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용/지도자 경력

 


1. 통산 감독 전적
2. 실업야구
3.1. 해태 타이거즈 감독 시절
3.1.1. 논란 1 : 폭군인가? 스승님인가?
3.1.1.1. 부정적 의견
3.1.1.2. 긍정적 의견
3.1.2. 논란 2 : 선수단 장악 + 차도남 감독님
3.1.3. 총평
3.2.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
3.3. 한화 이글스 감독 시절
3.3.1. 2013 시즌 전
3.3.2. 2013 시즌
3.3.3. 2014 시즌
3.3.4. 총평
3.3.4.1. 부정적 평가
3.3.4.2. 긍정적 평가
3.3.5. 타이거즈 야구 먹칠 발언 논란
3.3.6. 재평가?


1. 통산 감독 전적


'''역대 감독 전적'''
년도
소속팀
경기수



정규리그
포스트시즌
1983
'''해태 타이거즈'''
100
55
44
1
<color=#373a3c> '''1위'''
<color=#373a3c> '''우승'''
1984
100
43
54
3
5위
-
1985
110
57
52
1
3위
-
1986
108
67
37
4
2위/2위[1]
<color=#373a3c> '''우승'''
1987
108
55
48
5
3위/2위
<color=#373a3c> '''우승'''
1988
108
68
38
2
<color=#373a3c> 1위/1위
<color=#373a3c> '''우승'''
1989
120
65
51
4
2위
<color=#373a3c> '''우승'''
1990
120
68
49
3
2위
3위
1991
126
79
42
5
<color=#373a3c> '''1위'''
<color=#373a3c> '''우승'''
1992
126
71
54
1
2위
3위
1993
126
81
42
3
<color=#373a3c> '''1위'''
<color=#373a3c> '''우승'''
1994
126
65
59
2
3위[2]
4위
1995
126
64
58
4
4위
-
1996
126
73
51
2
<color=#373a3c> '''1위'''
<color=#373a3c> '''우승'''
1997
126
75
50
1
<color=#373a3c> '''1위'''
<color=#373a3c> '''우승'''
1998
126
61
64
1
5위
-
1999
132
60
69
3
4위[3]/7위[4]
-
2000
133
57
72
4
4위[5]/6위[6]
-
<color=#373a3c> '''통산'''
<color=#373a3c> 2147
<color=#373a3c> 1164
<color=#373a3c> 934
<color=#373a3c> 51
<color=#373a3c>­
년도
소속팀
경기수



정규리그
포스트시즌
2001
'''삼성 라이온즈'''
133
81
52
0
<color=#373a3c> '''1위'''
'''준우승'''
2002
133
82
47
4
<color=#373a3c> '''1위'''
<color=#373a3c> '''우승'''
2003
133
76
53
4
4위
-
2004
126
74
48
4
'''2위'''
'''준우승'''
<color=#373a3c> '''통산'''
<color=#373a3c> 532
<color=#373a3c> 312
<color=#373a3c> 204
<color=#373a3c> 16
<color=#373a3c>­
연도
소속팀
경기



정규시즌
포스트시즌
2013
'''한화 이글스'''
128
42
85
1
9위
-
2014
128
49
77
2
9위
-
<color=#373a3c> '''통산'''
<color=#373a3c> 256
<color=#373a3c> 91
<color=#373a3c> 162
<color=#373a3c> 3
<color=#373a3c>­
<color=#373a3c> '''총계'''
<color=#373a3c> '''2935'''
<color=#373a3c> '''1567'''
<color=#373a3c> '''1300'''
<color=#373a3c> '''70'''
<color=#373a3c>­

2. 실업야구


1973년에 33세의 나이로 한일은행 감독에 취임해 기나긴 감독 커리어를 시작한다. 이때부터 이미 우승 청부사로 불리고 있었으며 77년에는 니카라과 인터컨티넨탈컵 대표팀 감독을 맡아 한국을 세계대회 첫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저 시절, 한일은행 직원으로 일하기도 했단다.

3. KBO 리그



3.1. 해태 타이거즈 감독 시절


[image]
[image]
대만 전지훈련 때 식사하던 사진. 이 때 42세였다. 그야말로 왕성한 활동력에 팔팔할 때 나이.
[image]

'''만일 제도가 바뀐다면 우리는 또한 그 바뀐 제도에 따라 우승할 것이다.'''[7]

1981년 대한야구협회에서 추진한 야구인 해외 연수 프로그램의 첫 번째 수혜자로 선정[8]되어 임신근[9]에게 한일은행 감독직을 넘긴 뒤 미국 조지아 서던 대학교[10]로 유학을 떠나# 대학야구 팀에서 연수를 받았다.[11] 해외 연수 프로그램은 대한야구협회에서 야심차게 시작한 사업이었으나 한국프로야구의 창설 이후 무게가 프로 쪽으로 쏠리면서 대한야구협회의 처지는 어려워졌고 결국 프로그램은 더 이상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프로야구 출범 당시 각 팀에서 아무도 러브 콜을 하지지 않아 '''자존심이 상해''' 야구 연수를 간다는 이유로 1년동안 도미했다'는 식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 조용히 귀국해서 개막전을 봤던 것은 사실이지만. 나중에 김응용이 KBS N SPORTS의 「한국야구 레전드」 김응용 편에 나와 그 때 코치 자리조차도 제의를 받지 못한 것에 관해 자신의 생각을 말한 적이 있는데, 당시 야구단 감독으로 해당 연고지 출신의 야구인들이 임명되는 분위기에서[12] 자신은 북한 평안남도 출신이라 부름을 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술회했다.#[13] 1983년에 연수를 마치고 돌아와 1982년 시즌 초반 해임당한 김동엽 초대 감독의 뒤를 이어 원년 시즌이 끝난 1982년 11월 3일, 해태 타이거즈의 2대 감독으로 부임한다.
취임 기자 회견에서 올시즌 목표를 묻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목표야 물론 우승이지요". 당시 1983년 해태의 전력으로 보면 이는 허세로만 들렸다. 1982년보다 강화된 전력이라 해봤자 전해 부상으로 거의 개점 휴업이었던 이상윤이 회복되었다는 점과, 닛폰햄-한신 2군에 있던 재일교포 투수 주동식의 영입 정도 뿐, 그것만 가지고는 우승은 커녕 상위권조차 장담하기 힘들었다. 다만 14명으로 시즌을 치렀던 원년에도 해태 타이거즈는 팀홈런 1위를 기록하고 홈런왕/타점왕/도루왕을 모두 보유했던 팀이었다. 가능성은 있는 팀이었던 셈.
그러나 해태는 장명부를 앞세운 삼미를 제치고 전기우승을 확정짓고, 1983년 한국시리즈에서 MBC를 격파하고 창단 최초 우승을 한다. 이 때 해태가 못 했다는 건 아니지만, 보너스 문제로 구단과 선수들 사이에 갈등이 생겼던 MBC가 자멸한 것도 어느 정도 영향이 있었다.
이후 2000년까지 해태 타이거즈의 감독을 지내며, 해태의 한국시리즈 9회 우승을 이끌었다.

3.1.1. 논란 1 : 폭군인가? 스승님인가?



3.1.1.1. 부정적 의견

군대와 비견되던 예전 해태의 강압적인 이미지를 만든 데에 일조했으며 그 정점에 있었던 김응용은 해태의 독재자이자 폭군이라는 지독한 별명까지 얻었다.
어느 감독이든 자신이 좋아하는 선수를 중용하고 싫어하는 선수를 멀리하는 경향이 있지만 김응용의 경우는 어떤 선수라도 경기에서 실책을 저지르거나 본헤드 플레이를 보이면 그 자리에서 얼차려를 시키거나 발로 걷어차는 등 프로팀이라기 보단 군대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으며 한창 잘 하는 선수라도 한 번 눈밖에 나면 무조건 썩혀두거나 트레이드해버리곤 했다. 즉, 실력도 있고 그 실력이 꾸준히 유지되는 선수만 칼같이 우대한 것. 1993년 지상파 방송중계 도중 올스타전에서 팀의 주축선수를 발로 걷어차는 장면이 그대로 방송을 탄 적도 있다. 해당 선수는 도저히 감독님 밑에서 못뛰겠다면서 트레이드를 요구했고 이듬해 바로 트레이드 되어 그 팀의 우승을 이끌게 되는데 그 선수가 바로 '''한대화'''.[14] 2012년 KBS N SPORTS에서 기획한 「한국프로야구 레전드 10인」한대화 편에서 김응용은 '그 올스타전이 애들 장난인데 내가 뭐하려 걔한테 그랬겠느냐' 그러면서 둘러대는데 실제 영상보면 제대로 엉덩이에 조인트.#[15][16]
김응용의 폭력은 아주 유명했는데, 해태 투수인 방수원은 강판에 불응했다는 이유로 덕아웃으로 끌려와서 주먹으로 맞은 경우도 있었다. 이것이 TV에 찍혀나와 한동안 구설수가 되었다. 그리고 김응용 밑에서 이를 배운 김성한#s-1이 후에 이를 따라한 김지영 포수 구타사건을 일으키다가 결국 논란을 빚었다. 박충식의 증언에 의하면 해태 타이거즈에서는 자신이 트레이드 된 2000년대 초반까지도 구타문화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2군에서는 제대로 못한 선수를 코치가 따귀를 때리는 게 다반사였다고.[17]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에도 이 선수에게 경기 중에 엎드려 뻗쳐를 시키는 게 사진에 찍히기도 했다.
요즘 시대에 이런 식으로 선수들을 다뤘다간 스포츠 기사가 아닌 사회 기사에 이름이 실리기 딱 좋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성적이 좋다는 이유로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 묵인되었지만, 조금씩 구타 문제를 사회적으로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는(적어도 다루는 척이라도 한다는) 점을 보면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듯 하다.

3.1.1.2. 긍정적 의견

폭력 문제에 대해서는 지금 보면 심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 프로 의식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던 프로야구 초창기에 감독직을 시작했다는 것과 당시 야구계를 포함해 사회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군사정권 특유의 수직적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추세였다는 점을 감안하여 바라볼 필요가 있다. 김응용의 이러한 성향 외에도 창단 때부터 해태는 군기로 유명한 군산상고 출신이 많았다. 원년멤버이자 초반 해태 우승의 견인차였던 김봉연, 김성한, 김준환, 김일권, 김용남 등등이 모두 군산상고 출신. 고교 선후배들의 관계가 그대로 이어진 분위기에서 김응용 역시 자연스레 선배 세대부터 내려온 엄격한 군기+구타 문화에 편승하게 된 것이다.
해태 선수들이 대체로 개성이 강했기 때문에, 유약한 성격으로는 제대로 이끌 수가 없다는 점에서 이런 폭력을 곁들인 카리스마는 어쨌든 해태 왕조를 여는데 도움이 되었다. 프로 초창기에 선수들은 아마때의 습관이 남아 있어서 자율적으로 훈련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시켜야만 움직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었다. 당시 프로 역할을 하던 실업야구는 선수간 연봉차도 거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선수생활 은퇴 후에는 정식으로 입사시켜줘서 미래를 보장해줬기 때문에, 선수들은 잘하나 못하나 똑같은 월급을 받으니 열심히 할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게을리하는 것 같으면 아무말 없이 야구방망이로 땅을 툭툭 두들겼다던데, 그 무시무시한 침묵의 카리스마에 열심히 하는 척이라도 안 하면 못 배길 지경이었다고 한다.
또 김응용의 철권통치에는 확고한 실력 제일주의 원칙이 있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김응용 감독은 정말 실력이 있는 선수라면 술을 마시든 무엇을 하든 간에 자기 앞가림만 제대로 한다면 간섭은 커녕 적당히 못본체 해주었다. 선동열이나 한대화, 임창용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선동열훈련에 늦지만 않는다면 밤새 술을 퍼마셔도 간섭하지 않았고[18] OB 베어스에서 뛰던 한대화해태 타이거즈 이적 얘기가 나오자 기겁하고 차라리 은퇴하겠다는 말까지 꺼냈지만, 정작 해태 타이거즈로 온 한대화에게 김응용 감독은 도리어 "넌 일찍 출근할 필요 없어. 늦잠 자고 나와도 돼" 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간염 환자인 한대화가 충분한 휴식으로 몸을 추스리도록 한 배려였다. OB 베어스 시절과 훗날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의 한대화김성근과 겪었던 불화와 대조되는 부분. 강훈련을 강조했던 김성근OB 베어스 시절부터 한대화를 태만한 선수로 생각했고, 이는 한대화가 은퇴식도 치르지 못하고 선수를 그만두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 그저 그런 선수가 일탈을 저지른다면 그야말로 '''헬 오브 지옥'''을 맛보여줬다. 현재 야구계에서 종사하는 사람 중에서 이에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으로 대표적인 게 양승호 전 롯데감독. 이 양반이 해태 시절 일화가 좀 쩌는데 매번 일찍 나와서 광주구장 한 켠 시원한 바람부는 명당(?)에서 낮잠 자다가 김응용 감독한테 걸려서 혼나고 술 마시는것도 항상 이 양반이 중점적으로 걸렸다고 한다. 그리고 [19] 이병훈 해설. 이 때문인지 이병훈 해설은 김응용 감독이 한화 감독으로 부임하자 사사구에서 굉장히 부정적인 의견을 날렸다. 근데 이 뒤로 이병훈은 해태를 떠나 삼성으로 트레이드되고, 1997 시즌 전 음주운전 교통사고로 시즌아웃되는 병크를 치고 은퇴를 해서...
이처럼 어디까지나 실력에 따라 당근과 채찍을 가했으므로 별말이 나올 수가 없었다. 지금도 수많은 지도자들이 학연, 지연이나 연공서열에 따라 선수를 기용한다는 점에서 김응용의 실력 제일주의는 지금까지도 야구계에 많은 의미를 시사하고 있다. 김응용은 은퇴후 인터뷰에서 '난 이북 출신에 부산상고에서 야구를 배웠고, 타이거즈 감독을 오래 했으니 전라도 사람이고, 삼성에서 우승했으니 대구 사람이다'라는 발언을 하였다. 지역드립같은 건 이미 초월하신 분. 참고로 선수시절에는 크라운맥주, 한일은행 소속으로 서울에서 생활하였다.
성적이 좋았건 어쨌건 폭력 자체는 정당화될 수 없고 정당화되어서도 안 되기에 이런 점을 근거로 김응용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당시의 폭력문제를 현재의 잣대를 대서 과거 김응용의 감독으로의 리더쉽과 그 업적을 평가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상기했듯 당시는 군대식 수직적 위계질서를 강조하던 사회였고, 인권에 대한 이해와 성숙이 부족했던 동시에 수직적 문화가 어찌됐건 성장의 발판으로 잘 먹혀들어가던 시대였다. 당연히 체벌이나 폭력 등은 가해자나 피해자나 제3자나 수직적 위계질서의 유지를 위하여 다들 묵인하는 내지는 장려하는 추세였다.[20] 김응용은 20세기 한국 프로야구 태동기라는 당시의 환경 속에서 성적을 내는 데에 최적의 방법을 택했던 것이고, 그것이 지금의 관점으로 본다면 성적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가혹행위일지라도 인권 개념이 막 뿌리를 잡을 자리를 찾던 당시로서는 성과를 내는 데에 특효였던 보편적인 도구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앞에서도 말했듯이 선수들에게 항상 폭력만 휘두른 게 아니라, 필요할 때는 몸소 보살펴주기도 하고 자기가 해야 할 일과 앞가림만 잘 하면 사생활까지 일일이 간섭하지는 않았으므로 무작정 주먹질만 한 감독이라고 비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3.1.2. 논란 2 : 선수단 장악 + 차도남 감독님


한화에서 70대 노장을 삼고초려한 이유도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김응용은 기본적으로 선수단에 파벌이 생기는 것을 싫어하여 파벌을 만드는 선수들을 족족 트레이드시키고, 선수단의 단합을 해칠까봐 특정선수에 대한 공개적인 총애마저 삼가는 등 이런 면에서는 굉장히 철저하다. 전 해태 투수였던 이상윤과 관련된 일화에서 그 모습을 알 수 있다. 술친구였던 한국 최초의 권투 세계챔피언 김기수씨가 투수 이상윤의 장인이 되자, 이후 김기수씨와 만나는 걸 삼갈 정도. 참고로 김기수씨는 호남지역에 아무런 연고가 없던 김응룡 감독이 해태 타이거즈 감독으로 부임했을때 광주에서 유일한 지인이였다. 당시 광주에서 김응룡 감독의 유일한 낙이 경기가 없을때 김기수씨 만나서 술한잔 하는거였다고...
심지어 선수들과 개인적으로 친해지는 것도 극히 피했다고 한다. 해태에 몸담았던 어떤 선수는 트레이드로 다른 팀으로 갈 때 작별인사를 한 게 김응용 감독과 가진 유일한 일대일 면담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해태신화가 설립되기 전 해태가 두번째 우승을 한 1986년의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저라고 왜 선수들과 술한잔 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나라 선수들은 그런 술자리를 꼭 그라운드까지 연장시키려고 하니...(그런자리를 피합니다.)". 김성근 감독도 비슷한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선수와 감독이 농담을 할 정도라면 보기는 좋을지 몰라도 이미 그 팀은 끝장난 거라고. 물론 김인식이나 류중일같이 인화력으로 선수단을 이끌면서 좋은 성적을 내는 감독들도 있다. 시대가 변하면서 선수들의 프로 의식이 어느 정도 발전한 만큼 감독 스타일의 대세도 변하고 있는 셈.
북일고 인맥과 프랜차이즈 스타 코치들의 폐해가 심각한 한화의 악습을 깨기 위해서는 적임자가 온 듯하다.
이러한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이순철 숙청사건이다. 이순철은 해태의 주장이었으며, 90년대 초중반 해태 선수단은 이순철이 통솔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이순철보다 더 빠른 발과 장타력을 겸비한 이종범이 이순철의 1번타자 자리를 가져갔고 거기에 1994년을 기점으로 이순철의 실력이 내리막을 타자 그의 이용가치도 사라져버렸다. 이순철의 특권은 조금씩 박탈되었고, 결국 오랜 시간 해태의 리더였던 이순철은 항명사건을 거치며 단칼에 해태에서 방출되었다.
그런데 이건 또 김일권 숙청의 후속편이었다. 원년 멤버이자 도루왕이었던 김일권 역시 풍운아로 유명했으며 불고기 화형식 등 일화가 많은 선수였는데, 일단 실력이 되었기 때문에 넘어가다가 나이가 들고 대안이 될 선수가 등장하면서 칼을 뽑고 태평양 돌핀스로 트레이드 해버렸다. 그 대안이 되었던 신인선수가 바로 이순철이라는 것.[21] 이렇게 지속적인 물갈이(?)를 통해 김응용 감독은 세대 교체와 선수단 내 파벌 축출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3.1.3. 총평


야구 외적인 팀 관리나 조직면에서 무척이나 유능한 사람이다. 개성 강한 팀을 말 그대로 장악해버리며 팀을 이끌었고, 선수들과 일절 소통을 피하며 공정성을 보이려 했다. 더불어 당시로는 드물게 과도한 훈련을 지양했고, 시대에 발맞춰 연투 조절을 하기도 하엲다. 무엇보다 결과적인 의미로 9번의 우승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엄할 땐 엄하지만 2군급 선수들에게 사비를 털어서 월세방을 구해주는 등[22] 적절한 당근을 써먹어가며 딱 불만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만 선수단을 통제하는 능력은 매우 뛰어났으며, 깨끗한 사생활 관리나 적절한 쇼맨쉽, 무엇보다도 넘사벽급의 뛰어난 성적은 주변의 비난들을 잠재우기엔 충분했다.

3.2.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


[image]
2000년 10월 30일 삼성 감독 취임식에서.
[image]
언제나 우승 후보였고, 정규 시즌에서의 압도적인 성적에도 불구하고 꼭 한국시리즈에서 발목을 잡혀 무관의 제왕이라는 결코 좋지만은 않은 별명을 받아들여야 했던 삼성 라이온즈는, 우승에 대한 염원으로 2000년 시즌을 마치고 김응용을 모시다시피해서 데려오게 된다. 여기에는 IMF 사태로 인해 해태 타이거즈의 모기업인 해태가 부도난 것과 해태 구단 수뇌부와 김응용 간의 마찰이 있었던 것도 김응용의 삼성 라이온즈행에 한몫했다.
V9 이후 이종범마저 팔리자 친 김응용 감독은 아예 팀에 손을 떼다시피 했다. 그런데 나중에 밝혀진 사실로는 1999년 무렵 해태 쪽에서 먼저 김응용 감독의 삼성행을 제의했다고 한다. 이종범이 팔려 나간 뒤에 해태와 삼성 프런트 사이에서 이야기가 끝나 김응용 감독만 승낙하면 곧바로 삼성행이 보장된 상태...였으나 선수까지 팔다, 이젠 감독도 다른 팀에 팔아 버리냐는 무등 아재들의 분노에 어쩔 수 없이 1년 더 맡았던 것.[23] 해태 말년에 괜히 손을 뗀게 아니다.
라이벌 팀의 수장 김응용의 삼성행은 가장 큰 이슈 중 하나였다. 당시 적지 않은 삼성 팬들이 '삼성을 가장 많이 무릎 꿇렸던 주적 김응용을 데리고 오는 걸 보니 팀에 정나미가 떨어진다'며[24] 삼성 팬을 관두는 사람도 있었고, 또한 해태 출신인 유남호, 김종모, 김종윤, 신용균 등이 상당수 코치진에 포진되어 있었기에 당시만 하더라도 김응용 감독에게 불만을 품은 팬들이 많았다. 이러한 이유로 당시 삼성을 비꼬던 말인 '''해삼 라이거즈'''라는 이름까지 생겨났을 정도였다.
하지만, 오히려 김응용이 오기 전에 삼성 라이온즈이만수로 대표되는 프랜차이즈 스타에게 홀대한 데 비해, 김응용은 쫓겨나다시피하며 해태 타이거즈로 이적하여 그와 잠시 함께했던 양준혁을 2002년에 다시 삼성으로 데리고 왔고, 팀의 숙원이었던 KBO 한국시리즈의 한을 풀어 주었으며, 감독 은퇴 후에도 구단의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지역 유소년 및 아마 야구계를 위해 활동하고, 프랜차이즈 스타들을 챙기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여 2002년 우승 이후로는 김응용 감독에 대한 팬들의 불만이나 비난은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특히나 기존시스템을 다 때려부수고 자기만의 확고한 야구철학으로 팀을 인솔하는 방식으로 인해 삼성 프론트 및 선수단과 갈등을 빚고 해임된 김성근 감독과는 달리 유연한 자세로 삼성의 팀컬러와 전통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야구철학을 접목시킨 것으로 인해서 그후로도 크게 비판을 받은일도 없으며 오히려 해가 갈 수록 점점 더 좋은 평가를 들었다.
2001년 부임 첫해 삼성 라이온즈 선수단의 인식을 크게 바꾸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바로 이승엽 오렌지 사건이다. 2001년 스프링캠프 당시 이승엽이 하루 연습을 마치고 오렌지를 까먹다가 오렌지칼에 손바닥 자상을 입고 다음날 연습에서 휴식하게 됐다. 이런 황당한 부상사건이 생기자 노발대발한 김응용은 즉시 선수단을 모집했는데, 오렌지를 들고 와서는 선수단 앞에서 오렌지를 그 큰손으로 거칠게 까먹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나가면서 선수단에게 "오렌지는 이렇게 까먹는거야. 알았어?!!!!". 이후 선수단 분위기는 안 봐도 비디오. 도련님 야구를 한다는 소리를 듣던 삼성 선수단의 의식변화에 계기가 된 일이라 한다.[25]
다만, 이해에 정규시즌 우승으로 한국시리즈에 직행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시리즈에서 정규시즌 3위였던 두산 베어스에게 패함과 동시에 본인의 한국시리즈 전승 기록이 깨져버리고[26] 감독 인생 첫 준우승을 기록하였다. 김응용이라도 삼성의 한국시리즈 저주는 풀 수 없다는 말이 나왔으나, 2002년에 김성근LG 트윈스에게 백투백 끝내기 홈런으로 승리를 거두며 삼성 라이온즈의 숙원이었던 한국시리즈 우승을 달성하게 된다. 2002년 한국시리즈 참조. 이로 인해 김응용은 '''대한민국 최초이자 유일한 한국시리즈 10회 우승달성'''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image]
2002년 한국시리즈 우승 시상식때. 이 수상 소감 자리에서 LG 트윈스김성근 감독 최고의 별명 '''야신'''이 만들어 졌다. 당시 모든 면에서 삼성 라이온즈와 전력이 비교가 안되던 LG 트윈스가 계속 삼성을 물고 늘어지자 김응용은 우승후에도 "김성근 감독이 잘했어요, 신과 싸우는듯 했다."라고 밝힌 소감에서 비롯된 말. 근데 그 말뜻에는 "나는 신보다 더 위대하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이건 본인도 인정했다. 상대도 부족한 전력에 정말 최선을 다해서 싸웠으니 상대를 추켜 주면서도 티 안나게 내 자랑을 하는 법이 뭐가 있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아! 신이라고 해주자. 생각했다고. 김성근 감독도 이 말을 듣고는 대번에 진의를 파악하고 피식 웃으며 "그럼 날 이긴 자기는 뭐가 되느냐"고 응수했다고 한다.
이후 2003년에도 시즌 초부터 KIA 타이거즈와 함께 우승 후보로 지목받았고, 전년도에 성공했던 공격야구를 앞세워 시즌 중 현대 유니콘스, SK 와이번스와 치열한 선두 다툼을 펼치며 2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을 하는 듯 싶었으나, 후반기부터 팀 성적이 쳐지기 시작하며 결국 시즌을 3위로 마감,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하나 전년도 삼성에서 배터리코치로 활동했던 조범현이 이끄는 SK 와이번스에게 2연패를 당하며 패배, 2004년 김재박의 현대 유니콘스와의 한국시리즈 패배를 끝으로 감독직을 당시 수석코치였던 선동열에게 물려주고 길고 길었던 감독 생활을 마감했다.
복기해 보면 '''이 시기부터 시대와 조금씩 어긋나고 있었다.''' 삼성 감독 첫 해였던 2001년 누가 봐도 앞서는 전력에[27] 한국시리즈 직행이라는 유리함까지 갖췄음에도 준플->플레이오프까지 거친 김인식 감독에게 일방적으로 당했고,[28] 2002년에는 정규리그 1위를 차지하고 한국시리즈에서도 우승을 이뤄냈으나 시즌 막판까지 2위 팀 KIA와 치열한 선두 경쟁 끝에 겨우 정규리그 1위를 차지했으며 한국시리즈에서도 역시 작년 두산과 똑같은 조건의 LG를 상대로 7차전까지 갈뻔했다.[29] 2003년에는 시즌 초 10연승을 달리는 등 전반기만 해도 1~2위 자리를 다투다가 7월 즈음때부터 슬슬 미끄러지기 시작해 3위로 추락,[30] 준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되었고 전년도까지 삼성의 배터리코치로 일했던 초보 감독 조범현이 이끌던 당시 신생팀 SK에게 2연패로 스윕당했다.[31] 마지막으로 2004년에는 한국 시리즈에서 몇 년째 모기업 지원이 끊긴 현대에게 9차전 까지 가는 접전 끝에 무너졌다. 9연패를 찍은 것도 이 시기의 일. 여름에 강해지는 삼성의 종특 때문에 후반에 치고 올라와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여담으로 2004년 삼성 호지스의 빈볼에 빡쳤던 SK 브리또가 삼성 덕아웃을 습격했을 당시 SK 카브레라를 헤드락으로 제압하였다. 훗날 김승우의 승승장구양준혁, 이종범과 출연했을 당시 카브레라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해서 헤드락을 풀어줬다고... 박명환야구TV에서 오상민이 밝힌 일화로 오상민이 SK전에 등판하여 역전패로 져서 속상한 나머지 씻지도 않고 밥도 안 먹고 구단버스에 혼자 앉아 있었는데 오상민을 발견한 김응용이 매니저를 불러 밥먹이고 씻기라고 지시했던 모습에 가슴이 찡했다고 한다.

3.3. 한화 이글스 감독 시절


[image]
'''2012년 10월 8일, 한화 이글스차기 감독으로 확정되었음이 알려졌다.''' 임기 2년에 계약금, 연봉 각 3억원으로 총 9억원에 계약을 맺었다. 당연히 한화 이글스 갤러리를 포함한 모든 야구 관련 갤러리들은 대폭발. 거기다가 이종범이 주루코치로 합류하고, 김성한#s-1은 수석코치로, 또다른 감독 후보군이었던 이정훈까지 2군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면서 박찬호김태균을 맞이하게 된 작년 못지않게 뜨거운 비시즌을 보내게 되었다. 1군과 2군 모두 한 성질 한다는 지도자들로 채워졌으니 이제 농땡이피우던 선수들의 도망갈 길이 전부 막혔다는 평. 이때 김승연 회장은 배임-횡령사건으로 2012년 8월에 징역 4년을 선고받고 김응용 감독 선임시 옥중에 있었다. 이런 가운데 한화 프런트는 후임 감독으로 김재박을 선임했으나, 옥중에 계신 회장님의 최종 결재 단계에서 반려되었고, 김승연 회장의 장남이 부친의 의중에 따라 김응용 감독측과 접촉하여 영입했다고 알려져 있다. 취임사는 '''못하면 죽는다.'''

3.3.1. 2013 시즌 전


시즌 전부터 논란을 만들면서 건재함을 과시하셨다.

3.3.1.1. 류현진 논란

2012년 10월 24일 류현진의 메이저리그 진출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하면서 논란을 불렀다. 이 의사표명은 며칠 전 류현진이 했던 인터뷰에 대한 대응으로 보인다. 사실 소속 선수의 팀 잔류를 원한다는 의사표명 자체는 문제가 될 게 없다. 팀에서 에이스급 투수가 나가는데 좋아할 감독이 누가 있는가? 문제는 야인시절에는 한시라도 빨리 가야 된다던 사람이 감독이 되고 나서 말이 달라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에, "'''한입으로 두말한다'''"고 욕먹는 것을 일단 피할 수 없고, 기사내용 중에 류현진을 깎아내리는 내용이 있다는 것. # 특히 정치인들, 그 중에서 미제 타도를 강조하시고 평양 김씨 일가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분들이 주로 쓰는 단어인 해당행위(害黨行爲) 라는 '''매우 부적절한''' 단어선택과 20승 투수 언급이 반감을 크게 모았고, 게다가 류현진과 김응룡이라는 두 인물이 가지는 상징성 때문에[32] 한화 팬들의 여론은 매우 안 좋아진 상태. 게다가 한화 팬이 아니지만 류현진을 응원하는 야구팬들도 꽤 많고 이들은 당연히 류현진에 대한 동정적인 시선을 가진 만큼 이미지에 꽤 큰 타격을 받을 듯 하다.
근데 원래 김응룡 감독은 직설적이고 거친 입으로 예전부터 유명했다. 일단 올해(2012년)까지 류현진 문제는 계속 경신될 것으로 보이며 과연 이 문제를 어떻게 끝낼지가 주목되었다. 그리고 당시 한화 이글스의 상황을 나타낸 짤.
일단 10월 29일 류현진의 포스팅 추진이 결정되었고 김응용 감독은 '아쉽지만 가서 잘 활약하길 바란다'며 입장을 내 보였다. 해당행위니, 9승 투수라 가치가 없다니 하면서 류현진을 까내리면서까지 붙잡겠단 지난 기사하고는 정 반대의 입장인 셈. 게다가 '''9승밖에 못한 투수'''소리를 들으며 기분이 상했을 것 같은 류현진도 진심으로 감사하다며, 이번 포스팅으로 성공을 못하면 국가와 팀에 기여하고 다시 가치를 인정받겠다는 뒤끝없는 인터뷰로 화답했다. 불과 3일 지났는데 당사자들끼리는 별 감정이 없는 게 어쩌면 이거... 그래서인지 김응용 감독이 일부러 여론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 어그로를 유발했다는 견해도 있다.[33] 어쨌든 류현진이 메이저리그에 가는건 성사되었으니... 참고로 김응용이 해태시절 하던 주특기중 하나가 '''일부러 심판에게 어그로를 끌어서 본인은 퇴장된 뒤 그 사이에 교체투수에게 몸풀기를 시키는 일'''이었다. 기사를 읽어보고 판단은 알아서 하도록 하자.
다만 적어도 한화 감독을 맡기 전에는 류현진의 해외진출을 분명 지지했지만 2013년 시즌 들어서 성적이 부진하자 '''"류현진이 남아있을 줄 알고 류현진만 보고 왔는데 훌쩍 떠났다", "딱 1년만 남기를 원했다"'''라는 발언들을 하면서 한화 감독을 맡은 후에는 류현진의 해외진출을 진심으로 원치 않았던 것으로 보였다. 감독 입장에선 팀의 에이스가 빠져나갔으니 더더욱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다.
허나 2015년 기사에 따르면 한화 감독직을 수락할 때 본인 의사와는 상관없이 구단에서 그 전에 이미 류현진의 해외진출을 결정했다고 한다. 결국 김응용 감독은 류현진의 메이저리그 진출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독박을 일부러 쓴 셈.#

3.3.1.2. 김주찬 논란

FA 우선협상기간 마지막날인 11월 16일 "김주찬은 50억 가치가 있는 선수"란 인터뷰를 했다. 타팀의 FA와 접촉이 금지되는 우선협상 기간중에 협상 카드를 제시한 편법이라는 의견을 가진 야구팬들과 이택근의 50억 원 계약 이후 FA선수들에게 너무 거품이 낀게 아니냐는 불만을 가지고 김주찬의 협상을 지켜보던 야구팬들 양쪽에게 폭풍같은 까임을 받았는데, KIA 타이거즈가 김주찬에게 진짜 50억 원을 줘버렸다.
졸지에 롯데는 타선 누수가 심각해졌고, KIA는 2013년 FA(이용규, 윤석민)가 있는데 50억 원이란 엄청난 거금을 써서, 자금 운용에 지장이 생길테고, 뜬금없이 중견수는 강동우가 나이도 많은데 가장 잘치는 거 같다며, 강동우를 기용할 것을 내비쳤다. '애초에 김주찬을 영입할 생각이 있긴 했던 걸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그러나 2013 시즌 돌입하고 김주찬은 50억 가치를 하는 듯했다. 후에 김응용은 인터뷰에서 김주찬을 영입하고 싶었다는 언급을 하였지만 궁색한 변명처럼 여겨졌으나.... '''2016년 김주찬의 활약을 보면 역시 갓끼리감독'''이란 평가가 무색하지 않다. 방탄유리로 돌아온 김주찬은 공수주에서 대활약하며 기아타이거즈의 타선을 이끌고 있다. 게다가 김주찬은 FA 마지막 해인 2017년에는 한국시리즈에서 기아 타이거즈의 11번째 우승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게 되므로써 김응용이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선수보는 눈 만큼은 여전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다른 부분들은 김주찬 문서 참조.

3.3.1.3. 트레이드 논란

장성호를 롯데와 트레이드 하면서 받아온 선수가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는 수준이라 한화팬들의 멘탈을 붕괴시키는 중. 물론, 장성호가 한화에서 좀 성적이 안 좋아서 팀 정리겸 트레이드를 시킬수야 있는 것이지만 그래도 장성호 정도급의 선수를 내주면서 받아온 선수라는게 꼴랑 '''3라운드픽 신인 1명'''... 그렇다고 송창현이 아마에서 성적이 좋았냐면 그것도 아니라서 개밥신보다 더 기대가 안 될 정도라 한화팬들을 절망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송창현이 2013년에 엄청난 성장세를 보이고 후반기에는 실질적인 한화 에이스 역할을 하면서 이 트레이드는 운영은 개판일지언정 선수보는 눈은 죽지 않은 김응룡감독의 한수로 평가받고 있다.

3.3.2. 2013 시즌


한화 팬들은 과거 명장이었으나 오랜만에 복귀이후 커리어 다 까먹는 흑역사 감독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우려했지만, 그래도 V10을 이룩한 명장이기에 시즌 전까지만 해도 기대가 컸다. 김응용 특유의 카리스마로 선수단을 장악하여 프로근성이 없는 선수들의 마인드를 재무장시키고 선수를 재발굴해내어 착실한 리빌딩을 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하였으나...
'''개막 후 13연패로 한국프로야구 개막 최다연패 기록인 2003 롯데의 12연패를 깨면서 야구 인생에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한화 이글스는 이미 오래전부터 침체되어 왔던 팀이지만 작년의 나쁜 성적보다도 더 밑으로 내려간 초반 성적을 냈기에 옹호여론이 거의 사라지는 추세, 거기에 작년 후반기 한용덕 감독대행의 팀 성적과 비교되고 비판받는 상황. 사실 김응용 감독이 부임하고 팀을 4강으로 이끌겠다고 했지만 침체된 팀 상황을 구할 마땅한 대안을 남기지 못했다. 심지어 13연패째를 기록한 LG와의 삼연전에서는 이해하지 못할 투수 선발기용과 교체로 빈축을 샀다.
그래도 첫 13연패 기간 동안은 나름의 옹호가 있었다. 한화는 작년에도 꼴지였고 팀의 주축이던 류현진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로 떠난 이상 전력이 약화된 것이 자명하니 아무리 훌륭한 감독이라도 한계가 있다는 것. 문제는 13연패를 끊어낸 이후에 김태균의 활약으로 3연승을 거두긴 했지만 장기적으로 가도 상황이 좋아지진 않았다는 것이다.
가장 크게 문제가 되는것은 투수운용으로 선발로 나왔던 투수가 다음날 불펜으로 나오고 전날 불펜으로 출격했던 투수가 다음날 선발로 나오는 등 이해할 수 없는 쌍팔년도 야구가 계속되고 있다. 연패 막바지부터 시작된 이러한 투수운용에 비판에 목소리가 나왔으나 김응용 본인이 연패만 끊고나서 정상적인 운용으로 돌리겠다고 발언했기에 일단은 지켜보는 분위기. 하지만 연패가 끊기고도 운영이 정상화 되기는 커녕 더 심각해져서 유창식의 경우 4월 26일부터 5월 3일까지 8일간 선발 1회, 구원 4회로 무려 5회를 등판했고 그 다음날인 5월 4일은 선발로 등판할 예정이다. 또한 송창식의 경우 혹사를 당하고 있는 와중에 6점차 리드상황에 등판하는 등. 상식이 있는 야구팬이라면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는 투수운용과 혹사를 반복하고 있다. 거기다 야수진도 김태균, 최진행, 이대수 등을 빼면 노답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한승택이나 하주석같은 신진급 선수들도 성장세가 더딘 편.
시즌 초반에는 대체로 '아무리 명장이라지만 이미 10여년전에 한 번 감독을 은퇴했던 사람이고 그 때문에 현대 야구에 적응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분석과 '''현재의 한화 이글스는 몇 년간 체계적으로 리빌딩을 했어야 했다는 점에서 서로 궁합이 맞지 않았다'''는 평가가 있었다. 그러나 5월로 접어든 현재는 '''그딴 거 필요없고 폭발 직전.''' 한화팬이 상주한 커뮤니티는 분노와 자학, 쌍욕으로 도배가 되고 있고 야구계의 큰어른이라 쉬쉬하던 언론도 슬금슬금 비판기사를 내놓고 있다.
그래도 후반기에는 모든 걸 다 해봐도 안되는 현실을 깨달았는지 리빌딩으로 방향을 선회하며 나아졌다. 과연 리빌딩의 초석으로 가는 길이 될 수 있을지는 아직 두고 봐야 알것이다.
자세한 사항은 김응용/2013년 문서 참조.

3.3.3. 2014 시즌


시즌 전 두 명의 국가대표선수 정근우이용규를 FA 영입했지만, 정근우만이 고군분투했을 뿐 이용규는 부상이 완쾌되지 않은 상태에서 지명타자로만 출전하였다. 불펜 운영은 작년 송창식(야구선수)이 3명으로 늘어난 수준. 안영명, 박정진, 윤규진이 노예 역할을 전담하게 되었다.
이 해에 한화 2군에서 젊은 투수인 이태양을 2군에서 발굴했다. 김응용 감독은 사비로 2군 선수들을 챙기려 했었고 그 중에 눈에 든 것이 이태양이었다.[34]
반은 맞고 반은 좀 기사가 다르게 나와서 제자들이던 이종범양준혁이 팬들에게 SNS로 호통을 쳤다.
김응용/2014년 문서로.

3.3.4. 총평


2012년 당시 김응용이 한화 감독이 될 것이라 예상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시 상황과 언론 보도를 통해 추정해볼때, 김응용이 한화 감독에 부임한 것은 매우 즉흥적인 결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김성근을 영입하려 했으나 한화 프런트가 통수를 쳐서 물거품이 되었고,[35] 급하게 회장님 지시로 김응용을 영입한 것.
그 당시 김응용은 삼성 라이온즈의 사장직에서 물러났는데 모 TV 프로그램 에 출연하여 "아직도 감독으로 현장에서 뛰고 싶다" 라는 의사를 밝혔던 상태. 설마하니 TV 프로 한번 보고 감독시켜 줄 정도로 막장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만 어쨌든 김응용의 현직 복귀 의사를 접한 구단주가 "이왕이면 최고인 김응용에게 맡기자!"라고 결정했다는 것.
부임 초창기부터 김응용과 한화 이글스의 궁합이 잘 맞을 것이라 본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렇지 않아도 꼴지 전력인데 류현진박찬호의 거취도 불분명한 상태에서 우승 청부사를 영입한다는 건 예상할 수 없는 선택이기에.. 물론 검증된 감독인 만큼 아예 막장일 거라고 생각하지야 않았을 테지만
물론 그 기간 김응룡 본인이 정말 아무것도 안 한 건 당연히 아니다. 정말 답이 없을 정도로 무성의하게 일을 하는 감독이면 그냥 무능한 감독 정도가 아니라 당장 퇴출시켜야 할 위험 인물로 찍히며 타 팀 팬들에게 비웃음이 섞인 종신감독 소리를 듣지도 않는다. 적당히 무능하면 암흑기를 연장하며 다른 팀의 성적향상에 도움이 되지만, 진짜 작정하고 팀을 망치면[36] 그 폐해는 리그 전체에 미치기 때문이다. 김응용도 팀 운용 방식이 이전 해태나 삼성에서 보여준 방식과 거의 똑같았다. 선수들에게 간섭하지 않되 김응룡 본인의 권위와 카리스마로 팀을 통제하기, 전력 구성상 불필요한 선수는 가차없이 내치기, 어찌보면 상식적인 팀 운용 방법이고, 해태 타이거즈 시절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걸 감당할 수 있을 만큼 팀의 선수층이 어느 정도는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전력이 어느 정도 존재하는 구단이라면 이 방법은 먹혔을 것이다. 하지만 한화 구단은 선수층이 너무 얇아서 그런식의 처방이 먹힐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기존의 해태나 삼성은 선수들 개개인이 우수하거나 최소한 주전급은 그럭저럭 돌아갔기[37] 때문에 김응룡의 운영 방식이 최상의 효과를 낼 수 있었지만 한화는 그렇지 못했다. 아니, 김응룡의 팀 운영은 거의 모두 팀에게 치명적인 독으로 작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 깨닫게 된 후론 승리도 승리지만 육성에 더 치중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만약 현장에 복귀를 안하고 그대로 야구계의 원로로 남았다면 KS 우승 10회의 빛나는 명장으로 길이 남았겠지만 실제로 본인도 한화를 맡은것에 대해 매우 아쉬워하는듯 하다.

3.3.4.1. 부정적 평가

먼저, 구장 크기를 늘인 결과, 한화의 타자들은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장타력이 줄었다. 물론 한화 투수들은 여전히 홈런을 맞았다. 구장 크기가 문제가 아니라 실력이 문제였던 것.[38] 게다가 불펜 운용의 경우, 특정 불펜에 과부하가 걸리면서 투수진 전체에 연쇄작용을 불러 일으켜 결국 2014년 최악의 팀 방어율을 기록했다.[39]
그렇다고 타선은 잘 돌아갔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선술했듯이 팀 장타율이 완전히 시망했으며, 김태완의 활용을 두고 매년 불협화음이 일어났다. 팀내 보직이 꼬여 원래도 최악이었던 수비진 전체를 말아먹게 만드는 막장의 시너지를 불러오게 만들었다.[ * 다만 한화의 수비는 원래 최악이었다.] 물론 한화 선수단에서 쓸만한 카드 자체가 없었음을 감안하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하지만 무엇보다도 팬들이 가장 불만을 가진 부분은[40] '''김응용의 태도'''였다. 7회나 8회 무렵 팀의 패배가 확실시되면 늘 인상을 쓰며 경기 운영에서 손을 놔버리는 듯한 모습을 보였으며, 아예 경기가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뜬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물론 내일 경기도 준비해야 하는데 오늘 패배가 확실한 경기에서 손놓지 않고 싶은 감독은 없겠지만 티를 너무 냈다는 것이 문제. 당연히 경기 종료 시 감독 인터뷰도 몹시 무성의했으며, 인터뷰 불참도 밥 먹듯이 했다. 사실 김응용의 인터뷰를 따서 생성된 기사의 수가 제법 되는 것으로 볼 때 언론과의 관계는 그리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짐작되지만, 중요한 것은 '''팬들에게 보이는 모습이 영 좋지 않았다는 것.'''

3.3.4.2. 긍정적 평가

대다수가 후임감독들 덕분에 결과는 처참하지만 취지는 좋은게 대다수다.
일단 군문제를 해결한것이 대표적으로 김응룡이 한화에 와서 남긴 업적으로 뽑힌다. 2013년 처참한 성적으로 반강제로라도 리빌딩을 할 수밖에 없던 분위기였기 때문에 어떤 감독이라도 그렇게 했을상황이였다고 생각가능하지만 누군가는 해야하는 과정이였다. 다만 그 결과가 후임감독이 말아먹어서 빛을 바랬다.
장성호와 유망주 송창현을 트래이드도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당시 한화에 장성호가 있어도 성적이 처참한 상황이었고, 포지션 중복 문제가 있던 베테랑을 처분해 미래의 유망주를 얻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9년까지 포텐이 안 터지면서 성공적인 트레이드인지 보여주기식 트레이드인지는 지켜봐야한다.

3.3.5. 타이거즈 야구 먹칠 발언 논란


2015년 올스타전 이후 식사자리에서 자신의 아쉬움을 토로하면서 '''"다른 건 다 괜찮다. 하지만 내가 한화 감독을 2년 하면서 혹시 ‘타이거즈’의 야구에 먹칠을 한 것은 아닌지 후회된다"'''는 말을 하는 바람에 한화팬들에게 거센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한화가 역대 최하위, 최악의 성적으로 한화 이글스의 역사에 먹칠을 한 것에 사과를 해도 모자를 판에 먹칠 발언이 터지며 한화 팬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오히려 재임 시절 욕을 많이 먹었던 한대화, 김인식, 유승안 전 감독이 차라리 낫다는 반응까지 보이고 있다. 한대화 전 감독은 막장 프런트가 5년동안 저질렀던 드래프트 패스와 2군구장조차 없던 시절에 있는 선수를 활용하며 2011년을 6위로 마무리했다는 점에서 재평가를 받고 있다. 김인식, 유승안 전 감독은 감독직을 사임한 이후 신문과 다큐멘터리 인터뷰에서 성적 부진의 원인이 자신들에게 있음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특히 김인식 감독이 MBC 스포츠 플러스를 통해 객원해설로 참가하여 한화 이글스와 김성근 감독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는 모습을 보인 것과 김응용 전 감독의 발언을 비교해 보자면 매우 대조적인 모습이다.
김응용이 감독을 맡던 시절 팬들이 쉽게 알아차릴 정도로 팀 내에서 내홍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고[41] 코치진과 선수들과의 관계 또한 껄끄러웠다. 그 절정은 강석천과 피에의 말다툼 사건이었고 감독이라면 이를 제지해야 할 판에 물병이나 던지며 분위기를 막장으로 몰고간 것 뿐만 아니라 능력이 안 되는 코치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고 드라마나 보러 갔다는 사실이 재발굴되며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이 문제를 두고 김응용을 비난하는 여론이 거세지자 양준혁은 야구계의 어르신에게 너무한다고 페북으로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이 사태 때문에 한화 이글스 팬덤에서의 김응용에 대한 여론은 '''아예 감독 취급도 안해주는건 기본에 그냥 없는 사람 취급'''할 정도로 끝없이 추락했다. 비슷한 수준으로 금지어 취급받고 미움받는 강병철[42]도 일단 '''한화 감독으로서의 존중은 받는다'''[43]는 점과 심지어는 그 사람조차 '''최소한 한화 야구에 대한 열정은 있었다'''는 반응이 있다는 점을 볼 때 감독 취급조차 안해준다는게 어떤 의미인지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었지만'''...

3.3.6. 재평가?


김성근 감독을 거치며 재평가 할만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 김응용 시절 킬끼리 소리를 듣게 한 2013 송창식의 투구이닝은 71이닝인데 반해[44][45], 2015년 살려조의 투구이닝은 각각 권혁 112이닝, 송창식 109이닝, 박정진 96이닝이다.[46][47] 또한 선발 로테이션을 제대로 유지하지 않으면서 조금만 불안하다 싶으면 선발을 2이닝도 안채우고 퀵후크를 일삼는 김성근에 비해 김응용은 이태양과 송창현 등 젊은 투수를 꾸준히 로테이션에 박아놓고 키웠다. 사실 김응용도 퀵후크를 안하겠다고 선언했으나 얼마안가서 퀵후크를 남발한 적이 많았다. 특히 용병에 대해 퀵후크를 단행한 적이 있는데 일례로 멀쩡하게 잘 던지던 앨버스를 60구만에 내려버린 것.
  • 선수 영입 면에서도 차이가 있는데 애제자였던 장성호를 주고 젊은 무명 송창현을 데려온 김응용에 반해 김성근은 젊은 군필 외야수 노수광, 오준혁을 나이 많은 지명타자 이종환, 서른을 코앞에 두고 있던 대졸 미필 좌완 임준섭과 트레이드[48]하였는데 이 트레이드는 노수광의 맹활약으로 KIA의 완벽한 승리로 마무리 되며 어마어마한 지탄을 받았다. 특히 노수광이 포지션이 한화의 취약한 부분이었던 외야수였던지라... 심지어 KIA는 이후 노수광을 SK로 이적시키면서 이명기와 김민식을 데려와 2017년 우승을 이루었고 2018년에 오준혁을 kt의 이창진과 바꾸고 이창진이 2019년에 기량이 폭발해 KIA가 1승을 추가했다. 이성열, 허도환양훈을 트레이드 한 것도 양훈이 2015년 후반기에 팀 선발진의 기둥역할을 하면서 비난이 있었다. 물론 2016년에 양훈이 폭망하면서 이거 가지고 뭐라는 사람은 별로 없어졌지만, 임준섭 트레이드 건을 보면 김성근에게 좋은 평가를 내리기 힘들다. 선발 자원이 얼마나 키우기 힘든지를 감안하면 아예 승부조작이나 하고 감독, 코치의 메시지마저 차단한 뒤 태업한 유창식을 버린 것, 이성열-허도환을 받아온 트레이드를 제외하면 김성근의 트레이드를 좋게 봐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
  • FA영입 면에서는 김응용은 처음에 류현진을 선발 자원으로 계산했으나 MLB로 떠나버렸고, 이에 선발투수를 잡아달라고 구단에 요청했으나 가볍게 묵살, 김주찬 데리고 와달라고 했으나 그것도 묵살. 그나마 2014년에는 정근우이용규를 영입하면서 기용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이용규가 재활이 덜 된 상태여서 지명타자로만 기용할 수 밖에 없던 건 덤. 반면 김성근은, FA로 권혁, 정우람 등이[49] 잘 잡았다고 평가받았으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송은범, 배영수심수창[50]영입으로 인해 폭풍같이 까인다. 더구나 저 먹튀들을 영입하느라 임기영, 박한길등의 젊은 유망주들[51]을 보상선수로 보내버린 것도 큰 문제. 김응용도 이용규 FA영입으로 한승택을 내보내긴 했으나 데려온 선수가 이용규이므로 한승택을 문제삼는 팬은 별로 없다.
  • 김응룡의 군대 관리는 논란의 여지 없이 좋은 평가를 받는다. 김응룡 시절에 군대간 선수만 해도 하주석, 김용주, 안승민, 오준혁, 임기영, 오선진 등이 있고, 이태양은 아예 국대에 합류한 뒤 금메달까지 딴 덕분에 병역특례를 받았다. 김성근은 SK시절부터 채병용, 고효준, 윤길현, 이재원, 모창민의 군대 문제 때문에 마찰을 빚었고,[52] 한화로 와서는 오히려 시즌 막판 군 전역한 하주석과 김용주를 끌어올리느라 조정원, 채기영 두명의 선수가 임의탈퇴되어 상무는커녕 현역 입대해야 될 처지가 됐으며,[53] 시즌 후 FA 영입 시 보호명단을 짜는데 애로사항이 꽃피었고, 당장 위의 선수들 중 오준혁, 노수광은 기아의 리빌딩의 대표 주자가 되었고 김민수, 임기영 등은 아예 다른 팀으로 가버렸다. 150km의 속구를 뿌리던 최영환과 박한길마저 롯데로 갔고 최영환은 수술 후 공익행.
  • 그 외에도 적어도 리빌딩에 관한 기초 개념은 갖고 있었기 때문에 2군 정비에 많은 힘을 썼으며[54] 적어도 특타와 같은 보여주기식 훈련이 아니라 사비로 이태양, 송창현 등을 밥해주면서 겨울 내내 직접 코칭한 모습이 대비된다. 결과적으로 2014년 한화 2군은 퓨쳐스리그 2위에 올랐지만 김성근 부임이후로 2015년 중부리그 4위, 2016년 남부리그 5위라는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다. 2군의 투수들을 '한 번 보려고' 뜬금없이 부르더니 공 한 번 경기에서 못 던지게 한 뒤 다시 2군으로 보내는 쓸데없는 짓거리로 2군의 투수진까지 초전 박살낸 것도 김성근이다. 결국 송창현은 견디지 못하고 군대로 도망갔다.
  • 감독 임기동안 2군을 신경쓰지 않는다고 엄청난 욕을 먹었다. 그러나 1군이 2군에 간섭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지 현재 한화 이글스가 보여주면서 2군 감독에게 위임하고 일절 간섭하지 않았던 김응용 감독의 방식이 더 나았음이 증명되고 있다. 오히려 2군 선수들을 독려하고 선수들 컨디션 체크도 꼼꼼히 했다고... 이런 특유의 방식은 해태시절때도 그랬듯이 부모님처럼 감초역할을 했던 것이 크고 이정훈 감독과는 불화설도 없고 오히려 자주 대화도 나누고 연락도 했다고 한다. 그 때 발굴한 것이 9호선만 타던 팀에서 잠시나마 희망이 되어주던 한화 젊은 영건 이태양이다. 이태양은 병역면제도 받고 금메달도 획득하였다. 이글스 팬들에게도 오히려 호재라고. 반면 김성근 감독은 2군 감독이던 이정훈과의 불화 끝에 육성군 타격코치로 좌천시키고[55] 프렌차이즈 선수였던 前 선수 전대영을 2군 감독으로 앉혀놨다. 이로써 한화 팬덤은 현재 노리타 가 지분을 가지고 있다.
  • 2018년 현재 한화가 돌풍을 일으키는 데 김응용 감독 시절에 가능성을 보여주거나 점찍어서 미리 군대 문제를 해결했던 선수들이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들을 모두 씹어먹을 만한 한화에서의 업적들.
  • 2년 연속 최하위. 신생팀에게까지 밀리는 압도적 9위.
  • 2년간 승률 0.360. 승패마진 -71.
  • 13연패로 개막전 이후 최다 연패 기록.
  • 삼미 그 이상의 단일시즌 최악의 팀 평균자책점(6.35).[56]
  • 인터뷰
    • "2년이 마치 20년 같았다" #
    • "2년 동안 건강하게 큰 병 안나고 끝이 나서 다행" #
    • "지난 2년을 내 야구인생에서 지우고 싶다."
    • "난 한화에 간 적 없는데" #
  • "창피해서 우리 경기는 안 본다. 했는데 뭐하러 보나. 다른 팀들 경기만 본다" #
  • 경기 피드백 안하고 드라마 관람.
    • 2013년. "주말에는 경기가 일찍 끝나면 그 뭐더라… 궁중 잔혹사? 그걸 본다" "드라마 시작 시간이 오후 8시 45분인데 광고 나오고 그러면 9시쯤 시작한다. 시간이 딱 맞다" "만날 팀이 져서 밖에 잘 나가지 않는다. 집에서 편하게 누워서 이렇게 TV나 본다" #
  • 이용규를 기용할 때, 어깨부상이 완벽하게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지명타자로 무리한 기용. "거봐. 내가 일전에 '이용규의 중견수 수비는 올해 안된다'고 하지 않았나. 나는 진작에 마음을 접었다." 라며 디스한건 덤 . #
  • 김태균이 15홈런을 치면 하이파이브를 하겠다고 하였으나 역시 무시. #
  • 피에가 어깨부상임에도 불구하고 선발출장을 시킴.
한화 이글스에서 김응용은 감독 기간 중에는 김응용 본인의 무성의한 태도 및 올드스쿨적인 작전구사, 감독 이후에는 한화에서의 감독 행적 자체를 후회하는 듯한 발언 등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으며, 그의 커리어에 걸맞지 않는 성적과 함께 사실상 본인의 야구 인생 최악의 오점을 남기고 한화 이글스 팬들에게서 무능의 대명사 취급을 받았다.
'''다만 상술되어 있는 비판점들을 자세히 뜯어보면 결과표라 할 수 있는 성적을 제외하면 전부 인터뷰에 대한 비판이다.''' 성적에 대한 비판의 경우 애초에 남겨진 전력 자체가 전임인 한대화 감독 시절 전력에서 '''류현진, 박찬호 등이 빠져나가 더 약화된 전력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전년도 10월에 부임한 감독이 개막 전 6개월 가량의 훈련으로 강팀을 만들어 내는 것은 만화 속에나 존재하는 일로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 감독의 작전구사의 경우 올드스쿨적인 작전구사라 비판받지만 실제 메이저리그에서는 이미 경기 중 감독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승패마진을 2승 정도로 보며 그나마도 메이저리그의 경기 수가 KBO에 비해 많은 것을 감안하면 실제 KBO에서 감독이 작전구사 등을 통해 만들어 낼 수 있는 승수는 1.5승 정도다.
한국에서의 감독의 역할은 오히려 미국의 단장과 흡사한데 미국의 야구단과 달리 한국의 야구단은 기업에 종속적이기에 단장은 모기업으로부터 현장에서 필요한 지원을 모기업이 할 수 있도록 관리하는 역할이다. 때문에 미국 야구단의 단장들이 실시하는 선수 트레이드 및 팜 정비를 통한 팀 구성은 한국 감독들의 역할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한국에서 감독의 역할은 선수단의 구성과 팜의 정비 등으로 평가 받아야 하는데 이러한 것들은 단기간에 효과를 낼 수 없는 것이다. 일례로 미국에서 명단장으로 칭송받는 테오 엡스타인이 시카고 컵스 부임 후 성적을 내기 시작한데 걸린 기간을 보면 알 수 있다. 테오 엡스타인은 11년 10월에 부임했고 시카고 컵스는 12년에는 46년만의 최악의 성적인 61승 101패를 냈고 13년에는 지구 꼴찌였다. 14년도에도 73승 89패 (NL 12위)로 승률이 4할에 가까웠다. 시카고 컵스가 성공적인 성적을 내기 시작한 것은 엡스타인의 4년차인 15년부터였고 우승은 5년차인 16년도에 이뤄졌다.
선수단 구성에 대한 전권을 갖고 있는 메이저리그에서도 손꼽히는 단장조차도 성적을 내기까지 4년이 걸리는 상황에서 선수단의 구성조차 자신의 맘대로 할 수 없는 2년 계약의 감독이 할 수 있는 것은 제한될 수 밖에 없다.
김응용 감독의 부임 직후의 한화 이글스는 팀 자체가 망가져 애초에 성적을 낼 수 없었던 상황이었기에 리빌딩 및 육성 시스템의 재정비가 필요했다. 때문에 '''그가 재임시절 추진한 것들 대부분이 당장 효과를 보기 힘들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했어야 했던 궂은 일들, 장기적으로 봐야 했던 것'''들이었다.
결과적으로 당시 엠팍 등 인터넷 커뮤니티에 서식하는 야구팬들의 인식과 실제 팀 운용은 큰 괴리가 있으며 그러한 허상을 보여준 것이 바로 후임인 김성근 감독이다. 김성근 감독은 선수 육성, 작전 구사 등을 본인의 장기로 내세운 인물이었고 그의 부임 과정은 철저히 팬들의 의견과 여론이 개입되어 있었고 김성근 감독의 3년동안 감독의 선수 육성, 작전 구사 등은 결과적으로 큰 효과를 볼 수 없는 것이 증명되었다. 한화는 이러한 점을 뒤늦게 깨달았고 그제서야 NC의 육성이사였던 박종훈 전 단장을 선임하는 등의 방식으로 나타났다.
김응룡 감독의 운영 외적인 측면은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김응룡 감독이 야구계에서 떠나있는 근 10년 가량 한국 사회의 많은 문화들이 바뀌었는데 이러한 부분에서 노력은 한 것으로 보이나 시대의 차이를 극복하지는 못했다. 김종모 전 코치 #의 증언은 김응룡 감독의 선수단 장악 방식의 전형을 보여주는데 해태 시절의 외부 인터뷰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이른바 '''김응룡 화법'''은 선수단을 장악하고 집중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수단이었고 이러한 방식은 00년대 초까지는 용인될만한 문화였으나 10년이 지난 한화 시절에는 과거 같은 과격한 언행은 삼갔으나 선수단의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한 옛 방식의 인터뷰 등 야구 마케팅 측면에서 한화 팬들의 반발을 샀다. 그렇게 지속적으로 한화 팬들의 반발을 사다보니 팬들의 비판의 수위도 높아졌고[57] 결국 본인도 감독 기간을 후회한다는 등의 발언을 했고 그것이 다시 한화팬들의 반발을 사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종합하면 야구 내적으로는 유능했으나 야구 외적으로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해 야구 내적인 업적을 후임자에 의해 박살내버린 감독. 시간이 지났음에도 선수를 보는 눈은 살아있었기 때문에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선수들을 제법 보존 및 육성시키고 팀의 재정비를 위해 고군분투하였다. 문제는 야구 외적인 마케팅 측면에서 철저히 실패하는 바람에 한화 팬들의 반발을 샀고 이에 팬들의 여론이 김응룡의 대척점이라 할 수 있는 김성근을 선임하게 만들어 김응룡이 만든 장기적 자원과 투자들을 박살(...) 내버리게 했다는 것. 결과적으로 후임인 김성근 감독이 김응룡 감독이 모아뒀던 유망주와 2군을 박살을 내버리는 바람에 김응룡의 공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어렵다.
결국 2020시즌 한용덕 감독이 역대 최다연패인 14연패 후 사퇴하였다. 한용덕 감독의 실패의 원인은 대부분 노쇠하고 빈약한 선수층에 있다고 분석되는데 여기에 대해서 아쉬운 점은 한대화~한용덕 감독까지 제대로 칼자루를 쥐고 장기적인 안목에서 선수들을 육성하는데 성공한 인물은 김응룡 뿐이다. 6년 전인 김응룡 시절 주전으로 기용된 송광민이 한용덕 감독 때까지 주전으로 뛸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그것을 극명히 보여준다. [58]
반면 김응룡 감독의 13, 14시즌 당시 선수단은 한대화 시절과도 달랐고 심지어 14시즌은 13시즌과도 선수단이 상당히 달랐다. FA인 이용규와 정근우를 제외하고도 당시 전역 후 복귀한 다수의 선수들, 고졸 선수들이 김응룡에 의해 기용됐다. 김회성, 송광민, 한승택, 정범모, 강경학, 윤규진, 이태양 등 상당히 많은 선수들이 기회를 받았다. 심지어는 14년도 전역선수인 김회성을 쓰기위해 13년도 전역선수인 송광민을 유격수로 보내려하기도 했다. 윤규진 같은 경우 한 경기에서 롱릴리프로 좋은 모습을 보이자 바로 당시 부진하던 김혁민을 대신해 마무리로 기용됐다.
결국 대다수의 팬들이 성적을 반쯤 포기하고 리빌딩이 우선이라는 것을 깨닫는데는 사실상 2020년 종료 후였다.[59] 팀은 뒤늦게라도 많은 선수들을 방출하고 젊은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려는 준비를 하고있다. 김응룡이 한화 시절 많은 실수를 저질러 끔찍한 성적을 낸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지라도 리빌딩을 위한 노력 자체는 이미 팀의 심각한 부분을 예견하고 시작하고 있던 것이다. 단지 팀의 어두움을 제대로 보지 못 했던 팬들과 구단은 김응룡이 나가고 나서도 오랫동안 깨닫지 못 했을 뿐.

[1] 전후기 각각 2위[2] 한화 이글스와 공동 3위.[3] 드림리그[4] 양대리그 합산[5] 드림리그[6] 양대리그 합산[7] 1987년 한국시리즈를 우승으로 이끈후 인터뷰에서. 실제로 저 시점 이후로 무려 6회나 더 우승했다. [8] 당시 대한야구협회 사무총장으로 재임중이던 이용일과의 인연때문이었는데 1978년 이탈리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단장과 선수로 만났다. 이때 다른 선수들은 경비를 모두 탕진하기 바빴는데 김응용은 필요할때만 쓰고 남는 돈은 반납하는 모습을 보고 김응용으로 낙점했다고 한다.[9] 실업시절의 인연이 있는지라 나중에 삼성코치를 했다가, 해태에서 투수코치를 했다.[10] 당시 조지아 서던 칼리지[11] 2019년히스토리 채널에서 방송한 「한국 야구의 가장 위대한 순간들」에서 허구연은 김응용이 미국대학야구 팀으로 연수를 갔다고 했다.[12] 물론 이 말은 반 정도 맞고 반은 틀렸다. 연고지역 출신 야구인을 감독으로 기용한 팀은 6개 구단 중 삼성 라이온즈, 롯데 자이언츠, 삼미 슈퍼스타즈 등 3개 팀 뿐이다. 삼성은 대구야구의 대부였던 서영무가 초대 감독이었고 롯데는 경남고 출신이었던 박영길을 감독으로 세웠으며 삼미도 인천야구의 대부였던 박현식을 감독으로 선임했다. MBC 청룡은 서울 경동고 출신의 백인천을 초대 감독으로 선임했지만 실제 본인이 태어난 곳은 중국이었고 OB 베어스 초대 감독 김영덕재일교포였다. 심지어 훗날 김응용이 지휘봉을 잡는 해태 타이거즈의 초대 감독 김동엽은 김응용과 같이 이북에서 피난 온 실향민이었다.[13] 영상 12분 50초쯤부터.[14] 사실 한대화를 데려온건 김응용이었다. 간염에 걸려서 김성근에게 쫓겨난 한대화를 늦잠을 자고 훈련에 늦게 나오도록 배려를 해주면서까지 한대화를 데려왔고 한대화는 김응룡 특유의 자율야구에 적응하면서 6연속 골든글러브를 수상하여 해태왕조 건설에 일익을 담당했다.[15] 영상 29분 50초쯤부터. 참고로 이 레전드 시즌 2도 방영됐는데 시즌 1도 그렇고 2도 그렇고 하나의 사건을 두고 당사자들이 서로 다른 말을 하는 것이 꽤나 재미있다.[16] 이것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방송 카메라를 발로 막는 장면이 비쳐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당시 스포츠신문에서 뽑은 제목은 '''시청자에 왕발킥?'''.[17] 타이거즈에서 전반적으로 구타가 사라지기 시작한 시기는 이종범이 일본에서 돌아온 다음이다. 선수단 리더인 이종범이 안하니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고.[18] 장채근선동열이 비오는 날 우취를 예상하고 술이 떡이 되도록 마셨다가, 다음 날 비가 오는데도 경기를 강행해는 바람에 망했어요가 된 건 아니고.... 장채근의 홈런과 선동열의 완봉으로 승리하게 되었는데,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전날 마신 술 때문에 장채근이 크게 코를 골고 잤는데도 모른 척 하고 봐줬다는 일화가 대표적이었다. 군기 엄했던 해태에서 당시 선동열이나 장채근이나 짬이 안 되었던 편인걸 생각하면 꽤 이례적인 일...[19] 이병훈 본인의 표현[20] 쌍팔년도에 군생활한 사람치고 줄빠따 등 일상화된 폭력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당시 군대에서 폭력을 당한 사람도 얼마 후에는 짬밥이 올라 가면 동일한 폭행을 후임병들에게 가하는 시스템이 돌아갔었다. 군대는 물론이고 운동계나 학교에서도 잘못했다는 이유로 매를 때리고 맞는 걸 당연시했으니 아무도 이를 문제삼을 수가 없었다. 더 멀리 바라보고 일찍 인권에 눈을 뜬 소수가 성장이라는 절대명분 때문에 반박의 목소리를 낼 힘을 모으지 못했던 시대였다.[21] 정확히 말하면 한대화가 트레이드로 입단하고 3루를 보던 이순철을 외야로 이동시키면서 김일권과 같은 유형이나 기량이 더 뛰어난 이순철로 대체했다.[22] 양준혁의 자서전을 보면 갈 곳이 없는 선수들은 자신의 집에서 지내게 해 주었으며 한국에 적응 못할 용병들을 위해 자주 양식집에 데려가 식사를 사주는 등 경기장 밖에서는 따뜻한 모습이 많이 보였다고 언급했다.[23] 결국 김응용 감독이 예정과는 달리 2000년 시즌 해태 감독을 1년 더 맡게 되자 삼성은 그 대체자로 수석코치 김용희를 감독으로 승격시켜 1년만 임시로 맡게 하였다. 그러나 임시 감독인 만큼 김용희의 입지는 좁았고 1년 후 김응용이 삼성으로 오자 김용희는 경질되었다.[24] 사실 우승을 명분으로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팀의 상징이었던 이만수를 내치고 양준혁을 해태로 트레이드했는데 이때까지 우승은 고사하고 한국시리즈조차 가지 못하는 삼성에 불만이 쌓이던 팬들이 김응용이 감독이 된다는 말이 나오자 폭발했다고 보는게 맞다.[25] 물론 이승엽은 그 다음해에 김응용에 대해 속풀이 뒷담을 하다가 대선배 양준혁에게 크게 혼쭐난 적이 있다고 한다.[26] 시즌중 선발 - 계투 - 마무리를 거치며 혹사당한 김진웅이 불을 거하게 지르며 망했다.[27] 당장 정규리그 2위였던 현대 유니콘스와는 무려 '''7경기''' 차이로 정규리그 1위를 차지했고, 두산 베어스와는 '''13.5경기''' 차이가 났었다. 게다가 2001년 시즌의 경우 4위 팀 한화 이글스부터 8위 팀 롯데 자이언츠까지 경기차가 얼마 나지 않아 전력 평준화가 이뤄지는 등 4강 진출을 위해 5팀 간 엄청난 경쟁이 벌어지던 해였다.[28] 실제로 두산의 투수력은 10승 투수도 없었는데다가 3~5차전 각각 9/11/14점을 내줄 정도로 상당히 안좋았다. 그러나 삼성은 10승 투수 3명을 보유하고도 거기서 1승밖에 거두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더 좋지 못했다.[29] 극적인 면만 강조해서 잘 안알려지는데 단순 전력이나 체력적인 면은 2001년에 이어 삼성이 훨씬 유리했다. 그런데도 이런 승부가 나온것은 LG가 분전한 것도 있지만 삼성 쪽도 분명히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30] 당시 이승엽의 홈런 신기록 의식, 선발 에이스 임창용과 마무리 투수 노장진의 부진으로 인해 투수진에 제대로 구멍이 뚫렸고, 외국인 타자 틸슨 브리또의 시즌아웃 등 악재가 제대로 낀 상황이었다.[31] 이승엽의 아시아 홈런신기록 달성여부 때문에 포스트시즌 때 제대로 된 준비를 못했다고 한다.[32] 류현진은 지역 출신은 아니지만 어쨌든 한화에서 데뷔하여 7년동안 활약한, 2000년대 한화를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팀의 상징이고, 김응룡은 빙그레 시절의 원수다.[33] 당시에 류현진의 메이저리그 진출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세력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여론의 힘이 필요했던 것이 사실이다.[34] 2군에서 사비로 훈련금을 지원한다며 지원자를 찾을 때 온 선수가 이태양 한 명뿐이었다는 얘기가 있다.[35] 김성근이 한대화 감독을 시즌 도중에 내치지 말 것을 부탁했으나 한화 프런트는 이를 어겼다.[36] 당연히 롯데 재임 시절.[37] 2012시즌까지의 KIA 타이거즈를 생각하면 된다.[38] 다만 구장 크기가 그대로 였다면 방어율은 더 올라갔을 거다.[39] 부임 첫해인 13시즌에 버팀목이 될 국내 선발 하나 없었다. 이듬해엔 이태양이 있었지만 이마저도 순전히 김응용 감독이 발국한 선수도[40] 어쩌면 김성근 감독이 상대적으로 나은 평가를 받기도 하는 원인일지도.[41] 김성한 수석코치의 사퇴는 기존에 알려진 것과 달리 김응용과의 불화에 의한 것이었다. 이미 김응용은 이전부터 수석코치를 많이 경질시킨 것으로 유명했다. 이 법칙에서 예외가 되는 인물은, 해태 초기의 김인식과 삼성 시절의 김종모선동열정도이다. 해태 시절에 수석코치였던 백기성은 김응용과의 불화로 사임했고, 1991년부터 수석코치를 맡던 유남호는 해태시절엔 괜찮았지만, 삼성에서 같이 일하던 2003년에 사이가 틀어져 시즌 중 사임하고 KIA의 2군 감독으로 갔다. 게다가 기존 한화 선수들과 해태 사단과의 불화까지 겹쳤다. 김응용이 데려온 코치진과 기존의 칰무원 사이에서도 의견충돌이 심했는데 대표적으로 송광민의 포지션 문제였다. 김회성 카드를 활용하면서 송광민을 유격수로 보내느냐, 아니면 3루수로 안정적으로 돌릴 것이냐에 대한 문제였다. 송광민을 3루에 넣자마자 복귀 경기에서 송베인으로 불리며 혼자서 병살을 만드는 모습까지 보여주며 후자가 정확한 판단이었음이 드러났다. ##[42] 잘나가던 빙그레 이글스 내부 분란의 단초 제공+1992년 한국시리즈+감독으로 온 후 팀을 그저 그런 팀으로 추락시킴[43] 최소한 강병철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데까지의 노력은 다 했었고, 중간에 경질당했음에도 상기된 먹칠발언 같은 논란을 만든 적도 없었다. 그 수단이 혹사였고 결과가 이글스의 첫 침체기었다는게 문제였지만...[44] 물론 2013년에는 지는 경기가 많아서 2015년 처럼 연투 하는 경기가 많지 않았다. 다만 나오면 많은 투구를 했다.[45] 71이닝이 어느 정도냐는 물음에 답해주자면, 롱 릴리프로 다소 자주 나오는(2~3이닝 피칭을 주 2회 하게 되거나, 가끔 선발급의 이닝을 주 1회 먹는 정도.) 투수들이 던지는 이닝이라고 생각하면 된다.[46] 단 2013년은 128경기였고 2015년부터는 144경기로 늘어난 것도 있다.[47] 하지만 9개구단 체제였던 2013,2014년은 한번씩 3일간의 또는 월요일과 겹칠경우 4일간의 휴식기간이 있던 반면, 10개 구단 체제인 2015년엔 그런 휴식기간 따윈 없었다. 물론 2013년의 송창식은 혹사가 맞지만, 2015년의 살려조는 혹사 수준을 넘어선 인간존엄성 위반 수준이다. 송창식이야 선발과 불펜을 오갔으니 어쩔 수 없다 쳐도 선발 등판 기록이 없는 권혁, 박정진에 대한 혹사는 타 팀 팬들조차 불쌍히 여겼을 정도로 살인적인 수준.[48] 특히 임준섭은 몇 경기 뛰지도 않고 부상으로 드러누워 2015년을 마감했고, 2016년에는 아예 안 보이더니 결국 시즌 중에 공익으로 소리소문없이 입대를 했다. 이종환 역시 수비가 심각하게 안되는 대타용 외야수였고, 17년 3군에 있다가 급히 콜업되어 한가운데 공에 선풍기 스윙을 하는 프로답지 않은 모습을 보이다 김성근 경질 후 6월 방출되었다.[49] 하지만 권혁은 2년동안 그 전에 던진 공만큼 던지다가 수술대에 올라갔고, 정우람은 불펜투수에다가 84억이라는 과한 금액을 투자했는데도 불구하고 2016년 블론 1위를 하는 등 일부에서는 먹튀라고 까이고 있다. 아무리 고무팔이라지만 15년부터 슬슬 퍼지기 시작한, 선발 경험 한 번 없는 투수를 2-3이닝 맡기고 연투시키고 세이브 상황이 아니라 유망주에 기회를 줄 타이밍에도 올린 감독 탓이 제일 크다만...비슷한 사례로는 롯데의 윤길현이 있다. [50] 그나마 심수창은 불펜에서 나름대로 꾸준히 던지고 있고 스리쿼터-사이드암 변칙 투구로 148km까지 찍었다. 본인이 팔꿈치 주변 인대를 강화시켜서 연투나 포크볼 연속 투구도 큰 무리가 없는 꽤 희귀한 케이스다. [51] 이는 결국 부매랑이 임기영은 99년 이후 한화지명 선수 최초로 타팀에서 한국시리즈 승리투수가 되는 어이없는 상황까지 간다[52] 결국 이재원은 허락없이 군 팀에 들어갔고, 군 팀 입단 가능 나이를 놓친 채병용과 고효준은 30세가 가까이 돼서야 공익 복무를 하게 되었고 소집해제 후 후 예전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으며 윤길현은 상무에 입대하기는 했으나 토미 존 서저리를 받은 후 남은 복무 기간을 국군수도병원에서 재활로 보내야 했다.[53] 결국 둘 다 20 시즌 기준 팀을 떠났다.[54] 김응룡의 한화 미래 예상[55] 이정훈 감독은 부임시 김성근 감독에 대한 존경을 표하며 기대를 드러내기도 했지만 이정훈 본인이 2군 감독 시절부터 눈여겨보고 아꼈던 노수광을 김성근이 트레이드시킨 것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다가 찍혔다는 소문이 있다.[56] 다만 이는 당시 역대 최고의 타고투저 기조의 영향도 있어서 조정 평균자책점으로는 뒤에서 22번째이다. 역대 최악급은 아니라는 것.[57] 직관팬들이 현수막을 거는 등 비난의 수위가 상당했다.[58] 한용덕 감독 역시 육성을 시도 한 것으로 보이나 아이러니 하게도 프랜차이즈 출신 감독이라는 타이틀이 단호함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나마 기량들이 못쓸 정도는 아니었던 18시즌까진 애매한 상태여도 잘 맞아 떨어졌지만 이후에도 결단을 확실히 내리지 못하면서 결과적으론 실패가 되었다.[59] 사실 팀 사정을 아는 이들은 진즉부터 주장한 일이고 구단과 지도자들 역시 전혀 모르진 않았겠지만 묘하게 타이밍들이 맞지 않았다. 김응용 감독의 기용에도 의문을 품었지만 기대 이상으로 리빌딩의 모습을 보였고, 이후 김성근 감독이 김응용 감독도 초기에 실수한 어떻게든 이기려는 모습을 끝까지 유지해 버리며 팀의 기조와 어긋나는 모습을 보인다. 이후 한용덕 감독 재임시기에 노쇠화가 완연하고 좋은 전력이라 할 수 없는 상태에서 기적같은 3위를 하게 되고 냉정한 리빌딩을 하기 애매해 져버리며 결국 좋지 않은 마무리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