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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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아프리카에 위치한 국가. 수도는 주바.
원래는 수단 공화국에 속해 있었지만, 2011년 2월 수단 공화국 남부의 독립 여부를 묻는 주민 투표에서 98.83%가 독립에 찬성, 동년 7월 9일에 공식적으로 독립하였다. 남한이나 서독 등 방위가 들어간 용어를 사용하는 국가는 분단국가인 경우가 많아서 오해하기 쉽다 보니 수단 공화국을 '북수단' 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는데, 애초에 분리독립한 데다 양측 모두 통일을 하겠다는 의지가 없으므로 사정이 다르다. 실제 비르 타윌 지역에 있는 북수단 왕국은 초소형 국민체일 뿐이다.
2. 역사
수단 전체의 역사에 대한
2.1. 개관
역사적으로는 남수단과 수단 전역이 북쪽의 이집트와 남쪽의 에티오피아 사이에서, 양측의 흥망에 따라 이집트/에티오피아(및 해당 지역을 기반으로 한 나라들)의 영향력이 왔다갔다 하는 역사였으나, 단순히 '이집트와 에티오피아의 중간지'라고 하기엔 그 중간지인 수단 지역(현 수단과 남수단 및 몇몇 소국을 포함하는)의 지역 자체가 너무나도 방대한 관계로, 해당 지역에서 수많은 군소 왕국들이 생겨났다 사라져갔다. 이집트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으며 기마 유목민들이 많던 북수단 지역과는 다르게 남수단 지역은 나일로트계 민족들이 수천년 동안 같은 방식으로 유목을 해왔다. 수단 전체를 장악하는 지속적인 국가의 탄생은 근대 시작된 일이다. 오스만 제국의 알바니아계 군인 무함마드 알리가 지배하는 이집트가 남수단 지역까지 장악했다. 이후 이집트 케디브 왕조가 영국의 보호령이 되고, 마흐디 운동 와중에 바까라족이 남수단과 북수단 거의 전역을 장악했다 패망한 이후 영국이 프랑스와 식민지 쟁탈을 하는 과정에서 북수단과 남수단을 아우르는 수단으로 분류되었다. 이후 수단이라는 한 국가로 독립하였으나, 앞서 말한 대로 자체적인 국가적 정체성을 가질 만큼 확고한 동질감이 있지는 않았던 데다 국토가 굉장히 넓은 관계로, 끊임없는 마찰 끝에 결국 21세기 초 독립하여 남수단을 이루게 된다.
요약하자면 수단과 남수단 모두 나일로트계 부족들로부터 기원했으며, 19세기에는 북수단의 역사와 비슷한 맥락으로 흘러왔으나 그것뿐이고 두 나라는 역사, 언어, 종교가 전혀 다르다.
2.2. 근대 이전
고대부터 나일사하라어족에 속하는 유목민들이 거주했다. 이들은 유목민이지만 기마 유목민은 아니었다. 수단 북부의 경우 이집트와 에티오피아라는 두 문명의 사이에 있으므로 주변 문명들에게 널리 알려진 지역이었다. 고대 이집트 문명은 흔히 생각하는 고대 이집트와 이후 현재까지 이어지는 이집트 지역에만 머물렀던 것이 아니라, 수천 년에 걸쳐 중심지가 나일강 상류에서 하류로(나일강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른다) 옮겨오는 과정을 거쳤고, 이집트의 중심지가 북쪽으로 옮겨간 이후로는 수많은 부족들과 군소 왕국, 쿠시 왕국과 누비아 왕국과 같은 국가들이 생겨났다 사라지고는 했다.
그러나 남수단의 경우는 고온의 열대 우림을 개척하기 힘들었고, 열대성 질병이 창궐하는 지역이라 문명이 일정 단계 이상 발전하기 힘든 환경이었다. 네로 황제 시절 고대 로마 제국이 원정대를 보냈지만, 정복시키고자 하는 확실한 목표가 있는 원정보다는 반쯤 탐험에 가까웠다. 공화정 말기에 이미 확보한 이집트로부터 나일강을 거슬러 올라가, 가능하다면 나일강의 수원까지 거슬러 올라가보고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면 에티오피아까지[1] 영토를 확장하거나 혹은 새로운 거래 상대를 만들거나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원정대의 구성 또한 대규모 원정보다는 소수의 황제 직속 근위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들은 큰 문제 없이 나일강을 열심히 거슬러 올라가며, 메로에와 같은 유서 깊은 도시들에 도달하기도 했으나, 나일 강이 그냥 좀 긴 강이 아닌 지구상에서 제일 긴 강이었던지라... 결국 현재의 수드(Sudd Marsh, 남수단에 위치한 늪지대로 이름부터 아랍어로 '장애물'이라는 뜻이다)에 도달한 이후, 한반도 전체보다 방대한 악어와 모기 및 각종 위험물들이 우글거리는 환경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로마로 복귀한다. 이미 속주로 삼은 이집트의 이집트인들이나, 종종 거래를 하던 아프리카의 상인들 모두 해당 지역에 대해 '거긴 좀 별로...'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사실 네로의 뻘짓에 근위대원들만 고생을 한 꼴이었다. 참여한 군단병과 로마 작가들이 드라마틱하게 '두 바위 사이에서 뿜어져나오는 나일강의 수원'을 발견하긴 했다고 선전을 하긴 했으나 나일강의 수원은 한 군데가 아닌 데다가, 수드로 흘러들어가는 수원은 몇 군데가 더 있고, 빅토리아 호수까지 가려면 조금 많이 더 남쪽으로 내려가야 했다.
이후 수단 북부는 이집트의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으며 기독교와 이슬람이 차례로 유입되고, 기마 유목민들이 유입되어 현지 누비아인들과 혼혈되어 수단 아랍인의 기원이 된 반면, 남수단 지역의 역사는 19세기 이집트 케디브 왕조에 정복되기 이전까지 큰 변화가 없었다. 이것이 향후 벌어지는 수단과 남수단 분리의 근본적인 원인(애초에 전혀 다른 바탕을 가진 지역을 하나로 묶어 수단으로 만들어놓은 것이므로)이 된다.
2.3. 근대
19세기 이집트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사실상 독립(메흐메드 알리 참조)한 이후 수단까지 영역을 확대한다. 북부 수단의 아랍화된 누비아인 샤이키야족을 격파하고 베두인들이 딩카족, 누에르족을 대상으로 상아 및 노예 납치 및 무역을 하던 현 남수단까지 영역을 확보하였다. 무함마드 알리는 이 지역에 자신과 동향이던 알바니아 출신 군인들을 파견하여 행정 제도를 이집트 식으로 개편했으며, 누에르족과 딩카족을 징집하여 전열보병으로 훈련시켜 이집트 군에 편입시켰다. 몇몇 기독교 선교사들 또한 이곳에 도착하였지만, 별 영향력은 주지 못하였다.
당시 이집트는 상아에 관심이 있었지만, 공교롭게도 19세기 말 영국에서 국제 노예 무역을 금지되면서 상아 무역에 큰 차질이 발생한다. 당시 상아 무역과 노예 무역은 부록으로 함께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두인들이 나일사하라어족 원주민 마을에 쳐들어가 원주민들을 고문하여 상아를 받아낸 후 수탈하고, 사람들을 납치해서 노예로 만들어 상아를 노예에게 직접 손으로 들게 해서 운송시켜 파는 방식으로 상아를 획득, 수출했는데 이 방법이 막혀서 상아 공급 단가가 올라가 버린 것이다.
이후 북부 수단 출신의 아랍인 알-주바이르 라흐마 만수르가 해당 지역의 무주공산 상태를 보고, 영국의 노예 무역 금지 조치를 뇌물을 주고 피한 후 노예 무역과 상아 무역을 재래식 방식으로 병행하며 해당 지역에서의 독자적인 영향력을 키우고, 수단 지역의 다르푸르 술탄국과 분쟁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후 이집트는 알-주바이르를 견제하고, 본격적으로 해당 지역을 통제하고자 영국인 탐험가 사무엘 베이커를 고용한다. 그 후 해당 지역을 이퀘토리아로 명명하고 통치를 위임하나, 딱히 획기적인 성과를 내지는 못하였다.
이후 이집트 자체가 수에즈 운하 채무 문제로 영국의 보호령이 되어 버리면서 자연스럽게 이집트의 덤인 수단 북부의 덤으로 따라오게 되나, 1894년 수단의 수도인 하르툼에 영국의 손길이 뻗쳤을 때 남부의 파쇼다에서는 프랑스 국기가 올랐고, 이것이 바로 파쇼다 사건(1898년)이다. 결국 이 문제는 좋게 말해 외교적 협의, 바로 말해 해군력이 대폭 밀렸던 프랑스가 손을 떼면서 일단락 되었다. 나일강과 콩고강의 중점이 양국의 경계가 되었다. 파쇼다는 남수단 북동부에 있는 지금의 코도크(Kodok)다.
사실 수단이 독립을 할 때부터 이 나라의 독립을 주도한 유학파 출신 엘리트들은 이질적인 여러 부족이 사는 거대한 나라에서 발생할 문제는 무시한 채 북부 아랍 문화와 남부의 흑인 누비아 문화가 어떻게든 잘 조화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
2.4. 현대
독립 이후 15년간 1차 내전으로 백만 명이 죽었다. 결국 1978년에 남북끼리 따로 분리하려고 했다가, 남부 수단에서 석유 및 자원들이 가득 발견되면서 분리 문제는 다시 백지화 되었다.
1983년에 수단인민해방군(SPLA)이 궐기하여 2차 내전이 일어났고, 20년간 내전이 줄곧 지속되었다. 2003년 수단 서부에 위치한 다르푸르에서 아랍계 민병대 잔자위드가 무장 봉기 세력을 무차별 학살, 강간하여 '''30만 명의 희생자와 270만 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수단 내전 당시의 참상을 찍은 사진들 중 유명한 사진이 있다. 1993년 2월 남수단 아요드 지방에서 사진기자 케빈 카터가 찍은 사진으로 1994년 퓰리처상 보도사진 부문을 받은 수단 아이를 기다리는 독수리'이란 사진이다. 굶주림에 지쳐 쓰러진 소녀를 독수리가 지켜보는 장면으로, 내전 당시의 참상을 상징적으로 포착한 동시에, 사진 기자로서의 윤리에 대한 논란으로 숱하게 인용한 문제의 사진이다. 다만 워낙 이 사진에 대한 이야기가 유명한 통에 여러 가지 루머가 퍼지기도 한다.
2차 내전으로 국제적 비난이 거세지자 결국 수단이 공격을 일단 중지했고, 여러 시행착오 끝에 투표가 이뤄졌다.
당시 수단 대통령이었던 오마르 알 바시르 대통령은 1989년 쿠데타로 집권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2004년 유엔 평화 유지군 주둔 이후 다르푸르 학살 때의 인종청소 및 전범 혐의로 국제형사법원의 체포 영장을 받았다.
남수단 독립 투표는 2011년 1월 9일 일주일간 진행되었고, 투표 3일만에 60%의 투표율을 돌파하였다. 개표 결과 찬성 표가 무려 98.83%에 달해 7월 9일 정식으로 수단에서 분리 독립하였다. 국제 사회의 승인 과정에 대해서는 남수단/독립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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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마차르의 부통령 취임식 때의 사진. 왼쪽부터 부통령이자 반군 지도자 리에크 마차르, 대통령 살바 키르이다.
살바 키르 대통령의 트레이드 마크인 카우보이 모자는 조지 W. 부시가 준 것이라고 한다.
2011년 7월 9일 정식으로 독립을 선포했고, 초대 대통령은 그동안 수단 부통령으로 있던 살파 키르 마야르디트(Salva Kiir Mayardit). 가톨릭계이자 1983년 수단인민해방군을 세운 존 가랑이 2005년 의문의 헬리콥터 사고로 죽자 2인자인 뒤를 이은 사람이다. 남수단은 UN(국제연합) 기준으로는 193번째 독립국가이자 유엔 회원국이다(2011년 7월 14일 가입). 수단이 독립 직후 남수단을 국가로 인정하고 남수단의 독립 선포식에 수단 대통령이 직접 찾아가 독립을 축하하는 등으로 문제는 일단락은 되었다.
수단에서 독립한 이후에 잘 될 줄 알았으나, 남수단 초대 대통령인 살바 키르 마야르디트가 헌법을 개정하여 자신의 권력을 엄청나게 강화하여 독재를 시작하는 막장 짓을 저질렀다. 결국 제2차 수단 내전 당시에 수단과 무장 투쟁을 했던 다른 반군과 민주화를 추구하는 반군들이 부통령인 마차르를 중심으로 모여 치열한 내전을 벌이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그 악명 높은 내전인 남수단 내전이다. 그렇게 대통령 세력과 부통령 세력으로 나눠진 반군들의 극심한 내전은 2013년부터 시작되어, 남수단 국민들 수만 명이 숨지고 최소 220만 명의 피란민이 발생하며, 2014년 소말리아를 제치고 '세계 최악의 파탄국가'라는 타이틀까지 거머쥐게 돠었다. 이후 유엔과 서구 열강의 중재하에 2015년 8월 평화 협정을 맺었으며, 2016년 4월 반군 지도자였던 마차르가 부통령을 맡는 연립 정부를 구성해 정국이 안정되는 듯 했으나... 2016년 7월에 대통령과 부통령의 경호원들이 무력 충돌을 하며 또 다시 내전으로 번질 가능성이 생기고 있다.
그 와중에 조지 클루니가 세운 센트리에서 남수단 높으신 분들이 내전을 이용해서 부를 축적했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 남수단은 4년째 이어진 내전으로 어린이 난민이 200만 명을 넘어섰다. #
2019년 4월에도 앙숙인 살바 키르 대통령과 부통령 출신의 반군 지도자 리크 마차르가 연립 정부를 구성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2020년 2월 22일에 남수단 정부와 반정부 세력이 참여하는 과도 통일 정부가 출범되면서 사실상 내전이 종식되었다. # 부통령에는 반군 지도자가 취임했다. #
5월 20일에 남수단에서 무를레족과 누에르족 사이에서 충돌이 발생해 수백 명이 사망했다. #
2020년 8월 12일에 군인들이 민간인들을 무장 해제하는 과정에서 물리적 충돌이 일어나 127명이 사망했다. # 8월 31일. 반군 세력과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 #
3.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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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은 62만km2(세계 45위)에, 인구는 1,100~1,300만 가량으로 추산된다. 면적과 인구가 원래 수단의 1/4을 차지한다. 현재 남수단의 면적은 한반도(22만km2)의 3배는 족히 된다. 더불어 '''내륙국이다.''' 동으로는 에티오피아, 서로는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남으로는 우간다와 콩고민주공화국, 케냐에 접한다. 수단과의 국경은 1,000km에 달하는데, 이게 앞으로 골치. 그러나 남수단 내전으로 국가가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져 버렸다.
여담으로 남수단의 독립으로 아프리카 최대 면적에 세계에서 10번째로 큰 나라였던 수단(당시 250만km2)은 알제리(238만km2)에게 자리를 넘겨주게 되었다. 현재 수단의 면적은 세계 16위.
4. 군대
수단 내에서 독립 투쟁을 하던 수단인민해방군(Sudan People's Liberation Army, SPLA)이 그대로 남수단군이 되었다. 개인 병사의 실전 경험은 높지만, 개인 화기를 빼면 아무것도 없었다. 따라서 북부의 수단군이 작정하고 쳐들어 올 경우에는 체첸 전쟁 시즌 2편을 찍을 게 명백했고, 결국 남수단군은 전력 증강의 필요성을 느꼈지만 말처럼 쉽지가 않다.
독립 직후 러시아로부터 Mi-17 10대를 구입하여 인도 받았으며, 공군력은 이게 전부다. 이 Mi-17이 수송용으로 개조된 V-5 버전임을 생각해보면 남수단의 공군력은 그냥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 아랍 연맹의 지원 아래 MiG-29를 비롯한 전투기들을 대거 보유한 수단 공군에 견주면 열세가 명확한 상황. 수단 공군의 폭격을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아 본 남수단에서도 이를 모르는 바는 아니겠지만, 아직까지 본격적인 공군력 증강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있다. 남수단을 인정하는 나라들도 섣부른 군사 지원을 하지 못하고 있고.
기갑 전력도 현저한 열세를 보이기는 마찬가지라, 200대가 넘는 전차와 다수의 장갑차를 보유한 수단군을 상대로 내놓을 수 있는 카드는 T-72 100여 대가 고작이다. 장갑차는 아예 없으며, 그 자리를 테크니컬이 메워주고 있는 상황. 정해진 제식화기는 없지만 대체로 FN FAL과 H&K G3이 주로 사용된다.
5. 경제
내전으로 무너진 경제가 회복되지 않고 있어 답이 없는 상황. 1인당 GDP는 2019년 IMF 추산치 기준 276달러로 세계에서 가장 낮으며, 국민의 90%는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살아가고 있다.
수단 석유의 85%가 남수단 지역에서 나왔고, 정부 수입의 98% 이상이 석유에서 나왔다. 그러나 석유를 정제할 시설도 없고, 내륙국 신세이니 당연히 항구도 없다. 결과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취약한 경제를 가진 나라로 평가받고 있다. 교통 사정도 형편 없어 철도도 수단으로 통하는 248km짜리 협궤 하나밖에 없고, 석유를 수출할 파이프라인도 수단의 유일한 항구인 포트 수단으로 가는 한 가지 파이프라인밖에 없다. 길의 거의 대부분은 포장되지 않아 수도 주바에서 다른 나라로 가는 포장된 길은 하나도 없다. 독립하자마자 물가가 미친 듯이 폭등하고 있고, 혼란상으로 개발도 어려운 상황. 수도 주바는 세계에서 4번째로 물가가 비싼 도시라고 한다.[2]
하지만 한때는 자원도 풍부하고, 농산물도 자급자족했던 나라다. 특히 남수단의 원유는 원래 수단의 75% 정도인 46억 배럴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또 다르푸르를 제외[3] 하면 사하라 사막이 국토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수단보다는 상황이 좋다. 다만 최근엔 내전 등의 영향으로 영 상태가 좋지 않다. 물론 그게 독립 이후에도 우려되는 혼란의 원인이 된다. 2012년만 해도 기근으로 50만 명의 수단 난민이 남수단으로 흘러들어왔다. 그러나 내전과 사막화로 인해 남수단도 식량이 점점 부족해져, 2012년 현재 470만 명이 식량 원조를 필요로 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더군다나 몇 년 동안 원유 생산이 중단되었다.
6. 사회
6.1. 민족
이슬람을 믿고 아랍화된 흑백 혼혈 아랍인 위주의 수단과 달리 남수단은 기독교 60.5%, 토속신앙 32.9%인 나일로트계 흑인들로 이루어졌다. 수단이 아랍어권에 해당한다면 남수단에서는 주로 나일사하라어족에 속하는 여러 부족어를 사용한다. 남수단인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딩카족과 누에르족은 평균 키가 매우 크다. 사실 누에르족과 딩카족뿐만 아니라 나일사하라어족군의 나일로트계 민족 자체들이 엄청나게 '''키가 크다.''' 1953년 딩카족의 평균 신장(남성과 '''여성''' 모두를 포함한다)은 183cm이다. 유럽 내 장신 국가들인 북유럽, 독일, 네덜란드, 구 유고슬라비아 지역 남성(20~24세)의 평균 신장이 최신 버전으로 최소 170cm대 후반, 최대 183cm 전후인 것, 남수단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라서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는 나라라는 점을 감안하면 어마어마하게 큰 수치. 그런데 1995년 조사에선 10대 소년부터 노인을 포함한 딩카족 남성의 평균 신장이 177.4cm까지 줄어들었는데, 전쟁과 기근의 영향으로 추정된다. 다만 아직까지 20~24세를 기준 평균 신장은 185cm를 넘기는 장신을 갖고 있다. '''딩카족이 포함된 나일로트계 민족은 대체적으로 남성과 여성의 합친 평균 신장이 180cm을 넘어가는 아프리카 장신 부족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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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 구호 물품을 받으러 나온 여성들.
그리고 옆으로는 다소 가는 뼈대이다. 길고 가는 체형. 알렉 웩, 더키 토트 등을 비롯해 남수단(을 포함한 동부 아프리카 흑인들) 출신들이 패션 모델로 성공한 경우가 다 이유가 있다.[4]
또한 누에르족과 딩카족을 포함한 남수단인들은 흑인들 가운데에서도 독보적으로 피부색이 검다. 완전한 흑색. 위쪽의 독립 선포식 때 사진이나 아래의 마누트 볼을 참고해보자.
6.2. 언어
공용어는 영어이고, 일부 소수 민족의 언어도 사용되고 있다. 현재에도 아랍어 구사 가능자가 많이 존재하지만, 독립 이후 공용어에 포함되었던 아랍어는 퇴출되었다. 일단 북수단과 갈라진 계기가 종교와 인종 갈등이기 때문에 북수단의 정체성과 결부되어 있는 아랍어가 달갑지는 않은 듯. 남수단은 남수단어라는 언어를 개발 중이다. 하지만 이것도 어려운 게 이 언어도 영어 위주이고, 남수단에서 인구 많은 딩카족 위주로 쓰이던 딩카어 용어를 토대로 표준어로 정하려고 하기에 다른 다수 민족인 지에족이나 무를레족은 이럴 바에는 그냥 영어 쓰던지 차라리 아랍어 쓰자고 결사반대하고 있다. 부족 갈등이 언어 문제에서도 영향을 끼치고 있는 셈.[5] 기타 유력 종족의 부족어 외에 수도인 주바에서는 아랍어를 바탕으로 하여 많이 간략화되고 각 부족어의 영향을 받은 크리올어인 주바 아랍어가 사용되고 있으며, 그 밖에 스와힐리어 쪽에도 접근하고 있다.
7. 문화
7.1. 스포츠
영국으로 귀화하여 NBA 시카고 불스에서 맹활약하고 농구 약체인 영국의 2012 런던 올림픽 선전을 이끈 루올 뎅(키 206cm)이 바로 남수단 딩카족 출신이다. 루올 뎅 이전에는 딩카족 출신의 NBA 역사상 최장신 선수 중 1명인 마누트 볼(231cm)이 있었다. 난민 자격으로 오스트레일리아 국적을 획득한 밀워키 벅스의 쏜 메이커(키 216cm)도 남수단 딩카족 출신이다.
2012년 5월 FIFA에게 209번째 정식 가입국으로 인정받았다. 축구 국대에 대한 사항은 남수단 축구 국가대표팀 문서 참고.
2021년 기준 대한민국 3부 축구 리그인 K3리그 울산시민축구단에서 해당 국의 성인 & 유소년 국가대표 선수인 마틴 사위(99년생)와 팔 폴 퍽 쿤(00년생)이 뛰고 있다. 이전에는 현 K4리그 참가팀인 고양시민축구단과 K3리그 참가팀 양주시민축구단에서 뛰고 있었다.
육상 대표팀이 2019년부터 2020년 도쿄 올림픽 대비를 위해 마에바시시에서 장기 훈련을 받고 있었는데, 코로나19로 인하여 올림픽이 연기되자 도쿄 올림픽 종료 때까지 1년 더 남아 있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
7.2. 여아 선호
딩카족 사회는 지구상의 문화권과 마찬가지로 남성이 사회를 통치하는 남성 중심의 문화이다. 사실상 일부다처제와 여성의 사회 활동이 극히 제한된 아프리카에 내전으로 여성이 살기 힘들다는 말이 사실이다.
하지만 출생에서는 딸을 더 선호한다. 아들은 지참금이 나가는 짐이지만, 딸은 길러준 보호자가 신랑집에서 지참금을 받는 돈줄이기 때문이다. 내전 상황에서 수많은 고아들이 생겼을 때도 여아들은 친척에 이웃, 심지어는 일면식도 없는 남이 서로 데려가려고 하지만, 남아들은 거의 고아원행이라고 한다. 남아들은 가난으로 옷도 없어 발가벗고 다니기도 하지만, 여아들은 몸값을 높이기 위해 가난한 와중에도 화려한 옷, 그게 아니면 최소한 깔끔하게 세탁이 된 옷을 입힌다고 한다.
하지만 지참금은 친정에만 지급되기 때문에 결혼 당사자인 신부는 돈은 구경도 못 해보고, 시집 간 처가에서 그 비용만큼 고된 노동과 시집살이를 하게 된다...[6]
8. 상징물
8.1. 국호
독립이 논의되던 당시 여러 가지 국명이 제안되었으나, 부족들이 서로 자기들 언어와 뜻이 담긴 나라 이름을 고집하여 결국 '''친숙하고 부르기 쉬우며 모든 부족이 동의할 만한 것'''이라는 이유로 남수단 공화국이 정해졌다. 그동안 여러 기사에서 수단 남부라는 이유로 남수단이라고 부른 것의 영향이 큰 듯하다.
남수단 공화국이라는 국명이 정해지게 된 이유는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대한민국이 일조한 바가 있다. 남수단 독립 준비 위원회의 벤야민 머리얼은 발표를 하면서 '''"남베트남, 북베트남도 있었고, 남한과 북한도 있는데 남수단/북수단도 불가능하지 않다."'''라고 덧붙였다. 물론 결정적 요인은 아니다. # 왜냐하면 이런 종류의 이름들, 즉 남한, 북한, 동독, 서독, 남예멘, 북예멘 등은 대부분 통칭이지 정식 국호가 아니기 때문이다.[7][8] [9]
남수단 최대 부족인 딩카족이나 일부에선 구드(Gud) 공화국이라는 이름을 주장하기도 했으나, 다른 부족에선 구드 공화국이라는 명칭이 '''딩카의 땅'''이라는 뜻이라는 이유로 결사반대하여 결국 이 이름으로 결정났다.
국민들의 의사와는 관계 없이 외세의 강압 등으로 분단 및 분할된 한국과 베트남과는 달리 남북수단은 '''현지 국민들의 자의적인 독립 및 분할 의사와 국민투표를 통해서 자발적인 분할 및 분리'''에서 나왔기 때문에, 원치 않는 이유로 나뉘어 통일을 지향하는 개념의 분단국가와 다를 것이다. 국민투표와 그들의 사회적인 의사와 이슬람 성향과 기독교, 토속 성향이라는 차이로 인해서 남북의 분할을 염원했던 남북수단과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8.2. 국기
국기 위쪽의 검은색 줄은 아프리카인, 사이의 흰색은 평화, 가운데 붉은 줄은 독립을 위해 흘린 피, 아래의 녹색 줄은 풍요로운 자연, 파란 삼각형은 나일 강, 노란 별은 자유를 의미한다.[10] 정확히는 나일강의 상류 지류인 백나일강이 지나고, 에티오피아를 지나는 청나일강과 수단에서 합쳐진다.
9. 국가
남수단의 국가 South Sudan Oyee! (남수단 만세)
10. 외교
11. 문제점
11.1. 끝나지 않은 남북 갈등
일단 수단과 결별하긴 했지만 갈등이 봉합된 건 아니다. 독립 투표가 이뤄진 2011년 1월 10일에도 남북 국경선에서 총격전이 벌어져 남수단에서만 33명이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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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하루 전인 2011년 7월 8일 기사. 공교롭게도 중간에 유전지대인 아비에이(Abyei)가 있다.
마지막 유전인 아비에이 등을 수단이 과연 포기할지도 의문이다. 아비에이는 건기에만 남하하는 유목민 인구가 절반을 차지해 이들을 유권자로 포함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남수단 입장에서는 최대 부족 딩카족의 발상지라 쉽게 포기할 수는 없다. 2011년 5월 20일, 남수단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아비에이 유전지대를 수단 군대(SAF)가 점령하고, UN 헬기까지 공격하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6월 20일 남아공 대통령 타보 음베키의 주도로 협상을 가져 아비에이 지대를 비무장지역으로 만들기로 합의했지만, 이게 과연 얼마나 지켜질 지 의문. 일단 유엔 평화유지군이 주둔 중이다.
남수단에 살고 있는 이슬람을 믿는 부족 및 소수 독립 반대파들에 대한 처리도 문제시된다. 유목민들이 아비에이 이남으로 내려오는 경우도 많고, 물 문제로 인구는 줄곧 남하하는 형편이었다. 이들을 무력으로 뭉개면 피해자라고 주장하던 남수단의 입지가 타격을 받기 때문이다. 그나마 아랍권이 2010-2011 아랍권 민주화 운동으로 인해 제 코가 석자라고 수단 문제에 끼어들긴커녕 자국 문제에 급히 신경 쓰는 상황이 되면서 남수단에선 호재가 되었다. 이미 수단도 89년 쿠데타 이후 22년째 집권하는 오마르 알 바시르에 대한 반발이 거세기 때문에, 한동안 자국 안정화에 신경 써야 할 판국이다. 수단의 알 바시르는 1989년부터 세계 10대 독재자 순위에 포함돼, 2007년에는 독재자 순위 1위에 오른 경력을 가지고 있다. 수단 내에서도 반정부 세력이 늘어나고 있기에 남수단 일에 질기게 매달릴 수도 없다.
뒤에 보듯 유전은 남수단에 있는데 정유공장, 파이프라인, 석유 수출 항구는 수단에 있어서(나일강의 입장으로 볼 때 상류가 남수단, 하류가 수단) 이 배분 문제도 남아있다. 독립 협상이 진행되던 2005년까지는 수익을 반씩 나눠먹었지만 지금부터가 진짜 문제다. 수단은 남수단의 독립으로 앞으로 4년 반 동안 재정에서 52억 달러가 빠지게 된다. 그래서 수단은 103억 달러를 보상으로 요구했다.
독립 이후에도 남수단과 수단은 석유가 풍부한 국경지대를 가지고 니꺼 내꺼 하면서 계속 싸워왔다. 남수단은 수단 내의 무장세력을 지원하거나 국경을 넘어 수단군을 공격했고, 이에 수단군은 우세한 공군력을 이용해 남수단을 폭격했다.
2012년 3월 26일, 독립 이후로 헤글리그의 소유를 주장해오던 남수단군은 석유가 풍부한 국경지대 마을인 헤글리그(Heglig)를 공격하여 점령했으나, 확전과 국제 사회의 압력을 두려워하여 2일 만에 병력을 철수시켰다. 하지만 수단군은 남수단군의 공격을 선전포고로 간주하고 남수단에 대해 폭격을 개시함과 동시에 여러 국경지대를 공격했다.
2012년 4월 11일 남수단과 수단군이 본격적으로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남수단군이 기습으로 헤글리그를 일시적으로 점령했지만 수단군의 공습이 이어졌고, 23일까지 수단군의 발표에 의하면 남수단군은 3천 명 이상이 전사했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남수단도 전사자 3백 명도 되지 않으며 폭격에 굴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으나, 헤글리그 지역은 양군이 무장하여 외신 기자를 일절 출입을 거부하고 있는 상태라서, 자세한 피해 및 어느 군이 유리한지는 아직 모르고 있다. 다만 외신보도 추정으론 압도적인 전력을 가진 수단군이 헤글리그 지역에 배치되어 있으며, 적어도 남수단군 피해 규모가 압도적인 게 맞다고 하는 분석이다. 곧이어 23일에는 남수단 내 도시인 벤티우를 수단 공군이 폭격을 감행, 민간인 16명이 사망했다.
덤으로 남수단은 이웃 케냐와 영토 분쟁을 벌이면서 케냐군과 총격전을 벌였기에, 케냐와도 사이가 그리 좋지 않다. 딩카족 피난민으로서 미국에 이민 가서 정착에 성공한 이가 미국 작가와 공동 집필로 쓴《신이 찾은 아이들》에 따르면, 케냐로 피난 간 남수단 난민들은 케냐 경찰과 군인들에게 난민촌에서도 허구헌 날 약탈당하고 대들다가 사살당하면서 죽기까지 했다. 앞서 말한 중국의 송유관 문제를 두고 더 벽에 부딪친 것이 케냐와의 국경 문제인데, 남수단은 케냐 측의 국경에서 약 13,300평방 킬로미터 땅을 돌려달라고 요구하고 케냐는 결사거부하고 있으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송유관을 허용할 수 없다며 맞서고 있다.
11.2. 남수단 내 부족 갈등
그나마 수단과의 갈등은 국제 사회가 중재라도 할 수 있고, 수단 내부에서도 남수단 문제는 부차적인 걸로 취급돼서 심각하지는 않지만, 부족 갈등이 폭발한 것이 더 큰 문제다.
우선 학살이 일어난 다르푸르의 경우, 다르푸르 독립군이 남수단 수단인민해방운동(SPLM)과 전혀 다른 조직이기에 2010년 2월의 정의, 평등 운동 평화협정(JEM)이 쉽게 뿌리 내리지 못하고 있다. 그 외 남코르도판과 블루나일도 평화유지군이 주둔하고 있는 곳이다.
남수단 내부의 부족 갈등은 독립 이전부터 이미 심각한 수준이었다. 30여 년이 넘는 내전과 그 이전 100년 이상의 사실상의 전쟁 시대에 잔자위드(아랍계 민병대)와 젤라바[11] 의 대대적인 학살 와중에도 여러 부족끼리 서로 죽어라 싸웠으며, 몇몇 부족은 다른 부족을 뭉개고자 젤라바와 손 잡는 경우도 흔했다. 심지어 수단 공군의 공습을 받아가면서도 부족들끼리 서로 총질하고 있을 지경으로 부족들의 갈등이 엄청나다. 그 감정이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어 남수단의 미래가 암울하다.
독립 이전인 2009년 9월만 해도 한 번에 167명이 테러로 죽었으며, 결국 2009년 한 해 동안 2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내전으로 목숨을 잃고 난민도 3만 명이 넘는 상황. 해를 넘긴 2010년 6월에도 해외 기자들은 부족들 갈등으로 목숨을 잃은 이들 집단 장례식을 취재했는데, 생존자들은 다른 부족들에게 복수를 외치면서 내전이 계속될 걸 보여주었다. 남부 수단 여론은 이런 갈등에 수단이 배후 조종을 한다고 비난한다. 틀린 말도 아니지만 과거 영국 식민지 시절, 이간질로 만들어낸 갈등이 대를 이어 남은 것도 엄청나기에 꼭 수단 탓만을 할 수도 없다. 사실 영국의 이런 이간질 수법은 대영제국 시대 많은 식민지에서 흔하게 벌어진 일이다. 한 부족에게 더 이득을 주면서 다른 부족들이 영국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그 부족에게 가게 하는 방법. 벨기에가 르완다 및 콩고에서 벌여놓은 짓이나 프랑스가 카메룬 및 알제리에서 벌여놓은 짓처럼, 유럽 열강이 아프리카 곳곳 및 전 세계 식민지에서 자주 저지른 짓이다.
2011년 3월 12일 수드 습지를 두고 무를레족과 남수단 내 최대 민족인 딩카족이 무력충돌을 벌였다. 비가 오면 남한의 절반만한 큰 습지대가 되면서 온갖 동식물이 많이 분포하는 이 곳은 물이 부족한 남수단에서는 소를 키우자면 절대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그래서 이곳을 두고 부족들의 갈등은 오래전부터 문제가 되어왔다. 독립 이전부터도 이 지역의 지배권을 두고 영국도 골치 아파했을 정도라고 한다. 여기에 백나일 강을 두고 역시 부족들끼리 서로 충돌을 벌이며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소를 많이 기르는 여러 부족들에겐 강은 절대 양보할 수 없기에, 강의 실질적 지배권을 두고 지속적으로 총격전이 벌어져 민간인들이 40여명 살해되었고, 보복으로 공격을 감행한 지에족 마을에 무차별로 로켓포 공격을 벌여 100여 명 사상자를 냈다. 세계가 도호쿠 대지진과 오디세이 새벽 작전에 더 신경을 쓰느라 알려지지도 않았지만.
한국에서도 번역 된 《신이 찾은 아이들》이란 책자를 보면 딩카족의 개신교 소년 존이 겪은 이야기들이 생생하게 나와있다. 이 책에는 수단의 무차별 학살적 공격과 같이 부족 갈등도 나와있는데, 다른 부족 아이들 고아를 납치하여 맹수 먹이로 던져주는 일[12] 까지 있을 정도로 부족들의 갈등이 깊고 악랄했다고 한다.
2012년 1월 무를레족과 누에르족의 부족 갈등으로 대규모 유혈 사태가 일어났다.
수자원 봉사단체인 팀 앤 팀에서 남수단 한 마을에서 우물 펌프를 설치할 당시 겪은 일인데, 딩카족이 다수인 그 마을에서 소수로 살고 있던 주변 지에족이 봉사단체 사람들과 절친하게 굴면서 펌프 수리 기술이나 여러 가지로 더 배우려고 한 적이 있었다. 이들과 친해지면서 열심히 하신다고 말하자 나오던 답변이 "이렇게라도 안 하면 딩카 놈들이 우릴 죽이려 들기 때문이라오. 우리가 기술력을 가져서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된다는 걸 알게 해줘야지." 이에 봉사단체 사람들은 할 말을 잃었다고.
울지마 톤즈 연출을 맡은 구수환 PD가 후속 이야기를 다룬 울지마 톤즈-그 후 선물을 찍으러 2011년에 남수단을 방문할 당시에도 톤즈 지역에서도 치안이 장난 아니었다고 한다. 톤즈 이웃 동네에서 소 1마리 때문에 사람이 20여 명이나 죽을 정도였다. 부족 갈등도 갈등이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같은 부족도 마을끼리 서로 도둑질하고, 그 과정에 따른 살인 및 보복으로 마을이 아주 불바다가 될 정도이니 이러한 갈등으로 인해 내부 치안 상태가 영 좋지 않다.
- 캐나다 외무부의 남수단 설명. 위험도가 가장 높은 4단계(방문을 피해 주십시오)로 되어 있다. 한 마디로 가지 말라는 소리.
- 호주 외무부의 남수단 설명. 위험도가 가장 높은 4단계(방문하지 마십시오)로 되어 있다.
11.3. 내부 종교 갈등
부족 갈등과 같이 앞서 말한 종교적 문제도 골치 아프다. 남수단 인구의 80% 이상이 기독교를 믿지만 성공회와 개신교, 가톨릭이 복잡하게 얽히고 이들이 내전 와중에 같은 기독교도끼리도 종파가 다르면 죽어라 싸우거나 사이가 나빠 다른 부족의 약탈 및 학살이 줄곧 일어났다. 젤라바와 잔자위드가 자행하는 학살도 자신들이 당하지만 않으면 외면하는 게 흔했다. 심지어 기독교 믿는 일부 부족은 젤라바를 불러와 젤라바를 돕겠다는 조건으로 사이 나쁜 다른 기독교 부족 거주 지역을 불바다로 만들고 학살하게 만들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 밖에도 젤라바에게 학살된 다른 부족 난민들이 도움을 요청할 때 외면하곤, 그 난민들이 국제 구호품을 받게 되자 되려 총기나 무기를 들고 약탈하는 일도 꽤 자주 벌어졌다고 한다. 팀 앤 팀 한국지부가 남수단에 가서 수도 공사를 하다가 겪은 일인데, 소들을 방목하는 곳을 차타고 지나보니 무장한 사내들 수십여 명이 잘 구축된 진지에 기관총과 박격포까지 방렬시켜놓고 사주 경계를 하고 있더란다. 무슨 군대라도 온 거냐고 물어보니 통역이 하는 말 '''"저 자들은 그냥 목동입니다. 여기선 목동이 이 정도 무장도 안 하면 가축 다 뺏겨요."''' 그야말로 전격 삼국지.
이러니 힘을 합쳐 싸우자는 의견은 좀처럼 통하지 않아 오랫동안 수단에게 동네북처럼 당했다. 그나마도 수단도 내부에서 같은 이슬람끼리 싸움이 벌어지고 여기에 이집트 등 주변국과의 관계도 좋지 않은[13] 등의 문제로 인해 전적으로 남수단 문제에 집중할 수 없기에 이만큼 저항할 수 있었던 것.
여기에 고유 신앙을 고집하는 부족에 이슬람을 믿어서 젤라바를 돕던 부족들도 있고, 당연히 이들은 기독교를 믿는 부족들에게 적대적이다. 즉 나머지 20% 다른 종교를 믿는 부족들이 차별 및 학살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수단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11.4. 내부 군벌 갈등, 남수단 내전
더불어 같은 부족에 종교라고 해도 세력권 때문에 군벌을 이뤄서 또한 서로 죽어라 싸운 경우도 적지 않아서 골칫거리가 한둘이 아니다. 덕분에 국토 장악력이 강하지 못하고 남수단을 강력하게 통합하게 이끌 지도자가 드문 것도 문제.
여기에 정부군 편성이 문제가 되고 있다. 왜냐면 정부군 장교들과 군벌들과 친분에서 여러 가지로 정부군 편성도 이뤄지지 않는 상황이다. 여러 군벌들이 난립한 상황에서 이렇듯 같은 기독교고 뭐고 일단 권력을 위하여 수단의 힘을 빌리는 일도 얼마든지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군도 엉망이다. 그 밖에 군 문제 말고도 다른 국가를 이루는 모든 분야에서도 저런 문제는 곪고 있다. 어차피 정부군이래봤자 치안 유지도 못하고 각 부족이 자발적으로 자경단으로 치안 유지를 하고 있지만.
2011년 2월 17일에는 남수단 용레이 지역에 반군이 여러 마을을 무작정 공격하여 211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죽었다. 이 반군 세력을 이끄는 것도 기독교인 조지 아서(또는 아투르, 아르투르) 대령이라고 한다. 이전부터 수단의 지원을 받아 강력하게 무장하고 제법 세력을 강력하게 이끌던 그는 용레이 주지사 선거에 나섰다가 선거에서 지자 휘하 부대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2월 25일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남수단 임시정부군이 파병되었으나, 용레이 인근의 히자두 지역의 군벌을 이끄는 리처드 아시킴가 준장이 정부군의 통과를 거부했다. 정부군을 이끄는 가브리엘 마얌바 대령이 아시킴가와 개인적 친분이 있어서 그냥 넘어갔다. 결국 여전히 조지 아서는 무사했다.
4월 20일에 반군과 정부군의 충돌로 군 20명이 사망하였는데, 이미 2011년 4월까지 8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그나마 12월 20일에 조지 아서는 정부군에게 휘하 부대가 진압되면서 사살당했다. 하지만 다른 군벌 세력도 남아있는 남수단에서 여전히 군벌과 내전은 뺄 수 없는 위험이다.
2013년 12월 전 부통령을 중심으로 쿠데타 시도가 있었다. # 아직도 교전이 벌어져 수도 주바에 400여 구의 시신이 실려왔다고 한다. # 그리고 결국 이러한 갈등은 내전으로 이어졌고, 결국 악명 높은 남수단 내전이 발발했다.
남수단 내전이란 2011년 수단에서 독립을 쟁취한 남수단에는 키르 대통령에 충성하는 정부군과 리에크 마차르 전 부통령을 따르는 반군 사이에 전투가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내전을 말한다. 내전은 키르 대통령이 속한 딩카족과 마차르 부통령이 속한 누에르족의 전면전으로 번졌다.
국제연합(UN) 통계에 따르면 수만 명의 사람들이 내전으로 사망했으며, 2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전쟁을 피해 남수단을 떠났으며, 남수단은 수 년간 이어진 내전으로 무지막지한 기근에 시달리고 있다. 2013년 12월 15일 딩카족으로 이뤄진 정부군과 누에르족으로 구성된 반군이 소규모로 접전을 벌이다 내전이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대통령과 부통령 사이의 긴장이 이들의 충돌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남수단에 내전이 발발하고 몇 시간만에 정부를 지지하는 병력이 주바를 장악하면서 시민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했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당시 35세였던 모니카의 남편은 그녀 앞에서 총을 맞고 죽었고 자신은 강간을 당했는데, 그녀는 이 때 당시를 이렇게 증언했다.
심지어 저 여자는 강간을 당했을 때 임신 5개월째였다. 성폭행을 당하고 3달 후에 그녀는 아이를 잃었고,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 살고 있다. 그 외에도 온갖 종류의 학살과 고문을 비롯한 전쟁 범죄가 저질러지고 있다. 반군들은 잔혹해서 남자아이는 거세를 하여 피를 흘려 죽게 했고, 여자아이들은 집단 강간한 후 살해했다는 것이다. 아이들을 죽이는 방법도 잔인하여 묶인 채로 참수당하고, 불타는 건물에 던져 죽임을 당한 아이들도 있었으며, 어린아이 앞에서 그의 가족들을 무참하게 강간하거나 살해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말한다. '''문제는 이 짓거리를 반군만 하는 게 아니라 정부군도 한다는 것이다.''' UN남수단임무수행단은 2015년 6월 29일자 긴급보고서를 통해 정부군과 정부군을 지원하는 민병대원들이 성인 여성과 어린 소녀들을 집단 성폭행한 뒤 현지인들의 오두막집인 투쿨수에 가두고 불태워 죽인 사건이 최소한 9건 이상 확인되었다고 밝혔다. 또한 3살밖에 안 된 딸 앞에서 성폭행을 자행하고, 젖을 먹이던 여성으로부터 아이를 떼어내 내동댕이 치고 집단 강간하는 등의 미친 짓이 저질러진다고 한다. 또 반군의 소재를 추궁하고, 가축을 숨겨놓은 장소를 알아내 약탈하기 위해 벌겋게 불에 타는 석탄을 여성의 손 위에 올려놓고 주먹을 강제로 쥐게 하고 고문까지 저질렀다는 증언도 나왔다."군인들은 문을 발로 차고 집 안으로 들어왔어요. 총대로 나를 때리고 누우라고 명령했어요. 남편에게는 총에 대해 물었지만 남편은 총도 없었어요. 우리가 어떤 부족인지 물어보고 나를 돌아가며 강간했습니다. 몇 명이나 되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아요. 그 다음엔 내 남편을 죽였습니다."
이러한 막장 짓거리에 남수단인들은 살기 위해 도망을 가게 되었다. 이에 '''무려 100만 명 정도의''' 남수단인들이 이웃나라로 빠져나갔으며, 심지어 일부는 자신들을 학살했던 수단으로 탈출하기도 했다. 문제는 이렇게 도망친 사람들이 간 나라가 모국과 다를 게 없는 막장 국가들이다 보니 차별을 받고 살며 그곳의 반군에게 살해되거나, 어린아이들은 소년병으로 징집 또는 강간을 당하는 상황에 처한다고 한다. 이러다 보니 다른 사람들은 이른바 남수단 난민 캠프로 이동하여 살아가는데, 이곳의 사정 또한 영 좋지 않다. 만약 남수단에 폭우가 내리면 구호물자 운반이 어려운 상황이 되어 매일 한 그릇밖에 안 되는 옥수수죽밖에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남수단 난민 캠프의 사정은 열악하기 짝이 없다.
또한 유엔군이 주둔하는 지역에 마련된 캠프에서도 사람들이 안전한 것은 아니다. 남자들은 할 것이 없다 보니 술과 마약에 찌들어 각종 문제를 일으킨다. 특히 여자들을 강간하거나 폭행하는 막장 짓거리가 저질러진다고 한다.
"주로 야간에 여성을 대상으로 폭력이 일어나기 때문에 밤에 목욕을 하거나 화장실을 가는 것조차 무서워하는 여성들이 많습니다. 혼자 사는 여성들은 끊임없이 남자들에게 폭행당하고 있고, 아주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남수단 내전 당시 간호사로 치열한 격전지 중 하나인 벤티우 인근 유엔보호구역에서도 일했던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이 있는 곳에서도 하루도 빠짐 없이 총격전이 벌어졌고, 폭격을 피해 셀 수 없이 벙커로 피신해야 했다고 증언했다. 특히 그녀가 일했던 유엔보호구역은 우기가 되면 늪지대로 변해버리는 곳에 있었는데, 전쟁을 피해 보호 구역으로 들어온 수천 명의 난민들 사이에는 호흡기 질환과 피부병이 흔했고, 말라리아와 홍역 같은 전염병부터 처음 보는 풍토병까지 창궐했으며, 아이들이 심각한 영양실조에 시달릴 정도로 가히 생지옥이나 다름없었다."남자들은 딱히 할 일이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을 술을 마시며 보냅니다. 술 또는 다른 마약들을 남용했을 때 통제 불가능 상태가 됩니다. 남편들은 아내를 학대하고, 소녀들은 해가 지고 나면 끊임없이 남자들을 피해서 도망다녀야 합니다. 이곳에서 하루만 머물러도 밤에 비명과 소란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이 간호사는 "전쟁터에서는 총상 환자를 주로 돌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총상 환자는 그리 많지 않다"고 말했다. 총에 맞는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전쟁으로 도로가 막혀 병원에 올 수도 없기 때문이다.''' 많은 환자들이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죽거나, 살아나더라도 평생 감염으로 인한 후유증을 앓게 된다. 특히 유엔이 지키는 보호구역 밖의 보건의료 상황은 더욱 열악하다. 내전이 일어나기 전 남수단 전역에서 그나마 제 역할을 하던 의료기관 대부분은 문을 닫거나 파괴됐다. "벤티우 시내로 이동진료를 나가 보니 현대적 시설을 자랑하던 병원은 완전히 파괴돼 있었고, 며칠을 걸어와 진료를 받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고 증언했다. 기사.
그렇게 길고 긴 남수단 내전이 2015년 8월 마침내 정부군과 반군은 전투를 벌인 지 20개월 만에 평화협정에 서명했지만, '''아직도 충돌은 끊이지 않고 있다.'''
2020년 2월에 양측 간의 연합 정부를 구성한다고 했다. # 그리고 2020년 2월 22일을 기해 반군의 지도자가 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드디어 내전이 끝났다. 공식적으로는.''' #
현재도 상황은 개막장이라서 '''남수단 내전에서 식인 등 잔혹 행위가 발견되기도 했다.''' 여러 자료들에 의하면 남수단 정부군에 의해서 누에르족 남성 수백 명은 한 곳에 모여 총살당했으며, 정부군은 누에르족 사람들에게 모닥불 안으로 뛰어들게 하거나 사람 생살을 먹도록 강요하는 등 가혹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유엔보고서는 "정부군은 조직적으로 학살을 저질렀다"며 "주바 시내 도처에 검문소를 세우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수색을 벌였다"고 밝혔다. 또 "(정부군이) 누에르족 사람들을 한 자리에 모아 생살을 먹게 하고, 같은 족 사람들의 피를 마시게 했다"며 "어떤 여성은 '남수단 정부군이 시신을 불에 태우고 그것을 먹으라고 시켰다'고 증언하기도 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누에르 족 군인들끼리 모여 군벌화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나아가 이게 타지에 족이라든지, 누사르 족이라든지 다른 소수 부족들도 '자기들도 딩카놈들에게 저런 꼴이 될 것'이라고 불안해하며 군벌화가 이뤄지는 점.
이렇다 보니 수단 언론에서도 비웃는다. 마치 우리가 전쟁범죄를 모두 한다는 투로 하더니만 우리랑 떨어지니까 본격적으로 자기들끼리 그러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고... 어렵사리 내셔널 지오그래픽 지가 인터뷰하던 남수단인들은 "독립하면 나을 줄 알았더니만 오히려 수단이던 시절보다 더 엉망이 되었어요! 수단이랑 싸울 때 공통의 적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젠 서로 부족끼리 적이니 적만 늘어났어요!" 라고 분노와 슬픔을 담아 절규했다.
11.5. 열악한 산업 기반
오랜 내전으로 남수단에선 제대로 된 산업 및 경제 체제가 없다. 석유 말고도 다른 자원은 많지만 그걸 개발하려면 외국 자본 및 기술 투자가 필수적인데, 이것에 대한 각 부족의 우선권 주장으로 제대로 되기가 어렵다. 국가 채무 부담도 수단과 얼마나 잘 나누게 될지가 불투명한 상태에 수단과 아랍권의 반발과 열악한 치안 문제로 다국적 석유 개발 업체들이 나서길 꺼리고 있다. 중국에서 참여하려고 해도 여전히 아랍 연맹의 눈치를 봐서 주저하고 있는 것도 사실. 세계적인 원유업체인 로열 더치 쉘이나 BP plc, 엑슨모빌 같은 대기업들이 남수단 석유 개발 문제에 끼어들려다가 포기한 것도 아랍연맹 눈치도 크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석유 시설 정제 공장도 아예 없어서 수단으로 가져가야 하며, 내륙국가라 석유를 수출하려면 항구를 장악한 수단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그래도 이 문제는 중국이 송유관을 놓으면 좀 나아지겠지만, 석유 수익 분배를 두고 부족끼리 죽어라 싸우고 있고, 수단과 손잡은 군벌 세력이 이 송유관을 건드릴 가능성도 무시할 수가 없어 중국도 골치를 겪고 있다.
또 중요 유전지대인 헤그리그 지대가 남북으로 절반으로 동강났는데, 자본이나 기술력이 유리한 수단에서 선점한 곳이 가득하여 경제적인 시설 보충이 일절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수도인 주바조차도 전기가 안 들어오는 곳이 가득하니 할 말 다했다.
2014년 9월 16일에는 남수단 정부가 모든 외국인 소유 회사 및 NGO를 자국에서 추방하겠다는 충공깽스러운 발표를 하여 남수단에 있는 모든 외국인들을 패닉에 빠트렸다. 그렇지 않아도 열악한 산업 기반에 이를 운영할 남수단인 인력이 부족하여 주변의 우간다, 케냐 등 외국인 노동력에 의존하고 있는 판에, 이런 조치는 최악의 병크라서 외국인들은 물론 남수단 내에서도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11.6. 종합
아프리카 많은 나라들이 겪고 있는 '''종교, 부족, 자원, 군벌, 내전과 그 휴유증, 영토 분쟁 문제를 몽땅 한꺼번에 겪고 있는 상태'''라서 자칫하면 제2의 소말리아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일각에서는 소말리아와 같은 파탄국가로까지 가지는 않더래도 에티오피아로부터 독립 이후 아프리카의 최악의 부정부패 독재국가로 전락한 '''에리트레아'''처럼 남수단도 똑같은 전철을 밟아 부패한 독재국가가 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앙골라나 나이지리아[14] , 시에라리온 등에서 실증된 '오래된 미래'가 나타날 가능성은 많다. 그래도 일단 유엔과 중국이 적극 지원하고 있고, "답이 안 나온다"던 독립 문제도 해결은 한지라 최악은 안 될 거라고 기대는 하고 있으나,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과도 같은 부족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
이런 가운데 한국 정부는 미국의 권유로 남수단에 평화유지군을 파병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도 평화가 오려면 외국 군대 주둔으로 어림도 없을 듯. 다른 부족끼리 싸우고 으르렁거리는 것에 함부로 끼어들다간 다른 부족 편애한다고 폭발하기에, 과거 보스니아 내전이나 르완다 내전 때처럼 가만히 두고 볼 가능성도 허다하다.
2011년 11월, 일본 정부가 평화 유지 활동으로 자위대 파견을 결정했다. 일본 언론 보도[15] . 2011년 12월 1일, 대한민국 정부도 평화유지군 파병을 결정했다.
2014년 7월 9일로 남수단은 독립 3주년을 맞았지만, '''아무도 이를 기뻐하지 않을 정도'''로 상황은 막장으로 치닫고 있다.[16] 끝없는 내전과 부족 갈등에 기근까지 겹치면서 마침내 6관왕 '''소말리아를 제치고 취약국가지수 1위'''에 올랐다.
게다가 2015년에도 계속해서 남수단 내전이 치열해지면서 나라는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졌다. 일단은 남수단 내전이 마무리되었지만 이미 국가가 완전히 파탄난 상태이기 때문에, 거의 가망이 없는 헬게이트 상황이다. UN 등에서도 남수단은 타국의 도움 없이는 근대적인 민주주의 국가가 되기 불가능한 상태라며 남수단의 미래에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
영국 일간지 가디언과 독일의 도이체 벨레(DW) 방송 등은 남수단 내전 발발 2주년인 2015년 12월 15일 남수단 내전 당시에 자행되던 무자비한 고문이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으며, 무자비한 인권 유린과 성범죄, 살인, 폭력이 만연해있다고 보도했다. 심지어 '''일부 지역에서는 인육을 강제로 먹이는 등의 잔혹 행위도''' 심심치 않게 발생하고 있으며, 10대의 어린 소년들마저 내전에 끌어들이는 현실이다. 국제 의료구호단체인 국경 없는 의사회는 이런 상황이 지속되자 유엔의 역할 부족을 비판할 정도로 막장인 상황이다. 간단히 말하면 '''남수단은 현재 소말리아와 동급인 지상 최고의 생지옥이라고 볼 수 있다.''' 2016년 취약국가지수에서 113.8을 기록해 114.0인 소말리아에 이어 막상막하급 2위를 기록할 정도.
2016년 7월 9일 독립 5주년 기념일 전날인 8일에는 위에 서술한 대로 현직 대통령과 부통령 휘하 경호대까지 수도에서 서로 총질을 하고 있으며, 각 지역은 내전과 치안 문제로 엉망이 되고 있다. 외신 추정으로는 3년 동안 내전으로 4~5만 명이 죽고 난민도 해도 200~500만 명 추정인 상황이다.
2018년 결국 다시 취약국가지수 113.4점을 찍으며 1위가 되는 불명예를 안고 말았다. 얼마나 더 나락으로 떨어질 지 알 수가 없다. 2019년에는 예멘에 밀려 2위가 되었지만[17] , 국가 사정이 막장인 것은 여전한 상태.
이 때문에 행정구역도 몇 번이고 바뀌었다고 한다. #
12. 관련 문서
[1] 당시 로마인들은 사하라 사막 남단의, 동아프리카로 치면 이집트 남단의 아프리카 전역을 에티오피아라고 불렀다. 에티오피아라는 이름 자체가 고대 이집트어로 '흑인들'을 일컫는 말이었다.[2] 여담으로 뉴스의 앙골라의 수도인 루안다가 중앙아프리카의 국가인 르완다(...)로 잘못 표기되어있다.[3] 다르푸르 학살 및 내전으로 이웃 차드로 피난 간 수단 서민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수단에서 살 때는 1주일에 한두 번은 꼭 염소나 양이나 닭고기를 푸짐하게 먹었고, 빵이나 옥수수가루 떡 같은 아프리카 주요 식사들도 풍성하게 먹었다면서 그 때를 그리워할 정도다.[4] 물론 남수단 외 이웃 국가 출신들도 나일로트계 부족들의 혼혈의 영향으로 체형이 비슷하며, 모델로 활약하는 경우가 많다. 소말리인 문서 참조.[5] 그런데 이 "남수단어"라는 언어의 존재가 명확하지 않다. 국내 언론에서 "남수단어 개발 중"이라고 나와 있으나 해당 기사 외의 다른 근거나 출처, 정보가 부족한 것.[6] 본디 지참금은 신부를 가져가면서 노동력을 하나 가져가는 것에 대한 보상 개념이다. 즉 신부 것이 아니라, 신부를 잃는 가족에게 지급되는 것이다. 남수단에서 활동한 이태석 세례자 요한 신부의 저서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에 나오는 내용이다.[7] 남한은 대한민국, 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동독은 도이치 민주 공화국, 서독은 도이치 연방 공화국이다.[8] 정식 국호가 남수단과 비슷한 케이스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동티모르, 북마케도니아가 있다. 참고로 북마케도니아는 남수단의 국명이 결정될 당시에는 그냥 마케도니아였다.[9] 다만 여기서 북수단 왕국은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한 나라다.[10] 베들레햄의 별을 형상화했고 남수단 단결을 뜻한다는 설도 있다.[11] 원래는 사막에서 온 몸을 가리는 아랍인들의 고유 옷을 가리키는 말인데, 남수단 사람들은 흑인 이슬람 민병대를 부르는 말로 썼다.[12] 표범에게 아이들을 먹이로 줘 배를 채우게 한 뒤, 얌전해진 표범을 가죽 손상 없이 잡고자 했다는 것.[13] 나일 강의 수자원을 둘러싸고 갈등이 크다.[14] 하지만 이 쪽도 보코 하람이라는 최악의 집단이 등장하면서 다시 막장이 되어가고 있다.[15] 그런데 자위대가 남수단에서 작전을 하는 보고 문건에 조작이 있다는 의혹이 2018년에 제기되었다. 모리토모 학교 비리 사건 공방 와중에 딸려나온 의혹.[16] 당연하겠지만 차라리 이전 수단의 영토였던 시절이 더 나았다고 한탄해 하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다.[17] 다만 국가의 합법성(State Legitimacy) 분야는 여전히 1위다. 참고로 이 분야 공동 1위가 다름아닌 '''북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