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군/한국
'''(1절)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 용사야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
'''삼천리 삼천만의 우리 동포들 건질 이 너와 나로다'''
'''(후렴)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 싸우러 나가세'''
'''(2절) 원수들이 강하다고 겁을 낼 건가 우리들이 약하다고 낙심할 건가'''
'''정의의 날쌘 칼이 비끼는 곳에 이길 이 너와 나로다'''
'''(3절) 너 살거든 독립군의 용사가 되고 나 죽으면 독립군의 혼령이 됨이'''
'''동지야 너와 나의 소원 아니냐 빛낼 이 너와 나로다'''
'''(4절) 압록강과 두만강을 뛰어 건너라 악독한 원수 무리 쓸어 몰아라'''
'''잃었던 조국 강산 회복하는 날 만세를 불러보세'''
'''간다 간다 나는 간다. '''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잠시 뜻을 얻었노라'''
'''가물대는 이 기운이'''
'''나의 등을 떠밀어서'''
'''너를 떠나 가게 하니 '''
'''이로부터 여러 해를 너를 보지 못할지나'''
'''그동안에 나는 오직 너를 위해 일할지니'''
'''나 간다고 슬퍼마라'''
'''나의 사랑 한반도야'''
'''- 거국가''', 작자 안창호
1. 개요
'''獨立軍'''
한국의 독립군은 하나의 단체라기보다는 일제에 저항하거나 교전한 여러 준군사조직의 통칭이다. 익히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는 단체들도 있으나 사실 사료상에 남지 않았거나 제대로 조직되어 있지 않았던 독립군 단체들도 많았다.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 등의 의병전쟁을 시초로 일제가 의병을 대대적으로 토벌한 1909년 남한대토벌과 국권을 빼앗긴 1910년을 전후하여 그 투쟁의 근거지를 만주로 옮겨갔으며[1] 1945년 한반도가 일제로부터 해방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하지만 사실상 그 활동의 전성기는 1910년대였고 1920년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를 거치면서 절정기를 맞았으나[3] , 1921년 자유시 참변으로 주력이 괴멸되었고 1931년 일제의 만주 사변으로 근거지마저 위협받게 되면서 차츰 둔화되어갔다.
해외, 특히 미주 등지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대, 대조선국민군단, 맹호군(한인국방경위대) 등등, 이주민들이 결성한 독립군 단체들도 있었으나 여기에서는 국내와 만주 일대에서 실제 일본군과 교전을 벌인 단체를 기준으로 서술하도록 한다.
2. 약사(略史)
[image]
중국에서 독립군 가족 기념 사진, 연대 미상[4]
한국에서 독립군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된 것은 1905년 을사조약 이후 각 지방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항일(抗日) 의병이나, 기원을 논한다면 1895년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일어났던 을미의병부터일 듯하다. 그 의기(義氣)는 장하였으나 그 출신들이 민중, 혹은 구식 군대(대표적으로 훈련도감 출신) 출신자임에 따라 제대로 훈련되어 있지 않았고 장비 또한 열악했다. 하지만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군이 일제에 의해 해산되고 시위 1연대 1대대원, 시위 2연대 1대대원 합계 1,200명이 이에 반하여 서울에서 시가전을 벌이고 각 지방 진위대들이 봉기하였으나 실패함에 따라 구(舊) 대한제국 군인 출신들이 의병에 합류하게 되면서 체계화되었다.
물론 많은 수의 시위대원과 진위대원들이 일제의 은사금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갔으나[5] 적지 않은 구 군인들이 의병에 참여함에 따라 본격적으로 일본군과 교전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의병 연합체인 13도 창의군 결성으로 인하여 그 군세가 전성을 맞이하였으나 여러 사정에 의해 실패한 뼈아픈 사실도 있다. 이때까지는 의병(義兵)이라 하여 임진왜란 당시부터의 근왕(勤王)의 기치를 내세웠었다. 대표적인 단체로 안중근 의사가 몸담고 있던 대한의군(大韓義軍)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투쟁도 헛되이 1910년 한일병탄조약에 의하여 국권이 피탈되자 이 의병들은 차츰 그 본거지를 만주로 옮겨갔다. 그 이유로는 첫째로, 국내에서는 일제의 단속이 심화되어 병합 직전인 1909년에 일제의 남한 대토벌 작전 같은 재앙이 닥쳤지만 만주는 당시 중국의 치안이 제대로 미치지 못했다. 둘째로, 만주는 외국 영토여서 일제의 단속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였다. 셋째로, 국내와 가장 가깝고 동포들이 가장 많이 이주한 곳이었고, 넷째는 의병 활동을 둘러싸고 지휘 체계 상의 혼란이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지휘 체계 상의 혼란이라 함은 의병장 중에 양반이 아닌 의병장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신돌석, 홍범도 같은 인물들은 출신상 양반은 아니었으나 양반 출신 의병장들보다 명성과 전과에서 낮지 않았다.
좁은 의미의 독립군은 1910년 국권 피탈 이후 중국, 만주, 연해주 지역으로 이동하여 조직적 무장 저항 운동을 벌였던 단체들로 한정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6] 만주와 조선 후기부터 조선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했었던 연해주 지역을 근거지로 삼아 독립군은 신흥무관학교로 대표되는 장교 육성기관을 설치하여 독립군 간부를 육성하였고[7] ,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후 격화된 만주에서의 무장투쟁은 1920년 홍범도의 봉오동 전투, 김좌진의 청산리 전투 등을 통해서 꾸준한 성과를 이루었다.
하지만 일본군보다 무기와 화력에서 열세인 탓에 게릴라전으로 나가야했다. 무엇보다 독립군은 통합된 지휘체계가 부재하다보니 수많은 무장단체들로 나뉘어서 투쟁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청산리 전투 직후 일본군이 보복으로 독립군의 기초인 만주의 한인들을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우며 독립군의 기반을 박살내기 시작하자, 어쩔 수 없이 근거지를 러시아 연해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자유시 참변이 발생하기도 했다.
당시 블라디미르 레닌은 약소 민족 지원이라는 새 러시아의 정책을 반영해 독립군의 항일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독립군 군자금은 당시 돈 50만 달러를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군자금의 용도를 둘러싸고 독립군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이의 갈등을 빚게 되었으며, 이승만의 가짜 명함 사건과 결부되어 결국 이동휘를 비롯한 무장투쟁파가 상해임시정부와 결별하게 된다. 무장투쟁파가 상해임시정부를 떠나게 되고 태평양 전쟁 말이 되어서야 이범석과 지청천이 겨우 광복군을 조직하게 되어 물리적 투쟁능력을 얻게 되나 이마저도 미군에서 인정받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김구 선생은 일본이 투항하자 오히려 눈물을 흘렸던 것. 결국 이 때문에 한국은 독립 과정에서 전혀 임시정부가 힘을 못 쓰고 미국과 소련이라는 또 다른 외세들에 의해 분할되어 지금에 이른다. 패전국인 일본, 독일이야 당연히 미국 등 연합국에게 점령당해 군정을 받았지만, 한국의 경우 패전국의 식민지였고 대대급도 제대로 구성 못할 소규모 전투인력을 보유한 독립운동 세력은 연합군의 일원도 아니라서 어쩔 수 없었다. 중화민국이 엄연히 살아있었고 팔로군도 중일전쟁 때 교전 세력으로 인정받은 중국과 다르다.
아무튼 1923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의하여 임시정부 주만 참의부가 독립군 단체 연합체로 창설되었으며 이외에 통의부, 정의부 등이 각각 설치되어 만주에서의 투쟁은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룩하며 계속 이어진다. 임시정부는 흩어진 독립군을 점차 하나로 통합하고 대외적으로 독립군이라는 하나의 단체로 인식시켰으며 각국의 명령권에서 독립군을 보호했다. 중국 등지에서 활동하는 독립군이 타국의 명령에 복종하는 일개 병사가 아니라 명령을 거부할수도 있는 '타국의 병사'로서 움직이는 데 임시정부가 큰영향을 주었다.
투쟁은 주로 낮에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내려와서 기습을 했다. 일본의 주재소를 공격해 일본 공무원과 일본제국 경찰들을 죽이고 행정망을 무력화시키거나 일본군 초소를 공격하여 일본군을 사살하곤 했다. 이는 일본의 심각한 골칫거리였다. 무엇보다 독립군 무장단체들의 일원인 대한신민군과 대한북로독군부가 합동작전으로 함경북도에 주둔하던 일본군을 기습공격해서 많은 수를 사살하고 격퇴하고자 출동한 일본군을 역관광시켜 후퇴하게 만드는 사건이 터지자 일본을 제대로 빡치게 만들었다.
이외에도 독립군이 계속해서 일본군을 공격해서 도발하자, 마침내 빡돈 일본 제국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토벌을 결심한다. 물론 중국 땅인 만주에서 활동할 구실을 만들고 싶어 일부러 마적단을 시켜 일본 민간인들을 죽게 한 '훈춘 사건'을 만들어, 이를 구실로 만주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해 독립군에 대한 토벌을 시작했다. 독립군과 일본군의 전투는 굉장히 치열했다. 특히 지형지물에 의존하며 게릴라전으로 나오는 독립군을 상대하는 게 일본군으로서도 쉬운 게 아니라서, 상당한 사상자를 냈다.
한편으로 임정 산하 한인애국단 소속으로 1932년 히로히토 천황 폭살 미수사건을 일으킨 이봉창 의사, 훙커우 공원 의거를 일으킨 윤봉길 의사 등도 역시 독립군 활동에 포함시킨다면 30년대의 투쟁 횟수와 성과 역시도 그다지 낮게 평가할 수는 없다. 이들의 투쟁이 없었다면 한국의 광복은 참으로 지난(至難)하였을 것이다.
3. 해방 직전과 직후
1940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직할부대인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였고 제2차 세계 대전의 추축국이었던 일본 제국, 나치 독일 등에 미국 등 연합국과 함께 선전포고를 하기도 하면서 일본군과 교전할 준비를 하기도 하였으나 1945년 해방이 되고 일본 제국이 패망하면서 한때 본래의 목적을 상실하기도 하였다.
이들 광복군은 해방 후 귀국하면서 미군정청에 의해서 '군대'로서가 아니라 개인적인 자격으로 귀환해야 했다. 이에 대하여는 해당 항목을 참조할 것.
한편으로 좌익 계열인 조선독립동맹의 당군(黨軍)인 조선의용군이 1942년에 결성되어 초대 김두봉, 이후 무정의 지휘 아래 활동하였다. 그 규모는 전성기에 5만 명으로 여타의 독립군 단체와는 그 규모가 달랐다. 다만 한국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에 북한군에 흡수되어 한국전쟁 시에 남한 침략의 선봉에 선 터라 한국 학계에서는 흑역사로 치부되는 아픈 과거가 있기도 했다. 한편으로 실제 조선의용군이 독립군 활동을 하긴 하였으나 일제시대에는 그 활동인원이 500명을 넘기 힘들었고 관동군이 항복하면서 소속 한인(韓人) 병사들을 그대로 인수하여 그 수가 그렇게 불어났다는 주장도 있다. 사실 1943년 광복 직전에 초대 지휘관 김원봉이 주력인원이라 할 만한 300명의 병사를 이끌고 광복군에 입대한 사실이 있기도 하다. 또한 조선의용군은 독립군으로서 일본군과 교전했던 것도 사실이나 1945년 이후에는 국공내전에 중국 공산당 세력으로 참전하기도 하여, 그 정체성이 독립군이기보다는 공산군으로 봐야한다는 의견도 있으나 현재 한국사학계에서는 공산군과 독립군이 중첩될 수도 있음을 인식하고, 즉 민족주의와 공산주의가 당시 시대와 식민지 상황 상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이들도 독립군으로 보고 있다.
아무튼 이후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하게 되면서 그동안의 독립군은 지금의 대한민국 국군으로 진화하였다. 최소한 국군은 그 법통을 항일 독립군에 두고 있음도 주지의 사실이다. 이에 대하여 국군의 기간병력 대부분이 일본군 및 만주군으로 구성되었으니 국군은 '황군의 적자'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창군 당시 국군에는 청산리 대첩 당시의 북로군정서 1중대장 강근호 장군, 광복군 출신으로 중국 국민당군 소장을 역임한 김홍일 장군 등 독립군을 법통으로 명시할 만한 상징적인 인물들이 대다수 존재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 외에도 군 출신 독립운동가 대부분이 대한민국 국군 창설에 관여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 초대 대한민국 해군참모총장인 손원일 제독이 있다. 더군다나 대한민국 해군은 수뇌부 전체가 상선사관단 출신이라 일본군과는 아예 관련이 없다. 산하의 대한민국 해병대는 해군 육전대라는 특성 상 일본의 해군육전대 및 간도특설대 출신이 대거 몰아졌고 2대 사령관까진 간도특설대 출신이지만 3대 공정식 장군은 본래 해군이었던 사람으로 일본군과 관련이 없고 김성은 장군도 마찬가지로 해군 출신이지 일본군이 아니다. 위키니트 중 해병대에 반감을 품은 이들이 많아 지속적으로 친일 황군으로 반달 당하는데 최소 현 해병대 수뇌부는 해병대의 아버지를 손원일 제독으로 받아들인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국방장관은 청산리 전투의 영웅 철기 이범석 장군이었으며, 초대 국방차관은 광복군 참모처장이자 중국 국민당 공군 참모장이었던 최용덕[8] 장군이었다. 광복군과 대한민국 국군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인 셈이다.
4. 독립군가
해당 문서 참조.
5. 주요 독립군 조직
- 구한말/대한제국 의병
- 좁은 의미의 독립군: 중국, 만주, 연해주 일대에서 활동한 조직적 무장 투쟁 세력
- 의열 투쟁 집단: 개개인 단위로 요인 저격, 폭탄 투척 등의 의거를 벌인 단체들
6. 무장
관련 기록의 부실로 인해 독립군의 무장에 관해서는 대다수의 정보가 알려지지 않았으나 일부 사실들을 통해 유추해볼 수는 있다.
한국 광복군은 일본군 장비 이외에도 소련, 체코슬로바키아나 독일제 총기 등을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러시아 내전 당시 사용되던 구식 무장들을 헐값에 사들였거나, 중국 국민당군[11] 에게서 다수의 독일, 체코슬로바키아제 병기를 보급받았기에 가능했다. 또한 김좌진의 북로 군정서군은 러시아 내전 때 연해주로 퇴각하던 백군 소속 체코 부대가 총기와 탄약 등을 매각해 줘서 무기를 확보하기도 했다. 그 외에 중국에서 활동하는 밀수업자로부터 무기를 밀수해서 구입하기도 했다.
6.1. 권총
6.2. 기관단총
6.3. 소총
- 조총, 천보총 - 구식 화승총을 쓴 게 아니라, 개머리판을 달고 뇌관식으로 개조하는 등 개량을 거친 것을 썼다. 단 이는 "독립군"으로 활동하던 시기가 아닌 국내에서 의병으로 활동하던 시기에만 사용했다. 만주에 가서 조총을 쓰진 않았다.
- 엔필드 소총 (전장식, 후장식 개조판 섞임)
- 게베어 1871
- 베르단 소총
- 그라 소총
- 무라타 소총 13년식
- 레밍턴 롤링블럭 M1867
- 아리사카 계열 (노획)
- 모신나강 계열 [12]
- Gew98 계열
- 스프링필드 M1903
- M1 개런드
- M1 카빈
6.4. 기관총
- 개틀링 기관총
- 맥심 기관총
- M1895 콜트-브라우닝(Colt-Browning) 기관총
- 루이스 경기관총
- 96/99식 경기관총 (노획)
6.5. 폭탄류
6.6. 대포류
6.7. 함선
- 계림호 독립군 비공식 군수지원함
6.8. 훈련기
- JN-4D 독립군 최초이자 마지막 보유 기체
7. 독립군의 의의 및 한계
몇몇 사람들은 광복군이 곧 한반도로 진격할 것이었고 자주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지만 사실 무장이나 규모등으로 보았을때 일제를 직접적으로 몰아낼 힘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수백만 단위의 군대를 태평양 전쟁 기간 동안 굴려댄 일제와 달리 독립군의 규모는 초기엔 많아야 천 명 단위[13] , 후기에도 수천 명 이상을 넘지 못했으며, 단위당 전투력은 더더욱 차이가 났다.[14] 이 때문에 독립군의 투쟁은 말그대로 처절했다.[15]
그럼에도 이런 규모나 총체적 성과에 대한 교육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일시적인 성과만 언급하는 방식으로 독립운동에 대해 교육하다보니 실제 독립군의 성과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어려워지는 원인이 된다.
사실 독립군의 의의는 이런 군사적 성과가 아닌 '''정치, 외교적 성과'''에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독립군의 활동이 성과를 직접적으로 내지는 못했더라도 이들의 존재가 직접적으로 연계하고 있던 중화민국에, 그리고 서구 열강에 지속적으로 한국인들의 독립 의지를 전달하여 끝내 일제 패망 후 한국의 독립을 이끌어낸 원인이라는 것이 이들의 진정한 존재 의의인 셈이다. 2차 대전이 한창 벌어지고 있던 1943년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카이로 회담은 특별조항에서 한반도의 독립,해방을 언급한바 있다. 이는 중화민국 총통인 장제스가 미 대통령 루즈벨트에게 건의한 것으로 실제로 장제스의 도움이 없었다면 일본은 1914년에 발발한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식민지만을 반환하고 1910년 병합한 한반도에 대해서는 통치를 계속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장제스가 이런 건의를 한 이유는 많은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이 만주 그리고 중국 본토와 연해주에서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한 결과이다.
실제 독립 이후에도 미국을 포함한 서구 열강들의 한반도에 대한 관심이나 이해가 심하게 부족했던 사실을 생각하면, 이러한 독립운동조차 이뤄지지 않았다면 일제가 패망한 후에도 그 고유 영토로 인정받아 독립을 이루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16]
이들의 투쟁이 조국의 8.15 광복을 직접 이룩하지 못했을지라도, 그들의 전투와 순국은 "우리는 일본의 지배를 원하지 않는다."는 인식을 다른 나라들에 확실히 심어주었다. 비록 일본이 연합국의 적국으로서 패망하였기 때문에 한국이 다행히 식민지에서 풀려났으나, 이마저도 없었다면 한 번이라도 돌아볼 나라들조차 없었을 테니까. 이들의 이러한 노력과 윤봉길 의사 등의 의거로 인해 중국의 장제스는 한국의 독립 요구를 카이로 선언에 끼워넣었고, 중국이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며 2차대전의 주요 승전국 중 하나가 된 후, 한국은 일본에게 협력하는 영토가 아닌 식민 피지배국으로 인식되어 해방을 맞게 되었다. 어쨌든 일본이 점령하던 곳이라 미국과 러시아 등 연합국의 군정이 이어지긴 했지만, 확실한 독립을 얻을 수 있었다.
특히 독립군이 한국군에 많이 들어왔기에 현대 한국군이 일본군과의 연결을 끊을 수 있었다. 만약 독립군이 없었다면 구 일본군 간부가 그대로 남아있는 최악의 경우나 지금보다 훨씬 일본군의 영향이 강한 군대로 남아있을 가능성을 점칠 수 있다. 한국군이 자신의 근본을 일본이나 독립 후 처음 시작한 게 아니라 항일 독립군, 나아가 조선 때로 둘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이지만 일제강점기 좌우익으로 분열되었던 독립군은 해방 이후 한반도로 들어오면서 격렬한 좌우익 대립의 씨앗이 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독립군의 흑역사도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해방 전 벌어진 빈주 사건이라던가, 해방 이후 독립군 출신 정치인들이 친일세력을 오히려 등용한 것이 그 예시.[17]
8. 기타
독립군에 속한 분들 중 아직 살아있는 분들이 계신다. 업적에 비해 큰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전부 돌아가신 것으로 착각받기도 하는 상황이 안타깝다.
광복군에 속하셨던 김영관 한국광복군동지회장님의 인터뷰가 있다. 꽤 상세하게 자신과 당시의 상황과 그 후의 이야기 등을 이야기하셨기에 독립군, 광복군에 관심있는 사람은 참조. 1부, 2부
9. 둘러보기 틀
[1] 일본의 대륙침탈 야욕으로 이미 러일전쟁, 청일전쟁을 거치면서 중국을 점령중이었고, 만주 일대에 일본군이 진출해있는 상황이었다. 만주가 그나마 일제의 눈을 피하기 좋은 곳이면서 접근성도 좋아서 독립활동의 거점으로 적합했다. (중국 대륙은 바다를 건너야 하니까)[2] 1,0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는 말은 과장이다. 청산리 전투 항목 참조.[3] 그 전의 대한광복군정부는 배치가능전력이 3만(!)에 이르는 강대한 세력이었지만 실질적으로 전투를 벌이지는 못했다. 비록 규모가 천여명으로 훨씬 적고 전과도 부족했더라도[2] , 전투를 벌여 일본군을 물 먹이는 결과를 확실하게 일궈낸 1920년대의 독립군이 더 의의는 크다.[4] 사진 속 독립군들이 중산복과 오스트리아식 야전모를 착용하고 있고, 태극기와 함께 청천백일만지홍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받는 시기일 것으로 추정된다.[5] 일제의 은사금은 항일의병만이 아니라 전국 각지의 양반들도 받았다. 그 이유는 항일의병을 조직할 수 있는 실질적 주체들인 양반 집단을 회유하는데 있었으니, 여기서 은사금의 목적을 알 수 있다[6] 국내에 잔류한 의병 세력은 1915년까지 미약하게나마 활동을 이어간다. 의병의 시대와 독립군의 시대는 약간 겹치는 셈이다. 마지막 의병 부대에 관해서는 채응언 참고[7] 대개의 교육과정이나 서적에서 청산리 전투나 봉오동 전투에 집중하느라 이 때를 어물어물 넘기기도 하는데, 사실 '''1910년대는 한국 독립군의 최전성기로''', 대한광복군정부의 군사 규모는 '''3만''', 훈련중이었던 한인은 '''수십만'''이었다.[8] 대한민국 공군의 아버지. 이른바 공군 창설 7인의 한 사람이다. 초대 국방차관과 2대 공군참모총장을 역임하였다. 중국 국민당 공군(중화민국군 공군) 창설의 주역이기도 하다. 당시 국만당 공군 대령의 신분으로서, 대한광복군 참모처장을 겸임하였다.[9] 좌익계열 대표적 군대.[10] 우익계열 대표적 군대.[11] 광복군과 국민당군은 공공의 적을 두고 있었기에 정치적으로도 군사적으로도 협력관계였다.[12] 만주의 위치가 소련과 가깝고 모신나강이 워낙 많다보니 제식소총처럼 많이 썼다.[13] 대한광복군정부에게는 3만의 전력이 있었으나 일본과 동맹을 맺은 러시아 제국의 방해로 1년 만에 강제로 해산당하면서 실질적으로 써먹지는 못했으며, 오히려 대한광복군정부가 와해되면서 대규모 군 집단 존재의 의의까지 회의감을 느끼는 이들이 다수 생겨나기도 했다.[14] 특히 자유시 참변에서 소련군의 공격으로 독립군은 주력이 와해되어 큰 타격을 받았다.[15] 독립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학철(1916)은 인터뷰에서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의 결과는 과장이며 실제 독립군은 일본군과의 교전에서 열에 아홉은 패배했으며 일본군 서너명을 사살한것이 대전과였다고 한다. 청산리와 봉오동에서도 다수의 일본군을 사살했다는 사실 자체에는 문제가 없지만, 산악전 특성상 사상자를 정확히 추산하는 것은 불가능한데, 한국 측에서는 최대치를 공식적 자료로 취급하고 있어 문제로 지적받는다.[16] 실제로 한반도와 비슷하게 일본에게 '강제 병합'된 류큐(오키나와현)는 아예 독립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자발적으로 일본으로의 복귀를 선택했고, 홋카이도의 아이누나 타이완 주민들(오스트로계 원주민과 한족계 본성인 모두)은 아예 하나의 공동체로도 인정받지 못했다. 독립에 스스로의 의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반례.[17] 대표적으로 김구가 있다. 정치판에서 지원세력과 자금 등이 부족했기 때문에 해방 전과 달리 친일파 청산에 소극적이고 친일 인사를 등용하는 등 모순된 행보를 보였다. 당장 경교장 제공자가 친일 기업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