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영화)

 


'''사도''' (2015)
''思悼, The Throne''[1]

[image][2]
'''감독'''
이준익
'''각본'''
조철현, 이송원, 오승현
'''제작'''
오승현
'''촬영'''
김태경
'''조명'''
홍승철
'''편집'''
김상범, 김재범
'''음향'''
최태영
'''미술'''
강승용
'''음악'''
방준석
'''출연'''
송강호, 유아인
'''장르'''
사극, 드라마
'''제작사'''
㈜타이거 픽처스
'''배급사'''
[image]쇼박스
'''촬영 기간'''
2014년 7월 8일~2014년 10월 8일
'''개봉일'''
[image] 2015년 9월 16일
'''상영 시간'''
125분
'''총 관객수'''
[image] 6,247,651명
'''국내 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1. 개요
2. 개봉 전 반응
3. 예고편
4. 시놉시스
5. 등장인물
6. 평가
7. 흥행
8. 고증
8.1. 전체적인 사건
8.1.1. 엔딩 크레딧에서 나온 참고문헌
8.1.2. 노론 음모론 탈피와 담론
8.1.3. 사도세자의 정신병 묘사
8.2. 문화부분
8.3. 개별 사건들
9. OST
10. 여담
11. 수상 정보
12. 관련 문서


1. 개요


[image]

'''“이건 나랏일이 아니라 집안일이다.”'''

2015년 9월 16일에 개봉한 한국 영화. 2014년 7월에 촬영을 개시했고, 2015년 8월 11일 제작보고회를 개최했다.
배경은 1762년 사도세자뒤주에 갇혀서 죽는 '''임오화변'''이다. 사도세자의 사후를 그린 에필로그 부문을 제외하면 사건들을 병렬적 시간 구도로 보여준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고 점차 의식을 잃어가는 8일 동안의 시간을 순차적으로 진행하면서 사도세자의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영조와 관계가 틀어지고 뒤주에 갇혀 죽기까지의 상황을 동시에 그려내고 있다. 영화의 결과라 할 수 있는 임오화변은 너무나 익숙한 소재이기 때문에 사도가 뒤주에 갇히는 장면을 앞부분에 배치하고, 왜 사도가 뒤주에 갇혔고 부자 사이가 틀어질 수 밖에 없었는 지에 집중하려고 한 영화다. 이준익 감독 말에 의하면, 충혈된 감정으로 시작되는 영화.
영화 자체가 '''장기간의 역사를 매우 압축해서 보여주므로, 보기 전에 숙종, 경종, 영조에 대해 대략적으로라도 아는 것이 좋다.'''
2000년대에 제작된 영화 및 드라마 중 2015년 8월 7일에 방영한 KBS 드라마 스페셜 <붉은 달>[3]과 함께 노론 음모론을 전면 배제한 작품이다.[4] 그런데 인터넷의 영화 관련 댓글에는 노론 음모론을 앞세운 자칭 전문가들의 글이 잠시 폭주한 적 있고 이후에도 간간히 활동세력이 눈에 띈다.

2. 개봉 전 반응


영조 역할의 송강호관상에서 처음으로 사극에 출연한 후 왕 역할은 처음이라 송강호표 왕의 모습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는 와중에, 아무리 연기파 배우라도 어색함이 있지 않을까 하는 등 우려를 표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었다. 송강호의 출연작 중 <변호인>, <효자동 이발사> 등이 있었지만 일반 형사(살인의 추억), 공원 매점 주인(괴물) 등 서민적인 역할을 맡은 경우가 많았고 관객들에게도 이런 서민적인 이미지가 친숙해져 있었기 때문. 그러나 예고편과 스틸컷이 나오면서 그런 불안감이 싹 사라졌다.
영화 <베테랑>으로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던 유아인은 <베테랑>의 천만 돌파로 영화배우 커리어의 전성기를 맞게 된 상태에서 사도세자 역을 맡아 기대가 큰 상황. 적어도 주역 연기자의 연기력에는 걱정이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베테랑>에서 재벌 3세 마약중독자 싸이코 역으로 나오던 유아인이 이 영화에서도 정신병자 역으로 나오는 것이 묘하게 배역이 매치가 된다는 시각도 있었다.
<서부전선>과 추석 극장가를 노렸다.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전체적인 이야기가 부자지간의 갈등이라는 점에서 추석즈음 개봉이 시의 적절했던 셈.
영조와 사도세자와의 관계는 정치적인 문제 때문에 두 부자가 갈라졌다는 속설 대신 지나친 기대감 때문에 사도세자를 거칠게 몰아붙이는 영조의 모습, 부자의 성격차이와 그로 인한 부자간의 갈등을 주로 묘사할 것으로 보인다. 영조가 편집증 수준으로 정신적 폭행을 가하고 이로 인해 사도 세자가 정신 질환에 시달리며, 사도세자와 영조가 서로에게 반감을 가지고 이것이 극도로 악순환을 거듭하다가 결국 임오화변이 일어났다는 것은 현대에 남아있는 사료에 근거한 정설이다. 주류사학계에선 여기에 해석을 더하여 정치적 문제와 부자 갈등을 섞는 게 보통이다. 물론 이 정치 갈등도 이덕일 같은 노론 음모론은 절대 아니다. (자세한 내용은 임오화변 문서 참고.) 아버지의 따뜻한 말 한 마디가 듣고 싶었다는 예고편의 사도세자의 대사가 이것을 잘 나타내는 듯 하다.

3. 예고편



'''▲ 티저 예고편'''

'''▲ 메인 예고편'''

'''▲ 캐릭터 예고편'''

4. 시놉시스


'''“잘하자. 자식이 잘 해야 애비가 산다!”'''[5]
재위기간 내내 왕위계승 정통성 논란에 시달린 영조는 학문과 예법에 있어 완벽한 왕이 되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인다. 뒤늦게 얻은 귀한 아들 세자만은 모두에게 인정받는 왕이 되길 바랐지만 기대와 달리 어긋나는 세자에게 실망하게 된다.
'''“언제부터 나를 세자로 생각하고, 또 자식으로 생각했소!”'''
어린 시절 남다른 총명함으로 아버지 영조의 기쁨이 된 아들. 아버지와 달리 예술과 무예에 뛰어나고 자유분방한 기질을 지닌 사도는 영조의 바람대로 완벽한 세자가 되고 싶었지만 자신의 진심을 몰라주고 다그치기만 하는 아버지를 점점 원망하게 된다.

왕과 세자로 만나 아버지와 아들의 연을 잇지 못한 운명,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가족사가 시작된다.

5. 등장인물



[image]
'''영조''' (송강호 扮)
[image]

'''"왕은 결정하는 자리가 아니야. 신하들의 결정을 윤허하고 책임을 묻는 자리다."'''

너, ~니? 등 은근히 간략하고 짧은 대사들이 많은데, 작중 내내 무겁기만 한 중후반부를 조금이나마 환기시켜주는 대사로 생각하는 관객들이 많지만 현실은 실제 궁중어투라서 쓰인것이다. 궁중어투를 잘 살린 것으로 유명한 사극 대왕의 길의 영조도 거의 똑같은 말투를 사용한다. 실제로 영조는 신하가 아침에 문후를 여쭐때에도 "나는 일없다" 하는 식으로 짤막하게 답했다. 한중록을 봐도 영조는 세자에게 "그 술은 누가 주더니?" "네가 불한당이냐. 불은 어이 지르니" "어찌 그러하니?" 하는 식으로 말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배우의 출신지(경남 김해)가 출신지여서 그런지 억양상 동남 방언이 묻어날 때가 종종 있다. 그런데 듣다 보면 꽤 자연스럽다.

"별일 없지?"

영조가 불길한 일이 있는 날에, 부정을 떠넘긴다는 의미로 싫어하는 사람을 불러서 말하는 대사. 처음엔 내관, 그 다음엔 세자를 불러서 이런다. 이 점은 영화와 사료가 조금 다른데, 한중록에 따르면 영조가 부정을 씻기 위해 세자를 불러서 실제로 한 말은 '''"밥 먹었냐"'''였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이 해당 상황에서 (송강호가 연기하는) 영조가 '밥 먹었냐'고 물어보면 훌륭한 배우 개그가 되어 버려 관객들이 빵 터질 것을 우려해 유사한 의미의 다른 대사로 바꾸었다는 후일담이 있다.

아들인 사도세자성군이 되기를 바랬던 군주(아버지). 극중 영조는 세자가 어린 시절 때부터 엄하게 교육을 시켰다. 영조는 권력 투쟁 와중 숱한 죽음의 고비를 넘긴 사람으로, 신하들에게 책잡히지 않도록 항상 공부를 강조하고, 즉위할 때 신하들과 약속으로 묵인하고 있던 일부 폐단을 세자가 바꾸려 들자 그걸 왜 멋대로 바꾸냐며 신경질적으로 반응한다. 툭하면 반역 모의가 나오고, 역모죄로 잡힌 죄인들은 대놓고 영조에게 경종을 독살한 범인이라고 우기는가 하면 천한 무수리 최씨의 자식이 어떻게 왕이 되냐며 비난한다. 그 말에 영조는 저놈들의 입을 찢어 버리라는 명령을 내리며 자리를 떠난다.[6]
세제 시절의 혹독한 고생을 견딘 아버지 입장에서는, 항상 자식은 모자란 듯 보인다. 세자가 어린 시절 영조가 직접 쓴 책을 읊으면서 무려 '''한 구절'''이나 빼먹자, "놀이는 한때의 맛이요. 학문은 평생의 맛이라고 내가 몇번을 말했느냐! " "저, 저... 눈 껌뻑껌뻑 쳐다보는..."[7] 이라 말하고 노는 것만 좋아한다며 강하게 훈계를 할 정도다. 세자가 어느덧 청년이 되자, 틈만 나면 "양위하겠다."라는 등의 얘기를 꺼낸다. 이는 진짜 마음이 있는 게 아니라 세자의 반응과 신하들의 충성심을 떠보기 위한 테스트였다.

그러다 대리청정이 시작되었는데, 세자의 개혁적인 성향이 자신과 안 맞았고[8], 거기에 자신이 이뤄놓은 탕평책을 건드리는 게 싫었는지 '신하들이 다 보는 앞에서 세자의 발언 하나하나에 지적'을 해서 기를 죽인다. 대왕대비가 죽은 뒤 이 둘의 관계는 더욱 더 어긋나고, 눈 밖에 난 세자를 폐하라는 문서를 쓰라며 세자의 스승들을 압박하고 세자가 저렇게 된 책임을 전가한다. 그러던 와중 영조의 마음을 읽은 김상로를 중심으로 한 신하들이 나경언을 사주해 부추기고, 영조는 이를 구실로 칼자루를 내던지면서 말한다. ''' "자결하라." '''세자가 이런 법도가 어디 있느냐[9], 언제부터 날 아들로 여겼냐면서 거부하고 신하들이 몸을 던져 말리자, 그를 뒤주에 가두고 직접 못질을 한다.
영조가 뒤주에 가두기 전에 자살을 종용한 것은 실제 역사상의 사건 그대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 시점에서는 자결하는 게 세자로서는 가장 편한 길이긴 했다. 영화 상에서나 역사적으로나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영조 입장에서는 합당한 후계자가 사도세자의 아들 밖에 없었기 때문에[10] 좋건 싫건 세손에게 보위를 물려줄 수 밖에 없었다. 안 그러면 족보를 뒤져 먼 친척에게 물려줘야 하니까.
그런데 사도세자를 폐서인시키면 세손에게 물려줄 수가 없기 때문에 그가 반드시 "세자인 상태에서 죽은 상태"여야 했다. 또한 작중에도 나오지만 사약을 주거나 참형을 하면 역적이 되기 때문에 세손 뿐 아니라 자신의 정통성에도 타격을 준다. 당연히 이 정도로 왕을 끌어내릴 순 없겠지만 큰 타격이 있을 것. 즉, 영조가 이미 정신병자가 되어버린 사도세자에게 보위를 물려주지 않으려면 반드시 "처형이 아닌 형태로 사도세자가 세자의 신분을 유지 (혹은 회복)한 상태에서 사망"해야 하는 복잡한 상황인데, 새파랗게 젊은 그가 자연사하길 기대할 수도 없으니 자결을 종용한 것이다. 그가 자결했다면 세자로서 사망하고 자연스럽게 세손이 후계로 올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자결을 거부하자 저런 방법으로 죽이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정황상 세자와 신하들이 "설마 죽이기까지 하겠냐"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큰데 (실제로 초반엔 몰래 음식과 물도 줬다) 영조 입장에선 아들을 반드시 죽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반드시 자살하거나 뒤주에서 죽어야지 1.(이미 국정을 돌보는 것이 불가능해진) 그에게 보위를 주지 않고 2. 손자에게 보위를 주는 것이 둘 다 가능했다. 그렇기 때문에 자살을 거부한 이상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반드시 죽는게 필요했던 것이다.[11]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 후 7일 째 밤에 사경을 헤매는 사도세자와 진심 어린 속 얘기를 하면서 아버지로서의 정을 드러낸다. 자신이 세자를 엄하게 키울 수 밖에 없는 이유인 군주와 후계자로서의 법도와 자신의 기대에 어긋나는 세자를 보면서 얻은 실망이 사랑을 미움으로 변하게 하였다며 자신의 진심을 토로한다. 자신이 원했던것은 아버지의 따뜻한 눈빛과 말 한 마디였다는 세자의 진심을 듣고 왜 우리는 마지막에서야 서로의 진심을 알았냐면서 한탄한다. 그 후 세자가 뒤주에서 숨을 거두자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숨과 맥박을 짚어본 뒤 얼굴을 어루만지며 소리 죽여 오열하면서도 명분상 폐서인된 역적을 처단한 것이기에 환궁하면서 개선가를 울린다. 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데 일조했던 김상로를 비롯한 다른 대신들마저 '''"독하구먼. 자식 죽이고 개선가라니......"'''라고 말하며 씁쓸해 한다. 이렇게 아버지의 심정과 군주의 의무를 복합적으로 드러내었다.
한편 뒤주를 동원해가면서 세자를 죽인 이유는 정순왕후의 가족과 김상로의 대화로부터 나온다.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가 사약을 내리면 되지 않냐고 묻자 정순왕후와 김귀주의 아버지인 김한구와 김상로가 사약을 내리거나 참수하는 것은 역적에게 내리는 것이고, 그 3대는 역적으로 취급받으니 아비인 영조 자신도 역적이 되기 때문에, '미쳐서' 아비에게 해를 끼치려한 아들을 왕이 아닌 분노로 '미친' 아비가 죽임으로서 이를 어디까지나 가정문제로 한정지어 여론을 희석시키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리고 세자가 역적이 되면 세손까지 역적이 되기에 세손을 아끼던 영조로서는 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이게 된 것.

영화에서도 그렇지만 실제로도 영조는 못난 아버지다. 어릴때 쏟은 사랑이 성인이 되기까지 유지되었다면 좋았을 운명을 자신과 나라만을 생각하면서 별 시덥잖은 이유로 아들을 책망하고, 끝내 아들을 죽이는 게 운명이라면서 단호하게 나오는 모습이 화를 일으킨다. 마지막에 사도세자를 걱정하면서 그래왔다는 이야기나 의리를 내세우며 사도세자에 관한 기록을 지우는 모습이 참으로 비탄스럽다. 하지만 영조는 사도세자를 처단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 변호하는 발언을 하는데 이 때 피눈물을 흘리면서 임금이 얼마나 엄청난 자리인지를 각인시키는 발언을 한다.

'''"내가 임금이 아니었다면 이런 비극은 없었을 거다!"'''

사실 영화상의 묘사로 아들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다. (역사적으로는 불명) 영조는 왕으로서 책임감이 얼마나 무거운지, 군주로서뿐 아니라 정치인으로서 줄타기가 얼마나 위태로운지 절실히 실감하고 있었고, 그렇지 못하면 자신의 목숨이 날아간다는 것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강박적으로까지 공부를 했고, 경연에서도 신하들의 말문을 막을 정도의 학식을 가졌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영화에서도 언급이 된다. 그러나 이처럼 공부에 힘을 써야 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정신을 못 차리고 뻘짓만 하자 조바심에 계속해서 그를 가혹하게 훈계를 하였고, 아들이 스트레스 때문에 삐딱하게 나가자 실망감에 점점 차갑고 잔인하게 변한 것이다. 어쩌면 공부 스트레스로 자식을 자살하게까지 만드는 현대의 일부 잘못된 부모와도 비슷하다. 애정이 없는 것은 아니나 잘못된 교육방식으로 자식을 엇나가게 만든 것. "내가 임금이 아니었다면 이런 비극은 없었을 거다"란 것이 단순한 변명이 아니라 진심이라고 할 수 있는게, 실제로 그가 왕이고 아들이 미래의 왕이란 강박관념에 시달리지 않았다면 (적어도 아들을 분명히 사랑하는 영화상으론) 저렇게까지 강박적으로 아들을 몰아세우진 않았을 것이다.
14년 뒤, 죽기 전에 청년이 된 세손과 함께 당시의 기록들을 세초하는 것을 바라보며 세손에게 네 아비의 일을 다시 꺼내선 안된다고 당부한다. 자기 손으로 아들을 죽인 것이 큰 충격이었는지 세손과의 대화 중에 눈물을 흘린다. 삭제된 장면에서는 숙종을 모시는 빈소에 찾아가 "아버지, 자식 하나 건사하지 못한 이 불초소생을 용서하소서."하고 슬퍼하는 모습이 나온다. 실록에서 자식의 죽음에 슬퍼했다는 언급은 없지만 여기서는 아버지의 정을 표현 못했던 것과 아들을 죽인 트라우마를 가지게 된 듯 하다. 실록에 영조 본인의 심정까지 자세히 드러나지는 않는데, 아마 '사도(思悼)'[12]라고 이름붙인 이유를 거기에 둔 것 같다.
여기서처럼 흔히 아동용 역사만화나 관련 창작물에선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서 곧 후회하거나 슬퍼했다고 묘사하는데, 어쨌든 영조도 한 인간이니 자식이 죽었는데 마음이 좋았을까 싶지만, 일단 사료로는 증거가 전혀없다. 실제 역사에서 영조가 사도세자를 사후 복권시킨 것은 후회 따위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당연한 것으로, 세손의 정통성을 위해 '''세자가 죽기를 기다렸다가''' 죽자마자 바로 복위시킨 것이다. 게다가 정작 복권된 사도세자를 남들이 다 꺼리는 흉지에다 매장했다.[13] 이를 볼 때 애초에 아들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아 못마땅하게 여기던 중, 사도세자의 만행을 보고 자식이고 뭐고 인간적으로 혐오하게 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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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 이선''' (유아인 扮, 아역 : 엄지성 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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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란 것은 아버지의 따뜻한 눈길 한 번, 다정한 말 한 마디였소."'''

이 영화의 주인공이 되는 인물. 조선의 세자이자 아버지의 따뜻한 눈길 한 번, 다정한 말 한 마디가 듣고 싶었던 아들. 영화 도입부에서 사도세자는 마치 분노에 미친 사람처럼 칼자루를 쥔 채 영조있는 곳을 쫓아간다. 물이 흐르는 진창을 따라 걸어가는데, 당시의 일을 기록한 한중록에도 "수구(水口)를 통해 윗 대궐로 가리라.", "내 기어이 '협검(狹劍: 칼을 참)하고 아무리나 하고'[15] 말 것이다."라는 사도세자의 말이 있다. 하수도를 따라 영조가 거처하는 궁궐로 가서 (아마도 영조를) 죽이고야 말리라는 분노 어린 말.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영조의 눈에 들기 위해서 노력을 했지만, '아버지'가 아닌 '군주'로서, 자신을 대하는 아버지의 기대에는 못 미쳤다.

자신이 대리청정을 맡게 된 순간부터 아버지와 관계는 본격적으로 금이 가기 시작한다. 자신의 생각대로 결정하면 영조가 뒤에서 그걸 왜 네 마음대로 결정하냐며 트집을 잡고 바로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으면 그것 하나 제대로 못하니 대리 시킨 보람이 없다며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망신을 주지 않나, 능행 중에 비가 오자 영조에게 "네가 거짓말[16]이나 하니깐 가뭄에 시달리는 남도에 내려야 할 비가 능행길에 내린다"는 말도 안되는 면박과 함께 "넌 숙종대왕의 능에 참배할 자격이 없다. 돌아가!"라는 말을 들으며 행차 길에 쓸쓸하게 남겨진다. 대왕대비와의 언쟁으로 영조가 왕위를 선위하겠다며 별궁으로 떠나자, 선위를 거두어달라며 눈 오는 날에 끝까지 엎드려 석고대죄를 하다 쓰러지고 만다.

대왕대비인원왕후의 죽음을 계기[17][18]로 온갖 기행을 일삼는다. 국정에 전념하기 보다는 사냥이나 유희를 즐기는 쪽으로 바뀌었고, '내관의 목을 따가지고 가족들에게 내보이기', '관을 짜서 스스로 그 안에 들어가기', ' 중에 술 마시기', 생모인 영빈 이씨가 후궁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중전복을 입히고 중전의 예우로 배례와 행차를 하는 등''' 정순왕후를 대놓고 무시하고 아버지인 영조를 아예 늙은이라고 부르는 등 부자 관계는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최악으로 치닫는다. 이에 폭발한 영조는 "네가 며칠째 대리청정도 안 들어오니, 내가 너한테 문안드리러 왔다."라면서 귀 씻은 물까지 끼얹으면서 '''내 탓이다. 너 같은 인간을 자식이랍시고 세자로 세운 내 잘못이야'''라는 폭언으로 대꾸한다.

세자는 부왕의 가혹한 압박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고 주변 사람들과도 점점 멀어진다. 자신의 수행원들에게 가혹하게 대하고, 공부를 아예 놓아버려서 스승들과도 서먹해지고, 아내인 혜경궁 홍씨가 세손 얘기만 꺼내 부부 관계도 어긋나버리게 된다. 심지어 아들인 세손 가례식에도 영조의 허락을 받지 못해 참석하지 못했다.
부왕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하나 좌절되고 머리 숙여 비바람과 눈보라 속에서 사과하기를 여러 번. 그러던 중 김상로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자신이 역모를 한다며 자신이 저질렀던 일들을 고하고 자신에게 폭언을 퍼붓고 영조가 나경언의 발언을 지지하게 되자 힘겹게 버티던 세자는 무너지고 만다. 한번 더 사과하며 부왕에게 고개를 숙이고 솔직히 울화가 있어 힘들다고 외쳐 보지만 부왕은 "넌 존재 자체가 역모야! 울화? 왜, '''차라리 미쳐서 발광을 해라, 이 자식아!!'''"라는 한 마디를 내뱉고 세자의 눈 앞에서 방문을 닫아 버린다.[19]

결국 세자는 폭발해 상복을 입고 측근들과 함께 부왕을 죽이러 경희궁으로 향한다. 영화는 여기에 또 다른 영화적 창작을 덧붙여 진행한다. 세자가 부왕을 상대로 역모를 감행했으나 세손을 위해 포기했다는 것이다.[20] 사도세자는 영조와 대화하는 세손을 보고 들고 있던 칼을 내려놓는다.

영화에서 이야기 흐름 상 영조와 사도의 사이가 중심 줄거리이지만, 주제의식은 사도와 그의 아들 정조 사이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도가 부왕인 영조를 죽이려다 포기한 것은 예법보다 자신의 마음을 알아준 아들 정조 때문이었으며, 뒤주에 다시 들어갔을 때는 세손 탄생 시 자신이 그린 부채 그림을 보고 비로소 자신이 왜 죽어야 하는지 깨닫는다. 물론 자신과 다르게 영조의 사랑을 받는 정조에 대한 부러움도 내비친다. 활터에서 정조에게 숙종의 능행을 따라갔던 사실을 묻거나 영조가 좋아해서 공부를 열심히 한다는 정조의 말에 화살을 일부러 허공에 날리는 장면은 사도가 가진 정조에 대한 부러움과 자신은 사랑받지 못한 슬픔을 동시에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에 아들이 할아버지의 기대때문에 원치도 않는 공부를 하는 자신을 비관하자 사도세자는 아들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고 이를 계기로 차가웠던 세자와 세손의 부자 관계는 점차 부드러워 지기 시작한다.

'''"허공으로 날아간 저 화살이 얼마나 떳떳하냐."'''[21]

영화를 보다 보면 '''안습'''이라는 생각밖에 안든다. 영조의 콤플렉스로 인해서 정신적으로 지속적인 고통을 받은 자식의 모습으로 나온 사도세자는 영화속에서 제일 비참한 인물로 묘사되었다. 어린 세자가 아버지인 영조의 생각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이유로 부자의 관계가 갈라지고, 뒤주에서 굶으면서 아들인 세손의 울음소리에 고통스러워하며 죽어가는 장면들을 하나하나 볼 때마다 안타까움만 자아낸다. 관객 입장에서는 사도세자의 행동을 볼 때 변덕스러운 영조에게 갈굼받으며 미쳐가는 과정이 얼마나 안타까운지 볼 수 있다. 안 미치는 게 기적일 지경이다. 더 무서운건 '''이 모든게 사료에 기록된 사실이다.''' 오히려 영조가 실제 사료에 비해 미화가 많이 되었다. 영화에서 더많은 영조의 악행을 시간상 추가하지 못했다 하여도, 끝말의 뒤주 속에 갇힌 세자와 미안한 마음의 대화는 당연히 없고, 말년의 후회나 참회의 모습 따위 보이지도 않았다.

편집된 장면들 중 부왕의 지나친 구박으로 마음이 피폐해진 세자가 인원왕후정성왕후를 모시는 빈소에 홀로 찾아가 "중전마마, 대비마마. '''지금 이 순간이 그냥 지나가게 해 주소서."'''하고 힘없이 말하는 부분이 있는데, 참으로 안쓰러운 모습이다.
영화는 심의문제 때문인지 사도세자의 살인행각이 상당히 순화되어 있다. 예로 조선왕조실록에선 "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서 병이 발작할 때에는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를 죽이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하였다"고 나오는데 영화에선 딱 하나만 죽이며 "왕손의 어미"를 때려죽이지도 않는다. 아마 저런 것들을 다뤘다면 저 심의로 나오긴 힘들 수도 있다. 사도세자가 딱 하나 죽이는 장면도 좀 아슬아슬하다. 머리를 잘라서 들고 다니긴 하는데 카메라가 미묘하게 비껴가며 촬영하고 있다. 그러나 노론 음모론자들은 이런 순화조차도 "사도세자를 사람 마구 죽이는 살인마로 왜곡했다"고 주장했다. 아래 '노론 음모론자들의 비난' 항목 참고.[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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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경궁 홍씨''' (문근영 扮)
사도세자의 아내. 풍산 홍씨. 정조의 어머니다. 정조 역으로 소지섭이 출연했는데, 이에 대해 문근영은 반농담으로 "소지섭과 로맨스 연기를 찍고 싶었는데 어머니 역할을 맡아서 아쉬웠다"고 말했다. 문근영이 <사도>에 출연한 이유는 평소 존경한 연기자인 송강호와 연기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역부터 시작해서 60대 노인 분장을 한 문근영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분장이 안 어울린다는 평가가 상당히 많다. 차라리 이 부분만 적령기 나이대의 배우를 캐스팅하는 게 낫지 않았겠냐는 평가도 있다. 분장이 마치 90대와 같아 보이는데 조선시대 60대가 현대의 90대와 맞먹는다 생각하면 과한 분장은 아니라는 반론도 있다.[23]

문근영 연기 인생에서 처음으로 어머니 역할을 연기했다. 영화 전체적으로 세자의 아내로서의 모습보다는 세손의 어머니라는 모습이 더 부각된다. 영화 시작 부분을 보면 '''"세자는 포기하고 세손을 살릴 것"'''을 종용하기도 한다. 이런 모습만 보이니 세자도 입만 열면 세손이라고 자네 눈엔 내가 안보이냐고 하소연하거나, 며느리(세손빈)에게 "부부란, 서로의 실수를 덮어주고, 사소한 예법에 얽매이지 않으며, 서로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끝없이 사랑하는 것이니라."라고 얘기한 것을 보면, 이 때 이미 세자는 아내에게도 의지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좋은 어머니이긴 했으되, 좋은 아내는 아니었던 것으로 표현된 셈이다. 그래도 영화 최후반부에 아들 정조가 왕위에 오른뒤 함께 사도세자의 무덤에 가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보면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 나름대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 역사 기록을 보면 사도세자가 아버지 영조 앞에 불려갈 때, 영조가 유달리 예뻐한 제 아들(정조)의 머리쓰개를 쓰고 가려 하자 홍씨가 머리에 맞지도 않는다며 말리면서 세자 본인의 것으로 바꿔쓰라며 실랑이를 한 일이 있었다. 이때 아내 혜경궁 홍씨에게 한 세자의 말이, '''"자네는 어찌 이리도 자네 생각만 한단 말인가"'''였다고 한다. 여러가지로 해석이 가능한 기묘한 말이다. 물론 이 기록이 혜경궁 홍씨 본인이 쓴 책인 한중록에 나오는 부분이라 혜경궁 홍씨의 행동이 자식을 살리기 위해 남편을 죽도록 내버려두겠다는 의미인지에 대해서는 논쟁거리이다. 정말 그런 의미면 혜경궁 홍씨 자신이 기록으로 남기려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학계의 평도 꽤 많기 때문이다. 즉 당시 혜경궁 홍씨는 단순히 세자의 의도를 몰랐을 뿐이고, 이런 아내의 행동에 사도세자는 섭섭한 나머지 아내가 이기적으로 행동한다고 오해했다는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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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빈 이씨''' (전혜진 扮)
선희궁. 전의 이씨. 사도세자의 생모이며, 영조의 후궁이다. 영조와 사도세자를 잇는 인물 중 하나로 사도세자의 역할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혜경궁 홍씨가 세자가 칼을 들고 영조에게 간다고 알리러 찾아왔을 때 절망한 듯 주저앉아 세자를 포기한 모습을 보여준다. 다음날 사건의 전말을 영조에게 알리고 '세자는 처분하시되 세손은 보존해 달라'고 하는 것으로 정조를 살리고 세자가 죽는데 일조하게 된다. 뒤주 안에 갇힌 사도세자도 영빈의 고발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안색이 변할 정도였다. 세자가 뒤주에 갇힌 직후, 세자와 세손 둘 모두 살리기 위해 고발한 것이 최악의 상황으로 가게 된 것에 대해 충격을 받는다.

아들인 사도세자에 의해 억지로 중전 복장을 입게 되고 배례와 행차를 중전과 동일하게 하는 바람에 영조의 심기를 크게 건드렸고 이것은 영조가 스스로의 손으로 사도세자를 죽이는 원인 중 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 하지만 아들의 본심은 자신에게 효도하고 싶어서 감당하지 못할 일을 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그저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그런 세자가 죽은 뒤 "살아서 뭐해. 내 무덤엔 풀도 안 날거야."라고 힘없이 말하다가 혜경궁 홍씨에게 '내가 죽인 게 아니지?'라며 통곡하고 마는데, 의도야 어떻든 결국 자기 아들을 죽게 만든 어머니의 죄책감과 슬픔을 보여준다.[24] '내 무덤에 풀도 안날 것이다'라고 한 말은 실제로도 영빈이 세자의 죽음을 듣고 한 말이기도 하다. 영화에서는 빠졌지만, 실제 역사에서 사도세자의 3년상을 끝낸 후 자식을 뒤따르듯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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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원왕후''' (김해숙 扮)

'''"윤~허~하오~"'''[25]

대왕대비로, 숙종의 계비이다. 경주 김씨. 사도세자에게는 든든한 후원자이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인원왕후가 세자를 끼고 밥을 많이 먹인 통에 세자가 살이 쪘다고 영조가 타박했을 정도다. 세자에게는 자상한 할머니지만 화완옹주와 혜경궁을 비롯한 궁중 여인들에게 궁중 예법을 강조하는 엄격한 모습을 보인다.[26] 문 소원이 영빈에게 무례하게 군 것을 알고 매질을 하다 영조와 큰 말싸움이 났는데, 영조가 출신 운운하며 왕 못해먹겠다며[27] 양위하겠다고 화를 내자 빈정대는 투로 윤허한다고 대답한다. 세자를 구박하는 영조의 버릇을 고치려는 의도였지만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세자가 눈을 맞으며 석고대죄를 하다 얼어 죽게 되자 윤허를 거두어 달라는 중전과 영빈의 부탁을 듣고 처음에는 대비의 말은 함부로 거둘 수 없다고 하지만, 세자의 상황을 듣고는 "그럼, 내가 죽으면 되겠네"라고 말한 후[28] 식음을 전폐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모습으로 나온다. 그리고 유언으로 윤허를 거두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29]

인원왕후 사후 사도세자의 광증은 급격히 악화되는데, 상을 치르는 와중에도 인원왕후가 죽은 걸 세자의 탓으로 돌리고, 세자도 참다못해 온갖 기행을 벌이게 된다. 참고로 영화에선 직접 묘사되지 않지만 영조 본인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간접적으로는 영화상에서도 나온다. 인원왕후가 문 소원(정4품의 후궁 직책명이다.)을 매질하는 와중 영조가 들어와서 인원왕후에게 한 말인 "그럼 천한 저를 임금으로 만든 분이 대비이시니"하는 부분. 연잉군 시절 생모인 숙빈 최씨가 사망한 이후 의지할 곳이 없던 영조를 지원해주고 그를 왕세제로 공식 지명해준 사람이 인원왕후이기 때문이다. 인원왕후가 사도세자를 보호하자 영조가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크게 대항하지 못하는 것에는 인원왕후가 대왕대비란 것도 있지만, 영조 본인의 은인이라는 이유도 있었다.

작중에서는 영조와의 나이 차이가 조금 모호하게 묘사되는데, 실제로는 인원왕후와 영조는 겨우 8살 차이였다. 다만 실제 두 배우의 나이 차이는 12살이고, 영조 역의 송강호 역시 하얀 수염을 붙히고 할아버지 분장을 했기 때문에 작중 나이 차이가 그렇게까지 많이 나는 건 아니다. 송강호가 중년이란 이미지가 강해서 그렇지 사도세자와 갈등을 겪을 당시 영조의 나이는 60대 중반으로 (사도세자가 태어날 때 이미 42세였다) 조선시대엔 자연사해도 크게 이상하지 않을 노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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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완옹주''' (진지희, 아역: 신비 扮)
영조영빈 이씨의 딸. 사도세자의 여동생. 노론 음모론을 따르는 다수의 작품에서는 노론과 연합해 동복오빠를 몰아낸 악녀로 그려졌지만, 작중에서는 사도세자와 사이가 좋고 영조의 지극한 사랑을 받고 있음이 직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세자빈을 맞이하는 자리에서 아버지가 무릎에 앉히기도한다. 이 때 눈을 사시처럼 뜨는 장난을 쳐서 사도세자가 결국 폭소를 터뜨리고, 영조가 한참 설교를 하다가 "너 왜 웃니?"라고 말하는 개그씬이 등장한다.
사도세자가 영조를 만나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미쳐서 내관의 목을 베고 도저히 한지붕에 못 지내겠다고 당장 다른 곳으로 보내라며 칼을 들이대는 지경까지 되자 아버지의 총애를 받는 자신이 나서서 아버지를 경희궁으로 이어하게 한다. 실제 역사에서 사도세자와 이상한 말까지 나올 정도로 사이가 좋았던 걸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사도세자 사후 혜경궁보다 더 세손에게 매달리는 장면을 통해 조카를 아끼는 고모의 모습도 드러낸다. 이후 혜경궁 홍씨화완옹주의 사이가 매우 나빠진 것도, 화완옹주가 친모인 홍씨보다도 더 지나치게 정조와 가까이 지내는 모습으로 인해 섭섭함+부담을 가지고, 이것이 증오로 악화되었다는게 정설이다.

실제로도 조카와 친했지만 영조 말기 세손이 척신들을 바짝 경계하면서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했고 정조 즉위 후 정후겸이 사사당하면서 화완옹주도 귀양간다. 화완옹주는 1737년생으로 임오화변 당시 만 25세로 정치달과 혼인했다가 젊은 나이에 상부하고 궁에 들어왔는데 영화에선 만 16세의 진지희가 섭외되었다. 당시 17세였던 정순왕후 김씨 역에 만 25세인 서예지가 섭외된 것과 대비된다. 역사 내용 그대로를 보자면 실제로는 화완옹주 역 배우가 정순왕후 역 배우보다 더 나이가 많았어야 한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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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왕후''' (서예지 扮)
영조의 계비. 경주 김씨. 15세의 나이로 66세였던 영조와 혼인을 치룬다. 국사 공부 좀 했다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세도정치와 연관이 깊은 인물이다. 물론 정순왕후가 직접 세도정치를 일으켰다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정순왕후와 세도정치의 관계는 좀 더 복잡한데 해당 문서에 나와 있다. 영화에선 딱히 선역도 악역도 아닌 중립자적 인물로 나온다. 실제로도 이 시기 정순왕후의 발언권은 매우 미약했다. 정순왕후의 발언권이 커진 건 정조가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된 이후이다. 양부모가 모두 죽고 난 뒤라 법적 보호자가 없었기에 그 틈에 정순왕후가 발언권을 키웠다.

작중에서도 정순왕후의 방이 노론 회합소로만 사용될 뿐, 뭔가 음모를 꾸미는데 적극적인 모습은 아니다. 오히려 영조가 두렵다고 말한다. 이 뒤로 영조의 앞에서 자신의 총명함을 보이는 장면만 나와서[30] 뭐가 무서운가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 이런 정석적인 답밖에 하지 못하게 하는 영조의 압박감 때문에 두려운 것이라고 해석하는 의견도 있다. 다만 뒤주 사건 이전에 있었던 외척들과의 모임에서는 "문안 한 번 안 오는 세자에게 무슨 정이 있겠느냐"며 사도세자에 대한 적대적인 의견을 표출하기도 하였다.[31] 아버지와 오빠에게 주상이 무섭다고 말하는 것도 그렇고 자신의 생각을 숨기고 중립적 입장을 취하는 것 때문에 화완옹주가 그 여자 속이 깊은 건지 맹한건지 모르겠다며 비아냥거릴 정도.

사도세자에게 엄청난 무시를 당한다. 정순왕후를 알현할 생각도 하지 않았고[32], 특히나 영빈 이씨에게 중전 복장을 입히고 행차까지 하는 등 굉장한 멸시와 천대를 당하고 있다. 사도세자에게는 어머니는 커녕 인간으로도 대우받지 못한 셈. 실제 역사인지 아닌지는 모르나 영화만 보면 세자에게 악감정이 생기고도 남는다.
사도세자가 아무 잘못 없는 정순왕후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정확히 알 순 없지만 든든한 버팀목이자 친어머니나 다름없던 정성왕후가 사망하고 맞이한 계비여서일 가능성이 높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어머니가 정성왕후처럼 아버지에게 박대당하며 살다가 한 많은 인생을 뒤로 하고 죽었는데 아버지가 얼마 안가 새어머니를 맞이한다고 생각해보자. 새어머니가 딱히 잘못이 없더라도 자식 입장에서 좋게 볼리가 없다. 특히나 사도세자에게는 정성왕후가 무척 각별한 존재였음을 생각하면 영화 속에서나 실제 역사 속에서나 정순왕후는 애초에 사도세자가 좋아하기가 힘든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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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봉한''' (박원상 扮)
사도세자의 장인이자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부채를 매개로 아버지아들을 연결해주는 사람. 실제로 세자는 장인인 홍봉한에게 의지했는데,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가 여럿 남아 전해지고 있고, 또 개중 어떤 내용들(무기를 수집한다거나)은 화변 때 언급된 폐세자의 이유들과 관련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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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손/정조''' (유년 이효제 / 성년 소지섭 扮)

'''"사람이 있고 예법이 있는 것이지, 어떻게 예법이 있고 사람이 있겠습니까. 공자께서도 예법의 말단을 보지 말고, 그 마음을 보라 하였습니다. 그날 소손은 제 아비의 마음을 보았나이다."[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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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혜경궁 홍씨의 아들. 자신의 아버지인 세자가 할아버지로부터 자결하라는 명령에 이마에 피가 날 정도로 머리를 박으며 절규하는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본다. 이후 기어코 영조가 세자를 뒤주에 가두고 못을 박자, 뛰쳐나가서 글공부든 뭐든 아버지의 몫은 자신이 대신 할테니 제발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울부짖는다. 하지만 곧 할아버지의 명령으로 다른 신하에게 안겨 쫓겨나고 만다.
태어났을 당시에는 싫어하는 세자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영조에게 별로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 총명하고 공부를 좋아하는 모습을 보이자 곧 사랑과 총애를 듬뿍 받는다. 세자에게 자결하라는 명을 내릴 때도 명을 거두어달라는 많은 신하들을 내쫓기나 하던 매정한 영조가 세손을 보자 뒤주에 못박던 것도 멈춘 채, 세손마저 뒤주 안에 들어가게 둘 거냐며 다급한 기색을 보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세자에게는 억지를 부리면서 능행 도중에 쫓아내는 반면, 세손을 옆에 두고 속마음을 털어놓기까지 하면서 공부 열심히 하라고 말하는 장면은 손자를 대하는 여느 가정의 다정한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세손의 경연에서 영조가 직접 심사하는 가운데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하자 "그래, 통이야!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아이에게 이런 생각이 나오기는 힘들다."라며 세손을 칭찬하며[34] '''"삼백년 종사의 명맥이 오직 세손에게 달려 있다."'''고 말하는데 이 때의 문답과 영조의 발언은 모두 실록에 있는 내용 그대로다.[35] 하지만 영화에서는 자신이 공부에 열중하는 건 모두 할아버지가 기뻐하기 때문에 하는 일이라며 내키지 않는 모습을 아버지에게 털어 놓기도 한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부자 관계와 또 다른 부자관계를 보여주는 인물로 사실상 제3의 주인공이다. 두 관계 다 아버지의 정치적 입지, 정신적 문제가 부자관계의 악영향을 주는 공통점이 있는데, 파국을 맞이 한 전자와 달리 후자의 관계는 어느정도 공감대를 이루는데 성공한다. 사도세자가 분노하여 칼을 들고 영조에게 갔을 때 사도세자를 포기시킨 게 바로 정조. 영조와의 대담에서 영조가 사도세자가 영빈 이씨의 환갑 잔치에서 사배[36]를 할 것을 정조가 받아 들인 점[37]을 지적하자, 자신은 할아버지(영조)가 왕이 아니더라도 그 이상의 대접을 할 수 있다며 '예법도 사람이 있어야 되는 것이다', '아버지(사도세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는 등의 발언을 한다. 이때 아버지에 대한 끓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칼을 들고 영조를 찾아간 사도세자가 마당에서 마침 이 말을 듣자 분노를 풀어버린다. 이는 사도세자가 젊은 시절 끊임없이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으나 끝내 하지 못했음을 연상케 한다. 사도세자는 아들이 자신의 심정을 이해했다는 발언을 한 순간 아버지를 이해하고자 했던 과거의 자신을 떠 올렸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아들에게 상처를 주는 행위를 하는 지금 자신의 처지가 자기 아버지와 다를바 없다는 점을 인지했을 것이다.[38]
세자가 뒤주에 갇힌 뒤 세손빈과 함께 물그릇을 들고 와서[39], 세자는 절대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물을 가져왔으니 나오시라고 애처롭게 외치다가, 소란을 듣고 나온 영조에게 자식이 아비에게 물 한잔 제대로 줄 수도 없냐며 울부짖는다. 영조는 세손을 안타깝게 바라보면서도 세손을 외가(혜경궁 홍씨의 친정)로 보내라며 끝내 외면하고 만다. 끝내 세자가 죽자 아버지의 상을 치루며 슬퍼하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세손의 분량은 끝난다.

성인 정조 역으로는 소지섭이 특별출연을 했다. 카메오 수준이라고 보기엔 후반 10여분 동안 무려 4개의 씬에 나와 특별출연이라기엔 결코 비중이 적지 않다. 영조와 함께 당시 있었던 화변의 기록을 세초하는 것을 바라보며 네 아비 일을 함부로 꺼내지 말라는 당부를 받지만, 그날 있던 일이 한이 되어 잊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영조가 세상을 떠난 뒤, 왕위에 오르고 결말 부분에서 어릴적 참혹한 일이 너무 많아, 어머님께 재롱 한번 피우지 못하였는데, 이참에 제대로 놀아보겠다며 아버지가 그린 그림이 새겨진 부채로 부채춤을 추는 장면을 10여 분이나 되는 짧지 않은 시간으로 마무리한다. 이 결말 부분은 감독의 의도가 섞여 있지만 평이 제법 가리는 편이다. 이 영화가 정조 영화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정조 등장 장면이 상대적으로 긴 편이기 때문에 결말이 지루하다는 평도 있다. 다만 이 영화는 영조와 사도세자만의 이야기가 아닌 영조, 사도세자, 정조 3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정조도 엄연한 임오화변 관련인이다. 특히 이 영화는 영조가 세손을 자신의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사도세자를 희생시켰다는 해석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더욱 관련될 수 밖에 없다. 그 해석을 따르고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해 주는 장면이 영화 말미에 왕이 된 정조가 아버지 능에 참배할 때, 당시에 못 드린 물을 올리며 "제가 아버지를 죽였습니다.", "제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날 어찌 그런 일이 있었겠습니까."라며 오열하는 장면.

반대로 소지섭이라는 이유도 있을수 있지만 음악과 나오는 춤 장면에서 감동하는 관객도 있다. 말그대로 호불호. 특히 부채 춤 장면. 정조가 태어난 날 꿈에 나온 용을 그린 그림으로 만든 부채는 훗날 정조가 왕이 되었을때 선물하려 했던 물건이고 극 중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혔을 때 사도세자의 최후까지 함께한 사도세자의 유품이다. 그래도 관객 중에선 이 장면에서 눈물을 흘린 경우도 있었다. 특히 아버지 사도세자와의 추억을 회상하면서 활시위를 당기는 자세를 취한 뒤[40] 복받치는 감정을 갈무리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부채로 얼굴을 가리는 엔딩 장면은 그야말로 백미.

원래 영화 말미에는 정조가 영남 만인소를 올리는 선비들을 접견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상영판에서는 편집되었다. 사족이 길다고 느낄까봐 편집한 것이라고 밝혔는데, 이준익 감독은 이 장면이 편집된 것을 아쉬워했다고 한다.[41]
여담으로, 이렇게 등장 장면이 적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소지섭은 출연료 없이 출연했다고 한다.
사도세자에 적대적이며 나경언을 사주해 비행을 고하게 만든 대신. 노론 음모론 같은 관점이 아니라 영조의 마음이 사도세자를 떠난 걸 알고 영조에게 폐세자 명분을 주고자 한 행동이었다. 실제 역사 속 김상로는 내심이야 어찌되었든 표면적으론 세자를 비호했고 그러다 파직당하기도 했다. 김상로가 왕과 세자 사이에서 이간질을 했다고 적은 기록이 한중록에 있고 영조도 정조에게 그런 말을 하긴 했는데, 막상 실록의 실제 기록들과 교차검증 해보면 그런 정황을 찾기가 쉽지 않다.
영조가 뒷날 세손에게 김상로에게 사도세자의 죽음의 책임이 있다고 말하기는 하는데, 사실 가장 큰 책임자는 영조라서 면피성 발언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김상로의 행적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것이 임오화변의 결정적인 사유는 되기 힘들다는게 정설이다. 아무튼 정조 즉위 후 관직이 삭탈되는데, 이 때 김상로는 이미 죽은 뒤였다.
초반부에 사도세자를 벌하러 가는 영조 앞을 가로막으며 등장한다. 이때 "어찌 일개 후궁의 말만 듣고 나라의 근본을 흔들려 하십니까?"라고 말리는데, 실제로는 당시 도승지였던 이이장의 발언이다. 이후 세자와 가까웠던 일부 신하들이 자기 신세 걱정을 하자 "지금 당신들 가문 걱정할 때요? 나라가 망하게 생겼는데." 라고 일갈한다. 이후 난입하여 자해를 거듭하는 사도세자를 막고 왕이라고 법전 어디에도 없는 이런 처분을 내릴 수 없다며 어떻게든 영조의 처분을 막으려 하지만 결국 끌려나가게 된다. 적극적으로 처분을 반대하는 역할.
물론 이야기의 자체가 영조와 사도세자에게 맞춰져 있기 때문에 여타 신하들처럼 큰 비중은 아니다. 채제공이 실제로는 사도세자의 몇 안 되는 든든한 우군이었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비중을 좀 더 늘려 더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반대로 주된 서사구조와 주연들에게 집중시키기 위해 딱히 언급 없이 지나가는 점이 나쁘다고 할 수도 없다. 다만, 임오화변 당시 채제공은 모친상을 당해 고향에 있어서 사도세자를 위해 별 일을 해주지 못했다. 정조도 이를 알았는지 실제 역사에는 정약용과 더불어 정조가 가장 아낀 신하 중 하나였다. 뿐만 아니라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를 죽을 때까지 지키며 충성하다 노환으로 죽자 정조가 절규할 정도였다.

분량상 삭제된 장면에서는 세자가 뒤주에 갇히고 얼마 후 영조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신하들과 경전을 읽자 채제공이 이를 한탄하며 세자의 처분에 이의를 제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자 영조가 이 일은 궁궐 밖을 넘을 수 없는 일이며, 신하가 임금의 가족 문제에 참견하냐며 언성을 높이자 채제공도 이에 지지않고 이 일을 빠짐없이 기록할 것이라고 대답한다. 세초하면 다 지워질 기록일 뿐이라며 대꾸하는 영조의 말에 그렇다면 세초하라는 전하의 하교까지 다 기록할 것이고 그것만은 임금도 지울 수 없다며 세자의 처분에 강하게 반발한다. 그 말을 들은 김상로는 채제공에게 강력한 처벌을 청하지만, 영조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채제공에게 "그래. 어디 한번 승정원일기에 낱낱이 기록해봐라"라는 투로 대답하는 걸로 끝낸다.
연안 이씨. 사도세자의 스승이다. 영조로부터 '보위를 세손에게 전하고자 하니, 세자를 잘못 가르친 책임을 지고 폐세자 상소를 올리라'는 명을 받는다. 올 것이 오고 말았다며 그 직후 '세자에게 자애를 베푸시라'는 애절한 상소를 남기고 자결한다.
잘 부각되지는 않으나 극중 등장하는 조정 대신들 중 분량이 꽤 많은 편이다. 어린 세자에게 글을 가르치는 것으로 첫 등장하며, 세자가 졸 때 물을 뿌리면서[42] '지금 잠이 오시냐'며 깨운다. 세자의 대리청정 장면에서도 세자를 지원하며, 영조의 양위 소동 때 세자가 눈을 맞으며 대죄할 때에도 끝까지 세자 곁을 지키다 자신의 옷을 벗어서 세자에게 덮어준다. 사도세자 입장에서는 최고의 충신. 이천보 또한 양아들을 키우는 입장에서 영조처럼 모질지 않았고 이천보가 보기에는 영조가 세자에 대한 엄한 질책과 가혹한 훈육이 도를 넘었다고 느꼈을 수 있다. 자신의 양아들인 이문원[43]은 편한 입장이지만 사도세자는 입장이 다르다. 이천보는 아들을 키우는 아비로써 사도세자가 영조의 가혹한 훈육에 정신이 피폐해져서 광증이 생겨 안타깝게 된 것을 안쓰럽게 여기는 듯 하다. 한마디로 친자식인데 연약하여 맘에 안든다고 엄혹하게 대한 영조와 양아들이 양녕대군급 말썽을 피우는데 자상하게 대한 이천보가 대비되는 부분.
여담으로, 작중 상당히 개혁적인 대신으로 묘사된다. 세자의 첫 대리청정때, 노론 원로대신들의 군권 장악을 비판하는 발언(저들이 주상의 즉위를 도운 공로를 내세우며 군권을 독점한다)을 하는 장면이라든가, 그가 자결한 후 김상로의 "순진한 것들이 개혁이니 명분이니 하다 감당 안되니 도망치듯이 죽었다"는 발언 등으로 유추해볼수 있다. 때문에 노론 음모론을 먼저 접한 관객이라면 소론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 역사상의 이천보는 노론이었다.
  • 이후[44], 민백상
두 사람 다 이천보와 함께 세자의 스승 3인방을 구성하나 이천보보다는 비중이 낮은 편. 이천보가 자결하자 세자에게 "몇년만 참으시면 용상에 앉게 되시니, 그때까지는 제발 문안드리고 공부하는 척이라도 하라"고 하지만 세자는 거부한다. 이후 둘 다 자결했다는 언급이 나온다.
참고로 이천보, 이후, 민백상은 영조실록에서는 단순히 병으로 죽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고종실록(고종실록 39권, 고종 36년 11월 19일 양력 3번째기사)에서는 사도세자를 추숭하는 일을 거론하며 이들이 신사년(1761년) 함께 자결을 했다는 암시가 나온다. 여기서 신사년은 사도세자의 관서행 사건이 벌어진 해이다. 영화에서는 이 기록을 토대로 세 사람이 자결했다고 표현한 듯 하다.
영조의 첫 번째 중전. 달성 서씨. 영조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고, 환갑 잔치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고 혼자 외롭게 죽었다. 극중에서 영빈 이씨가 영조의 성격이나 버릇을 갓 시집온 혜경궁에게 알려주는 부분이 있는데, 자기는 총애받지 못해 잘 알지 못하는 부분이라 씁쓸해한다. 하지만 영빈 이씨가 도리어 환갑 잔치까지 건의해줄 만큼 대접을 해주는지라, 둘 사이엔 큰 다툼 없이 그럭저럭 잘 지낸다. 노년에 거동이 힘들 때 그녀를 부축하며 함께한 것도 다름아닌 영빈 이씨다.
실제 역사에서는 대비인 인원왕후보다 한달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 영화 속에서는 인원왕후가 시름시름 앓는 것을 지켜보기도 하며 인원왕후와 달리 승하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과 장면이 없다. 대신 국상 중에 영조가 세자를 부르고 나서 대비와 중전이 죽었다는 언급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도세자가 미치고 결국 죽게 된 원인이 정성왕후의 부재도 크다는걸 감안하면 중요 인물 치고 비중이 현저히 낮다.
배역을 맡은 박명신은 영빈 역할을 맡은 전혜진이 추천해서 영화에 합류했다고 한다.
  • 문 소원[45] (박소담 扮)
극 중 영조가 불길한 기운이 들면 물로 귀를 씻어내는데, 그 물을 담은 대야를 드는 역할을 맡은 나인이다. 그러다 영조의 눈에 띄어 후궁이 되고, 임신까지 하면서 한 순간에 신분이 격상된다. 이후 영조의 총애를 믿고 정성왕후의 환갑잔치 문제로 선희궁에게 버릇없이 오만하게 굴다가, 이를 괘씸하게 여긴 대왕대비에게 종아리에 회초리 찜질을 받는 등 제대로 혼쭐이 난다.[46] 참고로 이 일화들은 모두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다만 영화 묘사상 이 사건은 대비의 죽음으로까지 바로 이어지지만 실제 정성왕후 환갑잔치(파토 났지만)는 인원왕후 승하 6년전이었다.
영화는 이 장면을 통해 영조의 이중적인 행태를 보여주는데, 아들에게는 사소한 예법가지고 깐깐하게 굴며 갈구면서 정작 대비가 예법을 들며 자기가 아끼는 후궁을 혼내자 대비에게 대든다. 게다가 대비가 문 소원을 '천한 것'으로 매도하자 이를 제멋대로 확대 해석해서 자신의 출신 문제까지 들고 나온다. 영조의 일그러진 인간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이라 할 수 있겠다.[47] 영화 속에서 문 소원은 계비인 정순왕후가 들어오자,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이 내인을 정순왕후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는데 동일인물이 아니다. 정순왕후 본인은 정식 간택을 통해 중전 자리에 올랐다.[48] 숙종이 희빈 장씨 이후 후궁이 왕후가 될 수 없도록 법을 만들었기에, 실제로 영조가 마음이 있었어도 문 소원을 왕후로 삼을 수 없었다. 실제 인물은 1776년(정조 즉위년), 오라버니인 문성국과 함께 영조를 이간질하여 사도세자의 죽음에 이바지했다는 이유로 작위를 삭탈당하고 동년 음력 8월 10일 사약을 받았다. 문성국도 이 때 역률이 적용되었으나 이미 죽은 뒤였다. 실록과 한중록에 문씨 남매가 이간질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혜경궁 홍씨가 사도세자의 아내이자 영조의 며느리로서 남편과 시아버지에게 모든 책임을 돌릴 수 없었으며, 실록도 정조 즉위 후 정조가 일방적으로 발표한 것을 그저 기록한 것일 뿐이기 때문에 김상로처럼 책임전가 당했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 대신들은 정조가 사도세자 일을 추궁할 것을 겁내고 정조는 할아버지에게 책임을 돌릴 수 없는 데다가 대신들 입장도 고려해야 했으니, 그들에게 선왕의 후궁에 불과한 그녀는 굉장히 만만한 먹잇감이었기 때문이다.
영조의 내관. 초반에 영조가 안부를 묻고 귀를 씻는 장면이 나온 것으로 보아 싫어하는 듯 하다.(...)[49] 세자나 혜경궁 홍씨에게 영조의 소식을 미리 알려주는 역할도 하고, 영화 후반부에 유교의 장례 법도에 따라 궁궐 지붕에 올라 영조의 승하를 고했다. 이것이 초혼(招魂)이다. 요즘은 뜸하지만[50], 2000년대초 TV사극만 해도 이 장례 풍습을 묘사한 경우가 많았다.
  • 박 내관 (차순배 扮)
사도세자를 모시는 내관. 단역이지만 작중 사도세자 이상으로 불쌍한 사람. 세자의 인생 전체를 함께한 인물로, 세자가 영조에게 질책당하고 망가져가는 내내 옆에서 착잡한 모습으로 지켜본다. 세자가 어릴때 잘 처신해서 영조의 비위에 맞추도록 하지못하고 너무 놀아주기만한 정도의 실책이 있긴하지만, 세자가 나이가 들어 막 나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입장이 되지못해 주변인에게 알리는 역할만 한다. 결국 세자가 뒤주에 갇힌 다음날로 세자의 비행을 막지못한 죄로 참수된다. 세자가 아주 어릴때부터 잦았던 영조의 질책으로 좌불안석에, 양위소동, 무덤파고 놀기 , 이후 세자가 히스테리를 넘어 광증을 일으켜 동료 내관까지 살해당하는 모습들을 보며 그가 느꼈을 고통은... 상사 하나 잘못만나 인생 전체가 꼬인 케이스.
  • 나경언
나경언의 고변으로 유명한 인물. 작중에서 사도세자의 비행을 고한 이유는 나경언의 동생이 사도세자에게 살해된 내관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상로가 세자를 처리하려는 영조의 뜻에 맞춰 세자의 비행을 기록한 글을 그를 통해 제출하게 했다. 일개 양민이 왕에게 뭔가를 직접 고발하기란 불가능하므로, 세자가 역모를 꾀했다는 거짓 증언으로 영조에게 글을 직접 바친다. 그의 최후는 상당히 황당한데 이 고변을 들은 영조는 대소신료들이 나경언과 같지 않다며 화를 내고[51] 나경언을 칭찬했으나 그 즉시 나경언에게는 고언은 좋지만 역모 운운하여 왕을 놀라게 한 죄로 참수해버렸다. 채제공과 홍인한 등은 그를 문초하여 배후를 밝히자고 주장했으므로 영조와 김상로 측에서 입을 막은 것. 김상로가 그를 즉시 참하라고 주장하여 비겁하게 묘사되지만, 달리보면 애초에 역모로 거짓증언한 시점에서 죽음을 피할 순 없었기에 고문당하지 않게 빨리 끝내준 것이기도 하다.[52]

6. 평가



6.1. 관객


네이버, 다음 둘 다 약 8점대의 평점으로 전반적으로 호평이 많다. 출연 배우에 대해서도 송강호, 유아인 등 주연 배우들의 연기는 물론이고 아역까지 호연이라는 평이 많다. 영화 내용에 대해서도 눈물을 흘리며 봤다는 등의 여운을 느낀 감상평이 많다.
그러나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방식[53]때문에 그 시대 역사를 잘 아는 사람이 아니면 정신이 없다는 평이 있다. 첨언하면 이런 식의 연출 방식은 연출가들이 애호하는 기법으로 예수의 수난을 그린 멜 깁슨이 연출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도 사용된 기법이다. 처절한 현재 상황과 좋았던 과거 상황을 비교 연출하여 관객들로 하여금 처절한 현 상황을 더욱 처절하게 느껴지게 하는 효과를 준다.
또 영화의 군더더기 장면이나 특히 소지섭이 특별출연한 성년 정조의 부채춤 같은 장면이 생각보다 길고 지루했다는 의견이 있다. 이에 대해 이준익 감독은 그 부분 역시 심혈을 기울여 상징성을 살린 장면인데 관객 반응이 좀 섭섭한 모양.#[54] 하지만 극의 골자와 방향을 제시한 정병설 교수부터가 이 부분을 '이상한 군더더기'라 표현한 것으로 보면 딱히 이준익 감독의 뚜렷하지 못한 의도만을 옹호해주기도 어렵다. 과욕이었던 듯하다.[55]
역덕후들은 정말 '''오랜만에 이덕일노론 음모론이 배제된 수작이 나왔다'''는 점에서 만족스러워하고 있다.

6.2. 전문가


씨네21에선 대체로 무난하거나 수작이라는 평이다. 시네21
일간스포츠 기사 역시 무난하거나 수작이라는 평. 다만 결말이 상대적으로 약해 아쉽다는 평도 있다.

+김봉석 영화 평론가

"가장 익숙한 소재다. 연령층으로 봤을 때 40~50대도 유입할 수 있는 영화다. 누구에게나 극적이고 흥미로운 소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많이 다뤘던 이야기다. 관객이 피로감을 느낄 수 있다. 강점이 될 수도 있지만, 약점이 될 수도 있다."

+송효정 영화 평론가

"웰메이드 사극이다. 무거운 주제를 감독의 연출력과 배우의 연기력으로 잘 풀어냈다. 다양한 세대가 어울려 볼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전반적으로 높은 만족감에 비해 결말이 약하다."

박혜은 <맥스무비> 편집장은 10점 만점을 주며 극찬하기도 했다.

"다 아는 이야기다. 그러니 무엇을 새롭게 보여주겠는가? 이준익 감독은 이 질문 자체를 부질없게 만든다. 사도는 모든 것이 새롭다. 하나뿐인 아들을 뒤주에 가둬 굶겨 죽인 왕의 잔혹사, 즉 박제된 이미지와 이야기에 함몰됐던 시선을 인간에게 돌리자 전혀 다른 세계가 열린다. 시간을 초월해, 온 세상의 부모와 자식이 보인다. 영조와 사도의 마지막 대화, 정조의 춤사위가 내 것인 듯하여 오장육부로 울었다. 송강호, 유아인은 물론이려니와 이름을 하나씩 거론할 것 없이 모든 배우가 무시무시하다. 이토록 인간을 알알이 헤아린 영화를 본 적이 없다. 그야말로 떳떳한 이준익의 걸작이다."

박평식은 이렇게 평가하며 6점을 줬다.

"성정보다 행위, 비통할 따름"


6.3. 음모론자들의 비난



6.3.1. 황진미


황진미임오화변을 사사화(私事化)[56]되게 했다고 주장한다. 사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박시백 화백이 주장했듯이(영조실록 편), 임오화변과 같은 거대한 사건이 일개 개개인의 감정과 행동 때문에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음모론이 만들어지는 이유 중 하나이다. 사람들은 큰 영향을 미친 큰 사건에는 그 이유와 배경 역시 크다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런데 황진미는 혜경궁 홍씨 집안이 '''그 집안이 사도세자의 죽음에 기여했으며 이로 인해 정조의 즉위 후 멸문 당한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거기다 이덕일의 사도세자 관련 역사책을 사료분석에 근거해 나온 책이라고 주장했다. 관련 역사사실에 대한 공부를 하지 않은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덕일/비판, 황진미, 정병설 문서를 참고.
일간스포츠에서 대놓고 '''실제 "역사적 사실"(이라고 본인만 생각하는)에 근거해서 비판을 하였다.''' 일간스포츠 기사

역사적인 사건을 부자간의 갈등으로 축소했다. 영조와 사도 세자를 이용해 386세대의 부모와 2030 자식 세대의 갈등을 보여줬다. 그 점이 흥미로웠다. 송강호·유아인의 연기는 말이 필요 없다. 반면 전체적으로 정통사극을 표방했다고 했는데 정통사극과는 거리감이 있었다. 정통사극은 정치적인 해석과 '''역사적인 사실이 훨씬 더 가미돼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후반부로 갈수록 이준익 감독이 균형감을 잃었다.''' 이에 이야기가 끝까지 팽팽하게 가지 못했다.

사도세자임오화변에 대해 제대로 공부도 하지 않고 이덕일의 책을 근거로 심각한 오류까지 범하는 사람이 '''역사적인 사실이 가미돼 있지 않은 것을 근거로 균형감을 잃었다'''는 평을 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영화평을 했다는 황진미는 정작 <역린>의 평점을 <사도>보다 높은 7점을 줬는데 '''역사적 사실은 <사도>가 더 충실하다'''.
황진미는 9월 24일에 영화비평을 내기도 했다. 시작부터 이덕일의 책을 길게 언급하더니 이런 평을 썼다.

그 결과 영화의 교훈은 “이들 부자를 반면교사 삼아, 자식들 너무 몰아세우지 마라. 물론 돈 들여 키워놨더니 취직도 못하는 자식들이 한심하겠지만, 그걸 '''노골적으로 드러내면 자식들은 ‘오타쿠’가 되고, 그러다 이런 참변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 자식 죽일 생각 아니면 막말과 꼰대질을 삼가라” 정도의 명절 덕담이 되는 것이다. 작품성과 무관하게, 딱 그 정도의 의미에서 추석 가족영화로 추천할 만하다.

9월 25일에도 다른 매체에 비평을 실었는데, 이덕일의 노론 음모론을 길게 언급하는 등 전체적인 내용은 대동소이하지만, 끝에 다른 의견을 덧붙이며 이번엔 자신의 정치적 견해와 결부지었다.

그러나 사도의 입장에서 영화를 곱씹어 보면 전혀 다른 교훈이 도출된다. 사도세자는 왜 죽었는가? 그가 미쳐서이든 정치적인 이유에서이든 정말로 죽게 된 원인은 '아버지를 죽이려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를 달리 말하면, 그가 죽은 이유는 '아버지를 죽이려다 못 죽였기 때문'이다. 그가 칼을 빼들고 영조의 침전까지 갔지만 죽이지 못했을 때, 그는 이미 죽음과 마주친 것이다. 그 순간 그에게는 딱 두 가지 길이 있었다. 아버지를 죽이든지, 아버지에게 죽든지. 가령 이방원은 왕자의 난으로 실권을 장악한 뒤 이성계를 상왕으로 추대하였다. 사도세자는 이방원처럼 아버지를 상징적으로 죽이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죽임을 당한 것이다. 칼까지 빼들고 아버지를 죽이지 못하면, 곧바로 내가 죽는다. 기억하자.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회군이 있은 뒤 며칠 만에 광주학살이 시작되었다. <암살>의 아버지를 죽이기 위해 나선 딸은 영웅이 되고, <사도>의 아버지를 죽이지 못한 아들은 뒤주 속에서 죽는다. 청산하지 못하면 역청산 당한다.

황진미는 어이 없게도 봉건왕조제인 전근대 역사와 민주주의가 성립된 현대역사를 마치 같은냥 생각하고 대입한다. 이건 군사독재정권도 하던 짓인데 황진미는 똑같은 행위를 했다. 광기에 젖은 상태에서 툭하면 사람을 살인했던 사도세자의 행위는 옹호받을 상황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거나, 아니면 모르고 있는 것이다. 또 극중 나오는 사도세자의 살부에 대한 당위성을 주장하며 이를 1980년 서울역 회군과 광주민주화운동에 비교한다.
그리고 황진미는 정치갈등과 이덕일의 노론 음모론을 구분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정치갈등이 실재했다는게 곧 이덕일의 노론 음모론을 가리키는 건 아니다. 정치갈등 자체는 이미 1980년대부터 나오던 것이지 이덕일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다. 이덕일의 문제점은 거기에 근거없는 음모론에 대한 확신과 극단적인 과장을 붙혀 노론 음모론을 만든 것이다. 정치 갈등 자체는 한중록의 서술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6.3.2. 이덕일


이 영화는 이덕일의 주장을 대놓고 까는 수준의 작품이면서도 상당한 흥행을 기록하였다. 결국 이덕일은 이 영화를 "당파싸움에 휘말려 억울하게 죽은 사도세자를 정신병자 살인마로 둔갑시켰다"면서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덕일의 대중적 유명세는 특정 당파를 만악의 근원으로 지목하는 음모론에 바탕을 둔 것이었고 그 중에서도 가장 자극적인 사건이 임오화변인지라 위기감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 사료와 비교해보면 영화에서 묘사된 사도세자의 광증은 '''오히려 순화되어 있다.'''

"'''네가 왕손의 어미를 때려죽이고''' 여승을 궁에 들이며, 서로(西路)에 행역하고 북성(北城)으로 나가 유람했는데, 이것이 어찌 세자로서 행할 일이냐? 사모를 쓴 자들은 모두 나를 속였으니 나경언이 없었더라면 내가 어찌 알았겠느냐? 왕손의 어미를 네가 처음에 매우 사랑하여 우물에 빠진 듯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하여 마침내는 죽였느냐?''' 그 사람이 아주 강직하였으니, 반드시 네 행실에 대해 간언하다가 이로 말미암아서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또 장래에 여승의 아들을 반드시 왕손이라고 일컬어 데리고 들어와 문안할 것이다. 이렇게 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겠느냐?”

『영조실록』 99권, 영조 38년 5월 22일 을묘

타고난 자질이 탁월하여 임금께서 매우 사랑하셨는데, 10여 세 이후로 점차 학문을 게을리하게 되고, 대리청정 이후로는 질병이 생겨 천성을 잃었다. 처음에는 대단치 않았기에 신민들이 낫기를 바랐지만, 정축년(1757)과 무인년(1758) 이후로는 병증이 더욱 심해져서 그 발작할 때에는 '''궁녀와 내관을 죽이고 죽인 뒤 문득 후회하였다.''' 임금이 매번 엄한 하교로 질책하니, 세자가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질병이 더해갔다.

『영조실록』 99권, 영조 38년 윤5월 13일 을해

세자가 '''내관, 나인, 하인들을 죽인 것이 거의 백여 명'''이오며, 그들에게 낙형을 가하는 등 차마 보지 못할 일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그 형구는 모두 내수사 등에 있는 것인데 한도 없이 갖다 썼습니다. …… 지난번 제가 창덕궁에 갔을 때 '''몇 번이나 저를 죽이려고 했는데''', 겨우 제 몸의 화는 면했습니다만 지금 제 몸을 돌아보지 않더라도 우러러 임금의 몸을 생각하면 어찌 감히 이 사실을 아뢰지 않겠습니까?

『모년기사』 · 『대천록』 폐세자반교문 중 선희궁의 말

사도세자는 휘는 선이요, 자는 윤관이라. 재위 11년 을묘년(1735년) 정월 21일에 탄생했는데 영빈이 낳았다. 나면서 남달리 영특했고 자라면서 문리 역시 통해 거의 조선의 희망이었다. 오호라, 성인을 배우지 않고 도리어 태갑을 배워 망할 일로 가려고 하니 슬프다. 스스로 깨닫고 마음을 잡기를 가르치고 수시로 말했으나 소인배 무리를 가까이 해 장차 나라를 망칠 지경이었다. 오호라, '''자고로 무도한 임금이 어찌 없다 하리오만 세자 시절에 이런 자를 나는 들은 바 없었다'''. 그 근본은 넉넉하고 좋게 태어났으나 마음을 잡지 못해 미치는 데로 흘렀다. 새벽부터 밤까지 태갑의 뉘우침 같은 것을 바랐으나 마침내 '''만고에 없는 일에까지 가서''' 머리 센 아버지가 만고에 없는 일을 저지르도록 했구나. 오호라, 애석한 것이 그 자태요. 한탄스러운 것이 이 적는 글이다. 슬프다. 이 누구의 잘못이란 말인가?

영조가 쓴 사도세자 묘지명

그런데 영화에서 사도세자가 죽인 사람은 딱 한 명이고 사도세자가 죽인 경빈 박씨도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이덕일은 이 정도도 역사 왜곡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영화의 역사 왜곡 여부를 떠나 아예 이덕일이 비난을 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이덕일의 비난
또 이덕일은 "대한제국을 팔아 넘긴 마지막 노론 당수 이완용이 고종에게 사도세자 살해에 가담한 정후겸의 신원을 여러 차례 요청한 데서도 이 사건의 본질은 명확하다"고 말한다. 이 역시 오류다. 임오화변 당시 정후겸은 불과 13살에 화완옹주의 양자도 되기 전이었다. 이완용이 마지막 노론 당수라는 증거도 없다. 또 이완용이 신원을 요청한 것은 정후겸 뿐만 아니라 무려 77인이나 되며 그 중에는 남인 이현일과 윤휴, 북인 정인홍 등등 서인과 노론에게 숱한 비난을 받은 인물까지 있다. 특히 윤휴는 이덕일이 송시열과 대비하여 '백성의 벗이 되고자 했던 시대의 개혁가'라고 극찬한 인물이다! 그 목록에는 심지어 윤원형, 김익순 같은 인물까지 포함되었으며 시기 또한 고종이 아닌 순종 때다. 즉 '대한제국을 팔아 넘긴' '이완용'을 제외하면 '''문장 전체가 오류 아니면 왜곡이다.'''

7. 흥행


한국 박스오피스 1위 영화
앤트맨
(2015년 37주차)
'''사도'''
(2015년 38주차)
사도
(2015년 39주차)
사도
(2015년 38주차)
'''사도'''
(2015년 39주차)
인턴
(2015년 40주차)
개봉 첫 날, 2주 연속으로 박스오피스 왕좌에 군림하던 앤트맨을 제치고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개봉 첫 주에 1,210개관에서 3만 2,987회 상영하여 179만 9,063명을 동원하고, 142억 7,496만 9,979원을 벌었다. 개봉 이전 관객수까지 포함해 총 관객수는 181만 554명이고 총 누적 매출액은 143억 6,635만 5,979원이다. 《관상》보다는 낮은 출발이지만 평단과 관객 양쪽의 평이 워낙 좋아 추석 시즌에도 강력한 흥행 몰이를 할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같은 날 개봉한 《메이즈 러너: 스코치 트라이얼》을 제치고 주간, 주말 모두 박스오피스 1위로 화려하게 데뷔했다. 9월 22일에는 전국 200만 관객을 넘어섰으며 26일에는 전국 300만 관객을 넘어섰다.
권상우, 성동일 주연의 《탐정: 더 비기닝》, 여진구, 설경구 의 《서부전선》 등 추석 연휴를 겨냥한 대형 한국 영화 경쟁작들도 모두 물리치고 2주 연속 1위를 지켰다. 2주차에는 전국 1,153개관에서 3만 6,050번이나 상영됐으며 전주보다 고작 1.1% 감소한 178만 51명을 불러모았고, 전주보다 0.6% 줄어든 141억 8,302만 287원을 벌었다. 그래서 2주차까지 누적된 관객 수는 359만 595명, 총 매출액은 285억 4,928만 5,266원이다. 30일까지 496만 관객을 넘으며 10월 1일에 전국 507만을 넘었다. 이로서 이준익 감독에게는 278만 관객을 기록한 《황산벌》 흥행을 넘으며 《왕의 남자》에 이어 감독으로서 두번째 흥행 대박 영화가 되었다.
더불어 사극 영화 역대 흥행 7위를 차지했다. 사극 영화 1위는 1,761만 관객이 본 《명량》. 2위는 《광해, 왕이 된 남자》로 전국 1,232만 관객이 봤으며 3위는 전국 1,230만 관객이 본 《왕의 남자》, 4위는 전국 913만 관객이 본 《관상》, 5위는 866만 관객이 본 《해적: 바다로 간 산적》, 6위는 전국 747만 관객이 본 《최종병기 활》.
덤으로 노론 음모설을 소재로 만든 영화 《역린》이 거둔 전국 384만 관객도 압도하며 깨버렸다.
흥행 추세를 따지자면 감독의 최고 대박작인 《왕의 남자》가 열흘동안 거둔 전국 228만 관객을 깨며 열흘동안에 전국 260만 관객을 기록했다. 때문에 이 작품도 1,000만 관객이 가능하리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비록 《베테랑》이 열흘동안 510만, 《암살》이 열흘동안 540만 관객을 기록한 것보다 반타작급이지만. 역시 추석 시즌 개봉작이었던 《광해, 왕이 된 남자》 보다는 3일 먼저 400만 관객을 돌파하였고, 꾸준히 흥행이 이어지고 있기에 충분하다는 의견도 있다.
그런데, 개봉 3주차, 평일에 계속 1위를 지키다가 예상치도 못했던 앤 헤서웨이로버트 드니로의 《인턴》의 갑작스런 대반격으로 주춤했다. 평일 기록까지 합산한 주간 박스오피스에선 3주 연속으로 1위를 지켰지만, 주말 박스오피스에선 《인턴》에 밀려 전주보다 1단계 떨어진 2위를 차지했다. 3주차엔 전국 934개관에서 2만 8,060회 상영되었으며 전주보다 11.3% 상승한 198만 818명을 불러모았고, 전주보다 7.7% 상승한 152억 7,098만 2,935원을 벌었다. 그래서 3주차까지 누적된 총 관객 수는 557만 1,388명이며 총 438억 2,005만 4,201원을 벌었다. 지금까지 상당한 흥행세를 보여줬지만, 《인턴》에 이제 왕좌를 뺏긴데다 《마션》과 《성난 변호사》가 개봉하면 꽤 타격을 입을 것으로 보인다. 천만 관객을 바라보기에는 그렇게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다. 거기에 10월 4일에는 《인턴》과 《탐정: 더 비기닝》에까지 밀려 박스오피스 3위로 내려가버렸다. 그나마 하룻만에 2위로 다시 올라섰고 10월 5일까지 전국 562만 관객을 기록했다.
그러나 10월 8일 《마션》과 《성난 변호사》가 개봉하면서 4위로 밀려났다. 10월 10일까지 전국 594만 관객을 기록, 이 상황이라면 전국 1,000만은 어렵게 되었다. 일단 전국 600만은 넘어서겠지만 700만대까지도 힘들 듯 하다.
개봉 4주차에는 역시 에상대로 《마션》과 《성난 변호사》의 개봉으로 직격탄을 맞았다. 4주차에는 전국 732개관에서 1만 5,320회 상영되었는데 전주보다 77.7%나 폭락한 44만 2,076명을 불러모았고, 전주보다 78.2%나 하락한 33억 3,584만 6,800원을 벌었다. 그래서 4주차까지 누적 관객수는 601만 3,321명으로 6백만 관객을 돌파했고, 누적 매출액은 471억 5,459만 3,501원이다. 그리고 박스오피스 4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후 6위로 밀려나면서 이젠 주말에도 3,4만 정도 관객을 기록하면서 700만 관객 넘기도 어려워 보인다. 10월 17일까지 전국 617만 관객을 기록했다. 그리고 개봉 5주차에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주말에는 《트랜스포터: 리퓰드》의 개봉으로 인해 6위로 하락했지만, 평일 기록까지 합산한 주간 박스오피스에선 전주와 마찬가지로 4위를 유지했다. 5주차에는 전국 424개관에서 7,540회 상영되었으며, 전주보다 61.2% 감소한 16만 2,444명을 불러모았고, 전주보다 65.6% 감소한 11억 8,077만 2,100원을 벌었다. 그래서 5주차까지 총 관객 수는 617만 5,579명이며, 총 누적 매출액은 483억 3,377만 7,301원이다.
개봉 6주차에는 《더 폰》, 《특종: 량첸살인기》. 《돌연변이》 등 신작 한국 영화들의 총공세로 타격을 많이 받았고 흥행세도 제법 가라앉았다. 6주차에는 전국 360개관에서 3,342번 상영되었으며, 전주보다 67% 하락한 5만 3,573명을 불러모았고 또 전주보다 67.2% 감소한 3억 8,780만 5,100원을 벌었다. 박스오피스에선 전주보다 3단계 하락한 7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6주차까지 누적 관객 수는 622만 9,110명이며, 누적 매출액은 487억 2,121만 101원이다.
결과적으로 1000만 관객 얘기가 나왔던 개봉 초반의 기대치에 못 미쳤을 뿐, 최종관객 624만을 기록하여 손익분기점(300만 관객)을 돌파해서 상업적으로 분명 성공했고, 영화 자체의 평가도 양호해 지금까지의 실적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자격이 있다. 《소원》에 이어 또 다시 히트작을 탄생시킨 이준익 감독은 《평양성》과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연이은 참패로 은퇴 직전까지 몰렸던 슬럼프에서 완전히 벗어나 재기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8. 고증



8.1. 전체적인 사건


정병설 교수가 영화 사료 검수에 참여했다.
일단 영조, 사도세자, 임오화변 소재를 다룬 작품 중에선 고증이 가장 '''좋은 편'''에 속한다. 1998년 <대왕의 길> 방영한 직후 이덕일의 사도세자의 고백이 출간되고 이후 대중의 인식은 이덕일의 견해에 많은 영향을 받게된다. 대왕의 길 이후 17년만에 사도세자의 정신병을 조명한 작품이고 세밀하게 다룬 건 이 영화가 최초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한중록을 폭넓게 참고한 게 분명한 장면들이 정말 상세하게 나온다. 인원왕후가 혜경궁 앞에서 예법을 어긴 화완옹주를 꾸짖으며 곡좌를 하게 하는 장면, 선희궁에게 대든 숙의 문씨의 종아리를 치는 장면, 영조가 방어진 논의를 자기 의사대로 결정한 사도세자에게 왜 자신에게 묻지 않냐며 핍박하는 장면, 호조의 은 문제로 논의하는 장면, 사도세자가 정조의 태몽으로 용꿈을 꾸고는 이를 그림으로 그리는 장면[57], 세자의 스승이었던 이천보 등의 자결, 아들의 죽음을 확인한 영조가 개선가를 울리는 장면 등은 모두 사료로 전해지는 내용이다. 이 정도로 세밀한 고증을 보여주는 한국 사극은 매우 드물다. 관련 지식은 정병설 교수가 쓴 '권력과 인간'과 '혜경궁 홍씨, 회한의 궁중생활 칠십 년'을 참고.
이 영화는 《비밀의 문》이나 《역린》 같은 노론 음모론에선 분명하게 벗어난 작품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영화 전체가 영조시대 전반(심지어는 경종독살설까지)을 다루다보니 시간이 부족해 요약한 내용이 많다. 이에 역사를 좀 아는 사람과 일반 관객이 받아들이는게 서로 조금 다를법하다. 역사 매니아들은 주변 내용을 이해한 상태에서 컷 하나하나에 집중할 수 있어 장면을 보며 감탄했지만, 역사를 잘 모르는 관객들에서는 상황 자체가 잘 이해가 안간다는 사람들도 있긴 하다.
전체적인 고증은 좋지만 지나가는 내용에선 오류가 여럿 있다. 굉장히 짧은 장면으로 사도세자가 균역법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나오는 장면이 있다. 그리고 영화에선 나경언의 고변에 홍봉한이 배후를 밝혀달라고 청하고 김상로가 태워버리는 걸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홍봉한이 태워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또 영화속에서는 정성왕후 환갑잔치 문제가 결국 인원왕후의 죽음으로까지 이어지고 정성왕후가 인원왕후의 승하를 지켜보지만 실제 역사 속에서 정성왕후는 66세에 세상을 떠났고 인원왕후가 그 뒤를 따랐다.

8.1.1. 엔딩 크레딧에서 나온 참고문헌


실록과 승정원일기, 한중록과 같은 1차 사료와 함께, 2차 사료로 정병설 교수의 저작과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이 나온다.

8.1.2. 노론 음모론 탈피와 담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임오화변에 대한 당대부터 현대까지의 연구와 학설들을 굉장히 '''폭넓게''' 받아들였다.
이덕일노론 음모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오해가 있다. 김귀주를 비롯한 경주 김씨 일파가 정순왕후에게 가서 '우리 다 죽는거 아니냐'고 세손까지 몰아낼 궁리를 하고 나경언의 고변이 그들의 배후공작인 것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노론이니 소론이니 하는 언급 자체가 등장하는건 아니지만 정순왕후가 '오라버니, 아버지'하니 관련 지식이 조금만 있어도 노론임을 알 수 있다. 정순왕후는 오히려 자신은 영조가 두렵다고 언급한다. 근데 정작 정순왕후가 어떤 경험을 통해 영조를 두려워하게 되었는지는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영조에게 '친정식구들 벼슬을 높이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는 정순왕후의 현명함을 나타내는 장면만 나온다. 사실 저 부탁 자체가 '(젊은 나이에 나한테 시집 오게 해서) 자네에게 내가 미안한데 혹시 할 말 있으면 해 보라'는 영조의 질문에 대한 답이었던 걸 생각하면, 자신으로 하여금 원칙론적인 대답을 할 수밖에 없게끔 먼저 선수 친 고단수 영조가 두렵다는 표현일수도 있다. 이 역시도 사료에 나오는 기록을 바탕으로 한 묘사다. 실제 역사에서는 영조 말년 세손 승계 문제에서 김귀주를 비롯한 경주 김씨들이 오히려 세손의 편을 들었다.
이 부분을 파고보면 이덕일식 노론 음모론과는 다르다. 이덕일식 노론 음모론은 성군의 자질이 있던 사도세자를 노론이 모함해 죽이고 광인으로 몰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작품 속 사도세자는 정신병자가 맞고 그를 정신병자로 만들고 죽인 '''주체'''는 영조다. 노론이 나경언의 배후에 있긴 했지만 최종 결정권은 분명 영조에게 있었고, 홍봉한의 만류에도 나경언의 고변서를 태우고 세자와 대질시키지 않고 바로 죽여버리기로 결정한 이도 영조였다.
사료 고증을 해준 정병설 교수는 부자갈등으로 인해 정신병을 얻은 사도세자가 부친을 죽이려는 모습까지 보이자 영조가 제거한 다음 원인을 흐릿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노론은 이 사건에서 몸을 사렸고 끼어든 정황이 '''없다고''' 본다. 총명한 세손을 후계자로 점찍고 눈밖에 난 세자를 팽했다고 본 박시백 화백 역시 노론이 이 사건에 끼어든 바는 없었다고 본다.
'''그러므로''' 오히려 여기서 중요한건 정병설 교수는 노론이 끼어든 정황이 없다고 봤지만 감독과 각본가들은 그와 다르게 임오화변의 배경에 정치갈등도 일부 포함됐다고 보고 포함시켰다는 것이다. 이건 혜경궁 홍씨로부터 비롯된 설이다.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의 정신이상 증상에 대해서는 가감없이 적었지만 이에 대해 본심은 아니었고 아버지에게 미움받아 어쩔수 없이 생긴 것이며 둘 사이에 김상로 등 노론인사들이 끼어서 중상모략을 했다고 적었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 사도세자는 "본래는 인자하고 효성스러우신 분께 어쩌다 저런 광증이 생겼는지 망극할 따름"이라는 표현이 적지 않게 나온다.
영화는 정병설 교수의 주장을 골자로 하면서, 세손(정조)이 머리좋고 공부가 취미라 (사도)세자와 달리 영조의 사랑을 받았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혜경궁의 담론까지 받아들였다. 즉, 임오화변에 대한 당대부터 현대까지의 연구와 학설들을 굉장히 폭넓게 받아들인 것이다. 고로 노론 음모론하고는 분명히 다르다.
채널CGV더 굿 무비 2017년 2월 6일편에 소개되었다. 그런데 해설진 중 한명인 <씨네 21>의 주성철 편집장이 "사도세자는 정쟁의 희생자였는데, 이 영화는 정쟁을 빼고 부자간 갈등에 초점을 두었다"고 평하여 노론 음모론이 사실임을 전제로 하는 듯한 관점을 나타냈다. 그래도 한줄 평으로 "가장 현실적으로 재해석한 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라고 썼다.

8.1.3. 사도세자의 정신병 묘사


영화는 부자갈등 관계에 초점을 맞춰서 사도세자의 정신병 묘사는 덜 한 편이다. 한중록은 "현대 정신의학지식이 없으면 지어내기 힘들" 내용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 한중록에선 사람을 마구 죽이다가 나중에 후회했다는 묘사가 있는데, 영화에선 그런 갑자기 성격이 변하거나 후회하는 일 따위가 거의 없다. 그보다는 성격이 예민해서 사나운 부분이 강조된 편이다. 사도세자가 죽인 사람도 의대증을 표현하며 죽인 내시 1명 뿐이다.[58]
그러나 이덕일은 영화의 정신병 묘사조차 왜곡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사료에 근거하면 영화의 정신병 묘사는 '''순화된 것이다.''' 자세한 건 아래의 <이덕일: "살인마로 둔갑한 사도세자"?> 참고.
사실 영화 상의 그의 기행은 실제 사도세자의 모습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기록에 따르면 그가 죽인 이가 거의 '''100명'''에 달한다고 전하고 있으며, 이게 정확한 숫자가 아니라 많다는 의미라고 해도 무수히 많은 무고한 사람을 죽인 건 마찬가지다. 옷 입기를 어려워하는 것도 단순히 아버지 영조를 만나는 압박감에 저지른 걸로 묘사되는데, 이는 한번 있는 일이 아니라 실제로 그가 시달린 병이었으며 옷을 입히다가 주변인을 죽인 것도 실제 있었던 일이다. 그가 저지른 악행은 폭행과 살인 뿐 아니라 궁녀나 비구니에 대한 성폭행도 있었는데, 살인과 의대증을 제외하고는 영화에서 전부 생략되었다. 또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사치하느라 국고를 탕진한 것도 생략되었다.

8.2. 문화부분


조정(궁궐의 정전 앞마당)에 품계석이 없다. 품계석은 정조 때 설치한 것이니 영조 때부터 정조 즉위식까지의 장면에 등장하는 조정에 품계석이 있는 것으로 나왔다면 고증오류가 될 것이다. 상당히 고증에 신경썼음을 알 수 있다.
그에 비해 정조의 즉위식을 인정전에서 거행했는데, 후대 왕의 즉위식은 선대 왕이 승하한 곳에서 치르므로 정조의 즉위식은 영조가 승하한 경희궁에서 이뤄져야 맞다. 실제로 정조는 영조가 승하했던 경희궁 숭정문에서 하례하고 숭정전에서 즉위했다. 후술할 종묘 장면을 실제론 경희궁에서 찍고 뒤에 CG로 합성했듯이 경희궁에서도 촬영이 이뤄졌는데, 왜 즉위식 장면을 창덕궁 인정전(을 묘사한 세트)에서 찍었는지 의문이다. 즉위식을 하면서 뒤주가 놓여있던 조정을 바라보며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을 위해 의도적으로 즉위식 장소를 창덕궁으로 했을 수도 있겠지만, 조정에서 품계석을 제거할 정도로 세세한 부분까지 고증하다가 마지막에 고증을 무시하는 것도 일관성이 없다.
창덕궁금천교가 꽤 좁고 긴 모습으로 나왔는데, 지금의 금천교는 창덕궁이 창건된 뒤 지금까지도 창건 당시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즉 영화에서 나온 가마꾼이 간신히 지나가는 금천교는 고증 오류인 셈. 하지만 엄연히 보물 1762호인 금천교에서 촬영을 하면 아무래도 문화재에 대한 훼손의 위험이 있으니 그 점 역시 고려해봐야 할 부분.
작중 청나라에서 보내온 개와 개 그림이 소재로 나온다. 영조 시대에 이들이 있는 게 가능했던건지 의문이다. 국립고궁박물관에 사도세자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개 그림이 있긴 한데, 이게 정말 사도세자가 그렸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청나라 황실에서 라사압소시추 혹은 페키니즈를 키웠다는 건 사실로 보이지만 사도세자가 그렸다는 개 그림과는 너무 차이가 크다. 적어도 궁궐에서 약용 목적으로 따로 개를 길렀던 것은 확인되는 사실.
정병설 교수는 위의 개 그림을 사도세자가 그린 게 맞다는 가정 하에 개 그림의 구도 등에서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의 소원한 사이, 그리고 부왕에게 사랑 받고 싶었던 사도세자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 이 견종은 이름 그대로 아프가니스탄 원산인 아프간 하운드로 지금도 국내에선 보기 드문 견종이다. 영화에서는 해당 그림#을 사도세자가 그렸다는 전언을 받아들여 그림에 묘사된 개와 유사한 개를 출연시키려다 보니 한국 토종 개와는 다른 느낌의 개가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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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조룡보)
실제 왕의 곤룡포의 보는 오조룡, 세자는 사조룡, 세손은 삼조룡이다. 그런데 영화에선 그런 거 없이 죄다 오조룡의 보가 달린 곤룡포를 입었다. 다만 세자의 아청색 용포는 잘 고증되었다.
하지만 용보 자체는 고종 대의 용보를 크기만 키운 형태로 사용했다. 고증대로라면 물결 형태 테두리가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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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익선관 치고는 익선관의 높이가 상당히 낮다.
극 중에 나오는 무관들의 복식은 완전히 틀렸다. 조선시대 금군들의 복장과는 거리가 먼, 완전히 정체불명의 퓨전스러운 복식이다. 발도를 하거나, 세자를 뒤주에 넣는 등 양 손이 자유로워야 하는 순간에만 띠돈 매기를 통해 칼을 고정시키고, 이외의 경우에는 손에 들고 있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띠돈매기가 아예 등장조차 하지 않는 사극이 범람한 여파로 띠돈매기에 집착하는 일부 고증덕 생각과 달리, 띠돈매기가 반드시 사용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손에 들고 있는 것은 고증에 맞는 패용법이 아니다.
또한 작중에서 정조가 사도세자가 묻힌 융릉에서 오열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로는 단종의 능인 영월 장릉에서 촬영했다.
첩지 역시 고증과 다르다. 혜경궁의 첩지는 양호하긴 하지만, 애초에 높다란 받침대도 없었고, 후궁이나 옹주의 첩지는 아예 창작이다. 무엇보다 당의 차림에는 첩지 위에 족두리나 화관을 써야 한다. 첩지는 고정용 장신구다.

8.3. 개별 사건들


  • 영조가 세자빈을 맞이하는 자리에서 "네 폐백까지 받았으니 훈계 한 마디 하자~"라면서 하는 설교는 토씨 하나까지 한중록에서 나오는 글 그대로이다.
  • 영빈 이씨가 세자빈 홍씨에게 영조의 평소 성격과 습관에 대해서 말해주는 내용 역시 한중록에서 나오는 내용 그대로이다. 다만 한중록에서는 홍씨가 '영조께서는 평소 이러이러하셨다'라고 직접 설명하지만 영화에선 영빈 이씨가 대신 말해주는 형태로 각색했다.
  • 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는 장면은 대부분 사실이나 몇가지 내용은 차이가 있다. 대리청정 첫날 함경도 군영을 옮기는 문제로 일어난 일과 은자를 꿔 간 문제로 수어사와 호조판서가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은 신료들부터 왕부자(王父子)의 대화까지 거의 실록의 기록과 일치한다. 덧붙여 이 당시의 호조판서가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다. 다만 영화에서는 박문수라고 이름이 나오지는 않았다.
  • 세자가 세손을 위해 용 그림을 그린 것은 사실이다.
  • 극 중 "세손이 100일을 맞아 문안드린다."는 대사가 있는데, 실제로 세손의 책봉은 1759년, 세손이 8살이 되었을때 이루어졌다. 100일 당시 정조의 신분은 세손이 아닌 '원손'이었다.
  • 인원왕후가 승하하는 장면에서 정성왕후가 곁에 있었지만 실제로는 정성왕후가 인원왕후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59]
  • 주강 시간 때 영조가 세손에게 질문을 하고 이에 세손이 또박또박 잘 대답하자 영조가 이를 칭찬하며 "3백 년의 명맥(命脈)이 오직 세손에게 달려 있다."라고 말한다. 이 문답의 내용과 3백년 운운은 모두 실록에 나온 그대로이다. (영조실록 97권, 영조 37년 1월 5일 을사 2번째기사) 사실 이 부분은 생각해보면 꽤 의미심장하다. 왕위 계승권 1순위인 세자가 멀쩡하게 있는 상태에서 굳이 세손에게 명맥을 잇게 한다 운운을 하였기 때문이다.
  • 영조가 세자에게 술 마셨냐고 추궁하니 세자가 마셨다고 하자 상궁이 세자를 두둔하는 것, 그리고 영조가 나가자 세자가 춘방 관원들에게 "일개 아녀자도 나를 위해 나서는데 너희들은 가만히 있냐"며 소리치는 것 역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다만 이 소란 중에 촛대가 넘어져 세자가 있던 낙선당에 불이 나버렸고 영조가 세자에게 "네가 불한당이냐? 불은 왜 지르느냐!"며 꾸중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았고, 처음부터 술은 마시지 않았다.
  • 세자가 중간에 뒤주를 나온 것은 사실이다. 초기에는 감시가 그리 엄하지 않아 밖에 나와 바람을 쐬다 혼날까봐 다시 들어가기도 하고 음식을 주기도 했는데, 아마 당시 대신들도 화변 초기에는 "이러시다 말겠지..."하는 느낌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나 보다.[60] 영화에선 환각에 시달리던 세자가 뒤주를 박살내고 탈출해 우물가에 뛰어들고 이에 영조가 격노해 뒤주를 봉하는 식으로 더 격렬하게 묘사되었다.
  • 세자가 부채로 소변을 받아 마시는 부분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부채가 세손을 위한 용그림으로 만들었고 결국 세손에게 전해진 것은 비극을 더하기 위한 창작이다. 바로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화변 초기에는 주변인들이 지키고 선 병졸들과 쉬쉬하며 물과 먹을 것을 가져다 주기도 했었다.
  • 6일째 되는 날 세자의 생존을 확인하기 위해 군사들이 뒤주를 흔든 것과 뒤주 안에서 세자가 "어지러우니 흔들지 마라"고 말한 것도 사실이다.
  • 영조가 세자의 죽음을 확인한 뒤 개선가[61]를 명한 것은 사실이다.
  • 임오화변이 있기 전 해(1761년, 영조 37년)에 있었던 세자의 관서행, 즉 평양 등 평안도 지역에 다녀오는 묘사는 등장하지 않는다. 실제로는 영조가 이 관서행을 통해 세자가 역모를 준비했다며 뒤주에 가두는 가장 근본적인 사건이었다. 정조는 이후 사도세자가 모반 음모를 막기 위해서 평양에 간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배경 근거를 볼 때 이 또한 근거가 부족한 상황. 그래서 사도세자가 관서로 간 이유는 단순히 놀러 간 것일 뿐이라는 해석도 강하다. 당시 영조의 반응 자체도 세자의 아랫사람들만 처벌하고 세자에겐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말할 뿐, 의외로 너그럽게 넘어갔다.
  • 외적인 이야기로 그간 한국 영화, 드라마에서는 대체로 사배에 대한 묘사가 드물었던 편인데, 본작에서는 영빈 이씨의 생일잔치 일로 이배(흔히 일컫는 큰절)와 사배의 차이를 잘 설명하고 있다. 더불어 이 사배는 후반부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에서도 등장하는데 영빈 이씨처럼 혜경궁 또한 왕비나 대비가 된 적이 없기에 본래는 받을 수 없다. 허나 정조는 자궁(慈宮)이란 호칭까지 만들어내는 등 어떻게든 편법을 써서 어머니를 궁정에서 대비에 준하는 대접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역사적 사실과 별개로 영화상의 내용만으로 보면 사도세자와 정조의 어머니에 대한 애정의 공감대를 보여주는 연출이라 할 수 있겠다.[62]

9. OST


영화 속 사도가 경희궁으로 올라가는 장면 등에서 나오는 '나무아미타불~' 하는 음악이 귀에 맴돈다는 평가가 많다. 이 때문에 OST를 공개해달라는 요청이 많았는데 9월 25일 OST가 공개되었다.

관객들에게 특히 주목받은 그 부분이 나오는 트랙은 아모리 - 만조상해원경(위의 영상), 진혼 - 만조상해원경, 무덤방 - 망자해원경 - 옥추경 3곡이다. 이 곡들은 무속 경전이 대체로 네글자 네글자 대구로 이루어져 리듬감이 강하다. 사도세자가 부왕을 시해하려고 하는 오프닝, 후반부 장면이나 인원왕후 사후 세자가 본격적으로 미쳐가며 노래 부를 때 흘러나온다. 사도가 뒤주에 갇혀 주문처럼 중얼거리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또한 맹인 무당이 사도세자 앞에서 굿을 하며 옥추경을 부르는데, 해당 역을 맡은 배우 정해균이 실제로 박수무당에게서 2달간 배워 불렀다고 한다.[63][64]
금일 영가(靈駕) 저 혼신은 혼이라도 오셨으면
만반진수(滿盤珍羞) 흠향(歆饗)을 하고
일배주로 감응을 하야
살다 남으신 명과 복록은 자손궁에 전하시고
송경법사(誦經法師) 법문을 받아
모질악 자 악심일랑 버리시고
착한선 자 선심을 돌려
풍화환란 제쳐놓고
재수소원 생겨주고
왕생극락을 들어가서 인도환생을 하옵소서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메인 테마. 방준석 음악감독이 피리, 생황의 소리를 넣어 작업한 곡이다. 이 곡에 참여한 생황 연주가 진윤경은 영화에서 정조가 부채춤을 출 때 직접 등장하기도 한다.
영화의 슬픈 분위기를 살려주고 마지막 장면에서 관객들의 눈물을 빼주는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 방준석이 작업한 OST는 전체적으로 평가가 좋아 청룡영화상 등에서 음악상을 수상하였다.

조승우가 부른 꽃이 피고 지듯이. 영화에 삽입된 것은 아니지만, 방준석 음악감독이 친분이 있었던 조승우에게 제의해 탄생된 주제곡이다. 영화 개봉 후 뮤직비디오와 함께 공개됐다. 가사는 사도세자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

10. 여담


  • 추석을 맞아 영화 장면을 편집한 추석 예절 영상을 공개하였다. 모두 실제 극에서는 비극성을 가진 장면인데도 현실에선 묘하게 매치되는 것이 은근히 웃기다.

  • 한편, 영화가 흥행을 거두자 사도세자의 무덤인 융릉에 참배객 및 관광객이 많이 늘어났다고 한다.
  • 강남의 학부모들로부터 반응이 좋다고 한다. 기사 내용을 요약하자면, 부모 말 안 듣고 공부 안 하면 사도세자처럼 비참해질 것이라는 것을 자녀에게 주입시키고자 이 영화를 보게 한다는 것. 당연하지만 이 영화의 주제와는 정 반대 이다. 그렇지만 모두가 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고, 부모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나뉘는 듯하다. 한편, 이 영화를 본 강남의 청소년들은 사도세자가 갇힌 뒤주가 마치 자기 공부방 같다고. 참고로 실제 영화상에선 예법보다 인간이 먼저지 않냐 등의 말이 나오고 사도세자의 뜻을 이어받은 정조가 왕이 되면서 새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으로 끝나는데, 공부 안 하면 잘못돼서 사도세자처럼 된다는 건 현실에 갇혀있는 영조의 구시대적 발상과 같다. 즉 부모들이 영화를 악의적으로 왜곡해서 아이들을 공부시키려는 것이다.
  • 극 중 영조의 자결하라는 명에 사도세자가 돌에 머리를 박는 장면이 있는데, 이 장면에서 유아인은 실제로 돌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원래는 돌에 스펀지를 덧대고 그 위에 머리를 박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 스펀지가 너무 작아서 생긴 사고. 그래서 극 중 머리를 박은 후에 사도세자의 이마에서 흐르는 피에는 진짜 유아인의 피가 섞여 있다. 유아인은 부상을 당했음에도 씬을 끊지 않고 계속 연기하고 있어서 스태프들은 정황을 모르고 있었지만, 현장에서 모니터로 유아인의 연기를 보던 송강호가 알아챘다고 한다. 그래서 바로 응급처치를 하고 분장을 해서 촬영을 계속 진행했다고 한다.
  • 극 중 4살인 사도세자가 '사치(奢侈)'라는 글자를 쓰는 장면에서는 배역을 맡은 아역 배우가 실제로 한자를 썼다. 촬영 전 연습을 해왔다고.
  • 2015년 청룡영화상 시상식 때 축하 공연을 한 이은결이 이 영화를 패러디하였다. 함께 출연한 서유리가 '오늘 출연하신 분들을 보다가 옆(이은결)을 보면 한숨이 나오내요'라고 말하자 귀를 씻고 양치한 다음 '별일 없지?'(...). 이 때의 배경음악도 아모리 - 만조상해원경. 다른 참석자들이 빵 터진 것은 물론이고 송강호 본인도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 일본에서는 2016년 6월 4일 개봉하였으며, 일본판 타이틀은 왕의 운명 - 역사를 바꾼 8일간 - (王の運命ー歴史を変えた八日間ー) 일본의 해외영화 제목이 으레 그렇지만 포인트가 영 이상하다(...). 영화에서 8일간은 단지 세자가 죽어가는 모습과 회상의 매개를 보여줄 뿐 주요 사건은 사도세자의 삶 전반에 걸쳐 일어나기에 적절치 못한 부제다. 또 임오화변이 역사적 사건이긴 하지만 영화는 주제의식면에서 조선사에 강조를 두고있지 않다.
  • 영화의 촬영지는 전북 부안군의 부안영상테마파크와 수원 화성행궁 등이다. 작중에서 나오는 종묘 정전 장면은 실제 종묘에서의 촬영 허가를 받지 못해서 경희궁에서 촬영한 뒤 CG로 배경을 입혔다고 한다. 한편, 사도세자가 석고대죄를 하는 금천교 장면은 특이하게도 분당신도시 중앙공원에서 촬영됐다.
  • 인상깊은 오프닝은 원래 시나리오에는 없었다. 이준익 감독에 따르면, 후반작업에서 조언을 듣고 하이라이트 장면을 과감히 앞으로 빼내 관객들에게 긴장감을 주려 했다고 한다.
  • 포스터의 글씨 '사도'는 이준익 감독이 직접 쓴 것이다. 어릴 적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서예에 관심이 크다고 한다.기사
  • 영화의 코멘터리에서 이준익 감독은 배우칭찬봇으로 활동한다. 전체적으로 이준익이 배우의 연기를 칭찬하면 배우들은 부끄러워하며 그만 하라고 말리는 분위기이다. 영조가 뒤주에 못질을 하는 장면을 보며 송강호는 못질을 정확하게 한다는 등 배우들이 충분히 민망해할만한 칭찬들이 넘쳐나기 때문.
  • 정병설 교수는 영화 제작을 도와주면서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엔딩 크레디트에 ‘슈테판 츠바이크에게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힌 것을 참고해 존중의 의미를 담아 달라."고 요청했으나 엔딩 크레딧에는 도와준 사람 중 하나 정도로만 나와서 제작사와 서로 마찰이 있었다. 크레딧 수정은 어렵지만 제작사는 대신 자문료 및 참고문헌 사용료 형식으로 5000만 원을 대안으로 제시했고, 정 교수는 이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갈등은 해결됐다. 정병설 교수는 자문료 전액을 장학금으로 기부했다. 관련기사
  • 장성란 평론 #

11. 수상 정보


  • 제35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최우수작품상, 각본상, 음악상, 10대영화상
  • 제52회 대종상 여우조연상(김해숙)
  • 제36회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유아인), 여우조연상(전혜진), 음악상, 촬영조명상
  • 제19회 탈린 블랙나이트 영화제[65] 최우수작품상, 음악상
  • 제2회 한국영화제작가협회상 여우조연상(전혜진), 각본상, 음향상
  • 제7회 올해의 영화상 작품상, 남우주연상(유아인), 여우조연상(전혜진)
  • 제10회 아시안필름어워드[66] 의상상
  • 제21회 춘사영화상 남우주연상(유아인), 각본상
  • 제52회 백상예술대상 대상(이준익)[67]
  • 제4회 바르셀로나 아시아영화제 파노라마부분 최우수작품상
  • 제47회 인도국제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 탈린영화제에서 받은 상금은 기부했다.
  • 아카데미 시상식의 외국어작품상 후보작으로 출품됐으나 후보지명에는 실패했다.
  • 오스카 전에 열린 새틀라이트 시상식에서는 외국어작품상과 의상상 후보에 올랐다.

12. 관련 문서



[1] 영제의 뜻은 '왕좌'란 뜻으로 ‘왕위 혹은 국왕'을 뜻한다. 다만 한국사에 따른 단어 반영으로 옥좌로 변경 및 번역되었다.[2] 포스터를 자세히 보면 영조와 사도세자의 얼굴에 비치는 빛이 서로 반대 방향이다. 서로 지향하고자 하는 점이 정반대인 것을 잘 표현했다.[3] 정치 사극이 아니라 사료에 기록된 사도세자의 광증에 장희빈 귀신이란 상상의 소재를 연결시킨 호러사극이지만 1시간 분량에서 나름 실제 사건을 구현시켜 호러요소와 자연스럽게 이으려 노력하였고 사도세자의 광증은 영화 <사도>보다 이쪽이 실제에 가깝다. 사도세자의 연쇄살인과 옥추경, 빙애(경빈 박씨), 세손의 휘항 등 영화에 미구현된 에피소드들이 다수 등장한다. 노론 음모론은 당쟁도 대통의 씨가 있어야 할 수 있다는 화완옹주의 대사를 빌어 초반부터 배제해 버린다.[4] 공개 순서에 따르면 노론 음모론을 배제한 두번째 작품이고, 제작 순서에 따르면 첫번째 작품이다. 영화 <사도>가 2014년에 촬영한 반면 <붉은 달>은 2015년에 촬영했기 때문.[5] 영조가 아들보다 자신을 더 우선시하고 있음을 담고 있는 대사다.[6] 영조는 압슬형, 지자형 같은 가혹한 고문을 폐지했던 임금이다. 이런 그가 저런 형벌을 내린 건 그만큼 출신에 대한 심한 컴플렉스와 경종 살해 루머에 심한 트라우마를 가졌다는 의미도 된다.[7] 참고로 두 번째 대사는 대본에 없는 송강호의 애드립이다.[8] 사실 영조는 입장상 신하들, 특히 왕이 되는 입장에서 힘을 준 노론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들의 부정부패를 어느 정도는 방관하는 대신 이들의 지지를 얻고, 반대로 소론도 어느 정도 힘을 실어주는 식으로 탕평책을 펼치며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정치적인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세자가 원칙대로 하니 비록 그 방법이 정론이었을지언정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위태로워지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에 역정을 낸 것.[9] 자결이란 형벌이 조선에 어딨냐고 부르짖는데, 사약은 좀 애매하지만 거부권없이 공식적으로 집행되는 사형 형식이다. 영조가 개인적으로 자살하라고 하니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10] 영조의 중전들은 모두 자식을 못 낳았고, 후궁들도 줄줄이 딸만 낳았다. 그가 본 아들은 후궁들이 낳은 요절한 효장세자와 사도세자 뿐이었다.[11] 아들이 진짜 죽도록 미웠던, 아니면 죽이긴 싫었으나 이미 미쳐버려서 치워야했던 간에 왕권과 종묘사직을 더 중시한 그의 입장에서는 아들의 죽음이 필요했다. 실제로 사도세자의 죽음이 영조에게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는 실록이 전하지 않아 알 수 없으나(딱히 슬퍼했다는 기록은 없다), 영화 상에서는 영조가 그의 죽음을 크게 슬퍼했고 아버지로서 정이 있었으나 나라를 위해 (미친 사람에게 보위를 물려줄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죽인 것으로 묘사된다.[12] 생각할 사, 슬플 도[13] 세월이 흘러 영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아들 정조가 사도세자의 무덤을 명당이라는 수원 화산(花山)으로 이장하고, 묘라는 낮은 격식에서 원으로 격상시켜 현륭원(顯隆園)이라 명명하였다. 효성이 지극한 정조는 아버지의 무덤에 친히 편액을 써 달았고 성묘를 하러 자주 수원으로 행차했다고 한다.[14] 애초에 툭하면 사람을 죽여대고 기행을 일삼았으니 부모 이전에 인간으로서 좋아하기 힘들었을 것이다.[15] 한중록 원문에 '아무리'라고 쓰여 있다. '마무리'의 오타가 아니다. 사도세자의 표현이 글로 쓰기 심한 표현이라 혜경궁이 필터링을 한 것. 즉 요즘으로 치면 "내가 삐리리 해버릴꺼야!" 정도의 어감이라고 보면 된다. 한중록에는 사도세자의 거친 표현이 '부도지설(不道之說: 도의에 어긋나는 말)'이나, '불공지언(不恭之言:공손하지 못한 말)' 등의 표현으로 필터링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16] 남도 지방 백성들에게 독서를 즐긴다는 시를 이의경과 호남 지방 사람들에게 써준 것을 두고 괜한 트집을 잡은 것.[17] 이때 상중에서 영조가 한 말이 가관인데 가만히 있었으면 네가 왕이 되는 건데 윤허를 거두게 해서 대비까지 돌아가시게 만들었냐며 세자를 갈군다. 이에 울화통이 터진 사도세자는 '''"예, 다 제 잘못입니다!"'''하고 소리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18] 후술되지만 인원왕후는 역사적으로나 영화상으로나 사도세자를 매우 아꼈다. 양위를 두고 영조와 대립한 것도 영조가 허구헌날 양위하겠다고 하고 사도세자를 괴롭히는 버릇을 고쳐주겠다는 의도로 한 것. 그러나 아끼는 세자가 죽게 생기자 자신이 늙어서 왕의 말귀를 못 알아듣고 헛소리한 늙은이가 되는 걸 감수하고 윤허를 취소한 것. 세자 입장에서는 믿고 따르던 할머니가 자기 살리겠다고 자기 때문에 돌아가셨는데, 이 상황을 만든 아버지가 자기 탓을 하는거니 환장을 하겠는 것. 실제로 상중 술을 마시면서 "내가 죽인 할머니의 피눈물이다"라고 하는 등 트라우마가 남은 모습을 보인다.[19] 이것도 실제로 실록에 나오는 일화다. # 안습.[20] 정조의 부탁으로 영조가 없애버린 사초의 빈틈을 메우는 셈이다. 사초를 세초해 없애버린 것은 사실이니 실제 내용을 현 시대의 우리가 알 수 없다. [21] 사도가 정조 앞에서 한 말로, 세자라는 신분을 벗어나길 원했던 염원했던 사도의 읊조림이라 할 수 있다.[22] 역사적으로도 물론 영조의 과도한 훈육 때문에 사도세자가 미쳤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지만, 그가 사람을 마구 죽이고 기행을 펼치는 명확한 정신병자가 되어 왕위를 물려받기 힘든 상황이 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23] 그러나 실제로 조선시대 60대가 현재 90대라고 보기에 무리가 있는 것이 비율적으로 볼 때 조선시대에도 60세 넘게 사는 사람이 지금 90세 넘게 사는 사람보다 많았고, 80살 넘게 산 사람도 생각보다는 꽤 있었으며 이는 인구비율로 보면 지금 110세 넘게 사는 사람들보다 많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나이도 그리 많지 않은데다가 동안이기까지한 문근영이 자기보다 10살이나 많은 배우 소지섭의 어머니로 나오는 장면이라 그렇게 억지로라도 늙어보이게 표현하는 게 나을 거 같아서 그랬다고 보는 게 더 자연스러울 수 있다.[24] 전혜진은 이 장면을 위해서 소주를 마시고 촬영했다.[25] 영조가 문소원을 매질한 것으로 언쟁을 벌이다가 양위하겠다고 하자, 대비가 빈정대는 투로 하는 대답이다.[26] 작중에서 화완옹주가 세자빈인 혜경궁 앞에서 앉아있자 당장 곡좌(아랫 사람이 윗사람 앞에 앉을 때는 정면으로 앉지 않고 옆으로 조금 돌아앉아야 하는 예법)를 하라고 꾸짖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화완옹주는 영조가 세자빈을 맞이하는 자리에서 무릎에 앉힐 정도로 가장 아낀 자식인데다 아직 예법을 잘 모를 어린애라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음에도, 인원왕후는 따끔하게 "네 이년! 어디 옹주 '''따위가''' 세자빈과 나란히 앉는단 말이냐!"라고 꾸짖으며 엄격하게 예법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인다.[27] 문 소원이 윗사람인 영빈에게 무례하게 군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서 문 소원을 매질한 것에 대해 항의하는 영조에게 인원왕후는 "'''그 천한 것이''' 주상의 씨를 잉태하고 있다고 지금 감싸는 거요?"라고 소리쳤다. 이 말에 영조가 말꼬리를 잡으며 "'''천해요? 천해요??''' 그러면 천한 출신인 저를 왜 왕으로 밀어주셨습니까?! 그럼 그 '천한' 저를 임금으로 세운 것이 대비이시니 이 참에 제 임금 자리도 거둬가시죠!"라며 또 한번 양위하겠다고 생떼를 쓴다.[28] 생각해보면 짠한 장면인데, 세 명의 고집불통들이 대치하는 상황이다. 영조는 대비의 고집을 꺾기 전에는 절대 양위선언을 거두지 않겠다, 세자는 양위선언을 거두기 전에는 절대 석고대죄를 거두지 않겠다, 대비는 왕이 뉘우치기 전에는 절대 양위 윤허를 거두지 않겠다고 하는 상황인데, 여기 걸린게 '''세자의 목숨'''이다. 세자는 이를 악물고 내가 죽으면 죽었지 그냥 물러서진 않겠다는 심정이고, 영조는 아들이 죽을 위기임에도 내 고집이 더 중요하다는 심정이니, 결국 세자의 목숨을 가장 아끼는 대비가 물러서고 만 것이다. 세자를 친손자처럼 아끼는 대비가 사망했으니 세자는 한층 더 벼랑끝으로 몰리게 된 셈.[29] 그녀가 곡기를 끊고 죽음을 선택한 이유는 모호하게 표현되는데, 스스로 윤허한 것을 모양빠지게 취소한 것에 대한 자존심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윤허 사건은 실제로 있던 건 아니고 실제로는 둘 사이를 중재하려 애쓰던 도중 죽었다.[30] 왕비 간택 당시의 모습, 혼례 직후 영조와의 대화 두 장면이다. 전자에서는 "태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 것이 무엇인가?"라고 영조가 질문하자 "사람의 마음"(장부의 기개가 태산보다 높고, 여인의 지조가 바다보다 깊다는 의미)이라고 답했다. 후자에서는 영조가 "내게 청할 것이 있는가?"라고 묻자 '친정 식구들의 벼슬을 높이지 말아달라'고 답한다.[31] 영화 후반부에 나오는 장면이라서 관객들이 이 장면을 보다 나중(혹은 극중 현재) 시점의 일로 착각하기 쉬운데, 주의해서 보면 분명 작중 현재시점(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는)보다 앞서, 나경언 등을 사주하려고 하는 시점이다. 반면 정순왕후가 외척들에게 "저는 주상이 두렵습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작중 현재시점이다.[32] 자기는 친어머니 문안도 제대로 안드리는 불효자식인데 그 여자 문안을 왜 가냐고 핑계를 대다 친모인 영빈 이씨가 눈물로 부탁하자 마지못해 하는 수준이었다. 그마저도 영조를 만나야 한다는 압박감에 미쳐 내관을 살해하는 난리를 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33] 이 영화의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대사 중 하나다.[34] 앞서 어린 세자가 강연 중에 만족스럽지 못한 답을 냈음에도 심사를 담당한 신하가 시험을 통과 판정을 내리자 둘을 질책한 것과 대조되는 장면이다.[35] 영조는 세손을 칭찬하는 와중에도 "그런 아비 밑에 이런 훌륭한 자식이 나온단 말인가? 부전자전이라는 말도 다 틀린 소리다"라는 뉘앙스의 발언으로 세손의 아비인 세자를 비방하여 세손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36] 4번 절하는 것. 왕이나 중전만 받을 수 있는 대접이다.[37] 이 장면에서 정조는 아버지 사도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단순히 아버지의 명령인 것을 떠나 정조는 사도의 마음을 헤아렸다는 걸 암시하는 영화적 연출.[38] 또 사도세자 자신뿐 아니라 '''영조 자신의 심정에도''' 해당되는 대사인 것이, 영조 항목에서도 소개되었지만 영조는 자신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묘를 내심 왕비의 예로 모시고 싶어 했으며(신하들의 반대로 끝내 이루지 못했지만) 자신의 어머니 무덤을 능(陵)이라 불러주는 나무꾼을 잘 대접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어머니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던 인물이기도 하다. 영조는 나이가 한참 들어서 잠결에까지 "네 어미는 종년이다(爾母婢也)"라는 역사책 속의 구절만 들어도 경기를 낼 정도로 자신의 신분에 대한 컴플렉스를 드러냈는데, 이는 영조 자신에게 국왕의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정통성 시비를 떠나 영조 개인에게는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모멸과 부정'''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도세자 역시 정실부인의 소생이 아닌 후궁의 소생이었고(후궁과 무수리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기는 했지만) 어머니 영빈 이씨를 향해 왕이나 중전에게나 허락된 사배를 올리고 왕비의 가마에 태워 궁을 돌면서 어머니에 대한 마음을 드러낸 사도세자의 모습과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사배를 올린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예법도 사람이 있어야 되는 것이다"고 할아버지 영조에게 전하는 세손의 대사는 한 나라의 국왕이자 지배자라는 지위를 떠나 영조도 사도세자도 모두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마음의 무게를 품은 똑같은 한 인간이었고, 때문에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공경을 드러내지 못한 채 평생 짐처럼 떠안고 살아왔을 왕의 지위와 예법의 굴레가 얼마나 무거웠는지) 사도세자가 아버지 영조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여지도, 반대로 (그런 아들의 모습에서 자신이 하고 싶었지만 끝내 할 수 없었던 어머니에 대한 공경을 헤아린)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와의 거리를 조금이나마 좁힐 여지도 있었다. 그리고 실제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기에, 비극성은 더욱 극대화된다.[39] 이 때 내금위장이 앞을 막자 내금위장의 지위와 이름을 묻고 '''"내 너의 이름을 기억하겠노라. 비켜라."'''란 독기어린 말로 물러나게 하고 뒤주로 향한다. 참고로 이때 정조의 나이는 '''10살.''' 세손 정조를 연기한 아역배우 이효제의 열연이 맞물려 극장에서는 이 장면에서 눈시울을 붉힌 관객들이 많았다고 한다.[40] 앞서 언급한 할아버지가 기뻐하기에 자신의 의지와 별개로 공부에 열중해야 하는 현실에 대한 거부감을 아버지에게 털어 놓은 시기로, 사도세자, 정조 부자가 처음으로 공감대를 이루었던 때다.[41] 이 장면에서 김상로가 등장하는데, 김상로는 이미 정조 즉위 전에 죽었으니, 1792년의 영남 만인소를 뜯는 순간 선대왕과의 의리를 저버리는 것이며, 차라리 자기 목을 치라고 말할 수도 없다. 실제로 벽파의 대변인 역할을 한 것은 당시는 우의정 김종수였다. 상대 역인 채제공은 당시 좌의정이었다.[42] 영조처럼 얼굴에 들이부은 게 아니라 손끝에 묻혀서 얼굴에 살짝 뿌리는 식으로 깨웠다. 영조가 물을 뿌린 것처럼 모욕적인 뉘앙스가 아니라 개그씬에 가까운 장면이었다. 영조가 아닌 인물이 세자를 상대로 저런 짓을 했다간 파직되거나 유배될 가능성이 높다.[43] 이천보는 자기가 아들이 없자 친척의 아들인 이문원을 양자로 들였지만 양아들인 이문원은 똑똑하고 총명하였으나 말썽만 부리고 능글맞고 공부도 별로 안 했다. 그냥 말썽 피운 수준이 아니라, 그 오성과 한음에 비견될 정도였다. 이문원의 야사를 보면 오성과 한음의 야사와 겹치는 부분이 적지 않다. 그의 말썽에 이천보도 엄하게 훈육하였지만 이문원의 능구렁이 같은 처신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44] 이천보와 같은 연안 이씨로 반정 공신인 이귀의 아들인 영의정 이시백의 5대손으로 음서로 발탁되었고 과거에 매번 떨어져 동생이 먼저 문과에 급제하자 트라우마가 생겨 늦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였다.[45] 소원은 본명이 아니라 후궁 직첩(정4품)의 이름이다.[46]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말대꾸를 하면서 자신의 제일 윗사람인 중전을 모욕한 것이기도 했다. 현대 기준으로 봐도 단순 버릇 없는걸 넘어 큰 실례인데 예법을 엄하게 여긴 인원왕후가 가만있을리 없다.[47] 다만 다만 영조의 "군왕에 대한 압박감" 측면에서 해석하면 왕과 왕세자라는 엄중한 의무를 갖는 위치의 인물들은 사소한 행동에도 신중을 가하며 조심해야 하지만, 후궁 따위야 별 중요하지 않으므로 그렇게까지 가혹한 잣대를 들이지 않아도 된다고 볼 수 있다. 영화 상으로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애정은 있었으며, 왕위에 대한 압박감 때문에 자식을 가혹하게 몰아세웠고 죽음까지 몰아간 것으로 묘사된다.[48] 극중에도 정순왕후의 회상 장면에 간택 당시의 면접(?) 모습이 들어있다.[49] 내관의 업무상, 왕 옆에 자는 시간 외에는 항상 붙어다니면서 알게 모르게 왕의 행동을 제지하니 왕 입장에선 싫어할만도 하긴 하다.[50] 그래도 더킹 투하츠에서도 이 풍습이 묘사되었다.[51] 물론 양녕대군처럼 모두가 싫어하게 될 지경이 아닌 다음에야 신하입장에서 세자를 공격하면 명분이 부족하다. 당장 김상로도 나경언을 통해서 고발했고, 영조조차도 세자의 스승들로부터 요청을 받아서 처리하려했다. 그래서 영조가 화를 낼때 의미심장하게 김상로 무리를 보며 꾸짖는다. 사실상 이들을 감싸준 것.[52] 다만 김상로가 죽을수도있다고 고한 점이나 죽이시라고 고하자 나경언이 크게 놀라서 김상로를 쳐다본 걸 보면, 나경언은 백프로 죽는 일이란 걸 모른 듯 보인다.[53] 이준익 감독의 다른 영화 <동주>도 <사도>와 비슷하게 현재와 과거를 교차시키는 전개 방식을 채택하였다. 이준익의 작품세계는 <사도> 이후, → <동주> → <박열> 등으로 이어지는데, 점층적으로 더 기록영화와 같은 흐름이 강해지고 있다.[54] 정조가 혜경궁 홍씨에게 4배를 올린다.[55] 이 장면에 대한 평가를 떠나서 에필로그가 다소 긴 편이긴 하다. 작품 구성을 보면 작중 사도세자와 영조의 갈등이 극에 달하다가 정조의 영리한 한 마디로 시작해 꼬인 매듭이 풀리듯 죽기 직전까지 두 사람의 대화, 영조의 슬픔 등으로 응어리가 풀린다. 실질적인 결말은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개선가를 울리며 환궁하는 영조가, 엎드려있는 사도세자의 환영을 보면서도 애써 외면하는 장면일 것이다. 사도세자의 장례식 이후 슬퍼하는 영빈, 그의 기록을 영조가 지워주는 장면, 아들 정조와 수십년만에 마침내 그의 무덤에 갈 수 있게된 헤경궁 홍씨가 무덤에서 슬퍼하는 장면으로 이어지는데, 사실 이 정도도 에필로그치고 충분한 분량이지만 거기에 한발 더 나아가 부채춤까지 보여준 거라 정신적 피로감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이 장면은 앞서 사도세자가 천대받는 후궁인 어머니를 중전대접해주는 장면과 대구를 이루는 장면으로, 상징적인 장면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에필로그 자체가 너무 길기 때문에 처음에 눈물을 흘리다가도 감동을 강요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건 문제의 여지가 있다.[56] 사회 및 조직의 문제가 아닌 개개인의 문제로 여기는 것.[57] 홍봉한이 이 그림을 부채로 만들어 사도세자에게 전했다는 건 영화에서의 창작인 듯.[58] 작품의 전체적인 완성도가 아닌 사도세자의 정신병에 더 관심있는 사람들은 KBS 드라마 스페셜의 붉은 달을 참고하면 좋다.[59] 물론 바로 죽는 것이 아니라 시름시름 앓기만 한걸로 해석해서 정성왕후가 그 사이 먼저 죽고 인원왕후가 그 뒤를 따른 것으로 볼수도 있지만 묘사상 승하 장면에 가깝다.[60] 제법 신빙성이 있다. 뒤주를 부수면 얼마든지 살려줄 수 있었고, 애초에 영조는 마음에도 없던 선위 쇼로 신하들을 시험했었다.[61] 전쟁과 같은 큰 싸움에서 승리하거나, 역모를 진압했을 때 연주하는 노래. 이 영화에서는 후자의 목적으로 연주되었다.[62] 사도세자가 영빈의 회갑연에서 어린 정조에게 사배를 요구하자 정조는 이를 받아들였고, 이후 영조가 어린 정조에게 이것이 예법에 어긋나는 행위임을 지적하자 인간이 예보다 더 중요하다며 가족애와 아버지에 대한 이해심을 드러냈다.[63] 이후 2016년 라디오 스타에서 비화를 털어놓기도 했는데, 극단에서 창을 배웠던 적은 있지만 이정도로 비중있는 배역인줄 모르고 덜컥 맡아서 촬영 전까지 직접 절에서 경 읊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64] 극 중반 사도세자가 부르는 것은 유아인 본인 목소리다.[65] 에스토니아에서 열리는 영화제로 밤에 상영이 이뤄진다.[66] 홍콩국제영화제에서 주최하는 시상식으로 마카오에서 열렸다.[67] 이준익은 사도와 동주 2편의 영화로 대상을 받았다.