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평가

 




1. 한국사적 의의
2. 비판론
2.1.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조세 시스템
2.2. 세종 이후의 과학기술 발전 정체
2.3. 여성인권 하락
2.4. 국방력 약화
2.5. 쇄국
2.6. 종교 탄압
3. 옹호론
3.1. 사대주의조공 관계의 실익
3.2. 소중화주의와 모화사상, 그리고 국학
3.3. 개화기의 사대
4. 문치주의
4.1. 중앙집권체제
4.2. 우수한 기록 문화
4.3. 정교한 관료제
5. 과학 기술
5.1. 천문학
5.2. 기타
5.3. 건축
6. 범죄 수사
7. 계급
8. 인권
8.1. 장애인
8.2. 노비
8.2.1. 조선은 노예제 사회였는가?
8.2.1.1. 긍정론
8.2.1.2. 부정론
8.3. 여성
8.4. 소수민족
9. 조선에 대한 대중적 인식
9.1. 부정적인 인식
10. 군사력


1. 한국사적 의의


서울대학교국정교과서가 받아들였던 시대 구분에 따르면 조선은 멀게는 통일신라부터 시작되어 고려시대까지 지속되었던 중세를 끝내고, 근세를 열었다는 의의가 있다.[1] 또한 한반도라는 국토와 한민족이라는 민족문화, 민족의식을 완성시켰다. 그 외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 민간 경제(상업, 수공업, 무역)의 발전.
한국 역사상 최초로 조직적인 상인조합(유상, 만상, 송상 등), 어음, 로 대표되는 원시적인 선물, 금융 거래가 태동했다. 놋그릇[2], 자개, 칠기 등의 생활 용품이 시장에 출시돼 대중화되었다. 교역 역시 이전 고려시대보다 큰 폭으로 늘어나 ‘민간에 의한 무역’이 이전 시기보다 유의미하게 활발해졌다. 인삼을 가공한 상품인 홍삼의 예처럼 후기에 이르러서는 민간 주도의 무역 상품이 개발되었다. 화폐가 처음으로 대중적으로 쓰이던 시기 역시 조선시대다.[3] 이전 시기였던 고려는 물물교환, 현물화폐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고, 제한적인 무역만 이뤄졌었다.
  • 고급 문화의 활발한 발전, 수입.
조선 시대에는 중국과 활발히 교역했는데, 선진적인 문화를 수입하려는 욕구 역시 그 요인 중 하나였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도 역시 지속적으로 문화를 수입했는데, 조선 후기의 기득권층이었던 서울 북촌에 거주하던 벌열가문 경화세족들이 그 주역이다. 당시 슈퍼갑 부자들 사이에서는 세련되고 화려한 청나라 문화가 유행해 활발히 중국 문물을 수입하며, 서양이나 중동, 인도의 문화 역시 부수적으로 수입되었다. 조선은 사치를 지양했다는 편견이 있지만, 조선 후기 여흥 민씨, 안동 김씨, 반남 박씨, 전주 이씨 등 가세가 하늘에 뻗치던 당대 명문가들이 향유한 문화, 양식은 그 수준이 매우 사치스럽고 정교하며, 우수하다.
  • 건축 기술의 발전.
조선의 건축은 그 이전 시기와 비교해 평면적으로 더 복잡하고, 형태가 다양하며, 정교하다. 단순한 일자현 건축에서 탈피해 ㅁ, ㅂ, ㄱ 형태의 한옥이 보편화 되었다. 후기로 가면 만성적인 목재부족에 시달려 휘어진 나무 줄기마저 건축에 적용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상류층에서는 귀한 모과나무 등을 모양 그대로 집 기둥에 써서 자신의 부를 사치스럽게 과시했다. 왕궁, 사찰 같은 대형 토목 건축은 목재 부족으로 건축물의 규모가 작아졌으나[4] 민간의 가옥은 더 발달한 기술과 큰 규모를 갖추었다. 당연히 2층 건물도 있었다.(창덕궁 징광루, 덕수궁 석어당, 도시 지역의 상점 건축들)
  • 인구 급증.
오랜 평화와 낮은 세율, 농업 기술 발전(농업 생산량 증대)으로 인구가 증가했다. 조선의 인구는 14세기 말 약 5,500,000명 정도로 추정되는데 18세기에는 약 18,700,000명으로 전근대 시대인데도 불구하고 무려 3배가 넘게 인구수가 말그대로 폭증하였다. 서기 2019년이 된 지금에도 전 세계에서 국력의 펀더멘탈로 가장 중요한 요소중 하나가 인구라는 점을 상기한다면[5], 굉장히 큰 업적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당시 조선의 인구 밀도는 중국 중원, 이집트와 일본을 제외하면 세계에서 제일 높았으며, 인구의 절대적인 수치 역시 순위권이었다. 동아시아 문화권의 높은 인구 부양력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 통일신라, 고려 때 보다 훨씬 더 크게 늘어난 영토(영토의 확장).
1896년의 13도 체계를 기준으로 평안북도(평안남도는 고려시대때 가서야 완전히 고려의 영토로 편입되었다.[6])와 함경남도 그리고 함경북도는 모두 고구려와 발해의 멸망 이후 조선시대 때 4군 6진을 개척하고 나서야 다시금 한민족의 영토로 완전히 재편입되었다. 그 이전에 조선이 건국될 때까지 이들 영토들은 특정국가들의 지배력이 잘 미치지 못하는 사실상 야인들의 영토였었다. 지금 현재 남북한의 영토를 완성했다는 점과 통일신라, 고려 때 보다 더 영토를 크게 늘렸다는 점에서 조선시대의 영토 확장은 굉장히 큰 업적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 왕권과 신권의 조화(의정부서사제)와 성문법 국가체제의 완성.
다만 성문법이 있었다고 해서 법치국가인 것은 아니다. 법치국가는 '법이' 지배하는 국가를 말하지만, 조선은 이념상으로는 왕이 '법으로' 지배하는 국가였다는 데서 중대한 차이점이 있다[7]. 조선의 왕은 법을 준수하는 자리였지, 법에 복종하는 자리는 아니였으므로 법치국가는 아니다. 그래도 왕권의 독주를 견제하는 장치가 동시대 어느 나라와 견줘도 잘 돌아갔다. 다만, 이는 동시에 조선 정치 시스템의 한계이자 모순이기도 하다. 법적으로는 국왕에게 무한한 권력이 주어지는 체제인데, 실질적으로 강한 신권이 왕권을 제약하는 형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군약신강 문서에도 있지만, 이는 왕권을 제약한 요소인 동시에 국왕권과 신권이 무한 충돌하는 계기가 된다[8].
문과에 합격하는 서민층의 비율이 많이 늘었을 뿐만 아니라 무과도 시행되어 양인들이 양반이 될 수 있는 기회가 크게 늘어났다. 그 덕분에 귀족적인 요소가 강했던 전대 왕조들에 비해 신분차별이 많이 완화되었으며, 또한 전대에 비해 훨씬 합리적인 관료체계가 완성되었다.
  • 철저한 문민통제를 통한 지방 세력의 약화와 근대적인 행정체계와 정교한 중앙집권체제 완성.
  • 향촌자치강조와 농민통제책(호패, 오가작통법).
  • 근대적인 경찰제도와 소방제도의 빠른 도입을 통한 사회안전망 강화.
치안은 포도청, 소방 전담 기구는 금화도감이라는 기관이 있었다. 이런 근대적인 사회제도의 구축은 대부분 세종대왕시기에 완성되었다.
  • 국가가 지원하고 주도한 방대하고 체계적인 기록문화와 활자, 인쇄 기술의 발전.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등 굉장히 세분화되고 쓰는 방법이 체계화된 방대한 양의 기록물들을 편찬했으며, 거기다 기록자를 정치적 탄압으로부터 보호하고 객관적인 있는 그대로의 기록을 남기기 위해 왕조차 볼 수 없는 비공개 문서였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더 한다. 또한 전대인 고려시대 때보다 더 발전한 인쇄 기술력을 바탕으로 서적 편찬 또한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조보 같은 세계 최초의 신문 또한 발행되었다.
  • 과학기술과 문예, 의학의 발전.
측우기, 자격루, 혼천의, 앙부일구, 거북선, 화차신기전 등등 전대인 고려시대 때보다 한층 더 과학기술이 발전했으며 한민족 문화의 정수라 할 수 있는 한글 창제와 홍길동전 같은 한글 소설의 발달 그리고 형태가 확립된 한국의 대표적인 정형시인 시조의 발전과 궁중 악기인 편경 제작, 궁중음악인 종묘제례악과 악보인 대악후보 같은 문예의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또한 동의보감 같은 의학의 발전 또한 이루어졌다. 그리고 지도 제작 기술 또한 계속 발전해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같은 당대 최고 수준의 세계 지도나 대동여지도 같은 훨씬 더 정확한 지도들이 제작되었으며, 천문학 또한 발전해 칠정산 같은 우리나라 최초의 역법이 만들어졌고 세계에서 2번째로 만들어진 전천(全天) 천문도이자 세계 최초의 고경도 석판 위에 새겨진 전천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 또한 제작되었으며, 선조대에는 인류 역사에 남은 우리 은하 마지막 초신성인 SN 1604(케플러의 초신성)을 관측해 실록에 기록했는데 이는 현대에 와서 이 초신성이 la형 초신성이었음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자료로 쓰일 정도로 세세히 기록되어 있다. 연산군 대에는 은광석에서 순수한 은을 추출하는 첨단 회취법인 연은분리법이 개발되는 등 여러 분야에서 계속 발전이 이루어졌다.
  • 왕도정치를 표방하며 상류층의 검소함과 위민정치를 지향.
다만 너무 검소함을 추구하다보니 만성적인 재정 빈곤에 시달리고 대규모 국책사업을 시행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게다가 후기로 가서는 세율은 낮아졌지만 재정의 수요가 대폭 확대되었기 때문에 이를 보충하기 위한 조세왜곡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러한 점은 조선시대의 문화유산에서 화려함과 웅장함을 찾아볼 수 없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청화백자 등 화려한 유물이 전무하진 않지만.
오늘날 전해지는 전통문화의 대부분은 조선시대때 생긴 것들이 많고 특히 탈춤, 판소리, 민화 등 서민들의 문화가 발달했다.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꾸준한 개간과 간척이 이루어진 데다가, 농사직설 등의 농서 편찬과 감자, 옥수수, 고구마 등 해외작물의 도입으로 농업생산량이 크게 증가했다. 이는 동시대 주변국과의 영양상태 비교로도 확인된다. #
  • 화약무기의 발전.
그때 개발된 화약무기들 중 천자총통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큰 활약을 할 수 있게 해주었고, 문종 때 개발된 화차행주대첩에서 큰 활약을 하였으며, 비격진천뢰는 경주성을 탈환할 수 있게 해주는 등 조선시대 화약무기의 발전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조선은 비록 큰 피해를 입었지만 임진왜란에서 승리하여 왕조를 300년 더 유지했다.
  • 후대에 남긴 영향
개항기 시장의 발전, 근대문명에 대한 이해의 확산·심화, 근대화정책의 경험, 근대적 시설과 기업의 출현 등은 식민지기 경제 발전의 기반이 되었다. 실학사상의 기반 위에 개항 직후 출현한 개화사상은 식민지화의 위기 가운데 애국계몽운동으로 연결되어서 학교 설립을 위한 신교육운동, 실력 양성을 위한 식산흥업운동 등을 낳았다. 좀더 깊이 생각해보면 식민지화 이전 조선사회의 성취가 일제시대의 변화와 성장을 뒷받침한 점을 인식할 수 있다. 1910년대에 성장률이 3% 이상으로 높아졌을 가능성이 있는데, 아무리 강하고 효율적인 식민지정부라도 전근대 경제를 접수한 지 10년 정도에 자신의 힘만으로 3% 이상의 지속적인 성장국면으로 진입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일제 시대 근대문명의 이식이 순조로운 것은 조선시대의 문화 발달과 개항 후 근대문명의 수용 성과와 무관하지 않다. 조선시대 토지소유제의 진전은 토지조사사업의 신속하고 비교적 원활한 수행을 가능하게 하였다. 조선시대 집약적 소농경영의 발전은 산미증식계획기에 일본식의 보다 집약적인 농법을 원활히 받아들일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18세기에 이미 인구밀도가 높았고 노동력의 처분이 자유로웠기 때문에, 일본자본이 노동력의 확보에 애로를 크게 느끼지는 않았다. 교육을 중시하는 조선시대의 문화는 일제시대 교육의 확대를 뒷받침하였다. 조선을 농업사회로 묶어두려는 회사령에도 불구하고 회사자본과 공업이 빠른 성장을 보였던 직접적인 계기는 10년대의 호홍국면과 사회간접자본의 확충이었지만, 식민지화 전에 구축된 기반이 없었더라면 그만큼 현저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까. 조선인 중소공장이 우후죽순처럼 발흥하던 것도 식민지화 전 회사설립운동의 연장선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9]

2. 비판론



2.1.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조세 시스템


조선은 공식적으로는 민본주의와 성리학적 청백리관이 더해진 구도였다. 이 때문에 백성들에게는 세금을 적게 걷고, 관료는 적은 녹봉으로 만족하고, 지방 병영은 그 나름의 수세제도를 갖추는 등, 중앙집권화 국가로서는 비현실적으로 중앙정부에 세금이 모이지 않는 중, 근세 역사상 가장 작고 가난한 정부조직을 가진 나라로 구성되었다. 이 때문에 조선과 그를 이어 받은 대한제국은 극히 일부 시기를 제외하면 무슨 일만 있으면 재정부족, 재정부족, 재정부족의 돌림노래를 부르고, 관료들은 생계유지도 어려울 정도로 비정상적으로 적은 녹봉을 받고, 아전들도 공식적인 급여가 없었다.[10] 즉, 이건 절대로 오래 유지될 수 없는 시스템이었다. 겉으로는 작은 정부를 지향한다 한들, 전술한대로 한반도 전체를 통치하기에 조선의 왕실과 중앙정부가 이런 적은 재정으로 유지하는게 가능할 리가 없다. 이 때문에 실제 조선의 재정시스템은 겉으로 내세운 명분과는 달리 관례화 된 부정부패로 유지된다. 왕실은 내장원이라는 별도의 주머니를 만들었고, 중앙 관료는 지방관들에게 반공식적인 뇌물 수증을 받았고,[11] 지방관은 하다못해 수증을 내기 위해서라도 지방민들을 수탈해야 했고, 군대는 군대대로 수익원이 없어서 농사를 짓거나 후대에는 상업 활동을 했고[12], 공식적인 급여가 적었던 향리들도 그냥 알아서 백성들을 수탈해야 먹고 살 수 있었다. 그러고도 중앙정부에는 여윳돈이 없기 때문에 전쟁을 치르건, 성을 쌓거나 궁전을 짓건, 길을 닦고 광산을 개발하고 기술을 개발하건 그걸 할 수 있는 수익원부터 당장 찾거나 혹은 강제로 동원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13] 조선시대의 정책이 모두 땜질처럼 보이는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이 조세시스템에 기반한 부족한 재원탓이었다. 더 문제는 이 조세시스템이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고 명분상으로는 아주 훌륭했으며, 무엇보다도 왕권을 줄이고 그 사이에 끼어있는 중앙관료, 지방관, 아전들이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권한 이상으로 수탈 할 수 있는 구도였기 때문에, 이 제도를 개혁하려는 시도는 단 한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저 구도하에서는 민란이 발생해도 백성들의 불만이 중앙 정부가 아니라 지방관, 더 극심하게는 아전들에게 집중되었기 때문[14]에 아전들이 우리도 녹봉을 받고 [15] 싶다고 청원을 한 적이 있으나, 단칼에 거절 당했다. 결국 이 문제는 심지어 대한제국 시기까지 해결이 안 되어서, 조선은 가난한 나라라는 인식의 배경이 되게 된다.

2.2. 세종 이후의 과학기술 발전 정체


세종이 너무 먼치킨인 탓도 있지만, 이후에 집권하는 사림들이 과학 기술을 도외시한 탓이 크다. 성리학자들 중에도 수학이나 과학, 고고학 등에 심취한 사람도 있었고 후기에는 실학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추사 김정희의 사례와 같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차원이었고 그마저도 정조가 죽은 후에는... 조선왕조 지배층이 펼치는 정책의 근본은 수신을 통한 성리학적 왕도정치의 실현이었기 때문에 기술의 향상을 통한 발전엔 상대적으로 무관심했다. 그래서 조선 후기의 과학기술은 서양 과학을 부분적으로 도입한 부분을 제외하면 정체되었다. 이미 성종 때부터 정체가 뚜렷이 드러났을 정도니...

2.3. 여성인권 하락


중기 이후 가정 내 여성의 권리가 큰 폭으로 하락하고 인권이 남편과 시가에 종속되는 경향이 심해졌다. 다만 한글의 보급으로 여성의 문화참여는 오히려 늘어났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문화참여라는 게 여성들의 여가문화나 바깥 활동이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고, 남편을 향한 정절과 순종, 가정에 대한 헌신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는 한계가 있다. 즉 부분적인 계몽은 있을지언정 인권신장은 미비했다.[16][17]

2.4. 국방력 약화


이순신, 권율명장들이 지휘할 때는 전과가 훌륭했지만, 이런 명장들은 비교적 한정적이었고,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당시 조선군이 전반적으로 보여준 모습은 비록 200년 동안 전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는 하지만 역대 왕조들 중 가장 안 좋았다. 이는 이성계부터가 군벌이었던 관계로 군벌의 성장을 굉장히 경계하였으며, 이로 인해 정예 군사력의 증강을 경계하고 예비군 형태 중심으로 유지한것이 이유가 되었다. 조선초 기본전략인 제승방략이 임진왜란때 문제가 된 것도 이때문

2.5. 쇄국


중국, 일본과는 그럭저럭 교류가 있었고 초기에는 동남아나 아랍권과도 교류가 있었지만 중기 이후로는 쇄국적인 성향이 점차 강해지면서 교류가 크게 줄어들게 된다. 이는 왕조가 망할 때까지 중국, 일본, 몽골, 만주는 물론 동남아, 인도, 페르시아, 아랍권과도 계속 교류가 있었던 고구려, 신라, 원 말기의 혼란기 이전까지 활발한 교역을 하였던 고려 때와 비교해보면 문화수용과 교류의 관점에서 차이가 명확했다. 오죽하면 한국사를 다룬 역사 만화마다 중화사상과 유교중심 사상에 빠져 자신들이 명나라 다음으로 가는 상국이라는 자아도취에 빠져 교류를 거부하였고 명나라 문화가 아닌 것들은 전부 오랑캐라 지칭하며 기술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만, 조선 초기의 상황은 명나라의 해금령과 이미 그 이전부터 고려말 원나라의 극심한 혼란으로 인하여 바닷길이 완전히 막혀있었다는 사실은 감안해야만 하며 초기에는 외국과의 교류가 활발했다.

2.6. 종교 탄압


삼교 균형의 입장에서 균형의 미덕을 깨는 처사라 역시 대차게 욕한다. 몽골 제국 불교의 영향을 받아 고려시대 후기의 변질된 불교가 국가를 좀먹어 들어갔던데다, 통치이념을 미신을 배척하는 유교로 공고히 하다 보니 조선의 사대부들은 건국부터 불교와 무당들을 극렬하게 멸시했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와 미래에 대한 불안은 어쩌지 못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의존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하는 모순 또한 보여주었다. 유교적 통체이념을 확립했지만 지배층들부터 불교를 버리지도 못하고 믿은 것이다. 당장 왕실부터가 틈틈이 불교를 비호했고 (대표적으로 세조(조선)이나 수많은 왕실의 여인들) 광해군이나 명성황후 민씨는 아예 궐에 무당을 불러들이기도 했다. 궐 내에서 누군가를 저주하는 물품이 발견되거나 굿이 행해졌다는 기록도 빈번하게 나온다.[18]

3. 옹호론


"조선이 왜 500년만에 망했는가?"가 아닌 "어떻게 조선은 500년이나 버티어 냈는가?"라는 질문이 더 중요하다는 입장도 있다. 실제로 500년도 못가서 망한 나라들도 꽤 많다. 중국만 하더라도 500년을 버틴 왕조가 없으며, 왕통의 단절 없이 이어진 가장 오래 지속된 왕조는 청나라의 286년이다. 또한, 외세에 망한 나약한 국가라는 이유로 혐오하는 것은 결국 약육강식제국주의 논리에 불과하다.
하지만 조선이 개혁없이 어거지로 500년이나 존속되어서 나라와 민중이 점차 피폐해졌다는 주장도 있다. 조선의 국가적 위기 상황이었던 시기가 나라를 개혁했어야만 했던 시기인데 제대로 된 개혁을 못하고 그 상태로 200년이나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고인 물을 뒤집지 못한 것이 망국의 원인이라는 시각이다. 동시대 중국과 일본은 양란 이후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고 사회가 크게 변화하였다. 그래도 양란 이후 대동법이 실시되고 몰락 양반과 부유한 상민이 증가하는 등 개혁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게다가 세계적으로 봐도 500년 이상 버틴 나라는 조선 말고도 많다며 조선의 장기적 안정성을 폄하하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동북아시아 유교문화권의 왕조 국가관과, 유럽을 비롯한 다른 문명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한 비역사적 오류이다. 동북아시아는 왕조명이 곧 국가명이었고 또한 그 왕조의 부계 혈통과 사직곧 국가의 흥망과 직결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특히 조선왕조의 개창 과정에서 신진사대부 중 온건파가 폐가입진[19]에 의한 공양왕 옹립은 찬성했으나, 역성혁명에 극렬한 반대를 한 것은 왕성(王姓)이 바뀐다는 것이 곳 고려의 멸망을 뜻하는 문제 때문이기도 했다. 실제로 이성계는 즉위교서에 국호를 고려로 유지한다고 했으나, 다음해에 국호를 조선으로 바꾸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아시아권 내에서만 비교해봐도 중국 역대 왕조들이나 일본 역대 막부들 중 300년 이상 버틴 정권은 드물다.
반면, 서구권에서는 왕조를 국체와 동일시하지는 않았다. 서구권 왕국이나 제국들의 존속 기간이 긴 것도 그 때문이다. 동양에서는 왕조가 주씨에서 애신각라씨, 왕씨에서 이씨로 넘어가면 국체(Polity) 자체도 근본적으로 변한 것으로 본다. 왕족의 혼인 관계에 따라 왕조가 덜컥덜컥 바뀌면서도 국체가 유지되는 것은 봉건제의 영향이 짙은 유럽의 왕국들에서나 가능했다. 조선이나 중국처럼 왕조 자체가 500년 이상 존속한 경우는 서양권에선 유명한 경우는 합스부르크, 오스만 제국, 훗날 통일 이탈리아의 시조가 되는 사보이 왕조 정도이다. 쉽게 설명해서 프랑스 혁명 이전의 프랑스와 이후의 프랑스가 단순히 국명이 동일하다고 하여 진짜로 동일한 국체를 가진 동일한 국가가 아닌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대중이 조선의 역사에서 특별히 부정적인 부분은 세도정치 시기와 구한말이다. 확실히 당시의 조선은 국가 기강이 붕괴하고, 철종이 죽기 직전에 벌어진 대규모 민란으로 왕조도 껍데기만 남아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조선이 500년이나 지속된 후, 국력을 다하고 국운 자체가 저무는 중이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결국 조선의 멸망은 "망할 때가 되어서" + "(지배층이) 개혁과 개화에 실패해서" + "일본이 쳐들어와서" 의 세 가지가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이중에서 어느 쪽에 더 큰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 그 평가가 180도 달라질 수 있다.
그런데 조선에 대한 이미지와는 별개로 조선의 4대 왕이었던 세종대왕에 대한 이미지는 굉장히 좋은데 조선을 폄하하는 이들도 세종대왕만큼은 폄하하지 않는다. 사실 조선은 대중들의 극과 극의 평가를 받는 왕조인데 당장 세종대왕 / 문종 때 조선이나 선조 / 인조 때 조선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을 비교해보자. 물론 어느 왕조나 명군이 있었으면 폭군이나 암군도 있었기에 어느 왕을 중점에 두느냐에 따라 왕조의 평가가 달라질 수 있지만 적어도 한국에서는 조선만큼 극과 극의 평가를 받는 왕조는 없다.
조선의 상업과 19세기의 혼란상에도 과도하게 폄하의식이 있다는 의견도 있다. 일례로 조선 문서의 경제 문단에는 조선의 육지 유통망이 부족하다는 설명이 있는데, 국토의 절반 이상이 산지라 수레 타령하기에는 한계가 많다.[20] 이미 대규모 운송 시스템을 갖춘 수로 유통망을 500년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던게 조선이다. 게다가 그 삼정의 문란 운운하는 19세기 위기론 역시 그 실체가 과도하게 부풀린건 아닌지 의문이 제기된다.[21] 물론 중국이나 일본처럼 가시적인 상업의 발달을 기대하기 힘들다지만, 원시적인 금융시스템과(어음) 상업도시(평양, 개성), 대규모 소비도시(서울) 거상의 출현, 유통망의 발달이 분명히 이뤄졌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다.
또한 조선시대를 낮춰보는 시선에는 “고려청자는 화려한데 조선 백자는 수수하다.”[22], “화려하지 않다.”, “옛날에는 황룡사 같은 거대건축이 많은데 조선은 안 그렇다” 등 단편적인 이야기만 한다. 그리고 삼국, 통일신라, 고려시대는 화려하고 아름다우나 조선은 투박하다는 비전문적인 시선을 견지하고 있다.
조선의 기술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전보다 오히려 더욱 발달했으며 말기로 갈수록 더 발달한다. 당연하지만 시대가 지나면서 기술이 발전하고 이로 인해 더 화려해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오히려 조선이 화려함을 멀리했다는 것은 객관적인 자료로 합리적으로 판단해도 수긍하기 어렵다. 단청, 공포, 청화백자, 누정건축[23], 불교건축[24], 궁궐 건축[25], 닫집, 자개와 칠기를 보면 말이다. 오히려 이러한 요소는 대중의 관심에 비껴가 현대에는 실전될 위기인 게 현실이다.
거대함이나 화려함을 가지고 한 시대를 단정내릴 수 없다. 건축의 경우 동서양 어느 문화권을 막론하고 거대 건축의 수요는 필요가 없어지니 점차 줄어든 경향이 있다. 중, 근세에 피라미드 같은 건물을 짓지 못했다고 중, 근세와 르네상스 시대가 퇴보한 시대는 아니며, 삼국시대 신라의 왕릉이 통일신라의 왕릉보다 크다고 삼국시대 신라가 더 찬란하고 위대한 시대라고 단정하기는 힘들다. 특히 왕궁, 종교, 선전용 건축을 제외하면 건축 기술이 발전하면서 커다란 건축 수요는 점차 줄어들었다.

3.1. 사대주의조공 관계의 실익


민족주의의 태동이래 한국 대중은 일반적으로 조선의 대중국 사대주의 외교를 치욕스러운 것이라고 비난한다. 또한 반대급부로 해방 후 사학계에서는 조공의 경제적 측면을 부각하여 이를 속국관계가 아닌 교류와 같은 관계로 설명하고자 한다.
홍무제가 1368년 몽골을 막북으로 축출하자, 공민왕은 이듬해 곧바로 봉표칭신의 예를 통해 칭신했다. 명은 몽골을 축출했기 때문에 변방의 안정을 위해 막북과 동북 방면을 크게 경계했다. 홍무제는 고려에 이어 새로이 개창된 조선을 길들이기 위해 다방면으로 조선과 치열한 외교전을 벌였으며, 그에 이어 즉위한 영락제의 치세 중반부터 선덕제의 치세까지 조선은 두 호걸 황제의 여성 편력, 음식 취향 등을 맞춰주느라 대단한 곤혹을 치렀다는 점은 분명하다.[26]
그러나 공녀와 환관, 세공, 공녀, 책봉, 사신 접대 문제 등으로 마찰을 벌이고 압력을 받았다고 해서 그것을 부정적 의미를 내포한 사대주의적이라는 프레임과 함께 비난을 가하는 것은 타당치 않다. 어찌되었건 조선은 조공을 함으로써 국익을 얻은 것은 틀림없고, 명도 마찬가지였기에 그 관계를 지속했다. 거란몽골 등의 외침에 시달렸던 고려 전중기를 떠올려 보면 조선은 공민왕대 수립한 속국관계를 계승하여 북방으로부터의 안정을 얻어 군비를 절약하고 중국의 다양한 선진 문물을 수입할 수 있었다.[27] 또한 몽골 제국이 고려 전기까지 지속되었던 대륙의 분열을 종식시키고 고려 또한 복속되어 국제질서가 고착화된 것 뿐만 아니라 몽골복속기에 원의 주자학을 수용한 고려 식자층 중 신흥유신들이 주자학을 하나의 국시로 천명하고 개창한 조선에게 명은 주(周)-한(漢)-당(唐)-송(宋)에 이어 건설된 한족의 유교적 중화문명의 담지자였다. 특히 단순히 자신들의 종주국이 아닌 영원불변의 부모와 같은 존재였다. 이렇듯 조선 식자층은 유교의 예교문화를 조명관계에 적용하여 명을 군부(군주이자 부모), 자신들을 신자(신하이자 자식)라고 자기신념화하고 그 분의를 지키는 것을 '충효'라 인식했다.[28] 그들이 군부신자의 관계로 설명한 속국관계는 작금의 한국 민족주의가 '민족', '자주', '독립' 등을 강조하듯이 일종의 절대적인 이념 내지는 신앙이었으므로 현대의 잣대로 그것을 비난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조선의 유학자들이 조선의 예제와 문물을 당대 중화문명의 기준에 맞추어 개편하려고 한 것은 명의 예제패권주의가 강요된 결과가 아니라 몽골복속기를 통해 자기정체성 설정에 있어 변혁을 겪고 속국관계에 익숙해진 유학자들이 명 질서 속에서 속국 조선의 지위를 자각하고 명의 간섭 및 확인이 미치지 않는 범위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낸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개편을 통해 '동쪽주나라를 구현하고자 했다. 즉 이는 주권의 박탈이나 국익의 말살이 아닌 명분과 같은 실리를 추구했다고 보아야 한다. 즉, 실리를 통해 명분을 확인하고 또 명분을 통해 실리를 얻었던 것이다.[29] 다만 조선의 건국 이래 유교화의 심화와 명 질서의 안정화로 인해 유학자들이 필요이상으로 사대주의소중화사상에 심취하여 조선의 문신들이 징병칙서를 거절한 광해군의 왕명을 거부하여 파업에 벌이고 계해정변까지 초래한 것, 가도의 모문룡 휘하 명군의 횡포를 방기하고 재정을 쏟아준 것, 병자호란 직전 청 사신 박대한 것[32]등은 크게 비판받기도 한다.

3.2. 소중화주의와 모화사상, 그리고 국학


교육받은 평균적인 조선인을 뜯어보자. 그는 모종의 지적인 총명함과 세련됨을 지니고 있다. 그의 기억력은 잘 훈련되어 있다.(...) 그의 눈은 과거, 특히 중국의 과거에 고정되어 있다. 그는 고대로부터 내려온 전통과 관습의 노예다. 그의 사고는 폭이 넓지도 독창적이지도 않다.

- 대니얼 기포드, 「조선의 풍속과 선교」

조선의 조공외교를 두고 굴종적이고 비자주적인 정체성을 가졌다는 폄하의식이 있는데, 반대로 조선의 소중화사상을 들어 조선이 국뽕과 교조적인 국수주의를 가진 나라라는 비판 역시 존재한다.
물론 조선 후기의 정치체제가 취했던 소중화주의, 교조적 성리학이 폐쇄적이고 독선적인 이론이 모화사상 같은 비뚤어진 사상에 큰 악영향을 주었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는 없다. 이런 폐쇄성은 기존의 중화 숭배 사상을 비틀어 자국 문화만을 제일로 여기는 사상을 낳아 외부의 발전된 문물이 들어오는데 큰 장애가 되기도 하였다. 사실 당시는 병자호란과 명의 패망으로 이미 서구 열강이 들어오기 이전에 중화 질서의 파괴를 한 번 겪었고, 조선 후기까지 그에 대한 반동으로 지나치게 유교와 중화에 집착하는 일종의 중국화와 정체성 혼란을 겪은 결과이기도 하다. 조선이 원래부터 이상했던 것도 아니라는 것.[33] 당시 문체반정을 주창한 정조마저도 신하들과의 사사로운 서편에서는 고문을 내팽겨치고 써버렸으니… 만약 청에서의 서적 수입이 활발하게 진행되지 않았다면 조선 말 오경석, 박규수 등의 개화 사상파에 영향을 주기 힘들었을 것이다. 오경석 같은 경우에는 역관으로 근무하며 중국에서 수많은 신(新) 사상을 들여온 인물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자국 문화에 대한 자부심으로 뭉친 이들과 청나라 문화에 대한 동경을 가진 이들이 혼재되었던 시대라는 것. 한편으로는 당시 조선의 후진적이라고 생각되는 문물을 버리고 청의 진보된 사상과 문물을 받아 들이자고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 언어 문학 사용론, 한국적 진경산수화 등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것이다. 다만, 이 북학 사상파 역시 따지고 본다면 송시열, 이이명 등 선대의 노론 유학자들에 그 기원이 연연한다. 그리고 북학 사상파들은 주로 노론 경화사족들을 중심으로 널리 퍼져 있었으며 오히려 보수파들은 충청도 등 시골 지역에 많았다. 아니 애초에 중농학파건 북학파건 실학 연구가 흥한 동네가 오늘날 서울, 경기권이다.
무엇보다 세계적으로 기존 지식을 버리고 새로운 지식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나라는 많지 않다. 또한 그렇게 마구 받아들이고 완전히 자신의 색을 잃은 나라도 적지 않다. 애초에 세계 열강의 물결 앞에서 제대로 설 수 있었던 나라는 일본이 대표적인 예이며 왜 조선은 그렇게 못했냐는 것은 너무 크게 기대를 품는 것이다.
이 시기 조선에는 소중화주의와 같은 자뻑에 이어서 모화 사상 같은 정신승리 사상까지 융성하게 된것이다. 모화 사상을 통한 정신 승리는 명 황제에 제사를 지내면서 청나라의 패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 예시가 이미 명나라가 망한 지 오래인 시점에 세워진, 명나라 황제 만력제숭정제를 모시는 사당 만동묘이다. 하지만 현실적인 힘의 차이 때문에 드러내놓고 반발을 할 수가 없으니 이렇게나마 소극적인 태도로 반발을 하겠다는 것. 또 하나는 명나라가 멸망하였으니 이제 중화는 중국이 아니라 조선이 계승하겠다는 소중화 의식으로 설명된다. 외왕내제 형식으로 황제국을 자처했던 베트남도 명나라 황제에게 제사를 지낸 전례가 있다. 사실상 명나라와는 달리 청나라는 조선이 강제적으로 사대를 한 나라였으므로 이러한 반발이 나오게 되는 것. 또한 중국은 한반도보다 더 선진적이었기에 이러한 문화적 동경심이 모화 사상의 바탕이었다. 극단적인 예시가 1937년까지 이어진 만동묘 제사.[34]
모문룡 문서를 봐도 알겠지만, 병자호란과 함께 교조화된 모화 사상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지목되는 정묘호란 때 명군은 도움은커녕 민폐만 잔뜩 끼쳤다. 비단 임진왜란 뿐만 아니라 병자호란 대의 조선 인근의 명나라 잔당들의 행태는 그야말로 말이 아니었는데, 조선인 양민들을 걸핏하면 죽여대고 그 목을 청군이라 속여 조정에 보내기도 하고 수시로 문제를 일으켜 보다 못한 청나라 군대가 이들을 쫓아내줬을 정도였다. 다만 이들은 조선의 보급 실패로 인해 제대로 보급을 받지 못하여 약탈이 심했다 뿐이지, 확실히 도움은 크게 되었다. 사실상 대신 전쟁을 치뤄주는 격이니. 단편적인 시각으로 전체를 재단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물론 그렇다고 약탈한게 잘했다는 것은 아니고, 무엇보다 도와준답시고 왔으면서 당시 일본군에게 당했던 것 못지않게 약탈을 해댔으니 당대 조선인들이 반감을 가진 것은 무리한 일이 아닐 것이다.
아래 글에서도 보듯이 1980년대의 학자 최완수는 조선이 중화라고 여겼던 당대의 인식을 조선중화사상으로 구분 지었으며, 이것을 조선 후기를 이끌어간 시대 정신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생존 수단으로만 이용할 뿐이었던 대명 사대가 결국엔 시대착오적인 모화 사상으로 변질되어 정체성마저 그에 묶여버려 사회를 퇴보시킨 것은 분명 후기 조선 지배층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다.

3.3. 개화기의 사대


한국이 중국의 속국이자 일부이며 자주성과 독자성이 없는 국가라는 관념을 일종의 스테레오 타입이자 중화권과 일본의 혐한과 한국사 왜곡의 이론적 토대로 만들어버린 것은 분명 이 시기 조선이라는 정체의 업이긴 하다. 스스로가 사대를 정치적으로 너무 많이 이용해 먹어 자승자박을 해버린 게 문제. 특히 임진왜란이 끝나고 자신의 권력 안정을 위해 전쟁공 신들의 역할을 깎아내리고자 명나라 군대의 전공을 드높이고 자국 군대의 공적을 깎아내린 선조의 실책이 크다. 이후 재조지은면서 명나라의 크고 아름다운 은혜가 없었으면 우리는 망했을거야라는 생각이 뿌리내려버렸고 기존의 실리적인 사대 대신 맹목적인 사대가 나타났다. 광해군 때는 신하들이 중국 핑계를 대며 왕의 명에 항거하는 웃기지도 않는 사태가 벌어졌다.
개화기에는 이양선이 교역을 요구할 때마다 교역을 거부하면서 조선은 중국의 속방이기 때문에 멋대로 너희와 외교 관계를 맺을 수는 없다라고 했으니 사실상 스스로 만천하에 자신들의 사대주의를 홍보한 셈. 오히려 청나라에서 조선이 외교와 국방에선 자주권을 누려왔다고 해명했다. 사실 조선 정부 입장에서 본다면 서양의 개항 요구를 거절하기 위한 핑계에 가까운 것이기는 했다. 더불어서 "우리를 건들면 중국이 가만있지 않을걸?"하는 나름대로의 경고(?)를 겸해서. 그러나 서양 사람들 관점에선 거의 자기들이 아는 '식민지' 비슷한 걸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거문도 사건.
하지만 개화기의 지식인들도 비슷한 '사대'를 강하게 비판한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갑신정변에서도 제일 먼저 청나라와의 예속 관계를 끊을 것을 주장했고, 독립협회에서도 영은문을 박살내고 독립문을 세우는 등 '사대'에 대해 비판적이다 못해 적대적인 반응을 보였다.
다만 이에 대해서 "개화기 지식인들이 서양인의 관점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라는 주장도 있다. 일각에서는 개화기 지식인들이 조선 스스로의 '사대'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서 서양인들의 관점을 무비판적으로 배웠을 것이라는 주장은 당시 지식인들의 지능 수준을 무시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하는데 물론 당시 지식인들의 지능 수준을 무작정 무시하는 것도 지양해야겠지만 현대에도 미국이나 여타 선진국 문물이면 무조건 하악거리는 사람들이 상류층이나 지식인들 사이에도 상당히 존재함을 생각하면 당시라고 그런 사람들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당장 일본만 해도 비록 논란은 많지만 지식인이라던 후쿠자와 유키치가 어떤 태도와 사상을 보였는지 생각해보자.
물론 갑신정변 이후 위안스카이가 조선 문제에 깊이 개입하고 심지어 조선을 청의 속방으로 하자는 주장까지 하면서 더 강하게 속박한 기간이 있었으므로 그 영향도 있었겠지만, 개화기 지식인들이 '사대'에 적대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갑신 정변 이전에 이미 시작된 것이므로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는 힘들 것이다.[35] 게다가 나라가 망하기 전 각국에 열강들에게 이권을 내주다가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겨 멸망한 것에 대한 책임 역시 두고두고 까여야 할 대목이 아닐수 없다.
개화기의 조선에 대한 옹호론에서 그 시기에 필요했던 것은 정말 국가를 바로 세울 능력자들이 한 가운데 뭉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이끌 정도로 초월적으로 능력있는 정치가였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저 평범하게 능력있는 고종, 명성황후에게는 너무 거대한 시련이었다는 것. 쇄국이니 뭐니 해도 데지마에서 제한적으로 네덜란드와 교류한 일본[36]과 기껏헤야 하멜, 벨테브레이, 러시아 군인 몇명과 조우한 조선 왕조는 서구 문물에 대한 이해도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였고 그것은 이미 지도자 몇 명이서 힘낸다고 메꿀 수도 없을 정도의 격차였다.[37]
그 당시에 열강으로 성장한 일본 말고도 독립을 지킨 비유럽권 국가들이 있었지만, 이들 중에서 순수하게 자기 힘만으로 식민지가 안 된 나라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물론 에티오피아태국 등의 예도 있지만 이들은 그들이 가진 지리적 이점-서로 적대하거나 대립하던 서구 열강들의 이해 관계-으로 일종의 완충 지대로서 국가를 보존한 것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앞에 언급한 일본도 서구 열강이 중국 뜯어먹기에 정신이 없어서 상대적으로 일본 침탈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정세 덕을 안 봤다고 할 수 없다. 심지어 국가를 형성하지 않은 남아메리카의 마푸체 역시 오랫동안 스페인에 맞서 독립을 지켜냈다며 조선을 까는 경우도 있지만 스페인남아메리카는 거리가 조선과 일본의 거리보다 훨씬 더 먼 데다 당시는 아직 서구권이 다른 지역들을 압도하기 전이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마푸체도 결국 19세기에 들어서는 그 스페인에게서 독립아르헨티나칠레에 정복당해 거의 식민지인이나 다름없는 대우를 받았으며 현재도 그저 소수민족으로 근근히 명맥을 이어가는 상황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또 식민지가 된 나라들도 마이소르 왕국처럼 치열한 항쟁 끝에 점령당한 경우가 많고, 조선처럼 우리의 독립을 유지시켜 달라고 외국에 편지를 보내는 게 '저항'의 전부였던 경우는 드물다지만 조선도 나름대로 저항은 했다. 물론 그 저항이 국가나 왕조 차원의 저항이라기보단[38] 민중의 저항에 가깝긴 했지만 일본 역시 조선을 완전히 식민지로 삼기 전에 남한 대토벌 작전 등으로 의병 세력을 쓸어버리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39]
현재 사학계에서는 형식적으로 조선은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았고 그것을 근거로 근대에 속국이라고 주장되었지만 거의 형식적인 절차였고 외교와 내정에 대한 중국의 간섭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의 자주국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물론 모든 시기에 그랬던 것은 아니긴 하다. 조선도 명나라 초기나 청나라 초기에는 거의 뜯기다시피 조공을 바쳐야 했다. 명과 청이 안정되면서 점차 조공의 양을 줄여주었고 조공은 오히려 조공을 '바치는' 쪽이 이익인 형태로 변해가기는 했지만, 그러한 변화는 명과 청의 국제정책 변화로 인한 것이었지 조선이 힘이 강해졌기 때문은 아니었다.
물론 19세기에는 청이 간섭을 심하게 해서 그 이전보다 심하게 예속될 뻔한 시기였다. 이때는 내정 간섭까지 받는 완전 속국이 될 뻔했고,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대'는 이 정도의 예속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이는 청나라가 서구의 식민지 개념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열강들이 눈여겨보는 주변국에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우리도 이제 식민지있는 제국이라고 해야될텐데 마침 조공국들이 있네?'라는 일종의 왜곡 시도였다.
그런데 청의 예속이 절정을 달리던 1894년조차 청은 일본이 조선의 내정 개혁에 공동 착수하자는 제의를 하자 조선의 개혁은 조선인들의 몫인데 헛소리 말라고 거부했고 이홍장은 선교사들이 당신네 속국인 조선의 카톨릭 합법화를 허가해달라고 요청하자 조선은 자주적으로 정치를 해왔다고 못한다고 대답했다면서 이 때도 예속이 심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4. 문치주의



4.1. 중앙집권체제


조선은 신진 사대부들로 대표되는 사상가들이 중심이 되어 세운 나라로, 중국에서 먼저 만들어진 성리학을 국가 통치에 맞게 이상적으로 정비하여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국가의 틀을 완성했다. 때문에 대당률과 관습법에 의존했던 고려와는 달리 경국대전으로 대표되는 성문법 체계가 완비될 수 있었고, 철저히 관료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나이 어린 왕이 즉위했을 때는 성년이 되기 전까지는 대비가 수렴청정을 했으나, 권한도 동시대 중국에 비하면 그리 강한 편은 아니었다. 다만, 명나라청나라 황제의 권력이 다른 중국 왕조의 나라들과 비교해도 압도적으로 강했다는 것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기본적으로 왕조차 법 아래에 있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입헌군주제의 설명과 일치할 정도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서양 학문의 정의 그대로는 정말로 그렇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조선의 왕이 진짜 성문법 체계에 강하게 구속받았는지 여부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일단 입헌군주제라고 한다면 군주의 통치가 헌법에 의해 제한되어야 한다. 조선의 정치제도 구성에 대한 법률이나 관습법 등을 광의의 헌법이라고 전제하더라도 왕이 구속되는 그 헌법 혹은 법률은 왕의 통치범위에서 벗어난 주체가 만든 법률에 제약되어야 한다. 즉, 아무리 프로이센형 같은 외견적 입헌국가라도 외견적이나마 의회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하며 그런 독일 제국 자체도 법실증주의에 의거해서 비록 왕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의회지만 그 의회에서 만든 법률 자체는 군주의 권한 남용 방지에 기여했다는 의의가 헌법학의 의견이니만큼, 단지 왕이 법률로 제약받는다는 가능성이나 제약받아야 한다는 유교적 개념을 입헌군주라고 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물론 조선의 왕 역시 현실적으로나 명분상으로나 귀신도 부릴 수 있는 절대권력이었다. 왕권 자체만 놓고 보면 조선은 한국사에서 가장 왕권이 강력한 국가였다. 하지만 관습법에 더해 경국대전 같은 성문법 체계를 체택하고 있었던 조선에서는 신하들이 "선왕과 조상들이 정하신 법을 위반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하고 대항하면 왕도 이를 감안해가며 움직이긴 했다. 왕이 작정하고 시행하려는 정책에 신하들이 반대로 내놓는 논리가 바로 선례에 없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조선조 가장 기반이 약했던 철종도 진짜 작정하고 막나갔으면 무소불위의 권력을 얼마든 휘두를 수 있었다. 단지 그 뒷감당이 두려워 자제했을 뿐이다.] 결국 기본은 전제군주정이긴 하나, 신하들에게 헌법의 다운그레이드 형태인 법전을 쥐어주고 왕권을 견제했던 셈이라고 볼 수 있다. 참고로 이 형태는 정도전 시절에 주창된 것으로, 정도전은 심지어 입헌군주제의 개념조차 없는 상황에서 내각책임제를 제창한 성리학자이다.
몇몇 학자들은 의상학과 관련하여 조선의 의복이 양반부터 평민까지 그 형태가 동일함에 주목하기도 한다. 과거 신분제 사회에서 신분에 따른 옷의 구조 차이는 보편적이고 전세계적인 것인데 조선왕조는 그런 면에서 매우 특이하다는 것. 실제 조선의 옷은 새부적인 문양이나 색 등의 차이를 제외하면 임금부터 백정까지 그 구조는 동일하다. 물론 한복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저고리나 바지가 보편적일뿐 왕이나 사대부의 경우 곤룡포와 도포같은 옷을 입은 반면 아래 백성의 경우 경제적 여력과 가사 규제 때문에 저고리와 바지 외엔 입지도 못했다.
세종실록에서는 "우리는 옛날(삼국시대)에 사람을 순장하는 것을 없앴는데, 쟤들은(명나라) 아직도 하는 걸 보면 존경할 수만은 없는 듯."하고 당시 최강대국이었던 명나라를 비판한 바가 있었다.

4.2. 우수한 기록 문화


기록 문화 역시 세계적 수준이었다. 세계적으로 드물게 국가 주도로 방대한 역사 기록은 물론이고 및 왕실과 조정을 가까운 거리에서 관찰한 기록을 남겼다. 조선왕조실록의 세세한 기록 수준 및 사관들의 전문성과 프로 정신은 익히 알려져있을 정도이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수준을 보여주는 사례로, 태종이 말을 타다가 떨어진 날 태종은 부끄러워 "사관에게는 알리지 말라."라고 하였으나 사관은 그것을 '말을 타다가 떨어지셨는데 주위를 둘러보시더니 사관에게는 알리지 마라고 하셨다'라고 그대로 받아적은 적이 있다(...).
다만 이는 조선 전기에 한정되며, 조선 후기인 영-정조대에는 왕이 적지 말라고 하면 그냥 안 적었고, 승정원 일기에 적힌 내용도 조금씩 수정 및 조작이 이루어졌다. 단 사관들도 우회책을 써서 직설적으로 쓰진 않고 우회적으로라도 어떻게든 기록을 남기고자 노력했다. 예를 들어, "역적 OOO가 한 말을 쓰지 마렷다!" 라고 왕이 명하면 말은 쓰지 않되 그 OOO와 비슷한 말을 한 자인 XXX가 기록되어 있으면 "역적 OOO가 한 말은 역적 XXX가 한 말과 비슷한 말이었다," 라는 식으로 기록하는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기록이 너무 넘쳐나다보니 왕조에 대하 환상을 가질 여지도 없고 반대로 비참한 부분은 매우 세세하게 적혀있다보니 조선이 괜히 더 비난받는 면도 없지 않다.
기록에 대한 문인 계층의 관심과 욕구도 높았다. 영조, 정조 대에 이념 및 외교적인 이유는 청나라로부터의 서적 반입을 금지했음에도 청나라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인들이 사신으로 오가면서 당시 북경의 서점가에 있는 책들을 쓸어담고 다녔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유입된 청과 서양의 서적들은 실학으로 대표되는 정조 시대의 학문적 발전의 근간이 되었다.

4.3. 정교한 관료제


관료제 또한 매우 근대적인 체계였는데 유럽 같은 다른 나라들은 19세기까지 매관매직, 엽관주의나 하고 있을 때[40] 조선은 이미 근대적인 실력주의 관료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동시대 유럽에서 시험으로 관료들을 선발한다는 개념이 아예 없던 시절[41] 당대 조선은 이미 과거제도를 통해 관료들을 선발하고 있었는데 고려시대때 처음 시행된 과거제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고려시대때의 문제점들을 대폭 개선, 지역균형과 능력주의가 매우 절묘하게 섞인 합리적인 제도로 발전했다. 소과에서 각 도별로 할당된 인원을 먼저 뽑은 뒤 대과에서 점수로 줄을 세워서 최종 합격자를 가렸다.[42]
물론 그 만큼 난이도와 경쟁률은 상상을 초월했는데 전국에서 모인 수만 명의 응시자 중에서 소과 복시(최종)에서 200명을 제외하고는 전부 쳐내며 그 200명 중 단 33명만을 대과 복시에서 뽑았다. 명나라에서는 수십만 명 중에서 400명이었으니 조선이 경쟁률에서 낫긴 했지만...
또한 시험 단계도 어마어마하게 빡빡해서 진사시/생원시, 즉 소과를 통과해야만 대과 응시 자격이 주어졌다. 당장 생원/진사시를 통과해 생원이나 진사 타이틀을 따면 그 아래로 4대가 양반신분을 유지할 수 있을 수준이었으니 생원/진사시의 난이도 자체가 장난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일반 양인의 경우에도, 과거 응시 자격이 주어졌고 통념과 다르게 조선대의 평민 출신 문과 급제자 비율은 초기 40% ~ 50%였으며, 이런 초기 과거 급제자 출신들이 문벌을 짓기 시작한 중기에는 점차 낮아져 10% 후반대까지 이르렀으나, 양란 이후 다시 비율을 회복해 후기에는 다시 40% ~ 50% 비율을 유지했으며, 말기에는 60%에 육박했다는 최근 연구 결과도 있다.[43] (한영우 이화여대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겸 서울대 명예교수 연구) 출처 기사1 기사2 이 처럼 과거제는 신분과 계급에 상관없이 실력으로 관료들을 선발한다는 점에서 동시대 유럽 같은 다른 국가들에서는 매우 보기 힘든 실력주의에 바탕을 둔 객관적이고 평등한 관료선발 제도였다.
서양에서는 보통 근대국가의 탄생에 대해 얘기를 할 때, 근대국가는 중앙집권을 했고, 관료주의이며, 성과중심주의였으며, 또한 영토 전체를 꿰뚫어서 효율적으로 통치했다고 주로 설명하는데 조선은 이 기준에 맞춰볼 때 근대국가에 훨씬 더 가까운 모습으로 당대 조선의 정부에는 수많은 행정 부처들(인사처(이조), 국방부(병조), 세무부(호조), 외교부(예조) 등등)이 있었고 또한 과거 같은 시험으로 선발된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자문위원들이 있었으며, 실제로 이런 중앙집권 체계는 꽤 복잡한 방식으로 잘 운영되었다. 각 지방들 역시 중앙정부로 부터 직접적으로 통치되었는데 각 '도'와 그 밑의 수많은 행정구역들로 굉장히 체계적이고 정교한 모습으로 각각의 행정구역들이 설정되 있었으며, 각 지역마다 일종의 치안판사라고도 볼 수 있는 관료들이 파견되어 있었고 행정관이나 관료들은 현지에서 선출되지 않고 모두 과거를 통과한 뒤에 중앙정부로부터 각 지방으로 파견되었다. 이러한 체계적인 중앙집권화된 국가의 모습은 동시대 유럽 같은 다른 나라들에서는 굉장히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5. 과학 기술


과학 기술의 발전은 15세기 중반 세종, 문종 시대에 한 차례 큰 발전이 있었으며, 이후 18세기 후반 정조 시대에 다시 상대적으로 가시적인 진전이 있었다.
세종 ~ 문종 시대가 특히 두드러지는데, 당시 혼천의, 앙부일구, 자격루, 측우기와 같은 기구들을 많이 만들었던 사람으로 이천, 장영실을 들 수 있다. 또한 칠정산으로 당시 정확한 역법에 도달했으며, 화차신기전, 화포, 총통기, 오연자포와 십연자포 등 화포 기술을 갖추고 있었다.
이런 기술은 총통위가 폐지된 세조 이후 크게 쇠퇴했으나[44], 양란을 거친 다음 군사 기술은 지속적으로 발달했다. 거북선은 최초의 철갑선까진 아니라지만 최초의 장갑함이라 할 만한 선진적인 군함이었다. 또한 적군이 기병들의 눈에 석회 등을 던지는 것을 막기 위해 수정을 갈아서 고글인 '풍안경'을 만들었을 정도이며 한번 장전으로 2연발 ~ 3연발 연사가 가능한 '연발 조총'도 제조했다. 그리고 수통사기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도 제작 기술 또한 계속 발전해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같은 당대 최고 수준의 세계 지도나 대동여지도 같은 훨씬 더 정확한 지도들이 제작되었다.

5.1. 천문학


천문학 또한 발전해 칠정산 같은 우리나라 최초의 역법이 만들어졌고 세계에서 2번째로 만들어진 전천(全天) 천문도이자 세계 최초의 고경도 석판 위에 새겨진 전천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 또한 제작되는 등 여러 분야에서 계속 발전이 이루어졌다.[45]
산학과 역법은 베이징의 서양 선교사들의 역법을 받아들이면서 17세기까지 일본에 대한 우위를 유지하였다. 대표적으로 일본은 1643년 조선통신사 사절중 독축관(讀祝官) 박안기에게 칠정산 계산법을 전수받고 이것을 연구하여, 1682년 시부카와 하루미(澁川春海)가 일본 최초의 역법인 정향력(貞享曆)을 완성하였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우월성은 18세기 후반을 기점으로 일본이 에도 시대가 무르익으면서 역전되었다. 조선 통신사에 대한 대접도 점점 더 하락하여 순조 11년인 1811년에는 더 이상 통신사가 가지 않게 되었다.[46]
북학파홍대용이 1766년 의산문답(醫山問答)으로 자전을 주장한 것은 최소한 200년 늦고, 실학자 최한기가 코페르니쿠스지동설을 (중역으로) 받아들인 건 발견 300년 후였으며[47], 아이작 뉴턴만유인력윌리엄 허셜의 근대 천문학을 (역시 중역으로)받아들인 것은 발견 180년 뒤(1867년의 '성기운화(星氣運化)')였다. 이는 유럽보다 250년 이상 뒤쳐진 것이었으며, 그나마도 기학을 통한 독자적인 해석에 기반하였다. 최한기는 근대 의학 역시 신기천험(身機踐驗, 1866년)을 통해서 소개했으나 이것 역시 막 서양인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중국의 서적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결국 이러한 실패한 개화와 일제 강점기의 억압적 교육 정책을 바탕으로 한국의 과학은 한국전쟁까지 사실상 전무하다 싶은 정체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단 역법 항목에도 나와 있듯이 서양 천문학을 서서히 학습해 나갔기 때문에 일반인들의 인식과 다르게 조선은 서양 과학에 그리 무지하진 않았다. 17세기부터 18세기까지 서양 천문학이 계속 갱신되었기 때문에 19세기에 불완전한 지식에서 완전한 지식을 얻었다고 봐야 한다.[48]
영조대에 저술되어 구한말에 증보된 증보문헌비고를 보면[49]# 18세기 조선에서 통용되던 서유럽의 천문학을 확인할 수 있다. 케플러(刻白爾)와 뉴턴(奈端)등 당대 서유럽 과학자들의 연구 실적을 인용해 조선의 하늘에 맞게 보정하는 과정을 거치는 모습이 보인다. 관에서는 19세기 홍대용이 저술한 서적보다 훨씬 일찍부터 전문적이고 수학적인 법칙을 이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5.2. 기타


연산군 대에는 은광석에서 순수한 을 추출하는 첨단 회취법인 연은분리법이 개발되었으나 은본위 경제체제가 발달되어 있지 않은 조선에서 그리 유용하게 사용되지는 못했고 오히려 이후 일본으로 퍼져 일본의 은 대량생산에 큰 영향을 주었다.

5.3. 건축


정조 시대는 조선 과학의 마지막 정점이었다. 수원화성은 당시 서양의 기술을 도입하여 동양 성곽 기술의 결정체라 할 만했으며, 그 기록 역시 상세하게 남겨져 있다. 다만 화성은 실용적인 용도로 사용되지는 못했으며, 서양 과학 기술의 도입 역시 매우 느렸다.

6. 범죄 수사


조선은 범죄의 수사에 있었어도 꽤 과학적인 기법을 동원하였음을 <신주무원록>등의 저서를 통해 알 수 있다. 신주무원록의 과학성을 엿볼 수 있는 글.
검시 체계도 초검과 복검, 삼검에 걸쳐 검시해 초검과 복검의 결과가 일치해야만 사건을 종결하였고 일치하지 않을 경우 삼검도 불사했다. 또한 살인 사건에 대해서는 임금에게 장계가 올라가 허락이 떨어져야만 사형을 집행하는 등 생 사람을 잡지 않도록 고심한 노력이 돋보인다. 영조 이래 잔인한 형벌(압슬, 문신)을 금지한 것도 발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동시대 범죄수사의 수법으로 잔인한 고문을 통한 무조건적인 취조가 당연시되던 동시대 다른 국가들 보다 훨씬 더 과학적인 수사방법이었다.
이러한 조선의 법 정신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조선 시대 최고의 스캔들이었던 '어우동 사건'인데, 이때에도 왕과 신하들이 철저한 법리 공방을 벌인 후에야 법에 따라서 처벌이 이루어졌다.[50]
그러나 조선후기에 가서는 탐관오리의 횡포가 극심해서 범죄 감면을 받기위해 뇌물을 바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게 많았다 주로 군대 징집을 면제받거나 세금 감면, 형벌 감형, 재판 승소 등을 위해 뇌물을 제공하기도 했다.

7. 계급


[image]
일반적으로 조선의 지배 계급으로 생각되는 양반은 건국 초엔 계급이나 계층이 아닌 조정에 녹을 받고 일하는 관료를 지칭하는 용어에 불과했다.[51] 사실 조선 초기의 계급은 전대 고려와 유사한 양천제(양인 + 천민)였다. 초기만 놓고 보면, 전대 고려의 귀족적 요소들[52]이 상당부분 제거되었기에 고려를 포함한 전대 어느 시대보다도 신분간 편차와 차별이 많이 완화된 사회로 볼 수 있다.[53]
그리고 후기에는 신분간의 상하 이동도 전대에 비해 한층 '개방적'이 되었는데 몰락 양반이 많아지고 보다 좀더 자본주의적으로 바뀐 사회상 때문이다. 이 때 부터는 양반이 아니더라도 양인인 경우, 과거 응시 자격이 주어졌고 과거에 합격만 하면 양반이 되어 출세를 할 수 있었다.[54] 과거 제도는 결국 양반층의 계급 세습을 합법화시킨 것이라는 통념과 다르게 조선대의 상민 출신 문과 급제자 비율은 초기 40% ~ 50%, 이런 초기 과거 급제자 출신들이 문벌을 짓기 시작한 중기에는 점차 낮아져 10% 후반대까지 이르렀으나, 양란 이후 다시 비율을 회복해 후기에는 다시 40% ~ 50% 비율을 유지했으며, 말기에는 60%에 육박했다는 최근 연구 결과도 있다.[55] (한영우 이화여대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겸 서울대 명예교수 연구) 출처 기사1 기사2 추가로 한영우 교수는 ‘과거, 출세의 사다리’(지식산업사)를 4권으로 완결지은 뒤, 4권 말미에 남긴 글 '나가면서'에서 조선왕조가 500년 이상 장수한 비결은 지배 엘리트인 관료를 세습으로 보장하지 않고 능력을 존중하는 과거시험 제도로 부단히 하층 사회에서 충원했기 때문이라며 공부를 열심히 하면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탄력적 사회를 유지하려 했던 것이라고 강조했다. 기사

8. 인권



8.1. 장애인


세종13년(1431년), 박연이 아뢰기를

옛날의 제왕은 모두 시각장애인에게 현송[56]

의 임무를 맡겼으니 이는 세상에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57]

대중들의 인식이 인식이다 보니 조선의 인권이 시궁창이었다고 폄하되는 경우가 많으나 대부분 당시 시대상의 일반적인 인권의 비참한 실상을 고려하지 않고 한 말들이다. 물론 조선 말기, 19세기의 인권 상황이 유럽 각국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건 사실이지만 이 경우에도 조선의 제도가 정비된 시기를 생각해야 한다. 애당초 조선조 초기에는 전세계에서 농노와 노예제가 아예 합법이었던 시대였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근대적인 인권 개념은 겨우 19세기 이후에나 만들어지기 시작한 개념들로 그런 점에 비추어봤을 때 조선의 인권을 논하기 전에는 14세기 ~ 18세기의 당시의 보편적인 인권 상황과 시대상을 정확히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일단 조선 시대의 인권을 현대의 인권 개념의 잣대를 들이대며 그대로 직접 비교하기는 어렵다. 인권, 즉 'Human rights'라는 개념은 18세기 프랑스에서 시작된 말이다. 21세기 현대의 인권 개념으로 당시를 해석하는 것은 현대의 인권 개념이 어떤 식으로 어떠한 역사적 과정들을 거쳐 형성되어왔는지 고찰하는 하는 과정이어야 옳지 그게 아니면 대부분 아전인수격 해석일 뿐이다. 당연하지만 현대의 인권 개념을 전근대에 그대로 직접 들이대는 행위는 시대의 차이를 무시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의 인간 존중 사상은 유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세종 실록에서는 당시 음악을 정비했던 박연이 맹인 악공에 대해 논의하면서 위와 같은 말을 남긴 바 있다.[58] 조선에서는 장애를 하나의 질병·장애라는 말 그대로 몸을 불편하게 하는 요소로 인식했으며 기형이나 장애가 있는 사람을 사회 차원에서 매몰차게 내버리지는 않았다. 장애가 심한 자들에게는 세금과 군역을 면제하는 혜택을 줬다. 시각 장애인 같은 경우 손 재주가 우수한 사람을 뽑아 전문직으로 고용하기도 했다. 즉, 20세기 한국에서 실시되는 시각 장애인 안마사 제도와 비슷한 목적의 정책을 그 시절부터 실시했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얼마든지 출세가 가능했다. 각 부 장관급인 판서는 물론, 왕 다음가는 의정 급까지 올라간 자들이 있다. 척추 장애인 허조, 간질 장애인 권균, 지체 장애인 심희수 같이 정승의 반열에 오른 인물들이 적잖게 있으며, 채제공사시를 숨기지 않고 오롯이 초상화에 담았고, 청각 장애인 이덕수는 대제학과, 형조판서까지 오르는 등, 일단 과거를 볼 수 있고 그 중에 능력이 있다면 충분히 출세할 수 있었다. 사회 인식은 물론 장애인을 비장애인과 같이 대우하는 것까지, 오히려 조선시대가 훨씬 나았던 셈. 오히려 장애인을 학대하면 가중 처벌을 받았고, 장애인을 살해하면 해당 사건이 발생한 고을의 읍호가 강등되었다.[59] 즉 전반적으로 조선은 왠만한 나라들보단 높은 인권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 일본식 교육을 통해 장애인은 병자가 아닌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생겨 많은 장애인들이 고초를 겪기도 했다.

8.2. 노비


노비의 비율이 주변국들에 비해 과도하게 높으며, 그 인신예속적 성격 때문에 노비는 노예에 가까우며 고로 조선은 노예제 국가였다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일부 있다.[60]
또한 현대의 국제법상 slave에 대한 정의는, 인권적인 문제나 실제 처해있는 상황 및 처우와는 상관없이 한 사람이 누군가의 소유물이 되는 것이다. 이 정의대라면 노비는 노예에 해당한다. 물론 이 경우 중세 서유럽농노[61]제정 러시아농노 그리고 에도시대 일본농노들도 모두 노예의 뜻에 부합하기는 하지만 말이다.[62] 당연하지만 근-현대에도 인신매매가 되는 일본군 위안부들 같은 약자들의 경우에도 이 노예의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역사적인 개념의 노예라는 신분에 대한 정의와 이러한 현대 국제법상의 노예에 대한 정의는 서로 별개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노비는 노예가 아니며 고로 조선이 노예제 국가라는 주장은 잘못되었다는 반론도 있다. 대표적으로 제임스 팔레 교수의 노예제 사회 규정과 노비의 신분 규정에 정면으로 반박한 이영훈 교수의 주장이 있다. 이영훈 교수는 평소 조선에 비판적인 교수로 알려져서 의외일지 모르지만 제임스 팔레 교수가 타계할 때까지 조선 노예제 사회설을 줄기차게 반박했다. 이영훈 교수가 2007년에 발표한 논문[63]에 따르면 조선이 노예제 국가가 아니었던 이유는 아래와 같다. 참조 링크
  • 조선의 노비는 크게 주가(主家)에 종속되어 주인에게 직접 사역을 당하는 입역노비와, 주인과 떨어진 곳에서 거주하며 신공(身貢)을 납부하는 것으로 의무를 다하는 납공노비로 대별되었는데, 전자의 경우에는 적어도 가내노비들 한정으로는 노예로 볼 수 있지만[64] 그외의 경우에는 판단하기 애매하며 후자는 노예보다는 서유럽의 농노에 훨씬 더 가까운 존재였고 조선의 노비는 이들이 주류였다.
    • 이는 북한 김석형의 솔거노비/외거노비론을 용어만 바꿔서 답습한 것이다.
  • 조선의 노비는 주인에 대한 예속 관계 외에는 일반적인 양인과 구별되지 않았기에 공동체로부터 배척을 의미하는 모멸적 표지가 붙여지는 등의 사회적 죽음(social death)를 당한 존재인 여타 문명의 노예들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 적어도 법제적으로는 노비는 국가의 공민으로 인정받았기에 생사 여탈권은 주인이 아닌 국가에 주어진 것이었으며, 재산권도 보장받았다.[65]
그런데 유의해야 할 점은, 이런 내용을 담은 부분을 발췌한 것만 보고 좋아하고 말기에는, 해당 논문은 조선 노비에 대해 오늘날의 사람들이 불편해 할 만한 사실도 많이 전달하고 있다는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 신라/고려 시대에는 노비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지 않았으나, 조선 건국 이후 특히 세종 때부터 급증하여 가장 많을 때는 전체 인구의 4할을 차지한 적도 있었다.
  • 노비는 주인의 재산으로서 매매, 증여, 상속의 대상이었으며, 나아가 법적으로 무권리 상태였다.
이밖에도 조선의 노비는 결국엔 노예와 다를 것 없는 대우를 받았다는 증거도 적지 않다. 고려 때부터 내려오는 노비세습법인 천자수모(賤者隨母法)나 일천즉천(一賤則賤)의 법에 추가해서, 1422년(세종 2년)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노비는 주인을 고소할 수 없도록 하는 법만들었다. 당시 지배층은 주자의 말씀을 빙자해서 노비 살해는 주 - 노의 명분에 비해 가볍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이는 '성군'으로 칭송받는 세종 대에 벌어진 일이었다. 조선 시대 들어서 노비는 점점 비천한 존재로 간주되어, 성씨를 가지는 것을 금지시키며 가축, 똥 오줌, 농기구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강요받게 되었다. 이를테면 16세기 말 한 양반은 비를 구입한 다음 이름을 눌은(訥隱介)로 바꾸었다. 이러한 노비에 대한 법적 권리 박탈, 비천 관념의 강화는 전대 왕조인 고려에 비교해서도 확실히 후퇴한 것이었다.[66]

이영훈 교수의 강연에 따르면 조선 시대의 노비는 법인격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본다(16분 55초부터). 그렇기에 노비는 기본적으로 폭력과 성적 학대를 방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박취문의 『부북일기(赴北日記)』에 나타난 한 장수의 여자 관계에 대한 기록을 보면 여자 관노 역시 장수가 쉬고 가는 주막이나 관청에서 매우 쉽게 성접대 대상으로서 내어지곤 했다.[67]
또한 노비에 관한 한, 조선의 도덕률은 덕치가 아닌 법치였다. 조선의 양반들은 농사 일이 계획대로 진척되지 않으면 이를 노비 탓으로 돌려 가차 없는 매질로 다스리곤 했다. 『쇄미록(瑣尾錄)』에는 계집종이 칭병하자 종아리를 때린 일, 김매기 중에 그늘에서 쉬고 있는 노비를 보자 머리채를 잡고 끌어내서 채찍으로 종아리를 때린 일을 비롯해서 주인 오희문이 노비에게 구타와 매질을 가하는 모습이 곳곳에 나타난다. 1597년 오희문 가의 한 노비가 같은 집 노비였던 아내와 도망쳤다가 오희문에게 잡혀서 발바닥을 70, 80대나 맞은 다음, 관아에 넘겨져 다시 곤장을 맞고 죽은 일이 있었는데, 그에 대한 오희문의 기본적인 소회는 "애석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주인에게 죄를 지은 노비가 아니라 오희문 본인이 비교적 충노(忠奴)라고 인식한 노비의 죽음을 말할 때도 이 자는 같은 표현을 썼다.[68][69]
비록 법제적으로는 노주인이 관청에 고하지 않고 함부로 노비를 죽이거나 혹형을 가하는 일이 금지되었고 실제 처벌 사례도 있다고 하나, 그러한 사실들이 조선의 노비들이 주인의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웠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사가에서 일어나는 불법적인 폭력 행위를 국가기관에서 인지하기는 매우 어려운데, 당시 형법은 노비가 주인을 고소할 경우 교수형에 처하도록 규정하여, 외부에 대한 호소를 철저히 막아 놓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반면에 노비는 주인에게 욕만 해도 사형이었다. 사실 노비 살해나 학대에 대한 처벌 사례들도 (주로 서울 근처에서) 고문받고 살해된 시신을 행인이 발견하든가 해서 '운좋게' 중앙정부가 그 사실을 인지한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정당한 이유'가 있을 경우 관청에 고하고 노비를 죽이는 경우는 엄연히 합법이었고, 노비에게 매를 때리다가 의도치 않게 죽게 만드는 폭행치사의 경우도 처벌받지 않았다.
노비 중에서도 비 즉 여종들은 저러한 구타, 체벌과 주인의 성폭력, 그리고 안주인의 질투로 인한 학대까지도 감내해야 했다. 예컨대 성종 5년인 1474년에 도리라는 여종은 주인 신자치와 간음한 후, 이를 알게 된 신자치의 부인 이숙비와 이씨의 모친에게 끔찍한 고문을 받고 버려졌다가 사람들에게 발견되는 일이 있었다. 의금부에서 처음 형량을 정할 때 주인이 죄없는 노비를 구타해 사망에 이르게 한 죄목을 적용해 장형과 도형에 처할 것을 청했다. 하지만, 해당 사건은 살인이 아니라 상해를 입힌 죄이며 이와 관련된 형률이 없다는 문제가 지적되었다. 결국 풍속 교화를 강조하는 입장이 채택되어 처벌이 이루어지긴 했으나, 가해자인 이숙비는 사대부가의 여인이라는 이유로 장형을 면제받았고, 이씨에 대한 처벌은 이혼당한 후 그 어미와 외방에 부처(付處)하는 것에 그쳤다. 또한 정황상 두 사람의 간음은 신자치의 강간일 가능성이 높음에도 이에 대한 조사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만 신자치는 집안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다는 이유로 고신을 빼앗기고 외방에 부처되었는데, 2년 후에 사면을 받았다. 도리는 종량(從良)되었다.
노비 도리 사건의 처리 결과는 세종 연간만 하더라도 불가능했던 일이다. 당시 좌의정이었던 허조는 종과 주인 사이의 일로 주인을 처벌할 수 없다고 주장했으며, 세종 자신부터 노비 문제로 고위 관료의 부인을 형사처벌하는 것이 과하다고 말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사족 여성이 여종을 죽이고도 부처되었다가 곧 소환되는 수준의 가벼운 처벌만을 받는 것이 상례였다. 도리 사건에 대해 비교적 강력한 처벌이 이루어진 이유는 사건의 잔혹함으로 인한 파급력 때문이었다. 이는 사족의 여인이 여종의 살갗을 벗기고 낙형까지 가한 다음 유기한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사건이었다. 지배층 전반의 모범과 풍속 교화를 강조하던 성종 연간의 시대적 특징도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저 정도의 사건이 아니면 웬만한 폭력은 집안에서 소리소문 없이 넘어갈 가능성은 다분했다.
이러하니 양반들이 본인 소유의 노비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에 거리낌이 있을 리도 없었다. 그러다 살인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종종 벌어졌다. 초대 주한 프랑스 대리 공사 콜랭 드 플랑시가 19세기 후반 본국에 보낸 조선의 노비제도에 대한 보고서에는 그러한 노비들의 노예적 실상이 가감 없이 담겨져 있다.[70]

노비는 죽을 때 까지 살아야 하는 집에 일단 들어가면 심한 노역을 강요당합니다. 주인은 자기 마음대로 노비를 다루며 노비가 제대로 일을 하지 않으면 때리기도 합니다. 어쨌든 법적으로 노비를 죽이는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법을 어긴다 해도 처벌은 유배형에 처해질 뿐이며 실제로 처벌을 적용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이론적으로는 이렇지만 실제로는 관리에게 뇌물을 주어 처벌을 피하고 만일 주인이 고위 관리나 양반이면 걱정을 끼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노비는 아무리 심한 대우를 받는다 해도 자신을 소유한 주인을 고소할 권리가 없으며 배상금을 지불하고 방면을 요구할 수도 없습니다. 노비가 탈출을 시도하게 되면 뒤좇아 오는 하인들에게 쉽게 붙들리거나 길가는 행인에게 납치될 것입니다. 혼자 다니는 여자는 처음 만난 남자가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며 관아에 도움이나 보호를 요청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비는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희망도 없이 주인집에서 일생을 보내야 하는 운명인 것입니다.

제가 앞서 장관님께 말씀드렸다시피 사가[私家]에는 남자 노비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하인들 중 한 명을 선택해 자신이 소유하는 여자 노비와 짝을 지어 줍니다.[71]

만일 하인이 이 일에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되거나 다른 이유를 내세우면 하인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하인과 노비 사이에 태어난 남자 아이는 혼인적령기가 되면 자유를 줍니다. 여자 아이의 경우에는 엄마의 신분을 이어받아 주인집에 머물거나 주인이 마음대로 팔아 버립니다. 한편으로 이것이 주인의 중요 수입원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처럼 흉측한 제도는 인간을 생식 능력을 가진 동물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노비의 임시 남편 역할을 수락하는 남자는 어떻게 보면 주인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며 이 기간 중 주인은 자유의 일부를 양도받아 절대적인 권한을 휘두르게 됩니다. 예를 들면 남자가 그릇된 행동을 해서 매를 때리다가 살해할 의도가 없었는데도 죽게 되면, 이를 관아에 보고하지 않아도 됩니다. 만일 별 것 아닌 잘못으로 노비의 남편이 매를 맞아 부상으로 죽게 되면 주범을 추적하지만 사건을 국왕에게 보고한 후 국왕이 관아에서 사건을 처리하라고 명령을 내린 다음에야 가능합니다.

(중략)

개인이 소유하는 노비들의 조건이 처참하다고 하지만 조정이나 지방 관아에 소속된 여자들의 경우는 더욱 심각합니다. 이들은 모든 사람들의 소유이며 이들에 대한 멸시보다 더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72]

하지만 이영훈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양반들이 노비들을 함부로 죽이거나 고문하는 경우는 그다지 흔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노비들을 함부로 죽이거나 불구로 만드는 것은 본인들에게도 손해인 일이었고,[73] 무엇보다 노비들의 원한을 사게 되면 그들이 도주하거나 양반 본인들이 목숨의 위협을 당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학대를 견디지 못하여 노비들이 도주하거나 주인을 살해한 사례도 종종 일어났는데, 19세기 후반부터는, 양반에게 폭력을 가하고 양반의 무덤을 파헤치는 등 노비들의 저항이 점차 과격해지는 양상을 보이면서, 심지어는 노비로부터 곤욕을 당할까 봐 가족을 이끌고 도망가는 양반까지 생겨났을 정도였다. 조선 후기의 학자 황현(黃玹)의 저서인 『오하기문(梧下記聞)』에서는 조선 말 노비제의 혼란상을 다루며 “이제 양반 지배의 사회질서는 끝났다”고 말했을 정도였다.[74]
무엇보다 조선의 양반들은 일본의 지배계층인 다이묘들이 아시가루 등의 무장 병력을 거느렸던 것과는 달리 태종의 '사병혁파' 이후 휘하에 사병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비들의 위협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그 탓에 웬만해서는 노비들을 가혹하게 학대해서 노비들을 자극하는 일들은 잘 벌어지지 않았다. 더구나 노비들을 인간적으로 대해주는 기록들도 많다.[75]
일례로, 능주 목사를 부임한 김진화(金鎭華)가 19세기 중엽에 집필한 『귀전록(歸田錄)』에는 노비 관리와 관련한 내용들이 다수 등장하는데, 이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① 노비들을 꾸짖기만 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자식처럼 대해야 한다. 혹 잘못을 저지르면 불러서 타이르고, 타일러도 뉘우치지 않으면 불러서 꾸짖어야 한다. 꾸짖어도 뉘우치지 않을 때에는 벌을 주되, 너무 가혹하게 해서는 안 되고 은혜와 위엄을 병행하도록 해야 한다.
② 노비들에게 남은 제사 음식을 나눠주거나 불시에 술과 음식을 베풀 때에는, 직접 나누어주어 은혜와 의리를 보여야 한다.
③ 노비의 나이가 17~18세에 이르면 혼인을 서두르게 함으로써 혼기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만 한다.
④ 가문의 노비 수가 비록 많은 편이지만 앙역노비(仰役奴婢)에는 마땅히 정해진 수가 있기 마련이다. 앙역비(仰役婢)는 4명을 넘기지 않고 앙역노(仰役奴)는 2명을 넘기지 않도록 하며, 그 나머지는 모두 방역(放役)해야 한다.
⑤ 노비의 옷과 먹을 것에 필요한 자원을 별도로 마련할 수밖에 없는 까닭에 계묘년(1843)부터 여러 전답의 두차(斗差)를 모두 모아 노비계를 창설했다. 만약 이를 밑천으로 삼아 향후 10년 동안 재물을 불려나가면 앙역노비의 1년 옷값(衣資)와 식비(糧料)를 마땅히 계의 재원으로 능히 배급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노비들에게 전적으로 맡겨두지 말고 친히 문부(文簿)를 살펴 성취될 수 있도록 하라.
⑥ 집안의 크고 작은 일들에 노비들을 동원할 때는 그 부담이 특정한 노비에게 치우쳐서 원망을 사는 폐단이 없게끔 해야만 한다. 질병을 앓는 노비가 있으면 정성을 다해 구료해주고, 사상(死喪)을 당한 노비가 있으면 관례에 따라 비용을 도와주되, 이 또한 모두 위에서 정한 노비계의 절목에 따라 시행하게끔 하라.
- 김건태,「"광작을 자제하라": 19세기 어느 성리학자의 가작(家作)과 그 지향」,『동아시아는 몇 시인가?』(너머북스, 2015).[76]

이처럼 김씨가는 수시로 노비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어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게끔 했고, 나아가 결혼 적령기에 이른 노비들이 가정을 꾸릴 수 있게끔 주선해주었다. 또한 집안의 각종 대소사에 노비들을 동원할 때도 특정 노비에게 부담이 치우치지 않도록 했으며, 노비들이 아플 때나 상을 당했을 때에는 치료와 부조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밖의 기록에서도 양반들이 아픈 노비들의 병간호를 직접해주고 약을 지어주거나 노비들이 죽었을 경우 관을 마련해서 제사도 지내주고 노비들이 결혼할 때 지원도 해주며 주인집 식구들보다 밥도 더 많이 주는 등 노예와는 분명 다르게 대우해준 사례들도 많이 보인다.[77]
물론 이와 같은 노비에 대한 관습적인 보호 장치들도 어떠한 인간적인 연민이 작용한 결과로 보기는 힘들다. 위에서 서술했듯이 조선 전기 양반들에게는 노비가 토지에 우선하는 가장 소중한 재산이었던 이상, 자신의 재산을 스스로 손괴 또는 파기하는 것을 극히 꺼렸음도 당연하며, 무엇보다 휘하에 자신을 경호할 인력을 보유하지 못한 것[78]이 엄연한 현실이었다. 따라서 대노비 소유가 횡행했던 조선 사회의 특성상, 거느린 노비들을 너무 가혹하게 다스릴 경우 집단적인 보복을 당할 것에 대한 우려 역시 적지 않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조선의 사대부 계층은 유형원 같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재산인 노비를 결코 포기할 생각이 없었고, 이것은 신분제가 완화되는 19세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정약용 같은 인물조차 노비제의 폐지를 반대했던데다가, 소수의 실학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유학자들은 노비들의 처지에 대한 동정을 간간이 드러냈을지언정 노비제 자체는 옹호했다.

8.2.1. 조선은 노예제 사회였는가?



8.2.1.1. 긍정론

위와 같은 점들 때문에 과거 제임스 팔레의 주장을 비판하며 조선이 노예제 사회임을 부정했던 이영훈 전 교수는 현재 자신의 기존 주장을 철회한 상태이다.

제19회 연재에서 소개한 대로 조선왕조의 지배체제는 이원적이었다. 토지로부터 조세와 공물을 수취하면서 토지의 소유자가 누구인지 묻지 않았다. 인신으로부터 각종 역을 수취하면서 당자의 토지가 얼마인지 묻지 않았다. 몰인신의 토지 지배요, 몰토지의 인신 지배였다. 이 때문에 조세와 공물을 낸다고 해서 왕조에 속한 공민(公民)이 아니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납공노비를 반공반사(半公半私)의 농노로 간주한 나의 오랜 주장이 설 자리를 잃었다. 납공노비 역시 노예였다고 봄이 옳다. 세상이 바뀌었으니 생각도 바뀌어야 한다. 원시사회 이후 노예제와 농노제가 순서대로 펼쳐졌다는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잔재를 청산해야 한다. 노예제나 농노제로 일관한 사회가 더욱 많으며 농노제에서 노예제로 이행한 나라도 있었다. 새로운 지평의 역사학에서 ‘동의와 계약’ 또는 ‘지배와 보호’의 원리가 작동하지 않은 사회는 광의의 노예제사회로 정의될 수 있다. 조선왕조는 그렇게 새롭게 정의될 노예제사회에 속할 가능성이 크다.[79]

즉, 조선이 전형적인 노예제 사회는 아니지만, 조선은 국가에 노동력과 재물을 바치고 그 반대 급부로 권리를 보장받는 '공민'이라는 계층이 존재하지 않았던 사회이기에, 주인과 국가에 동시적으로 귀속된 납공노비라고 해서 노예가 아닐 수는 없으며, 따라서 모든 노비는 곧 노예인 이상, 인구의 최대 40%가 노비였던 전기의 조선은 노예제 사회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로 이영훈 교수는 이제 한반도 문명사를 노예제 사회가 아니었다가(고려까지) 노예제 사회로 전환(조선)된 것으로 보게 된 것이다.
이러한 태도 변화를 『반일 종족주의』 출간 등 근래 이영훈의 정치적 행보와 연결시키는 시선도 있으나, 보다시피 이영훈의 논거는 정치나 친일/반일 등의 문제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애초에 이영훈이 흑화(?)되기 전, 팔레와 논쟁을 벌일 때라고 태도가 별 달랐던 것도 아니다. 이영훈은 조선이 노예제 사회임을 부정했을 뿐, 입역노비를 노예로 보는 것은 팔레 교수와 다를 바가 없었으며, 입역노비든 납공노비든 사회적으로 매우 취약한 처지에 놓인 계층으로 보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표적으로 「11-16세기 한국의 노비와 일본의 게닌」에서는, 조선의 노비를 일본의 게닌에 비해 '덜' 노예적인 존재로 보면서도 예속의 절대성이나 비인간화 등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으며, 노예제 사회설을 부정하는 근거로 흔히 언급되는 「한국사에서 노비제가 던지는 몇 가지 문제」에도 그와 같은 문제의식은 여실히 드러난 바다. 2010년에 발표한 「제임스 팔래의 노예제사회설 검토」라는 논문의 결론에서도, 팔레 교수의 주장에 대해 실증적인 약점들은 비판할지언정, 한국 사회에서 노비제에 대한 비판이 너무 결여된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의식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
참고로 제임스 팔레 교수는 한반도가 12세기 고려 무신정권 시기를 기점으로 노예제 사회에 진입했으며 이후 18세기 중반까지 장기지속했다고 봤다. 그러므로 두 학자들은 적어도 조선이 15세기 중반부터 17세기까지는 노예제 사회였다는 데에는 의견일치를 이룬 것이다.
이영훈이 제임스 팔레와 논쟁 과정에서 "노비가 법제적으로는 노예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에 의견 일치를 이룬 것은, 기존의 관련 논의[80]에서 이 문제를 모호하게 다룬 점을 상기할 때, 결코 학술사적으로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일각에서 조선 노비의 인권 상황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근거를 나열할 때 노비 살해 살해 금지 등 당시의 '법적 규정'을 반드시 거론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이를 단지 형식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할 수도 없다. 후일 이영훈이 노예제 사회설에 손을 들어주게 된 것도, 당연히 그러한 선행적인 '일부 긍정'이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이영훈이 논문 「제임스 팔래의 노예제 사회설 검토」을 통해, 30% 이상의 노비 인구 비중을 가장 주된 논거로 내세우는 팔레의 노예제 사회설을 부정하며, 고대 그리스-로마나 남북전쟁 이전의 미국 남부와 달리, 11~19세기의 한반도는 노예 노동 중심의 생산양식이 사회의 지배적 생산양식이 아니었음을 지적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를 두고, 학계 내부에 그것을 만족해야만 노예제 사회로 분류한다는 확고한 합의라도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곤란하다. 이영훈이 해당 논문의 340페이지에서 예시한 세 가지 조건 즉 1. 사적 토지소유 2. 상품 생산과 시장의 발달 3. 대안적인 노동력의 부재 등은, 그리스-로마사 권위자인 모지스 핀리가 본인의 그리스-로마 사회 연구를 바탕으로 노예제 사회가 성립하기 용이한 '조건'들을 제시한 것일 뿐, 노예제 사회와 비 노예제 사회를 가르는 절대적인 '기준' 같은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예속민의 성격/비율과 무관하게 '노예 노동이 경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가' 여부만이 노예제 사회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학계의 공인된 기준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제임스 팔레는 크게 ① 노비는 법제적으로 노예로 볼 수밖에 없다는 점, ② 30% 이상이었던 조선의 노비 인구 비중은 고대 그리스-로마, 19세기 미국 남부와 같은 전형적인 노예제 사회와 비슷한 수준이었다는 점을 근거로 조선이 노예제 사회임을 주장했다. '노비=노예', '노예가 전체 인구의 30% 이상인 사회=노예제 사회'라는 두 판단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동의하지 않는다면, 팔레의 노예제 사회설을 찬성하기는 불가능하다. 미국의 한국학계나 올랜도 패터슨이나 최근의 이영훈이 팔레의 노예제 사회설에 동의한다는 것은 결국 저 둘을 인정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인구 비중 문제에 대한 것을 포함한 팔레의 지론은 혼자만의 주장은 아닌 것이 된다. 국내 학계가 반발하고 있다고 하나, 이영훈 외에는 누구도 체계적인 반론을 내놓은 바 없다.[81][82]
팔레뿐 아니라 이영훈도 노예제 사회 여부를 판단하는 데 노비 비율 문제를 중요한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영훈이 쓴 「11-16세기 한국의 노비와 일본의 게닌」 논문의 2장인 145~149페이지는 '노비인구의 역사적 추이'라는 제목으로 한반도 노비 인구 비중의 변화를 통시적으로 논하고 있는데, 해당 장이 제임스 팔레의 노예제 사회설을 소개하는 문단에 후행함을 감안하면, 이는 당연히 노예제 사회 논의에 노비 인구가 어느 정도였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부분이라는 점을 전제한 서술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또 이영훈은 같은 논문의 155~157페이지에서 조선의 노비 비중이 고대 그리스-로마, 18~19세기 미국 남부와 같은 전형적인 노예제 사회의 노예 인구 비중과 비슷한 수준이었다는 이유로 조선을 노예제 사회로 규정한 팔레의 설을 비판하면서도, 노비 인구가 이미 고려 시대에 이미 전 인구 3할을 점하게 되었다는 주장을 비판("팔레는 무신집권기 이후 노비가 전체 인구의 3할에 달할 정도로 많아졌다고 보지만, 어디까지나 근거가 뒷받침되지 않는 추론일 뿐이다.")하거나 노비 전체를 일률적으로 노예로 규정할 수 없음을 지적("우선 대확장기를 거치는 가운데 노비들의 존재양태가 노예로 단순화될 수 없을 만큼 다양해졌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했을 뿐, 노예로 간주될 수 있는 인구가 일정 비율이 이상이면 노예제 사회로 봐야 한다는 팔레 지론의 대전제는 전혀 문제삼은 바 없다.
상식적으로도 어느 사회가 노예제 사회인가를 판단하는 데 그 사회에 노비가 얼마나 되는가를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다. 비율이 상관없으면 노예 비중이 99%인 사회도 그 사실만 가지고서는 노예제 사회로 규정할 수 없는 것인가?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노예 비율이 전체 인구의 반 이상을 점유하게 된다면 '상품 경제의 발달' 여부 등과 무관하게, 그 사회에서 가장 보편적인 인간의 존재 양태는 노예가 되며, 가장 일반적인 생산 양식은 노예 노동에 의한 것이 된다. 이런 사회를 노예제 사회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이영훈이 '비율 문제'에 있어 팔레에게 동의하지 않았던 부분은 노비 비율이 노예제 사회 여부를 판단하는 중요한 준거라는 것이 아니라, 30%라는 기준선에 관한 것이었다.
이영훈의 2010년 논문 「제임스 팔래의 노예제사회설 검토」에서는 그 기준을 50% 이상으로 제시하고 있다. 당연히 이는 스스로 그것이 의미있다고 여겼기에 제시한 것이지, 같은 논문에서 인구 비중 문제 외에 다른 여러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고 해서 '사실은 비율 같은 거 상관없다'는 의도를 내포한 것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노예 인구가 전체 인구의 반을 넘어서게 되면, 경제 구조와 상관없이 그 사회는 노예 중심적인 사회로 볼 수밖에 없으므로 이는 지극히 타당한 기준 설정이다. 그렇다면 조선 중기에 기록한 40% 이상이라는 노비 비율은, 적어도 이영훈 기준으로는 "노예제 사회에 필적한다"고 표현해도 무리가 없는 수치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어디까지나 이영훈이 입역노비(특히 가사노비)는 노예, 납공노비는 노예가 아니라는 분류에 따라 팔레의 노예제 사회설을 반박하던 시절의 주장이고, 입역노비든 납공노비든 개인에게 예속된 사인(私人)일 뿐이어서 결국 둘 다 노예로 볼 수밖에 없으며, 심지어 일반 양인의 처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현재의 입장에서 조선은 "준한다"는 표현을 붙일 필요도 없는 완전한 노예제 사회가 된다.

8.2.1.2. 부정론

제임스 팔레 교수와 이영훈 교수가 주장하는 '노예제 사회설'은 주류 학계에서 규정한 '노예제 사회'의 개념과는 일치하지 않는 주관적인 개념 정의에 불과하다. 실제 학계에서 규정하는 사전적 의미의 '노예제 사회'는 ‘노예제도가 경제 및 노동조직의 기반인 사회’로 정의되는데 조선은 노비가 경제 및 노동조직의 기반인 사회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영훈 교수가 지적했듯이 팔레의 주장대로 노비나 노예가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30% 이상이면 노예제 사회로 규정한다는 그런 법은 존재하지 않는다.[83] 실제로 이영훈 교수는 최근까지도 팔레의 이러한 주관적인 노예제 사회설 규정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84] 하지만 이렇게 제임스 팔레의 주관적인 노예제 사회설에 반박한 이영훈 교수도 자신만의 노예제 사회설을 주관적으로 정의하였고 ‘광의의 노예제 사회’라는 개념을 새롭게 만든 뒤에 거기에 조선이 포함 될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을 하였다.[85]
팔레가 주장한 '노예 비율이 30% 이상인 사회는 노예제 사회'라는 주장은 학계의 절대적인 기준은 전혀 아니라는 점에서 결국 팔레만의 자의적인 노예제 사회 기준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가 없다. 실제로 같은 논문에서는 이영훈은 "필자는 그런 단조로운 구조의 農業社會가 노예제사회로 되기 위해서는 노예의 인구비중이 적어도 50% 이상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라고 주장했으며 노예제 권위자인 올랜도 패터슨의 연구에 대해서도 그런 조건들을 하나도 만족시키지 않는 7~19세기의 한국 역시 노예제 사회로 분류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그렇지만 패터슨의 리스트에 어색하게 끼어 있는 7-19세기 한국은 이 같은 핀리의 조건들을 하나도 충족하고 있지 않다." "그렇지만 11-19세기 한국사회는 그러한 국제적 환경과 전혀 무관하게 곳에 위치하였다."라고 핀리의 주장과 이영훈 본인의 개인적인 사견으로 반박하고 있음은 학계내의 노예제 사회로 규정하는 정확한 비율 같은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것을 확실히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평가 할 수 있겠다.
이영훈은 해당 논문의 345~348페이지에서는 예속민을 노예로 판정하는 기준으로 법제적 기준, 경제적 기준, 문화적 기준을 제시했다. 물론 세 가지 모두에서 팔레의 설에 매우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대표적으로 "팔래가 누차 강조하였듯이 이 법제적 기준은 노예의 판정 기준으로서 다른 무엇을 우선하는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이 기준에 따르는 한15-16세기 조선시대의 노비들은 노예였다. 노비들은 주인의 채찍 하에서 법적으로거의 무권리 상태에 놓였다. 그들은 財物로서 사고 팔리고 상속되었으며 짐승처럼맞아 죽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법제와 현실 사이에는 괴리가 있기 마련이다. 한국은 중국문명권의 일부로서 중국의 奴婢法을 받아들여 그의 노비들을 지배하였다. 법 기원의 이 같은 外來性도 법제와 현실 사이의 괴리를 증폭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예컨대 노비가 동산인 것은 사실이지만, 동산으로서 매매되는 일은 그리 일상적이지 않았다.1690년 大丘府 戶籍에 의하면 총 5,992구 노비 가운데 지난 3년간 매매 대상이 된노비는 14구에 불과하였다." 라고 팔레가 제시한 법제적 기준 그 자체를 현실과 괴리가 있다고 정면으로 반박한 부분이나 팔레가 이영훈 본인의 주장에 대하여 '한반도의 지리적 여건상 노비 다수가 소농이라고 해서 노예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반박한 점에 대해서 "소농경영이 지니는 노예제와의 근본적인 모순관계를 간과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본성이 이기적인 인간에 있어서 타인을 위해 강요된 억압적 노동과 자신과 가족을 위한 자발적 노동은 그 生産性이나 創意性이 크게 다를 수밖에 없다. 중략... 그런 관점에서 예속신분의 소농이 자립적 경제 단위로 성장함에 따라 결국 예속신분 그자체를 부정하게 되는 소농경영 그 자체의 動學에 銳意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라고 팔레의 주장이 지니는 근본적인 모순점을 지적한 부분 등에서 이영훈 교수가 팔레의 주장에 근본적으로 동의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 이영훈의 다른 논문 「11-16세기 한국의 노비와 일본의 게닌」(2004)의 4~5페이지를 보면, 국내에서는 북한 김석형의 학설이 통설적 지위를 누렸던 반면에, 미국의 한국학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팔레의 노예제설이 지지를 받았으며, 앞서 말한 노예제 연구자 패터슨 역시 "7-18세기의 한국사를 세계사에서 가장 발달된 대규모 노예제사회로 평가"했음을 말하고 있다. 미국의 한국학계내에서 지지를 얻고, 노예제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는 한 술 더 떠서 팔레보다 훨씬 더 긴 기간을 노예제 사회로 분류했으니 팔레 개인만의 사견으로 볼 수는 없다라고 주장 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이 팔레가 주장한 주요 근거인 "노예 비율이 30% 이상이면 노예제 사회다"라는 비율론적 근거에 대해서도 다 같이 동의한거라고는 보기가 힘들다. 왜냐하면 팔레가 주장한 고려-조선이 노예제 사회였다라는 주장과 그 비율론적 근거에 대한 동의는 당연히 별개이며 이는 패터슨과 팔레의 주장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확인이 되기 때문이다. 실레로 팔레는 12세기에서 18세기 중반까지의 한반도 사회를 노예제 사회로 분류했지만 패터슨은 7세기에서 18세기까지의 한반도 사회를 노예제 사회로 분류하는 등 상호간의 동일한 비율론적 근거는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30% 또는 50% 이상이면 노예제 사회다' 라는 식의 주장은 어디까지나 이영훈과 팔레의 주관적인 기준이자 주장일 뿐이지 학계에서 공인받은 정설은 전혀 아니다. 엄밀히 따지면 노예 비율이 30% 또는 50% 이상이면 노예제 사회라고 규정하는 학계의 공인된 정설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이러한 주관적인 소수의 대전제 자체에 학계가 확고한 정설로 동의 해준것도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그나마 가장 광범위하게 지지받는 노예제 사회 이론은 그 사회가 노예들의 노동력에 경제적으로 얼마나 의존하느냐가 학계에서 그 동안 폭 넓게 지지받아온 노예제 사회와 비노예제 사회를 구별짓는 가장 보편적인 기준이다.
제임스 팔레와 이영훈 두 사람의 비율론적 주장은 그럼 학계의 공인된 기준인가? 아니면 공인되지 못한 기준에 머물고 있는가? 라고 질문한다면 이 또한 공인된 기준은 어디까지나 아니라는 점은 부정 할 수 없는 부분이다. 아직까지 이 둘의 주장은 학계에서 공인된 기준으로는 통용되지 않으며 '노예 노동이 경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가'라는 경제적 측면에서의 판단이 좀 더 오래전 부터 광범위하게 노예제 사회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주로 쓰여온게 엄연한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예속민의 성격/비율과 무관하게 '노예 노동이 경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가' 여부만이 노예제 사회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학계의 공인된 기준이라고 보기는 힘들다라는 평가는 역으로 제임스 팔레와 이영훈의 평가 기준도 학계의 공인된 기준은 아니라는 뜻이된다. 실제로 이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어느 한 사회를 노예제 사회인지 아닌지 판단 할 때 노예 인구 비율로만 분류하는 학자들은 사실상 학계내에서는 거의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비율론적 주장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 비율론적 주장을 하는 학자들 사이에도 일치된 기준선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제임스 팔레와 이영훈의 기준선은 20%나 차이가 나며 당연하지만 이 경우 제임스 팔레의 기준으로 노예제 사회라고 판단 할 경우 이영훈 기준에서는 노예제 사회가 아니라는 상반된 결론이 도출되게 된다. 결국 비율론적 기준의 가장 큰 문제점은 노예제 사회인지 아닌지를 판단 할 때 그럼 그 비율은 몇% 이상을 기준선으로 삼으며, 또한 그러한 기준선을 설정한 근거는 또 무엇이며 그 기준선의 설정 근거에 대한 타당성은 또 무엇인가? 라는 기본적인 의문에 대하여 팔레와 이영훈 사이에 확고히 정해진 기준선도 합의된 기준 근거도 전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점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점에서 제임스 팔레의 비율론적 기준은 여전히 팔레만의 주관적인 기준이고 이영훈의 비율론적 기준은 여전히 이영훈만의 주관적인 기준이라는 점에서 둘 다 학계의 공인된 기준으로 평가받기는 매우 힘든 상황이다.
또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 30% 또는 50%라는 비율론적 근거를 가지고 노예제 사회냐 아니냐를 주장 할 경우 이 기준을 100% 적용한다고 해도 조선시대 전체가 노예제 사회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점이다. 실제로 이영훈 교수도 조선 시대 전체를 노예제 사회라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이영훈 교수는 조선의 노비 비율은 15세기 초에는 10% 미만이었다가 그 이후 증가하였고 다시 영조 연간 이후부터는 10% 미만으로 다시금 줄었으며, 조선시대에 노비 비율이 30~40%였던 기간은 15세기 중반에서 17세기 까지에만 한정되며 영조 이후 조선후기에는 노비제가 사실상 해체되었다는 견해 또한 분명히 밝혔기 때문이다.[86] 참고로 제임스 팔레 교수 또한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발행한 《정신문화연구》에 실린 이 학술지의 인터뷰에서 분명 “전체 인구에서 노비의 비중이 30퍼센트를 훨씬 넘은 18세기 중반까지는 한국이 노예제 사회였던 것으로 봅니다”라고 말했음을 볼 때 팔레 교수도 18세기 중반 이후부터의 조선 후기는 노예제 사회가 아니라는 데 동의하였음을 알 수 있다.[87]
애초에 노비들의 성격을 노예로만 규정해서 그 비율을 근거로 노예제 사회냐 아니냐를 따지는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주장도 있다. 왜냐하면 노비들의 신분적 성격을 노예로 규정 할지 농노로 규정 할지에 대해서는 학계내에서 확실히 정해진 정설이나 입장은 아직까지 전혀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당연하지만 노비 비율을 가지고 노예제 사회냐 아니냐고 주장하는것 자체가 의미가 없는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88]

8.3. 여성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조선의 여성들은 모두가 남녀칠세부동석, 칠거지악, 출가외인 등 성리학에 따른 예법•제약에 시달렸다는 것인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유교를 따르던 조선이라 당연히 민간에서도 성리학으로 인한 법적인 성차별은 존재했었다만, 우리가 흔히 아는 제약들은 대다수가 사대부와 같은 고위층들에게 주로 성행하던 것이었다. 자세한건 조선/오해 참조
시대적 한계가 있기는 하겠지만 조선 여성의 인권은 지금의 인식만큼 낮지는 않았다. 평민여성의 경우 성리학의 영향이 적었던 탓에 연애•외출•이혼•노출(!)•성적행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자유로웠다. 반대로 양반여성의 경우에는 위의 내용들에 대해서 강한 제제가 있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여성에 대한 존중과 예의가 있었다. 일단 그들도 배우는 지식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89]
또한 출가외인, 칠거지악이라는 예학적 제도들은 임진왜란 이후의 것이며, 보면 알겠지만 겉모습과는 달리 가혹한 것들도 아니었다. 그마저도 노론 출신의 양반가들은 따르지 않았고, 일반 백성들은 이러한 제약이 해당되지 않았다.
다만 법적인 부분에서가 아닌 사회적, 생활사적인 면에서의 가시적인 여성 인권이 낮아지는 일은 있었다. 고려에서와 같은 여성 단독의 상거래가 자유롭지 않았으며 연애 결혼이라는 것은 양반가에서는 쉽사리 나오기 힘든 이야기였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처럼 남성과 여성이 마주하는 것 역시 조선 후기로 갈수록 금기시되어, 예를 들면 여말선초까지 활발히 제작됐던 여성의 초상화가 조선 중후기로 가면서 그 수가 크게 줄어들게 된다.[90] 또한, 일반적인 사회 진출을 제외하고는 고려나 조선 초기까지는 호적에서의 기록 순서에서도 조선 초기 이후와 달리 남녀 구분 없이 태어난 순서대로 기재했던 점, 조선 시대에 부계로 제한했던 음서 상속권 또한 고려 시대까지는 외손자까지 똑같이 가능했던 점, 고려 시대에는 여성의 재혼자유로웠으나 조선 시대에 법으로 금지된 점[91], 기타 포상 보장 등의 제도적 제사나 상례 등도 모두 여성이 주재 가능했다는 점, 경제 생활이나 가정 생활 등이 모두 남성과 어느 정도 대등한 수준이었던 고려나 조선 초반을 감안하면 적어도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여성의 인권 하락이 상당히 진행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으며 이 시기 성립된 교조적 성리학 지배 질서가 일반 서민층에게까지 확산되고 19~20세기에 이르는 긴 시간동안 점진적으로 진행되면서 세계적인 여성 인권 수준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 되어[92] 대한민국의 법제상으로까지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또한, 이런 인권 하락 현상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 급격히 진전된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비단 조선 후기에만 국한된 일은 아니었으며 여성 인권의 영역에서만 나타난 현상도 아니었다.
예를 들어 조선 후기의 인권 하락과 별도로 이미 조선 전기에 성리학 질서의 성립을 위해 조선 초기인 태종 시기부터 첩의 자손인 서얼을 문과는 물론 생원이나 진사과에도 응시하지 못하게 한 "서얼 차대법"이 제정된 바 있으며 역시 같은 시기의 "삼가 금지법"을 통해 실질적으로 국가가 과부의 재가, 혼인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명백히 소수자의 인권을 법적으로 하락시킨 이런 법률들은 그 당대에만 실시된 것이 아니고 그 후 조선의 법제로 명시적으로 제도화된다. 위의 삼가 금지법만 하더라도 성종 때에 이르러 "재가 금지법"으로 성문법으로 확정되어 공포되었으며, 양반의 정처를 대상으로 관리하여 국가가 명부를 만들어 통제하였다. 예를 들면 세번 이상 시집간 여성의 경우는 별도로 공식 명부인 "자녀안"[93]에 기록하고 통제했다. 다만 일반 평민들은 재가금지법의 영향을 크게 받지 못했다. 19세기에도 민간에서는 재혼이 성행 한다는 기록이 있으니, 일각에선 성종이 양반들의 권력과 머릿수를 통제하기 위하여 실시했다는 주장도 있다.[94]
다만, 신사임당이 남편에게 재혼하지 말라고 부탁한 것으로 보면, 남성도 수절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은 듯하다. 변질된 유교적 전통 문서에도 아내와 사별하고 수절한 선비들이 적지 않았다는 내용이 있다.
이 부분은 고려에 비교하면 확실히 성리학적 질서가 뿌리내렸음을 보여주며 성리학에 따른 가부장적 질서가 확립되고 지방에서도 향악과 서원의 영향으로 점점 심화되었다. 좋게 말하면 양반계층이 원하던대로 성리학적 질서가 자리잡은거고, 나쁘게 말하면 이런 추세속에서 여성의 권한이 축소되었고, 가부장적인 가족관계와 종법이 고착화되었다는 것이다.

8.4. 소수민족


단일민족 프로파간다 때문에 조선 역시 단일민족 사회였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조선 사회에는 여진과 왜인, 한족을 비롯해 그다지 많지는 않지만 소수민족이 존재했다. 특히 명청교체기 명나라가 망하면서 청의 지배를 피해 자주국인 조선으로 넘어온 케이스도 꽤 됐다. 이지란, 김충선, 여여문, 얀 야너스 벨테브레 등이 대표적인 외국계 조선인들.
조선은 이러한 이민자들을 향화인이라 불렀으며, 대개는 일반 양민과 다를 바 없이 대했다. 특히 명말에 들어온 명나라 유민들은 황조인(皇朝人)이라 부르며 우대하는 편이었으며, 항왜 역시 그 전투력을 인정받아 중용받았다.
다만 북방민족계 이민자들인 백정 때문에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이 없다고는 못하겠으나, 같은 시기 유대인이나 집시 등에 대한 유럽의 차별과 비교하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차별 자체에는 백정들 자신의 문제도 없지 않았다. 자세한 것은 백정 항목 참조.

9. 조선에 대한 대중적 인식



BBC뉴스 코리아 "마지막 황손: 고종의 손자 이석은 헬 조선이라는 말을 어떻게 생각할까?"
[95]

9.1. 부정적인 인식


조선에 대한 한국인의 대중적인 평가는 굉장히 좋지 않은 편이다. 당장 2010년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유행어 중 하나인 헬조선이 현재 대한민국을 조선[96]에 빗대어 탄생한 유행어이다. 일단, 조선왕조는 한국 대중에게 가장 친숙한 왕조이다. 이는 조선이 한국사 최후의 왕조이고 기록도 풍부한 데다 공교육 및 대중문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덕분이다. 하지만 그 친숙함 이상으로 현대 한국 대중에게 가장 많이 욕먹는 왕조이기도 하다. 그 결말이 다른 나라에게 식민지화되는 것으로 매우 좋지 않게 끝났기 때문에 대중의 조선에 대한 반응이 부정적인 것은[97] 어느 정도 필연적인 면이 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총독 직할기관이었던 조선사편수회는 타율성론이나 정체성론과 같은 제국주의 시대의 이론을 가르쳤다. 이런 이론들은 20세기 국사 교육의 기초가 되기도 했다. 광복 이후 70년대 이전의 국사 교육마저도 "조선이 왜 500년만에 망했는가"라는 질문과 전형적인 답변들이 중심이 되었다.[98] 조선이 망한 원인은 한결같이 붕당정치와 내분, 신분차별, 유교, 사대주의, 문치주의가 꼽혔다. 이런 염세적인 국사관을 교육받은 기성 세대들의 역사관과 대중적인 인식에 큰 영향을 끼쳤다. 게다가 이 편견들은 80년대에 사극을 비롯한 대중 매체에 의해 강화되기도 했다. 계속해서 이론과 연구 경향이 바뀌는 역사학계와 대중들의 역사관이 차이가 나는 것은 필연적이었으며, 조선에 대한 오늘날 역사학계와 대중의 인식이 갈수록 괴리되는 것도 당연한 모습이다.
현대에는 특히나 온라인에서 조선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이 두드러진다. 조선사에 대한 토론에서 조선에 뭔가 우호적인 의견이 나타난다면 논리적인 토론은 고사하고 국뽕이라는 비난이 쏟아져 나온다. 심지어 극단적인 경우에는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와 신진 사대부들을 매국노라고 비난하거나, 진눈머처럼 조선이 아예 한국사임을 부정하기도 한다.
하나의 원인은 조선의 보수적인 면이다. 성리학붕당 정치 등 백성들의 삶은 안중에도 없이 밥그릇 싸움만 한 지배층. 유교신분제로 얼룩진 극도로 보수적인 사회와 꼰대 같은 정치인들, 그리고 그로 인해 정체된 사회.[99] 극악한 사서삼경 지상주의, 과거급제 지상주의에 광적으로 눈이 멀어 생사를 망각하고 도취돼 백성들의 모든 것을 결박하던 인습 등은 합리적인 현대인들의 시점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광경이다.

또 조선이 건국부터 멸망까지 각종 열강에게 당했던 굴욕적인 사건들 또한 뇌리에 깊게 남아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으로 대표되는 외세의 침략이 그 대표적 예다. 역사적으로 조선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정복 사업에 나선 일에 비하여 외침을 받은 일이 더 잦았다. 근현대사는 더 좋지 않다. 일본의 침공 앞에서 제대로 저항해보지도 못하고, 종국에는 35년 간의 식민지 시대를 살게 만들고, 해방 이후 남북분단의 아픔과 3년 간의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적인 현대사로 이어졌다.
그런데 조선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별개로 조선의 문화만이 한국 고유의 문화라는 인식도 은연 중에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는 조선이 대중에게 가장 친숙한 왕조이기도 하면서 다른 왕조들의 역사나 문화는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10. 군사력



조선의 군사력 운용에는 분명히 문제가 많았지만, 타당한 수준 이상으로 조선군이 폄하되는 경향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조선군은 역사적 전과가 처참하다. 전대왕조들은 중화제국들이나 북방 유목민족들과의 전쟁에서 극적인 승리를 경험한 적이 있다. 그에 비해 조선은 외적을 상대로 자력으로 승리한 적이 거의 없다. 또한, 대중적 이미지의 문제도 있다. 조선은 국가적으로 무를 천시하고 비생산적인 글 공부에만 전념했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다. 게다가 대중이 조선에 대해서 가지는 시각이 기본적으로 부정적이기도 하다.
다만 조선의 수많은 굴욕은 조선의 내부적 문제만이 아니라 외교적-정치적 상황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했다. 조선은 과거와 달리 안정된 강대국들[100] 에 둘러싸인 형세였다. 그렇기 때문에 전대왕조인 고구려나 고려에 비해 외교적 운신의 폭이 매우 좁았고, 정복 전쟁을 펼치기도 여의치 않았다. 또한, 세간의 인식과 달리 조선은 국방 문제를 등한시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임진왜란에서 의병과 수군만 싸우고 조정은 방관했다는 것이 대중적 인식이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실제로는 조선 조정은 정규군 전반을 지휘하며 필사적으로 일본에 맞서싸웠다. 그리고 군사의 규모는 축소되었지만 중앙 상비군의 질적 향상은 이루어졌고, 비격진천뢰, 화차, 조총을 위시한 화약무기도 대거 도입되었다. 이는 확실히 전대왕조에 비해 조선이 이룬 군사적 발전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정당한 수준 이상으로 비난이 과도할뿐, 조선의 군사체계에 심각한 결함이 많았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특히 조선군의 폐해에 대한 모든 책임을 국제정세 같은 외부 요인으로 돌릴 수는 없다. 분명 조선은 전대왕조들에 비해 기술도 발전하고 인구 및 생산력도 증가하였다. 그러므로 군사력도 전대왕조들을 능가해야 정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은 국력을 군사력으로 치환하는 시스템이 너무나 후진적이었다. 이는 오히려 전대왕조들에 비해서도 퇴보한 수준이었다. 쉽게 말해, 국력의 하드웨어는 제법 괜찮았지만 정작 그것을 운용하는 소프트웨어가 극히 부실했던 나라였다.
대중적 이미지와 달리 건국 초기, 아니 넓게 잡아도 조선 초기에서 중기로 넘어간다고 할 수 있는 예종까지는 조선의 군사력은 우수한 편이었다. 이는 초기에는 조선 조정이 군사력 강화에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태조 이성계 휘하의 고급 무장들과 정예병 수만이 남아있어 조선을 뒷받침해주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록에는 태조의 통치 기간에만 조선의 잠재적인 병력이 20만 이상이었던 것으로 나온다. 규모 못지 않게 내실도 우수하여 방패검병인 팽배수와 중기병 전력도 견실하게 편제되어 있었고 정예 궁병만 수만이었다고 한다. 조선에서는 이방원을 필두로 한 신하들이 대군을 일으켜 요동을 공격하는 것을 진지하게 추진하려고 했다. 명나라에서 이런 조선의 움직임을 경계했다는 기록도 있고 여진족과 왜구를 대상으로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이렇듯 조선은 초기의 군사력이 우수했지만 정작 그 잠재력을 증명할 실적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이는 조선 초기부터 국제정세가 안정되어 있어서 외침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군사력이 건실했던 시기에 대규모 외침이 있었다면 의외로 조선도 여요전쟁처럼 통쾌한 승전을 했을 지 모른다. 그러나 조선 초중기에는 조선과 명나라 모두 안정기였고 북방의 이민족들도 잠잠해서 전란이 없었다. 그래서 정작 전성기의 조선군이 보인 전과는 여진족 및 왜구들에 대한 소규모 토벌 정도였다. 그래도 실적이 없지는 않아서 세종대왕 치세에는 한국사의 마지막 북벌이었던 4군 6진까지의 확장을 이룩했다. 이는 고려시대에도 실패했던 동북 9성으로의 확장에 마침내 성공하고 현대 한민족의 국경선을 확립한 중요한 성과이다.
또한 화차가 정식으로 군제에 편입된 것은 문종 때였으며, 세조는 본인도 상당한 군재가 있었기 때문에 신숙주, 구치관 등을 통해 북방을 안정시키는 등 노력을 경주했다.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고 이만주를 잡아죽여 건주여진을 아예 멸망시킨 것도 세조 시기다.
그러나 이런 군사력이 유지되었던 것은 초중기까지이고 이후로 조선의 군사력은 약화일로를 걷는다. 이는 근본적으로 조정이 펼친 군제의 방향성에서 기인했다. 조선 조정은 군사력 전반에 대한 통제력을 최대화하는 군제를 펼쳤다. 그것이 힘들다면 통제 가능한 수준까지 군사력을 축소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이는 조정이 군사 반란을 극도로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의 창업군주인 이성계부터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군주가 된 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강력한 군대를 통제하지 않을 경우 벌어지는 문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부실했던 재정도 조선의 군사력이 약해진 중요한 원인이다. 이는 크게 두가지 이유였는데, 하나는 조정이 국가 운영에 충분하지도 않을 정도로 낮은 조세 수준을 책정한 탓. 이런 조세 제도를 펼친 이유는 조정이 유교적 위민사상에 근거하여 백성들의 경제적 부담을 덜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유교적 명분에만 집착하고 부족한 국가 재정을 충당할 대안을 마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군사력을 강화하고 싶어도 정작 세금을 충분히 걷지 않으니 군사력에 투자할 충분한 재원이 있을 리가 없었다. 이런 만성적인 재정 부족은 조선의 군사 규모는 물론이고, 무기의 질, 보급, 훈련 상태에까지 전반적으로 악영향을 끼쳤다.
이런 와중에 둘째 이유인 부정부패가 속출했다. 일단 세조 시기에도 훈구파한명회계유정난 공신들의 폐단은 심각했는데, 이들은 세조가 싸고 돈 바람에 제대로 뿌리를 뽑지 못했고[101] 이는 장기적으로 왕권의 약화와 조선 고위 관료들의 부정부패로 이어졌고, 청렴하고 능력있는 관리들보다 음서, 뇌물로 고위직에 오르는 관료들이 속출하니 자연스럽게 성리학의 기본인 청렴이 제대로 강조되지 않았다. 이에 확실하게 시스템의 붕괴를 이끈 것은 다름아닌 연산군으로, 왕이 직접 뇌물을 받아가며 흥청망청 노는 데다 국고를 탕진했다[102]. 이러니 국방력을 키울 예산이 없어진 것.
조정이 군축 정책을 펼친 것도 군사력이 약화된 원인이다. 이는 상기한 대로 재정이 파탄난 것도 있지만, 조선 중기까지 평화가 지속되어서 조정이 대군의 필요성을 경시했기 때문이었다. 조선 초중기를 거치며 열심히 때려잡은 결과 여진은 소수 세력으로 줄어들었고 몽골은 여진과 명에 가로막혀 올 수가 없으며, 왜구들도 토벌되어 조선의 주변국은 사실상 명나라만 남았다. 그러나 조선은 명나라와 대립각을 세울 기반도 필요도 없다 보니 복속을 택했다.[103] 대신 그 덕분에 조선은 전란없는 안정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명나라가 쇠퇴하자 이민족인 여진족과 일본이 발호했고 다시 전란기가 도래했다. 그런데 평화기 동안 약체화된 조선의 군대는 이에 대응하는 것이 벅찼다.
즉, 평화기가 끝나고 전란기가 도래했음에도 조선은 필수적인 수준의 군비증강도 하지 못한 것이다. 이는 평화기에 약체화된 군대를 재건할 역량이 조선에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상술되었듯이 근본적으로 조선의 체제로는 대군의 양성이 쉽지 않았다. 게다가 전란이 반복적으로 터지는 바람에 조선 입장에서는 군비증강은 커녕 전후복구조차 끝낼 틈이 없기도 했다. 그러나 정상적인 국가라면 외침이 예상되면 어떻게든 군대의 방비를 해야하는 것이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해내지 못한 것은 조선의 국가적 능력 부족이다. 따지고 보면, 군사력 양성에 문제가 없을 수 없도록 국정을 운영한 것도 조선의 실권자들이다. 그러니 순전히 외부 요인에만 책임을 돌리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결국, 전란기가 도래하자 조선은 약체화된 군대와 국방 체계의 문제점을 낱낱이 드러내고 말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국토의 초토화와 굴욕적인 패전이었다. 그나마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 직전까지는 국방의 문제를 떠나서 이미 조선이라는 나라 자체가 쇠망의 길을 걷고 있을 때이니 논외로 칠 수도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에서 보여준 속절없는 모습들은 당시 조선은 물론 역사적으로도 고려의 여몽전쟁과 함께 한민족에 깊은 상흔으로 남았다. 특히 충분히 막아낼 수 있는 적을 상대로도 실책만 반복하다가 처참하게 패한 병자호란의 결과는 너무나 참담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조선 이전 한반도의 왕조들은 대륙의 제국들과 북방민족들을 상대로 승리한 경험이 있는데, 조선은 단독으로 국가간의 전쟁에서 승리한 경험이 전무하여 더욱 비교가 된다. 조선군도 초창기엔 왜구와 여진족들을 상대로 꽤나 맹위를 떨치긴 하는데... 어디까지나 상대의 수준이 도적때에 머물렀을 경우에 한해서였다. 제대로 무장하고 대열을 갖춘 일본군과 중장기병을 대규모로 굴리는 만주족을 상대론 맥을 못 췄으며[104], 결함 많은 지휘체계 때문에 소규모 접전에서 승리를 거둬도 그걸 반격으로 이끌어갈 역량이 없었다.
이 때문에 조선의 군사적 업적을 옹호하기 위해선 이전 왕조가 멸망하기 직전 막장을 달리던 때의 군대와 초기의 최정예 조선군을 비교하지 않으면 견적이 안 나오는 안습한 상황이 나온다. 다만 그것도 군대가 어느 정도 제 기능을 했던 조선 후기에나 해당하는 이야기지 조선 말기~대한제국 시기 정부군은 의병을 때려잡거나[105] 외국 군대의 딱갈이 노릇을 하면서 자기들끼리 총질한 어두운 역사 때문에 언급하는 걸 터부시하는 경향이 있어서 완전히 흑역사 취급 받고, 이 시기엔 군대가 없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106]

[1] 다만 연세대학교의 경우, '근세'란 표현을 쓰지 않고 조선시대를 중세 후반부로 본다. 그리고 고려대학교는 이와 같은 시대구분을 쓰지 않고, 왕조의 변천에 따라 구분한다.[2] 한국은 전통적으로 ‘그릇’의 용도로 도자기가 아닌 놋그릇을 썼다. 화려한 도자기가 적은 것도 역시 이 때문. 정교한 도자기 수요가 전멸해버리니 도자기 기술이 화려해지길 기대하기 어렵다.[3] 그러나 화폐가 대중적으로 쓰였다고 보기엔 조선 말기까지 삼베나 쌀등의 현물거래의 비율이 유럽뿐 아니라 중국,일본과 비교해서도 매우 높다. 임진왜란때 명나라 조정에서 군인들에게 은전을 지급하며 식량의 일부를 조선 현지에서 사먹으라고 했는데 조선에서 화폐를 받는 곳이 거의 없었다는 기록도 있다.[4] 더이상 불교가 국교가 아니라 불교 사찰은 그 세가 움츠러 들었기 때문이며, 왕궁 역시 개별 건축물은 정전 같은 주요 건축을 제외하면 딱히 규모가 작아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공간상 훨씬 더 크고 복잡해졌다. 경복궁이나 동궐(창덕궁, 창경궁)의 규모를 보자.[5] 이 당시의 인구란 농업이란 국가 기간산업을 지탱하고 군사력에 동원될 수 있는 인구란 개념이었다면 오늘날에는 고급의 기술과 고도의 숙련된 인재들, 다시 말해 국가 경쟁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인적 구성원의 개념을 통칭한다.[6] 태조 왕건삼국통일전쟁 이래로 황폐해진 평양에 지금의 황해도 지방 백성들을 이주시켜 기반을 튼튼하게 하고, 처음에는 평양 대도호부(平壤大都護府)로 삼았다가 이어 서경으로 개편하면서 본격적으로 고려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그 이전에는 사실상 버려진 땅이었다.[7] 이를 잘 보여주는게 사헌부과 사간원이라는 존재였다. 왕이 자신의 임의대로 명령을 내린다 해도 이들이 적법성을 따져 부당하다고 거부하면 왕 역시 GG쳐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8] 특히 연산군으로 인해 발생한 중종 반정이후 왕권은 급격히 쇠락해졌는데 '왕권의 회복=절대권력의 인정=폭군화'란 논리로 신료들이 왕이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마저 견제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왕위에 오른 중종은 좌절감을 겪어야 했으며 신료들은 왕의 왕권 수호 및 회복 시도를 '제2의 연산군의 출현'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어떻게든 막았다.[9] 『한국경제통사』[10] 아전들이 공식적인 급여 자체가 아예 없었다고 흔히들 알고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즉, 아전들도 급여 자체는 분명히 받고 있었다. # ## 다만, 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은데, 향리들에게 비공식적으로 돈을 준다 같은게 말이 안되는 것이, 수령이 지방 자금을 횡령하거나, 자기 주머니라도 털어서 줘야 한다는 이야기다. 읍사례라고 해서, 조선후기 수령들이 자체적으로 내부 규칙을 제정해서 향리들의 인건비와 업무에 필요한 비용을 지급하려고 한 기록은 있으나, 이것도 드물게 나타나는 사례에, 무엇보다, 18,19세기에나 나오는 기록이다.[11] 조선 초기에는 과전법에 따른 과전이 주어졌으나, 이 과전이 워낙 부족한데다 워낙 적은 녹봉 때문에 관료들의 수탈이 일상이 되자 결국 관수관급제를 거쳐서 폐지된다.[12] 심지어 한양에 있는 경군도 시전을 열어서 그 수익원으로 유지했고, 강화도 수군은 수로 이용로를 받아서 유지했다.[13] 정약용이 감독한 수원화성은 일꾼들에게 임금을 지불한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수원 화성 건립이 정조가 심혈을 기울여 추진한 역점 사업이기 때문이다. 재원 만들고, 의궤 만들고, 기록을 저렇게 꼼꼼하게 남긴 것은 정말로 수원화성 정도이다.[14] 조선시대에 민란이 일어나면, 지방관은 추방으로 끝나지만 아전은 죽는다.[15] 이걸 공식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이전에 수탈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16] 조선시대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여성 중 한명인 신사임당의 대외적 이미지가 "현모양처"란 걸 생각해보자. 물론 신사임당은 글과 그림 솜씨가 뛰어나고 굉장히 머리가 좋았으며 정치적 감각이나 현실감각도 뛰어났다. 또한 당대에도 뛰어난 화가로 이름 높았다. 사실 신사임당이 현모양처로 불리는 건 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 신사임당이 남편 이원수(조선)의 집으로 출가하지 않고 오히려 이원수가 초반에는 데릴사위로 살았다. 신사임당이 남편의 과거 급제를 돕고 여러 조언을 해주긴 했으나 위에서 서술한 것처럼 그녀는 오히려 다른 방면으로 이름을 떨쳤는데 안타깝게도 그녀의 대외적 이미지는 조선 후기를 거쳐 현모양처가 가장 짙게 남았으며, 조선 후에 비해 비교적 여권이 높았던 당대에도 그녀의 영향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녀가 화가와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다곤 하나, 만약 신사임당이 그 재능으로 남자로 태어났으면 당대를 휘어잡는 학자나 정치가가 되었을 것이다. 멀리 갈것도 없이 아들 이이가 고위관료이자 학자로서 미친 영향력을 생각해보자. 물론 신사임당이 여권이 추락하는 과정에서 그 재능이나 명성이 평가절하당하고 현모양처의 이미지만 지나치게 강해진 것도 사실이지만, 낮은 여권우로 그 재능에 제약받은 것도 사실이다.[17] 조선 후기로 갈수록 여권은 더욱 추락해 아예 여성들이 교육을 받는 주요 목적 중 하나가 현모양처가 되기 위함, 즉 남편을 잘 섬기고 아이를 잘 기르는 목적이 된다. 실제로 이 흔적은 근대가 아닌 현대 대한민국까지 남아있었는데, 해방과 한국 전쟁 이후에 7,80년대까지 여성들은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최고 명문대에 보내는 걸 꺼리는 트렌드가 남아있었으며 (그나마 보낼거면 서울대학교 또는 이화여자대학교로 보냈다. 현재 여성 고위층의 많은 수가 이 두 학교 중 하나 출신인 경우가 많다는 걸 생각해보자) "신부수업"이라는 말은 90년대까지도 널리 남아있었고, 사실 이런 성차별적인 생각의 잔재는 기성시대를 중심으로 현재까지도 남아있다.[18]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해서 조선 후기로 갈수록 불교 탄압은 줄어들었으며 이후 불교는 한반도 내에서 쭉 지속된다. 일례로 임진왜란 직후 왕실과 국가의 주도로 사찰 복원과 건립이 활발해진 것 등.[19] 이성계 일파가 우왕과 창왕이 진짜 왕씨가 아니라고 주장했고, 왕통을 바로 세우기 위해 공양왕을 옹립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20] 박지원을 위시한 중상주의적 실학자들이 제기한 문제도 이미 현대 역사학계에서도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청나라, 일본 등지의 겉모습만 바라보고 나왔다는 비판이라는 소리가 나오는 마당이다.[21] 양반 가문의 족보들을 추적해 연구한 결과로는 19세기의 인구증가율은 그 이전 시대보다 더 높았다.# 물론 일부 족보로 전체를 일반화할 수 없고, 당시 조선이 사회적으로 (특히 인구학적으로) 포화상태에 이르렀다는데는 대부분 동의한다.[22] 대부분 모르는 사실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유행이 유기그릇으로 옮겨가서 도자기 수요가 사라졌다.[23] 승화루, 경회루, 성천객사 등[24] 종교 건축에서 국가의 개입은 줄었으니 민간의 지원으로 수많은 팔상전, 복층 건물을 세웠다.[25] 당대 중국 외 동아시아와 그 이전 시대와 비교했을 때 과도한 편이다.[26] 정동훈(2020), "正統帝의 등극과 조선-명 관계의 큰 변화 - 조선 세종대 양국 관계 안정화의 한 배경 -", 《한국문화》90.[27] 계승범(2018), "16세기 초중반 한중관계의 이념성과 중층성", 《조선시대 한중관계사》.[28] 권선홍(2010), "유교문명권의 국제관계: 책봉제도를 중심으로", 《한국정치외교사논총》31, 2; 최종석(2017), "13~15세기 천하질서하에서 고려와 조선의 국가 정체성", 《역사비평》 121; 계승범(2019), "삼전도항복과 조선의 국가정체성 문제 - 허태구, - 병자호란과 예, 그리고 중화(소명출판, 2019)에 대한 종합비평-", 《조선시대사학보》91.[29] 허태구(2019), 《병자호란과 예, 그리고 중화》, p. 322~325.[30] 조일수(2017), "인조의 대중국 외교에 대한 비판적 고찰", 《역사비평》121; 구범진(2019),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p. 66~67.[31] 허태구(2019), "병자호란 연구의 새로운 定礎 서평 구범진(2019),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까치, 403쪽.", 《인문논총》 76, 3.[32] 호란기 척화론자들의 대명의리론의 동력을 당대 명의 건재라는 국제정세의 현실로 비롯된 것이라 추정하는 연구자들도 있으나,[30] 당시 척화론자들은 국제정세를 고려하여 척화를 발언한 사료가 1639년 논쟁 과정에서 의리론이 밀리자 김상헌이 명의 정벌을 거론한 것 외에는 전무하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낮으며,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군신관계를 확정하는 대표적 절차인 봉표칭신의 예를 청 사신들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도망치는 상황까지 초래하면서 거부했다는 것은 # 실리를 추구했다고 보기 매우 어렵다.[31] [33] 다만 단순히 하늘에 대한 제사 이상의 의미를 지닌 소격서를 유교가 아닌 도교식 제사라며 폐지하자고 주장을 한 조광조 같은 인물도 있던 것을 보면 이런 교조적인 성리학 사상이 이전에도 이전에도 없던 건 아닌 듯 하다. 심지어 이 과정에서 중종을 제후왕으로 깎아내리는 사대주의적 발언까지 했을 정도로 조광조는 교조적이었다. 물론 조광조는 지나친 교조주의와 이 발언을 포함하여 왕에게 무례한 발언으로 결국 중종에게 사사된다.[34] 이거를 그냥 단순한 답없는 수구성으로 보기는 쉬운데, 바로 이 해에 중일전쟁이 일어났다. 게다가 중일전쟁과 일본의 중국 대륙을 향한 야욕은 하루아침도 아니고 당시 식자들은 30년대 초반부터 충분히 인지하고 있던 국제적 조류였다. 조선이 일본에게 침략당했을 때 중국이 구원군으로 왔던 역사적 전례를 생각하면 단순한 보수성의 발로일수도 있지만 반대로 굉장히 첨예하고도 일제 당국 입장에선 어쨋든 '무해한 구시대적 종교 문화 행사'로서 제지할 명분이 없다는걸 노린 정치적 발언이었 가능성도 있고, 어쨋든 관련 사료와 그 해당 문맥을 먼저 제시, 분석하지 않고 일차원적으로 '그냥 노답 보수주의자들이 그때까지도 있었단 반증이다!'식으로 주장하기엔 재해석의 여지가 많다.[35] 다만 이 부분은 현재에도 한국 내에서 존재하는 반미, 반일이나 친중 등 일종의 정치적인 목적이나 반외세적 성향 등의 영향일 가능성은 있기는 하다. 당시라고 그런 사상이나 정치적인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없지는 않을 테니까.[36] 물론 에도 막부도 강력한 쇄국 정책을 실시했는데,그 정도가 어느 정도였냐면 해외에 거주한 일본인들은 아예 입국 자체를 못하게 막았다.[37] 이전 서술에서 이 부분은 고종에 대한 옹호론은 될 수 있어도 조선에 대한 옹호론은 될 수 없다며 오랫동안 나라의 문을 닫고 사대만을 해 와서 유럽의 문명에 대한 이해가 사실상 전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태였다고 말하지만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사대는 절대 문을 닫아 거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이 부분은 조선의 소중화주의를 비판해야 옳다.[38] 고종은 일본에 대해서 을사조약 이전까지 할수 있는 한도에선 최대한 저항을 했다. 단 무력적 수단을 제외하고[39] 다만 이 부분은 왕조가 '사대'에 익숙해져서 독립과 외교에 대한 관점이 왜곡되었기 때문이라고 하기도 하고 조선 내부의 갈등이 심해져서 대외적인 항쟁이 어려웠다거나 하는 등등의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하기는 하다.[40] 영국군이 매관매직으로 인해 크림 전쟁발라클라바 전투에서 개박살이 난 이후에야 매관매직이 사라졌을 정도로 19세기까지 유럽에서는 매관매직이 합법적인 전통이었다. 애당초 과거제도 같은 시험을 통해 관료나 군인들을 선발한다는 개념 조차 없었을 정도였다.[41] 유럽에서 지방 말단 관료는 공식적으로 돈주고 자리를 살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 가장 유명한 공식적 매관매직 제도는 근세 유럽의 군 특히 육군 전투병과의 임관 및 진급 제도로 임관 진급하기 위해서는 일정 근속 년수를 채운 뒤 돈으로 계급을 샀다. 원래는 정부의 지원 부족을 육군 장교들이 자기 돈으로 해결하던 게 공식적인 제도가 됐던 것이다. 특히 영국 육군의 사례가 유명한데, 얘네들은 크림전쟁 때까지도 이 시스템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발라클라바 전투로 대표되는 크림전쟁에서의 영국 육군 기병대의 삽질의 가장 큰 원인이 바로 이거였다.[42] 배치, 승진 등 실제 공직생활도 대과 성적, 근무 성적이 크게 반영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임용 이후에도 실력주의에 입각해 관료제를 운용했음을 알 수 있다.조선의 인사임용제도와 영향요인에 관한 연구 - 유교적 실적주의를 중심으로 -[43] 조선사 전체로 확대하면 평민 급제자 수는 전 과거 급제자 중 1/3에 이른다.[44] 실제 총통위가 폐지되고 궁시 위주의 군제로 개편된 시기는 세조 치세이나 군사력 약화가 본격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하는 시기는 성종대 이후 부터였다.[45] 그러나 대동여지도는 동시기 서양 기술로 제작된 지도에 비교하면 그 정밀성이 떨어진다는 점은 있다.[46] 다만 이것은 일본이 서서히 국가 막장 테크를 타던 것도 한몫을 했다. 조선 통신사를 접대하는 비용을 조달하려다가 민란이 일어났다는 기록이 있을 지경이니, 언젠가는 이런 식으로 접대하는 수준을 축소하자는 논의가 나올 판이었다. 당장 조선 통신사가 중단된지 불과 50년만에 일본에서 무슨 사건이 터졌는지를 보자. 그리고 조선 통신사가 폐지된 지 불과 12년 만에 오시오 헤이하치로라는 사무라이에도 막부의 무능함으로 인해 백성들이 굶어죽는 사태에 분개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고, 조선 통신사가 폐지되기 약 30년 전인 1783년에는 일본사 최악의 대기근 사건인 텐메이 대기근이 발생했다. 이런 상황에서 외국 사신에게 접대하는 수준을 호화롭게 한다면 나라 재정이 버틸 수 없다.[47] 1857년의 '지구전요(地球典要)'. 중국보다 15년 늦었다. 다만 세종 시대 때 이순지가 막연하게 지동설을 주장한 적은 있었다.[48] 열린연단 문중양 참조.[49] 천문학 상위 부분은 영정조대에서 크게 보충하지 않았다. 18세기에 꾸준히 도입되었던 서양 학문이 19세기에는 다소 정체되었기 때문이다. 문중양[50] ...라기 보다는 사실 이에 대해서 의문이 있는게 신하들은 의견이 갈렸고 왕은 사형을 주장했다. 의견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법에 따라 처벌할 것 또 다른 하나는 법에 따르면 사형이 과하지만 일이 너무 심하니(현직 관료까지 얽힌 사건이었다!) 사형시켜야 한다 둘이었다.[51] 양반이라는 이름 자체가 무신 관료를 일컫는 무반(武班)과 문신 관료를 일컫는 문반(文班)을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52] 고려도 제도적으론 양천제를 표방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양인 내에 권세와 지위에 따라 귀족, 향리 등이 지배계층으로 존재했다.[53] 고려가 귀족 사회로 일컬어지지만 전대의 통일신라삼국시대처럼 귀족이라는 계급이 확고불변한 계급은 아니였다. 사실 고려도 그 이전 시대에 비하면 신분간 상하 이동에 대해 개방적인 모습을 보였다. 자세한 건 고려 문서 참조.[54] 이는 고려도 보장하긴 했으나 실질적인 면에서는 조선대의 유연성이 더 높았다. 고려의 지배층들(후대에 문벌귀족이라 불리는)의 결집도가 높았던 데다 고려의 직접적 행정력과 법제적 기반이 조선처럼 전 국토에 미치지 못한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55] 조선사 전체로 확대하면 상민 급제자 수는 전 과거 급제자 중 1/3에 이른다.[56] 거문고를 타며 시를 읊는 것을 말한다.[57] 당시 세종도 맹인은 아니지만 시력이 심각하게 좋지 않은 시각장애인이었다[58] 박연은 음악적인 재능은 매우 뛰어나지만, 실록에 남겨진 그의 인성과 관련된 기록을 살펴보면 재능에 비해 인성이 아주 바르지 못한 인물이었다. 그는 궁의 악공들을 데리고 사사롭게 영업 행위를 하는가 하면, 누이가 죽은 뒤에 바쁘다는 핑계로 유산만 챙겨서 얼른 돌아오는 등의 행동을 해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즉, 저 발언은 성격이 개차반인 박연조차도 장애인들에 대해 차별을 두지 않을 정도로 사회 통념상 장애인에 대한 시선이 좋았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59] 물론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런 것처럼 장애인을 멸시하는 사람이 없진 않았을 것이고, 아무리 체계가 정해져있다 한들 다 지켜졌지는 않았을 가능성도 높긴 하다. 그래도 나라의 중심 사상인 유교에서 저런 관점을 가지고 있는 만큼 그렇게까지 무시되었을 리는 없다.[60] 대표적인 예시가 제임스 팔레. 하지만 제임스 팔레는 조선을 노예제 사회로 규정했지 고대 사회라고는 하지 않았다. 애초에 팔레는 노예제 사회가 고대 사회만의 전유물은 아니라며 선을 그었고, 시민혁명 이전 남부 미국도 노예제 사회로 규정한다. 팔레 교수의 조선 노예제 사회설.[61] 중세 유럽의 농노들은 모두 영주의 개인적인 소유물들이었다.[62] 일본의 농노제[63] 「한국사 연구에서 노비제가 던지는 몇가지 문제」, 『한국사시민강좌』 40, 2007[64] 해당 논문의 155페이지에서는 노비를 노예와 등치시킬 수는 없지만 적어도 가내노비의 경우는 전세계 보편적으로 존재한 가내노예의 범주에 속함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또 같은 논문의 157~159페이지에서는, 일반적인 정의를 따르자면 다른 인간의 재산인 동시에 경제적으로 비자립적인 존재인 입역노비는 노예가 맞지만, 그들조차도 미국 남부의 흑인 노예들처럼 공동체에서 배제를 당하는 일은 없었으므로 이를 일률적으로 노예로 정의한 것은 보류한다고 했다.[65] 순수한 법제적 측면에서만 보자면 노비의 생사여탈권은 여느 양인과 마찬가지로 군주로 대표되는 국가권력만이 행사할 수 있었다. 노비는 매매ㆍ상속ㆍ증여될 수 있는 존재일지언정 어쨌든 '인간'으로 간주되고 있었고, 그렇기에 "인명(人命)의 여탈(與奪)은 군주의 고유한 권한"이라는 언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노비주인이 우발적으로든 고의로든 왕민(王民)의 한 일원인 노비를 살해하는 것은 엄밀히 따지면 불법이었다. 단지 노비주인과 노비의 관계가 '하늘과 땅의 관계'로 비유되는 현실 속에서 그러한 '법제적 당위성'이 실제적으로 구현될 여지가 거의 희박했을 뿐이다. 이렇듯 노비가 단순한 '비인격적 사물'이 아닌 엄연한 인간으로 간주되었음은 이 밖에도 주인 이외의 인간과 관련한 토지소송 등의 법적인 문제에 대해 노비의 발언권이 인정되고 있었던 점, 노비의 재산 소유 및 그 권리가 법적으로 공인ㆍ보호받고 있었던 점 등을 통해서도 확인이 가능하다.[66] 이영훈, 11-16세기 韓國의 奴婢와 日本의 게닌(下人), 경제 사학 제36호, 2004.[67] 여담이지만 성적 학대랑은 별개로, 강간은 가해자/피해자의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법으로 매우 엄하게 다스렸다. 그렇다곤 해도 상황에 따라선 그게 그거, 즉 현대 관점에서는 충분히 강간인 경우도 많았긴 하지만.[68] 정성미, 조선 시대 사노비의 사역 영역과 사적 영역, 전북 사학 제38호, 2011.[69] 다만 쇄미록에서 오희문은 집안 노비들이 전란의 혼란을 틈타 달아난 일을 기록하며 분노하면서도 피란 중에 죽은 노비들은 없는 살림을 털어서라도 장례를 치뤄주려고 노력하는 등 노비들을 인간적으로 대하는 모습 또한 같이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오희문이 노비를 학대하며 죽게 한 것은 명백한 악행이며, 애초에 노비들이 도주한 사유 자체가 오희문의 학대 때문이다.[70] 단 이 기록 역시 당시 제국주의 백인의 짐 사상에 경도된 서구 열강 프랑스의 외교관이 작성한 것이라는 걸 감안하고 봐야 한다. 당시 서구 열강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비서구권에 대해 멸시하던 시대였고 더군다나 이미 서구권은 노예제를 폐지한 뒤이기에 더더욱 노예제를 안 좋게 볼 수밖에 없는 시대였다. 당장 남북전쟁 이전 미국 남부도 노예제를 유지했다는 이유로 안 좋게 보던 게 저 당시 유럽이었다. 같은 서구권임에도 불구하고 노예제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멸시하던 것이다. 물론 19세기까지 유럽권이 미국 멸시하던 게 일반적이긴 했지만 말이다.[71] 이러한 기술은 가내노비가 고용 노동자인 머슴으로 대체되어 가는 조선 말의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72] #[73] 집안에 필요한 물건을 때려부수거나 하는 일이 드문 것과 비슷하다.[74] [책갈피 속의 오늘]1886년 노비세습제 폐지[75] 물론 주인의 개인적인 동정심으로 바라볼 수 있으나, 원칙적으로 당시 조선의 유교적 덕목에서 지향한 주인과 노비의 관계가 부모와 자식 관계 같은 관계였음을 고려하면 단순 예외 사례로만 치부하기는 어렵다.[76] 출처[77] 1, 2, 3[78] 조선 양반 사대부 계층이 합법적으로 보유할 수 있는 무장 집단은 역설적으로 가노(家奴)들밖에 없었다.[79] #[80] 예를 들어, 고경석, 「노예와 노비」, 역사비평 36, 1996.[81] 이영훈 외에는 김성우가 「팔레의 조선왕조사 인식」(2002)에서 제임스 팔레의 노예제 사회설을 다룬 바는 있다. 이 논문에서도 고려-조선 왕조가 고대 그리스-로마와 같은 노예 노동 중심 경제가 아니었으며 경제적으로 어디까지나 순수한 농업 사회였다는 점을 지적했지만, 이를 법제적으로나 관습적으로나 노예인 노비가 인구 30%가 넘는 고려-조선은 노예제 사회일 수밖에 없다는 팔레의 주장과 절충해서 두 왕조는 "노예제가 강고한 혹은 노예제가 주요 노동력으로 존재하는 농업 사회"라는 규정을 내놓았을 뿐, 전근대 한국의 노예제 사회적 성격을 전면 부인하지는 않았다.[82] 김성우는 전거한 논문에서, 역사상 가장 전형적인 노예제 사회 중 하나였던 옛 미국 남부 사회에 대해서조차, 자본주의 경제 구조를 갖추고 있었으므로 노예제 사회적 성격은 부차적이라는 식의 판단을 내릴 정도로 노예제 사회의 기준을 매우 좁게 잡고 있다. 전근대 농업 사회는 전근대 농업 사회라서, 근대 자본주의 사회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라서 아무리 노예 인구가 많아도 노예제 사회가 아니라면, 도대체 어떤 성격의 경제 체제여야 노예제 사회일 수 있는지, 그렇게 봐야 하는 타당성은 무엇인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아무튼 이영훈이 「제임스 팔래의 노예제사회설 검토」에서 언급한, '노예 노동으로 경영되는, 국제시장 판매를 위한 상품 생산이 경제의 주축임'을 학계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간주하자면, 김성우도 '비주류적인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 된다. 적어도 이영훈과 기준이 상호 합치되지 않음은 명백하다. 물론 제임스 팔레와 노예제 사회설을 반박하던 시절의 이영훈이 이런 점에서 의견 일치를 이루지 못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심지어 이영훈이 노예제 사회설을 지지하는 쪽으로 입장을 선회한 지금도 노예제 사회 판별 기준이 팔레와 완전히 일치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학계 내부에 이 문제에 관한 명백한 기준선이 존재한다고 보기는 매우 힘들다. 따라서 노예 인구가 30% 이상이면 노예제 사회로 봐야 한다는 팔래든, 50%는 되어야 그렇게 볼 수 있다는 이영훈이든 특별히 학계 통설을 위배하는 것은 아니게 된다. 애초에 한국학계에서 이 문제에 관한 통설이 형성되는 데 유의미한 기여를 했다고 볼 만한 학자는 두 사람밖에 없다.[83] "그러나 세계사에서 잘 알려진 노예제 사회에서 노예의 인구비중이 30%이상이었다고 해서 노예의 인구가 30% 이상인 사회가 모두 노예제사회는 아니다." 제임스 팔래의 노예제 사회설의 검토 (이영훈교수)[84] 팔레의 학설 역시 경험적 근거가 충분하지 않다. 중략.. 조선은 순전한 자급적 농업사회였다. 그리스·로마나 미국 남부는 고도로 상업화한 개방경제였다. 꽉 닫힌 농업사회에서 감시와 강제 비용이 많이 드는 노예적 생산양식이 지배적으로 들어설 여지는 거의 없을 것이다. #[85] 새로운 지평의 역사학에서 ‘동의와 계약’ 또는 ‘지배와 보호’의 원리가 작동하지 않은 사회는 광의의 노예제사회로 정의될 수 있다. 조선왕조는 그렇게 새롭게 정의될 노예제사회에 속할 가능성이 크다. #[86] #1 #2[87] #[88] "제임스 팔레 같은 외국인 학자는 노비가 농노보다는 노예에 좀더 가까웠다는 측면에 착안해서 조선을 노예제 사회로 규정했다. 하지만 노예제 사회라고 규정하기에는, 노비는 농노적인 모습도 많이 갖추고 있었다. 조선시대 노비는 노예와 농노 중 어느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양자의 모습을 골고루 갖춘 상당히 독특한 것이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노비와 노예 · 농노의 비교[89] 성리학적 예법에 따른다며 여성의 권리를 억압하고, 남존여비의 사상과 단어를 만들어낸 계층이었기에 이러한 행보는 더더욱 역설스러울수 밖에 없다.[90] 보통 초상화는 양반가들이 주문했는데 강화된 성리학으로 인해 여성 본인의 얼굴이 외간남자에게 보이기를 부끄러워 했기 때문이다.[91] 사실 법으로 완전히 막았다고 할 수는 없다. 여성이 재혼을 하면 그녀의 자식들이 과거 시험을 치룰 수 없었는데, 이를 생각해서 양반가의 여성들이 재혼을 거의 하지 않았을 뿐 아예 안 한것도 아니며, 과거 시험과는 연이 먼 일반 양민이나 천민들의 경우 남편이 죽으면 생활이 궁핍해지고 삶이 힘들어지므로 재혼을 택하는 여성들이 많았다.[92] 근대 이후의 전반적인 세계 여성 인권은 "세계 인권 사상사" 참고.[93] 다만 자녀안이 조선시대에 생겨난 건 아니고, 고려시대때부터 이미 존재했었던 것을 계승한 것이다.[94] 그도 그럴것이 제약의 내용이 "재혼한 여성의 자손들은 과거를 치를 수 없다." 인데 이는 사대부들에겐 치명적이었으나 관직과는 거리가 멀던 일반 평민들에게는 별 상관이 없는 제약이었다.[95] 댓글을 보면 알수 있듯 반응이 매우 나쁘다.[96] 특히 세도정치와 외침으로 한참 무너져내려가던 구한말조선.[97] 그런데 나라의 최후가 아름다운 경우는 어차피 대부분 없다. 로마 제국과 역대 중국 왕조들, 오스만 제국, 페르시아 제국, 무굴 제국, 러시아 제국 같은 휘황찬란했던 제국들은 물론이고 소련 같은 현대의 초강대국도 끝은 비참했다. 이는 한반도도 마찬가지라서 고조선, 고구려, 백제, 발해도 멸망할때 비참하게 망했다. 신라고려 등은 그나마 왕건이성계 덕분에 편안하고 명예롭게(?) 끝났다. 단, 조선의 최후는 타민족인 일제에 의해 몽골의 침공 당시와 이후 원 간섭기 시절의 고려마냥 변변한 저항도 못해보고 일방적으로 점령당해 식민지가 된데다 이후 독립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민중들을 가혹하게 수탈했기 때문에 더 안 좋게 보이는 면이 크다.[98] 다만 세계사를 조금만 파고 들어가보면 500년 이상 존속된 나라도 흔치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당장 옆나라 중국만 비교해봐도 알 수 있다. 일본은 막부와 천황과의 관계를 어떻게 봐야하는 지에 따라 관점이 달라지지만 막부 기준으로 볼 때도 500년 이상 존속된 정권은 없다. 그렇기에 단순히 500년이라는 기간에 가치평가를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는 의견도 많다.[99] 당장 조선은 사람들에게 꼴보수적인 사회의 상징이다. 당장 꼰대 같은 사람이 나오면 사람들이 조선에서 왔냐고 비아냥거리는걸 생각해보자.[100] 물론 통일 일본이 '강대국'으로 여겨질 정도의 상대적 국력을 지녔다는 것만으로도 생산력과 군사력 면에서 조선이 이전 왕조보다 동아시아에서 큰 비중과 힘을 차지하지 못함을 암시한다.[101] 세조는 쓸데없이 의리를 강조하며 자기 편을 들어준 공신들을 큰 일이 없으면 처벌하지 않았다.[102] 이때문에 조광조 등 교조적인 성리학 원리주의가 대두되기도 했다. 타락한 관학파들을 비판하기 위해 반대로 극단적일 정도로 도덕성을 강조하게 된 것.[103] 직할령으로 편입된다는 것이 아니라 대외적으로 명나라의 의중에 저항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104] 물론 조선군도 뛰어난 지휘관, 제대로 훈련된 병사, 유리한 지형이 갖춰진 싸움에선 얼마든지 강적들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중기부터 조선의 군사체계가 큰 문제를 드러냈는데 왕실과 조정이 반란을 지나치게 두려워한 나머지 지휘관의 권한 행사를 굉장히 억제하고, 병사들의 훈련에도 매우 소극적이었으며, 유능한 출정군 사령관이 있어도 군사적 식견이 부족한 왕과 대신들이 최고 지휘부 노릇을 하면서 불필요한 간섭을 하고 군대를 승산이 없거나 아군에게 불리한 전장으로 꼬라박는 일도 매우 빈번했다.[105] 대중적인 인식과 달리 의병 진압의 주력은 거의 다 일본군이 아니라 정부군이었다.[106] 고종과 조정 대신들이 무능해서 군대가 폭망했다 정도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이때는 조선이 국가 막장 테크를 밞고 있어도 군대가 완전히 유명무실했던 시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