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 대전/참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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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국들의 변화, 미국의 참전 이후 수가 급격하게 늘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2]
1. 개요
2.1. 일본 제국의 중국 침략
2.2. 추축국의 최초 침공 피해국
2.3. 본국 혹은 종주국의 전쟁 수행 합류
2.4. 별도 참전
2.5. 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
2.6. 일본 제국의 미국 침공
2.7. 그 외
7. 중립이었지만 추축국에게 점령된 국가
8. 중립이었지만 연합국에게 점령된 국가
9. 한국의 법적 지위
9.1.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참전국으로 보는 주장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의 참전국을 정리한 문서.

2. 연합국



2.1. 일본 제국의 중국 침략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전, 중국과 일본 제국은 따로 미리 전쟁을 치르는 중이었다. 이 두 국가의 관계는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연합국과 추축국 간의 관계로 확대되었다.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는 소련과도 맞붙었지만, 소·일 불가침 조약으로 소련과 일본의 본격적인 전쟁은 대전 최후반부에 벌어지게 되었다.
'''국가'''
'''참전일'''
'''참전 계기'''
중화민국[3]
1937년 7월 7일[4]
일본 제국의 침략, 중일전쟁

2.2. 추축국의 최초 침공 피해국


독일군의 폴란드 기습 침공으로 인해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폴란드 정부는 영국과 프랑스와 상호방위조약을 맺어놓은 동맹국이었기 때문에 두 국가는 상호방위조약에 규정된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독일에 맞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국가'''
'''참전일'''
'''참전 계기'''
폴란드 제2공화국폴란드 망명 정부
1939년 9월 1일
독일의 선제침략, 폴란드 침공
프랑스 제3공화국자유 프랑스
1939년 9월 3일
폴란드와의 상호방위조약 이행
영국
1939년 9월 3일
폴란드와의 상호방위조약 이행

2.3. 본국 혹은 종주국의 전쟁 수행 합류


영국이 전쟁에 참전하기로 결정하자 영국의 식민지들 그리고 자치령들과 영국을 본국으로 생각하고 있던 영연방 국가들 또한 독일과의 전쟁을 선포하게 됐다. 이후 이들은 영연방군[5]이라 불리며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태평양, 남아메리카 전선에서 나치 독일, 이탈리아, 일본 제국 등 추축국에 맞서 전투를 벌이는 주력을 맡게 된다.[6] 다만 이들 중, 주체적으로 참전을 결정한 영연방 국가들이나 몇몇 자치령을 제외한 영국의 식민지 지역들은 영국의 한 종속 지역으로서 참전한 것이기 때문에 공식적인 승전국으로는 인정되지 않는다.
'''국가'''
'''참전일'''
'''참전 계기'''
오스트레일리아
1939년 9월 3일
본국(영국) 정부의 요청을 수용하여 전쟁 수행에 합류[7]
뉴질랜드
1939년 9월 3일
본국(영국) 정부의 요청을 수용하여 전쟁 수행에 합류
뉴펀들랜드 자치령[8]
1939년 9월 4일
영국의 전쟁 수행에 합류
네팔 왕국
1939년 9월 4일
본국(영국) 정부의 요청을 수용하여 전쟁 수행에 합류[9][10]
캐나다 자치령
1939년 9월 10일
본국(영국) 정부의 요청을 수용하여 전쟁 수행에 합류[11]
남아프리카 연방[12]
1939년 9월 6일
본국(영국) 정부의 요청을 수용하여 전쟁 수행에 합류.
남로디지아[13]
정확한 시기가 모호함[14]
본국(영국)의 전쟁 수행에 합류함.[15]
영국령 인도
1939년 9월 3일
종주국(영국)의 전쟁 수행에 합류
영국령 팔레스타인
1939년 9월 3일
종주국(영국)의 전쟁 수행에 합류[16]
영국령 케냐
1939년 9월 3일
종주국(영국)의 전쟁 수행에 합류[17]
탄자니아[18]
1939년 9월 3일
종주국(영국)의 전쟁 수행에 합류[19]
영국령 나이지리아
1939년 9월 3일
종주국(영국)의 전쟁 수행에 합류[20]
영국령 골드 코스트
1939년 9월 3일
종주국(영국)의 전쟁 수행에 합류
영국령 자메이카
1939년 9월 3일
종주국(영국)의 전쟁 수행에 합류[21]

2.4. 별도 참전


'''국가'''
'''참전일'''
'''참전 계기'''
바레인
1939년 9월 10일
독일에 선전포고 후 연합군에 합류[22]
노르웨이
1940년 4월 9일
독일의 선제 침략, 노르웨이 침공
네덜란드[23]
1940년 5월 10일
프랑스 침공에 따른 독일군 침략
벨기에
1940년 5월 10일
프랑스 침공에 따른 독일군 침략
룩셈부르크
1940년 5월 10일
프랑스 침공에 따른 독일군 침략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정부
1940년 7월 18일
독일에 강제병합된 본국 독립 노력
이집트 왕국
1940년 9월 16일[24]
이탈리아의 선제 침략[25]
그리스 왕국
1940년 10월 28일
그리스 침공
유고슬라비아 왕국
1941년 4월 6일
유고슬라비아 침공

2.5. 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


독소전쟁 개전으로 인해 소련이 연합국에 가담했다.
'''국가'''
'''참전일'''
'''참전 계기'''
소련
1941년 6월 22일[26]
나치 독일바르바로사 작전 실행으로 인한 독소 불가침조약 파기
몽골 인민 공화국
1941년 8월 9일[27][28]
종주국(소련)의 전쟁 수행에 합류[29]

2.6. 일본 제국의 미국 침공


태평양 전쟁 개전으로 인해 미국,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연합국에 가담했다.
'''국가'''
'''참전일'''
'''참전 계기'''
파나마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에 따른 미국의 전쟁 수행에 합류, 일본 제국의 침략
미국
1941년 12월 8일
일본 제국의 기습 공격[30], 진주만 공습
필리핀 자치령
1941년 12월 8일
진주만 공습에 따른 미국의 전쟁 수행에 합류
코스타리카
1941년 12월 8일
미국의 전쟁 수행에 합류
도미니카 공화국
1941년 12월 8일
미국의 전쟁 수행에 합류
엘살바도르
1941년 12월 8일
미국의 전쟁 수행에 합류
아이티
1941년 12월 8일
미국의 전쟁 수행에 합류[31]
온두라스
1941년 12월 8일
미국의 전쟁 수행에 합류[32]
니카라과
1941년 12월 8일
미국의 전쟁 수행에 합류
과테말라
1941년 12월 9일
미국의 전쟁 수행에 합류
쿠바
1941년 12월 9일
미국의 전쟁 수행에 합류

2.7. 그 외


'''국가'''
'''참전일'''
'''참전 계기'''
멕시코
1942년 5월 22일
미국의 전쟁 수행에 합류
브라질[33]
1942년 8월 22일
U-Boat의 자국 상선 공격에 격분하여 참전
에티오피아 제국
1942년 12월 14일
영국군에 의해 해방 후 합류
볼리비아
1943년 4월 7일
미국의 전쟁 수행에 합류[34]
콜롬비아
1943년 7월 26일
미국의 전쟁 수행에 합류[35]
이탈리아 왕국
1943년 9월 8일
항복 후 연합국에 합류하였다.
독일이 구금된 무솔리니를 구출해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을 수립하자,
이에 대항해 이탈리아 내전을 치렀다.
이란 제국
1943년 9월 9일
영국과 소련의 전쟁 수행에 합류
유고슬라비아 민주 연방
1943년 11월 27일
추축국에 점령된 본국 탈환 노력[36]
라이베리아
1944년 1월 27일
미국의 전쟁 수행에 합류[37]
페루
1944년 2월 12일
미국의 전쟁 수행에 합류
루마니아 왕국
1944년 8월 25일
전 추축국[38]
불가리아 왕국
1944년 9월 8일
전 추축국[39]
헝가리 왕국
1945년 1월 20일
전 추축국
에콰도르
1945년 2월 2일
미국의 전쟁 수행에 합류
파라과이
1945년 2월 7일
미국의 전쟁 수행에 합류[40]
우루과이
1945년 2월 15일
미국의 전쟁 수행에 합류
베네수엘라
1945년 2월 15일
미국의 전쟁 수행에 합류 [41]
터키
1945년 2월 23일
[42]
시리아[43]
1945년 2월 26일
독일과 일본에 선전포고
레바논
1945년 2월 27일

사우디아라비아
1945년 2월 28일
[44]
아르헨티나
1945년 3월 27일
미국의 전쟁 수행에 합류[45][46] 및 친위대를 피해 도망친 사람들의 연합국 가담요구[47]
칠레
1945년 4월 11일
미국의 전쟁 수행에 합류[48]
핀란드
1945년 4월 15일
전 추축국, 소련의 압박과 영미의 추축국 탈퇴 및 연합국 가담요구

3. 연합국에 협조한 기타 단체/기구


'''임시정부'''
'''참전일'''
'''참전 계기'''
스페인 공화국 망명정부
1940년 7월 11일
비시 프랑스가 출범한 뒤에 자유 프랑스 진영과 통합
베트민
1941년 12월 7일
미국의 전쟁 수행에 합류
대한민국 임시정부
1941년 12월 10일
연합국의 전쟁 수행에 합류(연합국 여부는 아래 문단 참조.)
알바니아 민주정부
1944년 10월 26일
1944년 연합군이 알바니아 왕국을 점령한 뒤에 참전

4. 추축국


'''국가'''
'''참전일'''
'''참전 계기'''
일본 제국
1937년 7월 7일
중국에 대한 전면공격
만주국
1937년 7월 7일
일본의 전쟁 수행에 대한 동조
몽골군 정부[49]
1937년 8월 19일
일본의 전쟁 수행에 대한 동조
나치 독일
1939년 9월 1일
폴란드에 대한 전면 기습공격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1939년 9월 1일
독일의 전쟁 수행에 대한 동조
핀란드[50]
1939년 11월 30일
소련의 기습공격, 겨울전쟁
이탈리아 왕국(→이탈리아 사회 공화국)[51][52]
1940년 6월 10일
대프랑스/영국 전쟁에서의 전리품 획득
비시 프랑스[53]
1940년 7월 10일
독일의 전쟁 수행에 대한 동조
알바니아 왕국[54]
1940년 10월 28일
이탈리아의 전쟁 수행에 대한 동조, 그리스 침공
불가리아 왕국
1941년 3월 1일
유고슬라비아 침공에 가담
헝가리 왕국
1941년 4월 6일
유고슬라비아 침공에 가담
이라크 왕국[55]
1941년 4월 18일
영국의 지나친 내정간섭에 대한 반발
루마니아 왕국
1941년 6월 22일
소련에 빼앗긴 몰도바 지방 회복
유고슬라비아 왕국
1941년 3월 25일
사면초가로 인해 가담 이후 탈퇴, 이후 괴뢰국화
크로아티아 독립국
1941년 4월 10일
독일에 의해 독립 이후 유고슬라비아 침공에 가담.
태국[56]
1942년 1월 25일
일본의 남방작전에 가담, 인도차이나 지방 회복
버마국
1943년 8월 1일
미얀마를 영국으로부터 독립[57]
왕징웨이 정권
1943년 9월 1일
연합국에 선전포고
자유 인도 임시정부
1943년 10월 26일
인도를 영국으로부터 독립[58]
필리핀 제2공화국
1944년 9월 23일
미국, 영국에 대한 선전포고

5. 추축국에 협조한 기타 단체/기구


'''국가'''
'''참전일'''
'''참전 계기'''
러시아 인민 해방 위원회
1944년 11월 14일
독일의 전쟁수행에 합류

6. 중립국


개전부터 종전까지 형식상으로라도 중립을 유지한 국가에 한해 기술한다. 벨기에처럼 중립의사는 있으나 침공당해 강제로라도 참전한 경우 참전국으로 본다.
'''국가'''
'''중립사유'''
스위스
국토 대부분이 산지라 점령해서 이득보는 것이라곤 이탈리아 북부와의 교통 정도인데 의외로 병력이 많아 알프스 등지에서 버틸 경우 예상되는 피해가 컸다. 항복 직전이 되면 사회 인프라까지 자신의 손으로 다 붕괴시키겠다는데 그냥 두는 편이 돈세탁 등으로 쓸모가 많아서 오스트리아에서 독립한 이후 꾸준히 국토 사수에 성공, 영세 중립국으로서의 이미지를 굳혔다.
아예 전투가 없던 것은 아니고, 스위스 영공을 침입한 독일 공군과 스위스 공군이 몇차례 소규모 공중전을 벌인 적이 있다. 연합군의 경우 스위스의 중립을 보장해주긴 했지만 독일을 폭격하려던 폭격기가 스위스 도시를 오폭한 사례가 소수 있다. 결국 참다못해 폭발한 스위스는 고의든 실수든 연합국 추축국 두곳 모두에게 공격을 받은 이후 '''우리 영공에 침입하면 무조건 선빵날리겠다.'''라는 강경책을 내놨다.
스페인국
당시 프랑코 정권은 내전에서 독일과 이탈리아의 덕을 많이 봤지만, 역시 내전의 후유증으로 어느 한쪽 줄에 설 처지가 아니었다, 거기에 독일 공군 원수란 작자가 스페인 내전 중에 벌인 개짓 덕분에 추축국에 가입할 이유를 상실했다. 독일의 압박에 의해 의용군 1개 사단[59]과 청색 비행중대[60]동부전선에 파병했고 상당한 활약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의용군이었을 뿐이다. 나중에는 은근슬쩍 연합군 편을 들어서 히틀러가 분노하기도 했다. 일본과도 우호 관계를 유지했지만 1945년 4월에 단교했다. 이미 전황이 연합군 쪽으로 기울어서 그쪽 눈치를 본 것도 있었기 때문이다.
안도라
현재도 그랬지만 당시에도 스페인과 프랑스의 보호령이었기 때문에 스페인이 중립을 지키자 스페인에 묻어가기 식으로 중립국이 되었다.
포르투갈 제2공화국
역시 스페인과 마찬가지로 안토니우 살라자르 독재정권이었으며, 지리적으로 스페인에 둘러싸여서 스페인에 묻어간 셈이다. 연합국과는 해상통로로 연결되고, 추축국과는 스페인을 거쳐서 육로로 연결되므로 전쟁 기간 내내 양측의 스파이 활동이 성행했다. 다만 파시즘 국가는 아니어서 전쟁 중반 이후에는 아소르스 제도 등의 주요 거점을 연합국에게 개방해서 사실상 연합국이 된다. 사실 포르투갈은 포르투갈이 몰락하고 영국이 힘을 가진 뒤부터 전통적인 영국의 동맹국이었다. 대표적으로 나폴레옹 전쟁틸지트 조약 후 전 유럽이 나폴레옹의 동맹이나 밑에 있을 때 영국편에 서서 프랑스와 싸운 단 하나의 국가가 바로 포르투갈이다. 또 호주를 주축으로 한 연합군이 식민지 티모르를 점령하고 또 다시 추축국일본 제국이 포르투갈에게 선전포고를 때리고, 식민지인 티모르를 침략, 점령하였으나, 용케도 중립을 지켰다.
스웨덴
형식적으로는 중립국이지만, 나치 독일의 편의를 굉장히 많이 봐줬다. 당장 독일의 철광석 수요의 상당부분을 스웨덴이 메꿔줄 지경이었다. 이웃국가 중 노르웨이-덴마크[61]는 독일에 점령, 핀란드는 추축동맹에 가담하여 독일에 의해 국토가 포위되어 있었으므로 독일이 단번에 밀어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 노르웨이는 스웨덴이 길을 비키지 않겠다면 공격하겠다는 독일의 협박에 밀려서 길을 내줘 점령당했는데 이 때문에 안 그래도 깊었던 노르웨이의 반스웨덴 감정이 더 심해졌다. 그래도 스웨덴이 중립국 행세를 하여 주변국의 유대인들을 받아주어 독일의 강제수용소를 가는 것으로부터 막아주었다.
아일랜드
과거 아일랜드를 식민지배했던 영국 때문에 독일의 선전을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 옆에 있어서 영국의 견제가 심했으며, 미국과 영국간의 통상항로 중간에 버티고 선 관계로 전략적인 요충지에 있는 데다가 독일이 아일랜드를 점거하려는 계획을 만들다가 몇 번 들켜버리자 아예 미군이 아일랜드를 무혈침공해서 사실상 연합국의 점령지로 바꿔버린다. 그 외에 아일랜드인이 개인적으로 영국군 등 연합군 측에 참전한 사례도 있었다.
리히텐슈타인
이쪽은 스위스에 묻어간 식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리히텐슈타인은 사실상 스위스의 보호령이기도 했다.
아프가니스탄 왕국
이란이 소련과 영국에게 사실상 분할점령되면서 일종의 완충지대로 중립국임을 인정받았다. 물론 유사시 연합국이 진주할 수 있었긴 하지만 이 지역이 원래부터 외국군대가 주둔하는 것을 극히 꺼리고 집단적으로 반항하는 곳이었으므로 긴급사태가 터지지 않는 한 사실상 방치하는 지역으로 선정되었다.
티베트
1912년 사실상 독립하긴 했지만, 국제적으로 미승인국 취급을 받았고, 딱히 추축국이나 연합국의 위협을 받지도 않아서 중립 상태를 유지했다. 일본과의 사이에 중국이 있고, 중국의 상황이 어수선한데다 사실상 당시의 중화민국은 티베트를 건드릴 생각 없이 엄연히 다른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있었기에 청나라의 붕괴 이후 중국과는 이웃한 다른 국가로 존재하며 중립을 지키고 있었으나 종전 뒤 1950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침공해 와 1951년 점령당하게 된다.
바티칸 시국
나치 독일이 점령을 시도하며 대치한적 있으나, 교황이 근위대에게 화기가 아닌 미늘창만 들게하며 비폭력적으로 나왔고, 전 세계 가톨릭 교도들의 반발을 걱정해 포기하였다.
예멘 왕국
영국령이던 아덴을 비롯한 예멘 남부를 되찾기 위해 1936년, 이탈리아 왕국과 동맹을 맺었으나, 전쟁 기간 동안엔 중립을 지켰다.
산마리노
형식적으로는 중립국이지만, 이탈리아 왕국의 편의를 굉장히 많이 봐줬다. 예나 지금이나 산마리노의 국민경제는 이탈리아에 의존하는 처지였기 때문에 이탈리아 국내의 정세 변동이 산마리노 정계의 풍향을 좌우했다. 무솔리니가 잘 나갈 때는 산마리노 파시스트당이 여당으로서 장기집권했고, 윈스턴 처칠이 잘 나갈 때는 산마리노 공산당이 여당으로서 장기집권했다.

7. 중립이었지만 추축국에게 점령된 국가


'''국가'''
'''점령사유'''
덴마크
1940년 4월까지 중립을 유지했으나 독일이 노르웨이 침공을 위한 그 전초기지로 삼기 위해 침공했다. 지리적으로 연합국의 지원을 받기 어려웠고 독일의 군사력에 고스란히 노출되었으며 군사력 격차도 심했기에 침공 당일 새벽, 덴마크 정부는 독일의 제안을 받아들여 자국 영토에 독일군 주둔과 군시설 사용을 허가하였고, 독일의 보호령이 된다. [62] 덕분에 덴마크는 독일군 점령지이면서도 어느 정도 개입은 받지만 그래도 자주적이며 독립적인 정부가 존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독일에 전황이 불리해지는 1943년 후반부터 독일은 덴마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직할령으로 다스리기 시작하였고, 수탈이 강화되었다. 이를 교훈삼아 덴마크는 대전 종식 후 NATO에 가입한다.
모나코
작은 국가이고 사방이 추축국(비시 프랑스, 이탈리아 왕국)이였기에 비시 프랑스 정부에 지원금을 대주는 등 추축국에 호의적이였으나 1943년 이탈리아군이 침공하여 괴뢰 정권이 설립된다. 동년 9월 이탈리아의 철수 이후에는 독일이 점령한다.

8. 중립이었지만 연합국에게 점령된 국가


'''국가'''
'''점령사유'''
이란 제국
1941년 초까지 정부는 중립을 유지했으나 정부와 별개로 국민여론은 영국과 소련에 대한 반감이 강했고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친독정서가 상당했다. 한편, 영국은 북아프리카 전선의 전황 악화에 이에 호응하는 이라크의 반영 쿠데타로 중동에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소련은 독소전쟁 발발 후 영국으로부터의 군수물자 지원루트 확보 필요성을 느꼈다. 이러한 양국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면서 페르시아 침공이 개시, 이란은 항복하고 국왕이 퇴위당했으며 대전 기간동안 영-소군의 군정 점령을 받게 되었으며 강제적으로 연합국 측에 가담하게 된다.
아이슬란드 왕국
1940년, 사실상 종주국인 덴마크가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하자, 아이슬란드에도 나치 독일의 영향이 미칠 것을 우려한 영국이 무혈 침공했다. 이후 아이슬란드는 2차 대전 말기 까지 영국/미국의 점령하에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연합국이나 추축국 어느 한쪽에 가담하지 않고 중립을 지켰다. 참고로 1944년엔 히틀러가 자신의 뜻대로 고분고분 따르지 않는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10세에 분노해 아이슬란드 공화국으로 독립시키는 것을 승인했다.
포르투갈령 티모르
1941년, 오스트레일리아, 네덜란드, 영국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유는 일본 제국의 오스트레일리아 침공을 늦추기 위해서 였다. 포르투갈군은 저항하지 않았다. 이후 1942년 2월 일본 제국이 티모르를 점령하고 1945년 패망 직전 까지 통치하였다.

9. 한국의 법적 지위



한국(Korea)은 연합국 최고사령부 지령 SCAPIN[63] 1757호, SCAPIN 2136호에 따르면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핀란드, 태국, 발트 3국과 함께 3개 범주(연합국, 중립국, 적성국)의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특수 지위국'''(Special Status Nations)으로 분류되었다. 이 국가들은 자의든 타의든 추축국의 영향권에 속하며 연합국에 총부리를 겨눈 전적이 있는 국가들이다.
다만 이를 두고 조선을 추축국이나 부역국으로 인식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세계대전 당시 조선은 주권이 일본제국에 종속된 식민지로 일본제국의 일부였으므로, 국가가 아닌 일본 제국의 한 지역으로 취급됐다. 즉, 한국의 지위에 대해 설명할 때 공식적으로 설정된 특수 지위국을 제외하면 "국"이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한국의 구체적 지위에 대한 인식 변화에 대해서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논의 과정에서 미국영국/영연방의 입장을 주목해볼 만하다. 전쟁 직후, 당시 승전국들 중 주요 두 세력인 미국과 영국(+영연방 국가들) 사이에 한국이 구체적으로 어떤 지위에 있는지 혹은 있어야 하는 지에 대해서 이견이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의 경우 전쟁 직후 한국을 해방된 지역(a liberated territory)이라 언급한 점, 더 나아가 한국을 연합국의 자격으로 조약에 참가하게 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점은 당시 적어도 미국 내 일각에서는 한국이 태국, 오스트리아와 같은 부역 책임이 있다고 인식되지 않았거나, 적어도 그렇게 규정할 필요는 없다고 여겼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하지만 미국 외 주요 승전 세력인 영국을 비롯한 영연방 국가들은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훨씬 이전 시점에, 일본 제국과 대한제국 양측의 법적 절차를 거쳐, 주요 열강들을 위시한 국제 사회의 동의 하에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병합했다고 봤다. 그리고 일본 제국의 통치에 대한 한국인들의 저항 운동의 규모와 지속성 등에 대해서도 부정적 의견을 표출했다. 이 때문에 한국을 자신들과 같은 연합국 자격으로 조약에 초청하는 거나 한국에 해방된 지역이라는 지위를 부여하는 것을 적극 거부하며 반발하였다. 또한 미국 내에서도 국무부를 중심으로 영국/영연방 측의 의견과 같은 이유로 한국을 연합국으로 초청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들이 등장하여 힘을 얻었다. 이 때문에 한국에 유리한 지위를 주기로 한 당초 계획이 취소됐다.
결국 영국과 미국 사이에서 이뤄진 협의와 미국 국무부의 내부 설득 끝에 미국 정부와 의회도 영국과 미국 국무부의 논지에 타당성이 있고 그것이 미국의 국익에도 부합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영미 양 세력은 한국을 연합군과 함께 추축국에 맞서 싸운 연합국에 넣거나 전쟁의 모든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중립국으로 넣지 않기로 결정했다. 다만 그렇다고 주체적 결정권이 없는 식민지에 불과했던 지역을 적극적으로 전쟁 행위에 가담한 추축국으로 규정할 수는 없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한국을 특수 지위국으로 분류하였다.[64]
결국 일본 제국의 합법적 영토를 한반도, 대만, 오키나와, 일본 열도로 파악하고, 한반도의 독립과 대만의 중화민국으로의 할양, 오키나와의 미군 조차를 일본 제국의 해체와 분할로 파악하는 영미 학계와 외교가의 시각이 협정을 통해 굳어졌다.[65]

9.1.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참전국으로 보는 주장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참전국이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1919년 3·1 운동을 기점으로 구성된 임시정부는 이후 중일 전쟁 동안 중국 국민당과 연합하여 독립운동을 통한 방식으로 대일항쟁을 시작하는 한편 진주만 공습이 있었던 1941년에는 한국 광복군을 창설해 추축국인 일본 제국나치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또한 단순히 국민당의 지원을 받으면서 극히 제한적인 활동만 펼쳤고 타국으로부터 승인을 못 받았다는 주장에도 무리가 있는데 임시정부는 1944년에는 버마 전선에서 영국군의 요청을 받은 중화민국에 의해 임팔 전투(태평양 전선)에 광복군 요원들을 투입하여 직접적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군의 전투 행위에 협력한 바가 있고, 타 국가 정부로부터 1921년 중화민국의 승인을 받고 중화민국 이외에도 1944년에는 소련으로부터, 다음 해 1945년에는 프랑스폴란드, 리투아니아 등 몇 정부로부터, 특히 주요 연합국 5개국 중 3개국인 중화민국, 소련, 프랑스로부터 승인을 받았다는 것을 근거로 한다. 또한 단순한 게릴라 전술과 파괴 공작의 비정규전만 한 것이 아니고 중국 국민당군과 함께 정규전으로 대규모의 전투 또한 치러냈으며 다수의 광복군 군인들이 파병의 형식으로 중국 국부군에 배속되어 전투기 조종사, 전차 운용병, 항해사관 자격으로 활약하였기 때문에 하나의 참전국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전후 연합국은 이러한 성과들을 전세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한 국지적이고 산발적인 사태로 보았고, 태평양 전선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주도한 미국과 영연방 국가들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승인한 바가 없었다. 때문에 연합국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정식 망명 국가 기구이자 전쟁 주체로 승인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보다는 일본 제국의 속령으로서 일본제국의 전쟁 수행을 보조했다는 점이 부각되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연합국이 아닌 특수지위국으로 분류됐다.
[1] 위 지도에서는 추축국에 태국과 연합국에 터키와 사우디아라비아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터키, 사우디는 전쟁이 거의 다 끝나가는 1945년이 되어서야 선전포고하긴 했다.[2] 위 그래프에는 일부 망명정부(베트민, 알바니아 민주정부 등)는 포함되지 않았다.[3] 중국 공산당과 군벌들도 중화민국 국민혁명군에 소속되어 참전했다.[4] 중화민국이 연합군에 공식적으로 가입한 것은 진주만 공습 다음 날인 1941년 12월 10일(충칭 시각 기준)이다.[5] 엄밀히 따지면 영국도 영연방군의 일원이었다.[6] 말레이시아 식민지와 싱가포르 자치령도 영국의 전쟁 수행에 합류했으나, 1941년 시점에 일본군에 의해 점령되어 제외된다.[7] 태평양 전선뿐 아니라 북아프리카, 유럽 지역에도 호주인들이 보내졌고 미군과 함께 일본 제국군과도 전투를 벌였으며 일본 제국군 역시 호주 북부를 97차례나 폭격했다.[8] 이 당시에는 영국의 자치령이었다.[9] 엄밀히 말하면 영국의 식민지는 아니었지만, 당시 영국에 의해 강하게 영향을 받고 있었다.[10] 군사적인 참전과 총을 포함한 군사적 지원뿐 아니라 차, 설탕, 원료까지도 지원했다.[11] 다양한 전선에서 활약하였고 전쟁이 끝났을 당시 캐나다 공군의 규모는 세계 3위였고, 지상군은 물론 수많은 자원봉사단도 유럽으로 보냈다.[12] Union of South Africa.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전신.[13] 현재의 짐바브웨에 해당하는 영국의 보호령[14] 그러나 영문위키를 참조하면 상징적인 '선전포고'를 했다고 한다.[15] 북아프리카나 동아프리카, 미얀마, 유럽 등에도 병력이 보내졌다고 한다.[16] 이슈브(유대교도 자치정부)의 민방위군트란스요르단(이슬람교도 자치정부)의 아랍 군단이 참전했다. [17] 약 10만의 의용군이 나왔으며, 탄자니아와 함께 동아프리카 전선의 사실상 주역을 맡았다. 에티오피아와 마다가스카르 해방 이후로는 주로 버마 전선에 참전했다.[18] 당시에는 탕카니카와 잔지바르라는 두 개의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다.[19] 케냐와 마찬가지로 약 10만의 의용군이 지원했으며, 동아프리카 전선의 주역이었다. 에티오피아와 마다가스카르 해방 이후로는 주로 버마 전선에 참전했다.[20] 약 4만 5천의 의용군을 보냈으며, 영국과 영연방에 대한 물자와 자원 지원 또한 맡았다.[21] 북-남 아메리카와 유럽-아메리카를 잇는 지리적 요충지라는 이유 때문에 미군 기지가 들어왔으며, 많은 자메이카와 카리브 해 영국 속령 출신 청년들이 영국 본토 항공전과 유럽 전선에서 싸웠다. 또한 지브롤터몰타에서 피신한 난민들 중 많은 수를 수용한 곳도 자메이카였다.[22] 1940년에는 이탈리아에게 폭격을 당하기도 함.[23] 네덜란드령 동인도(인도네시아)도 일본군에게 점령당함.[24] 공식적인 선전포고는 1945년 2월 24일이며 이 때 독일과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25] 이집트는 그 당시 형식상으론 독립국이였으나 여전히 영국군이 주둔했고 영향력을 끼치고 있던 상태였다.[26] 소련이 연합국에 가담한 시점 기준이다. 할힌골 전투를 기준으로 할 경우에는 참전개시일이 1939년 5월 11일, 소련의 폴란드 공격을 기준으로 할 경우에는 참전개시일은 1939년 9월 17일이다.[27] 할힌골 전투를 기준으로 할 경우에는 참전개시일 1939년 5월 11일[28] 공식적인 선전포고는 1945년 8월로, 일본에 선전포고[29] 할힌골 전투를 기준으로 할 경우에는 '만주국에 대한 기습 공격'[30] 일본은 선전포고문을 주미 일본 대사관에 암호로 타전했다. 하지만 그 해독 과정에서 시간이 지체됐고 그에 따라 진주만 공습까지 본국으로 전송되지 않아 기습 공격이 되어버렸다. 진주만 공습이 기습 공격이었기 때문에 일본은 종전 후, 협상 테이블에 앉았을 때 계속 발목이 잡혔다.[31] 연합국에 식량을 지원했다.[32] 연합국에 식량과 원료를 지원했다.[33] 남미국가 중에는 유일하게 공식적으로 지상군도 파병하여 이탈리아 전선에 배치되었다.[34] 병력을 파견하진 않고 연합군에게 주석을 지원했다.[35] 주로 연합국에 석유를 지원했으며 독일의 잠수함에 의해 자국의 상선이 작살났음에도 군대는 파견하지 않았다.[36] 이전에도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이 꾸준히 저항 운동을 벌이고 있었다.[37] 전쟁 초기에는 자국 영토를 개방, 이후에도 '고무'와 같은 중요한 자원들을 제공했기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38] 미하이 1세가 쿠데타로 집권한 후 이온 안토네스쿠 체포령을 내리고 추축국에 선전포고했다.[39] 제2차 대전 발발 초기에 추축국에 속해 있었지만 독일군에 의해 억지로 끌려가는 등 독일군에게 사실상 피지배국, 독일군 점령지 수준의 취급을 받았고 전쟁 말기 전세가 추축국에게 불리해지자 나치독일과의 국교, 동맹관계를 끓고 소련 등 연합국과 동맹을 맺고 독일군을 공격했다.[40] 그 외에 일부 파라과이인은 브라질 공군에 합류해 합류해 추축국과 싸웠다.[41] 연합국에 석유를 지원했다.[42] 영국, 소련 등 연합국 세력과 추축국 세력의 가운데에 끼인 묘한 위치에 있었고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하여 큰 피해를 보았기 때문에 중립을 지키고 있었다. 전쟁 내내 친독적인 자세를 계속 유지했지만, 이는 표면상일 뿐 실제로는 그럴 생각조차 없었다는 반론도 있다. 이후에 전세가 완전히 기울자 소련의 압박으로 형식적 선전포고를 했다.[43] 당시 프랑스의 위임 통치령 지배하에 있었으나 지배국이었던 프랑스가 나치군의 침공을 받아 점령당한 이후엔 나치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러나 결국 영국과 자유 프랑스 정부에 의해 점령됐고 프랑스는 시리아의 독립을 약속해 이듬해인 1946년 프랑스의 식민지 위임 통치에서 완전히 독립하게 된다.[44] 사실 줄서기라기보단 1939년, 1941년 각각 나치 독일, 일본 제국과 외교관계를 단절하며 추축국과 선을 그은 데다가 이전부터 연합국에 석유를 지원했다. 동부 지역에는 미 공군의 기지까지 건설하는 것을 허용했다. [45] 남미의 대표적인 친독 국가였으나 전쟁 내내 독일을 도와준 적은 일절 없고 '연합군 군수사령부'의 자격으로 선전포고를 했다. 즉, 연합군의 군량은 상당부분 아르헨티나산이었던 것이다. 다만 참전 사유가 줄타기로 오해받는 이유는 전쟁이 끝난 후 나치 독일 전쟁범죄자들을 아르헨티나가 도피시켜줬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이 유럽에 파견되어 활동했었다.[46] 정부는 군인 4,000명을 파견했고 750여 명의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영국, 캐나다, 남아프리카 공군으로서 싸웠다.[47] 당시 아르헨티나는 친위대를 피해서 도망친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중 한 사람이 헝가리 출신 신문기자인 신문기자 비로 라슬로(Bíró László)이다. 라슬로는 볼펜을 발명한 사람으로 유명하다.[48] 친독 성향을 보였으나 1943년 이후로 추축국과의 관계를 끊었고 이후 일본에게만 선전포고를 했다.[49] 이후 '몽강연합자치정부'로 개칭.[50] 사실 추축국에 들어가긴 애매한데(초창기에는 완벽히 추축국편이었으나 후에 연합국편이 됨) 핀란드 정부의 공식 입장상으로는 '어쩌다보니 소련과 같이 전투를 벌이게 되어서 서로 협력했을 뿐 추축국은 아니다'였고 실제로 핀란드 정부는 독일의 공식적인 군사 동맹 요구 같은 것을 다 무시했다. 그러나 핀란드의 투르쿠에서 건조된 U보트 잠수함들은 후에 연합국 상선들을 침몰시켰다. 전후 각 국 정상들끼리 회담을 가질 때 핀란드 당국은 그런 사실을 공표하지 않았고 전쟁의 대상을 소련으로 한정지었다. 미국, 영국 역시 핀란드를 추축국으로 간주하지는 않았다. 아마 추축국의 패전이 뚜렷해지자 라플란드 전쟁 당시 독일군에 맞서 전투를 벌인 것이 크게 작용한 듯 하다. 이탈리아 역시 비슷하게 추축국의 패전이 뚜렷해지자 진영을 바꿔 연합군에 합류하였으나, 핀란드와 달리 추축국으로 간주되어 전범국가 취급을 받았다. 이는 핀란드의 경우 소련의 침략에 저항하는 수세적인 입장이었던지라 사실상 선택지가 없었던 반면, 이탈리아는 프랑스와 발칸, 아프리카에서 지속적으로 전쟁을 확대시키며 패권주의적인 면모를 보였기 때문이다. 또한 핀란드는 소련에게 전 국토가 점령당하기 전에 눈치껏 자의적으로 편을 바꾸었던 반면, 이탈리아는 연합군이 본토에 상륙하여 강제적으로 편을 바꾼 케이스였기도 하고.[51] 메이저 추축국 중 1943년 연합국에게 가장 먼저 항복하였으며 1946년에는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으로 개편하였다.[52] 이탈리아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도 진영을 변경한 사례가 있다.[53] 비시 프랑스는 일체의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지만 영국과 자유 프랑스, 미국을 포함한 상당수의 연합국이 비시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고, 사실상 독일군과 함께 연합국과 교전하고 있었다.[54] 이탈리아의 보호국.[55] 이미 독립했지만 사실 독립한 이후에도 영국의 심한 내정간섭을 받아야 했다. 참전하고 얼마 안 가서 영국군에 의해 점령당했고 영국은 1947년까지 이라크를 실질적으로 지배했다.[56] 가장 늦게 항복한 추축국이다. (1945년 9월 2일) 태국은 일본 제국의 강압에 의해 원하지 않게 동맹을 맺고 전쟁에 끌려갔다. 영국과 프랑스,네덜란드 등 다른 서방 연합국들은 당연히 태국을 전범국으로 처벌할 것을 주장했으나 태평양 전쟁의 연합군 핵심은 미국이었던지라 전범국 처벌을 주장해도 딱히 반영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미국이 태국을 용서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는 태국을 위한 변명의 소지가 있다. 애초에 서양 열강들이 주변국을 식민지로 만들고 태국을 포위 압박하는 상황에서 줄타기 외교로 겨우 생존했으면서도 이미 일부 지역을 할양해 프랑스에게 빼앗긴 상황이며 태국 입장에선 일본도 그런 열강들 중의 하나고, 가담하지 않았으면 일본에 점령당했을 것이다. 애초에 프랑스에게 일부 지방을 빼앗겨서 그걸 회복하려고도 했다. 프랑스와 네덜란드가 종전 후에도 베트남인도네시아 등의 식민지배를 유지하려고 식민지 독립 전쟁에서 인도네시아나 베트남의 독립운동을 무력진압하거나 영국이 말레이시아와 미얀마, 브루나이등 식민지였던 동남아 국가들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자치령 등의 각종 편법을 내세우며 계속 식민통치를 지속하려는 꼼수를 쓰려다가 결국 마지못해 독립을 인정하고 식민지 독립 이후에도 이들 나라들에 대한 영국의 내정간섭이 적지 않았던걸 생각하면 프랑스와 영국, 네덜란드는 충분히 일본 때문에 추축국에 가담한 걸 빌미로 점령하거나 이권을 침탈 했을 수가 있고 미국이 태국에 대한 처벌을 막은 게 백번 의로운 행동이다.[57] 일본 제국의 괴뢰국 중 하나로 일본과 동맹을 맺고 연합국에 선전포고한다는 조건으로 독립을 약속받았다.[58] 찬드라 보세를 정부수반으로 하며 안다만제도의 포트블레어를 영토로 지배했던 괴뢰국이다.[59] 청색 사단(División Azul, 정식 명칭은 에스파냐 의용사단/División española de voluntarios)이라 불리는 이 사단은 1943년에는 연합군의 압력에 귀국시키긴 했으나 수천명 가량은 베를린 전투까지 독일에 남았다. 사단의 구성원 중 몇몇 인원은 스스로 혹은 친지가 내전 때 공화국에 연관된 사람들이었고 이 사단은 항상 선봉에 서는 것은 물론 심지어 고기방패 역할까지 하는 등 의용군을 골수까지 빨아서 활용하자는 독일군에 의해 엄청 강하게 운용된다.[60] Escuadrilla Azul. JG27 산하로 편성되었으며, 스페인 내전에서 이미 Bf109를 탑승했던 베테랑들도 포함되어 있었기에 적응이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61] 단 덴마크는 군대만 주둔시키고 정부 자체를 무너뜨리진 않았다.[62] 덴마크는 공식적으로는 추축국에 선전포고를 한 적이 없다. 그래서 덴마크를 연합국으로 분류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63] 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 Instruction Note의 약자[64] 이에 대해서는 전후 식민지 관련 문제 정리에서 영국의 이해관계가 일본과 일치하였고, 이 점에서는 미국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지적도 존재한다. #[65] 독일의 경우 크게 보아 서독과 동독 둘로 분할됐으며, 추가적으로 미국 영향력 하의 서유럽과의 완충지대를 원하던 소련의 요구로 칼리닌그라드가 소련으로, 오데르-나이세 선 이동 지역이 폴란드로 할양되었다. 오스트리아 지역 분리의 경우 연합국이 오스트리아 병합의 효력 무효화를 선언했기 때문에, 독일로부터의 분단이 아닌, 병합 이전 상태로의 회복이라는 표현이 쓰였다. 다만 오스트리아가 독일의 일부로서 독일의 전쟁 행위를 보조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또한 특수지위국으로 분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