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정부/평가
1. 개요
2.1. 정치에 대한 평가
2.2. 사회·문화에 대한 평가
2.3. 외교·국방에 대한 평가
2.3.1.1. 소련의 대북 군사 지원 삭감 및 중단
2.3.2. 대북 관계
2.3.3. 병사 월급 대폭 인상
2.3.4. 국제 사회
2.3.4.1. 1988 서울 올림픽 성공적 개최
2.3.5. 평시작전권 환수 협의
2.4. 경제에 대한 평가
3.1. 정치에 대한 평가
3.1.2. 국민 탄압
3.1.3. 한국 정치의 병폐 조성
3.1.4. 5공 청산 방해
3.1.6. 부정부패
3.1.7. 기타
3.2. 사회·문화에 대한 평가
3.3. 외교·국방에 대한 평가
3.3.1. 올림픽 추진 과정에서 일어난 문제
3.3.2. 1979년보다 악화된 한미 미사일 사거리 지침
3.4. 경제에 대한 평가
1. 개요
노태우 정부에 대한 평가를 서술한 문서.
2. 노태우 정부에 대한 긍정적 평가
2.1. 정치에 대한 평가
2.1.1. 6.29 선언
6월 항쟁에서 국민은 민주화를 거세게 요구했다. 이때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를 비롯한 평화적인 정부이양,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 김대중의 사면 복권, 국민 대통합, 국민 개개인의 인권 신장, 프레스 카드 제도 폐지 및 언론 자율성 보장, 지방자치제 확대 등을 담은 6.29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에서 노태우는 자기 선언이 무시 당하면 대통령 후보를 포함한 모든 공직을 사퇴한다고 발표했고, 당시 여당인 민정당은 이 선언을 당의 공식 입장으로 인정했다. 이어 전두환도 특별 담화를 통해 6.29 선언을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하면서 이 선언은 정부의 공식 선언이 되었다. 그와 함께 4.13 호헌조치는 철폐되었다.
6.29 선언이 발표되자 6월 항쟁은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으로 끝을 맺었다. 그리고 6.29 선언에 따른 헌법 개정 작업이 착수 되었고, 1987년 10월 27일 국민투표를 통해 새 헌법이 확정, 6월 항쟁과 6.29 선언으로 이어진 일련의 과정은 일단락되었다.
이를 통해 대통령 직선제가 대한민국 땅에 돋아나게 되었고, 13대 대선 당선자 노태우 대통령부터는 민주주의 공화정에 입각한 '''국민들의 직접선거'''로 대통령이 선출되는 방식이 채택되면서 대한민국은 민주주의를 향한 첫 발걸음을 걷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선언 이후로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로 탈바꿈했다.
물론 이와 같은 선언이 집권 세력이 원해서 선뜻 한 것은 아녔고 6월 항쟁이라는 거국적 시민 항쟁이 분출되었고, 집권 세력이 이에 순응해서 나타난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선제 요구를 수용하고 이밖에 여러가지 민주화 조치를 선언함으로써 대규모 유혈 사태로 번지지 않고, 대세를 거스르지 않고 민심을 수습한 점은 인정 받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6.29 선언이 그저 궁여지책에 몰린 상황서 국민에 대한 항복에 불과하고 단순히 일시적으로 국민의 분노를 잠재울 일종의 미봉책이라는 비판 또한 존재한다.관련 칼럼 그리고 노태우도 공식 입장에서 '국민에게 항복했다는' 사실을 시인함으로 반대 진영의 공격은 일단락되기도 했다.관련 칼럼
2.1.2. 여소야대 국면의 통합 행보
노태우 대통령의 취임으로 군사정권이 '다소' 종식되었다. 노태우는 자신이 전두환과 달리 체육관 선거가 아닌 국민 직선을 통해 당선된 대통령이라는 자부심이 강했다. 덕분에 군사정권에서 문민정권으로 가는 길에 있는 과도기의 대통령으로서, 비록 노태우가 군사 정권과의 연관성이 짙었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그런 덕분에 민주화가 급격히 역행하는 위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군부 내에 김대중과 김영삼에 대한 거부 세력이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87년 민주화 직후 곧바로 문민정권이 들어섰다면 태국처럼 기껏 민주화를 이룬 나라에서 다시 반란 세력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났을 지도 모를 일이다.[1] 후임인 김영삼 대통령의 하나회 숙청 역시 노태우 대통령 집권 5년 동안 문민 정치인에 대한 군부의 거부감이 희석되었기에 더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좀 더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3당 합당과 공안정국 조성을 하지 않고 군의 정치적 이용을 자제했을 경우, 안정적인 경제 상황과 함께 후세의 격찬을 받는 대통령으로 국내외의 평가를 받았을 수도 있다.
특히 1988년에 이뤄진 총선에서 야권이 대승을 거두어 여소야대 국면이 형성되는 정치적 위기가 있었지만, 박정희→전두환 양 정권에 걸쳐 생명의 위협까지 겪은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를 '''여야 영수회담'''에 참여시키고 의견을 경청함으로써, 대선 후 자칫 불만이 생길 수도 있는 민심을 수습하고, 오히려 '''온건-통합 행보를 펼치는, 이전과는 다른 정부'''라는 인식이 사회에 널리 퍼지는 전화위복의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생전의 김대중은 노태우의 경청하려는 태도를 매우 높이 평가하였다. 참고로 훗날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고 초대 대통령비서실장을 노태우 대통령의 정무수석을 역임한 김중권을 임명했고, 통일부 장관과 국정원장을 지낸 임동원도 노태우 대통령 시절 남북회담 관련 일을 했던 사람이었다.
심지어 오늘날 정의당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진보정당 민중당과도 영수회담을 했다. 당시 민중당은 국회 원내 정당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우재 당 상임 대표 및 당 간부들과 면담하였다. 현직 대통령이 진보정당 대표와 단독으로 면담을 한 것은 전무후무한 사례가 아닐까 싶다.기사[2]
유명한 별명은 '물태우'인데, 원래는 재임 시기에 물난리가 많이 일어나 생긴 별명이지만, 이 표현은 곧 노태우의 우유부단한 리더십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87년 6월 항쟁 이후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자, 노조, 운동권의 시위가 봇물 터지듯이 이어졌는데, 분신 자살 시위, 쇠파이프 시위 등 과격 시위도 잇따랐다. 하지만 이에 대해 노태우 정부는 강경하게 대처하지 않고 상당히 소극적이고 온건한 대처를 했으며, 노동운동의 요구를 일정부분 수용하여 노동임금을 대폭 인상해나가도록 해갔다. 과거 군부 정권에서 수십 년간 지내온 국민들에게 노태우의 행보는 그야말로 우유부단하게 느껴졌던 것이었다. 이는 여소야대의 상황 때문이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노태우 본인 스스로 민주화라는 시대적 흐름을 읽고 이를 거스르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노태우 본인은 물태우라는 별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는데 그의 가치관의 단면이 드러난다. "사람들이 나를 물태우로 부르고 있는 것을 잘 안다. 그것은 매우 좋은 별명이며, 나는 물 같은 지도자로 보이는 게 좋다." 노태우는 소크라테스의 지도자론을 인용하면서 "물과 같은 사람이 지도자로서 가장 바람직하다."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또 "사람들이 나를 물태우라고 부르는 것은 약하다는 뜻인 것을 잘 안다. 하지만 겉으로 어떻게 보이든 대통령 심중에 강한 의지만 있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1989년 6월 9일 기사
또한 노태우는 민주자유당 내의 권력 구조가 김영삼으로 넘어갈 시점에 자신의 측근 정치인을 동원해 김영삼을 축출하거나 그를 방해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무난하게 정치적 권력을 넘겨주었다. 사실 이건 민정계에서 김영삼에 맞설만한 강력한 후계자가 없었던 탓도 컸다. 그러나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은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했고, 당내 의석 수에서도 민정계가 민주계를 압도하는 상황이라 민정계에 그럴 듯한 대권 주자가 있었다면, 혹은 한 술 더 떠서 노태우가 김영삼 만은 막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면 보수표의 분열로 김영삼의 대권은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보수파나 중도 좌파 쪽에서는 노태우가 어찌 됐든 군부 핵심 인물 중 하나였고, 광주민주화운동이나 하나회 관련된 일이 많다 보니 인해 싫어하긴 하지만, '대통령 임기 동안의 행보' 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긍정적으로 본다. 적어도 민주주의 공화정이 시작된 상황에서 '''그걸 뒤집지는 않았고''', 집권 후 전두환을 백담사로 내쫓았다. 군부 출신이지만 국민 선거로 뽑힌 대통령이고, 표현의 자유가 확대되는 등의 공적이 있다.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자기 자신을 개그 소재로 삼아도 좋다'고 대국민 담화에서 밝혔다. 물론 재임 기간 동안 다시 군사 정변을 노리다가 들통났지만, 이것은 그만큼 군부 내에서 다시 쿠데타가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었고 정부 차원에서는 대세를 거스르지 않았다.
2.1.3. 용인술
비교적 적재적소에 인재들을 기용했다. 역대 정부마다 인사 문제 등으로 논란과 비판이 많았지만 노태우 정부에서는 비교적 그러한 비판이 별로 없었다. 국민 선거를 통해서 선출된 정부이지만 대통령 본인과 정권의 구성원들이 여전히 군사 정권의 일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폭 넓게 인사들을 등용했던 점은 특기 할 만하다. 실제로도 그가 기용한 인물 중에는 훌륭하게 맡은 역할을 해낸 사람이 나왔다.
먼저 강영훈 국무총리를 예로 들 수 있다. 육군사관학교 교장 출신인 강영훈은 분단 45년 만에 최초로 남북 총리 회담을 성사, 남북 화해의 새 장을 열었다. 당시 3차례에 걸친 남북 고위급 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남북 협력 증진의 실질적인 기초를 닦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때문에 ‘총리의 권한과 기능을 제대로 행사하고 자기 역할을 충분히 한 총리로 평가 받기도 했다.[3]
그리고 국방대학교 교수 출신으로 대통령비서실 외교안보수석으로 임명된 김종휘 수석이 있다. 김종휘는 노태우에게 최초로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라고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노태우 정부 5년 임기 내내 청와대에서 근무하면서 북방 외교 및 남북 대화를 주도하였다.
이외에도 한국의 케인즈 학파의 일원으로서 많은 학문적 업적과 제자를 남긴 조순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를 경제 부총리 겸 경제 기획원 장관으로 임명했고, 이후에도 한국은행 총재로 기용했다. 조순은 육사 교관 시절 육사 생도였던 노태우를 가르쳤던 인연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노태우 정부 시절,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을 지낸 박승, 문희갑, 김종인, 이진설은 모두 개혁적인 정책을 펼쳤다. 1980년대 중반 고도 경제성장 및 세계적인 거품 경제의 여파로 부동산 시장이 폭등하여 사회적인 논란이 되고 있었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는 부동산 시장을 안정 시키겠다는 공약을 제시하고 당선되었다. 노태우는 당선되자마자 금융을 전공하고 한국은행과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 출신이었던 박승을 경제수석으로 임명했다. 노태우는 주택 200만 호 건설을 지시했고, 박승은 일산에 신도시 부지를 선정하고, 이후 건설교통부 장관으로 기용되어 신도시 건설을 주도하였다. 문희갑 역시 분당 건설을 주도하였고 토지공개념 3개 법안을 도입하였다. 훗날 대구시장을 지낸 문희갑은 정치권, 보수단체로부터 ‘빨갱이’라는 비난이 쏟아질 때마다 “6공의 운명을 걸고 '토지공개념`제도 도입을 실현하겠다”며 밀어붙였다. 그리고 금융실명제를 추진하려고 했으나 반대가 거세어 실패하고 말았다.
문희갑의 뒤를 이은 사람이 김종인이었다. 김종인은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의 손자로,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경제 사회 개발 5개년 계획 입안에 참여하면서 의료보험제도를 도입하는데 기여했다. 1987년 개헌 당시에는 헌법 119조 2항, 일명 ''''경제민주화\'''' 조항을 삽입한 주인공이다. 보건사회부 장관으로 기용되었다가 경제수석이 되었다. 김종인은 재벌을 견제했고 이 때문에 전경련에게서 가장 껄끄러운 인사로 꼽혔다. 또한 북방 외교에도 관여하여 적성국이었던 소련과 중국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과 수교를 맺으면서 경제 협력, 통상 협상에 관여하였다.
이외에도 현홍주 미국 대사는 북방 외교와 남북 대화를 이어가는 과정에서 전통적인 우방이었던 미국과의 관계를 훼손하지 않게 조정하고 미국과 소통했다. 이와 같은 활동으로 미국 역시 노태우 정부의 북방 외교와 남북 대화를 전폭적으로 지지해주었고, 고립된 북한이 미국에게 대화를 요구할 때도 미국은 한국을 통해서 대화하라고 나올 만큼 자주적인 외교를 펼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청와대 공보수석으로 기용된 김학준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는 석학으로 명성이 높았는데, 노태우에게 권위주의 청산, 위대한 보통 사람의 시대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홍성철, 정해창 대통령 비서실장, 이병기 청와대 의전수석 등은 조용한 보좌로 노태우 정부의 숨은 공신으로 꼽혔다. 김대중 정부에서 통일부 장관을 지내서 남북 대화를 주도했던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도 노태우 정부 시절 통일부 차관으로 임명된 바 있다.
노태우는 이러한 참모들에게 상당한 자율성을 부여하였고, 또 대통령 본인의 의견을 내세우기보다는 참모들이 회의를 통해서 국정 현안들을 결정하게 했다고 한다. 때문에 상술된 바처럼 물태우, 유약한 리더십, 소극적 리더십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오히려 민주화 이행 과정에서 적절한 리더십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2.1.4. 국정감사 제도 부활
국회가 행정부를 필두로 한 국가기관에 대한 감사와 감찰을 진행하고 사회적인 문제 등에 대해서 비판, 감시하는 공개 청문회인 국정감사 제도를 부활시켰다.
2.1.5. 정치인에 대한 풍자, 표현의 자유 보장
1988년 1월 1일 신년사에서 정치인 및 정치에 대한 풍자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대통령을 보고 "물태우"라 부르며 개그 프로그램에서도 풍자할 수 있었던것도 대통령의 결단 때문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당연하게 느껴지는것이지만 권위주의의 시대에서 한발자국 나아가는 발걸음이었다.
2.2. 사회·문화에 대한 평가
2.2.1. "전국민 대상"으로 의료보험제도 확대
1963년 박정희 정부에서 처음으로 의료보험'''"조합"'''법이 제정되었지만, 당시 이것은 조합에 가입한 사람들에게만[4] 적용되었으며, 그나마 68년 장기려 박사가 선구적으로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설립해 헌신적으로 활동하기 전에는 법안이 사실상 개점휴업상태였었다.
노태우 정부는 이를 확대하여, '''"전국민을 대상"'''으로 의료보험제도를 실시했다.
미국에서는 역대 정부마다 의료보험제도 도입과 확대 과정에서, 민간보험회사들의 반대로비로 인해 사회적으로 논란이 가중되었던 반면, 한국에서는 논란과 저항을 일으키지 않고, 공공영역에서 비용을 분담해 국민의 부담을 덜어주는 의료보험제도가 우리 생활 깊숙히 들어오게 되었다.[5]
2.2.2. 사회간접자본 건설
인천공항과 경부고속철도(KTX)를 건설을 1992년에 시작하였다. 1989년에 정부는 인천국제공항 건설과 경부고속철도 건설을 2대 국책 사업으로 지정하고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차량 및 제반 시스템은 국제 입찰 끝에 프랑스의 TGV 기술을 도입하기로 결정하였으며 1992년 6월 30일, 경부 고속 철도 최초 계획이 발의 되었다.
아울러 서해안고속도로와 새만금 건설사업을 시작했다. 분당, 일산 등 신도시 건설도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2.2.3. 범죄와의 전쟁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마약 사범, 조폭 수가 줄어들었다. 밀수품 거래와 범죄가 많았던 연안 인근 항만 도시들의 치안도 개선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고. 다만, 후술할 청명계획이 들통나 들끓는 여론을 타개하기 위한 쇼가 아니었냐는 목소리도 있었고, 경찰이 혹사 당했다는 지적도 받았다. 공적에만 집중하여 범죄자들을 잡아 들여서 크게 선전한 뒤 나중에 재판에서 죄를 입증하기 어려워 무죄로 방면 되는 경우도 있었다.
다만 조직폭력배와 인신매매 조직 만큼은 확실하게 때려잡아서 야쿠자들이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는 일본이나 브라질이나 온두라스 같은 중남미에서 각종 갱단들이 우글거리는 것과는 대조되게 대한민국에서는 갱단이 발을 붙이기 어려운 여건을 조성했으며, 노약자분들도 안심하고 길거리에 나설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 점 역시 노태우 정부의 확실한 치적 중 하나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대한민국은 전세계 치안 1위를 자랑하고 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을 비난하는 세력들도 이것만큼은 잘했다고 인정을 할 정도로 노태우 전 대통령의 최대의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2.3. 외교·국방에 대한 평가
2.3.1. 북방 관계
그 당시 중국과 소련 측은 북한의 주장인 '한반도에 코리아는 우리밖에 없다! 남쪽은 괴뢰국이다.'를 무시하고, 경제적으로 성장하는 한국과의 수교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고, 당시 정부는 중국, 소련과 시대적 흐름(탈냉전)에 맞춰 자주, 진취적으로 외교를 펼쳐 재임 기간 동안 남한과 미수교 상태에 있었던 공산권 국가였던 소련, 중국, 몽골, 베트남, 동유럽의 여러 국가들을 비롯해 남한과의 수교를 거부한 채 북한과의 관계를 유지하던 알제리, 말리, 앙골라, 탄자니아 등 아프리카 제3세계 국가들과 국교관계를 수립하여 북한에 대한 남한 체제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등 북한을 압박하는 효과가 있었다. 한국이 과거 적대관계였던 공산국들과 친교를 맺고 북한의 우방국들을 자신의 우방국으로 만들자, 이 때문에 북한은 엄청난 불안감과 위기의식을 느끼고 궁지에 몰리게 된다.
북한과의 관계도 1991년 남북 기본 합의서 체결, 유엔 동시 가입 등의 내세울만한 치적이 있다. 북한을 지지하는 몇몇 제2, 3세계 국가들(쿠바, 시리아 등)과는 수교를 맺지 못했지만 임기 5년 동안, 과거 전쟁을 벌이거나 적대했던 중화인민공화국과 베트남, 소련과 수교를 맺었고 40여개의 공산국가와 수교를 체결했다. 북한도 이 즈음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 카드를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소련과는 불곰사업을 진행하면서 대규모 투자가 이루어지며 교류가 이루어졌다.[6]
노태우 정부의 북방 정책의 핵심적인 인물은 김종휘와 박철언이 있다. 노태우 본인도 이 두 사람이 북방 외교의 '''투톱'''이라고 평가하였다. 북방 정책의 실질적으로 설계한 인물로는 김종휘가 있다. 그의 역할은 미국 닉슨 행정부의 헨리 키신저나 이후 김대중 정부의 임동원, 노무현 정부의 이종석 등에 비견될 수 있었다.
박철언은 체육청소년부 장관을 역임하면서, 북방 외교를 실질적으로 실행하였다. 소련 및 구 공산권 국가에 신분을 위장하여 비밀 특사로 파견되어서, 공산권 국가 내부의 학계, 정계, 기업인들과 접촉하여 수교의 물꼬를 텄다. 그리고 1980년대부터 북한에 수차례 방문하고 김일성과도 만나서 대화를 만들어갔다.
노태우가 전임과 후임 때문에 그들에 비하면 존재감이 없고, 군사 반란과 독재 정권에 가담했던 자라는 전적 때문에 노태우의 이 공적은 평가 받지 못했지만, 북방 외교와 남북관계 관련해서는 대한민국이 수십 년간 이어진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결국 우위를 점하고 승리했다는 걸 세계에 보여준 공이 크다. 미국이나 일본과 달리 강력한 반공을 표방했던 대한민국이기에 공산권과 오랫동안 적성국으로 지냈는데도 결국 국교 정상화를 맺었으니. 실제로 이 북방 외교 때문에 김일성이 펑펑 울었다느니, 조선로동당이 중국과 소련에게 배신감을 갖고 소리치며 멘붕 했다느니 여러 설이 많을 정도였다.
물론 국제 정세(탈냉전)의 도움도 있었다.# 1989년 미국 부시 대통령과 소련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몰타 정상회담' 에서 냉전 종식을 공식 선언하며 평화를 지향하는 새로운 세계질서를 수립하겠다고 발표했다. 또한 몰타회담에서 미국은 동구권(동유럽 혁명)에 대해 소련의 불간섭을 요구했고 소련은 개입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며, 1991년에는 상호 핵무기 감축에 합의한 전략무기감축협정을 체결하는 등의 국제 정세가 있었다. 하지만 국제 정세가 아무리 호의적이라도 이를 적극 활용해 성과로 이끌어 내는지 여부는 결국 정부와 그 리더인 대통령의 역량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노태우가 단지 시절을 잘 만나 치적을 이루었다고 볼 수는 없으며 이 부분 만큼은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물 흐를 때 노 젓는 것도 능력인 것이다. 공산권이 붕괴되는 당시 정세를 잘 읽고 발 빠르게 대처해서 임기 내에 눈에 띄는 외교 실적을 올렸다는 점 만큼은 인정할 만하다.
그러나 반중, 반러 감정이 심한 우파들의 경우에는 중국, 러시아와의 수교를 오히려 과오로 보는 경우도 있다.[7]
2.3.1.1. 소련의 대북 군사 지원 삭감 및 중단
소련이 북한에 대한 전투기, 미사일, 무기 부품, 석유 공급 등 대북 군사 지원을 삭감했다.# 북한에 제공되던 유류와 식량 지원도 거의 중단되었다. 1992년 11월 소련 해체 후 러시아 대통령으로 방한한 옐친은 노태우에게 "대북 군사 지원을 중단했다"는 말을 거듭했다. "소련과 북한간 상호 원조 조약 제1조인 '군사자동개입' 조항도 재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로 인해서 소련과 한국과의 관계가 큰 폭으로[8] 개선되고, 북소관계는 굉장히 불편한 관계가 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소련에게 경협자금 30억 달러를 특히 91년 당시 14억 7천만 달러는 무기한 차관으로 제공해 야권은 물론, 민주자유당 내 민주계(김영삼계) 의원들 조차도 "‘러시아 수교를 돈 주고 샀다"는 비난을 쏟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97년 러시아 경제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할만큼 어려워지자, 일부 채무를 무기로 상환받으면서, 98년 당시 이스라엘 회사와 기술협력중이던 "순항미사일 '''기술까지 완전한 걸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90년대 ~ 현재까지 북한문제에 관해 러시아가 한국의 대북행보에 관해 직접 강력한 제동을 걸지 않았던 건, 이 14억 7천만달러가 뒤에서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했다고도 할 수 있다.
당시 민주당(1990년) 국회의원이던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이를 비난한 적이 있지만, 그의 자서전 『운명이다』에서 "북방 외교 자체는 좋은 정책이었다. 소련과의 수교도 의미가 큰 업적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에게 미안했다."는 심경을 밝히기도 했다.
2.3.2. 대북 관계
2.3.2.1. 남북 기본 합의서 타결
노태우 대통령은 임기 첫해인 1988년 7.7 선언을 통해 공식적으로 북한 및 공산권과의 관계 개선 의사를 표명했으며, 미국 부시 대통령은 1989년 2월 방한하여 국회 연설에서"우리는 북한 쪽으로 다리를 놓으려는 노태우 대통령의 평화적인 제안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며 "노 대통령과 긴밀히 협조해 북한을 실질적·평화적이고 생산적인 대화로 유도할 것"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1991년 12월 남북 고위급 회담을 통해 남북 기본 합의서를 타결한 것은 노태우 정부 임기 말의 두드러진 성과 가운데 하나다.
이 남북 기본 합의서는 '''평화통일 지향 원칙을 양측의 국무총리 서명이 날인된 문서로 확인'''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이후 출범한 모든 후속 정부 대북 정책의 중요한 가이드 라인'''이 되었다.
김대중 정부의 6.15 공동선언[9] , 노무현 정부의 10.4 선언[10] 역시 이 남북기본합의서를 기반으로 점차 확대해나간 것.
다만, 이것의 가장 큰 한계라면 상대과 함께 테이블에 앉는 과정이 외풍(외국의 이해관계) , 내부 변수로(예, 정권 교체) 인해 난항 아닌 적 없다는 것이다.
2.3.2.2.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1991년 12월 한반도 핵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세 차례의 남북 고위급회담을 가지고 ‘한반도의 비핵화를 통하여 핵전쟁의 위험을 제거하고 조국의 평화와 평화통일에 유리한 조건과 환경을 마련하자’는 내용의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에 합의했다.
이때 주한미군의 전술핵무기가 모두 철수되었는데, 배경을 보면 1991년 미국과 소련은 핵무기 감축에 합의한 전략무기감축협정을 타결했고, 그 연장선에서 미국은 1991년 9월 주한미군 기지에 배치된 전술핵무기 철수를 발표했으며, 북방정책을 추진하던 노태우 정부는 12월 북한과 ‘한반도 비핵화 선언’에 합의하였다.#
1992년 1월 한-미 당국은 북한이 요구하던 팀스피리트 합동군사훈련 중단을 약속했으며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핵안전협정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북한은 핵시설 사찰을 받게 되었다.
이후 북한의 핵개발이 지속됨에 따라 전술핵 재배치, 핵개발 등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2.3.2.3. 북한의 대남 무력 도발 소강
노태우 정부 시절 북한의 도발은 없었으며, 잠수함 침투 사건도, 서해상 무력 시위도 없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실제로 무력 도발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고 1건 정도 있었는데, 후술될 이 사건은 북한의 기습 무력 침공으로 보기에는 다른 사건과 비교했을 때는 약한 측면이 있으며, 국군의 인명피해는 없고 북한군 전원 전멸함으로써 북한군 피해가 훨씬 컸다.
무엇보다 대한민국의 역대 정부 가운데 드물게도 북한의 대남 무력 도발이 '''거의''' 없었던 시기임은 분명하다. 제1공화국 때 6.25 전쟁, 박정희 정부 때 1.21 사태,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EC-121 격추 사건, 대한항공 YS-11기 납북 사건, 휴전선 남침용 땅굴 발견 사건, 헨더슨 소령 사건, 육영수 피살 사건,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최은희·신상옥 납치사건, 전두환 정부 때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김포국제공항 폭탄 테러,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등 숱한 북한의 무력 도발로 인명 피해, 재산 피해가 있었다.
이후 김영삼 정부 때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화성 해안초소 K-2 소총 사취 사건 등, 햇볕정책이 추진된 김대중 정부 때 제1연평해전, 제2연평해전가 있었다. 노무현 정부 때도 북한의 1차 핵실험을 비롯해 북한의 도발이 끊이지 않았다. 북한은 2대, 3대 세습 체제가 진행되어 강성국가 건설을 목적으로 가시적인 성과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으며, 기습적이고 직접적인 타격을 감행하거나 간접적인 도발을 점점 더 자주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북한/대남 도발에서 참고.
그런데 노태우 정부 시기에는 1992년 은하계곡 무장공비 침투사건 외에는 별다른 북한의 대남도발이 없었다. 은하계곡 무장공비 침투사건은 1992년 5월 22일 새벽 북한군 3명이 야간을 틈타 비무장지대 군사 분계선을 월경했는데, 국군 제3보병사단에 의해서 전원 사살되었다. 당시 국군의 인명피해는 없었고, 이 때 한국군 병장 한 명이 손바닥에 총상을 입었으나 치료 후 무공훈장을 받고 무사히 전역했다고 한다. 이 작전에 투입된 지휘관, 전투병에 대해서 대대적인 훈장, 포장이 내려졌다. 이 시기 북한의 대남도발이 이전, 이후와 비교해볼 때 뚜렷이 나타나지 않았고 소강기를 맞이했다고 볼 수 있다.
2.3.3. 병사 월급 대폭 인상
군인들의 봉급을 대폭 인상해주었는데 특히 병사들의 월급을 대폭 인상시켰다. 대통령 취임 직전 1987년 병장 기준 월급 5,100원이었는데 임기를 마친 1993년 11,300원으로 인상되어 약 2배 이상 병사 월급이 인상되었다. 이등병 기준 월급은 1987년 3,600원, 임기를 마친 1993년 8,100원이었다. 출처
2.3.4. 국제 사회
2.3.4.1. 1988 서울 올림픽 성공적 개최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과 1984년 로스엔젤레스 올림픽이 냉전으로 인해 반쪽 대회가 된 것과 비교하여 서울 올림픽은 사상 최다의 참가국(160개국), 최대 참가 인원(8,465명)을 자랑했다. 88올림픽은 공산 정권에 대한 회의감을 주었고, 이것이 공산 국가들의 체제가 무너지는 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이후 노태우 정부에서 추진된 북방 정책의 흐름으로 이어졌다. 올림픽으로 인해 대한민국의 이미지가 분명히 달라졌고, 이것은 국제 무대에서 한국의 외교력을 높이는데 큰 기여를 했다. 단, 추진 과정에서 많은 문제점이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후술한 부정적 평가를 참고.
2.3.4.2. 남북한 UN 가입
위에서 언급된 공산권과의 수교(북방정책)를 바탕으로 1991년 9월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을 이끌어냈다.
2.3.5. 평시작전권 환수 협의
임기 초인 1988년부터 협의를 시작하여 임기 말인 1992년 말 평시작전권을 환수하는 협의를 완료했다. 실제로 환수된 시기는 김영삼 정부 때인 1994년 12월 1일로 원래 계획인 1995년보다 조금 빠른 것이었다. 이로서 평시작전권은 대한민국 합동참모의장에게 돌아갔다.
당시 정부는 한미연합사 체제를 유지하면서 전시작전통제권은 1996년 이후에 다시 논의하여 2000년에 환수하기로 잠정적으로 합의하였으나, 논의는 노무현 정부까지 미뤄졌으며 현재 진행형이다.[11]
2.4. 경제에 대한 평가
2.4.1. 성장과 분배의 조화
1980년대 후반 3저 호황의 끝자락에서 재임 기간에 경제성장이 예전보다 침체되었다는 인식이 있었으나,[12] 노태우 재임 기간은 30여년간의 경제성장의 과실이 국민에게 고루 분배되고 중산층이 넓게 형성되는 효과도 있었으며 이 시기에 자가용이 대중화 되고, 해외여행객수도 급속히 늘어났다. 연평균 7~8% 성장을 유지하면서도 민주화 초입 정부였기는 했어도 이전정부와 마찬가지로 민주노조는 탄압했지만 그래도 노동운동이 번지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임금을 꼬박꼬박 올려주도록 했기 때문에 지니계수도 동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낮은 편이었고, 1997년 외환 위기 전까지는 소득 분배가 선진국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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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그래프
빈부격차를 측정할 때 쓰이는 지니계수는 낮을 수록 빈부격차가 낮다. 노태우 정부 시기에 대한민국의 지니계수는 가장 낮았고, 이밖에 다른 계산 방법인 10분위 배율, 5분위 배율도 거의 동일한 결과가 나온다. 상대적 빈곤율도 가장 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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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연평균 최저임금 증가율은 17%로 87년 개헌 이후 들어선 5년 단임제 역대 정부 가운데 최대 수치다. 게다가 1989년 갤럽조사에서는 전체 국민의 75%가 중산층이라고 응답했고, 1992년에는 76.3%이 중산층으로 조사되어서 역대 최고 수치를 기록했다.출처
이 때문에 중도·진보적 정치학자인 손호철 서강대 교수는 강의에서 "역대 정부에서 가장 진보적인 경제정책을 추진한 지도자는 노 대통령이다."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노 대통령은 노태우다.[13] 노태우는 조순 등 개혁적 인사들을 채용하고, '''토지 공개념'''을 시행하려 애쓰기도 하였다. 또한 최저임금제를 처음으로 도입한 인물도 노태우였다. 요약하면 장기 호황을 바탕으로 분배 정의가 강화되고 낮은 실업률 유지와 구매력 증가가 지속되었던 시기로 최근 강조되는 분배를 통한 소위 '소득 주도 성장'이 우리 경제 역사상 유일하게 이뤄졌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2.4.2. 부동산 정책과 재벌 견제
종합토지세, 택지소유상한제·토지초과세, 개발 이익 환수에 관한 법률 등 토지 공개념 3법을 도입하여 부동산 투기를 억제하고자 했다. 이 법안은 90년대 중후반에 차례대로 헌재에게서 위헌 판결을 받았지만, 민주화 이후 가장 진보적인 부동산, 토지 정책이었다. 당시 정부는 150평 이상의 집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률까지 제정하려 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야당 뿐만 아니라 여당까지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정부가 재벌과 대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비업무용 부동산을 매각 처분하라고 명령(5.8조치)을 내렸는데, 이것은 역사상 가장 강도 높은 직접적 재벌 규제로 꼽혔다. 이 일로 재벌과 대기업은 소유하고 있던 비업무용 토지 약 4천만 평을 처분하게 됐다.
노태우 정부는 3저 호황의 여파로 투기자금이 부동산으로 대거 쏠리면서 이로인한 문제점이 커지자 토지과다보유세 부과와 8.10부동산투기억제종합대책을 발표하였고, 주택 보급 확대와 주택 가격 안정을 위해 주택 200만 호 건설 계획을 발표하여 분당, 일산 등 1기 신도시를 기획, 건설하였다. 〈공시지가제도〉(1989)를 도입하였고, 노후 아파트 재건축 사업을 처음으로 승인하는 등의 일련의 정책으로 부동산 폭등을 적극적으로 억제하는데 주력을 했고, 이 정책은 재임초중반기에는 큰 효과를 보지못했지만 본격적으로 신도시 아파트가 대량 공급되기 시작한 1991년부터 부동산 가격의 상승세가 꺽였고 김영삼 정부 들어서도 부동산 투기 억제정책 기조자체가 유지되면서 김대중 정부 초기까지 부동산 시장을 안정화되는 효과를 낳았다. 또한 국제 수지와 국가 재정에서 흑자 기조를 유지하였다.
2.4.3. 대기업 채용시장 저변 확대
그동안 서울 명문대 출신 졸업자 위주로 신입사원을 채용해온 주요 대기업들에게, '''지방대 졸업자, 특히 지방거점국립대 졸업생을 중심으로 (가시적으로) 채용'''할 것을 권고( ), 기업인력의 저변을 확대하고자 노력했다.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1989년 정부투자기관경영평가위원회는 지방대 졸업생들의 취업 촉진을 위해 정부투자기관의 지방대생 채용 할당제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본사가 지방에 있는 정부투자기관과 지방사무소 정원이 서울(본사)보다 많은 투자기관은 '''대졸 신규 채용 인력의 60% 이상을 지방대 졸업자'''로 뽑도록 했다. 나머지 투자기관과 4대 국책은행은 50% 이상 채용토록 했다. 채용 결과는 정부투자기관 평가 때 반영하게 하는 방식으로 사실상 의무화했다. #
처음에는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정부 권고를 수용해, 해당 대학 교수들이 추천해준 인재들을 뽑는 형식을 취했지만 -> 이 무렵 채용된 분들이 진력하여 실력, 실적을 선보인 덕분에, 점점 공채의 문호를 지방대 졸업자들에게도 넓혀 개방하는 계기가 되었다. 60년대 중후반 출생의 30대 기업 임원 중 지방거점국립대 출신분들이 계시다면, 대개 이런 과정을 거쳐 들어와 남다른 노력을 기울이신 분이라 보아도 과언은 아니다.
3. 노태우 정부에 대한 부정적 평가
3.1. 정치에 대한 평가
3.1.1. 6.29 선언이 무색한 관권선거
3.1.1.1. 전두환의 외교라인 총동원
노태우는 긍정적 평가에 6.29 선언이 담겨진 것이 무색할 만큼, 전두환 정권의 지원을 받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지난 198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전두환 정권이 노태우 당시 민정당 총재의 대통령 당선을 위해 외교라인을 총동원했던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30년의 비밀유지 기간이 만료된 외교부의 1987년도 외교문서를 통해서다. #
노태우는 대선을 3개월 앞둔 1987년 9월 13일부터 1주일 동안 미국과 일본을 연이어 방문했다. 자신의 외교력을 홍보하고 교민사회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였다. 여당 대표 신분이었지만 순방단 규모는 대통령급으로 꾸려졌다. 기자단 규모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훗날 KBS 사장이 된 김인규 기자를 포함해 KBS 3명, MBC 3명 등 20명이 넘는 유력 언론사 기자들이 동행했다.
여기에 외무부가 대대적인 지원에 나섰다. 노태우의 미국 방문 전 외무부는 주미대사관에 노태우의 일정을 비롯해 수행원 명단, 방미 준비사항 등을 전달했다. 스위트룸 등 노태우의 숙소 배정부터 차량 임대, 운전기사에 대한 보안교육까지 꼼꼼히 지시했다. 또 공항 도착 시 일부 교민들의 반발 대비책을 수립하고, 연회장에 한국에 우호적인 미국 기자를 초청할 것을 요구한다.
지시를 받은 주미대사관은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노태우 공항 도착 시 과격 시위 가능성에 대비하고, 100여 명을 마중 나가도록 해 환영 무드(분위기)를 조성하는 게 좋겠음’, ‘친한(親韓) 미국 언론인 10명에게 연사 초청 티켓 배분 추진’ 등 정부 외교라인이 여당 대표의 방미 현장 분위기를 제고시키는 데 외교라인이 대거 동원된 흔적이 문서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과정에서 주미대사는 미국 정부에 노태우에 대한 경호를 요청했다가 거절당하는 굴욕도 겪었다. 주미대사는 미 국무부에 “노태우는 한국 집권여당의 공식 대통령 후보이며 미국 내 불순세력의 공격을 당할 수 있다”며 신변 보호를 요청했다. 하지만 국무부는 ‘노태우가 정부 공식 대표가 아니고, 이번 방미도 공식방문 성격이 아니다”라며 거절했다. 주미 대사는 두 차례나 더 같은 요청을 했지만 모두 거부 당했다.
노태우는 방미 일정을 마친 뒤 곧바로 일본으로 향했다. 외무부의 개입은 방일 과정에서도 계속됐다. 노태우 방일 전 외무부가 주일대사관에 보낸 문서 속에 이같은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민정당 측이 (일본 기자클럽) 연설문에 포함돼야 할 사항과 예상 질의응답 파악을 희망한다’라든가, ‘노태우 방일 시 면담 주선 및 행정지원 등 필요한 사항을 측면 지원하기 바란다’는 내용 등이 그것이다.
주일대사는 일본 언론을 분석해 외무부에 보고하기도 했다. ‘일본 언론인 클럽(JAPAN PRESS CLUB)은 VIP를 괴롭히거나 당혹하게 하는 질문은 삼가는 지극히 동양적인 습성을 가지고 있음’, ‘언론 접촉이 없을 경우 실망과 반발로 인한 역작용 가능성이 큼’, ‘회견이 반드시 실현되도록 민정당 측에 권고 바람’ 등의 내용이다.
주일대사는 또 일본 기자들의 예상 질문까지 파악해 보고하기도 했다. ‘두 김 씨(김영삼, 김대중)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는?’, ‘단일화되는 경우와 모두 출마할 때 어느 쪽이 더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김대중이 당선되면 군 개입 등 소문이 있는데 군을 컨트롤 할 수 있는 자신이 있는가?’ 등을 예상 질문으로 정리했다.
외무부는 노태우의 미일 순방이 끝난 뒤에도 민정당의 요구사항을 미국과 일본 주재 대사관에 전달하고 보고를 받았다. ‘민정당이 노태우 연설과 질의응답 기록을 제공해 달라고 했다’, ‘노태우 방일 기간 공식 발언을 가능한 대로 정리해 보고해 달라’ 등의 지시였다. 여당 대표의 해외순방 일정 준비부터 마무리 이후까지의 전 과정에 정부 부처인 외무부의 외교라인이 사실상 총동원됐던 것이다.
심지어 청와대와 안기부 등 국가기관에만 전달해야 할 노태우의 순방 관련 외교부 기밀문서들이 집권 민정당과 실시간으로 공유됐던 흔적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순방 관련 기밀 문서들의 문서 공유 기관에 느닷없이 민정당을 포함시켰던 것이다. 행정부와 집권당 간 최소한의 경계선조차 무시한 채 전두환 정부가 노태우에 대한 노골적인 지원에 나섰던 방증이다.
3.1.1.2. 시민 동원 유세
노태우가 부산 수영만에서 유세했을 때 전두환은 공무원 조직을 총동원해 백만 정도의 청중을 모으도록 했다. 87년 체제의 성립 2 - 13대 대통령 선거
3.1.1.3. 선거 당시의 부정행위
3.1.1.3.1. 부재자 투표 조작
구로구청에서 투표가 진행 중이던 투표일 오전 11시에 구로구 선관위가 의문의 투표함을 몰래 빼돌리다가 발각되었고, 이어서 의문의 투표함과 투표용지, 인주 등이 연달아 발견되었다. 결국 이에 항의하는 시민들과 학생들이 구로구청을 점거하고 농성에 돌입했고, 정부는 백골단 등의 용역, 최루탄을 동원하면서 진압, 1,034명을 연행하고 208명을 구속했다. 참고로 이 당시 구속된 시민들 중 일부는 2001년에 민주화 운동 유공자로 인정받았다. #
이후 선관위가 문제의 투표함을 되찾았으나 이미 대선 결과에서 노태우 후보와 김영삼 후보의 표차가 200만 표 가까이나 났기 때문에 당락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하여 이 투표함은 개표되지 않았다. 또한 적어도 1992년 총선 때까지 군 부재자 투표에 부정이 있었다는 이지문 중위의 폭로가 나왔던 걸 봐서는 당시 전국단위 선거를 치렀을 때 군인을 대상으로 한 부재자 투표에서 광범위한 부정이 저질러졌다는 걸 유추할 수가 있다. 해당 시기, 즉 쌍팔년도 군대에서 군생활을 한 분들의 증언에 의하면 암만 끝물이라고 해도 군사정권의 영향력은 여전히 미쳤을 테니 감히 야당 후보를 찍을 분위기가 아니었다고 한다.
3.1.2. 국민 탄압
집권 초기에는 비교적 유화책을 보였으나, 1988 서울올림픽 폐막 후 12월 법질서 확립을 시사하는 담화를 발표해 1989년 초 풍산금속 안강공장 경찰투입을 시초로 본격적으로 공권력을 통한 진압에 나섰다. 1989년 문익환 목사 방북을 계기로 공안정국을 조성해 통일운동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다.
1990년 3당 합당 후 권력을 국가 개혁이나 발전 과제 추진에 이용하기보다 그저 권력 유지에 급급한 경향이 강했고, 오히려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 오홍근 테러사건, 민간인 사찰 등을 저질러서 공안통치로 돌입했다. 노태우 정부는 또 다른 독재 정권이라는 의견도 있을 정도로 국민들을 탄압했고, 이에 따라 구속자 수가 점차 늘었다. 노태우는 구미권 순방 때 외신 기자회견마다 누누이 양심수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지만, 그 사이 양심수는 1988년 779명에서 1989년부터 천 단위 이상으로 늘어 1993년 민가협 조사 기준 총 6,614명에 달했으며, 하루 구속자는 평균 3.6명이었다.
이미 1989년 공안정국을 계기로 수사기관의 고문 빈도가 늘어나 홍성담, 차일환, 오영식, 서경원, 방양균 등 고문피해 사례가 속출했고, 이철규와 이내창, 박창수 등 의문사 사건들도 나왔다. 1991년 4월 26일에는 명지대 학생이었던 강경대 열사가 시위 도중 서울시경 제4기동대 소속 백골단에게 집단으로 구타 당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등 시위 탄압 또한 여전하였고, 이로 인해 운동권에서 잇따른 분신이 일어나면서 사회는 '분신정국'으로 접어들게 됐다. 이후에도 성균관대 학생 김귀정, 서울대 학생 한국원이 각각 경찰의 구타와 발포로 사망하는 일이 일어났다.
1992년 1월 17일에는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대신의 방한 국회연설 저지 목적으로 규탄 시위를 벌이던 태평양전쟁유족회 소속 주기성 옹이 손자뻘인 전경의 발길질에 쓰러져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3.1.2.1. 주요 공안 사건
3.1.2.1.1.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
너무 유명한 조작 사건.
3.1.2.1.2. 이철규 의문사 사건
반외세독재투쟁위원회 활동과 관련해 국보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이철규 조선대학교 학생이 가석방 된 뒤에 사망한 일이 있었다. 2004년 의문자진상규명위와 의사들은 전두환의 안기부가 개입하여, 광주 지역 내의 학원 민주화 운동을 짓밟기 위한 공작이었다고 판단했으며 이철규가 타살 당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3.1.2.1.3. 5.3 동의대 사태
노동자대회 저지에 항의하면서 파업 지지 시위를 벌이는 학생들을 경찰이 무력 진압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인명 피해 사건이다.
3.1.2.2. 언론장악
군사 정권 시절의 언론 통제도 여전하여, 1990년 4월에는 소위 '''KBS 사태'''가 일어났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3.1.2.3. 군사정변 시도
보안사가 제 버릇 개 못주고 또다시 쿠데타를 벌이려 계획했다가 들통난 사건이다. 국군보안사령부 민간인 사찰 폭로 사건 항목 참조.
3.1.2.4. 간첩조작
3.1.2.4.1. 남한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3.1.2.5. 군 부재자투표 부정 폭로 사건
군인들이 여당 후보를 뽑도록 조직적으로 강요한 부정 선거 사태다. 해당 문서 참조.
3.1.2.6. 1991년 연쇄 분신 파동
강경대 구타치사 사건에 대한 반발로 학생들과 시민들이 연쇄 분신 자살을 한 사건이다. 해당 문서 참조.
3.1.3. 한국 정치의 병폐 조성
노태우는 3당 합당을 저지른 장본인이다. 너무 김영삼이 비판을 받아서 모르지만, 이쪽도 엄연한 주동자로서 그 책임은 분명히 존재한다. 물론 노태우가 3당 합당을 획책해도 김영삼이 단칼에 거절하면 그만이었다. 결론은 양측책임.
6월 항쟁 이후 한국 사회가 제도적인 민주주의가 이루어지고, 1989년 문익환 목사와 임수경의 잇단 방북(임수경 방북 사건), 평화민주당 서경원 의원 방북 사건이 일어나는 등 4.19 혁명 때와 마찬가지로 통일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하자 그 타개책으로 인위적 정계 개편을 시도했다.
물론 김영삼은 이때 노태우를 비롯한 군사정권의 핵심 인물들을 낚아 뒤통수를 때렸고, 이는 김영삼의 엄청난 초창기 인기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3당 야합은 대한민국 지역감정에 쐐기를 박은 사건이며, 2017년까지 그 병폐가 여과없이 드러났다. 이것 때문에 사상 처음으로 국회를 200석 이상 차지한 여당이 태어났다. 참고로 국회의원 200석은 단독으로 헌법을 바꿀 수 있는 규모다. 그런데도 업적이나 추진 과제가 불분명했고, 당쟁에만 목을 맸다.
3.1.3.1. 지역감정 조장
노태우 정권은 초원복집 사건과 더불어서 정부 차원의 지역감정 조작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그 결실이 빛을 보던 시기였다. 1998년 총선에서 대구와 경북에 지역 기반을 두었던 민주정의당은 29석 중 25석을 얻었고, 부산과 경남에 지역 기반을 두었던 통일민주당은 37석 중 23석을 얻었다. 반면에 광주, 전남, 전북에 지역 기반을 두었던 평화민주당은 역시 37석 중 36석을 얻었고, 충남과 충북에 지역 기반을 두었던 신민주공화당은 27석 중 15석을 얻었다.
한 마디로 노태우 정권은 지역 정당들이 난립하여 지역감정을 이용해 집권하는 전략이 실현된 시기였다. 이처럼 지역에 따른 지지 성향이 뚜렷하게 나타나자, 정치인들은 각종 선거에서 지역감정을 적극 동원하려고 했고, 정당들이 지역 연고와 지역 발전 공약을 핵심적 선거 전략으로 내세우면서 한국 사회의 지역 차별, 지역 감정, 지역 이기주의가 심화되었고 지역주의 선거운동과 표 몰아주기, 투표 경향이 오랫동안 관행처럼 지속되었다.
3.1.4. 5공 청산 방해
3.1.5. 김영삼 문민정부 무능화의 단초 제공
3.1.6. 부정부패
전두환 밑에서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노태우도 역시 국고 비자금 횡령으로 악명이 높다. 공식 추산된 횡령 액수는 2,628억 원 내외다.#, #, #
심지어 수서 사건을 보면 알겠지만 제5공화국처럼 정권이 부패했다. 수서 사건은 강남구 수서동 수서지구 택지 분양 과정에서 일어났으며, 수서지구 택지를 한보그룹에 특별분양하는 과정에서 정·재·관계의 지도층 인사들이 거액의 뇌물을 수수한 혐의가 드러나 구속되면서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킨 사건이다. 관련자들이 무더기로 구속됐지만 관련 피고인 9명 중 6명이 집행유예로 풀려나 단순 독직사건으로 축소된 채 마무리되어 대표적인 의혹 사건으로 남았다. IMF고 자시고가 아니라 노태우도 경제난의 책임이 상당하다.
3.1.6.1. 1995년 노태우 비자금 사건
노태우의 부정부패를 세상에 알린 사건이다. 이로 말미암아 노태우는 구속까지 되었다. 문서 참조.
3.1.6.2. 율곡사업
1993년 김영삼 문민정부 들어서 폭로된 대규모 군납비리 사건이다. 해당 항목 참조.
3.1.6.3. 장남의 조세피난처 의혹
그의 아들 노재헌이 전두환의 아들인 전재국과 함께 페이퍼 컴퍼니를 운영했다는 의혹이 드러나면서 논란이 되고 있다. 현재까지는 수사 단계에 있다. 물론 이것은 재임 기간, 재임 이전에 발생한 일도 아니고, 퇴임한 지 20년도 더 된 시점에서 터졌다. 더군다나 노태우 본인은 병으로 누운 지 오래된 신세다.
3.1.6.4. 수서지구 택지 특혜 분양 사건
노태우 정권 시절의 대표적인 정경유착 사례다.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이 택지 특별 분양을 받기 위해 150억여 원의 자금을 노태우에게 건넸다.
3.1.6.5. 2차 사법 파동
1988년의 제2차 사법 파동은 사법권 독립 문제를 제기한 법관 성명 파동으로, 결국 김용철 대법원장의 도중하차를 몰고 왔다. 노태우 정부와 여당이 9대 김 대법원장을 재임명하려 하자 야당이 반대했고, 그 후 여당과 야당이 김 대법원장 유임에 합의하고 '대법관 임명에 야당 의사 존중'이란 타협을 이뤄냈다. 이에 법관들이 집단 반발, 정치권에 사법부가 종속될 수 없다는 입장을 천명하자 김 대법원장은 자진 사퇴했다.#
그 후 여당은 정기승 당시 대법관을 대법원장으로 내정해 국회 동의를 구했으나, 여소야대 정국 아래서 부결되어 결국 이일규 씨가 임명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2차 사법 파동은 대법관 인사가 정치권의 타협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법관들의 사법권 독립 요구에서 촉발된 것이었다.#
3.1.6.6. 1992년 대선 자금
노태우는 후임 대통령 당선자인 김영삼에게 정치자금으로 3천억 원을 지원했으며,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에게 20억 원을 지원했다. 이러한 사실은 노태우의 저서(2011년 8월 9일 발간)에서 드러난다. 물론 이 돈은 국민 세금이었다.#
3.1.6.7. 그 외 비리 의혹들
심지어 노태우는 박정희처럼 '스위스 은행 비밀구좌설'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1994년 들어 딸 노소영과 사위 최태원이 1990년 2월 당시 미국 내 은행에 20만 불을 분산예치했다가 미국에서 조사를 받는 등 곤혹을 치렀는데, 당시 세간에선 노태우가 율곡사업 등으로 거액의 비자금을 조성해 스위스 비밀계좌에 맡겼다는 소문도 있었다. 1995년 비자금 사건 당시 검찰이 수사에 들어가 이 부분에 대해서도 조사했으나 밝혀내진 못했다. 다만 검찰측은 1989년 유럽 순방 당시 노태우가 11월 24일부터 3일간 스위스를 비밀리에 방문했고, 12월 2일부터 이틀간 미국 시애틀에 체류하며 노소영 부부를 만났다고 밝혔다. 이것으로 사건은 퍼지지 않았으나 의혹은 풀리지 않았다.
그 외에도 노태우 정부 때 추진된 경부고속철도 및 수도권 신공항 개발사업, 골프장 건설사업 인허가 과정, 삼성그룹의 상용차사업 허용, 상무대 비리, 사돈기업인 선경그룹의 태평양증권 인수 및 동방유량의 동방페레그린증권 합작설립 등 숱한 비리 의혹사건이 많지만, 결국 의혹으로만 남았다.[14]
3.1.7. 기타
노태우는 앞의 둘이 저질렀던 엄청난 실책을 '''적어도 모르고 있지 않을''' 지혜가 턱없이 부족하였다. 이 점도 후임 김영삼 정부에 상당한 부담으로 남았다.
심지어 '자유민주주의 체제 생존'을 '''볼모'''삼아 국민을 위협하였다. 이러한 처사도 빼도박도 못할 진영논리의 횡포가 된다.
3.2. 사회·문화에 대한 평가
3.2.1. 부정 선거 조장
노골적인 선거 개입을 여러 차례 시도했고, 이것이 언론 통제 완화와 진보 성향 언론 한겨레신문 창간과 맞물려 여러 차례 신문 지면에 보도되어 구설수에 종종 오르기도 했다.
특히 제14대 총선과 제14대 대통령 선거가 연이어 치러진 1992년이 절정이었는데, 총선을 불과 이틀 앞둔 1992년 3월 22일, 이지문 육군 중위의 양심선언을 통해 군부가 정치적 중립을 위반하고 노골적으로 민자당을 밀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이틀 뒤 총선에서는 서울 노원 을 선거구 재검표 결과 민주당(1991년) 임채정 후보의 100표가 민자당 김용채 후보의 표로 바꿔치기 당한 사실이 밝혀지며 당선자가 김용채 후보에서 임채정 후보로 바뀌는 선거 사상 초유의 사태까지 발생했다. 그리고 화룡점정으로 대선에서 우리가 남이가로 알려진 초원복집 사건이 터졌다.
3.2.2. 환경오염
개발 독재의 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노태우 정권 역시 많은 환경오염 문제를 은폐하려고 하여 큰 비판을 받았다. 이 시기에는 수돗물 중금속 오염 파동(1989) 등 대규모 환경오염 문제가 발생하며 특히 문제가 되었다.
3.2.2.1. 낙동강 페놀 유출사건
한국 역사상 가장 큰 환경오염 사고 중 하나로, 낙동강 하류 도시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건강 문제와 관련해 큰 사회적 분노를 일으켰다.
3.2.3. TV다(多)채널 신설 저해
노태우 정부는 여행, 명상음악, 예의범절, 환경, 바둑, 다큐멘터리, 영화 등 다양한 장르가 세분화되는 TV다(多)채널의 출범을 5,6년 늦추게 만들었다.(특히 개발독재의 폐단과 관련하여 명상음악이 절대 필요한 상황이었다.) 소수 지상파 채널만을 고집하며 오히려 상술한 KBS 사태를 초래하는 등 위태로운 실책을 저질러 차기 김영삼 정부가 TV다채널(케이블TV)을 만들기 위해 엄청 고생하고 본격화한 직후에도 부작용을 적지 않게 겪은 계기를 만들었다. 기껏 지역 방송(SBS 등)이나 해외 위성 방송 채널(NHK 등)의 송출을 시작하기는 했다.
3.2.4. 저출산 방조
노태우 정부는 박정희 전두환 양대 정부의 최악의 삽질 중의 하나인 저출산 문제를 시정해야 되는데 시정하지 않고 방조하였다.
3.2.5. 최악의 치안 부재
노태우 정부 시기는 단군 이래 최악으로 불릴 정도로 치안이 엉망이었다. 이미 13대 대선 직후인 1987년 12월부터 파출소가 괴한들에게 털리고 3인조 강도가 수도권 일대를 휘젓고 다니는 등 치안 불안이 불거졌음에도 노태우 정부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엘리트 수사 인력들을 시국, 공안 부분에 집중 배치 시켰고, 경찰력 대부분을 학원, 노동 시위 진압에 동원하였다. 이에 따라 민생 치안에는 큰 공백이 생겼고 이 틈을 타 살인, 강도, 강간 등 강력 범죄가 거의 매일같이 터져 나왔으며 심지어 조직폭력배, 인신매매 등 조직 범죄까지 기승을 부리고 실종, 미(未)귀가자가 10만 명을 넘겼지만 시국사범의 높은 검거율에 비해 민생사범 검거율은 현저히 낮아 국민들은 치안 문제 때문에 불안에 떨어야 했다.
3.2.6. 부실대학 대량 양산의 시작
일반적으로 부실대학 양산의 시작을 김영삼 정부의 5.31 교육개혁때 발표된 대학설립 준칙주의를 시초로 보는 견해가 많으나 대한민국에서 실질적으로 부실대학 양산을 시작한 정권은 노태우 정부였으며 당시 대통령이었던 노태우와 문교부장관이었던 정원식은 진짜로 마구잡이로 대학 설립 인가를 내줬었다.# 통계자료만 봐도 노태우 정부 시절 얼마나 많은 대학들이 설립되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15] 김영상정부의 대학설립 준칙주의도 사실은 노태우 정부의 대학 증설 공약의 연장선상이라 봐도 무방했었으며 부실대학 증가의 불씨는 이미 노태우 정부때 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 노태우 대통령은 1987년 대선 당시 이미 대선 후보 시절 부터 대학 증설을 공약으로 내세웠으며[16] , 다른것도 아니고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강제 폐교된 광주예술대학교'''나 지금은 폐교된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비리 사학인 서남대학교'''[17] 및 그와 동시에 폐교된 한중대학교가 노태우 정부의 대학설립 공약에 의해 인가가 났던 대학교였다. 대학설립 준칙주의가 실행되기 이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노태우 정부때 대학증설 공약에 의하여 대학설립의 문턱은 이미 크게 낮춰졌으며 노태우 정부는 대놓고 전문대 추가 설립 신청을 대규모로 받았던 적도 있었다. # 물론 이때 신청이 들어온 대다수가 부실 사학 재단 들이었고, 이들 중에서도 이미 상당수가 부실 사학 재단이다보니 신청 과정에서도 적지 않은 사학 재단들이 나가떨어졌을 정도인데도 불구하고 안전장치 마련 같은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었다. 이미 이 무렵에 대학설립 과정에서 잡음이 나온 대학도 있었다는걸 생각하면...#
3.3. 외교·국방에 대한 평가
3.3.1. 올림픽 추진 과정에서 일어난 문제
1988년 올림픽 개최 당시 미관을 위해 거지, 부랑자, 장애인을 강제 수용소에 가두고 심판의 편파 판정, 선수의 약물 복용 사실이 발각되는 등 온갖 문제가 있었다. 1988 서울 올림픽 참고.
3.3.2. 1979년보다 악화된 한미 미사일 사거리 지침
미국의 압력에 의한 영향으로 어쩔수 없다. 그러나 국방과 각종 기술 개발에 매우 심각한 악영향을 줬으며 현재도 영향력이 있는 문제이다.
정확히는 1979년 당시에는 '사거리 180km 이상의 미사일(군사용 로켓)만 개발 금지'였지만 1990년 한미 미사일 양해각서 개정은 이번에는 사거리 180km, 탄두중량 500kg 이상의 '군사/과학/산업용 로켓을 포함한 어떠한 로켓도 금한다.'로 상황이 악화되었다. 그 결과 한국은 미사일, 민간로켓 연구도 장벽에 부딪히게 된다.
그나마 노태우 정부 이후 김영삼 정부 시기인 1995년 경에 한미 비확산 실무협의체를 통하여 MTCR과 같은 조건인 사거리 300km와 탄두 500kg이내로 사거리 규제를 완화하는 한편 한국의 MTCR 가입을 미국이 지지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더불어 민간 로켓은 규제하지 않는 것을 요구조건으로 내걸었으나 미국은 이 부분에 대하여 반발할 정도였다. 이후 1998년 북한이 광명성 1호를 발사하며 로켓 기술을 과시하자 한국의 불안이 극에 달하며 미국에 대놓고 새로운 협정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한미 미사일 양해각서가 강제성이 없는 양해각서임을 들어 우리 쪽에서 파기하면 자동으로 효력이 소멸하는 것 아니냐며 그냥 만들자는 극단적인 의견이 국방부 내에서 나왔을 정도였다.
자세한 것은 한미 미사일 사거리 지침 참고.
3.4. 경제에 대한 평가
3.4.1. 부동산 정책의 부작용
노태우 정부는 대통령 선거 당시 200만 호 주택 건설을 공약했고 이를 임기 내에 달성하고자 무리하게 추진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부작용을 낳았다:
- 부동산 가격 폭등 및 부동산 투기 과열: 200만 호 주택 건설을 추진하면서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였고 여기에 더해 인력난과 자재난이 겹치면서 주택 가격이 폭등했고 이에 따라 내 집 없는 서민들을 위한다는 애초의 취지가 무색하게도 일반 서민들은 평생을 벌어야 20평짜리 아파트 하나 장만할까 말까 하게 되었다. 또한 집값 상승에 따라 전세, 월세 가격도 덩달아 폭등하여 집세를 감당하지 못한 일가족이 동반 자살하는 등 민생고를 더하는 부작용을 야기했다. 게다가 부동산 투기 열풍이 불면서 부동산으로 한몫 잡으려는 투기꾼들이 설치고 이 과정에서 부동산으로 한탕 잡은 졸부들이 양산되면서 천민 자본주의 및 사회적 위화감이 팽배해져 갔다. 또한 돈이 부동산으로 몰리면서 1989년 4월 1,000 고지를 넘었던 종합 주가 지수는 이후 줄곧 내리막을 달렸고, 은행들은 예금을 붙들기 위해 금리를 인상하여 중소기업의 자금난을 가중시켰다.[18]
- 부실 공사: 200만 호 주택 건설 및 각종 대형 토목 사업으로 상술되었다시피 시멘트, 철근 등 건설 자재들이 품귀 현상을 빚었고, 이에 따라 부실 자재들이 공급되면서 입주를 시작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아파트에 균열, 누수 등 하자가 발생하는 일이 빈번했고, 지반을 제대로 다지지 않아 지반 침하가 일어나는 등 여기저기에서 부실 공사 흔적이 드러났다.
- 수도권 인구 집중 및 지방 공동화의 가속화: 노태우 정부는 수도권 인구 과밀화를 지역 균형 발전을 통한 수도권 인구 분산 대신 수도권 신도시 건설이라는 동족방뇨식 정책으로 해결하고자 하였고 이는 결국 신도시 건설 붐의 수혜 지역인 수도권과 상대적으로 소외된 지방의 격차를 더욱 크게 벌어지게 하는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다.
3.4.2. 내수 경제 인색
[1] 노태우 정권 성립 후 5공 청문회 등 5공 청산 작업을 하자 전두환이 '나한테 싸대기 맞는다' 운운하던 시절임을 잊어서는 안된다.[2] 참고로 가운데에 웃고 있는 사람이 바로 이재오다.[3] 정두언 전 새누리당 의원이 국무총리실에 오랫동안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공직사회 비평서를 내서 반향을 일으켰던 『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에서 최고의 총리로 꼽기도 했다.[4] 당장에 의료보험을 만든 장기려의사의 사례만 보더래도 빈곤층에 대한 의료적 혜택이 없어 성인과 같은 활동을 해왔단 것을 알 수 있다.[5] 미국만 봐도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의료보험제의 도입을 반대하는 주축이 거대 정당인 공화당으로, 신정부 출범때마다 큰 이슈 중 하나로 치열한 찬반 논쟁이 일어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민간 보험 회사들의 입김이 커지기 전에, 집권 여당이 주도적으로 추진해 공공 의료가 제대로 자리잡은 것이다. 당시 야당측에서도 자신들의 추구하는 바와 맞아 떨어지는 의료보험제도의 확대에 굳이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가 전혀 없으며, 여당은 자신들이 주도하여 추진한 정책인데다, 국민들에게 크게 호응을 얻는 결정적인 계기 중 하나였기에 이에 대한 축소나 폐지를 주장하기를 극히 꺼릴 수밖에 없었던 것.[6] 자세한 내용은 항목을 참조하면 알겠지만, 소련이 붕괴하면서 그대로 먹튀 당할 위기에 처해지자 대북군사지원 철회를 하고 한국에 군사 기술 및 물자로 대납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결국 군사력 증강, 국방력 강화라는 엉뚱한(...) 방향의 성과를 거둔 셈이었다.[7] 그러나 과거처럼 자유진영 국가들과 관계 맺고 살면 되던 냉전 시대가 아닌 냉전이 끝나고 공산진영이 붕괴 된 후 급격히 진행된 세계화의 물결에서 꿋꿋이 미수교했을 경우 득보다는 실이 더 많았을 것이다. 애초에 러시아는 소련 붕괴 이후 공산주의를 버리고 지금까지도 북한보다 한국과 훨씬 더 많이 교류하며, 지금 중국이야 과도한 중화사상으로 비판을 많이 받지만 현재 국내외 경제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국가이다. 그 미국과 일본도 21세기 이후로 자국 중심주의가 심해지는 판이라 예전처럼 진영논리에 따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경우가 적어졌다.[8] 6.25 전쟁 당시 북한에 전투기를 지원해준 러시아였지만,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 이후 출범한 김영삼 정부에는, 6.25 당시 정황을 담은 기밀을 한국에 공개하겠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구 소련시절 기밀문서를 담던 박스를 우리 정부 관계자에게 제공하는 모습을 언론에 공개하기도 하였다.[9] 남북기본합의서 + 공통점 찾기 노력 + 국가정상의 서명. 남북기본합의서에 차관급 실무자로 참여한 임동원 전 국정원장이 여기서도 대부분의 합의 과정에 관여하였다.[10] 6.15 공동선언 내용의 구체적인 시행과정이 담김.[11] 2015년 이전에 전작권 이전/이양을 목표로 한 합의는 2005년부터 활발하게 이루어져 2006년에는 2009년 즈음, 이명박 정부 때인 2009년 국방장관 회의에는 2012년 4월 17일로 확정되는 분위기였으나, 2010년 한미정상회담에서 2015년 12월로 합의되었다. 2015년 이후 재연기는 없다고 했지만, 박근혜 정부 때인 2014년 국방부 장관 회담에서 2020년대 중반으로 다시 무기한 연기되었다. 전작권 회의가 2000년대 중반부터 2010년 중반 시기에 활발해 진 것은 각각 현역+예비역, 현역 만으로도 제2차 한국전쟁 발발 시 이길 수 있다는 각각 2004년과 2009년 국방부 보고서에 따른 것이다.[12] 그 당시에 자주 거론되던 표현으로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 "아시아의 용에서 지렁이로 전락하다", "소득 수준 5천 불에 소비 수준 2만 불의 과소비 망국" 등이 있었다.[13] 참여정부의 경우, 노사모만 빼고 다 아는 사실이지만 진보적 이미지와는 달리 전반적인 경제정책은 삼성과 유착관계를 맺는 등 수구적이기 짝이 없으며, 갈팡질팡하며 재벌들에게 불확실성, 지지자들에게 배신을 안겨주는 경우(예: 한미 FTA)가 많았다.[14] 이하 출처: <대한민국사: 1945~2008> - 임영태 저. 들녘. 2008. p694~695.[15] 일반적으로 대학 설립에 소요되는 기간은 2~4년 정도이며 1994~1995년에 개교한 대학들도 개교 자체는 김영삼 시절에 이루어졌으나 인허가에 소요되는 기간 및 학교 건물을 건설하는데 소요된 기간을 감안하면 설립인가는 실질적으로 노태우 정부 시절에 인가가 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16] 하지만 김영삼이나 김대중도 당시 대학 증설을 공약으로 내세웠던 만큼 당시에 누가 되었든 결과는 마찬가지였을거라는 견해가 일반적이다.[17] 참고로 서남대학교와 광주예술대학교의 설립자인 이홍하는 이미 1980년대 후반 부터 사학 비리와 분규로 구설수에 올랐던 인물로 대학 설립 과정에서 충분히 사전 검증이 가능했던 인물이었지만 당시 정부는 그런 사전 검증 조차도 하지 않고 그냥 묻지마 식으로 인가를 내줬었다.[18] 다만, 이건 너무 단기적인 시각이다. 당시 부동산 폭등을 일으킨 것은 맞지만, 이후를 보면 이때 워낙 많이 공급되어 부동산은 안정되었다. 오히려 이때 200만 호 건설을 하지 않았다면 집값이 지금보다 훨씬 더 올랐을 것이라는 주장이 현재 주류 의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