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신수/선수 경력
1. 아마추어 시절
외삼촌이 롯데 자이언츠의 손꼽히는 프랜차이즈 스타 선수였던 박정태다.[1]
어린 시절 외삼촌 박정태의 영향을 받아 추신수도 야구 선수를 목표로 했다. 이에 추신수의 아버지가 추신수의 외삼촌이자 자신의 처남이기도 한 박정태에게 아들이 소질있냐고 묻자 박정태는 소질은 있지만 재능만으로 성공을 장담할 수 없고 매우 힘든 것이 야구 선수라며 추신수의 꿈에 회의적인 반응이었지만 추신수의 의지가 강하자 결국 야구를 가르쳐주면서 야구 선수로서 길을 본격적으로 걷는다.
[image]
부산 수영초등학교에서 이대호[2] ,이승화[3] 와 뛰었고 부산중을 거쳐 부산고에 입학했다. 유명 아마추어 선수들이 으레 그랬던 것처럼 추신수 역시 투수와 타자 두 부문에서 빼어난 실력을 자랑했다.
[image] [image][4]
특히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두각을 내기 시작하여 대통령배에 부산고를 2년 연속 우승으로 이끌었고[5] 조성옥 감독의 지도를 받아 본인도 2년 연속 MVP[6] 를 받으면서 많은 팀에서 주목하기 시작했다. 1학년 시절에는 2년 선배인 우완 백차승이 있었고 2, 3학년 시절에는 우완 김백만[7] , 키스톤콤비 정근우-진병국, 포수 허웅, 외야수 이승엽[8] 과 함께 활약했다.[9] 관련기사
2000년에는 대한민국 U-18 야구 국가대표팀에 뽑혀, 에드먼턴에서 열린 18세 이하 세계 청소년 야구 선수권 대회를 제패했는데 당시 멤버였던 김태균, 이대호, 정근우, 이동현, 이정호와 동기생이다. [10] 이들 '''1982년 개띠 라인'''은 박찬호, 조성민, 임선동, 전병호, 차명주, 박재홍, 송지만, 이영우, 홍원기 등을 배출한 1973년 소띠 동기생(일명 '''황금의 92학번'''[11] )과 더불어 한국야구의 중흥기를 이끈 역대 최강의 기수로 역사에 길이 남게 됐다.[12]
이 당시 부산 연고팀 롯데 자이언츠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부산고 졸업 예정자인 추신수를 2001년 1차 지명 신인으로 뽑기로 했다. 그러나 추신수는 롯데 입단을 거부하고[13] 청소년선수권이 끝난 뒤 시애틀 매리너스와 계약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외숙부 박정태에게 롯데 구단이 하는 행동을 보고 실망해서[14] 그랬다는 설, 당시 추신수의 아버지가 실망했다고 할 만큼 롯데 구단의 계약금 액수가 적었다는 설 등이 있다. 다만 롯데 자이언츠 측이 제시한 전체적인 금액(계약금 4억2000만원) 자체가 부족하진 않았다고 하며 이보다는 시애틀 매리너스 측에서 제시한 계약금이 137만 달러(당시 환율로 16억원)로 롯데가 제시한 금액보다 4배나 많았기 때문에 미국으로 간 것이라는 의견도 일리가 있다. 당시는 박찬호의 활약에 의해 대한민국 유망주들의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아마추어 FA 계약이 활발했던 시기였다. 그리고 추신수는 그 중에서도 군계일학이라 할 정도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도 주목을 받는 탑 클래스 유망주였다.
하지만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았다'라고 추신수의 아버지가 말한 것을 보면[15] 어느 정도 실망은 한 모양. 추신수도 본인의 지명뿐만 아니라 외숙부 박정태에 대한 홀대로 롯데 자이언츠에 실망한 탓에 한동안 롯데제과의 과자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인터뷰에서도 적나라하게 이 감정을 토로하던 때도 있었으나, 박정태가 롯데 자이언츠 2군 감독으로 들어가는 등 롯데와의 관계가 회복되자 추신수도 롯데에 대한 악감정은 풀었다고 인터뷰했다. 추신수는 KBO에서 뛰고 싶다는 생각도 자주 하고 있으나 롯데에서 뛰고 싶고 부산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인터뷰 했다.관련기사[16]
장민석이 술회하길 부산지역에서는 추신수, 이대호, 채태인이 앞서 나갔다고 한다. 고3이던 송승준은 고1이던 추신수에게 홈런을 허용한 적이 있다.
부산고 동기 김백만은 추신수 - 정근우의 경쟁이 팀 내 체력단련 훈련때부터 치열했다고 하며 김백만 본인에게 '저 친구만큼은 꼭 이기고 싶다'는 라이벌 의식을 심어준 친구로 추신수를 뽑았다. 전국대회 본선 진출권이 걸린 부산지역 예선에서 김백만이 대부분 던지고 승리해도 스포트라이트는 추신수에게 많이 돌아갔다.
부산고 감독이었던 조성옥은 추신수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특별대우 없이 오히려 더 강하게 키웠다. 스승의 마음을 제자도 알았는지 재능에 노력을 더해 고교 최고의 선수가 됐다. 그래서 조성옥의 부음 소식을 듣고 추신수가 유독 슬퍼하였다.[17]
2. 프로 경력
2.1. 메이저리그 경력
2.1.1. 시애틀 매리너스
평균 구속은 140km/h 언저리였지만 한국 고교 야구와 좌완 투수들 현실을 감안하면 대단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시애틀에서는 투수보다는 야수로서의 가능성을 더 높게 보았고, '''시애틀 구단측의 권유로 타자로 전향했다.'''[18] #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 계약한 신일고 봉중근과는 정 반대의 케이스로, 봉중근은 사람들이 다들 타자로 계약한 줄 알았는데 투수가 됐다. 봉중근의 경우는 원래 타자로 키울 생각이었으나 타격 연습을 하다가 배트가 부러진 후 투수 쪽 훈련에 합류했는데 좌완에 구속이 92마일이 나오자 구단에서 투수로 전향시켰다.
다만 내부적으로도 투수 코치와 타격 코치가 추신수의 미래에 대해 갑론을박을 했을 정도로 투수로 키워야 한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던 듯 하다. 구속도 나이가 들어서 골격이 잡힌 후에는 좌완으로 95마일이 나왔다고 하니. 물론 178cm밖에 되지 않는 그의 골격과[19] 훗날 토미 존 서저리까지 하게 되는 팔꿈치 상태를 보면 외야수로 전향했던 것은 훌륭한 결정이었다.
2001년부터 시애틀 산하 마이너리그에서 뛰었다[20] . 2005년부터 메이저리그에 콜업되기 시작하여, 2006년 중반부터 메이저리거로 활약하였다.
당시 매리너스는 추신수의 공격력을 살리기 위해 발이 빠른 스즈키 이치로를 중견수로 돌리려고 하였으나 이치로는 이걸 탐탁치 않게 생각했는데, 자기 포지션에서 최고의 활약을 하고 있는 슈퍼스타가 유망주 하나 때문에 포지션을 포기해야 한다는 건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기 때문. 실제로도 중견수 이치로와 우익수 추신수는 호흡이 잘 맞지 않아 부딪힐 뻔한 적도 있다. 이런 이유로 인해 2006년 시즌 도중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벤 브로사드와 맞트레이드되어 이적하게 된다. [21] 그 후 추신수가 인디언스로 트레이드 되고(7.27) 채 한달이 되기전(8.20)에 이치로는 중견수로 포지션을 변경한다.# 이를 보고 이치로에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그러나 사실 이 문제는 매리너스의 팀 사정상 어쩔 수 없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강견이라는 장점이 있다고 해도 추신수가 이치로를 제끼기 힘들다고 생각한 당시 트리플A코치는 그나마 가능성 있는 좌익수 자리를 주기위해서 2006년 한해 좌익수로 기용을 많이 했으나, 매리너스의 좌익수 라울 이바녜즈 역시 팀에서 확고한 주전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즉, 제레미 리드, 애덤 존스, 추신수, 크리스 스넬링을 비롯한 매리너스의 외야수 유망주들은 중견수 자리에서 테스트 받을 수 밖에 없었고, 중견수에 익숙치 못한 추신수는 수비에서도 결정적인 에러를 범함과 동시에 타격에서도 부진했다. 기회를 너무 조금 받았다고 아쉬워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당시 매리너스는 추신수 이외에도 여러 외야 유망주가 있었고 추신수가 그 중 독보적인 1순위도 아니었다. 다음 시즌에 이치로가 중견수로서 풀타임 소화한 것은 결국 모든 외야 유망주들이 중견수에서 망하는 바람에 언론의 폭격과 감독과의 면담 끝에 어쩔 수 없이 이동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추신수가 트레이드되고 한달도 되기전 8.20일부터 이치로는 중견수로 변경한다.#, 그리고 다음시즌은 풀타임으로 한번 더 뛴후 그 다다음 시즌인 08년 6.16일 경기부터 우익수 포지션으로 돌아갔다. 이치로가 추신수에게 포지션을 비켜줄 필요도 없는거지만 평소 선동열보고 "마늘 냄새나서 못 치겠다." "한국오니 마늘 냄새 난다." 했던 발언과 연관지어서 이 부분은 논란이 되고 있다. 아무튼 추신수의 트레이드는 팀의 이해관계상 어쩔 수 없는 것이었고, 결과적으론 추신수의 커리어에 있어 긍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한편 2006 도하 아시안 게임에는 참가하지 못했는데, 이유는 후술하듯이 김재박의 검증드립.자세한 내용은 김재박호/2006년항목참조.
2.1.2.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2.1.2.1. 클리블랜드 초창기 시절
이적 후 첫 경기였던 2006년 7월 27일, 친정 팀 '''시애틀 매리너스'''전에서 홈런을 때려 냈다.(홈 경기였다) 상대는 매리너스 부동의 에이스로 군림하고 있는 '킹' 펠릭스 에르난데스.[22]
그러나 2007년 토미 존 서저리를 받으며 1년을 개점 휴업 상태로 보내게 된다.[23] 무릎팍도사에 나와서 한 이야기로는 당시 대한민국 복귀를 진지하게 고려했다고 하며, 실제로 2007년 4월 2일에 열린 해외파 특별 드래프트에서 SK 와이번스의 지명을 받아 이미 해외진출선수에 대한 대한민국 복귀 2년 유예 규정이 풀려 있었다.
2008년 시즌 초반까지 부상자 명단에 등재되어 있었고, 5월 31일 캔자스시티 로열스와의 원정 경기때 복귀하며 새 시즌을 시작했다. 초반에는 2할 4푼~5푼대의 저조한 타율을 기록하여 부상 후유증을 이겨내지 못했으나 지속적인 출장이 이어지면서 기복이 없는 타격 능력을 보여 주게 되었다. 시즌 중반부터는 타격재능을 폭발하기 시작하여 8월 한 달간 출루율 4할, 장타율 6할로 활약하였다. 9월 12일에는 48타점을 기록하여 최희섭이 가지고 있던 종전 한국인 타자 시즌 타점 기록을 경신했다. 9월 20일에는, 87개째 안타를 쳐내며, 2004년 최희섭이 가지고 있던 한국인 메이저 리거 한시즌 최다 안타 기록 86개를 넘어섰다. 이러한 활약으로 추신수는 샤프에서 시상하는 아메리칸 리그 9월의 선수로 선정되었고 소속 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서 가장 기대받는 선수로 거듭나기 시작한다. 2008년에 94경기에서 타율 .308에 14홈런 66타점 OPS 9할을 찍는 활약을 펼치며 국가대표팀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2.1.2.2. 2009 시즌
2009 시즌에서는 메이저 리그에서 처음으로 풀 타임 출전하고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4번타자 및 주전 우익수로 출장하며 활약하였다. 10월 3일에는 '''아시아 선수 최초로 메이저리그 3할-20홈런-20도루를 달성'''! 또한 20호 홈런도 보스턴 레드삭스의 홈구장 펜웨이 파크의 11m짜리 좌측담장, 그린 몬스터를 '''밀어서''' 넘긴 홈런. 딱 20홈런을 때렸으며 86타점, .300의 타율을 기록했다. 이 해의 추신수는 어느 팀의 주전 외야수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았다. 팀 내 fWAR 1위(5.1), bWAR 1위(5.5)를 기록하였다.[24]
이 해 고교 은사인 조성옥 前 부산고 감독이 간암으로 사망했는데 그 소식을 접한 후 첫 경기인 7월 4일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의 경기에서 '''4안타 2홈런 7타점'''의 맹활약으로 팀의 대승을 이끌었다. 후일담으로 추신수는 이러한 맹활약을 하고도 돌아가신 감독님 생각에 웃을 수 없었고 경기 후 인터뷰도 다 거절했다고 한다.[25]
2.1.2.3. 2010 시즌
#1#2
2009년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약점이라 불려지던 몸쪽 높은 공과 많은 삼진수를 개선하기 위해 그해 부임한 타격코치와 메카니즘 수정을하고 기대에 찬 4월을 시작했지만 그동안 쌓아왔던 매카닉이 바뀔 리 만무할 터..약간의 고전을 하였고, 곧바로 전의 스윙으로 돌아온 뒤 4월 11일부터 15일까지 4경기에서 3홈런 5타점을 기록하는 등 맹타를 휘둘렀다. 4월 18일에는 홈런 1개를 포함하여 총 2안타 5타점을 기록하였다. 4월 24일부터 28일까지는 5경기 연속 2안타 경기를 펼쳤고, 이 기간 동안 3타점도 덤으로 기록하였다.
이후 5월 1일에 펼쳐진 미네소타 트윈스와의 시리즈 2차전 경기에서 3타수 1안타 1타점 2볼넷을 기록하면서 5월을 기분좋게 시작했는데, 4일에 펼쳐진 경기에서는 5타수 2안타 2타점을 기록하였으며 이후 6경기에서도 안타를 기록하면서 7경기 연속 안타 행진을 이어갔다. 다만 14일 경기에서 침묵하면서 연속 출루 행진이 멈추었다.
15일에는 멀티히트를 기록하였으며, 이후 5월 19일 캔자스시티와의 경기에서 2볼넷 2도루, 20일 경기에서는 1안타 2볼넷 1도루를 기록했다.
5월 21일 신시내티 레즈와의 시리즈 1차전 홈경기에서 선발출전하여 4타수 3안타 2홈런 3타점을 기록하면서 다시 타율은 .300으로 복귀하였다. 이틀 뒤 3차전 경기에서는 4타수 3안타(3루타 1) 1볼넷을 기록하면서 해당 3연전 동안 엄청난 타격감을 선보였다. 5월 25일 시카고 화이트삭스와의 시리즈 2차전 홈경기에서 4타수 2안타 1홈런 1타점을 기록하였지만 이후 5월 4경기에서 18타수 1안타를 기록하면서 타율이 급격하게 떨어져 .280이 되었다.
그러던 6월 첫 경기였던 디트로이트 원정에서 솔로홈런과 1볼넷을 기록했다. 시리즈 3차전 경기에서도 멀티히트를 기록하였으며 2타점을 기록하였다. 6월 4일부터 6일까지 화이트삭스와의 경기에서 5안타를 기록하였으며 9일에는 3볼넷을 기록하는 등 13일까지 연속 안타 행진을 이어가면서 5월 말에 비해 좋아진 타격감을 보여주고 있는 중이다.
6월 17일 뉴욕 메츠와의 시리즈 마지막 경기에서 5타수 3안타를 기록하였고, 19일에도 멀티히트를 기록하면서 5경기 연속 안타 행진을 이어가더니 23일에 펼쳐진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시리즈 2차전 원정경기에서 1볼넷을 포함하여 2홈런 4타점을 기록하면서 약 3주만에 홈런포를 가동하였다.
이후 6월 24일부터 6월 26일까지 펼쳐진 3경기에서 침묵했지만 다음날 27일에 펼쳐진 신시내티 레즈와의 시리즈 3차전 원정경기에서 다시 2홈런 4타점을 기록하면서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3일 뒤, 6월 마지막 경기였던 30일 경기에서는 솔로홈런을 포함하여 총 2안타 1볼넷을 기록하면서 6월을 기분좋게 마무리했다.
그런데 7월 2일 오클랜드전에 슬라이딩 캐치를 하다가 손가락 부상을 입었다. 처음 주치의 의견으로는 최악의 상황은 시즌아웃, 최소 5~6주 소견이 나와 절망적이였으나, 수술 후 놀라운 회복력으로 올스타 브레이크 후 7월 23일에 복귀하였다. 복귀 후 인터뷰에서 이렇게 빠른 회복력은 의사생활동안 본적이 없었다는 주치의의 첨언. 7월 26일의 데이터를 봤을 때 복귀 후 4경기에서 타율이 4할이 넘어 살아날 조짐을 보였다. 26일 경기에서 1타점 2루타와 보살 하나를 기록. 이어 복귀 후 맹타로 타율 3할, 출루율 4할, 장타율 5할의 기세를 보였다. 역시 추신수. WAR(Wins Above Replacement Player) 기준으로 볼 때 데뷔 3.5년차의 외야수가 박찬호의 2/3 수준의 성적을 쌓아올렸다. 추신수 12.5, 박찬호 19.2.
8월에는 타율이 .278인 것처럼 무난하게 보냈으며, 8월 5일과 22일에 솔로 홈런포를 각각 1개씩 기록하였다.
2010년은 전년도에 비해서 시즌 내내 투고타저 현상이 현저했던지라 전년도에 준하는 성적만 기록해도 감지덕지였으나 9월 1일과 2일 경기에서 각각 3안타, 2안타 1홈런 5타점을 기록하였고, 타율을 2할 9푼대 언저리를 찍고 있었다. 그리고 9월 17일에 펼쳐진 캔자스시티 로열스와의 원정 경기에서 투런홈런-만루홈런-솔로홈런으로 이어지는 '''한 경기 3홈런'''으로 '''7타점'''을 쓸어담았다. 쓰리런만 쳤으면 사이클링 홈런이었는데, 흠좀무.. 이틀 뒤, 9월 19일 로열스와의 3연전 마지막 경기에서는 2안타를 기록했으며 투런 홈런과 도루를 추가하며 20-20 클럽에 가입. 이는 2년 연속 20-20 달성이며, 아메리칸리그에서는 두번째로, 전체 리그에서는 6번째로 달성한 기록. 18일 경기에서 무관심 도루로 판정 받은 것이 번복되어 2년 연속 기록 달성에 보탬이 되었다[26] .
9월 24일 캔자스시티와의 시리즈 2차전 홈경기에서 3타수 3안타 2타점을 기록하였으며, 다음날 3차전 경기에서는 5타수 4안타 2타점을 기록하였다. 이후 9월 29일 디트로이트와의 더블헤더 1차전 경기에서 4타수 3안타 1홈런 2타점을 기록하였으며, 10월 1일 시카고 화이트삭스와의 경기에서도 4타수 2안타 1홈런 2타점을 기록하면서 타율도 3할에 복귀하고 90타점 고비도 넘기게 되었다.
2010년 최종성적은 550타수 165안타로 '''타율 3할, 출루율 0.401, 장타율 0.485, OPS 0.886, wRC+ 145, 홈런 22개, 도루 22개, 타점 90점 fwar 6.1, bwar 5.9'''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부상이 없었다면 30홈런도 가능하다는 전망이 나왔을만큼 다소 아쉽지만 작년 시즌과 비교했을때 훨씬 발전된 기량을 보여주고 클리블랜드의 넘버 원 플레이어로서 자리매김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삼진수도 전년대비 많이 감소하였다. 그리고 에이전트를 스캇 보라스로 교체했다. 사실상 클리블랜드에는 더 있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와 마찬가지이다. 또한 4할의 출루율은 리그에서도 알렉스 로드리게스나 마크 테셰이라보다도 높은 기록이다! 어시스트 순위 또한 메이저리그 1위를 기록했으니 어째 공수를 혼자서 먹여살리는 느낌이 든다(…).
'''3할-20홈런-20도루를 2년 연속'''으로 한 것은 인디언스 구단 역사상 최초이다. 거기다 2010년 메이저리그가 전년도보다 투고타저현상이 뚜렷한 것을 생각하면 더없이 준수한 기록. 거기에 추신수 본인도 언급하긴 했지만 안습의 클리블랜드 타선을 생각해 보자. 농담이 아니라 테이블세터는 커녕 팀에서 위협적인 타자가 '''추신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연히 투수들의 견제는 추신수를 향해 집중될 수 밖에 없고 이런 견제를 뚫고 투고타저 시즌에 이 성적을 낸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 심지어 클리블랜드 감독마저도 인정했다.[27] 인터뷰 내용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하려 했지만 결국 요지는 '''다른 선수들이 병맛이라 조낸 힘들었을 텐데 잘해줘서 고마워 ㅋ'''
[image]
타율이나 출루율 등의 스탯은 2009년의 복사 수준이었지만 전체적으로 투고타저가 심했던지라 리그 순위는 대부분 올랐다. 부상으로 인하여 줄어들 수 밖에 없었던 안타나 2루타를 제외하면 주요 타격 스탯중에서 순위가 오르지 않은것은 '''하나도 없다'''.
원래 좌완 파이어볼러로 이름을 날린 투수 출신인 만큼 타고난 강견이 장점 수준을 넘어 매우 훌륭한 무기로 작용했다. 보통 외야수들은 어시스트(보살)[28] 를 기록하기가 쉽지 않은데, 추신수는 2010시즌 어시스트 14개로 메이저리그 외야수 중 1위를 기록했다.
한 시즌에 아웃카운트 14개 잡아낸 거니 뭐가 대단하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메이저리그 1위다. 그리고 저런 선수가 외야에 버티고 있다면 상대방 입장에서 희생 플라이에 대한 부담이 커지게 된다. 주자는 가히 미칠 지경. 뛰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게 될 수 밖에 없다. 실제로 시카고 화이트삭스와의 2011시즌 개막전에서 상대팀 3루 주자는 추신수가 플라이를 잡고 송구를 하자 홈으로 쇄도하는 것을 포기했다.
WAR 수치는 수직상승해서 2위인 7.3을 기록. 클리블랜드에서 혼자 야구했다는것을 증명했다. 클리블랜드 팬들은 시즌이 끝나자 '''"OK, 좋았어. 이제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을 응원할 차례다"'''라는 반응.
ESPN의 칼럼니스트 제리 크래스닉이 개인적으로 선정한 '''2010년 MLB 음지에서 빛난 별(Bright spots for bad teams)''' 5위에 추신수가 선정되었다. 선정 기준은 시즌 최악의 부진을 겪고 있는 팀에서 그래도 빛을 발한 선수.[29]
2010년 시즌 클리블랜드 타자 중 타율 3할과 20홈런을 하나라도 기록한 선수가 추신수 외에는 아무도 없다. 게다가 팀 내에서 100안타 이상 기록한 사람 또한 추신수 뿐이라니 이래저래 클리블랜드의 안습한 상황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결국 팀 최초로 20-20을 2년 연속으로 달성한 선수가 되었다. 그래디 사이즈모어만 있었어도.
아래는 추신수와 같은 지구 소속팀의 3번 타자의 스탯 비교.
1. 미네소타 트윈스
3번타자 조 마우어(C)
타율 : 0.327 출루율 : 0.402 장타율 : 0.467 ops : 0.869 홈런 : 9 타점: 75, 도루 : 1
2. 시카고 화이트삭스
3번타자 알렉스 리오스(CF)
타율 : 0.284 출루율 : 0.334 장타율 : 0.457, ops : 0.791 홈런 : 21 타점: 88 도루 : 34
3.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3번타자 매글리오 오도녜즈(RF)
타율 : 0.303 출루율 : 0.378 장타율 : 0.474 ops : 0.852 홈런 : 12 타점 : 59 도루 : 1
4.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3번타자 추신수(RF)'''
타율 : 0.300 출루율 : 0.401 장타율 : 0.484 ops : 0.888 홈런 : 22 타점 : 90 도루 : 22
5. 캔자스시티 로열스
3번타자 빌리 버틀러(1B)
타율 :0.319 출루율 : 0.389, 장타율 0.470 ops : 0.859 홈런 : 15 타점 : 78 도루 : 0
12월엔 미국 온라인매체 '스포츠네트워크'의 판타지게임 전문 에디터 스티브 슈워츠는 '2010의 최고의 선수들(The Best of 2010)'이라는 제목으로 미국 4대 프로스포츠에서 '''올 시즌 단일 경기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친 선수'''들을 선정했는데 추신수가 메이저리그 타격 부문에서 1위로 선정됐다. 물론 9월 17일의 4안타 3홈런 7타점의 그 경기.
2.1.2.4. 2011 시즌
2011년 메이저 등록일수 3년을 채워 연봉조정자격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인디언스는 그런 추신수에게 5년 4500만달러의 장기계약을 제시했지만 추신수 에이전트인 스캇 보라스는 FA를 염두에 두고 장기계약을 거부했다. 결국 397만 5000달러의 1년 계약을 맺게 되었다.
2011년 4월 6일, 개막전에서부터 삼진에 땅볼 등 부진한 모습을 보여 팬들의 간을 떨리게 했다가 보스턴 레드삭스전에서 2점짜리 마수걸이 홈런을 터뜨렸다. 게다가 상대는 보스턴 레드삭스 소속의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최강 에이스인 마쓰자카 다이스케. 추신수의 시원한 홈런 한 방에 팬들은 그제야 숨을 돌리며 한숨을 쉬었다. 마쓰자카는 2ch에서 멍청한 녀석이라며 까이고 또 까였다는 후문이 전해진다.
2011년 4월 26일, 같은 AL 센트럴에서 1위를 다투고 있던 캔자스시티 로열스를 상대로 7회말 교체된 투수의 첫 구에서 시원하게 3점 홈런을 날려 2안타 4타점 1도루를 기록했다. 경기 전 지역 신문에서 부진한 그의 성적이 신경쓰이지 않느냐고 매니 액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감독에게 질문하자 그가 전혀 신경쓰이지 않는다며(물론 올스타 때까지 2할을 찍고 있으면 신경이 쓰이겠지만) 그는 최고의 선수라고 칭찬해 주었는데 제대로 기대에 부응한 셈이다. 또한 그림같은 슬라이딩 캐치로 아웃을 잡아내 경기를 끝내 원정 경기 3연패를 하고 있던 팀의 멋진 승리를 이끌었다.
2.1.2.4.1. 음주운전 적발
하지만 5월 2일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전을 마친 후 자신의 캐딜락 에스컬레이드를 몰고 '''음주운전'''을 하다가 새벽에 경찰에 체포됐다. 어처구니없게도 경찰에게 길을 묻다가 체포됐다. 일단 석방돼서 오클랜드 원정에 선발 출장한다고 했으나 팬들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닐 듯하다. 관련 기사 경찰 조서에 따르면 측정 결과 혈중 알코올 농도가 0.201을 기록했다고 한다.
8월 23일 밤, 셋째 아이의 출산으로 경기를 결장하고 바로 다음 날 오후에 있는 시애틀과의 더블헤더 중 첫번째 경기를 3점포 끝내기 홈런으로 갓 태어난 아이에게 선물했다. 인디언스의 치열한 시즌 중 한 달이라는 긴 시간을 엄지손가락 부상으로 쉬었지만 돌아온 후 아홉 경기에서 타율 0.344, 2홈런이라는 흠좀무한 성적으로 화려하게 재기했다. 그리고 같은날 다음경기 또 솔로 홈런을 쳐냈다.
하지만 8월 27일 왼쪽 옆구리 통증으로 인해 15일 간의 DL에 다시 등재되면서 재활을 시작하였고, 9월 15일 텍사스전에서 복귀했지만 한 타석만에 다시 통증을 느꼈다. 결국 매니 액타 감독은 추신수의 시즌 아웃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면서 2011 시즌은 이것으로 끝. 시즌 중반의 실수 하나가 선수의 시즌을 완전히 꼬아 버린 안 좋은 케이스가 되어버렸다. 2011 시즌 시작 전 구단에게서 제안받았던 5년간 5천만 달러의 제안을 다시 받을 수 있을지도 미지수가 되었다. 그 시점까지만 해도 트레이드든 FA든 당연히 그 이상의 제안을 받을 만한 포텐셜을 가졌지만.
2011년 11월 21일에는 고국으로 돌아와 4주 기초 군사 훈련을 받기 전에 SBS 힐링 캠프에 출연했다. 부산 제53보병사단에 입소하여 군사 훈련을 마쳤다.
2.1.2.5. 2012 시즌
2011 시즌 사구로 인한 부상으로 좌투수에 대한 약점이 생겼는데 4월 24일에 같은 부위에 또 사구를 맞아서 손가락에 금이 간상태로 시즌을 치르게 된다. 이때부터 지긋지긋한 좌투수에 대한 공포가 시작된다. 시즌초에 팀과 본인 모두 슬럼프를 겪으며 안좋게 시작했다.
5월 4일이 되어서야 시즌 첫 홈런포를 터뜨렸을 정도로 4월에 부진을 면치 못했다. 이후 5월 15일 미네소타 트윈스전에서 솔로홈런을 기록하면서 시즌 두 번째 홈런을 기록하였다. 5월에는 4월보다는 폼이 올라왔지만 아직 지난 09, 10시즌에 비해서는 부족한 편이다.
이후 5월 24일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와의 원정 경기에 팀의 우익수 겸 1번타자로 출전한 추신수는 빅리그 통산 첫 선두타자 홈런을 날리는 등 3타수 1안타 1볼넷으로 활약했다. 전날 무안타 부진을 만회하였고, 시즌 타율은 .266에서 .268(142타수 38안타)로 상승했다. 저스틴 벌랜더를 맞아 1회말 첫 타석에서 한가운데 체인지업을 받아쳐 비거리 454피트(약 138m)에 달하는 장쾌한 우월 홈런을 터뜨렸다. 시즌 3호째이자 개인 첫 선두타자 홈런이었다.
이후 6월 14일에는 멀티홈런을 기록하면서 시즌 5호 홈런을 기록하였고, 16일에는 시즌 9호 도루를 성공시켰으며, 이틀 뒤 18일에 펼쳐진 신시내티 레즈와의 홈경기에서 1번타자 겸 우익수로 선발출전하여 3회말에 두번째 타석에 들어서서 본인의 (시즌 6호) 솔로홈런을 기록하였다. 이후 19일부터 22일까지 네 경기 동안 7안타를 기록하면서 좋은 타격감을 이어갔다.
이후 6월 28일 볼티모어 오리올스와의 원정경기에서 선발출전하여 3타수 1안타 1홈런 1타점 1볼넷을 기록하였으며, 29일 2차전 경기에서는 총 2안타 2타점을 기록하였고, 30일에 펼쳐진 3차전 경기에서는 5타수 4안타 1홈런 3타점을 기록하면서 본인의 물오른 타격감의 정점을 찍었다. 6월 한 달 동안 .333 .382 .579 5홈런 13타점의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다만 볼삼비가 8/31로 다소 아쉬웠다.
이후에도 계속해서 페이스를 끌어올리면서 7월 2일부터 6일까지 5경기에서 4차례나 멀티히트를 기록한 데 이어 홈런포도 가동하면서 09,10시즌에 맞먹는 기록을 보여주고 있다. 7월 8일 경기에서는 5타수 2안타 1홈런 2타점을 기록하면서 전반기를 마무리하였다. 추신수는 2012년 전반기 동안 79경기 출전 311타수 93안타 10홈런 34타점 57득점 9도루(1실패) 36볼넷 타율 0.299 출루율 0.384의 준수한 타격 성적을 기록하며 팀에서 자체적으로 선정한 전반기 팀내 MVP에 선정되었다..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에도 나쁘지 않은 타격감을 보여주고 있으며 7월 21일과 23일 경기에서는 각각 4타수 1안타 1홈런 1타점, 4타수 2안타 1홈런 2타점을 기록하였다. 이는 추신수의 2012년 후반기 1, 2호 홈런이었다. 리드오프로 나와서 준수한 출루율을 기록했으며 타격 페이스도 안정적이니 3할 타율에 20홈런은 충분히 가능할 것처럼 보였으나...
8월 달 들어서 타율이 많이 떨어지는 등 페이스가 떨어지고 있다. 8월에 3홈런 13타점을 기록했지만 비율스탯이 .243 .331 .364일 정도로 4월에 이어서 매우 부진한 한 달을 보내었다. 그러다보니 엠팍에서 한 추까가 홈런친 것을 보고 실투라 별 의미가 없다면서 까고 미친듯이 다굴을 맞았는데 이게 히트를 쳐서 얍신수란 별명이 붙게 된다. 그후로부터 추신수가 안타를 치면 투수가 몸이 덜 풀린 경기 시작쯤에 스탯 관리용으로 안타 하나치고 경기 끝날 때쯤 힘 좀 있으면 불펜들 털어서 안타 하나 친다고 까기 시작하며 엠팍 한정 별명이 얍삽한 추신수, 즉 얍신수.(…)[30]
2012년 멜키 카브레라의 약물복용으로 인한 50경기 출장정지로 인해, 카브레라의 소속팀인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가 추신수의 영입을 원하고 있다는 기사가 떴다. 기사 하지만 같은 포지션인 헌터 펜스가 자이언츠로 간 뒤에 터진 뉴스였기 때문에 당연히 트레이드는 무산.
이후 9월 8일 미네소타 트윈스와의 원정경기에 1번 타자 겸 우익수로 선발 출장해 4타수 2안타를 기록하며 시즌 타율도 0.282에서 0.283으로 끌어올렸다. 전날에도 5타수 3안타 1타점의 맹활약을 펼친 추신수는 시즌 42번째 멀티히트를 기록했다. 추신수는 1번 타자로 다시 복귀한 이후 7경기를 치르는 동안, 4번의 멀티 히트를 포함해 타율 0.407로 빼어난 타격감을 뽐내고 있다.
폭락하는 팀의 성적과 함께 추신수의 성적도 후반기에 하락세를 보였지만 9월에 홈런포를 1개도 기록하지 못했지만 그 외에는 준수한 타격 성적을 거두었고, 특히 시즌 막판 13경기 연속안타[31] 를 기록하면서 12시즌 최종 성적은 155경기 타율 0.283 출루율 0.373 장타율 0.441 OPS 0.815 16홈런 21도루(7실패) 67타점 88득점에 2루타 43개를 때려냈다.
전반기 3번타자로 부진할때 클리블랜드 분석 직원 발상(출루율이 높은점)으로 추신수는 리드오프로 변신하게 된다. 액타 감독의 결단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직원이 의견을 냈고 단장이 지시한것.. 이는 fa직전해에 신의 한수로 작용되고, 리드오프로 좋은 성적을 기록한것을 눈여겨본 신시네티 레즈로의 트레이드 발판이 된다.
2.1.2.6. 트레이드
2012시즌 종료 후부터 트레이드에 대한 이야기는 나왔다. FA가 1년 남은 상황에서 에이전트가 모든 구단의 적인 그 분인 상황이고, 재계약 협상도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러 트레이드 루머가 나온 상황이었지만 단장 미팅까지는 트레이드가 제대로 진척되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 현지시간으로 11일에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신시내티 레즈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3각 트레이드로 신시내티 레즈로 이적했다. 애리조나가 자신들의 최고의 유망주인 트레버 바우어를 클리블랜드로 보내는 등, 클리블랜드가 유망주를 데리고 가는 대신에 신시내티로 추신수가 갔다. 트레이드가 막 이뤄진 상황에서의 평가는 고작 디디 그레고리우스, 토니 십, 라스 앤더슨 얻자고 최고의 투수 유망주인 바우어를 내줬다는 점에서 애리조나가 손해라는 반응. 때문에 케빈 타워스는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반대로 클리블랜드는 유망주를 얻어서 리빌딩의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다만 신시내티의 프랜차이즈 선수인 '''제이 브루스'''가 버티고 있는 우익수 포지션과 좌익수 라이언 루드윅의 존재와 맞물려 포지션 문제가 골치를 썩일 것으로 전망되었다. 일단 레즈의 단장인 월트 자케티는 추신수에게 리드오프 중견수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여담으로 추신수는 2012시즌까지 레즈를 상대로 '''타/출/장 .351 .426.713 OPS 1.139'''이라는 무시무시한 스탯을 기록하고 있었다.
트레이드 이후 2013 제3회 월드베이스볼 클래식 국가대표에 선발되었으나 불참하였다. FA를 앞둔 데다가 새 팀에서의 적응, 수비하기 더 어려운 포지션으로 전환으로 이해할 만하다는 의견도 있지만 국내리그 선수들과의 형평성과 병역특례를 받고나서 첫 대회인데 방송에서의 발언도 지키지 않는 태도에 대한 비판도 있다. 이 논란에 대해 추신수 선수를 변호한다면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은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과 달리 클리블랜드 구단측이 흔쾌히 승낙했다는 점이다. 추신수가 참가를 요청했던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과는 다르고 또 그때는 클리블랜드측에서 팀 트레이너까지 동행시켜서 경기출전여부등을 간섭해야해서 대표팀측도 크게 언짢아했던일이다. 물론 '병역특례'라는 조건이 있어 출전을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허락했던 2009년도와는 전혀 다르다. 또, "병역특례를 받고나니 국가대표로서의 의무를 저버린다는 것임?"이라고 묻는다면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언급할 수 있겠다. 설사 추신수가 먼저 이번 대회도 출전하겠다 했어도 구단이나 특히 에이전트인 스캇 보라스가 만류할 가능성이 있었다. 신시내티로 트레이드 된 현 시점에서도 본문에 나와있는 이유(새 팀과 새로운 수비 포지션 적응)로 비시즌에 국제대회에 나오는 것은 본인에게도 어려운 일일 것이며, 팀에서도 높은 연봉(737만 5천 달러, 약 80억원)을 투자한 만큼 쉽사리 보내려 하지 않을 것이다.
2.1.3. 신시내티 레즈
2.1.3.1. 2013 시즌
2.1.4. FA
2.1.5. 텍사스 레인저스
2.1.6. 2번째 FA
2.2. KBO 경력
2.2.1. SK 와이번스
2021년 2월 23일, 단독 기사로 추신수가 이마트 구단에서 뛴다는 기사가 나왔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구단측의 공식 발표로 추신수의 KBO행이 확정되었다. 연봉은 27억원[32] 으로 '''한국프로야구 역대 연봉 1위'''[33] 자리에 올라서게 되었다. 스포츠경향의 이용균 기자에 따르면 마지막까지 아메리칸리그 2팀의 오퍼와 신세계行을 놓고 고민했다고 한다. 한 팀이 포스트시즌 진출 확률 80%, 다른 한 팀은 99%였다는 에이전시의 말을 따라 추측해보면, 뉴욕 양키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2팀으로 추측이 가능하다.#
계약 직후 올라온 이영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는 신세계그룹이 SK 와이번스를 인수하면서 적극적인 구애를 했다고 한다. 메이저리그에서도 여러 팀의 컨택이 있었지만 고민 끝에 한국행을 결심했다고.
신세계의 인수 후 첫 대형 영입으로 마케팅 차원에서 대박을 터뜨렸다. 과거 2007년 부상을 입었을 당시에도 해외파 특별 드래프트로 지명권을 보유하게 된 SK가 계약을 제안했지만 메이저리그 도전을 위해 거절했고 14년 만에 한국행을 택하게 되었다. 부산광역시 출신인데다가 고향팀이자 외삼촌이 뛰었던 롯데 자이언츠에서 뛰고 싶다고 인터뷰를 했던터라[34] 1년 뒤에 롯데로 이적시켜주는 조건으로 영입한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돌았는데[35] 류선규 단장이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롯데로의 트레이드는 없을 것"'''이라고 못박으며 따라 신세계에서 은퇴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사실 롯데 입장에서는 추신수를 영입할 권한도 명분이 없다. 해외파 특별 지명으로 SK가 추신수를 가져갔기 때문에 그나마 가장 가능성 있는 방법은 1년 후 트레이드로 데려오는 방법이 있지만 성민규 단장이 젊은 팀으로의 리빌딩을 이어가고 나이 많은 선수들은 죄다 솎아냈고[36] 추신수의 초등학교 동기 이대호마저 사실상 2022년 예고 은퇴를 선언한 상황에서 은퇴 직전의 선수를 신규 영입하기엔 명분이 서지 않는다. 물론 메이저리그에서 탈아시아급 외야수로 명성을 높였던 추신수라면 예외가 될수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추신수를 데려오기에는 유망주 유출에 대한 롯데의 부담이 매우 크다. 설령 신세계 측이 추신수를 내놓는다고 해도 그에 대한 대가가 변변치 않다면[37] 신세계가 이적에 쉽게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추신수의 한국행에 대해 당연히 현장은 긍정적인 분위기. 김원형 감독도 좋은 소식이라며 환영했다. 특히나 야구 능력 뿐만 아니라 경험도 많고 메이저리그에서도 클럽하우스 리더 역을 훌륭히 소화한 선수이기에 더욱더 기대하는 모양. 나이가 먹긴 했으나 회춘한 성적을 보여주고 있는 김강민과 동기, 동갑인 것을 감안하면 충분히 활약을 기대해볼만 하다. 설령 에이징 커브 등으로 성적이 안 좋더라도 신세계 입장에서는 충분히 이득을 보게 되는데, 추신수라는 거물을 영입함으로서 팀과 그룹에 대한 홍보 효과가 실로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추신수 계약 소식이 뜨자마자 문학야구장에 광고를 하겠다는 광고주들의 연락이 줄을 잇기 시작했고 평소 야구에 관심없던 사람들이 신세계 팀에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쏟아지고 있다. 괜히 KBO 관계자들이 소속팀에 관계없이 환영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포지션은 코너 외야수 또는 지명타자가 유력하다. 메이저리그에서는 영 좋지 않은 수비력의 추신수였만 KBO 기준으로는 평타 이상의 수비력을 유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외야수 기용 가능성이 높다. 김원형 감독도 추신수를 지명타자보다는 좌익수로 기용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본래 주전 외야수는 오태곤이 유력했는데 내야와 외야 유틸리티 요원인 오태곤은 다른 포지션의 백업 역할도 해줘야 한다는 점 때문에 우려가 많았다. 그러나 추신수가 오면서 오태곤은 다행히 한숨 돌리게 되었다.[38] 팀 적응 문제는 82년생 동기생인 김강민과 신재웅이 있어서 그다지 어렵지는 않을 듯.
어쨌든 추신수는 미국에서 이룬 20년의 생활을 잠시 접어두고 2월 25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해 한국프로야구 선수로서의 생활을 시작한다. 추신수는 20년 전 홀로 미국에 떠났던 것처럼 이번에도 홀로 한국으로 오게 되는데 아내 하원미 씨와 세 자녀는 미국에 남기로 했다고 한다. 자녀 교육 문제[39] 때문인 듯하다. 대신 부산광역시에 거주하던 추신수의 부모가 인천광역시로 올라와서 함께 거주하며 추신수의 건강 관리에 신경을 써줄 예정이라고 한다.
2.2.1.1. 2021 시즌
타선은 최정, 로맥, 한유섬, 최주환과 함께 중심 타선을 맡게 될 가능성이 크다. 한국나이로 이제 40세지만 근 몇년간 메이저리그에서 타격으로는 경쟁력을 보여준 만큼 좋은 활약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많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주력도 예전 같지 않고 부상 염려도 있기 때문에 한국야구에서는 비교적 적극적인 허슬 플레이를 요구하는 상위 타선에 둘 가능성은 낮아보였으나, 과거 트레이 힐만 감독 시절 한유섬이 2번을 쳤던 것처럼 김원형 감독이 강한 2번타자 전략을 사용할 것이라 밝혀 2번에 추신수가 기용될 확률이 높아졌다.
등번호는 17번으로, 구단에서 이미 17번을 달고있던 이태양에게 정중하게 양보를 부탁하려 했으나 이태양 본인이 추신수의 영입이 결정난 순간 선배에게 양보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3. 국가대표 경력
3.1. 2009 WBC
[image]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외야수로서 출전하였다. 자신의 커리어 첫 A대표팀 출전이다. 지난 2006 WBC때 박찬호, 서재응, 김병현, 최희섭, 봉중근, 구대성 등 직전시즌까지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한 선수가 다수 포함됐었다. 하지만 이번 대회는 추신수가 유일한 메이저리거로 엔트리에 올랐다.
세간의 예상대로 대회 내내 팀의 주전 우익수 겸 중심타자로 출전했다. 하지만 대회기간 내내 제 컨디션을 회복하지 못하며 1할대 타율을 전전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4강 베네수엘라 전에서 승부에 쐐기를 박는 쓰리런포를 터뜨린 데 이어, 결승 일본 전에서는 5회말에 이와쿠마 히사시를 상대로 동점 솔로 홈런을 터뜨리며 2경기 연속 홈런포를 가동하는 등 메이저리거의 위용을 확인시켰다.
그렇게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은 결승전에서 일본과 연장 승부까지 갔으나, 아쉽게도 5:3으로 패배하면서 준우승에 머물렀다. 하지만 이 대회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준우승 기록은 현재까지 대표팀이 치른 총 4번의 WBC에서 최고 성적으로 남아있다.
3.2.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image][40]
자신의 병역 문제가 걸려 있던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었다.[41] 추신수-이용규-김현수의 기존 국가대표 외야진에 더해 그 해 커리어 하이를 기록한 김강민과 여차하면 외야 백업으로 들어갈수 있는 조동찬[42] 까지, 역대 국가대표 라인업 중에서 가장 외야 자원이 빵빵했던 때라고 평가받는다. 그래서 김잉여를 대신해 김현수가 1루수를 맡기도 했다.
첫 경기인 대만전에서는 3번 타자로 출전했다. 추신수 본인은 경기 전까지 별로 감이 안 좋다는 소감을 밝혔지만, 막상 경기에 출장하자 1회와 3회에 연타석 2점 홈런을 날렸다. 메이저리그+면제로이드의 위엄. 특히 첫 번째 홈런은 스윙 자체는 가볍게 툭 가져다 댄 느낌이었는데 맞은 공은 담장을 훌쩍 넘어가 버렸다.
그 와중에 클리블랜드 현지 팬들은 '''미국 동부 시각 기준으로 새벽 5시에 일어나 아시안 게임 대만전 라이브 방송을 인터넷으로 지켜봤다.''' 추신수가 2연타석 홈런을 날리자 '''추-!'''를 외쳐대며 광분. 마침내 대한민국이 이기자 병역 특례에 한 발짝 다가섰다며 기쁨을 표출했다.
[image]
중국과의 준결승전 3회말 2아웃 상태에서 몸쪽 깊숙한 코스로 떨어지는 -커브볼을 걷어올려 솔로 홈런을 치면서 또 다시 그 존재감을 과시했다.# 결승전인 대만전에서도 나쁘지 않은 타격과 선구안을 선보였고 강게이의 원맨쇼로 팀은 무난하게 우승하여 금메달을 획득해 오랜 숙원이던 '''병역 문제를 해결했다.'''[43]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서 기록한 최종 성적은 14타수 8안타 3홈런 11타점 8득점 3도루 10사사구 타율 .571 출루율 .750의 대활약.
[image]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서 야구 금메달을 받고 나서.
마침 오프 시즌이라 별 뉴스거리가 없던 MLB.COM의 메인 페이지를 장식했다. 그와 동시에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구단 측에서는 엄청나게 좋아라 해서 홈페이지에 '''병역특례 ㅊㅋ'''라고 올리기도 했다.
반면 해외파 특별 드래프트를 통해 추신수에 대한 권리를 획득했던 SK 와이번스로서는 아쉬울 따름.[44] 만에 하나 추신수가 병역을 치러야 할 경우 귀국하여 SK에 입단할 확률이 다소 있었을 텐데, 이제는 나이가 30대 후반이 되기 전까지는 가능성이 0에 수렴할 듯. 공익 복무를 마친 류제국도 LG와 계약하여 이제는 SK만 남았다. 그렇게 SK-신세계는 무려 14년을 존버하다 2021년에 신세계와 계약하며 마무리되었다.
아시안 게임을 마치고 귀국한 후, 2009년에 타계한 부산고 시절의 은사 조성옥 감독의 장지인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상삼리 소재의 천주교 공원묘지를 찾아 오열하는 모습이 보였다.
[1] 추신수의 어머니는 박정태의 누나인 박유정 씨다. 훗날 추신수의 권유로 야구에 입문한 이대호는 "신수는 슈퍼스타 외삼촌을 뒀는데 그것이 매우 부러웠다"고 언급했다. 그럭저럭 살만했던 추신수의 가정 환경과 달리 이대호는 할머니 슬하에서 어렵게 자랐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2] 참고로 이 시절에 이대호를 야구의 길로 안내해준 사람도 추신수다. 3학년 때 야구부가 있는 수영초로 전학을 왔는데, 맨 뒷 자리에 웬 고등학생이 앉아 있어서(...) 깜짝 놀란 것을 감독한테 말하고, 얼른 데려와 보라는 감독 지시에 이대호를 야구부로 데리고 왔다. 추신수 본인 말에 따르면 이때 생명의 위험을 느끼며 목숨 걸고 권유했다고 한다. 대동중학교로 진학해서 장기영, 채태인과 같이 뛰었고, 장기영과 같이 경남고 유니폼을 입었다. 채태인은 그의 아버지가 부산상고 동문이라서 부산상고로 진학했다.[3] 훗날 이우민으로 개명. 추신수와 부산중학교로 같이 진학했고 고등학교는 부산상고를 택했다.[4] 1999년 대통령배 결승전 당시[5] 2학년 때인 제33회(1999년) 대회는 배명고를 6-3, 3학년 때인 제34회(2000년) 대회는 경기고를 10-3으로 결승전에서 꺾었다. 2학년 때 결승전에서 만났던 투수가 심수창이었고 3학년 때 결승전에서 만났던 투수는 이동현과 오승환이 있었다.[6] 제33회(1999년) - 제34회(2000년) 대회 모두 최우수선수상과 우수투수상을 수상했으며 대통령배 사상 최초다.[7] 2001년 한화 이글스의 2차 1순위 지명을 받고 계약금 2억 원에 입단했으나, 별 활약을 보여 주지 못하고 2009년에 방출당해 은퇴했다. 은퇴 후 부산고 투수코치로 활동했고 부산정보고 감독으로 옮겼다.[8] 국민타자 이승엽과 동명이인이며, 부산고-중앙대에서 활동했다. 걸출한 타격실력을 보유했으나 프로에서는 빛을 발하진 못했다.[9] 고교 시절 혹사를 당하지 않았다고 이전 버전에 서술됐으나, 혹사를 피해갈 수 없었다. 제34회 대회에서 추신수, 이동현 모두 진통제를 맞고 결승전에서 던졌다.[10] 당시 부산지역에는 훗날 KBO에서 활약할 1982년생 동기생들이 많았다. 부산고의 추신수, 정근우, 김백만, 경남고의 이대호와 장기영, 경남상고의 김경언, 송산, 백승룡, 김덕윤, 부산상고의 채태인, 차정민, 이승화, 부산공고의 이명우 등.[11] 학번은 대학생에게 쓰는 말이지만 야구 팬들은 편의상 고졸 입단 선수들도 XX학번으로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에는 염종석, 박종호 등도 포함된다.(정민철은 1972년생으로 유급 경력이 있어서 적용하기가 애매하다.)[12] 그러나 1982년생 중심의 라인업은 성인무대에서 가동된 적이 2009년 WBC와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뿐이다. 그나마도 두 대회 모두 1982년생 전원이 다 잘한 적은 없다. 한두명씩 꼭 부진했다. 2009년 WBC 때는 김태균이 날아다니는 동안 추신수는 본선 1·2라운드를 말아먹었지만 준결승, 결승에서 맹활약했고 이대호는 중간에 살짝 해맸다. 2010년 광저우 AG 때는 면제로이드를 한사발 들이킨 추신수가 대회를 뒤집어 엎는 와중에 김태균은 타율 0.091 충공깽급 성적을 냈고 그해 타격 7관왕을 석권한 이대호는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홈런 1개와 3할의 타율을 기록하는데 그쳤다. 2009년 WBC와 2010년 아시안게임 모두 꾸준히 잘했던 1982년생 선수는 정근우 1명 뿐이었다.[13] 1차 지명권은 한 번 사용하면 이를 취소하거나 바꿀 수 없기에 추신수의 입단 거부로 롯데는 1차 지명권을 그대로 허공에 날리게 됐다. 이후 2차 1라운드로 이대호를 뽑았는데 사실상 그 해 1차 지명자나 다름이 없었다고 보면 된다. 이것도 바로 앞 순위 지명권, 그것도 신생팀 지원 차원에서 3장을 행사할 수 있었던 SK가 이대호를 지나친 덕을 어느 정도 본 것이다.[14] 이 당시 롯데 자이언츠는 프랜차이즈 스타에 대한 대우가 유난히 나빴던 구단이었다. 부산야구 역사상 최고의 스타였던 최동원을 매몰차게 내쳤고 롯데 특유의 짠돌이 경영 방식을 수많은 프랜차이즈 스타들에게 들이밀며 홀대했다. 이는 1990년대 중후반 롯데의 최고 스타였던 박정태도 피하지 못했다. 추신수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던 2000년 초부터 롯데 구단은 박정태를 홀대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당시 박정태가 선수협의회 창설 핵심 멤버로서 활약한 것을 구단 고위층이 곱게 보지 않았던 것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이미 알려져 있다시피 롯데 구단은 최동원 시절부터 선수협 활동을 죄악시하던 구단이었다.[15] 당시 추신수의 동기생 중에는 추신수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고 프로에 입단한 이들이 있었다. 대구상고 출신 투수 이정호는 5억3000만원이라는 거액의 계약금과 삼성자동차의 중형 세단 SM5를 삼성 라이온즈로부터 받았고 신생팀 SK 와이번스 역시 인천 동산고 출신 포수 정상호에게 4억5000만원의 계약금을 쥐어줬다. 추신수의 아버지 입장에서는 2년 연속으로 고교야구 MVP를 석권할 정도로 전국을 평정한 아들이 다른 지역 유망주보다 못한 대우를 받았다는 사실에 화가 났을 만하다.[16] 다만 이 발언은 지명권을 지닌 SK를 무시하는 듯한 오해를 살 수도 있는 것이었다. 뭐 SK 팬들이야 추신수가 SK에 올 가능성은 사실상 없으니 별 신경 안쓰고 있지만... 근데 2021년 2월 23일 SK로 입단했다.[17] 김백만은 조성옥 감독보다는 이상번 부산고 투수코치(조성옥 감독 사후 동의대 감독 승계)의 도움을 더 많이 받았다고 술회했다.[18] 사실상 시애틀 매리너스 구단측이 추신수가 선수로서 성공하는데 매우 고마운 일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시애틀의 권유가 없었다면 추신수는 계속 투수를 했을 것이다.[19] 메이저리그 선발투수 평균 신장은 191cm다. 당연하지만 키가 작을수록 릴리스 포인트가 낮아짐으로 타자에 비해 보는 단점이 훨신 크다 [20] 그의 고생담을 보면 알겠지만 이때 받던 돈은 한화로 매달 140만원 정도였다. 지금이랑 비교하면 그야말로 대박.[21]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오히려 추신수에게는 은혜나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시애틀에 있어봤자 이치로 때문에 자리가 없으니 다른 팀에 가서 자리를 잡는 것이 나았으니까.[22] 이 날 경기에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가 1:0으로 이겼는데, 그 1점이 추신수의 솔로홈런으로 결승타.[23] 이 당시 추신수는 마이너리그에 옵션된 신분이었기 때문에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부상자명단에 오르지 못하여 서비스 타임이 계산되지 못했다. 그 결과 FA와 연봉조정이 한 해씩 늦어지게 되었다.[24] 2위는 4.3의 클리프 리[25] 이 이야기는 2009년 11월 13일 방영된 'MBC 스페셜 - 추신수, 마침내 메이저리그를 치다'에서 확인할 수 있다.[26] 당시 도루 상황이 견제가 전혀 없었다고는 해도 고작 2점차였기 때문에 도루로 인정한다고 한다.[27] 2010시즌 최종전에서 매니 액타 감독은 추신수를 경기에 내보내지 않았다. 팀 내 최고타자의 기록을 지켜주기 위한 예우라고 한다.[28] 주자를 아웃시키는 데에 도움을 주는 행위. 타구를 잡아 송구를 하는 행위가 주가 된다. 타구를 잡아 2루나 1루로 허구헌날 송구하는 유격수는 수도 없이 기록한다.[29] 1위는 사이영을 받았지만 13승 12패를 한 선수이고 2위는 호아킴 소리아, 3위는 훌륭한 공산주의식 이름을 갖고 있는 레즈가 어울리는 선수, 4위는 제레미 거스리.[30] 그런데 엠팍에서 타격 스타일을 분석한 글에 따르면 진짜 얍신수라고 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상대의 실투'만 기다려서 치다보니 삼진이 좀 많아도 3할을 치는 것. 물론 얍삽하다는 것은 웃자고 하는 소리고 그만큼 선구안이 좋고 투수와의 지능 싸움에서 지지않는 좋은 선수라는 이야기다. 3할타자의 세가지 유형, 추신수는 유니크한 3할타자[31] 종전 개인 최다 연속안타 기록인 11경기를 경신.[32] 이중 10억은 사회공헌에 활용됨.[33] 이전 KBO 역대 연봉 1위는 이대호의 25억 (17~20년). 이대호는 2021년 FA 계약을 새로 맺으면서 8억으로 쪼그라들었고, 2위였던 양현종(23억)은 미국 진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추신수가 2021 시즌은 물론 역대 연봉 1위 자리를 확정지었다. 다만 계약금 포함 4년 150억의 계약을 한 이대호가 37.5억으로 한국프로야구상 가장 높은 단일 계약의 연평균 가치(AAV, Average Annual Value)를 기록하고 있다.[34] "롯데가 아니면 의미가 없다" 라고 인터뷰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한데, 기왕이면 롯데가 좋다는 수준의 이야기였지 의미가 없다는 것은 과장된 것이라고 한다.[35] 해외파 특별 드래프트 규정상 최초 지명된 팀에서는 무조건 1년 이상 뛰어야 한다.[36] 프랜차이즈 스타급인 로컬 보이 신본기까지 트레이드 카드로 사용할 정도로 롯데의 리빌딩 기조는 확실하다.[37] 신세계 팬들은 "추신수를 롯데에 내준다면 다음 해 신인 1라운드 지명권이나 특급 유망주를 데려와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38] 반면 발등에 불이 떨어진 쪽은 다른 좌익수 경쟁자인 고종욱과 정의윤처럼 수비력이 떨어져 지명타자로 많이 출전했던 외야수들. 고종욱은 좌타 외야수라는 점이, 정의윤은 장타형 외야수라는 점이 추신수와 겹치게 되면서 경쟁에 비상이 걸리게 되었다.[39] 알려진 것처럼 추신수의 세 자녀는 한국인 부모의 핏줄만 받아서 태어났을 뿐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사실상의 한국계 미국인으로 볼 수 있다. 오랫동안 미국에서 누린 생활 환경과 한국의 생활 환경은 판이하게 차이가 난다. 더구나 한국에서 나고 자란 추신수 부부와 달리 자녀들은 한국에서 오랫동안 지낸 적이 아예 없기에 자녀들 입장에서는 한국 생활이 오히려 더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40] 참고로 파.괘.한.다의 패러디다. 뭐든지가 아니라 모든지인것도 원본을 그대로 따라했기 때문. 추가로 덧붙이면 예술체육요원은 면제가 아니다.[41] 조범현 감독도 아예 '''추신수를 선발한다'''고 예고했다.[42] 실제로 아시안 게임 직전인 2008년과 2009년 포수를 제외한 전 포지션에 출전했었다.[43] 여담으로 추신수는 군 문제 때문에 고민 중에 있었는데, 백차승처럼 영주권 취득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 적이 있다고 했다. (다만 박주영은 올림픽 메달로 결론적으로 병역을 해결했다.) 물론 금메달을 따면서 군 문제가 깔끔하게 해결되면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44] 일단 트레이드가 금지된다. 특별지명 때 지명을 받은 팀에 입단하여 의무적으로 1년 간 뛰어야 한다는 조항이 있기 때문이다. 김병현은 이 기간이 지나고 나서 트레이드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