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고려)/평가

 


1. 당대/후대의 평가
2. 후계자 교육
3. 인복
4. 비판론 관련
5. 총평
6. 관련 어록


1. 당대/후대의 평가


신은 천지가 생겨난 이래 성명(聖明)하신 임금으로는 오직 요임금(唐堯)과 순임금(虞舜) 뿐이라고 들었습니다. 요임금께서는 지극한 어짊으로써 천하를 다스리셨고, 순임금께서는 크신 효성으로써 나라를 교화하셨기 때문에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두드러지고 역사책에 빛나고 계십니다.

이후에 중하주(中夏主)[1]

는 물론 여러 후왕(侯王) 등 모든 임금 자리에 오른 사람들로서 누가 요임금과 순임금의 자취를 잇고 유풍을 떨쳐서 백성을 교화하고 나라를 다스리려고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어짊을 닦되 어짊이 지극함에 이르지 못하였고, 효성을 행하되 효성이 온전하지 못하여서 백성을 이끌고 나라를 일으킴에 있어 처음과 끝을 온전하게 하지 못하고서 대부분 중도에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이는 요임금과 순임금의 다스림이 심오하여서 계승하기 어렵고, 어짊과 효성의 도가 광대하여 지키기 어려웠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 도를 본받으며 중간에 그침이 없었던 것은 우리 성군(聖君) 뿐이십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시작과 마침이 한결 같은 것은 오직 성인뿐일 것’이라고 하시었으니 우리 임금님의 높은 공과 빼어난 덕은 고금(옛날과 지금)에 다시 없을 것입니다.'''

- 현화사비문 내용 중

근친, 사생아, 고아 등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한국사상 가장 극적이라 할법한 자수성가를 이루어낸 영웅이면서 불안정한 국가와 위치에서 나라의 가장 긴 전성기의 기반을 마련했던 성군으로 평가된다. 또한 예술가, 문학가적인 면모도 보이는데 시호도 원문이고 몇 수 전해지는 시나 친필어필 당대 신하들의 평가를 보면 뛰어난 명필 혹은 예술가로서도 평가받았던 듯 하다.
요나라의 역사서인 요사의 기록을 보자면 요나라의 명장들 사이에서도 현종은 꾀가 많고 행동을 예측하기 어려워 상대하기 버겁다고 언급했을 정도로 난적으로 평가했던 기록이 존재하며 송나라의 역사서인 송사에서는 송황제[2]가 요나라의 대항마로 고려를 이용하기 위해 현종 개인에게 많은 선물을 주었던 것이 기록되어있을 정도로 주변 강대국 지도자들에게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존재감을 가졌던 군주였다.[3]
당대 인물이었던 최충은 봉선 홍경사 갈기비의 비문에 선대의 좋은 일을 계승하는데 있어서는 역사를 통틀어도 전례를 찾아 볼 수 없다고 표현했으며 현종의 치세를 주나라의 성강지치와 한나라문경지치와 비교해도 꿀릴 게 없다고 평가했고, 현화사비의 내용을 보면 채충순을 비롯한 당시 고려의 중신들은 현종을 요순의 재림 혹은 부처미륵에 비유하였고 과장 좀 보태서 하늘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내려온 이었다고 평가했다.[4] 고려 말 이제현 역시 '''"나는 현종에게서 아무런 흠도 찾아볼 수 없었다."'''고 평했다.
고려 황실에서 예종공민왕 때 각각 편찬된 태묘악장을 보면 공민왕 때 편찬된 책에는 고려 전기의 임금으로 찬양받는 인물이 태조, 혜종, 현종 3명 뿐이다. 태조와 혜종이 고려의 창업군주인 것을 생각하면 고려 말에도 현종은 최고의 성군으로 평가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예종 때 편찬된 책에는 현종을 열조(烈祖), 성조(聖祖)라고 부르는데, 열조는 커다란 공로와 업적이 있는 조상에게 쓰이는 굉장히 좋은 묘호이며[5] 성조는 이를 넘어서 거의 신격화 수준이라고 할 만한 묘호이다. 태조, 고조, 태종, 세조와 동급 혹은 그 이상의 묘호이며, 실제로 동북아시아에서 제위한 군주 중에서 이 묘호를 받은 사람은 '천고일제(千古一帝)'라고 불리기도 하는 청나라강희제 뿐이다.[6] 고려 왕조 내내 건국자였던 태조와 동급 혹은 그 이상의 임금으로 평가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서도 태조와 함께 숭의전 제사에서 제외된 적이 없는 두 명의 군주 중 한 명이었다. 김종서는 현종과 문종을 고려사 최고의 군주로 평가하였으며, 양성지세조에게 현종을 본받아야 한다고 권했으며 성종 때의 학자 서거정은 현종이 총명하고 덕이 있으며 성실하고 학문이 뛰어났다고 기록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류성룡선조에게 현종을 예로 들며 선위파동을 억제하였고, 세종 역시 백성들에게 공과 덕이 있는 군주이니 제사를 그대로 지내라고 교지한 4명의 군주[7] 중 한 명으로 현종을 지목한 만큼 후대에도 업적과 덕을 칭송받은 군주였던 것을 알 수 있다.[8]
공교롭게도 대량을 가리키는 조선시기 합천 옆 초계(합천군 초계면 파출소 자리)에서 백의종군을 한 이순신은 모친의 본적에서 그 죽음을 듣고, 비분감개에 현종같은 구국군주를 만나서 충효를 다 하지 못함이라 느꼈을 수도 있다. 역사나 문학에 통달한 이순신이 그러한 비교로 자기 두둔이 되는 것이라 자신만의 기록에서도 직접적 서술이 없다고 봐야 한다.
현대에도 광개토대왕, 세종대왕에 비해 대중의 인지도는 떨어지지만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중에서도 저들과 더불어 가장 위대한 군주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인 위기관리 대처능력 부분 등에서 현종을 한국사 최고의 군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다수 존재한다.

2. 후계자 교육


현종의 아들들은 현종을 닮아서 능력이 출중했고 인품이 있었으며 효성스러웠다. 그리고 형제간 우애도 좋아 이들 중 무려 세명이 왕이 되는 기염을 토하는데[9] 아들들도 명군이 되어 덕종과 정종은 현종과 같은 과로사가 의심될 정도로 열심히 일하다 비교적 이른 나이에 사망했고, 셋째인 문종 대에 이르러 고려 국력은 최정점을 찍게 된다. 그리고 이후에도 고려는 예종, 정치적인 면을 제외하면 인종 시대까지 태평성대를 누린다.
실제 현종의 아들들이 권력다툼에 휘말리지 않고 서로 우애좋게 왕위를 넘겨받으며 국가를 통치하였다는 점은 높은 평가를 받을만하다. 물론 요절이 가장 큰 원인이긴 했지만, 요절하지 않았더라도 넷째처럼 조용히 살다 갔을 수도 있고,[10] 어쨌든 고려에서는 현종의 세 아들들이 잡음없이 줄지어 형제 상속을 통해 왕위를 받아 괜찮은 임금이 된 어찌보면 유일한 사례라고도 할 수 있다.[11]
한마디로 자식 농사를 망쳐 본의 아니게 평가가 깎인 수문제세종[12] 등과 달리 전부 명군이었던 복받은 임금.[13]

3. 인복


시대가 인재를 탄생시키는 것인지 인재가 시대의 흐름을 바꾸는 것인지 그 선후관계는 알 수 없지만, 인망이 있던 현종 시절 고려에서는 국가와 군주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14] 유독 많았다. 그리고 이들은 현종 사후에도 황보유의 등이 후대 임금들을 보필하며 나라를 이끌었다. 물론 인복이 아무리 많아도 이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인만큼, 그들을 적재적소에 잘 배치한 현종의 능력도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또한 현종의 인성이 굉장히 높았다고 평가할 기록들이 존재하는데 고려 광종, 조선 이방원 등 일반적인 전제군주들처럼 강압적이고 공포스러운 복종이 아닌 강희제처럼 뛰어난 능력과 훌륭한 인성을 바탕으로 문무관들과 긴밀한 교류를 통해 깊은 유대관계를 형성하여 절대적이고 자발적인 복종을 이끌어낸 것으로 평가할 만한 기록들이 존재한다. 실책으로 평가되는 최질, 김훈의 난조차 현종을 폐위시키지 않고 어떠한 감시도 없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4. 비판론 관련


미숙한 외교로 하지 않아도 될 전쟁을 하게 만든 것 아니냐는 비판이 있으나, 정치, 외교적인 면에서는 사실상 선왕인 목종과 천추태후의 실책을 떠맡았다는 점과 갑자기 왕위에 올라 정권 기반이 취약한 편이었다는 점에서 충분히 옹호가 가능하다. 당시 현종은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은 허수아비 왕이었고, 실권은 강조에게 있었기 때문. 거란의 2차 침공도 목종을 폐위시킨 강조의 변을 핑계로[15] 감행된 것이었다. 당시의 현종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는 상황이었던 셈.[16]
2차 침입 때의 몽진을 가지고 현종을 비판하는 사람도 있는데, 당시 상황 자체가 강조가 고려군 주력 부대를 데리고 나가 싸우다가 개박살난 상태라 현종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던 것을 감안해야 한다. 선조 항목에서도 누누이 언급되지만 전근대 사회에서의 전쟁시 패색이 짙은 국가의 왕에게는 항복이나 몽진 말고는 선택지가 없었다. 왕조 국가에서 왕이 잡혀 죽는다는 것은 곧 나라가 망한다는 뜻이기 때문. 즉, 몽진은 현대의 인식과는 달리 '도망'이 아닌 '항전 의지 표방'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게다가 이 때 몽진을 주장한 사람은 다름 아닌 강감찬이었다. 다른 신하들은 항복을 주장했는데 강감찬만 끝까지 싸워야 한다며 몽진을 주장했고 현종도 이를 따른 것이다.[17][18][19]

일단 수도를 버리고 도망갔다는 것에서 해명을 할 필요가 있는데, 이것에 대해 우리가 너무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있어요. 예를 들면 수도를 버리고 후퇴하는 건 서양 사람들 입장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안 돼요. 단, 이건 있어요. 봉건 영주가 적이 쳐들어 왔는데 도망가잖아요? 그러면 주변 모든 인물들에게 인망을 잃어버려요. 왜? "내가 영주로써 군림하고 세금을 받는 것은 너희들을 지켜주기 위해서야!"(라는 것이 당시 사회 시스템이었으니까요). 산적이 쳐들어 왔는데 보안관이 도망을 쳤어. 그러면 보안관은 끝이죠. 하지만 왕은 보안관이 아니에요. 보안관이 아니라 국가 시스템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사람이지. 그러니까 왕이 전쟁을 포기하고 제 할 일을 안했느냐, 이 기준으로 왕의 잘못을 판단해야지, 피난간 것이 비겁하다고 말할 순 없는 거예요.

현종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항복하고 거란군을 돌려 보내는 것이 나았을 거에요. 왜냐하면 왕 된지도 얼마 안 된 기반도 안된 현종이 거란 황제에게 "항복하겠다. 대신 당신이 나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다면 현종의 입지는 (거란 황제의 도움을 받아) 더 단단해졌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후퇴했다는 건 끝까지 싸우겠다는 거거든요? 그리고 이 후퇴길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우리가 생각하듯 편안하게 도망간게 아니거든요.

임용한. 토크멘터리 전쟁史 67부 고려 vs 거란 전쟁2

재위 초기 일어난 원조 무신정변이라 할 수 있는 '김훈·최질의 난'은 현종의 실책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래도 반란 세력을 단기간에 정리하고 이후 무신의 처우도 올리면서 뒷수습은 비교적 잘했다. 자세한건 현종 항목 참조.
동국통감에서 농토를 절간에 바친 것이 문무왕만 못하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불교에 비판적이었던 조선시대, 그것도 재가금지법, 서얼금고법을 명문화시킨 성리학 군주 성종 때 성리학자 서거정이 작성한 기록이어서, 당시 시대상을 놓고보면 이게 비판거리인지 좀 애매한 점은 있다. 현종 시절만 해도 불교가 조부의[20] 훈요십조에서도 장려한 사실상 국교였을 뿐더러,[21] 천추태후에게서 본인의 생명을 구해준 승려가 지관이었기에 현종 입장에선 더 숭상할만했다. 또 다르게 생각해보면 불교에 비판적이고 출신 정통성에 엄격한 성리학자인 서거정이 보기에도 나당전쟁을 승리하고 삼한통일을 이룬 문무왕하고 비교할 정도로 비판론자의 관점에서조차 현종 원문대왕의 평가는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 총평


'''고려사 최고의 성군이자 한국사 통틀어 손꼽히는 위대한 명군''' 중 한 명.
고려의 국력 신장을 이끌어 태평성대의 기반을 닦은 고려 왕가의 중시조 뻘 되는 인물이자 창업군주들을 제외하면 세계사에서도 끝판왕급 자수성가 군주라 할만하다. 고려 왕사 기준으로 보자면 목종 대에서 사실상 끊길 뻔한 직계 왕통을 이어받고 후대 왕들의 맥을 이었다는 점에서 여러 의미로 고려 왕조와 한국사상 가장 중요한 군주 중 한명이라고 볼 수 있는 편.
특히 삶 자체가 파란만장하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평가가 가능한데, 지체 높은 왕족 신분이었지만 사생아 출신으로 일찍이 부모를 잃고 암살 위협까지 받을 정도로 불우한 유년기를 보내야 했으며, 왕위에 오르고 나서도 반란과 외침이라는 국내외적 시련을 겪어야 했다. 수난을 먹고 살며 20대 후반까지 힘든 일만 가득했지만 그는 스스로에게 매우 엄격했던 반면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자애로웠으며[22] 본의 아니게(?) 고생만 시켰던[23] 를 원망하기는 커녕, 오히려 현화사현화사비를 세워 추존하고 부모를 높이려 할 만큼 부모를 사랑했다. 이러한 현종의 효심은 이후 자식들의 치세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국가적 위기에서도 내적으로는 허술했던 고려의 행정망을 탄탄히 정비하는 동시에 호족 세력을 규합해 고려의 행정 체제를 완성시켰으며, 외적으로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의 침공을 두 차례에 걸쳐 막아냄으로써 고려에 100여년에 걸친 평화를 가져다주었다.[24] 비교적 비슷한 상황에 처해봤던 인조, 고종 등이 집권기 어떤 모습을 보였는지를 생각한다면 현종이 얼마나 대비되는 군주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세계사를 보더라도 명군, 성군이라고 평가되는 군주들조차 비판할 부분들이 존재하는데, 그러한 점도 거의 찾기 힘든 극적인 생애를 살았던 사극화하기도 딱 좋은 인물이지만, 의외로 대중 매체 등에서 상대적으로 조명받지 못해 그런지 대중적 인지도는 생각보다 낮은 편이다. 사실 고려 왕조 자체가 태조공민왕 정도 빼면 조선 왕들의 인지도에 비해 심하게 묻혀있기도 하고..
그래도 역사덕후들 사이에선 고평가받는 군주라, 한 역사 카페 명군 투표에선 2위를 하기도 했다. 한국사 최고의 명군은 누구일까요?

6. 관련 어록


야율요질(耶律瑤質). 자는 발리근(拔里堇)이며 적경궁(積慶宮) 사람이다. 아버지는 야율후고(耶律侯古)이며, 실위부절도사(室韋部節度使)였다. 야율요질은 학문에 독실하고 청렴하며 강개하여 세상을 경륜할 뜻이 있었다. … 황제가 고려를 정벌하여 강조(康肇)의 군대를 동주(銅州)에서 격파할 때 야율요질의 힘이 컸다. 왕순(王詢, 현종)이 항복을 청하자 여러 신하들이 의논하여 모두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야율요질은 말하기를, '''“왕순은 처음에는 한번 싸워보더니, 패하자 갑자기 항복을 받아줄 것[納款]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는 속이는 것이옵니다. 만약 이를 받아준다면 그들의 간사한 꾀에 떨어질까 두렵습니다. 그들의 기세가 궁하여지고 힘이 꺾일 때를 기다려서 받아들여도 늦지 않을 것이옵니다.”라고 하였다. 얼마 있다가 왕순은 과연 도망가버리고 청야(淸野) 전술을 써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다. 그 무리들은 험한 지세를 의지하여 진을 치고 공격하여도 항복하지 않았다.''' 야율요질이 계책으로 항복시켰다. 발탁하여 사번부상온(四蕃部詳穩)으로 임명하였다.

요사 전문 중

왕은 천성이 총명하고 인자하며, 학문에 힘쓰고 문장에 능하였다.

서거정동국통감》 전문 중


존호(尊號)를 더 올리는 조목입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중니(仲尼)[25]

가 말하기를, ‘무왕(武王)과 주공(周公)은 달효(達孝)일 것이다.’ 하였으니, 두 성인(聖人)을 달효(達孝)라 일컫는 것은 무왕(武王)은 천명(天命)을 받았으며, 주공(周公)은 문왕(文王)·무왕(武王)의 덕을 성취시켜 명당(明堂)에 종사(宗祀)하여 하늘에 배향(配享)시키고, 또 태왕(太王)과 왕계(王季)를 추존(追尊)하여 왕(王)으로 삼았으므로, 이른바 모두가 달효(達孝)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 전하(殿下)께서 친히 상제(上帝)를 남교(南郊)에 제사지내고 태조(太祖)를 배향(配享)하였으니, 곧 무왕(武王)·주공(周公)의 달효(達孝)와 같습니다. 지금 번잡한 의식을 거행하여 성대히 존호(尊號)를 받았으니, 온 나라 신민(臣民)들이 큰 경사(慶事)를 감내하지 못합니다. 원컨대 하향(夏享)에 친히 태묘(太廟)에 강신제(降神祭)를 지내고, 조성(祖聖)의 존시(尊諡)를 더 올려서 효도(孝道)의 도리를 넓히게 하소서. 이와 같이 한다면 거의 전대(前代) 성인(聖人)의 효도에 진실로 합할 것입니다. 신(臣)이 전조(前朝)를 살펴보건대, '''현종(顯宗)은 영명(英明)한 군주'''인데 역대(歷代)의 존시(尊諡)를 더 올리고 중외(中外) 산천(山川)의 신기(神祇)에게도 또한 미호(美號)를 가(加)했으니, 곧 이런 뜻입니다."

세조실록 7권, 세조 3년 3월 15일 무인 3번째기사 판서운관사 양성지가 전적·사직·존호·경연 등의 일에 대해 상언 전문 中


"어제 성교(聖敎)를 받들건대 되풀이함이 간절하신지라, 신들이 받들어 읽고는 눈물을 흘리며 마음을 가누지 못했습니다. 대저 비상한 이변과 우연한 재앙은 천지나 일월도 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은 잠시 기울었다 해서 그 운행을 그만두지 않고 땅은 잠시 터졌다 해서 그 두터움을 그만두지 않으며, 일월(日月)은 박식(薄蝕)하였다 하여 그 밝음을 그만두지 않고 그 때를 지나면 항시 정상을 회복하거니와, 사람의 일에서 찾아보아도 이러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예전 일을 논할 것이 없이 우리 나라의 일로 말하더라도, '''고려 현종(顯宗)이 거란(契丹)의 화(禍)를 당하여 나주(羅州)로 파천하였는데, 사책(史冊)에 이르기를 ‘경도(京都)의 공사(公私)의 집이 탕연(蕩然)히 모두 비었다.’ 하였으니, 그 화가 오늘날의 왜적의 화보다 못하지 않았으나 현종은 마침내 난을 다스리고 정도(正道)로 복귀하여 구적(寇賊)을 몰아 내고 구물(舊物)을 회복하여 당대에 태평을 이루어 고려의 성주(盛主)가 되었습니다.''' 만약에 한 번 변란을 겪은 것으로 심하게 꺾여서 다시는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지나치게 자비(自卑)하고는 물러나 한가하게 지내려는 생각을 하고 나라의 일을 어찌할 수 없다는 지경에 두었다면, 그 어려움이 어떻게 종식되었겠으며 그 일이 어떻게 성취되었겠습니까. 그렇다면 성교에서 이른바 하루라도 물러나지 않으면 하루의 치욕이 있고 이틀을 물러나지 않으면 이틀의 치욕이 있다는 말씀은 신들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참으로 모를 일입니다.

선조실록 45권, 선조 26년 11월 29일 기유 5번째기사 영의정 유성룡이 백관을 거느리고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는 전문 中


현종이 중흥의 공을 이룬 덕분에 종묘와 사직이 안정을 되찾았으며 문종태평성대의 통치를 펼치니 백성과 만물이 모두 화락하게 되었습니다.

김종서고려사》 전문 中, 《조선왕조실록 문종실록 9권, 문종 1년 8월 25일 경인 1번째기사》 전문 中


고려 때의 태조(太祖)·현종(顯宗)·문종(文宗)·충경왕(忠敬王)은 백성에게 공덕이 있어서 제사 문헌에 실려 있으니 종전대로 제사를 모시라.[26]

[27]

세종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29권, 세종 7년 9월 17일 계축 2번째기사》 전문


예조 낭관을 송도(松都)에 보내 여조(麗朝)의 제능(諸陵)을 살펴보게 하고 1백 보(步)로 한계를 정해 그 안에서는 경작과 장례를 금하게 하였다. 그 가운데 태조(太祖)의 능은 선조(先祖) 때 정한 제도를 써서 1백 보를 더 늘려 한계로 잡고, 현종(顯宗)·문종(文宗)·충경왕(忠敬王)의 3개 능은 50보를 더 늘려 잡았는데, '''이 세 임금의 공덕이 가장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송도 경내에 사는 왕씨(王氏) 자손으로 하여금 금호(禁護)하는 일을 전적으로 관장케 하였는데, 금법을 범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관에 고발하여 죄를 매길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현종실록 6권, 현종 3년 10월 7일 정미 2번째기사 고려 시대의 능 주변에서 경작과 장례를 금하게 하다


현종이 반정(反正)한 후, 거란과 화친을 맺어 평화를 되찾고 문치가 이루어졌으며, 조세와 부역을 경감해주고 뛰어난 인재를 등용했다.

공정하게 나라를 다스려 국민을 안정시키고 화합을 이루니 온 나라가 평안해지고 해마다 풍년이 들었다.

현종의 치세야말로 주나라성왕(成王), 강왕(康王)[28]

한나라문제, 경제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29]

최충


최충(崔冲)의 말은 세상에서 이른바 '천명(天命)'이라고 부르는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월나라 임금 구천(句踐)은 와신상담(臥薪嘗膽)함으로써 회계(會稽)에서 당한 치욕을 씻었으나, 소백(小白)은 거(莒)[30]

지역에서 겪은 고난을 잊었기 때문에 제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참화를 입게 했다.

임금이 천명만 믿고 제 하고 싶은대로 하면서 법도를 어기면 비록 천명을 얻었을지라도 반드시 잃게 되는 법이다. 이런 까닭에 군자는 태평성대에도 늘 위기와 환란을 걱정해 시종여일 근신하는 마음으로 하늘의 복록(天休)을 기다리는 법이다.

현종과 같은 임금은 공자가 말한 것과 같이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는 군주라 할 것이다.

이제현


“'''현종(顯宗)·덕종(德宗)·정종(靖宗)·문종(文宗)께서는 부모가 자식에게, 혹은 형이 동생에게 왕위를 잇게 함으로써 근 80년 동안 국가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또한 문종은 근면과 검약을 실천하고 현명한 인재를 등용했으며, 백성을 사랑하여 가능한 한 관대한 형벌을 부과했고, 학문을 숭상하며 노인을 공경했다. 자격 없는 자에게 관직[名器]을 맡기지 않았으며, 자신과 친한 사람이라고[近昵] 실권을 주지 않았다. 아무리 가까운 인친일지라도 공로가 없으면 상을 주지 않았고, 측근의 아끼는 신하라도 죄를 지으면 반드시 벌을 내렸다. 환관과 급사의 수가 10여 명에 불과하고 내시(內侍)는 반드시 공로와 재능이 있는 자를 가려 임명했는데 이 또한 2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쓸모없는 관리가 줄어 일이 간편해졌으며, 비용이 절약되어 나라가 부유해졌다. 나라의 창고에는 해마다 곡식이 계속 쌓이고 모든 백성들이 풍요를 누리니, '''당시 사람들이 태평성대라고 찬양했다.'''

'''송나라에서는 매번 왕을 칭상하는 조서를 보내 왔으며, 요나라에서는 해마다 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신을 보내곤 했다. 심지어 동쪽의 왜국에서도 바다를 건너 보배를 바쳤으며, 북쪽의 오랑캐들도 자발적으로 투항해 와 우리 국적을 얻고 거주지까지 받았다[受廛].'''

이제현 현종의 삼남 문종에 대한 평가 중


'''『금광명경(金光明經)』에서 ‘업(業)의 쌓임으로 인하여 사람들 중의 왕으로 태어나고, 국토를 거느리기 때문에 사람들의 왕(人王)이라고 부른다.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에 하늘의 신들이 수호하며 혹은 먼저 수호를 받고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간다. 비록 사람들 사이에 있지만 사람들의 왕(人王)으로 태어난 것이다’는 말이 있으니, 이로 보건대 우리의 지금의 성상께서는 하늘의 신(天神)들이 수호하여 사람들의 왕으로 태어나셨으니 청방(靑方)[31]

를 다스리면서 그윽한 덕을 품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 임금께선) 만승(萬乘)[32]

의 높은 위치에 계시면서 사총(四聰)을 타고 나셨으니 삼교(三敎)의 지극한 가르침을 한 마음에 밝게 비추고 계십니다.'''

'''어짊을 베풀어 도덕이 빛나고 효성으로 다스려 교화가 이루어지니 백성들이 기꺼이 모시고 팔방(八方)[33]

의 사람들이 즐거이 섬기고 있습니다. 안으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키면서 밖으로는 유교의 가르침으로 교화하여 안과 밖이 모두 조화를 이루고 옛날과 지금을 분명하게 알고 계십니다.'''

이른 바 신령스러운 앎이 선왕과 부처님들의 가르침에 부합된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지금의 임금님'''을 가리킬 것입니다.

《현화사비문》 전문 중

[1] 중하는 중국 전통적 천자국을 이르는 말이다. 굳이 중하의 황제라고 하지 않고 중하주라고 에둘러서 표현했다.[2] 참고로 이때 송황제들이 송진종, 송인종으로 함평-경력지치, 불야성이라고 표현되는 북송의 리즈 시절을 만든 명군들이었다.[3] 일반적으로 적들은 상대방에게 폄하된 평가를 하고 제 3자들은 상대방에게 객관적인 평가를 하는데 둘 다 높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당대에 능력 있는 군주였던 것은 확실하다. 더불어 요와 송의 은 당시에 각 왕조의 최전성기를 이끌던 중국사의 손꼽히는 명군들이었다.[4] 참고로 조선세종도 당대에 해동요순 또는 천종지성이란 유사한 평가를 받은 바 있다.[5] 촉한의 건국자 유비가 받은 묘호가 바로 이것이다.[6] 명나라 영락제의 묘호 역시 성조이나 한자가 다르다. 영락제는 成이룰 성자, 강희제는 聖성스러울 성자를 썼다.[7] 태조, 현종, 문종, 원종.[8] 세종의 이러한 교지는 약 200년후 현종(고려)과 동일한 묘호를 쓴 현종(조선)때 까지도 계속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9] 덕종, 정종, 문종. 넷째인 평양공 기는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었다.[10] 물론 문종 시절 평양공을 옹립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며 몇몇이 처벌받은 사례가 있긴 한데, 문젠 이게 평양공이 죽은지 2년 후라는 것(...).[11] 문종의 세 아들(순종, 선종, 숙종)과 인종의 세 아들(의종, 명종, 신종)도 줄줄이 왕은 되었으나, 전자는 중간이, 후자는 끝이 좋지 못한 케이스였다. 전임 태조 왕건의 세 아들인 혜종 - 정종 - 광종도 그리 모범이 될 만한 사례는 아니다.[12] 다만 세종의 아들들은 문종을 비롯해 여러 아들들이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긴 했다. 다만 둘째아들의 인성이 개판이여서 문제지...[13] 비슷한 사례로 고구려소수림왕을 들 수 있다. 소수림왕도 무너져 가던 고구려를 다시 회복시키고 그의 동생조카, 그 이후 왕들 모두 명군이었다.[14] 이들 외에도 유방, 김훈, 최질 등도 군인으로서 유능한 자들이었다. 유방은 그 유명한 유금필의 손자였고, 김훈과 최질도 난을 일으켜서 그렇지 거란 침략 때 열심히 싸운 자들이다.[15] 실제 목표는 1차 침공 이후 요새화된 강동 6주의 탈환이었다.[16] 강조 또한 자신이 고려의 실권자이긴 했으나, 이런 명분론적 한계 때문에 자의반타의반으로 요성종과 맞서기 위해 본인이 직접 군대를 끌고 나갈 수밖에 없었고, 결국 장렬히 패한 이후(...) 고려의 무장으로 최후를 맞이한다.[17] 조선 선조가 비판받는 부분 또한 상황을 수습하고 항전하려는 의지를 버린 채로 요동이나 명나라로 도망가려고 한 의도 때문에 비판받는 것이지, 그 전의 몽진 자체가 비판받는 것은 아니다. 왕이 잡히면 혼란만 더 가중될 수도 있다. 당장 이전이나 이후 왕들도 외적이 쳐들어오면 수도를 버리고 산성으로 들어가 주둔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흔했다.[18] 당장 프랑스와 영국 간의 전쟁인 백년전쟁을 생각해보자. 푸아티에 전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일국의 왕인 장 2세가 포로로 잡혀 프랑스는 한동안 잔 다르크가 나타나기 전까지 혼란스러워졌다. 즉, 한 나라의 수장이 잡히면 나라 멸망 테크와 직결될 수 있기에 현종의 몽진은 나름 현명한 선택이었으며, 현종은 인복이 있어 요성종이 추격하는 와중에도 들의 활약 덕분에 2차 침략을 수락으로 마무리짓고, 3차 때는 몽진을 하지 않고도 요나라에게 쓰디쓴 패배를 안겨 주었다. 즉, 몽진을 하지 않았다면 이들도 항전의 의지를 밝히지 않았을 것이다. 몽진을 하지 않아 붙잡히면 그 하나만으로도 아무리 뛰어난 인재라 해도 항전의지가 팍 깎여버릴 수 있기에 몽진을 하는 것만으로도 인재들에게는 "상황은 절망적일 지 몰라도 그래도 우리의 왕께서 안 잡혔으니 아직 진 것은 아니다." 라고 각오를 다지게 만들 수 있다.[19] 물론 모스크바 공방전 당시의 이오시프 스탈린처럼 항복도 몽진도 하지 않고 수도에 남아서 결사항전 끝에 승리한 경우도 있긴 했다. 실제 3차 침략 땐 현종도 그런 결사항전을 택했고.[20] 태조 왕건과 형식상 조부 사이긴 하나, 아버지와 자신이 다 늦둥이라 877년생인 왕건과 992년생인 현종의 나이차는 사실상 고조부급 수준이긴 하다.[21] 다만 훈요십조에선 사원의 무분별한 확장도 경계하긴 했다.[22] 현종은 역대 임금 중 누구보다도 백성을 사랑한 왕이었다. 거란 침입 이후 굶어 죽는 자들이 속출하자 “나 혼자만 호의호식할 수 없다.”며 화려한 밥상을 거절할 정도였다. 매년 억울한 누명을 쓴 백성들을 풀어주는 일을 실시했으며 일부 특권층의 사치와 낭비를 억제하기 위해 각도의 기술자들을 귀농시키기도 하였다.[23] 헌정왕후는 태어나자마자 산욕으로 인해 승하했고 안종도 5살 즈음에 승하하고 말았다. 부모 양쪽의 사랑이 가장 필요한 유년기, 청소년기를 고아로 보내고 왕위계승 1순위라는 신분 때문에 권력의 틈바구니에서 목숨을 왔다갔다 하였고 군주라는 의무와 책임만 지운채 일생을 고생하는 삶을 살게 하였으니 원망스러워 하는 것이 어찌보면 이성적일 수도 있다. 참고로 고종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제사에도 가지 않을 만큼 아버지와 사이가 지극히 안 좋았다.[24] 때문인지 여요전쟁 관련해 2019년 방영한 JTBC 다큐멘터리에선 이를 '평화전쟁'이라 일컫기도 했다.[25] 공자를 말한다.[26] 태조고려를 건국하였고 원종쿠빌라이 칸에게 역배팅하여 몽골 제국으로 부터 고려를 보전하였다. 문종은 현종의 셋째 아들로서 고려 전성기의 절정을 찍었으니 세종의 교지는 합리적이라고 볼 수 있다.[27] 세종의 교지이전 숭의전에서 고려 태조 이하 혜종, 정종, 광종, 경종, 성종, 목종, 현종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냈는데 이후 태종이 태조•혜종•성종•현종•문종•원종•충렬왕•공민왕을 모시라고 교지하였고 후에 세종이 위 4명의 군주로 종결지었다.[28] 이 두 임금의 치세가 주나라 전성기이며 '성강지치(成康之治)'라고 불린다.[29] 전한의 전성기라고 불린다. 한무제의 흉노 토벌도 이 시절의 국력 축적이 없다면 불가능했다.[30] 지금의 중국 산둥성 거현(莒縣).[31] 청(靑)은 동쪽을 가리키므로 청방은 동쪽 나라 즉 우리나라를 가리킨다.[32] 승(乘)은 수레를 의미한다. 고대 중국은 천자가 만 개의 수레를 끌 수 있고 제후는 천 개의 수레를 끌 수 있었다. 그래서 이후 만승, 만 개의 수레는 천자를 의미하게 되었다.[33] 천하(天下)의 다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