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A 타이거즈/이모저모

 


1. 선수 육성 체계
2. 라이벌 팀
2.2. 영호남 라이벌, 롯데 자이언츠 (가칭: - 시리즈)
2.3. 인기 구단 라이벌, LG 트윈스
2.4. 그 외
3. 신인왕 잔혹사
4. 군기 및 징계
5. 선수들의 충성심
6. 노란 응원막대
7. 잠수함 투수 전성시대
9. 기타


1. 선수 육성 체계


'''일단은''' KIA 타이거즈는 2010년부터 8개 구단 최초로 3군 체제를 시작한 팀이다. 하지만 창설 초기에는 '''무늬만 3군'''이라는 성격이 매우 강했다. 일단 2군 시설부터가 낙후되어 있던 상황이니 막 생긴 3군 시스템의 모습은 말할 필요도 없다. 2012년 말에 완공된 함평 육성전용구장이 완공되기 전까지 함평 전남야구장#을 임대하여 2군 구장으로 사용하였던 KIA 타이거즈 2군은 그야말로 '''헬'''이었으며 전용구장이 완공된 이후에도 함평군의 훈련시설이 아직 완공 전이라 육성체계가 완성되지 못한 탓에 2012년까지는 '''잔류군 및 재활군'''의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선동열 감독 체제 이후로 신인 드래프트를 통해 신인들을 많이 뽑고 신고선수들도 많이 영입하여 3군 체계를 강화시켜 선수들에게 많은 기회를 부여하면서 경쟁을 통해 훌륭한 팜 시스템을 구축하여 제 2의 이준호나, 넥센의 서건창 등을 발굴하고자 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2012년 시즌 후반기에 고양 원더스 소속의 외야수 강하승을 신고선수로 영입한 것[1]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2군 총괄코치가 3군까지 전체적으로 선수단을 관리하는 체계이다.
또한, KIA는 코칭스태프 체계에서 2군 감독이 따로 없고 1군 감독이 2군, 3군까지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체계를 따른다. 대신 2군 총괄코치라는 일종의 수석코치 및 감독대행을 두어 관리하는 체계. 그만큼 1군 감독이 2군과 3군까지 세밀히 점검을 하면서 모든 선수단의 운영을 관리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더욱이 선동열 감독 체제가 들어서면서 선수 육성에 대한 의미를 더욱 강조하면서 경쟁 시스템 구축이 가속화 될 전망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함평에 좋은 시설이 들어서고 무한 경쟁체제가 확립되어 좋은 시너지 효과가 일어나야지만, 그리고 선동열 감독 이후의 코칭스탭진이 2군 및 3군 육성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야만 가능한 일이다. 2012년 시즌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던 선 감독이었지만, 그의 부임 이후 육성군 체질 개선으로 2군이 좋은 성적은 얻은 것에 대해서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2] 그리고 2014년 말 선동열 감독이 사퇴하고 김기태 감독 체제가 들어서면서 2군 감독 직책이 신설되었고, 2019년 5월 김기태 감독이 사퇴하면서 2군 총괄코치 직책이 부활했다.
일단 최초로 3군이라는 단어를 도입하고 2009년 한국시리즈 우승의 산물이었던 기아 챌린저스 필드가 완공되면서 선수 육성의 하드웨어는 갖춰진 상태이다. 챌린저스 필드 클럽하우스 완공이 늦어진 상태에서 2군 코치진들이 새로운 선수 발굴에 실패한 결과 2013년 시즌의 참담한 결과가 나오게 되었다.

과거 2군 시스템과 인프라는 어느정도 개선은 된 편이지만 별개로 재활시스템은 '''10개 구단중 최악으로 꼽혔다.[3]''' 2015년 12월 7일 홈구장인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 부지내에 재활센터를 만들계획이라고 한다. 완공이된다면 구단 자체 재활치료가 가능해진다고 한다. KIA, 인프라 대확충...프리미엄 좌석, 3군 구장, 재활센터 건립 그리고 2016년 7월 13일 2군 경기장인 기아 챌린저스 필드 옆 부지에 재활센터 개소식을 가졌고 10개 구단중 최악으로 꼽혔던 재활시스템은 이전보다는 나아졌다.
다만 아직 선수 육성능력은 좋게 봐도 중하위권에 불과하다.[4] 애초에 KIA는 퓨처스 시설이 첨단화된 지도 4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군문제 해결도 김기태 감독이 부임하고 나서야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니 당장 성과를 바라기에는 조금 이른 상황. 또한 은퇴한 KIA 출신 선수를 코치연수도 시키지 않고 그대로 코치에 박아버리는 속칭 갸무원 문제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그래도 퓨처스에서 두각을 보였던 선수조차 드물었던 선동열 시절과는 달리 김기태 부임 뒤에는 그 선수들을 1군에서 쓸 수 있는지의 여부는 뒤로 하더라도 군경팀에서든 함평에서든 좋은 성적을 내는 선수들이 어느 정도 나오고는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선수들이 대부분 1~2년차라 처음부터 재능이 있었던 부류로 보이기 때문에 함평 교육시스템이 좋아서 이런 선수들을 배출한다고 보기 어렵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이진영.[5]

2. 라이벌 팀



2.1. 88고속도로 씨리즈 - 삼성 라이온즈


[image]
[image]
'''KIA 타이거즈'''
'''''KIA TIGERS''' ''
'''삼성 라이온즈'''
'''''Samsung Lions''' ''
2020년 7월 25일~26일 양 팀의 첫 이벤트 시리즈 엠블럼

삼성 라이온즈와는 원년 출범부터 라이벌이다. 상징부터가 호랑이 VS 사자에 유니폼 색깔도 빨강파랑[6], 각각 영호남을 상징하는 도시가 연고지인데다가 해태 버스방화 사건과 양 팀간의 설전과 정치적인 스탠스로는 김대중 vs 박정희, 진보 vs 보수 등으로 지역적인 라이벌 구도가 형성됐다.
2010년대 들어서는 단순히 팀을 떠나서 지역간 화해모드로 접어들면서 서로를 돕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자세한 건 달빛동맹 문서롤 참조.
해태의 전성기 시절엔 삼성이 우승을 한 번 밖에 차지하지 못하고, 이순철, 조계현, 정회열 등 해태의 선수들을 영입한다거나, 혹은 임창용, 이강철처럼 돈으로 영입을 해가며 해태를 따라해보는 시도를 보여주었으나, 당시엔 우승 횟수가 워낙 차이도 났고 삼성은 항상 준우승 전문이라는 놀림을 받았기 때문에 비웃음을 샀다.
하지만 삼성이 2002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시작으로 2011~2014 시즌엔 4연속 통합우승을 일궈내며 V8까지 달성하면서, 이러다 '우리의 우승 횟수를 뛰어넘을 수도 있겠다'는 타이거즈팬들의 여러 우려[7]에 인터넷 상에서는 양 팀간의 설전이 계속 있었다. 하지만 2015년 삼성 라이온즈 원정 도박 사건이 발생하고 삼성의 암흑기가 시작되고, KIA는 공교롭게 FA로 삼성의 최형우를 영입하고 2017 한국시리즈에서 V11을 이룩하게 되며 다시 양 팀간의 상황이 미묘하게 되었다.
이렇게 설전이 오가지만 김응용 감독 이야기가 나오면 모두 위 아 더 월드가 되기도 한다. 양 팀에서 위대한 업적을 쌓은 감독이라 김응용 이야기만 나오면 갑자기 화기애애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양 팀으로 VS놀이를 하면 뜨거운 토론이 자주 열린다.
  • 김봉연 VS 이만수
    • 원년 홈런왕과 전국구 인기스타의 대결. 원년 출범부터 큰 이슈였다. 누가 프로야구 최초로 통산 100홈런을 먼저 달성할 것인지 당시 엄청난 흥미거리였다. 결국 이만수가 먼저 달성했다.
  • 김성한 VS 이만수
    • 성적 상으로 보면 이만수가 당연히 앞서지만, 당시에는 원년부터 90년대 초창기까지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강타자이자 영호남을 대표하는 타자들이었다. 이만수가 무등구장 원정에 올 때마다 해태팬들이 '만수 바보~'라고 놀려대기도 했다. 팬들 사이는 안좋았지만, 실제로 양 선수 간 사이는 매우 좋아서 김성한의 은퇴식 때 이만수가 자신의 경기를 제끼고 무등구장까지 찾아와 축하해주기도 했다.
  • 이종범 VS 양준혁
    • 프로야구 최고의 떡밥이다. 설명을 하지 않아도 유명한 주제.
  • 임창용은 어디 레전드인가?
    • 돈이 없어 임창용을 삼성에 팔아야 했던 해태와, 삼성 소속 당시에도 계속 타이거즈로 돌아가고 싶어했던 임창용. 임창용이 삼성에서 엄청난 커리어를 쌓고,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를 거쳐 시카고 컵스에서 퇴단하고 삼성에 돌아올 때까지만 해도 다들 삼전드의 컴백이라며 반겼으나[8], 2015년 삼성 라이온즈 원정 도박 사건이 터지며 방출되고, 당시 도박 선수 명단이 알려지기 전에 KIA팬들은 "해당 선수들은 당장 은퇴시키자!" 라는 의견이 많았는데, 정작 해당 선수가 임창용으로 알려지고 방출이 되자 몇몇 KIA팬들이 임창용은 데려오자며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결국 임창용은 2016년에 KIA에 복귀해서 환영을 받았으나 결국 김기태 감독 및 프런트와 불화로 은퇴식도 없이 방출되며 현역 생활을 쓸쓸히 마무리했다. 이래저래 삼성팬들에게는 애증의 존재이자, KIA팬들에게는 아픈 손가락이다.
  • 김선빈 VS 김상수
    • 데뷔 시즌도 비슷하고, 특히 2012~2014 시즌 선동열 감독 재임 시절에 양 팀간의 설전이 심해지면서 누가 더 잘하는 유격수인지 온라인 상에서 키배가 많았다. 김상수는 2019 시즌부터 2루수로 포지션 변경을 했는데, 김선빈도 2020 시즌부터 본격적으로 2루수로 포지션 변경을 할 예정이고 누적 성적도 비슷하다.
  • 김주형정인욱(우동균 or 이영욱)
    • 양 팀간 안터지는 노망주들끼리 바꿔보자고 양 팀팬들이 서로 트레이드 의견을 묻기도 했다. 당연히 프런트에서는 시도조차 해본 적도 없고 팬들이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만 하는 이야기. 다만 이영욱은 한기주와 트레이드 되기도 했다. 대다수 양 팀팬들이 찬성했으나 결국 해당 인물 중 2020 시즌 기준 정인욱 빼고 모두 방출됐다. 그리고 정인욱도 방출됐다.
  • 무등 야구장 VS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
    • 챔필과 라팍을 짓기 전, 양 팀팬들이 우리의 구장이 더 구리다며 온라인 상에서는 서로 설전이 오가기도 했다. 무등야구장 물방개 사건과 시민구장 H빔 사건 등 양 팀은 정말 열악한 홈구장을 사용했었다. 참고로 무등구장은 1965년 완공, 대구구장은 1948년 완공이다.
그 외에도 '양 팀 중 어디가 더 명문 팀인가' 등 파이어가 나는 주제들이 많아서 팬덤이 충돌하기도 한다.
이런 양 팀의 라이벌 관계에 부응하여 2019년 12월 15일, 희망더하기 자선야구대회가 끝난 후 양준혁 삼성 라이온즈 OB회 사무총장이 이순철 SBS SPORTS 해설위원에게 공식으로 '타이거즈 vs 라이온즈 레전드 매치'를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라이온즈 측은 이미 참여하겠다는 의지가 확실하고, 타이거즈는 이순철 해설위원이 타이거즈 OB회 송유석 총무에게 전달하겠다고 밝히면서 2020 시즌이 끝난 후 스토브 리그에 친선 매치가 열릴 확률이 높아졌다.
여담으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가 대구경북에 확산되자 KIA 선수단 및 코치진, 2020 시즌 주장 양현종과 이화원 대표이사가 각각 1,000만 원씩 총 3,000만 원을 대구적십자사에 기부를 하며 달빛동맹에 힘을 쓰기도 했다.

2.2. 영호남 라이벌, 롯데 자이언츠 (가칭: - 시리즈)


롯데 자이언츠는 영남을 대표하는 도시인 부산을 연고지로 하고 있기에, 삼성처럼 지역적 구도의 라이벌 관계가 형성됐다. 그리고 해태제과롯데제과의 모기업 라이벌로서 대립하기도 했었다.[9] 무엇보다 '''선동열 VS 최동원'''[10]이라는 한국프로야구 사상 최고의 라이벌 매치가 이 두 구단의 승부에 커다란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롯데의 성적이 계속 중하위권을 맴도는 반면에 해태는 우승을 계속 차지하고 인수 뒤인 KIA가 우승을 2번이나 차지했지만, 롯데는 1992년 우승을 마지막으로 우승을 쌓지 못하면서 성적으로는 라이벌 관계라고 보기에는 애매해졌다. 그래도 영호남 더비로 보자면 양 팀의 큰 팬덤과 함께 여전히 흥미로운 관계다.
그래서인지 해태-KIA와 롯데는 두 팀 간 선수교환이 거의 없다. 양 팀간의 유일한 트레이드는 프로야구 초창기에 좌투좌타 내야수 백업으로 활약했던 김일환 정도.
FA 이동은 서로 1번을 주고 받았다. 2013년, 김주찬을 KIA가 FA로 영입하면서 롯데에 보상선수로 홍성민을 내줬고, 2020년에는 안치홍을 롯데가 FA로 영입하며 보상선수 김현수가 이적한 점. 이게 원년부터 현재까지 그나마 양 팀간의 선수 교환 사례다.
2018 시즌에는 한글날 대첩이라는 양팀간의 맞대결이 탄생하며 시청률은 지상파 2.8%, 케이블 4.8%로, 지상파로는 2018 시즌 중계 중 최고를 달성했고, 케이블로는 2014 시즌 이후의 포스트시즌을 포함한 모든 야구 경기 중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또한 네이버 중계 동접자 수도 50만명을 넘으며 굳건한 양 팬덤 간의 저력을 과시하며 여전한 라이벌 관계를 형성 중이다.

2.3. 인기 구단 라이벌, LG 트윈스


1983년 한국시리즈에서 MBC 청룡이 해태 타이거즈를 꺾었다면 프로야구 역사도 크게 달라졌을지 모른다. 당시 한국시리즈는 전·후기리그 우승팀이 맞붙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MBC는 후기리그를 1위로 마쳤지만 보너스 지급 문제를 둘러싼 선수단의 내부 분열로 자중지란에 빠졌고 결국 전기리그 챔피언 해태에 1무 4패로 완벽하게 패하며 홈구장인 잠실 야구장에서 원정팀 해태에게 우승을 내주게 된다. 한국시리즈 첫 단추를 제대로 끼운 해태는 이후 1986~1989 시즌 4연패를 차지하는 강팀이 됐고, MBC는 우승은 커녕 한국시리즈에도 한 번 나가지 못하는 만년 중하위권 팀이 되고 말았다.[11] 1989 시즌까지 MBC가 프로야구에 참가한 8시즌 동안 1983년 한국시리즈에서 준우승한 게 최고 성적. 당연히 두 팀 사이에는 딱히 라이벌 구도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12] LG의 옆집인 OB 베어스 역시 1987년을 PO 진출을 끝으로 투수들의 혹사 문제와 선수들의 노쇠화로 급격한 내리막을 겪었기 때문에 역시 해태와 라이벌로 엮이지 못했다.
하지만 1990년, LG그룹이 야구단을 인수하며 모든게 달라졌다. LG는 그 해 8월 25일까지 53승 42패(승률 .558)로 3위, 해태는 47승 3무 41패(.533)로 4위였다. 두 팀은 잠실에서 이 날까지 주말 3연전 경기 중 두 경기를 치러 1승 1패를 주고받은 상태였고, 1990년 8월 26일 경기에서 그 유명한 잠실구장 패싸움 사건이 터진다. 원래라면 구장관리 미흡으로 홈팀 LG의 몰수패를 선언해야 되지만, 원정팀 해태팬들이 난동을 피웠기에 심판들도 몰수패를 쉽사리 선언하지 못했고 결국 경기는 난동이 진정되고 1시간 뒤에 재개되어 해태의 1-13 대패로 경기가 끝나게 된다. 해태는 결국 페넌트레이스를 2위로 마쳤지만 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 3전 전패를 당한 채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한다. 거꾸로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차지하는 데 성공한 LG는 여세를 몰아 사상 처음으로 한국시리즈 정상에도 오르게 된 것.[13]
서울의 구성원들은 지방에서 상경한 사람들이 많고, 토박이가 적기 때문에 출신 지역이 다양하다. 덕택에 프로야구 원년부터 '서울팀=우리팀'이라는 인식은 미미했고 오히려 '고향팀=우리팀'의 인식을 가졌거나 본인은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지방에서 상경한 부모님의 응원팀을 따라서 응원하거나 항상 이기던 해태의 야구 자체에 매료된 비연고성 팬층도 상당했다.
그래서 '''호남 출신 팬+호남과 아무 관련이 없지만 해태 자체를 좋아하는 팬[14]'''으로 해태의 잠실경기는 항상 북새통을 이뤘다. 더구나 포스트시즌 4차전 이후부터는 대개 잠실에서 치르도록 되어있는 중립구장 규정 탓에 가장 잠실에서 많은 빅 게임을 가진 팀도 다름 아닌 해태였고, 잠실은 해태의 보조 홈구장이라는 말도 통용되던 시절이었다.[15]
또한, 1990년대 초중반부터 해태팬들이 LG를 놀리려고 만든 노래인 고래사냥이 탄생하게 된다. '자~ 떠나자~ LG 잡으러~' 라고 개사를 해서 잠실구장에서 떼창을 시작했고, LG팬들이 가장 싫어하는 응원가가 되었다. 이 응원가는 그 이후 쭉 이어져서 부르다가 결국 2008 시즌을 앞두고 김주일 응원단장의 사과로 더 이상 공식 응원단에서는 부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응원단에서는 말리지만 일부 KIA팬들이 고래사냥을 부르는 모습이 포착되었고, LG팬들은 그런 광경을 목격하고 분위기가 험악해지기도 했다.
1990년 LG에 입단했다가 트레이드를 통해 1994년 해태로 팀을 옮긴 이병훈 전 해설위원은 "LG 시절엔 솔직히 해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재계 라이벌인 삼성이나 잠실 라이벌 OB에 포커스를 맞췄다. 그런데 해태에 가보니 'LG에는 지지 말자'라는 분위기가 확실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1994년, 신바람 야구로 LG를 정상으로 이끌었던 이광환 전 감독은 "그 때도 지금처럼 LG는 인기가 대단한 팀이었다. 잠실에서 해태하고 맞붙으면 정말 힘든 경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지는 날에 팬 3,000명 정도가 모여 '감독 나오라'고 외친 적도 여러 번이었다. 감독으로서도 더 이기고 싶은 경기였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출처
이 라이벌 의식이 절정에 달했던 건 '''1997 시즌'''이었다. 이 해 해태는 LG와의 잠실 원정에서 3승 6패로 밀렸는데, 그 6패 중 5패가 '''8회 이후 역전패'''였다. 4월 15~16일 2경기 연속으로 연장 끝내기 패를 당하더니[16] 6월 29일 경기[17]에서는 박재용이 9회초 당대 최고의 마무리 이상훈을 상대로 역전 만루홈런을 때려내고도 9회말 수비에서 재역전패를 당했다. 9월 10일에도 임창용이 9회말 투아웃까지 잘 잡아내고도 허문회에게 1루수 강습 안타를 내준 이후 쓸데없는 견제로 2루를 허용한 후 이병규에게 동점타를 내주어 연장 14회 역전패의 다리를 놓아주었다. 절정은 1997년 한국시리즈였다. 당시에는 플레이오프 진출팀이 서울 연고팀일 경우 순위에 상관 없이 1, 2, 5, 6, 7차전을 잠실에서 열도록 하는 규정 때문에 해태는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차지하고도 홈 어드밴티지 없이 경기를 치뤘지만, 승자는 해태였다. 마운드에서는 이대진, 타석에서는 이종범이 팀을 이끌며 V9를 이뤄냈다.
이후 2001년, 팀 이름이 KIA로 바뀔 때까지 더 이상 해태가 한국시리즈 정상을 차지한 적은 없다. 결국, 해태의 '''첫 한국시리즈 우승도 마지막 우승도 모두 상대 팀이 전신 MBC와 후신 LG'''였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해태 팬들 사이에서는 "잠실은 해태 안방 구장"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들리기도 했다.
물론 LG라고 당하기만 했던건 아니다. 2002 시즌 페넌트레이스 4위로 포스트시즌 막차를 탔던 LG는 플레이오프에서 박용택의 활약과 김진우의 부진으로 3승 2패로 KIA를 꺾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그 후에는 2009 시즌 초 김상현, 박기남강철민 트레이드 덕분에 KIA는 V10을 이룩하게 됐고, '아낌없이 주는 LG'라는 놀림을 받게 된다.[18] 하지만 선동열 감독 부임 이후 KIA의 부진과, 2013 시즌에는 LG 김기태 감독의 활약으로 무등구장에서 6월 2일 경기를 통해 LG팬에게는 명경기, KIA팬에게는 치욕의 경기가 탄생하기도 했다.
2015 시즌부터는 김기태 감독이 KIA로 부임하며 다시금 양 팀 팬덤의 분위기가 뜨거워졌고, 2016 시즌에는 와일드카드에서 치열하게 맞붙기도 하며 라이벌 관계가 다시금 뜨거워지고 있다.
여담으로, 김상현 트레이드에 실패한 LG 프런트는 2009 시즌 이후로 KIA와 전혀 트레이드를 하지 않았으나 2019년 1월 중순 정용운을 받고 문선재를 보내주며 10년 만에 트레이드를 단행하기도 했다. 정용운은 2020 시즌 후 방출되고 문선재는 기량 발전 없이 나이만 먹어가며 노망주의 표본이 되어 루즈 앤 루즈 트레이드로 흐르고 있다.

2.4. 그 외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은 1988, 1989, 1991년으로 4년간 3번이나 계속 한국시리즈에서 맞붙은 한화 이글스가 라이벌이라 할 수 있'''었'''다. 그나마 광주와 가장 가까운 팀이고, 포스트시즌 횟수를 보면 빙그레/한화 이글스전이 가장 많다. 하지만 한화가 2008 시즌부터 암흑기가 시작되며 2018 시즌에 암흑기를 탈출하긴 했지만 라이벌로 보기엔 애매해졌다.[19] KIA 인수 이후인 2001년부터 현재까지 한화전 성적은 승률 .562로 인수 후 상대팀 승률 중에 승률이 제일 높다. 해태 vs 한화 성적이나 해태 vs 빙그레 승률도 전부 .550을 넘을 정도로 전형적인 타이거즈의 강세.
SK 와이번스의 천적으로도 유명하다. 2008년 윤길현 욕설 사건을 계기로 양팀간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하더니 2009년 한국시리즈에서 7차전까지 치열하게 싸운 것[20]을 시작으로, 이상하게 KIA는 SK에 강한 면을 보이며 무려 7년 연속으로 상대 전적 우위를 가져갔다. 이후로도 두 팀은 만났다 하면 이상하리만치 치열한 경기를 이어갔고, 2017년에는 프로야구 역사에 길이 남을 어메이징한 경기를 선보이기도 했다.[21] 그리고 SK가 무난한 1위를 달리며 강자의 모습을 보인 2019년에는 순위만 보면 별 상대도 되지 않을 것 같은 7위 KIA를 상대로 1위 SK가 '''열세'''를 기록하며[22] 다시 한 번 KIA와 SK의 관계가 주목받는 중이다.

3. 신인왕 잔혹사


의외로 많이 언급되지는 않지만 1982년 리그가 시작된 이래 가장 최우수 신인왕과 연이 '''지지리도''' 없는 팀이다. 1985년 신인왕과 KBO 골든글러브를 거머쥔 이순철[23]이 배출된 이후 2019년까지 34년 동안 타이거즈에서 신인왕을 배출해내지 못했다. 11번의 우승을 거머쥐는 동안에도 빼어난 신인이 나오지 못하거나, 그 해에 신인왕에 버금가는 활약을 했음에도 그 해에 더 괴물같은 선수들이 타 팀에서 나오면서 인연을 맺지 못했다.
  • 1989년에는 신인 이강철이 214.2이닝 15승 11패 3세이브 평균자책점 3.19라는 훌륭한 성적을 거뒀으나, 태평양의 박정현이 19승 10패 2세이브에 평균자책점 2.15, 242.2이닝을 투구하며 신인왕 자리를 내주게 된다.
  • 1990년에 1차 지명으로 입단한 이호성의 경우 그 해 외야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할 정도로 준수한 성적을 보였으나 그 해 신인왕은 김동수의 차지였다.
  • 가장 유명한 사례로는 이종범의 케이스로, 1993년에는 걸출한 스타급 선수들이 많이 배출되었던 한 해였고 특히 삼성 라이온즈의 교타자 양준혁과의 라이벌 구도가 그려졌다.[24] 결국 신인왕 투표에서 양준혁에 밀려 신인왕 타이틀을 놓치게 되었다. 대신 이종범은 그 해 한국시리즈 MVP와 이듬해 리그 MVP로 신인왕의 설움을 풀기는 했고 아들이 신인왕을 받으면서 아버지의 꿈을 대신 이뤘다.
  • 2002년에는 김진우도 12승에 탈삼진왕을 차지하는 등 신인왕을 탈만 한 성적이지만 더 뛰어난 현대 조용준의 등장으로 실패했다.
  • 2006년, 최고 계약금 10억을 쥐고 입단한 한기주의 경우에도 데뷔 후 선발 및 마무리 투수로 활약하며 수준급의 성적을 거두기는 했지만 그 해에 혜성처럼 나타난 MVP와 신인왕을 동시에 거머쥔 괴물급 투수의 등장으로 묻혔다.
  • 2009년, 최연소 올스타전 MVP와 한국시리즈의 숨은 공신으로 활약했던 안치홍 역시 그 해에 유일한 순수 신인으로 신인왕에 도전했으나 후반기에 접어들어 약점이 노출되어 삽질을 거둔 끝에 0.235라는 멘도사 라인 급의 타율을 기록했고, 결국 중고 신인인 이용찬에게 자리를 내줬다.
  • 2012년에는 박지훈이 불펜에서 준수한 성적을 거두며 신인왕에 도전했으나 서건창이 등장하면서 실패했다.
  • 2019년에는 전상현이 불펜에서 준수한 성적을 거두고 이창진이 중견수로써 좋은 성적을 펼치며 스탯티즈 WAR*로는 LG의 정우영보다 뛰어난 성적을 거뒀지만, 결국 신인왕은 정우영이 가져갔다.

4. 군기 및 징계


해태 타이거즈 시절과 2000년대 초반까지 KIA 타이거즈 군기는 악명 높았다. KIA로 트레이드 될 바에는 은퇴하는게 낫겠다고 옷 벗은 선수들도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손혁이 트레이드 이후 입단을 거부하다가 임의탈퇴로 은퇴했다. 그러다가 이종범이 일본에서 돌아온 후 이대진과 함께 앞장서서 똥군기를 정리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종범 본인도 이 부분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다고.
그래도 여전히 군기는 다른 9개 구단에 비해 강한 편이다. 김주찬의 경우 FA로 KIA로 이적한 후 한 인터뷰에서 "군기가 다른 팀에 비해서 센 편인 거 같다." 라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 무한도전 타인의 삶넥센 히어로즈이숭용과 역할을 바꾼 정준하도 녹화 당일 넥센의 경기 상대였던 KIA 측 식당을 방문했는데, 넥센은 선후배가 뒤섞여 이야기를 나누며 심지어는 팀 내 최고참(의 대역)에게 농담도 치며 식사하던 분위기였으나, KIA는 대선배인 이종범이 혼자 독상을 하고 다른 선수들도 별 대화 없이 묵묵히 식사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것과 연관되어서 만일 구단 내의 선수가 사생활이나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켰을 경우 내부 자체 징계를 세게 때리는 편이기도 하다. 무단 이탈을 한 김진우나 음주운전을 한 손영민, 구단물품과 관련되어 문제가 생겼던 한성구의 경우 임의탈퇴라는 강수를 거는 한편 SNS에서 부적절한 언어를 사용하여 팬들의 분노를 산 윤완주의 경우에도 KBO에서는 경고 정도로 끝난 부분을 '''구단 자체적'''으로 3개월 선수 자격 정지라는 중징계를 내린 사례가 있다.

5. 선수들의 충성심


강한 군기와는 별개로 타이거즈에 엄청난 충성심을 보이는 선수들이 제법 있다. 보통 해태 시절에 활약했거나 해태 야구를 보고 자란 연고지 출신 선수들에게 이런 경향이 더욱 강하다. 이와 또 별개로 타 팀에서 건너온 선수들도 팀에 대한 상당한 애정을 보이는 경우가 있는데, 특히 군기가 점차 약해져갔던 2010년대에 들어온 선수들이 대부분이다.
  • 서정환: 대구 출신임에도 "난 전라도 사람이여"라고 말할 정도로 팀에 애정이 많았다고 한다. KIA팬들도 감독으로서는 무척 싫어하지만 선수로서는 딱히 싫어하지는 않는다.
  • 임창용: 삼성 시절엔 FA계약 직후에 KIA 타이거즈로 트레이드 해 줄 것을 요구한 적도 있고, 야쿠르트 스왈로스에서 뛸 때도 타이거즈에서 은퇴하고 싶다고 말했을 정도였으며 결국 KIA로 돌아와 활약했지만 김기태와의 불화 끝에 방출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방출 전 마지막 면담에서 어떻게든 좋으니 팀에 남고 싶다고 말했지만 결국 방출을 당했다.
  • 이호준: 한창 SK와 KIA가 대립했을 시절에도 인터뷰로 KIA가 좋은 성적을 냈으면 한다고 말했고 주장임에도 벤치 클리어링 때 그라운드에 나오지 않았다.
  • 정성훈: 현대로 트레이드된다는 소식을 듣자 팀을 떠나기 싫다며 울었고 아예 올스타전때 현대 유니폼에 KIA 헬멧을 쓰고 나오는 기행을 보여주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KIA를 떠난지 16년이 지난 2018 시즌에 친정팀으로 다시 돌아와 KIA에서 은퇴했다.
  • 신종길: 한화 시절 자신이 트레이드 대상에 올랐다는 얘기를 듣자 구단에 'KIA가 아니면 안 가겠다'고 선언했다.
  • 김상현: LG로 트레이드될때 소주를 마시고 감독이 쉬던 숙소 방에 들어가서 타이거즈에 남고 싶다면서 무릎을 꿇고 감독한테 빌었다. 이후 2009년에 다시 돌아와 MVP와 팀의 우승까지 경험했다.
  • 양현종: 광주 출신의 로컬 보이인데다 본인도 KIA의 영구결번을 노린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팀에 애정을 보여주고 있다.
  • 안치홍: 신인 때 부터 타이거즈의 중심은 나라고 말하며 20년 동안 팀을 이끌겠다는 짤이 두고두고 회자 될 정도... 였지만, 2020 시즌을 앞두고 FA로 롯데로 이적했다.
  • 노수광: SK와 4대4 트레이드가 결정되고 눈물을 흘리고 감독에게 큰 절을 올리려고 했다고 한다. 트레이드 된 이후에도 자주 KIA 덕아웃에 놀러오는 모습을 보여줬다.
  • 서동욱: KIA에서 다른 팀으로 넘어간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자꾸 KIA로 자신을 보내달라고 요구했다고. 사실 KIA에 대한 충성심보다는 그 당시 KIA의 얇은 뎁스가 본인에게 기회를 줄 것이라 여겼기 때문에 KIA행을 원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해도 그리 애정이 없는것도 아니지만. 넥센은 서동욱을 대체할 주전이 이미 충분했기 때문에 딱히 활용법도 마땅치 않은 서동욱을 무상 트레이드로 KIA에 넘겨주면서 서동욱은 11년 뒤 KIA에 돌아올 수 있었다.

6. 노란 응원막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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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팀마다 팀 컬러를 반영한 응원막대를 판매하고 있지만, 빨간색과 감색을 팀 컬러로 내세우고 있는 타이거즈는 뜻밖에도 노란색 막대풍선을 쓰고 있다. 일부 KIA 팬들은 노란색 응원막대를 단무지라고 부르기도. KIA 타이거즈의 BI나 CI에서도 호랑이를 제외하고는 노란색을 찾기 힘들고 CI 변경 전에도 노란색 계열을 쓴 부분은 마찬가지로 호랑이 캐릭터를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노란 막대풍선의 유래를 거슬러 올라가자면 LG 트윈스가 1990년대 초반 처음으로 막대풍선을 이용한 응원을 시작한 뒤 다른 프로야구 구단에서도 응원 막대풍선을 차용하기 시작했는데, KIA의 전신인 해태 타이거즈에서 막대풍선 색상으로 고려할 때 빨간색도 써봤지만 잘 보이지 않아서 시각적으로 빨간색보다 잘 보이고 부피도 커보이는 노란색 막대풍선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KIA 타이거즈로 팀이 바뀌면서 2004년까지 빨간 응원막대로 바뀌기는 했지만 결국은 다시 노란막대로 회귀했다. KIA가 한 번 쓰다가 버린(?) 붉은색 응원막대는 훗날 팀 상징 컬러가 바뀐 SK 와이번스에서 쓰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좀 단순한 이유이기도 하지만 해태 로고 중에도 노란색이 일부 있기도 하고 나름대로 호랑이 캐릭터에 노란색 계열이 들어가는 만큼 의외로 잘 어울리는 응원 막대풍선 색깔이 되었고, 노란 막대풍선은 타이거즈만의 상징물이 되었다. 이 덕분에 KIA를 응원할 때 보면 빨간 베이스에 노란색이 강조되는 효과가 나온다. 특히 경기가 KIA의 압승으로 흘러가기라도 하는 날에 그 기세는 더 말할게 없을 정도. 매우 우연의 일치지만,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과 컬러가 상당히 비슷해졌다.
일각에서는 호남에서 노란색이 정치적으로 남다른 의미를 상징하는 만큼 타이거즈의 응원색으로 어울린다는 이야기도 한다. 실제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80년대에 이끌었던 평화민주당의 상징색이 노란색이었고 훗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탄생한 열린우리당도 노란색을 상징색으로 썼다. 모두 호남에서 강력한 지지를 받았던 정당들이다. 현재는 정치색과 완전히 무관.
현재는 일반적인 긴 모양의 막대풍선 외에도 호랑이발을 형상화시킨 막대풍선이나 탬버린 등 다양한 바리에이션이 나오고 있다.

7. 잠수함 투수 전성시대


타이거즈에 대해 설명할 때 왼손잡이 선수 수난사와 함께 언급되는 특징으로 수준급의 옆구리 투수들이 많이 배출되었던 팀이라는 것. 이 중 왼손잡이 수난사는 수많은 우투좌타 야수가 배출되고 있는 현대야구의 추이와 함께 타이거즈 왼손투수의 기록을 속속 갈아치우고 있는 양현종의 등장으로 사실상 옛날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지만 수준급의 옆구리 투수의 배출은 기아자동차로 모기업이 바뀐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다.
1989년부터 2012년까지 지속되었던 이강철-(박충식)-신용운-손영민의 등번호 19번 계보의 선수들이나 해태에서 뛴 적 있는 재일교포 선수 주동식, KIA 2009 시즌의 뒷문을 책임졌던 유동훈 등도 타이거즈를 대표했던 옆구리 투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선수이며, 해태에서 데뷔한 뒤 삼성에서 오래 선수생활을 하다 우여곡절을 겪고 KIA로 돌아온 임창용 역시 타이거즈가 배출한 KBO 리그 대표 사이드암 투수이다.
2012년을 끝으로 '등번호 19번 옆구리투수'의 계보가 끊겼고[25] 2010년대 초~중반 잠시 잠수함 투수의 기세가 줄어든 적이 있었지만 그 이후에도 박준표, 박정수 등의 선수를 발굴해 냈고, 한화에서 데뷔했지만 상무에서 군 생활을 보낸 뒤 제대하여 KIA의 선발투수진을 꿰찬 임기영 역시 타이거즈 옆구리 투수 배출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8. 호랑이가족한마당


시즌이 끝나면 매년 실시하는 구단의 축제 겸 팬미팅. 자세한건 호랑이가족한마당 문서 참조.

9. 기타


선수들의 E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강한 편이다. 특히 최원준 선수의 경우 라이엇 게임즈 코리아에서 주최한 리그 오브 레전드 대회에서 우승하고 MVP로 뽑히면서 E스포츠 팬들에게도 이름을 알렸다.


[1] 그러나 강하승은 타어강이라는 역대급 DTD이후 방출되었다.[2] 막상 12시즌이 끝나자마자 박철우 2군 총괄코치는 타격코치로 밀려나고 한화에서 잘린 한대화를 새 2군 총괄로 데려왔다.[3] 당장 KIA시절에 혹사에 허덕이며 재활군에 있던 신용운이 삼성에서 다시 정상적으로 선수생활 하는것을 보면 어느정도인지 실감간다. 오죽하면 팬들도 안타깝지만 그래도 KIA 나가서 천만다행이란 말을 할정도니.[4] 육성능력 보다는 애초에 조범현 말기~선동열 시절의 뻘픽으로 원석들이 극히 적은게 문제다.[5] 야만갑이라고 놀림을 받지만, 나이를 감안하면 엄연히 얘가 KIA 외야수 유망주 랭킹 1위다.[6] 다만, 삼성은 원년에는 파랑색 유니폼이 아닌 빨강색 유니폼을 입기도 했다. 자세한 건 삼성 라이온즈/유니폼 참조.[7] 게다가 KIA는 2011 시즌엔 4위에 그쳤고, 2012년부터는 선동열 감독의 암흑기가 시작되어서 더 비참함을 느꼈다.[8] 사실 임창용은 해외 시절 인터뷰를 여러 번 하면서 말년은 타이거즈에서 뛰고 싶다고 하였으나, FA 신분이 아니라서 삼성으로 복귀해야만 했다. 2011 시즌 인터뷰 당시에는 타이거즈 복귀를 강력 어필했으나, 그 다음 해부터 사이가 껄끄럽던 선동열 감독이 부임하자 그 이야기가 흐지부지 되기도 했다.[9] 당시에 라이벌 관계가 상당해서, 전라도에서는 해태제과와 관련된 식료품만 먹고, 롯데껌(이외 기타 식품)을 먹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반대로 롯데의 경우도 마찬가지.[10] 선동열은 광주 출신-고려대 졸업, 최동원은 부산 출신-연세대 졸업. 여러의미로 라이벌일 수 밖에 없는 관계였지만 실제로는 친한 형동생 관계였다고 한다.[11] 1986년과 1987년 MBC는 김건우와 김용수의 활약으로 막판까지 치열한 포스트시즌 경쟁을 했지만 1987년 시즌 막판 김건우의 교통사고 이후 OB와 사이좋게 하위권으로 추락했다.[12] LG 레전드 김용수가 스톡킹에서 청룡과 해태가 잠실경기를 하면 해태 팬들이 더 많았다고 밝혔다.[13] 해태는 시즌 내내 4위에 머물다 9월 들어 폭풍 상승세를 기록하는데 선두였던 빙그레와의 4연전을 싹쓸이해 휴식일이었던 LG가 선두에 등극했다. 이후 페넌트레이스 우승경쟁 구도는 4강체제로 갔다가 다시 LG와 해태가 선두 자리를 다투는 흐름으로 좁혀졌다. 그리고 LG의 최종전에서 LG가 OB에 승리하고 해태가 태평양과의 더블헤더 2차전에서 패배하며 LG의 한국시리즈 직행이 결정됐다.[14] 보통 선동열의 투구와 이종범의 화려한 플레이로 해태팬이 된 경우가 많다.[15] 실제로 타이거즈의 포스트시즌 역사상 가장 승률이 높은 구장이 잠실이다.[16] 4월 17일 경기도 연장까지 갔는데 이 경기는 해태가 이겼다.[17] 김응용 감독 참외 사건이종범 연속 도루성공 종결이 이 한 경기에서 발생했다.[18] 해태 시절에는 LG가 해태와의 트레이드에서 승자가 됐지만 KIA로 바뀐 뒤에는 정반대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19] 한화와 2014년 최하위 피하기 경쟁, 2015-16년 치열한 5강 순위 경쟁을 한적은 있지만 2009년부터 2017년까지 한화와의 상대전적에서 모두 우세했다.[20] 또한 이 시리즈는 사제 간의 대결로 관심을 모으기도 했는데, 당시 SK 감독이었던 김성근은 당시 KIA 감독 조범현이 충암고 재학 당시 감독이었다.[21] 링크 타기 귀찮은 위키러들을 위해 한 줄로 요약하자면, '''역대 최다 점수 차를 뒤집은 KIA와 그걸 또 뒤집은 SK.'''[22] KIA를 상대로 두산이 13승3패, 키움이 10승1무5패, LG가 10승5패를 기록한 것과 극명하게 대조된다.[23] 이 해 같이 데뷔한 선수가 바로 무등산 폭격기 '''선동열'''이다.[24] 본래 양준혁은 1992 시즌에 프로에 데뷔할 수 있었으나 삼성이 김태한을 1차지명하는 바람에 양준혁이 2차지명으로 밀렸고, 쌍방울 레이더스가 그를 2차 2라운드에서 지명했지만 삼성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던 그는 입대를 선택했고, 결국 1993 신인드래프트에서 삼성이 그를 1차지명하기에 이르렀다.[25] 2018년 손영민이 다시 이 등번호를 되찾음으로써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