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생애

 



1. 유년 시절
1.1. 이름을 개명
1.2. 날조된 타도제국주의동맹
2. 청년 시절
2.1. 왕청 유격대
2.2.1. 날조된 북만원정
2.4. 날조된 조국광복회
2.7. 제88국제여단
3. 해방 정국
5. 절대 권력을 손에 쥐다
6. 사망
7. 출처


1. 유년 시절


[image]
1927년의 김일성
1912년(메이지 45년) 4월 15일[1] 김형직강반석[2]장남으로 당시 외가였던 평안남도 평양부 용산면 하동 칠골에서 출생해서 고순화면 남동에 위치한 만경대#s-2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초명은 김성주'''로 소학교때부터 중국인 학교를 다녔고 지금의 지린성 쑹화강 강변에 있는 위원(毓文, Yùwén, 육문) 중학교를 다녔다. 1929년경에 반일 공산주의 활동을 하다가 위원 중학교에서 퇴학당했다.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1930년경 출소했다. 이후 공산주의 단체에서 활동했다.


1.1. 이름을 개명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인데, 대략 1930년경 김일성으로 개명했다.[3]

1.2. 날조된 타도제국주의동맹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14세였던 1926년에 타도제국주의동맹이란 단체를 만들어 활동했다고 주장하지만 이 단체는 '''북한에서만 주장하는 날조된 단체다.'''날조된 타도제국주의동맹1
길림성 이통현 고유수 일대 농촌에 이종락이 만든 “길흑농민동맹” 산하에 바로 “ㅌㄷ”란 것이 있었는데, 바로 이 사람이 만든 농민단체 산하에 있던 “ㅌㄷ”를 김일성이 만든 것처럼 조작한 것이다. 이종락은 당시 소년이었던 김일성이 하늘처럼 따르던 혁명 선배이자 은인이고 형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이종락이 변절자로 죽자 김일성이 그의 활동 이력을 가로챈 것이다.날조된 타도제국주의동맹2
또한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11세였던 1923년, 만주 팔도구에서 만경대까지 14일간 천리길을 걸었다고 주장하며, 이것을 '배움의 천리길' 이라는 이름으로 우상화하고 있는데 '''이것도 거짓말이다.'''

2. 청년 시절



2.1. 왕청 유격대


1931년 9월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같은 해 10월 12일 중국 공산당중앙은 '만주 병사공작지시에 관한 지시'를 내려 항일 유격대를 건설할 것과 이 유격대를 농촌으로 확대하여 항일 유격전을 전개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이에 따라 만주 지역에는 각 지역별로 공산 유격대가 형성됐다. 남만 유격대, 동만 유격대, 그리고 동북 인민혁명군 등이 그것이다. 김일성, 최현 등은 모두 동만 유격대 소속으로 분류된다.
김일성을 비롯하여 최광, 오진우 등은 왕청 유격대 소속이었다. 김일성은 당시 왕청 유격대의 대장이 아니었다. 1933년 9월에 왕청 유격대와 훈춘 유격대는 중국 구국군 오의성부대와 연합하여 동녕현성을 공격했다. 동녕현성 전투의 주도자는 오의성부대의 오의성이었다. 그는 원래 마적 출신이었다. 이때 김일성은 왕청 유격대의 일개 소대장으로 처음 항일운동에 참가했다.
김일성의 상관인 오의성이 과거 마적 두목이던 왕덕림과 의형제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은 당시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던 유격대 조직의 성격을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이 내용은 김일성을 마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마적들과 어울리면서 행했던 행적을 능히 짐작케 해준다.'''
그리고 실제로 김일성은 항일운동 간판만 걸어놓고 약탈, 납치, 살인, 방화를 자행하는 등, 행동 방식도 마적과 차이가 없었다. 이 때문에 김일성은 '''마두(馬頭)'''라고 불렸다.

2.2. 민생단 사건


이 당시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 소속의 정치위원이었는데, 민생단 사건이 절정에 달했을 당시에 김일성은 다른 곳에서 활동중이었고 사건이 소강상태에 접어들 무렵 소환되어 취조를 받게 되었다. 김일성은 자칫하면 죽을 위기에 놓였지만 중국인 왕윤성[4]의 도움을 받아 풀려나게 되었다.
김일성은 중국어를 매우 유창하게 했고 민생단 사건과 관련하여 자신을 유창한 중국어를 이용해 왕윤성을 설득시켜 사형을 당할 위기에서 빠져나가고 그 대신 정치위원에서 해제되어 평대원이 되었다. 군대로 따지면 영관급 장교에서 현역병으로 강등된 셈이다.
이때 김일성은 정치위원 자리에서 이미 직위 해제됐고, 후임으로 남창익이라는 사람이 정치위원으로 임명됐다. 북한에서 김일성이 지휘했다고 주장하는 동년현성 전투도 중국 구국군 오의성부대의 지휘를 받은 것이다. 김일성은 민생단 감투를 쓰고 평대원으로 강등돼 전투에 참가했다. 그리고 민생단 혐의를 벗기 위해서 작탄대 대원이 되었다.

2.2.1. 날조된 북만원정


김일성의 회고록에서 북만원정을 일본군의 토벌 위기에 처한 저우바오중 부대를 구원하기 위해 김일성이 벌인 원정이라고 기술하고 있으나 '''이것은 거짓말이다.''' 실제는 민생단 사건으로 몰려서 총살위기에 처한 김일성이 중국인 빨치산 간부의 도움으로 한밤중에 저우바오중 부대로 도망친 사건이다.
또한 "일본군에 투항한 유격대 길강성 지휘부 사령인 이종락이 김일성에게 처형됐다."라는 '''김일성 회고록 내용도 거짓말이다.''' 이종락을 처형한 것은 김일성이 아니라 항일1로군 총지휘관 양정우였기 때문. 오히려 김일성은 일본군으로 투항을 권고하는 옛 상사였던 이종락의 손을 (일본군에 투항하기 위해) 잡으려 했다. 그러나 이를 알아차린 항일1로군 총지휘관 양정우는 이를 저지했고, 송무선 항일1로군 조직과장을 파견해서 이종락을 압송한 후 직접 처형했다. 당시 일본군에 투항하려고 고민하던 김일성을 항일 유격부대 총지휘관이 만류했다는 것.날조된 김일성의 회고록

2.3. 날조된 조선인민혁명군


북한은 "1934년에 이르러 김일성은 동만주의 반일 인민유격대와 남만주 반일유격대를 통합하여 '''조선인민혁명군'''을 창설하였으며, 그 이듬해인 1935년 5월에는 반일 민족 통일전선 본보인 조국광복회를 조직하고 그 회의 회장으로 추천되었다. 그리고 김일성은 만주 각지의 혁명적 무장세력을 통합하여 신박한 영도력을 발휘하여 조선인민혁명군을 만들었다"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것은 거짓말이다.'''
조선인민혁명군은 1930년대 만주지방에서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조선혁명군'과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가 소비에트 홍군이라는 명칭을 취소하고 다시 성립할 것을 지시했던 코민테른의 '1월 서한'에 따라 결성한 동북인민혁명군의 명칭을 조합해서 고안해낸 '''가공의 조직이다.'''김일성이 가공해 만들어낸 군사조직

김일성의 자서전 "세기와더불어"에도 "중국 동북지방에서 활동할 때에는 동북항일연군이라고 하였고, 조선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거나 조선에 나와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이라고 정황에 맞게 이름을 바꾸어 가며 활동했다." 라고 되어 있다. '''즉, 조선인민혁명군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결론이다.'''[5]
동북항일연군은 조선인민혁명군과는 전혀 다른 실존했던 군사조직이었다. '''심지어 북한이 '혈맹'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중국조차도 조선인민혁명군의 존재를 부인했다.''' 예컨대 1962년 4월 25일 평양에선 항일유격대 창설 30주년 기념행사를 전례 없이 대대적으로 개최했는데, 이 자리에 초청된 중공측 수뇌급 간부 팽진(彭眞)은 이 점을 피력했다. 쉽게 얘기하자면, '''중국 측은 김일성이 주도하여 조직했다는 조선인민혁명군은 날조된 것이며, 김일성은 중국 공산당의 일개 지방당의 말단 조직원으로서 당의 지도 하에 행동했던 자로 규정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북한에서는 현재도 4월 25일을 조선인민군 창건기념일로 선정하여 매해마다 성대한 기념행사를 치르고 있으며 북한의 날조된 역사가 우리 백과사전에까지도 버젓이 등장하고 있다.조선인민혁명군은 존재하지 않았다2
특히 북한에서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내용 중에는 양세봉의 조선 혁명군을 김일성이 흡수해서 대규모 부대로 거듭나게 되었다(...).라는 것도 있는데, '''이는 완전한 거짓이다.''' 조선혁명군의 일부 대원이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6]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다고 보는 것이 사실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북한에서 주장하는 조선 혁명군과 실제 사료에 등장하는 조선 혁명군이 다르다.''' 해당항목 참조.

2.4. 날조된 조국광복회


북한의 사회과학출판사에서 1973년에 펴낸 '정치사전'에서 조국광복회를 "김일성이 항일무장투쟁 시기 주체사상을 구현하여 창건한 첫 반일민족통일전선조직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거짓말이다. 조국광복회라는 조직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북한이 날조하여 만들어낸 조국광복회의 실제 모델은 웨이청민이 만든 재만한인조국광복회이다.'''
조국광복회 설립자는 김일성이 아니라 중국인 웨이청민(魏極民)이다. 웨이청민은 중국 공산당 동만특위 책임비서 겸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의 정치위원이었다. 웨이청민이 1936년 5월에 제1로군 간부회의를 소집해서 반일통일전선체를 조직하도록 지시했고, 이 지시를 1936년 6월에 실행한 사람이 오성륜(吳成崙)이다. 조국광복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북한김일성은 재만한인조국광복회에 대해서 크게 4가지를 날조했다.
첫째, 동북항일연군 제2군의 주요 간부인 오성륜,엄수명,이상준 등이 발기인으로 참여했는데도 자신이 이동백, 여운형 등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고 조작하였다. 둘째, 코민테른 7차대회에서 채택된 ‘중국내 제민족 반파쇼 인민전선과 반일민족통일전선 구성에 관한 테제’에 근거해 창설된 것을 자신의 독자적인 통일전선전략전술에 따라 조직한 것이라고 날조하였다. 셋째, 오성륜(별명 全光)이 작성한 창립선언과 10대 강령을 자신이 작성했다고 날조하였다. 넷째, 조직 창립일을 6월 10에서 5월 5일로 조작하였고, 조직 결성 장소도 장백현과 국내의 혜산,갑산이 유일했는데도 서울,평양,제주도를 비롯한 전국에 결성했으며, 회원도 수십만에 달한다고 조작하였다.조작으로 만들어진 조국광복회
특히 김일성이 여운형과 함께 조국광복회를 결성했다는 것은 완전한 날조다. 무엇보다 1936년 당시 김일성은 만주에 있었고 여운형을 국내에 있었기 때문에 만난 사실조차 없었다. 여운형과 관련된 기록에도 1936년 김일성을 만났다는 기록은 없다. 1936년 당시 여운형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자신이 운영하던 조선일보,중앙일보가 폐간돼 사장직에서 물러나 경황이 없던 때였다.
김일성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광복회의 지방조직이 만주는 물론 국내 각처에 결성됐으며 전국적으로 회원이 수십 만에 달했다고 주장한다. 국내 각처란 서울을 비롯한 부산, 대구, 광주, 대전, 제주 까지 조직이 결성됐다는 뜻이다. 이정도 규모이면 대형 조직인데 북한은 조직의 편제나 간부들이 누구인지에 대해 전혀 밝히지 못하고 있다. 만약 전국적으로 광복회 회원이 수십만이라면 최소한 어림잡아도 20만명이라고 할 수 있고 당시 조선 인구가 2천500여 만이므로 125명에 한 사람꼴로 회원이 있는 셈이다. 이를 다시 20세 이상의 성인 인구에 적용하면 70-80명에 한 사람 꼴로 회원이 있는 셈이다. 하지만 당시나 해방 후 38선 이남 지역에 조국광복회 회원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다.

2.5. 보천보 전투


항목 참조

2.6. 훙치허 전투


항목 참조

2.7. 제88국제여단


[image]
제88국제여단 시절 사진. 좌로부터 김일성, 계청, 최현, 안길
1937년부터 일본군이 ‘만주국치안숙청계획’을 통해 만주 지역의 병력을 늘리고 토벌작전을 실시하자 동북항일연군은 사실상 궤멸 상태에 빠진다. 김일성, 최용건 등 동북항일연군 대원 중 일부는 일본군을 피해 연해주, 하바롭스크 소련 영내로 이동한다. 아때 김일성이 작성해서 소련 당국에 제출한 자신의 이력서가 2019년에 국내 언론에 공개되었다.(단독, 김일성 소련 ‘붉은군대’ 이력서 단독입수)
1942년 소련 극동군은 이들을 ‘동북항일연군교도려’로 편성하였으며 얼마 후 ‘88독립보병여단’로 정식 편성한다. 여기서 김일성은 소련군의 단기 군사 교육을 받고 주로 한국인으로 구성된 여단 1대대의 대대장에 보임된다.
이때 소련군 지도부는 김일성의 부대원들과의 오랜 동지애, 성실성, 러시아어 실력 등을 눈여겨 보기 시작한다. 당시 붉은군대의 평가에 따르면 김일성은 지나치게 과음하는 버릇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규율을 잘 세웠으며 엄격한 군율을 적용하였다고 한다.
[image]

'''1945년 10월, 잡지사 '선구'에서 서울 시민 2000명에게 여론조사한 자료.'''

광복 직후 '선구'의 설문조사에서 김일성이 군무부장 부문에 조사된 이유로 해방정국 당시 유명세가 있었다고 한홍구(성공회대교수) 등 일부 측에서 주장하고 있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문화선전성 제1부상(차관)을 지냈던 정상진은 단연 '''거짓'''이라고 폭로했다.[7]
1945년 8월 9일 소련이 일제에 선전포고를 한 뒤 제88국제여단의 작전 계획이 모두 취소돼 제88국제여단의 조선인 병사들은 대 일본 전투에 참전하지 못했다고 밝히고 있다. 오늘날 북한 역사가 자랑하고 있는 것과 달리 ‘김일성 부대가 있는 제88국제여단이 대 일본 전투에서 총 한방 쏘지 못했음이 소련 국방성 문건으로 명확히 드러난 것이다. 소련군 대좌 저우바오중이 소련 극동군 총사령관 바실레프스키 원수에게 보낸 보고서
해방 이후 소련정치부의 지시로 원산항에 귀국하는 김일성을 마중했는데, '김성주입니다'라고 인사하는 김일성을 알아보지 못하고 뒤에 소련정치부에 보고하면서 김일성을 알았다고 한다. 정상진은 1945년 10월 14일에 있었던 "소련군 환영대회"는 소련의 각본이었으며, 1945년부터 1965년까지 북한에서 발표한 모든 연설문은 소련에서 작성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기사 결국, 관제데모의 결과로 지지율 운운하는 꼴이다.

3. 해방 정국


1945년 9월 19일 김일성은 제88국제여단 조선공작단의 일원으로 원산을 통해 귀국한다. 평양에 입성한 김일성은 평양시 경무사령부 부사령관에 임명된다. 9월 말 김일성은 삼팔선 이북에 새로운 공산당 지도 조직을 만들 것을 제안한다. 9월 11일 박헌영서울에서 조선공산당을 조직하기는 했지만 제대로 북한 지역의 지방 조직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김일성은 이 문제에 대해 소련군정과 교감한 후 제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의 주류였던 국내파는 1국1당 원칙에 어긋난다며 거세게 반발했다.
10월 초 김일성은 한발 물러서 서울의 조선공산당 산하에 이북 5개 도당을 총괄하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설치하자는 수정안을 내놓았다. 그럼에도 국내파의 반발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박헌영 역시 자신의 입지를 흔들 수 있는 변화에 부정적이었다. 10월 8일 김일성은 개성시 인근에서 박헌영과 북조선분국 설치를 두고 담판을 맺었다. 소련군은 이 자리에 민정사령관 로마넨코를 배석하여 김일성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8][9] 박헌영도 고집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김일성은 10월 10일부터 10월 13일까지 '북부 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를 개최했다.[10] 얼마 후 북조선분국 중앙집행위원회가 열려 책임비서로 친 김일성계였던 김용범이, 제2비서로 박헌영파였던 오기섭이 선출됐다. 이후 북조선분국에서는 김일성 세력이 점점 우세해지다 1945년 말 아예 김일성을 책임비서로 선출한다.
1946년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되자 김일성은 위원장으로 선출된다. 1945년까지만 하더라도 소련군정은 군정의 얼굴마담으로 조만식을 내세웠으나 신탁통치 문제 등에서 소련의 뜻을 따르지 않자 대신 김일성을 전면에 세우기 시작했다. 3월 23일 김일성은 '20개조 정강'을 발표해 무상몰수-무산분배를 뼈대로 한 토지개혁, 산업 국유화 등 공산주의 국가 건설을 위한 자신의 구상을 밝힌다. 이 구상에 따라 3월부터 8월까지 이른바 '민주개혁'이 진행됐다. 지주와 우익 등 저항 세력은 탄압받았다.[11] 아울러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따른 임시정부 수립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김일성과 소련은 남북 동수로 내각을 구성하고 저변의 지지를 얻고 있는 조선공산당이 남한 몫의 반을 가져올 수 있다면 공산주의 세력이 임시정부의 3/4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를 위해 여운형을 평양으로 소환해 좌우 합작 운동 중단을 종용하기도 했다.
1946년 4월 김일성이 이끄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그 명칭을 북조선공산당으로 개칭한다. 박헌영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났음을 의미했다. 이와 함께 김일성은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북조선민전)을 조직해 각 사회단체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고 그 해 8월에는 김두봉이 이끄는 조선신민당을 흡수해 북조선로동당을 창당한다. 11월 3일에는 인민위원회 선거가 실시됐다. 북조선민전이 추천한 단일후보에 대한 찬반투표였다. 소련군정은 인민위원이 다시 대의원을 뽑아 북한의 최고집행기관인 북조선인민회의를 구성하도록 했다. 2월 21일 김일성은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됐다.
이 과정에서 김일성은 공산주의에 입각하여 부르주아를 몰아낸다는 명목으로 갑부들을 숙청하는 사법살인을 마구 남발했고 그 재산을 갈취해댔다. 이 때문에 북한의 토호들은 죄다 남쪽으로 도망쳤고 이렇게 도망친 사람들 중에서 모여서 만든 학교가 오늘날의 대광고등학교이다.
1948년 9월 9일에 북한의 내각 수상으로 공식 취임하였다.

4. 6.25 전쟁


해방 후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이 국공내전에서 장제스의 국민당을 몰아내고 중국 대륙을 석권하자, 김일성은 숭어가 뛰니 망둥어도 뛴다고 '''자신도 무력으로 한반도를 통일할 수 있다는 욕심이 들기 시작했다.''' 여기에 박헌영의 '남로당원 20만 봉기설' 주장으로 하루에 10km씩 진격하면 50일 안에 대한민국 전체를 정복하는게 가능하다고 생각했기에, 김일성은 1950년까지 남침을 허락해 달라고 소련에게 끈질기게 들이댔다.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은 2차대전 이후 미국과의 대전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에,[12] 김일성의 요청을 묵살했지만, 미국이 애치슨 라인[13]을 설정하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미군이 공여한 대한민국 국군의 각종 군용장비가 후방으로 빠지는 등 호재가 발생하자 스탈린이 이를 승낙했다. 김일성은 승낙받자마자 빠르게 남침 작전계획을 구상한 뒤 스탈린에게 비밀문서로 전달했다.
그리고 스스로 인민군 총사령관이 된 김일성은 인민군을 앞세우고 1950년 6월 25일 새벽 38선 전역에 걸쳐 불법 남침을 개시하였다. 그리고 불법 남침을 개시한 그날 오후 ''' "오늘 새벽 리승만 괴뢰도당이 우리의 모든 평화통일 제의를 거부하고 옹진반도에서 해주로 우리를 공격하였고 우리는 이에 대해 반격하여 개성, 옹진, 파주, 동두천, 장단을 해방하였다" '''고 선전해 댔다.
그런데 6.25 전쟁 초반 인민군의 활약은 대단했다.[14] 하루 만에 개성, 의정부, 파주, 옹진, 동두천, 장단을 점령하였으며 사흘만에 서울을 점령한데 이어 7월 13일에는 한강을 건너 20일 대전광역시까지 함락시키고 승승장구하여 7월 말에는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왔다.[15] 이때에는 지방을 돌면서 인민군을 독려하기도 했었다.[16] UN군의 참전에도 인민군의 우세가 계속되자 인민군에 ''' "인민군은 8월 15일 해방절 전까지 전쟁을 끝마쳐라" '''고 명령할 정도로 자부심을 내비치기도 했다.[17]
김일성은 개전 초기 빠르게 서울을 점령하면 남한 내 엄청난 혼란이 생겨 대한민국의 숨은 공산세력이 후방에서 혁명을 일으키고 자연스럽게 통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자만했던 탓인지 실제로 인민군이 개전 3일만에 서울을 점령했을 때 김일성은 당시 한강 이북에 갇혀 있던 남한군 잔존병력을 소탕하는 대신 서울 중앙청 앞에서 대규모 점령식과 퍼레이드를 벌이고 이승만이 경무대에 남기고 간 미제 물건들을 챙기며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느라 소중한 골든타임을 날려버렸다.[18]
그러나 막상 서울을 점령해도 대한민국의 후방은 잠잠했고 미군의 참전이 빠르게 결정되는 등 악재가 생겼다. 여기에 동부전선에서 국군 6사단의 선전으로 한강 이북의 국군을 포위섬멸해야 할 2군단이 큰 피해를 입었다. 또한 대한해협 해전 패배로 인한 부산에 대한 사보타주 실패 탓에, 인민군 육군은 서울 점령 후 3일간 서울에 머무르지 않았으면 겪지 않았을 군사적 곤란에 빠졌고, 이후 전쟁이 장기화되어 엄청난 희생을 치르게 되었다.
사실 대한민국 내 공산주의 세력은 이승만 정부의 강력한 토지개혁 정책과 공산지도자 탄압 때문에 6.25 전쟁 직전 즈음에는 세력이 많이 약해진 때였다.[19]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로당박헌영은 전쟁을 일으키면 대한민국에서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선전했고, 김일성은 이를 그대로 믿어버렸다. 서울을 점령한 김일성은 사흘 간 남진을 멈추고 “남로당 20만 명 총궐기” 소식을 기다렸지만, 남한 전역에서 인민군의 남침을 반기는 남로당의 폭동은 단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다.[20]

마침 인민군은 남침 때 북에서 단 한톨의 식량도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금방 보급문제에 직면했다. 실제로 인민군에는 아예 보급부대가 없었다. 이것은 러시아 혁명 내전시대에 적군(赤軍)들이 식량을 전적으로 혁명을 지지하는 민중에 의존하여 식량 수송을 하지 않고 부대 이동을 한 것을 모방한 것이었는데, 남한의 민중들은 러시아의 민중들과는 달리 인민군에게 자발적으로 식량을 갖다바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남한에 무기만 갖고 내려가면 공짜로 공산혁명이 이룩된다”는 생각만 갖고 있던 인민군은 갑작스런 식량부족 문제로 고통을 받아야 했다.
이러한 인민군의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김일성은 점령지 남한 민중들에게서 식량을 징발하도록 인민군에게 명령하였다. 예를 들어 인민군에게 점령된 서울에서는 6월 29일 ‘자치대’라고 쓴 붉은 완장을 찬, 우락부락하게 생긴 청년들이 총을 메고 다니면서 집집마다 식량 보유량을 조사하고, 이를 빼앗아갔다.[21] 남한 점령지에서 강제 징발한 식량은 인민군을 비롯한 당 기관, 정권 기관의 공무원에 한해 배급을 주고[22] 시민들에게는 일체의 식량 배급을 중단했다. 특히 인구가 밀집한 서울의 경우 150만 시민들에게 식량 배급을 중단하면서 아사자가 속출했다.
게다가 인민군은 점령지에서 ‘국가반역자’(한국의 공무원, 우익인사, 자본가, 지주, 군인, 경찰 등)들을 검거했는데, 체포된 자는 수만 명에 이르렀다.[23] 체포한 국가반역자는 인민재판 현장으로 끌고 갔고, 거기서 수많은 시민이 보는 앞에 따발총으로 즉결처분해버렸다. 이런 식으로 김일성이 점령지에서 유혈이 낭자한 공포정치를 자행하자, 인민군에 대한 남한 민심은 심각하게 이반되었다. 물론 인공 치하의 방송 또한 문제 투성이였다. 힘차기는 해도 같은 내용을 날마다 되풀이하여 듣는 사람을 질색하게 만들었다. 표현의 자유를 극도로 제한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김일성은 백주 노상에서 남한의 젊은이들을 강제로 납치하여 총알받이로 내모는 일들을 자행했다. 이런 식으로 인민의 자유를 말살하고 폭압적 독재를 밀어붙이자, 전쟁 전까지만 해도 김일성에 대해 일말의 기대를 품고 있던 남한의 민심은 김일성을 완전히 떠나버렸다. 수많은 민중들이 인민군에게 군량을 바치긴 커녕, 가진 식량을 모두 짊어지고 앞다퉈 피난을 떠나버렸다. 이로 인해 군량이 확보되지를 않으니, 낙동강 전선까지 기세좋게 진격했던 인민군은 더 이상 전진할 힘을 갖지 못하였다.[24] 이러한 사실을 안 스탈린마오쩌둥은 승리하기 위해서 민심을 얻어야 하는데 바보같은 짓만 하고 있다면서 김일성에 대해 진심으로 화를 냈다.
마침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으로 UN군이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자, 김일성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인민군에게 총 후퇴 명령을 하달하면서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스탈린과 마오쩌둥에게 군대를 파병해 자신들을 도와달라고 싹싹 빌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국과의 전쟁을 두려워했던 스탈린은 지상군 파견을 거절했고 마오쩌둥 역시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이자, 김일성은 10월 12일 평양에서 북한 주민들에게 ''' "피로써 조국을 사수하자" '''고 라디오 방송을 내보낸 뒤 평양을 떠나 덕천시로 피난했다.[25]
그리고 한국군과 UN군이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하자, 피신 장소였던 덕천을 떠나 강계시임시수도로 정했다. 그런 뒤에 강계의 지하 동굴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중 급속히 진격해오는 한국군과 UN군이 중국 입장에서 심각한 위협으로 다가오자 미군과 직접 국경을 마주할 것을 경계한 마오쩌둥은 '항미원조 보가위국(抗美援朝 保家衛國)[26]'의 기치 아래 중공군을 파견하였다.
청천강 전투에서 중공군이 대승을 거두고 한국군과 UN군이 후퇴하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김일성은 좀 바깥을 돌아다니며 한숨을 돌렸다. 한국군과 UN군이 12월 4일 평양 철수를 한 뒤 12월 10일 중공군의 뒤를 따라 '''비로소 평양으로 나왔고 다음날 연설을 했다.'''[27] 한편 12월 7일, 펑더화이와의 합의 아래 중국과의 연합사령부인 조중련합사령부를 구성하며 반격을 시작하는 인민군의 지휘권을 중공군에 넘겼다.
조·중 연합군은 12월 25일경 북한 지역을 회복하였고 더욱 남하하여 12월 26일에는 38선을 넘어 남으로 내려왔다. 결국 1951년 1월 조·중 연합군은 서울을 수중에 넣은 뒤 평택-오산-삼척-원주를 잇는 37도선 근방까지 밀고 내려온다(1.4 후퇴). 1.4 후퇴 후 소련 대사인 테렌티 시티코프와 함께 진격을 주장했지만, 이 주장은 제2차 인천상륙작전을 우려한 펑더화이에 의해 무시되었다. 그러던 중 중공군이 37도선 근방에서 공세종말점에 도달하고 후퇴를 멈춘 후 전열을 재정비한 1951년 초 한국군-UN군의 반격으로 조·중 연합군은 3월 서울을 내주고 38도선 이북으로 다시 후퇴하였다.
1951년 4월에 조·중 연합군은 춘계공세를 감행하여 서울 코앞의 의정부까지 진격하는데 성공했지만 결국 서울 점령에는 실패했고 5월부터 시작된 UN군의 역공세로 현재의 휴전선과 비슷한 모양의 전선까지 밀리게 된다. 그리고 7월부터 휴전회담이 시작되면서 2년 가까이 전선 주변의 고지들을 장악하는 고지전만 벌일 뿐 양측 모두 전선이 크게 요동칠 정도의 공세를 자제하면서 현재의 휴전선 모양이 굳어지게 된다. 이후 휴전협정일이자 북한에서 전승절이라고 정신승리하는 1953년 7월 27일 오후 10시에 유엔, 중국 측과 체결한 휴전 협정에 정식으로 서명했다.

종합하자면, 한마디로 6.25 전쟁에서 김일성은 '''시비만 걸어놓고 정작 진짜 싸움은 쑹스룬에게 죄다 떠넘겼을 뿐'''이었다. 즉, 6.25 전쟁에서 김일성은 한 것이 없다. 전쟁 초반의 선전은 6사단장 방호산 등의 활약과 전쟁 경험이 많았던 조선족 부대인 조선의용군의 도움으로 달성한 것이고, 후반의 반격은 쑹스룬이 지휘한 중공군이 주도한 것이다.
물론 김일성도 게릴라로 활동한 전력은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김일성의 군사적 능력은 파멸적인 수준이었다. 중국 국공내전에서 마오쩌둥이 승리한 이유는 마오쩌둥이 문제가 많은 인물이기는 해도 국민당의 상상을 초월한 무능과 군벌들의 배신, 그리고 이 상황을 역이용한 공산당 지도자들의 뛰어난 군사적 재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소련에 아부한 대가로 북한 지도자가 된 김일성에게 이런 군사적 능력은 전무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은 6.25 전쟁에서 패배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북한에서 기반이 부족했던 박헌영을 미국의 간첩으로 몰아서 숙청했다.
[image]
1953년 11월 중국에서 덩샤오핑(왼쪽)과 만난 김일성. 이 둘은 38년 후에야 공식 석상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그리고 스탈린6.25전쟁을 반대했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1990년대 초에 소련이 붕괴하여 기밀문서가 공개되면서 남침유도설이나 북침설같은 수정주의자들이 모두 떼굴멍하게 됐는데, 김일성이 계획서를 입안했는데 그것을 수정해 준 사람이 스탈린이었던 것이다. 마치 위의 각주를 보면 스탈린은 반대했는데 이를 무시하고 김일성이 단독으로 한 것같은 뉘앙스로 읽을 수 있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선제공격계획 같은 문서도 있는데 한글(한국어)로 쓰였지만 한국어가 굉장히 어색한데, 왜냐하면 소련이 써준 러시아어를 북한이 한국어로 번역한 문서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남침계획서 같은 러시아어로 된 문서도 있었다. 당시 북한은 소련의 위성국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북한이 소련이 반대하는데 단독으로 전쟁을 결정 할 수도 없었고, 또 소련의 지원 없이 전쟁을 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남침 했을 때 소련제 탱크를 끌고 왔던 것이 북한이다. 도리어 구체적인 계획까지 짜준 것이 소련이었고 지원도 해줬다. 그러니까 스탈린과 김일성이 작당한 것이 맞다.[28]
김일성의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발생한 피해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한국군 사망자 13만 8천 여명, 부상자 45만 명, 실종자까지 모두 포함하면 60만 9천 명, 인민군 사망자와 부상자 52만 명, 실종자까지 모두 포함 80만 명, 유엔군 사망자 5만 8천 명, 부상자 48만 명, 실종자와 포로까지 포함하면 총 54만 6천 명, 중공군 사망자 13만 6천 명, 부상자 20만 8천 명, 실종자와 포로, 비 전투 사상자까지 모두 포함 97만 3천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남한 민간인 사망자 24만 5천 명, 학살된 민간인 13만 명, 부상 23만 명, 납치 8만 5천 명, 행방불명 30만 3천 명으로 모두 100만 명의 남한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었다. 1953년 북한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북한 민간인 사망자는 28만 2천명, 실종자 79만 6천 명이다. 이것은 당시 남북한 전체 인구의 1/5이 피해를 입었으며, 개인별로 보면 한 가족에 1명 이상이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남한의 경우 일반 공업 시설의 40%, 북한은 전력의 74%, 연료 공업 89%, 화학공업의 70%가 피해를 입었다.6.25전쟁의 피해 이 밖에 부상 후유증, 이산가족, 남북분단 등 숫자로 표현하기 어려운 수 많은 피해가 아직도 산적해있다.
더욱이 이 전쟁의 영향으로 인해 철천지 원수였던 '''일본의 경제적 부흥'''을 가져오는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물론 일본은 경제적으로 부흥할 수 있는 역량은 진작에 가지고 있었지만, 이 전쟁으로 인해 경제적 부흥을 앞당겼다는 사실은 결코 부정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전쟁으로 인해 남북간의 감정의 골이 깊어져, 결과적으로 '''분단의 고착화'''를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영향은 오늘날까지 '''현재진행형'''이며, 현재에도 이러한 분단은 허물어질 기미조차 보이지가 않는다.
덤으로 김일성이 철원 백마고지를 빼앗기자 고암산에서 3일을 식음전폐하며 통곡했다고 한다.

5. 절대 권력을 손에 쥐다


비록 소련의 필요와 스탈린에 대한 충성과 아부로 소련의 지원을 받아 권력을 잡은 김일성이었지만 수십년동안 한반도와 만주에서 독립활동을 한 연안파와 국내파에 비해 정통성이 부족하였기에 김일성의 절대적 독재체제는 절대로 공짜로 이룬 것이 아니었다. 김일성의 통치 반세기사를 돌이켜보면 그야말로 숙청의 연속. 수십년간이나 나라 하나를 황제처럼 통치한 것은 김일성이 결코 만만한 정치인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반대파 제거를 통한 권력장악에는 정말로 능수능란했다.
북한 초기 김일성의 권력은 그다지 확고하지 못했다. 김일성이 최고 지도자이긴 했지만 그의 만주빨치산 파벌(갑산파)[29]허가이의 소련파, 김무정과 박일우의 연안파, 박헌영리승엽남로당파 등 수많은 파벌의 견제에 시달리고 있었다.[30]
한국전쟁 당시 인천 상륙작전 이후의 군사적 대참사로 평양의 통치체제 자체가 붕괴되었는데, 김일성은 패배의 책임을 '''반대파에게 모조리 뒤집어씌워''' 버리면서 정치적 위기를 탈출했다. 연안파의 리더 김무정은 평양 함락 당시 김일성이 '''반 강제로'''(…) 평양 수비를 명령했는데, 정작 평양이 함락되자 '''평양 함락의 책임을 지고'''(…) 지위를 박탈당했다. 북한 초기 김일성과의 명목상의 공동정권을 구성할 정도로 위세를 자랑했던 박헌영은 남한 내부 호응의 부진에 책임을 지고 제거되었다.
사실 이건 박헌영도 할 말이 없었다. 위에서 이야기했듯 박헌영은 전쟁 전에 "전쟁이 일어나면 남조선 인민 20만 명이 호응할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지만…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뭐 광복 초기에는 한국전쟁 이후에 비해 남한이 좌파적 성향이 깊었고 북한이 우파적 성향이 강했었는데 이건 당시 평양의 별명이 '동양의 예루살렘'일 정도로 개신교를 중심으로 한 우파의 입김이 셌던 까닭도 있다. 반면 남한의 대구는 '동양의 모스크바(…)로 불릴 정도로 좌파적 성향이 깊었는데 현재 상황을 생각해 본다면 참으로 얄궂은 역사. 물론 이것도 얼마 못 가 여순 사건으로 남쪽이 다 숙청됐다.
전쟁 이후에는 1956년의 8월 종파사건과 1958년의 "최창익 그룹 국가전복음모" 사건을 통해 연안파와 소련파를 궤멸시켰다. 당시 300명의 장성 중 숙청당하지 않은 사람은 김일성의 최측근 15명, 그리고 김일성에게 충성을 맹세한 연안파와 소련파 장교들 몇 명 정도에 불과했다고 전해진다. 거기다 김일성에서 김정일로 승계하는 과정에서 갑산파들도 다 숙청시켰다. 한국전쟁 직후의 군사적 열세에서 불구하고 두 동맹국이 후원하는 두 파벌을 기어코 제거했다는 것만으로도 김일성의 정치적 수완(혹은 독재에의 집착)을 볼 수 있다.
김일성의 무자비함은 어찌보면 독재체제 성립 이후에 절정에 달했는데, 1960년대에는 당내의 "군사만능주의"를 비판하며(…) 평생 동지였던 김광협최광 등을 가차없이 숙청한다.[31] 이 숙청은 군부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방지하고 김일성 자신이 군을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해서였다고 전해진다. 여담이지만, 김광협의 몰락 이후 군을 장악한 것이 그 유명한 오진우다.
권력을 자기 아들인 김정일에게 계승[32]함으로써 북한이 사실상 전제주의국가로 거듭나는 기반을 마련했다. 하는 짓거리를 보면 전설로 자신에 대한 숭배도를 높이는 등의 고전적인 방법을 사용하므로 봉건 국가라 해도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또한 독재정권이 들어선 사회주의 국가 중에서도 권력 계승을 자기 자식에게 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어지간한 나라는 총애하는 부하에게 넘겨주긴 할 지언정 자기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넘겨주지는 않았으며, 그나마 국가 원수 자리를 형제에게 넘겨준 쿠바조차도 원수 자리를 계승받은 '''동생 역시 과 함께 혁명 투쟁에 참가한 서열 2위 원로'''였기에 계승한 것이지, 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후계자가 된게 아니다. 루마니아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김일성을 존경해 그를 벤치마킹하려다가 '''벌집'''이 되어 버린 것을 생각하면 정말 아무나 하는 건 아닌 모양... 물론 김일성은 제 딴에는 합법적이라는걸 강조하려고 최고인민회의 선거 쑈를 벌였지만 이건 말 그대로 쇼일 뿐[33]이라…
또한 홍길동이 썼다는 '''축지법'''을 쓸 줄 안다고 한다. 축지법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기행이 있는데… 예를 들면, 독립운동을 하던 때에는 낙엽을 타고 두만강에서 일본군 함대를 격침시켰다던지 솔방울을 수류탄으로 바꾸어서 싸웠다고 한다. 물론 일고의 가치도 없는 100% 거짓말. 다만 이건 보천보 전투 이후 한반도 '''민중 내에서''' 퍼진 소문들이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도 박완서의 어머니가 김일성이 축지법을 쓴다는 이야기를 해주는 장면이 있다. 요즘 북한 어린이들은 믿…으려나? 그리고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였을 때(아마 1920 - 30년대쯤) 웃통을 벗고 모래밭을 구르니 모래가 로 변했다고 한다. 근데 진짜 90년대에 들어 북한에 기아가 왔을 때 그런 액션을 전혀 취하진 않았고 그냥 죽어 버렸다.
[image]
유교적 가부장주의, 샤머니즘적 개인숭배, 기독교 교리 왜곡, 미륵 신앙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대중 심리 자극, 공산주의 특유의 통제 경제, 일본 제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경찰국가 등, 전근대와 현대를 막론하고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했기 때문에 김일성의 권력 장악도는 매우 높고, 이런 모습이 제3세계 독재자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이렇게 주화입마를 당한 독재자들로는 루마니아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짐바브웨로버트 무가베, 시리아하페즈 알 아사드 등이 있다.

6. 사망


[image]
1994년 사망 후 공개된 초상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이시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이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1994년 7월 8일 2시에 급병으로

서거하시었다는 것을 가장 비통한 심정으로온 나라 전체 인민들에게 알린다.

- 1994년 7월 9일 조선중앙텔레비죤에서 방송된 전형규 방송원의 김일성 사망 공식 발표 중에서. -

[image]
김일성 사망 당시 신문 보도
김일성 사망 공표 당일 MBC 뉴스데스크 방영분.[34]

KBS 뉴스 9 방송분도 참고.

1994년 7월 7일 밤, 그는 남북정상회담 숙소로 쓰일 묘향산 특각을 둘러보다 쓰러져 다음날 새벽 2시에 82살로 심근경색으로 사망하였다. 북한측은 표면상으로는 과로로 인해 심장병이 발병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그의 말년에 모든 권한은 김정일에게 쥐어진지 오래였고 김일성이 하는 일이라곤 정치에서 손을 떼어 주석궁의 자기 사무실에 앉아 혁명열사릉을 감상하고 먹고 자는 것이었으니 과로보다는 노환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북한의 주장처럼 과로로 인한 건강 악화도 일부는 맞다는 의견도 있다. 김일성이 사망하던 해인 1994년에는 북핵 문제로 인해 미국이 당장 북한을 공격할 수도 있다는 전쟁설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이 때 미국의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북한을 전격 방문해서 북미 간 대화를 시도하고 남북정상회담을 주선해서 이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나이가 많은 상태에서 이렇게 활동하다 보니 당연히 건강 악화로 이어졌다는 것.
생전의 김일성은 과거 동지들과 함께하고 싶다며 자기가 죽으면 혁명열사릉에 자신의 시신을 안치해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그를 신격화시켜 권력 이양을 정당화하고자 한 김정일은 시원하게 씹었다.
[image]
유리관 속에 놓여 있는 김일성의 시신.
김일성이 죽고 나자 당연히 세뇌된 북한 주민들은 통곡을 했다.[35] 당초 북한측은 사망 순간부터 34시간 동안 비밀에 부쳤다가 조선중앙방송평양방송 등 북한의 주요언론들은 9일 정오 특별방송에서 “심장혈관과 동맥경화증으로 치료를 받아오던 중에 쌓인 정신적 과로로 1994년 7월 7일 심한 심근경색이 발생했고 심장쇼크가 합병됐으며 모든 치료를 다했으나 심장쇼크가 악화되어 1994년 7월 8일 새벽 2시에 사망했다”고 보도하면서 대외에 공표했다. 아나운서들은 김일성의 사망 당시에 방송에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김일성 동지께서 뜻하지 않게 서거하신 것은 우리 당과 혁명의 최대의 손실이며 온민족의 가장 큰 슬픔"이라 말했다.
김일성 사망 공표 후 김용순 남북정상회담 예비접촉 북측단장이 정상회담 유보를 통보했고, 김영삼 대통령도 "남북정상회담 합의 원칙은 유효하다"고 입장을 밝히는 한편,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전군 비상경계령을 내렸다. 저녁에 박관용 청와대 비서실장, 이병태 국방부장관, 김덕 안기부장, 정종욱 안보비서실장, 주돈식 공보수석비서관 등과 특별히 설렁탕에 수육 5점을 추가한 채 만찬을 들며 사태분석을 했다. 당시 김일성 사후 일반 시민들은 대부분 기뻐했지만, 비상경계령으로 휴가도 못 나가게 된 남한 장병들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고, 남북정상회담 무산으로 이산가족들과 실향민들도 눈물을 흘렸다.
사후 북한 관영언론들은 정규방송 중단 후 장송곡 등을 틀었고, 장례기간 동안 평양 만수대 등 전국 각지 김일성 동상과 기념비 등 우상화 기념물은 조문객들로 가득 찼다. 당시 조문객들은 이성을 잃고 슬퍼하던 끝에 현기증을 호소하거나 기절해 병원으로 실려갔고, 당시 북한 내 병원들은 심장마비 환자들로 넘쳐났다. 이 상황에 대해 <조선일보>는 사회면에서 '집단 히스테리'로 표현했고,[36] 7월 13일 사설에서 북한 주민들을 '광신도'로 묘사했다.
장례 기간 동안 북한 당국은 외신들의 취재를 원천 차단했고, 조선중앙TV 측은 영국 WTN에 김일성 사망 공표 장면과 슬퍼하는 북한 주민들의 모습을, 일본 TBS에 김일성 유리관 안치 장면을 각각 제한적으로 제공했다. 7월 20일에 김정일은 금수산의사당에 안치되어 있는 김일성의 시신을 실은 영구차가 평양 시내를 한바퀴 돌고 다시 안치하도록 명령했다. 이날 아침 평양시민들은 김일성의 영구차를 보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모여들어 영구차가 지날 때마다 길가에 늘어선 군중들은 무릎을 꿇거나 엎드려서 눈물을 흘리며 ‘수령님, 수령님’하면서 통곡했다고 한다. 북한 지방주민들도 조직적 또는 개별적으로 TV를 시청해야만 했고 김일성의 장례식을 봐야만 했다.
반면 남한에선 국회 외통위에서 이부영 의원이 정부의 조문의사 표명에 대해 조심스레 물었으나, 오히려 보수언론에 의해 조문논쟁이 벌어졌고 결국 정부는 조문과 추모를 거부/금지했고, 심지어 <조선일보> 사설에서도 '김일성 주석' 호칭에 대해서도 혐오했다. 뒤이어 7월 20일엔 정부는 러시아로부터 넘겨받은 6.25 관련 비밀문서를 토대로 "김일성은 스탈린, 마오쩌둥과 사전협의 후 전쟁을 일으켰으며, 고로 김일성은 전범이다."라고 공표했다. 거기에 당시 북한의 장래를 두고 온갖 억측 보도까지 나돌았다. 이러한 조문파동은 며칠 후 서강대 총장 박홍 신부의 주사파 파동까지 번져갔다. 이에 북측은 '조문거부'에 반발해 7월 15일부터 대남비방방송을 실시해 남북관계를 파탄 상태로 몰아넣었다.
어쨌든 그렇게 장례식을 치르고 현재 김일성의 시신은 미라화되어서 그의 사무실이였던 주석궁을 개조한 금수산태양궁전에 안치되어 있다.
이후 북한 내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그리고 1년에 한 번 씩 정기 참배를 받고 있다. 하마터면 김대중 대통령도 남북회담 당시 북한측의 회담 참가 조건으로 이 시체에 대고 참배를 할 뻔 했다고.
참고로 김일성의 시신을 미라화하는데는 예전에 레닌을 미라시켜서 지금도 보존중인 러시아 기술진들이 투입되었다. 특히 북한은 김일성의 시신에 참배 받을 때에 모양이 찌그러지면 안된다고 보존제를 비싼 재료를 쓰는 등, 경제사정도 안 좋은 주제에 이 시체 유지시킨다고 100만 달러 이상을 퍼부었으며, 지금도 1달에 2~3번씩 방부처리, 2~3년에 1번씩 재보존처리 등 돈지랄을 하고있다. 추정치로 만들때 100만 달러 이상이 들었으며 지금도 연간 그에 준하는 돈을 퍼붓고 있다고 한다. 저 시체 보존만 안해도 북한은 아사자가 몇 만명은 줄어들 것이라고 하니까 말 다했다.
미라 제조에 쓰인 기술은 엠버밍이라고 하여 시체를 원형 그대로 보존하게 하는 것인데, 한참 전에 개발된 기술이지만 지금도 이 방법이 최상이라고 표현될 만큼 정교한 기술이나 그 대신 '''유지비가 미친듯이 깨지는''' 기술. 사실 엠버밍 기술도 고대 미라 제작 방법과 마찬가지로 썩기 쉬운 내장과 뇌는 제거하므로 그냥 껍데기만 남겨놓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후 아들 김정일도 사후에 박제가 되었다. '''물론 자기가 원해서.'''

7. 출처


  • 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3당합당에서 스타벅스까지 2권 - 강준만 저. 인물과사상사. 2006.

[1] 보천보 전투 당시 일본군측 기록에 29세로 기록되어 있어 실제로는 1907~1909년 생이라는 설도 있으나, 당시 의 나잇대를 감안하면 아무리 조혼이 성행했던 시대라도 어려운 값이다.[2] 독실한 개신교도로 김일성도 어렸을적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나갔다고 한다. 반석이란 이름도 베드로의 고사에서 따온 이름이다.[3] 본인의 자서전에 개명하게 된 상황이 나온다.[4] 왕윤성은 김일성의 회고록에서 '머리가 커서 왕다노대'로도 불렀다고 소개된 인물이다.[5] 안찬일 박사님의 해설, 이 영상 23분부터 시청 조선인민혁명군은 존재하지 않았다1[6] 그 산하 제2방면군장이 김일성이었음[7] 정상진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 해군 중위로 태평양함대 예하 해군보병연대에 소속되어 한반도 상륙작전에서 활약해 적기훈장을 수여받았고, 청진시의 정치범들을 석방시켰다.[8] 이때 소련은 이미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로 둘 계획을 세운 상태였다. 실제 소련군은 주둔후 지역에 있는 치안조직을 모조리 해산한 뒤 보안대를 편성하고 김일성이 수장인 조직 휘하에 두었으며, 김일성과 반대되는 옌안파 세력인 조선의용군이 입북하려하자 이를 막았다.[9] 이상우,'북한 40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특성과 변천',을유문화사,1990,pp349-350[10] 조선로동당 창건일의 유래다.[11] 남한에 비해 북한 지역에는 지주 세력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애초부터 저항의 동력이 충분치 않았다.[12] 스탈린은 히로시마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을 심하게 무서워했다. 그런 게 모스크바에 떨어질까봐 걱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과 싸우는 것을 피하고 싶어했다. 1949년 핵실험과 1953년 수소폭탄 개발을 통한 소련의 핵무장 또한 그런 맥락에서 볼 수 있다.[13] 공산주의에 대한 극동 최종방어선은 필리핀-일본으로 정하는 애치슨 국방장관의 선언이다. 대한민국은 제외되었는데, 이는 6.25전쟁의 한 원인으로 지목된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사실 애치슨 라인은 전쟁에 별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설이 중론이라고 한다.[14]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실전 경험과 장비가 전무했던 국군과는 달리 인민군에는 팔로군에 참여하여 국공내전이라는 실전을 겪은 베테랑 군인들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방호산의 6사단이 있다.[15] 현재는 대구광역시 의 일부인 달성군 사문진 나루터에 상륙하기도 했다. 사문진을 가 본 사람은 알겠지만 사문진교가 있고 바로 옆에 화원동산이 있다. 조금 더 올라가면 강정고령보도 존재한다. 사문진에서 안쪽으로 조금만 더 들어오면 화원역이 보이고 상인월배지구까지 이어진다. 이때 인민군은 정말 대구 함락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16] 전선사령부가 있던 수안보(충북 충주시 소재)까지 내려오기도 했다고.[17] 여기서 6.25가 왜 하필이면 6월 25일에 일어난 건지에 대한 해답이 나오는데 위에서 김일성은 50일이면 대한민국을 완전 점령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8월 15일 해방절에 부산을 점령해 조국통일 선언을 할 계획이었기 때문에 8월 15일에서 50일 전인 6월 25일을 전쟁 개시일로 잡은 것이다.[18] 서울 점령식을 마친 김일성은 경무대에서 휴식을 취했으며, 중앙청 지하실에 마련된 전선사령부에서 승리의 향연을 베풀고 축배를 들었다. 인민군은 사흘 동안 전승 축하회를 열고 반동 숙청에 나섰다. 병사와 장교들은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며 쇼핑을 하고 시내 구경을 하는 등 마치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처럼 행동했다. 만약 그 시각에 인민군 전차가 한강으로 쇄도하여 한강 다리가 끊겨 도강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던 국군을 공격했다면 한강 북단 곳곳에서 끔찍한 학살극이 벌어졌을 것이다.[19] 흔히 빨치산으로 대변되는 남한 내 공산세력은 군경의 지속적인 토벌로 지리산 일대를 제외하면 거의 박살난 상태였다. 6.25가 아니었으면 1950년 이내로 완전 와해되었을 것이란 것이 중론이다.[20] 당시 김일성에게 호언장담을 했다가 몸이 단 박헌영은 6월 28일 남로당원과 당 조직에게 총궐기를 호소하는 방송연설을 했다. 그것은 연설이 아니라 차라리 남로당원들을 향한 힐책과 비난이었다. 그런데 박헌영이 그렇게 "첫째도 폭동, 둘째도 폭동, 셋째도 폭동"이라고 다그쳤음에도 불구하고 남한 전역에서 인민군의 남침을 반기는 남로당의 폭동은 단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21] 이들은 “만고 역적 이승만 도당들의 학정으로 말미암아 선량한 인민들이 많이 굶어죽을 지경에 놓여 있으니 우선 가진 것을 다 같이 나눠 먹어야 한다. 그러면 인민공화국에서 1주일 안으로 식량을 넉넉히 배급해 줄 것이다”라며 모조리 강제로 빼앗아갔다(김성칠 지음·정병준 해제, 역사 앞에서-한 사학자의 6·25일기, 2016, 84~85쪽).[22] 북한에서 내려온 로동당원들은 급료 외에 같은 당원인 남한 출신 당원의 급료보다 3~4배가 넘는 출장비와 전시(戰時)수당을 받았다. 또 북한 화폐에 대한 교환비율을 8배로 높여 손목시계, 가죽구두, 피복류를 마구 사들였다. 이 모습을 본 서울시민들은 “북한 거지들이 서울을 지배하면 서울은 텅 비게 될 것”이라고 불평했다.[23] 일본육전사연구보급회편, 『한국전쟁(1)-38선 초기전투와 지연작전』, 1986, 명성출판사, 1986, 97쪽.[24] 실제로 남로당 고위 간부였던 박갑동은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없었어도 인민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버틸 힘이 없었다고 증언했다. 이유는 당연히 식량문제에 있었다.[25] 피난 도중 반공 시위대에게 잡힐 것을 두려워하여 자신의 전용 리무진(소련제 ZIS-110)까지 버리고 도망쳤다. 이 리무진은 국군에게 노획되어 1951년에 이승만 대통령이 워커 장군 부인에게 선물했다가 차량 고장으로 버려졌다. 1981년 유엔한국참전국협회가 미국 뉴저지 주 자동차 수집상이 소유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듬해에 되찾았고, 2013년 전쟁기념관에 기증되어 전시되어 있다.# [26] 미국에 맞서 조선(북한)을 도와 가정과 조국을 지키자[27] 단, 연설의 대부분은 김책이 했으며 이후 김일성은 성진시김책시로 부르도록 지시하였다.[28] 스탈린의 의도는 한반도같은 당시 상대적으로 가치 없는 땅에 미국의 역량을 묶어 놓고 유럽 쪽으로 공산주의를 확장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의 한반도는 지금보다 전략적 가치가 낮았다. 또 한가지 이론은 미군을 시험하려 했다는 설도 있다. 실제로 트루먼 대통령은 "스탈린이 나를 시험하고 있다. 한국전쟁에서 미국이 핫바지처럼 행동하면 스탈린이 계속 여러곳에서 도발할 것이다."라고 이야기 한 적이 있다.[29] 그나마 갑산파들도 김정일의 승계 과정에서 숙청된다. 지금 남은건 이른바 '백두파'라 하는데 한마디로 그냥 김씨 가문의 아첨꾼들이다.[30] 그렇다고 김일성이 오늘내일 하는 수준이였다고 보면 곤란하다. 정당성이 어찌되었든 제일 힘 쎈 놈이 짱이라고, 김일성은 소련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있어 마냥 무시할수는 없는 존재였다. 박헌영만 해도 본인의 실질적 기반은 죄다 남쪽에 남겨진 채로 자기 몸만 북쪽에 온 케이스라 불안하긴 마찬가지였고, 실제로 김일성을 찬양하는 시를 쓴 적도 있을 정도였다.[31] 다만 최광은 김일성 통치 말기에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으로 복직해 죽을 때까지 유임했다. 물론 군 상층부에서는 그냥 늙다리 바지사장이라고 뒷담화를 깠다지만.[32] 1974년에 아예 김정일을 '후계자'로 확정시켰고, 20년 후 사망하여 자연스레 김정일에게 넘어갔다.[33] 북한에도 선거 제도가 있긴 있다. 믿기지 않겠지만 김정일도, 김정은도, 그 외 여러 권력자들도 전부 다 투표로 뽑힌거다. 다만 후보는 단 한명 뿐이며, 투표소에 보위부 요원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고 있어서 반대표를 행사하면 누가 썼는지 다 보이니까… 그 외 다른 투표라고 해봐야 조선로동당에서 하는 거수 투표 정도가 있지만 주체가 그 조선로동당이니 결과가 너무 뻔하다. 사실상 말 그대로 그냥 쇼일 뿐이다.[34] 제목은 7월 4일이지만 실제로는 7월 9일자 뉴스다.[35] 탈북민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김일성이 죽었을땐 진심으로 북한 전역이 울음바다였다고 한다. 다만 김정일 사망 당시엔 이미 북한 사람들도 알 만큼 알아서 거짓으로 슬퍼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고.[36] 초판 기사는 <"김일성 죽었다" 흥분-불안>이었지만, 모종의 사정으로 다음 판에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