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종교

 


1. 개요
2. 종교별 현황
2.2. 불교
2.3. 기독교
2.3.1. 역사
2.3.2. 침체기
2.3.3. 현황
2.3.4. 교단별 문화
2.4. 사이비 문제
3. 기타


1. 개요


현대 일본일본국 헌법에 의거하여 법적인 정교분리가 이루어진 세속국가이며, 종교의 자유가 세계 최상위 수준으로 보장되는 국가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어느 정도냐면 법정 공휴일로 지정된 종교 기념일이 하나도 없을 정도다. 불교 기념일조차 공휴일로 지정되지 않았는데, 이는 특정 종교 기념일을 공휴일로 지정하면 정교분리에 어긋난다는 이유 때문이다.[1]
역사적·문화적으로 신토불교의 영향력이 매우 강하다. 길거리에서 쉽게 사찰신사를 찾을 수 있는 수준이다.

2. 종교별 현황


일본 문부과학성 조사에 의하면 신토가 1억 2천만 이상(거의 100%), 불교 9천만 이상(거의 70%), 그리스도교 150만(1% 내외), 기타 신흥 종교 몇만 명이라는 희한한 결과가 나왔는데, 중복집계 때문에 종교인 숫자가 일본 전체 인구보다 많다. 퓨 리서치 센터에서는 불교 36.2%, 기독교 1.6%, 무종교 57.0%[2]로 보고 있는데, 대부분 일본의 특징적인 종교관(한 종교에 얽매이지 않음) 때문에 정확한 종교 신자 수를 집계하는 것은 어렵다. 오히려 중복 집계를 해서 전체 인구의 2배 정도 되는 숫자가 나온 결과가, 한 종교에 얽매이기 싫어하는 일본인들의 종교관을 더 잘 나타내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일본에서 종교, 특히 불교나 신토 등의 전통종교는 한국처럼 선택의 대상이라기보다 '''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와 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쉽게 말해서 한국에서는 종교인과 무종교인이 정확하게 분리되어있는 것과는 달리, 일본에서는 대부분의 국민이 종교에서 기원한 문화를 따르지만 그것을 종교가 아니라 문화라고 인식한다는 것이다. 흔히 일본인은 종교적인 관념이 약하다는 말이 있으나, 엄밀히 말하면 풍속으로 종교를 찾는 이들이 많아 그것이 진지하지 않고 세속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런 점 때문인지 크리스마스부처님오신날 등 종교적 기념일은 그냥 평일로 넘어간다.
일본의 종교생활은 관념적으로 이루어진다기보다는, 매우 세속적인 단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본인은 '''태어날 때는 신사[3], 결혼식은 교회[4], 죽어서는 절에 묻힌다'''는 이야기가 있었을 정도. 그 정도로 종교를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서 서브컬처 같은 데에서도 야훼모에화하거나 죽여버리는 등 아무렇게나 소재화하는 일이 많다.
일본의 종교계에서는 신토불교가 가장 영향력이 크다. 신토는 시치고산성인식, 마을에서 하는 축제(마츠리), 절기별 풍습, 결혼식 등 그 밖의 여러가지 의식에서 일본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불교는 장례식이나 묘제에서 큰 영향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고 생활 속 템플스테이, 대처승 등이 일본 불교의 밑거름이다. 선불교(禪) 수행도 비교적 보편적으로 널리 퍼져 있으며 관습적인 탁발승 문화가 아직도 남아있다.
만물에 있다고 믿는 일본인들은 아직도 정월이면 신사에 가서 참배하고, 1000년이 넘은 축제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한국이 6.25 전쟁새마을운동을 거치면서 대다수의 민간 신앙과 축제 문화들이 대부분 자취를 감춘 것과 대조적이다.
한국중국과 달리 전통이 파괴당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으로 인해 일본에서 그리스도교는 맨 처음 도입되던 센코쿠 시대에 잠깐 널리 퍼지다가 말고 에도 시대 이후로는 철저한 배척 대상이었고, 메이지유신 이후로도 2차대전 시기까지 공공연하고 간헐적인 박해가 심하여 기독교는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했다.
'''고리야쿠(ご利益)'''라 해서 한국 이상으로 기복을 밝히는 경향이 매우 강하며, 이것이 마네키네코에도 반영되어 있다.

2.1. 신토


신토 문서와 국가신토, 신사(신토) 문서에서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신토는 불교를 흡수하면서 체계화되었기 때문에 일본에서 불교와 신토는 사실상 하나나 다름없는 상태이다. 즉, 인도에서 새로운 신들이 유입된 거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일본 제국 시절에는 서양의 그리스도교를 모델로 하여 신토를 체계화하고 국가 사상으로 삼아 국민교육을 하였는데, 이렇게 일본의 근대 민족주의에 알맞게 가공된 형태의 신토를 국가신토라 한다.
일본인들 중에서는 신토를 종교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일본인들은 신토의 관습이나 신념을 따르더라도 이를 종교라는 개념보다는 그냥 문화나 생활이라고 보기 때문이고, 다른 이유로는 패전 이전에 국가신토를 교육하면서 그리스도교 등과 대비해 신토의 우월성을 주장하기 위해 "신토는 종교가 아니다"라고 교육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정교분리와 관련해 정치적으로 가장 큰 논란이 되는 부분 중 하나가 신토에 대한 정부, 정치인들의 취급이다. 현대 일본은 국교가 없는 정교분리 국가라지만, 전통적으로 천황은 신토의 사상이나 교리와도 큰 관련을 맺으므로 일본 황실과 관련된 행사는 신토와 엮이게 마련이다. 나라에서 황실과 엮인 신토 행사를 벌이는데 이게 정교분리 위반이 아니냐는 것. 2019년 나루히토 천황의 즉위식에서도 이 문제가 이슈가 된 바 있다. 아울러 일본 정치인들, 특히 일본 총리를 비롯한 내각 각료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역시 일본국 헌법에서 규정한 정교분리에 위배된다는 주장도 자주 이슈화됐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 정교분리 원칙 위반 논란

2.2. 불교


일본불교먼나라 이웃나라 일본 문화편에서 인용한 학자 가토 슈이치[5]의 말대로 '''"일본이 불교화된 것이 아니라, 불교가 일본화되었다"'''고 보는 편이 낫다. 물론 현지화는 어디에나 일어나는 일이지만, 일본은 특히 심하다.
일본 불교는 개산조사(開山祖師)를 중심으로 모든 활동이 이뤄진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석가모니보다는 해당 사찰의 주직(住職)[6] 또는 소속 종파의 개산조사를 중심으로 한 것이 일본 불교의 특징이다. 때문에 부처님을 모신 법당보다 개산조사를 모신 전각이 월등히 큰 경우도 적지 않다. 센꼬지 법주(法主) 스카스카사 스님은 “일본 불교계는 크게 나누어 보면 13개의 종파가 있으며, 센꼬지는 천태종정토종의 이종(二宗)의 사원이 부처님 전에 봉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다시 말해서, 일본 불교는 한국처럼 기복적 신앙보다는 사상적, 교육적인 부분에 많이 기울어져 있다는 것이다. 개인의 깨달음이 불교의 종교적 부분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래서 일본의 불교는 유교와 영향을 주고 받으며 발전하기도 했다.
불교계의 ‘통일된 기구’나 문화를 형성하는데 한계가 있는 것은 여기에 기인한다. 전일본불교협회와 전일본승니법단(全日本僧尼法團)이 구성되어 있기는 하지만 친목단체 이상의 의미를 갖기는 어렵다. 전일본불교협회 회장을 역임한 이야바야시 일한불교교류협의회장은 “주요 종파별로 회장직을 순번으로 맡고 있다”고 밝혔다.
불교학자 마츠오 겐지는 승려에 대한 일본인의 이미지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 바 있다. 승려란 "승려의 아들로 태어나 에 살면서 불교를 공부하고, 삭발하고 법명을 받고 나서는, 승복을 입고서 장례의식을 비롯하여 종교 의례를 하는 사람"이다. 일본인에게 승려는 장례의식을 주관하는 사람, 그리고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사찰은 자식에게 대물림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는 것이다.[7] 이러한 정리는 일본 불교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주(州)에서 촌(村)에 이르기까지 절이 거의 반이나 되고, 머리를 깎고 절에서 사는 자가 평민보다 배는 된다.

《노송당 - 일본행록가장》

그래서 한국과 정반대로 승려가 '직업'으로서 꽤 흔한데다 결혼해서 아내를 둘 수도 있고 아이도 가질 수 있는 대처승[8]이 많으므로, 앞서 말한 종교인의 세습문제나 과세라든가[9] 비리 문제, 금전 강요 문제, 승려 적체 문제[10] 같은 종교 부패 현상 역시 불교에서 불거지는 경향이 흔하다. NHK 조사에 의하면, 불교의 가르침을 신뢰하는 사람은 일본 인구의 90%로 나왔다. 불교의 가르침에 대한 신뢰는 높다. 그러나 "사찰을 믿을 수 있느냐"는 설문에는 20%, "승려를 믿을 수 있느냐"는 설문에는 10%만이 긍정적이었다. 일본에서는 평소에 회사원 등으로 일하며 승려를 부업으로 삼는 재가승들도 흔하고, 신토무녀처럼 일본 불교에는 알바 승려도 존재한다.
물론 여기에는 불교에 대한 비판이 살짝 들어 있다. 일각에서는 승려를 가리켜 "부모에게 물려받은 절에서 장례식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다소 불교 폄하적인 듯한 발언이기는 해도, 특히 장례식으로 먹고 산다는 말은 일본인의 불교관을 상당 부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히 틀린 말이 아니다. 실제로 일본 사찰 어딜 가든 뒷마당에는 상당한 규모의 납골 묘원이 있다. 스님이지만, 수행자로서보다는 생계가 거의 보장된 하나의 직업인으로서의 이미지가 그 못지않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본의 불교가 흔히 상상하는 것처럼 고도의 철학 체계로서보다는 죽음을 정화하는 주술적 체계로 받아들여졌음을 의미한다.
일본의 대처승들은 대개 남자가 승려이고, 아내는 일반인인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지만 드물게 아내가 승려이거나 부부 모두 승려인 경우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종파마다 육식, 장발, 대처에 대한 허용 여부가 다르다. 메이지유신 이후로는 대다수의 불교 종파가 승려의 결혼을 허용하지만, 두발자유는 정토진종(浄土真宗)이라는 종파가 거의 유일하다시피 하다. 선종밀교 계통 종파들은 한국과 중국처럼 삭발 교리가 유지되고 있으며 육식의 경우 본인이 주지로 기거하는 사찰에서만 가능하고, 집단 연수 기간 중에는 일시적으로 채식만 해야 한다.
승려 양성과정도 각 종단에 속한 대학교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그래서 일반인이 승려가 되려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한 뒤 그곳에 있는 승려 양성 코스를 거쳐야 한다. 승가 교육 커리큘럼 자체부터 한국과 무척 다르므로 일본에는 '행자승'에 해당하는 계급이 없고, '토쿠도시키'(得度式)라 부르는 삭발 수계식이 끝나면 바로 정식으로 승복과 가사를 착용할 수 있다.
현대에 농촌의 인구가 도시로 빠져나가 단가(檀家)[11] 신도들이 감소하고 있어, 제사에 의존해 왔던 불교는 큰 경영난에 빠졌다고 한다. 그래서 승려들이 수시로 돈 이야기를 해서 신도들에게 더욱 거부감을 준다고 한다. 몇몇 승려들은 도시의 거대한 빌딩에 납골당을 짓거나 묘원을 건설하지만, 역시 팔리지 않아 빚을 안기도 한다.
그래도 조선 시대 이후 숭유억불(崇儒抑佛) 사상으로 불교 문화가 한 번 크게 타격을 받은 한반도와 달리[12], 불교가 사회 문화 전반에 상당히 뿌리내렸다. 일본인들에게 현세의 종교는 신토이며, 내세의 종교는 불교이다. 일본불교와 신토와의 관계는 그렇게 좋은 편도 아니지만 서로 티격태격했던 한편 영향을 주거니 받기도 하였다. 그 결과 신불습합이라고 불리는 현상도 일부 보이고 있다.[13]
여러모로 일본에서 메이저한 종교로서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동시에 보여준다. 일본 불교의 주요 종파는 진언종정토종이며, 황벽종[14] 등 소수 종파도 있다.
불교계 대학으로는 교토여자대학 등이 있다.

2.3. 기독교


기독교의 세가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비교해도 독보적으로 약한 국가들 중 하나다. 16세기에 가톨릭이 전래되어 한국보다 훨씬 더 일찍 기독교가 전파되었지만[15] 여전히 비주류이다. 세계적인 인지도 때문에 소설, 영화 등에서는 꽤 등장하는 편이나 신자의 숫자 자체는 적다. 기독교 종파는 개신교가톨릭의 비율은 비슷하고 정교회는 마이너하다. 1억 2,800만 명 가량 되는 일본 전체 인구의 1%에 못 미치는 수치다. 홋카이도오키나와현은 기독교인 비율이 다른 지역보다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역시 3% 정도로 체감할 정도는 아니다. 또한, 본토인 규슈의 나가사키현의 경우는 가톨릭의 영향으로 4%가량이 기독교 신자이다. 그나마 있는 신자들도 재일 한국인이나 한국계들이라 한다.

2.3.1. 역사


일본의 기독교 역사는 1549년 8월 15일에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고시마에 도착한 것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이것은 예수회가 기획한 일본 선교의 시작을 알리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그 이후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아우구스티노회선교사들이 인도필리핀 등지에서 잇달아 입국하면서 일본 선교를 위한 열기가 고조되었다. 이 수도회들은 각지에 수많은 성당, 수도원, 학교, 병원 등을 건설했고, 불과 65년 만인 1614년에는 성직자 150명, 신자 65만 명을 넘는 경이적인 발전을 맛볼 수 있었다. 이처럼 급성장하는 일본 가톨릭교회를 바라보는 수도회들은 당연히 일본 선교가 동아시아 선교의 교두보로 여겼다. 선교사들은 기독교화한 일본을 기지로 중국마저 기독교화해 최종적으로는 동북아 전체를 복음화하는 원대한 소망을 구상했을 정도였고[16], 선교사들에게는 일본 선교의 성공이 더 많은 아시아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호기가 되리라는 희망이 있었던 것이다. 일본의 기독교 전래와 관련된 인물들에 대한 간략한 정보는 이 문단을 참고해보자. 아무튼 일본 기독교(특히 가톨릭) 전래의 역사가 생각보다 긴 것 때문인지 교황청에서는 한국과 달리 일본을 전교 지역으로 분류하지 않는다. 따라서 일본 가톨릭은 교황청 인류복음화성 관할이 아닌 주교성 관할이다.
그러나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내린 금교령(禁敎令)을 기점으로 활기를 띄던 일본 가톨릭교회를 철두철미하게 박해하기 시작했다. 이는 도쿠가와 막부 시대 이후에도 지속되었고, 불교로 개종하지 않고 살아남은 가톨릭 신자(키리시탄)들은 카쿠레키리시탄이 되어 숨어서 몰래 신앙을 유지했다. 막부는 단가 제도를 실시해서 모든 백성들이 의무적으로 불자로 등록하게 했고, 사찰에 주민등록증과 비슷한 불자 증명서인 종문개장을 발급할 권한을 부여했으며[17], 후미에로 숨은 키리시탄들을 잡아내 배교시키려 하며 선교사의 입국을 철저히 막았다.[18] 한 번 꺾인 선교열은 도쿠가와 막부말인 1846년 파리 외방전교회가 일본 선교 계획을 재수립하기까지 259년 동안 일본 가톨릭교회를 침묵 속에 놓아두었다.[19] 결국 3세기 가까운 박해[20]는 일본 가톨릭교회의 폭발적인 응집력과 동아시아 선교의 교두보라는 2가지 역할을 빼앗았다. 그 결과 선교 4세기 동안의 교세 증가율은 선교 활동 초기에 비해서조차 현저하게 떨어진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교육·의료·사회 복지를 축으로 하는 일본 가톨릭교회의 사목적 노력에도 좀처럼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2010년대에도 여전해서 가톨릭 인구는 95만명 정도라고 한다.[21]
개신교의 경우 매슈 페리흑선내항을 기점으로 일본이 개항되자 다른 개신 종파들도 일본에 유입되었다. 개신교1859년미국에서 성공회 선교사 존 리긴스(John Liggins)와 채닝 윌리엄스(Channing Williams)가 일본에 들어온 것을 계기로 한다. 한국 개신교가 그랬듯, 일본의 개신교 선교사들도 직접적인 선교뿐만 아니라 학교를 세우고 의료기관을 세우는 등의 활동을 통해 교세를 확대해 나갔다. 2010년대에 개신교는 약 43만명쯤 된다.[22]
정교회1861년러시아 정교회 소속 선교사였던 이반 드미트리예비치 카삿킨[23]이 일본에 입국하면서 전래되었다. 1912년, 니콜라이 주교의 안식 당시 약 3만여명의 신자가 소속되어 가톨릭에 버금가는 규모로 급속히 성장했지만, 러시아 혁명 이후 러시아로부터의 지원이 축소되고, 소비에트와의 협력을 견제한 일본군부의 탄압으로 러시아인 세르게이 관구장주교가 체포되는 등 외압으로 인해 교세가 축소되었다. 또한, 태평양전쟁 패전 후 개신교나 가톨릭이 어느정도 교세를 확대해 가던 시기에 GHQ의 명령으로 모스크바 총대주교청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미국대교구 관리하에 놓이는 일이 생겼고, 이로 인해 교단이 미국파와 러시아파로 분열되는 등 교세 회복의 기회를 놓쳤다.
2014년 기준으로 신자 수는 약 1만명이며, 일본 전역에 60여 개의 성당 및 집회소가 있다.[24][25] 태평양전쟁 말기부터 현지인 주교들도 배출했으며, 전례문 뿐 아닌 성경도 독자적으로 번역한 성경(니콜라이역)을 쓰는 등 한국 정교회와 비교해봤을 때 교세나 재정 면에서 안정적이라고 볼 수 있다.
비칼케돈파 교회인 콥트 정교회의 경우, 에티오피아, 이집트 출신 거주민들의 요청으로 2004년에 처음 일본에 들어와 이집트인 사제가 사목활동을 이어왔다. 2016년 7월 18일 교토부 기즈가와 시에 최초의 성당인 시드니 교구 소속 성모 마리아-성 마르코 콥트 정교회 성당이 세워졌으며, 2017년 현재, 전국적으로 일본인 신자를 포함한 80-100명의 신자가 있다.
그러나 개항 이후에도 일본의 기독교에 대한 시각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메이지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에도막부보다 상대적으로 덜했을 뿐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이 때문에 서구 열강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결국 이들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1873년종교의 자유를 허용해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중지되었지만, 신사참배는 종교활동이 아니라는 이유로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등 그 자유의 수준에는 제한이 컸다. 종교적 신념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해 탄압당하는 사례는 당대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에도 많았다. 또한 1939년의 종교단체법으로 외국인이 교단의 대표자가 되는 것을 금지하면서, 외국인 성직자가 대표자인 교단, 특히 가톨릭과 정교회의 주교들이 강제로 은퇴, 체포당하는 등 전시체제 하에서는 기독교 탄압도 재개되었다.
일본에서 기독교의 교세가 약한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일본의 전통적인 종교관과 기독교가 잘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 가톨릭교회에서는 가톨릭이 16세기 당시 교세를 회복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과거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150년 일본 선교가 진행돼 오면서 일본의 문화와 교육, 의료, 도덕윤리에 대해 기독교가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측면도 있으나, 샤머니즘과 조상 숭배 등에 대해서는 대결적 자세로 임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본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기독교 교리의 핵심이기에 바꿀 수는 없다.[26] 엔도 슈사쿠의 <침묵>에 등장하는 선교사 페레이라 신부의 말을 빌리자면, "일본 민족은 인간과 아주 동떨어진 신을 생각할 능력은 갖고 있지 못하오. 이 민족은 인간을 초월한 존재를 생각할 힘도 갖고 있지 않소. ... 이 민족은 인간을 미화하거나 확장시킨 어떤 것을 신이라 부르오[27]." 결국 일본에는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힘든 그 무엇인가가 있었다는 것이다.

2.3.2. 침체기


2차대전 후로도 일본 기독교는 발전할 기회를 얻지 못했으며, 오히려 날이 갈수록 침체되고 있다. 대부분의 교회 구성 인구가 노년층 중심이며 부모의 신앙이 자녀들에게 잘 전수되지 않고 있어 성소(聖召) 지원자 수가 감소하고 있다.[28] 이런 현상은 교회를 약하게 만들고 결국 자연 감소로 교회가 문을 닫도록 한다.
또한 일본 기독교는 선교 활동도 잘 하지 않는데, 이는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권하는 행위를 꺼리는 민족성 때문이기도 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교에 반응을 보이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거절당하는 수모를 겪지 않기 위해, 이들은 불문율 같이 조금이라도 부담될 말은 하지 않는다. 또한 대체로 고지식할 정도로 변화를 싫어하는 일본인들에게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이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거꾸로 이것은 긍정적으로 작용할 경우, 신앙생활에 있어 특별한 박해를 받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일본은 2차대전 패전 이후로 이제 더이상 제3세계 불교, 이슬람 국가들처럼 폭력으로 기독교를 박해하지는 않으나, 사회구조가 기독교로의 개종을 불편하게 하며, 여전히 가족, 마을, 국가의 조직은 문화적 압력을 행사하여 기독교인들이 사회에서 동떨어진 존재가 되도록 한다. 가족에는 불단이나 신단을 모시고 마을은 개별 지역 신사의 부족신(현인신, 제신 등)을 모셨으며, 한때는 국가 차원에서 덴노를 신으로 모셨다.[29] 그리고 회사 대부분이 저마다 회사 제사를 지내는데, 기독교 신자들은 심각한 갈등을 겪는다. 남의 눈치를 먼저 살피는 일본인들의 집단주의는 기독교로 개종하기 어렵게 한다. 가령 한국에 와 있는 일부 일본인 신자들은 기독교로 개종하자 자기 집에서 거의 나도는 끈떨어진 뒤웅박 신세가 되고 말았다. 심지어 아주 극단적인 경우 상속은 물론 호적에서도 제외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현재 대부분의 일본인들에게서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는 무관심이나 세속적인 관점을 넘어서 거의 무지(無知)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 가톨릭개신교를 구별하지 못하거나, 가톨릭 성직자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식의(...) 정신 나간 작품이 꽤 많다. 그런데 이게 '판타지 장르 속의 가톨릭을 모델로 한 가상종교'에서만이 아니라 '나름 리얼을 추구하는 장르에서의 실제 가톨릭'에서도 벌어진다.[30]
이렇게 일본에서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거의 없다시피 해서, 입국심사장에서 직업을 묻기에 "신부(사제)"라고 대답하면 "뭐하는 직업이냐"고 묻거나, 수녀원에 찾아와 "남편은 어디 갔느냐?"고 묻는(…) 공무원들이 있을 정도다. 또 야스쿠니 신사에 유족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우상숭배를 금기시하는 그리스도교 신자를 합사하여 신령으로 받들도록 했는데, 여기에 대해서 일본기독교교회협의회가 법적 투쟁을 벌였으나, 일본 사법부는 "종교적 인격권은 법적 보호 대상 외"라면서 무시했다.

2.3.3. 현황


그러나 적어도 전후에는 국가나 사회 차원에서 기독교를 배척하지는 않는다. 역대 일본 총리들 중에서도 기독교인들이 있었으며[31] 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20세기 후반 이후에는 크리스마스발렌타인 데이처럼 연중 행사로서 혹은 기독교 교회에서의 결혼식 선택(일명 채플 결혼식)과 기독교계 미션스쿨 인기 등의 형태로 순수한 기독교 문화 행사가 국민 사이에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사실 릿쿄대학(성공회), 도시샤대학&도시샤여자대학(회중교회), 아오야마가쿠인 대학(감리회), 국제기독교대학(개신교), 조치대학(가톨릭 - 예수회), 세이신여자대학(가톨릭 - 성심수녀회), 시라유리여자대학(가톨릭 -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등 일본의 사립학교들 중에는 은근히 기독교계 미션스쿨이 많다. 만약 일본이 선교 자체가 힘든 기독교 박해 국가였다면 기독교인이 총리가 되고 크리스마스 행사를 진행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재계에서는 모리나가 제과[32]와 구 파이오니아(Pioneer)[33]의 창업주가 기독교인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 대중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일본인 기독교인을 꼽자면 빙점의 작가인 미우라 아야코(三浦綾子)가 있다. 미우라의 소설들은 일본 대중문화가 공식적으로 금지되던 시절에 이미 인기를 끌었는데, 기독교적 정서가 호감을 끌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위에 얘기한 엔도 슈사쿠도 생전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기독교를 소재로 한 소설을 많이 남겼다. 성우 쪽으로 넘어가면 오카모토 노부히코가 가톨릭 신자로 알려있다.
1980~90년대 한국에서도 인기를 끌었던 성경 이야기 애니메이션인 '''슈퍼북'''(アニメ親子劇場, 2D 버전 한정)과 '대모험'(パソコントラベル探偵団) 역시 일본 애니메이션이다. 미국과 합작이라곤 하나, 기독교가 1%도 안 되는 나라에서 제작했다는 것 자체가 매우 놀라운 일. 가톨릭으로까지 범위를 넓히면 테즈카 오사무가 늘그막에 참여(하지만 도중에 사망)하던 26부작 애니메이션 <태초에>(In the Beginning)가 있으며, 바티칸 교황청에게도 찬사를 받았던 작품이다.
한국 개신교에서 2000년대 초에 유행했던 어린이 주일학교 프로그램인 'MEBIG'(메빅) 역시 삿포로에 있는 아이린 채플(愛隣チャペル)에서 시작한 것이다. 삼일교회를 통해 한국에 도입되었으나 한국 개신교 정서와 맞지 않았는지 2004년 삼일교회 측에서 메빅교회와 결별하고 '윙윙캠프'라는 독자 브랜드로 바꾸었으며, 이후 메빅 열풍은 사그라들었다. 이후 한국에서 메빅은 CCM인 꽃들도 정도만 유명한 편이다.

2.3.4. 교단별 문화


일본에서는 가톨릭, 정교회, 성공회 등에서 세례명을 표기할 때 한국과는 달리 반드시 이름 앞에다 표기한다.[34]
일본 개신교의 주류인 일본기독교단(日本基督教団, UCCJ)[35]은 구 조합교회(組合教会)를 주축으로 장로회, 감리회 등과 1941년에 통합된 교단이다. 2차대전 당시만 해도 신사참배에 협력하는 등 철저하게 어용적인 면모를 보였으나,[36] 패전 이후 신학적 방향이 180도 선회하여 '진보적'인 이미지가 강해졌다. 이러한 역사적 경위 때문인지 장로제 교회정치를 선호하는 한국 개신교들과 달리 일본 개신교들은 회중제 교회정치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다.
한국 개신교인들이 개역성경 문체인 고어체를 자주 쓰듯, 일본 개신교인들도 전근대 문어체로 된 주기도문과 찬송가를 사용하므로 일반적인 일본인들보다 문어체를 더 잘 알아듣는다. 일본 정교회 또한 문어체로 번역된 성경과 기도서를 사용하지만, 이쪽은 한학자 나카이 츠쿠마로가 번역에 참여하고 러시아인 대주교 니콜라이가 타종파의 번역을 참고하는 것을 꺼렸기 때문에 독자적인 용어체계를 가지며, 메이지 시대의 번역(니콜라이역) 이후 개정하지 않아 문체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예배 외의 상황에서는 공동번역성서를 사용한다. 한편 가톨릭, 루터교, 성공회는 성경 뿐 아니라 성가와 전례문까지 모두 현대어로 된 것을 사용한다.

2.4. 사이비 문제


사이비 종교가 암암리에 발호한 예도 많다. 일본에서는 보통 카루토(カルト)라고 영어 표현 컬트(cult)를 들여와 표기한다. 엄청난 사회적 물의를 야기했던 옴진리교도 현재 공식적으로는 해체되었지만 이름을 바꾸고 교도들을 분리시키는 형태로 여전히 존속 중이라 하며, 일부는 정계 진출도 노릴 정도의 세력이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지금의 행복실현당 같은 경우. 이타미 주조[37]의 영화를 보면 야쿠자종교 단체들이 일본 사회에 상당히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을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
물론 원체 종교가 세속화된 일본 사회인만큼 사이비 종교 문제도 큰 사건이 한두 번 터진 적이 있어서 그렇지, 사실 세계 기준으로는 약한 편에 속한다.
상술했듯 일본에서 기독교에 대한 대접이 좋지 않은 이유 중 하나로 사이비 종교가 거론된다. 한국에서 건너간 통일교와 미국에서 건너간 여호와의 증인, 그리고 일본 내에서 자체적으로 생긴 기독교계 이단 종파도 많다.[38] 이런 문제 때문에 일본의 기성 기독교 교회 주보나 웹사이트에는 "저희 교회는 이단 및 사이비(컬트)와 무관합니다"라는 안내를 꼭 달아둔다.
다만 일본인들은 사이비 종교나 신종교하면 주로 불교 계열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가장 사건을 일으킨 옴진리교 계열이나, 창가학회, 행복의 과학 등 영향력있는 신흥종교들이 대부분 불교계열이기도 하고, 일본불교 특유의 개산조사를 중시하는 활동 때문에 불교계열 신종교가 굉장히 많기 때문이다.

3. 기타


한국 지상파 방송에서 특정 종교 홍보는 물론, 관련된 물품까지 모두 광고가 금지되어 있는 데 반해 일본에서는 지상파 TV에서 불단과 등 불교용품의 광고가 허용되어 있다.
이슬람교는 20세기 초반에 일본에 넘어온 타타르족의 후손들과 재일 터키인, 아랍인 위주로 어느 정도 존재하고 있다. 유명한 모스크로는 고베 모스크가 있다.

[1] 사실 미군정과 초대 대통령덕분에 기독탄신일부처님오신날이 공휴일로 지정된 한국이 특이한 사례이긴 하다.[2] 출처(퓨 리서치 센터)[3] 오미야마이리(お宮参り)란 의식을 한다.[4] 정확히는 외견적으로만 교회의 모습을 한 채플 예식장.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영향으로 퍼져나간 점도 없지 않다.[5] 출처는 <21세기 먼나라 이웃나라> 7권 일본문화편 230페이지.[6] 한국의 주지스님에 해당[7] 이러한 일본 불교의 모습을 잘 묘사한 작품으로 시귀가 있다.[8] 이와 반대로 독신으로 사는 승려를 비구승이라 한다. 남자는 비구, 여자는 비구니로 구분한다.[9] 일본에서는 스님이 세금을 내지 않는다.[10] 일본에서 승적을 갖고 있는 사람은 무려 3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11] 일정한 에 속하여 시주를 하며 절의 재정을 돕는 집, 또는 그러한 사람.[12] 고려 시대까지는 절이 장례의식을 주도했다. 제사도 대가를 지불하고 다니는 절에 대행하는 경우가 많았다.[13] 한국도 마찬가지만 토착종교와 불교가 융화되거나 영향을 주고 받는 건 불교가 전래된 나라에서 흔히 보이는 현상이다. 메이지정부가 국가신토를 위해 신불분리를 하기 전에는 신사 안에 절이 있는 곳이 많았다. 신궁사. "일본의 토착신들은, 부처가 일본의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모습을 바꿔서 나타난 것이다"라는 본적수적설이 널리 퍼지기도 했다.[14] 반야심경당음으로 독송한다.[15] 예를 들어 임진왜란의 선봉장으로 매체에서 많이 나와서 한국인들도 이름을 아는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가 대표적인 가톨릭 신자 다이묘였다. 그의 외손자 고니시 만쇼예수회 신부가 되었고 순교까지 했다. 그 외에도 군사 간베에 등 일본 사극을 보면 센코쿠 시대에 오히려 현대보다도 독실한 기독교도가 많이 나오는데 그만큼 센고쿠시대가 일본 기독교의 전성기였다.[16] 역사스페셜 100화 <임란포로 빈센트 권은 왜 화형 당했나?>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포로가 된 조선인인 권 빈센치오가 예수회에서 선교사 훈련을 받았으나 조선에 파견되기 전에 일본에서 일어난 박해에 휘말려 순교했다.[17] 당연히 카쿠레키리시탄이라도 경조사를 절에서 해결해야 했다.[18] 막말까지 일본과 외교 관계를 맺은 서양 국가인 네덜란드개신교 국가였다. 네덜란드는 종교개혁 당시 앞장 서서 성상파괴운동을 주도했고, 가톨릭 국가 스페인과 치열한 독립전쟁으로 반 가톨릭 정서가 심했다. 또한 일본과 무역 활동시 크게 종교색을 드러내지도 않았다.[19] 이탈리아인 선교사인 조반니 바티스타 시도티(1668~1714)가 밀입국한 일이 있었지만, 카쿠레키리시탄과 접촉하지 못한 채 막부에 투옥되어 옥사했고 쇄국정책 탓에 다른 선교사들이 올 수도 없었다.[20] 억압받은 기간으로만 치면 조선의 2~3배에 육박한다.[21] 지바시의 인구(2015년 기준)와 비슷하다.[22] 도쿄도 신주쿠구, 또는 홋카이도하코다테시 인구의 1.3배 가량이며 도쿄도의 카츠시카구인구와 비슷하다.[23] Иван Дмитриевич Касаткин, 이후 사도 대등자 성 니콜라이로 시성됨.[24] 하코다테의 부활성당, 도쿄의 부활대성당(니콜라이당) 등이 유명하다.[25] 수도원은 2018년 말 경에 시즈오카현 아지로(網代)에서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2019년 7월 폐쇄된 상황이다. 또한 일본 정교회 소속이 아닌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직할 성당이 2곳이 도쿄도내에, 콘스탄티노플 세계 총대주교청 산하의 수도원 1곳이 치바현에 소재한다. 우크라이나 정교회 소속의 선교회도 활동 중이다.[26] 이를 한국의 상황에 비유하자면, 제사를 우상숭배라 배척하는 개신교인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에 비유할 수 있다.[27] 신토의 '현인신' 개념을 지칭하는듯.[28] 일본 가톨릭의 경우, 각 교구수도회에서는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국, 베트남, 필리핀, 페루 등지에서 성직자·수도자 지원자를 받아들이고 있다. 실제로 현재 도쿄 가톨릭 신학원에 재학 중인 신학생 가운데 외국인은 전체의 약 18%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일본 가톨릭 교구의 요청으로 한국 가톨릭 교구에서 사제나 사제수품 전 신학생을 선교사로 파견하는 경우도 있다. 일본 성공회도 사정은 비슷하다.[29] 태평양 전쟁 이후에는 정교분리 및 인간선언 때문에 덴노를 신이 아닌 상징적인 입헌군주로 모시고 있긴 하다.[30] 대표적으로 Fate 시리즈에 나오는 신부 코토미네 키레이나 수녀 카렌 오르텐시아. 말만 신부지 코토미네는 아내도 있고 살인도 하며, 카렌은 수녀면서 버젓이 노출하고 성관계도 맺는다. 실제 가톨릭 사제수도자가 저러면 파면은 물론 매장당한다. 물론 가톨릭이라 명시되진 않고 모델만 따왔다.[31] 가타야마 데쓰(장로교), 오히라 마사요시(성공회), 아소 다로, 요시다 시게루(가톨릭), 하토야마 이치로, 하토야마 유키오(침례교). 역대 일본 총리의 수가 100명이 조금 안 됨을 감안하면 인구대비로는 꽤 많이 배출한 셈이다. 아직 총리는 아니지만 이시바 시게루 자민당 전 간사장도 친척들중 개신교 목사가 많아서 본인도 개신교 신자이다.[32] 창업주 모리나가 다이치로가 감리교인이었다.[33] 창업주인 마쓰모토 노조무(松本望)가 목사 아들이었고, 창업 당시의 사명도 '복음상회전기제작소'(福音商會電機製作所)로 기독교색이 강했다.[34] 이름이 아소 다로이고 세례명이 프란치스코면 フランシスコ 麻生太郎라는 식. 실제로 전 총리 아소 다로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다.[35] United Christ of Church in Japan. 일본어 한문 표기와 달리 영어에는 '연합'이란 표현이 들어간다.[36] 식민지 조선에서도 말썽을 일으킨게 바로 조합교회였다. 결국 광복 이후 한반도에서 회중교회는 완전히 사라졌다.[37] 1933~1997/영화감독. 담뽀뽀로 세계적인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영화에서 야쿠자와 우익단체를 매우 부정적으로 그리면서 결국 그 자신도 야쿠자들을 비난한 영화로 인하여 야쿠자들에게 미움을 사게 되었고 1992년에는 야마구치구미 조직원 5명으로 부터 습격당하기도 했다. 1997년 주간지 플래시에 사생활 및 불륜이 공개되면서 투신자살로 삶을 끝내고 만다. 그런데 이 자살에 의심스러운 부분이 한두 가지가(유서가 자필로 쓰이지 않았다든가 이타미가 평소 자살할 성격이 아니라든가) 아니라서 일본에서는 반쯤은 타살 취급하고 실제로 타살됐다는 내용의 논픽션도 있다.[38] 특히 서프라이즈에서도 언급된적 있는 예수가 사실 일본을 방문한적이 있고 십자가형을 피해 닮은 사람을 죽게 하고 일본으로 도망쳐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아 여생을 살다 죽었다고 주장하는 종파도 있다 그래서 증거를 대라하면 다 없어져 버렸다는 어처구니 없는 답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