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비판
1. 텍스트 분량 조절 실패
가장 치명적인 문제인데, 권수가 늘어날 수록 점점 텍스트량이 폭증하는 문제로, 조선 후기부터는 아예 실록의 대화내용과 상소문 내용을 통자로 말주머니에 박아넣거나 수 페이지로 도배를 해놓은 부분이 심히 많아져 더 이상 만화라고 볼 수가 없는 지경이 되었다. 예송 논쟁으로 상소문이 난무하는 13권 효종,현종 편부터 기미가 보이더니, 17권 순조실록부터는 굉장히 심해졌다.
사실 학습만화를 만드는 저자의 역량을 재는 부분은, 많은 정보를 얼마나 독자들에게 알기 쉽고 간결하게 축약하여 전달하느냐는 것인데, 사실상 저자의 역량 미달로 가독성이 완전히 무너져 학습 만화로서의 기능에 실패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중대한 문제점이다.
때문에 도가 지나친 텍스트 통짜 때려박기 문제로 인해 독자층들이 대거 이탈하여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자체가 대중화되는데 큰 난관이 되었다. 물론 나무위키를 포함해 박시백의 작품에서 비롯된 내용과 정보가 인터넷에 상당히 퍼져있는 것을 볼 때 호사가들에게 있어 상당히 큰 도움이 된 작품이긴 하지만, 작품 자체가 엄청난 텍스트 분량으로 인해 학습만화라 하기엔 지나치게 소비층이 협소해져버렸다는 것.
오류가 많을지언정 어린 세대들까지도 아우르는 전달력과 가독성을 지닌 먼나라 이웃나라와 같은 다른 학습만화들에 비해 많이 부족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2. 옛 문체를 그대로 옮겨놓은 문장들
효종실록 이후부터 두드러지는 문제인데, 왕과 대신들의 당대 어투를 그대로 한글로 옮겨다놓은 까닭에 한자를 잘 모르는 독자들은 당최 알아먹을 수가 없는 문제가 크다.
현대적 문장으로 바꾸거나, 최소한 옆에 한자라도 병기해놔야 하는데 아무것도 해놓지 않았기에, 일반 대중이 보기엔 진입장벽이 존재한다.
대신 개정판에서는 아래에 뜻을 적어놓아서 조금 더 쉬워졌다. 그래도 어렵긴 마찬가지
3. 역사적 사실 전달 관련
박시백이 학자가 아니다보니 여러 가설을 적당히 선택해서 실었는데, 이 때문에 확실하게 입증되지 않은 학설을 그대로 실어놓은 것이나 고증오류도 꽤 존재한다.
3.1. 인물 관련
박시백은 참고문헌을 포함해서 인물을 평가한 다음에, 높이 평가하는 인물이 있으면 '''장점은 개인의 생각까지 포함해서 언급하고 단점은 싹 무시하는데''' 대표적으로 정도전, 조광조, 정광필, 이이 등이 있다. 반면 비판적으로 보는 경우에는 실록을 넘어서서 민담집까지 야사로 언급해서 비판했다. 읽다보면 작가의 호오가 분명히 드러나는데, 작가가 직접 자캐로 언급하기도 하고, 백성이나 관리 아무개들의 입을 빌려서 말하기도 한다. 이런 부분을 보면, 작가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사람과 사건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 배극렴이 개국 1등공신이 된 것을 두고 "마지막 순간까지 어느 편에도 끼지 않았던 원로" "중간파들의 협조를 이끌어내기 위함"이었다고 묘사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배극렴은 왜구퇴치 때부터 이성계를 따르고 위화도 회군을 같이 하였으며, 고려 멸망의 순간 왕대비에게 찾아가 공양왕을 폐할 것을 직접 요청한[1] 이성계 세력의 연륜있는 올드비 중 하나였다.
- 초기 태조실록, 정종실록에 변중량이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작가는 이 사람을 계산을 잘 하고 이리저리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붙는 정치철새의 원조라고 해석하였고 최후는 정도전에게 붙었다가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이방원에게 붙으려 하다가 끔살당하는 인물로 묘사한다. 그리고 개정판에서 이 부분이 후손들의 항의를 받아 수정되었다. 구체적으로는 몇몇 컷을 완전히 삭제하고, 작중 변중량의 캐릭터 디자인 자체를 바꾼다. 정확히는 변중량이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정몽주에게 알려주는 장면과[2] ,정도전에서 병권이 몰리는 것을 비판한 장면은 수정되었고, 제1차 왕자의 난에서 이방원에게 아부하다가 살해당하는 페이지인 165쪽 전체를 삭제했다. 그래서 2권 개정판은 개정 전판과 비교하여 165페이지부터 한 페이지씩 앞당겨져 있다. 특히 수정 이전 초판에 나온 변중량은 작가가 지조없음을 강조하려고 했는지 눈이 사시(斜視)로 표현되어 있었는데 개정된 이후 평범한 디자인으로 바뀌었다. 다만 박시백도 10권의 후기에서 변중량 묘사에 대한 논거를 실어두고 있는 등 확대해석은 삼갈 필요가 있으며 이후에는 이런 경우가 없었다. 그리고 사실 변중량에 대한 이 묘사는 1, 2권의 주요 참고문헌이었던 <정도전을 위한 변명>을 참고한 흔적이다. 정도전을 위한 변명에서도 변중량을 기회주의자로 묘사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실록을 따라간 이 책에서 태종 이방원 관련 묘사는 특히 실록이 조작되었을 가능성을 두고 작가의 사견이 많이 들어가는데, 이 책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작가가 변중량의 죽음 장면 전체를 삭제한 것은 기존 변중량의 죽음 장면이 실록을 따랐기 때문인데, 변중량의 후손이 승자인 이방원의 기록은 믿을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박시백은 같은 이유로 정도전의 죽음 장면을 믿을 수 없다고 처리했기 때문에, 변중량의 죽음 장면은 왜 정도전의 죽음 장면과 달리 실록을 따랐느냐는 변중량 후손들의 주장을 반박할 수 없었을 것이다.
- 문종이 본인의 사고방식이나 성격 때문만이 아니라 수양대군의 세력이 커서 쉽사리 건들지 못했다고 서술했는데 문종은 적장자+세자+대리청정으로 정통성을 중시 여기는 조선왕조에서 엄청난 힘과 권위를 갖고 있었다. 문종의 대리청정 기간은 재위 말기에 건강이 악화되었던 세종의 업무를 사실상 세자가 대신한 것으로서 상당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후의 조선왕조에 있어 세자의 대리청정 및 정치 참여의 중요한 전례가 되었다. 세조 역시 재위 말년에 세자 시절의 예종을 문종의 전례에 따라 조회에 참석하게 했으며, 숙종 역시 세자 시절의 경종의 대리청정에 있어서 많은 부분을 문종의 전례에 따르게 하였다. 따라서 문종은 당시의 수양대군이 감히 넘보거나 위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수양대군이 본격적으로 세력을 불릴 수 있었던 건 문종이 죽기 직전의 시기에서야 가능했다.
- 세조가 대군 시절 세종 앞에서 무용을 뽐낸 것을 보고 세종에게 세자 교체의 시그널을 보낸 것이라는 주장을 싣고 있는데, 위에도 언급했듯이 당시 세자의 권위는 절대적인 것이었으며 대군이 감히 넘볼 상대가 전혀 아니었으므로 이는 매우 무리한 추측이다. 수양대군의 이러한 퍼포먼스는 세종실록이 아닌 세조실록 총서에 실린 내용이므로 세조를 띄우기 위해 추후 삽입한 내용일 가능성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수양대군의 퍼포먼스는 오히려 세자 교체가 아니라 세자 이후를 염두에 둔 것일 수도 있다. 수양대군의 '쇼'는 1429년 (세종 11년)부터 계속 이어지는데, 당시는 왕위계승 서열의 절대적 1순위였던 세자가 병치레가 잦고 결혼 후 세자빈만 두번 바꾸고 후궁을 셋이나 (귄씨, 홍씨, 정씨)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낳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형이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뜨거나 혹은 후계자가 될 아들을 낳지 못한다면, 그 다음 왕위는 세자의 형제들에게 돌아갈 수 밖에 없고, 그 경우 세종의 둘째인 수양대군은 서열상 상당히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된다. 다만 형제계승의 경우 양녕대군-효령대군-충녕대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서열이 절대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수양대군 입장에서는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면서 세자의 후계자 자리를 노렸다고 보면 그 행적이 충분히 납득이 간다. 이러한 "쇼"는 1441년 세손(후일의 단종)이 태어나고 수양대군이 왕위계승 레이스에서 완전히 탈락한 이듬해(1442년)까지 이어지는데, 이후에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세손이 태어나고 유아기를 무사히 넘기면서 이런 방법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 남이를 태종의 4녀인 정선공주의 아들로 적었다. 하지만 정선공주는 남이의 모친이 아니라 조모다. 정선공주는 남이의 부친인 남빈과 결혼했고, 남빈이 홍여공의 딸과 결혼해서 낳은 아들이 남이이다. 다른 것을 떠나서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봐도, 남이가 질투한 구성군 이준은 세종의 아들인 임영대군의 아들인데, 남이가 태종의 외손자일 수가 없다.
- 세조의 후궁인 소용 박씨 덕중(德中)이 구성군에게 구애편지를 보냈다가 기겁한 구성군이 세조에게 보고하면서 들통난 사건이 있었다. 여기에 대해 박시백은 내시만 때려죽이고 넘어갔다고만 적었는데, 실제로는 이 일로 구성군에게 죄를 묻지는 않았지만 사실 내시들 뿐 아니라 소용 박씨 역시 죽임을 당한다. 정확히는 처음 편지를 보냈을 때는 방자(궁중에서 잔심부름 하는 궁녀)로 강등시켰다가, 그러고도 정신 못차리고 두번째로 편지를 보내자 결국 교수형에 처한다. 세조실록에는 "내녀(內女) 덕중(德中)을 내치어 밖에서 교형(絞刑)에 처하였다." "최호와 김중호(편지를 배달한 환관들)를 때려죽이고 나인도 또한 율(律)로 처단하였다."라고 분명히 나온다 (세조 37권, 11년(1465 을유 / 명 성화(成化) 1년) 9월 5일(기유) 2번째기사). 사실 왕조사회에서 임금의 후궁이 외간남자, 그것도 국왕의 조카한테 연애편지를 보낸 건 살기 싫다는 뜻이나 다름없는 행위다.
- 별로 비중있는 인물은 아니긴 하지만 인종, 명종실록 편에서 임꺽정을 다룰 때, 패두였던 이억근이 공명심에 소수 인원만 끌고갔다가 몰살당했다고 그렸다. 여기에 이억근의 대사도 "이 기회에 공을 세워서 출세해보자" 하는 식으로 적어서 더욱더 부정적인 캐릭터로 만들었다. 그러나 실제 명종실록을 보면 이억근은 실전경험이 풍부했던 포도관으로 애초에 무모한 작전에 반대했는데, 개성부 도사의 명령으로 어쩔수 없이 나섰던 것이었다.
- 이이의 초기 행적중 을사삭훈 관련해서 이준경과의 대립 배경도 완전히 잘못 읽었다. 박시백은 이준경이 스승 조광조가 기묘사화에서 위훈삭제를 내걸었다가 처형된 것을 이유로 조심한 것은 제대로 보았지만, 이이가 과격하게 나간 것이 '사림의 중흥과 함께 반대파가 이미 힘을 잃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았다. 하지만 정작 붕당 관련 인식을 보면, 반대세력이 이미 힘을 잃었기 때문에 그 이후 단계인 사림의 분열을 경계해야 한다는 인식을 한 것은 이준경이었고, 이이는 붕당은 존재하지 않고, 반대파가 남아있으니 붕당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라고 보았다. 이준경이 죽는 시점까지 이이의 생각은 붕당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었다.[4] 이 두가지 생각을 결합해 보면, 이이가 을사삭훈에 강경하게 나갈 것을 주장한 것은 반대파가 존재하지 않다고 봐서가 아니라, '일을 하려면 강경하게 나가야 한다'는 젊은 혈기나 마찬가지였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 이이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이 거의 없다. 붕당을 잘못 인식한 부분에 대한 언급도 없다. 무엇보다 이이의 경우는 상당부분의 지문에서 '이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율곡'이라는 호로 언급되는데, 이는 전형적인 높임표현중 하나이다. 바로 붙어있는 칸에서 앞에서는 율곡, 뒤 칸에서는 이이로 언급하는 사례도 있는 등 참고자료를 생각없이 옮겼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소제목에도 율곡이라고 언급하는 등(외로운 율곡) 사례가 너무 많다.
- 이이의 십만양병설에 대해서는 부실한 선조실록에 없고 선조수정실록에만 있다고 해서 사실이라고 단언할 수도 없지만 사실일 수도 있다고 언급한 반면, 임진왜란 직전 김성일의 발언과 류성룡의 언급에 대해서는 유성룡의 징비록에만 기록되어 있다는 이유로 유성룡의 변명이라는 생각을 그대로 기록했다. 이는 전혀 준비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맞게 된 임진왜란의 배경인 집권 동인의 문제이며, 그 배경이 유성룡과 김성일이라는 인식으로 나온 것이다. 이 때문에 서인이 집권한 시점에서 편찬된 선조수정실록에서 그대로 인용된 해당 내용을 무시한 것. 십만양병설을 바라보는 시각과 비교하면 상당히 일방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최명길이 후대 사대부들에게 비판당하고 과소평가되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후대 서인들은 최명길을 높이 평가했다. 다만 송시열은 최명길을 간신이라 깠다.
- 임경업을 다룬 내용도 문제가 있다. 임경업의 친명 성향이 상당히 숨겨졌고, 능력 있는 장수로만 묘사되었다. 병자호란 이후에 회군하던 청군을 공격했던 일은 언급도 되지 않았다. 임경업이 명에 망명하는 과정도 심기원 관련만 언급되어서 김자점과의 연결고리나 임경업의 가족이 명나라에 잡혀가는 과정이 생략 되었으며, 이 때문에 임경업 부인의 명나라 충신 운운도 언급 자체가 안된다. 임경업의 명나라 시기 활동도 문제인데, 작중에서는 북경이 함락된 다음에 임경업이 청의 귀순권고를 받아들인 것처럼 묘사되었지만, 실제로는 활약은 전혀 없었지만 꽤 오래 버티다다가, 청에 항복한 이전 명나라 장수와 병사들에 의해서 포로로 잡혔다. 귀순권고에서 살려주겠다고 해서 임경업이 살았던 것처럼 작중에서 처리되었지만, 실제로는 예친왕 도르곤이 섭정왕에 오르면서 대사면령을 내려서 죽음만 면하고 감옥에 있었다. 임경업의 죽음 관련해서도 정명수와의 대립 관계만 중시해서 언급했는데, 임경업의 문제는 하나 둘이 아니었고, 임경업이 죽어줘야 했던 이들도 정명수 뿐만이 아니었다. 임경업이 장살당하는 장면에서 불똥이 자기에게 튀는 것을 막기위해서 김자점이 죽였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언급되는데, 임경업과 김자점의 이전 연결고리가 전혀 언급되지 않아서 뜬금없어 보인다. 이는 같은 소단락에서 다룬 것처럼 정명수와 임경업을 대비시키기 위해서였는데, 현실적으로 조선이라는 나라의 입장에서만 보면 정명수나 임경업이나 결국 조선이라는 나라를 버리고 각각 청과 명이라는 또 다른 국가를 위해서 활동하려고 했던 거기서 거기인 인물이다. 마지막으로 임경업이 죽으면서 했다는 "조정에서는 이미 천하의 일이 안정되었다고 생각하는가. 오늘 나를 죽인다면 반드시 후회가 있을 것이다."라는 말도 언급이 없는데, 저 이야기는 민담이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에서 사관이 직접 언급한 내용이다. 저 말의 비현실성은 임경업 문서에서 다루고 있지만, 실록에 명백하게 기록된 죽으면서 한 말은 기록하지 않은 것은 임경업이 심기원의 옥사로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만 강조하기 위한 표현 방법이다. 저 이야기를 언급하면 임경업과 정명수를 대비시키는 구도가 흐트러지기 때문이다.
- 남인의 영수였던 허적에 대해 처신의 달인이나, 재상으로 특출한 자질은 없었고, 대동법도 시종일관 반대했다고 평가했는데, 정작 허적은 이시방과 함께 김육이 대동법의 실무를 맡긴 관료들 중 하나였다. 특히 호서대동법의 실행은 허적이 직접 담당했다.[5]
-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재건과 당백전 유통의 문제점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경복궁 재건과 당백전의 유통은 조선 경제에 매우 안 좋은 영향을 끼쳐 조선 조정은 강화도 군영의 운영비까지 까먹어야 할 정도로 재정이 파탄났다. 물론 이런 게 없었다 해도 이때까지 조선의 상황이 영 좋지 못했기 때문에 이 정도로 깔 순 없다고 변호하고 있는데, 흥선대원군이나, 당백전 문서 등에서 알 수 있지만 저건 조선의 현재 정도가 아니라 미래를 없앤 행동이었다. 아주 간단하게 말하자면 짐바브웨의 무가베가 한 짓을 흥선대원군이 했다고 보면 좋다.
- 지방 관직을 맏는 수령에 대해서, 수령에 대한 특징과 문제점을 논하지만, 1862년에 전국적으로 일어난 임술농민봉기이거나,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의 주범인 백낙신과 조병갑에 대해서는 장황하게 서술하고 있고, 정작 이들보다 학정을 일으키고, 백성들을 수탈한 민영휘와 조병식의 탐학에 대해서는 언급을 거의 안하고 장면조차도 안 나온다.[6] 그나마 민영익이 알렌에게 치료해준 보답으로 10만냥을 준 것이나[7] 세입대비로도 엄청난 부정부패를 저지른 민씨 척족 일원을 넣는 등 일단 나온것만 해도 얼마나 많이 해먹었는지 대충 짐작케 해주긴 한다.
3.2. 전쟁사 관련 내용 비판
- 10권 선조편의 경우 실록이 부실하여[8] 나머지 징비록이나 현대 사학자들의 연구를 많이 참조했는데 임진왜란 부분 만큼은 시리즈 중 가장 참신함이 없는 것을 넘어 잘못된 통설을 그대로 실어놓거나 무리에 가까운 해석을 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조선이 전쟁 대비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라고 서술한 것이나, 명나라 군대가 아무 것도 안하는 민폐 군대로 묘사되고 작전권 헌납 때문에 전황은 개판이 되었다고 묘사한 것. 일단 당시 조선의 '전쟁 대비'라는 것을 살펴보면 축성 및 성곽 수리 등을 포함하여 '좀 더 큰 규모의 왜구가 쳐들어올 것'을 상정했다는 냄새가 강하다. 즉, 임진왜란 같은 대대적인 전면전에 대해서 대비를 못했을 뿐[9] 왜구의 공격자체는 인식하고 시행된 나름대로의 노력을 묘사하지 않았다.[10] 작가의 현대정치관을 선조실록을 통해 독자들에게 피력하기 위한 의도로 보이는데, 정치관 전달의 도구로서 선조실록을 이용하다 보니 지나치게 당대 역사적 내용이 왜곡되어버린 케이스다. 이는 인조실록에서도 똑같이 반복된다.
- 명나라군 관련해서는 분명 약탈이나 민폐가 심각하긴 했지만 평양성 전투나 직산 전투 등 제대로 싸운 전투도 존재하며 존재 자체가 왜군에 상당한 부담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명군이 벽제관에서 패배한 이후로 겁쟁이 기질과 남의 나라 싸움이란 이유로 싸우지 않았다고 구차한 핑계를 대었다고 주장했으나 명이 벽제관 전투에서 잃은 병력만 4천이 넘고 이후 명군은 조선의 풍토병으로 보유한 말의 절반에 해당하는 1만 2천필의 군마를 잃는데 이여송이 지휘하던 북병의 주력이 기병이란 걸 생각하면 기갑사단의 전차와 장갑차들이 반이나 날아간 상황이다. 애초에 명군이 도움이 안된 민폐군대라는 주장 자체가 과거에 막장화가 되기 전인 역갤에서나 하던 주장으로 작가의 민족주의, 반미 정치성향과 비전문성을 드러낸 대목이라 하겠다.
- 조선시대사를 다루며 작전권 헌납이니 하는 말을 꺼내면서 조선군이 유명무실해졌다고 언급하는 것 자체가 현재 한국군의 전시 작전권이 미군에게 있음을 비판하기 위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11] 작전권 드립은 훗날 20권에서 공주 전투의 일본군 장교가 한 번 더 한다. 전작권 떡밥의 실상을 감안하면 작가의 이해도가 얄팍하단 말밖엔 달리 할 말이 없다. 명군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싶었다면 상술한 각종 대민범죄나 명군 보급 문제로 조선이 엄청나게 고생한 걸 조명했어야 했다. 더하여 중국을 공략하겠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망상을 정말 실현가능한 것인냥 서술했다.[12] 그러나 도요토미가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자 옆에서 디스하는 말풍선이 하나 나오기는 한다.
- 안위의 부산왜영 방화건이 부하들의 허위보고를 이순신이 그대로 믿고 장계를 썼다 파직의 빌미를 제공했다고 하거나 이순신이 부산으로 출진하라는 조정의 명을 거역하여 백의종군했다고 적었다. 이순신은 원균처럼 부산을 털어버릴수 있다는 헛소리를 안했을 뿐이지 어찌되었든 왕명에 따라 부산으로 출동해서 작전을 진행하고 돌아왔으며, 안위의 부산왜영 방화건은 실록에서 선조 본인이 이순신이 안위와 김난서의 공을 가로챘다고 억지를 부리는 대목이 있어 실제 있었던 일임을 증명된다.
- 숙종 시절 북한산성 축성 문제에 대해서도 축성 반대파 쪽의 의견에 공감대를 보이고 있는데 북한산의 지리적 위치상 옛날부터 축성하자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요충지였던 점을 생각해보면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 고종실록 편에선 고종이 3만명의 근대적 군대를 양성하자 일본 육군은 백만이 넘어간다는 소릴 했는데 20세기 초 일본은 근대화가 막 시작된 국가에 불과했으므로 청일전쟁 시기에 전군이 12만이었고 청일전쟁 종결 후에야 30만 명 정도의 병력을 유지하게 된다. 당대 일본은 유럽처럼 수백만 대군을 필요하면 징집영장 뿌려서 모으고, 기차로 운반해서 총기와 수백발의 실탄. 각종 전쟁 물자를 보급할 정도로 강한 나라가 아니었다. 징병제를 실시했음에도 여러 한계로 인해서 징병 대상자 중에서 2만명 정도만 훈련을 시키던 게 메이지 초창기의 일본이었다. 백만 단위의 병력을 운용한건 30년대도 넘어간 중일전쟁 시대고 그나마도 무리하고 갑작스러운 병력 확장으로 일본 스스로도 큰 난항과 고통을 받았다. 중일전쟁 발발 이전까지 일본군은 소수정예 위주의 병력만 유지한다는 방침을 유지하여 육해군을 합쳐 전군이 30만 정도였다. 10대 1의 숫적, 질적으로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태라는 건 변함없지만 오류의 범위가 너무 크다.
4. 정치색
작품 초반에는 내용 중간중간에 정치인에 빗댄 이야기나 현대사에 관련한 비유가 꽤 많이 나왔었다. 애초에 박시백은 대학시절에 학생운동을 한데다가[13]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그리기전에 한겨레 신문에서 시사만평을 연재했었다. 그래서 정치색이 강한 부분이나 좌파 운동권 시각에 입각한 역사 해석도 종종 볼 수 있다. 과거 김대중 시절의 만평을 보면, 아무리 미선이 효순이 사건과 이라크 전쟁의 세계적 반미기류를 감안하더라도 작가의 반미감정이 심각한 수준에 있음을 알 수 있다(특히 주한미군). 그래서 정치 성향이 보수적이거나 중도인 독자들은 이 점에 대해 비판을 많이 가하거나 거부감을 드러내는 편.
주로 만화를 그리는 도중 발생한 이슈나 유사한 근현대사 사건들을 내용에 넣었는데. 반정이나 외침시에 특히 많다. 1권에서는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장세동, 김종필, 고건이 등장했고 2권 중간엔 김종필, 장세동, 고건으로 "2인자의 처신"을 설명했으며, 후기에서는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3권에서는 조지 W. 부시가 등장해 조명관계에 빗대 당시 한미관계를 깠다.
2권에서 사병혁파와 관련해서 "이쯤되면 막 하자는 거지요?"를, 3권에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발언하여 큰 논란이 된 "대통령 노릇 못해먹겠다."의 패러디인 "왕 노릇 못해먹겠다."를 태종의 입을 빌어서 시전하였으며[14] 5권에서는 다시 전두환이, 그리고 후기에서 박정희가 등장한다. 같은 책에서 세조실록의 계유정난 부분에선 아예 대놓고 12.12 쿠데타와 연관시키기도 했으며, 세조실록을 5.18 민주화운동 이후의 신문에 비유하기도 했다.[15]
조선왕조실록에 대해서도 자신의 취향에 맞는 부분은 취하면서, 그 외 부분에 대한 비판은 작가의 개입이 유난히 많다. 이런 부분은 세조실록이 가장 심하고 그 다음이 태종 실록이다. 세조실록 마지막 작가의 말에는 '''성공한 쿠데타'''의 주역이라면 4명의 그림이 있는데, 태종, 세조, 박정희, 전두환이다. 조선시대의 명백한 성공한 쿠데타인 중종반정과 인조반정의 두 주역들은 언급도 없다.[16] 정작 중종실록에서는 기묘사화를 설명하는 챕터에 훈구 대신들이 은밀히 중종을 알현하러 들어간 신무문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곳에 12.12 쿠데타의 주역들이 모인 30경비단이 있었음을 짤막하게 언급했다[17] . 이 때문에 정치색에 대한 지적이 꾸준히 이어졌고 작가도 지적을 받아들여 7권 이후로는 본편에선 잘 드러나지 않는다. 예외가 10권, 12권인데. 10권에서는 선조가 도피한 것에 대해 한국전쟁때 이승만이 부산으로 피난 간 것에 간접적으로 비유했으며[18] , 인조의 경우 이명박 정부에 비유하는 장면이 꽤 나왔다. (애초에 1~4권의 경우 처음에는 학생 타겟으로 다소 패러디를 강화해 구성했었다.) 17권에선 홍경래의 난 이후 사로잡은 봉기군 처형을 당시 시끄러웠던 구제역 살처분에 빗대어 인간 살처분이라고 한탄하는 돼지의 모습을 그려넣었고 순조가 뜻밖에 수천의 백성을 죽인 학살자가 되었다고 하는 장면에서 전두환이 또다시 등장하여 순조에게 "선배님"이라고 하고 순조는 경악하여 절규한다.[19]
6권 예종, 성종 실록에선 경국대전이 조선에서 얼마나 중요한 법전으로 대우받았는지에 대해 설명하면서 막판에 헌법재판관 한명이 그러니 관습헌법으로 존중해줘야지 않을까요?라고 한마디 하는 장면을 넣었는데 당시 논란이 되었던 서울시가 관습헌법으로 한국의 수도이므로 수도 이전은 위헌이라는 판결이 나온 것을 비꼰 것이다.
인조실록 뒷부분에는 명나라, 청나라, 인조, 서인, 북인 등과, 미국, 중국, 한국, 북한, 여 야당, 촛불(?) 등을 써놓고 서로 비슷한걸 선으로 연결하는 코너가 마련되어 말이 많았다. 다만 '없으면 말고!'라는 꼭지를 달기는 했는데, 보수나 중도 성향 독자들이 거부반응을 많이 보인 대목.
'이여절의 나라'의 편에선 당대 최악의 탐관오리인 그의 얼굴을 이명박 대통령을 본따서 그런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기도 하였다.
작품 초반에는 실존 정치인의 얼굴을 모델로 그린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서 고려 말의 권신인 이인임의 얼굴은 김종필 전 총리를, 세종 때의 재상 허조의 얼굴은 조순형 전 민주당 대표의 얼굴을 대놓고 넣었다. 공양왕은 최규하 대통령과 엮여 나왔다. 다만 여기서는 공양왕은 무기력한 최규하와는 달랐다고 칭찬했다. 정작 최규하는 신군부의 협박 속에서도 국방부장관 없이는 정승화 체포를 재가할 수 없다고 버텨 신군부가 국방부장관을 찾느라 시간을 소비했고 결국 재가 후에도 재가한 시간을 밝혀 선체포 후재가였음을 확인할 수 있게 했으므로 마냥 무기력했던 것은 아니다. 세조의 경우에는 전두환과 치환해서 등장했다.
5. 세계사 오류
어차피 조선왕조실록을 다루는 것이니 만큼 외국 역사에까지 충실한 고증을 바라긴 어려워도 아쉬운 점이 여럿 있다.
5권에서 수양대군이 속으로 자신이 존경하는 인물로 한무제와 당태종을 꼽으면서 "두 분 모두 난세에 몸을 일으켜 천하를 차지한 분들"이라고 언급하는데, 당태종은 확실히 맞는 말이지만 한무제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20] 그나마 한무제 비슷한 시기의 당태종과 비슷한 인물이라면 한문제가 더 적합하다. 또한 뒤이어 당태종에 대해 소개하면서 "그의 인망과 위세를 우려한 첫째 태자가 셋째[21] 와 손잡고 그를 제거하려 했다. 이를 미리 간파한 이세민은 선수를 쳐서..."라고 적고 있는데, 이건성과 이원길이 먼저 이세민을 제거하려 했다는 건 어디까지나 역사의 승자인 당태종 쪽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인데 이걸 마치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적고 있다.[22] 이걸 그대로 믿는다면 안평대군이 김종서, 황보인과 손잡고 수양대군을 제거하고 단종을 쫓아내려 했기에 수양대군이 어쩔 수 없이 계유정난을 일으켰다는 단종실록의 기록도 그대로 믿어야 할 것이다.[23]
10권에서 한줌의 만주족이 명나라를 정복한 사례를 들며[24]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를 정복하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았을 것이란 주장을 하고 있으나 어불성설이다. 당시 명나라는 엄청난 강국이였으며 화약무기의 수와 질에 있어서는 당대 최강국 중 하나였다. 청나라는 산해관을 넘기 위해 갖가지 노력으로 홍이포를 비롯한 대포를 손에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삼계가 스스로 성문을 열기 전까지는 자력으로 산해관을 넘지도 못했다. 중일전쟁이나 이라크전쟁의 예시만 봐도 적국의 군사력을 파괴하는 것과 적국을 정복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임을 알 수 있다.
12권에선 숭정제가 홍타이지의 모함에 원숭환을 죽였다는 설을 여과없이 실었다. 같은 권에서 청이 이자성의 반란군을 패퇴시키고 중국을 접수하자 전 왕조보다 유연한 정책으로 민심을 얻었다 정도로 서술하는데 변발에 반발한 강남의 한족 반란에 대학살로 대응한 내용은 다 빠졌다. '광주시종교지' '양주십일기' 등의 기록에 따르면 성(省) 하나에서만 수십만명이 죽은 경우가 부지기수이며, 대학살의 피해자 수는 '''최소 수백만에서 최대 수천만 단위'''로 추정된다. 자세한 사항은 링크 참조. 전반적으로 시리즈의 논조가 청나라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이라, 정복왕조로서의 면모와 청조가 저지른 대량학살 등은 거의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
16권에선 건륭제 60년을 태평성대라고 기술했는데 사실 강희제, 옹정제 등 3대에 걸친 전성기 이후 건륭제 후반부터는 청이 슬슬 쇠퇴하기 시작하던 시대로 평가되고 있다. 한편 바스티유 감옥 습격으로 대표되는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을 설명하는 그림으로는 무려 40년 후의 1830년 7월 혁명을 그린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그림을 썼으나 개정판에서 바스티유 감옥 습격 그림으로 바꾸었다.
18권에서 1,2차 아편전쟁을 간단하게 다루는데, 영국군을 남색 군복을 입은 남북전쟁 시기 미군 비슷하게 그렸다. 그러나 이 시기는 영국군이 아직 레드코트를 입던 시절이다.
6. 정치사 관련
머리말에서부터 '정치사를 위주로 하여...'라고 해 두었는데 그 말대로 정치사를 제외한 사상사, 경제사와의 연계가 부족하여 왕권과 신권 사이, 또는 신하와 신하 사이의 권력 투쟁사에 다소 편중된 듯하다는 지적이 있다. 그래서 15세기까지의 묘사는 세종 시대 때의 각종 과학 기술이나 음악, 언어 등의 문화발전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북방이나 각종 지방에 있었던 백성들의 이야기에 내용 등 내용이 대서사적이어서 큰 흐름이 느껴지고 읽는 재미가 있으나, 16세기 이후로는 정치 이외의 분야나 지방에 대한 내용이 줄어들고, 궁중 내에서의 정치를 중심으로 한 신하들의 상소문, 그에 대한 임금의 비답이 나열되는 듯한 다소 평면적인 묘사가 눈에 띄게 늘어난다. 숙종조부터 영조조까지의 서술이 독자에 따라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에 기인한 것. 저자 역시 이에 대한 비판에 대해 '실록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고 싶었다'고 해명하면서도 어느 정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다만 역사적 배경을 본다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16세기 양란 후 조선에서는 성리학 교조주의가 나타나면서 자연 다른 학문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고, 이와 관련한 정치적 문제가 등장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16세기 이전에는 지방에 기거하는 사림의 영수가 중심이었으나, 16세기 이후에는 한양을 중심으로 한 정치가 펼쳐졌었다. 이 때의 지방은 거의 찬밥신세나 다를 바 없었는데, 당시 지방 출신은 과거 시험을 봐도 합격하기 힘들었을 뿐더러, 합격을 해도 한양에서 벼슬한 예가 거의 없었다.[25] 이러한 점에서 실록은 정치사를 중심으로 서술될 수밖에 없었던 면이 있다. 그리고 박시백은 17세기의 각종 지방의 여러 사건들에 대한 내용도 서술한 바 있다.
6.1. 정치사상사와 경제사
조선조의 국시였던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처지는 부분들이 존재한다. 고려 말 사원, 권문세족들과 관련된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이 성리학으로 설정된 이유가 분명치 않아 조선의 국시가 성리학이 된 사실에 대해 설명이 부족하다. 정치사와 사상사의 구분이 명확지 않아 성리학이 실현하려고 했던 노력은 가려지고 정치사는 권력투쟁으로 전락해 버렸다. '권력은 원래 부모 자식 간에도 공유하지 못하는 것', '권력의 생리가 본래 이렇다'는 식의 상투적인 결론이 종종 보인다. 또한 조선 시대에 행해졌던 각종 개혁 조치(대동법, 균역법, 서얼허통 등)들이 어떤 정치 철학에 의해 시행되었는지가 명확히 나와 있지 않은데 이 역시 철학적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대부를 권리 무한 책임 제로의 희대의 안하무인 뻔뻔 집단으로 폄하하는데[26] 이것 때문에 역덕 커뮤니티에선 말이 많다. 군사회 지도층을 확보하기 어려웠던 당시 상황으로서 나랏일을 배우고 이끄는 학생이나 관리의 신분으로 군역을 면제받는 것은 충분히 납득 가능한 수준이었다.[27] 그리고 군대만 안갔다 뿐이지 양반층에게도 엄연히 과세 책임이 있었고, 적어도 세습 신분으로 변질되기 전의 양반들은 전세와 제일 무거운 세금인 공납 역시 정상적으로 납부했는데[28] 돈 한푼 안내고 마음대로 행패부리는 농땡이 집단처럼 묘사하였으며, 성종 정도를 제외하면 조선 왕조 500년 내내 백성이 살기 어려웠던 것마냥 서술했다. 심지어 세종 시대마저도! 수령고소금지법을 바탕으로 태평성대는 양반들 한정이었다는 구절을 넣었다. 그런데 정작 그 수령고소금지법을 폐지한 것은 세조의 행적인데, 이것도 세조시대를 다루면서 언급하지만, 이러면 태평성대가 백성들에게 펼쳐진다고 보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위에 언급된 성종 시기에 수령고소금지법이 부활한다. 또한 조선조 내내 백성이 진짜 잘 먹고 잘 산 시기는 아니었다. 기근 한번 휘몰아치면 3천명이 굶어죽는게 통상적인 수준 하지만 이는 동서양 막론하고 어디서나 백성들 삶은 곤궁했고 현재도 그런 사람도 많다. 오히려 조선 초기는 조선 특유의 비현실적으로 낮은 조세와 정부시스템이 그래도 돌아가던 시기라서 국가의 국력과 민간의 생활 양자 모두를 충족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이다.
조선의 세율은 박시백이 고평가한 정도전에 의해서 상당히 저평가 되었고, 이게 어떻게든 굴러갈 수 있게 이리저리 손을 본 것이 조선 초기의 세제와 관료수급제도의 개혁 내용이다. 이것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 성종 때까지이고, 이것이 완전히 파행으로 돌아가는 것이 임진왜란으로 국토가 초토화된 조선중기 이후인데, 해당 시기를 기준으로 봐도 평균적인 조선 백성의 삶은 일본과 비교하면 훨씬 나았다. 물론 나았다는 것도 아사자가 나오는 시기가 있으며, 그 위험을 관리하기 어려운 것은 신분사회의 한계로 봄이 옳겠지만. 그리고 세종때의 곤궁함도 '사대외교와 사민정책'을 주 원인으로 지목했다. 사대외교 부분도 사대와 자주를 대립관계로 보는 기존의 통념을 그대로 가져왔다. 그러나 조선 전기만 해도 그래도 사대부 집단은 건전했으며, 최소한 사대외교가 진짜로 사대주의로 가는 것은 사림이 중앙정계를 장악하게 되는 시기 이후, 본격적으로는 임진왜란 이후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박시백도 2권에서 밝힌 바 있고 자성사대 부분도 세종의 '나라와 백성의 운명을 가지고 도박을 할 수는 없는 노릇'[29] 이라고 속으로 한탄하는 부분을 넣어 꼭 좋아서 하는 것만은 아닌 것으로 나오게 햇다.
위 비판의 연장선으로, 조선왕조실록이 단순히 정치사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사상이나 경제, 문화 등 다방면의 자료를 다량으로 담고 있음에도 불구, 작가가 주로 정치사에 천착한 나머지 나머지 부분을 다루는 데는 소홀했다는 일부 사학자의 비판이 제기된 바 있다. 특히 조선 중심 이데올로기인 성리학 쪽 분야와 관련해서 내용의 부실함에 아쉬움을 면키 어렵다며 관점 또한 기존 역사학계 주장 답습에 불과하다고 날선 비판을 가한 오항녕 전주대 교수가 대표적.
7. 사회 과학에 대한 이해부족
작가는 국가의 토대가 되는 국가 경제(산업) 형태와 체제 형태와의 밀접한 관련성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작품 전반에서 반복되는 작가의 세계관은 일종의 정신론적인 사고에 기인하고 있는데, 이는 주로 '''과학적 사고가 결여된''' 구세대의 사고적 한계이기도 하다.
즉 역사를 '사회 과학의 역사'로 보지 않고, '민중사'와 같은 비 과학적이고 협소한 사관이 책 전반에 지배적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조선왕조가 서구문명권에서 발현된 '근대화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것을 중화문명권의 경제 정치구조의 한계가 아닌, 자꾸 조선 선비들의 편협한 가치관의 한계에서 찾으려고 한다.
즉 정신론의 문제로 문명발전사를 재단하려 하는 것인데, 산업혁명 자체가 천년 전국시대였던 유럽의 지리적, 역사적 특수성, 그리고 그 결과물인 유럽의 식민지 경영(특히 영국의 삼각무역)이라는 환경적 특수성, 또한 산업혁명을 뒷받침하는 여러 혁명(가격혁명, 정치혁명, 과학혁명 등)이 낳은 우연의 결과물이라는 걸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 못하는 듯하다. 홍경래의 난이나, 정조의 개혁군주적 면모나, 허균의 역심 등을 평가하는 대목에서 자꾸 근대적 가치인 '근대화를 이루려 했는가'라는 어불성설의 논리가 개입되는 건 이 때문이다. 물론 작가는 부정하긴 했으나 그런 논리(자본주의 맹아론) 자체가 등판하는 것이 작가의 수준을 의심케 만드는 심각한 문제라는 것. 즉 작품 자체의 취지는 좋았으며 대중사회에 순기능을 끼친것도 사실이지만, 작가의 사회과학, 경상계열 계통 학문에 대한 이해도가 많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8. 극심한 민중사관
조선의 지배계급을 비난하기 위해, 청조와 일본의 지배계급들을 은근슬쩍 멋있고 쿨한 캐릭터들에, 그들의 유능함을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서술하고, 조선의 지배계급은 한없이 무능하고 백성들을 무한겁 착취만 거듭하는 인간말종식으로 표현해놓은 서술이 많다.
만평가 출신답게 자국 정치인만 까는데 특화된 서술관이 강해서, 당시 국제정세나 조선의 국력수준을 지나치게 왜곡해서 생각하고 있다.
특히 임진왜란과 명청교체기때 상황에서 두드러지는데, 임진왜란때 일본군이 얼마나 강한 군대인지 주로 언급하고, 왜 일본군이 해전은 물론 육군까지 점차적으로 조선,명 연합군에 밀려났는지는 부실하게 서술한다. 봉건군대의 연합체로서의 일본군의 한계와, 중앙집권제의 조선,명의 군사행정적 우월성과 압도적인 병력동원력에 대한 서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로부터 받은것이 없음에도 국란에는 떨쳐 일어나는 특이한 DNA를 가진 백성들이 의병이 되어 일본군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라는 식의 70년대식 구닥다리 민중사관적 서술만 나온다. 해당 내용이 노골적으로 나오는 컷
의병이 주로 자기동네에서 일어난 향토군에 가까운 성격이라는 전근대적 배경을 이해못하고 '민족주의'의 맹아라도 있는 마냥 서술하고 있는건, 작가가 현실사회를 토대로 그 시대를 무리하게 분석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전형적인 아마추어적인 오류이며, 시스템과 관련된 사회과학적인 세부적 부분을 아예 모르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또한 후금을 초창기부터 명과 대등하게 힘겨루기를 하는 초강대국인냥 서술해놨다.
사실 명나라의 이자성의 난, 조선의 이괄의 난이 없었으면, 후금은 산해관은 커녕 조선 국경을 넘는것도 불가능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약소한 수준이었으며, 누르하치보다 강성한 세력이었던 여러 만주의 패자들을 사냥해온 조선의 국방력을 임란과 이괄의 난으로 북방군이 붕괴된 이후 허접한 상황만 강조하면서 아주 형편없는 약소국이라는 식으로 폄하하고 있다.
조선이 명청 초강대국 사이에 끼어서 고통받는 구도로 스토리를 짠것은, 작가가 인조실록 말미에 그린 '비슷한것끼리 연결하시오' 보너스란에서 그 이유가 비춰지는데, 작가의 평소 정치관을 비추어 볼 때, '''명나라=미국, 청나라=중국, 노무현&김대중=광해군, 이명박=인조'''라는 정치적 주장을 독자들에게 피력하기 위한 방향성으로 인조실록을 잡았음을 추론하게 된다.
작가의 서술은 일관되게 '''무능한 정권''', '''유능한 인민'''을 강조하고 있으며, 정권이 망쳐놓은 나라를 인민들이 일으킨다라는 식의 70년대 대학가를 지배하던 민중사관에 심하게 물들어있기에, 자꾸 '''우리민족은 반만년동안 짓밟힌 약소민족'''이란 자학사관에 가까운 행태로 독자의 피해망상을 마구 부추기는 구닥다리 사관을 고수하는 모습이 보인다. 특히 조선의 임란&이괄의 난 연타로 북방군이 붕괴된 이후 허접한 상황을 조선사 전체로 테라포밍하여 강조하면서 아주 형편없는 약소국이라는 식으로 폄하하고 있다.
문제는 이게 일본 우익들이 주장하는 '자학사관'과 다른 차원의 문제인데, 일본식 자학사관은 2차대전의 만행을 덮으려는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나, 한국식 자학사관은 거꾸로 국민들의 피해망상을 마구 부추겨 점점 사회를 배타적, 폐쇄적, 파쇼국가로 몰고 가는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나치의 역사교과서에 독일민족이 분열되어 착취당하고, 30년전쟁때 주변 강국들에게 얼마나 심하게 짓밟혔는지 자학사관을 교육해 학생들의 피해의식을 마구 부추겨 죄의식을 마비시킨 것을 생각해보면 의미심장한 부분.
민중사관이 주로 구소련권 국가들에서 번성했던 역사관이었음을 볼 때, 작가가 구세대 좌파인 것을 염두해보면 그 역시 비슷한 연령대의 운동권 좌파들과 마찬가지로, 추구하는 방향성은 '인권'이 토대가 되는 서구권식 좌파라기 보단, '우리민족끼리'와 같은 전체주의가 기반이 되는 동구권식 좌파에 가깝다 보여진다.[30]
9. 기타
엄밀히 말해 비판이나 오류까지는 아니지만, 1권에서 티베트 불교를 잘못된 명칭인 '라마교'라고 부른다. 그냥 명칭이 잘못되었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림에서 승려와 신도들이 옷을 벗고 있거나[31] 원나라 황제가 '라마교'에 빠졌다는 등 괴상망측한 사이비 종교로 표현된다. 현대엔 라마교란 명칭도 잘 안 쓰이고 서양인들이 티벳 불교에 빠질 정도로 티베트 불교의 이미지가 좋아진 편이라 라마교가 티베트 불교를 말하는 것인 줄 몰랐다는 독자도 있을 정도. 1권 자체가 고려 사회나 불교를 비판하는 내용이긴 했다. 고려 대승불교는 그간 요나라와 교류하다가 원나라 이후 티베트 불교와의 교류가 많았으며, 달라이 라마 덕에 미화된 현재와 달리 그 당시 티베트 불교는 엄연히 "부패한 종교"가 맞았다. 사실 토번이 망한 이유 중 하나가 종교계의 부패였다.
[1] 시중(侍中) 배극렴(裵克廉) 등이 왕대비(王大妃)에게 아뢰었다. “지금 왕이 혼암(昏暗)하여 임금의 도리를 이미 잃고 인심도 이미 떠나갔으므로, 사직(社稷)과 백성의 주재자(主宰者)가 될 수 없으니 이를 폐하기를 청합니다.” - 태조 1권, 1년(1392 임신 / 명 홍무(洪武) 25년) 7월 17일(병신) 1번째기사[2] 출세를 위해 정몽주 파에 붙었던 게 아니라 그의 스승인 정몽주의 안위를 걱정했다는 것으로 바뀌었다. [3] 물론 조광조가 벌인 언행은 그대로 기록해서 속고내를 잡는데 반대한 일이라든가 소격서 폐지를 주장할 때 세종, 성종이 소격서를 폐지하지 않은 건 잘못이었다고 말하는 부분 등을 넣기는 했지만 특별히 강조는 하지 않고 그저 언급만 했다.[4] 만화에서도 이준경이 사망하며 남긴 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들 중 이이가 "사람이 죽을 때면 선해진다고 했는데 이준경은 악하구나" 라며 이준경의 붕당 경계를 언짢게 여기는 장면이 나온다.[5] 허적이 대동법에 반대한 것은 사실이다. 다만 조정에서 결국 대동법을 하기로 결정하고 그 시행을 허적에게 맡기자 매우 잘했다(...).[6] 그나마 조병식같은 경우는 방곡령을 실시한 경력이 있기에 변호가 가능하지만,(이마저도 사실 자기가 빼돌릴 것마저 일본으로 넘어갈까봐 그런 것이다.) 민영휘는...[7] 이 장면에서 알렌이 깜짝 놀랐다며 서울에서 유동자산 3천냥만 있어도 부자로 통한다는데 10만냥이나! 라고 하는데 결국 이 말은 부자 기준의 300배 이상의 돈을 줬다는 건데 현대로 치면 2020년 기준으로 현금으로 15억 이상을 가지고 있으면 부자라고 평가받는데 그 300배 이상 즉 4500억 이상을 그것도 가지고 있는게 아니라 준거다! 사례금으로 준 액수가 이정도라면 가진 재산은 그보다 더하다는 얘기고 애초에 사례비로 수천억원을 내줬다는 것부터가 엄청난 돈지랄이다.[8] 이유는 임진왜란때 전쟁 이전의 사초가 대거 소실되었기 때문.[9] 당시 조선의 상황에선 그렇게 생각하는게 당연하기도 했고. 오히려 당시의 지방 양반들과 백성들이 전쟁을 대비하는데 불평하는 기록도 있었다.[10] 이후 18권 '사대부의 조선 500년' 파트에서도 이러한 묘사는 일체 반영되지 않았다.[11] 저자의 정치성향을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12] 몽골과 팔기군에게 중국이 망했으니 일본군도 중국 침공했으면 해볼만했다고 적었는데 우선 팔기군은 끝내 산해관을 뚫지 못하고 이자성의 난으로 사분오열된 중국이 자진해서 열어준 산해관으로 무혈입성했다. 나중에 태세 정비하고 달려든 조선군에게도 고전한 일본군이 명을 친다? 다른 거 다 차치하더라도 그 엄청난 보급선을 어떻게 감당한다는 걸까?[13] 보통 수준이 아니라 강성 운동권 출신 인사다. 감옥에 간 적도 있을 정도. 문제는 감옥에 가게 한 사건인데 다름 아닌 1988년의 '''광주 미 문화원 폭탄 설치 사건'''이었다. 참고로 이 사건 주동자는 안내상, 배우 박철민과 박시백은 동조자였다.[14] 좌파 운동권에서는 보수 성향 정치인이나 언론이 흔히 '좌파'라고 부르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시선이 좋지만은 않다. 노무현을 비난하는데 종종 쓰인 "좌측 깜빡이 키고 우회전한다"는 표현이 바로 좌파 운동권에서 나온 비판이다.[15] 이건 2가지로 문제가 되는데, 첫번째는 계유정난에 나쁜 시각을 가진 이들에게 12.12를 비판하는 효과가 나오고, 두번째는 12.12에 나쁜 인식을 가진 이들에게 계유정난을 같은 취급하게 만드는 효과가 나온다. 세대별이나, 교육과정, 정치적 시각별로 봤을 때, 둘 중 하나라도 비판적으로 평가할 이들은 거의 전국민에 가깝다. [16] 허나 사실 중종은 주역은 커녕 그냥 옹립된거고 인조는 중종보다는 주역에 가깝지만 태종, 세조처럼 강력한 존재감은 없다. 인조실록 파트에서도 인조는 태종, 세조처럼 쿠데타의 주역이지만 그들만큼 강한 힘을 쥘 수 없었다며 태종의 입을 빌려 우리는 쿠데타의 사령관이지만 너는 그냥 주역 중 하나였을 뿐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훗날의 박정희, 전두환의 쿠데타 후 위상을 보면 이 둘은 인조보다는 태종, 세조와 가깝다.[17] 이건 기묘사화에서 중종의 역할을 최규하급으로 격하시킨 묘사다.[18] 6.25 전쟁의 전개 과정을 보면 이승만이 다리 끊고 달아났다는 통념과는 달리 제대로 된 피란계획이고 뭐고 잡혀 있지 않다가 서울 함락 직전에야 겨우 빠져나가는 등 아주 개판이고 한강 인도교 폭파 과정조차 혼란과 명령 전달 미진이 겹친 막장 상태였다.[19] 실제로는 정주성에서 벌어진 학살은 계획적인 학살이라기보다는 해당 부대가 민간인을 상대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부대인데다가 설상가상으로 지휘부까지 학살을 말리지 않는 막장 상황이라 벌어진 일이다. 임술농민봉기의 사례에서 보듯 원래는 대충 주모자들 목을 자른 후 가담자들은 노비로 삼아버린다든가 하는 식으로 처리되었을 것이다.[20] 다만 한무제의 경우도 황제가 되기까지 어머니 왕 미인과 장모 장공주의 뒷공작이 있었다.[21] 책에는 셋째라고 적혀 있지만 사실 셋째 이현패는 일찍 죽었고 현무문의 난 때 이세민이 죽인 동생 이원길은 당고조 이연의 넷째이다.[22] 오히려 태자 이건성은 이원길이나 측근 위징이 계속해서 이세민을 제거할 것을 주장해도 이를 거부하였다고 한다. 본인이 아버지 당고조의 신임을 받고 있었고 군공(軍功)을 계속 세우면서 능력 또한 인정받고 있었던 만큼 이세민의 측근들을 외직으로 쫓아내서 무력화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긴 듯. 그러나...[23] 그런데 사실여부를 떠나서 수양대군이 속으로 생각한 것이기 때문에 수양대군이 그렇게 믿는 걸로 나온 걸 수도 있다.[24] 엄밀히 말하자면, 명나라는 만주족에 의해 망한 것이 아니다. 명나라는 정덕제부터 시작되는 4대 암군 시기, 특히 만력제 때 나라의 시스템이 거의 마비되고, 임진왜란을 포함한 만력3정과 무덤공사로 인해 국고가 텅텅 비게 되는 것을 시작으로 기존에 곪아있던 사회적 모순이 내부에서 터진 이자성의 난으로 인해 터지면서 스스로 무너졌을 뿐이다.[25] 일례로 홍경래의 난의 주도자인 홍경래도 한양에서 과거시험에서 한양 고위직의 자제들 위주로 합격하는 행태에 대해 분노했었고, 이에 대한 불만을 격문을 통해 비판했었다.[26] 이러한 평가는 18권 '사대부의 조선 500년' 파트에서도 마찬가지로 달라지지 않았다.[27] 요즘이야 배우는 사람이 많지만 그 당시 배울대로 배울 재력이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그들을 군에 징집하는것보다는 차라리 열심히 배우게 해 국가의 관리로 등용하는게 더 이득이었을 것이다. 물론 조선 후기로는 서원의 폐단으로 연결되는 점이 있긴 하지만...[28] 이는 한번 언급된 적이 있다.[29] 조선 세종의 재위기는 영락제, 선덕제, 정통제의 재위기간이 겹치는데 선덕제, 정통제는 별달리 원정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영락제는 조선이 개기면 밟아버릴 수도 있었다. 심지어 영락제 재위기간중에 대월을 멸망시키기도 했고[30] 이는 이른바 뉴라이트 사관을 배격하는 인물 중 하나인 김기협에게서도 드러나는 부분이다.[31] 바싹 마른 승려가 이상한 표정과 자세를 하고 옆에 신도들이 옷을 벗고 있는 등 그림만 대충 보면 완전히 사이비 종교다. 아무래도 방중술에 대한 비판을 하려고 한 듯 보이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