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역사

 









1. 개요



'''2012년 MBC 제18대 대통령 선거개표방송에서 나온 대한민국의 현대사 (1분 14초)'''[1]

'''(히스토리 채널)south korea a nation to watch'''
대한민국역사는 세계사적으로도 손꼽힐만큼 파란만장하다는 것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1910년, 대한제국일제에 불법적으로 강점당한지 9년이 지난 1919년, 조선인들은 3.1 운동을 통해 독립을 선언한다. 그리고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임시정부를 세움으로써 대한민국의 역사는 시작된다.[2] 1919년부터 1945년까지 26년 동안 일제에게서 국토와 국민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자 광복을 맞았다. 그러나 해방됨과 동시에 미국-소련 양국의 분할 점령과 신탁 통치를 겪었고, 미소 군정기의 정국 속에서 벌어진 혼란한 시국 아래에서 냉전 초기의 극도의 좌우 이념 대립을 겪게 되었다. 김구, 김규식등의 중재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친미 우익 세력과 친소련 좌익 세력의 반목은 심화되었고, 소련 당국이 남북총선거를 위한 UN한국임시위원단의 북히한 입장을 거부하면서, 결국 가능한 남한 지역에서만 선거를 실시하기로 해 선거를 통해 제헌국회를 구성하였다.
1948년 8월 15일, 미군정에게서 정권을 이양받으면서 한반도 이남 지역에 정부를 수립하였다. 이후 6.25 전쟁을 거쳐 나라 전체가 극빈함에 시달렸으며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권위주의 통치를 국민의 힘으로 몰아냈으나, 그 후 민주당(1955년)을 중심으로 의원 내각제를 기반으로 세워진 제2공화국은 갈피를 잡지 못한채, 정파간에 첨예한 대립으로 국정운영이 제대로 되지않고, 국내에 혼란한 정세를 틈타 박정희5.16 군사정변으로 무너뜨리고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수립하고 의원 내각제에서 대통령 중심제로 바꾸는 개헌안을 마련해 1962년 국민투표로 이루어지며 이후 제5대 대통령 선거제3공화국을 세움에 따라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인 출신 권위주의 통치가 이루어지며,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들의 거센 요구가 계속됨에 따라 부마민주항쟁, 5.18 민주화운동, 6월 항쟁 등을 거쳐 6.29 선언에 따른 9차 개헌을 통해서 제도적인 민주화를 이룩하게 되었다. 그리고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 석달만에 불법 사조직 하나회를 완전히 해체시키면서 군인 출신의 권위주의 통치와 잔해는 완벽하게 끝이 나게 된다.
이 와중에도 경제 개발을 시작하고 대성공하여, 1988 서울 올림픽, GDP 1만 달러 돌파, OECD 가입 등으로 1980년대~1990년대 중반은 경제 부흥으로 대한민국의 자신감이 가장 부풀어올랐던 시기였다. 하지만 1997년 외환 위기라는 충격을 받은 뒤 한국 국민들은 언젠가 자신들이 지금 누리는 부가 다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후 2000년대 들어 2만 달러대까지 성장한 뒤 2018년 3만 달러를 돌파하였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을 성공적으로 이뤄내면서 민주화산업화를 동시에 이뤄냈으며 21세기에 들어서 선진국으로 들어선 몇 안 되는 국가이다. 또한, 한국은 세계최초로 원조를 받던 수원국에서 원조를 주는 공여국으로 바뀐 국가이기도 하다.#'''
물론, 시대가 빠르고 급작스럽게 변화하면서 많은 사회 문제들이 생겼다. 그리고, 조금씩 해결되는 기미가 보이지만 아직까지 대한민국 내부에서 여러가지로 해결해야 될 산적한 문제들이 많이 사회 밑바탕에 남아있다.
다른 국가의 역사와 비교하여 대한민국의 역사의 특이점은 유시민이 썰전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국의 역사는 한민족이라는 단일 민족으로부터 시작된다. 왜냐하면 다른 국가와 다르게 한국은 단군 이래 한민족이 다른 민족에 밀려나거나 사라져서 한민족이라는 민족이 단절되거나 교체된 적이 한번도 없기 때문이다. 발굴되는 유물에서도 한민족의 고유의 문화적 특성이 단절되지 않은 채로 연속적으로 보여진다. 반대로 중국은 선비족이나 북방 민족 등의 민족 교체와 유럽같은 경우에는 여러 민족이 흥하고 망하여 대부분이 다민족 국가이다

2. 시대별


이 문서는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부터의 근현대사(대한민국의 역사)만을 다루고 있다.
1919년 이전의 한민족과 한반도의 역사에 대한 내용은 한국사 관련 정보 문서를 참고.

2.1. 1919~1944: 독립 선언임시정부 수립



1919년 4월 10일,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에서 각 지역의 교포 1천여 명과 신한청년당이 주축이 되어 29인의 임시의정원 제헌의원이 모여 의정원 회의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민주공화제를 골간으로 한 임시헌장을 채택한 뒤 선거를 통해 국무원을 구성했다. 행정수반인 국무총리에 이승만을 추대하고 내무총장에 안창호, 외무총장에 김규식, 군무총장에 이동휘, 재무총장에 최재형, 법무총장에 이시영, 교통총장에 문창범 등 6부의 총장을 임명한 뒤 4월 11일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대한민국으로 국호를 정하게 된 계기는 다음과 같다. 3.1 운동 직후 임시정부의 수립이 당면 과제로 부각되자, 국내외 독립지사 29명이 1919년 4월 10일 밤, 중국 상하이의 허름한 셋집에 모여서 그들의 모임을 ’임시의정원‘으로 정하고 다음날인 11일, 역사적이고 중요한 결정을 내리게 되었는데 "국호를 무엇으로 정하느냐?"였다고 한다.
그래서 임시정부에서 국호를 정할 때, 여운형 등은 "대한제국이 짧은 기간 안에 망했으므로 '대한' 대신 '조선'으로 칭하자."라고 주장했으나, 임시정부 초대 교통총장을 지낸 신석우가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라는 의견이 임정 요인 다수의 지지를 얻으면서 대한으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8.15 광복 이후에 열린 1948년 7월의 제헌 국회에서도 대한·조선·고려 등의 여러 의견이 나왔으나, 투표 결과 대한민국으로 결정되었다. 사실, 이미 북한에서 '조선'이라는 칭호를 가져간 탓도 있긴 했었다. (예: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그리고, 1948년 7월 제헌 국회에서 공식적으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확정하였다.
[image]
'''대한민국 3년 1월 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신년 축하 사진'''
초기 임시정부는 내무총장 안창호의 주도로 연통제(국내의 비밀행정조직망)와 교통국(임시정부 통신 기관)을 조직하는 한편 독립신문을 발행하였으며, 각종 외교 선전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또한, 애국공채 발행과 국민의연금을 통해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승만과 안창호가 독립운동의 방략 상으로 대립하였으며, 이념적으로도 국무총리인 이동휘는 사회주의 혁명을 부르짖었고 대통령 이승만은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여 서로 충돌하였다.
1920년 12월 8일 이승만이 대통령 취임을 위해 상하이로 들어오자 독립운동가들은 이승만의 독단적인 구미위원부 설치 건과 국제연맹 위임통치 청원 사건에 반대하였는데, 특히 러시아 연해주 거류 동포사회에서 조직된 대한국민의회가 임시정부에 통합되며 그들의 대표로 국무총리가 된 이동휘는 미국교포의 독립자금을 축내며 외교운동으로 신탁통치를 주장하는 이승만이 대통령을 맡는 것에 대하여 반대한다며 국무총리직을 사임하였다. 이동휘가 사임하고, 이승만에 반대하는 신채호 등이 이탈하자 임시정부는 혼란에 빠졌다. 안창호는 코민테른 자금을 임시정부에서 사용하는 것을 반대하였고, 이동휘는 고려공산당을 만드는 데 이 자금을 사용하여 이승만을 견제하였다. 이승만은 혼란을 수습하는 것이 불가해지자 다시 미국으로 떠나버렸다.
1921년 임시정부는 소련의 레닌으로부터 혁명자금 200만 루블을 지원받았는데, 그가 보내온 40만 루블과 20만 루블을 수령한뒤, 자금분배 과정에서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동휘는 한형권, 김립을 보내 60만루블을 수령해 오게 하였다. 그러나 이동휘 등은 임시정부에 지원금을 납부하지 않았고, 이에 김구는 이동휘 일파를 추격하여 김립을 암살하고 이동휘, 한형권 등을 비롯한 임시정부 내 사회주의자들을 모두 추방하였다.
1923년 1월부터 6월까지 5개월 동안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 각지의 200여명의 대표가 참석하였다. 국민대표회의는 임시정부의 해체와 재건을 주장하는 창조파와 임시정부의 개혁을 주장하는 개조파로 분열되어 결국 아무런 결실을 얻어내지 못하였으며, 내무총장 김구는 유명무실해진 국민대표회의에 대해 해산 명령을 내렸다.
1925년 이승만이 임시의정원을 통해 대통령직에서 탄핵되고, 뒤이어 취임한 박은식 대통령은 대통령제를 국무령제로 고친 뒤 사임하였으며, 초대 국무령 이상룡이 서간도에서 상하이로 왔지만 내각 조직에 실패하여 다시 서간도로 돌아갔다. 그 뒤, 1925년 2월 양기탁을 국무령에 천거하였으나 사퇴하였고 5월 안창호를 국무령으로 천거하였으나 사양하여 의정원의장 이동녕이 국무령을 맡게 되었다. 홍진이 제3대 국무령으로 뽑혀 진강으로부터 상하이에 와서 취임하였으나 역시 내각 조직에 실패하였다. 1927년 12월 이동녕의 권유로 김구가 국무령에 선출되었으며, 김구는 국무령제를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로 개편하였다. 1928년 이동녕을 국무령으로 추대하고 김구는 내무부를 맡아 임시정부의 실질적인 지도권을 행사하였다.
1921년 이후 임시정부는 연통제, 교통국과 같은 국내 비밀행정조직망의 파괴와 외교 선전활동의 무성과, 심각한 재정난 등으로 오랜 침체기를 겪었다. 인원도 줄어들어 초창기에 천여 명에 달하던 독립운동가들이 수십 명으로 감소하였다. 조선총독부는 밀정을 파견하여 임정 요인에 대한 체포, 납치, 암살 공작을 단행하였고, 김희선, 이광수, 정인과 같은 자들은 친일파로 변절하여 국내로 돌아가버렸다.

2.2. 1945~1949: 광복군정기



대한제국경술국치로 주권을 상실한 뒤, 일본 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수모를 겪으면서 30~40년 동안 수난과 고통의 일제강점기 시대를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1945년 일제가 태평양 전쟁에서 패망함으로써 한국은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image]
하지만 승전국들이 카이로, 얄타, 포츠담 회담에서 합의한 바대로 해방과 동시에 38도선이 그어짐에 따라 한반도는 진주한 소련군과 미군에 의해 둘로 점령되게 되었다. 여운형과 좌우익의 각 인사들이 모여 만든 조선건국준비위원회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지만 미군정에 의해 부정되었으며 38도선 이북 역시 소련군정의 정치가 계속 되고 있었다.
한반도 전체가 신탁통치에 따른 입장의 차이와 급속한 이념의 대립에 따른 분단의 불안감, 여러 정치세력의 투쟁과 정적에 대한 무력행사, 무질서한 경제 등 사회혼란을 겪고 있었으며 미소공동위원회와 좌우합작운동 등이 있었으나 유엔총회 후 38도선 이남은 소련의 38도선 이북에 대한 총선거 반대에 따른 유엔의 결정으로 남한만이라도 단독선거를 실시하기로 했고 제헌의회를 구성, 의회 간선제를 통해서 미군정한국민주당의 지지를 받는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하면서 대한민국 정부를 1948년 8월 15일에 수립하게 된다.
[image]
1948년 5월 31일 대한민국의 역사적인 제헌국회 개원식
이에 반응해 38도선 북부에서는 9월달, 소련 군정의 지지를 등에 업은 김일성대한민국 수립 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워 대한민국과 대결 양상을 벌였다.[3]
그리고 남한은 6.25전쟁 전까지 아주 고통의 시기를 보냈다. 암살, 방화, 국지전, 반란, 북한과 대립, 영토문제 등. 특히, 남로당은 대한민국 정부을 무너뜨리기 위해 2번의 대대적인 군사반란을 일으켰는데, 제주도에서 일어난 남로당 반란사건하고 그 반란사건의 진압군이었던 14연대가 반란을 일으킨 14연대의 반란이였다. 경제적으로도 초인플래이션으로 고통의 나날을 보냈다. 군사적으론 1949년부터 북한에 열세가 되었고 그것은 6.25전쟁이 일어난 이유 중 하나가 된다.
분단과 전쟁을 막기 위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김구, 부주석 김규식 등이 남북을 하나로 만들려고 노력했지만 이미 미소 양국의 이해관계와 이승만, 김일성으로 양분되어 만들어진 남북 분단 체제를 바꿀 수 없었다. 이승만과 김일성 둘 다에게 거부당하고 중도 성향의 독립운동가 출신 인사들이 하나 둘 의문의 암살을 당하게 되자, 통일된 한국을 만들려는 노력은 사그라들게 되었고, 남북은 각각 군대를 창설해 38도선을 경계로 중소규모의 국지전을 벌이게 되는 위험한 상황을 지속하게 되었다.[4]

2.2.1. 한국의 민족 분열과 분단의 요인


  1. 만주국을 무너뜨린 소련은 곧바로 한반도로 남하하여 한반도 이북지역에는 소련군이 진주하며 이어 한반도 전체가 점령될 태세에 놓이게되자, 이에 놀란 미군은 북위 38도 선에서 양군이 진주할 것을 제안하고 소련은 이를 승인했기 때문에 미군과 소련군의 군정이 시작되었고 이는 분단의 1차적 요인이 되었다. 또한 미군과 소련군정 당국 모두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정부를 세우기 위해 정치 세력을 후원하거나 솎아내는 작업을 하여 한반도 남쪽과 북쪽에서 반대되는 정치세력이 일소됨으로써(박헌영, 조만식) 이것도 분단의 원인이 된다.

  1. 중국의 공산화를 들 수 있다. 미국이 지원한 장제스국민당이 ‘국부천대’ 로 대륙을 포기하고 타이완 섬으로 철군하면서 마오쩌둥중국 공산당국공내전에서 승리하였다. 드넓은 중국이 공산화되었기 때문에 미국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원래 미국은 중국을 현재 일본과 같은 역할(아시아 지역의 미국의 대리)을 하게 만들려는 계획이었다. 일본은 많은 공업설비들을 해체하고 농업목축이 주를 이루는 아시아의 스위스와 같은 국가로 만들 계획이었고[5] 이를 위해 제2차 세계 대전의 전범을 처벌하고 일본의 사회당(현 사회민주당) 세력을 우대했으나 다시 전범 세력이 정계를 장악하게 되었고 사회당 세력은 축소되었고 공산당 세력은 추방되었다. 이 사건을 ‘역코스(reverse course)’라고 한다. 한국에서도 좌우 합작에 우호적(여운형, 김규식 우대)이던 미국이 시큰둥하게 되었고 대한민국 단독 정부 수립의 방향으로 기울게 되었다. 이 사건은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일본의 화족 세력을 중심으로 한 전범 세력을 처벌하지 못함으로써 일본 정치는 급격히 우경화되었고 일본의 파벌 정치, 세습 정치 등의 고질적인 구태의 원인이 되었다. 또한 과거사가 청산되지 않음으로써 현재 전시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같은 과거사와 독도 영토 문제가 지금까지도 계속되게 된다. 한국에서도 분단-한국전쟁 등으로 상호간의 악감정이 생겨나 분단이 고착화하는 원인이 된다.

2. 동유럽은 물론, 그리스를 제외한 발칸 반도가 공산화되었고 미국은 그리스와 터키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막아내고 서유럽에 경제 지원을 하려는 계획을 가진다. 서독, 일본, 그리스 등의 국가에 원조가 진행되자 위기감을 느낀 소련은 공산 진영끼리만 교류하고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조직한다.

2.3. 1950~1959: 한국전쟁제1공화국


일제 치하에서 벗어난 지 5년 만에 북한의 침공으로 6.25 전쟁을 겪게 된다. 이 6.25 전쟁은 수백만 명 이상의 무고한 희생자와 행방불명자들을 낳았으며 반공으로 뭉치는 계기가 되었다. 8.15 해방의 충격이 가시지도 전에 전쟁으로 막심한 피해를 받았을때,북한에서 건너온 실향민들과 전후 베이비붐으로 엄청난 인구가 폭증하였던 반면 농업사회에 머물러있었다. 이 시기의 가난함은 한강의 기적 참고. 1961년 포린 어페어에 기고된 기사를 보면 말그대로 총체적 난국이었던 전후 상황을 알 수 있다. 이땐 먹을 거리가 없어서 자기 몸의 때를 먹었다는 증언도 있을정도로 너무나도 끔찍했다.기사. 이렇듯,1950년대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암울한 시대로 인식하기 쉽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1950년~61년에 미국에게 제공받은 경제원조는 27억 달러에 달하였고 이 외에 많은 군사원조도 주어졌다. 이러한 막대한 원조는 전후 시설 복구 및 극도로 어려워진 민생고를 그나마 유지하는데 크나큰 역할을 하였으며, 이승만 정부는 원조를 바탕으로 공업 생산에 투자를 하여 제조업이 급속히 성장하였다. 더욱 괄목한 변화는 의무교육을 제정해, 국민학생은 1960년까지 총 360만 명으로 (1945년 대비) 2.6배 증가했고, 중학생은 53만 명으로 10배 증가했고, 고등학생은 26만 명으로 3.1 배 증가했고, 대학생은 7800명에서 9만 8천 명으로 12배 이상 증가하여 당시 영국의 대학입학률을 능가하게 되었다. 선진국유학을 떠나는 대오도 활발해져, 1951년~59년에 5000여명이 떠나고 훗날 이들은 대거 귀국하여 국가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교육의 확산은 1960년대부터 전개된 고도성장에 적응할 수 있는 노동력을 공급하게 되었다.
한편 제주도에서는 이념 갈등으로 인한 피비린내 나는 학살이 지속되어, 제주 4.3 사건으로 말미암아 무려 약 3만 명, 제주도 인구의 약 10분의 1이 살해당하는 참사를 겪었다. 탄압과 학살은 1949년부터 시작되었지만, 1956년까지 7년이나 지속되었다.

2.4. 1960~1979: 4.19 혁명제3공화국 ~ 대한민국 제4공화국경제계획(대한민국)


이승만 정권은 개헌을 반복하며 집권욕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고 결국 3.15 부정선거로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해 4.19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이에 이승만은 하와이로 망명[6]하게 되고 장면을 행정부 수반 총리, 윤보선을 군통수권자 대통령으로 4.19혁명 정신을 이어받은 제2공화국이 세워지게 된다. 그러나 2공화국은 대통령과 총리간의 알력이 심했고 같은 정당 내에서 계파간의 갈등이 심각하여 10개월 만에 개각을 세번이나 단행하는 등 국정운영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4.19의 여파로 정치 및 언론자유가 대폭 신장되는 긍정적인 변화는 극심한 사회혼란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국내정세는,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하는 군부세력이 쿠데타를 계획하고 수천여명의 군인, 장교들을 동원하여 5.16 군사정변으로 제2공화국을 무너뜨렸다. 이후 박정희 소장은 제1공화국과 제2공화국에서 준비해두었던 경제계획(대한민국)을 가져다가 성장률을 7%로 상향조정하는 계획안을 마련하고 이를 충당할 자금을 구하려 일개 기업이 외국기업에 빌리면 중앙은행이 보증한다고 공언해도 턱없이 모자란 돈만 얻어오고, 이에 지하에 있는 자금을 확보하여 경제개발에 충당하려는 목적으로 대한민국 환에서 현재의 대한민국 원으로 전환한 화폐개혁은 금융에 혼란만 야기해 경제사정 악화만 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한편 1961년~1963년에 군정을 실시하면서 정치/언론규제를 하였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참고.
이때는 제국주의를 야기한 선진 열강들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체제의 차이를 떠나 종속이론에 입각해 항구를 봉쇄해 원료부터 제품생산까지 자립공업을 일으키고 국영기업을 육성하는 계획을 추진 하였는데 이전의 실패에 교훈을 얻어 1964년에 이전까지 하던 계획을 뜯어고치는 당시 후진국의 대세와 정반대인 약한 산업은 관세와 정부의 보조금으로 충당해주고 일정한 단계가 달성되면 해외시장에 진출하는 수출주도 산업화로 방향을 틀었다.
3년간의 통치를 통해 정치 기반을 다진 박정희는 정치자금을 받아서 선거를 준비하였고 상대의 종북몰이를 역으로 이용, 전라도와 경상도 농민들의 표를 받아 마침내 1963년 12월 국민 선거를 통해 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1960년대1970년대 동안 장기집권 하게 된다.
대일차관기업의 부실화와 자금문제는 골칫거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일수교에 의한 물품과 기술의 유무상 공급, 고강도 노동 및 월남전 참전 특수에 따라 경제 규모는 성공적으로 커졌고 노동집약형 경공업과 조선, 자동차 등 노동집약형 중공업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대한민국 산업화의 시작을 알린 시기이다. 대한민국 제3공화국 참고.
70년대에 이르러 미국은 베트남전쟁으로 막대한 인명피해와 돈을 투입해 국력이 소모되어 닉슨 독트린이 발표한데 이어 리처드 닉슨중국을 방문해 6.25 전쟁이래 적대관계를 유지하던 미중관계는 해빙기를 맞았다. 이러한 국제정세데탕트로 불린다. 이에 비해 박정희는 국내외적으로 경제, 정치적 위기를 맞고 있었다. 월남 특수 종료와 함께 미국발 불황이 국내에 찾아와 경제성장률이 급락하고 외채상환 압박, 부실기업 문제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에 대통령 박정희는 8.3 사채 동결 조치 등을 하는 하는 한편, 1968년을 기점으로 북한의 무장공비에 의한 군인 및 민간인살해가 빈번하였는데, 이를 이유로 들어 1971년 대통령에 비상대권을 부여하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해 출판, 언론, 방송에 대한 검열을 합법화하고 정치활동, 집회의 자유를 불법화하였다. 한편으로는 6차 개헌을 통해 대통령의 3선 제한을 철폐, 52%의 득표로 7대 대통령에 취임해 1972년 10월 17일 19시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여 헌법의 일부 조항을 효력을 중지시키며,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단체들의 활동을 중지시키며 효력이 정지된 조항은 "비상국무회의"가 주재하고 10월 27일까지 개헌안을 마련하여 국민투표에 붙인다는 "10.17 특별성명"을 발표하여 제3차 국민투표로 통과되었다. 이는 4공화국의 성립이었다.
1972년 들어 한국경제의 성장을 견인한 경공업 수출만으로는 더 이상 고도성장을 지속할 수 없게 되었다. 이는 , 합판, 신발, 가발 등의 품목들이었는데 이 같은 수익이 별로 남지 않는 품목들로서는 성장 동력의 전망이 분명치 않았다. 이해 5월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 집무실에서 오원철 당시 경제담당 수석 비서관에게 100억 달러 수출이 가능한지 물어보고 오원철은 일본이 중화학공업을 육성한덕분에 100억 달러 수출을 이루었다고 대답하고 그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보고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1973년 6월에 철강,비철금속,기계,조선,전자,화학을 6대 전략 업종에 선정해 이들 분야에 10년간 90억 달러를 투자해, 1981년까지 전체 공업비중에서 중공업비중을 51%로 늘리고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 수출 100억 달러 달성한다는 중화학공업 육성을 발표하였다.
주철, 강철, 기계, 조선업, 화학산업혁명이래 선진국이 독점해온 산업들로서 막대한 자본 투입과 수많은 기술인력 양성이 필요해[7] 스페인도 진출하지 못하던 분야이고 마오쩌둥무한정 자원과 노동력을 동원하다 파국을 초래한 분야이다. 이것은 지나치게 모험적인 투자로서 자칫하면 한국경제는 대대손손 빚더미에 오를 수 있는 위험천만한 전략이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이것에 과감히 도전하였으며, 1974년 원유도입값이 3배 이상 폭등한 오일쇼크가 발생해 물가상승률이 8배 이상 치솟고 막대한 무역적자가 발생해 부도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대출을 통해 이를 막고 연간 수출증가율은 40%를 경신하는 동시에 노동집약 건설업을 통해 중동지역에 많은 노동인력을 건설투자에 투입함으로써 다량의 오일달러를 벌어옴으로써 성장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새마을운동이라는 새로운 돌파구를 내며 농촌발전에 집중적으로 투자하여 도시보다 현저하게 뒤쳐진 농촌은 70년대 말에 이르러 가구당 소득이 도시를 역전하였다. 이는 오늘날 해마다 많은 개발도상국에서 찾아 배우러오며, UN에서도 아프리카 빈곤퇴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지정하였다.
그 결과 대한민국의 1인당 GDP는 1970년대에는 더욱 빠른 속도로 성장하면서 원조 농산물을 시장에 판 돈이 예산의 절반을 차지하는 매우 가난한 농업 후진국이 15여년만에 공업이 발달한 중진국으로 발돋움하였다. 그러나 박정희의 안정적인 장기집권을 실현하였다고 평가받는 유신 체제는 곧, 각종 반발로 강하게 이어졌으며 유신 정부는 긴급조치들을 선포해 이를 탄압했다. 그러나 YH 사건 등으로 부마항쟁이 일어나고, 계엄령이 떨어져 진압이 완료되어 진정된 와중에 박정희는 중앙정보부장을 맡고있던 김재규에게 총을 맞고 숨진다. 제4공화국 참고.
10.26이 일어나고 약 2달뒤, 전두환의 보안사와 하나회는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킨다. 수경사 장태완 사령관, 헌병감 김진기, 특전사 정병주 사령관 등 일부 장성들은 강경 진압을 주장했으나 결국 진압에 실패했다. 실제로 9공수 회군전까진 진압군이 약간 우세했지만[8] 지위부의 오판으로 9공수가 돌아가고 특전사 정병주 사령관이 불법체포되고[9] 헌병들도 무력화되어서 절대열세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아무런 방해없이 1공수는 국방부하고 육군본부을 점령한다. 혼자 남은 수경사의 장태완 사령관은 휘하에 있는 극소수 전투병까지 합쳐서 100명의 군인들로 직접 보안사을 공격할려고 했지만 포기하고 체포당한다. 그리고 그다음날 새벽 반란군에게 잡혀서 협조하게된 국방부 장관하고 최규하 대통령이 결제해서 반란은 성공하게 된다. 12.12군사반란으로 박정희쪽의 예전군부는 몰락하고 하나회를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가 탄생한다.
어두운 측면으로는 비민주적인 통치로 인한 사회문제에 대한 함구령, 문화에 대한 검열언론 탄압이 있다. 제2공화국 시대에 이르러 미군정기 및 6.25 전쟁 시절에 있었던 양민학살과 정치범죄들에 대한 국민들의 조사요구가 커져갔으나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반공이라는 이름하에 묻혀버렸고 학살 • 범죄의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은 피해자임에도 범죄자 취급을 당하여 취업제한 등 각종 불이익을 받는 일종의 연좌제가 시행되었다.

2.5. 1980~1987: 신군부의 통치와 단군 이래 최고 호황 개막


1980년대의 사건
시기
사건
1980년 5월 17일
5.17 내란
1980년 5월 18일
5.18 민주화운동
1981년 5월 28일
국풍81
1981년 11월 17일
88올림픽고속도로 착공[10]
1982년 1월 5일
3S정책의 일환으로 야간통행금지령이 해제
1982년 3월 27일
3S정책의 일환으로 한국프로야구가 출범
1983년 1월 11일
일본 총리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전후 처음으로 대한민국을 공식 방문
1983년 6월 30일
KBS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방송
1983년 8월 3일
삼성반도체가 64KB D램을 개발
1983년 10월 9일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1984년 5월 1일
과천 서울대공원 개원
1984년 9월 6일
전두환 대통령 전후 처음으로 일본 방문
1985년 9월 30일
63빌딩 개장
1986년 5월 3일
인천 5.3 운동
1986년 9월 20일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1987년 6월 9일
이한열 피격 사건[11]
1987년 6월 10일
6월 항쟁
1987년 6월 29일
6.29 선언
1987년 11월 29일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1987년 12월 16일
제13대 대통령 선거 노태우 당선
[image]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도청으로 진격하는 계엄군'''
1979년, 1212 군사반란으로 군내 자신들의 정적들을 없앤 신군부은 1980년에 모든 권력을 가지기 위해 5.17 내란을 일르킨다. 그땐 독재자의 죽음으로 민주화 열기가 서울의 봄으로 일어나고 있는 시기였다. 그들은 북한남침설을 거짓유포, 5월 17일 밤에 국무회의가 비상계엄령을 선포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신군부는 5월 18일부터 모든 군들을 동원한다. 그들은 새벽에 이화여대를 급습, 전국학생회을 체포해서 학생운동을 무력화 시켰고 새벽 2시경쯤에 33사단 병력으로 국회을 점령, 사실상의 헌정중단을 일르킨다. 그들은 그리고 정치적으로 상대할수 있는 삼김들도 다 체포나 가택연금으로 국회의원들도 다 고문등으로 다 무력화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있어 마지막 남은 방해물들인 광주시민들을 수 천명을 죽이면서까지 굴복시킨다. 무력함을 느낀 최규하가 사퇴하고 전두환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5공화국이 탄생한다.

1980년에는 오일쇼크로 새계경제는 성장이 곤두박질 치고 때마침 막대한 자본이 소요되는 중공업을 육성중이던 한국경제에 치명타를 가해 경제성장률이 집계하기 시작한 1954년이래 최초의 마이너스 성장인 -1.7%, 물가상승률 28.7%라는 큰 충격이 가해졌으나 전두환 정부의 강력한 물가안정 정책과 함께 이전까지의 정부주도 개발에서 민간부문의 자율성을 크게 확대하는 방향으로 고성장 기조로 복귀하여 유지되었고 1인당 실질 소득은 7여년만에 2배 불어났으며, 여기에 엔고에 의한 저달러, 저유가, 저금리 시대의 이른바 삼저호황까지 겹치며 80년대 말~90년대 초중반까지의 이른바 단군 이래 최대 호황기가 찾아오기 시작한다.
1986년에는 서울에서 제 10회 아시안 게임을 개최하게 되었다. 당초 1970년에 개최하기로 했으나, 대한민국 정부가 개최권을 반납함에 따라 태국 방콕에서 대신 개최하였다.
이 시기에는 각종 악법들이 시도 때도 없이 난무했다. 정치풍토쇄신특별조치법, 제3자개입금지법 등이 제정되었으며, 반공법 폐지 이후 사회안전법을 만들어 정적이었던 정치인사들과 무고한 국민들을 억압하였다. 이러한 악법들에 맞서서 민주화 운동이 계속되는 도중에 결정적으로 1986년 7월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이 터졌으며, 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터지게 되었다.

'''역사다시보기 - 6월 민주항쟁'''
1987년 6월, 전두환 대통령은 헌법 중 대통령 간접선거 조항을 사수하겠다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자, 이제껏 쌓여왔던 국민들의 분노가 강하게 폭발했고 이는 40여년 지속된 권위주의 정권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만들었다.
6월 항쟁은 대통령 직선제를 비롯한 헌법과 정권의 개혁안을 발표하게 만든 사건이다. 이후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와 자유화의 물결이 본격적으로 대두되었고, 훗날 각종 공안사건들은 재심을 받은 뒤 무죄선고를 받게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 9차 개정안이 현재까지 한국 정치와 법률 운영의 기초가 되고 있다.


2.6. 1988년 이후: 민주주의의 시대



2.6.1. 1988~1997


1988년에는 1988 서울 올림픽을 개최하여 국제올림픽위원회 회원국 160개국이 참가하게 되었고, 특히 당시 동서냉전으로 갈등과 분쟁을 벌여왔던 미국소련, 그리고 서유럽동유럽 국가들이 한 자리에 모두 모여서 참가하였다. 이 대회에서 대한민국은 종합 4위를 달성하면서 주최국으로서의 강한 저력을 발휘하였으며 대한민국이 더욱 선진화되고 불굴의 신화를 입증하는 한강의 기적과 국력을 전세계에 과시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1982년부터 주식시장에 대한 제한조치가 풀렸다.
이때까지도, 대한민국은 북한과 체제, 국력, 외교적인 측면에서 끊임없이 경쟁을 벌이는 중이었고, 과거에는 공산권의 전폭적 지원을 얻는 북한보다 국력이 열세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공산권의 침체나 여러 외교적 성과, 그리고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유치 등은 대한민국의 저력을 전세계에 조금씩 알리고 과시하는 계기 중의 하나가 되었고, 이렇게 하여 한국인들은 '''"우리가 북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완전히 이겼다!"''' 라는 확신을 얻게 되는 자긍심을 갖게 되었고 전세계에 입증하였다.
더불어 공산권의 몰락에도 일정 영향을 끼쳤는데, 미국-소련의 대립으로 인해, 서구권과 동구권 국가들은 몇 년 동안 올림픽에서 서로 마주하지 못하다가 서울에서 결국 올림픽에 함께 모여서 참가하였고, 동구권의 국가들은 직접 '서울'을 방문하고 충격을 받았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대한민국이 일본 식민지에서 8.15 광복이 되었지만 6.25 전쟁으로 박살났고, 1950년~1960년쯤에는 거지들이 들끓는 서울이었는데 전혀 딴판으로 변한 것이었다.
게다가 북한은 동구권 국가들에게 "우리는 지상락원이지만 남조선은 거지 천국이다."라는 선전을 해댔기에 공산권의 국가들은 자신들이 알던 사실과 전혀 다른 서울을 목격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동구권 인민들이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로 돌아서게 되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제법 유명하다.'''
이후 1991년에는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했다.
1990년대, 마지막 군인 정권 출신으로 여겨지던 노태우 정부와 그 후 문민정부의 시대를 열게 된 김영삼 정부는 민주화와 더불어 고도성장 시대에 누적되어있던 여러가지 어두운 문제점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3당 합당의 후유증, 성수대교 붕괴 사고,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등으로 '사고 공화국'이라는 비아냥을 받았다. 그리고, 1993년에는 대전에서 세계박람회(엑스포)를 개최하면서 성공적으로 마무리를 하였다.

2.6.2. 1998~2002: 사상 최악의 경제위기와 극복



1997년, 김영삼 정권은 IMF 사태로 대미를 장식했고, 그 이후 15대 대선이 실시되어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대한민국 헌정 역사상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국민의 정부가 출범했고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실시되었다.
1999년, 대한민국 대중문화의 파급력을 호칭하는 '한류'라는 단어가 중국의 언론 등에서 먼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한류라는 단어가 대한민국의 대중문화를 거론하는 고유명사로 각인된다.
2002년에는 대한민국일본에서 FIFA 월드컵동시에 개최되었으며 대한민국은 종합순위 4위를 달성하면서 4강 신화를 이뤄내기도 했다. 같은 해에 부산에서는 제 14회 아시안 게임이 개최되었으며 사상 최초로 북한이 공식 참가하여 남북한이 동시입장하기도 하였다. 2000년대 들어 1인당 GDP는 2만 달러까지 진입하게 된다.
2003년에는 사스 사태로 세계 경제가 약 48조원의 경제피해를 입었다. 안그래도 2003년에는 한국이 IMF 외환위기[12]의 후유증에 시달릴때라 사스피해까지 받아서 그 당시 한국경제는 암울했다.

2.6.3. 2004~2013(참여정부~이명박 정부)


[image]
한국 영화 산업도 2000년대 들어서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대한민국의 문화산업은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13]
예를 들어, 경제성장과 민주화로 풍요롭게 살고 있는 신세대들과 과거 가난을 겪으며 자라거나 보수적인 사상에 익숙한 기성세대들간의 세대갈등부터 지역개발의 차이에서 오는 지역갈등같이 사회문제에서 오는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편협한 시각이나 돈이면 다 해결된다는 황금만능주의, 성장을 위한 지나친 경쟁사회로 인해 일어나는 인간소외현상, 지나친 개발로 인한 자연파괴 등이 있다.

'''ペ・ヨンジュンBYJ, Ardent love?! Report Image!'''
그리고, 2000년대 초 일본에서도 겨울 연가를 시작으로 일본의 중장년층을 중심으로 배용준의 욘사마 신드롬과 함께 한국 드라마의 인기가 급속도로 영향력이 커지면서 일본에서도 한류라는 단어가 전해지게 된다.
2010년 ~ 2011년 K-POP을 중심으로 신한류라는 단어도 등장하였다. 특히 2012년에는 싸이강남스타일이 말 그대로 전세계적으로 열풍이 불게 되었고 한국 음악 역사상 처음으로 짧은 기간이었지만 한국 음악이 전세계의 음반 시장을 뒤흔들었다. 중남미,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일부에서 한류가 더욱 확산되었다.
2010년 11월 11일에는 2010 G20 서울 정상회의를, 2012년 3월 26일에는 세계 50여개 국가가 모인 2012 서울 핵안보정상회의를 개최하였다.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서 입장조차 거절되었던 대한제국의 과거를 넘어, 높아진 국가적 위상과 국제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경제안보분야에서 국제적인 이슈를 논의하고 조율하는 의장국이 된 것이다. 누가 뭐래도 국위는 몰라보게 좋아졌다.
[image]
그러나, 2010년에 발생한 천안함 피격사건연평도 포격 사태를 이후로, 남북한의 정권 교체 이후 대남 도발도 더욱 거세지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2011년 1월 14일, 대한민국의 저축은행 중 한 곳인 삼화저축은행이 PF로 인한 부실을 털어내지 못해서 영업정지 처분을 받게 되는 등 다수의 상호저축은행들이 건설사들에게 빌려준 자금을 회수하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2012년 3월 15일한미 FTA가 발효되었다.

2.6.4. 2013년 ~2019년


2012년에는 전라남도 여수시에서 세계박람회를 개최했다. 2014년에는 인천광역시에서 제 17회 아시안 게임을 개최했으며 2018년에는 강원도 평창군에서 동계올림픽이 개최되었다.

[image]
여러 안전불감증 관련 사고[14], 북한의 위협 재증대[15]에 더해 장기적 불경기로 인하여 사회적인 갈등이 심화되었다.
[image]
[image]
[image]
[image]
2016년 말에는 사상 초유의 민간인의 국정농단 정치 스캔들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고 분노한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탄핵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대한민국이 추구했던 성장중심사회의 어두운 단면이 드러나게 되었다. 2016년 12월 3일 6월 항쟁의 참여인원을 뛰어넘어 대한민국사 최대 인원인 232만 명의 국민들이 거리로 나와 촛불을 들어 박근혜의 퇴진을 요구함으로써 12월 9일에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안이 통과되어 공식적으로 직무가 정지되었고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에서 재판관 8명의 만장일치탄핵이 인용되어 박근혜는 공식적으로 대통령직에서 파면되었다. 헌정 사상 최초로 탄핵이 이루어진 것이다.
[image]
그리고 2017년 5월 9일, 조기 대선으로 제19대 대통령 선거가 치뤄졌고 기호 1번 더불어민주당문재인 후보가 득표율 41.1%로 당선되면서 대한민국 헌정 사상 3번째 정권교체이뤄냈다. 이는 대통령 선거 역사상 가장 많은 득표 차이로 당선되었으며, 이전까지는 531만 7,708표 차이를 기록한 17대 대선이었지만, 이번 19대 대선에서 1, 2위간의 득표 차이가 557만 951표를 기록하면서 갱신됐다.
[image]
2018년, 참여정부 이래 처음으로 남북 정상들이 만났다. 사진은 2018 제1차 남북정상회담이며, 좌측은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은, 우측은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 문재인.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전후 남북관계는 빠르게 발전하였으나, 2019년 2월 북미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는 다시 냉각된다.
[image]
[image]
한편 2019년 후반기에는 조국 전 법무부장관을 둘러싼 논란과 의혹인 조국 사태가 사회를 양분시켰다. 이는 대규모 집회로까지 이어져서 진영별로 각각 조국 전 법무부장관 규탄 집회검찰개혁 촛불문화제로 이어졌다

2.6.5. 2020년대


[image]
2020년 새해가 밝자마자 중국 우한시에서 시작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큰 피해를 입었다. 한때 여러 집단감염으로 국가별 감염자수 2위까지 올라갔었지만 3월부터 유럽, 미국 등에서도 대규모 감염이 일어나며 순위권에서 벗어났다.

3. 대한민국에서 개최한 주요 국제 행사



4. 관련 링크



5. 관련 문서



6. 둘러보기




[1] 영상 속에서 나오는 음악은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의 오프닝이다.[2] 다만 대한민국 수립년도를 두고 1919년1948년이 대립하고 있다.[3] 분단의 원인이 이승만인지, 김일성인지, 미국인지, 소련인지는, 입장에 따라서 여려 의견이 대립하고 있다.[4] 6.25 발발전의 38도선은 완전한 경계선이 아니었다.[5] 다만 스위스는 당시에도 공업이나 금융이 발달하였다.[6] 당시 언론계부터 학계, 교육계를 비롯 한민족문화대백과, 두산백과 등이 망명이라 표현한다. 심지어 이승만 본인도 하야 직전에 학생 대표들과 면담하며 원하는 것이 내가 망명하는 것이냐고 물었다.[7] 내수시장에서 품질을 테스트한 다음 세계시장에 진출하는 단계가 필요한 만큼 최소한 인구는 7000만 명이 넘어야 한다고 여겨졌다.[8] 그것도 아주 약간의 우세였다. 진압군은 전투병력이 특전사이지만 그래도 1개의 대대만 있었는데 반란군측에서는 수경사 전투병력과 1,3,5공수여단들이 있었다. 그리고 노태우는 진압군이 우세할거라는 가능성까지 염려하고 불법적으로 '''전방부대인''' 제9보병사단까지 동원한 상태였다. 상황으로 볼때 진압군의 유일한 승리시나리오는 9공수가 수경사의 지원을 받아 1공수나 다른 반란 공수부대들, 아니면 반란 제9보병사단이 오기전에 신속하게 보안사을 제압하는 것받게는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어려운데 아무리 9공수가 특전사 공수부대라도 수경사 제30경비단하고 제33경비단을 대대만으로 처리하는건 어렵기 때문이였다.[9] 이때 김오랑 소령은 사령관을 지킬려다가 반란군에게 사살당했다.[10] 전 수정자가 개통일이라 했으나 실제 개통은 1984년이다.[11] 7월 5일 사망.[12] 외환위기는 2001년에 끝났다.[13] 이 덕분에 1940~50년대 태생이었던 사람들은 전 세계에서 흔치 않게 '''농업사회, 공업사회, 정보화사회를 모두 겪은''' 케이스로 불리기도 한다.[14] 대표적으로 2014년 4월 16일 발생한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가 있다. 이 외에도 경주 마우나리조트 붕괴사고, 아산 오피스텔 붕괴사고 등이 있다.[15] 서부전선 포격 사건, DMZ 목함지뢰 매설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