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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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20일, 차이잉원의 총통 취임식 부속 행사로 치러진 공연에 등장한 대만 문화의 상징들이다.
1. 개요
4. 대중문화
4.3. 아이돌 산업
4.6.1. 게임계의 타이완 뉴웨이브
4.7. 고민거리
5. 언론
6. 인형극
8. 종교
8.1. 불교
8.2. 도교
8.3. 민간신앙
8.5. 이슬람
9. 성 문화
9.1. 성 산업
11. 기타
12. 관련 항목


1. 개요


대만의 문화는 기본적으로 중국 각 지방에서 이주해온 서로 다른 중국인 한족들의 문화를 바탕으로 이루어졌으며 여기에다가 토착 대만 원주민들의 문화, 남방 특유의 지리와 풍토, 또 무엇보다 현대 대만의 복잡하기 그지없는 정체성 문제가 혼합되어 분명 중국풍이지만 본토 중국과는 다른 문화가 만들어졌다.
대만인들은 자신들이 중국의 정통문화를 계승했다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대륙의 본토인들이 문화대혁명이라는 초유의 사건을 저질렀을 때 대만 정부는 그에 대항하는 구도로 중화문명부흥운동(中華文化復興運動)이라는 운동을 펼쳤다. 현재 중국이 자국의 전통문화를 되살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을 볼 때, 대만의 중국 전통 문화를 일찍이 중시하고 보존한 노력은 높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이 시기에 대만어객가어 등의 토착문화는 억압받았다는 어두운 점도 있다.[1]
반면에 21세기 초반에 들어서 타이커(臺客)라는 문화가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기도 했는데, 이는 샌들을 신고 빈랑 열매를 질겅거리는 전형적인 도시 대만인의 이미지가 하나의 문화적 상징이 된 것. 또 대만어(민남어)로 된 노래나 영화도 예전에 비해서 활발히 제작되고 있다.
즉 대만 문화는 중국 전통문화의 보존으로 대표되는 '정통적인 중국'이고자 하는 노력과, 이제까지 빛을 발하지 못했던 '대만' 고유의 정체성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의 상충과 혼합이라고 볼 수 있다.
대만 사람들의 인식과 문화는 중화권의 한족 문화 기반이며 여기에 대만 원주민 문화와 일본 문화, 미국 문화 등이 어느 정도 섞여있다. 중국 한족들이 청나라 시기부터 대만섬에 진출해 대만 원주민과 혼혈과 교류가 이뤄져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고 일본의 식민지배를 당한 역사적 영향 및 일제 패망 이후 잔류한 일본계 대만 거주민의 영향을 받았고 미군 주둔시기 미국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국에 비하면 대만은 일본 문화에 대한 거부감ㆍ반감이 거의 없다. 대만은 대만 고유의 독자적 민족의식 형성이 한국에 비해 매우 늦어 일본의 지배에 대해서 큰 반감을 가지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대만에서도 일본에 대한 반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며, 일본 제국이 물러가고 들어온 국민당 독재정권이 일본에 큰 피해를 당한 탓에 전후에는 정권 주도로 반일 정서가 고양되었던 바 있다. 일본 문화에 대한 수입규제 조치를 취한 적도 있었고 학부모들이 일본 만화를 선정적이고 폭력적이며 비현실주의적인 묘사가 많다고 불매운동을 벌인 역사가 있다.
정서나 감성적인 면에서도 분명 중국의 전통적인 느낌도 나지만 묘하게 일본식 분위기와 미국의 영향이 섞여 있다.[2] 한편 미국인들처럼 더치페이 문화이며, 나이를 따지지 않는 문화가 발달되었다. 대만은 같은 동아시아권으로서 문화적으로 한국,일본과 비슷한면도 많지만 나이면에서는 나이를 따지는 한국이나 일본하고는 많이 다르다. 대만에 사는 한국인이나 일본인들이 자기네 나라에서 했던 것처럼 고개 숙여 인사했다가 손을 내밀어 악수로 인사하려던 대만인이 뻘쭘해지거나 당황하는 상황도 간혹 나온다.
전근대에는 대만에 이주한 한족들이 들여온 푸젠 지역의 문화와 원주민 문화가 융합되어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으며, 근대에는 대만일치시기로 인해 일본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미국과의 관계 강화 및 미군 주둔의 영향으로 인해 미국 문화가 대만인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국부천대로 중화민국 정부가 대만에 자리잡게 되자 중국 대륙의 전통 문화 및 음식이 전파[3]되었고 중화민국 및 중화 정체성을 강조하며, 중국대륙 양식 건물을 건축하고,[4] 표준중국어 강조 및 중화문명부흥운동 같은 강력한 중화사상 정책을 펼쳤다. 이렇게 대만 문화는 전통적인 중화 문화를 중심으로 대만원주민의 문화, 일본의 문화, 미국의 문화 영향이 융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대만 남부의 문화와 북부의 문화는 (전통문화 부분에서) 근소한 차이가 존재한다. 체감은 되지 않을 수 있으니 이 내용은 참고만 해 두기 바란다.

2. 표현의 자유


장제스 - 장징궈 독재 시기에는 대만에서 표현의 자유라는 건 눈을 씻고 찾아도 찾아볼 수 없었다. 대만도 독재시절에는 중화전통문화를 진흥시켜서 중공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전통문화가 잘 보존되어있는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화부문에 대한 탄압을 아예 자행하지 않은것은 결코 아니다. 장씨 독재 시절에도 대만 영화에서 '''타이완 뉴웨이브(Taiwan New Wave)'''라는 움직임이 있어서 대만의 현실과 대만 내의 정치 사안들을 표현하자는 운동이 자주 있었다. 타이완 뉴웨이브 운동 덕분에 대만 영화인들은 중국 국민당 특무조에 끌려가서 여럿 코로 취두부를 먹곤 했다. 대만은 장제스가 철권 통치를 하던 1960년대부터 '''동성애 인정해달라는 시위'''를 하던 나라다. 이쯤 되면 대만인들의 담력 자체가 엄청나다고 봐야 할 듯.
리덩후이가 대만의 민주화를 추진하면서 상황이 변한다. 이 때부터 표현의 자유 범위가 크게 넓어진다. 장씨 독재 시절의 반작용 수준이라 봐도 될 정도로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나라를 만들어버렸다'''. 덕분에 대만의 표현의 자유 정도는 거의 미국 수정헌법 1조 수준이다. 그래도 당시는 민주화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라 조심스럽긴 했다.
표현의 자유는 천수이볜 정부 시절부터 본격화한다. 2000년 민주진보당천수이볜이 정권을 잡으면서 탈중국적 성향이 매우 강해졌다. 그리고 천수이볜은 대만의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차원에서 '''빈과일보'''의 대만 진출을 허용했는데, 이때 빈과일보가 '''자극적'''인 성향을 대만에서 포텐 터뜨리며(...) 미쳐 날뛰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른 언론들까지 빈과일보의 방식을 따라하고 천수이볜은 이 상황을 보고 즐기면서 대만 정치권에서 표현의 자유를 무제한적으로 보장하기 시작했다. 언론에서는 더욱 자극적인 소재가 필요한데, 인구 2,300만 명의 대만 내에서는 그런 소재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 대만의 언론사들은 오히려 정부한테 심의 기준을 내리라고 요구했고, 천수이볜은 이런 움직임을 강화해서 '''정말로 심의 기준이 엄청 완화'''됐다.
공공장소에서 상영하는 것에 대한 규제를 제외하면, 포르노의 제작, 판매와 공유가 사실상 완전 합법이다. 한국에서 폭력성 사유로 19금 딱지를 받는 녀석들은 대만에 가면 '''12세''' 정도로 심의를 받고 당당하게 팔 수 있다. 심지어 대만야동청소년 관람불가 대신 '''15세 관람가'''로 인가되며, 정말 수위가 높은 야동만 청불로 나온다. 팬시 프론티어에서 판매되는 에로 동인지들도 일절의 검열 없이 판매되고 있다. 어찌보면 일본이상의 성진국.
표현의 자유가 제대로 보장되는 덕분에 대만 정치인들은 대만 만화나 대만 게임에서 단골 소재로 등장하며, 대만 정치인들을 3컷만에 끔살 시키는 5도쟁패 같은 만화나 전직 총통골 D. 로저로 만들어도 대만인들은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여전히 코렁탕 같이 표현의 자유를 '''자체검열'''하는 케이스가 많은데 대만은 안 그런다.
2019년 비정구기구 CIVICUS가 발표하는 'People Power Under Attack' 보고서는 기본적인 자유수준을 기준으로 196개국을 개방, 축소, 방해, 억압, 폐쇄 등 5개 범주로 평가하고 있는데, 아시아에선 유일하게 대만이 개방등급으로 분류되었다.# 보고서 원문 한국일본은 '축소', 홍콩은 '방해', 중국, 북한은 '폐쇄'국가로 분류했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가 긍정적인 면만 있는 건 아닌 게, 2010년대 이후 대만사회에서 극단주의 세력과 친중파들이 가짜뉴스를 퍼뜨리는 여론조작 시도가 확산되고 있어 정부, 민간차원에서 입법 등의 대응책이 논의되고 있다.

3. 음식




식문화는 기본적으로 중국 각지에서 이주해온 중국인들의 식문화가 종합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외성인들은 중국 본토에서도 높으신 분들, 엘리트가 많았기에 대만인들은 '''중국 요리가 대만에서 더 잘 이어지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기도 하다. 거기다가 일본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일본 요리의 영향도 받았고 디저트, 대표적으로 빙수가 발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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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값이 한국, 일본보다 '''훨씬 싸다.''' 2018년 말 기준으로 거의 갈비찜 수준으로 고기가 잔뜩 들어간 국수, 즉 니우러우미엔(牛肉麵. 우육면)이 시장통에서 한화로 4,000원, 제법 이름있는 식당에서 파는 것은 한화로 6,000~7,000원 안팎 쯤이다. 타이베이에서도 맛집들이 모여있기로 유명한 둥먼(東門) 지하철역 근처의 식당들은 꽤 비싼 편. 동문 쪽 허름한 맛집의 경우 2018년 말 기준으로 우육면이 한화로 10000원 쯤 한다. 물론 한국의 면 요리 맛집들과 비교하면 이것도 싼 편이긴 하며, 파생형인 곱창국수도 인기가 있다.
음식에 따라 기름을 많이 사용해서 맛이 느끼하며 팔각, 고수 등의 향신료가 들어간 음식들이 있어 한국인들의 입맛에는 더러 안 맞는 경우가 있다. 사실 어느 나라 음식이든 다른 나라 사람의 음식은 입맛에 적응하기가 어렵긴 하다. 기름이 들어가서 그런지 요리에는 항상 녹차가 나온다. 찻잎 간장 팔각 온갖 향신료로 삶은 계란인 차예단도 있으며, 편의점에서 판다.
지파이도 있는데 일본의 가라아게와 비슷하게 닭가슴살을 넓게 펴서 양념을 하여 튀기는 요리도 있으며[5], 치즈 감자나 대만 카스테라도 인기가 있다.
'빈랑'이라는 나무열매를 시도때도 없이 씹고 다니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습관성이 있는 이 열매는 일종의 씹는 담배로 각성효과가 있는데 주로 운전기사나 노동자들이 씹고 다닌다. 다만 피 같은 벽돌색 침이 줄줄 나오는 부작용이 있다. 심지어 구강질환의 원인까지 되기도. 대만의 길바닥에 붉은 자국이 있다면 빈랑 씹는 이들이 뱉어놓은 것일 뿐이다. 또한 빈랑은 중독성이 있어 권장되지 않는다. 건강에도 안 좋기에 대만 정부에서도 빈랑을 씹지 말자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남방 국가라서 과일이 다양하다. 냄새가 고약한 취두부도 유명한데 야시장에서는 어김없이 볼 수 있기 때문에 처음 여행 오는 사람들은 취두부의 냄새를 힘들어한다. 또한 대만뿐만 아니라 아시아권, 서양권에도 널리 퍼진 버블티를 최초로 만든 나라이기도 하다. 버블티는 대만에서는 상당히 대중적이고 가격도 한화 2200원 정도로 한국에 비하면 저렴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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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리수(鳳梨酥)라는 과자가 유명하다. 파인애플(鳳梨)을 넣은 과자로 관광객에게 인기가 높다고 한다. 한국식으로 쉽게 이해하자면 천안 호두과자가 국가대표급으로 만들어져 팔리는 셈. 다만 가게에 따라 진짜 파인애플이 들어가지 않고 파인애플"향"만 첨가된 잼을 넣어서 만든 것도 있으므로 평이 괜찮은 것을 알아보고 먹어야 한다. 한국에서는 인천 차이나타운에서나 찾을 수 있었으나, 최근 대만 여행객들이 증가함에 따라 버블티, 우롱차, 카스텔라와 함께 대만산 간식류로 각광받고 있으며 서울 등 대도시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채식이 굉장히 발달한 나라이다. 전체 인구중 13%이상이 계란과 유제품까지 먹지 않는 완전한 채식을 하고 있으며, 계란과 유제품을 먹는 페스토까지 포함하면 전체인구의 30%이상이 채식을 하는 나라이다. 이는 종교적인 이유가 가장 큰데, 대만은 전통적으로 도교와 불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 이로 인해 고기 섭취를 제한하는 문화가 널리 퍼져, 현재 보편화되었다고 한다. 참깨소스와 채소로 만드는 비빔면인 마장면이 대표적.
음식 배달 문화가 발달한 한국, 일본과 반대로 이쪽은 외식 문화가 발달했다. 부엌이 없는 집들도 많고[6] 끼니는 대부분 밖에서 해결하는 편. 주택가에 들어서면 한 블럭 너머 브런치 카페와 만두집을 볼 수 있다. 한국의 김밥천국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4. 대중문화



4.1. 영화




4.2.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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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의 음악은 대부분 표준중국어[7]로 불린다. 다만 일부, 특히 음악이나 독립음악 등 비주류에 속하는 장르는 대만어로 부르는 경우도 있다. K-POP일본 음악영어가 많이 섞이듯 노래 가사에 일본어가 자주 들어가기도 한다. 일본 문화에 익숙한 국가인지라 별로 어색한 일은 아니다. 이것도 2010년 이후로는 많이 바뀌었다. 아무래도 한류의 영향이 크다보니 노래에 (특히 아이돌 음악) 영어를 많이 쓴다. 오히려 일본어를 쓰는게 촌스럽고 옛날노래 같이 느껴진다고...
70년대에는 가수 등려군이 세계적으로 유명했다. 특히 노래 '첨밀밀', '월량대표아적심'은 당시 한국에서도 유행한 노래였다. 진숙화도 등려군 못지 않은 뛰어난 노래로 많은 활약을 했으며, 80,90년대 홍콩영화의 많은 주제곡을 부른 엽천문도 유명하다. 싱가포르 출신 싱어송라이터인 손연자(孫燕姿)가 대만에서 주로 활동하면서 많은 인기를 얻기도 했다. 잘 모르는 사람은 손연자를 대만인으로 착각할 정도. 사실 손연자 말고도 그동안 동남아 화교 출신 가수지망생들이 가장 먼저 찾는 곳이 대만이었다. '꽃보다 남자'의 대만버전 드라마 <유성화원>에 나온 F4는 유명세를 얻자 가요계에도 진출했다. 실제로 나는 가수다의 중국판에서 대만의 가수들이 중국의 가수들을 이기는 모습이 심심치 않게 나오기도 한다.
1990년대 대한민국이 1세대 아이돌의 전성기였던 시절에 대만의 가수들이 한국 노래를 많이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대만의 톱가수로 유명한 서회옥.
대만의 대중가요계는 일본 가요의 영향을 받아 상당히 탄탄하고 저변이 넓다. 장르적으로도 댄스, 발라드, 록, 힙합 등 다양한 음악이 사랑받고 있고 10대 아이돌 가수부터 중장년 가수들까지 차트 상위권에 오른다. 한국 가요계가 아이돌 그룹이 주류라면 대만 가요계는 싱어송라이터가 주류라고 할 수 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도철(陶喆), 왕리훙(王力宏)이 인기를 얻고 2000년대 초반 주걸륜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이른바 '3대 싱어송라이터 시대'가 시작됐다. 한국이 H.O.T 등 1세대 아이돌을 시작으로 아이돌이 대를 이으며 인기를 얻었듯 대만에서는 이들의 뒤를 잇는 싱어송라이터가 줄줄이 쏟아지며 가요계를 주도하고 있다.
여성 솔로 가수로는 장혜매채의림 등이 중화권의 디바로 군림하고 있다. 록 음악도 주류 가요계에서 인기가 높으며 오월천(五月天)이라는 밴드는 십여년째 '국민 밴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8] 상대적으로 아이돌 그룹은 많지도 않거니와 인기도 그다지 없는 편이다. 그나마 2001년 데뷔한 3인조 걸그룹 S.H.E가 지금까지 꾸준히 활동하며 레전드 아이돌이 됐다.
일본, 한국의 노래들을 굉장히 많이 번안하고 있다. 과거에는 일본 가요의 비중이 절대적이었지만 00년대부터 한류열풍의 영향으로 한국 가요의 번안 비율이 높아졌고, 2010년대 이후로는 매해 케이팝 번안곡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아지고 있다. 간혹 한국에서 '대만이 표절한 한국 노래들' 이라는 식으로 영상이 짜집기되어 돌아다니는 경우가 있는데, 이거 대부분 한국에서 정식으로 판권 구입해서 번안한 노래들이다(...). 오히려 중국 본토에서 멋대로 번안한 노래를 대만 측에서 함부로 따라했다고 잘못 알려져셔 욕먹는 경우도 많다.
여담으로 티아라Bo Peep Bo Peep을 번안한 왕채화의 'Bo Bee' 라는 곡이 엄청나게 히트를 쳤다. 링크
한국, 일본, 중국과는 달리 뮤직뱅크인기가요, 쇼! 음악중심 같은 음악 공연 TV 프로그램이 거의 없다. 방송에서는 예능, 쇼 프로그램이 주를 이루는 편. 때문에 가수들이 예능 프로그램 등에 출연해 자기 노래 한 곡 부른 뒤 토크하는 경우가 많다. 대신에 오프라인 행사 공연이 많은 편이다. 새 앨범을 낼 때마다 簽唱會라고 하는 거리 공연과 팬싸인회를 겸하는 행사를 전국 주요 도시를 돌며 연다. 줄만 잘 서면 주걸륜이나 채의림 같은 중화권 레전드 가수들의 공연을 공짜로 코앞에서 볼 수 있는 셈이다.
나무위키에 등재된 대만 가수 목록[9]
  • 등려군
  • 엽천문
  • 딸기구원
  • 주걸륜
  • 주근깨
  • Chthonic
  • 채의림
  • 장혜매
  • 바이안
  • A-Lin
  • 왕페이[10]
  • Bii
  • 쉬자잉
  • 소아헌
  • 위례안
  • 팽가혜
  • 황안[11]

4.3. 아이돌 산업


대만 가요계는 싱어송라이터가 주축으로, 한국과 같은 아이돌 그룹은 철저히 비주류다. 대만 내에서도 중화권을 공략하기 위한 엔터테인먼트 아이돌 시스템이 없는 건 아니나, 대만 시장이 워낙 작고 인기도 없어서 제대로 뜨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도 한국 아이돌들한테 거의 잠식당한 상태. 중국 시장을 보고 만든 보이그룹이나 걸그룹들도 사실상 대부분이 참패를 하고 연예 기획사들이 줄줄이 폐업하는 결과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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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에는 "Dears"라는 걸그룹[12]이 대만 내에서 인기를 많이 누리고 있다. 그러나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아이돌 그룹은 인기가 매우 미미한 편. 3인그룹 드림걸즈는 상당히 고령인데다[13] 그룹 전체보다는 곽설부 개인의 인기가 높고[14], 싱가포르 출신 쌍둥이로 구성된 By2도 지나친 성형 등으로 2010년대 후반에는 시들해지고...

4.4. 만화




4.5. 서브컬처


서브컬처 관련해서 가장 대우가 좋은 나라로서 웬만한 작품들은 거의 다 정발되고 있다.[15] 오죽하면 마이크로소프트 실버라이트의 각국 홍보 사이트 중에서 대만판 사이트만 특별히 '''일본판 사이트에도 없는''' 모에화 캐릭터[16]를 홍보용으로 내세울 정도다. 다만 이건 21세기부터의 일이고 1990년대까지는 서브컬처물에 대해 이미지가 썩 좋지는 못했고, 사실 일본 만화라고 하면 선정적이거나 폭력적인 장면들이 막 나오는 만화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그래도 만화에 대한 정부의 인식은 2000년대부터는 괜찮은 편.
중국에 수입되는 일본 서브컬처들도 대부분 대만의 중국어 번역본들을 2차 수입해온 것들이다. 애니메이션의 경우, 대만이 음성 더빙을 한 작품을 중국에서 정체자들을 간체화하고 제목이나 몇 가지 자잘한 것들만 대륙식으로 수정해 발매하는 것들이 많다.
대만의 오덕 수백 명이 니코니코 조곡을 합창한 동영상이 뜨기도 했으며 일본에서는 그에 대한 답가까지 불러줬다. 정치인들도 일본 만화를 즐겨본다고 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다. 쿠메타 코지는 대만에서 팬사인회를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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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시 프론티어(開拓動漫祭(개척동만제))라는 동인 행사가 있으며, 대만의 최대 동인 행사이자 '''일본 코믹 마켓 다음으로 세계에서 큰 동인 행사'''이다. 흔히 FF로 줄여 부르며, 이 FF에는 정부지방자치단체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등 관심이 매우 뜨겁다. 가장 많이 수입되는 한국은 물론이고 심지어 일본에서도 서브컬쳐는 사회 주류에서 어느 정도 왕따가 되는 편이지만 '''대만은 전혀 다르다. 정치인들이 당당하게 오타쿠 인증을 하는 곳이 바로 대만이다!''' 예를 들어, 2010년 대만 중화민국 지방공직인원 선거(신베이 시장)와 2016년 제14대 중화민국 정부총통 선거에서 일합을 겨뤘던 중국 국민당주리룬민주진보당차이잉원(2016년 당선된 총통) 둘 다 오타쿠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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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30일 팬시 프론티어차이잉원 총통 당선인이 직접 방문하면서 오타쿠 인증을 찍었다. 뉴스의 내용은 '차이잉원이 키리시마를 닮았다'는 내용(...)
다만 이와 같은 행보는 젊은층의 표를 의식한 행동이라고 분석하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18] 일반 대중들의 오타쿠에 대한 시선은 한국에서의 오타쿠에 대한 시선과 별반 다르지 않다. 젊은 층에서는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분위기로 인해 존중하는 편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는지는 개개인마다 온도의 차이가 있다. 심지어 2020년 총선에서 코스프레 출신이 당선되는 일도 있었다.
적은 인구수임에도 한국에 비해 큰 서브컬쳐 산업의 규모가 유지되고 있다. 이는 정치외교적으로 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거부감이 적은 것과 중국어 화자의 일본어 학습의 난이도가 한국어 화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음에서 기인하는 이유가 크다.[19] 또한 한국의 경우 98년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이전에는 애니메이션(TV판 한정)이나 오락실 게임[20]을 제외한 나머지 부문들은 수입이 금지되거나 제한되어 있었고, 1970년대 이래로 만화영화 제작비 부담 문제나 인식 부재 등의 요인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이 정기적으로 방송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최소한 일본만화의 공식적인 수입이 이루어지지 않는 등의 선(?)은 유지한데 반해서[21] 사실 대만도 일본 만화의 수입을 규제하려는 움직임이 상당했던 데다가 일본 만화에 대해 선정성이나 폭력성 등으로 문제시하기도 했지만, 이미 1960년대부터 일본 만화가 정식 수입되면서 일본 만화한테 시장을 꽤나 많이 내주기도 했던 역사가 긴 데다가 검열 문제나 비교적 적은 인구수 때문에 자체 애니메이션 같은 것도 제작이 제대로 이루어질 틈이 없는 등의 요인이 겹쳤고, 90년대 이후로 일본 만화출판사 제휴잡지들도 늘어나며 만화시장 대다수를 일본에게 내주는 판이다 보니까 일본 만화의 비중이 커질 수밖에 없기도 했다.

대만 오타쿠들은 이미 2011년경부터 이미 이런 오타게를 일본 오타쿠들에게 받아들여 추고 있었다.

4.6. 게임


게임 제작 또한 많이 한다.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대만제 게임들로는 RPG 풍운(風雲之天下會), 슈팅 게임 던 레이더, SRPG 용의 기사 2, 3D 롤플레잉 게임풍색환상(風色幻想), 환세록(幻世錄), 워락(魔法軍團 Warlocks), 대전액션게임 삼국지 무장쟁패, 오락실 액션 게임 삼국전기 등이 있다. 대만제 게임들은 주로 패키지 게임이 흥했던 1990년대에 대거 들어와 한국 게이머들에게 인상을 남겼다. 덕분에 던 레이더를 제외하고는 모두 한글화 정발로 발매될 수 있었다.[22] 특히 삼국전기는 오락실 게임인데도 불구하고 국내에 한글화 정발되었다. 다만 한국 못지 않게 일본 게임의 아류가 많은 편이다.
FPS 게임에 좀 약한 것으로 보인다. 카스건, 퀘이크건, 배틀필드 시리즈건, 날고 기는 한중일 플레이어들의 기량에 밀려 인간탑재 봇 노릇을 하는게 일상다반사다. 다만 A.V.A의 경우, 준우승을 하기도 했다.
리그 오브 레전드는 어느 정도 하는 편이다. 대만 출신의 게임단 타이페이 어새신스리그 오브 레전드 시즌2 월드 챔피언십에서 우승했었고, 이 후에 플래시 울브즈ahq와 같은 쟁쟁한 명문팀들을 배출하며 대만 롤의 자부심을 지켜왔다. 롤판의 1부 리그라 할 수 있는 LPL에서도 많은 대만 선수들이 뛰고 있다. 하지만 리그 오브 레전드 2016 월드 챔피언십부터 계속해서 대만 팀들이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는 성적만을 보이고 있어, 실망감을 안겨주고 있다. 결국 계속되는 실력 저하와 승부조작 논란까지 겹쳐 대만 롤 리그인 LMS는 2020년, 동남아시아 리그와 통합되어 PCS로 재탄생되는 결과까지 맞이하게 됐다. 이러한 여파로 대만 롤의 자부심이자 명문팀이었던 플래시 울브즈와 롤드컵 진출 경력이 있던 G-RexMAD Team와 같은 팀들이 해체되기까지 했다.
오락실도 꽤 있고 태고의 달인 시리즈 같은 게임이 인기가 많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처럼 게임을 네트워크로 연결하는 게 가능할 정도로 시장규모가 제법 큰 몇 안 되는 나라이다. 그 일례로 코나미의 아케이드용 네트워크 시스템인 e-amusement가 최초로 개통한 해외시장이 바로 이 대만시장.
Cytus, DEEMO 등의 모바일 리듬게임으로 유명한 게임 제작사 Rayark 또한 대만 소재 개발사이다. 2011년 9월 설립된 신생회사지만 절륜한 퀄리티로 모바일 게임계의 신성으로 자리잡고 있는 중.
강철소녀라는 게임도 만들었다.[23]
현재는 일루전 커넥트가 국내에 서비스중이다.
매년 1월에는 타이베이에서 대형 게임쇼인 타이베이 게임쇼(TGS)가 개최되고 있다. 도쿄 게임쇼와 약칭이 같아서 타이베이 게임쇼는 TpGS라고 구분한다. 다양한 신작 공개 및 중문화 게임의 발표도 이루어지고 있다. 콘솔 게임의 측면으로 봤을 때는 한국의 지스타보다도 더 알찬 느낌. 하지만 어디까지나 콘솔 게임에 한한 것이고, 온라인 게임 부분과 게임의 다양성 부분에서는 많이 부족하다.
대만의 게임 시장은 한국과 달리 모바일 > '''콘솔 > PC'''이다. 모바일 > PC > 콘솔인 한국과는 꽤 다르다.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 국가들 중에서 가장 왜색이 짙은 게임을 만드는 나라이다. 단순히 일본색이 좀 난다는 것을 넘어서 아예 캐릭터 이름, 복식, 건축, 인테리어, 음식, 생활 문화 등 전반적인 면을 전체적으로 일본식으로 만드는 일도 적지 않다. 누가 보면 완전한 일본 게임인 줄 알거나, 최소한 대만이 일본과 똑같은 문화를 공유한다고 외국인들이 착각하게끔 할 수도 있어 보일 정도이다. 한국 같았으면 바로 이러한 이유로 논란이 일었겠지만 대만-일본 관계가 모종의 정치적 연유로 매우 긴밀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대만은 중국과 달리 검열도 매우 수위가 낮아서 그만큼 중국의 반대급부로 더더욱 일본과 연대하려는 경향의 반영일 수도 있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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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도 은근 많이 만드는데, 위의 사진은 우항(雨港)이라는 별명이 있는 지룽항을 소재로 한 우항지룽(雨港基隆)이라는 미연시다(...).
과거에는 인구라는 한계점으로 인해 수요가 기대 이하인 시장으로 여겨져 외면받던 경우도 있었으나 2014년 쯤을 전후로 대만에 번체중문화된 해외 게임이 정식 발매되는 경우가 많아졌으며 대만 자체 내 수요보다 많은 수량이 유통되고 있다. 이는 각종 규제와 심의 문제로 중문 게임 출시가 안 되어 곤란해하던 중국 게이머들이 이런 면에서 자유로운 대만에서 출시되는 번체중문화 타이틀을 직구하거나 다운로드하기 시작하면서 시장이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일종의 우회 판매이다.
닌텐도, 소니(플레이스테이션), 코나미 등 일본 콘솔게임사들의 지역코드 분류에서는 대한민국, 대만, 홍콩, 마카오동아시아 이름으로 한데 묶여서 관리되고 있다.(일본은 별도) 마이크로소프트Xbox 360에서는 대만, 홍콩, 마카오만 묶여있고 한국은 별도. 이 때문에 대만 게임계에서는 한국에 게임이 정발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대만에도 정발되겠다는 의견이 생긴다. 스팀에서는 각 국가별로 다 코드가 다르게 부여되어 있으니 제외.
또한 반교 -Detention-으로 작품성 면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4.6.1. 게임계의 타이완 뉴웨이브


대만게임들은 한국, 일본의 게임과 달리 '''자국의 근대, 현대 역사를 담아내서 만드는 케이스가 많다.''' 반교 -Detention-(장제스 시대), 환원 -Devotion-(장징궈 시대) 시리즈는 물론이고 위에 나오는 지룽소녀라는 미연시 야겜조차 대만일치시기에서 국부천대 사이의 대만 내부의 상황을 다루고 있다. 대만의 게임들에는 어떻게든 최대한 '''정치적 메시지'''를 넣어서 만든다. 이는 1980년대 초반 대만 영화에서 시작된 '''타이완 뉴웨이브'''라는 움직임이 대만 문화 전반으로 퍼졌기 때문이다. 대만 만화에서도 현대 정치를 가지고 소재로 쏟아내는 판에 대만 게임이라고 다를 바 없다.
대만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심의 기준이 널널하고, 정치적 문제가 되는 물건을 막 만들어도 표현의 자유가 폭넓게 보장되다 보니 정치인들도 태클을 걸지 않는다. 이런 움직임에서 이미 소재가 고갈되어 가는 각종 판타지를 소재로 해도 타이완 뉴웨이브를 접목하여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만 게임에서는 '''실험적인 작품'''이 많이 나온다.

4.7. 고민거리


대만 문화산업의 고민거리 중 하나는 주변국(한국, 일본, 중국 등) 문화에 영향력을 잠식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문화경쟁력을 잠식당하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한중일에 비하면 자생력이 확연히 떨어진다.
예를 들자면 한국 영화일본 영화, 중국 영화는 2001년 이후로 자국에서 점유율 40% 이상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지만 대만 영화는 자국시장에서 차지하는 점유율은 1990년대 이래로 하락일로로 들어서서 높아봐야 20% 미만이고, 2018년에는 아예 대만 영화 시장에서 대만 자국영화 비중은 '''6.90%'''에 불과하다. 남아메리카에서 베네수엘라 영화와 비슷한 수준.
텔레비전 방송도 방송시장 개방 이후로는 너무 많은 채널이 허용되다보니 경쟁력을 상실했고, 수많은 채널들이 난립하다 보니 돈 많이 들어가는 대형 프로그램을 제작할 역량이 크게 줄어들었다. 또한 보도부분의 경우에는 지나친 선정성 경쟁으로 가짜뉴스, 왜곡보도 확산이 이미 대만 내에서도 수많은 비판과 지적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다보니 대만 내에서조차 종편과 보도채널을 너무 많이 허용해주어서 방송이 막장이 되었다고 한탄하는 목소리가 많고, 제작인력이나 노하우도 중국으로 빠져나가서 아예 중국에 종속되는 판이라는 목소리도 많다. 한국은 한류 열풍이 90년대 말에 생기기 시작한 이래로 영화,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이 꾸준히 수출되고 있고, K-POP도 세계적으로 흥행하는 등[25] 문화수출국으로써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지만 대만은 이런 것들이 전혀 없다. 만화와 게임은 어느 정도 자생력이 있지만 애니메이션은 한국보다도 시궁창이라서 애니메이션 보조지원제도가 있다고는 하지만, 주요 방송사 재정이 훨씬 풍족한 한국도 TV 애니메이션 제작이 활발하지 못한데 대만의 TV 애니메이션 제작이 활발할 리가 없다.[26] 사실 애니메이션 제작 역사 자체는 한국보다 빨랐고, TV 애니메이션 제작도 대만이 1985년 <샤오핑과 샤오안(小平與小安)>이 시작점으로 한국보다 2년 정도 빨랐지만 제작여건이 시궁창이니 그 만큼 발전이 뒤쳐진 것이다. 의외로 방송시장이 개판이 된 2000년대 이후로도 합작 형태로 꽤 제작은 되고 있지만 역시 현실은 시궁창인 편이다.
대만의 문화산업은 한국에서 볼 수 있는 문제점이 몇 배는 더 농축되었고, 제작 인프라는 개판이며, 세계에서 돌풍 같은 것도 별로 기대할 수 없는 수준이다. 그러다보니 대만의 영화업계나 방송업계에서는 한국을 부러워하는 의견이 많아 한류에 대해 질투어린 시선으로 보는 경우도 종종 있다.[27] 대만에는 한국 문화와 일본 문화의 영향력이 강해서, 뉴스만 틀면 해당 국가의 연예계 소식이 메인뉴스로 나오는 수준이다. 길거리를 거닐면 거리에서는 한국노래가 나오는데 간판은 일본어와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이 도배되어 있는 묘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대만은 1990년대까지만 해도 자체적인 소프트파워를 자랑하던 나라였는데 사실 타이완 뉴웨이브로 세계영화계에서 나름대로의 호평을 받기도 했고, 홍콩 영화와의 교류가 활발해서 대만 영화대만 드라마도 그 영향을 받아 어느 정도 경쟁력이 있다고 평가되었지만 21세기에는 대만 방송시장의 파편화와 90년대 초부터 진행된 자체 영화산업의 몰락이 겹쳐 연예계 영화계의 고급인력들이 대부분 같은 언어권인 중국 대륙으로 블랙홀처럼 빨려들어가(...) 속 빈 강정만 남게 되었다. 자체적인 소프트파워를 잃어버려 미국에 의존하게 된 캐나다나 호주의 연예계, 영화계와 비슷하다.

5. 언론



5.1. 신문


대만은 1949년 대만 계엄령이 선포된 이래로 1980년대 중반까지는 현재의 중국과 싱가포르가 그렇듯이, 혹은 비슷한 시기의 한국이 그렇듯 언론들은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아야했다. 우선 주요 기사는 국민당의 검열을 받아야 했고, 신문발행지면도 1970년대 중반부터 1987년도까지는 1일 12면으로 제한되어있었으며 1950년대 중반부터 1987년까지 신규 언론사의 등록도 막혀있는지라 자연히 언론자유가 보장되지 않았다. 당시 대만 언론자유 수준이 어땠는지 알수있는 사건이 자유중국 사건이다.
1988년 대만 계엄령 해체와 더불어 언론자유화가 시행됨에 따라 신문발행이 자유화되었고 이후로 홍콩의 상대적인 추락과 더불어 중화권에서 가장 언론자유가 보장되는 국가/지역으로 거듭났고, 동아시아에서도 독보적인 수준으로 성장했다. 대만의 4대 일간지의 평균 발행부수는 50~100만 부 내외로 인구에 비하면 좀 많이 발행하는 편.
대표적인 신문으로는 중국시보(中國時報), 연합보(聯合報), 자유시보(自由時報), 빈과일보(蘋果日報)[28]가 있다. 이중 중국시보와 연합보는 친 국민당 성향, 자유시보는 친 민진당 성향으로 분류되며 빈과일보는 정치적인 스탠스에 있어서 기존의 3대 신문사와는 다르게 정당에 구애받는 성향은 아니지만 반중 성향을 강하게 띄고있다. 이외에도 1966년부터 2006년까지 발간된 중앙일보(中央日報)도 있었는데 중국국민당의 기관지이다. 한때는 1위 신문사의 자리를 굳건히 지킬때도 있었지만 1980년대 후반-90년대의 민주화 바람으로 중국시보, 연합보는 물론이고 자유시보에게도 밀리는 처지가 되었고 2000년대에 적자가 누적되어 결국엔 2006년에 종이신문 발행을 중단했다. 다만 인터넷 홈페이지는 계속 운영중이라 완전 폐간은 아니다.
대만의 신문이 가지고 있는 특징 중 하나는 '''신문이 굉장히 알록달록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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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중앙일간지(중국시보)의 모습. '''이게 찌라시가 아니라 전국 대상 중앙일간지다.''' 심지어 이 정도면 대만에서도 '''약과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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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출신 일간지인 빈과일보 대만판.
사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대만의 신문은 '''지금에 비하면 꽤나 깔끔한 편이었다.''' 현재와 같이 신문이 난잡해진 것은 홍콩 빈과일보의 대만 진출이 가장 큰 이유로 꼽히고 있다.
빈과일보가 홍콩에서 창간되었을 때부터 전면 컬러 인쇄와 자극적인 제목 선정으로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지만 신문의 노골적인 상업화와 연성화로 비판이 많았는데 대만의 빈과일보도 이를 답습했고 첫 판매부수만 56만부를 찍는 등 대박을 치면서 2000년대 초반에 창간했음에도 수위권의 언론사에 등극했다. 반면에 지방언론사들이 속속 파산하고 메이저급 언론사들도 불황에 허덕이자 다른 일간지들도 판매 부수를 늘리기 위해 경쟁적으로 자극적인 편집을 하게 된 것. 한때 대만 빈과일보에서 넥스트TV(壹電視)라는 보도채널을 운영한 적이 있었는데 모 기업인 빈과일보로 인해 '''자극적인 BGM 남발과 온갖 현란한 자막 효과'''로 뉴스를 도배했고 이후 넥스트TV가 타 채널에 매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영향이 이미 모든 뉴스채널로 확산되어(...)''' 대만의 텔레비전 뉴스(지상파든 종편이든 전문채널이든)를 보면 굉장히 어지럽다.
여하간 대만 언론은 자유화와 함께 상업주의적인 노선을 대놓고 걷다 보니까 언론자유도가 높은 것과는 별개로 대만 언론에 대한 신뢰도는 한국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낮은 수준이고, 언론에 대한 불신도가 높은 편이다.# 검열이 심각하며 현재도 자행되고 있는 중국과 다른 방향으로 막장인 셈이다.

5.2. 방송




1962년에 대만 최초의 TV 방송이 송출되었다(TTV).[29] 이후 수십년 내내 대만 TV의 주요 채널에서는 각종 국내외 영상 작품들이 방영되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도 그에 편승해 속속 방영되었으며 일본 애니메이션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애니메이션을 자체제작하기에는 돈이 너무 많이 든다는 이유도 있고 비교적 수입판권료가 싸다는 이유 때문에 일찍부터 수입되면서 대만에서 폭발적 인기를 얻어오면서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수입되었고 애니덕후들의 팬카페도 다수 생겨났다. 蔣中正到龍猫的取代(장제스를 토토로로 대체하자)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30] 오죽하면 1970년대에 일본만화 유해론이 나와서 논쟁거리가 되었을 정도였고 이게 1990년대까지도 이어졌다. 하지만 한국이 그렇듯이 대만도 마찬가지로 TV애니메이션의 자급자족에는 실패하면서 현재까지도 일본 애니메이션이 잘 방영되고 있는 상황이다.
당시 대만은 경제력이 한국을 능가했던 관계로 TV방송 시작이 늦었음에도 TV가 한국보다는 일찍 보급되었으며 국영방송이 주류였음에도 타이완 성 정부, 중앙정부, 국민당에서 각자 따로 방송국을 운영하던 관계로 일찍부터 경쟁체제가 갖춰져 있었기 때문에[31] 상업성 경쟁도 상당했고, 한국과 다르게 중간광고를 대대적으로 집어넣을 정도였다. 하지만 1990년대 이전에는 사실상 국영방송이 주류였음에도[32] 불구하고 과도한 광고, 국영독점다운 친정부 일색의 성향과 과도한 정부 선전, 산악 지형으로 인한 난시청지역이 많은 국토의 특성 등으로 인해 일찍이 본성인들을 중심으로 케이블 TV가 보급되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비디오 레코더가 널리 보급되면서 외국에서 방영되는 프로그램을 녹화 방영하거나 자체제작 프로그램을 방영하기 시작한 케이블 방송도 등장하게 되자, 위협을 느낀 국민당 정부에선 케이블 TV를 불법으로 지정하고 탄압에 나섰지만 케이블 TV의 확산을 막을 수 없었고 결국 리덩후이 정부하에서 케이블 TV 양성화 정책과 채널 수 확대[33] 정책을 폈다.
이 시기 방송에 대해 대대적인 규제 완화를 하면서 채널 수가 급속히 늘어나고 이에 따라 방송시장도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였지만 TV 채널이 시장 규모에 맞지 않게 너무 과도하게 많아지는 바람에 채널당 분배되는 파이가 너무 적어지고 설상가상으로 국산TV 프로그램의 방영 쿼터제가 폐지되면서 케이블 방송사들은 앞다투어 외국의 TV 프로그램을 잇따라 수입하면서 외국 TV 프로그램에 의존하게 되었고, 기존의 자체 제작 프로그램들은 광고 수입이 크게 줄어듬에 따라 중국과 합작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또한 방송사 재정 기반의 부실화에 따라 자체제작 프로그램의 제작비도 급속히 줄어드는 바람에 프로그램의 저질화도 가속화되어 국민당 1당 독재시절과 다른 의미로 방송계는 막장이 되고 말았다. 어느정도의 수준이나면 지상파 채널이 15개에(물론 MMS 시행으로 채널 수가 15개인 것이다.) 종합편성채널이 '''20개'''나 허용되어있고 24시간 보도채널이 한국은 2개(YTN, 연합뉴스TV) 정도인데 반해 대만은 9개씩이나 된다. 거기에다가 중국처럼 각 방송사에서 채널을 여러 개 소유하고 있는 건 기본이다. 이러니 제 살 깎아먹기식으로 경쟁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자체제작 기반을 유지하는 방송사들이 상당수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 해도 한국 수준으로 제작기반이 잘 유지된 것은 아니다.
인구가 한국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고 이미 기존의 광고 규제도 느슨했다보니 아무리 규제 완화를 한다 해도 한계치가 있는데 이런 사정을 감안하지 않고 방송 규제를 완화하면서 엄청난 부작용에 시달리게 되었던것이다.[34] 지상파 방송이 몰락한 건 덤으로 5대 지상파 방송사 시청 점유율을 합해도 전체 시청 점유율의 1/5에 못 미치는 수준이 되었다.
그나마 수입 프로그램에 대한 의존이 문제가 되면서 국산 프로그램 방영 쿼터제를 부활시키기는 했고, 이러한 쿼터제를 확대하려는 움직임까지 일고 있지만 그런다 하더라도 근본적인 재정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기에 앞으로도 나아지기는 힘들 듯하다. 재정이 얼마나 막장화가 되었냐면 명색이 지상파 방송국이라는데가 케이블 종편사에 얹혀 살고 있는 곳도 있으며 부동산 수익으로 겨우겨우 연명하고 있는 방송사들도 있다.
심지어 뉴스에도 PPL이 나올 정도이며, 이런 PPL의 경우에는 일반 뉴스와 구분도 되지 않아 대만 언론의 질을 떨어트린다는 원인 중 하나라는 한탄이 나왔을 정도다. 특히 경쟁이 심각하다보니 보도 부문의 막장화도 나타나 한국의 종합편성채널에서 보이는 선정적인 뉴스 경쟁도 대만은 이미 2000년대 초부터 등장했다. 심지어 선거 개표도 선관위 공식집계보다 훨씬 이르게 발표하는 일까지도 벌어지는데, 이때문에 2004년 총통선거 때의 혼란을 초래하기도 했다. 비단 이 사례뿐만 아니더라도 공정성이나 심층성보다는 선정성, 시청률을 추구하다보니 자막과 GG로 떡칠된 화면구성이나 잡담으로 때우는 경우가 많은 시사토크쇼 등으로 인해서 별로 좋은 소리는 못 듣고 있다. 게다가 취재 행태도 자세히 보면 저급하기 그지 없다보니까 기자들이 무례하거나 엉뚱한 질문 정도는 날리는 정도는 애교인 수준이다. 한국에서도 언론사들과 기자들이 베껴쓰기 및 떨어지는 자질, 광고료와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달라지는 논조 등으로 비판을 받으며 평판이 나쁘지만, 방송사에서 최소한의 공익성을 강조하는 규제는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리미터가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는 느낌이라면 대만은 PTS 같은 소수의 방송국들을 제외하면 그조차도 완전히 풀렸다는 느낌이다. 대만인들이 한국 뉴스프로그램을 볼 때 적어도 한국 뉴스 프로그램이 대만보다는 훨씬 깔끔하고 신뢰가 간다고 평(...)할 정도이며, 뉴스 프로그램에서 주석이나 성장, 시장 소식부터 나오는 중국과는 다른 의미로 막장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2019년 이후 대만 예능이 다른 의미로 인기가 있는데, 유튜브의 SET, FTV 등에서 업로드된 대만 예능프로그램의 노출수위가 한국이나 중국보다 상당히 높아서 유튜브 알고리즘을 통해 '대만 예능의 위엄'으로 화제가 되기도 한다.

6. 인형극


포대희 참조

7. 스포츠


대만/스포츠

8. 종교


대만은 중화민국 헌법 제 13조에 따라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으며, 세계적으로도 종교의 자유가 가장 잘 지켜지는 나라 중 하나이다.
2005년 대만 내정부 통계에 따르면 대만에서 신자가 많은 종교는 불교와 도교로 각각 인구 중 각각 35%, 33%가 스스로를 불교 신자, 도교 신자로 인식한다. 그 뒤를 이어 그리스도교(3.9%)와 기타 소수 종교 등이 있으며, 무종교인은 약 18%이다. 자료 출처
대만의 전통적인 종교는 불교도교, 유교, 그리고 이 세 가지가 혼합된 민간종교로 나눌 수 있다. 각각의 사원은 이름에 쓰이는 글자를 통해 구분할 수 있다. ‘사(寺)’자를 사용하는 불교의 대표적인 사원은 룽산쓰(龍山寺), ‘궁(宮)’자를 사용하는 도교의 대표적인 사원은 즈난궁(指南宮), ‘묘(廟)’자를 사용하는 유교의 대표적인 사원은 쿵쯔먀오(孔子廟)이다.
2005년의 자료에 의하면 대만 정부에 등록된 재단법인 혹은 사단법인의 종교는 불교, 도교, 가톨릭, 정교회, 개신교, 이슬람, 일관도 등 16개가 있다. 2000년 내정부 통계에 의하면 대만 지역에 등록 사찰이 9,413개이고 전국적인 종교 재단법인은 145개, 사단법인은 300개이다. 이와 같이 많은 사찰과 종교 단체가 일하고 있는 곳이 대만이다. 그러나 실상 寺, 宮, 廟 안에 들어가면 유교, 불교, 도교만 합쳐진 것이 아니라 민간 종교까지 혼합되어 있다.
대만인들은 한국인, 일본인 등 주변 나라 사람들처럼 종교를 신념적인 면에서보다는 세속적인 면에서 받아들이고 이해한다. 세계에서 가장 편의점이 잘 되고 가장 많은 나라가 대만이다. 먼저 실질적으로 편리해야만 뭐라도 된다. 우선 싸야 되고, 편리해야 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활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어야 한다. 종교 또한 예외일 수 없다. 생활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종교는 결국 대만인의 삶 속에 영향력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시장이 사찰이나 궁 앞에서 시작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불공을 들이면서 시장도 볼 수 있는 편리함을 위해서이다. 이들은 현재의 생활과 삶에 직접적인 것을 이야기할 때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인다. 그러나 종교가 세상과 무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이들은 종교와 멀어지기 마련이다.

8.1. 불교


불교는 18세기 한족의 대만 이민을 통해 자리잡았다. 이 때 여러 산에 관세음보살 신앙을 근거로 한 산사들이 들어섰다.
대만일치시기에는 일본의 불교 교파도 유입되어 1945년 패전 직전에는 8개 종단의 14개 교파가 대만에 자리잡았다고 한다. 일본 불교는 대만을 새로운 시장(?)으로 보고 자신들의 불교 신앙을 열심히 전파했으며, 패전으로 일본인들이 대만에서 대거 쫓겨난 이후로도 일본 불교의 교파들은 일부 남아있다.
2차대전 이후 국민정부가 대만을 지배하고, 국부천대가 이루어지면서 중국 대륙의 수많은 승려들이 대만으로 건너왔다. 중국 대륙에서 건너온 불교 승려들은 대승 불교를 기반으로 하여 신앙을 전파했다. 이렇게 중국 대륙에서 건너온 불교 승려들의 노력으로 1983년에 80만 명에 지나지 않았던 불교 신자는 현재 800만 명을 넘어섰다. 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에 대해 불교 승려들의 노력뿐만 아니라 급격한 도시화로 인해 소외된 사람들이 불교에서 위안을 찾고자 하는데 따른 것이라고 분석한다. 대만의 불교는 1980년대 중반부터 점차적으로 국민당 철권통치가 완화되고 민주화가 추진되면서 자유로워진 사회 분위기를 타고 여러 사회운동을 전개해나갔고, 이러한 활동들이 많은 대만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분석도 있다. 1980년대 대만의 불교 인사들은 이를 토대로 중국에 건너가 문화대혁명 이후 뿌리가 뽑히다시피 한 중국의 불교를 진흥하는 데도 기여했다고 한다.
불교 신자들은 주로 정토종이나 선종을 믿지만 대만 불교가 다양화됨에 따라 중국불교 뿐 아니라 티베트 불교일련정종 등 비(非) 중국불교도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티베트 불교의 경우 사라 프레이저(Sarah E. Fraser) 하이델베르크대 교수가 2018년 연구에서 인용한 가장 최근의 통계에 따르면 대만 내 티베트 불교 신자 수는 약 50만~60만여 명에 달한다. #

8.2. 도교


도교 역시 한족의 전통 신앙으로서 18세기에 유입되었다. 대만의 도교는 전진교정일교가 주요 종파이다. 중국 대륙에서 문화대혁명으로 도교 제례 의식 전통이 큰 타격을 받은 것과는 달리 대만에서는 도교 의식이 많이 남아 있고 행해지고 있다.

8.3. 민간신앙


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종교는 유교, 불교, 도교이지만, 민간에 직접적으로 깊이 파고들어 그들의 풍속과 인생관, 가치관에 영향을 주는 것은 바로 민간 신앙이다. 이는 민간신앙이 대만 사회의 주요한 문화현상이며 사람들의 정신을 안정되게 하는 문화 종교의 구실도 하는 이유에서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신념만큼이나 사람마다 믿는 민간신앙의 종류는 신, 사람, 귀신 등으로 다양하기 때문에 민간신앙을 믿는 사람이나 종류를 쉽게 숫자로 파악할 수는 없다. 그리고 대만 사람들은 민간 신앙이 불교, 도교와 서로 통하는 면이 있어 종종 자신이 믿는 종교가 민간신앙이 아니라고 말하는 경우도 적지 않아 그 종류를 파악하기도 힘들다. 신앙의 대상들은 천지, 일월성신, 인류, 사회, 국가, 민족에 중요한 공헌을 한 위인 각종 종족의 조상 이외에도 직능에 따라 개척 신, 토지 신, 향토 신 등으로 구분을 한다. 이는 도교가 후한 때 장도릉이 창건한 하나의 고대 정령 신앙이었고, 노자의 사상과 유가, 불교가 섞인 종교로서, 오랜 변천 과정을 거쳐 남방 도교가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만의 민간 신앙은 도교의 영향을 크게 받아 도교의 색채가 짙고 민간 신앙과 도교를 혼동하는 이들도 적지 않는 것이다.

8.4. 그리스도교


그리스도교 인구는 대만 전체의 약 3.9%이다. 이 중 약 2/3이 개신교이고 1/3이 가톨릭이다. 대만은 16세기 타이완 섬을 지배했던 네덜란드스페인으로부터 선교사가 유입되어 기독교를 처음으로 접하였다.
주변 국가들처럼 대만도 그리스도교 인구는 많지 않으며, 많은 대만인들에게 그리스도교는 여전히 생경한 종교/문화로 인식된다. 그리스도교는 대만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꽤 불편한 종교이다. 교회에서 정한 시간에 정해진 장소로 가서 미사/예배를 드려야 하고, 당장 실생활에 그리 큰 유익을 주는 것 같지도 않고, 각종 종교 행사나 교회 모임 등의 신앙 생활이 일상과는 동떨어져 있다고 느끼는 경향이 있다.
많은 선교사는 대만 복음화의 가장 큰 걸림돌로 불교, 도교 등 전통 종교 뿐 아니라 조상의 위패, 재물신 등의 사당을 차려놓고 복을 구하는 다신교적 사상을 손꼽는다. 절대 다수의 대만인들은 자신이 모시는 신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하며,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역시 여러 많은 신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강하다. 즉 "당신이 믿는 신도 좋고, 내가 믿는 신도 좋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신앙이 확산되기 매우 어려운 것이다. 이 같은 배경으로 인해 특별히 그리스도교에 대한 배척이 없지만, 유일신 사상을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는다. 아울러 그리스도교로 개종했을 경우, 조상신을 섬길 수 없기 때문에 선뜻 신앙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온 집안 식구들이 수시로 사원을 찾아서 절을 하며 조상을 숭배하는데, 이를 거부하면 가족으로부터 모진 눈치와 핍박을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조상 숭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조상에 대한 배반이라는 생각이 이들의 사상에 짙게 깔려있는 것이다. '''실생활과 동떨어진 종교는 대만인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
대만의 그리스도교 현황은 이러한 상황을 함께 이해해야 한다. 영국령이었던 홍콩이나 포르투갈령이었던 마카오처럼 서양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국처럼 기복신앙이 되거나 민간신앙과 섞인 것도 아니다. 현세의 세세한 일상생활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지 않고, 내세와 구원을 말하며 절대신에게 순종할 것을 요구하는 종교를 별로 선호하지 않는 것.

8.4.1. 개신교


대만의 개신교 신자는 전체 인구의 2.6%이다. 대만은 청나라 지배 이전까지 네덜란드 세력이 자리잡았던 곳이기 때문에 가톨릭보다는 개신교의 포교가 더 활발히 이루어졌다. 네덜란드 선교사들은 당시 타이완 섬에 있었던 소수의 한족과 원주민에게 개신교를 전파했다. 그러나 정성공이 네덜란드 세력을 타이완 섬에서 쫓아내면서 개신교의 전통은 일시적으로 끊기게 된다.
19세기에 서양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다시 타이완 섬에 들어와 개신교를 전파했다. 그들은 성경민남어와 각종 원주민 언어로 번역했는데, 이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 민남어 백화자로 현재에도 대만어로마자 표기에 활발히 사용되고 있으며, 원주민 언어들의 로마자 표기도 이를 계기로 확립된 것이 많다.
대만의 개신교인들은 장로회가 대다수를 차지한다. 대만기독장로교회(台灣基督長老教會)는 1865년[35]에 설립되어 활동해왔는데, 이들은 본성인대만 원주민 선교에 큰 비중을 두었다. 장로회는 대만일치시기에도 대만인의 권익을 대변하는 역할을 해왔으며, 국민정부의 횡포에 대해서도 본성인들을 대변해 적극적으로 저항해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중화민국(대만)이 UN에서 쫓겨나는 등 국제적 입지가 급격히 축소되던 1970년대에 중화민국 정부는 장로회를 빨갱이 집단으로 보고 집중 탄압한 바 있다. 그럼에도 1977년 8월 16일에는 단체로서 최초로 대만 독립을 공개적으로 촉구하는 등 저항을 이어나갔다. 이러한 이유로 민주화된 오늘날 장로교 인사들은 범록연맹의 주요 지지세력 중 하나이다. 공식적으로 대만의 장로회는 특정 정치세력을 지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장로회 인사들 중에는 범록연맹 지지자나 범록연맹 측에서 활동하는 인물이 많다. 또한 장로회는 원주민의 권익 신장과 권리 보장에도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러한 노력 덕에 원주민들 중 64%가 장로교 신자이다.
물론 외성인 중에서도 개신교인들은 있다. 중국 대륙에서 공산주의 이념에 의거해 종교인들을 탄압하다보니 많은 수의 개신교인들이 대만으로 넘어왔다. 국가 지도층 중에서도 중화민국의 국부인 쑨원을 비롯해 헌정 초대 총통 장제스, 장징궈, 쑹메이링 등이 개신교인이었다.

8.4.2. 가톨릭


가톨릭은 개신교에 비해 교세가 크지 못하다. 16세기에 타이완 섬 북부를 잠깐 지배했던 스페인에서 가톨릭을 전파했지만 얼마 못가 네덜란드에 쫓겨나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했다. 대만 가톨릭에서는 19세기에 도미니코회 수도사들이 필리핀에서 대만으로 들어온 것을 대만 가톨릭 역사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대만에는 1913년에 중국 대륙으로부터 교구가 분리되어 독자적인 교구가 설치되었다.
하지만 국민정부 지배 이전까지 대만에는 가톨릭 신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 가톨릭 신자가 급격히 늘어나게 된 계기는 국부천대중국 대륙의 종교 탄압 과정에서 수많은 대륙 가톨릭 신자들이 대만으로 망명해온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외성인들이 초기부터 교회의 주류였는데, 현재까지 배출된 3명의 추기경 모두 중국 본토 출신이었다. 자연히 대만 가톨릭도 국민당을 지지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 반대 급부인지 대만의 가톨릭은 개신교에 비해 민주화 운동에 소극적이었고, 오늘날에도 이것이 대만에서의 가톨릭 부진의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현재 대만 가톨릭은 대만 전역에 8개 교구를 가지고 있다.

8.5. 이슬람


무슬림의 경우 대다수는 회족이지만 위구르족도 일부 존재한다. 회족은 청나라중화민국(중국 대륙) 시절에 이주해온 이들도 많고 국부천대문화대혁명 때 이주해온 이들도 많지만, 위구르족은 절대다수가 문화대혁명 때 이주해온 이들이다.
그 외에도 동남아시아에서 이주한 인도네시아인 노동자들 역시 대만 무슬림의 주요 구성원이다.

9. 성 문화



9.1. 성 산업


의외로 국민당 일당독재 시절에 공창제가 시행되었기 때문에 성매매가 합법이었고, 수도인 타이베이도 1990년대 초중반까지는 태국방콕과 더불어서 유흥과 향락으로 유명했다. 당시 타이베이 이발소의 상당수가 음성적으로 퇴폐영업을 했을 정도. 성매매 업자들은 국민당과도 유착되어 있어 정치적 문제가 되기도 했다.
매춘이 불법화된 건 민진당천수이볜이 타이베이 시장으로 취임하고 부정부패를 척결하겠다면서 사창가를 쓸기 시작하고 양지에서 활동하던 성매매 업소들이 줄줄히 폐쇄조치를 당하면서부터이다. 이러한 조치가 여론의 지지를 얻으면서 1999년에 공창제 폐지법안이 통과되었고 2년 후인 2001년에 공창제가 완전히 폐지되었다. 그러나 공창제 폐지 이후에 매춘업소가 오히려 음지로 숨어드는 바람에 부작용이 속출하여 2011년에 지자체가 성매매 특구로 지정되길 원하면 그 지역에서 성매매를 할 수 있게 하는 방식으로 매춘이 다시 합법화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성매매 특구가 지정되지 않아 실질적으로는 불법이었다가 타이중 일부 행정구역에서 허용함으로써 실질적으로 다시 허가되었다. 대만의 매춘 항목 참조. 물론 당연히 그와는 별개로 성매매에 그리 호의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대다수다.
길가에서 외설스런 복장을 입고 뭔가를 파는 젊은 여성들을 가끔 볼 수 있는데, 빈랑에다가 향료 따위를 넣고 파는 빈랑소녀들로 빈랑서시(檳榔西施)라 한다. 대부분은 복장만 야할 뿐 그냥 팔고 끝나지만 가끔 빈랑을 팔면서 가벼운 스킨십을 하는 여자들도 있고 빈랑을 팔면서 매춘이 이뤄지는 곳도 있다고는 한다. 빈랑이 육체노동자나 운전기사 등을 상대로 잘 팔리기 때문에 돈은 꽤 되는데 제품 그 자체로는 차별화가 거의 안 되다보니 경쟁이 심해서 이런 외설적 마케팅 수법이 등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1990년대 중후반에는 유흥업소 단속과 함께 매춘부들이 빈랑서시로 전직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일자리를 잃었는데 자신들의 직업노하우를 살릴 수 있는 것이 빈랑서시라서 그런 것. 아무튼 담배가 그렇듯 빈랑 복용자들은 대체로 저학력 노동자들이기에 빈랑서시도 대도시보다는 근교 지역이나 시골에서 잘 찾아볼 수 있다. 빈랑서시들의 모습(후방주의)

9.2. 성 소수자


동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의외로 동성애자, 양성애자임을 공개한 사람들이 많은 나라다. 2003년에 동성결혼 합법화를 검토한 적이 있었지만, 이 때는 민진당이 입법원에서 과반을 차지하고 있을 때도 아니고 반대 여론이 커서 무산되었다. 그래도 이 때 당시에 많은 개혁이 이루어지기는 해서 동성애자에 대해 많이 관대해진 것도 사실. 그리고 2016년 대선에서 차이잉원이 총통 선거에서 압승하고 입법원에서도 민진당이 과반을 훌쩍 넘어 적어도 2010년대 후반에는 동성결혼 합법화가 가능해질 것이라는 예측이 많다. 대부분의 대만인 젊은 세대는 그들의 의사를 존중하고 있다. 2015년부터 타이베이, 타이중, 가오슝에서 동성커플을 공인하고 증명서를 발급하거나, 원한다면 호적에 기재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2016년 2월 1일부터 신베이, 타이난에서도 가능해졌다. 물론 장노년층들은 동성애에 대해 썩 관용적인 편은 아니고, 사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이 꽤 존재하기는 했다.
2016년에는 대만의 국회인 입법원에 동성결혼 합법화를 골자로 한 민법 개정안이 제출되었으며 2017년 5월 23일에 대만 사법원에서도 동성결혼을 불허하는 현행법에 위헌 판결을 내리고 2년 이내에 법을 개정하도록 요구하였다. #
그러나 2018년 지방선거와 함께 시행된 동성결혼을 제도화하는 민법 개정에 대한 국민투표에서는 반대가 더 많이 나왔다.(출처) 그래서 민법 자체를 고치지는 못하고, 결국 2019년 5월 17일 동성결혼 합법화를 위한 특별법이 가결되며 아시아 최초 동성결혼 합법 국가가 되었다. 민법 개정을 못하니까 특별법을 제정하는 방식으로 '''구제조치'''를 한 것이다. 대만 민법에 따르면 혼인은 무효라서 '''혼인신고서를 통한 동성결혼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사실혼 관계의 동거임을 입증하는 서류를 각 지방 관청에 비치해서 작성한 이후, 법원에 "동성결혼 특별법에 따른 '''구제조치'''를 신청"하고 그것을 법원이 허가하는 방식으로 동성결혼의 합법화가 시행되었다. 이런 조치에 반발하는 반동성애 진영에서는 2022년 지방선거 때를 목표로, 동성결혼 특별법의 효력을 정지하는 2차 국민투표를 준비하고 있다.

10. 총기


기본적으로 대만은 총기 소지가 불법인 국가이다. 그러나 대만의 삼합회들은 '''총 가지고 싸운다'''. 또한 '''대만 정치인'''들도 자기 보디가드 뿐만 아니라 본인 스스로도 총을 챙기고 다닐 수 있다. 현직 국회의원이나 장관 등이 관할 직할시청이나 현청을 통해 신분을 증명하고 총기 사용 면허를 따면 총을 구입해서 다닐 수 있다. 때문에 삼합회나 정치인들에 의한 총기사고가 잊을 만 하면 한 번씩 나곤 한다. 2004년 총통선거 와중에 천수이볜총에 맞기도 하고 2010년 중화민국 지방공직인원 선거선거 유세를 하던 롄성원이 총에 맞기도 했다.

11. 기타


중국과 이래저래 연관이 많지만 사실상 다른 나라라 중국/대만 쪽으로 진출하는 기업은 항상 상표 등록, 사이트 제작 등 모든 부분을 중국 쪽과 대만 쪽으로 따로 신경써줘야 한다. 하다못해 게임 사이트나 서버조차도 따로 지정해 주어야 한다. 일례로 카운터 스트라이크 온라인은 중국 웹사이트와 대만 웹사이트를 따로 제작했는데, 그것도 그냥 글자만 각자의 언어에 맞춰 바꾼 정도가 아니라 아예 별개의 디자인으로 생판 다른 사이트들을 만들어 놓았다. 이래저래 진출하는 기업 입장에서는 귀찮은 상황. 중국은 직역하는 데 비해 대만은 비교적 완곡하게 번역함을 알 수 있다.
현지인 대부분이 더치페이에 엄청 신경 쓰는 편이다. 1원이나 10원 정도의 작은 돈도 다른 사람이 내주겠다고 하면 거절한다. 정말로 잔돈이 없어서 다른 사람이 내주는 경우에도 미안하다고 하면서 1원이라도 나올 때까지 온 짐을 뒤진다. 원래 중국인은 개인주의자들로 철저히 네 것은 네 것, 내 것은 내 것이라고 생각하며 서구화된 대만은 그 경향이 더 강하다. 홍콩이나 마카오, 싱가포르의 중국인은 말할 필요도 없다. 다만 친한 사이끼리는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기도 한다.
『타이완』[36]에 따르면 호기심이 많아서 질문을 많이 하는 편이라 사생활 침해로 느껴지는 질문을 받게 될 수 있다. 이는 '렌칭웨이(인정미)'라는 특유의 문화 때문이다. 렌칭웨이는 상대방의 진짜 입장을 알기 위해 세 번까지 물어 청하는 것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대접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서로 호의호식하고 싶다는 입장인지 돕기 싫다는 입장인지[37]를 표현하는 포괄적인 문화라고 한다.
대만의 제헌절은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38] 크리스마스와 같은 12월 25일이 대만의 제헌절이라 한국, 홍콩, 마카오,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레바논, 필리핀과 함께 아시아에서 크리스마스가 공휴일인 나라였다. 지금은 교회 관련 기관•학교를 제외하고는 쉬지 않는다.
뉴스가 동아시아 국가들 중 제일 재미 없다고 한다. 어느 정도냐면 "타이베이 경찰서장이 자기 집 반려견을 잃어버렸는데 6시간 만에 찾았다"가 뉴스 거리라고..... 대만 사회는 그만큼 '''안정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가끔씩 '''연쇄살인'''이 터져서 대만의 전 뉴스를 '''몇 주 동안''' 도배하는 경우가 많다. 대만은 사회가 안정된 국가라서 e스포츠 관련 뉴스가 메인 뉴스에 튀어나올 정도이다. 그리고 대만 내부에서 롤 승부조작이 터졌을 때(2016년) '''또 몇 달 동안 이걸로 정치 패널들을 데려다 놓고 토론'''을 했다(...).
오토바이가 주 교통수단으로,[39] 대만에 살고 있는 현지인에 의하면 바깥에서 잠시 돌아다녔을 뿐인데 집에 돌아와서 세수를 해보니 시커먼 먼지가 많이 묻어 있었다고 한다. 때문에 길거리 주변을 걷다 보면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 심지어 배달 문화가 발달된 한국, 일본과는 달리 직접 오토바이를 타고 가서 사먹거나 포장해올 정도라고 한다.
의외로 한류의 원조격인 국가이기도 하다. 한국 가수 클론이 대만에서 크게 히트했다. 한국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대만 화교들은 한류를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핸드폰이나 MP3에 한국 노래를 넣고서 듣고 다닌다. 한국 연예인에 전혀 관심 없는 한국인도 이들과 같이 있으면 자연스레 알게 될 정도.
타이베이 시내를 걷다 보면 구룡성채 마냥 벽에 때가 덕지덕지 낀 건물이 굉장히 많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오래돼서 그런 것도 있지만 워낙 습기가 많고 더워서 페인트칠을 해도 얼마 안 가 다 벗겨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이건 태국 등 동남아 국가들과 오키나와현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만큼 덥기 때문에 어딜 가나 에어컨을 빵빵하게 놓는데 전기요금이 그리 비싸진 않기 때문에 24시간 틀어 놓아도 큰 부담은 없다고 한다.

12. 관련 항목



[1] 다만 본성인들의 토착문화에 한하자면 푸젠성과는 큰 차이점이 없다. 본성인들 대부분이 푸젠 성에서 온지 생각보다 오래 지나지 않았기(1600-1700년대) 때문이다.[2] 그래서 대만에 갔다온 사람들은 분위기가 일본과 비슷하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는데, 온천 지역에서는 대만자본으로 설립된 일본 료칸 컨셉 호텔이 인기를 끌기도 한다.[3] 취두부, 샤오롱바오, 샤런쇼마이, 마파두부, 유탸오, 우육면, 훠궈, 탕후루, 양꼬치 등 대만인들이 즐겨먹는 유명한 음식들 중 거의 대부분이 중화민국 국부천대시절 대만으로 건너온 외성인들이 전파한 것이었고 이것이 대만인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4] 예를 들어 국립고궁박물원, 중정기념당, 국부기념관, 국립역사박물관, 충렬사 같은 것들.[5] 한국에서는 홍대와 강남의 대만요리 전문점에서 판매한다.[6] 이 때문에 도시가스 회사 덩치가 인구에 비해 작은 편이다.[7] 대만에서는 '국어'라고 한다.[8] 음악적 성향은 일본 밴드와 비슷하다.[9] 트와이스쯔위는 엄연한 대만인이지만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으므로 논외.[10] 홍콩 출신이지만, 대만에서도 매우 큰 인기를 얻은 가수이므로 서술한다.[11] 쯔위 사태 이후 매국노로 단단히 낙인찍혔다.[12] 2인조 걸그룹으로, Alfa Music Entertainment에 소속되어있다. 좌측은 Dewi Chien(간정예)이고 우측은 Dabe Chen이다. Dewi Chien의 경우, 한국에서는 '대만 세 자매', '대만 현아 닮은 꼴' 등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나의 소녀시대라는 영화에도 출연(타오민민 역)하여 요즘은 국내에서도 Dewi Chien을 알게 된 사람이 많아졌다.[13] 한국인 멤버 송미진은 결혼해서 애까지 있다.[14] 이마저도 실력보다는 비주얼로 먹고산다는 평가가 많다.[15] 그런데도 '''한국만큼은 아니다.''' 일본 서브컬처 작품의 한국 정발은 굉장히 문턱이 낮아서, 오죽하면 일본에서도 한국에 수출하는 정도로는 세계 진출로 치지 않는 수준이다(...).[16] 아이자와 히카루라는 캐릭터다. 자세한 사항은 해당 항목 참조.[17] 다만 정치인이 젊은층 많이 모이는 동인 행사장에서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어릴적 즐겼다." 정도의 발언이 오타쿠 인증인지 표심을 확보하기 위한 것인지는 개인의 판단에 맡긴다. 일단 차이잉원은 실제로도 오타쿠임이 밝혀진 바 있다.[18] 특히 차이잉원 총통이 속한 민주진보당의 경우 다른국가에서 리버럴 계열로 분류될 만한 행보를 하며 젊은층의 지지율이 높기 때문에...[19] 한국어의 경우, 일본어와 어순의 차이가 거의 없기 때문에 접근성은 가장 높지만, 워낙 한자를 원형 자체로 읽을 일이 드물다 보니 한자를 따로 공부를 하지 않으면 실력이 늘기가 힘들다.[20] 사실 오락실 게임도 초창기에는 해적판이 대다수를 차지했기 때문에 공식수입이라고 하기에도 뭐했다.[21] 그렇지만 수입이 아주 안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고 당시에도 들어올 일본 만화는 들여오기는 했다. 주요 어린이 잡지에서도 일본 만화를 실었다거나 아니면 일본 만화를 표절한 만화가 수위 조절 과정을 통해서 출판되는 식이었다.[22] 특히 PC게임 유통사인 유한회사 지관은 이러한 대만제 IBM-PC게임을 주로 수입하였으며 한글화도 해서 대만 게임으로 꽤 재미를 봤었다.[23] 전함 모에화작품으로 함대 컬렉션보다 만화로 먼저 나왔으며 게임으로는 함대컬렉션, 전함소녀보다 늦게 서비스됐다. 국내에서는 밀리터리 모에화 게임으로는 강철의 왈츠, 소녀함대에 이여 3번째로 서비스를 시작했으며 전함모에화로는 2번째로 서비스 중이다. 2018년 12월 현재 중국, 본진인 대만 서버가 종료되고 국내 서버가 동년 8월 1일 종료되면서 완전히 게임이 종료되었다.[24] 양국이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중국-대만이나 남한-북한 같은 관계 속에서 쉽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런 관계 속에서 어느 한쪽은 반대쪽의 성향과 상반되는 방향으로 일부러라도 강하게 나아가는 경향을 보여서, 외부에서 보면 지나칠 정도로 비춰지는 일이 종종 있다. 대한민국에서 북한의 존재 때문에 한편으로 신자유주의를 지나칠 정도로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그 예이다.[25] 물론 2012년 강남스타일 이전에는 영미권에서는 마이너이기는 했다만 그럼에도 대만보다는 사정이 훨씬 나았다.[26] 애니메이션이 차지할 지분을 포대희가 먹고 있는 이유도 있다.[27] 트와이스의 멤버 쯔위가 K-POP 걸그룹이 되었다는 소식이 대만에 알려졌을 때의 반응이 '''우리가 능력만 있었다면 저런 애들이 외국으로 나갈 일은 없었을 텐데...'''였다. 여러 모로 씁쓸한 현실.[28] 홍콩에 있는 그 빈과일보가 맞다. 2003년 대만판 발행을 시작했다.[29] 국영방송이기는 했지만 운영형태는 민영방송에 가까운 방식으로 운영되었고, 방송국 설립 비용의 상당수를 금융회사나 일본 회사들로부터 끌여들였기 때문에 지분의 상당수를 금융회사나 일본 회사들이 차지하던 형태였다.[30] 中正은 장제스의 본명[31] 태국도 마찬가지로 국영방송국이 주류임에도 국영방송국들이 사실상의 상업방송국처럼 운영되고 있다.[32] 운영형태상으로는 민영방송이었다. 1980년대 당시 KBS와 MBC가 실질적인 운영형태는 국영방송이었음에도 공식적으로는 공영방송으로 운영되었던 것과 비슷하다.[33] 민간전민 텔레비전PTS의 방송이 시작된 것도 이 시기다.[34] 프랑스와 이탈리아, 서독 등에서 방송규제를 완화하면서 방송시장의 규모가 크게 성장했던 선례가 있지만 기존의 광고규제가 엄격한데다가(특히 광고를 하루에 몇십분 이내로 할 수 있다는 규정이 광고시장 성장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채널도 2-3개 정도였다보니까 광고가 얼마할 수 없어서인 점이 컸고, 대만과 같은 환경이라면 인구수가 일정수준되지 않는 이상 당연히 경쟁과다에 시달릴 수 밖에 없다.[35] 한국보다 20년이나 먼저 설립된 개신교 교단이다.[36] 우 링리, 크리스 베이츠, 정해영 옮김, 가지[37] 공무원의 관행 중 시보떡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38] 사실은 일부러 맞춘 거다. 장제스도 개신교 신자였다.[39] 심지어 오토바이 관련 문제를 다루는 정당인 중화민국 기차당이 있었을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