공돌이고 호금도는 기계쪽 공돌이 출신이다.) 이런식으로 해야 성공한다는 구체적 솔루션이 아닌. 펀쿨섹좌나 할만한 '''만화에서 나올법한 허세를 부리는 대사'''들인지라 안 하느니만 못하다.

'''각급 지도간부들은 모두 자신을 엄격히 단속하고 권력을 엄격히 사용하며 자신을 엄격히 요구하고 또한 일함에 있어 실속이 있고 착실하게 창업하며 성실해야 한다.'''[27]

2014년 3월 9일 안휘대표단 심의 참가 때.

'''신형의 정부와 기업가 관계를 총화하면 바로 ‘친(親)’과 ‘청(清)’ 두 글자이다.'''

2016년 3월 4일 중국민주건국회, 공상업연합회 위원 방문 때.

'''자신의 눈을 아끼듯이 민족단결을 아끼고 자신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듯이 민족단결을 소중히 여기며 석류알처럼 굳게 뭉쳐야 한다.'''[28]

2017년 3월 10일 신강대표단 심의 참가 때.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에서 우리가 승리했다.'''

2017년 8월 1일 인민해방군 건군 90주년을 맞아 국영 매체로 생중계된 베이징 인민대회당 기념식 연설에서.


13. 기타


  • 축빠로 유명하다. 아르헨티나를 방문했을 때는 메시유니폼까지 선물받고 좋아할 정도. # 2011년 당시 민주당 대표이던 손학규와 만남 당시 "중국이 월드컵에 나가고, 월드컵을 유치하고, 월드컵에서 우승하는 것이 내 3가지 소원"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의 영향력 때문인지 중국의 고등학교 입학 시험에서 체육 과목 구기 테스트 종목에 축구가 공식적으로 포함되었다. # 그래서 그런지 AC 밀란을 인수한다는 기사가 떴다. 그러나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잇따른 삽질현재는 중국 국가 대표팀에 대한 기대감을 어느 정도 접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신 중국 슈퍼 리그를 무지막지하게 키우자는 걸로 방향 전환을 했다고 한다. 축구굴기라 해서 중국 축구 산업을 급속도로 성장시키고 있다. 전국에 축구 전문 학교 2만 개 설립을 하고 있는데, 2만 개면 대한민국 전국에 있는 학교 수보다 많다. 시진핑의 음성을 변조해 시진핑의 축구 사랑과 독재를 한데엮어 패러디한 인간관악기 영상도 있다. 간체자로 되어있고 중화인민공화국 내부의 정치사정에 해박한걸 봐선 시진핑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해외거주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이 올린것으로 추정된다.
  • 젊은 시절 복싱을 배웠었다고 하며, 자세를 취한 적도 있다. # 이와 별개로 기사가 쓰였을 당시에는(2014년) 국내에서 시진핑의 이미지가 나쁘지 않은편이라 그런지 시진핑을 좋게보는 댓글들이 꽤 된다.
  • 바둑을 즐긴다고 하며, 이창호의 팬이기도 하다. 2014년 방한 당시 청와대 만찬에서 이창호의 얼굴을 보고 매우 기뻐하며 악수하기도 했다. # 청와대에서 국가 간 선물 교환 시에도 한국에선 바둑알을 선물했다.
  • 2014년 7월 서울대학교 강연에서 서울대에 책 기증 의사를 밝혔고, 약 1년 후 서울대 도서관에 책, 정기 간행물, 영상물 약 1만 점을 기증하여 약속을 지켰다. #
  • 키가 180cm로 아시아의 정치인 중에서는 상당한 장신에 속한다. 보통 세계적으로 지도자의 경우 거구를 좋아하는 경향이 큰데, 시진핑의 경우 큰 체구로 서양 정치인들에게도 꿀리지 않는 수준이다. 비단 키가 큰것 뿐만이 아닌 몸무게도 많이 나가는지라 덩치가 크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서 175cm로 추정되지만 같은 독재자들 중에서도 니콜라스 마두로에 비견되는 풍채[29]를 자랑한다.
  • 베이징(北京, 북경)이 베이핑(北平, 북평)이던 시절 베이핑 근처에서 태어났다고 이름이 近平(근평)이다. 동생은 가족들이 베이징과 멀리 있을 때 태어나 이름이 위엔핑(遠平, 원평).
  • 인도의 한 뉴스 앵커가 Xi Jinping의 Xi를 로마 숫자 11로 착각해 Eleven Jinping으로 읽었다가 해고된 적이 있다. BBC, WSJ, 연합뉴스
  •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나폴레옹이 중국한테 했던 "중국은 잠자는 사자다. 잠에서 깨면 세계를 진동시킬 것."이라는 말을 인용해서 "중국이라는 사자는 이미 깨어났다. 이 사자는 평화적이고 친절한 문명 사자다."라고 말했었다. #
  • 중국산 스마트폰 골수 마니아라고 하며 현재 사용하는 스마트폰은 ZTE Axon 시리즈 스마트폰 중 하나인 ZTE Axon 이라고 한다.
  • 시진핑 집권 이후의 중국에는 유독 호랑이를 때려잡는 시진핑 그림이 많다. 해당 그림에 나오는 호랑이들은 부패한 고위 관료들을 빗댄 것이다.
  • 중국 대학생 네티즌들이 뽑은 카리스마형 훈남(...)이라고 한다. 참고로 미국 순위 선정 매체 ‘하티스트 헤즈 오브 스테이트’(Hottest Heads of State)[30]에서는 196위를 했다. 즉, 전세계의 지도자들 중에서 외모가 최하위권. 참고로 꼴찌는 북한의 김씨.
  • 김용옥차이나는 도올 방송에서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과 더불어 매우 칭찬했다. 서방이나 국내 언론에서 시진핑의 부패 척결이 권력 강화의 수단이기만 하다는 일각의 견해를 부정하고, 시중쉰이 어린 나이에 큰 공산주의 조직을 세웠던 것이나 천안문 사태후야오방을 지지했던 것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진핑이 장기집권 의도를 드러내면서 독재와 우상화를 본격화하고 나선 2018년 시점에는 방송에서 스스로 자신이 "똥이 됐다." 하고 탄식하며 비판파로 돌아섰다.
  • 대기원시보에서는 시진핑을 중국 공산당의 독재를 종식시키고 중국의 민주화를 이룩해낼 중화 민족의 메시아로 보고 있는듯하다. (현재 기사 링크 삭제됨)
  • 청년들에게 "밤을 새면 건강에 나쁘다." 조언하며, 자신은 아무리 늦어도 밤 12시 이후에는 취침한다고 하였다. 네이버 뉴스
  • 전원책 변호사에 따르면 시진핑은 어떤 경우라도 자기가 결정하는 자리가 아닌 이상 말을 최대한 아낀다고 한다. 아마 과거에 있었던 아버지 시중쉰이 숙청당하면서 온갖 고초를 경험해서 말 한마디가 나중에 발목잡힐 수 있다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31]
  • 2014년 하버드 대학교 케네디 스쿨 애시 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시진핑의 지지율은 내치(內治) 94.8% 외치(外治) 93.8%라고 조사되었다고 한다.[32]
  • 사드 배치 논란 이전까지는 한국에서 호감도가 의외로 높았던 인물. 2013년에는 호감 40% 비호감 20%로 호감이 상대적으로 많았고 박근혜 대통령의 전승절 참가당시에는 호감도가 55.1%로 오르기까지 했다. 사드 논란 이후에는 혐오대상이되어 호감도가 20%대로 떨어졌으나, 그래도 트럼프, 푸틴, 아베 등 다른 나라의 정치인들보다는 상대적으로 호감도가 괜찮았다. 하지만 당선 이후에도 상당한 기간 부정적인 인식이 많았던 트럼프는 방한 이후 한국에서 트럼프의 호감도가 괜찮아졌고 시진핑이 장기 집권에 성공하면서 호감도가 또 내려가는 중이다. 결국 트럼프에게 역전당했다. 지금은 아예 혐중감정으로 인해 트럼프가 상당한 지지를 얻게 된 상황.
  • 중국의 한 초등학생이 "시진핑 할아버지 살 빼세요."라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 블라디미르 푸틴 정도로 뺐으면 좋겠다던 이 편지를 보도한 기사들은 돌연 인터넷에서 삭제됐다고 전해진다.
  • 머리숱이 엄청나다. 아버지 시중쉰도 머리숱이 엄청난데 유전인듯 하다. 그동안 흰머리를 감추다가 공식석상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
  • 시진핑 국가주석의 승인을 받은 감옥은 어떤 모습일까? 시진핑(習近平)식 ‘스마트 교도소’: 비밀 문서 공개되다
  • 펑리위안도민준을 언급하며 젊은 시절 시진핑이 김수현과 닮았다고 이야기 한 바 있다.
  • 시진핑의 작은 신(新)홍위병.
  • 미얀마를 방문하는 글 시진핑의 페이스북 자동번역 결과 '똥구덩이'로 번역되는 소동이 있었다.#
  • 중화민국에 대해 엄청난 강경책을 펼치는 시진핑이지만 웃기게도 중화민국의 군통령이자 중화권 최고의 여가수였던 등려군의 팬이다. 어느 정도냐면 등려군의 노래가 담긴 테이프의 필름이 다 늘어질 정도로 들었다고. 그래서 혹자는 등려군이 살아있었다면 시진핑의 초청으로 중국에 방문하지 않았을까 라고 한다.
  • 2017년 8월 1일 "한국 전쟁 중국이 승리했다"라고 발언하였다.
  • 중국 인민해방군2020년 2월 28일 갑자기 대량의 방탄복 140만 개를 주문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대만을 상정한 침략일 가능성이 있다고 학자들은 얘기하고 있다. #
  • 대만등 중국 본토를 제외한 중화권에서 인간 관악기 소재로 애용되고 있는 중이다. 그 예시로 중화권 유튜버 乳透社·小反旗등이 있다. 위에 있는 축구발언 영상의 제작자다.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눈치를 보는 짤도 있다. 자신의 홈그라운드인 자금성에 초빙한 도널드 트럼프와 회견을 하게 되었는데 이 때가 2017년 11월이라 날씨가 꽤 쌀쌀했다. 이 때 시진핑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었는데 이 상황에서 트럼프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진핑은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굳어진 얼굴로 차렷 자세를 취했다. 이게 개그 아닌 개그로 움짤을 남기기도 했는데 시진핑으로서는 엄청난 굴욕짤이다.#
  • 의외로 불교와 인연이 있다. 80년대 징딩현 당부서기 시절 당시, 국공내전으로 폐사가 되어버린 당나라 시대 사찰 임제사(臨濟寺) 재건에 크게 기여했다. # 모친 치신은 아예 티베트 불교 신자라는 루머가 있기도 하다. 하지만 국가무신론에 따라 종교인은 중국공산당원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시진핑은 무종교인이고 우상화를 위해 티베트인들을 탄압하고 불교유적들을 부수고 있다.(...)[33]
  • 2019년 11월 내지는 12월 부터 펑리위안과 딸 시밍쩌랑 별거에 들어 갔다는 소문이 있다.#, #
  • 영어는 그럭저럭 알아듣는편이지만 말하기는 부족한 편이라고 한다. 참고로 이전주석중 한명인 장쩌민은 영어실력이 좋은편이였으며 심지어 미국에서 영어로 연설하기도 했다.
  • 중국의 역대 최고 지도자들 중에서 처음으로 건국 이후에 태어난 인물이다.[34]

[1] 연변북한에서는 공식적으로 습근평이라고 표기한다. 시진핑이 저술한 서적 중 유일하게 한국에서 출판된 저서가 '시진핑 국정운영을 말하다'인데,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서는 '습근평 국정운영을 론함'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조선중앙텔레비죤에서도 한국 한자음으로 뉴스에서 습근평이라고 부른다. (북한은 2010년대 초반 한때 중국 인·지명을 중국식 발음으로 도입하려 시도했으나, 정착에 실패한 적이 있다.)[2] 진핑(近平)이라는 이름도 베이핑(北'''平''', 베이징의 당시 이름) 가까이('''近''')에서 태어났다는 뜻.[3] 프로필 상으론 180cm이지만 175cm인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의 옆에 서있을 때의 키가 비슷하다. 180cm는 젊었을 적의 키인 듯 하다.[4] 1913년 10월 15일 - 2002년 5월 24일[5] 1926년 11월 - [6] 1979년 - 1982년[7] 1987년 - [8] 1992년 6월 27일 출생(31세). 후처 펑리위안 소생.[9] 성적 상위 5% 안에 들어야 진학할 수 있는 명문 고등학교이다. 동문으로는 류허와 같은 고위 공직자나 아이들 우기 등이 있다.[10] 2018년 국가주석 임기 철폐 개헌으로 사실상의 종신 집권을 선언했다.[11] 덩샤오핑천안문 6.4 항쟁 이후 중국 공산당 총서기 직위와 국가주석 지위를 사임했지만, 중국 인민해방군 통수권을 유지하면서 죽을 때까지 1인 독재를 유지했다.[12] 별개로 이둘은 시진핑과 달리 온건한 성향이였으며 도를 넘는 행위들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경제 성장이라는 업적도 이루웠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둘은 시진핑만큼이나 권력에 환장하지 않았으며 외교정책과 국내정치도 시진핑에 비하면 정상이였다.[13] 그리고 이 당시 중공은 과두제에 가까운 형태로 중국의 정치 체제 자체가 일본과 달리 전혀 민주적이지 않다는 형태만 제외하면 실질적으로는 민주국가로 분류되는 일본의 자민당과 유사한 형태의 권력 운영을 하였다.[14] 도올 김용옥은 핸디캡을 극복하고 결국에는 당 총서기가 된 인간 승리의 표본이라고 찬양했는데, 위에서 봤듯이 당 간부들이 특채해서 중앙위 후보 위원이 됐기 때문에 서열상 꼴찌였을 뿐이다. 한 때 중국의 축복으로까지 찬양하던 김용옥은 시진핑이 종신 집권을 추구하는 걸 보며 자신의 안목이 틀렸음을 마지못해 인정했다.[15] 보시라이와 같은 태자당이지만 시진핑은 그 같은 강경파가 아닌 온건파 지도자에 속하는 것으로 평가되었다.[16] 푸틴은 어디까지나 시진핑에 비해서는 유화적인 편이다. 푸틴은 아무 공적없이 대통령이 되지는 않았으며, 전임자가 망쳐농은 러시아의 경제를 어느 정도 정상궤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후진타오장쩌민의 정권 다툼 후의 공백으로 겨우 주석이 된 시진핑과 달리 푸틴은 처음에는 나름대로 민주적으로 선출되었다. 비판을 받는 2014년 크림 위기도 원래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일부였다가 흐루쇼프에 의해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일부가 된 곳인 크림반도를 소련의 후신인 러시아가 억지로나마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명분은 있었다. 반면 시진핑은 전임자가 발전시키던 중국의 경제 성장을 퇴보시켰고 주변국들을 죄다 돌려버리는 외교적 실책을 저질렀다. 대만은 역사적으로 청나라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영토인 적은 있어도,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였던 적은 없으며. 러시아가 소련의 후신을 주장하는 것과 달리 중화인민공화국은 공식적으로 자신들은 중화민국의 후신이라 주장하지 않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다른 사례이다. 푸틴이 독재자이긴 해도 시진핑 정도의 독선적인 인물은 아니며, 필요에 따라 과도 타협은 시도하는 인물이다. 푸틴과 비교되어야 할 대상은 시진핑이 아니라 터키의 독재자인 에르도안 정도다. [17] 여담으로, 김정은도 비록 김정일이 지정해주었다는 강력한 정통성은 있었을지언정 워낙에 개인적인 약점이 많았던데다가 북한 군부에 워낙에 쟁쟁한 어르신들이 많아서 그냥 눌려지낼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지만 결국엔 할아버지 김일성처럼 숙청에 숙청을 거듭하여 권력을 거머쥐었다. 그런 면에서는 시진핑과 행보가 유사한 셈이다.[18] 대장정으로 중국공산당 중앙지도부가 섬서성 옌안에 도착한 이후 류지단은 마오쩌둥의 명령으로 산서성 군벌 옌시산을 공격하러 원정을 떠났다가 전사한다. 공산당에선 류즈단의 고향 '바오안'을 '즈단'으로 개칭해서 그의 공로를 기념했다. 국내에선 우리식 한자 독음 '유지단'으로 많이 알려졌다. 2000년 이전에 나온 책들은 대부분 유지단으로 표기되었다.[19] 요약하면 시중쉰의 감독아래서 1954년 시중쉰의 동료인 류즈단의 전기가 나왔는데, 이 소설에서 중공정권 수립후 처음으로 숙청사건이 된 가오강 사건의 주범인 '반동' 가오강이 미화되었다는 판정을 받아서 여기에 연루된 여러 사람이 다친 사건이다. 작가뿐만 아니라 이를 펴낸 시중쉰 또한 반동이 되었다.[20] 시중쉰은 중공 정권 수립 후 서북(西北)지역 제1서기, 군정 위원회 주석이던 펑더화이가 6.25 전쟁 지휘관으로 불려가면서 1950년 10월부터 1952년 9월까지 서북 지역 군정위 부주석, 주석 대리와 경제 총책을 맡았다.[21] 다만 이런 류의 일화는 어린이 위인전마냥 후대의 미화가 상당수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걸러들어야 한다.[22] 2012년 기준 현역으로 계급은 소장이다.[23] 단, 1:40초 가운데 인물이 천관위(중국 정치인이며 대만의 야구 선수와는 동명이인)가 아닌 한정이다.[24] 이와중에 치열한 라이벌이었던 태자당의 보시라이의 몰락도 한몫했다.[25] 한국의 경우, 시진핑은 임기 초에는 박근혜친중 정책 때문인지는 몰라도 한국에 대해 그럭저럭 호의적인 편이었다.[26] 허나 어떤 나라들은 2017년부터 조사한 자료 밖에 없다.[27] 정작 시진핑 본인은 독재권력을 휘두르고 있으며 자신을 엄격하게 단속하지도 않는다.[28] 정작 시진핑 본인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와 같은 전염병 유행시 진실을 은폐하려 시도했다.[29] 마두로는 키가 190cm이다.[30] 'Hot'을 평가하는 것이면 단순히 미남이 아닌 매력남을 보는 것이다.[31] Tvn 유식한 아재들의 독한 인물 평존. 유아독존에서[32] Tvn 유식한 아재들의 독한 인물 평존. 유아독존에서[33] 물론 불교말고도 기독교와 이슬람도 강경하게 탄압하고 있다.[34] 구소련에서는 고르바초프가 소련 성립 이후 태어난 서기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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