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군

 



1. 개요
2. 언어별 명칭
3. 발전사
3.1. 1차대전과 항공전력의 태동(1903-1918)
3.2. 전간기와 항공력/폭격기 만능 사상의 태동(1919~1938)
3.3. 2차대전과 항공관제(1939-1953)
3.4. 베트남전과 미사일(1954-1975)
3.5. 걸프전 그리고 스텔스(1976-현대)
4. 여담
5. 공군인
6. 나무위키에 별도의 문서가 있는 공군
7. 관련 문서


1. 개요


육군해군은, 비록 어리지만 대단히 중요한 막내의 탄생을 알아야만 한다.

줄리오 두헤

공중전에서 패배한다면 전쟁에서 패배하는 것이고, 이는 매우 빠른 패전을 불러오는 것이다.

버나드 로 몽고메리

비행기는 참 재미있는 기계이지만, 군사적으로는 별 가치가 없을 것이다.

프랑스군 원수 페르디낭 포슈

사실 이 말은 비행기의 수준이 너무 형편없던 시절이기에 가능했던 말이다. 정작 이 말을 한 당사자인 포슈는 이후 개선된 비행기를 직접 보고는 군사적 잠재성을 인정하여 4년 뒤인 1차 대전 초기(1915년)부터 공군을 이용해 적극적인 정찰을 벌이고 1916년에 포병이 활약하는데 있어서 항공정찰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했다.

20세기 양차세계대전에서 비행기의 전략적 가치를 인식하면서, 기존의 해군 항공대육군 항공대를 공군으로 전문화시켰다.
다만 비행체를 운용한다고 모두 공군은 아니다. 육해군에서도 항공부대를 운용한다. 마찬가지로 공군도 지상/해안가에 기지와 숙소가 있고, 이들을 지키는 보병, 기갑, 방공, 수상부대를 운용한다. 이들의 차이점은 운용 장소가 아니라 운용 목표에 있는데, 육군을 지상을 위해, 해군은 제해권을 위해 항공부대를 운용한다.
현대전을 다룬 영화에서 상황이 여의치 않은 육군 장교가 무전으로 "Airforce!(공군!)"라 외치는 장면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물론 이런 장면은 너무 극(drama)화된 모습이지만, 실재로도 현대전에서 (작은 규모의 국지전이 아니라면) 육군이든 해군이든 공군의 협조를 확보하지 않고 전면전을 수행하는 경우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2. 언어별 명칭


  • 한자: 空軍
  • 영어: Air Force
  • 독일어: Luftwaffe[1], Luftstreitkräfte[2]
  • 프랑스어: Forces aériennes
  • 에스페란토: Aerarmeo

3. 발전사



3.1. 1차대전과 항공전력의 태동(1903-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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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원들이 편갈라 싸우기 시작했을 때부터' 혹은 '사람들이 배를 타고 다니기 시작했을 때부터' 생겼을 것이라고 짐작을 할 수 밖에 없는 육군과 해군의 기원에 비해, 공군은 기원은 매우 명확하다. 일단 하늘을 날아야 하기 때문에, 기술과 기록문화가 충분히 발달한 근현대가 되어서야 겨우 개념이 생겨나고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물론 그만큼 공군의 역사는 육해군의 역사에 비해서는 매우 짧은 편이다.
동력 비행기를 개발하기 전에 열기구나 가스 기구를 이용해서 군 정찰 용도로 사용한 선례는 있으나 이를 본격적인 공군의 전신으로 보긴 힘들다. 최초의 공군은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각국에서 육/해군 항공대의 형태로 창설되었다. 1차대전 초기의 항공기들은 속도가 느리고 (약 시속 100~160km/h 내외로, 새마을호 열차 정도) 비행 고도도 낮아서 숙련된 보병들이 대공화망을 구축하면 격추되기 일쑤였지만, 몇 년 사이에 지속적 연구와 성능 개량, 파일럿 양성, 군부의 전투기, 폭격기로서의 사용 가능성 인지로 인하여 매우 빠른 속도로 발전하게 된다.
폭격의 역사도 이때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미 독일과 프랑스는 1차 대전 개전 직후부터 서로의 진영을 향해 구식 항공기들이 털털거리며 날아가 조종석에 싣고 온 폭탄을 손으로 들어 떨어뜨리는 원시적인 폭격을 시작했고, 곧 이어 독일의 발달된 체펠린 비행선 등이 영국과 프랑스의 도시를 노리기 시작한다. 이후 본격적인 폭격기로 고타 G IV 등이 개발되었다.
이렇게 상대국의 정찰기/정찰기구와 폭격기/폭격용 비행선을 쫓아내고, 되도록이면 격추하기 위해 전투기[3]가 등장하기 시작하였으며, 곧이어 이러한 전투기들이 전장 상공의 제공권을 장악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느리고 둔한 기구[4]비행선은 퇴출되고 고정익 항공기들이 항공 전력의 중심에 서게 된다. 또한 영국의 트렌차트를 위시한 지휘관들이 이러한 새로운 무기를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1918년 영국에서 처음으로 육군 및 해군 항공대를 통합하여 자국의 방공작전 및 적에 대한 폭격작전을 통괄하는 진정한 의미의 공군을 탄생시켰다. 이에 며칠 앞서서 당시 신생국인 핀란드가 먼저 공식적으로 공군을 창설하긴 했지만 조종사 한명, 항공기 1기뿐인 전력이라 논외...
초창기의 전투기는 2인승으로 후방 좌석에 기총 사수가 탔다. 하지만 아직 엔진 추력이 많이 부족한데다 크기도 크고 결정적으로 날개를 위시한 대부분의 기체제질이 목제로서 빠른 기동을 하지도 못하므로 조종사가 진행방향으로 기총을 쏠 수 있는 현대식 1인승 전투기가 고안되었다.[5] 하지만 1인승 전투기를 만들면 조종사가 총을 쏴야 하는데 초창기에는 비행기 날개에 기총을 달았지만, 당시 기술력으론 날개가 비행기 자체 무게를 견디는 것도 버거울 지경에 기총의 반동을 제대로 버티는 것은 곤란했다. 따라서 그래도 단단한 편이고 조종사가 보기에도 좋은 기수에 기관총을 탑재하는 것을 연구하기로 했으나... 이번에는 동체 앞에 달린 프로펠러를 피해서 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필요했기에, 세계 각국은 상금까지 걸고서 이 방안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처음 채택된 안은 '프로펠러를 피해 쏘는건 개발하기 힘드니 프로펠러에 방탄판을 달자!'라는 콜롬버스의 달걀식 해결책. 당장은 그럭저럭 유용했지만, 가뜩이나 겨우 비행할 수 있었던 초기 비행기가 진동으로 인해 추락할 위험이 컸고, 심한 경우엔 지속사격중 프로펠러가 뽑히는(!) 등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후 에어코 DH.2에 채택된 것처럼 동체 뒤에 엔진을 달아버린다든지 하는 미봉책도 나왔지만, 기관총의 방아쇠와 엔진축 사이에 캠을 설치하여 프로펠러가 총구 앞을 가리면 발사되지 않게 하는 동조 장치(싱크로나이즈드 기어)의 개발로 이 문제는 완벽하게 해결되었다.
당시의 항공전은 전적으로 도그파이트에 의존하였으며, 이는 항공기와 파일럿의 능력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적기의 꼬리를 잡은후 기관총으로 사격하여 적 항공기를 무력화 시키거나 파일럿을 사살하는 방식이 주를 이루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까지도 이 방법이 양측 공군간의 기본적 전투방식이었으며, 베트남전과 당시 중동전쟁도 원시적인 미사일의 성능으로 인해 별로 다른 상황은 아니었다.
당대의 공중전은 진흙탕 싸움이던 지상전과는 조금은 다른 양상을 보였다. 포격과 기관총의 학살극에 무참히 죽어나가던 지상전과 달리 공중전은 파일럿 개개인의 실력이 승부의 큰 변수였고, 소수간의 대결이 주를 이룬데다가, 파일럿 자체가 많은 훈련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고급 교육을 받은 귀족 가문의 자제들이 구성원의 대부분을 이뤘다. 또한 공군이란 조직 자체가 육군이나 해군과는 달리 오래되지 않은 신설 조직이었고, 구성원 자체도 민간 항공 전문가들이 많아서 군 특유의 권위주의가 상대적으로 약했다. 덕분에 마치 기사들간의 일대일 대결 같은 분위기가 국적을 넘어 암묵적으로 퍼졌고, 상대의 기체는 격추해도 파일럿에게는 경의를 표하며 공격하지 않는 등의 중세식 기사도 정신을 표하는 경우가 많았다. 즉 일종의 낭만주의 성향이 있었다.
그래서 당시의 전투기들은 요즘 볼 수 있는 저시인성 도장 따위는 고려하지 않았다. 같은 편대원들끼리 마치 서커스단 마냥 화려한 도장을 맞추기도 했고, 에이스들은 (중세 기사들이 방패와 갑옷에 문장을 둘렀듯이) 굉장히 눈에 띄는 원색 도장을 하고서 하늘을 날았다.
또한 초기에는 진형이건 뭐건 그냥 닥치고 달려들어 진짜 개싸움을 벌였으나, 독일 공군의 막스 임멜만오스발트 뵐케등의 이들이 공중전 역시 진형을 짜고 유기적으로 싸울 때 비로소 큰 효과를 발휘한다는 점에 착안하면서 공중전 역시 편대전술과 전술기동을 비롯한 전술적 영역이 크게 발전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지금까지도 조종사들에게 교육되는 뵐케의 금언이라든가, 베트남 전쟁까지도 유용한 방어 대형이었던 러프베리 원형진, 공중기동법인 임멜만 턴등이 이 시절에 만들어졌다.
이 당시의 공중전에서도 특출난 인물은 출현했다. 붉은 색으로 기체 전체를 도장하고 하늘을 호령했던 붉은 남작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은 모든 파일럿들의 선망의 대상으로 자리잡았고, 그의 전설적인 전공은 붉은 혜성이라는 형태로 오타쿠 문화에도 전파되기에 이르렀다. 참고로 2차 대전 당시 독일공군 총감이었던 헤르만 괴링도 이때는 검고 푸른 색이나 새하얀 색으로 기체를 도장하고 다니던 늘씬한 훈남 에이스 파일럿이었다.

3.2. 전간기와 항공력/폭격기 만능 사상의 태동(1919~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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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대전 당시 복엽기와 2차 대전 당시의 디자인의 과도기적 모습이 보인다. 그림 자체는 전간기가 아닌 2차 세계대전중에 벌어졌던 몰타항공전을 묘사하고 있지만, 그림에 나온 영국군의 글로스터 글래디에이터와 이탈리아군의 CR. 42는 전간기의 항공기 컨셉에 맞추어 개발된 전투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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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자국의 항공 부대와 최초의 공군인 영국 공군의 운용을 지켜본 미국 육군 장군 빌리 미첼이탈리아줄리오 두헤 등은 이러한 공군력의 미래를 낙관하였으며, 장차 전쟁은 공군력의 우세가 전황을 결정지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미첼의 경우 이미 제1차 세계대전 말에 대규모 공수 작전을 기획하기도 하였고, 해군보다 항공력을 이용하는 것이 비용과 효과 면에서 미국의 국익을 증진시킬 것이라는 사상을 퍼트리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의 줄리오 두헤 역시 항공기에 의한 전장의 지배가 앞으로의 대세가 될것으로 믿었을 뿐 아니라, 고속/정밀 폭격기의 등장은 전투기조차도 무용지물로 만들 것이라는 폭격기무적론을 당시 열강에 퍼트리기 시작했다.[6][7]
그러나 이러한 선구자적인 인물들에도 불구하고 당시 각국은 제1차 세계대전의 후유증으로 인해 군축이 확대되고 있었으며, 미국의 미첼의 경우 과도한 해군 행각으로 인하여 군에서 쫓겨나게 되는 수모를 겪었고, 두헤의 경우는 이탈리아의 미진한 항공 산업으로 인해 그의 예언을 자국에서 실행시킬 수 없었다.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으로 군의 증강이나 신무기 개발이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항공 전략상의 큰 발전을 이루지 못했고, 프랑스는 육군 중시 경향이 강한데다가 마지노 선 건설에 매달리는 바람에 공군력 건설에는 뒤처지고 말았다.[8] 영국의 경우는 사정이 조금은 나은 편이라 미첼, 두헤 등에게 영향을 미친 트렌차트 등의 지론에 따라 폭격기 중심의 체제를 갖추고 있었으나, 해군과의 대립으로 확장에 어려움을 겪었다.
1930년대가 되면서 독일에서 나치와 히틀러가 집권, 재군비를 추진하는데, 독일의 발달된 기술력 덕분에 어렵지 않게 당대 다른 나라에 비해 우수한 항공기를 보유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지만, 문제는 상대국의 방공망을 뚫고 적의 도시를 폭격할 장거리 폭격기보다는 당장 전선에서 아군을 지원하고 적의 주요 군사시설을 파괴할 급강하 폭격기의 개발을 중점적으로 하고 있었다. 한편, 독일의 쌍발 폭격기들도 전략 폭격을 못 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들을 엄호할 장거리 호위전투기를 제대로 개발하지 못 하는 바람에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참패하게 된다. 또한, 전략 폭격기를 대규모 투입한 연합군도 장거리 호위기들이 없었던 43년 중반 까지는 탈탈 털리고 있었다.
독일의 재군비에 따라 영국과 프랑스도 군사력을 확장하기 시작했으나, 영국의 경우는 독일과 맞먹는 레이더 기술과 보다 발전된 항공력에 대한 이해, 그리고 상대적으로 우월한 공군의 지위 덕에 빠르게 통합되고 효율적인 방공 체계를 갖추게 되었으나, 프랑스의 경우는 단순히 전투기의 수를 늘리는 데에만 치중했을 뿐 작전체계가 허술했고, 대지 공격용의 폭격기와 공격기에 대한 개념도 부족한 데다가 무엇보다 보유수조차도 적었다.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 때와 같이 육군 및 해군이 각기 육/해군 항공대를 운용하는 식으로 편성했지만 유럽 각국을 뛰어넘는 생산력을 가지고 있었고, 국토의 크기 덕분에 항공 산업이 일찍부터 발달하여 민간에서 충분한 인력자원을 충당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만 해군 항공대의 경우는 해군 군축 때문에 항공모함을 도입하기는 했지만 미첼에 대한 안 좋은 추억과 여전히 팽배한 전함 중심의 사상 때문에 크게 기대하지는 않고 있었다.

3.3. 2차대전과 항공관제(1939-1953)


1939년, 나치 독일폴란드 침공과 함께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전투에서의 항공전력의 능력이 대두되었다. 독일 공군은 빠른 시간동안 지상과 공중에서 폴란드의 공군력을 파괴하고 곧이어 육군을 지원하면서 폴란드 육군과 도시들을 파괴하여 항공력의 우세가 전장의 주도권을 바꾸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 현실임을 입증했다. 또한 당대의 육군 대국이었던 프랑스군을 우수한 독일 육군의 작전 능력과 함께 우월한 항공력으로 분쇄, 항공력 논란의 종지부를 찍어버렸다.
그러나, 영국을 침공할 때부터 독일 공군력의 압도적인 전력은 구멍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당시 영국은 공군력의 공격 외에 방어에도 관심을 보여서 영국 전역에 레이더 기지를 건설, 당시 순수하게 인간의 시력으로 적을 탐색하는 전투기에게 무선으로 적의 위치와 상황을 관제하게 된다. 이러한 레이더 기지의 존재가 드디어 진정한 공군의 실시간 전장통제를 가능케 하였다. 당연히 이렇게 체계적으로 짜인 영국의 통합 방공 시스템에 걸린 독일 공군은 예상외로 허우적대기 시작했고, 폴란드와 프랑스의 막강한 지상군을 쓸어버렸던 슈투카는 오히려 이러한 장거리 폭격전엔 무력하다는 것이 드러났으며, 독일의 장거리 폭격기들은 항속력과 탑재력에 한계를 드러냈기에 휘청이게 된다.[9] 또한 본래 장거리 폭격기를 호위하기로한 Bf 110이 스핏파이터에게 너무나 쉽게 갈려나갔고 짧은 항속거리로 장시간 비행이 불가능 했던 Bf 109가 그 임무를 이어받았고 자신들의 단점을 극대화 하는 환경과 통합 방공시스템을 바탕으로 체계적으로 공격해오는 스핏파이터들에게 밀려났다. 물론, 폭격기무적론에 입각한 호위 없는 장거리 폭격은 애초에 무슨 폭격기를 가져와도 답이 없었다.
결국 큰 피해만 받고 영국 침공을 그만둔 독일 공군은 소련으로 진로를 바꿔 당시 규모만 세계 최대였던 소련 공군을 섬멸한다. 하지만 소련은 미국의 지원하에 군사력을 회복하여 독일군을 기나긴 수렁에 빠트리고, 오히려 독소전 중반 이후부터는 제공권 역시 소련측이 장악하게 된다. 또한 2차 세계대전 중반에 이르면 독일은 영국과 미국의 장거리 폭격기 대군에게 주요 도시란 도시는 모조리 쑥대밭이 되는 수모를 겪는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 역시 이론과 실제는 다르다는 것을 유럽 상공에서 무수한 항공기와 인력을 소모하면서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실질적으로 서유럽 전선에서 독일 공군이 제공권을 상실해버린 시기는 1944년 4~5월 정도였으며, 그 시작은 P-51의 등장(1943년 11월)이었다.
태평양 전쟁에서는 미국과 일본 모두 항모중심의 해군 항공대를 주력으로 싸웠지만, 미 육군 항공대 역시 여러 곳에서 많은 활약을 했으며, 특히 일본 해군의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을 제거한 것은 미 육군 항공대의 P-38 라이트닝이었고, 육군 항공대의 B-29가 소이탄과 원자폭탄의 위력으로 일본을 굴복시켰다. 2차 대전은 공군력이 전쟁의 주역으로 발돋움하게 계기가 되었다.
참고로 이때 벌어진 공군 최강의 병크는 그 이름도 유명한 카미카제. 육성하기 어려운(일본군은 그 악명높은 똥군기 때문에 더욱 육성/배출이 어려웠다) 조종사들과 자원을 한심하게 무한정 낭비하던 일본군필리핀 해 해전 이후 제대로 된 숙련 조종사들과 대전 이전에 생산된 그나마 괜찮던 품질의 전투기들을 싸그리 소진하고 차마 항공전력이라고 부르기도 난감한 비행간이나 겨우 조종할 줄 아는 오합지졸 훈련병에 날림으로 만들어진 불량 비행기와 복엽 훈련기 뭉치로 버티다가 이 정신나간 전술을 만들어버리며 그나마 남아있던 숙련병들과 비행 전력을 소멸시키고 안그래도 막장이던 일본군의 멸망을 앞당기게 된다. 더군다나 대전 초부터 끝까지 J7W 신덴 같은 의미없는 실험기[10], 비행기가 아니라 사람 태운 폭탄밖에 안되는 MXY-7 오카 따위를 제외한 실질적 주력 전투기는 오직 선회만 빠르지 한대 맞으면 그냥 불타오르는 비행 라이타 제로센과 그 육군의 Ki-43 하야부사, 그리고 역시나 불타는 낙엽으로 이름을 떨치던 쌍발 폭격기 G4M 뿐이었다. 상대인 미군은 신형기 날아다니는 판국에.
영국, 미국, 독일 등에서 동시에 각기 개발된 레이더는 방공작전에서 조기 경보체제에서 유용성을 충분히 입증했으며, 이러한 레이더 개발국들은 지상기지에서 뿐만 아니라 항공기 탑재용 레이더를 빠르게 개발한다. 주야로 연합군, 특히 영국의 야간 폭격에 시달리던 독일군은 레이더를 탑재해 야간에 조종사의 시야를 대체하여 적 폭격기들의 위치를 탐지할 수 있는 전투기 개발에 열을 올렸다. 독일은 좋은 기술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전투기 크기도 작았고 영미의 폭격기들이 나날이 높아지는 성능과 물량을 바탕으로 지속적으로 여기저기 찔러 들어오는 탓에 큰 결실을 맺지 못 했다. 다만, 덩치가 큰 쌍발기에 레이더를 장착해 야간 초계기(영국 공군은 주로 야간에 폭격했다)로 사용했는데, 이러한 야간 전투기는 주간 전투기에도 레이더가 장착되고 미사일을 운용함에 따라 시계밖 전투가 주류가 되는 베트남전 무렵까지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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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반해 유보트와 일본 해군의 활동에 골치를 썩히던 영국 및 미국은 장거리 초계기에 대수상레이더를 탑재하여 적의 잠수함이나 함선의 수색에 투입했으며, 대전 초기부터 기술개발에 노력을 기울여 독일보다 더 소형이면서 더 고성능 레이더를 개발했다. 이러한 전자 장비의 차이가 연합군 공군력이 독일 공군력에 대해 우위를 점하게 되는 주요 요소 중의 하나였으며, 이후 군용 항공기에서 전자장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점차 높아지게 되었다.
2차대전 말기에는 30년대부터 연구개발 되던 제트 엔진이 실용화 되어 독일의 ar 234나 Me-262 같은 세계 최초의 실용 제트 정찰/폭격기와 전투기가 나오기도 하였으나 애초에 투입량도 부족했기에 큰 전과를 올리기에는 이미 늦었고, 기술적으로 아직 미숙한 부분도 많았다[11]. 특히 영미의 압도적인 항공력을 성능의 우세로 상쇄시켜 보려는 독일의 기술개발은 눈물겹기까지 하다. 이러한 독일의 많은 실험기와 시재기들은 당대의 관점에서 볼때는 대단한 것들이 많지만, 상당수가 당대의 기술수준으로는 몇몇 실용화된 것들이나 이후 미국, 소련, 영국 등에서 참고용으로 써먹게 된 것들을 제외하면 실현 불가능한 것들 이었으며 비현실적내지 비효율적인 물건들이 많았다. 이것은 다른나라 같으면 천천히 시간을 가지고 다른 사업을 통해 실험기나 청사진등의 연구와 개발, 설계를 하고 이를 토대로 물건을 만들 것을 급하니까 이리저리 쑤시고 들어간 결과이지 독일의 기술력이 다른 나라에 비해서 압도적이라서 나온 결과가 아니다.
하지만 대전 이후에도 제트 엔진의 개발은 계속 이루어져서, 결국 한국전쟁에서 최초로 제대로 된 제트기MiG-15F-86 세이버의 격돌이 벌어졌다. 이 초기 제트 엔진 시대도 아직은 도그파이트가 전투의 기본이었고, 심지어 세이버의 주무장은 아직도 M2 브라우닝 중기관총의 방계 혈통인 M3 기관총이었다[12]. 다만, 세이버는 드디어 개발한 소형 전투기에도 달 수 있도록 소형화한 레이더를 달기 시작했는데, 이 기능 하나로 거의 쌍둥이로 불리는 MiG와 세이버의 운명이 갈려서 미그기가 무참하게 쓸려버리는 결과가 나왔다.[13]

3.4. 베트남전과 미사일(1954-1975)


베트남전 직전 공군은 미사일이라는 새로운 무기 체계와 조우하게 된다. 이 꿈과도 같은 무기는 로켓에 뇌를 단 것과 같은 것으로 로켓이 적을 인식, 추적하여 격추까지 시켜준다.
특히 미사일 만능주의에 입각한 공군(정확히는 미 해군 항공대가 첫 테이프를 끊고 공군이 그에 따라간 형태이다)이 '앞으로는 미사일이 있으니 낡은 방식인 기관포는 필요없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F-4 팬텀에서 기총을 제거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그 설레발의 대가를 베트남전에서 처절하게 맛보게 된다. 게다가 핵 만능주의 덕분에 공군이 개발한 기체들도 대부분 속도만 빠른 폭격기같은 물건들이었던지라 더더욱 시망...
미사일은 사거리는 길지만 정치적 문제 때문에 아무리 원거리에서 레이더와 상황 판단을 통해 적기인지 뻔히 알 수 있더라도 '완벽히 육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쏘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져 있었기에 미사일의 장점인 사거리를 전혀 살리지 못했다. 그렇다고 미사일이 일단 쏘면 무조건 적을 격추시키는 절대 만능의 요격법도 아니라 여러가지 방법으로 회피가 가능했기에 실제 명중률은 그리 높지 않았다. 또한, 결정적으로 베트남 공군의 미그기는 상대적으로 화력은 약했지만 팬텀에 비해서 크기가 작아서 기동성이 좋았기에 일단 근접전에 들어가면 기총도 없고 기동성도 떨어지는 팬텀은 불리한 상황에 놓였다. 물론 근접전에 들어가더라도 팬텀이 강력한 엔진추력을 활용해 상방향으로 턴을 할 경우 미그로서는 따라가기가 쉽지 않아서 기관포가 없더라도 손쉽게 먹이감이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공중전 손실비만 따지면 먹이감이 안된 수준이 아니라 팬텀이 털고다녔다. 팬텀 1대당 미그기가 3.67대가 떨어졌다. 덧붙여 해군 팬텀은 기관포도 없이(...) 싸웠는데 7대를 손실하는 동안 40대를 격추시켜서 1:5를 넘는 교환비를 보이는등 공군 팬텀보다 성적이 더 좋았다.
어찌되었든 상황이 이 꼴이 되었으니 공군도 늦게나마 정신을 차리고 추가 장비로 기총[14] 을 달아주긴 하지만, 해군은 '공군 놈들을 따라하고 싶지 않아'라는,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 끝까지 달지 않았다. 물론 진짜로 저것만 이유인건 아니고 미 해군은 공군과는 달리 발칸형이 아니라 리볼버식으로 작동되는 건포드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게 기계적인 문제로 성능이 엉망인데다가, 미사일은 해군이 쓰던게 공군 것 보다 기동성이 좋았었다. 그리고 해군이 F-4를 방공용으로도 쓰기 위해 고출력 레이더를 달고 그걸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에 제대로 기총을 달기 힘들기도 했다. 참고로 베트남전에 투입된 미사일 3종 세트 중 AIM-4 팔콘[15]은 명중률 0%(…)로 수렴을 기록했고, 스패로우사이드와인더도 초창기에는 10%를 넘지 못했다. 물론 미군의 교전규정상 한 적기에 2기의 미사일을 발사하는 방법을 썼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 명중률이면 참 답이 없는 정도다. 가상이지만 명중률을 직접 확인해보고 싶은 사람은 Thirdwire 사의 Strike Fighters 를 해 볼 것.
한편, 미사일은 지상에도 영향을 주었으니, 이전까지 대공공격이 순전히 얼마나 하늘에 쏟아붓느냐의 승부였던데 반해 적을 추적하는 미사일이 등장하면서 전투기들의 위협요소로 등장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미사일 만능주의는 지상에서 더 빛을 발한 셈.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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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10의 지상폭격
또 이때부터는 2차대전 당시 급강하 폭격기의 지상공격능력을 계승해 현대의 MBT들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항공전력인 지상공격기와 한국전 때 실용화에 성공하여 베트남전부터 대거 투입된 회전익기, 소위 헬리콥터의 능력이 대두되게 된다. 특히 공격헬기와 지상공격기는 지상전에서 동료 지상군의 든든한 조력자가 되었다.[17] 물론, 헬리콥터는 지상군을 지원하는 것이 주 임무인 특성상 거의 다 공군 소속은 아니고, 해군/해병대육군 소속의 항공대에서 운용하고 있다.

3.5. 걸프전 그리고 스텔스(1976-현대)


베트남전 이후 나온 전투기들의 레이더의 기능이 더욱더 상승하여 전투기에 달린 레이더로 수백 킬로미터 밖의 적기를 탐지하거나, 레이더파를 지면에 쏜 후 반사되어 돌아오는 패턴을 분석하여 시계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지형을 읽어내고 화면에 시각화하는 매핑 기능, 레이저를 목표에 조준한 후 폭격, 폭탄이 레이저 사이트를 따라가는 조준이라거나, 인공위성과 연계하여 GPS로 유도하는 유도탄 등 별의별 해괴한 무기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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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B-52 스트라토포트리스.
또 이와 반대로 항공기가 적 레이더에 탐지되지 않도록 하는 스텔스 기술이 개발되기 시작하였는데 이쪽 분야를 실용화시킨 유일한 나라는 미국이다. 초기의 스텔스기는 특수 마그네틱 도료를 사용하여 레이더파의 일부를 흡수하여 항공기가 레이더에 좀 더 작은 물체로 보이도록 했다. 그 다음으로 나온 것은 F-117 나이트 호크 같은 스텔스기로 레이더파를 흡수하면서 반사하는 구조였다. 거기다 적외선이나 엔진음도 최소화하는데 큰 노력을 하게 된다. 이 능력이 얼마나 위협적인지는 걸프전에서 증명되었다.
이라크군은 개전 첫날부터 정체도 모를 항공기에게 지휘소와 레이더 시설 등 주요 구조물이 폭격 당하는 상황에 빠졌다. 기존의 폭격이 보이는 대상이 우수수 폭탄을 떨구고 가는 식인데 반해, 미군의 폭격은 한밤중에, 그것도 레이더에는 걸리지도 않는 뭔가가 정확한 폭탄 한두 발 떨구고 가는 식으로 전개되면서 이라크군 방공망은 손놓고 당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능력을 위해 기체의 디자인 자체가 현실적으로 날 수 없는 구조로 만들었고[18], 덕분에 속도는 바닥을 기고, 폭장량은 레이저 유도 폭탄 두 발 정도가 한계이고, 비행 자체가 컴퓨터의 도움(FBW) 없이는 불가능했다. 또한 각이 진 디자인의 이유도 한가지. 당시 컴퓨터 기술로는 구형의 계산이 불가능해서 평면으로만 설계가 가능했었다고 스컹크 웍스에서 후에 말했다. 즉 부족한 컴퓨터 기술로 어찌어찌 만든 초기작이라는 것. 흠좀무.
시간이 흐르면서 러시아를 필두로 스텔스기를 무력화하기 위한 레이더 개발이 시도되기 시작했고, 어느 정도 성과를 올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적을 자랑했던 F-117도 세르비아 공격에서 격추되는 등 손실이 생겼다. 이에 대해선 많은 논란이 있었는데, 가장 인정받는 설명은 세르비아군 당국에 매수된 프랑스 공군 중령이 NATO의 비행 스케쥴과 경로를 넘겼는데, 이것이 며칠 지나서 그다지 효용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미군의 나태함으로 F-117이 일주일간 같은 비행 경로로 비행하는 바람에 그 경로에 SA-3등을 배치했다는 것이다(참고로 당시 세르비아군의 대공 레이더는 베트남전 수준이었고, 이를 이용해 F-117을 탐지한다는건 불가능에 가까워서, 격추 직후 러시아가 최신예 레이더를 판매했는가의 문제로 NATO러시아간의 신경전이 있었다).
하지만 이후 미국은 스텔스의 방향을 B-2[19]F-22와 같이 유려한 디자인으로 레이더파를 반사하는 방향으로 바꾸고[20], F-117을 퇴역시키기에 이르렀으니 아직 스텔스 기술은 미국의 독무대라 할 수 있다.
  • 대표 항공기
    • 고정익기
    • 회전익기
    • 가변익기
      • F-14 톰캣[21] (미국)
21세기에는 무인기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정찰,공격용으로 실전에서 큰 성과를 보이고 있으며 미군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공군도 무인기의 비중을 늘려가고 있다.

4. 여담


초기 공군력의 대부분은 육군에, 일부가 해군에 소속된 부대였다. 왜냐하면 초기 공군의 주된 역할은 육군의 보병, 포병을 지원하는 정찰이 주임무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공중전은 1916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러다 1918년 1차세계대전 말기(1918년 4월)에 영국이 세계 최초로 공군(Royal Air Force 줄여서 RAF. 즉 영국왕립공군)이라는 독립된 군을 갖추었다. 그 전에 오스만 제국이 1904년에 먼저 공군을 편성했으나, 조직의 독립성이나 임무, 무엇보다 규모 면에서 완전히 독립된 형태의 공군이라 하기에는 조금 부족했다.
어떻게 영국이 세계 최초로 공군을 독립편성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추가로 설명하자면... 일단 독립적인 군사조직을 갖추기 위해서는 그 군만이 전문적으로 해야하는 일이 있어야 함을 이해해야한다. 해군의 예를 들자면 해군은 배를 타는 일이라는 육군이나 공군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역할을 하기에 해군이라는 타군과 구별되는 군이 존재하는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타군은 할 수 없고 오직 공군만이 할 수 있는 공중전이 물론 존재했으나 당시의 기술적 한계로 인해 전쟁에서 비행기가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영국의 육군과 해군 항공대는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우수한 전투기와 나름대로 쓸만한 폭격기를 갖추고 있었고 그 규모도 다른나라에 비해 매우 거대했기에 다른 나라에 비해 비행기가 전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22] 전략폭격을 최초로 했다고 알려진 독일 제국 해군 항공대체펠린은 그 비행선이라는 태생적 한계가 명확해 속도도 느리고 공격에도 취약해서 효과가 매우 떨어졌다. 전쟁 후 비행기의 여러 역할들과 잠재력이 크게 부각되며 영국은 항공대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영국의 육군 항공대와 해군 항공대가 합쳐저서 세계 최초로 공군이라는 독립된 군으로 거듭난다. 당시 영국 육군 항공대는 다른 나라는 거의 하기 어렵던 특정 지점에 대한 전략폭격도 가능했다.
즉 '공군의 독립적 편성'이라는 사건자체가 비행기 성능의 발전과 이러한 비행기를 운용하는 항공대의 수적, 질적 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타국의 예를 추가로 살펴보자면, 독일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1930년대) 영국, 프랑스 항공력의 박멸 및 영국본토 공습이라는 명확한 목표를 설정했고 이러한 특수한 목적의 달성을 위해 기존에 있던 항공대의 인적, 물적 규모를 크게 늘렸다. 그 결과 독일이 설정한 목표들을 전문적으로 해낼 수 있는 공군이라는 독립된 군이 편성된다. 독일 공수부대의 필요성도 독일 공군의 창설과 연관이 있다. 당시 나치 독일의 2인자 헤르만 괴링이 1차대전 당시 육군 전투기 조종사 출신이라는 점 또한 한 몫을 했다.
그래서 독일이 세계 최초로 루프트바페(Luftwaffe)라는 공군을 편성했다는 주장은 이는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밀리터리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착각중 하나. 사실 제1차 세계대전 초반에 독일 제국 육군 항공대는 연합군과 공중에서 호각을 다툴 정도로 강했다. 그러나 전쟁을 거듭할 수록 손실이 매우 많았고 결국 대전 말기에 독일 항공력은 사실상 괴멸상태였기 때문에 전후에 육군에서 독립시킬 공군 자체가 없었다. 더군더나 대전내내 맹활약하며 연합군을 마구 후려갈긴 독일 육군 항공대에 대한 악몽으로 연합군은 독일의 항공전력 보유를 아예 금지시켰다.
미국의 경우도 비슷한 맥락인데 원래 미국의 항공전력이나 기술적 수준은 상당히 보잘 것 없었다. 거기다가 미국은 1930년대 이전까지는 항공력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미국의 육군 항공대는 수적, 질적인 면에서 엄청난 성장을 보였고 이를 바탕으로 전쟁에서도 맹활약을 했다.(추축군 항공력의 박멸, 추축군 본토의 여러 시설 폭격, 지상군 지원 등) 미국 항공대의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맹활약과 수적, 질적인 면에서의 거대한 팽창은 미국이 앞으로 있을 전쟁에서 항공대의 중요성과 복잡한 항공작전들을 수행하기 위한 그들만의 독립된 군이 필요함을 깨닫게 했고 마침내 전쟁이 끝나고 1947년에 미공군이 탄생한다.
2차대전 미군 기갑부대에게 가장 화력지원을 많이 해준 것은 육군항공대가 아니라 포병부대로 특히 M7 프리스트를 비롯한 자주곡사포, M10 울버린 같은 대전차자주포들이 기갑부대를 지원해주었다. 그래서 육군항공대의 대전차 임무 성과는 과장돼 있다는 게 현 전사학계의 주류의견. 대부분 유기된 전차나 이미 지상군이 격파한 전차를 공격하고는 격파했다고 기록함으로써 전적이 과장되었고, 재조사를 통해 항공전력의 대전차 임무는 비효율적이라는 결론을 냈다. 그러나 그 이외의 보급로 공격과 보병 공습은 효과적이었다. [23]
미군은 이걸로 재미를 많이 봤는지 2차 대전 이후에도 항공 전력에 의한 사전 터닦기에 상당히 의존을 해서, 전쟁이 나면 일단 공군 혹은 해군 항공대를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상대방의 항공전력을 뜨기도 전에 말 그대로 박살내고, 지상 전력도 어느 정도 청소한 후에나 게임 시작을 할 정도. 하긴 그게 가능하다는 것도 사실 무진장 대단한 것이지만... 걸프전에서 이 방식으로 제대로 승리한 미군은 이후 상대적으로 육군을 정예화를 하는 대신 숫자를 줄였으나, 이후 아프가니스탄이라크에서 공군력이 영향을 줄 수 없는 비정규 게릴라전이 수시로 벌어지는 베트남전 시즌 2, 3(…)를 찍으며 개판을 내고 있다가 결국 망했어요. 다만 이 현재의 미 공군과 베트남전 당사의 미 공군을 비교하는 건 현 미 공군에게 있어 최악의 모독이다. 월남전 자체가 워낙 육군이고 공군이고 제대로 못 굴러가던 막장이었고, 현대의 미 공군은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발전했으므로 이는 확실히 잘못된 비교이다. 당장 현재 이라크와 아프간에서 미 공군의 F-15, F-16, A-10들이 월남전 당시 F-4, F-105들처럼 막 떨어진다는 말을 들은 적 있는가? 물론 이라크와 아프간 양국의 방공 및 항공세력이 제대로 된 맨패즈조차 없을 정도로 베트남과는 비교도 안되는 개판이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미 공군의 역량이 상당히 쌓였던 것도 어는 정도 작용을 했을 것이다. 차라리 전체적인 전쟁의 흐름이나 환경을 비교하는 것이 옳지.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P-51 머스탱티거를 박살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포레스트 검프에서도 댄 중위는 소대원이 전멸하자 검프가 도망가자고 하는 와중에 닥치고 공군부터 불렀고, 해군이 나오는 영화라도 늘 마지막엔 건쉽이나 전폭기가 날아와서 적을 갈아버리고 육군이 나와도 그렇고... 그냥 미군 영화의 클리셰 확정. 사실 이런게 클리셰인것도 역사상 전무후무한거지만.
트랜스포머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도 마이클 베이가 미 공군에게 뭐 로비라도 받은건지 공군이 다 해먹는다. 진짜 영화 내에서 수틀리면 부르는 게 공군이다. 특히 폭격기 뜨면 디셉티콘이고 뭐고 개박살. 1에서는 먼저 초반에 스콜피온이 낙오된 미군 보병들을 공격 중일 때 MQ-1 프레데터가 정찰 화면을 보내주고 곧 이어 A-10 썬더볼트가 웅장한 음악과 함께 출격하여 지원하고, 그걸로도 모자라자 AC-130 의 공중 지원 포격으로 외계인을 도망치게 만드는 미 공군의 위엄(...)을 볼 수 있다. 후반부에 스타스크림이 처음에는 F-22 편대에 끼어들어 혼란을 주는 상황에서는 두세 기 정도 격추시키지만 이내 파일럿들이 정체를 파악하자 데꿀멍하고 튀었고 그 랩터 편대가 메가트론을 거의 반쯤 죽여놨다. 끝장은 샘 윗위키가 짓기는 했지만 메가트론이 겨우 샘 윗위키 정도에게 끝장나도록 만든 것은 그 F-22 편대의 공대지 미사일이었다. 2에서는 F-16이 상당수의 디셉티콘을 폭격으로 조졌다. 물론 공군이 너무 강하다는 피드백이 있었던지 활약은 전작에 비해 대폭 줄었으며 3편 시점에는 적이 드론이라 공군이 박살나기는 한다. 하지만 개중에 항공 수송이나 미사일로 도움을 주기도 한다. 다만 이건 무비판적인 이야기고 원래 메가트론을 비롯한 사이버트론 종족은 지구의 원시적인 화기로는 흠집 하나 못 낸다.
전투 비행 시뮬레이션을 플레이하면 어떤 모습인지 어렴풋이 알 수 있다. 특히, 켐페인 모드가 지원되는 게임인 경우, 멀티만 주구장창 날리지 말고 한 번 싱글 켐페인을 해 보자. 한 번 죽으면 끝! 이라는 하드코어한 룰을 적용하면 더욱 좋다.
2차대전을 배경으로 한 게임, 예로 콜 오브 듀티에선 막판에 사방에서 탱크가 몰려오고 보병들이 몰려와서 전멸직전에 시간 잰 것처럼 정확하게 공군이 날아와서 모조리 파괴하고 아군이 '와!!'하고 환호해주는 게 클리셰. 실제로 높은 난이도에서 할 땐 정말 기쁘다.
스타게이트의 미공군은 우주로 뻗어가서 별의별 우주인들을 박살낸다. 해병대가 나오긴 하는데 들러리 수준이라 별 의미 없다.[24][25]
밀덕 계통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전차 개그를 할 때 연합군, 주로 미군야라레 전차 승무원이 애용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뭐가 보이든지 관계 없이 승무원이 하는 대사는 "공군!"이다.[26]

5. 공군인


공군은 기술군의 특성이 강조된 탓에 타군에 비해 고학력이란 이미지가 강한 편이다. 과거 육군에서 고졸을 갑종장교로 임관시킬 때 공군은 대졸자를 학사사관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다소 타군에 비해 편하단 이미지도 있다. 미국에선 의자에 앉아서 근무한다고 Chair Force라는 비칭이 있다. 또한 이런 요소들 때문에 다른 병종에 비해 상대적으로 군대 특유의 권위주의가 덜하고[27] 개방적인 이미지를 나타내기도 한다.
육군의 주요 전투원이 병사이고 해군의 주요 전투원이 부사관인 것과 달리, 공군의 주요 전투원은 장교(파일럿)다. 병들과 부사관들은 주로 지원업무를 맡는다. 다만 방공포대나 관제대대에서 관련 특기를 가지고 근무하는 공군이라면 육군이나 해군처럼 들과 부사관들도 주요 전투원이 된다.

6. 나무위키에 별도의 문서가 있는 공군




7. 관련 문서



[1] 루프트바페. 독일어 권에서도 독일에 한정된 단어다. 스위스 공군은 Schweizer Luftwaffe(스위스 공군)라고 부른다.[2] 항공군. 독일 제국동독 공군의 명칭이었으며, 현재 오스트리아 육군항공대(오스트리아에는 공군이 육군 소속임)의 명칭이기도 하다.[3] 처음엔 프랑스에서 '추격기'로 불렀다. 미군도 1943년까지 추격기(pursuit plane)라고 불렀다. 그래서 당시 미군 전투기는 전부 제식 번호가 P로 시작한다. 미 공군이 미 육군에서 분리되면서 전투기(fighter)로 변경.[4] 다만, 무인 기구의 경우, 대 항공기 방해물 역할로 공중에 도배를 해놓는 방식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또한, 2차대전때 V1을 막기 위해 쓰이기도 한다.[5] 하지만 복좌 전투기도 1차대전 종전까지 현역으로 남아서 단좌기를 상대로 어느정도 성과를 올리기도 했고 키스 파크&아서 노스 콤비와 같은 에이스 조종사가 나오기도 했다.이당시 전투기의 전방 기총이라고 해봐야 기총 1~2정이라 후방기총에 비해서 크게 앞설게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이야기.[6] 하지만 이런 폭격기 무적론은 폭격기의 비행 성능이 향상되면 전투기의 성능은 더더욱 좋아진다는 점을 놓쳤기에 2차대전 초반 폭격기 잔혹사로 이어졌으며, 결정적으로 나중에 발명된 레이더와 그것을 이용한 조기 경보 체제 등으로 인해서 무너졌다.[7] 두헤의 이론은 매우 논리적이고 참신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인간의 인내심을 과소평가하는 바람에 전략 폭격으로 전쟁을 이길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빗나가고 말았다. 거기다, 그의 이론은 민간인이고 뭐고 없고 전장에서 화학탄을 쓰는 게 당연하던 시대에 만들어진 거라, 요즘같이 부수적인 피해를 억제하느라 군이 스스로를 억제해야 하는 시대엔 더 잘 들어맞지 않게 되었다.[8]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칼 하인츠 프리저 대령이 저술한 '전격전의 전설'에서는 이러한 내용을 부인한다. 1940년 5월 10일 황색작전 개시 시점에 독일 공군의 가용전력은 3,578대 중 2,589대에 불과했으며 빌헬름 슈파이델 독일공군 대장은 '1940년 5월 10일 당시 활주로에서 이륙한 폭격기 수가 1000대 남짓이었다고 말했다. 반면 프랑스 공군은 개전 당시 3,562대의 전투용 기체가 가용했다. 서부전역 종결 이후 한 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독일군에게 점령당하지 않은 지역에 방치된 프랑스 공군 기체가 무려 4,268대에 달했다고 한다. 사실상 프랑스 전역에서 독일이 제공권을 잡은 이유는 프랑스의 공군 전력 자체가 미비했다기보다, 1차대전 식의 대규모 소모전을 우려한 프랑스 공군 수뇌부가 전력을 아끼며 전쟁에 참여했기 때문이다.[9] 정치적 개인적 욕심으로 공격목표를 항속거리의 한계부분에 있던 런던으로 수정한 상부의 삽질이 상당했다.[10] 그래도 신덴은 이후 개발 목표를 장거리 폭격기 요격으로 잡았지만 자원 부족에 전쟁이 끝나면서 망했어요. 이후 분석한 결과는 역시 총체적 난국이라는 평.[11] me-262가 실전배치되고 얼마 뒤 연합국도 글로스터 미티어와 슈팅 스타를 굴리기 시작했다. 다만 이때쯤가면 독일 공군은 거의 씨가 말랐기 때문에 전투기내지 전폭기와의 교전보다는 V1, V2요격에 투입하거나 후방에 예비대로 편성되었다.[12] 발사 속도가 1.5배 빠른 정도.[13]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은 미군의 베테랑 조종사들과 중국(혹은 북한)의 조종사들의 경험의 차이이며, 그 외에도 세이버의 유압시스템이 미묘하게 반응성이 더 좋아서 근접항공전시 미세한 우위가 있었다고도 하고, 미그의 37mm기관포은 공중전이 아닌 폭격기 요격용으로, 위력은 강하지만 발사속도와 명중률이 낮다는 점도 지적된다. 참고로 최근의 RAND 보고서에서 10:1에 달하는 격추비 자체가 틀린 수치이며 실제 격추비는 1.8:1이었다고 해서 논란이 되고 있다.[14] 총 자체부터 탄약까지 완전하게 하나의 모듈화 한 '발칸 포드'를 장착했다. 증가연료탱크 달 듯 기체에 척 갖다 달면 되었는데, 덕분에 공기 저항이 늘어나서 비행 특성이 떨어지는 것을 감수해야 했으며, 이 자리에 달 수 있는 폭탄 및 연료 탱크를 달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이 건포드가 생각처럼 만능도 아니어서 초기형은 고장도 심했다.[15] 버전이 많으며 세미 엑티브 형식과 적외선 형식이 공존한 미군의 유일한 미사일. 심지어 핵탄두까지 장착할 계획도 있었다.[16] 사실상 이때부터 방공 vs 공군의 승부는 전자전(ECM)기술의 개발 대결이 되었다. 누가더 적 레이더를 잘 기만하냐 혹은 누가더 미사일을 더 잘 맞추는 기술을 가지고 있는냐가 쟁점이 된 것이다.[17] 이 때만 해도 전투기/공격기에 폭격 조준용 컴퓨터가 따로 설치되어 있지 않았었다. 이러한 폭격 장치는 A-7 에 최초로 장착된다.[18] 오죽하면 미국 군수업체 측에선 자기들은 벽돌에다가도 엔진과 컴퓨터만 달아 주면 날릴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19] 스텔스 이전에 최초 제식채용된 특이한 형태의 전익기(수평/수직 미익이 없고, 주익과 동체의 구분도 없다시피 하다. 납작한 부메랑을 상상하면 되겠다)란 점에서도 시선을 끌었다. 참고로 이글 개발한 노스롭사는 이러한 전익기에 관심이 많아서 1945에 나오는 B-35나 B-49 같은 항공기를 2차 대전에 만든 회사다. 창업자가 전익기에 대해 관심이 많아서, 그가 죽기전 당시 국가 기밀인 B-2의 모형과 사진을 국방성에 허가를 받아서 보여줬더니 눈물을 흘리고 "하느님이 이것을 보게하려고 나를 25년이나 더살게 해주셨다는것을 알게되었다!"("Now I know why God has kept me alive for 25 years" )그 뒤 사망했다는 도시전설도 돈다. 하지만 영어 위키에 따르면 실제로는 정신과 몸상태가 그런것을 볼상태가 아니었다고 한다. [20] 여기서 말하는 유려한 디자인은 말그대로 디자인이다. F-117도 유려하지 않을 뿐 레이더를 반사하는게 기본이다. 단지 나이트 호크를 개발할 당시에는 곡면계산을 하기엔 슈퍼컴의 연산능력이 많이 부족했다.[21] 톰캣은 비행속도에 따라 날개의 각, 특히 후퇴각이 변하는 가변익기이다.[22] 공군으로 통합되기 전 영국 해군 항공대(RNAS)는 2900대가 넘는 항공기와 5만명이 넘는 인원이 있었고 육군 항공대(RFC) 또한 3300대 정도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다.[23] 포병이 적 기갑부대를 상대로 효과가 없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지근거리에서 터지는 포탄만으로 기갑차량의 궤도나 보기륜들이 파손되며, 특히 기갑부대와 함께 다니는 보병들이나 이들에게 연료와 탄약을 실어나르는 수송부대는 치열한 포병사격에 치명타를 입기 일쑤였다.[24] 현역 공군장성이 2명이나 찬조출연한데다가 주인공 잭 오닐역을 맡은 리차드 딘 앤더슨은 명예공군준장을 수여받을 정도로 미공군하고 친하긴 했다.[25] 이건 주 활동 무대가 끽해야 차량 하나 통과할까말까한 스타게이트를 통한 이동이기 때문에 그렇다. 나중에 이렇게 발로 뛰며 얻은 기술과 동맹 맺은 외계인의 지원으로 우주 전함까지 만들어내 스케일이 대폭 커진다.[26] 심지어 아군인 소련군이 보여도 전차장이 반공주의자라서, 영국군이나 아군 셔먼을 봐도 이미 개념을 상실해서 또는 노획전차인 줄 알고 무조건 보자마자 공군을 부른다.[27]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타 군종에 비해 상대적으로 할 뿐이지, 결코 권위주의가 없는 것이 아니다. 공군도 군대인 이상 권위주의가 없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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