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철/지도자 경력
1. 삼성 라이온즈 코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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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 코치 시절.
삼성 라이온즈에 이적하여 1년의 선수생활 후 은퇴한 이순철은 삼성 라이온즈의 주루코치가 되어 2000년까지 활동하였다. 이승엽이 1999년 프로야구 최다홈런을 경신할 때 주루코치로서 1루에서 이승엽과 포옹하기도 했다.
2. LG 트윈스 코치 시절
2000년 시즌 후 악감정이 남아있던 김응용[1] 감독이 삼성 라이온즈의 감독으로 취임하게 되면서 이순철은 삼성을 떠났고, 2001년 LG 트윈스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LG 트윈스 이광은 감독이 학연을 중시하는 사람이라는 평가가 있는지라 연세대 후배의 자리를 만들어주려고 영입했다는 추측도 있었다.[2]
사실 코치 시절만 해도 평가는 상당히 좋았다. 선수들도 '편하면서 잘 가르쳐주는 코치'라면서 좋아했고 주루코치나 작전코치로서의 능력 또한 최상급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여담이지만, 코치 시절 2001년 올스타전 이벤트인 '올드스타전'에 출전해서 장호연을 상대로 '''잠실 야구장'''좌측 펜스를 넘기는 홈런도 때려냈다. 아주 살짝 넘어가긴 했지만, 은퇴하고 몇 년이 지난 코치가 잠실 담장을 넘기는 모습을 보여주는것 자체가 볼거리였다.
3. LG 트윈스 감독 시절
코치 시절의 좋은 평가를 바탕으로, 2003시즌 종료 후 이광환의 뒤를 이어서 LG 트윈스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계약기간은 3년. 이 과정이 조금 재미있는데, 당시 KBO 홍보대사로 있다가 코치 연수를 마치고 온 선동열을 2003년 하위권으로 쳐진 서울특별시 연고 구단들이었던 LG 트윈스와 두산 베어스 등이 감독으로 영입하려고 하였고, 각각 LG와 두산의 사령탑을 맡고 있었던 이광환과 김인식 등은 구단의 선동열 영입설에 따라 모두 팀을 떠났다. 그러나 막상 선동열은 스승 김응용 감독이 있는 삼성 라이온즈의 투수코치로 부임하였고, 엄한 감독을 사퇴하게 만든 두 팀은 결국 기존 팀의 코치였던 이순철과 김경문을 감독으로 승격시키게 된 것.
그러나 감독 취임 이후 이순철은 최종적으로 LG 팬들로부터 '''감독 취급은커녕 사람 취급도 못 받는 암군으로 굴러떨어졌다.'''[3]
첫 번째는 성적. 이순철이 재임한 3년간 LG의 성적은 6-6-7이었고, 7위를 기록하다 중도 경질된 2006년에는 양승호 대행 체제에서 최하위로 굴러떨어지는 굴욕을 맛봤다. LG가 황금기 멤버들이 어느정도 노쇠하면서 리빌딩이나 리툴링의 필요성이 있었다고는 하나, 이 문제는 아래에서 다시 한 번 반박되니 후술.
두 번째로, 돈 들여서 데려온 선수들은 죄다 먹튀가 됐다. 사실 이건 이순철 잘못이라고 보기에는 하락세가 완연한 선수들을 돈주고 나온 프런트의 잘못이기도 하다. 진필중은 두산 시절 리그 최고의 클로저로 군림했으나 김인식 감독의 혹사 수준의 기용으로 퍼지고 있었고, 영입 직전이던 2003년에는 이미 기아에서 눈에 띄게 하락세를 타고 있었다. 그런 선수를 4년 30억이나 주고 데려왔더니 LG에 있던 3년간 sWAR 0.96이라는 최악의 성적으로 먹튀짓을 하다가 계약 끝나기도 전에 방출당했다. 마해영의 경우 2004년 FA 첫 해부터 에이징커브를 제대로 맞고 장타력이 급감하며 하락세가 완연했고, 2005년에도 기대 이하의 모습을 이어가고 서정환 감독과 갈등하는 등 좋지 않은 모습만 보여주고 있었다. 이미 4년 28억 계약이 2년 남아있던 마해영을 LG는 장문석을 포함한 3대3 트레이드로 영입했으나, 2006년 OPS 0.719로 살아나지 못하고 2007년에는 1군 11경기 28타수 2안타 타율 '''0.071'''을 기록하며 폭망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진필중과 마해영 둘 다 기아에서 넘어온지라 기아에 좋은 일 시키기 위해 영입한 거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
세 번째로, 팀의 구심점이 되었던 프랜차이즈 스타들을 박대하고 내쫓았다. LG의 프랜차이즈 스타 이상훈과 1994년 신인 3인방 류지현, 김재현, 서용빈 등은 모두 이순철 재임기에 FA 혹은 트레이드로 타 팀에 이적하거나 등떠밀리듯 은퇴하게 된다. 이상훈은 '''친정 팀인 LG를 상대로 더 이상 공을 못 던지겠다'''며 자리만 지키고 있어도 보장되는 '''6억 연봉을 포기'''[4] 하는 것으로 선수생활을 마감했고, 유지현은 1군에서 배팅볼을 던지는 수모를 당하면서도 '''LG 외의 다른 팀으로 가는 건 생각조차 해본 적 없다며 내야가 부실했던 SK와 한화 등 타 팀에서 잘 대해 줄테니 와달라는 오퍼를 뿌리치고 은퇴했다'''. 김재현은 이전부터 각서 사건으로 인해 구단과의 갈등이 있었고 결국 2004년 말 팀을 떠났으며, 서용빈 또한 2005년 복귀 이후 대부분 2군에 박아놓았고 결국 1년 뒤 은퇴하게 된다. 그리고 이 셋의 이적과 은퇴로 LG는 팀의 구심점이 될 선수를 잃었고, 이는 10년간의 암흑기에 일조하게 된다.
다만 좀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1994년 신인 3인방 중 하나인 류지현은 2002년 구단과의 연봉조정 신청에서 이긴 것을 계기로 구단과의 사이가 틀어진 점을 감안해야 할 필요가 있고, 서용빈의 경우는 군 복무 + 노쇠화가 겹쳤다는 점에서 어쩔 수 없어보이는 부분도 있다. 김재현 역시 각서파동 사건으로 인해 구단과 사이가 틀어진 점도 있었고, 오히려 당시 이순철은 '''"FA가 된 김재현을 꼭 잡아달라."'''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김재현의 인터뷰로도 프런트와의 갈등만 나오지 이순철에 관한 이야기는 없다. 그러나 후술하겠지만 김재현을 보내고 데려온 보상선수를 보면 욕을 쳐먹어도 싼 수준이다.
하지만 이 역시 반론이 존재하는데, 류지현의 경우 연봉조정 신청과 관련해서 구단과 사이가 틀어지긴 했지만 슬럼프 이긴 했어도 공수주에서 쓸모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쓸모없는 선수로 판단되어 류지현의 은퇴 시기를 앞당긴 이순철의 역할도 한 몫 하긴 했다. 서용빈과 비슷하게 늦은 나이에 군 복무를 하고 온 이영우는 전성기 시절의 기량은 전혀 보여주지 못했고 어깨 부상이 도지며 수비도 제대로 할 수 없었지만 늦은 나이에도 7할대 중반의 OPS를 기록하며 좌타 대타감으로 준수한 활약을 보였고 충분히 1군에 붙어있을 만 했다. 그렇기 때문에 서용빈에게 경기감각을 익힐 기회도 주지 않고 2군에 박아둔 건 실책인 셈. 다만 서용빈은 신인 시즌의 커리어 하이를 다시 보여주지 못했고, 2000년대 들어서는 리그 최하 수준의 공격력을 가진 1루수였으며, 서용빈이 복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는 박병호라는 특급 유망주를 1차지명으로 영입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서용빈을 기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적었다. 물론 그럼에도 일말의 여지 없이 홀대하고 내팽개친 부분은 아쉬움이 남으며, 특히나 2006년시즌을 앞두고 서용빈을 배제하면서 데려온 마해영도 제대로 폭망한지라 더더욱 아쉬움이 남게 되었다.
이들의 은퇴는 대부분 프런트의 주도 하에 일어난 일이었으나, 이상훈의 경우에는 부임 당시 감독과의 불화가 언론에서 부각되다가 이상훈이 SK로 트레이드되는 등 실제 비판의 화살은 그 프런트가 내세운 감독인 이순철에게 갔다고 일부는 주장하기도 했다.
위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신바람 야구의 대명사 이광환은 2003년 LG 감독을 맡던 시절 시즌 중 구단 수뇌부로부터 이상훈, 유지현, 김재현을 다음 시즌 구상에서 제외하라는 지령을 받았지만 '기둥 3개가 한꺼번에 빠지면 집이 무너진다. 내가 감독으로 있는 동안에는 안 된다'고 하며 결사 반대를 외쳤으나 날 자르고 이순철을 감독으로 앉힌 뒤 뒤에서 그 세 명을 정리했다고 밝히고 있다. 손윤 칼럼, 스포츠2.0 펌글.[5][6] . 다만, 나중에 일어난 이종범 선수의 은퇴 권유나 위 선수들을 은퇴시킨 후에 한 언플을 볼 때 그가 해당선수들 은퇴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는 건 납득하기 힘들다. 일례로 은퇴할 당시에도 어느정도 기량이 있어서 타 팀에서도 영입할려고 했던 유지현[7] 을 공수주 전부 안돼서 쓸모없는 선수로 매도했었다. 게다가 2004 시즌 중에는 팀의 영구결번 레전드이자 2군 투수코치인 김용수가 껄끄럽다는 뉘앙스의 발언을 인터뷰 중에서 했고[8] 2004 시즌 끝나자마자 김용수 코치를 쳐내고 찌질하게도 잠실구장에 걸린 영구결번 현수막까지 내려버리는 찌질함의 극치를 보였다.
사실 이 세 문제만으로도 팀에 큰 해악이 되는데, 앞서 언급한 단점에 방점을 찍는 가장 큰 문제가 따로 있으니... 그렇게 프랜차이즈 선수들을 내친 주제에 '''대체전력 육성에 완벽히 실패했다'''는 점이다. 적어도 후임 감독인 김재박은 없는 자원 속에서도 이대형, 우규민, 최동수, 김정민 등을 중용해서 성공하는 결과를 이끌어냈다.[9] 이는 감독으로서 엄청난 차이다.
이순철은 신인 육성에서 계속된 실패를 거듭했는데, 장기적으로 육성할 필요가 있었던 거포 유망주인 박병호와 정의윤, 이성열 등을 너무 일찍 1군에 불러 이리저리 타격폼을 뜯어고치는 등 '''타격 기술뿐만 아니라 멘탈까지 망가뜨렸고''', '''살이 안 찌는 체질인 추승우를 거포로 육성한답시고 억지로 살을 찌우게 해서''' 공수능력의 잠재력을 말아먹고 2007년 방출당해서 야구인생 자체가 끝나기 직전까지 내몰렸다.[10] 결정적으로 그가 있을 때 지명한 투수들인 장진용, 김기표, 신창호 등은 '''볼 것도 없이 패망'''.[11] 당시 스카우트였던 이효봉이 '''지명 삽질로 팜을 박살내고 있었는데도 그냥 눈 뜨고 지켜만 봤다'''. 이 때문에 LG는 2010년대 초반까지 특히 타자쪽에서 중간층(1981~빠른 1988년생) 선수들의 부재에 시달렸고, 염경엽과 김진철, 그리고 김진철 이후 2013년에 부임한 전 두산 스카우터 출신 김현홍이 적절한 스카우팅으로 팜을 재건할 때 까지 LG의 팜은 암흑기에 빠져있었다.[12]
LG 팬들이 그에 대해 치를 떨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원인은 바로 이동현. 이동현은 2001~2002년에 맹활약하면서 LG 마운드의 샛별로 떠올랐지만 이미 경기고 때부터 혹사당한 데다가 신인 시절에도 '''순수 불펜으로만 120이닝''' 이상을 던지는 등 '''김성근의 지나친 혹사'''로 인해 고생하다가 토미 존 서저리를 받고 재활중이었는데 이순철은 그런 이동현을 재활이 미처 끝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당겨 쓰려다가[13] 수술한 부위의 인대가 탈이 나서 얼마 못 가 재수술을 받게 되었고 결국 이동현은 5년 여에 걸쳐 세 차례의 수술을 받으며 기나긴 시간을 재활에 매진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이순철이 남긴 유명한 한 마디가 있었으니, '''"재활은 마운드 위에서 하면 된다."'''[14] 이후 이동현은 무려 5년 만에 눈물겨운 복귀를 하였고 그 뒤로 LG 불펜에서 활약하고 있지만 그 재활 기간동안 그를 바라보는 팬들과 선수 본인의 마음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이동현의 케이스는 김성근 감독의 미친 혹사로 보는 의견도 있고 이동현 본인이 혹사 이후 수술+재활을 하며 쉬어야 했을 때 어거지로 등판시켜서 부상기간을 더 연장한 이순철이 까이는 비중이 많았다가, 2015년 이후 김성근이 한화 이글스에서 혹사 논란이 벌어지자 2002년 이동현의 투혼 역시 김성근의 미칠 듯한 혹사였다는 게 알려지며 김성근이 까이는 비중이 높아졌다.
결론적으로는 고교 시절부터 혹사를 당해 관리가 필요했던 선수를 신인 때부터 김성근이 무리하게 굴려서 부상이 찾아왔고 이를 이순철이 당겨 쓰며 부상을 악화시켰다는 게 중론.
이순철이 LG 감독 시절 저지른 또 하나의 대표적인 최악의 실책 중 하나가 2004년에 김재현이 FA로 SK에 이적했을 당시 보상선수 사건이다. 당시 정우람, 윤길현, 고효준, 신승현 등의 젊고 싱싱한 투수들 중 적어도 하나는 보호선수 명단에 끼지 못할 거라는 전망이 우세하였다. 이는 김재현을 잃은 대신 팀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허약한 마운드를 보강할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이순철은 '''SK의 전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선택'''이라면서 보상선수로 전 LG 선수였던 내야수 안재만을 지명했다. 안재만은 SK, LG 어디서나 주전감은 아니었고 보상선수를 통한 소중한 전력보강 기회만 날려먹은 셈이었다. 게다가 SK는 롯데에서 FA로 풀린 만능 내야수 김태균을 사인 앤드 트레이드로 영입하면서 3루 자리를 메꿨고 이후 1차 지명을 받은 최정이 주전 3루수로 성장하게 되는 등 '''SK 전력에는 아무런 타격이 없었다'''.[15] 어쨌든 덕분에 SK에 남은 투수들은 팀의 주축 투수로 성장했고 안재만은 갑상선 질환과 잦은 부상 등으로 인해 LG에서 제대로 나오지도 못하다가 방출당하고 KIA로 이적했다가 웨이버 공시된 후 은퇴했다. 이거 또한 뒤의 감독인 김기태와 비교되는 것이, 주력선수 3명을 FA로 날렸지만 보상선수 지명에서 팀의 미래를 위해 '''유망주들을 지명해'''[16] 철저히 실리를 추구하면서 이득을 봤다.
그리고 그의 비인격적인 면을 잘 드러낸 일이 바로 우규민 사건이다. 2006년 5월 11일, 삼성과의 경기 도중 김창희의 강습 타구에 '''머리'''를 직격당하고 쓰러진 일이 있었다. 당연히 모두들 부상을 우려했고 '''"당장 후송해서 검사받아야하는 거 아닌가?"''' 생각했지만, '''이순철은 이를 수수방관만 한 채 지켜보기만 하다가, 우규민이 다시 일어나자 그대로 계속 공을 던지게 했다.''' 다행히 우규민은 큰 부상을 입지는 않은 것으로 드러났지만, 감독의 선수에 대한 배려가 어느 수준인지 잘 보여주는 일화였다. 그 어떤 쉴드로도 커버가 안 되는 사건. 저런 응급처치가 제대로 일어나지 않아 임수혁 사건이 잠실에서 일어났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더더욱 모골이 송연해진다.
결국 2006년 5월 말, 격분한 LG 팬들이 얼굴을 가리고 위와 같은 플래카드를 내걸게 되었다.[17][18]
이어 다음 날 경기에서 심판의 오심에 항의하다 퇴장 명령을 받게 되자 '''덕아웃에서 야구방망이 하나를 뽑아오더니 그 방망이를 집어던진 다음''' 이틀 뒤인 6월 5일 자진 사퇴하고, 수석코치 양승호에게 감독 대행을 넘겼다. 왼쪽의 사진은 당시 기아에서 건너와 LG에서 먹튀짓을 하던 마해영과 합성되어, 오른쪽과 같이 서로 방망이 집어던지고 싸우는 짤방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근데, 저러고 그러러니 쳐다만 보는 현대 유니콘스 선수단이 보인다
전지훈련에서의 유남호 폭행 사건과 마찬가지로 이순철 본인에게도 흑역사였던 시절이기도 하며, 본인이 감독이 될 그릇이 절대로 아님을 증명한 시절이 되겠다.[19]
3.1. 감독으로서의 평가
명선수는 명지도자가 될 수 없다의 적절한 예시 중 하나로 경기 운영 능력은 '''최악 그 자체'''. 출첵야구라는 문구가 그의 몰상식한 경기 운용을 아주 잘 나타내고 있다. 중간계투 운용에 대한 체계적인 계획 없이 매 경기마다 5~6명 이상의 투수가 마구잡이로 등판하기 일쑤였고 이런 운용은 결국 계투진에 엄청난 부하를 일으키면서 팀 성적이 바닥을 치는 원인이 됐다. 2005년 LG의 전체 투수 등판횟수는 606회로 8개구단 최다, 2006년에는 535회로 전체 2위다. 이마저도 2006년 후반기는 양승호 감독 대행이 팀을 정상적으로 운영하면서 이러한 현상이 줄어든 덕이다.
후임 감독이었던 김재박과 성적을 비교해보면 이순철 305경기 129승 170패 6무 승률 0.431, 김재박 385경기 158승 217패 10무 승률 0.410으로 이순철이 근소한 차이로 승률이 더 높았다. 하지만 '''순페이는 휘청이던 팀에서 부임하자마자 이상훈을 내쫓는 등 팀을 만신창이로 만들'''면서 대체전력 발굴은 제로에 가까웠지만 '''김재박은 그가 바닥까지 말아먹은 팀 추스려서 ' 5위 '까진 해 봤다.''' 기껏 1년 잘 써먹은 박명환이나 옥스프링이 2~3년차에 나가떨어지는 등 차라리 성적에 관해선 김재박쪽에 실드쳐줄 건덕지가 많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감독은 성적에 대한 책임을 지는 자리이기 때문에 김재박이 욕만 먹는 수준이라고 한다면 이순철은 아예 금지어다. 성적도 성적이지만 영구결번감인 여러 레전드들을 대책없이, 특히 이상훈을 감독이 직접 내쫓은 것 때문에 이순철하면 아직도 대다수의 LG팬이 아직도 이를 갈 정도다.[20]
훗날 이순철 해설위원은 견해적 차이겠지만 홈구장 더그아웃에 기타를 치는 건 좋지 않다는 건 동료나 상대팀 선수들에게 피해를 입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전 감독의 생각이었다고... 그만큼 아직도 LG빠들은 15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이순철만 생각하면 이를 갈 정도.
대표적인 노력파에 코치시절 보여준 능력도 나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감독으로서는 부진했던 이유로는 사실 LG선수들이 막장이라서 그렇다는 '순페명장론'이 대두된 일이 있었다. 물론 LG팬을 놀리는 어그로. 그의 선수보는 안목[21] 이나 경기운용능력, 그리고 통솔능력을 볼 때 그가 LG 트윈스 감독을 맡는 동안 능력을 보였다고 여겨지는 분야는 '''거의 없다시피하다. 아니, 없다.''' 특히 선수들을 자주 비판하는 특성 탓에 반감을 사기 쉬웠던데다, (LG 프런트측의 압력이 있기도 했지만) 선수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할 고참 선수들을 마땅한 대안도 없으면서 전부 내치기까지 했다. 이런 실책들은 고스란히 김재박, 박종훈 감독 시기에 일어난 팀 내 분란의 씨앗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런 분란들은 김기태 시절에 와서야 겨우겨우 잠잠해졌고, 나아가 LG가 2013년에야 비로소 비밀번호를 끊는 원동력이 되었다.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분명 '''야구지식은 많은데 독선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자세 때문에 선수들과 융화하기 어려운 타입'''. 특히 LG 특유의 자유분방한 분위기에서 이런 타입의 감독은 상극일 수밖에 없었다. 분명 주루, 작전 등 제한된 분야에서 코치로서 능력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없다고 해도 좋을 선수를 보는 안목, 선수단 통솔 실패, 과도한 혹사로 인한 선수들 부상 등은 감독으로써 그의 한계를 잘 보여주는 지표이다. 코치로서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감독으로서는 그릇이 안 되는 대표적인 경우.[22]
결국 이런 막장 행보 때문에 당시 롯데의 8888577의 마지막 77을 찍은 강병철, 2007년 KIA를 시원하게 말아먹은 서정환과 같이 야구 커뮤니티에서 무지하게 까였으며, 스타크래프트도 보던 팬들에 의해 앞의 강병철과 KTF 매직엔스를 막장으로 인도한 김철이랑 엮으며 일명 '''3Fe'''로 또 까였다.
제 아무리 최근에 김성근이 SK의 영광의 왕조 시절 호성적에 묻혀 있던 뒷면의 추악한 점이 낱낱이 까발려진 이후 다른 성적 못 낸 감독들이 재평가 받고 있다곤 하지만, '''이 인간과 롯데 시절 백인천 만큼은 무조건 예외이다'''.
4. 우리 히어로즈 코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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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우리 히어로즈의 수석코치로 부임했지만 당시 감독이었던 이광환의 자리를 노린다는 소문 때문에 불화가 생겼고, 김시진을 다시 감독으로 임명하면서 결국 시즌 후 둘 다 경질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LG에 있을 때 이광환의 후임이 이순철이었고, 사이가 좋을 리 없는 둘을 두었으니...
이후에는 2009 WBC 국가대표팀 코치를 맡았고, WBC가 끝난 후 MBC의 해설가로 복귀하였다.
비록 이광환과 불화가 있었지만 선수들의 훈련 지도나 젊은 선수들의 태도 개선, 주루 플레이 개선에는 적지 않은 공을 세웠다는 평가를 받았다. 다만, 애당초 이 팀 자체가 선수들의 연봉 삭감으로부터 비롯된 태업과 선수들과의 친화 관계가 없던 것 때문에 수석코치로서의 업적은 딱히 눈에 띄는 게 없다.
5. KIA 타이거즈 코치 시절
5.1. 2011년
2011년 10월 18일, KIA 타이거즈의 수석코치로 임명되며 14년 만에 친정 팀 타이거즈로 복귀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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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위 짤방은 재평가 받기 시작했다.해당 영상 해당 영상은 MBC의 야구 해설프로인 '야구 읽어주는 남자'. 당시 팀에서 필요한 역할이 달랐다며 좋게 넘어간 것처럼 보이지만 이후에 이용규의 잠재력을 보지 못한, 선수 보는 눈이 하나도 없음을 증명한 것이 되었다.
기사에 따르면 현역시절 선동열 감독과는 언제고 한 번은 다시 같은 팀에서 팀을 이끌어보자며 약속을 한 모양이다. #
팬들은 '''최희섭과 양현종'''의 멘탈을 개조해주길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본인도 같은 생각인지 부임 첫인사 때부터 최희섭 길들이기에 들어갔다. 상견례 때 선동열 감독의 인사 후 한마디 해달라고 하자 자기는 대화울렁증이 있다며 손사레를 치면서 "나는 최희섭과만 대화하면 된다.다른 선수들은 안해도 된다.(최)희섭이랑만 얘기하면 다 해결된다"라고 말하며 웃었다고.[23]#
5.2. 2012년
하지만 2012년 시즌을 앞두고 그에 대한 불안감도 높아졌다. 단적인 예가 발전 가능성이 거의 없어보이는 신종길에게 꽂혔다는 것. 마무리 훈련 최고 성과라는 드립이 나왔으며 도루왕 할 것 같다는 말을 직접 할 정도라서 세간의 우려는 높아져만 갔다. 어차피 최희섭만 뻥뻥 터지게 하면 상관없다는 말도 있긴 하지만 선수보는 눈이 과연 좋은지는 2012년 시즌이 시작되면 자명해질 듯. 선동열 감독이 사실상 타격에는 문외한이나 다름없어서 이순철 수석코치에게 타격을 다 맡기는 상황이라는 말이 있는 마당이니 그의 능력에 따라 김기아 타선이 될지 다이너마이트 타선이 될지 두고 볼 일.
2012년 3월 31일 '''이종범의 갑작스런 은퇴'''에 개입했다는 게 알려지자 KIA팬들에게 선동열과 함께 열심히 까였다. KIA에서도 금지어로 등극할 기세.
SK와의 개막 2연전에서 허접한 경기력으로 2연패 당하자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특히 공격야구 드립쳐놓고 잔루만 잔뜩 적립하는 상황이라. 더구나 선동열이 타자들은 전적으로 이순철에게 맡겼기 때문에 타격코치 이건열과 함께 신나게 까였다. 야인인 선동열은 작년 KIA 야구 안 봤다고 해도 해설하며 계속해서 봐온 이순철이 과거 조범현이 했던 실패를 그대로 답습하는 모양새라.
삼성전에서도 형편없는 경기력은 계속. 특히 '''팀 타율이 1할대'''라 그 호랑이 사랑방에서 조차 개새끼라며 이순철을 깠다. 특히 양아들 신종길이 8푼대의 맹타를 휘두르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까일 예정. 여기에 김원섭, 차일목, 홍재호 등 하위타선은 그야말로 길가의 돌멩이, 논가의 허수아비 수준이라 그냥 욕처먹었다. 수십억 들여 애리조나 간 선수들보다 겨우내 땡깡 부리고 국내서 홀로 훈련한 '''최희섭'''이 훨씬 잘하니 말 다한셈. LG시절 키운 선수 없는 무능한 코치[24] 가 KIA 온다고 달라질리 없었다. KIA 팬들은 주둥이만 살았을 뿐이라고 씹었다.
6월이 되어도 KIA 타선은 도무지 나아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으며, 특히 SK와의 2연전에서 이틀 연속 영봉패를 당하기까지 하니 이순철과 이건열을 사람 취급하는 KIA팬은 깨끗하게 멸종하다시피 했다. 6월 7일 현재 KIA의 팀홈런 개수는 14개로 강정호보다 2개나 적다. 팀내 홈런 1위가 겨우 4개 친 최희섭이었다. 거기다 뜬금없이 공 줍다가 종아리 근육이 파열 당해 가지가지 하는 새끼라고 욕을 처먹었다. 그나마 워낙 어그로갑인 이건열이 있어서 묻어가는 형세였지만 다들 경질되고 일본인 타코가 들어오길 바랄 지경이었다.
6월의 수석코치로서의 모습과 해설자로서의 모습을 대조해서 보면 '말은 쉽다', '입만 살았다.'라는 관용어구가 연상될 지경. 해설자 시절 보여준 풍부한 야구이론들은 결국 '''현장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처절하게 인증시켜주고 있으니 실로 입야구의 아이콘이라 불러도 할 말 없게 되었다. 때문에 KIA팬들은 KIA에서 쫓겨나 다시 해설복귀한다면 이전처럼 모두까기 인형질을 못 할거라고 예상했지만....
이건열이 결국 2군에 내려가면서 타격을 전담하게 되었다. 팬들은 오십보백보라며 답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 답답해했다. 그런데 2012년 6월 26일부터 KIA의 타선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그것도 홈런 한방에 의한 득점이 아닌 안타를 비롯한 발야구에 의한 작전야구...어? 근데 이건 이순철의 공이라고 보기는 무리다. 삼성에서 트레이드로 건너온 조영훈이 활력소가 된 것 + 전임 조범현 감독때 했던 특타를 부상을 이유로 그만두게 했다가 성적이 안 나오니 다시 시작하면서 타선이 불 붙은 것. 결국 2011년 조범현이 풀어놓은 숙제를 깽판치다가 답이 안 나오자 다시 원상복귀한 셈.
시즌이 지나면서 차일목이나 박기남 등 일부 선수들이 예상 밖의 활약을 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기복이 심한 타선을 붙들어놓지 못하고 있어서 욕을 먹었다. 어제는 맹타를 휘두르던 타선이 오늘은 침묵하는 등.
그러나 8월 들어 KIA 타선이 시즌 초, 즉 기복이고 뭐고 없이 그냥 꾸준히 못하는 개막장 타선으로 회귀하면서 다시 폭풍처럼 까였다.
결국 KIA가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며 2012년 시즌을 마무리했다. 선감독이 타격코치로 김용달을 영입하게 되면서 이순철은 자연스레 수석코치의 임무만 수행하게 되었다. KIA팬들은 제발 수코 역할에만 충실하라는 의견을 표했다. 와중에 김응용 감독이 한화 이글스로 복귀하면서 스승을 따라 한화로 이적할 가능성이 있다는 카더라가 돌기도 했다.
선동열 감독 사임 이후 공개된 자료를 보면 흥미로운 부분이 보인다. # 내용은 감독이 수석코치와 각 부문 코치를 통해서 선수에게 오더를 전달하는 수직적 체계였다는 일화와 더불어, 2012년 대패한 사직 경기에서 [25] 수석코치가 고참이자 간판급인 4타수 무안타인 모 선수[26] 를 공개적으로 질책하여 해당 선수가 부진에 빠졌다는 보도가 있었다.
5.3. 2013년
4월까지 잘 나갔지만, 이후 팀이 급격히 무너지며 선동열 감독과 함께 까였다. 선동열 감독이 경질되면 이순철 코치가 그 자리를 이어받을 거라고 예상한 팬들도 있지만, 구단은 성적 부진을 이유로 그를 10월 5일 김평호, 조규제, 박철우 코치와 함께 재계약 포기 통보를 통해 그를 '''해임'''했다. 후임 수석코치로는 2군 총괄코치(감독)인 한대화가 올라왔다.
대부분의 KIA 타이거즈 커뮤니티에서는 선동열과 함께 팀을 망친 원흉으로서 해임을 환영하는 분위기다.
박동희에 의하면 이순철 자신이 선동열 감독 대신 팀 부진의 책임을 진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그런 측면도 없지 않고.
2013년 10월 6일 수석코치에서 물러나기 전에 선동열 감독의 통보가 있었다고 한다. 이전 버전에서는 선동열이 종용했다는 식으로 기술되었는데 [27] 기사를 보면 선동열이 주도해서 이순철을 잘라서 뒤통수를 친 게 아니라 프런트가 결정한 해임을 미리 알려주고 양해를 구한 것으로 보인다. 어차피 선동열은 이번 시즌의 졸렬한 지휘로 코칭스탭의 조각권은 없어진 상태고,[28] 코치 인사는 프런트가 전적으로 결정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초반에 1위를 달리다가 8위까지 미끄러진 것은 당연히 선동열이 책임져야 하지만, 프런트는 선동열은 일단 현대자동차그룹의 고위층이 영입한 데다가 프랜차이즈 스타이기 때문에 함부로 자르기 힘드니[29] 바로 그 아래이면서도 선 감독의 최측근인 수석코치에게 책임을 물은 것같다.
이후에는 해설가로 복귀했고, 국가대표팀 소집 때마다 간간히 코치를 맡고 있다. 2015 WBSC 프리미어 12 국가대표팀의 타격코치를 맡았으며 2017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국가대표팀도 맡는다.
[1] 지금이야 시간이 오래 흘러서 이순철은 '영원한 나의 스승'이라고 김응용에게 존경심을 표하면서 화목한 사제지간의 관계를 회복했지만, 이 당시만 해도 1996년의 항명사태와 1997년의 방출건으로 인해서 양자간의 악감정이 서로 풀리지 않던 시기였다.[2] 실제로 이광은이 자기 인맥이라고 쓴 인물은 오영일 투수코치, 노찬엽 타격코치, 박철영 배터리코치 세 명이다. 그나마 박철영 코치는 능력은 좋았다는 평이 잇다.[3] 현재 이와 비견되는 감독은, 한화 이글스의 혹사 대마왕 김성근 정도이며, 이를 넘는 감독은 아예 감독이라는 이름만 걸고 골프만 주야장천 열심히 친 롯데 자이언츠의 백인천밖에 없다. 그것도 백인천은 열심히 한 것이 아닌 태업이었으므로 열심히 한 감독 중에서는 이 둘이 역대 최악의 암군이라 볼 수 있겠다.[4] 말이 6억이지 당시 물가가 지금보다 훨씬 낮았으므로 실질 금액은 훨씬 많다. 거의 현대의 10억대 연봉 수준이다.[5] 대부분의 라이트한 야구 팬들은 네이버 뉴스의 자극적인 헤드라인과 그 댓글란을 중심으로 정보를 얻는 경우가 많고 긴 분석기사나 칼럼은 자세히 읽어보지 않는다. 3인방을 이순철이 퇴출시켰다고 믿고 있는 LG팬들 뿐 아니라, 프런트가 퇴출시켰다는 주장을 지지하며 이순철 실드치던 KIA팬들 역시도 이 출처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결론은 그냥 감정적인 문제.[6] 물론 이러한 사실이 이순철의 무능과 다른 여러 삽질, 프런트에 대한 과잉 충성 등을 덮을 수는 없으며, 얼마든지 팬으로서 깔 수 있다. 다만, 이렇게 감독감이 전혀 아니올시다인 인물을 감독으로 앉히고 입맛대로 팀을 주물러 댔던 프런트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었다는 점만큼은 분명하다. 이후에도 LG 프런트는 팬들에게 비판받는 하는 행보를 꿋꿋이 밀고 나간다.[7] 실제로 은퇴직전인 2004년 초에도 연봉 문제로 LG와 갈등을 빚던 유지현을 SK가 트레이드로 영입하기 위해 LG에 제의를 했던 적도 있고, 김인식 감독이 한화 감독을 맡던 2005년 시즌 중 이미 은퇴하고 LG 코치를 하고 있던 유지현에게 우리 팀으로 와주면 잘 대우해줄테니 몸을 만들어놓으라고 한 적이 있다고 한다.[8] 김용수가 이순철보다 1살이 많은데다가 이순철은 1년을 꿇어서 실질적으로는 2학번이 차이나며 학교도 각각 연세대(이순철), 중앙대(김용수)로 아예 엮이지도 않는다.[9] 단 김정민의 경우는 은퇴 후 코치로 있던 선수를 복귀시킨 것이어서 애매하다. 그 때문에 졸지에 자리가 없어진 최승환은 결국 두산으로 트레이드되었고 홍성흔의 컨디션을 감안해서 이후 지명타자로 전향시킨 점도 있다. 물론 타격은 채상병이 더 나은 모습을 보였지만 이후 두산에서 양의지가 성장하기 전까지 주전 포수로 활약하게 된다.[10] 다행히 당시 한화 감독이던 김인식 감독이 불러서 기회를 얻고, 한화에서 준 주전급으로 나섰다.[11] 다만 2004년 1차 지명을 받은 장진용의 경우 이미 2003년 6월에 1차 지명이 결정된 상황이었고 이순철은 당시 1군 주루코치였었다. 2006년 1차지명자인 김기표는 특정 투수 혹사로 악명 높은 경성대에서 상당히 혹사당한 상태였기에 위험성이 어느 정도 예견된 터였고.[12] 염경엽과 김진철 등이 비록 팀 내 파벌을 형성했다는 루머로 욕먹긴 하지만, 염경엽은 2009년 드랩에서 '''오지환''', 문선재, 정주현, 한희 등을 지명해 팀의 중심 유망주로 만들었고(한희와 문선재는 결국 실패했지만), 2010~12년에 온 김진철이 지명한 '''신정락''', '''임찬규''', '''유강남''', 이천웅, 서상우, 최성훈, 그리고 2014년 이후 김현홍이 지명한 안익훈, 양석환 등은 곧 다가올 팀내 세대교체에 대비할 선수들이라는 점에서 이순철 시대의 신인발굴 실패는 독이 되고 만 셈이다.[13] 보통 토미 존 서저리의 경우 수술 후 공을 던지고 실전에 등판하기까지 재활기간 1년~1년 6개월 정도를 필요로 하는데 이순철은 이동현이 수술을 받은 후 '''8개월도 안 되어서''' 실전 투구를 지시했다.[14] 흔히들 이 말을 우규민에게 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우규민이 아니라 이동현에게 한 말임을 알 수 있다. 정작 우규민은 저 때 소화 이닝 수도 적었고 무엇보다 보여준 것도 많지 않았다. 후술하겠지만 우규민에게도 다른데도 아니고 무려 머리에 타구를 맞은 상태에서 마운드에는 코빼기도 안비치고는 연투를 시킨 미친 소리를 들을 만한 일화가 있고, 사실 2003년 최다이닝 1위를 기록한 후 관리를 해주지 못하며 그 여파 때문에 어깨 부상에 시달렸던 이승호역시 이 일화에 해당되기는 했다만, 이동현의 임팩트가 더 커서 묻혀버렸다.[15] 그리고 11년 뒤 양상문 감독 체제하에서 정상호를 데려온 것은 입으로만 약화를 외친 이순철의 언플과 대조된다. SK 포수 운용의 양대 축인 정상호를 데려오면서 '''약점인 백업 포수의 경험 부족'''을 노린 것이기 때문. 하지만 후에 정상호가 먹튀가 되면서 결과적으로 실패하긴 했지만. 두산으로 가서 박세혁 백업을 충분히 해주고 있고 SK에서 이성우 또한 데려와서 어느 정도 쓰린 속을 달랬다고 봐야한다.[16] LG가 데려온 보상선수들은 '''윤지웅''', 나성용, '''임정우'''인데, 이들은 2011년도 신인 지명에서 '''높은 순번'''(윤지웅이 1번, 나머지 둘은 3번)이었다.[17] 이는 5년 뒤에 SK에서도 데자뷰가 되었다.[18] 그리고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규탄 촛불집회에서도 현수막으로 나왔다.[19] 실제로 감독직 사퇴 이후 코치직을 두 번 했으나 두 번 다 능력은 하나도 없음이 증명되었고, 이후 감독 제의는 단 한 번도 오지 않았다.[20] 이상훈이 두산 코치가 됐다고 비판하는 LG팬도 이순철에 의해 쫒겨난 것을 잘했다고는 절대 말하지 않는다. 애당초 그가 현역일 때는 '''LG하면 이상훈!!, 이상훈하면 LG!!'''라는 말이 있었고 LG를 상대로 공을 던질 수 없다며 수억원대의 연봉을 포기할 정도로 LG를 사랑했던 이상훈이 더 이상 LG 트윈스에게 더 이상의 요구를 하지 않겠다고 손을 놓아버린 것의 발단을 제공한 것 자체가 평생까임권이다.[21] 구체적으로 보면 추승우를 강제로 살찌워 거포로 만들려는 롯데의 금지어 백모씨와 비슷한 짓거리를 했었다. 하지만 살이 안 찌는 체질인 추승우는 빠른 발을 살려 똑딱질을 하는 쪽이 더 적합했다.[22] 이렇게 코치로선 괜찮지만, 감독감은 아니었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유백만, 유남호, 서정환, 박종훈, 선동열, 김시진, 조원우, 김한수 등도 비슷한 경우다. 특히 이순철의 경우는 LG 팀컬러와는 상성이 극단적으로 안 맞았던 게 더 욕을 먹는 원인이 되었다.[23] 그러나 이순철은 최희섭이 2012년 5월 19일 경기에서 패하고 최희섭을 공개적으로 질책했는데, 이 과정에서 최희섭은 완전히 삐딱선을 타고 망하고 만다.[24] 그런데 이순철이 지금껏 맡았던 분야는 '''타격이 아니라, 수비, 주루'''였다. 타격부분은 애초에 맡아본 적이 없어서 문외한인 셈.[25] 5월 19일로 추.정[26] 이용규와 최희섭이 해당되나, 최희섭으로 추정.[27] 관련기사 이순철의 지인이 "최근 선동열 감독이 따로 면담하고 이순철 수석코치에게 (경질에 대한)양해를 구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28] 조범현은 2009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후 발언권이 높아진 후에야 자기에게 껄끄러운 수석코치인 김종모를 자르고, 타격코치 황병일을 수석코치 자리에 앉히는 등 자기 마음대로 조각을 할 수 있었다.[29] 거기다가 KIA 타이거즈는 역대 모든 감독들, 즉 김성한, 유남호, 서정환, 조범현을 모두 계약 내에 자르는 무리수를 두어 왔다. 이는 그룹 감사에서 누누히 지적되어 온 부분이다. 때문에 선동열은 좋든 싫든 계약기간인 3년차까지 간다고 보는게 타당하다. 그리고 선동열은 3시즌을 채웠지만, 말실수 하나 때문에 결국 재계약한지 얼마 안 되어 사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