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 이글스/역사

 



1. 개요
2. 연표
2.1. 초창기 (1986~1987)
2.2. 강팀, 그러나 콩라인 (1988~1992)
2.3. 약간의 부침 (1993~1998)
2.4. 4전 5기의 첫 한국시리즈 우승! (1999)
2.5. 첫 침체기 (2000~2004)
2.6. 짧은 중흥기 (2005~2007)
2.7.1. 김응용 감독 체제 (2013~2014)
2.7.2. 김성근 감독 체제 (2015~2017.05.22.)
2.7.3. 이상군 감독대행 체제 (2017.05.23~2017.10.03)
2.8. 꿈같았던 가을야구, 그리고 다시 하위권 (2018~)
2.8.1. 한용덕 감독 체제 (2018~2020.06.07.)
2.8.1.1. 한용덕 감독 1년차 (2018)
2.8.1.2. 한용덕 감독 2년차 (2019)
2.8.1.3. 한용덕 감독 3년차 (2020)
2.8.2. 최원호 감독 대행 체제 (2020.06.08~2020.10.30.)
2.8.3. 카를로스 수베로 감독 체제 (2021~)
2.8.3.1. 카를로스 수베로 감독 1년차 (2021)
3. 연도별 시즌 요약


1. 개요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베이징 올림픽 야구 등으로 야구가 다시 인기를 끌기 시작한 2000년대 후반 이후 야구를 보기 시작한 사람들은 대부분 한화 이글스를 일명 '''꼴칰''', 만년 하위팀, 사회인 야구팀 등으로 부르며 약체로 평가하고 있으며, 한화를 창단 초부터 답이 없던 만년 하위권팀이라 비난하기까지 한다. 신규 야구팬 유입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한 2008년부터 한화 성적이 급전직하했으니 이런 인식이 생기는 것도 사실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우선 한화는 창단 첫 해에는 2할대 승률로 꼴찌(7위)를 했지만, 이후에 KBO 역대 감독 통산 승률 1위인 김영덕 감독의 지휘 하에 황금기를 맞이해 본 적이 있는 구단이기에 '''아예 전성기가 없는 팀은 절대로 아니다'''. 물론 빙그레 시절이 마지막 전성기라고 해도 할 말 없지만, 창단 후 1992년까지 무려 4번의 한국시리즈 티켓을 거머쥐었고, 그 중에서는 정규시즌 1위도 두 번이나 포함되어 있는 강호였다. 한국시리즈에서 다 지기는 했지만, 1989년은 제도의 헛점[1]이 있었다는 점도 있었고 단일리그제라 정규시즌 1위의 가치도 무시할 수는 없기에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구간이다.
빙그레 시절 이후에는 성적이 워낙 들쭉날쭉했다. 이글스는 원년 이후 2007년까지 최하위는 단 한 번도 없었지만, 그 대신 1992년 이후로 2007년까지 정규시즌 1위는 물론, 정규시즌 2위조차도 없었다. 즉 1993년~2007년 사이에는 중위권 정도의 팀이었다는 것. 이 중에는 끈질긴 승부로 사상 첫 우승을 이룬 1999년[2], 2006년[3]도 포함되어 있었다.

2. 연표



2.1. 초창기 (1986~1987)


빙그레는 분명히 강팀이었지만 처음부터 강팀은 아니었다. 1군 진입 첫해인 1986년 시즌에서는 그 청보에게 밀리며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다. 청보는 만약 빙그레가 86시즌 꼴찌를 면했다면 구단 역사를 모두 꼴찌로 장식하는 진기록을 세울정도의 약팀이었으니 이 시기 빙그레가 얼마나 못했는지 짐작할수 있을 것이다. [4] 이듬해인 87시즌도 간신히 청보에게 꼴찌를 뺏기며(?) 6위를 기록했을 뿐 특별한 성적을 내비치진 못했다.

2.2. 강팀, 그러나 콩라인 (1988~1992)


2008년부터의 안습한 팀 성적 때문에 거의 잊혀지고 있는 사실이지만[5] 총 5회 준우승(1988, 1989, 1991, 1992, 2006년)으로 삼성 라이온즈두산 베어스에 이어 세 번째로 준우승을 많이 한 팀이다. 하지만 10회 준우승의 삼성과 7회 준우승의 두산은 각각 한국시리즈 우승도 8번, 6번씩이나 해 봤지만[6] 빙그레-한화 이글스는 뭐...[7] 그리고 한국시리즈 승률도 가장 낮은 팀이다(1회 우승/6회 진출, 16.7%).
2017년 기준으로 한화 다음으로 한국시리즈 승률이 좋지 않은 팀은 LG 트윈스다(총 2회 우승/4회 준우승, 승률 33.3%). 참고로 삼성의 한국시리즈 승률은 7회 우승/17회 진출, 즉 41.1%이다. 2000년대 들어와서 '''7회 우승'''을 했기에 승률이 이만큼 오른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1985년 우승은 한국시리즈를 안 치른 통합 우승이어서 승률 계산에서 제외했다. 한화보다 준우승 횟수가 2회 많은 두산 베어스의 한국시리즈 승률은 6회 우승/13회 진출인 46.15%이며, 한국시리즈 준우승 2회의 키움 히어로즈와 1회의 NC 다이노스가 있지만 이 경우는 한국시리즈 진출 경력이 각각 두 번과 한 번이므로 계산에서 제외했다. 그리고 가장 승률이 좋은 팀은 KIA 타이거즈로 11회 우승/11회 진출로 100%의 승률을 자랑한다.
해태(현 KIA)에 3번(1988년, 1989년, 1991년), 롯데삼성에게는 한 번씩 한국시리즈에서 패해서 준우승을 했다(vs롯데=1992년, vs삼성=2006년).
더구나 1989년, 1992년 시즌은 정규시즌 우승으로 한국시리즈에 직행했는데도 하위 팀(각각 2위 해태, 3위 롯데)에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런 경우는 단일리그로 치른 25번의 시즌 중 단 5번 일어났는데(1989 빙그레, 1992 빙그레, 2001 삼성, 2015 삼성, 2018 두산), 그 중 두 번을 당한 것이다.
이때 당시는 빙그레 이글스 시절로, 80년대 후반부터 화려한 투타 선수진으로 강팀으로 평가받았다.
당시에 해태 다음갈 정도의 에이스들[8]을 보유하고 있던 강팀이었으며, 88년부터 92년까지 5년간은 '''22422'''의 준수한 순위를 기록한 바 있다. 게다가 1989년과 1992년에는 앞서 언급했듯 정규 시즌 우승으로 한국시리즈까지 직행했다.[9]
하지만 이 시기에도 해태롯데에 밀려 단 한 번도 한국시리즈 우승을 거머쥐지 못했다.[10]

2.3. 약간의 부침 (1993~1998)


그러나 1993년부터 타선 주축이었던 이강돈, 이정훈, 장종훈 등의 선수들이 슬럼프와 부상으로 무너져버리기 시작하며 타선이 난국을 겪었다. 이 시기의 한화는 정민철, 구대성 등의 초일류급 투수들과 강석천, 이민호 등의 타자들로 겨우내 순위를 유지하는 형국이었다.[11] 이 시기의 신인지명은 실로 안습 그 자체인데 잘 된 게 1996년 신인 드래프트밖에 없다... 또한 1998년 외국인 선수 트라이아웃에서 뽑은 둘(부시, 치멜리스)은 부진하면서 제값을 못했다. 이 시기에는 신인드래프트의 연이은 실패로[12] 계속 특정 투수진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1999년 외인 타자 둘의 대박으로 기적적으로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재건에 성공하면서 우승을 거머쥐게 된다. 이때를 기점으로 팀의 이미지가 변하게 되는데, 1998년까지가 리그 정상급의 투수진에 의존하는 경기를 했다면 1999년부터는 강력한 타선을 앞세운 공격야구로 변화하게 된다.
1993시즌 시작 전 빙그레에는 몇 가지 악재가 겹쳤다. 동계훈련 도중 이정훈이 발목 부상, 장종훈이 무릎 부상을 당했고 마운드의 핵심으로 부상한 정민철은 방위병으로 복무했다. 그리고 노쇠화로 경기력이 하락한 한희민은 삼성으로 트레이드됐다. 장종훈은 잔부상에 시달리면서도 17홈런과 0.295로 나름 제몫을 했지만 이강돈은 0.233의 타율로 노쇠하고, 이정훈은 단 41경기 출장에 그쳤고 강석천은 시즌 도중 부상을 당했다. 유승안의 은퇴 공백을 잘 메워준 김상국과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마무리를 잘 담당했던 강정길 역시 부진했다.[13] 결국 한용덕이 13승, 정민철이 방위병임에도 10승, 진정필이 전천후 투수로 나와 9승으로 분전했지만[14] 결국 1993 시즌 61승4무61패의 성적으로 5위에 그쳐 6년 만의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로 빙그레 이글스의 전성기가 끝났다.[15] 신인들의 활약도 미미했는데 구대성은 아마추어 시절 혹사 여파로 시즌 내내 개점휴업했고, 공주고 시절 노히트노런으로 청룡기 우승을 이끌었던 노장진은 3승 4점대 방어율로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16] 6월 초까진 겨우겨우 4위권을 유지했으나 6월 들어 10연패로 급추락하면서 가을야구권에서 완전히 멀어졌다. 8월 중순 승패마진 -15까지 추락하며 쌍방울, 태평양과 꼴찌 경쟁까지 갔으나 이후 귀신같은 연승행진으로 61승4무61패로 5할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1993 시즌 최초의 감독 700승 달성을 끝으로 김영덕 감독은 감독직에서 은퇴했고[17], 1988~1990년 빙그레의 수석코치였다가 김영덕과의 불화로 롯데 감독으로 떠났던 강병철이 롯데와의 재계약을 거부한 뒤 이글스의 새 감독이 됐다. 한국화약 회장 김승연과 동생 김호연 간 재산 분할로 빙그레가 계열 분리되어 김승연의 자사 계열사의 이름인 한화 이글스로 구단명을 변경했다. 그룹명도 한국화약에서 한화그룹으로 변경됐고, 구단 로고도 바뀌었다.
한화의 이름으로 참가한 첫해인 1994년에는 초반 부진을 딛고 상위권으로 도약해 8월 한때 2위였다가 65승2무59패로 해태와 공동 3위로 마감하며 2년만에 포스트시즌에 복귀했다. 준플레이오프에서 선동열을 무너뜨리고 구대성의 1승 1세이브로 활약하며 2전 전승으로 포스트시즌에서 처음으로 해태를 이겼지만, 플레이오프에서 강력한 투수진에 김경기가 3경기 연속 홈런을 터뜨린 태평양 돌핀스에 맥없이 물러났다.[18] 원투펀치였던 한용덕이 시즌 막판 교통사고를 당해 포스트시즌에 나오지 못했던 점이 아쉬운 점이었다. 이 해 신인 박지상이 3할을 치며 이정훈의 공백을 메우고[19] 2년차 신인 이민호가 63경기에만 나서고도 팀 내 최다인 14홈런을 치며 강석천의 부상 공백을 메우고 세대교체의 시작을 알렸다. 그러나 장종훈의 홈런이 17개에서 10홈런으로 줄었고, 이정훈의 악바리 근성은 자신을 부상의 늪으로 빠져들게 했다. 팀 타선은 규정타석을 채운 타자가 김상국강정길 둘 뿐이었고 다이너마이트 타선이라는 팀 컬러와는 정반대로 물방망이였다. 하지만 30승[20]을 합작한 정민철한용덕의 원투펀치, 선발과 구원을 오간 더블스토퍼 송진우(9승10세이브)와 구대성(7승12세이브), 삼성에서 트레이드된 유망주 이상목과 원년 에이스 이상군 등이 골고루 활약해주며 버틸 수 있었다. 마이너스 득실에 팀 득점력도 최하위권이었지만 마운드의 힘으로 가을잔치에 초대받을 수 있었다. [21]
1994 시즌 이후 한화 팬들을 분노하게 만든 삼성과의 2대2 전격 트레이드가 이루어졌다. 부상으로 노쇠화가 왔다고 판단된 프랜차이즈 스타 이정훈장정순을 내주고 정경훈정영규를 데려왔다. 이 트레이드는 빙그레 때부터 동고동락했던 선수단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995 시즌 장종훈이 지난 두 시즌 간 부상으로 인한 부침을 극복하고 타율 0.326과 22개의 홈런으로 막판까지 타율왕과 홈런왕 경쟁을 펼칠 정도로 부활에 성공했다.[22] 그리고 삼성에서 건너온 정영규는 2할대 후반과 11홈런, 주전 2루수 김용선[23]은 10홈런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나머지 타자들의 성적은 뛰어나지 않아 팀 전반적인 공격력의 향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 해부터 주전 포수는 김상국에서 신인 강인권전형도 대신 OB에서 트레이드된 조경택으로 넘어갔다. [24] 투수에서는 정민철송진우가 동반 13승에 각각 3.21과 3.20의 방어율로 활약하고, 구대성도 4승 18세이브 [25] 방어율 3.54, 161탈삼진으로 활약하고 지난해 말 교통사고를 겪었던 한용덕도 비록 승운은 8승13패로 불운했지만 180.1이닝 소화에 3.29의 방어율로 건재함을 증명했으며, 유망주로 가능성을 보였던 이상목 역시 전천후로 134.1이닝을 소화하며 7승5세이브 3.75의 방어율로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독수리 5형제 이외에 활약한 투수는 전무한 수준이었다. 이상군은 혹사와 노쇠화 여파로 4점대 후반의 방어율로 부진했으며 무엇보다 신인 투수 신재웅이 부상으로 인해 11경기 등판 5점대 방어율로 부진했다. 결국 투타 부조화로 인해 한화는 전반기 롯데와 3, 4위 경쟁을 하며 4위로 마치고도 후반기 급격하게 추락하여 55승 71패, 승률 0.437로 6위에 그쳤다. 1987년 이후 8년만의 4할대 승률을 기록했다.
하지만 1996년 신인 드래프트로 신인 4인방(홍원기, '''송지만''', 이영우, 임수민) 외 기타 알짜 신인[26]들을 발굴해내며 타선도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1996년 신인 4인방이 활약하고 구대성을 굴려서[27] 정규시즌 3위(70승1무55패)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나[28] 정규시즌에서 9승9패로 팽팽하게 맞섰던 현대 유니콘스에 1차전 0-15 대패를 당하는 등 2전 2패로 광탈했다.[29] 이 해 송지만은 입단하자마자 0.287의 고타율에 18홈런을 쳐주고 이영우홍원기, 임수민도 데뷔 첫 해부터 주전으로 활약했다. 장종훈이 2할대 중반의 타율로 주춤했지만 15개의 홈런으로 일발장타 능력은 아직 남아있었고, 부상 및 부진으로 허송세월했던 강석천이 2할대 후반의 타율로 재기에 성공했다. 마운드에서는 구대성 이외에도 송진우정민철은 나란히 200이닝 이상 소화에 15승과 13승[30]을 거두며 원투펀치 역할을 해줬고 이상목은 9승13패로 다패왕이 됐지만 3.97의 방어율로 선발진의 한 축을 담당했다. 한용덕은 이전 시즌보다는 부진했지만 4점대 중반의 방어율과 8승으로 버텼다. 이상군이 8점대 방어율로 망하며 쓸쓸히 은퇴했지만 한화는 지난해보다 향상된 투타 전력으로 2년 만에 포스트시즌에 복귀했다. 새로운 신예들의 발굴과 함께 3년 동안 2번의 포스트시즌으로 이끌었던 강병철은 재계약에 성공했고, 1997 시즌에는 우승후보 중 하나로 꼽히게 됐다.
그러나 홀수해에는 가을야구 진출에 실패하는 징크스를 이어가며 1997시즌 시즌 초반부터 최하위권으로 내려간 끝에 51승2무73패로 7위에 그쳤다. 최하위였던 롯데에도 6승12패를 기록했지만 6위 현대를 11승2무5패로 호구잡았기 때문에 7위라도 할 수 있었다. 방어율 4위에 팀타율은 6위였지만 순위는 7위로 1점차 패배가 잦았다. 지난해 15승을 거뒀던 송진우가 6승 투수로 추락해버리며 14승을 올린 정민철 혼자서 팀을 이끌었다.[31] 그 외엔 구대성이 8승 25세이브에 3점대 방어율을 기록했다.[32] 신재웅은 이 해 3점대 방어율과 규정이닝으로 커리어 하이를 기록했다. 타선에서는 강석천이 0.322의 고타율과 17도루, 장종훈이 2할 후반대의 타율과 22홈런으로 활약했고, 몇 년 간 한화 유격수로 활약하는 백재호가 16홈런을 기록했고, 삼성에서 방출되어 한화로 온 전상렬도 괜찮은 활약을 했지만 지난해 가능성을 보여준 신인들이 대거 소포모어 징크스의 직격탄을 맞았다.[33] 이강돈은 이 해를 끝으로 은퇴했다. 신인드래프트에서는 주전 유격수가 된 백재호와 중간계투에서 활약한 김해님 정도만 건졌다. 1차지명인 이성갑은 1군에서 공을 던지지도 못하고 은퇴했다.[34]
1998 시즌에는 짝수해 포스트시즌 공식 그런거 없이 55승5무66패로 시즌 7위로 마감했다. 개막 직전만 해도 정민철, 구대성의 활약과 타자용병들의 가세로 인해 OB, 현대 등과 함께 우승후보로 거론될 정도였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실망스러운 결과가 나왔다. 시즌 초반에는 선두를 질주하다가 순위가 내려가면서 올스타 브레이크 도중 강병철 감독은 성적부진으로 경질되었고[35] 이희수가 감독대행을 맡았다. 이 해 한용덕이 중간계투에서 맹활약하며 7승 4세이브 2점대 방어율로 부활하고 뒷문은 구대성이 8승24세이브로 꾸준한 모습을 보였지만 정민철은 그동안의 누적된 이닝으로 인한 부상 여파로 간신히 10승을 채우는 데 그쳤고, 송진우는 전년도와 똑같은 6승으로 마무리했다. 이 해 팀내 최다 이닝과 노장진[36]과 함께 최다선발등판을 기록했던 이상목은 9승17패로 다패왕을 기록했다. 외국인 용병제가 시작된 1998년 한화는 타자용병 마이크 부시와 조엘 치멜리스를 뽑았는데 부시는 MLB 경력에 마이너리그에서 100홈런 이상 떄려낼 정도로 기대를 많이 받았지만 변화구에 약점이 잡히고 부상으로 드러누우며 2할대 초반의 타율과 10홈런에 그친 채 퇴출되었다. MLB 경력이 없고 마이너만 전전한 뒤 대만야구에서 한 시즌 활약했던 치멜리스는 17홈런 63타점으로 타선에서 활약했지만 수비 불안으로 재계약에 실패했다. 외국인 타자를 제외한 국내 타자는 16홈런-25도루를 기록한 송지만과 13홈런을 기록한 유격수 백재호 외에는 별다른 활약이 없었다. 장종훈은 17홈런을 기록했지만 한창 전성기에는 미치지 못하는 활약이었다. 이 해 현대의 독주로 유례없는 순위싸움이 벌어져 시즌 막판까지 포스트시즌 경쟁을 펼쳤지만 마지막 14경기에서 경쟁팀 해태와 OB와의 연이은 맞대결에서 밀리는 바람에 2승1무11패에 그치며 4위에서 7위로 추락하고 말았다.[37] 시즌 118경기를 치른 시점까지 한화는 4위였으나 이후 1무 포함 7연패하면서 쌍방울에도 뒤진 7위로 마쳤다.

2.4. 4전 5기의 첫 한국시리즈 우승! (1999)


1999년에는 감독을 강병철에서 이희수로 교체하고[38], 기존의 촌스럽던 유니폼을 새롭게 변경했다. 그리고 지난해 저조했던 외국인 선수들을 모두 교체하고 댄 로마이어, 제이 데이비스[39]를 영입했다.
그리고 아무도 예상치 못했지만[40] 드디어 1999년 한국시리즈에서 한을 푸는 우승을 차지했다. 이때만 해도 '세기말의 패자' 라는 칭호를 얻었다.
대구에서 열린 삼성과의 시즌 개막전에서 3연전을 싹쓸이한 한화는 개막 후 7승2패로 매직리그 1위를 달렸다. 하지만 곧바로 투수 로테이션에 문제를 겪으며 연패의 수렁에 빠졌다. 그러면서 4월 28일 3위로 추락한 데 이어 5월 한 달 동안 장종훈의 연일 통산기록 갱신 소식[41]과는 별개로 월간 팀 승률은 10승16패로 3할대 승률에 그쳐 이번에도 가을 야구와는 인연이 없는 듯 보였다. 급기야 대전 홈경기에서 9연패에 빠지며 매직리그 1,2위 삼성과 LG에 7~8경기차로 벌어졌고, 홈관중으로 1,000명도 채우지 못하는 등 홈팬들의 외면을 받기도 했다. 이희수 감독은 삼성과의 홈경기에서 구대성이 완투승을 앞두고 심판의 석연치 않은 볼판정으로 밀어내기 동점을 허용하고 역전패를 당하자 이영재 심판에게 격분하여 폭행을 휘둘러 12경기 출장금지 징계를 받고 유승안 수석코치가 대행을 맡았다. 하지만 이 일이 반등의 포인트가 되었는지 한화는 살아나기 시작하며 마침 이 무렵 투수진 붕괴로 성적이 내려가기 시작한 LG를 야금야금 쫓기 시작했다. 시즌 초반 다소 부진했던 로마이어가 적응을 마치며 미친듯이 홈런포를 가동하기 시작한 6월에 15승 2무 9패를 기록하며 월간 6할대 승률로 반등한 한화는 올스타브레이크에 들어서는 시점인 7월 10일에는 다시 LG를 제치고 매직리그 2위에 복귀해 LG와 치열한 순위 싸움에 들어갔다. 리그 재개 후 다소 부진하며 잠시 LG에 매직리그 2위 자리를 내줬으나 전반기에 다소 약했던 LG와의 3연전에서 싹쓸이 승리에 성공하며 8월 6일에는 매직리그 2위에 올라섰고 8월 8일 이후로는 단 한 번도 2위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그러나 두산, 롯데, 현대 등 강팀들이 모인 드림리그 구단에 비해 쌍방울이라는 최약체가 있는 매직리그 구단들의 승률이 떨어졌다는 점이 문제점였다. 심지어 시즌 중반에는 드림리그 3위 현대가 매직리그 1위 삼성보다 승률이 높았던 기간도 있었다. 한 리그의 3위 팀이 다른 리그의 2위 팀보다 승률이 높을 경우 와일드카드로 준플레이오프를 치러야 해 한국시리즈 진출을 위해서 한화는 여유로운 2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안주할 수 없었다. 지난해 압도적인 우승을 거둔 현대는 에이스 정민태가 20승을 달성하는 등 뛰어난 전력을 보여주며 8월 한때 롯데의 추락을 틈타 드림리그 1위에도 도전하는 등 좀처럼 한화의 추월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9월 들어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와 연이은 태풍으로 경기가 계속 중단된 이후 현대에 승차 1.5경기차로 뒤진 상황에서 인천에서 현대와의 단두대매치 3연전을 치르게 됐다. 한화로서는 행운이 따랐는데 앞서 LG전과 삼성전이 모두 우천취소되며 현대와의 3연전에 전력손실 없이 온전히 총력전을 펼칠 수 있게 됐다. 9월 24일 현대와의 운명의 시리즈 첫 경기에서 정민철의 완봉으로 정민태를 제압하며 4-0으로 기선제압한 한화는 다음날 이상목의 호투로 6-1로 승리해 현대를 추월하는데 성공했다. 여세를 몰아 마지막 경기까지 타선이 폭발하며 9-7로 역전승하며 1.5경기차 열세를 도리어 1.5경기차 우세로 바꾸며 준PO 생략 가능성을 높였다. 기세가 오른 한화는 연승을 10연승으로 늘리며 현대를 탈락시키고 도리어 삼성을 제치고 매직리그 1위에 올랐다. 하지만 드림리그 순위가 마지막 날에 바뀐 것처럼 한화 역시 마지막날 삼성과의 경기에서 패배해 매직리그 2위로 마쳐 드림리그 1위를 차지한 두산을 플레이오프에서 만나게 됐다.
1993년 이후 한화는 투수진에 의존하는 경기를 했으며, 당시 한화에는 정민철, 구대성, 송진우, 이상목이라는 탑급 투수진이 있었다. 그러다가 1999년 외국인 선수를 잘 뽑은 덕에 다이너마이트 타선을 재건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탑급 투수진과 다이너마이트 타선 2기가 맞물린 게 바로 1999년 시즌, 우승이었다.[42]
사실 이 우승은 운도 어느 정도 작용했는데, 당시 드림-매직 리그로 나뉜 제도 덕을 봤다. 승률상 4위로 턱걸이했는데 그마저도 후반기 10연승으로 전체 5위이자 드림리그 3위 팀인 현대 유니콘스를 간신히 따돌리고 준플레이오프를 무산시켰을 정도였다. 드림리그의 두산과 롯데는 더 만만한 한화와 맞붙기 위해 막판 혈전을 벌였다. 그러나 팀 투타 WAR 총합은 롯데 다음으로 2위였고, 댄 로마이어(홈런 수 45)와 제이 데이비스(30-30클럽)라는 역대 최고의 외국인 타자 듀오와 당대 최고급 거포 송지만(20-20클럽), 그리고 전성기만은 못해도 제 몫은 다한 장종훈(홈런 수 27)까지 이어지는 상위 타선과, 포텐터진 이영우, 임수민의 테이블 세터, 심지어 백재호, 강석천과 같이 쉬어갈 수 없는 하위 타선(강석천이 이영우, 임수민 포텐터지기 전엔 1번 붙박이었는데 하위타선으로 내려온 것) , 그리고 송진우, 정민철, 이상목이라는 확실한 선발진과 철벽 마무리 구대성으로 이루어진 투수진까지 단기전이라면 충분히 사고 칠 수 있는 조합이었고[43], 이를 바탕으로 플레이오프에서 '''전체 승률 1위 팀'''이었던 두산을 4전 전승으로 스윕하고 삼성과의 준결승에서 방전된 롯데를 4:1로 비교적 손쉽게 제압했다.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가 존재하는 기존 방식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의견이 많지만 당시 드림-매직 리그 1, 2위 간 교차로 이루어진 플레이오프는 기존 제도의 5전 3선승제와 달리 한국시리즈와 같은 7전 4선승제로 한화는 이 플레이오프를 4승으로 스윕해 전력누수를 최소화한 반면 상대 팀 롯데는 그렇지 못했다. 하지만 4위 팀의 우승이 어려운 것은 분명하다. 준플레이오프 제도가 실시된 1989년 이래로 준플레이오프부터 시작해서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팀은 단 2팀(3회) 뿐이란 사실이 증명한다. 그 사례는 정규 시즌 3위로 우승을 차지한 1992년 롯데와 2001년, 2015년 두산인데, 준플레이오프부터 어드밴티지가 없이 경기를 치뤄야 하는 4위팀이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옛날로 거슬러 가면 예외는 있는데 1984년에 종합 승률 4위였음에도 삼성의 져주기 시전으로 후기 리그 1위를 차지하며 한국시리즈를 차지한 롯데 자이언츠가 있다.

2.5. 첫 침체기 (2000~2004)


그러나 2000년 정민철이 일본 진출하면서 투수진이 무너져서 주춤하게 되었고, 이후 몇 년 간 한화의 야구는 강타선에 뭔가 모자란 투수진이라는, 90년대와는 180도 다른 이미지가 된다. 일단 2000년에는 장종훈이 전성기만큼은 못 미쳐도 28홈런-81타점을 기록하며 여전히 건재했고, 송지만이 데뷔 후 최고의 시즌을, 외국인 타자 제이 데이비스댄 로마이어가 버티고 있어서 괜찮은 편이었지만, 정민철의 일본 진출과 이상목의 부상, 한용덕의 연이은 부진으로 인해 믿을만한 투수가 송진우구대성, 고졸신인 조규수밖에 없을 정도로 투수진이 망하면서 7위에 그쳤다.
2001년 시즌을 앞두고 감독을 LG 시절 신바람 야구를 선도한 이광환 감독이 부임하였고, 구대성이 일본 오릭스 블루웨이브로 이적하게 되며 투수진이 더욱더 약해졌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한용덕이 마지막 불꽃을 태웠고, 이상목이 복귀하며 어느정도 숨통이 트였고, 타선에서는 고졸 신인이던 김태균이 자리잡음과 동시에 유례없던 난전에 힘입어 4위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지만, 두산에게 1승도 못거두면서 상위 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44] 또한 이해 한화가 외인을 엄청나게 교체해대는 바람에 2002년부터 외인 교체 제한 규정이 생기는 단초를 제공했다. 2002년에는 정민철이 요미우리 퇴단 후 국내로 복귀했고, 백전노장이던 송진우가 220이닝을 소화하며 18승을 거뒀고 송지만이 38홈런-104타점을 기록하며 팀 타선을 이끌지만 장종훈의 노쇠화와 김태균은 라식수술 후유증과 2년차 징크스를 겪으며 7위로 추락, 이광환 감독은 시즌 후반부터 거의 태업에 가까운 운영을 선보이다가 시즌 후 사임한다.
이광환 감독의 사임 이후 빙그레 선수 출신인 유승안이 한화 이글스의 새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팀을 추스르던[45] 2003년에는 시즌 최후반에 연승가도를 달리며 SK와 막판까지 4위 경쟁을 했지만, 두산 베어스한테 고춧가루를 얻어맞고 4위 경쟁자 SK 와이번스에도 패하면서 5위로 아쉽게 시즌을 마치게 된다. 시즌 종료 직후 이 해 부진했던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인 송지만을 내주고 권준헌을 영입하는데, 이는 구단 역사뿐만 아니라 '''프로야구 역사상 최악의 트레이드를 논할 때 한번씩 회자되는 트레이드이다.'''[46]
2004년에는 유승안 시프트를 처음으로 실현했으며 빙그레-한화 역사상 최악의 관중 흥행을 보였다. 팀 성적도 8위에 겨우 반 경기차 앞선 7위였다.

2.6. 짧은 중흥기 (2005~2007)


그러다가 2005년, 김인식 감독을 영입해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준우승 한 번을 비롯해 3년 연속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47] 2006년 한국시리즈엔 삼성과 함께 명승부를 펼치기도 하며 강팀으로 인정받았다. 참고로 2006,2007년에는 똑같이 67승57패2무를 거두었다. 이는 92년 김성근의 삼성이 거둔 성적과 동일하다. 2018년 반짝하기 전까지 이글스의 최후의 전성기. 구대성, 정민철, 송진우, 문동환 등의 노장이 마지막 불꽃을 태웠으며 이범호와 김태균은 20대 초 중반의 나이에도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중심으로 소년가장 역할을 했고 2006년 에는 혜성같이 등장한 괴물 류현진을 앞세워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이 시기는 한화팬들에게 자랑스러운 때였다. 한화 이글스 하면 약팀이라는 이미지가 전혀 없었던 시절. 야갤에서 팀이 분리되기 이전, 롯데의 키보드 워리어들과 맞설 수 있는 건 칰키워 뿐이라는 말까지 있었고, 골수 대전팬들은 그야말로 자부심이 넘치던 시기였다.'''그러나......'''

2.7. 기나긴 암흑기 (2008~2017)


단순히 행복야구 등의 약팀의 이미지로 바뀐 것이 아니라 팀의 통산 성적도 크게 좀먹었다. 2007년까지는 팀 성적이 5할에 +9승이었는데, 이 암흑기동안 2013년에는 LG 트윈스한테도 통산승률이 따라잡혔고, 롯데 자이언츠한테도 2020년 기준으로 통산 승률이 따라잡혔다.[48] 프랜차이즈 스타를 오랫동안 기용하는 팀 특성과 김인식 감독의 지나친 노장 선수 신뢰+그로 인한 혹사 등이 겹치면서 한화의 기둥뿌리는 '''밑에서부터 썩어가고 있었다.''' 기존 선수들의 뒤를 이을 신인 선수 육성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 이후 송지만, 장종훈, 정민철, 문동환, 김민재, 송진우, 구대성 등등 팀을 지탱하던 주축 선수들이 차례차례 은퇴하거나 타 팀으로 이적하고[49] 그나마 젊은 피로 꼽히던 이범호[50], 김태균의 일본 프로야구 진출[51], 김인식+한대화로 이어지는 선수 혹사와 리틀 야구단식 투수 운용, 그리고 철밥통 코치진의 결과물로 보이는 현기증 나는 수비, 병맛 쩌는 중계플레이로 막장으로 변해갔다.
흔히 지금의 암흑기는 2008 베이징 올림픽 직후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지만[52], 그 하락세의 조짐은 2000년대 초반부터 이미 보이고 있던 상황이었다. 8888577, 6668587667비밀번호를 작성하지는 않았기에 공론화가 되지 않았을 뿐 2000년에는 투수진의 약화로 전년도 우승팀이 전체 7위로 추락했고, 4위 자리를 두고 역대급으로 치열한 경쟁을 펼쳤던 2001년에는 4위로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했지만 끽해야 승률 0.473이었던 데다가 준플레이오프에서는 두산에게 2패로 스윕당하며 광탈. 2002년~2004년에는 각각 승률 0.461, 0.473, 0.398에 그쳤다. 그렇게 2000년부터 2005년 김인식 감독 이전까지 승률 5할도 못 해봤다.
김인식 감독 부임 이후인 2005년부터 2007년까지 3년 연속으로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하나 노장 선수의 비중이 너무 높았고 2군 구장도 없었던 상황에서[53][54] 리빌딩, 신인 선수 육성은 어불성설이었다.[55][56] 2008년 당시 한화는 베이징 올림픽으로 인한 휴식기 전까지 56승 46패(여담으로 이 해에는 연장 무승부가 없었다) 승률 .549로 3위로 당시 2위였던 두산 베어스와는 승차없이 따라가고[57]있었지만, 베이징 올림픽 이후 무려 '''3주 동안 류현진 등판 경기'''를 제외한 나머지 경기에서 전패했고('''3승 12패'''), 그 뒤에 분전했지만 8승 16패로 승패마진을 제대로 까먹어서 64승 62패 승률 .508로 삼성에 1경기차인 5위로 마감한다. 이게 2018년 3위로 가을야구 하기까지 마지막 5할 승률이였다.
그 이듬해인 2009년에는 초반에 살짝 반짝했으나 무너진 선발진과 얇은 선수층, 주축 선수들의 부상 등의 요인들로 인해 연패를 밥 먹듯이 하며[58] 압도적인 최하위를 기록하게 된다.
다만 이 암흑기는 역설적으로 그간 전통 비인기팀이던 한화를 KBO의 흥행기관차 중 하나로 올려놓는 역할을 했는데, 맨날 꼴찌만 하면서 나는 행복합니다라거나 팬들의 보살 이미지가 정립되며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다.

2.7.1. 김응용 감독 체제 (2013~2014)


'''빙그레 라이벌의 복귀'''
'''제9대 김응용 감독'''
2012 시즌 후 대대적인 팀 강화를 위해 '''김응용'''을 감독으로, 김성한, 김종모, 이종범, 이대진 등 과거 해태 타이거즈 출신 코치들을 대거 영입하는 강수를 두기도 했다. 그러나 KBO 리그 개막 13연패 신기록을 세우면서 시작한 김응용의 2년은 김인식 감독의 뒤를 이어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투수진 혹사와 더욱 심각한 팀 운영으로 더 험난한 리빌딩의 여정만을 남겨둔 채 '''잃어버린 2년'''으로 남게 되었다. 참고로 2013년을 기준으로 LG 트윈스한테 통산 승률을 역전당했다.
2014년 10월 12일, 롯데 자이언츠에게 패하여 시즌 9위를 확정하면서, 한화는 3년 연속 꼴찌를 기록함와 동시에 '''KBO 역사상 최초의 7위 꼴찌, 마지막 8위 꼴찌, 최초의 9위 꼴찌에 이어 마지막 9위 꼴찌를 마크하는 대위업을 이루고야 말았다.''' 2014년 10월 13일, 시즌 마지막 홈경기인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21점차로 지면서 시즌 평균자책점 '''6.35'''를 기록하여 삼미의 시즌 평균자책점 6.23 기록까지도 경신하고 말았다.[59]

2.7.2. 김성근 감독 체제 (2015~2017.05.22.)


'''구단 체질개선을 위한 도전'''
'''제10대 김성근 감독'''
김응용 감독은 2년 임기를 끝으로 물러나고, 5886899라는 비밀번호를 더 늘리기 싫었던 구단은 이글스 마당에 올라온 글과 한 팬의 한화 본사 앞 1인 시위 , 그리고 다음 아고라 청원에 서명한 팬들의 의지를 담아[60] 제10대 감독으로 야신 김성근 감독을 영입한다. 김성근 스타일은 일시적인 도핑에 가깝다는 일부 의견도 있지만, 적어도 비밀번호는 한 번 끊어줄 필요성이 있고 당장 팀의 체질 자체를 바꿀 수 있는 감독은 김성근 감독뿐이라는 점에 구단과 팬들이 모두 동의한 것. 일부 네티즌들 사이에서 김성근마저 한화를 살리지 못하면 한화는 아예 구제불능인 팀이니 해체하라는 이야기가 나오니 할 말 다 하긴 했다.[61][62]
이어 김광수 수석코치, 박상열 투수코치, 아베 오사무 타격코치로 이루어진 일명 '김성근 사단'[63]을 영입하고 조경택 배터리코치와 구단 레전드인 강석천, 송진우 코치, 김응용 前 감독을 따라 한화로 왔던 이종범, 김종모, 이선희 코치 등 9명의 코치와 재계약을 포기했다. 그리고 새로 영입한 코치들, 특히 일본인 코치들의 면면이 아주 화려하다. 특히 통산 165승에 빛나는 1980년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에이스 니시모토 다카시 투수 코치, 히로시마 카프의 1990년대 붉은 악마 타선의 일원이었던 쇼다 고조 타격코치[64] 등 일본프로야구에서도 레전드급 선수 출신의 코치들이 왔다.
김성근 감독은 취임식 때 선수단 전원에게 이발 및 면도 발언을 시작으로 강훈련을 예고했다. "한 가지 재밌는 아이디어를 이야기하면 김태균은 내일부터 3루에서 반 죽을 것이다" 등의 발언은 덤. 이후 야구 관련 커뮤니티들에서는 훈련 받느라 고생하는 한화 이글스 선수들 사진을 보며 즐거워하는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다. 과거 편하게 훈련 받던 것과 대조하는 짤방이나 다시 김성근 감독에게 붙잡힌 정근우별명왕을 소재로 하는 짤방도 흥하는 중.
2014년 11월 10일자로 정승진 대표이사[65][66]가 물러나고 김승연 회장의 비서실장인 김충범 부사장이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확실하게 밀어주기 위한 전략이라고 봐도 될 정도.
FA 시장에서도 내부 FA인 김경언을 잡아두고 외부 FA인 권혁, 송은범 , 배영수를 영입하여 얇은 투수진 뎁스를 크게 보강하였다. 그리고 12월 5일 각각 롯데 자이언츠삼성 라이온즈에서 뛰었던 셰인 유먼미치 탈보트를 영입하면서 새로운 외국인 투수를 영입하는 모험보다는 어느 정도 검증된 선수를 영입하는 행보를 보였다.
시범경기에서 10전 2승 8패로 꼴찌를 하며 아직도 불안함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쌍방울 감독 시절에도 시범경기는 완전 망치고 정규시즌은 3위로 마무리 했던 경험이 있으니 기대감을 가져보자.
뚜껑을 열어 봤더니 시범경기는 시범경기였을 뿐. 지난 5년과는 달라진 모습을 보이며 4월의 승률은 5할대를 확정하였다. 입칰효과입성큰효과의 대결은 일단 입성큰효과의 승리. 5월에는 7위까지 내려가기도 했지만 확실히 작년보다는 나아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8월 들어 김성근 감독의 무한혹사와 융통성없는 특타로 인해 선수들의 체력이 방전되고 연패횟수가 늘어남으로써 결국 6위까지 밀려나고 말았다.
그리고 9월 11일 SK와의 경기로 여태까지 곪아왔던 혹사의 여파와 이해할 수 없는 투수운용으로 8위까지 밀려나고 말았다.
그리고 끝까지 버텼으나 결국 플레이오프 진출이 좌절되고 말았다. 그리고 58868996으로 비밀번호는 연장되었다. 일단 그나마 다행인건 그 아래 팀이 4팀이나 있다.
한편 시즌 중 유달리 웨이버 공시되어 팀에서 방출당하는 선수가 많이 나왔다. 65명 등록선수 명단을 아예 다 채우고 2015 시즌을 시작했기 때문인데, 많은 선수들의 기량과 플레이를 체크하기 위해 65명을 다 채운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2016년 들어서 한화의 암흑기 시절보다 더 최악의 경기를 펼치고, 김성근도 여러 논란에 휘말리며 한화 이글스는 4월 현재 명실상부한 최악의 팀으로 진행중이다. 이 정도면. 정말 한화 이글스는 '''명장의 흑역사를 만드는 구단'''으로 사실상 확정이다. 물론 흑역사가 된 것은 전적으로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 노장의 잘못이다.
'''남에게 퍼주는 혜자트레이드를 한다''' 특히 기아에겐 선물을 주고 쓰레기를 받아가는데 2015년 노수광, 오준혁, 김광수를 줬는데 김광수는 기아의 불펜 필승조가 되었고[67] 노수광, 오준혁은 쏠쏠한 활약을 펼치며 차세대 리드오프로 기대를 받고있다. 게다가 '''유창식까지 주어서 기아는 보유구단이 되었다.''' 반면 한화로 간 임준섭은 부상으로 경기에 전혀 나오지 못하고 있으며 박성호는 육성선수로 전환되있다. 이종환만 가끔씩 대타로 간간히 비치는 중.
빙그레 첫해 이후 최소 경기 30패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한화, 빙그레 첫 해 이후 '최소경기 30패' 굴욕
2016년 6월 7일까지 12경기에서 11승 1패를 거두는등 반격을 시작하고 있다. 한때는 9위와 10게임 이상의 차이가 벌어져 영영 답이 없을 것만 같이 보였으나 기세를 몰아 상반기를 7위로 마무리 했다. 상승세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 5위까지 게임차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도 기대할 수 있는 부분. 다만 같은 이유로 최하위권까지의 간격도 좁은 만큼 하반기의 귀추가 주목되는 상황이다. 결국 7월에 기아에게 1번 1승2패를 당한 것 외엔 모두 위닝 시리즈를 기록하였다. 저 기록은 7월 초까지 7전 전패를 당했던 두산에게 얻어낸 2승 1패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자칫하면 삼미 슈퍼스타즈처럼 전패를 당할 수도 있었으니 정말로 불행 중 다행.
8월 중반까지 기아와 함께 5할 승률을 유지하며 희망고문을 이어나갔으나 안영명의 어깨 수술로 인한 시즌 아웃[68], 배영수[69]안승민의 복귀 불발, 서캠프의 공인구 부적응으로 인한 부진[70][71], '''한화의 미래 김민우의 어깨 관절와순 손상, 권혁의 팔꿈치 통증으로 인한 이적 후 첫 1군 이탈''' 등 악재가 터지며 월 승률 5할이 붕괴되고 총 승률 5할에 10경기 이상이 남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기아는 5할을 찍다가 올라가고 LG는 우주의 기운(...)을 받아 9연승을 찍는 와중에 롯데가 8월 후반에 완전히 무너지며 8월 내내 8위와 7위를 오고가고 있다.
가을마다 김성근이 맡던 팀이 훈련으로 인한 체력 방전으로 부진했던 걸 생각해보면 30경기가 조금 남은 상황에서 20번 이상 이기길 기대하긴 어려울테니 올해도 포기하는 게 편할 듯. 특히 김민우의 부상은 전병두류현진이 겪은 어깨 부상인데다가 어깨 부상 후 재활 성공률은 10% 정도라 김성근을 모셔오자고 시위를 하던 팬덤 내부에서 조차 아름다운 이별 아니면 칰복절을 바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일단 어깨 부상 후 복귀하는 게 10% 남짓이지 그 후 지속적으로 선수 생활을 하는 선수는 그 중에서 20%를 채 넘지 못한다. 게다가 김민우는 부상 여부를 감독이 계속 숨긴 채 불펜 투구로 쇼케이스를 여러 차례 했고 당장 한 곳에서 재활해도 충분치 않을 시간에 1군 경기가 있는 경기장과 2군 서산을 오가며 재활과 재활 중단을 반복하고 있어서 '''사실상 선수 생명이 끝났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8월 후반기엔 본인이 수술 없는 재활을 선택하여 30m 롱토스를 하며 몸을 푸는 중이고 본인이 토미 존 수술과 무뤂 수술 등 여러 고비를 넘긴 덕에 긍정적으로 재활 훈련에 매진하고 있다...고는 하는데 위에 쓴대로 어깨 부상은 복귀율이 처참하게 낮고 보통 어깨 부상은 어떻게 복귀한다 해도 2~3년은 제 기량이 안 나오는 게 보통이라...
20일 태평양 돌핀스식 도박성 선발자원 불펜 투입의 부작용이 제대로 폭발하며 LG에 패하여 5할 승률 불가가 확정되었다. 2003년부터 10시즌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한 LG 트윈스에 이어 역대 두번째로 오랜기간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한 팀이라는 굴욕적인 기록까지 세우게 되어버렸다. 거기에다 선수들 대부분이 사실상 선수 생활에 심각한 타격이 감에 따라, 위약금을 내서 감독을 경질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더 호응을 얻고 있으며 심지어 구단을 해체하고 선수들 다른 데로 보내줘야 한다는 말까지 진지하게 거론되는 수준이다. 당장 네이버와 구글을 비롯한 공신력 있는 검색 엔진에서까지 '한화 이글스 해체'(...)가 자동완성으로 뜨고 있다.
심지어 2017년 까지 한화가 김성근을 감독직에 유임시킨다고 하니 이쯤되면 정말 선수들이 남아나지 않겠다. 다행히 외인 원투펀치가 영입되었고, 그나마 나아진 수비, 트레이드로 영입된 군필포수로 16년같은 막장스러운 상황은 없었으나, 햄스트링 부상이 유행(?)하며 선수들이 하나 둘 이탈하더니 삼성과의 벤치클리어링 후 패배로 스윕까지 헌납하며 '야구도 못하면서 연봉은 거품에 팬들은 어그로끌고 선수들은 사고치고 감독은 더럽게 플레이하는 구단' 수준까지 이미지가 나빠져버렸다.[72] 결국 21일 밤 김성근과 프런트의 해묵은 갈등이 2군 선수들의 특타훈련을 두고 제대로 폭발했고 23일 사실상의 경질로 김성근의 야구 커리어는 사실상 마감되었다.[73] 그리고 이 해는 일찌감치 PS 탈락을 확정지었다.

2.7.3. 이상군 감독대행 체제 (2017.05.23~2017.10.03)


한화 구단은 2017년 남은 시즌을 이상군 감독대행 체제로 진행한다고 발표했다. 한화, 남은 기간 이상군 대행 체제 이상군 감독 대행은 구단의 챌린지 2017 비전과 관련, 감독 대행직을 수행하면서 팀을 빠른 시간 내 정상화 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기에 끝까지 진행한다고 한다. 성적을 떠나서, 객관적으로 정상적인 운영은 맞다.[74][75]
9월 13일 삼성전 패배로 14경기를 앞두고 포스트시즌 탈락이 확정되고 말았다.

2.8. 꿈같았던 가을야구, 그리고 다시 하위권 (2018~)



2.8.1. 한용덕 감독 체제 (2018~2020.06.07.)


'''14년만의 이글스 출신 감독'''
'''제11대 한용덕 감독'''

2.8.1.1. 한용덕 감독 1년차 (2018)


2018년부터 한화를 이끌어갈 수장으로 한용덕 감독이 결정되었다. '''한화 새 사령탑, 한용덕 감독 선임 완료''' 감독 대행직 이후 한화 1군 스태프로는 5년 만에 다시 복귀한다.
결과적으로 감독이 한용덕 감독으로 바뀌면서 상황은 180도 바뀌었다. 2018 시즌 중 한화는 순위 3위에 도달한데 이어 SK를 꺾으며 2위를 달성하고, 심지어는 1위 두산까지도 노리고 있는 상황이다. 김성근 전임 감독의 선발 운용과 비교되는 운영방식이 효과를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되도록이면 선발에게 많은 이닝을 맡기는 효율적인 운영을 하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7월부터 급작스레 팀이 부진에 빠지면서 위기가 찾아온 상태이다. 그래도 5할에 약간 못미치는 아슬아슬한 성적을 유지하고 있어 큰 이변이 없는 한 가을야구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9월 28일 두산전에서 승리하면서 5강을 확정지었고 동시에 비밀번호도 끊어내는데 성공하였다.'''[76] 마지막 경기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시즌 순위 '''3위'''로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한화는 10년 만에 5할 이상의 승률을 냈다.

2.8.1.2. 한용덕 감독 2년차 (2019)


작년의 모습은 모두 사라지고 길 잃은 팀이 되어버렸다. 시즌 초 이용규의 항명 파동부터 안맞는 투타조화로 인해 후반기부터는 최하위 자리를 놓고 롯데 자이언츠와 각축을 벌이고 있다. 한화가 질 때 롯데가 같이 지고 롯데가 이길 땐 한화도 같이 이겨서 승차 없이 아슬아슬하게 9위를 유지하다가 롯데가 두산을 잡을 동안 한화가 선두 SK에게 패하면서 결국 최하위를 찍기도 하고 다시 롯데가 최하위 자리를 탈환하는 등, 하나뿐인 10위 자리를 놓고 양팀이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다. 그러다가 롯데가 막판에 제대로 맛이 간 반면, 한화는 6연승까지 하면서 꽤나 큰 차이로 탈꼴찌에 성공했다.

2.8.1.3. 한용덕 감독 3년차 (2020)



2.8.2. 최원호 감독 대행 체제 (2020.06.08~2020.10.30.)




2.8.3. 카를로스 수베로 감독 체제 (2021~)


'''구단 최초 외국인 사령탑'''
'''제12대 카를로스 수베로 감독'''
11월 27일 한화 이글스 역사상 첫 외국인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계약 기간은 3년이고 연봉은 비공개로 계약에 합의했다고 한다.
우선 정민철 단장을 사단으로 한 프런트진도 이전과 다른 리빌딩 드라이브를 걸었고, 이에 따라 수베로 감독도 성적보단 리빌딩을 우선적인 운영 기치로 내걸 것으로 보인다.

2.8.3.1. 카를로스 수베로 감독 1년차 (2021)



3. 연도별 시즌 요약


'''문서가 존재하는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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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위 팀은 PO 직후 5차전까지 가더라도 5일이나 쉴 수 있었다. 실제로 해태는 플레이오프를 스윕으로 끝내 무려 8일이나 쉬었다.[2] 타 리그 3위인 현대에 승률로 밀려 준PO를 할 위기에 처했지만 10연승으로 현대를 승률로 역전해 위기를 모면했다.[3] 무명투수 지연규의 4이닝 무실점 경기[4] 결국 빙그레가 첫 해 고전한 것 때문에 앞으로 신생팀은 1년간 2군에서 보내야 한다는 룰이 생겼다. 쌍방울, NC, kt 모두 창단 전 1년은 2군에서 보냈다.[5] 2008년 시즌에는 올림픽 브레이크 이후 후반기에 불운이 겹친 건 사실이다. 문제는 2009년부터이다(...)[6] 삼성은 1985, 2002, 2005, 2006, 2011, 2012, 2013, 2014년, 두산은 1982, 1995, 2001, 2015, 2016년, 2019년에 우승했다.[7] 1999년 딱 한번 우승했다.[8] 투수 부문에선 이상군, 한희민, 송진우, 한용덕 등. 타자 부문에선 장종훈, 이강돈, 이정훈, 강정길[9] 사실 가운데 4도 정규시즌에서는 3위였는데, 4위 삼성이 PO에서 숙적 해태를 꺾어서 한국시리즈까지 갔기 때문이다.[10] 해태는 그렇다 쳐도 롯데에 진것은 충격이었다.[11] 그나마 저런 초일류급 투수들조차 없었더라면 이때가 1차 암흑기가 될 뻔했다. 당시 타선이 영 힘을 못 썼던지라... 특히 주전 유격수 허준은 언급하기 싫을 정도로 못 쳤다... [12] 1996년 드래프트 성공도 야수쪽에 몰빵되어 있었다. 이상열은 현대로 트레이드되고 나서야 터졌다.[13] 이들을 대신한건 10홈런 39타점을 기록한 진상봉, 2할 7푼대 타율의 지화선이었다.[14] 그 외엔 이상군이 선발과 구원을 오가며 2점대 방어율 7승을 기록했지만 전 시즌까지 선발진의 한 축이었던 장정순은 5승으로 부진했다.[15] 유독 93년은 비와 관련된 불운이 심했다. 태평양과의 개막전에서 장종훈의 홈런으로 앞서나간 것을 우천취소당하며 불운이 시작됐고 이후 LG와 OB전에서 앞서던 경기를 우취당하고 다음날 더블헤더가 열리면 지는 경우도 있었다. OB와의 잠실원정은 우취로 지레짐작하고 대전에 머물다 경기 개시 소식에 부랴부랴 경기 시작 30분 전 겨우 도착해 0대1 영봉패를 당하기도. 6월 2일에는 대전구장에 비바람이 몰아쳐 조명탑이 기우는 바람에 두 달 동안 청주에서만 홈경기를 했는데 이 때문에 방위병이었던 정민철이 청주 홈경기에 출전할 수가 없었다. 휴가를 얻어야만 갈 수 있는 '가깝고도 먼 홈구장'이 되었다.[16] 시즌 후 선수단 무단이탈로 1994년 초 임의탈퇴됐다가 1997년에 복귀했다.[17] 이후 1996-98년 LG에서 인스트럭터와 2군 감독을 지내기는 했지만 김승연 한화 회장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1군 감독은 맡지 않았다.[18] 정민철은 1차전 패전투수에 이어 3차전 구원등판하여 김경기에게 연장 10회 끝내기 홈런으로 또 패전투수가 됐다.[19] 고졸선수 최다인 18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했고, 이상훈의 노히트노런도 저지했다. 다만 이해 반짝이었고, 다음 해 2할 5푼, 1996년 1할 1푼을 기록하여 코칭스태프와의 불화 끝에 방출되었다.[20] 한용덕은 16승, 정민철은 14승을 올렸다.[21] 정민철은 리그 최다 이닝인 218이닝에 2.15의 방어율과 196개의 탈삼진으로 이 부문 1위에 올랐지만 투수 골든글러브는 이해 프로야구 최초 40세이브를 기록한 태평양의 정명원에게 돌아갔다.[22] 아쉽게도 출루율 1위, 장타율 1위에 만족해야 했다.[23] 2021년 현재 충청팜의 한 축인 세광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있다.[24] 김상국은 이 해를 마치고 박은진을 받는 대신 현대로 트레이드되었다.[25] 이해 12번이나 선발등판했다. 선발로 뛸 사람이 없으면 구대성이 선발등판했기 때문에 다패왕이 되고 말았다. 선발이 5~6이닝 먹으면 6~7회 쯤 구대성이 나오고, 4~5선발 자리에 또 구대성이 선발등판하는 방식으로 심하게 혹사당했다.[26] 고졸우선지명으로는 이상열, 심광호 등이 있다.[27] 18승 3패 24세이브 1.88의 평균자책점으로 4관왕(평균자책점&다승&구원왕&승률), MVP, 골든글러브를 차지했다.[28] 해태와 마찬가지로 시즌 초반 최하위권에서 부진하다가 5월 이후 치고 올라갔다. 꾸준히 3위권에 머물다가 시즌 막바지 해태를 1.5경기차까지 추격하지만 막판에 주춤한 사이 쌍방울의 연승으로 인해 3위로 마감했다. 쌍방울에 11승7패로 우위, 현대에 9승9패로 동률이었으나 해태에 상대전적에서 5승13패로 크게 뒤쳐진 것이 아쉬웠다.[29] 구대성이 혹사 여파로 당초 1차전 선발 예상된 상태에서 갑자기 정민철이 선발등판했고, 결국 5회를 기점으로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2차전에서 구대성이 4이닝 투구했지만 폭투로 점수를 내주며 패전투수가 됐다. 1차전에서는 성난 대전아재들이 경기장 안으로 오물을 투척하여 현대 외야수들이 헬멧을 쓰고 수비를 하기도 했다.[30] 정민철은 12패로 불운했다.[31] 5월 23일 OB전에서 무사사구 노히트노런의 대기록을 달성한다. 유일한 1출루가 스트라이크낫아웃 출루였다. 방어율 2위, 탈삼진 1위로 맹활약했지만 MVP는 커녕 투수 골든글러브조차 한국시리즈 우승 기록과 다승만 앞설 뿐 정민철보다 모든 기록이 떨어지는 이대진에게 빼앗기고 말았다.[32] 강병철-이희수 시기를 통틀어 유일하게 선발등판이 없던 시즌이다.[33] 이 중 송지만홍원기 정도만 어느정도 성적을 유지했고, 이영우와 임수민은 크게 부진했다.[34] 여담으로 이때 향후 배우로 전향한 김대원이 지명되기도 했다.[35] 강병철 경질 시점 한화의 성적은 29승2무33패에 4위 쌍방울과 0.5경기차임에도 경질되었다.[36] 1997년에 한화로 복귀하여 1997 시즌 6승, 1998시즌 7승을 기록한 뒤 최익성을 상대로 삼성으로 트레이드됐다.[37] 반면 9월 9일까지 꼴찌였던 OB는 막판 21경기에서 마지막 8연승 포함 16승1무4패로 막판스퍼트를 내며 극적으로 4위를 차지했다.[38] 1998년 시즌 중에 강병철 감독이 경질되고 이희수가 감독대행으로 팀을 이끌다가 정식감독으로 승격.[39] 데이비스를 뽑기 직전 삼성이 그를 지명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삼성이 빌리 홀을 선택하면서 데이비스를 지명할 수 있었다.[40] 읽다 보면 알겠지만 시즌 초반만 해도 한화는 우승전력이라 평가받지 못했다.[41] 1999시즌 초중반 장종훈은 프로야구 통산 최다 홈런, 루타, 2루타, 득점, 타점 기록을 연일 경신했다. 이해 프로야구의 선수 개인에 대한 화제거리로 전반기는 장종훈의 각종 통산 기록 경신여부, 후반기에는 이승엽의 국내프로야구 최다홈런 및 아시아 최다홈런 경신 여부에 스포트라이트가 쏠렸다.[42] 이듬해부터 한화의 투수진이 망하면서 팀의 야구 스타일은 투수진 중심에서 타선 중심으로 재편된다. 한화의 우승은 90년대의 투수진 중심 스타일과 2000년대의 타선 중심 스타일, 그 중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43] 쉽게 말하면 다수의 A급 선수들이 포진한, 두터운 선수층이 장점인 조합이라기 보다는 S급의 핵심 선수들 몇몇에 크게 의존하는 형태. 애당초 리그 운영도 송-정-이 세 투수에 구대성으로 확실히 3승 하고 나머지는 버리는 3승 2패 전략이었다.[44] 사실 2001년 시즌은 일찌감치 앞서나간 1~3위를 제외하면 나머지 5개 구단이 4위 자리를 두고 다툰 역대급 평준화시즌이였다. 이때 당시 한화는 피타고리안 승률은 8개구단 중 꼴찌였으며, 당시 최하위였던 롯데와의 경기차도 겨우 '''2경기'''였고, 승률 차이는 2푼에 불과했다. 참고로 이해 한화 이글스가 역대 포스트시즌 진출 팀 중 최하의 승률(0.473)이다.[45] 문동환 재활, 이범호의 레벨업 등 김인식 초창기 잘 나가던 한화의 기초는 유승안 감독 때 마련되었다. 반면 송창식 혹사 등의 그림자도 있어서 과대평가란 시각도 있다.[46] 원래 연봉문제로 송지만과 팀 사이가 험악했다고도 하고, 송지만의 선수협 활동으로 인해 구단의 눈 밖에 났다는 설이 있다.[47] 그러나 이 423 충무로 시기는 결과적으로 독이 되었다. 이유는 후술.[48] 2020년 10월 2일 현재 롯데 2248승 2530패 112무 승률 0.4705, 한화 2075승 2343패 84무 승률 0.4697.[49] 사실 한화 자체가 2군팜 육성이나 선수단 관리의 질적 향상에 극히 인색한 구단이었다. 2군 시설이 열악한 건 말할 필요도 없고 당장 군입대 선수 훈련 프로그램을 만든다고 한 게 2013년이었고 불과 얼마 전까지 기본적인 군입대 관련 선수 관리가 엉망진창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송광민.[50] 이후 1년만에 국내 복귀를 했지만 구단과의 마찰 등의 이유로 KIA로 가고 말았다.[51] 2012년 한화로 복귀했으나 혼자서 팀의 암흑기를 끝내기는 역부족이었다.[52] 사실 그 전년도였던 2007년부터 타 팀에 비해 노장 선수들의 비중이 컸고 신인들의 성장이 더뎠기 때문에 암흑기의 조짐이 슬슬 보이던 시점이었고 김인식 감독의 팀 운영방식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긴 했다. 물론 2007년 시즌의 경우 기존의 송진우, 정민철, 구대성 등 노장 선수들이 아직까지는 건재했고 시즌 중 유난히 잦았던 우천취소 덕분에 '류현진-정민철-비-비-비-류현진(...)' 이라는 희대의 선발 전략을 잘 활용해 최종순위 3위를 기록했다. '''물론 그 이후부터는...'''[53] 이 당시 한화는 선수단 육성에 중심이 되어야 할 2군 구장 또는 클럽하우스도 없었다. 때문에 2군 선수단은 대전고등학교 운동장, 청주야구장, 계룡대 내부 연습구장, 혹은 1군 선수단이 원정을 가서 비어 있는 한밭종합운동장 야구장을 돌아다니며 경기를 소화하거나 훈련을 진행해야 했으며, 선수단 숙소도 없어서 인근 아파트를 전세내 여럿이 생활하는 등 KBO 구단 중 2군 인프라가 가장 열악하기로 유명했다.[54] 사실 이 당시 한화 구단 및 모기업도 이러한 사실을 아예 모르지는 않고 있었기 때문에 대덕구 신탄진 인근에 2군 구장 및 연습장을 짓는 계획을 세우고 지자체와 양해각서 및 협약을 맺었으나, 행정적인 문제로 인해 신탄진에 2군 구장을 짓는 게 무산되었고 이후 2012년에야 서산 야구장이 완공되며 처음으로 2군 전용구장을 갖게 되었다.[55] 특히 타 팀이 신인선수 지명 권리를 모두 행사할 때 한화는 2년 연속으로 4~5명의 선수만 뽑을 정도였다. 당연히 선수가 없을 수밖에...[56] 2000년 이후 한화가 김태균, 이범호, 류현진, 최진행을 제외하고 제대로 키워낸 선수가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보자. 그나마 쓸 만했던 유망주들은 혹사로 맛이 갔고 뭔가 해주는 선수들은 죄다 군 미필에 군필 선수들 중 기량이 성장한 선수가 있냐면 그것도... 게다가 저 4명은 각각 은퇴, 이적 후 은퇴, 해외 진출, 방출 상태로 2020년 기준 모두 한화에 없다.[57]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전문가들 역시 한화의 4강은 거의 무난하다고 보는 편이었다. 세 팀은 정해졌고 4위 한 자리를 놓고 4~6위팀인 롯데, 삼성, KIA가 경쟁하는 구도였을 정도로 4위권과 승차가 넉넉한 데다가 당시 한화는 잔여경기가 가장 적은 팀이었으니...[58] 두 자릿수 연패가 무려 두 번(12연패, 10연패)이나 있었다.[59] 사실 2014년은 역대급 투병타신 연도이다. 순위로 보면 투수 조련사라는 김성근이 부임한 2015년에도 똑같은 9위를 기록 중이다. 그 밑의 팀이 신생팀이었던 kt wiz였던 만큼 사실상 꼴찌.[60] 김성근 감독을 싫어하는 국내 구단의 분위기에 편승해 그냥 내부승진을 통해 새 감독을 정하려 했으나, 1인 시위 등의 소식을 접한 회장의 압박 으로 인해 김성근 감독을 영입했다는 소문도 있다. 농담이 아닌게 실제 기자들의 증언도 이와 일치했다. 특히나 김승연 회장 성격상 이런 말이 자기귀에 다이렉트로 들어간 상황이라면...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할까?[61] 여담으로 이 당시 김성근 감독이 대전에 내려가서 감독면접을 봤니 이상훈코치가 대전 집을 알아보고 있니 하는 소문이 돌았지만 다 사실무근이였다. 애초에 김성근 감독과 같은 레벨이라면 사장이 감독을 찾아가는게 보통인 크보 상황일 뿐더러, 사장은 애초에 대전에 있지도 않았다.[62] 이보다는 더 큰 문제가 있는데, 애초에 김성근 감독은 팬들이 원하는 감독이였고 감독 선임에 팬의 입김이 작용한 국내 프로스포츠 최초의 사례이다. 그런데 만약 이 감독체제에서 성과가 없다면 그 후에 한화이글스의 운영방향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고, 이는 당시 옐로우카드에서도 논의되었다. 물론 15년과 2016년 관중동원이나 구단 굿즈판매량을 보면 양측 모두 아주 행복한 상황이지만.[63] 다만 감독 본인은 사단의 존재를 부인하였다. 실제로 코치진에서 감독과 처음 호흡을 맞추는 코치고 상당수였고.[64] 다만 쇼다 코치는 2009 시즌에 SK 와이번스의 코치로 있었다.[65] 사실 정승진과 김성근은 나름 불편한 관계. 2012년에 한화는 차기 감독으로 김성근을 영입하려고 했었으나 한화 프런트가 김성근과의 약속을 깨고 결국 영입은 물거품이 되었다. 이는 카더라 통신이 아니라 실제 보도된 내용. 그 당시 프런트의 수장이 정승진이었으니... 애초에 이번에 한화팬들이 김성근 감독밖에 없다고 주장했을 때에도 저 2년 전 일 때문에 김성근이 한화로 오는 건 힘들 것이라고 보는 의견도 많았다.[66] 약속을 깼다는 부분이 한대화를 경질시키지 않는다는 조건을 안지켰다는 것인데 이에 대해 막장전력을 맡기 싫었던 김성근이 트집을 잡은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무엇보다 이때 김성근이 부임했더라면 메이저리거 류현진은 아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67] 다만 김광수는 한화에 있을때 정말 못했다. 그래서 팬들도 김광수 자체는 아깝지 않다는 평가였다.[68] 어깨 웃자람뼈를 깎는 수술을 받았다. 윤규진이 작년 후반기에 받은 수술과 유사하다. 결국 이 수술 후 150km 초반의 강속구는 더 이상 던질 수 없게 되었고, 17시즌 후반기에야 붙박이 선발이 된 뒤 공 끝의 변화가 심한 투심을 주 구종으로 하는 방식으로 어쩔 수 없이 피칭 스타일을 바꾸어야 했다.[69] 2군에서 130km 초반의 공을 겨우 던지다가 구속을 140km 중반까지 끌어올린 덕분에 8월 초 1군에 콜업되어 선발진의 부담을 줄여주나 싶었으나 감독이 '그냥 잠깐 보려고' 부른 것으로 밝혀졌다. 덤으로 같이 올라온 김범수도 다시 2군행. [70] 1군 엔트리에 이름을 걸고 2군에 잠시 내려가 계형철 코치의 지도를 받았으나 올라온 뒤로도 베팅볼만 뿌리며 거하게 캠프 파이어를 저지른 뒤 진짜로 서산에 캠프를 차려버렸다.[71] 2군 경기에서도 1.2이닝만에 머리로 향하는 사구로 퇴장을 당하며 미치 탈보트마에스트리에 이어 감독에게 '장점을 도저히 찾을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실패한 투수'''로 단단히 찍힌 것으로 보인다.[72] 실제로 김성근이 부임한 뒤의 SK는 나머지 7개구단 팬들과 감독들에게 물어뜯기고 뜯기를 반복하다 경질 뒤 겨우 해소되었으나, '''적어도 SK는 야구라도 잘했다.''' 한화는 성적도 못내면서 9개구단의 안티구단이 되어버렸고, 쉬이 가라앉지 않을 예정이라...물론 이는 김성근 이전에도 비밀번호를 찍는 와중에 설레발떨며 타팀을 공격하던 칰키워들의 공도 무시할 수 없다.[73] 나이도 나이지만, 프론트와의 갈등, 혹사 논란 등 야신 이미지에 가려진 단점들이 다 드러난 동시에 어쨌든 포스트시즌엔 진출하지도 못했으므로 더 이상 프로야구 팀의 감독을 맡기는 힘들 것이다.[74] 다만 이건 '''투수 운용'''에 한정된 이야기. 진루타 순위가 리그 최상위에 희생플라이가 리그 최하위인 팀을 가지고 계속 희생번트를 하고, 2군 선수를 올리는 기준이 명확하지 않으며, 끝없이 반복되는 좌우놀이 등 비판받을만한 요소는 충분하다.[75] 물론 투수운용만 봐도 그 사람보다야 훨씬 미래를 위한 운영임은 확실하다. 다만 이 행보를 과연 리빌딩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에 관해서는 의견이 갈리는 중. 그리고 시즌 막바지 인터뷰에서 리빌딩 보다는 성적에 신경을 썼으나, 부상자가 속출하면서 어쩔 수 없이 신인들을 기용하며 나머지 경기들을 리빌딩 기조의 운영으로 선회했다고 밝혔다.[76] 그리고 결과적으로 한용덕 감독은 진정한 야신이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