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거세당하다
1. 소개 및 출간 배경
본서는 '''여성이 가진 삶의 에너지가 어떻게 부정되고 억압되는지를 '거세' 라는 표현으로 정리하면서, 이 에너지를 다시 발산할 것을 촉구하는 책'''으로, 그 자체로 페미니즘의 제2물결을 상징한다고 알려져 있는 고전이다. 서구 페미니즘의 역사에서 몇 권의 책을 꼽아야 할 때 꽤 자주 언급되곤 하는 유명한 책으로, 처음에는 영국 여성들을 위해 쓰여졌지만 출간 1년 만에 8개 언어로 번역될 만큼 많은 인기를 끌었다. 물론 저자가 "전복적이길 바란다" 고 말했을 만큼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책이기도 하다. 저자 그리어의 전기 작가 크리스틴 월리스(C.Wallace)는[1] 이 책을 읽으려는 아내들과 말리려는 남편들 사이에 많은 다툼이 일어났다고 말한 바 있다. 여러 서평을 보면 공공장소에서 대놓고 읽을 만한 책이 아님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제목도 그렇거니와, 특히 표지에서부터 빨갛게 도색(?)되어 있는데다 여성의 신체부위들을 그림으로 그려놓은 국내 번역서는 더하다(…)."부디 이 책이 전복적이길 바란다. 이 책이 공동체와 연계된 모든 분야에 불을 지피길 바란다... ''(중략)'' ...이 책이 조롱이나 비방을 당하지 않는다면 목적을 제대로 달성하지 못한 것이다. 가장 성공적인 여성 기식자(寄食者)들이 이 책에 불쾌함을 느끼지 않는다면 재미없는 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일반 여성이 용인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조금이라도 자존심이 있는 여성에게는 참을 수 없는 것이다.'''"
- pp.24, 25 (일부 구문은 나무위키에서 자체 강조)
본서가 집중적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는 단어를 하나만 꼽자면 '''에너지''', 특히 "여성이 갖고 있는 삶의 에너지"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서는 결혼, 사랑, 가족에 대한 정상성(normativity)에 이의를 제기하며, 이 정상성에 개인을 끼워맞추려는 노력들이 여성의 에너지를 억압한다고 설명한다. 일견 '클래식' 해 보이는 메시지일 수도 있겠지만, 루이즈 터커(L.Tucker)는 이 책의 메시지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Wollstonecraft), 제인 오스틴(J.Austin), 버지니아 울프(V.Wolf), 시몬 드 보부아르(S.de Beauvoir)의 계보를 잇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무튼 본서는 여성들로 하여금 이 '에너지' 를 자연스럽게 발산할 수 있도록 각성시키는 것이 바로 여성해방, 즉 페미니즘이라고 제안한다. 물론, 1960년대 후반에 페미니즘이 강하게 탄력을 받던 시대상을 배경으로 쓰여진 만큼, 저자는 페미니즘에 대한 희망과 낙관을 드러낸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많은 논객들과 사상들에 대해 비판적 수용을 하고 있으며, 특히 마르크스주의의 계급투쟁 노선에 대해서는 상당히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원서의 제목인 "거세당한 여성" 이 의미하는 바는 본서의 84페이지에서 드러난다. 저자에 따르면, '''모든 욕망을 어린 시절부터 부정하도록 배움으로써 일체의 호기심과 욕망이 무력감에 의해 압도당하는 상태'''를 거세당한 상태라고 이야기한다. 즉, 여성들이 자신의 인간성,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성적인 것을 포함한) 모든 자연스러운 욕망들을 드러내는 것이 스스로에 의해, 사회에 의해 허용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거세당한 여성은 단순히 아름다운 굴곡과 실루엣만을 갖고 있는, 그저 무기력하고 만족스러운 모습밖에 유지할 줄 모르는 인형에 불과하게 된다. 1960년대 영국 사회에서 여성들은 이처럼 인간이라기보다는 인형에 가까운 존재처럼 양육되고 있었다. 그래서 저자는 "나는 여장 배우가 되길 거부한다. 나는 여자이지 거세당한 사람이 아니다"(p.76)라고 외친다.
본서는 1970년에 쓰여졌지만, 여기저기 시대를 앞서 읽어내고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을 드러내 보여서 "이게 정말 그 시절에 나온 책이라고?"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예컨대, 미래에는 근대적 핵가족이 붕괴되고 점차 새로운 유형의 가족형태가 나타날 것이라고 전망했으며, 실제로 현대에는 맞벌이, 동거, 별거, 졸혼, 편부모가정, 조손가정 등이 점점 증가하는 추세이다. 또한, 미래에는 단순한 수직적 사고는 앞으로 컴퓨터에게 위임되고 여성적 창의성과 직관이 가치 있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으며(p.135) 50년이 지난 현재에도 이는 유효한 제안이다.[2] 더불어, 강간 및 성폭력 문제를 의제화시킨 수전 브라운밀러(S.Brownmiller)의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Against Our Will)보다 5년 앞서서 강간을 여성신체에 대한 혐오의 사례로 끌어오기도 했다. 단, 하술될 우정민(2012)의 서평에서 지적하듯, 본서는 여성 대상 폭력 문제를 중산층 여성들의 삶의 불만족보다 경시했다는 한계를 보여 비판 받기도 한다.
저자에 대해 소개하자면, 속칭 "20세기 말의 가장 중요한 페미니스트" 라고도 불리는 저메인 그리어(G.Greer)는 호주 멜버른 태생이며 영국에서 활동한 영문학자이자 평론가, 작가이다. 대부분의 중요한 활동들은 다 영국에서 했고, 본서 역시 예상 독자층은 영국 여성들을 타깃으로 하고 있다. 그리어는 셰익스피어의 초기 희극에 등장하는 사랑과 결혼에 대해 논하여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았고,[3] 새파란 20대에 쓴 첫 작품이자 최대의 대표작이 바로 본서일 정도로 인문학 분야에서 일찌감치 두각을 드러낸 수재다. 당시 영문학계에는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들 사이에서 키 크고 늘씬한 아가씨가 혼자서 목이 터져라 열변을 토하곤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데 그녀가 바로 그리어. 페미니스트로서는 아이러니하지만, 그리어는 신체적 외모가 뛰어나다는 이유로 유독 더 많은 인기와 주목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어는 그런 첫인상과 달리 입만 벌리면 적나라하게 "젖가슴", "보지", "생리", "오르가즘" 같은 단어들을 마구 쏘아대는 통에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했다고 한다. 그런 꾸밈없는 직설화법으로 주장하는 대부분의 내용은 브래지어가 여성억압의 상징이라는 것이었으며, 나중에 뉴질랜드에서 강연할 때에는 "bullshit" 이라고 말했다는 이유로 체포된 적도 있다고(…). 하여간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페미니즘의 제2물결 당시에 주목을 받았던 영문학자이자 사회운동가였다. 그리어의 활동의 지향은 기계적인 남녀동권적 평등이 아닌, 여성이 스스로를 정의하고 스스로의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하술되듯이 TERF 성향을 보여서 트랜스젠더 진영에게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
본서의 후속 저서로서 그리어는 《완전한 여성》(The Whole Woman)을 다시 썼으나 본서만큼 유명해지지는 못했다. 그 외에도 저자는 《Sex and Destiny》, 《The Change》, 《Shakespeare's Wife》, 《White Beech》 를 출간하기도 했다.
2000년 4월 23일에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악성 그리어 팬으로 보이는 한 여대생이 착란적인 편지 공세와 스토킹 끝에 주거침입까지 저질렀고, "엄마"(Mummy)라고 외치며 그리어를 묶어 놓고는 온 집을 어질러 놓는 기행을 벌이기도 했다. 나중에 체포된 가해자는 정신과 치료를 선고받았으며 그리어는 "나는 괜찮으며 피해자가 아니다" 라고 태연하게 대답했다고. #The Telegraph
2. 목차 및 주요 내용
- 요약
- 1장: 몸
- 성
- 뼈
- 굴곡
- 털
- 섹스
- 사악한 자궁
- 2장: 영혼
- 전형
- 에너지
- 아기
- 소녀
- 사춘기
- 심리학의 사기
- 원료
- 여성의 힘
- 일
- 3장: 사랑
- 이상
- 이타주의
- 이기주의
- 집착
- 로맨스
- 남성의 환상의 대상
- 사랑과 결혼에 대한 중산층의 신화
- 가족
- 안정
- 4장: 미움
- 증오와 혐오감
- 욕
- 비참함
- 분노
- 반란
- 5장: 혁명
책의 전체 내용을 세줄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여성의 몸은 남성들에 의해 정의되고 설명되어 왔으며, 여성이 자신의 섹슈얼리티에 대해 말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다.
- 여성들은 어릴 때부터 에너지를 억압하도록 사회화됨으로써 여성의 열위를 더욱 공고화하고, 거짓 안정을 갈망하는 왜곡된 사랑의 이미지로 고통 받는다.
- 여성으로서의 삶의 비참함을 덜어 줄 반란의 길은 여성의 해방에 있으며, 억압 구조에 대해 즐겁게 파업함으로써 자신의 에너지를 발산해야 한다.
2.1. 챕터별 내용 정리
각 챕터의 내용들을 각각 세 문장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책에서 전반적으로 논의하고자 하는 내용들은 몇 종류로 추려서 하단에 다시 챕터의 순서와 무관하게 소개할 것이다. 먼저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는 여성이 직접 정의하고 가치를 매겨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을 정리한다. 다음으로, 여성들이 사회화를 거치면서 어떻게 자신의 에너지를 부정하고 억압하는지를 살펴본다. 그 다음에는 사랑과 결혼에 대해 저자가 갖고 있는 비판적 태도를 검토한다. 또한, 저자가 소위 '심리학' 이라고 부르는 정신분석 치료에 대한 부정적 태도에 대해 잠깐 언급할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다양한 주제들에 대해 저자가 어떤 관점을 갖고 있는지 본서를 기준으로 요약한다.
- 1. 몸
- 2. 영혼
- 3. 사랑
- 4. 미움
- 5. 혁명
2.2. 여성이 느끼는 여성의 몸
그리어는 여성이 자신의 몸을 사랑할 것을 강조하는 많은 페미니스트 중 하나지만, "자신의 생리혈을 맛보라" 고 권고하는 것으로는 아마 유일할 것이다.[4] 그리어는 여성이 바라보는 자신들의 몸의 굴곡, 자궁, 생리, 섹스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리어는 또한, 여성들이 그런 주제를 입에 올릴 때에도 행여나 누가 볼까 입을 가린 채 속닥거리거나, 괜히 에둘러 말하는 등의 경향을 보이는 것에 대해서도 비판했다."인간의 몸은 각자에게 맞는 최적의 몸무게와 몸매가 있다. 이것은 건강과 효율성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여성의 몸을 기능이 아닌 미적인 대상으로만 간주하면 몸과 그 몸의 주인을 왜곡시키게 된다. 억지로 강요된 굴곡은, 풍만한 젖가슴이 만들어내는 굽이치는 아라베스크 문양이건 아르누보의 가는 철사 같은 날씬함이건, 역동적이고 독립적인 몸을 왜곡하고 여성적인 것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것이다."
- p.43
먼저 그리어가 말하는 것은, '''남녀 간의 성적 이형성'''이 우리가 배워 온 것만큼 극단적으로 다르지 않으며, 상당 부분은 '''문화에 의해서 과장되고 왜곡된 차이'''라는 것이다.[5] 저자에 따르면, 실제로 염색체, 호르몬, 태내기 발달에 있어서 생물학적인 차이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 중 어떤 것도 문화가 가르치는 것만큼 '결정적' 이거나 '단순한' 방식으로 성별 분화에 관여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유사점을 찾아야 한다면 꽤 많이 찾아진다고 말한다. 생물학적 특성들이 반영될 것이라고 흔히 믿어지는 뼈와 신체 굴곡, 체모 역시 남녀는 의외로 꽤 비슷한 편이다.[6] 예컨대, 팔뚝에 털 많은 여성, 잘록하지 않은 허리를 지닌 여성은 흔한 남성들의 생각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여성들은 알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자꾸 인형처럼 박제된 여성의 몸을 원하기에, 여성들은 지금도 겨드랑이 털을 밀고, 땀 냄새와 입 냄새와 심지어는 질 냄새까지 없애려 고생하고 있다.
그리어는 여성의 자궁과 생리에 대해서 남성들이 자꾸 "귀한 것, 신성한 것, 보호해야 할 것" 으로 취급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음험한 것, 혐오스러운 것, 불가해한 것" 으로 취급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말한다. 하지만 여성들이 당사자로서 느끼는 생리는 그렇게 귀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혐오스러운 것도 아니라는 것. 저자는 여성들에게 있어서 자궁은 마치 사악한 타자와도 같고, 생리란 처음 사춘기에 진입할 때에는 더없이 당혹스러운 현상인데다 나이가 들어서도 "차라리 없이 살고 싶은 것"(p.64)일 뿐이라고 말한다. 바로 이 점에서 그리어는 생리휴가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인물이다. 그리어는 생리가 여성을 미치게 만든다는 식의 주장이 안티페미니즘 진영에서 즐겨 활용되는 논리로, 생리 때문에 업무를 감당하지 못하는 무능한 여성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생리 따위에 구애 받지 않는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여긴다.
그런데 이쯤에서 의문이 생길 수 있다. 현대 한국사회에서는 초경에 대해서 축하하고, 남성의 첫 몽정에 대해서는 숨겨야 할 것으로 치부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리어가 강조하는 것은, 초경을 겪은 소녀에게 생리를 신성하고 거룩한 타자의 작용으로 재정의하여 교육하는 경향은, 여성들이 생리에 대해 갖는 걱정이나 불안을 해소하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여성들이 생리통을 느끼는 스스로의 몸을 부자연적이라며 비난하게 만들 뿐이다. 이 논리를 염두에 둔 상태로, 이제 다시 몽정으로 되돌아가 보자. 만약 몽정에 대해서도 남학생들이 여학생들만큼 "자신의 몸이 타자화되는"[7] 공포를 갖도록 교육받는다고 한다면, 아마도 그때서야 우리는 남성들의 공포를 유발하지만 도움을 받지 못하는 몽정에 대해서도 같은 논리가 적용된다는 확신을 갖고서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저자는 p.103에서 소년들은 단지 성적 환상에 대한 개인적 죄책감만 경험한다면, 소녀들은 신체적 변화에 대해 '''사회가 자신의 몸에 부여한 고결함을 자신이 저버렸다는 죄책감'''을 경험한다는 차이가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결국 문제는 사회가 어떻게 '교육하는가' 에 달렸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여성들의 성생활에 대해서도 그리어는 솔직하게 말한다. 현대에는 여성의 성기가 남녀 모두에게 비천한 취급을 받고, 심지어 욕설의 주 소재로도 쓰이지만, 전근대 문학작품이나 사료들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차이가 있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오늘날의 여성들은 자신의 다리 사이에 관심을 갖는 것 자체가 혐오스러운 것이라고 배웠고 (그러면서도 섹스 때에는 남편을 위해 당연히 오르가즘에 도달할 줄 알아야 한다) 여성의 성기는 작으면 작을수록 환영받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면서도 남성의 페니스는 가능한 한 커야 한다) 이게 전근대 시절만 해도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 저자가 확인한 민속 문학들에서는, 여성의 질을 못 상자(pin-box)라는 애칭으로 부르거나 비너스의 사원이라고 긍정했고, 기승위로 남편을 보내버리는(…) 아낙네들의 절륜함에 대한 자부심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특히 이 당시 여성들은 자신들의 질에 대해 수동적으로 삽입을 기다리는 기관이 아니라 "말하고, 끌어안고, 팽팽하고, 힘차게" 반응하는, 주체적이고 섹스를 갈망하며 민감한 기관으로 묘사했다고.
이와 관련하여 60년대 말에 논쟁이 되었던 것은 '''질 오르가즘이냐 음핵 오르가즘이냐'''의 여부였다. 당시 페미니스트들은 페니스의 질내삽입이 오르가즘의 유일한 수단이라고 믿는 것이 남성우월적 사회로부터 세뇌된 결과라고 이해했고, 그 대안으로서 음핵의 자극을 강조했다. 정치적 레즈비언들과 분리주의자들은 여성끼리 서로의 음핵을 대등하게 자극해 주는 섹스를 통해서 진정한 여성해방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움직임은 Masters & Johnson(1966)의 《Human Sexual Response》 로부터 기원하는데,[8] 뒤늦게 앤 코에트(A.Koedt)라는 페미니스트가 이를 바탕으로 《The Myth of Vaginal Orgasm》 라는 책을 써서 난리가 났던 것이다. 코에트는 페니스의 질내삽입이 여성에게는 어떤 쾌감도 주지 못하지만 남성에게만 쾌감을 줄 수 있는, 불평등하기 짝이 없는 섹스 방식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서 저자는 전면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지만, '''질 오르가즘을 과소평가하기엔 논리에 허점이 많다'''고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심지어는 "질의 오르가즘에 대한 환상을 버리는 것이 궁극적으로 도움이 되지만, 클리토리스의 일시적인 흥분으로 진정한 만족을 대신하는 것은 섹스에 재앙이 될 수 있다"(p.51)고도 했다. 또한 낸시 만(N.Mann)의 비판 논문을 인용하면서, 오르가즘은 어떤 기관을 어떻게 자극할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섹스에 임하는 마음가짐이 잘못되었는지 아닌지, 섹스의 여러 특성들에 흥미를 느낄 수 있는지 없는지에 더 크게 좌우된다고 논박했다. 저자가 생각하는 오늘날의 섹스 양식의 문제는, 현대 사회에서 정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성적 스크립트(sexual script)[9] 가 '''지나치게 무미건조하고 기계적'''이라는 것이다. 남녀 간에는 서로의 성적 욕망에 대해 자유롭게 소통해야 하며, 이것이 부재하는 섹스는 일견 여체를 끌어안고 있더라도, 실상은 존엄한 인간이 아닌 일개 신체 기관의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혼자만의 자위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성적인 주제에 대해서 남녀 간에 대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여성들끼리도 자꾸 "나 그날이야...", "우리 여자들은 한 달에 한 번씩 마법에 걸리잖아" 같은 식으로 에둘러 말하는 것에 대해서도 그리어는 단호하게 반대한다. 현대에도 간혹 페미니스트들이 "왜 소중이라고 해? 그냥 보지(cunt)라고 해! 왜 보지를 보지라고 떳떳하게 말 못 해? 그것도 억압이야!" 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그리어를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성적인 이야기를 해도 괜찮다는 얘기가 아니다. 이들의 맥락은, 숨어서 섹슈얼리티를 소곤거리는 분위기가 아니라, (최소한 같은 여성끼리라도) 터놓고 직설적으로 말했을 때 그것이 '''긍정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자는 것에 가깝다.
2.3. 여성의 사회화: 거세되는 과정
일찍이 시몬 드 보부아르가 자신의 저서 《제2의 성》 에서 "여자는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다" 라고 말함으로써 젠더라는 개념을 공론화시켰듯이, 저자 역시 남녀가 사회적으로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사회화를 거쳐서 인위적으로 남성성과 여성성이 만들어진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보부아르와 다른 점이라면, 이 책에서는 구체적으로 '''"거세의 과정"''' 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즉, 사회화를 통해 사회적 여성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자신이 갖고 있던 역동적이고 발산적인 에너지를 숨기고 억누르게 되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반면, 남성들의 사회화에서는 에너지의 억압이 나타나지 않는다.
일단 여기서는 논의의 편의를 위해서 "딸이 있다면 어떻게 키울 것인가" 에 주안점을 두어서 그리어의 이야기를 되짚어 보기로 하자. 목표는 젠더 평등한 양육을 통해서 딸이 불행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제2의 성》 의 2부를 함께 병행하여 읽어보는 것도 본서를 이해하는 데에 상당히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딸이 태어났다. '''영아기 시절''', 어떻게 키우는 것이 좋을까? 그리어는 사회가 소년들과 소녀들을 아주 어린 나이부터 구분하여 교육하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소녀들은 주변 어른들로부터 (무)의식적으로 '''귀여움과 애교, 내숭'''에 대해 칭찬을 받으며, 이를 통해 점차 여성적 행동거지를 강화한다. 또한, 소년들에게는 골목대장이 되어 온 동네를 쏘다니는 것도 허용하지만, '''소녀들에게는 "바깥은 무섭단다" 를 힘주어 교육시킨다.''' 그 결과 소녀들은 집 안에서 내내 인형놀이를 하거나 몽상을 하며 지내고, 정신적인 모든 활동이 결여된 가사노동만을 기계적으로 도우며 실내에 고립된다. 소년들이 골목에서 자기들끼리 편을 갈라 전쟁놀이를 하는 동안 집단적 협동과 경쟁에 대해 사회화되는 것과는 극명한 차이다.
이쯤에서 그리어는 어머니들의 과잉보호에 대해 질문한다. "세상의 무서움을 힘주어 말하면서 바깥을 조심하라고 교육하면, 정말로 유괴나 성폭행을 막을 수 있는가?" 과잉보호된 소녀들은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밖에 나섰다가 위험에 처했을 때, 자신이 어떤 위험에 처했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모르고, 도리어 자신이 어머니의 주의를 어겼다는 공연한 죄책감에 빠진다는 것. 그런 위험에 대해서는 오히려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니는 말괄량이 유형의 소녀들이 더 침착하게 대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정에서는 늘 무의미한 위협과 경고만 과포화되고 있다는 게 문제. 반대로, 어린 딸이 집 밖에서 주체적, 자율적, 적극적인 정보획득 능력을 활용함으로써 '''호기심과 열정의 에너지를 마음껏 발산'''하도록 키우는 것이 더 낫다는 게 저자의 제안이다.
이제 그 딸이 학교에 입학했다. '''소녀 시절''', 어떻게 키우는 것이 좋을까? 그리어는 이 시기에 많은 소녀들이 사회화에 저항하며, 사회는 이들을 "말괄량이" 라는 호칭으로 따로 분류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학교는 오히려 말괄량이들에게 유리한 면이 있다. 왜냐하면 집에서는 여성스러울수록 유리한 반면 말괄량이들은 부모의 탄식을 듣지만, 학교에서는 말괄량이들이 운동회나 체육, 반별 행사, 친구들 사이의 인기에 있어 유리한 반면 여성스러운 소녀들은 친구들의 질투와 시기를 얻게 되기 때문이라고.[10] 이때의 여학생들의 에너지는 '''극단적인 열정과 열렬한 애정표현'''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사회는 어린 소녀가 그런 애정표현을 하는 것을 몹시 거북해하고 금기시하며, 학교는 이를 제재하기도 한다.[11] 이런 사회적 거부반응에 대해 소녀들은 '''격렬한 저항'''을 하는데, 사회는 이에 대해 "사춘기 왔나 보네" 하면서 단순하게 치부하지만, 사실 이는 자신의 에너지와 자아를 유지하려는 소녀들의 "마지막 발악"(p.98)임을 유념해야 한다고 한다.
이제 이 딸은 '''2차 성징'''이 도래하여, 자신의 몸이 이상하게 변화하는 것을 느낀다. 여기에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저자에 따르면, 소년들과는 달리, 소녀들의 사춘기는 신체의 변화에 적응하는 것 이상으로 그 변화를 죄악시하고 억압하고 아무 일도 없는 척해야 하는 과정이다. 즉 여성들은 사춘기 시절을 '''불안과 공포의 기간이자 자기처벌적 시기로 기억한다.''' 이런 여성화의 목적은 여성들이 성적 대상으로서의 시장 가치를 최대화하는 것이지만, 그 결과 자신들의 가치가 최저로 떨어지는 아이러니가 발생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청소년기에는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소녀일수록 착취적인 소년들에게 더 함부로 섹스를 허용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이처럼 성적인 변화의 과정 속에서 여성들은 '''아무것도 알아서는 안 되고 설령 알더라도 모르는 척하는 것이 상책'''임을 교육받게 된다는 게 그리어의 생각이다. 예컨대 소녀들은 생리나 출산에 대해 갖고 있는 상당한 공포가 있는데,[12] 사회는 이런 공포가 있는지조차 모르고,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것. 그러나 대조적으로, 남성들의 발기부전에 대한 공포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남근숭배적" 이라 할 만한 엄청난 관심과 걱정을 쏟는다는 것이다. 청소년들에게 허용되는 지식의 종류에서도 차이는 나타난다. 남학생들은 성욕과 오르가즘을 생식보다 먼저 접하지만, 여학생들은 임신과 출산 위주로 접하면서도 오르가즘에 대해서는 입도 열지 못하도록 교육된다. 그리고 그 사회는 그렇게 배워 온 여성들이 훗날 첫날밤을 치를 때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오르가즘에 당연히 도달할 것을 기대한다는 것.[13] 이렇게 정신적으로 한계지어지고 억압되는 사회화는, 도리어 충실히 사회화된 여성일수록 여성의 천성적, 생득적, 본질적, 내재적 결함을 입증하는 사례로 남게 한다. 여성들을 일체의 정신적이고 사회적인 활동으로부터 고립시킨 뒤, 여성들이 이를 받아들여서 '거세' 되자, 그런 정신적이고 사회적인 열위를 두고는 "거 봐, 여자들은 남자보다 열등하다니까?" 라고 평가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회화는 딸이 장성하여 사회생활에 참여하게 되더라도 계속된다. 그리어는 성인이 된 여성이 결혼하지 않고 직업활동을 할 경우, '''가족들이 심한 성화와 간섭, 오지랖을 부리면서 그 여성을 힘들게 한다'''고 비판한다. 그나마 그 직업이라는 것도 사실 별 것 없었다. 60년대 영국 사회에서 여성이 취업할 수 있는 직종이라곤 대부분 하잘것없는 것들로, 남성중심-여성주변적 형태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 그나마 볼 수 있는 비서, 간호사, 여배우, 심지어 바니걸(…) 등 여초 현상이 나타나는 직군에서도 형편없는 근로와 고된 업무로 인해 여성들의 불만족이 컸다. 저자에 따르면, 동료 여성들에게 차마 바니걸이 되라고 제안하진 못하겠으니(…) 차라리 자기처럼 대학원에 진학해서 교수를 노리는 게 그나마 낫다고 한다. 마릴린 먼로처럼 섹스 심볼 노릇을 하며 돈을 벌면 그나마 자신이 갖고 있는 유능하고 지적인 면모도 전부 가려져 버릴 거라고.
2.4. 사랑과 결혼: 낭만적 환상을 버려라
저메인 그리어가 특히 비판적인 것이 바로 사랑과 결혼, 가족에 대한 전통적(혹은 근대적) 관점이다. 물론 페미니스트로 자인하는 사람 치고 이런 주제에 대해 혹독하게 비판하지 않는 사람은 없지만, 그리어는 그 중에서도 사랑에 대해서 상당히 '상식을 깨는' 방향에서 접근하는 흥미로운 성향을 보이고 있다.
이쯤에서 잠깐 생각해 보자. 혹시 사랑을 묘사할 때 흔히 나오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 나, "사랑은 받기보다는 베푸는 것", "사랑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도 더 주지 못해 미안해하는 것" 과 같은 표현들에 대해 공감하는지? 그렇다면 그리어의 생각을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어는 '''사랑은 숭고한 이타적 희생이라는 미사여구 자체가 사랑에 대한 왜곡'''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물론 저자가 사랑은 이기적 이해타산에 불과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저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랑은 에이브러햄 매슬로(A.Maslow)가 제시했던 욕구계층이론을 접목시킨 '''"자기실현적 사랑"''' 이다. 즉 그리어가 꿈꾸었던 최상의 사랑은, 양측이 각자 자기애를 갖고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꾸려가며, 상대방의 자아를 지배하거나 소멸시키지 않고, 상대방의 선택을 옭아매지 않는 사랑이다. 사랑이 자신을 소멸시키는 이타적인 행위라는 생각은 망상적인 낭만에 불과하다는 것.
물론 그리어는 어머니들의 모성애는 성스러운 것이라며, 모든 어머니들은 성인(聖人)이라고까지 하면서 힘주어 선을 긋는다. 그러나 여기서도 지적할 것은, 자녀들에게 이 모성애가 공경이 아니라 죄책감만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즉 '''"자녀로서 나는 어머니가 행복했으면 좋겠는데, 어머니는 자꾸 나 때문에 불행해지려 하신다"''' 는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 그리어의 관점에서 '''내리사랑은 희생과 동의어가 아니다.''' 이 논리가 여기까지 어느 정도 납득이 된다면, 이번에는 남녀 간의 사랑으로 넘어가 보자. 저자는 많은 커플들이 위험한 심리적 공생관계 끝에 마침내 '''이기적 채권의식'''으로 변질된 자기희생을 한다고 지적한다. 저자가 목격한 연인들의 사랑싸움이나 부부 간의 말다툼을 보면 아주 극명하게 드러난다고(…).[14] 특히 저자는 여성들이 희생의 대가로서 '''안정감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지만, 현행의 결혼 및 가족 제도로 안정을 찾는다는 건 근대의 거짓말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자신의 미래를 사랑하고 실현해 나가는 것을 경시하는 커플에게, 저자는 성경에서 끌어 온 조언을 제시한다. '둘이 합쳐 한 몸을 이루지도 못하게 되지는 말자. 내 몸을 사랑하지 못하는 주제에 이웃까지 사랑할 수는 없다.'
이처럼 왜곡된 사랑의 관념은, 저자에 따르면 '''남녀가 접하는 대중매체'''에 의해서도 강화된다. 먼저, 사랑하는 여성을 바라보는 남성들은 '''성녀-창녀 이분법'''의 거짓 이미지를 갖게 된다. 남성들이 성장기에 흔히 접하곤 하는 남성향 어드벤처 소설들의 서사에서는, 늘 '''순진무구한 성녀'''와 '''색기 넘치는 악녀'''라는 두 가지 종류의 여성들만이 존재한다. 순진무구한 성녀는 남성 용사가 구하러 가야 할 붙잡힌 히로인이며, 한없이 무력하지만 (경쟁자 남성을 표상하는) 대마왕과 같은 악당 남성들의 위협에 상시 노출되어 있다. 반면 악녀들은 매우 노출이 심하고 문란하며 저속한 복장을 하고 있고, 성적으로 자유분방하며 '값싸 보이는' 언행을 한다. 히로인의 의상이 하늘거리는 드레스라면 이들은 숨막힐 듯한 거유에 높은 하이힐, 꼭 끼는 가죽 의상이 특징이다. 남성이 이입하게 될 주인공의 임무는, 이 악녀를 자신의 힘으로 굴복시켜서 마침내 '남성에게 제대로 복종하는 법' 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리어는 물론 남성들이 창작물과 현실을 구분할 수 없다고 주장하진 않지만, 이 이미지들이 종종 연애나 성관계, 결혼생활 도중에 떠오르게 되면 불감증, 발기부전, 권태기 등을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자신의 여친을 억지로 성녀의 이미지에 끼워맞추려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성들은 어떨까? 그리어는 동료 여성들을 향해서도 비판의 날을 세운다. 사랑하는 남성을 바라보는 여성들은 대조적으로, 자신의 남친이 '''여성향 로맨스 소설의 "남주"'''(…)인 것마냥 착각하게 된다. 그래서 이 여성들은 현실의 남친이 자신에게 그 소설에 나온 것만큼 멋있고 우아하고 감미롭게 대해 주지 않으면 제풀에 지치거나 낙담하고,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남친에게 답답해하며 이것저것 요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리어는 냉정하게 일침을 놓는다. '''"당신 주변에 존재하는 남자들은 그런 로맨스 소설에 나오는 빈틈없고 멋있는 훈남이 아니며, 현실에는 여심을 휘어잡고 들었다놨다 하지 못하는 남자들이 태반"''' 이라고. 그리어는 여성들이 본인 스스로를 여성향 로맨스 소설의 "여주" 에게 이입하는 것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이런 소설들에서 여주인공들은 대개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성향을 보이는데, 언제까지 그런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코스프레를 할 셈이냐는 것이다.[15]
이쯤에서 여성들이 기대하는 남친의 이상적인 이미지에 대해 저자가 언급하는 것을 잠깐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남성들의 관점에서 읽으면 절로 헛웃음이 나올 정도지만, 본서에서 저자는 실제로 다양한 여성향 창작물들에서 이런 장면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함을 보여주고 있다. 일부 위키러들은 정말로 이런 암묵적 요구를 받아 본 경험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어를 유명하게 만든 또 다른 제안은 바로 '''핵가족의 타파와 대안적 가족의 구성'''이다. 저자는 근대사회에서 불가피해 보이는 핵가족 구성이 완전히 작위적이며 인류 역사상 가장 불안정하고 수명이 짧은 제도일 것이라고 비관한다. 저자에 따르면, 핵가족 제도는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 고립되게 만들고, 서로간의 소통을 약화시키며, 심지어 부모자녀 간의 친밀감조차도 병리적으로 만들 수 있다. 여성들의 관점에서도, 여성들은 서로 간의 교류와 친밀함을 나누지 못함으로써 각자의 방 안에만 고립되었고, 그 결과 가족 내에서, 그리고 가족 간에 점차 의심과 불신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런 제도를 구태여 유지하는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사람들이 '''안정을 갈구하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저자는 따지고 보면 기혼 여성들이라고 딱히 더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심지어 저자는 가정주부들이 "영구적인 피고용인이라는 안정성을 얻는 대가로 남편의 집에서 무보수로 일하는 노동자"(p.312)일 뿐이고 때로는 이혼이라는 이름의 해고까지도 당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불평등한 결혼생활은 단호히 거부하고, 설령 불안정할지라도 자유롭게 삶을 변화시키면서 흥미진진한 인생을 살아 보자는 것이다."로맨스 소설 속 남자 주인공들은 여자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알고 있다. 꽃과 작은 선물, 연애편지, 그녀의 눈과 머리카락을 찬미하는 시들, 달빛이 비추는 테라스에서 촛불을 켜 놓고 조용한 현악기 소리를 들으며 하는 식사, 절대 서둘러서는 안 되고 신체 접촉도 전혀 없어야 한다. 약간의 거친 숨소리는 필요하다. 그녀의 얇은 보디스(bodice)를 누르는 델 듯한 입술도 필요하다. 그녀의 풍성한 머리카락에 속삭이는 사랑의 말들도 필요하다. '사소한 일이 대단히 중요하다.' 그녀가 좋아하는 초콜릿, 그녀를 부르는 애칭, 그녀의 생일 기억하기, 기념일, 유치한 놀이, 다음으로는 그녀를 생각나게 해 주는 바보같은 것들이 있다. 그녀의 향수, 그녀의 스카프, 그녀의 프릴 달린 속옷과 우스꽝스러운 레이스 손수건, 그녀의 무릎 위에 앉아 있는 새끼 고양이. 미스터리, 마법, 샴페인, 의식, 다정함, 흥분, 애모, 숭배... 여성은 이런 것을 아무리 받아도 충분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대부분의 남성은 여성의 이런 환상 세계에 대해 전혀 모른다.''' 그들은 이런 류의 문학과 낭만주의의 상업성에 노출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 p.219 (일부 구문은 나무위키에서 자체 강조)
물론 누군가는 진정으로 결혼을 원할 수 있으며, 현실적으로 모든 여성들에게 비혼을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것도 무리다. 그래서인지 저자는 대안적 결혼생활을 제안하는데, 저자의 제안을 요약하면 '''유기적이고 무질서적인 확대 가족이자, 만인의 자녀를 키우는 공동육아'''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부모의 도시생활과 자녀의 시골생활로 특징지어지며, 저자는 어린이들이 시골 논밭과 자연 숲속에서 뛰노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부모는 가끔씩 시간이 될 때마다 시골로 내려와서 자녀를 만나며, 그 이외의 나머지 시간에는 다른 어른들이나 아이들과 계속 공동체적으로 어울린다. 저자는 누가 친부모인지는 중요치 않으며 어른들로부터 아이들이 무엇을 배우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요지는 '''부모의 양육부담을 최소화하자'''는 것이다.[16] 사람들은 이에 대해 "품행 방정한 아이로 클 수 있겠느냐, 사회의 안정을 해치지 않겠느냐, 어머니들이 행복하겠느냐" 고 걱정하겠지만, 전통적 가족제도라고 해서 딱히 아이들을 잘 키우는 것 같지도 않거니와, 안정 같은 게 우리 사회에 존재하기는 했는지도 의문이고, 언제든 해고당할 수 있는 전일제 무보수 돌봄노동이 과연 어머니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2.5. 심리학의 사기?
위의 책 목차를 보다 보면 심리학 전공자라면 흠칫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 2장에서 "심리학의 사기" 라는 소단락으로 나누어진 대목이 그것이다. 실제로 해당 단락에서는 심리학에 관련하여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직접적으로 심리학을 거론하는 몇몇 문장들이 있다.[17] 이런 문장들은 심리학 전공자들에게는 불쾌감을 주고 본서의 메시지 자체를 실제보다 더 평가 절하하게 만들 수 있으며, 기타 분야, 특히 사회학이나 여성학 전공자들에게는 '''심리학이라는 학문 자체에 대해 자칫 잘못된 생각으로 오도할 위험이 있다.''' 따라서, 양쪽 학문 모두를 위해서라도 여기서 잠시 부연할 필요성이 있다.
우선 본서에서 막연히 "심리학" 이라고 일컫는 분야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본서가 저술된 시점은 1970년으로, '''1960년대 성의학자들'''의 문헌들과 '''20세기 초 몇몇 정신분석학자들'''의 문헌들이 인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저자는 그 중에서도 지그문트 프로이트(S.Freud) 외에도 오토 바이닝거(O.Weininger)와 같은 인물들을 거론하면서 집중적으로 비판한다. 그런데, 물론 이 시기 심리학이 각 분과별로 기초가 정립되던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 60년대에는 행동주의의 시기로 불릴 만큼 정신분석학이 의미 있는 심리학적 연구방법론의 세계에서 배척 받고 있었다. 이 시기까지 여전히 정신분석학이 나름대로 인정 받던 분야라면 아마도 성격심리학, 발달심리학, 임상심리학 일부, 그리고 교육심리학 등이 있을 텐데, 본서는 이들 영역들을 '''심리학 전반으로 과잉일반화'''하여 이해했다.[18] 이는 아마도 같은 시기에 미국 대중사회에 정신분석학이 의미 있는 테라피의 수단으로서 널리 보급되고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기 때문일 수 있다. 영미권의 정신분석학은 과잉의료화되었다는 비판을 받을 만큼 심리학 내지 의학 등의 간판을 내거는 세일즈를 즐겼기 때문.
그렇다면 저자는 현대 심리학자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연구영역을 전혀 건드리지 않은 것일까? 3장에서 저자는 욕구계층이론과 관련하여 1954년에 매슬로가 출판한 《Motivation and Personality》 도서를 인용하는데, 이 책이 바이닝거의 《성과 성격》(Geschlecht und Charakter) 따위의 책들보다는 '''훨씬 더 현대심리학에 가깝다.''' 매슬로는 이 책에서 자기실현적 인간이 기존의 젠더 이분법과 성 역할, 문화적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집착을 거의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으며, 이런 이분법에 얽매이는 사람들이야말로 "충분히 건강하지 않다" 고 분석했는데, 저자 역시 이에 대해 본서에서 "타협일 수 있지만 그래도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보여주었다" 며 칭찬했다. 이는 바이닝거의 《성과 성격》 이 반여성적(anti-female)인 성향으로 악명 높은 것과는 실로 대조적이다. 하지만 그리어는 (아마도 몰라서였겠지만) 매슬로가 아닌 바이닝거를 들어서 심리학이라는 학문의 반여성성(?)에 대한 비판을 아끼지 않는다. 저자는 또한 이타주의와 이기주의를 설명하는 단락에서 "동기" 라는 단어를 자신의 논증에 즐겨 동원하고 있지만, 사실 동기(motive)라는 개념 자체는 '''현대심리학에서 가장 뜨겁게 연구되었던 연구영역들 중 하나였다.''' 저자는 오히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심리학의 정원에 들어와서 잔디를 잔뜩 밟아놓고 나갔던 것이다.
물론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 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본서는 소위 '페미니즘의 고전' 들 중 하나이고, 50년이 지나서도 독자들이 이 책을 읽으며 페미니즘 분야에서 고착되어 온 오해를 교정할 기회를 갖지 않는다면, 이는 양쪽 학문 모두에게 문제가 될 수 있다. 비록 접근 방법과 관점이 다를 뿐, 심리학 역시 페미니즘만큼이나 사회적 문제나 갈등, 개인의 삶의 역경과 고충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으며, 인류 모두의 안녕과 행복 및 권리에 공헌하고자 노력해 왔다.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그 성과를 인정하건 인정하지 않건 간에, '''그 선의만큼은 사실이다.''' 이제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자. 심리학자들이 페미니즘의 메시지를 베티 프리댄 이후로 전혀 업데이트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분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이 심리학의 메시지를 지그문트 프로이트 이후로 전혀 업데이트하지 않는다면, 이 역시 오늘날의 심리학자들을 좌절시킬 수 있다. 불행히도, 심리학은 페미니즘의 역사에서 때로는 정신분석학으로, 때로는 성차 연구로, 때로는 진화심리학 연구로, 때로는 유전자 결정론으로 띄엄띄엄 출현하면서 공포에 질린 페미니스트들을 결집시키는 유령이 되어 가고 있다.
심리학의 메시지는 '''인간의 마음과 행동에 대해 타인을 설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관찰하여, 누적된 관찰결과를 통해 논리적인 이론을 세우고, 이 이론을 통해서 다시 그 마음과 행동을 설명해 내자'''는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이 이 활동에 대해서 동조까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 의의를 납득할 수만 있다면, 아마도 페미니즘과 심리학 사이의 학문적인 상호 간 호기심이 증가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이상의 우려는 여성학에 대해 아예 관심이 없거나 혹은 피상적인 편견만을 갖고 있는 심리학 연구자들에게도 동일한 형태로 뒤집어서 적용될 수 있다. 적어도 이 단락에서의 요지는, 이제 50년 정도 세월이 흘렀다면 "심리학? 그거 여혐하는 학문이잖아요?" 라는 말이 더는 나오지 않게 해 보자는 것이다.
3. 저자의 기타 관점들
- MTF 트랜스젠더에 대한 관점
그런데 본서 2장에서 저자는 트랜스젠더에게 우호적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언급을 남기기도 했다. 구체적으로, 성전환(확정) 수술을 받은 트랜스젠더인 에이프릴 애슐리(A.Ashley)라는 사람의 예를 드는데, 저자는 "그는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성의 양극성에서 생겨난 희생자" 라면서 "우리 자매이며 우리의 상징" 이라고까지 했다(p.78). 물론 인문학적인 글쓰기가 강하게 반영된 본서인 만큼, 본서의 텍스트는 까딱 잘못하면 오해하기 십상인 '비꼬는 수사', '암묵적인 인용', '받아치는 수사', '겉뜻과 속뜻이 다른 문장' 들이 화려하게 난무하고 있기는 하다.
- 레즈비언 소녀들에 대한 관점
- 자매애에 대한 관점
- 모성애에 대한 관점
- 정치적으로 올바른 단어에 대한 관점
"프랭크 자파(Frank Zappa)는 자유 연애와 혼음 파티의 여성 대사제로 ... 이 용어가 경멸적인 편견에서 자유로워지기를 원했다. 그러나 엄청난 선전에도 불구하고 6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음악가들 주변을 서성대던 대다수 여성들이 이 호칭을 모욕으로 간주했다. 완곡한 표현의 운명은 그것이 가리키는 현실과 결합하자마자 급속하게 원래의 기능을 잃어버린다. 따라서 완곡한 표현은 규칙적으로 다른 완곡한 표현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이념이 행동을 기적적으로 따라잡지 못한다면 개방적인 사회에서 ... 'fiancee'(약혼녀) 자체가 금기어가 되는 것을 상상해보는 것도 설득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 p.342
- 여성에 관련된 욕설
"그들이 발표한 견해는 매우 격언적이고 엄격해서 사상이 혼란스러운 일반 여성에게는 무시무시하게 보일 것이다. 그들은 남성을 적으로 간주했다. 남성이 계속해서 자신과 여성의 역할을 오해하고 영속화하려는 한, 이 단체의 말은 틀림없이 옳다. 그렇지만 '''혁명을 위해 꼭 혁명적인 이론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현 제도의 폐단에 마음의 상처를 입고 수립된 이론은 ... '''도움이 되지 않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혁명적인 전략으로 성욕을 피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 성욕을 피하는 전략은 진정성이 없고 예속되는 작용을 한다. 남성이 여성의 적이라는 것은, 제복을 입고 날뛰는 청년이 제복이 다르다는 것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면에서 자신과 비슷한 다른 청년을 적으로 여기는 것과 같다. 한 가지 가능한 전략은 제복을 벗어던지는 것이다."
- pp.383-384 (일부 구문은 나무위키에서 자체 강조)
- 미러링에 대한 (잠재적) 관점
4. 관련서평
미국의 언론인 엘리자베스 워첼(E.Wurtzel)은 본서 최후반의 서평에서, 이 책이 다른 페미니즘 서적들과는 달리 규정적이고 규범적이어서 실제로 독자로 하여금 삶을 바꾸도록 촉구하는 힘이 있다고 하였다. 서평이 쓰여진 2000년대 하반기에는 많은 것들이 나아졌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여성혐오의 사례들이 발견되기에 본서는 가치를 가진다는 것이다.
국내에서 확인되는 유일한 서평은 우정민(2012)의 서평이다.[21] 우선, 우정민(2012)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아직도 여성들이 거세된 것으로 보인다는 현실을 고려하면 본서가 여전히 국내에서 유효하다고 평가하며, 본서의 솔직하고 도발적인 표현들이 읽는 이에게 여전히 충격으로 다가온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본서는 한편으로 몇 가지의 비판을 받을 여지가 있는데, 세상 모든 커플의 성관계가 여성의 피학증의 발로이며 남성상위는 여성억압의 상징이라는 분석에는 동의하기 어렵다는 점,[22] 저자가 제시한 대안적 가족형태가 다소 비현실적으로 보인다는 점, 저자가 전형적인 백인 중산층 고학력자이다 보니 5장에서 강간 및 성범죄 문제를 과소평가했다는 점[23]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일정한 한계점이 있음에도, 본서가 서구사회의 모순에 대해 불만을 심어주는 "창조적 실패" 가 된다고 보았다.
5. 남은 비판점
- 남성은 여성을 정말로 미워하나?
4장을 펼치자마자 나오는 것은 "여자들은 남자들이 그들을 얼마나 미워하는지 모른다" 라는 선언적 문장으로 시작되는 끔찍한 강간 장면의 묘사들의 나열이다. 한 소설에서 발췌된, 여성들뿐만 아니라 어지간한 남성들도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지독한 윤간 장면들은,[24] 그와 함께 제시되는 현실의 강간범 남성들의 "사정이 끝난 후에는 이 여성을 죽여버리고 싶었다" 고 술회하는 인터뷰들과 함께 엮인다. 저자는 이를 바탕으로 종합적으로 정리한다.''' '남자들은 사실은 우리 여자들을 증오하고 미워해. 사랑하니까 섹스를 하는 거라고? 그거 거짓말이야. 미워하니까 섹스를 하는 거야.' '''"구타당하고 강간당한 여성이 이유를 물으면 강간범들은 '당신을 사랑해서' 라거나 '당신이 너무 아름다워서' 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인다. 얼마나 황당한 답변인가? ... 남성은 스스로 얼마나 깊은 증오를 가지고 있는지 잘 모른다...
...자위를 부끄럽게 여기는 한 남성이 성욕을 배출하기 위해 여성을 급습하면서 응당 자위행위에 부여해야 할 수치심을 여자의 탓으로 돌린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위와 섹스가 별반 다르지 않다. ... 이 남성은 여성을 자신의 정자를 비워주는 그릇이나 인간 타구(唾具)로 간주하고 혐오감을 느끼며 돌아선다. 남성이 자신의 성과 사이가 좋지 않고 여성을 단지 성적인 존재로만 여긴다면, 그는 적어도 얼마 동안 그녀를 싫어할 것이다. 섹스에 대한 증오가 발작을 일으킬 정도로 커질수록 혐오의 표현은 더 거리낌없어질 것이다."
- pp.322, 325
헌데 남성 독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남성이 여성을 미워한다는 근거로서 본서에서 채택하는 인터뷰 및 진술들은 오히려 '''현자타임의 묘사에 가깝다.''' 예시로서 제시된 수많은 지독한 진술들은[25] 공통적으로 '''섹스 후의 느낌'''임에 주목해야 한다. 섹스 전에도 여성을 그렇게 보았더라면 과연 섹스 자체가 가능했을지 의문이다.
이 장에서 저자가 인용한 남성들은 공통적으로 영미권의 불량배들, 오토바이 폭주족들, 교도소 출소자 등등 '''사회의 하류층'''들로 한정되어 있다. 이런 사람들의 진술을 통해서 중산층 남성들의 성생활과 연애, 또는 말하자면 성범죄나 데이트 폭력 문제들로까지 확장시켜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의구심을 가질 수 있다. 흥미롭게도, 대략 30년 후에 출간된 서적인 래윈 코넬(R.W.Connell)의 《남성성/들》(Masculinities)에 따르면, 이런 주변화된(marginalized) 남성들에게는 젠더 평등과 여성의 대상화가 공존하는 모순적이고 혼란스러운 측면이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중산층은 말할 것도 없고, 이런 하류층 남성들의 성생활을 이해할 때조차도 본서는 이 서적을 통해서 보완되어야 한다.
저자의 강경한 생각은, 비록 저자가 보기에는 중산층 여성들의 삶에 대한 권태에 비해서 덜 중요하고 의제화할 가치가 없다고 느껴졌더라도, 일정 부분은 남녀 간의 정상위 섹스와 페니스의 질내삽입에 대해 당대 페미니스트들이 갖고 있던 반감과 상통하는 면이 있어 보인다. 티-그레이스 앳킨슨(T.Atkinson) 등의 래디컬 세력에서 흔히 말하는 "사랑은 강간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느끼는 스톡홀름 증후군일 뿐" 같은 주장들을 그대로 수용할 때, 페미니스트들은 저자의 이런 선정적인 자의적 주장에도 혹하기 쉬울 수 있다. 따라서 저자의 메시지는 자칫 위험하고 파괴적인 방향으로 확산될 수 있어 보인다.
그보다 의문스러운 것은, '''남성들의 심리에 대해 왜 여성이 설명을 하려 하느냐는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은 여성들의 삶과 심리에 대해서 남성들이 아는 척하며 설명하는 것이 꼴사나운 데다 부정확하다고 비판해 왔다. 하지만 남성들의 삶과 심리에 대해서 여성들이 아는 척하며 설명하는 것 역시 똑같은 수준에서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많은 남성들이 섹슈얼리티와 젠더에 대해 어렴풋한 인식에서 그치고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경험에 있어서만큼은 남성들 본인의 증언이야말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1차 자료가 된다. 남성은 남성의 삶을 가장 잘 알고 있고, 여성은 여성의 삶을 가장 잘 알고 있다. 물론 자신이 보지 못하는 것을 상대방이 볼 수 있는 장점이 있고, 페미니즘이 실제로 호소하는 것 역시 이에 가깝겠지만, 자기네 설명이야말로 진짜 진실이라는 식으로 호도하는 것은 위험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